소설리스트

2장 키워주세요. (3/15)

2장 키워주세요.

“그러니까……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거지?”

엄청난 소란이 한바탕 몰고 지나간 끝에 침착함을 되찾은 남자가 내 앞에 앉아 있다.

말로는 간단하지만 실은 간단하지 않은 소란이었다.

고양이에서 사람으로 변한 나 때문에 놀란 남자가 욕실 밖에서 몇 분 동안이나 비명을 질러댔었고, 나 역시 욕실 안에서 마구 울어버렸기 때문이다.

약 10분을 그렇게 소란을 떤 다음에 남자가 욕실 안으로 옷 하나를 던져주었다.

헐렁하고 큰 박스티였다.

그 옷을 입고 나서야 나갈 수 있었던 나는 욕실 밖에서 긴장하며 경계하고 있는 남자를 대면했다.

처음의 그 경악하는 눈빛은 어느 정도 사라져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놀란 눈치다.

하지만 내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자 남자가 살짝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말이 통한다는 걸 알자 경계심을 조금 푸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그 남자와 마주 앉아 있는 것이다.

이 상황에 대해 침착하게 의논하자는 것이 남자의 뜻이었다.

그런데 이게 침착할 수 있는 상황인가?

이 남자, 의외로 대범한 건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기절하고 남았을 일이었으니 말이다.

나도 기절하고 싶은데 다른 사람은 오죽할까.

마주 앉은 뒤에야 나는 처음으로 나를 주워온 남자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차가운 은테의 안경, 큰 키와 넓은 어깨에 비해 얼굴이 작고 눈매는 단정하며 콧날이 높다.

얇은 입술과 하얀 피부, 그리고 깔끔하게 빗질한 머리카락은 완벽한 미남형의 얼굴.

몇 살이나 되었을까?

서른은 넘어 보였다.

결혼은 했을까?

이 소란에도 아무도 나오지 않는 걸 보니 혼자 사는 싱글남인가 본데.

이 상황에서도 별걸 다 추측하고 있는 나 자신이 조금은 우습다.

나, 고양이라서 호기심이 많은 걸까, 아니면 원래 호기심이 많은 성격인 것일까?

지금 내가 입고 있는 헐렁한 박스 티셔츠는 이 남자의 것이다.

아무리 고양이라지만 알몸으로 있는 것은 이 남자나 나를 위해서 결코 좋은 일이 아니기에 실례를 무릅쓰고 빌려 입었다.

티셔츠 한 장을 입었는데도 마치 원피스를 입은 것처럼 무릎까지 가려진다.

이 남자와 나의 키 차이가 그 정도다.

“사고가 난 것 같긴 한데……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와, 나, 사람 말이 완전 술술 나오는 걸 보니 역시 사람이 고양이로 환생한 거야.

차가워 보이는 은테 너머 남자의 시선에 살짝 몸이 움찔거렸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이 없다는데 이 남자의 눈빛은 조금 차갑다.

그래도 어젯밤 빗속에서 낭패를 볼 뻔한 나를 주워왔으니 아주 나쁜 사람은 아닐 것이다.

“사람인 거야, 아니면 고양이인 거야?”

“그건 저도 잘…….”

그걸 내가 알면 이러고 있겠어요? 아, 물론 이러고 있겠죠. 갈 곳이 없으니.

난 원래 넉살이 좋았던 것일까, 아니면 고양이가 되면서 넉살이 좋아진 것일까?

낯선 남자에게 알몸을 보이고도 멀쩡하니 앉아 이렇게 차분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나 자신이 대견스럽다.

“이것 참, 곤란하게 됐네…….”

곤란하다는 남자의 말에 깜짝 놀랐다.

설마 나가라고 하진 않겠지? 이 엄동설한에 나가라고 하면 나더러 얼어 죽으라는 얘기지.

아니다, 그 이전에 동물원에 구경거리로 팔려갈지도 몰라. 그러면 창살에 갇혀서 꼬마들이 던져주는 캣스낵이나 받아먹으며 일생을 보내게 되겠지. 그런 건 싫어……!

“저어……!”

나도 모르게 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실례라는 건 알지만, 당분간만 여기서 지내게 해주시면 제가 집안일을 도울게요!”

이렇게 된 이상 달라붙는 수밖에 없다.

물에 빠진 고양이 건져놓으니 참치 캔 내놓으라는 격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무조건 여기서 버텨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 왜 고양이가 되었는지 기억나게 될 때까지는 말이다.

그리고 옵션으로 돌아갈 집이 생기거나 생각날 때까지.

“나중에라도 기억이 돌아오면 그땐 나갈 테니까 그때까지만이라도…….”

“그 손으로 집안일을 한다고?”

남자가 내 손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랬다.

내 손은 고양이 손이었던 것이다, 이런.

“고, 고양이 손이라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여기서 물러서면 고양이가 아니다.

무조건 우겨야 한다.

그러자 남자가 테이블 위에 있는 귤 하나를 내 앞으로 쓰윽 밀어놓는다.

“에?”

“까봐.”

“…….”

“할 수 있으면 귤부터 까봐.”

“…….”

이런 빌어먹을 못돼 처먹은 인간. 고양이 손으로 어떻게 귤을 까라고!

하지만 그런 내색을 했다가는 바로 이 집에서 추방.

까만 털이 보송보송한 앞발, 아니, 손을 들어 열심히 귤을 까보려고 하지만 이놈의 손가락은 왜 이렇게 짧은 걸까?

콩알보다 작은 손가락을 움직였더니 손톱이 먼저 움직인다.

푹, 날카로운 손톱에 귤이 파이며 즙이 주르륵 흘렀다.

“못 까지?”

“…….”

아, 귤도 하나 못 까는 이 서러운 내 손.

“이리 내놔.”

내 손에서 귤을 빼앗은 남자가 스윽스윽 손가락 움직임 몇 번에 귤을 완벽하게 까놓는다.

부러웠다.

귤을 까는 긴 손가락이 이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먹어.”

귤을 까서 조각조각 분리까지 시킨 남자가 내 앞으로 깐 귤을 내밀었다.

귤 알맹이를 보자 입안에 군침이 고인다.

어젯밤 우유를 조금 먹은 것 빼고는 아직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 때문이다.

체면을 무릅쓰고 얼른 하나를 집어 입안에 넣고 우물거릴 때 남자가 입을 열었다.

“어쨌든 그 꼴로 밖으로 나갈 수도 없을 테니까 당분간만 여기에 있어. 당분간만이야. 난 누구하고 같이 사는 건 딱 질색이니까 계속 여기에 눌어붙어 있을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당분간 있으면서 기억을 되찾도록 노력해 봐. 알았지?”

“감사합니다!”

오, 이런 착한 남자 같으니라고.

내가 당신을 빌어먹을 인간이라고 말한 것은 취소할게요. 당신은 아주 멋진 사람입니다. 아무렴요.

두 개째의 귤 알맹이를 입안에 넣을 때 남자가 일어섰다.

“따라와.”

남자의 말에 엉거주춤 일어나 남자를 따라간다.

남자가 나를 데려간 곳은 작은 방이었다.

방 안 가득 책장이 벽을 두르고 있었고, 책장에는 책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여긴 내 서재야. 서재에는 함부로 들어가지 마.”

“네.”

집을 안내해 주려는 것이다.

이런 친절한 남자 같으니라고.

얼굴만 차도남이지 속은 따도남이구만.

다음으로 그가 날 데리고 가서 보여준 곳은 아늑한 느낌의 방이었다.

조금 전의 서재와는 사뭇 다른 느낌.

널찍한 침대의 시트는 카키 브라운의 체크무늬, 그리고 시트와 색을 맞춘 것처럼 창가의 커튼 역시 체크무늬다.

“그리고 여긴 내 침실. 마찬가지야, 여기도 함부로 들어오지 마.”

그럼 이 집 안에 내가 함부로 다닐 수 있는 공간이 대체 어디인가요?

“이 방은 손님용 방인데, 넌 이 방을 사용해.”

“와아…….”

침실에서 나와 다시 문을 열고 보여준 손님용 방은 아담한 사이즈였다.

안에 침대 하나와 붙박이장이 가구의 전부.

이 남자, 카키 브라운을 어지간히 좋아하는지 침대와 붙박이장 역시 카키 브라운이다.

“내 옷을 몇 벌 줄 테니까 그걸로 매일 갈아입어. 속옷은 없어.”

“네?”

속옷이 없다는 말에 살짝 당황했다.

그렇다면 내내 집 안에서 노팬티로 다니라는 말인가?

내가 아무리 고양이라도 그건 너무한 것 아닌가요?

“그렇다고 내가 여자 팬티를 사러 속옷 가게에 들러야겠어? 고양이 때문에?”

“그, 그러면 남자 팬티라도 주세요.”

질 수 없다.

밀릴 수 없다.

노팬티로 지낼 수는 없다.

“내 팬티?”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남자의 말에 나도 공감해 버렸다.

“꼬리는 어쩌려고? 팬티에 구멍이라도 뚫을까?”

그렇다.

내게는 꼬리가 있었다. 살랑거리는 까만 꼬리가.

“정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규칙을 말해주지.”

규칙?

규칙이 뭘까?

“일단 이곳에 있는 동안은 내가 네 주인이야. 알겠지?”

“주인……?”

“주인님이라고 불러.”

주인님이라고 부르라고? 정말? 정말로? 그건 이상하잖아.

내 표정을 읽은 걸까?

“싫으면 나가.”

“아니요. 싫긴요, 주인님.”

얼른 대답했다.

여기 있을 수만 있다면 주인님 소리 못할 것도 없다.

“넌 고양이고 난 네 주인이야. 알겠지? 그러니까 내가 부르면 냉큼 오는 거고 내가 시키는 대로 얌전히 있어야 해.”

“알겠습니다, 주인님.”

키워준다는데 이 정도야 뭐.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도 모르는 채로 거리를 헤매는 것보다는, 좋은 주인님 밑에서 안전하게 있는 편이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암, 그렇고말고.

* * *

“…….”

물끄러미 앞의 접시에 놓인 생선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남자가 쏘아붙인다.

“넌 고양이잖아. 고양이는 생선을 좋아하지 않아?”

이 남자는 내 주인님이다.

그리고 주인님은 기억이 없는 내게 멋대로 ‘미요’라는 이름을 붙였다.

처음에는 나비라는 이름을 붙이려는 걸 기겁하며 거부했더.니 고양이는 ‘미야 미야’ 하고 운다고 미요라고 이름을 붙여 버렸다.

“가시를 바르기가…….”

“나 원 참. 무슨 고양이가 생선 가시를 발라먹어?”

그가 혀를 차며 내 생선 접시를 당겨가더니 젓가락으로 솜씨 좋게 발라 놓는다.

가시와 살을 잘 분리한 다음 다시 접시를 내 앞으로 내밀어 줬지만 젠장! 고양이 손으로는 젓가락을 들지 못하겠다.

열심히 젓가락 들기를 시도하는 나를 보고 있던 주인님이 혀를 차며 젓가락으로 생선살을 집었다.

그리고 내 입 쪽으로 내민다.

“아, 해.”

창피스럽지만 굶어 죽지 않으려면 받아먹어야지 별수 있나.

그렇다고 접시에 얼굴을 박은 채 입으로 먹으면 그건 정말 죽고 싶을 만큼 창피할 게 뻔하다.

죽어도 그 짓은 못한다. 접시에 코를 박고 먹다니.

“자, 다시, 아.”

밥과 생선을 숟가락 위에 얹어 입안에 넣어주는 것을 꼬박꼬박 받아먹고 있자니 문득 기분이 좋아진다.

세상의 모든 아이는 어렸을 때 엄마에게 이렇게 밥을 받아먹었겠지?

나 역시 그랬겠지?

문득 떠오르는 이름, 엄마.

나도 가족이 있었겠지?

고양이 가족이건 사람 가족이건 가족이 있었을 것이다.

어떤 분들이었을까?

내 잃어버린 기억 속의 가족들은 과연 어떤 분들이었을까.

사고를 당한 것이 확실하다면 내 죽음에 그분들은 많이 슬퍼하셨을지도 모른다.

그걸 생각하니 목이 메어왔다.

하지만 목이 메어도 밥은 받아먹었다.

“퇴근해서 올 때까지 얌전히 있어. 밖으로 돌아다니지 말고, 누가 와도 문 열어주지 말고. 그리고 이것저것 만지지 말고. 알아들었지?”

가방을 메고 현관에 선 주인님이 이것저것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내가 무슨 앤가?

이래 봬도 다 큰 고양이이건만 못 미더운 저 눈빛은 뭐란 말인가.

“점심에는 빵 먹어. 어차피 젓가락이나 숟가락은 쓰지도 못할 거잖아.”

차가운 듯 말하지만, 주인님이 본심은 상냥하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나처럼 희한한 고양이를 위해 점심 식사로 빵까지 준비해 놓을 리가 없다.

만약 나쁜 사람 같았으면 당장 방송국 카메라를 불러들였을 것이다.

그런데 주인님은 지금 나를 최대한 보호해 주고 있다.

나중에 기억을 되찾으면 은혜 같은 고양이가 되고 싶었다.

고양이의 보은 같은 걸 꼭 해주고 싶다고나 할까.

“다녀오세요~”

주인님의 헐렁한 원피스, 아니, 티셔츠를 입은 채로 손을 흔들어줬다.

그리고 주인님이 나가자마자 얼른 문을 잠갔다.

이제 저녁에 주인님이 퇴근할 때까지 이 넓은 집에 나 혼자인 것이다.

“그런데 혼자서 뭐하지?”

꼬리를 살랑거리며 거실로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한 것은 텔레비전을 켜는 일이었다.

화면 안에서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웃고 또 웃다가 한 시간쯤 지나 꺼버렸다.

계속 보고 있으니 재미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거실 창 쪽으로 걸어갔다.

이 맨션은 2층에 있다.

2층에서 내려다보니 아래에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해가 떠 있어도 얼어붙은 입김이 나오는 추운 겨울이기에 모두 두꺼운 옷을 입고 바쁘게 돌아다닌다.

이 시간에 한가로운 사람은 나 혼자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한가로운 고양이지.

“응?”

그때였다.

아래의 보도블록 위에 잿빛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서 위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황금빛 눈에 잿빛 털을 보니 혈통 좋은 고양이가 분명했다.

그런데 왜 혈통 좋은 고양이가 주인도 없이 저런 곳에 나와 있을까?

저 고양이가 남자라면 분명 고양이계의 아이돌일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난 수컷 고양이에게는 관심이 없다.

역시 난 원래 고양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잘생긴 수컷 고양이보다는 잘생긴 인간 남자가 더 좋게 보이지. 우리 주인님 같은.

“아함…… 심심해.”

팔을 쭉 뻗어 하품을 한 번 한 다음에 슬쩍 돌아설 때 거울이 눈에 들어왔다.

거울 속에서 살랑거리는 까만 꼬리가 시선을 잡아끈다.

내 꼬리.

길고 까맣고 윤기가 흐르는 내 꼬리.

“흔들어볼까?”

내 꼬리인데 왜 신기한 걸까?

살짝 엉덩이를 흔들어보자 꼬리가 아래위로 가볍게 살랑거린다.

엉덩이에 힘을 준 채로 허벅지를 오므리자 신기하게도 꼬리가 또르르 말린다.

“와, 자유자재로 움직이네?”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 싶어 꼬리를 움직이는 연습을 하기로 했다.

이왕 고양이로 살 거면 꼬리 하나 정도는 잘 움직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꼬리로 빵도 잡을 수 있을까?”

이 정도로 긴 꼬리이니 연습하면 원숭이처럼 꼬리로 뭔가를 잡거나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빵 접시가 놓여 있는 테이블로 쪼르르 달려가 살짝 원피스, 아니, 티셔츠를 들어 올리고 엉덩이를 슬쩍 내밀어 본다.

노팬티이지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이 집에는 아무도 없는데 말이다.

“으응…….”

열심히 꼬리에 힘을 줘 보지만 역시 빵을 잡는 것은 무리다.

“하아…… 포기하자…….”

꼬리를 스르륵 내리며 거울을 바라보자,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헐렁한 티셔츠를 허벅지까지 내린 모습이었다.

목덜미에서 찰랑거리는 단발, 나 원래 단발이었을까?

기억이 나지 않으니 패스.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나쁘지 않은 외모, 아니, 꽤 귀여운 편이다.

그리고 헐렁한 티셔츠 위로 불룩 솟은 풍만한 가슴.

만약 내가 사람이었고 고양이로 환생한 것이라면 전생의 좋은 일은 전부 가슴으로 집중된 것이 틀림없다.

티셔츠 아래로 쭉 뻗은 매끈한 다리.

이 정도면 제법 매력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쫑긋한 고양이 귀와 뭉툭한 고양이 손, 그리고 긴 꼬리는 애교로 봐주면 된다.

“흐음…….”

고양이 손으로 살짝 티셔츠의 끝을 들어 올려 본다.

그러자 티셔츠 아래로 노팬티의 하체가 드러났다.

“새까맣다…….”

감탄하고 말았다.

다리의 중심을 가리고 있는 은밀한 숲은 꼬리의 색깔처럼 새까맣고 윤기가 있었다.

“귀여운데?”

거울에 이리저리 모습을 비춰보며 포즈도 취해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하암…….”

소파에 앉아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대체 시간은 왜 이렇게 느리게 가는 걸까?

하루가 마치 십 년은 된 것 같은 기분.

아무것도 안 하고 집 안에서 뒹굴뒹굴한다는 건 이렇게 지루한 것이로구나.

“주인님,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

물론 주인님이 돌아온다고 해서 놀아준다는 보장도 없지만 그래도 혼자보다는 둘이 낫다.

소파 위에 머리를 뉘인 채 눈을 살짝 감자 잠이 스르륵 밀려왔다.

고양이는 잠이 많다더니 진짜인 것이 틀림없다.

어젯밤에 그렇게 푹 잤는데 여전히 졸음이 밀려왔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주인님이 돌아와 계실까……?

“으응…….”

잠결에 좋은 냄새가 흘러와 코를 간질인다.

살며시 눈을 떴다.

지금이 몇 시지?

나 좀 봐. 시간을 궁금해하는 고양이라니.

혼자 자문자답을 하면서 시계를 보았다.

7시…….

심지어 시계를 볼 줄도 안다.

역시 난 전생에 사람이었어.

그때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이 돌아온 것일까?

소파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 내 어깨에서 담요가 흘러내렸다.

어쩐지 해가 졌는데도 춥지 않게 따뜻하게 잘 잤다 싶었는데 담요를 덮어준 것이다.

역시 주인님은 따도남.

“에헤헤.”

담요를 어깨에 두른 채로 소리가 들려오는 주방으로 걸어가 본다.

역시 따뜻한 것이 좋다.

걸어가는 내내 좋은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다녀오셨어요?”

주방에서, 앞치마를 두른 주인님이 나를 슬쩍 돌아본다.

따도남인 걸 다 아는데 인상을 쓰긴.

“소파에서 자지 마. 감기 걸려. 감기 걸리면 동물 병원에 데려갈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담요, 고마워요.”

정말 고마운 주인님이다.

주워와 주고, 재워 주고, 이런(?) 모습인데도 내쫓지 않고 여기서 살게 해주고, 게다가 담요도 덮어준 주인님.

“장난감 사 왔어.”

“네?”

프라이팬을 한 손으로 흔들던 주인님이 앞치마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휙 던진다.

눈앞으로 빨간 것이 휙 지나간 순간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야옹!”

내 입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나온 것은 진짜 본능적인 일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성을 잃고 주인님이 던진 공을 쫓아 몸을 날려 버린 것이다.

“으응, 으응.”

두 손으로 공을 꼭 잡고 뺨에 비벼본다.

그런 다음에 바닥에 공을 두고 손으로 이리저리 굴렸다.

“꺄아!”

움직이는 공이 왜 이렇게 좋은 건지는 모른다.

다만 공의 움직임에서 눈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런 공 성애자 고양이 같으니라고.

“미요, 저녁 먹자.”

주인님이 부르지 않았으면 아마도 한 시간도 넘게 공을 가지고 놀았을 것이다.

주인님과 식탁에 마주 앉아 따뜻한 김이 폴폴 올라오는 접시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뜨거운 것은 먹을 수 없다.

괜히 고양이 혀가 아니다.

접시에 담긴 요리는 잘 구워진 닭 가슴살.

잘게 자른 데다가 뼈도 없어서 그냥 먹기만 하면 된다.

“캣타워를 사주고 싶은데 네가 올라갈 수 있는 캣타워는 없을 것 같아서 포기했어. 대신 박스를 하나 얻어왔어.”

“박스?”

“고양이는 박스를 좋아하잖아.”

주인님은 고양이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

이전에 고양이를 키워본 것일까?

“전에 고양이를 키워보셨어요?”

“물론. 너처럼 이상한 고양이는 아니지만.”

주인님이 살짝 웃는다.

아, 웃으니까 매력적인 얼굴이다.

자주 웃어주면 좋을 텐데.

“이제 식었을 거야. 먹어.”

그렇게 말하며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먹기 시작하는 주인님을 살짝 쳐다보다, 앞에 놓인 닭고기를 손톱으로 살짝 찍어 입안에 넣었다.

“맛있어…….”

맛있는 닭고기.

요리를 잘한다, 이 주인님.

손톱으로 열심히 찍어서 먹는 모습을 주인님이 힐끗힐끗 보고 있다는 사실이 신경이 쓰였지만 그래도 맛있게 먹었다.

이렇게 맛있는 것을 먹고, 이렇게 친절한 대우를 받는다면 고양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주인님은 무슨 일을 해요?”

호기심 많은 고양이가 나다.

“나? 왜? 궁금해?”

“궁금해요. 무슨 일 해요?”

“재미없는 일.”

“가르쳐 줘요.”

“그러면 발바닥 만지게 해줄 거야?”

“네?”

웬 발바닥?

이상한 취미가 있나?

“난 고양이 발바닥 만지는 게 좋거든. 아, 넌 손바닥이라도 괜찮아.”

그 말에 살짝 손을 펴본다.

물론 이 짧은 손가락(앞 발가락)이 펴질 리가 없다.

고양이 손이라는 게 다 그렇지, 뭐.

까만 털 사이로 분홍빛 말랑한 살덩이가 있다.

이걸 말하는 건가?

“이거요?”

앞발, 아니, 손을 내밀자 주인님이 그 손을 잡는다.

아, 따뜻한 손…….

손을 잡은 주인님이 손바닥의 그 분홍빛 말랑거리는 젤리 같은 부분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고양이 발바닥은 정말 마약이야. 한번 만지면 놓기가 싫다니까.”

“으응…….”

분홍빛 젤리 살을 문질문질하는 주인님의 손가락에 살짝 가슴이 두근거린다.

손바닥을 만지는데 왜 가슴이 두근거리지?

분홍빛 젤리 살을 문질거리며 살며시 미소 짓는 주인님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니 은테 안경 너머로 쌀쌀맞아 보이던 눈동자가 조금은 상냥하게 느껴졌다.

* * *

“흐응…….”

허리에 손을 짚은 채 싱크대에 쌓여 있는 그릇들을 째려봤다.

“…….”

주인님은 지금 소파에 누워 잠들어 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소파에 앉아 책을 읽던 주인님이 이내 눕는다 싶더니 10분도 지나지 않아 가슴에 책을 올린 채로 잠이 들어버린 것이다.

아무래도 일 때문에 피곤한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주인님, 무슨 일을 하는지 알려주기로 했으면서 알려주지 않고 잠이 들어버렸어.

얄미워서 잠든 주인님의 발가락을 깨물어 버리고 싶지만 착한 내가 참을 수밖에.

살짝 손을 들어 물을 틀자 쪼르륵 하며 물이 흐른다.

“히익!”

역시 물 하면 온몸의 솜털이 바짝 일어난다. 고양이가 물을 싫어한다던데, 이래서야 씻을 수나 있을까?

그런데 뭔가를 하고 싶기는 하다.

그저 밥만 축내는 고양이가 아니라 집안일을 도울 수 있다는 걸 주인님께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문제는 물이 무섭다는 것.

일단 용기를 내서 흐르는 물에 살짝 손을 대봤다.

“꺅.”

다행히, 차갑기는 하지만 아주 무섭지는 않다.

역시 꼬리나 등의 털에 물이 닿지 않으면 손 정도는 물이 닿아도 상관없는 거구나.

그렇게 많이 무섭지는 않아.

“할 수 있어.”

자신감을 얻어 물을 조금 더 세게 튼 다음 세제를 손바닥에 약간 덜었다.

스펀지를 쥘 수 없으니 손바닥을 쓰는 수밖에 없다.

손바닥에 듬성듬성 나 있는 털이 스펀지의 역할을 해줘서 거품이 이내 몽실몽실 일어났다.

“고양이도 설거지 정도는 할 수 있다구요~”

자신만만하게 접시에 거품을 묻힌 다음 흐르는 물에 쓰윽쓰윽 씻어냈다.

깨끗하게 닦인 접시를 옆으로 살짝 옮겨 놓으며, 성공!

“해냈어. 역시 난 대단해!”

스스로 감탄하며 다시 두 번째 접시를 시도했.

주인님이 잠든 사이에 설거지를 마쳐놓으면 잠에서 깨어난 주인님이 얼마나 놀랄까?

대단한 고양이라고 칭찬해 주시지 않을까?

거품을 씻어낸 접시를 다시 옆으로 옮기려는 찰나,

“아앗?!”

손에서 접시가 미끄러졌다.

허둥거리며 접시를 잡으려고 했지만 짧은 손가락이(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잡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앗!”

그야말로 눈 깜빡할 사이에 접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쨍그랑-!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어진 접시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뭐야?!”

소파에서 잠들어 있던 주인님이 접시가 깨지는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가슴에 얹어졌다가 바닥으로 떨어진 책을 밟으며 일어서서 내 쪽을 바라본다.

“죄, 죄송해요…….”

“지금 뭘 한 거야?!”

무서운 목소리를 내며 주인님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잠들기 전에 내 손바닥을 만지며 나른한 미소를 짓던 주인님과는 너무 달라 와락 겁이 났다.

주인님이 내 앞으로 다가오자 난 그만 어깨를 움찔거리며 목을 움츠리고 말았다.

“죄송해요, 전 그냥…….”

분명히 화를 낼 거야.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화를 내실 게 분명해.

접시를 깨뜨렸으니 이런 쓸모없이 말썽만 피우는 고양이는 당장 나가라고 소리칠지도 몰라.

잔뜩 겁먹고 있는 내 손을 주인님이 잡은 것은 그때였다.

“다친 곳은 없어?”

“네?”

응?

주인님 목소리가 그렇게 많이 화난 목소리는 아니네?

“접시가 깨졌잖아. 다친 곳은 없느냐고.”

“네? 네. 다, 다친 곳은 없는데…… 하지만 접시가…….”

“움직이지 말고. 자, 얼른 안겨.”

“네?”

안기라는 주인님의 말에 난 고개를 갸웃거리고 말았다.

왜 안기라는 거지?

이해를 하지 못하는 내게 주인님이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한다.

“바닥에 온통 깨진 접시 파편이잖아. 난 슬리퍼를 신었지만 넌 신발도 신지 않아서 위험해. 발에 조각이라도 박히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아, 그렇구나.

주인님, 날 걱정해 주신 거구나.

날 걱정해서…….

눈물이 핑 돌 뻔했지만 꾹 참고, 주인님의 어깨를 잡고 그 품에 얼른 뛰어올랐다.

그러자 주인님의 팔이 내 다리를 받치며 나를 안아 들었다.

주인님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허리에 다리를 감은 나를 주인님이 거실로 데려갔다.

주인님의 품에 안겨 거실로 걸어가는 동안 꼬리가 내내 살랑거렸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하체가 주인님의 허리 부근에 닿아 있는 것이 조금 창피했지만 어쩔 수가 없다.

주인님의 허리를 다리로 감고 있느라 자연스럽게 벌어진 엉덩이에 주인님의 손이 닿아 있었다.

이것 역시 나를 안아 올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닿은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가슴이 이상하게 두근거려 온다.

주인님의 품에 안겨 거실의 소파로 옮겨진 다음 얌전히 내려질 때까지 가슴의 두근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유리 조각을 치울 동안에 움직이지 말고 여기 얌전히 있어. 알았지? 이 말썽꾸러기 고양이야.”

소파에 앉아 난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해요, 주인님. 잘하고 싶어서 그런 건데…… 흑…….”

눈물이 제멋대로 눈가에 맺히고 말았다.

울고 싶지 않은데, 말썽을 일으키고 거기에 눈물까지 흘리고 싶지 않은데 눈물이 제멋대로 나와 버렸다.

“흑, 흑…….”

눈물아, 들어가. 울면 주인님이 울보 고양이라고 할지도 몰라.

얼른 눈물을 그치려고 했지만, 쉽게 멈추지 않는다.

“울보 고양이.”

아니나 다를까, 역시.

“말썽꾸러기에 울보 고양이.”

하지만 말과는 반대로 주인님의 큰 손이 내 머리를 쓰윽쓰윽 쓰다듬었다.

울지 말라는 듯 문질러 주는 그 손길에 고개를 끄덕이며 손등으로 눈가를 닦아냈다.

큰 손으로 쓰다듬어 주는 느낌은 따뜻하고 다정해서 놀랐던 가슴이 어느새 뭉클하게 진정되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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