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나는 고양이?
응?
머릿속 전체를 깨끗하게 청소하면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너무 말끔하게 청소해 버려서 머릿속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이런 느낌.
그저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새하얀 도화지처럼 깨끗했다.
나는 누구지?
스스로 물어봐도 답이 없다.
이름도 모르고 왜 이 꼴이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낯선 주택가에 혼자 서 있는 것이다.
고양이의 모습으로.
기억이라고 할 만한 것은 단 하나.
끼이익-! 하는 무서운 차 소리와 사람들의 웅성거림, 그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는 이렇게 되어 있었다.
까만 발, 까만 털, 그리고 까만 꼬리를 가진 고양이가.
고양이가 되었어.
어떻게 고양이가 되었는지는 모른다.
언제부터 고양이가 되었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고양이였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고민할 틈도 없었다.
머리 위에서 차가운 빗방울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비는 싫다.
차가운 물은 몸서리 처지게 싫다.
차가워! 비를 피해야 해……!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한다.
조금 전에 눈을 떴기 때문에 이곳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어느 곳으로 가야 이 차가운 비를 피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어디로 가지?
비를 피할 곳만 있다면 좋을 텐데…….
한쪽에 비를 피할 수 있을 것 같은 긴 처마를 가진 집이 있었지만, 마당에 크고 무서운 개가 있었다.
저런 무서운 개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
비도 무섭고 날은 추웠고 갈 곳이 없어서 그만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 그때였다.
몸이 위로 휙, 하고 올라간 것이다.
“뭐야, 고양이잖아?”
뒷목을 대롱대롱 잡아 올린 손길이 누구의 것인지 돌아보려고 했지만 돌아볼 틈도 주지 않고 쇼핑 백 안으로 쏙 집어넣어졌다.
납치?
두려움이 왈칵 밀려든 나머지 쇼핑백에서 빠져나가려고 바동거려 보지만 엄한 남자의 목소리만 되돌아온다.
“이 계절에 비를 맞으면 얼어 죽을 거야. 그러니까 얌전히 그 안에 있어. 따뜻한 곳으로 데려가 줄 테니까.”
무뚝뚝하지만 그 목소리에서 숨어 있는 친절을 찾아낼 수 있었다.
따뜻한 곳으로…….
비를 피할 수 있는 따뜻한 곳으로 데려가 준다는 말에 얌전히 있기로 했다.
“말귀를 알아듣네? 꼬맹이, 너 똑똑하구나?”
그 말에 ‘바보 취급 하지 마요’라고 대답하려고 했지만 내 입에서 나온 것은 ‘야아옹’ 하는 소리였다.
나 진짜 고양이가 된 거야?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전에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사람의 말을 선명하게 알아듣는 것으로 봐서는 역시 사람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유일한 기억.
그것은 아마도 사고의 기억일지도 모른다.
나, 사고가 나서 죽은 것일까?
죽어서 고양이로 다시 태어난 것일까?
그렇다면 사고로 죽기 전에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여자? 남자? 어른? 아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건 이렇게나 답답한 일이다.
남자가 나를 데려간 집은 고급 맨션의 2층이었다.
한 층에 한 세대가 사는, 베란다가 딸린 고급 맨션.
거실로는 창밖이 보이고 복도에는 주방과 연결된 창문이 있다.
2층이라서 엘리베이터는 없다.
다만 층계를 올라오면 작은 복도가 있고 그 복도에 문은 이 맨션 하나뿐이다.
맨션이지만 단독 주택과 다를 바 없었다.
신기했다.
기억을 잃었는데 이런 것은 알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나’에 대한 것은 전부 깨끗하게 잊어버렸는데 고급 맨션이라든가, 문을 여는 법이라든가, 텔레비전 켜는 법에 대해서는 전부 기억이 난다는 것이 신기했다.
모든 것이 그대로 있는데 다만 ‘나’만 사라진 느낌.
“소파를 할퀴면 혼을 내줄 거야.”
나를 쇼핑백에서 꺼내 바닥으로 내려주며 남자가 으름장을 놓는다.
당연히 나는 그런 짓을 하지는 않는다.
남자의 집은 깨끗하고 단정했다.
혼자 사는 것일까?
넓은 거실의 한쪽 벽에 카키 브라운의 소파가 놓여 있고 벽면을 따라 브라운의 가구들이 색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벽의 무늬는 조용한 패턴의 크림색 벽지, 그리고 바닥은 푹신한 카펫.
진짜 비싼 집이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
“자, 우유야.”
남자가 작은 그릇에 우유를 담아 내려놓는다.
카펫 위에 쟁반을 두고 그 위에 그릇을 내려놓는 것으로 봐서는 혹시나 내가 우유를 흘릴 것을 염려한 것이 틀림없다.
깔끔한 성격인가?
우유를 보자 배가 고파 왔다.
혀를 할짝대며 우유를 먹고 있을 때 남자가 소파에 걸터앉았다.
맥주 캔을 따 마시는 남자를 보며 나도 마시고 싶다고 생각할 때, 스르륵 졸음이 몰려왔다.
정신을 차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졸음이 몰려오다니.
아마도 차가운 곳에서 따뜻한 집으로 들어와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게다가 미지근한 우유로 배까지 채우지 않았는가.
스륵스륵 내리감기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카펫 위에 몸을 둥글게 말고 말았다.
진짜 고양이가 자는 것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무거운 눈꺼풀을 감자 머릿속이 점점 흐릿해진다.
이곳이 어디인지, 이 남자가 누구인지 궁금했지만 호기심이 졸음보다 강하진 못했다.
잠결에 털을 만지는 남자의 손길이 느껴졌지만 마음대로 만지게 내버려 두었다.
어차피 고양이인걸.
고양이니까 괜찮아, 조금 정도는 만져도.
* * *
띠리리-
띠리리-
시끄러운 전화벨 소리에 눈을 꼭 감았다.
제발 누가 전화 좀 받아!
속으로 소리쳐 보지만 아무도 없는지 전화를 받는 사람이 없다.
일어나서 전화를 받을까 생각해 보지만 나른한 몸을 일으키기가 싫다.
이대로 쭈욱 자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전화벨은 곧 그쳤다.
누군가 전화를 받은 것일까?
그러나, 전화벨 소리는 그쳤지만 원하는 대로 잠을 계속 잘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눈을 비비며 엉거주춤 일어나 화장실로 걸어갔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가 변기 위에 앉는다.
쪼르륵 소리와 함께 시원한 느낌에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아, 기분 좋아.
레버를 당겨 물을 내리고 난 후 쏴아- 하고 물 내려가는 소리를 들으며 세면대 거울 앞에 섰다.
물을 틀어 손을 씻으려는 순간 난 깨닫고 말았다.
여긴 어디지?
그렇다.
어떻게 찾아오긴 했지만 내가 자던 곳도, 이 화장실도, 여기까지 걸어온 집 안의 모든 공간이 낯설었다.
전혀 알지 못하는 곳으로 와버린 것이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애초에 이전에 대한 기억이 없으니 내 머릿속에 알고 있는 장소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황한 채로 거울을 보는 순간,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충격이 나를 덮쳤다.
이곳이 낯선 곳이라는 건 차라리 애교에 가까울 정도의 충격.
알고 보니 내가 고양이였더라 하는 것보다 더 파격적인 충격.
거울에 비친 나는…….
새카맣고 쫑긋한 귀, 그리고 까만 털에 덮여 있는 네 개의 손가락? 발가락?
그러나 손가락인지 발가락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엉덩이에서 길게 뻗어 나와 있는 까맣고 윤기 흐르는 꼬리도 아니었다.
진짜 중요한 것은…….
“꺄아아아아악-!!”
봉긋한 젖가슴과 그 아래로 쭉 뻗은 하체는 틀림없는 사람, 그것도 여자의 알몸이었다.
“이게 뭐야아아!!”
고양이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내 정체는 도대체 뭐야아아아아!!
머릿속이 깨끗하게 지워진 상태에서도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다.
난 고양이가 아니라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사고의 기억으로 미루어봐서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은 후에 다시 고양이로 환생했다고 세월 좋게 짐작했는데, 하룻밤 사이에 고양이도 사람도 아닌 모습이 되다니!
고양이 귀에 꼬리, 손을 가지고, 그리고 인간 여자의 가슴과 성기, 얼굴을 가진…… 반 고양이 반 사람, 아니, 반 사람 반 고양이?
일명, 고양이 인간?!
이게 뭐야?! 이게 뭐냐구!!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누군가 외치고 있었다.
“뭐야?!”
물론 모르는 목소리, 아니다, 어젯밤에 들었던 목소리였다.
화장실 밖에서 다급하게 달려오는 발소리와 그 목소리에 그제야 어젯밤 날 주워온(?) 이 집 주인 남자를 떠올렸다.
그리고 고양이긴 하지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내 몸의 상황도.
물론 고양이가 옷을 입는다는 게 더 신기하긴 하지만 말이다.
“대체 넌 누구……!”
갑작스럽게 집 안에서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리니 주인 남자 입장에서는 놀랐을 것이 뻔했다.
고양이를 주워온 것이지 여자를 주워온 것은 아니니 말이다.
“으아아악!”
화장실 안으로 뛰어 들어온 남자가 경악하며 뒤로 물러섰다.
이해했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니.
“고, 고양이?”
화장실의 벽면에 딱 달라붙어 달달 떨고 있는 날 향해 남자가 경악한 눈을 한 채 입을 열었다.
그 말에 대답 대신 내 엉덩이의 꼬리가 바짝 털을 세우고 살랑거린다.
멋대로 움직이지 말란 말이야!
꼬리에 소리쳐 보지만 이놈의 꼬리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이는 듯 계속 살랑거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남자의 시선이 처음에는 내 쫑긋한 귀, 그다음에는 까만 털이 보송보송한 내 손(발일까?)에 머무르더니, 다시 멋대로 살랑거리는 꼬리에서 멎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 시선이 옆으로 옮겨지더니 털이(고양이 털과는 다른 의미의) 덮여 있는 다리 사이의 중심에 멎는다.
그리고 내 시선 역시 남자의 시선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남자가 보고 있는 것이 내 은밀한 부위라는 걸 알아차리는 순간,
“끼아악! 변태야아아!!”
떠나갈 듯 비명을 지르며 손으로 하체를 가려봤지만, 슬프게도 커다란 가슴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나, 고양이인 주제에 가슴은 왜 이렇게 큰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