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그 연인의 사정 (16/17)

외전. 그 연인의 사정

아리스가 왕위에 오른 지도 1년이 조금 지났다.

나라는 차차 안정을 되찾았고, 수도는 예전처럼 활기를 띠었다. 처음에는 불안해하던 사람들도 점점 아리스를 믿기 시작했고, 폭군 때 쌓인 안 좋은 왕실의 이미지들은 점점 사라져 갔다.

그리고 나라의 경사가 있는 오늘은 평소보다 더 수도가 시끌시끌했다. 아리스의 탄생일을 축하하는 연회가 길게 열렸기 때문이다.

아리스 즉위 후, 처음으로 나라에서 여는 공식 연회였다. 많은 귀족과 각 나라의 사신들이 연회에 참여한 덕택에 오랜만에 왕궁에 활기가 돌았다.

물론, 전까지도 활기가 돌기는 했지만 그때는 뭐라고 할까, 일하는 열정으로 활기가 돌다 못해 활활 탔다고나 해야 하나?

사실 지금도 몇몇 주요 관직자들은 연회에 참여하지 못하고 일을 하는 중이었다.

아리스가 그들에게 특별 휴가를 줬지만, 아직 정리되지 않은 일들이 많아 휴가 후 돌아오면 일이 밀리는 게 더 끔찍하다며 휴가를 제 손으로 걷어찬 자들도 많았다.

그리고 그중에는 린다도 있었다. 딱히 연회에 참석할 일도 없지만 그렇다고 다들 휴가를 나가 텅 빈 기사단 숙소에 있기도 심심했던 그녀는 그냥 쌓인 일을 마저 계속했다.

오래 앉아 있어 찌뿌둥한 몸을 풀던 린다는 저 멀리 기사단 쪽으로 오는 기척을 느끼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익숙한 기척인데.’

린다는 펜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기사단 건물 밖으로 나왔다.

“린다!”

어딘가 익숙하다 했더니.

한 남자가 크고 우렁차게 린다를 부르며 다가왔다.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망정이지, 사람들이 전부 돌아보게 하기에 딱 좋을 성량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부르는 남성을 귀찮다는 듯이 삐딱하게 서서 보았다. 린다의 시선 끝에는 그녀와 꼭 닮은 강렬한 붉은 머리와 회색빛 눈동자를 지닌 사내가 있었다.

조금 더 빨리 걸음을 재촉한 사내는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뭐야? 둘째, 너 왜 여기 있어?”

“이게. 넌 아직도 오라버니한테 둘째, 둘째, 그러냐!”

린다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게 뭐 어쨌다고, 하는 시선을 그에게 보냈다. 그는 그녀의 달라지지 않은 태도에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래, 내가 너한테 뭘 바라냐. 그나저나 너 왜 내 연락 씹어?”

“기사 단장이라는 사람이 ‘씹어’가 뭐냐, ‘씹어’가.”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말 돌리지 말라는 눈빛이었다. 그에 린다는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아, 뭐, 귀찮아서. 하이크 제국 수도는 멀잖아.”

“야! 집에서 수도까지 얼마나 걸린다고! 하루면 되겠다, 하루면! 본가에는 가끔 들른다며!”

안 그래도 목소리가 큰 사람이 소리까지 치니 귀가 아팠다. 린다는 한쪽 귀를 막으며 뚱한 표정을 지었다.

“잔소리하려고 제베르까지 온 거야? 친히?”

“네가 하도 연락이 없어서 걱정돼서 와 봤다!”

“시시라한테 전서구 보냈잖아. 괜찮다고, 제베르 왕국 일이 바빠서 앞으로 몇 년은 본가 못 갈 거라고.”

시시라는 아르펜 백작가 형제 중 다섯째였다. 그녀는 린다와 유일하게 연락을 하고 지내는 동생인 동시에 유일하게 이름으로 부르는 바로 아래 동생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그 뒤로 연락도 딱 끊고 내가 수도에 한번 와 달라고 해도 답장도 안 하냐? 아니, 잠깐, 그전에 왜 시시라는 시시라고 나는 둘째야?”

“그야 시시라는 친하고, 넌 아니니까.”

린다와 그녀의 오라버니는 터울이 그렇게 큰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라버니도, 린다도 일찍 집을 나간 편이라 그다지 친하지 않았다. 그나마 마주칠 일은 집안 대소사 때나? 그것도 린다가 잘 안 가서 어쩌다 한 번이었다.

그렇다고 이들 형제 사이가 나쁜 편이냐고 물으면 그건 아니었다. 아르펜 백작가 형제들은 서로 신경 쓰지 않고 살 뿐이지, 사이가 나빠서 뿔뿔이 흩어진 건 아니었다. 만나도 개인주의가 강해서 다 따로 노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그나마 시시라만이 유일하게 떨어져 있는 형제들에게 자주 연락하는 편이었다.

“큼. 나도 가끔은 연락하잖아.”

그는 변명처럼 웅얼거렸다.

린다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라 그는 변명할 게 많지 않았다.

“하지. 수도에 놀러 오라고. 누군 바빠 죽겠는데 도대체 왜 자꾸 오라는 거야? 가서 형제들 일하는 곳 구경이나 하라고?”

“아니, 그냥……. 너 내 결혼식도 안 와서 내 아내 얼굴도 모르니까 소개도 하고, 겸사겸사?”

“그 겸사겸사가 상당히 귀찮게 들려.”

하여간 눈치는. 그는 한숨을 푹 쉬고 말했다.

“내가 여기 왜 왔겠냐?”

“아까 내가 물었잖아.”

린다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오라버니를 올려다보았다.

“태자 전하께서 친히 오시겠다고 하셔서! 네가 그렇게 오라고, 오라고 해도 귓등으로도 안 들어서 아예 만나러 오셨다!”

그의 말에 린다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녀는 정말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왜? 또 맞고 싶대? 아님 10살 때 내가 때린 거랑 13살 때 밀친 거 마음에 담아 두고 복수하려고?”

“그럴 리가 있냐!”

그가 확 소리를 키웠다가 주변을 살피고 목소리를 작게 깔았다.

“네 활약상을 듣더니 대번에 만나고 싶다 하셨어. 태자 전하께서 사람 욕심이 좀 많으시거든.”

“근데?”

그래서 어쩌라고.

린다는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그녀의 표정을 보면 그런 말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네가 제베르 왕국에서 혼인하기 전에 하이크 제국으로 데려가시려는 거지.”

“인재 영업 한번 이상하게 하네. 왜 혼인이야? 누가 혼인한대?”

“아직 안 했지만, 사람 인생 모르는 거다? 그리고, 너 여태 혼인 안 한 건 제국 돌아와서 하려던 거 아냐? 제국민하고.”

“그럴 리가 있냐……. 그랬으면 벌써 돌아갔지.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고 있어.”

가뜩이나 일도 많아 죽겠는데, 오라비라는 자는 어이없는 소리만 늘어놓고 있었다.

아리스가 왕위에 오른 지 벌써 1년 조금 넘게 지났지만, 여전히 정리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본기도 안 된 왕실 기사 단원들을 처음부터 다시 가르치느라 린다의 일이 많았다.

“야, 잘 생각해 봐. 너한테 나쁠 거 없다? 네 실력으로 훈련 교관이 뭐야? 더 높은 직급도 가능하잖아! 그저 기사단원으로 썩히기에는 네 실력이 아깝지.”

“내 실력 인정해 주는 건 고마운데, 안 썩히고 자알 사용하고 있으니까 걱정 마.”

“이제 이오스랑도 잠잠해졌는데, 네 그 욕구 어디서 풀려고? 받아 줄 사람이 있어?”

같은 피가 섞여 있어서 그런가. 린다가 아직도 전투에 굶주려 있다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듯했다.

“하이크 제국에는 그런 인재가 널렸어요. 너 오면 놀랄 거다? 네 욕구를 풀어 줄 정도는 아니지만 나도 네 상대는 될 거고. 여섯째, 아니, 너 때문에 나도 자꾸 숫자로 부르네! 어쨌든, 케니스는 네 상대 될 걸? 걔 요즘 놀랄 정도로 강해졌어. 어찌나 훈련을 많이 하는지.”

데려 가려고 별 노력을 다 한다. 오라버니는 요즘 하이크 제국 기사들 수준이 올랐다느니, 와서 한번 시험해 보라느니, 하는 유혹적인 말들을 계속 내뱉었다.

그에 린다는 잠시 허공을 쳐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순간 누군가의 얼빠진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딱히 끌리는 내용은 없네. 그리고, 있어. 죽을 걱정 없이 검을 맞댈 수 있는 놈.”

그는 놀란 눈으로 린다를 보았다. 린다의 눈빛은 어릴 때랑은 달리 훨씬 부드러워져 있었다.

예전에는 투쟁심으로 아주 활활 타기만 했는데, 이제는 제법 차분한 모습도 보일 줄 알았다. 자신의 동생도 나이를 먹긴 먹는 모양이었다. 저리 철이 든 것을 보면.

“있다고?”

“어. 있어.”

“누군데?”

“알아서 뭐 하게?”

“애인이냐?!”

미쳤나.

오라버니라서 차마 그 말까지는 하지 못했지만, 린다는 아까보다 더 어이가 나간 표정을 지었다.

“애인 아니니까 닥쳐, 좀. 나 귓구멍 안 막혔거든.”

“아니야? 진짜? 진짜로?”

그는 린다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린다의 얼굴에 짜증이 잔뜩 뱄다. 진짜 아닌 모양이었다.

“둘째야, 오늘 나랑 혈연의 연을 끊을래?”

“……크흠! 그, 그 정도로 싫어할 것까지는 없잖아. 상대가 울겠다. 네 검을 받아줄 수 있는 상댄데, 너무 푸대접 아니야?”

“걔가 왜 울어? 걔는 나보다 더 펄쩍 뛸 텐데.”

자기보다 더 질색할 지도.

그리고 린다가 굳이 그를 언급할 정도면 푸대접까지는 아니었다. 어쨌든 상대를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사이는 더럽게 나쁘지만.

“난 할 말 끝났어. 바빠서 먼저 간다.”

정말 딱 자기 할 말만 하고 그녀는 미련도 없이 뒤돌아섰다.

“아! 맞다! 린다! 너, 내일 연회에도 참석 안 해?”

“호위할 분이 계셔서 내일은 참석합니다. 됐지!”

“그래? 그럼 태자 전하 보면 인사는 좀 해! 업무 중이라고 무시하지 말고!”

“태자 전하 하시는 거 봐서.”

역시 한마디도 지지 않는 저 성격. 예전 성격 어디 안 갔다.

린다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고는 그는 다시 중앙 홀로 발길을 돌렸다.

* * *

제베르 왕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연회가 열린 지 5일째가 되었다.

즉위 후 처음으로 국왕이 직접 주최하는 파티라서 그런지, 내로라하는 왕국 귀족들이 파티에 모습을 드러냈다. 웬만하면 펜베르크 성에서 절대 나오지 않는다는 제스트윈 공작까지 참석했으니 말 다 했다.

첫째 날에는 왕국 귀족들이 먼저 도착해 작은 파티를 즐겼다. 그리고 둘째 날에는 각국 사신들이 속속 도착하여 잠시 하루 쉬고, 셋째 날부터 본격적인 연회가 열렸다.

그리고 그 본격적인 파티가 있던 셋째 날, 모두가 놀랄 만한 인물이 등장했다.

바로, 하이크 제국의 황태자가 몇 개의 마차에 재물을 한가득 실은 채 제베르 왕궁에 나타난 것이다. 커다란 황금빛 마차에서 내리는 황태자를 본 이들은 전부 헛것을 본 양 눈을 비볐다.

‘아니, 왜 저런 거물이?!’

그곳에 있던 귀족들은 전부 그렇게 생각했지만, 차마 입 밖으로 그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무려 황태자가 친히 행차했는데, 감사는 못 할망정 왜 왔냐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황태자는 아리스의 앞에 예를 갖추고 생일을 축하한다고 말했고, 아리스와 몇 마디를 나눴다. 그리고 그 이후, 그는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레 섞여들었다.

그 다음 날 열린 연회 때도 딱히 그는 어떤 수상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다가오는 귀족들을 적당히 상대하고 연회에 적당히 참여하다 귀빈실로 돌아갔다.

중간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행동을 보이기는 했지만, 그 외에는 딱히 정치적으로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보통 사신단 대표로 태자를 보내진 않잖아요? 혹시, 전하와 하이크 제국 사이에서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까요?”

“왕위에 오르실 때, 주변국의 도움을 은밀히 받으셨을 지도요.”

귀족들이 이리 숙덕거리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다른 나라에서도 왕자나 공주가 사신단으로 오긴 했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후계싸움에서 밀려난 사람들이었다. 다른 나라에 명분 삼아 보내기 좋은 사람들이 바로, 그런 왕자나 공주들이었다.

주변국에 체면치레는 하면서 혹시라도 왕자나 공주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정치적 이점을 챙길 수 있었다. 반대로 왕자나 공주가 다른 나라에 가서 실례를 저지르거나 잘못을 하면 그건 그거대로 직위를 해제하고 벌을 주면 되었다.

그런 식으로 정치적 분쟁을 만들지 않을 수 있어 그들은 자주 이런 일에 이용당했다.

하지만 황태자는 달랐다.

그는 무려 황제의 바로 뒤를 이을 후계자였다. 웬만큼 큰 사안이 아니면 사신단에 끼어 올 리도 없는 거물. 그의 말이 곧, 하이크 제국의 뜻이자 정치적 입장이 될 수 있었다. 그 정도로 그의 존재는 대단했다.

그런 사람이 왜 갑자기 생일 축하한다며 제베르 왕궁을 찾은 것일까?

그전까지 하이크 제국과 제베르 왕국의 관계는 그저 예의상 오가는 교류만이 있었을 뿐, 서로 깊게 관여하지 않았다. 그냥, 하이크 제국은 제베르 왕국 자체에 관심이 전혀 손톱만큼도 없었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제국의 황태자가 제베르 왕국을 찾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의 등장으로 제베르 왕국 귀족들은 물론, 다른 왕국 귀족들도 술렁였다.

“어휴, 그런 소리 마세요. 다들 왕권을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데. 태자 전하께서는 다른 일 때문에 오셨겠죠.”

다들 숙덕거릴 때, 그들 사이에 끼어 있던 아델라가 주변 귀부인들에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어머, 아델라 님! 언제 오셨어요. 케스너 후작 부인께서는 좀 어떠세요?”

“몸이 많이 안 좋으시다 들었는데, 괜찮으신 건가요?”

자연스럽게 아델라의 주변에 모여든 귀족들은 금세 다른 화제로 아델라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델라가 케스너 후작 부인이 머무는 별궁에 출입이 가능한 귀족인 덕에 자연스럽게 후작 부인에 관한 이야기로 대화가 흘러갔다.

현재 케스너 후작 부인은 아리스가 편의를 봐 줘서 별궁에서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아리스의 노력에도 케스너 후작 부인은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고 있었다.

그 때문에 별궁은 특별 관리 대상이었다. 먹는 것 하나, 입는 것 하나, 모든 물품이 왕의 허락 없이는 오갈 수 없었다. 사람도 마찬가지였기에 왕의 허락이 떨어진 이가 아니면 출입이 불가했다.

케스너 후작 부인이 시녀도 안 두고 하녀들도 몇 밖에 안 둔 탓에, 별궁을 드나들 수 있는 귀족은 얼마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귀족들은 그녀의 안부부터 아델라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들은 케스너 후작 부인의 안부보다는 케스너 후작 부인이 마음에 둔 왕비감이 있으며 왕이 그런 부인의 말을 전적으로 따른다는 데에 대한 것에 더 관심이 많았다.

아직 왕비를 들이지 않는 아리스와 후작 부인의 의중을 포함해서 요즘 대신들의 동태도 파악하기 위해 귀족들은 아델라와 대화를 나눴다. 아델라는 그들과 말을 섞어 가며 요즘 대신들의 상황에 대해 적당히 알려주었다.

아델라는 이곳에서 어떤 이야기가 돌고 귀족 간의 알력 싸움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확인하고 유력 귀족들과 미리미리 친분을 쌓아 두기 위해 연회에 참석하곤 했다.

그런 그녀도 연회에서 황태자를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태자 전하께서 오셨다고 듣긴 했는데, 진짜로 보니 놀랍네. 근데 진짜로 왜 온 걸까?’

연회 중에도 아픈 케스너 후작 부인을 돌보느라 별궁에 있던 아델라는 황태자가 나타났다는 소식에, 궁금증을 못 참고 연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녀는 왕궁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해 둘 필요가 있었다. 나중에 릴리아가 왕비가 될 상황을 대비해서.

그 때문에 아델라는 주변 귀족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 척하면서도 황태자의 동태를 살폈다.

‘여태 행동을 봐서는 딱히 우리 전하께 뭘 원해서 온 것 같지는 않은데.’

정말 순순히 축하만 하러 온 걸까? 황태자가 친히?

아델라가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 사이, 린다가 홀 안에 들어섰다. 주변을 훑지도 않고 곧장 아델라를 찾은 그녀는 성큼성큼 아델라에게로 향했다.

마침 아델라는 누군가에게 시선을 주고 있어서 린다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그런 아델라를 놀려 줄까 하던 린다는 누군가에 의해 억지로 저지당했다. 누군가가 린다를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의 시선이 린다에게 향했다. 그 누군가가 린다만을 보며 걸어왔으니까. 덕분에 덩달아 아델라의 시선도 린다에게 향했다.

“린―!”

아델라의 표정이 빠르게 밝아지는 것을 본 린다는 자신도 순간 아델라를 따라 얼굴에 미소가 올라왔다. 아델라의 목소리가 끊기지만 않았어도 린다는 그녀를 바라보며 마주 웃었을 터였다.

“이렇게 보게 되어 반갑군. 몇 년 만이지? 그대의 형제들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 아르펜 백작 영애.”

아까 멀리에서부터 린다를 발견하고 성큼성큼 걸어온 이는 금발의 청안을 지닌, 현재 이 연회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황태자였다. 그런 그가 린다에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린다에게 다가오려던 아델라는 주춤 린다의 곁에서 멈췄다.

‘이게 무슨 일이야?’

아델라는 눈만 깜박이며 이 상황을 바라보았다. 린다는 자신의 곁에서 멍하니 멈춘 아델라를 한번 본 후, 자신에게 내민 그의 손을 물끄러미 보았다.

주변의 시선이 둘, 아니, 얼떨결에 껴 있는 아델라까지 합해서 셋에게 쏠렸다. 그러나 린다는 주변 시선과는 상관없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예를 갖추며 고개를 깊게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태자 전하. 린다 아르펜, 인사 올립니다. 린다 경이라고 불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금발에 청안을 지닌 남자의 손이 허공에서 민망하게 멈췄다.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어색하게 손을 거뒀다.

“변함없군.”

“어릴 때 성격 어디 가겠습니까.”

아무렇지 않게 그의 핀잔을 받아치며 린다는 아델라 쪽으로 한 발 움직였다.

“혹시, 보르만 경에게 이야기 들었나?”

“무슨 이야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린다가 아델라 쪽으로 한걸음 움직이면 그도 같이 한걸음 움직여 린다에게 말을 걸었다. 아델라는 둘이 하는 양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지금 둘이 뭘 하는 걸까.

‘린다 경의 형제 중 넷이나 황궁에서 일한다더니, 황태자 전하와 가까운 사이인 줄은 몰랐네.’

이 상황이 신기했던 아델라는 가만히 그 사이에 껴 있었다.

“이번에 우리 사신단과 함께 제국으로 돌아가자는 말.”

“그럴 생각 없다고 말씀드렸는데, 그 부분은 듣지 못하셨습니까? 전 애초에 황궁 사람도 아닙니다. 거절하겠습니다.”

“제국민은 맞지 않나. 다시 생각해 봐.”

어느 나라 사람이든 그게 무어가 그리 중요하다고 다들 이러는지. 제국민들은 제국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난 것 같았다. 물론 그 정도로 강대한 국가이기는 했다.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인재가 썩어가는 것이고 자기네 나라에 와야만 인재가 기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저 오만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린다는 이곳에서도 충분히 자신의 기량을 펼치고 있었고, 제베르 왕국도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었다. 하이크 제국과 이오스 왕국 다음으로 큰 나라였다.

아니, 설사 작은 나라라고 한들 상대가 잘 살고 있는 곳을 저리 무시하면 없던 짜증도 몰려올 터였다.

“다시 생각해도 제 마음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아델라는 둘의 입씨름을 보다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황태자 전하께서 이곳에 온 이유, 린다 경이구나!’

속으로 다른 꿍꿍이가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일단 겉보기에는 그랬다.

제베르 왕국에 황태자가 직접 행차할 정도로 탐나는 인재였나? 아델라는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그럴 수도 있겠다고 결론 내렸다. 린다를 잘 아는 이라면, 누구라도 그녀의 실력이 탐날 만했다. 많은 사람이 혀를 내두를 정도의 실력을 지녔으니까 말이다.

특히 린다의 형제를 넷이나 자신의 아래에 두고 있는 황태자라면 린다를 궁금해 할 만도 했다. 더 나아가 린다의 능력을 확인하고 곁에 두고 싶을 수도.

“그대가 원하는 걸 말해 봐. 뭐든 들어 주지. 그대가 상상하는 것 이상을 누릴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가 몇 번을 말해도 린다의 대답은 ‘NO’였다. 그녀는 딱히 권력욕도 없었고, 그렇다고 재물에 관심이 많지도 않았다. 린다만큼 붙잡아 두기 까다로운 존재도 없을 것이다.

한편 린다는 이 대화가 너무 쓸데없이 느껴졌다.

“아무것도요.”

“아무것도?”

“예. 바라는 거 없습니다.”

“시간을 주지. 바라는 게 있을 거야.”

린다의 철벽도 엄청났지만 황태자의 집착(?)도 꽤 끈질겼다.

그러나 린다는 싫다는데 붙잡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고, 같은 말을 여러 번 하는 것도 싫어했다.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린다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는 것을 보니, 곧 있으면 폭발할 것 같았다. 린다 앞에 서 있는 이가 황태자가 아니었다면 벌써 맞거나 무시당했을 것이다.

“하…….”

결국, 린다의 입에서 대놓고 한숨이 나왔다.

“좋습니다. 원하는 걸 말하죠. 저는 제 검을 온전히 받아 낼 수 있는 이의 곁에 있고 싶습니다. 제가 성장할 수 있게 대련을 받아 줄 수 있고 제 검을 받아도 죽을 걱정 없는 이요.”

얼핏 들어보면 아주 간단한 요구다. 하지만 린다의 실력을 아는 이들은 기함할 만큼 위험한 요구였다.

린다의 검을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받아 내는 이는 제베르 왕국을 통틀어 셋뿐이었다. 미하일 제스트윈, 이저드 제스트윈, 그리고 마지막 한 명, 헤이든 세이즈.

힘이 좋다는 장정들도 그녀와는 열 번도 검을 맞대지 못하고 전부 검을 손에서 놓쳤다.

린다의 실력을 약하게나마 온몸으로 받아 냈던 아델라는 안쓰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린다의 제안이 얼마나 잔인한 요구인지 아델라는 알고 있었다.

“원하는 게 정말 그것뿐인가?”

“예.”

분위기를 보아 하니, 황태자가 저 제안을 받아들일 것 같았다. 아델라와 연회 경비를 맡고 있던 기사단원 전부 표정이 점점 구겨져 갔다. 그들은 황태자에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속으로 열심히 빌고 있었다.

“좋아. 내 그대를 상대하지.”

“상관은 없습니다만, 다른 이를 보내도 괜찮습니다. 이를 테면, 보르만 경이라던가.”

린다의 차가운 눈빛이 멀리서 이 상황을 흔들리는 눈으로 보던 린다의 오라버니, 보르만에게 향했다. 그는 아까부터 열심히 고개를 젓고 있었다.

“경을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건 난데 다른 이를 내세우면 쓰나. 걱정 말게. 보르만 경과는 맞수일 정도로 내 실력도 좋아.”

“예. 그럼 내일 아침 기사단 훈련장에서 뵙죠.”

그렇게만 말한 린다는 아델라를 데리고 그곳을 벗어나려 했다. 그가 다시 잡지만 않았어도.

“아, 잠시. 이건 아까와는 별개의 이야기인데.”

린다가 이리도 온몸으로 말 걸지 마, 잡지 마, 같은 아우라를 풍기는데도 꿋꿋이 잡는 이는 또 처음이었다. 역시 황태자.

“혹, 춤 신청을 하면 받나?”

“업무 중입니다.”

역시나 가차 없이 거절당했다.

그런 와중에도 황태자의 낯이 참 두껍다고 생각한 것은 그가 그 다음으로 노린 것이 린다의 곁에 있던 아델라였다는 것이다.

“그럼, 곁에 있는 레이디는?”

그가 서글서글한 미소로 아델라를 바라보았다.

“아, 전…….”

하지만 아델라도 린다 못지않게 철벽이었는데, 그녀에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아델라는 살포시 반지 낀 왼손을 보여 주었다. 임자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군. 하지만 짝이 있더라도 한 곡 정도는 괜찮지 않나? 두 번이나 차이면 내가 민망할 것 같은데.”

이건 협박인지, 제안인지. 당사자가 꿈쩍도 안 하니 주변인부터 공략해 보자, 이건가.

“저에겐 너무나 영광이지만……. 제가 혼인한 몸이기도 하고, 전하를 모시기에는 부족한 점이 너무 많습니다. 죄송합니다. 명을 거둬 주세요.”

물론, 아직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게 아니라 많은 이들이 모르고 있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유부녀가 맞았다. 문서상 처리는 끝났고 앞으로는 결혼식과 같이 사는 것만 남았으니까.

아델라는 태연하게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표정에 황태자는 잠시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는 자신이 유부녀에게 작업 아닌 작업을 걸고 있었다는 게 당황스러웠다. 젊어 보여서 혼인까지는 아니고 기껏해야 약혼 정도인 줄만 알았다.

“첫 춤은 보통 파트너나 배우자와 추는데 태자 전하와 먼저 춤을 추면 부인이 뭐가 되겠습니까.”

린다는 아델라 말에 맞장구쳐 주며 황태자에게 핀잔을 주었다. 한심하다는 린다의 눈빛에 뜨끔해진 황태자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내 몰랐네. 오해 마. 부인에게는 미안하군.”

“아닙니다. 태자 전하께서 린다 경과 대화중이라 제가 제 소개를 못 해서 발생한 오해인걸요.”

“이해해 줘서 고맙군.”

아델라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하자, 그는 그제야 약간 안심한 표정이었다. 둘을 보던 린다는 얼른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어? 어, 그, 그래. 그렇게 하게.”

린다가 타이밍 좋게 끼어들어서인지 황태자는 아델라의 이름도 묻지 못하고 둘을 떠나보내야 했다.

* * *

아델라와 린다는 테라스로 바람을 쐬러 나왔다. 훅 끼치는 신선한 바람이 두 사람을 훑고 지나갔다. 단둘이 되고서야 둘은 한시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니, 아델라는 아까 린다와 황태자가 나눴던 대화가 다시 떠올랐다.

“린다 경.”

“예?”

린다는 아까보다 훨씬 편해진 표정으로 밤하늘을 바라보다 아델라의 부름에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까 태자 전하께 한 말이요.”

“예.”

“그거, 누구 생각하고 하신 말이에요?”

“딱히 누굴 생각하고 한 말은 아닌데요.”

하지만 그녀의 말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특정인을 지칭한 표현 같았다. 아델라는 린다가 무의식중에 그런 말을 뱉은 건지, 아니면 누군가를 머릿속에 그리고 그런 말을 뱉은 건지 궁금했다.

“그렇지만, 딱 셋이 특정되잖아요.”

“셋이요?”

“각하, 이저드, 헤이든 경.”

린다는 아델라의 말을 듣고 보니 그렇구나 싶었다. 딱히 누군가를 의식하고 뱉은 말은 아니었는데.

“그렇네요.”

미적지근한 린다의 반응에 아델라는 혹시나 해서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혹시, 헤이든 경 생각하셨어요?”

그에 린다는 잠시 고민하다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르만에게 말할 때도 그를 떠올렸으니, 무의식중에 그를 특정하는 말이 나왔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놈만 한 대련 상대가 없는 건 사실이니까요. 각하는 바쁘고, 이저드 님도 바쁘니.”

‘헤, 헤이든 경도 바쁠 텐데요.’

그만큼 편하다는 소리일까?

몇 년간 둘을 지켜보며 아델라는 전생에 린다와 헤이든이 왜 맺어졌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린다는 헤이든에게, 헤이든은 린다에게, 서로가 서로를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둘뿐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끌릴 수밖에.

물론 현재도 그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것 같았지만 전생과는 약간, 아니, 아주 달랐다. 현재 둘의 문제는 서로를 전혀 연애 대상으로 보고 있지 않다는 거였다.

전생에는 서로를 달리 볼 사건이라도 터졌지만, 현재는 그 사건 자체가 사라져서 그런 걸까? 서로만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까지는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 인식이 좋아해, 라는 감정까지는 가지 않는 듯싶었다.

서로에게 호감이 있음에도 둘은 그 감정을 호감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보는 사람은 참으로 답답할 노릇이었다. 그저 편한 친구나 동료에게 느끼는 감정 정도로만 생각하고 앉았으니, 나 원 참.

‘어쩌면…… 이번 일이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아델라는 태연자약한 린다를 빤히 보았다. 여태 황태자만큼 린다에게 적극적으로 말을 걸고, 들이 댄(?) 사람은 아예 없었다. 린다가 워낙 틈을 안 주기도 했고, 보통 다들 린다를 무서워해서 가까이 오지도 못했다.

‘이거, 태자 전하를 도와서 질투 유발 작전이라도 써야 하는 건가? 헤이든 경이든 린다 경이든 깨닫기라도 하게?’

최근 1년 동안 그런 비슷한 시도를 안 해본 건 아니었지만, 매번 실패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하는 마음으로 시도해 보긴 하겠지만 성공할 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아델라는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아델라가 한참을 말이 없자, 린다가 아델라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린다 경이 제국으로 가게 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요?”

“그럴 일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린다는 확고하게 딱 잘라 말했다.

“이번 사신단에는 린다 경 오라버니도 있잖아요. 오라버니도 강하시지 않으세요?”

“강하긴 한데…… 제가 위기감을 느낄 정도는 아니에요.”

린다의 대답에 아델라는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린다의 마음에 파장을 일으킬 만한 뭔가가 없을까.

“그, 그렇군요. 전 린다 경의 오라버니라고 해서 되게 긴장했는데.”

“아델라 님이 긴장할 것까지야.”

린다는 어깨를 으쓱이며 픽 웃었다. 눈치를 보는 아델라의 행동이, 그녀가 떠날까 봐 불안해하고 있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아, 근데. 태자 전하와는 오래 알고 지내셨나 봐요?”

“알고 지냈다기보다는, 오래전에 몇 번 봤죠. 아버지께서 황제 폐하의 보좌관으로 있을 때 서너 번?”

뭐지. 왜 저런 사실을 되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거지. 아델라는 놀란 표정으로 린다를 빤히 보았다.

“폐하의 보좌관이면…… 귀족 중에서도 높은 직급에 속하지 않나요?”

“음…… 아르펜 백작가 자체는 유서가 깊긴 하죠. 대대로 폐하의 보좌관을 맡고 있기도 하고요.”

정말, 이 가문 정체가 뭘까?

그러고 보니 린다의 가문에 관한 이야기를 제대로 들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린다는 전생에도, 지금도 자기 집안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았다.

황궁에 형제만 넷이 일한다고 했을 때 알아 봤어야 했는데! 그저 능력이 출중한 형제들이구나, 라고만 생각했다.

“린다 경은 왜…….”

“왜?”

아델라는 멍하니 입을 열려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빠르게 내저었다.

“아니, 아니죠. 실례되는 질문이었어요. 잊어주세요.”

“아직 질문도 받지 않았는데, 뭘 물으려고 했는지는 알 것 같네요.”

린다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까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아델라의 의문에 그녀는 성심성의껏 답했다.

“처음에는 각하를 어떻게든 이기려고 남아 있던 건 맞습니다. 각하만 이기면 언제고 떠날 생각을 한 것도 맞고요.”

하지만, 그렇게 반강제로 펜베르크 성에서 지내면서 린다에게도 소중한 인연들이 많이 생겼다.

처음에는 언제고 떠날 생각을 하던 린다에게, 이제는 이곳이 아니면 안 될 때까지 정말 많은 일이 벌어졌다.

동료들이 생기고, 언제든 자신의 검을 받아 주는 상사가 생겼다. 그렇게 아르펜 백작 영애가 아닌, 린다로서 살아가게 되면서 그녀는 점점 제베르 왕국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정말 이곳이 좋아지더라고요. 지키고 싶은 사람들도, 많이 생겨 버렸고요.”

제스트윈 공작과 공작 부인을 만나고, 호위병들과 성주민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저드와 헤이든, 아델라까지 만나면서 그녀는 진심으로 이 나라까지 지키고 싶어졌다.

이들과 함께하는 미래가 영원하길 바랐고,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안전하게 삶을 이어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이크 제국으로 돌아가면 높은 자리야 얻을 수 있겠지만, 전 딱히 권력에는 관심 없어서요.”

부와 명예에 관심이 있었다면 그녀도 진작 형제들처럼 하이크 제국 황궁에 갔겠지. 집을 나와 여기저기 떠돌아다니지 않았을 것이다.

“그보다는 제가 싸우고 싶을 때, 언제든 싸울 상대가 있는 게 더 좋습니다. 그게 제가 원하는 삶입니다.”

그녀의 진솔한 고백에 아델라는 감동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린다를 보았다. 린다의 마음을 아델라는 헤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도 그러한 과정을 거쳐 결국 이곳에까지 도달했으니까 말이다.

아델라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보자, 린다는 약간 쑥스러워졌다.

“그, 뭐, 어쨌든, 그러니까 사서 걱정 마시라고요.”

“그럼요, 그럼요!”

아델라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리고 그렇게 감동하던 중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린다와 헤이든의 관계를 진전시킬 만한 묘안이 떠올랐다.

아델라는 아까보다 더 눈빛을 반짝이며 민망해하는 린다를 보았다.

“이 와중에, 이런 거 물어봐도 되나요?”

아델라는 린다의 눈치를 보며 서두를 살그머니 꺼냈다.

“뭔데요?”

린다가 아델라의 이야기를 무시할 리가 없었다.

“그게, 요.”

“예.”

“다음 달이면 이저드는 저와 왕궁을 나가서 살 거라, 대련 시간을 따로 내기 더 힘들어질 거고 헤이든 경도 이제 가문에서 압박이 들어올 텐데…… 괜찮으세요?”

“그게 왜…….”

린다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으려다 입을 닫았다. 그녀는 아델라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금방 눈치챘다.

그러니까 아델라의 말은, 헤이든도 혼인을 하게 되면 지금처럼 그와 편히 대련을 즐길 수가 없어진다는 이야기였다.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아무 때나. 그게 불가능해진다는 거였다.

“걔는, 외동아들이죠.”

린다가 이제야 깨달은 듯, 작게 중얼거렸다.

린다야 혼인 같은 거 안 하면 그만이었지만, 헤이든은 달랐다. 그는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였으니까.

아직은 가문에서 그에게 혼인을 강요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헤이든이 계속 여자를 만나지 않고 이 상태로 지낸다면 억지로 정략결혼을 진행할지도 몰랐다. 당장은 아니지만 언제고. 헤이든은 세이즈 백작 가문을 이끌 가주가 되어야 했으니까 말이다.

“그럼 그땐 펜베르크 성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나…….”

린다의 혼잣말과도 같은 중얼거림에 아델라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 왜 이야기가 그리로 빠지는 거예요?! 잡으시라니까요! 깨달으세요, 얼른!’

린다는 고민에 빠져서 아델라의 필사적인 도리질을 보지 못했다.

* * *

연회가 거의 끝나갈 무렵, 연회 홀이 황태자가 등장했던 것처럼 크게 술렁였다.

이저드가 푸른 연미복을 입고 연회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금발의 미남자도 검은 연미복 차림으로 함께 등장했다.

둘의 등장만으로도 주변이 환하게 빛나는 느낌이었다.

남아 있던 대부분의 귀족들은 늦게까지 남아 있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소문으로만 듣던 둘의 외모를 두 눈에 담을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덤으로 말 몇 마디까지 나눌 수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그래서인지, 둘이 등장하자마자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자신을 에워싸기 전에 이저드는 보폭을 크게 해서 그들에게서 벗어났고, 헤이든도 그를 따라 빠르게 사람들을 지나쳤다.

둘이 향한 곳은 당연하게도 아델라와 린다의 곁이었다. 아까부터 둘을 보며 미소 짓는 아델라와 달리 린다는 굳은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늦어서 미안하네.”

아델라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안 늦었어요. 아직 마지막 춤이 남았는걸요?”

“첫 춤은?”

그의 물음에 아델라는 이저드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에게만 들리게 조용히 속삭였다.

“혼인한 여인이 신랑 아니면 누구랑 첫 춤을 추겠어요.”

소곤소곤 말하면서 씩 웃는 아델라를 보며, 이저드는 은은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저드가 청혼했던 시점에선 아델라가 미성년자였던 탓에 바로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다. 게다가 그녀가 성인이 된 후에도 이런저런 일을 정리하느라 결혼식이 늦어져 어쩔 수 없이 둘은 서류상으로 먼저 부부의 연을 맺었다.

사실 아직 함께 살고 있지 않아 부부가 된 것이 크게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아델라의 입에서 신랑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확 와 닿았다.

그의 심장이 제 기능을 못 하고 미친 듯이 뛰었다.

“아델라.”

“네?”

“그대, 원래도 아름다웠지만, 오늘 특히 아름답네.”

이저드가 그녀의 손을 꼭 맞잡으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자 아델라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요! 하녀들이 절 잡고 몇 시간이나 공들인 걸요!”

아델라의 장난기 어린 말에 이저드가 낮게 웃었다. 아델라도 그와 함께 마주 웃었다.

“방금 거는 장난이고, 이저드도 오늘 멋져요. 내 신랑이 세상에서 제일 멋져요. 항상.”

둘은 서로에게만 들리게 작게 속삭이며 첫 춤이자 마지막 춤을 추러 중앙으로 향했다.

그런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헤이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린다를 돌아보았다. 린다의 상태가 아까부터 좀 이상해서 신경이 쓰였다.

“야. 아니, 경.”

린다는 입을 꾹 다물고 헤이든을 빤히 올려다보기만 했다.

“왜 그래?”

그녀는 나름대로 심각한 얼굴로 헤이든을 위아래로 훑었다.

“뭐냐, 그 복장. 경, 그런 복장 답답해서 싫다며.”

린다의 지적에 헤이든이 자신의 복장을 살피며 어깨를 으쓱였다.

“어머니께서 성화여서 어쩔 수 없었거든. 나도 안 어울리는 거 알아.”

“누가 안 어울린대? 어울려.”

“아, 그래, 또 시비…… 어?”

그녀가 의외로 순순히 그런 소리를 하자, 오히려 헤이든이 놀랐다. 당연히 안 어울린다고 거들떠보지도 않을 줄 알았더니.

“너, 혼인할 거지?”

“뭐? 갑자기 왜 그런 뜬금없는 질문을?”

“하긴 언젠가 하겠지.”

아까부터 이상하다 싶더니, 갑자기 애가 안 하던 짓까지? 자기가 묻고 자기가 답하는 건 무슨 경우일까.

헤이든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어, 언젠가 하겠지. 가문을 이어야 하니까.”

린다의 자문자답에 헤이든은 일단 대답을 해줬다.

“그래? 그럼 우리 앞으로 대련 줄이자.”

“어?”

이야기가 왜 그렇게 이어지는지 헤이든은 알 길이 없었다.

“내가 참아 볼게. 못 참겠으면 펜베르크 성으로 돌아가는 방법도 있고.”

“어어?”

그는 이 상황 자체를 이해할 수 없어서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그럼 연회 잘 즐겨라. 이저드 경도 오셨으니 난 이제 그만 간다.”

“뭐? 야! 야, 린다!”

헤이든은 자신을 지나쳐 가는 린다를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그보다 먼저 귀족 영애들이 둘의 사이를 갈랐다. 점점 멀어지는 린다를 헤이든은 이상하게 초조한 마음으로 쳐다보았다.

“혹, 파트너가 없으면, 저와 춤을…….”

몇몇 여성이 춤 신청을 하기도 전에 헤이든은 그들을 피했다. 그의 얼굴은 이미 많이 구겨진 상태였다.

“파트너 있습니다.”

헤이든은 그렇게 말하고 린다의 뒤를 쫓아 뛰었다.

아마 세이즈 백작 부인이 이번 연회에 참석했으면 울었을 것이다. 기껏 아들을 어르고 달래 난생처음으로 연회에 연미복을 입혀 들여보냈더니, 들어온 지 5분도 안 되어 퇴장했으니까.

* * *

“야!”

헤이든의 목소리가 사람이 없는 복도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린다는 평소와 비슷하게 인상을 쓰며 그를 돌아보았다.

“왜.”

못마땅한 눈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린다는 평소의 린다가 맞았다. 헤이든은 자신이 뭘 잘못 봤나 살짝 헷갈렸다.

“너 어디 아파? 왜 갑자기 대련을 줄이자니 어쩌자니 그래. 언제는 네가 나한테 말하고 했냐? 멋대로 시작해서 지칠 때까지 한 건 너였거든?”

“그래서, 싫었어?”

“그……!”

싫다는 건 아니었는데, 뉘앙스가 좀 그랬나? 헤이든은 괜히 린다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지만.”

헤이든도 린다와 비슷했다. 자신의 검을 감당할 수 있는 상대에게 마음껏 검을 휘두를 수 있는 그 대련이 좋았다. 그러니 불만 없이 그녀의 대련을 매번 받아들였지.

“그런데 너, 대련 좋아하잖아.”

헤이든과 린다의 거리는 점점 줄어들어, 대략 다섯 발자국 정도가 남았다.

“좋아하지.”

“근데 갑자기 줄이자는 이유가 뭐야?”

그의 물음에 린다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뗐다.

“네가 혼인을 하면 밤늦게까지 따로 대련하기 힘들잖아. 그러니까 지금부터 줄이자는 거지. 서로 익숙해지게.”

“왜?”

그의 천진한 표정에, 둘 사이에 잠깐 대화가 사라졌다.

“하아. 그럼, 혼인 후에도 백날 밤늦게까지 대련하게? 외간 여자랑?”

“푸하핫!”

린다가 나름대로 진지하게 말했더니, 이 철없는 자식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너, 스스로를 여자로 생각하긴 했구나?”

“아니, 그게 아니고 이 새……!”

―끼야, 라고 하려던 린다는 가까스로 참았다.

“아는 사람들은 알지. 너랑 나랑 그저 동료일 뿐인 거. 근데 너랑 혼인할 아가씨와 그 가문은 이해해 줄 거라 생각해?”

이쯤 하면 폭발해서 멱살잡이라도 할 줄 알았더니, 린다는 의외로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린다가 진지하게 이 부분에 대해 고민했다는 걸 헤이든은 그제야 알았다.

“유부남과 미혼의 여성. 결혼 전부터 만났던 사이. 입에 오르내리기 딱 좋지. 우린 아니라고 하면 그만이지만, 네 아내가 겪을 일들은?”

어디 하나 틀린 말이 아니라 헤이든도 웃음기가 가신 얼굴로 린다를 보았다. 거기까지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사실 그는 어떤 여성과의 혼인 자체를 떠올려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백작 부인이 그렇게 다른 가문 아가씨 이야기를 해도 그는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원래부터 헤이든은 딱히 여인에게 관심이 없었다. 맨날 사고치고 다니고, 여기저기 쏘다니기 바빴지. 그는 그런 삶이 좋았다. 마음대로 다 하고 사는 삶. 그러다가 매번 세이즈 백작에게 혼이 났지만.

‘결혼 후? 결혼 후라…….’

린다의 말에 헤이든은 처음으로 결혼 후 문제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

“그럼 그냥, 우리 둘이 하면 안 돼?”

“…….”

린다는 육성으로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어떻게 혼인하자는 소리를 이 상황에서 할 수가 있을까? 아까까지 자신이 한 말은 귓등으로 들은 것 같았다.

린다는 이를 악물고 평정심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왜, 너랑 혼인해?”

한마디만 더 허튼 소리하면 가만 안 두겠다는 뉘앙스가 다분히 섞여 있었다.

헤이든은 자기가 그렇게 툭 던져 놓은 말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걸 그제서야 알아챘다. 딱히 흑심이 있어서 던진 건 아니었다.

“아니, 나는 좋아하는 걸 못할 바에야, 이 관계는 유지하고 계약 같은 걸 하는 건 어떨까 해서. 우리야 서로 편하니까 진정한 의미의 부부는 못 되더라도 함께 오래 갈 수는 있을 것 같은데.”

헤이든이 급하게 변명을 내놓았다. 그러나 린다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각하께서는 영지를 다스리느라 맨날 바쁘시잖아. 펜베르크 성에서 너랑 매번 대련해 준 것도 나고.”

린다에게 반응이 없자, 헤이든은 계속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린다의 생각을 못 읽겠다. 하지만 화가 난 건지 미간이 잔뜩 구겨져 있는 것은 보였다.

“솔직히, 네 검을 매번 받아 줄 수 있는 건 나고, 내 검을 그렇게 받아 줄 수 있는 건 넌데, 굳이…… 대련을 줄여야 하나? 난 싫은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헤이든에게 설명을 해 줘야 하는 걸까. 린다는 머리가 아파 와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난.”

헤이든이 그런 린다의 눈치를 보고 있기를 수 분. 드디어 린다의 굳게 닫혔던 입이 떨어졌다.

“누군가와 혼인할 생각이 전혀 없어. 설령 있었다고 하더라도, 넌 아니야.”

“그럼?”

“우습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난 날 사랑해 주는 사람,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원해.”

린다의 말을 듣고 있던 헤이든이 심각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럼 어떡해? 난 너랑 대련을 줄이는 게 싫고, 넌 나랑 계약으로 묶이는 게 싫은데.”

“뭘 어떡해? 어쨌든 넌 혼인을 해야 하잖아. 네 미래의 아내에게 최선인 방법을 택해. 됐지?”

헤이든은 돌아서려는 그녀를 잡으며 뚱하니 대답했다.

“야야, 나 그렇게 혼인에 환장한 사람 아니거든? 아버지, 어머니께서 초조해 하셔서 그렇지.”

“네가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라며. 그러니 당연히 그분들은 걱정하시지.”

린다의 한심스러워하는 눈이 헤이든에게로 향했다.

처음 만남보다 약간 철이 든 상태였지만, 그는 린다를 처음 만났을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철이 없었다.

자신이 얘한테 뭘 바라나 싶었다. 린다는 그가 잡은 팔을 빼내려 했다. 그러나 그가 제법 꽉 잡고 있어 가볍게 쳐내는 걸로는 팔이 빠지지 않았다.

린다를 잡은 채 헤이든은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눈을 빛냈다.

“가문 명맥을 나만 유일하게 유지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뭐라는 거야. 너 외동아들이라고.”

“좋아. 그럼 나도 혼인 안 할게. 그럼 우리 관계 문제없지?”

철이 안 든 게 문제가 아니라, 그냥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린다가 뭐라고 핀잔을 줘도 헤이든의 눈빛은 아주 확고했다. 미쳤나 보다.

“난 가문을 위해 막연히 혼인을 생각한 것뿐이지, 굳이 고르라면 안 하는 쪽이야.”

“하…….”

당연하게도 린다의 입에서 큰 한숨이 나왔다.

“왜 결론이 거기로 도달하냐. 평소에도 더럽게 말 안 듣더니 내 말은 귓등으로 들려?”

“응? 아니, 진짜야. 내가 평소에 네 말에 일일이 토를 달긴 하지만, 이번에는 진짜거든?”

평소 기어오른다는 걸 스스로도 잘 아는가 보다.

“그런 놈이 아까는 계약 결혼을 운운해?”

“그건 진심인데.”

“진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당장 대련 줄이자니까 싫어서 그냥 막 던진 거지.”

“대련 줄이는 건 싫었는데, 그렇다고 막 던진 건 아니다?”

린다의 불신 어린 시선이 헤이든에게 닿았다. 그녀의 시선을 받으며 헤이든은 아주 잠깐 그녀와 함께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았다.

네가 무슨 여자냐, 여자답게 좀 굴어라, 애가 힘이 장사다. 여태 그런 이야기만 했다는 게 떠올랐다. 린다가 헤이든의 말을 안 믿을 만했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 린다와 이렇게 관계를 유지하며 지내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 걸까. 처음에는 서로 질색했는데. 그 시기가 정확히 언제라고 특정할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린다의 곁에 있었을 뿐이다.

린다에게 시비 걸어서 맞다가 대련을 했다. 또 핀잔을 듣다가 서로 편히 대화하고 마지막에는 또 대련을 하고. 헤이든은 그런 린다가 곁에 있는 일상이 어느 순간부터 아주 당연하게 느껴졌다.

“막 던진 게 아니라고? 보통, 혼인하자는 말을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에게 그렇게 막 해?”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누구의 의견이야?”

린다가 눈을 몇 번 깜박였다. 얘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다.

“그럼, 좋아해?”

“아니?”

“이게 진짜! 그럼 안 좋아하는 거 맞잖아! 말장난해?!”

린다가 헤이든의 팔을 뿌리치려 주먹을 쥐고 있는 게 보였다. 그에 헤이든은 냉큼 린다를 놔 주고 빠르게 말을 이었다.

“아, 아니! 뭐, 널 여자로 본 적이 있어야 좋아한다, 안 한다는 감정을 알지! 갑자기 물으면 어떻게 아냐?!”

적반하장도 유분수였다. 린다가 화를 내야 했건만, 그가 버럭 먼저 화를 냈다. 한 대 때리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이런 놈을 데리고 진지하게 대화를 나눴던 자신이 한심했다.

“여태 이성으로 안 보였으면, 앞으로도 쭉 안 보여. 역시 막 던진 거 맞잖아.”

“아, 글쎄 아니라니까? 네가 내 마음을 들여다봤어? 그걸 어떻게 장담해?”

그냥 무작정 우기기로 한 건지, 헤이든의 표정이 뾰로통했다. 린다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네가 네 입으로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말했다?”

“아직은 아니지만 변할지도 모르잖아. 그리고 이성적으로는 모르겠지만, 동료로는 너만 한 사람이 없지! 근데 이게 좋아한다는 감정인지는 잘…….”

헤이든은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없었다. 애당초 그런 감정 자체를 몰랐다.

그냥 린다가 편했다. 린다만 한 대련 상대도 없었고 린다와 대련을 하고 나면 확실히 실력이 늘어서 좋았다. 그녀와 대련을 하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거웠다.

평소에 자주 시비를 걸어서 맞긴 했지만, 딱히 그녀가 무척 싫어서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린다를 보면 참을 수 없이 시비를 걸고 싶어져서 그 마음에 따를 뿐이었다.

“헤이든.”

“응?”

린다가 차가운 눈동자로 그를 불렀다.

“날 껴안을 수 있어? 다정하게 손잡을 수 있어? 혹은, 키스할 수 있어? 그것도 아니면 잠자리는? 상상이라도 해 봤어? 나를 좋아한다는 감정.”

“어, 음…….”

좋아한다는 걸 왜 상상해야 하는지조차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왜 자신이 린다에게 이 일로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지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린다는 말도 안 통하는 애를 붙들고 이게 뭐 하는 짓일까 싶었다. 그녀는 사기를 잃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널 잡고 뭘 하겠냐. 그래, 막 던진 거 아니고 나름대로 생각해서 던진 거라고 할게.”

어차피 헤이든이 버틴다고 해서 세이즈 백작이 혼인을 안 시킬 것도 아니었다. 그때가 되면 헤이든도 어느 정도 이해하겠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발길을 돌렸다.

“……내 말 안 믿네.”

서로를 너무 잘 알아도 문제였다.

린다가 건성으로 대답해서 헤이든은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평소보다 한 톤 내려간 그의 목소리에, 린다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를 다시 돌아보았다.

“난 좋아하는데 왜 거기까지 상상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거든? 그러니까.”

린다가 벌렸던 거리를 헤이든이 다시 좁히며 가까이 다가갔다.

“……해 보면 알겠지?”

헤이든의 대답은 여태 들었던 대답 중에 가장 황당한 소리였다.

“해 보자고?”

“응. 손잡는 거나 안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키스랑 나머지는, 음……. 확신이 생기면?”

저딴 식으로 말해 오는 놈이 다른 놈이었다면 어디서 수작질이냐고 팼을 텐데. 헤이든의 작태는 그저 황당하기만 해서 린다는 잔소리조차도 나오지 않았다.

한참 말이 없던 린다는 곧, 팍 인상을 구겼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자신을 쉽게 보고 이러는 건가? 좋아하나 안 하나를 해 봐야 알겠다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너, 네가 말한 거 후회하지 마.”

린다의 입가가 비틀어져 올라갔다. 린다가 왜 그런 살벌한 미소를 짓는지 모르는 헤이든은 멀뚱멀뚱 그녀를 보았다.

“따라 와.”

“왜?”

“그럼 연회장 복도에서 할까?”

아니, 고작 안고 손잡는 건데 어디서 하든 무슨 상관이지? 소문 같은 거 신경 쓰는 타입도 아닐 텐데…….

헤이든은 약간 의아했지만, 린다의 뒤를 순순히 따랐다.

그녀가 향한 곳은 기사단 숙소였다. 탁, 하고 헤이든의 뒤로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헤이든이 이쯤 되니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뭔가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잘못 온 것 같은 기분?

“야, 왜 굳이 숙소까지……, 야!”

“뭐.”

헤이든이 놀란 눈을 하고 린다를 보았다. 그와 달리 그녀는 제복을 벗으며 헤이든을 표정 없이 쳐다보았다.

“오, 오, 옷은 왜 벗어?”

“해 보면 알 것 같다며.”

“뭐, 어?”

헤이든은 놀란 눈을 하고, 말까지 더듬었다.

“좋아하는 감정, 그거. 해 보면 알 것 같다며.”

“아, 어, 그렇게 말한 건 맞는데, 왜 벗어?! 입어!”

린다를 보지 않기 위해 시선을 돌린 헤이든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러니까 해 보자고. 네가 원한 거잖아?”

“아니, 그러긴 했는데, 옷을 벗을 필요는…….”

“대신 중간에 도망가면 죽일 줄 알아.”

린다의 목소리가 헤이든을 잡아먹을 것처럼 낮게 깔렸다. 헤이든은 절로 몸을 움츠리며 주춤 그녀에게서 물러섰지만, 몇 평 안 되는 방 안에서 도망갈 곳은 없었다.

* * *

다음 날 아침, 린다는 상쾌한 낯빛으로 연무장에 나타났다. 평소보다 좀 더 기분 좋아 보였다. 대련이 그렇게 즐거울까.

린다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챘지만, 아델라는 그게 순전히 그녀가 새로운 상대와 대련을 할 수 있어서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걸로 마음의 변화가 일어난 건 아닌 모양이었다. 좀 더 오래 대련을 즐길 줄 알았던 린다가 의외로 정말 빠르게 대련을 끝냈기 때문이다.

스무 번의 합도 넘기지 못하고 황태자가 검을 떨어뜨렸다.

물론 린다의 공격을 받아낸 것만 해도 황태자는 잘 견딘 거였지만, 린다는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던 건지 틈을 봐서 손목을 냅다 쳐 버렸다. 보는 이들 전부 손목을 움찔 떨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물론, 린다는 황태자라고 힘을 조절한 거였다. 덕분인지 다행히도 황태자의 손목은 무사했다. 다만, 보는 이들의 심장이 천국과 지옥을 오갔을 뿐이다.

이저드가 미리 의원을 불러 놔서 바로 진단을 받은 게 다행이었지, 아니었으면 생각하기도 싫었다. 국제 분쟁이라도 나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 때문에 그 찰나의 순간 얼마나 마음 졸였던지.

“경, 정말 강하군. 경의 형제들도 정말 강하다 생각했는데, 그들이 왜 입을 모아 경을 칭찬하는지 알겠어. 완벽한 내 패배야.”

황태자는 의외로 순순히 패배를 인정했다. 그의 곁에 인재들이 많은 이유를 조금 알 것도 같았다.

그에게는 아집과 오만, 자신의 것이 아닌 힘에 대한 질투 같은 게 크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에게 없는 것을 가진 이들을 높게 쳐주고, 좋은 대우를 해 줬다. 그러니 당연히 인재가 그에게 몰릴 수밖에 없었다.

“칭찬 감사합니다. 제 형제들도 충분히 강합니다.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하핫. 경, 정말 아까워. 혹, 하이크 제국에 오면 황궁에 들리게. 경에게 배움을 받고 싶군. 아, 이건 순수한 부탁이야.”

“생각은 해 보겠습니다.”

“하이크 제국으로 돌아오라는 소리는 안 할 테니 좀 들르게.”

린다가 그를 만나 처음으로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린다는 황태자에게 예를 갖추고 인사를 올린 후, 아델라와 이저드가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아델라는 손에 든 물통을 린다에게 냉큼 건넸다.

“저 진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그 정도로 세게 안 쳤는데요.”

아니, 누가 봐도 강했는데.

“뚜둑 소리를 들은 것 같았는데요?”

“그 정도로 안 부러져요. 대련할 때 힘 조절도 못 하면 어디에 씁니까?”

그녀의 말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 된 몇몇 기사단원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울겠다.

아델라는 주변 분위기를 살피다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 대련에 헤이든 경이 안 나왔네요? 제일 먼저 싸움 구경하러 나올 줄 알았는데.”

그녀의 물음에 린다가 물을 마시며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걔 자느라 못 나와요.”

“이상하군. 헤이든 경이 이 좋은 구경을 자느라 놓친 적은 없는데.”

아델라의 곁에 함께 서 있던 이저드가 의아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제 무리해서요.”

“헉. 어제 두 분 또 대련하셨어요? 정말 체력 하나는…… 대단하세요.”

어쩌면 아델라의 반응이 가장 보편적인 반응일 것이다. 린다는 남은 물을 마저 쭉 들이키며 입가를 대충 소매로 닦았다.

“아뇨, 저랑 자느라. 그냥 쉬게 두세요. 부기사 단장 일은 제가 일정 부분 처리하겠습니다. 그럼.”

음…….

으음…….

으응……?

혼란에 빠뜨릴 말만 던져 두고 돌아선 린다의 등을 아델라가 빤히 보았다. 방금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걸까?

“저, 제가 오해한 걸까요? 잤다는 말로 들리는데요.”

아델라가 이저드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이저드도 조금 놀랐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이미 전생에 한 번 겪었던 일이기에 엄청나게 놀라지는 않았다.

“그대가 들은 게 맞네. 나도 그리 들었으니.”

“제 청각에 문제가 있나 했어요…….”

린다와 헤이든의 이야기는 이저드에게 전해 듣기만 했지, 실제로 겪은 적은 처음이라 아델라에게는 문화 충격이었다.

“근데 두 분, 마음을……, 확인한 건 맞겠죠?”

“아마 아닐 거네. 전생에도 마음을 먼저 확인하고 관계를 가진 건 아니었어.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말게. 알게 될 테니까.”

이저드의 말을 들으니 아주 약간은 안심이 되긴 했는데, 둘, 정말 괜찮은 걸까?

아델라는 괜히 둘의 관계가 틀어질까 걱정되었다.

하지만 아델라의 걱정과는 달리, 미래는 전과 비슷하게 흘러갔다. 전생에서 벌어진 일과는 시간의 차이만 있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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