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일상으로 돌아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
……라고 끝났으면 좋으련만.
아델라와 이저드는 아직 젊고 그들 앞에 펼쳐질 미래도 무궁무진했다.
지금부터는 수없이 생을 반복했던 아델라도 모르는 미래다. 그들 앞에 펼쳐질 미래가 어떨지는 정말 아무도, 그 누구도 모른다. 그 길이 평탄한 길일지, 아니면 울퉁불퉁한 길일지. 그것도 아니면 안개에 휩싸인 길일지.
원래 미래란 예측할 수 없는 법이었고 어느 험난한 길에 들어설지도 몰랐다.
“싫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나도 널 수도에 보내고 싶지 않지만, 전하께서…….”
“뭐든 싫습니다.”
공을 세워 하사받은 직위가 싫다고 저리 단칼에 거절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심지어 기사 단장이라는, 18살인 이저드에게는 파격적인 자리였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쩐지, 이래서 아리스가 이저드의 의견을 먼저 물어보자고 했구나.
“기사 단장 직보다 더 높은 지위를 원해서는 아닌 것 같고.”
미하일은 마주 앉은 이저드의 안색을 살피다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델라 양 때문이군.”
둘의 사이를 미하일은 최근에야 알았다. 그리 3구역을 드나들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물론 아델라와 이저드가 린다를 통해 몇 번 만나 친한 사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연애나 사랑을 하는, 그런 사이까지 발전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했을까, 싶었다.
어릴 때부터 이저드는 연애의 ‘연’ 자에도 관심이 없었고, 또래 여자아이들에게도 예의 그 이상을 차리지 않았다.
게다가 그와 친한 여성들이라고는 린다와 비슷한 또래의 호위병이나 수비병들뿐이라, 미하일은 이저드가 연애를 할 수 있다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저드가 꾸준히 3구역에 드나든다고 했을 때조차 그는 아들이 마음에 맞는 친구를 사귀었구나, 정도만 생각했다. 이런저런 경험을 쌓는 건 아이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일이기도 했기에 그는 별말 없이 그저 지켜보았다.
“……그저, 저한테는 과분한 자리라 생각했을 뿐입니다.”
이저드의 대답이 약간 늦었다. 아델라에게 피해가 갈까 봐 변명하는 게 뻔했다. 그런 이저드의 모습이 참 생소했다. 미하일은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난감했다.
“내, 너희가 2년이나 사귀었다 듣긴 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구나.”
요직도 차 버리고 펜베르크 성에 붙어 있겠다고 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아델라와 떨어지기 싫어서. 보통 이저드의 나이쯤 되면, 밖으로 나가고 싶어 안달이던데, 이저드는 완전 반대였다.
특히 지방 귀족들은 수도를 접할 일이 적어 대부분 수도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심지어 폐왕이 다스리던 시기에도 그런 로망을 가진 수많은 젊은이가 수도를 향했고 왕이 바뀐 지금은 더 유입이 많아졌다.
그런데 사지 멀쩡한, 아니, 멀쩡한 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저드는 수도에만 올라가면 요직이 확보된다. 그 요직은 많은 이들이 원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모두가 원하는 자리에 앉게 될 이저드는 결단코 안 가겠다 버티고 있었다.
정말, 황당한 상황이었다.
“전하께는 지금 믿고 의지할 사람이 필요해. 그래도 안 되겠느냐? 배신하지 않고 곁을 지키며 뒤를 받쳐 줄 사람이 지금의 그분께는 꼭 필요하단다.”
“…….”
미하일은 펜베르크 지역을 다스려야 했기 때문에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 외에 아리스가 믿고 의지할 만한 사람으로는 이저드가 딱 맞았다.
제스트윈 공작가의 후계자가 곁에서 그를 든든하게 지탱해 주는 것만으로도 아리스에게는 큰 힘이 될 것이다.
이저드도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뭐라 쉬이 대답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수락하면 이제 겨우 함께하게 된 아델라와 떨어져 있어야 했다.
그렇다고 거절하면 아리스의 상황을 외면하는 거였다. 현재 누구보다 빨리 왕권을 안정시켜야 하는 아리스에겐 제스트윈 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저드.”
이저드에게서 대답이 없자, 미하일이 그를 불렀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까보다는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미하일은 기다리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저드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
“응?”
그는 문을 닫고 집무실을 나가기 전에 자신의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느냐?”
미하일을 불러 놓고, 이저드는 잠시 말이 없었다.
“……아닙니다.”
말을 하다 마는 게 더 불안하다는 걸 그는 알까.
미하일은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는 이저드를 불안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 * *
“내가 둘 다 쓸데없이 땅이나 팔까 봐서 해 주는 말인데, 그냥 받아들여.”
로브를 쓰고 3구역으로 나온 이저드의 곁에 한 소년이 슬렁슬렁 따라붙었다. 이저드는 그의 등장이 놀랍지도 않은지 계속 묵묵히 걸었다.
“……언제 오셨습니까?”
“방금.”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저드가 살짝 시선을 돌린 곳에는 2년 전과 다름없이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 루가 보였다.
세상에 더 없을 것 같은 은발과 보석 같은 적안을 지닌 루는 2년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키는 전보다 약간 큰 것 같았다.
“그래. 여기 시간으로는 2년 만인가?”
“예. 2년 만입니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안 보였던 것치고 루는 2년 전과 전혀 다름없었다. 그동안 일어난 상황도 대충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2년 전과 다름없이 감흥 없는 표정으로 거리를 걸었다.
“그런데 아까 무슨 말씀입니까?”
“넌 어차피 받아들이게 되어 있으니 그냥 미리 받아들이라고.”
그게 마음대로 되면 이리 고민할 것도 없었다.
“왜 그렇게 확신하십니까?”
“그거야 당연히 네 미래가 그래. 가고 싶지 않아도 가게 될 텐데 시간 끌어 봤자 아델라만 힘들걸.”
루의 입에서 아델라라는 이름이 나오자, 이저드가 움찔했다. 역시 힘들어 하려나. 이저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눈치챈 루가 피식 웃었다.
“내 말은, 둘 다 같은 이유로 고민하게 될 거라서 똑같이 힘들 거라는 거야.”
이저드는 그의 말을 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네가 고민하는 게 뭐야? 아델라를 두고 수도에 올라가야 해서지.”
이저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아델라도 그 걱정을 하게 될 거라고. 널 두고 수도로 가야 할 걱정.”
아델라는 왜? 아델라도 이저드와 비슷한 제안을 받은 걸까?
“예?”
“내 조언은 여기까지. 곧 알게 될 거야.”
곧, 이라는 말은 아직 아델라는 수도에 올라갈 일이 안 생겼다는 뜻일까. 이저드는 루의 말뜻이 궁금했지만 루는 그 이후로 더 이야기 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정말로 곧,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루가 한 말의 뜻을 알 수 있게 된다.
* * *
어스름한 새벽빛이 깔린 어느 날이었다. 아델라는 거실에서 느껴지던 기척이 없어지자, 부스스하게 눈을 떴다.
아델라가 돌아오고 한 달 정도 지났을까? 릴리아는 여전히 잠을 쉬이 이루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새벽에 자주 거실로 나와 자는 걸 알게 된 아델라는 몇 번이나 괜찮냐고 물었지만 릴리아는 그저 잠이 적어진 것뿐이라며 괜찮다고만 했다.
그리고 또 며칠이 지났을 때, 아델라는 릴리아가 아픈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주 잠시, 새벽녘에 나온 릴리아의 표정을 문틈 사이로 보게 됐을 때였다. 그때 보인 그녀의 표정은 꼭,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릴리아의 기척이 밖으로 향했다.
‘어라? 이 기척, 익숙한데.’
아델라는 눈을 비비고 일어나 새벽빛이 환하게 쏟아지는 창문으로 조심히 향했다. 찰싹 창문에 붙은 아델라가 창밖 정원을 살폈다. 호기심으로 반짝이던 그녀의 눈동자는 새벽빛을 받아 한층 더 밝게 빛났다.
‘역시, 아리스 님 기척이야. 왕궁은 어쩌고 오셨지? 케스너 후작 부인을 모시러 왔나?’
그런 것치고는 단출한 차림이었다. 왕으로서의 아리스가 아니라, 펜베르크 성에 살던 시절의 아리스로 보였다.
아델라는 릴리아와 아리스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물끄러미 보았다. 뭐라고 말하는지 들리지 않았지만,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 같았다. 릴리아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아리스의 표정은 확실히, 좋아 보였다.
아델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둘을 바라보다가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기다리던 사람이 아리스 님이었구나. 저렇게 기다리셨는데 왜 나한테 아리스 님 소식을 안 물어보셨지?’
릴리아가 아픈 게 아니라 천만다행이었지만, 한편으로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 * *
“아리스 님께서 새벽에 오셨어요.”
“새벽에? 아침에 오신 게 아니고?”
아델라는 이저드가 사 준 케이크를 오물오물 씹으며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테라스가 개방된 케이크 가게의 자리 중 가장 바깥쪽 자리에 앉아 거리를 구경하던 중이었다.
“네. 분명, 새벽에. 제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이상하군. 펜베르크 성 입성은 아침이라고 들었는데.”
이저드는 며칠 전, 케스너 후작 부인을 만나기 위해 아리스가 펜베르크 성에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왕궁 일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오는 것이기는 했지만, 예상보다 이른 방문이었다.
“그쵸? 이상하죠? 수행 기사들도 전부 물리고 왔다니까요? 케스너 후작 부인의 집도 아니고, 저희 집에요.”
아리스는 혈혈단신으로 릴리아만 보고 돌아간 후, 재입성한 것이다. 아델라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빠져 케이크만 빤히 내려다보았다.
“아리스님 지금 공작저에 계시죠?”
그녀의 물음에 이저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뵐 수 있을까요?”
“그대가 뵙고 싶다고 하면 기꺼이 허락하실 거네.”
“그럼 가요!”
“지금? 급한 일인가? 마저 먹고…….”
이저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델라는 케이크를 크게 한입 물었다. 아델라는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케이크가 반이나 남아서 그냥 가긴 아까웠다.
이저드도 아델라와 비슷한 생각을 하긴 했지만, 입 안이 터질 정도로 한입 크게 베어 물 줄은 몰랐다. 그는 그런 아델라를 웃으며 보다가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
“급하게 먹다가 체하네.”
“괘아나요! 이거 부으러워서.”
아델라의 입에 케이크가 가득 들어서인지 발음이 뭉개졌지만, 제대로 알아들은 이저드는 큭큭 웃었다. 그녀의 입가를 다 닦아 준 이저드가 손을 떼자, 아델라가 덥석 그를 잡았다.
“?”
“제가 빨아 드릴게요!”
……손수건 이야기였다.
그녀는 어째선지 의욕이 가득 찬 표정으로 이저드의 손수건을 가져갔다.
사실 손수건을 아델라에게 줘도 상관없었지만 손수건을 빨아서 자신에게 돌려주는 것을 기대하는 것 같아 보이는 아델라의 모습에 이저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
“네!”
이저드가 아델라를 향해 손을 내밀자, 아델라가 활짝 웃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 * *
“전하께서 저희 어머니에게 마음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크흡! 쿨럭, 쿨럭!”
너무 단도직입적이었나.
아리스는 마시던 차가 사레들린 듯 연신 기침을 했다. 아리스의 표정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곳에 있던 린다나 헤이든, 이저드는 딱히 매우 놀란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지난 2년간 아리스를 봐 오면서 그가 릴리아를 대하는 태도를 보았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에게는 무뚝뚝한 아리스가 릴리아 앞에서는 표정이 풀어지는 걸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 그건 말입니다.”
아리스는 너무 당황하여 평소에 쓰던 존댓말이 튀어나왔다.
“아뇨. 변명은 넣어 두세요. 그걸 따지려고 온 게 아니니까요. 저희 어머니, 진지하게 좋아하세요?”
아델라는 돌려 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그리고 이 상황을 잠자코 지켜보던 이저드는 루의 말을 점점 이해할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 아리스는 이미 혼기를 넘겼는데도 부인이 없었다. 그래서 왕비의 자리도 비어 있었다.
“예, 좋아합니다.”
처음에는 당황하던 아리스도, 아델라의 침착한 반응에 차차 안정을 되찾았다.
“어떤 반대에도 굴하지 않을 정도로요? 약한 어머니께 귀족들의 화살이 향할 텐데, 지켜주실 수 있습니까?”
아리스는 아델라가 진심으로 둘을 걱정하고 묻는 것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아델라의 진지한 태도를 보며 아리스는 혹여 자신이 잘못 말하기라도 할까 봐 바짝 긴장했다.
“아직 제게는 그분을 지킬 힘이 부족한 건 압니다. 그래서 강해질 거고요. 제 자리가 안정을 찾은 후에 그때 반드시 제대로 고백을…….”
“……고백도 안 하신 거예요? 어머니는 아리스 님이 왕이 되신 것도 모르시는 거고요?”
“고, 고백은 했습니다. 거절당했지만요. 제가 왕이 된 걸 밝히면 더 멀어질 것 같았기에……. 죄송합니다.”
왜 혼나는 기분이 드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그는 이상하게 아델라의 앞에서 굳어지는 기분이었다.
‘잠깐. 고백을 이미 하셨다고? 어머니가 거절하셨고? 그런데 왜 그렇게 아리스 님을 기다리셨지?’
아델라는 알 듯 말 듯한 기분으로 눈을 굴렸다.
“아리스 님은…….”
“예?”
“아니, 어머니께서 왜 거절했는지 조금 알 것 같아서요.”
“제가 성급했습니다. 릴리아 님은 그때 많이 당황하시면서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좋아하는지 몰랐던 것 같아요. 전 릴리아 님이 저와 같은 마음인 줄 알고 수도에 올라가면 한동안 못 볼 것 같아서…….”
그의 말에 아델라는 안쓰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리스도 느꼈을 정도인데, 자신이 못 느끼고 있었다는 게 약간 슬픈 기분이었다.
“그 이유가 아닐 거예요. 거절한 이유는, 저였겠죠.”
아리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아델라를 보았고 린다와 헤이든도 마찬가지였다.
“아리스 님은 만약에, 저희 어머니가 받아들여 준다고 하면 그 후를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당연히 있습니다.”
굳은 표정의 아리스를 빤히 보던 아델라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는 염두에 두었다. 릴리아와 함께하기 위해, 그녀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인연까지 품에 안기로.
비록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부모와 자식 간이지만, 릴리아와 아델라는 가족이었다.
“제가 생각할 게 좀 많아서 물러갔다 다시 와도 되겠습니까?”
“언제든 그렇게 하세요. 아, 아니, 하게.”
아리스는 뒤늦게 자신이 계속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라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 건 눈치챌 수 있었는데, 그 심경의 변화가 무엇인지 알 수 없던 그는 약간 불안했다.
아델라가 나가고 이저드는 공작저 밖까지 그녀를 배웅했다. 조금 더 따라가려고 했지만 아델라는 사양하며 이저드를 공작저로 돌려보내곤 혼자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남겨진 이저드는 다시 아리스가 머무는 방으로 돌아왔다.
“뭔가, 짐이 잘못한 것 같네.”
이저드 또한 심각한 표정이기에 아리스는 매우 긴장한 상태였다. 왠지 결혼 허락을 받으러 장인어른을 찾아간 기분이라고 할까. 아델라의 태도가 분명하지 않아 그는 더 헷갈렸다.
“딱히 잘못한 건 없지 않습니까? 좋아하는 걸 어떻게 숨겨요?”
의외로 헤이든이 위로에 나섰다. 돌아온 이저드의 표정도 조금 심각해 보였기 때문에 헤이든이 나서야 그나마 분위기가 풀어질 것 같았다.
“……전하.”
이저드가 뭔가 생각에 빠진 듯싶더니,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말하게.”
“전하께서 하사한 기사단장 직 말입니다.”
“아, 그거. 공이 하도 대답이 없어서 따로 원하는 게 있나 물으려 했는데.”
“아뇨. 받겠습니다.”
이저드의 하늘빛 눈동자가 굳건하게 빛났다. 그는 어떤 확신을 가진 모양이었다. 린다와 헤이든은 의외의 선택에 약간 놀란 듯 보였고 아리스의 표정에는 화색이 돌았다.
“잘 생각했어. 고맙네.”
“그 전에, 제가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무얼?”
아리스의 물음에 이저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 *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 생각하긴 했다.
아직 앞길이 창창한 릴리아에게도 지금과는 다른 미래가 펼쳐질 거라 어림짐작하고 있었다. 특히 릴리아에게 사랑이 찾아올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긴 했었다. 릴리아가 워낙 남성을 멀리해서 걱정되긴 했지만.
평소 남성을 멀리하던 릴리아는 다른 이들과도 필요 이상의 친분을 쌓지 않았다. 벨제프 자작에게 당한 기억 때문인지, 그녀는 예의를 차린 웃음 이상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그런 사람이 아리스에게는 점점 마음을 열었다.
아마, 아델라가 친근하게 대해서 심적으로 편해졌던 것이 계기가 된 것 같았다. 아델라와 릴리아의 사정을 들은 아리스가 둘을 많이 챙겨주었기도 하고.
그렇게 2년이 지난 후에는 아델라 없이도 유일하게 편히 대화를 나누는 관계가 되었다.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가 없었다.
‘왜 몰랐을까?’
릴리아에게 사랑이 찾아온다면, 아리스 이외에는 없었다. 그녀가 유일하게 마음을 놓고 대화할 수 있는 대상이 아델라를 제외하고는 아리스 뿐이었기 때문이다.
아델라가 그녀의 마음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것은 릴리아가 아델라 앞에서는 아리스에게 덤덤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델라 앞에서 그 어떤 티도 내지 않았다. 아리스를 향해 사랑하는 이를 보는 그런 눈빛은 한 번도 보인 적이 없었다.
‘나 때문이구나.’
마음 놓고 누군가를 좋아하지 못한 게.
아델라를 돌봐야 하니까. 아델라와 연이 끊어질까 두려워서. 혹은, 자신으로 인해 아델라와 아리스의 미래가 엉망이 될까 봐.
릴리아는 과부인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경향이 있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했다가 아델라가 욕을 먹는 건 아닐까. 자신 때문에 이상한 소문이 돌아, 아델라의 혼삿길이 막히는 것은 아닐까. 자신이 사랑할 사람이 자신과 만난다는 이유로 주변에 안 좋은 시선을 받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들 때문에, 릴리아의 행동은 항상 조심스러웠고 함부로 밖에 나가서 아델라 자랑도 하지 못했다.
“루!”
“아델라?”
아델라는 공작저를 나와 곧바로 루가 지내는 여관으로 향했다. 루는 일주일 전에 돌아와 지금은 펜베르크 성을 돌며 다른 도시에서 팔기 위한 물건들을 사들이는 중이라고 했다.
“나, 뭐 물어볼 거 있어.”
“응.”
“전에, 그, 어디더라? 어떤 들판인데 꽃밭으로 뒤덮였던 곳!”
“거기 그냥 이름 없는 동산인데.”
“혹시, 거기! 어디였는지 기억해?”
“기억하지. 왜? 가게?”
아델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루는 알겠다며 종이를 꺼내 무언가 적어 주려다가 멈췄다.
“응? 왜, 기억 안 나?”
“음, 아니야. 너 혼자 갈 거야?”
“아니, 어머니랑.”
“그냥 내가 마차를 붙여 주는 게 빠를 것 같아서. 어머니께 말해. 여기서 얼마 안 걸리니까, 잠시 나들이 다녀오자고.”
“아, 진짜? 잠시만! 어머니 모셔올게!”
“천천히 다녀와. 그러다 엎어져.”
아델라는 기쁜 표정으로 밖으로 나가다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그 꽃밭, 회귀가 시작되기 전의 기억인데.’
그녀가 말하던 꽃밭은 지난 생에서 루랑 자작가를 도망쳐서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본 곳이었다. 이번 생에는 그것마저 바뀌어 루와 떠돌던 일은 사라졌는데 루는 척하면, 척, 알아들었다.
아델라는 여관 주인과 마차에 관해 이야기하는 루를 돌아보았다. 루도 아델라의 시선을 느끼고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왜?’
그가 입 모양만으로 물었다. 하지만 아델라는 그런 루를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루는 모르는 게 없으니까, 대충 알아들은 건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던 아델라는 다시금 발을 돌렸다.
* * *
너른 들판에 형형색색의 꽃들이 끝이 보이지 않게 펼쳐져 있었다. 들판 위에 흐드러진 꽃밭은 너무 아름다워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공간 같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공간은 또 처음이라 릴리아는 연신 감탄사만 내뱉었다.
그녀의 모습에 아델라는 예전이 생각나 피식 웃었다.
아델라도 처음 이곳을 우연히 보게 되었을 때는 너무 아름다워 입만 벙긋거렸다. 꽃이 너무 예뻐서 그 안에 발도 못 붙였던 것도 생각났다.
“예쁘죠?”
“응, 응. 루는 정말 세상을 많이 아는구나. 너희가 아니었으면 이런 곳 평생 못 봤겠다, 나도.”
“다행이에요. 언젠가 꼭 보여드리고 싶었거든요.”
아델라는 꽃을 밟지 않으려 조심스럽게 꽃들 사이로 발을 내디뎠다. 신발 밑으로 사박사박 흙이 밟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먼저 앞장서서 릴리아를 이끌었다. 안쪽으로 천천히, 천천히 들어가니 어느새 만개한 꽃들 한복판이었다.
“제 소원은 다 이뤘어요.”
“응?”
“어머니가 사는 거, 이저드가 사는 거,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거. 제가 죽을 위험도, 어머니가 죽을 위험도 없어지는 거요. 그리고…….”
아델라가 빙그레 웃으며 릴리아를 돌아보았다.
“어머니와 함께 살고 어머니와 함께 즐겁게 지내고, 이렇게 나들이 가는 거. 그런 모든 일상이, 다 이루어졌어요.”
아델라는 릴리아의 손을 꼭 맞잡으며 말했다.
“그래서 행복해요.”
“나도, 나도 그래. 이런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단다.”
릴리아도 부드럽게 웃으며 아델라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어째선지, 아델라의 표정이 조금은 우울해 보였다.
“어머니도 저와 함께해서 행복했다면, 정말 다행이에요.”
“너는, 너는 나와 함께해서 행복했니? 괜찮았어?”
“그럼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데 안 행복할 리가 없잖아요.”
아델라가 배시시 웃자, 릴리아는 왜인지 마음이 울렁였다.
사랑하는 사람.
아델라와 릴리아의 사이가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둘은 알았다. 어린 아델라를 만나 자작가를 벗어나서 함께 하기까지 참, 어려운 길을 걸어왔다.
그래서 릴리아는 아델라를 놓을 수 없었고, 아델라도 릴리아를 놓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말씀드리는 건데…….”
하지만, 그래도. 놓아야 할 때는 놓아야 했다.
둘 다 각자의 길을 가야 할 때는 언제고 닥칠 거였다. 가족이라 하더라도, 평생 같이 살 수 없을 테니까.
“행복하세요. 어머니가, 아니, 릴리아라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최선을 다해 가세요.”
아델라의 표정은 평소와 같이 해맑았고 밝아 보였다.
릴리아는 아델라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전 언제나 어머니 편일 테니까. 그리고 어머니께서 아리스 님을 사랑한다고 해도, 어머니께서 재가하신다고 해도 우리 관계는 달라질 거 없어요. 전 어머니의 딸이고, 어머니는 제 어머니고.”
“어…… 그게, 어떻게…….”
릴리아의 표정은 아까와는 다르게 많이 당황한 듯 보였다.
“아니, 아니야. 아델라. 네가 뭔가 착각…… 아니야. 난 그분 안 좋아해. 그분도, 나를…….”
아델라는 빠르게 부정하는 릴리아의 손을 꼭 잡고 자신과 눈을 맞추게 했다. 릴리아의 눈동자가 심하게 떨렸다.
“전요, 제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했어요. 그래서 후회가 없어요. 어머니도 후회 없이 사셨으면 좋겠어요. 제 걱정도 우리 가문 걱정도, 아리스 님의 입장도 걱정하지 말고.”
아델라가 부드럽게 웃으며 릴리아를 꼭 껴안았다. 릴리아의 몸이 잘게 떨렸다.
“어머니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믿어주세요. 혼자 짐을 지려 하지 마세요. 그럼 제가, 그리고 어머니를 위하는 사람들이 슬퍼해요.”
아델라는 자신이 들었던 말을 그대로 릴리아에게 해 주었다.
혼자 짊어지려 하는 건 릴리아나 아델라나 똑같았다. 아델라는 그 마음을 알기 때문에 릴리아를 마음속 깊이 위로할 수 있었다. 릴리아의 등을 토닥이는 아델라의 손길이 그 어느 때보다 따뜻했다. 아이인 줄만 알았던 아델라의 손이 언제 그리 커진 건지.
“그리고 어머니가 생각하는 것보다 제 배경이 든든해요! 어머니를 지켜줄 수 있을 정도로! 물론, 아리스 님도요.”
“아델라, 미안하다. 미안해.”
“에잉, 왜요? 사랑이 죈가? 어머니가 아직 저를 아이로만 보는데. 저도 알 거 다 알고 다 컸거든요.”
아델라의 어깨를 힘껏 감싸 오는 릴리아를 보며 아델라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넌 나한테 아직 애거든? 아니, 네가 다 큰다 해도 나한테는 아이야.”
“맞아요. 그거 잊으시면 안 돼요. 무슨 일이 있어도 전 어머니 자식 맞아요. 알았죠?”
첫 만남부터 끊어지려야 끊어질 수 없는 사이였다.
피 한 방울 안 섞여 있었지만 릴리아는 어린 아델라를 보는 순간 느꼈다. 내가 지켜야 할 아이구나.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아이만은 살려야겠구나. 그런 직감이 들었다. 지금도 그런 마음이 달라진 건 아니었다.
다만, 아델라와 함께 자신도 행복해질 방법을 생각해 보기로 한 것이다. 아델라의 행복이 곧 릴리아의 행복이었고, 릴리아의 행복이 곧 아델라의 행복이었으니까.
이것이 둘만의 마지막 나들이라는 것을 직감해서인지 둘은 한참이나 꽃밭에 함께 머물렀다.
* * *
“오늘 무슨 날인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 아름다운 꽃밭을 아델라가 보여 준다 싶더니. 돌아온 펜베르크 성은 온 성안이 아름다운 불빛들로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평상시 펜베르크 성의 밤은 은은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정도였지, 이 정도로 불을 환하게 밝혀놓은 적은 처음이었다.
“으응? 펜베르크 성에 축제가 있었나요?”
“그런 소리 못 들었는데…….”
‘앗, 설마. 왕이 행차했다고?’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미하일 공작이 왕이 행차했다고 이런 걸 준비할 사람은 아니었다. 괜한 곳에 돈 안 쓰는 분이라.
‘아, 그럼…….’
아델라는 눈을 반짝이며 마차 밖을 보는 릴리아를 뚫어져라 보았다. 릴리아에게 오늘은 더없이 신기한 날일 것이다.
“응? 왜 그러니?”
릴리아가 아델라의 시선을 느끼고 의아하게 물었다.
이거 눈치 있게 빠져 줘야 하는 거야, 아니면 같이 가야 하는 거야? 아델라는 잠시 고민하다가 마차 앞에 있는 창문을 열었다. 그에 마부가 마차를 멈추고 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집 말고, 제스트윈 공작저로 가 주세요.”
“응?”
마부는 예, 라고 대답했고, 반면 릴리아는 의아한 표정으로 아델라를 보았다.
“이렇게까지 준비했는데, 차마 눈감아 줄 수가 없어서요.”
“어?”
역시 릴리아는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아델라는 릴리아가 걱정되긴 했지만, 어차피 벌어질 일이라면 빨리 아는 게 나았다. 릴리아가 아리스의 모든 사실을 알고도 그를 받아들일 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쨌든 상황은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마차는 펜베르크 성 3구역을 넘어, 2, 1구역, 그리고 심지어 공작가까지 한 번도 막히지 않고 달렸다.
‘너무 대놓고 준비하신 거 아닙니까?’
아델라는 신기하게 밖을 쳐다보는 릴리아를 잠시 보다가 그냥 자신도 이 상황을 즐기기로 했다. 왜냐하면 밖이 정말로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아델라와 릴리아가 성을 나가 있는 사이, 언제 이만큼 준비할 수 있었던 건지. 신기하기만 했다.
아델라는 펜베르크 성 야경이 이리 아름다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색도 각양각색이라, 아까 본 꽃밭을 그대로 건물들에 옮겨놓은 것 같았다.
‘이러고 벌써 반지까지 준비하신 건 아니겠지? 그럴 시간이 있었나?’
아델라는 아까 아리스를 너무 닦달했나 싶었다. 그냥 확인 차 물어본 건데, 초조해할 줄은 몰랐다.
‘나중에 소문나겠네. 전하께서 로맨티시스트라고.’
왠지 그런 소문이 나서 부끄러워할 아리스가 생각나 아델라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릴리아의 앞에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그녀는 죽도록 노력했다.
둘은 공작가에 도착해 천천히 마차에서 내렸다. 아주 당연하게도, 공작가 정문을 비롯해 정원, 공작가 건물들까지 멋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아델라는 열린 정문 앞을 기웃거리다가 릴리아의 등을 살포시 밀었다.
“으응?”
“가 보세요.”
“가 보라고? 공작저에?”
“네. 쭉― 빛을 따라 쭉 걸어가다 보면 선물이 나올 거예요.”
“아, 아니. 내가 공작저에 들어가도 되는 거니?”
아델라는 뿌듯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선물이기에 나 혼자 가래?”
“가 보면 알아요. 얼른, 얼른!”
릴리아는 아델라의 등쌀에 못 이겨 떨리는 걸음을 뗐다. 천천히 안쪽으로 향하는 릴리아의 뒷모습을 보며 아델라는 만감이 교차했다.
‘이거 왠지, 잘 키운 딸을 시집보내는 기분이야.’
분명 반대여야 할 텐데 말이다.
빛을 따라 걸어가는 릴리아를 한동안 쳐다보던 아델라도 걸음을 옮겼다. 빛이 향하는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이저드를 만나러.
‘음? 근데 기척이 안 느껴지네. 없으신가?’
아델라는 린다와 헤이든의 기척도 느껴보려 했지만,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엥? 아리스 님이 고백해야 하니까 다 숨어 계시느라 그런가?’
그녀는 익숙하게 이저드의 집무실이 있는 곳을 찾았지만, 아무리 기웃거려도 사람은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뭐야. 다 어디 간 거야?’
다들 고백 준비하러 간 거야?
이저드에게 할 말이 있었는데 정작 당사자가 없자, 아델라는 시무룩해졌다.
‘그냥 다시 돌아가야겠다. 기다리다 보면 어머니께서 정문으로 나오겠지, 뭐.’
라고 생각하며 그녀가 돌아본 곳에는 흐트러진 얼굴을 한 이저드가 서 있었다. 어디서 뛰어왔는지 그는 머리도 평소와 다르게 흐트러져 있었다.
“이저드!”
기쁜 마음에 이저드에게 다가간 아델라가 이저드의 하늘빛 눈동자를 마주 봤다. 그의 눈동자가 아주 약간 떨린 듯도 싶었다.
“왜 여기 있나?”
“예?”
“정문, 에서 못 봤나?”
“뭘요?”
그러고 보니, 이저드의 차림새도 심상치 않았다. 예복 아닌가, 저거. 평소보다 훨씬 단정하게 꾸민 이저드를 아델라는 이리저리 살폈다.
조금 흐트러지긴 했지만 앞머리까지 싹 넘기고 고정한 걸 보니 정말 엄청나게 꾸민 건데. 거기다 얼굴은 왜 저리 고와. 뭐 하셨나?
아델라는 또 유심히 이저드의 변화된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저드, 어디 파티가요? 아님, 중요한 자리? 아. 혹시, 전하께서 이저드까지 동원하셨어요?”
“그게 아니, 하…….”
이저드는 그제야 아델라가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쩐지 릴리아만 그 길에 나타나더라니.
덕분에 아리스를 부른 후, 이저드만 아델라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뛰어왔다.
“미안하네. 미리 말을 해 놨으면 좋았을 것을.”
“예? 뭘요?”
그는 잠시 주변을 돌아보다 깔끔하게 뒤로 넘긴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 후 그는 자신의 예복 웃옷을 벗어 아델라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아델라의 복장이 쌀쌀한 밤에 비해 추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델라는 그가 하는 양을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뭐 하시는 거지?’
훅, 하고 이저드의 향이 퍼져 나오는 그의 겉옷이 좋긴 했지만, 갑자기 자신에게 커다란 품의 옷을 덮어 주자 의아했다.
“나는 그대에게 예를 갖춰 정식으로 청혼해야 한다고 생각했네. 그런데…….”
이저드의 말에 아델라는 눈만 멀뚱멀뚱하게 떴다. 방금 뭘 들은 거지. 그녀는 아주 잠시 고민했다.
멀뚱히 서 있는 아델라의 앞에 그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우리에겐 이런 밤도 어울린다고 생각해. 그대와 내 만남이 여태 정해진 순서대로 흘러간 건 아니었으니까 말이야.”
이저드는 그녀의 한쪽 손을 잡고 부드럽게 웃었다.
‘응? 어? 뭐지? 나 잘못 들은 건가?’
어둠이 내린 주변은 어두웠고 그들을 비추는 건 달빛과 별빛뿐이었다. 이저드가 준비했던 아름다운 불빛들은 없었지만, 지금 이대로도 아주 아름다웠다.
그의 곁에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으며, 그녀의 곁에도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으니까.
“혹시, 설마……. 오늘 펜베르크 성 밝힌 거, 이저드예요?”
“난 그대가 눈치챘을 줄 알았는데.”
놀라지 말라고 대놓고 한 걸.
이저드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그저 웃음이 나왔다. 어떻게 보면 아델라답기도 했다.
“그럼, 지금! 청혼하려고요?!”
“그대가 허락한다면.”
아델라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듯 놀란 눈을 하고 이저드를 마주 보았다.
꿈인가? 생시인가?
그녀는 자신이 꿈을 꾸는 건가 하고 이저드와 눈높이를 맞추며 쪼그려 앉았다. 그러자, 이저드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대가 앉으면 어쩌나.”
청혼하려 한쪽 무릎을 꿇은 사내 앞에, 같이 쪼그려 앉는 여인이라니. 그는 아델라의 행동이 그저 사랑스러워서 웃음이 입가에서 떠나질 않았다.
아델라는 또 멀뚱히 그의 웃음기 어린 표정을 바라보았다. 현실성이 느껴지지 않는 아름다운 얼굴이 웃으며 청혼을 한단다. 그것도, 청혼을 위해 준비까지 철저하게 해서.
아델라는 아까 봤던 펜베르크 성의 전경을 떠올리며 웃는 이저드를 홀린 듯 보았다.
“해요, 하세요.”
“이 상태로?”
“네, 네!”
자신의 손을 잡고 일어설 생각이 없어 보이는 아델라의 모습이 귀여워 이저드는 체면을 차릴 수가 없었다.
조금 더 근사하고 멋있게 청혼을 하고 싶었는데. 하지만 그녀의 발그스름한 얼굴을 보니 그런 생각이 사라졌다.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떻겠는가. 아델라가 웃고 행복할 수만 있다면 그 무엇도 상관없었다.
“그전에, 그대한테 고백할 게 있네.”
“뭐요?”
“내가 수도에 가게 됐어.”
아델라는 약간 우울해 하는 이저드를 가까이서 바라보다가 씩 웃었다.
“우리 천생연분이 맞나 봐요. 어떻게 딱 이렇게 타이밍이 맞는지. 저도 수도에 갈 생각 때문에 이저드를 찾아온 거거든요.”
루의 말뜻이 이 뜻이었나. 아델라가 수도를 향할 일이 생기니, 이저드도 당연히 그녀를 따르게 될 것이라는.
이저드는 알고 있던 사실이라 놀랍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놀란 척했다. 아델라가 너무 기뻐했으니까. 잠시간 아델라의 기쁜 눈동자를 바라보던 이저드는 맞잡은 그녀의 왼손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수도에 가서도 그대와 함께 웃고, 걷고, 자고, 그대와 모든 걸 함께하고 싶어. 내 평생을 걸고 그대를 사랑하겠네.”
화려하진 않지만 단정한, 그를 닮은 푸른 보석이 박힌 반지를 아델라는 신기한 듯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런 건 또 언제 준비하신 걸까.
“나와 혼인해 주겠나?”
맞잡은 손을 통해 이저드가 약간은 긴장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물론, 아델라도 손에 땀이 날 지경으로 긴장하고 있어 둘 중 누구의 온기인지는 몰랐다.
아델라는 긴장감이 서린 하늘빛 눈동자를 마주 보다가 이내, 점점 눈가를 휘었다.
누구든 그의 얼굴을 보면 헤어 나올 수 없을 텐데. 그런 미모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앞에서는 한없이 부드러워지고 긴장하는 그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네. 좋아요. 전, 전 진짜 좋아요. 혼인해요. 해요, 우리.”
비록 아까와 같이 거창한 분위기도, 환하게 빛나는 밤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어떤 밤보다 기억에 남을 것이다.
달빛과 별빛으로만 수놓아진 하늘 아래에서 서로의 사랑을 약속한 날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들에게 앞으로 닥칠 상황들은 이 아름다웠던 밤을 가끔 까먹게도 하고, 착각하게도 할 테지만 완전히 사라지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다고 한들, 그들이 지나온 시간을 이길 수 있는 일들은 없었다.
그리고 또한, 아델라와 이저드의 의지를 꺾을 일도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살다 보면 또다시 거친 길을 가게 될 것이 분명했지만 아마, 그들은 또다시 원하는 길을 찾아갈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것 또한 그들에게는 일상이리라.
― 그녀는 호상이고 싶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