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권-2부 5장. 그녀는 호상이고 싶다 (14/17)

그녀는 호상이고 싶다 6

| 목 차 |

2부 5장. 그녀는 호상이고 싶다

에필로그

외전. 그 연인의 사정

외전. 그 후 그들은

2부 5장. 그녀는 호상이고 싶다

“좋은 아침이에요.”

이저드와의 대화 덕분에 더욱 상쾌해진 아델라는 휴게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런데 휴게실 안 분위기가 축 쳐져 있었다. 아델라의 밝은 표정과는 대비되는 분위기였다. 스웰라와 이브니아의 표정이 매우 좋지 못했다.

“어? 리지나 님께서 늦으시네요?”

세자궁 시녀들 대부분 늦장을 부린 적이 없었기에 의아한 마음으로 물은 건데, 분위기가 싸해졌다. 이브니아는 스웰라한테 눈치를 줬고 스웰라는 아델라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왜 그러세요?”

“아, 아니요. 리지나 님께서는 오늘 지병이 도져서 쓰러지셨대요.”

스웰라가 난감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고, 아델라는 일부러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며 눈을 키웠다.

“괜찮으시대요? 어떤 지병을 앓았기에 그런 일이…….”

“어릴 적부터 몸이 좀 약했다고 하더라고요. 의원을 불러 백방으로 치료 중이라는데, 차도가 없대요. 그래서 며칠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리지나에게 지병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아마 자기 가문에 불똥이 튈까 봐 미리 발을 뺀 거겠지. 대외적으로 그럴싸한 이유를 만들어서.

이제 슬슬 발을 빼는 가문들이 있을 거라는 걸 짐작하고 있어서 그리 놀랍지 않았다.

“그렇군요. 안타깝네요. 저희 오늘 문병이라도 가봐야 할까 봐요.”

“아. 병문안도 거절하셨대요. 리지나 님 몸이 너무 안 좋아서 나중에 왔으면 좋겠다네요.”

“어머……. 어떡해요.”

아델라는 안타까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리지나를 걱정하는 척했다.

“괜찮아지시기만을 바라야죠.”

스웰라도 그렇게 말하며 걱정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반면,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브니아는 이를 으득 갈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이가 갑자기 지병 때문에 쓰러졌다고 하니까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봐도 일이 잘못될 것을 염려해 발을 뺀 게 확실해 보였다. 그러니 이브니아가 속이 터질 수밖에. 그런 이브니아의 심정을 알면서도 아델라는 모른 척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브니아 님? 무슨, 근심 있으세요? 안색이 안 좋으시네요.”

“아, 아니요. 저도 리지나 님이 걱정되어…….”

억지로 웃는 이브니아의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아델라와 스웰라가 그런 이브니아를 빤히 보자, 그녀들의 시선에 부담을 느꼈는지 이브니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브니아도 자신이 지금 매우 억지로 웃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저, 전 잠시 화장실 좀.”

이브니아는 애써 티 내지 않으며 휴게실을 나갔다. 방을 나가려고 일어서는 그녀를 빤히 보던 스웰라와 아델라는 이브니아가 나가자 바로 긴장을 풀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리지나 님이 나간 것도 나간 건데, 두 분 다 표정이 별로여서요.”

아델라가 의아한 표정으로 스웰라를 쳐다보았고, 스웰라는 한숨을 푸욱 쉬며 조심스레 소파에 앉았다.

“이번 일이 위험하다고 판단돼서 빠지신 것 같아요.”

그건 옳은 판단이었다. 아직 많은 이들이 몰라서 문제였지. 왕궁은 위험한 곳이 맞았다. 특히 지금은 더.

“그렇군요. 어쩐지 어제까지 멀쩡하던 분이 갑자기 지병이 있다고 해서 놀랐어요.”

“저도요…….”

“그럼 며칠 지켜본다는 건 거짓말이고, 곧 시녀를 못 하겠다고 연락이 오겠네요. 지병이 심해서, 라던가.”

정확히는 왕궁 자체에 곧 폭풍이 몰아칠 것을 대비해서 미리 빠졌다는 말이 더 맞는 말일 테지만.

“정말 하루라도 조용한 날이 없네요. 폭풍이 몰아치는 것 같아요.”

스웰라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힘없이 말했다.

“그러게요. 저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상상 이상이라고 할까요.”

물론 아델라는 왕궁이 대충 어느 정도인지 케스너 후작 부인한테 들어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리고, 저…….”

아델라한테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뗀 스웰라는 말하기 망설여하며 뒷말을 흐렸다.

“네.”

그에 아델라는 부드럽게 대답하며 그녀가 입을 뗄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저……. 아까 안색이 별로라고 물어보셨잖아요.”

“예.”

“저는 곧 쫓겨날 것 같아요.”

“쫓겨나다니요? 왜요?”

“왕비 전하께서 시키신 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고, 지난번에 이저드 경께 하녀들의 숙소를 알려준 거로 완전히 왕비 전하의 눈 밖에 났거든요.”

스웰라는 애써 웃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자 아델라는 그녀의 곁에 다가가 앉았다.

“이저드 경께 접근하지 못한 건 저 때문인데…….”

“그게 실은, 저희한테 기회를 준다면서 아델라 님이 쓰러져 계실 때 이저드 경과 빨리 친해지라는 명령을 받았어요. 아델라 님보다 먼저.”

“저보다요?”

“예. 그렇지 않으면 귀족 사회에 다시는 발 못 붙일 줄 알라며 협박도 하셨고요.”

모튼이 왕비와 이야기를 잘 끝낸 것처럼 말해서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그 뒤에 왕궁 시녀들한테 또 이런 명령을 내렸을 줄은 몰랐다.

하긴, 모튼이 화를 냈다고 포기할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아델라나 이저드를 독살할 생각도 하지 않았겠지.

“왜 하필 저보다……? 저도 이저드 경과 그렇게 친하지 않은데.”

“친하지 않다니요. 이저드 경 혼자 왕비궁에 오신 거 보면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 할걸요?”

워낙 조용히 왕궁 생활을 하던 이저드였기에, 그때 그 행동은 더 주목받았다. 특히 세자궁에서 일하는 시녀들은 이저드의 변화를 가장 놀라워했다. 아델라와 이저드 사이의 흐르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뒤바뀐 걸 눈치챈 것도 그들이었다.

“그래서, 절 막으려고 왕비님께서 시녀들한테 그런 명령을 내린 건가요?”

“아무래도 그래 보여요. 세자 저하께서 아델라 님을 감싸셔서 왕비 전하께서는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았어요. 몇 번이고 아델라 님을 쫓아내야 한다고 소리치셨거든요. 저는 밖에서 들어서 소리치는 부분밖에 못 들었지만요.”

왕비가 그냥 지나칠 리 없을 거라 생각하긴 했다. 모튼의 결함을 운운하며 도발했는데, 이렇게 넘어간 게 이상했으니까.

왕비가 아델라한테 사과했다던 모튼의 말은 역시 입바른 말이었다. 아델라를 앞으로 계속 이용하기 위한 말뿐인 호의였다.

“절 쫓아내야 할 이유는요? 그런 말은 없었어요?”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아델라는 모튼한테 도움이 되면 되었지, 해가 되는 존재는 아니었다. 비슷하게 모튼의 편인 아델라와 레널드인데도 왕비가 둘을 대하는 태도는 약간 달랐다.

왕비는 레널드를 좋아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당장 그를 왕궁에서 쫓아낼 궁리를 하지는 않았다. 왜냐? 레널드의 신분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는 몇 년 동안 모튼의 편에서 최선을 다해 모튼을 도왔기 때문이다.

반면에, 아델라는 도무지 왜 그렇게 악착같이 쫓아내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델라 또한 표면적으로 모튼의 사람이라, 왕비가 이용하고 싶을 만큼 이용할 수 있는데 말이다.

무엇보다 현재, 이저드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 유일한 존재인 그녀는 이용할 가치가 충분했다. 그런데도 왕비는 굳이 그런 아델라를 배제하고 다른 시녀들을 억지로 이저드에게 붙여 그녀의 이용 가치마저 없애려 하고 있었다.

“저하의 앞길을 막을 거라며…… 그 뒤의 이야기는 못 들었어요. 저하께서 아델라 님이 없으면 안 된다며 왕비님의 말을 끊으셨거든요.”

‘앞길을 막을 만한 능력이 있어야 앞길을 막지.’

아델라는 왕비와 세자한테 위협조차 안 되는 위치였다. 왕궁에 이제 막 적응한 말단이 그들한테 무슨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설마, 진짜로…… 내가 한 말 때문에? 그게 날 쫓아내야 할 만큼 예민한 문제인가?’

이러니까 무심코 던졌던 말들이 점점 확신으로 바뀌는 기분이었다.

왕비가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모튼의 결함. 그리고 아델라가 무심코 내뱉었던, 이저드나 모튼이나 둘 다 왕의 자식이 아닌 거 아니냐고 했던 발언.

그런 말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뱅뱅 맴돌았다.

“이 사실을 세자 저하께서도 아세요?”

“아니요. 한 번만 더 저하께 들키면 왕궁에서 쫓겨나는 게 문제가 아니라 해를 가할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왕비는 모튼의 말에 따르는 척하며 다른 계획을 세우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시녀들의 태도가 전과 같으면 세자 저하께서 이상하게 여기는 건 시간문제일 텐데요?”

“저희도 그걸 걱정해서 이브니아 영애께서 물어봤는데…….”

“그런데요?”

“저하의 계획을 망치는 게 아니라 과정을 조금 수정하는 것뿐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저희는 이저드 경과 친해질 방도나 찾아보라면서요.”

“과정을 바꾸는 거라면……, 저겠네요.”

굳이 아델라보다 먼저, 라고 언급한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델라보다 먼저 이저드의 마음을 다른 시녀가 사로잡으면 아델라는 이 계획에서 필요 없어지게 된다. 아델라의 자리를 다른 영애가 대신하면 아델라를 처리하기 훨씬 쉬워진다.

왕비는 아델라가 모튼의 계획에 껴서 자신의 앞에 알짱거리는 게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이상하네. 이저드를 없애는 거에 집착하는 것도 모자라, 별 볼 일 없는 나까지 제거하려 하다니?’

왕비와 모튼의 이목을 잡는 게 아델라의 일이긴 했다. 하지만 이건 정말 예상치도 못한 대어를 낚은 기분이었다. 자신이 이렇게 주목받을 줄은 몰랐다.

“정황상 그래요. 두 분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잘 안 들려서 모르겠지만, 세자 저하께서 세우신 계획 자체에 반대하는 것 같지는 않았어요. 대화를 끝내고 나온 표정이 나쁘지 않으셨거든요.”

모튼의 계획에 왕비가 반대하지는 않았다는 건, 모튼의 계획안에서 언젠가 아델라가 버려지긴 할 거라는 이야기였다.

지금 이렇게 왕비를 흥분하게 만드는 존재는 왕궁 안에 딱 둘이었다. 이저드와 아델라.

그 둘을 모두 왕궁에서 쫓아내거나 없애는 계획을 짰을 테니 왕비의 화가 그나마 누그러진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왕비는 그 ‘언젠가’를 못 참고 아델라를 더 빨리 내치려고 수를 쓰려던 것이다.

“그렇군요……. 근데 쫓겨나신다는 건, 왕비 전하의 계획이 틀어져서 그런 건가요?”

“네. 맞아요. 전 사실 이저드 경께서 아델라 님을 구하러 와 주실 때부터 실패할 걸 확신했어요. 그래도 왕비 전하의 명이니까 어쩔 수 없었죠.”

명령을 받은 스웰라는 리지나와 이브니아에게 등 떠밀려 이저드 주변을 맴돌았다. 하지만 이저드는 여전히 흔들리지 않고 꿋꿋했다.

왕비가 아무리 세자궁 시녀들을 닦달한다고 한들 이저드한테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실제로 왕비의 계획은 보기 좋게 망했다. 아델라가 복귀했을 때, 이저드의 행동이 극명히 달라진 것을 보면 정말로 완벽한 실패였다.

“예상대로 저희는 시킨 일을 성공시키지 못했고, 엊그제 전부 불려갔어요. 같은 세자궁 소속이라고 아델라 님을 감싸주는 거냐며 화를 내고 때리셨죠.”

“때려요? 맞았어요? 어딜요?”

아델라는 놀란 눈으로 스웰라의 안색을 살폈다.

“머리를……. 지금은 괜찮아요.”

“아니, 어떻게 귀족 영애들께 손을 댈 수가 있어요?”

아델라한테 손을 올릴 때부터 알아봤긴 하지만, 자기 밑의 사람들한테 함부로 대하는 건 왕이나 왕비나 비슷했다. 아델라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스웰라의 머리를 이리저리 살폈다.

“이저드 경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진짜 너무하네요.”

아델라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하자, 스웰라가 옅게 웃었다.

“그동안 말씀 못 드린 건 죄송해요. 아델라 님이 복귀하면 전부 말씀 드리려고 했는데, 이저드 경께서 계속 함께 계셔서…….”

“예? 아휴, 아니에요. 이렇게 말해주시는 게 어디예요? 저 같으면 왕비 전하 무서워서 말도 못 했을 거예요.”

곧 쫓겨날 위기인데도 미소 짓는 스웰라를 아델라는 안타깝게 보았다. 그녀는 스웰라한테 오히려 조금 미안한 기분이었다. 스웰라를 위하는 척 웃고 있었지만, 자신도 스웰라를 이용한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말이다.

“어차피 쫓겨나면 왕비 전하는 평생 안 볼 텐데요, 뭘요.”

이런 걸 보면 그녀 역시 은근 담력이 센 것도 같았다. 아니면 어차피 쫓겨날 거,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된 걸까.

첫 만남과 비교해 보면 스웰라가 많이 의연해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아델라 님을 돕고 싶었어요. 언제나 조심하라고, 꼭 말씀 드리고 싶었어요. 왕비 전하의 계획은 실패했지만, 이대로 포기할 것 같지 않아요.”

“네. 그렇겠죠. 그렇게 절 싫어하시는데. 조심할게요. 정말, 정말로 너무 감사드려요.”

“아니에요. 아델라 님 없었으면 전 레널드 경과의 오해를 풀지도 못한 채 쫓겨났을 거예요. 정말 감사해요.”

아델라는 애써 웃는 스웰라의 손을 꼭 마주 잡아 주며 도닥였다.

“스웰라 님께는 정말 죄송해요. 그저 저희 오라버니를 돕고 싶어 오셨을 텐데, 오히려 쫓겨나게 만들어서…….”

“그게 아델라 님 탓인가요? 제가 고집을 부려서 왕비 전하의 세력으로 들어간 탓이죠.”

스웰라는 과거 자신의 철없던 행동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자신 때문에 아버지가 다른 가문에 고개를 숙인 걸 생각하면 속이 울렁거렸다.

레널드를 좋아하는 마음은 전과 같았지만, 스웰라는 그에 대한 마음을 어느 정도 정리한 후였다. 그가 자신을 절대 보지 않는다는 직접 겪어보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자, 드디어 주변이 보였다. 자신을 위해 준 사람들, 걱정해 준 사람들도 전부. 그리고 자신이 가문에 얼마나 해를 끼쳤는지까지.

“오히려 지금이 더 마음이 편해요. 왕궁 들어왔을 때는 잘해야지, 모두와 잘 지내야지,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지, 이런 생각 때문에 항상 긴장했거든요.”

“스웰라 님…….”

부드럽게 미소 짓는 스웰라의 눈매가 왜인지 슬퍼 보였다. 아델라는 잠시 그녀를 빤히 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만일 왕궁에서 진짜로 쫓겨나게 된다면요. 그러면, 가족 분들과 여행은 어떠세요? 바람 쐬는 게 왕궁에서의 안 좋은 기억을 잊는 데에 도움이 될 거예요. 스웰라 님을 보며 힘드셨을 가족 분들도요.”

아델라는 최대한 돌려 이야기하며 예쁘게 웃었다.

스웰라가 왕궁에서 나가는 게 가문과 그녀를 위해 더 나은 걸지도 몰랐다. 그리고 이건 어쩌면 하늘에서 준 기회일 수도 있었다. 폭풍이 몰아치기 전에 얼른 발을 빼고 왕궁에서 나가라는 무언의 계시일지도.

“서쪽이나 남쪽, 혹은 제국도 괜찮겠네요. 제 친한 친구한테 들었는데 제국은 아름다운 곳이 정말 많대요.”

“제 심정과 가족들까지 헤아려 주셔서 감사해요. 부모님께 말씀드려 봐야겠어요.”

“네, 네. 참고로 동쪽은 전쟁이 자주 일어난다니까 조심하세요.”

사실은 동쪽에서 군사들이 올라올 거라 피해가라는 뜻이었지만, 직접 말할 수 없어서 에둘러 표현했다.

아델라가 스웰라를 도울 방법은 이 정도 밖에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녀는 차라리 아예 왕비의 세력에서 빠져나오는 게 훨씬 나았다. 그리고 거사를 치르는 동안 멀리 여행을 떠나 있는 게 스웰라의 가문이 살아남을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적어도 왕이 바뀐 후, 변명할 기회는 생기니까 말이다.

“예, 명심할게요.”

웃으며 아델라를 마주 보는 스웰라에게 아델라도 그저 웃어 주었다. 그녀를 향해 웃어 주는 것 말고는 해줄 게 없었다.

‘지금은 힘들겠지만, 언젠가 이 상황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날이 올 거예요.’

왕궁에서 쫓겨나는 상황에 놓인 사람한테 차마 이 말은 해줄 수 없어, 그녀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 * *

“오라버니. 잠깐 나 좀 봐.”

“응?”

스웰라와 나눈 이야기 중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아델라는 그 이후 인적이 드문 곳으로 레널드를 따로 불렀다.

“왜?”

“나한테 비밀로 하는 거 없지?”

아델라가 레널드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비밀? 무슨?”

레널드의 어리둥절한 표정은 진심으로 보였다. 아니면 그새 연기력이 늘었다거나.

“저하와 왕비 전하 사이 일, 잘 마무리된 거 맞지?”

“어. 잘 해결됐어. 처음에는 화를 내며 싸우셨지만 나중에 나올 때는 두 분 다 침착하셨어. 저하께서 잘 이야기하시니 왕비 전하께서도 저하의 의중을 이해하셨다고.”

“이야기하는 거 직접 들었어? 무슨 대화 나누는지?”

혹시나 레널드가 자신을 속이고 있나 싶어 아델라는 그를 계속 떠봤다.

“듣진 못했지. 저하께서 나한테 사과하시고 네 몸이 나아질 때까지 모든 원조를 해 주신다고 하셨어. 저하께서 왕비 전하께 신신당부 드렸다고도 말했고.”

‘그럼 모튼의 계획을 오라버니도 잘 모른다는 말인데…….’

평소에 둘이 자주 이런 이야기 나누지 않나? 그런데 왜 이번에는 말하지 않은 걸까? 아델라는 눈을 도르륵 굴리다가 싱긋 웃었다.

“그래? 그럼 내가 너무 걱정이 많았나 봐. 저하께서 그렇게 말하셔도 왕비 전하께서 날 해하실 줄 알았거든. 오해했네, 내가.”

레널드의 궁금증을 유도한 대답이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레널드는 그냥 세자궁으로 돌아가려는 아델라의 어깨를 잡았다.

“오해? 무슨 오해?”

걸렸구나.

아델라는 웃음을 얼른 갈무리하고 망설이는 표정으로 우물쭈물했다.

“아니,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어디서 무슨 말 들었어?”

“아니……. 왕비 전하께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날 죽이려고 하실 텐데, 너무 쉽게 물러서서. 저하께서 자세한 이야기도 안 하시고.”

“뭐? 그거 다 오해였다니까? 왕비님은 네가 저하의 명을 받고 있는지도 몰랐대.”

그 말을 진짜 믿나?

레널드가 모튼을 너무 믿고 있어서 탈이었다. 아델라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려다가 참았다. 레널드가 모튼을 의심하게 흔들 생각이었지, 레널드를 지적할 생각으로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 아니었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내가 왕비 전하께 몹쓸 말을 했거든. 이대로 죽는 줄 알고, 화가 나서.”

“……무슨, 말? 난 그런 소리는 못 들었는데.”

“오라버니도 들으면……. 왕비 전하께서 쉽게 물러설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걸?”

언젠가 사고를 칠 것 같더라니.

레널드는 아델라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이 무서웠다. 그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뭐, 뭐라고 말했냐니까?”

“막무가내로 이저드 경을 노리시기에, 왜 그런지 너무 궁금해서…….”

“궁금해서?”

레널드는 어느 때보다 진심으로 심각하게 아델라의 말을 귀담아듣고 있었다.

“혹시, 이저드 경이 왕위에 오를 수 있을 만한 무언가가 있나 해서.”

“그래서? 빨리 말해. 뭔데 그렇게 뜸 들여?”

아델라답지 않게 이야기를 끄는 자세가 영 이상했다. 진짜 사고를 치긴 쳤나 보다. 레널드 앞에서 항상 당당했던 아델라가 눈치를 보는 것을 보니.

“저하께 치명적인 약점이 있냐고 물어봤지. 이저드한테 왕위를 뺏길 만한 결함 같은 거?”

“뭐어?! 그, 그걸 왕비님께 직접 물어봤다고?”

레널드가 놀라서 펄쩍 뛰자, 아델라는 고개만 끄덕이고 입을 앙다물었다. 보나마나 레널드한테 한소리 들을 게 뻔했다.

“너…… 너, 미쳤어? 제정신이야? 아니, 아니, 어떻게 거기서 그런 걸 물어?”

“난 그냥, 죽을 것 같으니까 너무 억울하고 궁금해서 그랬지.”

아델라는 천연덕스럽게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누가 안 죽을 줄 알았나.”

뒤이은 아델라의 뻔뻔한 대답에 레널드는 이마를 짚었다.

아델라의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오다 못해 아예 없어졌을 줄은 미처 몰랐다. 왕궁에 무작정 들어왔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래서 말했잖아. 왕비 전하께서 날 당장 안 죽이고 참는 게 이상하다고. 저하께서 막는다고 해도 막힐 화가 아닐 텐데.”

“넌 그걸 말이라고!”

레널드가 버럭 화를 내자 아델라는 잔뜩 몸을 움츠렸다. 자신이 잘못한 건 아는 모양이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레널드가 보기에 그래 보였던 거지만. 아델라는 최대한 약한 척, 반성하는 척을 연기했다.

레널드는 끓어오르는 화를 잠재우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건 자칫 하다가는 아델라뿐만 아니라 자신과 심지어 가문에까지 불똥이 떨어질 위험이 있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뭐야? 넌 죽을 만한 발언을 했고, 왕비 전하께서는 널 무조건 죽일 생각일 텐데 저하와 대화로 풀었다는 게 이상하다?”

“어. 분명, 왕비 전하의 화가 풀릴 만한 거래를 한 거야. 그래서 오라버니도 의심했지.”

“나? 난 왜?”

“저하께서 계획한 걸 오라버니가 모를 리 없다고 생각해서. 세자 저하께서 말 안 했을 리가 없잖아.”

“나 아니야. 들은 거 없어. 결백해.”

레널드는 그렇게 대답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고 보니, 모튼에게는 걱정 말라고만 들었지 왕비와 나눴던 대화 내용은 듣지 못했다. 앞으로 이저드와 아델라에 대해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묻는다거나, 이렇게 하라는 명령도 요즘에는 없었다.

“어쨌든, 그게 아니면 왕비 전하께서 멈춘 게 이상하잖아.”

“그래. 왕족을 모독한 건데, 죽이고도 남지.”

아델라는 레널드가 더, 더 의심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고개를 열심히 끄덕여 줬다.

“맞아.”

“넌 지금 터진 일에 자각이 없는 거야, 아니면 모른 척하는 거야? 심각한 문젠데, ‘맞아’? ‘맞아’로 끝날 것 같아?”

“동의한 것도 죄야? 나도 이 문제가 심각한 거 알거든? 내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바로 죽을 텐데.”

“네 이용가치? 이저드?”

“응. 저하께서 날 옆에 두고 계신 이유가 그거잖아. 이저드 경의 약점 알아 오기.”

모튼이 바라는 게 과연 그뿐인지는 알 수 없었다.

스웰라와의 대화를 돌이켜 보면 확실히 그 이상의 계획이 있어 왕비가 잠잠해진 것 같았다. 스웰라가 조심하라고 한 것도 마음에 걸렸다.

“약점, 약점…….”

레널드도 그 부분이 찝찝한지, 여러 번 단어를 되뇌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왕족을 모함한 것과 같은 그녀를 고작 이저드의 약점을 캐내야 한다는 이유로 왕비가 내버려두진 않았을 것 같다고.

“하……. 너 그냥 지금 당장 왕궁에서 나가라. 그게 낫겠어. 역시 널 왕궁에 두는 게 아니었어.”

“여기까지 왔는데 나가라고? 이대로 나가면 밖에서 암살자들한테 쓱싹 처리될 걸? 여기까지 왔는데 발 뺀다고 해 봐. 저하께서 가만있겠어? 왕비 전하는?”

“아오…….”

레널드는 단정하게 정리해 놨던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왕궁에 들어온 이래 최고의 위기를 맞은 것 같았다.

“오라버니. 만약에 이 위기를 벗어날 방법이 있다면, 내 계획에 동참할 거야?”

“당연히 그런 방법이 있으면 하지!”

“저하의 뜻에 반하는 계획이라도?”

그가 잠시 주춤했다. 이 말은 왜인지, 아델라와 모튼 중에 선택하라는 말처럼 들렸다.

“무슨 계획인데? 들어보고 생각할게.”

“그냥, 날 믿고 따라주면 안 되나? 저하께는 잘하잖아. 설마 내가 가문에 해가 되는 행동을 하겠어?”

‘지금 했잖아!’

레널드는 목 끝까지 나오려는 말을 안으로 쑥 집어넣었다. 어떻게 저런 뻔뻔한 정신력을 가질 수가 있지?

“저하랑 너랑 같아? 저하는 내 주군이야. 아니, 가문을 위해서면 너야말로 가주인 날 따라야 하는 거 아냐?”

“오라버니가 가는 길이 너무 가시밭길이라, 난 좀 편한 길로 안내해 줄까 했지.”

편한 길까지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거사 후, 레널드가 죽는 일은 막을 수 있겠지. 지금의 그는 모튼의 최측근이기에 최소 감옥행이었다. 레널드가 좋은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죽길 바라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릴리아와 아델라는 아직 벨제프 가문에 속해 있었다. 둘이 제명당한 뒤에 망하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벨제프 가문은 이번 거사로 망하면 안 됐다. 심지어 모튼의 최측근으로 소문이 나서 망한다? 더욱 안 될 일이었다.

그랬다가 이저드나 아델라를 도운 이들에게 불똥이라도 튀면 큰일이었다. 때문에 미리미리 모튼과 레널드 사이를 갈라놓을 필요가 있었다.

“지금 너 때문에 그 가시밭길이 지옥길이 됐거든?”

“그러니까 만회하겠다고.”

“어떻게?”

“음…….”

생각이 있어서 뜸을 들이는 건지, 생각이 없는데 있는 척하느라 시간을 끄는 건지.

레널드는 아델라를 불안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잘.”

“자알? 잘 한다고 해결되면 너도나도 번성하게?”

참고 참았지만, 속에서 터져 나오는 비꼼은 참을 수가 없었다. 레널드는 아델라가 너무 철없어 보였다.

“이것만 확실히 하자. 오라버니는 우리 가문이 망하길 바라, 아니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살아남길 바라?”

“굳이 따지자면 당연히 후자지. 내가 여기까지 오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그치? 그 노력이 한순간 물거품 되는 건 싫지?”

“당연하지!”

안 그래도 아델라 때문에 거의 코앞까지 온 부기사단장 자리가 물거품처럼 사라질 위기였다. 그는 권력만은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알았어. 오라버니의 의견은 잘 들었어.”

가문과 자신의 권력이 걸려 있다면 레널드는 모튼한테 등을 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아델라가 싱긋 웃자, 레널드는 답답하다는 듯이 불만을 터뜨렸다.

“너 지금 내 복장 터뜨리려고 하는 거지? 그게 끝이야? 계획은?”

“아니, 뭐. 왕비 전하와 세자 저하가 뭘 계획하는지 눈곱만큼도 모르는데, 벌써 계획이 나올 리가.”

“그건…….”

“오라버니한테 의견을 물어보지 않은 걸 보면, 반드시 숨겨야 할 일이었나 봐. 무슨 계획인지는 몰라도.”

아델라는 여유롭게 다시 세자궁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만약 작정하신 거면…… 나 같은 일개 시녀는 피해가기 힘들겠지?”

아델라는 아까부터 계속 모튼이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투로 말했다. 그런 그녀의 말에 레널드의 마음이 점점 흔들렸다. 듣고 보니 마음에 걸리는 점들이 하나둘 생각나기 시작했다.

“너 아까는 위기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다며.”

“있긴 한데, 세자 저하의 뜻을 거역해야 한다니까?”

정말로 뭐가 있는지 아델라는 여유를 부렸다. 그녀의 가벼운 발걸음을 멍하니 보던 레널드는 머리를 다시 헝클어뜨렸다.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리는 와중에, 그는 쉬이 결론을 내지 못했다. 여기서 잘못 판단했다가는 왕궁에서의 삶이 송두리째 뽑혀나가게 생겼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역시, 왕궁 최고의 권력자를 배신하는 일은 할 수 없었다.

“내, 내가, 사정해 볼게. 너 하나 봐주는 거, 저하께는 손쉬운 일이니까.”

“그래 보든가.”

“너 만약에, 내가 저하께 부탁해서 왕궁을 나가게 되면 나가야 한다? 알았지? 뒤는 내가 봐줄 테니까.”

“그것도― 그래 보든가.”

초조한 레널드와는 다르게 아델라는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이걸로 레널드가 모튼을 일방적으로 믿는 경향은 조금 줄어들 것이다. 아마 자신도 모르게 불신이 자라날 테지. 모튼은 아델라를 궁 밖으로 못 나가게 할 거고, 레널드는 그에 큰 불안감을 느낄 테니까.

* * *

아델라의 예상대로, 리지나는 병이 심해졌다는 이유로 결국 시녀 일을 그만두었다.

아마 앞으로도 리지나처럼 무슨 이유든지 만들어서 빠지는 이들이 하나둘 늘어날 것이다. 부디 티 나지 않게 빠져 줬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모튼과의 사이가 흔들리길 바랐던 레널드는 최근에 계속 표정이 어두웠다.

“무슨 일 있어?”

라고 물으면, 레널드는 아델라의 눈치를 보다 고개를 젓기 일쑤였다. 아무래도 모튼한테 아델라에 관해 이야기를 했다가 단박에 거절당하거나 혼난 모양이었다. 그 틈을 타 아델라는 레널드를 신경 써 주는 척, 몇 번 그렇게 말을 걸었다.

그랬더니.

“……역시 세상에 믿을 사람은 가족밖에 없다. 그 말이 맞아.”

이러는 게 아닌가.

아델라는 닭살 돋는 말 하지 말라며 그에게 핀잔을 줬다. 그런데도 레널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넋 놓은 표정을 지었다.

아마 지금쯤 머릿속에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 것이다. 원래 한 번 의심이 시작되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부풀어 오르는 법이니까.

레널드가 충격에 빠져 있거나 말거나 아델라는 이저드와 함께하는 시간을 더 늘렸다. 이저드와 웃으며 대화하고 한 번은 식사도 함께했다.

그 덕인지 둘의 소문은 왕궁 안에 빠르게 퍼졌다. 약간 기다렸다는 듯이 빠르게 퍼진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아델라는 왕비와 모튼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보기 위해서 일단 모른 척했다.

둘의 소문과는 대비되게, 모튼에 대한 이상한 소문은 표면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다. 하녀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대화가 오갔을 뿐이다.

“그거 아세요?”

“뭘 말인가?”

아델라는 이저드와 세자궁으로 가는 길에 주변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저어기, 저기 정원에서 한밤중에 만나 밀회를 즐겼대요. 누가 키스하는 걸 봤다나?”

아델라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정작 하고 싶어도 못해서 답답한데, 염장을 지르나 싶었다.

“밀회는 자주 하니 할 말이 없지만, 키스는 억울하군.”

“제 말이요.”

아델라의 뚱한 표정에 이저드는 크게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아델라의 표정이 그의 앞에서 너무 잘 드러나서 문제였다. 그러니까 그의 심장에 큰 무리가 갔다.

이렇게 함께 걷고 있고, 대화하고, 눈을 맞추고 있는데도 계속 잡아 두고 싶었다. 저 표정을 자신만 봤으면 좋겠어서.

거사만 아니면 감정을 참지 않아도 될 텐데.

“이러다 제가 이저드 침실까지 찾아 들어갔다고 헛된 소문도 나겠어요.”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충분히.”

“실제로 만들어 버릴까요?”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복장 터지게 이상한 소문이 나는 것보다야 진짜 그런 짓을 하고 소문이 나는 게 덜 억울했다.

왕궁에 와서 입맞춤도 못 했는데, 무슨 소문은 벌써 할 거 다 했다는 둥,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둥, 그런 소문이 쫙 돌았다.

“그러지 않는 게 좋겠네.”

아델라의 눈빛이 이글이글 빛나는 것을 빤히 내려다보던 이저드가 웃으며 말했다.

“왜요. 오랜만에 이저드랑 같은 침대에서 자 보고 좋네요.”

“그대가 날 굳건히 믿어 주는 건 기쁘지만, 내 밑바닥을 시험할 셈이 아니라면 안 그러는 게 좋을 거야.”

“이저드의 밑바닥이요?”

이 기분, 왠지 한 번 겪어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전적으로 이저드를 믿어 오는 그녀의 신뢰가 이저드는 기쁘면서도 곤란했던 적이 있었다.

전생에, 그녀와 한 침대를 쓸 때 겪었던 감정이었다.

이저드는 또랑또랑하게 뜬 아델라의 눈을 보며 난감하게 웃었다.

“인내심 말이네. 나라고 그대를 안고 싶지 않을 리가.”

정식으로 교제와 약혼을 거쳐 결혼한 후로 미뤄두고 있는 게 얼마나 많은 줄, 그녀는 알까.

아델라 못지않게 그 역시 그녀와 대화를 하다가도, 그녀의 얼굴을 보다가도, 불쑥 충동이 올라오곤 했다. 당장 그녀를 안고 싶고, 입 맞추고 싶고, 닿고 싶었다. 온종일 붙어 있어도 성에 차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말하시면…….”

아델라의 입가가 씰룩이는 걸 보니, 기쁜 기분 반, 장난치고 싶은 기분 반인 것 같았다. 그녀의 말을 짐작한 이저드가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해 보지 말게.”

“그 말 하려던 거 아니에요. 지금 껴안고 싶다고요.”

“그것도 안 돼.”

이저드는 한 치의 스킨십도 허용하지 않고 먼저 걸음을 빨리했고, 아델라는 뒤에서 아쉽다는 듯이 그를 따랐다.

“그런데, 모튼이 바라는 게 그저 이런 추문뿐일까요? 추문으로 쫓아내기에는 약한데.”

그건 이저드도 동의했다.

아델라의 나이가 어리다는 점이 있지만, 귀족 사회에서 아델라의 나이는 연애를 못 할 나이는 아니었다. 미성년자를 첩으로 들이는 이들도 은근 많았다.

게다가 이저드와 아델라는 둘 다 미혼이었다. 그런 둘이 연애를 한다고 해서 문제될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당연하게도, 왕궁에서 쫓겨날 문제도 아니었다.

“어차피 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 아무래도 상관없긴 한데, 궁금하긴 하네요. 잔머리를 어떻게 굴렸을지.”

아델라는 어깨를 으쓱이며 이저드의 옆에 쪼르르 붙어 걸었다. 아무려면 어떤가. 마음껏 설쳐 보라지.

그대로 역풍을 맞을 테니까.

* * *

“이야. 축하해, 아델라 양.”

오늘 모튼의 기분이 유독 더 좋아 보였다. 아델라를 집무실에 부른 그는 그녀가 들어오자마자 손뼉을 쳐 줬다. 그에 아델라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난 아델라 양이 이렇게 잘 해낼 줄 몰랐는데. 이저드와 연인 사이라고 해도 믿겠어?”

‘연인 사이’에서 아델라는 뜨끔했다. 실제 연인 사이 맞는데.

“나 모르게 그런 일은 언제 다 한 거야? 그대, 마음먹으면 정말 무섭게 성장하는 사람이군?”

그런 일은 도대체 뭘까.

아델라는 혹시 소문에 관해 이야기하는 건가 싶어 눈만 이리저리 굴렸다. 그 소문의 출처가 세자궁과 왕비궁 시녀나 시종이라고 의심되는데, 모른 척 이야기를 꺼내는 게 우습지도 않았다.

실제로 스웰라가 떠나기 전, 시녀들 사이에서 이상한 소문이 돈다고 귀띔해 줬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그런 일이요?”

“그래. 이저드랑 사이가 많이 진전됐다며.”

“진전은 됐죠. 전보다는 편하게 대화를 나누고, 전보다 잘 웃으시고. 그런데 약점은 글쎄요. 아직 안 보이셔서…….”

아델라는 모튼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히 말했다.

“아냐, 아냐. 충―분해. 아주.”

‘예전에는 약점을 캐내라고 그러더니, 왜 지금은 충분하대? 아직 아무것도 안 했구먼.’

아델라는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모튼은 마치, 이미 이저드의 약점을 쥐고 있는 승리자처럼 의기양양했다.

“저, 근데, 친해진 뒤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약점도 안 보이고, 저와 이저드 경 사이에 소문도 이상하게 나면…….”

이미 소문은 이상하게 퍼져 나갔지만, 아델라는 그 사실을 모르는 척 순진한 얼굴로 고민했다.

“아아, 그건 걱정 마. 내가 다 책임지지. 아델라 양이 이렇게 열심히 해 줬는데, 그대 하나 책임지지 못 하겠나.”

책임지긴. 이용하고 버릴 생각이면서 말은 잘한다.

“그럼 전, 저하만 믿고 계속 이저드 경과 친해지려 노력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레널드 경보다 그대의 포부가 훨씬 크군.”

레널드와 비교하는 것을 보니, 요즘 모튼과 레널드 사이에 문제가 생긴 게 맞나 보다.

“감사합니다.”

모튼이 뿌듯한 표정으로 나가보라고 전했고, 아델라는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을 나왔다. 아델라가 문을 닫고 나오기 전에 슬쩍 본 모튼의 눈빛이 싹 굳어 가는 게 보였다.

역시 아델라를 안심시켜 방심하게 하려 그녀 앞에서 일부러 웃어 준 거였다.

* * *

그리고 모튼이 꾸미던 일은, 거사가 실행되기 며칠 전에 터졌다.

그날은 찬란한 태양 빛을 받으며 잠에서 깬 날이었다.

아델라는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깨는 게 왕궁에서의 유일한 낙 중 하나였다. 요즘 내내 햇볕이 따스하게 내리쬐어 아침 창밖 풍경이 볼만했다.

싱그러운 아침 공기에 아델라는 그날따라 일찍 눈이 떠졌다. 덕분에 간단한 식사는 물론 티타임도 가질 수 있었다. 창가에 앉아 오랜만에 바깥 풍경을 즐기고 있는데, 안 좋은 예감이 든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저 멀리서 느껴지는 기척들 때문이었다. 숙소로 향해 오는 사람들의 기척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것도 꽤 무서운 기세로 빠르게.

‘안 좋은 예감은 거의 맞더라.’

그들의 기척이 아델라의 방으로 정확하게 향했다. 아델라는 가만히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속으로 숫자를 세며.

‘다섯, 넷, 셋, 둘, 하나.’

똑똑.

숫자 세는 걸 끝냄과 동시에 아델라의 방문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델라 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안 된다고 하면 쳐들어올 기세였다. 어차피 아델라에게는 선택권이란 게 없었다.

“예.”

아델라는 차분히 창문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델라의 방 안으로 들어온 이들의 숫자는 꽤 많았다. 처음 보는 얼굴의 시녀들과 시종, 심지어 붉은 망토를 두른 기사들까지. 왜 이렇게 많은 수를 동원해서 왔는지 알 길이 없었다.

‘기사들이 왕궁 안에서 망토를 두르는 경우는 극히 드문데…….’

힐끗 살펴본 망토는 금색 실로 자수가 새겨져 있었다. 어떤 문양이 새겨져 있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누구시죠?”

아델라는 그들 중 가장 앞에 선 시녀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다른 시녀들과는 다르게 어디서 많이 본 느낌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아델라 님. 전…….”

“볼란 백작 부인, 맞죠?”

“예.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그녀는 맨 처음, 아델라가 이 왕궁에 들어와 세자궁으로 배치되기 전에 만났던 사람이었다. 신입 시녀들한테 시녀의 업무에 대해 설명해 주고 안내를 해 주었던 사람이었다.

그때 들은 대로라면 볼란 백작 부인은 외궁 시녀들을 총괄하는 사람이었다.

‘외궁을 관리하는 사람이 여긴 왜?’

점점 더 알 수 없는 상황에 아델라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렇게 묻자, 볼란 백작 부인은 아델라에게 깊이 고개 숙였다. 그녀만이 아니라 함께 온 시녀, 시종, 기사들까지 아델라한테 고개를 숙였다.

“오늘 전하를 모실 영광을 누리게 되셨습니다. 준비를 하셔야 해서 부득이하게 아침부터 모시러 오게 되었습니다.”

아델라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눈만 깜박였다. 왕궁에 들어와서 그녀는 처음으로 어처구니가 없어 멍을 때렸다. 살면서 이토록 어이없고 황당한 일을 겪을 줄이야. 전생에 이저드의 약혼녀가 되라는 때보다 더 황당한 상황이었다.

‘왕? 왕의 시중을 들라고? 아침부터? 미쳤……?’

아침부터 쳐들어왔다 했더니, 이런 이유로?

아델라는 그제야 기사들이 두른 망토에 새겨진 자수가 왕의 인장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았다. 망토에 금색으로 수놓은 게 이상하다 싶긴 했는데, 왕을 보필하는 기사들이었어?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데리고 가거라.”

아델라가 대답도 안 하고 말없이 서 있자, 가장 앞에 선 볼란 백작 부인이 다른 시녀들한테 눈짓했다. 아델라는 그들한테 양팔이 잡혔다.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억울하게 연행당하는 기분이었다.

“잠깐, 잠깐만요!”

팍, 하고 아델라가 강하게 뿌리치자 나름 단단히 잡고 있던 시녀들의 팔이 풀렸다. 시녀들은 아델라의 단 한 번의 몸부림에 나가떨어진 게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아델라는 순간 아차 싶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뜬금없이 왕의 시중을 들게 생겼는데 그런 상황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전하께서요? 절 어떻게 아시고요?”

왕과 직접 대면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그나마 스쳐 지나가듯 본 건 그때 그 끔찍한 경기장이 처음이었다.

“경기장에서 세자 저하의 곁에 계셨지요. 그때부터 눈여겨봤다고 합니다. 너무 어여쁘셔서.”

그때 왕의 눈은 텅 비어 있었고 아델라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잠시 모튼과 이저드를 흘겨보는 것 같았으나 아델라한테 시선이 머문 적은 없었다.

관심 밖이던 아델라가 갑자기 왕의 눈에 들었다니? 이걸 믿으라고 하는 소리인가?

‘왕비 짓인가?’

그런 게 아니면 이 상황이 말이 안 됐다.

“전 세자궁의 시녀입니다. 혹, 이 일은 세자 저하의 뜻이기도 합니까?”

아델라가 최대한 마음을 가다듬고 묻자, 시녀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예.”

‘뭐야? 모튼도 알아? 그럼 둘 다 꾸민 짓이야? 왜? 왕한테 날 보내서 얻을 게 뭐라고. 이저드가 왕의 여자를 건드렸다, 그런 거로 몰아가려고?’

이러면 반대가 되는 게 아닌가? 왕이 또 파렴치하게 남의 연인, 그것도 한참 어린 아이를 건드렸다고 퍼질 텐데?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조용히 저희를 따르면, 아델라 님께는 어떤 해도 없을 것입니다.”

말에서 강한 협박이 느껴졌다. 이미 시중을 드는 것부터가 해인데, 여기서 뭐 더 해될 게 없다는 건지. 아델라는 속이 배배 꼬이려는 것을 참고, 시녀들한테 순순히 붙들려 주었다.

‘나야 틈을 봐서 도망갈 수는 있겠는데, 이 사실을 오라버니가 알까 모르겠네.’

기사나 시종들과 시녀들의 경계는 아델라의 생각보다 너무 느슨한 편이었다. 잠시 한눈팔 시간만 만든다면 충분히 도망칠 수 있었다.

게다가 최악의 상황이 온다면 아군들보다 아델라가 먼저 통로를 쓰면 됐다. 중앙 홀이라 사람들 눈에 띈다는 점이 문제지만, 어차피 통로도 확인해 봐야 하니까 이참에 겸사겸사 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레널드가 좀 마음에 걸렸다. 이 사실을 알면 어떻게 나올지……. 아델라는 도망치더라도 레널드나 모튼의 반응은 보고 사라지자고 생각했다.

* * *

레널드는 아침 일찍부터 어제 밀린 서류를 정리 중이었다.

원래 기사단장이나 부기사단장이 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부기사단장은 새벽부터 왕한테 불려 갔고 기사단장은 요즘 통 일찍 출근하는 법이 없었다. 기사단장은 자기 서류까지 레널드와 부기사단장한테 미루며 밖으로만 나돌았다.

가뜩이나 골치 아픈 일도 많아서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서류 정리까지 하려니까 레널드는 머리가 부서질 것 같았다.

그런 와중에 더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렸으니. 당연하게도 아델라와 관련된 일이었다. 요 며칠 최고로 자신의 골머리를 썩이는 주범이었다.

“레널드 경! 레널드 경!”

레널드가 급하게 뛰어오는 기사단원을 서류를 정리하던 퀭한 눈으로 보았다.

“큰일! 아니, 아니죠. 제가 이 소식을 전하기 전에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요.”

“뭡니까?”

레널드는 피곤한 표정으로 심드렁하게 물었다.

“경의 동생 말입니다.”

“제 동생이요?”

아델라의 이야기가 나오자, 레널드는 반사적으로 인상을 구겼다. 워낙 작은 걸로도 꼬투리를 잡으려고 드는 이들이 있어 예민한 반응이 나왔다. 기사단원은 그런 레널드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실례되는 질문인지 압니다만, 동생분을 왕궁에 데리고 오신 게…… 전하께 잘 보이려는 목적은 아니시죠?”

그의 물음에 레널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델라가 왕궁에 들어온 거랑 자신이 왕한테 잘 보이는 거랑 무슨 상관이라는 말인가.

“아니죠? 역시 그렇죠? 아무리 레널드 경이 권, 아니, 가문을 위해 뭐든 한다고 해도 설마 동생까지 바칠 리가 없죠. 그렇죠?”

“무슨 소립니까?”

레널드가 불쾌한 듯 표정을 팍 구겼다. 레널드는 기사단원이 아침부터 자신을 비꼬려고 찾아온 거로 오해했다. 그에 남자는 허둥지둥 본론을 꺼냈다.

“아니, 저, 방금 시녀들이 지내는 숙소에 다녀왔는데……. 아, 오해는 마세요. 저 그 주변에 일이 있어서…….”

아무도 안 물어봤는데, 남자가 놀라서 먼저 변명한 것은 그전에도 몇 번 사사로이 시녀들을 만나고 다녀서 경고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널드는 전혀 상관이 없는 듯 그를 빤히 보았다.

“시녀 숙소에 갔는데요?”

“아! 갔는데!”

남자는 급히 정신이 돌아온 듯 빠르게 아까 본 상황을 설명했다.

“아델라 양이 잡혀 가는 것 같던데요. 시녀들이 아델라 양 옆에 이렇게 딱 끼고 데리고 가는 걸 봤습니다.”

남자는 팔짱 끼는 흉내를 내며 말했다.

“아델라가 확실합니까?”

“예. 사람들한테 둘러싸여 있었지만 얼굴은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어요. 둘러싼 사람들이 외궁 시녀들과 시종들, 그리고 전하의 호위 기사들이었습니다.”

“……예?”

아침부터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레널드는 쥐고 있던 펜을 책상 위로 떨어뜨렸다.

“보통 그런 식으로 귀족 영애를 데려가는 건 거의…… 그런, 상황 밖에 없잖습니까. 그래서 혹시나 레널드 경도 아시나 하고…….”

남자는 하얗게 변하는 레널드의 안색을 살피며 그의 눈치를 보았다. 평소 흐트러진 모습을 잘 보이지 않는 레널드가 딱 보기에도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어디, 어디로 갔는데요?”

“외궁 쪽이었던 것 같은데요? 아델라 양을 태운 마차가 그쪽으로…….”

벌떡!

남자의 이야기가 다 끝나기도 전에, 레널드는 지체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널드의 표정이 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질려 갔다. 레널드가 급하게 방을 나갔고, 방에는 남자만 덩그러니 남았다.

“어! 레널드 경! 서류!”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방 밖으로 나온 남자는 망연자실하게 허공을 보았다. 레널드가 온데간데없이 벌써 사라졌기 때문이다.

* * *

“경, 외궁으로 가십니까?”

기사단 건물을 빠져나와 말을 타려던 레널드를 누군가가 불렀다. 레널드는 순간 느껴지는 압박감에 경계 태세를 갖추며 자신을 부른 사람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이저드가 서 있었다.

‘언제부터 저기 있었지?’

이저드가 다가오는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자신이 너무 급했던 탓일까? 꽤 가까운 거리에 이저드가 있었는데, 저곳에 서 있는지도 몰랐다.

이저드의 표정은 평소와 같이 흔들림 없었지만 분위기가 왜인지 평소보다 훨씬 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예. 아델라가……. 아, 경! 세자 저하께 제 말씀 좀!”

레널드는 뒤늦게 자신이 혼자 외궁에 가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 냈다. 그래서 그는 이저드한테 모튼을 불러와 달라고 부탁한 뒤, 그동안 자신이 먼저 가 시간을 끌고 있으려 했다.

그런데, 레널드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이저드가 다른 말에 올라탔다.

“제가 외궁으로 가서 시간을 끌겠습니다. 레널드 경은 세자 저하께 가 보십시오.”

“네? 어, 예?! 왜 이저드 경이? 제가 가겠습니다!”

“제가 가야 할 겁니다. 저하께 가 보십시오.”

레널드가 이저드의 앞을 막았지만, 그는 동요하지 않고 레널드를 피해 고삐를 잡았다.

이저드의 태도가 너무 확고해 레널드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저드의 당연해 보이는 모습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상했지만, 레널드는 여기서 이런 실랑이를 벌일 시간이 없었다. 이저드가 아델라한테 단단히 빠진 것 같다더니, 그게 사실이라 저러는 건가 싶었다.

“빨리 가 보시죠. 저도 최대한 시간을 끌어 보겠습니다.”

“예? 아, 예!”

레널드는 어리둥절하게 대답했고, 레널드의 대답을 들은 이저드는 곧바로 말을 몰고 사라졌다.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 정도로 아델라를 좋아했나?’

멀리 사라지는 이저드를 눈으로 쫓던 레널드는 곧 정신을 차리고 세자궁으로 향했다.

* * *

세자궁에 도착한 레널드는 이저드가 왜 자신이 아델라한테 가야 한다고 했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저하! 아침부터 찾아온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경이 이렇게 급하게 뛰어온 적도 오랜만이군. 무슨 일이지?”

이제 막 침실에서 나오던 모튼이 급하게 뛰어와 한쪽 무릎을 꿇는 레널드를 의아하게 보았다.

“아델라가! 아니, 아델라를 도와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레널드가 간절한 눈빛으로 모튼을 보았다. 모튼은 그런 그를 지그시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데 그러지?”

“아델라가 외궁으로 잡혀갔습니다. 이 사태를 막아줄 분은 저하뿐이십니다.”

레널드의 외침에 모튼은 아주 잠시 동요를 보였다가 금방 표정을 갈무리했다. 하지만 그가 잠시 동요한 것은 예정보다 일이 빨리 진행됐기 때문이었다.

왕비가 어지간히도 아델라를 빨리 치우고 싶었던 모양이다. 모튼은 아델라가 아직 쓸모 있어서 지켜본 건데 말이다.

모튼은 팔짱을 끼고 고민하는 척 자기 턱을 쓸었다.

“이저드 경은?”

“예? 이저드 경은 왜……?”

이 상황에서 이저드의 행방을 묻는 게 이상했지만, 레널드는 사실대로 답했다.

“먼저 외궁에 갔습니다.”

“경보다 먼저?”

“예.”

“그렇군.”

모튼은 새어 나오는 미소를 숨기기 위해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이저드가 자기 뜻대로 움직이니, 그 희열을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레널드 앞에서 맘껏 웃을 수는 없었다. 레널드는 이 계획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널드는 그가 웃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챘다. 모튼이 나름 숨긴다고 입가를 가렸지만, 웃고 있는 눈은 가려지지 않았다. 급해 죽겠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저리 웃고 있으니 마음이 언짢았다.

‘설마 이 상황을 알고 계셨던 건가?’

그럼 이저드도 알고 있었던 걸까?

아까 이저드의 반응으로 보건데, 이저드는 어느 정도 뭔가를 짐작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너무 확고하게 자신이 외궁에 가야 한다고 말했으니까 말이다.

“우리도 가지. 앞장서.”

고갯짓을 하는 모튼의 표정에는 여유가 묻어 나왔다.

“예!”

자리에서 일어선 레널드는 힘차게 대답했지만,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분명 모튼이 무언가 수를 쓴 것 같은데, 자신은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

레널드는 얼마 전에 아델라와 나눈 대화가 떠올라 석연치 않았다.

‘오라버니한테 의견을 물어보지 않은 걸 보면, 반드시 숨겨야 할 일이었나 봐. 무슨 계획인지는 몰라도.’

특히 아델라가 거의 마지막에 했던 그 말이 강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아델라를 왕궁에서 내보내 달라고 할 때, 인상을 쓰며 레널드를 설득하던 모튼의 모습도 떠올랐다.

레널드는 앞서 걸으며 복잡한 머리를 휘휘 저었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이 일은 나중에 물어보자.’

모튼의 계획이었다면 언젠가 제게 꼭 말씀해 주시겠지, 그렇게 믿었다. 아직까지 레널드는 모튼에 대한 믿음이 아주 조금은 남아 있었다.

* * *

“철저한 사람들.”

아델라는 욕실 문 앞에 서서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혼자 씻겠다고 난리를 피웠더니 시녀들은 겉에 입은 드레스만은 기어코 벗겨서 아델라를 욕실로 집어넣었다. 갈아입을 옷과 함께.

그런데 갈아입을 옷의 상태를 보고 있자니 그냥 지금 입은 속치마가 나을 정도였다. 하다못해 지금 입고 있는 얇은 드레스는 그래도 살이 비치는 재질은 아니었으니까.

“이거 어디서 봤던…… 아.”

전생에 이저드와 처음으로 한 침대를 쓰던 날, 이것과 비슷한 옷 같지도 않은 옷을 입은 적이 있었다. 그때도 부끄럽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위기감이 들거나 그렇진 않았는데.

아델라는 시녀들이 준 옷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물이 받아져 있는 욕조에 휙, 하니 던졌다.

‘이제 어쩐담.’

빠져나갈 곳이라고는 커튼이 쳐진 커다란 전면 창뿐인데, 창문을 깨지 않는 이상 나갈 수 없었다. 창문을 깨면 당연히 소리가 나니 탈출은 불가능했다.

아니, 근데 욕실에 전면 창이 한 벽을 차지하는 곳은 또 처음 봤다. 저렇게 커다랗게 창을 달아 놓으면 뭐가 좋은 걸까? 겨울에 엄청 춥겠네, 그런 생각만 들었다.

‘저 유리를 맨손으로 깨는 건 무리고. 씻고 나가서 기회를 노려야 하나?’

첨벙, 첨벙.

아델라는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갈까 고민하며 욕조 옆에 쪼그려 앉아 손으로 물을 첨벙였다. 씻는 척이라도 하며 시간을 끌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밖이 이상하게 소란스러웠다. 웅웅거리며 밖의 대화 소리가 욕실에 퍼지는 걸 보면, 무슨 소란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아델라는 조심히 문을 열고 얼굴을 밖으로 뺐다.

“아델라 님! 지금 나오시면 안 돼요!”

‘왜죠?’

아델라는 욕실 문 앞을 철벽처럼 막아선 시녀들을 멀뚱히 올려다보았다. 소란의 중심지를 자세히 보니, 방문 앞에서 누군가가 볼란 백작 부인과 말씨름 중이었다.

“전 시키는 대로 하는 거라니까요?”

“어디서요? 어디서 시켜요? 전 그런 말 못 들었습니다.”

“아가씨께서요.”

“그러니까, 어느 아가씨요!”

아델라는 시녀들 사이로 요리조리 상황을 살폈다. 문에 가려 밖에 있는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실랑이를 벌이는 저 목소리만은 잘 알고 있었다.

“앗! 저!”

둘의 싸움이 더 커지기 전에 아델라가 냉큼 손을 들었다.

그러자 안에 있던 시녀들을 포함해서 밖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아델라한테 향했다. 물론 그중 시종들과 기사들은 아델라의 옷차림에 얼른 시선을 내렸다.

레이디의 속 드레스 차림은 속옷만 입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런 모습을 보는 건 정말 무례한 일이었기에 모두 시선을 내린 거였다.

“헉! 아델라 님! 옷!”

“아? 아, 네. 갈아입을 옷이 젖어서요! 잠시만요. 제 옷 입고 나올게요.”

욕조에 푹 담가 놓은 저 천 쪼가리가 옷이라고 불릴 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시녀들이 가져간 자신의 드레스를 뺏어 든 아델라는 욕실로 들어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드레스를 빼앗긴 시녀들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아델라가 사라진 욕실 문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욕실 문이 열리고 아델라가 상쾌한 표정으로 나왔다.

“그, 저분이 들고 계신 거요. 그거 제가 시킨 거예요.”

“예?”

볼란 백작 부인과 말싸움을 한 주인공은 하녀복 차림의 린다였다. 아델라와 린다는 찰나의 순간 시선을 교환했다.

“어, 언제요?”

볼란 백작 부인은 적잖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여러분들이 오시기 전에요. 출출해서 요깃거리를 부탁했거든요. 숙소에 있을 때 부탁했는데, 외궁까지 전달됐나 보네요. 먹으면 안 되는 건가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린다가 다과를 들고 있기에 그런 척 뻔뻔하게 말을 맞춘 것이었다.

볼란 백작 부인은 린다를 위아래로 훑다가 천천히 길을 터 줬다. 린다는 이미 주목받고 있던 터라 최대한 조용히 걸음을 뗐다. 시선도 한껏 내린 그녀는 천천히 티 테이블에 다과를 내려놓았다.

“그럼, 씻는 건 다 드시고 난 다음에 하죠. 드시는 동안 전하를 모실 때 주의해야 할 사항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아델라는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티 테이블에 가서 앉았다. 왠지 린다와 함께 이 공간에 있으니 마음이 든든해지는 기분이었다. 린다가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볼란 백작 부인이 주의 사항을 설명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아델라는 오직 린다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했을 뿐이다.

“여차하면 제가 데리고 튈까 했는데, 그럴 필요 없겠네요.”

린다가 마지막 다과 접시를 내려놓으며 씩 웃었다. 아델라는 그런 린다를 의아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린다는 아델라와 눈을 잠시 맞췄다가 방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걸렸다.

그에 아델라는 곧, 린다가 왜 그런 말을 하고 웃었는지 알 수 있었다. 밖이 또 소란스러워졌다. 큰 소리가 난 건 아니었지만, 기사단원들의 목소리가 여러 번 들렸다.

“밖에 무슨 일이죠?”

볼란 백작 부인도 밖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시녀들한테 물었다. 서로 눈치를 보던 시녀 중 한 명이 방문을 열고 밖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리고 그녀는 곧 시종이나 기사들이나 너 나 할 것 없이 한 곳으로 시선이 쏠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의 시선 끝에는 한 사내가 서 있었다.

하늘을 담아 놓은 것 같은 청명한 눈동자를 지닌 수려한 미모의 남성이었다. 시녀는 그를 난생처음 봤지만, 단번에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이저드 제스트윈.

궁에서 그를 모르는 여인은 없었다. 하도 유명해서 소문이 거짓된 줄로만 알았는데 지금 보니, 그의 외모를 찬양하는 소문은 결코 과장된 게 아니었다.

“저, 저, 저기, 저, 부인.”

이저드를 발견한 시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볼란 백작 부인을 불렀다.

“왜 그러시죠?”

시녀의 반응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백작 부인도 방 밖으로 나왔다. 그녀도 시녀와 마찬가지로 이저드가 온 것을 확인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지만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백작 부인의 얼굴에 잠시 미소가 걸린 것처럼 보였다. 아주 짧은 순간에 사라졌지만, 분명 아델라는 백작 부인의 미소를 보았다.

‘왜 웃지? 누가 왔는데?’

이상하게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셨네요. 건투를 빕니다.”

아델라가 문을 응시하고 있을 때, 린다가 아델라에게만 들리게 작게 중얼거렸다.

“예?”

“전 정체를 숨겨야 하니까, 이만 갈게요. 힘내세요.”

작게 속삭이는 린다의 얼굴이 멀어진다 싶더니, 그녀는 진짜로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린다는 방문을 나서서 잠시 한곳을 응시하다가 사람들이 눈치채기도 전에 사라졌다. 정말 감쪽같이 사라져서 아델라는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기척이 얼마나 미약한지, 바로 옆에 있던 시녀도 린다가 물러가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물론, 그들이 한곳에 시선이 팔린 것도 한몫했다.

‘린다 경이 저렇게까지 말한다는 건…….’

거기까지 생각한 아델라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서 말씀하시죠. 이곳에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기사들은 이저드 앞을 막고 있었고, 아델라는 모두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서 빼꼼 얼굴을 방 밖으로 내밀었다.

“이저드 경?”

모두 단단히 굳어서 이저드를 밀어내지도 그렇다고 들여보내지도 못하고 곤란해 하고 있을 때, 아델라의 목소리가 그들 사이를 뚫고 울렸다.

“아델라 님, 언제……!”

시녀들이 놀라서 외쳤다.

그들은 아델라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자신들의 옆까지 올 때까지 알지 못했다. 심지어 기사단원이라는 이들도 아델라의 기척을 읽지 못할 정도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눈을 크게 키웠다.

그리고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시녀와 시종들이 얼른 이저드한테서 아델라를 숨기려 그녀를 에워쌌다.

그러나 그들의 대처보다 아델라와 이저드의 행동이 한 발 더 빨랐다. 아델라는 시종들 사이를 쏙 빠져나와 이저드에게 향했고, 이저드는 자신을 막고 있는 기사들이 아델라한테 시선을 돌리는 사이를 파고들었다.

이저드의 손이 아델라의 팔을 단단히 잡아챘다. 모든 게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 뛰어나다는 왕실 정예 기사단원들도 손 놓고 이저드가 아델라를 등 뒤로 숨기는 걸 보고만 있어야 했다.

“이게 무슨, 무슨 짓입니까?!”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볼란 백작 부인이 큰 소리로 화를 냈다.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이저드는 차분하게, 그러나 무섭게 그들을 압박했다.

“지금 경께서 무슨 짓을 하신 줄 아는 겁니까?! 감히, 전하의 여자를 건드리신 겁니다!”

볼란 백작 부인은 물러서지 않고 소리쳤다.

“아델라 님이 현재 전하와 합방을 했습니까?”

“예?”

질문을 받을 줄 몰랐던 백작 부인이 멍하니 되묻기만 했다.

“그럼, 후궁의 첩지라거나 어떤 교지가 내려왔습니까?”

“그건 곧!”

“곧, 이라는 말씀은 아직 아니라는 말이군요. 그럼 아델라 님께 약혼자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은 받으셨습니까?”

그곳에서 그에 대한 답을 해 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이런 질문을 받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들은 당연하게도 아델라한테 약혼자가 없다는 전제 하에 일을 진행했다.

왕비뿐만 아니라 레널드와 모튼에게까지도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듣지 못했다. 애초에 그들은 아델라에 관한 이야기는 약혼자 관련이 아니더라도 아예 한 톨도 듣지 못했다.

그들은 그저 왕비가 아델라를 잡아 두라고 해서 잡아 두는 것뿐이었다. 특히 시녀와 시종들은 자신이 모시는 왕비의 말을 충실히 따른 죄밖에 없었다.

“확인하지 않으셨군요. 그럼 다시 묻겠습니다. 아델라 님이 전하의 여자라고 불릴 부분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저드의 목소리는 더없이 차분했지만, 이저드를 잘 알고 있는 아델라는 그의 목소리에 감정이 실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담긴 감정은 분노에 가까웠다.

그가 지금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다는 건 아델라만 알아챌 수 있었다. 그게 기쁘면서도, 걱정됐다.

“처, 첩지는 전하께 승은을 입으면 당연히 나올 것이고……!”

예상치 못한 쏘아붙임에 볼란 백작 부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왕이 자기 여자로 만들겠다, 그러면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거 아닌가?

왕궁 사람들은 그걸 아주 당연하게 생각했다. 과정 따위야 나중에 처리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왕이 계속 그런 식으로 해왔으니까. 오히려 절차를 운운하며 반박하는 이저드가 그들은 이상하게 느껴졌다.

“아델라 님께 약혼자가 있으면 어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여기 계신 분들은 전하의 평판이 땅에 떨어지길 바라는 겁니까?”

이제는 주워 담을 평판도 없었지만, 이들이 누구를 거론했을 때 제일 동요할지 알기에 그는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볼란 백작 부인은 잠시 주춤했다가 다시 허리를 폈다. 이저드의 태도가 그들을 당황하게 하기에는 충분했지만, 그들의 뒤에는 왕비라는 든든한 조력자가 있었다.

“이저드 경. 아무리 아델라 영애를 은애한다고 하여도 여기가 어디라고 거짓을 고하십니까? 지금 아델라 영애를 빼내기 위해 하시는 말씀인 걸 제가 모를 것 같습니까? 그 말 책임지실 수 있습니까? 아델라 영애께 약혼자가 있다는 말은…….”

아니, 왜 당사자한테 안 물어보고……? 너무 확신하는 거 아닌가? 아델라는 이저드 등 뒤에서 황당함에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저…… 있는데.”

아델라가 볼란 백작 부인의 말을 끊으며 우물쭈물 말했다.

“……예?”

“이저드 경 말씀이 맞습니다. 전 미래를 약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주변이 아까보다 더욱 술렁였다.

아델라가 이저드의 편을 듦으로써 이저드를 위험에 빠뜨리기는커녕, 왕한테 또 안 좋은 소문만 붙기 딱 좋은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잡아만 두면 알아서 한다던 왕비는 깜깜무소식이었고, 상황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들이 당황스러워할 만도 했다.

“그…….”

이번에야말로 볼란 백작 부인의 말문이 제대로 막혔다. 예정에 없던 일이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난감해 보였다. 백작 부인은 조금 텀을 두고 입을 열었다.

“근데 왜 따라오신 겁니까? 아까 말씀을 해 주셨어야죠.”

‘그걸 왜 내 탓으로? 자기들이 막 데리고 온 거면서?’

다른 건 모르겠지만, 이들이 손발이 맞지 않는다는 것은 알겠다. 꼭 중요 사항 숙지도 없이 갑자기 일에 투입된 사람들처럼. 여기까지 오기 위해 2년을 준비한 아델라는 속으로 기가 막혔지만, 아닌 척 눈을 내리깔며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게…….”

아델라는 뒤쪽에서 느껴지는 기척을 의식하며 최대한 말을 아꼈다. 아델라는 아까부터 외궁과 가까워지는 두 기척을 계속 신경 쓰고 있었다.

이저드의 말에 동조하며 시간을 끌려고 한 것도 그 이유였다. 의도야 어쨌든 모튼과 레널드가 오면 이 상황이 끝나긴 할 테니까.

“아델라 양 보고 뭐라 하지 말지. 나 때문이니까.”

그리고 잠시 후, 아델라와 이저드를 그 상황에서 구해 줄 모튼이 등장했다.

하지만 이 다음 상황이 아주 이상하게 흘러갔다.

“저하!”

볼란 백작 부인이야말로 구세주를 만난 듯 표정이 밝아졌다. 너무 티 나는 거 아닌가.

아델라가 사람들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는 사이, 모튼은 아델라와 이저드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아델라 양은 나한테 피해가 갈까 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고 그대들을 따른 거야.”

‘뭔 소리지? 자기가 허락해 놓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세자의 허락 없이 이들이 아델라를 막무가내로 데리고 온 것처럼 들렸다. 왕비의 명을 받고 움직인 시녀와 시종, 왕의 호위 기사들한테는 약간 황당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당황스럽게 만든 건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여기서 화룡점정은 모튼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아델라의 팔을 잡아채 자신의 곁에 서게 한 후 내뱉은 말이었다.

“아델라 양이 아직 어려 성인이 된 후에 말하려고 했는데…….”

‘응? 이거, 음, 뉘앙스 좀 이상하지 않아?’

아델라는 우악스럽게 자신을 잡아챈 모튼을 의아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거기 있던 모든 사람의 표정이 아델라와 비슷했다.

“그녀와 미래를 약속한 이가 나네. 아델라 양이 성인이 된 후에 첩의 교지를 내리려고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군. 전하께는 내 따로 이야기하지.”

모튼이 아델라를 보며 말했지만, 아델라는 눈만 멀뚱히 깜박였다.

‘뭐라는 거야.’

모튼의 말을 이해 못 해서 이러는 게 아니었다. 진심으로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건가,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델라를 자신의 여인이라 주장하여 모튼이 얻을 게 뭔지 아델라는 잠시 생각했다.

그가 언젠가 사고를 칠 것 같긴 했다. 그 사고가 이런 사고로 이어질 줄은 몰랐지만, 뭔가 이상한 일을 꾸미고 있을 거라는 건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이저드와 친해지길 종용하고 알아내라고 한 이저드의 약점을 못 알아냈더니 괜찮다고 하질 않나. 이저드와 아델라의 소문이 빠르게 퍼진 것도 이상했다.

전부 이상한 점뿐이라 그랬을까.

아델라와 이저드는 생각보다 침착하게 이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저드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은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오히려 놀란 이들은 아델라와 이저드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었다. 레널드까지. 레널드는 경악에 가까운 표정으로 아델라와 모튼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사고 회로가 멈출 정도로 충격적인 발언이긴 했다.

“예, 예?”

“못 알아들었나? 내 여자라고.”

전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라 얼이 나갔다. 그나마 가까스로 정신을 붙잡고 물었던 볼란 백작 부인마저 다시 넋을 놓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그녀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럴 만했다. 모튼이 무슨 이상한 짓을 저지를 걸 예상하던 아델라조차도 당황스럽긴 했으니까.

모튼은 주변을 훑어보다가 그대로 아델라를 데리고 외궁 밖으로 나왔다. 아델라와 모튼을 따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충격에 쉽사리 발을 못 뗐기 때문이다.

외궁 밖에는 후궁들도 이 흥미진진한 상황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녀들은 아델라와 모튼이 밖으로 나오자 후다닥 사라졌다.

“뭐 하시는 겁니까?”

외궁과 어느 정도 거리를 벌렸을 때, 모튼의 손에서 팔을 빼며 아델라가 인상을 구겼다.

“크……! 크흐흐.”

모튼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이 상황이 매우 우습다는 표정으로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저드가 아델라한테 이리 빠졌을 줄은 몰랐는데.

사실, 그의 계획에서는 아직 이 일이 일어나기엔 이른 시기였다. 모튼이 생각하기에는 아델라와 이저드 사이가 왕의 명을 거역할 정도로 가까운 게 아니었고, 이저드가 이 함정에 빠질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

왕비가 독단적으로 계획을 앞당겨서 어쩔 수 없이 묵과했지만, 이런 수확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왕이 바란다는데, 그 앞을 막아선다라…….’

만일 실제로 왕이 아델라를 원했다면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다. 뭐, 이저드의 무모한 행동 덕분에 모튼한테는 상황이 아주 유리해졌지만 말이다.

“왜 웃으십니까?”

그의 웃음에 기분이 나빠진 아델라는 한껏 표정을 구기고 싶은 것을 참았다. 그녀는 인내심을 바닥에서부터 끌어모아 표정을 유지했다.

“방금 보았나?”

“뭘 말입니까?”

“왜, 그대한테 내 여자다, 라고 할 때 이저드 표정 말이야. 표정 따위 없는 것처럼 굴더니, 인상까지 쓰고. 그대한테 빠져 있긴 한가 보군.”

이저드의 표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연인 걱정 안 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델라는 웃고 있는 모튼을 싸하게 굳은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이러라고 그와 친해지라 하셨습니까?”

“음?”

“이저드 경과 친해져서 이런저런 소문이 나게 만들고 제가 저하의 여자였다고 하면, 이저드 경은 물론 저까지 더러운 소문이 나겠네요. 왕궁에서 얼굴 못 들고 다닐 정도로.”

심지어 그 소문 중에는 둘이 밀회를 즐겼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안 좋은 소문이 돌기에 아주 좋은 먹잇감이 된 것이다.

게다가 아까 그 자리는 유력 가문들의 집합소였다. 시녀들은 물론, 기사단원들도 웬만한 귀족 가문 중에서도 세력이 큰 축에 속했다.

“그대는 왜? 내가 시킨 일이라고 하면 될 것을.”

“소문이란 게 저하께서 원하는 식으로 퍼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처음에야 모튼이 퍼뜨린 소문대로 이저드를 공격할 테지만, 아델라한테 향하는 비난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가뜩이나 아델라는 귀족들이 물고 뜯기 아주 적합한 사람이었다. 아델라는 그들한테 약하고 만만하고, 찍어 눌러도 되는 사람이었다. 상대적으로 이저드보다 더.

무엇보다 방금, 모튼은 아델라를 그들에게 아주 대놓고 뜯으라고 먹잇감으로 던져 줬다.

“사람들이 좋아하죠, 이런 스캔들. 두 남자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꼬리 친 여우같은 여자. 왕비 전하가 절 가만 안 둘 이유도 되고, 좋네요.”

“뭐?”

평소 고분고분 자신을 따르던 아델라가 따지듯 날카롭게 이야기하자, 모튼은 약간 당황한 듯 보였다.

“아주 잘 알겠습니다. 세자 저하와 왕비 전하의 뜻.”

그녀의 말은 꼭 비꼬는 것처럼 들렸다.

“그대의 말은 꼭 내가 그대를 위험에 빠뜨린 것처럼 들리는군. 난 그대를 구해 준 거야.”

“예. 감사합니다.”

더 들어볼 가치도 없다는 듯이 아델라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물러가 봐도 되겠습니까? 사람들 시선이 무서워서요.”

“그…….”

아델라는 모튼이 입도 뻥끗하기 전에 쌩하니 먼저 앞서 걸었다. 갑자기 변한 아델라의 태도에 잠시 자리에서 굳었던 모튼은 곧 정신을 차리고 아델라와의 거리를 빠르게 줄였다.

“그대, 화났나? 내가 그대 하나 못 보호해 주겠나. 아. 혹시 미래를 약속한 사람 때문인가? 오해받을까 봐? 나한테 데려오게. 제대로 설명해 주고 도와줄 터이니.”

아직은 아델라를 버릴 시기가 아니었다. 왕비는 아델라를 빨리 이용하고 처리하기 위해 계획을 앞당긴 걸 테지만, 모튼은 아직 아델라를 버릴 생각이 없었다.

아델라는 이저드가 자신한테 몹쓸 짓을 했다고 계속 연기를 해 줘야 했다. 계획을 당긴 만큼, 아델라의 역할은 중요했다.

모튼과 이저드, 아델라가 계속 붙어 있어야 소문이 점점 더 기정사실이 되어 이저드한테 안 좋은 인식이 박히게 된다. 그렇게 이저드의 평판을 더 안 좋게 만든 후에 아델라를 끊어내도 늦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를 달래려 해명했지만 아델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가 이렇게까지 쫓아가서 굳이 달랜 여성은 아델라가 처음이었다.

“아델라 영애.”

아델라가 시선도 주지 않자 그는 짐짓 근엄하게 아델라를 불렀다. 하지만 아델라는 외궁 앞에 대기한 마차에 올라탈 뿐이었다. 모튼이 뒤늦게 마차에 타려 하자, 아델라는 냉큼 문을 닫아 버렸다.

“오늘은 너무 갑작스러워서 표정 관리가 힘들 것 같습니다. 저하께 피해를 주고 싶지 않으니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내일은 웃는 모습으로 뵙겠습니다. 그럼.”

아델라는 마차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며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확실하게 선을 긋는 모습에 모튼은 얼이 빠졌다.

* * *

“이거, 너도 동의한 일이야?”

아델라를 찾은 레널드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는 아예 이 상황을 짐작도 못 했다는 듯이 인상을 구겼다.

“동의했으면 오라버니한테 비밀 없냐고 물었겠어? 저하 마음대로 진행한 일이야.”

“하…….”

짐작은 했지만, 아델라한테 확인 사살을 당하니 레널드는 머리가 띵하게 울렸다.

이저드와 아델라, 그리고 모튼의 소문은 귀족들 사이에 쫙 퍼졌다. 온갖 모함과 거짓된 소문이 도는 와중에, 레널드에 대한 안 좋은 소문도 돌았다.

레널드가 작정을 하고 아델라를 모튼한테 밀어 넣었다는 것이다. 세자빈과 모튼 사이에 후사가 아직 없어 아델라가 후사를 갖게 된다면 레널드가 권력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었다.

소문에 휘말리지 않으며 혼자 이 악물고 여기까지 버텨왔건만, 돌아오는 것은 고작 여동생을 이용해 권력을 잡으려는 간신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넌 어떻게 이 상황에서도 그렇게 태연해? 너 지금 소문으로는 완전!”

“알아. 애한테 못하는 말이 없어. 이래봬도 나 아직 어린데.”

아델라가 턱을 괴고 뚱하니 대답했다.

“지금 농담이 나오냐…….”

“농담 아닌데. 어른들이 모범은 못 보여 줄망정, 애들을 물고 뜯고.”

소문이 아무 상관이 없는 건지, 관심이 없는 건지, 아니면 심각성을 못 느끼는 건지. 레널드는 뚱하니 턱을 괴고 있는 아델라의 건너편에 가서 앉았다.

“이제라도 나가자. 세자 저하께서는 소문을 정정할 생각이 없으셔. 이 소문을 이용해 이저드 경을 끌어내려야 하니까.”

레널드가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아델라는 창밖을 보던 시선을 레널드한테 옮겼다. 그녀의 눈에는 딱히 어떤 감흥도 없었다.

“오라버니는 아직도 저하를 믿어?”

어, 라고 대답하려던 레널드는 왜인지 목구멍에서 대답이 턱, 하고 막히는 것 같았다.

“난 안 믿어. 이저드 경이 없어지면 저하는 날 치울 거야. 필요 없어지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왕비 전하께서 날 죽이고 싶어 하시잖아.”

아델라가 덤덤히 말했다. 그녀는 이런 상황을 예상이나 한 듯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난…… 하아.”

“저하를 너무 믿지 마. 우리 가문은 입지가 약해서 그 사람 말 한마디면 쓸려나가거든. 그 사람은 그걸 알아서 우릴 휘둘러도 아무 죄책감이 없는 거야.”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레널드도 그걸 알고 모튼을 모신 거였다. 지금 이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그런데 이제 와서는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결국 이렇게 쓰다 버려질 건데.

자신은 조금 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를 줄 알았다. 모튼이 꽤 각별하게 챙겼으니까. 하지만 레널드가 모튼한테 다른 의견을 내뱉는 순간, 하나밖에 남지 않은 가족을 지키려는 순간, 그 모든 신뢰가 모래알처럼 사라졌다.

정말 환상이었던 것처럼.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겠어. 그러니까 나가자. 왕궁.”

그가 무언가 굳게 마음먹은 표정으로 아델라를 보았다.

“약속했잖아. 이번에는 너 안 버리기로. 절대 안 버릴게. 나가면 내가 지켜 줄 거야. 그러니까…….”

아델라는 그런 레널드의 눈을 빤히 보다가 착잡하게 웃었다.

“진작 좀 그러지. 그럼 내가 오라버니 앞에서 연기는 안 했잖아. 괜히 피곤하게.”

“응?”

“오라버니 마음가짐 잘 들었고. 나는 왕궁 나갈 생각 없어. 당한 게 억울해서라도.”

“어?”

아까와 달리 아델라의 표정에는 여유가 생겼다. 아까는 세상만사 귀찮은 표정을 짓고 있더니, 지금은 아델라의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너무 열 받아.”

이저드 앞에서 그런 파렴치한 발언을 하는 것도 모자라 소문까지. 아무리 생각해도 화가 났다.

‘아리스 님이 수도에 올라오시려면 얼마나 남았지?’

아델라는 골똘히 생각에 빠져 속으로 시간을 가늠했다.

통로를 찾고 소식을 보낸 이후, 아군 쪽 군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수도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받았다. 중앙 귀족들 몇 포함, 지방 귀족들의 도움까지 얻어 조용히 수도에 각각 입성하면, 앞으로 며칠 안에는 정예군이 수도로 집결한다.

거기에 중앙 귀족들도 사병을 출전시키기로 해서, 수도 안에는 이미 아군들이 대기하고 있는 상태였다.

성문을 열어 아군이 수도를 제압하고, 미리 들어온 최정예군이 통로를 통해 왕궁을 제압할 시간까지 가늠하면 딱 일주일을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델라는 이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소문에는 소문! 이왕 이렇게 된 거, 집결하기 전에 왕궁을 혼란의 구렁텅이로 떨어뜨려야겠다.

“안 그러면 어쩔 건데? 무슨 수라도 있어? 저하 배신하는 거면 안 돼. 절대. 그땐 진짜 우리 다 끝이야. 가문이고 뭐고 전부.”

“알아서 자멸할 텐데, 배신은 무슨.”

“뭐? 무슨? 무슨 말이야?”

아델라가 다시 창밖을 바라보자, 레널드가 테이블을 탁탁 치며 물었다. 아델라의 시선을 잡아 오기 위함이었지만,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이냐니까?”

“알고 싶지 않아도 곧 알게 될 거야. 정 궁금하면, 아랫사람들 이야기를 잘 들어보든가.”

그리고 아델라의 말대로 정말 얼마 안 있어, 레널드는 아델라가 말한 ‘자멸’의 의미를 알게 된다.

* * *

아델라의 예상대로 소문은 순식간에 기울어져 어느샌가 아델라를 맹렬하게 공격하고 있었다.

아델라와 이저드가 함께 있는 장면만 봐도 대놓고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들이 늘었고, 아델라가 혼자 걸어갈 때는 휘파람을 불며 아델라를 훑는 이들도 늘었다.

그리고 그때쯤, 하녀들과 하인들 사이에서 돌던 모튼의 소문이 드디어 시녀들과 시종들 사이에도 암암리에 돌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늦게 소문을 타긴 했지만, 효과는 꽤 강력했다.

“근데 그거 누가 들었대요?”

“전 본궁 주방 하녀가 말하는 걸 지나가다 들었어요.”

“왜, 그 자리에 있던 왕비궁 시녀, 하녀, 심지어 세자궁 시녀들까지 전부 들었다잖아요. 그래서 흘러나온 말 아닐까요?”

“제 친구의 친구의 사촌이 왕비궁 시녀인데 저도 얼핏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듣긴 했어요.”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모를 소문은 입에서 입을 타고 전해졌다. 귀족들 사이에서는 절대 그냥 스쳐 지나갈 화제가 아니었다. 세자한테 왕위를 못 이을 만한 이유가 있다는데, 어느 귀족이 그냥 흘려버릴 수가 있을까.

“혹시 그래서 벨제프 자작 영애가 이저드 경으로 갈아탄 게 아닐까요? 이저드 경 외모가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저하의 총애를 받는 편이 나았을 텐데 이저드 경과 밀회를 한 걸 보면…….”

물론, 이상하게 왜곡되어 소문이 퍼지기도 했지만 이 소문에서 주목되는 화제는 단연, 모튼이 왕위를 이을지 말지의 여부였다.

“전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어요. 왕비님도 안 닮았고, 전하의 젊은 시절도 안 닮았고…….”

“어머, 어머. 그럼 왕비님이 또 외도를? 첫째 왕자님도 그래서 잃으신 거 아니었어요?”

“솔직히 첫째 왕자님은 외도까지는 아니었죠. 돌아가신 왕세자 저하 사이에서 자식이 생긴 줄도 모르셨던 건데.”

그들은 자신이 보고 들은 이야기보다 더 부풀려서 이야기를 전했다.

‘아니, 이, 이게 도대체 무슨 망측한 이야기야?’

우연히 지나가다 들은 레널드는 심장이 벌렁거렸다. 이건 또 무슨 이야기이고,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머리를 팽팽 돌려도 알 수가 없었다.

‘이게 뭐지? 왜 저런 소문이 도는 거지? 아델라랑 이저드 이야기로 떠들썩할 줄 알았더니?’

분명 엊그제만 해도 그랬다. 사람들 입에 연일 오르내리는 이름은 아델라와 이저드뿐이었다. 그런데 아델라가 당하고만 있지 않겠다고 선언한 지 만 이틀도 안 되어서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진짜야? 설마 아델라가 이런 소문을…….’

레널드는 불안한 눈빛으로 세자궁으로 더욱 걸음을 재촉했다. 세자궁과 가까워질수록 그의 불안함은 더했다. 밖에 나와 있는 호위 기사들이 평소보다 더 많았고, 하녀들과 시녀들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레널드 경, 오셨습니까.”

기사단원 중 몇이 레널드를 알아보고 인사를 했고 레널드도 같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경들은 언제 세자궁에 배치 받으셨습니까?”

“아, 그게……. 아닙니다. 들어가 보시죠.”

레널드는 의아한 표정으로 세자궁 안으로 발을 들였다. 안에 들어서자 커다란 소리가 복도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소리의 진원지는 시녀들이 쉬는 휴게실이었다.

“이 천한 것이 감히! 뚫린 입이라고 나불거린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야! 네가 그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모튼이 없는 틈을 타, 왕비가 세자궁에 들어와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아델라의 머리채를 잡으려다 이저드에게 제지당한 왕비는 그에 더 분이 받혔는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제스트윈 공작가라고 지금 날 무시하는 것이냐? 오냐오냐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지!”

“왕비님께서 왜 이토록 화가 난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랫사람들이 보고 있습니다. 체통을 지키십시오.”

“체통? 하! 체통? 이것들이, 둘이 붙어먹은 것도 눈감아 주니까, 내가 만만해 보이더냐? 내 기필코 이 소문의 진원지를 찾아, 네 년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레널드는 주체 없을 정도로 화가 난 왕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왕비는 터질 듯이 붉어진 얼굴로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주변 식기들을 다 깨고 있었다.

“진정하십시오. 이보다 소문을 잠재워야 합니다. 혹 전하의 귀에 들어가는 날에는…….”

이 안에서 가장 침착한 건 이저드 하나뿐이었다. 이저드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차분한 말투로 왕비를 똑바로 보고 사실을 고했다. 레널드는 그의 대처를 보며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저드의 말이 통했는지, 왕비의 표정이 차갑게 식어 갔다.

“전하께서 아시는 날에는 둘 다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왕비는 이를 아득바득 갈며 휴게실에서 빠져나왔고, 레널드는 그녀가 지나갈 때까지 몸을 숨겼다. 지금 왕비와 마주쳐서 좋을 게 없을 것 같았다.

휴게실 안에 유일하게 남은 이저드와 아델라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곧 이저드가 아델라 곁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아델라, 나 좀 보게.”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아델라는 이저드의 말대로 그를 마주 보았다. 아델라의 약간 붉어진 한쪽 볼이 살짝 부어 있었다. 그는 그런 아델라의 얼굴을 차마 건드리지도 못하고 움찔 표정을 굳혔다.

이저드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델라는 그의 손을 먼저 잡아 자신의 볼에 가져다 댔다. 서늘한 이저드의 온도 덕분에 화끈거렸던 볼이 조금 괜찮아지는 기분이었다.

“괜찮아요. 저를 제일 먼저 의심할 줄 알았어요. 한 두어 대 맞을 것도 각오하고 있었고요.”

“……미안하네.”

“잉? 왜 이저드가 미안하죠? 잘못한 건 우리가 아닌데.”

아델라는 그의 손을 꼭 잡고 부드럽게 웃었다.

덜컹!

이저드와 아델라가 부드럽게 서로를 보고 있는 사이, 둘의 대화와 둘의 관계를 목격한 레널드가 발을 헛디뎠다. 아델라와 이저드의 시선이 어정쩡하게 문을 잡고 서 있는 레널드에게로 향했다.

“아. 저, 하던 거 마저 하……, 아니! 아니지! 뭐야? 둘이 뭐죠? 방금 대화 다 들었어요!”

레널드가 주변을 살피고 문을 굳게 걸어 잠그며 허둥지둥 물었다. 서로를 쳐다보던 아델라와 이저드는 레널드를 멀뚱히 그저 보기만 했다.

“소, 손 떼세요. 제 동생한테.”

둘의 분위기가 약간 이상했다. 저 편안한 분위기는 한 달 함께 있었다고 나오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내가 잡은 건데.”

이저드는 레널드의 말대로 손을 떼려고 했지만, 아델라가 그의 손을 꼭 잡고 놔 주지 않았다. 아델라는 오히려 레널드를 방해꾼 취급하고 있었다.

“너, 야, 너! 우리 적……! 이러다 너 소문!”

둘이 영 떨어질 기색이 없자, 레널드가 강제로 아델라를 잡고 일으키려 다가갔다. 그러자 이저드가 레널드를 막으며 아델라를 조심히 일으켜 세웠다.

‘이 분위기 뭔데?’

레널드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이저드와 아델라를 번갈아 보았다. 둘이 눈을 마주치는 것을 보면 절대, 절대로, 그저 평범한 사이는 아니었다.

“너 혹시, 설마……. 저하 버리고, 이쪽에 붙은 거 아니지? 저하 소문도 네가 흘린 거야?”

레널드는 충격을 받은 얼굴로 아델라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소문은 내 아이디어 아니야. 다른 분 아이디어지. 그리고 처음부터 저하의 편 아니었는데. 그런 척한 거지.”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전혀 모르겠다. 레널드는 아델라가 말하는 바를 짐작도 못 해서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렸다.

“그럼?”

레널드가 멍하니 물었다. 그러자 아델라는 두 손을 들어 이저드를 가리켰다.

“정식으로 소개할게. 내 연인이셔. 내가 이 일을 맡은 이유이기도 하고.”

“……?”

정말로, 모든 생을 통틀어서 제일 놀랐을 때를 꼽자면 바로 지금, 이 순간이었다. 엊그제까지는 분명, 모튼의 내 여자 발언이 가장 충격적이고 놀란 순간이었지만, 지금에 비할 바가 못 됐다. 넋이 나간 레널드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제야 오라버니한테 소개한 건 이젠 말할 수 있어서야. 오라버니 마음도, 우리도 준비됐거든.”

아델라는 이저드를 보며 씩 웃었고, 이저드도 아델라를 보며 눈매를 휘었다. 레널드가 얼이 빠져 반응을 하든 말든 아델라는 다시 이저드의 손을 잡고 자신의 볼에 대었다. 서늘한 손 덕분에 볼이 푸쉬식 식는 그 느낌이 좋았다.

“자, 잠깐, 뭐라고? 내가 잘못 들은 거지? 아니, 지금 뭘 둘만 다른 세상이야? 떨어져! 떨어져 봐!”

손밖에 안 잡았고 가까이 붙어 있지도 않았는데, 뭘 더 떨어지라는 건지?

레널드가 소리를 치며 이저드와 아델라 사이를 다시 가르고 섰다. 그에 아델라는 못마땅하게 레널드를 보았고, 레널드는 답답함에 둘을 추궁했다.

* * *

“저, 전하, 왕비 전하 듭니다.”

내궁에 위치한 왕의 침실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이상하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이, 왕비는 불안했다. 그 조용한 공간에 시종의 떨리는 목소리가 퍼지니 더욱 스산하게 느껴졌다.

“들라.”

왕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렸고, 시종이 천천히 문을 열어 주었다.

“윽.”

침실 문이 열리자, 지독한 피비린내가 왕비와 시녀들을 덮쳤다. 피비린내 자체를 처음 맡아본 신입 시녀는 헛구역질까지 했다.

안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내궁을 담당하는 시종장도 차마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밖에서 발만 동동 굴렸다. 저 피 칠갑 속에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공포였다.

왕비는 동요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20년 전의 그 날이 생각나 손을 잘게 떨었다.

“나 혼자 들어갈 테니, 모두 물러 서 있거라. 그리고 모튼을…….”

왕비가 가까스로 목소리를 내며 안으로 한발 한발 내디뎠고, 곧 그녀의 뒤로 방문이 닫혔다. 탁, 하고 조심스레 닫혔는데도 주변이 너무 조용해서 쾅 하고 닫힌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탁하게 가라앉은 눈을 한 왕이 그런 왕비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왕은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왕비에게 다가갔고, 그 순간 왕비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전하. 제 말을……!”

짝!

그녀가 미처 입도 열기 전에 왕의 손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또 짝, 하고 다른 쪽에서 소리가 났다.

“또, 또, 짐을 배신해?”

“아닙……!”

퍽!

그는 막무가내였다. 왕은 왕비의 머리채를 잡고 바닥에 내팽개쳤고, 왕비는 붉게 물든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네가 짐을 또 속여? 이젠 둘째 놈도 잃고 싶은가 보지?”

그의 눈이 광기로 물들었다. 이글거리는 왕의 눈은 당장에라도 왕비를 찢어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왕비는 그때의 공포가 생각나 몸을 잘게 떨었다. 그녀는 왕이 전 왕비를 어떻게 죽였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긴, 짐을 한 번 속였으니, 두 번은 못 속일까.”

“저, 전하! 고정하시옵소서! 전 그때 그분이 아닙니다!”

왕비는 그때 자신이 판 함정에 똑같이 자신이 걸릴 줄은 몰랐다. 지금 이게 누가 파 놓은 함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왕비는 그때의 데자뷔를 느꼈다.

“전 엘레나 왕비님이 아니에요! 자세히 보세요, 전하!”

왕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게 보이자, 왕비는 그의 다리에 매달려 애원했다. 이미 엉망이 된 얼굴이었지만 드레스로 최대한 닦고 그에게 얼굴을 내밀었다.

그에 왕은 잠시 우뚝 서서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왕의 눈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엘레나가 아니면 네년은 누구냐?”

“예?”

왕이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점점 제정신을 못 찾는 것 같았다. 미처 이런 상황까지는 예상하지 못한 왕비의 눈동자가 떨렸다.

“크, 크하하하! 왜 그리 놀라. 짐이 널 기억 못 할까 봐?”

왕의 웃음에 왕비도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곧 왕의 표정이 무섭게 돌변했다.

“날 부추겨서 엘레나를 죽게 한 년 아니냐. 내 그것도 기억 못 할까? 짐의 자식을 품고 있어 엘레나 대신 그 자리에 앉혔더니, 딴 놈의 씨를 품고 모른 척해?”

“억!”

왕은 주변에 무기가 될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왕비의 목을 졸랐다.

“왜? 너도 짐이 우습더냐? 딴 놈 자식을 왕세자까지 앉혀서, 아주 네 세상 같더냐? 이놈이고 저놈이고 감히 짐을 무시해?”

“저, 전하, 오해……! 오해! 헛소문, 입니다! 이간질……!”

왕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지만, 왕의 눈에는 그녀의 모습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왕비가 목이 졸리면서도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당신을 저주합니다. 당신이 평생 고통 받았으면 좋겠어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만큼, 당신도 잃길 바랍니다. 평생 불행하세요.’

그의 귀에 환청이 들렸다. 자주 듣던 환청이었다.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던, 그 미소가 시리도록 아름다웠던 한 여인의 목소리였다.

자신이 죽인 형의 아내이자 전 왕세자비. 그리고 자신이 강제로 자신의 왕비로 만들었던 여인, 엘레나.

그녀가 죽어가면서 남긴 지독히도 오래된 저주였다.

왕의 눈에는 지금 목을 조르고 있는 왕비와 엘레나가 겹쳐 보였다. 그는 인상을 구기며 손아귀에 힘을 더 줬다.

“전하!!”

그때, 그들 사이를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도 왕비의 목을 놓지 않았던 왕은 주변 사람들이 뜯어말리고서야 왕비를 놔 줬다.

“어마마마! 어머니! 어머니! 정신 차리세요!”

뒤늦게 소식을 듣고 뛰어온 모튼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무 표정 없이 왕비를 내려다보는 왕을 원망 가득한 눈으로 보던 그는 곧바로 자신의 어머니를 업고 뛰쳐나갔다.

왕은 그런 모자를 멍하니 보다가 입을 열었다.

“왕비궁을 폐쇄하고 왕비를 궁 밖으로 내보내지 마라. 세자에 대한 소문은 짐이 직접 확인하겠다. 세자도 오늘부로 본궁과 왕비궁 출입을 금한다.”

그가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왕비는 그날 꿈을 꿨다. 아주 오래전, 과거에 대한 꿈이었다. 정확히는 과거의 인물이 나온 꿈.

꿈에는 생전 아름다웠던, 아니, 아름다웠다고 생각했던 엘레나가 나왔다. 그녀의 아들과 함께.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엘레나의 눈은 언제나 죽어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생기가 담길 때는 아들을 바라볼 때뿐이었다.

하루하루 말라가던 엘레나를 보며 당시 그녀는 비웃었다. 고작 왕비라는 자리 하나도 못 버티는 그녀가 너무 나약해 보였다. 하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빛나게만 보이던 왕비라는 자리가 얼마나 위태로운 자리였는지.

왕비의 자리에 직접 앉아 보니, 자신이 생각하던 자리와 너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벅차 왕비 또한 말라가고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그녀가 유독 악독하게 굴고 주변을 모두 정리한 것은 모튼 때문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 모튼을 지켜야 했으니까. 왕의 아들이 아님이 드러나면 자신이나 아들이나 죽을 목숨이었으니까.

엘레나도 그랬을까. 온 주변을 신경 쓰느라 그렇게 하루하루 말라갔을까?

‘그러고 보니, 그 아이, 이름이 뭐였더라…….’

엘레나 아들의 이름이 가물가물했다. 너무 오래전 일이었고, 이미 죽은 아이라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이름이었다.

‘왜 하필 당신의 꿈을 꿨을까.’

왕비는 뿌연 시야 때문에 눈을 몇 번 느리게 깜박였다. 너도 당해 보라고?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깨달으라고?

그러나 그녀는 단 한 번도 엘레나를 밀어낸 걸 후회한 적이 없었다. 왕궁에서 입지가 좁았던 자신과 모튼이 살 방법을 찾은 것뿐이었다.

왕궁은 그런 곳이었다. 약점이 있으면 죽을 때까지 물고 뜯는, 그런 곳. 그렇게 해야 자신의 입지가 확고해지는 곳.

그 때문에 왕비는 단 한 번도 과거를 되돌아본 적이 없었다. 과거에 대한 죄책감도, 그녀한테는 없었다.

“왕비 전하!”

왕비가 멍하니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천장을 보았다. 그녀의 곁에 있던 시녀장은 놀란 표정으로 왕비를 불렀다.

“정신이 드세요? 괜찮으세요?”

“아…….”

목소리가 이상했다.

왕비는 잠시 인상을 썼다가 왕이 자신을 죽이려 한 것을 떠올렸다.

“꼬박 이틀을 주무셨어요. 목소리는 차차 돌아오실 거예요. 정말, 정말 다행이에요…….”

왕비가 굳이 입을 열어 묻지 않아도 시녀장은 전부 알려 주었다. 그녀를 오랫동안 옆에서 모셨기에 시녀장은 왕비의 눈빛만 봐도 대충 왕비가 원하는 바를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왕비는 아직 정신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아 풀린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왜인지 평소보다 훨씬 조용했다. 시녀장 외의 시녀들이나 시종들도 보이지 않았다.

“왜…….”

“시녀들과 시종들은 전부 출궁하였고, 하녀들은…… 잡혀갔습니다.”

“?”

“전하께서…… 왕궁을 샅샅이 뒤져 증거를 찾겠다며, 크게 분노하고 계셔서…….”

시녀장의 말에 왕비는 다시 천장을 멍하니 보았다.

그리고 곧, 왕비가 큭큭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심각한 상황에서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왕비를 보며 시녀장은 혹, 왕비가 정신이 이상해지신 건 아닌가 걱정했다.

“와, 왕비 전하?”

“큽! 흑, 흐흐흐!”

잔뜩 쉰 목소리로 웃으니, 그 웃음소리가 기괴하게만 들렸다. 귀신의 웃음소리 같기도 했다.

“전하?”

눈가에 눈물이 맺힐 정도로 왕비는 웃고 있었다. 잔뜩 인상을 구기며 웃던 왕비가 시녀장을 보며 뭐라 입을 열어 말했지만, 그 목소리는 잔뜩 쉬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예?”

시녀장은 왕비에게 얼굴을 더 가까이했다. 그러자 드디어 왕비가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지 들렸다.

“못, 찾아.”

절대로.

모튼이 왕의 자식이 아니라는 증거는 그녀가 하나하나 전부 제거했다. 이 비밀을 아는 이는 왕궁에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전부 죽여 버렸으니까. 그녀가 한때 사랑했던 모튼의 친부마저도.

가문의 뜻대로 거의 팔려가다시피 왕의 후궁이 되기 전, 그녀는 사랑하던 사람이 있었다. 미래까지 약속하고 만남을 지속하던 한 평민 남자가.

왕궁에 들어온 뒤로도 종종 만났고 심지어 모튼을 낳은 후에도 여러 번 만났지만, 모튼에게서 남자의 모습이 보이면서 왕비는 불안해졌다. 엘레나가 왕의 손에 어떻게 죽은 지 똑똑히 봤기에 더욱.

그래서 죽였다. 모튼의 비밀을 알 것 같은 이들은 전부. 사랑하는 이도 예외 없이. 아니, 그렇기에 더 철저히.

그러니까 왕은 증거를 찾을 수 없다. 온 나라를 뒤진다 한들, 모튼의 친부는 죽었고 이 사실을 아는 다른 이들도 전부 죽었다.

왕은 스스로 무덤을 판 것이다. 이번에도 그는 폭정만 일삼다가 귀족들한테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다. 증거도 없는 소문만으로 휘둘리는 왕을 귀족들이 얼마나 한심하게 볼까.

왕이 알아서 나서 준 덕분에 생각보다 빨리 모튼을 왕으로 올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녀는 그런 생각에 미친 듯이 기분이 좋아졌다.

‘난 당신처럼 당하고 있지 않아, 엘레나.’

엘레나의 마지막은 파국이었지만, 자신은 다를 것이다. 왕의 어머니로서 당당히 이 자리를 지켜낼 것이다.

그녀는 자신 있었다. 엘레나가 죽은 후, 22년 동안 왕궁 사람들을 전부 갈아엎으면서 여기까지 온 그녀였다.

‘고작 소문 따위로 세자와 나를 없애지 못해.’

하지만, 그녀의 파멸은 결국 죽은 엘레나로부터 시작됐다.

왕비와 다르게 엘레나는 아리스가 왕세자의 아들임을 아는 이를 피신시켜 놓았다. 즉, 22년 전 벌어진 일과 그보다 더 전의 일을 아는 이가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었다.

* * *

요즘 왕궁 분위기가 흉흉했다.

대신들은 왕을 말릴 수가 없어 이 상황이 지나가길 초조하게 기다렸다. 한동안 잠잠하다 싶더니, 왕이 또 왜 저러는 건지.

며칠 전에는 후궁 하나를 죽여 놓더니, 최근에는 후궁들 전부와 왕궁 사람들 전부 추궁하여 증거를 찾는다며 왕궁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평소에는 그래도 모튼의 말을 들어주던 왕이었지만, 이제는 모튼도 세자궁에 가둬 둔 채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녔다.

그런데 나오라는 증거는 안 나오고, 왕비가 왕궁 사람들을 멋대로 바꿔놓은 흔적만 나와서 분위기는 점점 더 안 좋아졌다. 귀족들 사이에서도 왕비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세자로 키운 거 아니냐는 분위기로 기우는 상황이었다.

결정적으로 과거, 왕궁 최고의 명의라고 불렸던 이가 나타나면서 분위기는 완전히 반전되었다.

그는 선왕 때부터 왕족들의 건강을 책임졌던 최고 의원이었는데, 왕세자가 현왕의 손에 죽임을 당한 후 왕비의 비호 아래에 있다가 어느 순간 왕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항간에는 왕비의 비밀을 알아서 숙청을 당한 것 아니냐는 말이 돌았지만, 자세한 내막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모두의 기억 속에 잊혔을 때, 많이 늙었지만 멀쩡한 모습으로 그가 왕궁에 나타난 것이다.

이 이야기는 귀족들 사이에서 당연히 쟁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국왕 전하.”

“누구였더라.”

왕은 알면서도 삐딱하게 물었다. 왕의 앞에 나타난 이들은 죽은 왕세자의 편이었고, 자신이 왕위에 오른 후에는 사사건건 부딪쳤던 이들이었다.

하나는 왕궁 최고 의원이요, 하나는 죽은 엘레나의 최측근이었던 케스너 후작이었다.

“여봐라, 케스너 후작은 잡아가거라. 어디서 숨어 있다 이제야 나타난 건지 알아봐야겠다.”

왕의 손짓 한 번으로 케스너 후작은 기사들한테 잡혀갔지만, 그는 딱히 어떠한 반항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왕은 그런 후작의 등을 죽일 듯이 노려보다가 곧 허리가 굽은 노인을 내려다보았다.

“꼴이 참 볼만하군. 짐이 왜 그대한테 사사건건 방해를 받았는지 모르겠어. 그냥 그때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아니지, 그럼 지금처럼 웃긴 꼴은 못 봤으려나?”

왕의 텅 빈 푸른 눈 안에 아주 잠깐 흥미가 돌았다. 그는 비웃음으로 가득 찬 눈으로 노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전하께서는 그때와 똑같으시군요.”

노인의 말에 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얼핏 듣기에는 외모를 칭찬하는 것처럼 들릴지 몰라도 지금 왕을 보며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건 비꼬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왕이 그 뉘앙스를 모를 리가 없었다.

“아, 죽고 싶어서 온 건가?”

스릉.

왕은 자신의 곁에 서 있는 기사의 검을 뽑아 왕좌에서 슬렁슬렁 내려왔다. 덕분에 주변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서로의 눈치를 보던 대신들은 노인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왕의 성정을 잘 아는 사람이 왕을 도발하니, 늙어서 치매가 온 건가 싶었다.

“절 죽이셔도 상관은 없지만, 전하께서 얻고 싶은 대답은 저 이외에 아무한테도 듣지 못할 겁니다.”

그에 왕이 우뚝 자리에서 멈췄다. 노인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땅에 박고 있었지만 절대 물러설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의원은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왕궁에 들어온 거였다. 얼마 남지 않은 목숨, 왕가를 위해 쓰인다면 기쁠 것 같았다. 과거, 엘레나가 간곡히 부탁했던 일을 이제야 마칠 수 있게 됐다.

‘왕자가 조금 더 커서, 세력을 모으고 왕이라는 자리를 감당할 수 있을 때, 그때 다시 궁으로 부르겠습니다. 그땐, 이 일을 만천하에 알려 주세요. 왕자가 왕위를 잇는 데에 공의 발언이 꼭 필요합니다. 왕가의 대가 이대로 끊기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그는 그녀의 부탁이 이루어지는 날을, 왕가를 위해 움직일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엘레나가 죽고 뒤이어 아리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도 그는 기다렸다. 매일 매일을 기록하며 그녀의 당부를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드디어, 드디어 그날이 왔다. 악착같이 살아온 지난날들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그냥 돌아온 건 아니다, 이건가? 그래. 네가 가진 패가 뭔지 말해 보아라.”

왕은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는 노인을 감흥 없다는 듯이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의 손에는 아직 검이 들려 있었다.

“세자 저하께서 전하의 자식인지 아닌지 찾고 있다 들었습니다.”

“궁에 흉흉한 소문이 도니, 내 직접 잠재우기 위해 찾고 있다. 그러한데?”

흉흉한 소문은 왕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 같았지만 왕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에 대한 대답을 드리기 위해 왔나이다.”

“네가 뭘 안다고? 왕비가 다른 이와 내통하는 거라도 보았나? 그럼 내통한 놈을 찾아와야지.”

왕은 날카롭게 벼려진 검날을 무심하게 보며 말했다.

“내통한 사내는 아마 죽었을 겁니다. 왕비 전하께서 그냥 뒀을 리가요. 왕비 전하와 만난 걸 본 사람도 전부 죽었겠죠. 찾으셔도 아무 증거도 안 나올 겁니다.”

그 말이 맞아, 왕은 인상만 구겼다. 안 그래도 그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노인이 속을 긁고 있었다.

“하지만, 세자 저하께서 전하의 자식이 아닐 수도 있다는 심증과 물증은 있습니다.”

“뭐?”

“현 왕비 전하께서는 조산하셨습니다. 그것도 예정일에서 두 달이나 일찍. 하지만 아이는 미숙아가 아니셨죠. 이에 대해서는 아마 전하께서도 모르실 겁니다. 아이를 받아냈던 의원과 하녀들은 전부 죽음을 맞이했으니까요.”

노인의 말에 왕은 모튼이 태어났던 날을 상기해 보았다. 미숙아라며 하녀들과 의원이 각별히 신경 썼던 게 생각났다.

물론 그는 딱히 모튼이 태어나든 말든 관심이 없어, 그저 보고로만 들었다. 아이가 미숙아로 태어나 특별히 지원이 필요하다는 보고였다.

그땐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관심이 없었으니까.

“네가 어찌 알지? 그때 너는 연구 때문에 제국에서 지내던 시기로 아는데.”

“엘레나 왕비 전하께서 확인하신 사항입니다.”

왕은 엘레나의 이야기가 나오자 살짝 표정을 굳혔다. 그러고 보니, 노인은 왕세자의 사람인 동시에 엘레나의 사람이었다.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네가 엘레나의 사람인 걸 여기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전 왕가의 사람이지, 엘레나 왕비 전하의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도 저는 왕가를 위해 움직일 뿐입니다.”

그가 현역 시절에 왕족을 위해 일했던 걸 모르는 이가 없었다. 왕가를 위해 왕족들한테 필요한 치료제는 물론, 같은 의원들한테도 자신이 개발한 기술을 알려 주던 그는 왕궁 의원 중에서도 최고로 인정받은 인재였다.

기존에 없던 치료제를 만드는 데에 한평생을 바친 그는 그 공을 인정받아 왕궁 최고 의원까지 오른 인물이기도 했다. 또한, 선왕과 왕세자, 그리고 후에 왕위에 오르는 지금의 왕한테까지 나름대로 성심성의를 다하기까지 했다.

“왕가를 위해? 하, 크하하하! 그래서 왕자의 정체를 숨겨 준 것이냐? 형의 아들한테 왕위를 이어 주려고?”

웃기지도 않은 소리를 들은 듯 왕이 인상을 와락 구겼다.

“아리스 님의 정체를 숨긴 건 그분만이 유일하게 단 하나의 의심도 없이 왕가의 적통이었기 때문입니다.”

왕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노인을 노려보았지만, 노인은 담담하게 말했다. 왕은 당장에라도 노인의 목을 비틀 것만 같았다.

“짐 앞에서 죽은 놈을 두둔하는 것이냐? 누가 적통이라고? 그놈의 새끼가? 왕인 내가 버젓이 살아 있는데, 네가, 감히?”

그는 성큼성큼 걸어와 노인의 멱살을 잡고 억지로 일으켰다.

“그렇게 죽고 싶은 게 소원이면 죽여 주마.”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왕이 노인을 바닥으로 패대기쳤다.

“모튼은 전하의 자식이 아닐 확률이 높습니다!”

검을 들어 올린 왕의 앞에서 노인은 바닥에 내쳐져 몸을 제대로 못 가누면서도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왜? 죽을 것 같으니, 이제 와서 살고 싶으냐? 하지만 늦었다.”

왕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노인의 팔을 가차 없이 잘라 냈다. 깔끔하게 잘린 노인의 팔이 바닥에 나뒹굶과 동시에, 피까지 흥건하게 바닥을 적셨다.

노인은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자신의 사라진 팔을 다른 손으로 움켜잡았다. 이를 악문 그는 잠시 고통을 삼키는 듯이 말이 없었다. 참기 힘든 아픔일 텐데도 노인의 입에서는 어떤 비명도, 신음도 터져 나오지 않았다.

“왕궁에 다시 얼굴을 들이민 걸 후회하게 해 주마. 내 네 눈빛은 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 우선 건방진 눈부터 파내 주지.”

“후……. 후회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감수하더라도 왕가를 위해 해야 할 일입니다.”

“하? 그럼 죽거라.”

대신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왕이 저리 머리끝까지 화가 나면 아무도 말릴 수 없다. 그들은 이번에도 또 피범벅이 된 시체 하나를 치우겠구나 싶어서 전부 시선을 피했다.

“전하께서는 원자를 생산하실 수 없습니다! 높은 확률로 전하는 아이를 만들 수 없나이다! 그러니, 모튼은 전하의 자식이 아닐 확률이 높습니다!”

“……뭐라?”

나머지 한쪽 팔도 잘릴 위기에서 노인의 커다란 외침이 중앙 홀을 왕왕 울렸다. 덕분에 왕은 물론, 대신들의 시선까지 노인한테로 쏠렸다.

왕은 피가 뚝뚝 흐르는 검을 허공에서 멈췄다. 중앙 홀에 긴 침묵이 깔렸다.

“그 때문에 제가 제국에 다녀온 겁니다. 병명을 알기 위해서요! 심지어 엘레나 왕비 전하와 후궁 분들한테까지 실험했습니다! 그 연구에서 나온 결과는 아주 높은 확률로 전하께서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거였습니다!”

처음 엘레나 왕비는 아리스 외에 아이를 갖길 원하지 않았다. 엘레나는 왕과의 잠자리를 끔찍해 했고, 하루에도 몇 번씩 헛구역질했다. 왕의 아이를 가질까 봐 항상 두려움에 떨던 그녀는 의원에게 부탁해 약까지 받아먹었다.

하지만 의원은 왕가를 위해 엘레나를 속였다.

아이를 갖지 못하는 약제가 아니라,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약제를 지어 줬다. 후궁들한테도 마찬가지였다. 왕궁을 안정시키려면 후계자가 많을수록 좋았다. 왕의 자리를 굳건히 하기 위해서는 후계가 아주 중요했다.

그렇게 몇 년, 그는 점점 이상함을 느끼게 된다.

여태까지 임신 소식을 전한 후궁이 딱 2명, 하지만 그녀들은 채 8주를 넘기지 못하고 전부 아이를 유산했다.

그리고 엘레나한테서는 임신 소식이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다시 말해 보아라. 뭐라고 했느냐?”

아까까지만 해도 무서운 기세로 노인을 몰아붙이던 왕이 차갑게 굳어서 물었다.

“아예 확률이 없지는 않습니다. 다만, 처음 한번 잠자리를 가진 것으로 아이를 잉태할 확률은 기적에 가깝습니다.”

노인은 핏물이 떨어지는 한쪽 팔을 꽉 잡고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계속 말을 이었다.

“그동안 왜 후궁들께서 임신을 못 하신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 없으십니까? 대신들도?”

노인이 날카로운 눈으로 묻자, 대신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노인의 시선을 피했다.

“그대들 전부 반역자입니다! 왕국의 안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튼 이외의 후계가 나오면 그 알량한 자리가 흔들리고 골치 아파지니까 궁중 암투로만 생각했겠죠!”

“뭐라고요! 저희가 나라를 위해, 전하를 위해 일한 걸 어찌 그리 깎아내릴 수 있습니까!”

“그대들이 나라를 위해 한 일이 뭡니까? 돈 따먹기? 재산 불리기?”

노인이 피식, 하고 웃었다. 그에 발끈한 몇몇 대신들이 다시 노인과 소리 높여 싸우기 시작했다.

“뭐요! 그러는 공이야말로 이런 거짓부렁으로 왕궁을 흔들려는 것 아닙니까? 전하! 저자의 말을 귀담아듣지 마소서!”

“틀어진 걸 바로 잡으러 왔을 뿐이오. 무너진 왕실의 기강을 위해!”

“저, 저자가! 후궁들이 아이를 갖지 못한 건 이유가 나왔소!”

“뭐, 왕비 전하께서 약이라도 탔다고 하오?”

“예! 의원들이 왕비 전하의 계략이라고 전부 실토했습니다!”

그들의 외침에 노인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때마다 그의 팔에서 피가 흘러나왔지만, 노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이곳에서 하는 발언이 마지막인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거야 당연하지! 현재 왕비 전하께서는 전하의 병을 모르시니까! 왕비 전하는 그저 모튼 이외의 후계자가 생기면 안 되니까 그리한 거야! 전부 죽여 버리면서!”

“아니, 이 자가?! 여기가 어디라고 추측을 사실처럼 말해!”

꽥꽥 목소리를 높여 싸우는 대신들과 노인 사이에서 왕은 귀가 먹먹해짐을 느꼈다. 누군가가 그를 비웃는 환청도 얼핏 들리는 것 같았다. 왕은 한 손으로 한쪽 귀를 막았다. 그래도 웅성거리는 소리가 줄어들지 않았다.

‘둘째 왕자님은 성정이 너무 포악하셔서…….’

‘왕의 그릇은 아니지.’

‘그래도 다른 면에서는 세자 저하보다 나은데, 역시 저 성질 못 죽이시면 힘들지.’

‘전하께서는 이미 첫째 왕자님을 후계자로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아직 두 분 다 어리시지 않아? 둘째 왕자님이 무슨 사고라도 치셨대? 왜 벌써?’

‘몰랐어? 왜 일전에 첫째 왕자님이 아끼시던 강아지를 죽였대. 전에도 한 번 그러신 적 있잖아.’

‘허어, 일곱 살짜리 꼬마가?’

그게 왜. 개가 하도 짖기에 교육을 했을 뿐이었다.

왕은 인상을 쓰며 주변을 살폈다. 대신들이 시끄럽게 소리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는 노인이 핏발을 세우며 소리치고 있었다.

노인의 모습에서 과거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한테 항상 엄하기만 했던 사람. 형한테는 그리도 너그러우면서, 자신한테만은 모질었던 사람.

두려웠던 걸까? 아들이?

노인을 내려다보는 왕의 표정이 한순간 차갑게 식었다. 그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바뀐다 싶더니 곧 서걱, 하는 심상치 않은 소리가 중앙 홀에 퍼졌다.

그의 칼질 한 번으로, 주변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사람의 머리인 것도 같은 무언가가 바닥을 굴러다니는 소리만 작게 대신들 사이에 울려 퍼졌다.

“큭, 크하하하! 방금 웃겼지 않나?”

대신들은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경악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이내 하하, 하하하 하고 억지로 웃기 시작했다.

“우, 웃겼나이다!”

“예, 예! 저도 보았습니다!”

왕이 웃으니까 대신들도 억지로 입가를 올렸다. 그러자 왕의 분위기가 또다시 확 바뀌었다.

“크흐흐흐, 웃겨? 공들은 짐이 후계를 못 갖는다는데, 그게 웃겨?”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한단 말인가. 대신들은 눈치를 보다가 냉큼 바닥에 꿇어앉아 머리를 조아렸다.

“용서하소서! 저희는 거짓된 말을 하는 저자가 죽은 게 통쾌하여……!”

“여봐라! 이곳에서 한 번이라도 웃은 놈은 다 감옥에 집어넣어라! 꼴도 보기 싫으니!”

“전하!”

그들은 끌려가는 동안 왕을 불렀지만, 왕은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왕실 부기사 단장인 데반트한테 검을 휙 던진 왕이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왕궁은 물론 수도의 출입을 전부 금한다. 여기 있는 병사들은 날 따르라.”

“예!”

* * *

요 며칠 왕궁의 분위기가 안 좋게 흘러가더니, 오늘은 갑자기 시녀들도 숙소에 붙잡혔다.

시녀들은 그래도 시녀 숙소에서 지내는 이들끼리는 자유롭게 대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숙소 곳곳에 기사들이 배치되어 아무도 밖으로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아델라는 초조하게 방 안을 서성였다. 요 며칠 난리라는 외궁에서 소식이 전혀 날아오지 않았다.

헤이든과 이저드는 새벽에 잠시 왔다갔지만, 린다는 털끝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왕궁에 숨어들어온 정예 호위병들도 린다의 소식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들리는 말로는 외궁에서 하루가 멀다고 곡소리가 들린다는 것 같았다. 하루에도 몇이나 추궁 당했고, 감옥에 사람이 넘쳐났다. 외궁도 예외는 아니었다.

공작가의 호위병들은 경비가 삼엄해서 외궁 근처만 맴돌 뿐, 린다의 정보를 알 수가 없다고 했다.

‘별일 없겠지? 조금만, 조금만 버티면 되는데……. 잘못되셨으면 어떡하지?’

아델라는 창문 밖에서도 느껴지는 기사단원들의 기척을 살피며 침대에 앉았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마음이 술렁여서 진정이 되지 않았다. 린다를 잃게 된다는 가정은 해본 적이 없는데, 소식을 못 받을수록 가정이 자꾸 현실이 되는 것 같았다.

‘예감이 안 좋아.’

직감이었다. 아델라가 죽음 직전에 느끼는, 시간을 되돌려야 할 것 같은 그런 감.

아델라는 급하게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 최대한 편한 복장으로. 경비가 심해지긴 했지만, 빠져나갈 방법이 영 없는 것도 아니었다. 기사들이 건물 밖까지 살피긴 했지만, 자주 돌아다니진 않았다. 체통머리 없이 창문을 뛰어넘어 빠져나가는 영애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델라는 옷을 단단히 여미며 빠져나가기 가장 적당한 때를 기다렸다.

* * *

“저기, 린다. 린다. 얘.”

누군가가 이제 막 잠든 린다를 흔들어 깨웠다. 린다를 깨우는 여인의 목소리는 아주 푹 잠겨 있었다. 그럴 수밖에. 자신은 모른다고 내내 울다가 추궁을 하는 병사들한테 맞아 기절까지 했으니.

그녀에 비하면 린다는 상황이 아주 조금 나았다. 추궁하면 하는 대로 고분고분 대답한 린다에게는 그들이 딱히 손을 올리지 않아도 됐다.

소문이 어디에서 시작된 건지, 소문을 어떤 시점에서 들은 건지, 어디서 들었는지, 어제는 무엇을 했고, 그제는 무엇을 했고, 그끄제는 또 뭘 했고, 후궁들은 한 명 한 명 다 어디에 있었고, 그런 것들을 전부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 덕분에 아주 지긋지긋하게 그들에게 잡혀 있어야 했다.

시간이 어찌 흘러가는지 감도 안 잡혔고, 중간에 병사들이 자기들끼리 농담하는 것도 가만히 들어주고 있어야 했다. 사람 정신력 갉아먹는 데에 아주 탁월한 재능을 지닌 이들이었다.

오늘도 그들한테 시달리다 현재 눈을 감은지 1시간도 채 안 됐다. 린다는 잘 떠지지 않는 뻑뻑한 눈꺼풀을 몇 번이나 깜박이며 들어 올렸다. 깜깜한 공간에 눈이 어느 정도 적응한 후에야 린다는 자신을 깨운 이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왜?”

린다를 깨운 사람은 린다와 함께 숙소 생활을 하는 룸메이트 중 하나였다.

“그게…… 밖에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데 이상한 냄새가 나서…….”

그녀가 굳이 린다를 깨운 것은, 그나마 이곳에 모여 있는 이들 중에 가장 강했기 때문이었다. 힘도 그렇고 정신력도 그렇고.

린다는 눈을 뜨자마자 주변 기척부터 살폈다. 이렇게 가까이 접근할 동안 정신을 못 차린 게 신기했다. 많이 피곤했나.

하녀의 말대로 외궁 주변의 경비가 더 늘었고, 무슨 이상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해 왔다.

“기름 냄새 아닌가?”

린다가 몸을 벌떡 일으키며 문 주변으로 다가갔다.

덜컹.

방문을 여니, 냄새가 더 심하게 났다. 기름 냄새는 긴 복도에 잔뜩 퍼져 있었다.

쾅, 쾅!

그리고 밖에서 무언가 옮기는 소리가 들렸다. 린다는 급히 걸음을 옮겨 후궁들이 있는 방을 살폈다. 다들 고문을 받아서 그런지 대부분 잠들어 있었다. 그녀들은 큰 소리가 들려도 전혀 깨지 않았다.

린다가 건물 입구까지 빠르게 다가갈 동안, 쾅, 하고 복도를 울리는 소리는 계속됐다. 창문을 뭔가로 막는 것처럼 보였다. 달빛이 비쳤던 창문에 어둠이 드리웠다.

‘뭐 하는 거지?’

이윽고 철문으로 된 입구 앞에 선 린다는 천천히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아무리 당겨도 문은 움직일 기색이 없었다.

“뭐야, 안 열려? 아무리 가둬둔다고 해도 그렇지, 입구까지 잠글 건 뭐야? 별궁이 감옥도 아니고.”

뒤이어 린다를 따라온 하녀가 쀼루퉁하게 불만을 표출했다.

외궁 안에 있는 건물 중에서도 현재 하녀들과 후궁들이 갇혀 있는 건물은 매우 작은 편에 속했다. 그녀의 말대로 감옥 같은 기분이 들긴 했다. 큰 방에 여러 명이 다닥다닥 붙어서 자야 했으니까 말이다.

“가둬 둔다는 의미로 끝날 게 아닌 것 같은데.”

린다는 생각보다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

출입로가 전부 막혔고 심지어 기름 냄새가 점점 심해졌다. 밖에서 기름을 계속 뿌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응? 무슨 소리야?”

“하녀들 전부 깨워. 마마님들도.”

“어? 다들 잠든 지 얼마 안 돼서 깨우기 힘들 텐데…….”

“다 같이 비명횡사하고 싶지 않으면 당장 깨워야 할 거야.”

그렇게만 말한 린다는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갔다. 방에서 세상모르고 자는 이들을 전부 깨우기 위함이었다.

* * *

“불……?”

아델라는 병사들이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 훌쩍 창문을 뛰어넘은 상태에서 멈췄다. 그녀는 멀리에서 보이는 붉은 색상의 하늘을 멍하니 보았다.

왼쪽에 하나, 오른쪽에 하나. 양쪽으로 불길이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오른쪽은 왕비궁이 있는 쪽이요, 왼쪽은 외궁이 있는 쪽이었다.

‘설마, 아니겠지? 설마! 왜? 어째서?’

아델라는 금세 정신을 차리고 곧바로 달렸다. 그녀는 본궁 근처까지 달려 마구간에 묶여 있는 아무 말이나 집어서 탔다.

‘아닐 거야!’

그래야 했다. 자신이 잘못 본 것이어야 했다.

“멈추십시오! 거기 멈추라는 소리 안 들― 워억!”

외궁이 가까워져 오자 아델라를 저지하는 병사들이 보였지만, 아델라는 그냥 막무가내로 말을 몰았다. 말의 힘이 어찌나 좋은지, 병사들을 훌쩍 넘어 다녔다. 그들은 말의 앞발에 치일까 겁이나 저절로 대열을 갈랐다.

말은 정말 무사히 아델라를 별궁 가까이 데려다주었고, 그녀는 곧바로 말에서 내려 새빨갛게 불타오르는 별궁으로 향했다.

‘안 돼, 안 돼!’

외궁에서 기척이 느껴지는 곳은 별궁뿐이었다. 아직 기척이 느껴지는 것을 보면 사람이 안에 살아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별궁에 그냥 다가가기에는 너무 뜨거웠다. 이대로 다가갔다가는 화상에 걸리기 딱 좋았다.

‘물, 물이라도. 주변에 물이……!’

아델라는 빠르게 주변을 훑었고, 마침 가까운 곳에 호수가 있었다. 그녀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곧바로 물속에 뛰어든 아델라는 온몸을 싹 적시고 뭍으로 뛰어나왔다.

“저! 저 여자 잡아!”

한발 늦게 말을 따라온 병사들이 소리쳤지만 활활 타오르는 불에 가까이 가기에는 무리였다. 너무 뜨거워서 살이 다 탈 것 같았다. 아델라는 그들보다는 조금 더 별궁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문은 자물쇠로 걸었고 그나마 탈출 가능한 곳은 창문!’

그 앞에도 무거운 가구로 막아 놓은 것 같았지만 굳게 잠긴 철문보다는 나았다. 불이 활활 타는 별궁에 가까워지니 안에서도 소란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린다, 겨― 언니! 린다! 어디 있어요!”

아델라가 크게 소리쳤지만, 타닥타닥 나무 타는 소리에 묻혔다.

“당장 잡으라고 이 새끼들아! 전하께 죽고 싶어?!”

바쁜 아델라의 마음과 비슷하게 별궁의 경비를 맡은 기사단원 중 한 명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병사를 불 속으로 밀었다. 왕은 자신의 계획이 방해받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그걸 잘 아는 기사는 짜증이란 짜증을 주변 병사들한테 다 냈다.

아델라는 그들이 자신을 잡기 전에 기척을 최대한 읽었다. 안에 사람들이 어느 쪽에 몰려 있는지 알기 위해.

“언니! 린다! 린다 언니!”

그녀의 이름을 외치며 빠르게 창문을 지나가던 중 쨍그랑, 하고 어딘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다!’

소리가 난 쪽으로 냉큼 뛰어가자, 병사들도 그녀를 뒤따랐다.

“뭐야? 방금 무슨 소리야? 뭐 해! 저 여자 잡으라고!”

그들이 아델라한테 정신이 팔린 사이, 기사단과 병사들 사이를 유유히 지나가는 이가 있었다.

“비켜.”

그는 아델라와 마찬가지로 물을 뚝뚝 흘리며 아까 욕지거리를 내뱉은 기사단원을 툭툭 쳤다.

“뭐? 어떤 놈이 누구한테 비키라 마라…….”

“꺼지라고, 젠장.”

그동안 참고 참아 왔던 맹수가 이빨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퍽 소리도 안 났는데, 기사단원이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금발의 푸른 눈을 지닌 사내는 주변을 신경 쓰지도 않고 뚜벅뚜벅 별궁으로 걸어갔다.

“린다 언니!”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말든 아델라는 깨진 창문 쪽으로 소리쳤다.

“아델라 님?”

“잠시만요. 이거 깰게요! 물러나 계세요!”

아델라의 손에는 이미 묵직한 돌이 들려 있었다. 저건 또 언제 집은 건지.

“아니, 콜록, 됐어요. 뒤의 놈한테 맡기세요.”

린다의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커다란 창과 그 앞을 막았던 가구가 쩌적 하고 갈라졌다. 산산이 부서지는 창문을 보며 아델라는 자신이 그동안 헤이든의 실력도 간과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쪽으로!”

그러나 헤이든의 실력을 넋 놓고 구경할 시간은 없었다. 안에서 연기를 마셨을 사람들과 불에 뎄을 사람들이 있어 얼른 호수 쪽으로 안내했다.

“괜찮냐?”

하녀들과 후궁들을 먼저 보내고 마지막에 나온 린다를 헤이든이 챙기며 물었다. 대답 대신 린다는 기침을 몇 번 하더니 헤이든한테 손을 내밀었다.

헤이든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의 손만 멍하니 바라보다 왠지 이상하게 간지러운 기분이 들어 그녀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아오, 네 손 말고!”

곧바로 린다의 짜증이 날아왔지만.

“그럼 뭐!”

급 민망해진 헤이든도 덩달아 소리쳤다.

“검! 여분의 검 있을 거 아니야! 단도라도!”

“아.”

헤이든은 뒤늦게 깨닫고 민망해져서 허리와 품에서 각각 단도를 꺼내 린다한테 넘겼다. 린다는 그런 그를 어이없다는 듯이 훑고 두 자루의 단도를 익숙하게 쥐었다.

“고맙다.”

“어?”

린다한테 감사 인사를 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헤이든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어 그녀의 표정을 확인하려 했지만, 린다는 이미 자리를 뜬 후였다.

잠시 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린다는 경비를 선 병사들을 가차 없이 패고 있었다.

“악!”

“억! 저, 저년 잡아! 저것들 다 잡아!”

헤이든은 린다의 고맙다는 인사를 마음 깊이 새겨보지도 못하고 난장판이 된 병사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 * *

한편, 이저드와 모튼은 왕한테 불려간 상태였다.

불이 나기 바로 몇 분 전, 둘은 본궁으로 나란히 불려갔다. 그곳에는 왕의 호위 기사들과 왕만이 중앙 홀을 지키고 있었다.

주변은 온통 어두웠고, 듬성듬성 램프에 불이 붙어 있어 그나마 시야가 확보되었다. 보통 전시 상황이 아니면 중앙 홀 테라스의 문은 절대 가리지 않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전부 단단한 철문으로 막아 놓았다.

“전하, 부르셨습니까.”

모튼이 정중하게 먼저 입을 열었다. 왕의 눈동자는 항상 그랬듯이 텅 비어 있었다.

“그래.”

“무슨 일로 이저드 경과 함께 부르셨습니까.”

이전까지 왕은 이저드한테 한 톨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이저드를 기사단에 합격시킨 거 말고는 딱히 그를 특별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이저드를 따로 만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언급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달랐다. 왕의 분위기도 그렇고, 왕실 기사들 사이에서 흐르는 분위기도 그렇고.

“짐이 오늘 이상한 말을 들었어.”

“예? 무슨 말을…….”

“짐이 후계를 가질 수 없는 몸이라나?”

“예?”

왕은 지루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다가 곧 모튼한테 시선을 옮겼다. 그의 표정에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네가, 짐의 아들이 아니란다.”

모튼은 그의 말에 인상을 쓰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아바마마의 아들이 아니라니요?”

“이해력이 달리는 것이냐? 네 어미가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널 낳고 짐의 아들로 둔갑시켰다는 말이니라. 어쩐지 짐과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더라니.”

왕이 짧게 혀를 찼다. 그에 모튼은 황당함에 말을 잠시 더듬었다.

“누가, 누가 그런 허튼소리를 합니까! 전 분명 전하의 아들입니다!”

“네 어머니 태도를 보면, 너도 어느 정도 짐작했을 터인데. 보아라, 저놈은 흔들리지도 않아.”

왕이 가리킨 방향에는 이저드가 서 있었고, 이저드는 붉은 얼룩이 남아 있는 땅바닥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중앙 홀에서 사람이 죽은 듯싶었다. 피비린내가 주변에 아직 짙게 남아 있었다.

이저드는 왕의 시선을 느끼고 느리게 고개를 들었지만, 그보다 먼저 모튼이 이저드의 멱살을 잡았다.

“네놈! 그동안 속내를 감춘 게 이날을 위해서였구나!”

하지만 이제 이저드는 모튼의 화를 받아 줄 이유가 없었다. 그는 모튼을 손쉽게 뿌리쳤다.

“진정하시죠. 저도 몰랐던 일입니다.”

“몰랐는데 그리 태연하다는 말이야? 어디서 거짓말을!”

“쯧.”

모튼이 이를 가는 걸 지켜본 왕이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저놈한테 화내 봤자 뭐 해? 네가 짐의 아들이 아닌 것은 변하지 않는데.”

“아바마마!”

“그러한데, 저희를 왜 부르셨습니까.”

흥분해서 소리치는 모튼과 달리 이저드는 평온한 표정으로 물었다.

“생각해 보니 말이야. 모튼이 짐의 자식이 아니면 왕위와 가장 가까운 건 네가 아니더냐. 공주의 자식이니까.”

“…….”

이저드는 말이 없었다. 왕은 그것을 긍정의 뜻으로 해석했는지 태연하게 계속 말을 이었다.

“내 자식도 아닌 놈한테 왕위를 물려주는 것도 열 받는데, 내가 제일 싫어하는 놈의 자식한테 왕위를 물려주는 것도 싫어서 말이야.”

제스트윈 공작은 언제나 왕과 비교되는 인물이었다.

항상 비교 당하던 형인 왕세자가 죽고 나니, 이번에는 웬 어린놈이 튀어나왔다. 인품이면 인품, 능력이면 능력, 외모면 외모. 사람들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제스트윈 공작 후계자를 칭찬했다.

그때부터였다. 제스트윈 공작가와 악연이 된 것은. 왕이 미하일한테 열등감을 느끼게 된 것은.

“그래서 무슨 말을 하시고 싶으신 겁니까?”

왕은 이저드의 당당한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초에 저 집안사람들은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저드가 어릴 때는 자신을 닮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미하일과 아주 판박이였다. 성격이며 외모며 모든 게.

“차라리 날 닮은 양자를 들이는 게 나을 것 같군. 적어도 자식새끼에게 뒤통수 맞을 일은 없을 테니까.”

“그게, 무슨, 무슨 말씀입니까!”

모튼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모튼은 왕의 말이 쉬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전에 거슬리는 것들을 전부 없앨 생각이다. 내가 나중에 양자라도 들이면 너희가 제일 방해될 것 아니냐.”

사실 이 말은 그냥 핑계였다. 자신을 속인 왕비는 물론, 자식이라고 먹이고 재우고 키운 모튼까지 포함해서 죄다 가만둘 수 없었다. 자신을 기만한 이들을 전부 용서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저드는 말 그대로의 뜻이었다. 그가 왕위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 그 노력의 산물을 제삼자가 홀라당 주워 먹게 할 수 없었다.

“어떻게…… 전하께서 저한테 어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저 왕궁에서 도는 소문만 믿고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반발은 이저드한테서 터져 나올 줄 알았는데, 이저드는 의외로 담담했다. 오히려 모튼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모튼은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왕을 올려다보았다. 왕은 그런 모튼을 지그시 내려다보다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문뿐이라면 이럴 리가. 의원에게 확인했다. 저놈들을 조용히 처리하거라.”

기사단원들한테 고개를 까딱인 왕은 그대로 뒷문을 통해 자리를 뜨려 했다.

부기사 단장인 데반트의 검이 왕의 목에 향하기 전까지는.

왕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데반트를 지그시 보았다. 그는 언제라도 왕의 목을 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제가 얼마나…… 아바마마께서 국정을 돌보지 않는 동안 얼마나 노력한 줄 아십니까? 아바마마의 빈자리를 채우려 그리 노력했는데, 그런데, 그런데! 어떻게 그리 쉽게 절 내치실 수가 있습니까?”

왕은 데반트가 누구의 명을 따르는지 눈치채고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그곳에는 왕 못지않게 분노로 가득 찬 모튼이 서 있었다.

“뭐 하는 짓이냐?”

“오늘부터 전하는 저한테 왕위를 선위하신 겁니다.”

“뭐라?”

“그동안 아바마마의 이상 행동을 이해하려 노력했습니다. 대신들한테 좋게 이야기하려 노력했고, 그들의 눈치를 보며 숨죽여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러지 않아도 되겠네요. 아버지께서 먼저 저를 버리셨으니까.”

모튼은 그리 말을 마치고 데반트한테 고갯짓을 했다. 데반트의 검이 왕의 목에서 멀어졌다.

“선왕을 내궁에 감금하고,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이놈을 감옥에 집어넣어라.”

모튼의 시선과 이저드의 시선이 그 순간 잠시 부딪혔다. 찰나에 이저드의 눈빛에 묘한 기색이 서렸다가 사라졌다.

“큭, 킥킥킥.”

긴장감 속에 왕의 웃음소리가 정적을 깨고 울렸다. 그는 진짜로 미친 건지 계속해서 킥킥거리고 웃었다. 웃긴 상황이 아니었는데, 그의 입가에서 웃음이 비죽비죽 삐져나왔다.

그한테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전 왕세자를 죽이고, 선왕을 겁박하여 선위를 받았을 때만 해도, 온 세상이 자신의 것이 된 것만 같았다. 그의 미래가 이렇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자신이 행했던 일 그대로, 아들이라고 키운 놈한테 돌려받게 될 줄이야.

“그래, 어디 가져가 보아라. 하지만 넌 내 것 중 그 무엇도 얻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은 과거, 선왕이 왕한테 한 말이기도 했다. 억지로 자기 아들한테 선위하던 선왕이 제게 이를 갈며 내뱉은 말이었다. 이 또한 자신이 똑같이 입에 담게 될 줄 몰랐다.

왕은 모튼을 보며 웃다가 데반트한테 시선을 옮겼다.

“외궁에만 불을 지르라 명한 줄 아느냐? 어리석군.”

여태 왕의 명을 따라 일을 진행했던 데반트의 눈이 커졌다.

“서, 설마 왕비궁에도……?”

“말했잖으냐. 내 것 중 무엇도 얻지 못할 거라고. 왕비도 내 것이다.”

그 순간 데반트는 사방을 살폈다. 테라스 문을 전부 막아 놓으라고 할 때는 이저드와 모튼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수작인 줄 알았더니, 그것만이 목적이 아니었다. 왕은 모튼과 모튼이 따르는 이들이 밖의 상황을 보지 못하게 하려던 것이다. 왕궁이 지금 어찌 흘러가는지 못 보게 하기 위해.

“저하!”

데반트의 표정이 급격하게 무너졌다.

“왕비궁에 불이! 당장 가 봐야 합니다!”

“뭐?”

데반트가 그렇게 말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중앙 홀을 벗어났다. 급해 보이는 데반트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던 모튼도 곧 인상을 구기며 그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남겨진 왕은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그들이 꽁지 빠지게 사라지는 꼴이 그렇게 웃길 수가 없었다.

“지금 가 봐야 늦었는데, 뭐가 저리 급해서.”

왕의 얼굴에는 아직도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이저드는 그런 왕을 아무 표정 없이 쳐다보았다. 남은 왕실 기사단원들도 왕을 그저 어이없이 보고만 있었다.

“네놈도 가 봐야 하지 않느냐? 왕궁에 들어오면서 스파이 하나 안 심어 놨을까.”

이저드 역시 아까부터 외궁 쪽 기척이 신경 쓰였지만, 그는 헤이든과 린다, 그리고 아델라를 굳게 믿고 있었다.

“잡혀가기 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 왜? 너도 이 자리가 탐나더냐?”

왕은 왕좌를 가리키며 우습다는 듯이 물었다. 그에 이저드는 정중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자리의 주인은 따로 계십니다. 그분이 원래 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살아 계십시오.”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게냐?”

“악착같이 살아 계십시오. 당신은 그냥 죽을 자격이 없습니다.”

이저드는 왕의 앞에서 처음으로 분노가 담긴 눈빛을 보냈다. 곧 흔적도 없이 갈무리 됐지만.

왕은 이저드가 왕실 기사단들 손에 잡혀갈 때까지 그 후 한참 동안이나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 * *

왕비궁은 사방이 막혀 활활 타고 있었다.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밤하늘의 별을 가리고 있었고, 밖으로 빠져나온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었다. 외궁 쪽은 린다가 창문을 깰 힘이 있었지만, 왕비궁 안에는 그럴 만한 사람이 없었다.

뒤늦게 모튼이 왕실 기사단들과 함께 왕비를 구해 냈지만, 이미 연기를 많이 마셔 의식을 잃은 뒤였다.

“의원! 의원을 불러!”

그가 소리쳐서 의원이 허둥지둥 뛰어왔다. 그 짧은 몇 분 동안 모튼은 몇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의원이 최대한 빠르게 여러 응급 처치를 했지만, 왕비는 숨이 멎어 갔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 그대로, 그녀의 몸이 점점 차가워졌다. 그리고 점점 그녀의 심장이 멈춰 갔다.

“어마마마! 어마마마!”

참으로 허무한 죽음이었다.

살기 위해 사람들을 죽이고, 그 시체 위에 위태롭게 섰던 여인은 질식사로 생을 마감했다. 그것도 남편의 손에 의해.

“어머니!”

모튼의 비명이 메아리처럼 사방에 퍼졌다.

툭, 투둑.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건지, 아니면 더 칠흑 같은 어둠을 보여주려는 건지,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졌다.

덕분에 화재는 진압됐지만, 죽은 사람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밤새 비는 쉬지 않고 쏟아졌다.

어스름한 새벽빛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한 어둠 속에서 모튼은 가만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곁에는 왕비가 생전의 모습으로 조용히 누워 있었다.

화재로 인해 여기저기 타고 찢겼던 왕비의 드레스는 다른 화려한 드레스로 갈아 입혀져 있었다. 얼굴이 약간 창백한 것 말고 왕비는 그냥 자는 사람처럼 말끔했다. 모튼은 이미 차갑게 식어 버린 그녀의 손을 잡고 밤새 곁을 지켰다.

‘왜 이렇게 된 거지?’

어머니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평소와 다르게 흐리멍덩해져 있었다. 많이 울어서인지 눈가도 벌겠다.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거지? 왜 상황은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방향으로 계속 향하는 걸까.

그는 밤새도록 생각했다.

처음부터 이저드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아닌가, 왕이 그놈을 받아들이지만 않았다면 벌어지지 않을 일이었나? 그렇게 따지면 처음부터 왕비가 왕을 속이지만 않았다면…….

생각하면 할수록 더 깊은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머리로는 어디부터 어긋났는지 그도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왕비와 왕은 그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어머니와 아버지였고, 기행을 펼치는 미친놈이라도 왕은 자신한테는 잘 대해 준 기억이 더 많았다. 적어도 아들의 말이라면 오냐오냐 다 해 줬으니까 말이다.

지금의 그에게는 어머니를 잃었다는 분노와 아버지에게 배신당했다는 분노에 화살을 돌릴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중 가장 적합했던 게 이저드였다.

그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왕비가 흥분해서 계획을 그르칠 일도 없었고, 왕이 자신과 왕비를 내칠 일도 없었다. 그리고 자신은 아마 지금과는 달리 아주 평화롭게 왕위를 얻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모튼이 왕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사실도 밝혀질 일이 없었다.

그렇게 밑바닥으로 내리치는 기분을 밤새 느끼던 모튼은 아침이 된 후에야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탁.

문을 닫고 나온 복도에는 부기사 단장인 데반트를 비롯한 몇몇 왕실 기사단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전하께서는?”

“침소에 드셨습니다. 저하의 명에 따라 침궁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오지 않으시도록 지켰습니다.”

모튼의 물음에 데반트가 고개를 숙이고 고했다.

“이저드한테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나?”

“예. 생각보다 조용히 감옥에 들어갔고 먼저 잡힌 헤이든과도 이렇다 할 대화는 없었습니다.”

왠지 찝찝한 보고였다.

모튼은 잠시 어두운 복도 끝을 째려보는 것처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곧이어 입을 열었다.

“왕비 전하의 국장은 일단 미룬다. 왕비 전하의 상태를 누설하는 이는 전부 목을 쳐라. 지금 어마마마는 상태가 위중해 누워 계시는 거야, 알겠나?”

“예.”

지금 모튼에게 당장 필요한 건 권력이었다. 누구든 그의 명에 반박하지 못하며 무슨 일을 해도 괜찮은 자리. 귀족들이 눈치를 보고 자신을 업신여기지 못할 그런 자리.

그는 선위를 받은 후에 모든 일을 정리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저드는 선위를 받은 후 내가 직접 처리한다.”

한껏 가라앉아 있던 모튼의 눈빛이 이저드를 생각하자 무섭게 불탔다.

일이 왜 이렇게까지 됐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저드가 왕궁에 오지 않았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었다.

아버지의 일도, 어머니의 일도, 그리고 모튼의 일도. 전부.

한 번 이저드 때문이라고 속으로 확정을 지으니 그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꼭, 이 사건의 원인이 전부 이저드의 탓인 양. 자신의 잘못은 없는 양.

“내궁으로 가지.”

모튼은 그렇게 말하고 망설임 없이 먼저 앞장섰다.

우선 왕에게서 억지로라도 국새를 뺏고 선위한다는 내용의 서류를 받는다. 그후, 자신의 비밀을 아는 이를 비롯해 눈엣가시라고 여겼던 이들도 전부 처리할 것이다.

그는 이때 이미, 판단력이 약간 흐려진 상태였다.

어머니가 눈앞에서 죽고도 그가 그나마 정신을 잡고 있었던 이유는 왕위만 받으면 다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왕위만 받으면 주변을 차근차근 정리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 * *

밤새 무섭게 비가 내린 탓인지, 아니면 불안함 때문인지, 아델라는 제대로 잠을 청하지 못했다.

외궁에서 난리를 치고 병사들한테 잡혀가던 중에 레널드에게 발견된 그녀는 감옥에 갇히는 신세는 면했다.

대신 숙소의 경계가 강화됐고, 아델라는 방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가 없게 됐다. 레널드가 기사들한테 아델라를 내보내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사라진 탓이었다.

레널드는 현재 왕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말도 해 주지 않은 채 아델라만 숙소에 두고 홀연히 사라졌다. 아델라는 잡혀간 헤이든과 소식을 알 수 없는 이저드를 걱정했다. 그리고 궁 밖으로 도망친 린다까지 모두 걱정됐다.

‘린다 경, 제발 무사히 빠져나가셨길…….’

린다가 밤새 왕궁을 빠져나가 무사히 아리스와 만났기를 바랐다. 그녀가 아군들에게 왕궁 상황을 되도록 빨리 알려야 이저드와 헤이든, 그리고 아델라의 목숨이 비교적 안전할 것이었다.

그렇게 그녀가 간절하게 두 손 모아 빌고 있는데, 아델라의 방에 누군가가 찾아왔다.

“아델라 영애, 계십니까?”

왕을 호위하는 호위 기사들이었다.

“예, 무슨 일이십니까?”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전하? 왕이 날 왜 갑자기?’

아델라는 의아한 표정으로 굳게 닫혀 있는 방문을 보았다.

‘설마 외궁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인가? 후궁들 구해준 거?’

궁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아델라는 잘 몰라서 불안했다. 알아보려 했지만, 어제 이후로 병사가 충원되어 왕궁 안의 정보를 알기 쉽지 않았다.

심지어 왕궁 상황을 알려줄 수 있는 레널드조차 나타나질 않으니, 아델라는 초조하게 어떤 소식이라도 당도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돌아온 상황이 왕의 부름이라니.

“아델라 영애? 문을…….”

“제가 나가겠습니다.”

아델라는 문고리를 돌리기 전에, 아직 부슬비가 내리는 창밖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아침보다 빗줄기가 줄어들었지만, 정오가 다 되어 가는데도 햇빛이 들지 않았다. 구름에 가려 사라진 것이다.

‘괜찮으시겠지? 괜찮을 거야.’

아델라는 밖의 일이 무사히 진행되고 있을 거라 믿고, 불안한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문을 열고 나가 조용히 왕실 기사단원들을 따랐다.

* * *

‘여긴, 사형장이잖아.’

마차가 꽤 멀리 가기에 어디로 부르나 했더니, 사형장이었다. 외궁과 시녀 숙소 사이로 쭉 달리면 보이는 사형장은 본궁에서도 꽤 멀고, 다른 어떤 궁하고도 멀리 자리해 있었다.

아델라는 원형 경기장의 축소판 같은 사형장 안에 들어서면서 불안함을 느꼈다.

‘설마, 사형이 집행되나? 누구? 나? 아니면…….’

처음에는 외궁에서 난리 피운 것 때문에 부르나 했다. 하지만 갑자기 사형장으로 마차가 향하니까 너무 불안해졌다.

“왔나.”

왕실 기사단을 따라 사형장 입구가 아닌 뒤쪽 출입구로 갔더니, 사형대가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모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하’께서 불렀다고 하여 왕이 부른 건가 했는데, 모튼이 나타나 아델라는 약간 놀랐다.

‘모튼이 전하라고? 선위를 받은 거야? 언제? 어떻게? 밤사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자세히 몰랐지만, 확실한 건 모튼이 제대로 된 절차를 밟고 왕위에 오른 건 아닌 것 같았다.

아델라는 놀란 표정을 금세 지우고 모튼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 눈으로는 힐끔, 원형으로 된 사형장 안을 살폈다.

사형장 안은 경기장과 비슷하긴 했지만, 약간 달랐다. 원형 건물 전체를 둥그렇게 감싼 큼지막한 계단은 계단으로 쓰이기도 했지만 앉아서 사형 집행을 볼 수 있는 의자로 쓰이기도 했다. 그리고 왕이 자리한 곳은 경기장과 비슷하게 정중앙에 큼지막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사형장 안에는 출입구가 딱 두 개 뿐이었는데, 하나는 정문, 다른 하나는 왕이 자리한 곳에 있는 뒷문이었다.

아델라는 하늘이 뻥 뚫린 사형장을 힐끔힐끔 훑어보다 움찔대며 동작을 멈췄다.

‘뭐야? 방금 본 거…… 사람이야?’

아델라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자신의 발끝을 멀뚱히 내려다보다가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힐끔, 사형장을 바라보았다.

얼핏 그녀의 눈에 들어온 사형장의 상황은 참담했다.

특히 고문 받아 정신을 잃은 후궁들과 외궁 하녀들의 몰골은 보는 사람들한테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그들의 몸에는 어디 하나 성한 구석이 없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주변 눈치를 보는 대신들이 서 있었다. 후궁들과 하녀들이 고문받는 걸 옆에서 전부 지켜본 그들은 이미 겁에 질려 있었다.

“내 그대한테 좋은 소식을 전할 게 있어서 말이야. 그대가 분명 좋아할 소식이야.”

아델라는 저 중, 이저드와 헤이든이 보이지 않아 더 초조해졌다. 그녀는 최대한 자신을 다독이며 모튼을 보았다. 모튼이 좋은 소식, 이라고 한 게 마음에 걸렸다. 모튼한테 좋은 소식이 아델라한테도 좋은 소식일 확률은 몹시 적었다.

“예? 무슨 소식입니까?”

“저들이 전부 실토했네.”

아델라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아델라의 반응을 살피는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던 모튼은 자리에서 일어나 뚜벅뚜벅 아델라에게 걸어갔다.

“나에 대한 헛소문을 퍼뜨린 장본인 말이야.”

그의 눈에 노기가 잠시 일렁였다가 사라졌다.

아델라는 갑자기 강한 기운을 내뿜으며 자신에게 걸어오는 모튼을 보며 숨을 참고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여기서 참지 못하면 여태까지 참은 게 말짱 도루묵이었다.

“헛소문이라 하시면.”

“내가 선왕 전하의 자식이 아니라는 헛소문.”

헛소문 아니지 않나?

아델라는 케스너 후작이 20년 전 궁에서 일하던 의원과 함께 입궁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확히 무슨 이유로 왔다는 건 못 들었지만 지금 모튼의 반응을 보아하니,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들어왔던 것 같았다.

“외궁에서 먼저 퍼졌다기에 내 친히 알아봤어. 그대 덕분이네. 그대가 후궁들을 살린 덕분이야. 훌륭해.”

그의 입에서는 아델라를 향한 칭찬이 나왔지만 표정과 눈빛은 전혀 아니었다.

무섭게 날 선 시선으로 아델라를 보며 다가온 모튼은 몸을 움츠리는 아델라의 코앞까지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그녀와 거의 닿을락 말락한 거리까지 접근한 모튼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델라는 목 뒤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대가 왕비궁이 아닌 외궁으로 향한 것은 증인을 살리려고 했던 거야. 그렇지? 왕비 전하를 버리고 외궁으로 향했을 때는 그에 마땅한 이유가 있었겠지. 안 그런가?”

아델라의 어깨를 내리누른 모튼의 손에 힘이 담겼다. 악, 소리가 나올 정도의 악력이었다. 아델라는 인상을 구기며 땅바닥을 쳐다보았다.

‘왜 저렇게 말하지? 왕비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

그래도 그렇지, 왜 생사람을 잡는지 모르겠다.

아델라는 모튼이 평소와 다른 것 같다고 느꼈다. 모튼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아델라는 일단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아델라의 반응에 그녀의 어깨를 툭툭 치며 모튼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래? 역시 그렇군. 하긴, 그대가 나와 척을 질 리가 없지. 그대 오라버니의 목숨은 물론, 가문이 걸린 일인데.”

즉, 자기와 척을 지면 레널드와 아델라, 심지어 벨제프 가문에 속한 모든 사람까지도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경고였다.

아델라의 몸이 살짝 굳었다.

그 모습에서 아델라가 자신의 말을 잘 이해한 거라 생각한 듯 모튼은 다시 왕좌로 돌아가 앉았다.

“그럼 아델라 양도 들었겠군. 이저드와 친하게 지냈으니 말이야.”

‘갑자기 이저드는 왜……?’

아델라가 퍼뜩 고개를 들어 모튼을 보자, 모튼이 환하게 웃었다. 그의 미소는 어딘지 약간 오싹하게 느껴지는 구석이 있었다. 약간 정신이 풀린 것 같은……. 눈이 풀린 건가?

“후궁들과 하녀들이 헛소문은 퍼뜨린 주범으로 이저드, 그놈을 지목했네. 어떻게 하나같이 전부 그놈하고 엮인 건지……. 선왕께 거짓을 고해 즉결 처분당한 의원 놈도, 케스너 후작도 그놈과 한편이더군.”

아델라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외궁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도, 후궁들과 하녀들이 참혹하게 당한 장면을 그녀에게 여과 없이 보여준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그는 아델라를 시험하고 있었다. 아델라가 진짜로 자신의 편이 맞는지, 아닌지를. 그녀가 자신의 편이 맞는다면, 저들과 같이 자기 뜻에 따를 것이고, 아니라면 이저드를 감싸겠지.

“이렇게 많은 증거와 증인들이 있었는데 여태 몰랐다는 게 신기해. 그렇지 않나?”

그는 아델라의 의견을 물은 게 아니었다. 아델라도 동조하라는 의미로 말한 거였다. 그의 시선이 집요하게 아델라에게 따라붙었다.

“그, 그렇습니다. 가까이 지냈는데 저도 감쪽같이 속았네요.”

아델라가 그리 대답하자, 그는 그제야 무섭게 쏘아보던 눈을 풀었다. 모튼은 이걸로 아델라도 저들과 한배를 탔다 생각했다. 이제 아델라도 저들처럼 자신의 말에 따를 것이다.

그는 후궁들과 하녀들에게 진실을 받아내기 위해 고문을 한 게 아니었다. 거짓을 진실처럼 고하게 하려고 그녀들을 극한까지 낸 몬 것이었다. 또한, 그들이 당하는 모습을 지켜본 대신들도 꼼짝 못 하고 모튼의 뜻대로 진술하게 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만들어진 진술은 전부 모튼이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혹은 육체적으로 고문하여 자신의 입맛대로 만들어낸 거짓 자백이었다. 이저드를 처리해도 뒷말이 나오지 않게.

“이걸로 그대의 복수도 완벽해질 거야. 좋지 않나?”

모튼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아델라는 아무 표정도 짓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바닥만을 쳐다보고 있었을 뿐이다.

“표정이 왜 그러지?”

아델라가 웃지 않고 서 있자, 모튼의 표정도 함께 굳어 갔다.

“그대가 가장 좋아해야 할 터인데.”

그의 차가운 눈빛이 아델라에게 닿았다.

“제스트윈 공작은 어쩌시려는 겁니까? 이저드 경이 죽으면…….”

“그댄 참 걱정이 많군. 이 일을 설마 이저드 혼자 계획했을까. 공작가에는 반역죄로 이미 병사들을 보내 뒀네.”

반역죄로 공작을 다스리려 병사를 보냈다고 하는 걸 보니 모튼은 아직 수도로 군사가 집결되고 있는 건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델라는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제발 무사히 수도와 가까워지는 중이시길.

“혹, 그들이 사병을 움직여 수도로 들어오는 날에는 반역이 더 확실해지지. 귀족들에게 병사들을 차출하라고 일렀어. 미하일 공작이 수도에 도착했을 때를 대비해 함정을 파 놔야 하니.”

만일 그 기별을 오늘 보낸 거면 모튼은 한참 늦었다. 아리스를 따르는 정예군은 벌써 수도에서 대기 중일 터였다.

아델라는 그에게 들은 이야기로 왕궁 상황을 얼추 파악하고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럼, 이저드 경은 어떻게……? 공작을 잡는 함정에 쓰일 인질로 이용하실 겁니까?”

“인질? 그럴 리가.”

“그러면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아델라는 최대한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조심했다.

“뭘 어찌해. 굳이 살아 있어야 인질인가? 살아 있는 척하면 되는 것을.”

설마설마했는데, 진짜로 이저드를 죽일 생각인 것 같았다. 아델라는 이 상황을 어떡해야 하나 고민했다.

“저, 그럼, 사형…….”

“알면서 묻는군.”

“언제요?”

“왜 그리 집요하게 묻지? 그대도 보고 싶어서?”

보고 싶을 리가.

아델라는 표정이 무너지려는 것을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모튼은 그녀의 태도를 어느 정도 납득하는 듯 턱을 쓸었다.

생각해 보니 아델라도 이저드의 농간으로 인해 아버지를 잃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화를 참고 이저드를 대했던 걸 생각하니까 그는 아델라가 새삼 다시 보였다. 자신은 절대 그놈의 앞에서 미소 따위 지어줄 수 없는데 말이다.

“비공개로 진행될 예정이었지만, 그대만은 내 특별히 참관을 허락해주지.”

그후, 그는 어머니의 소원대로 아델라 또한 처리할 예정이었다. 아델라한테 딱히 어떤 유감도 없었지만, 죽은 왕비와의 약속이니 지키고 싶었다. 그래도 양심(?)은 남아 있어서 자신한테 이용당하고 휘둘린 아델라에게 죽기 전에 상을 내려 주기로 했다. 저 발언이 그 상이었다.

이 발언이 자신의 목을 죌지도 모르고 그는 끝까지 아델라와의 관계에서 자신이 우위에 있다 여기고 있었다. 자신의 말 한마디로 아델라 정도는 금방 죽일 수 있었으니까.

* * *

외궁에 불이 붙어 위험했던 그날 밤, 헤이든과 함께 외궁을 지키던 병사들을 전멸시킨 린다는 헤이든과 아델라를 뒤로 한 채 그 공간을 벗어나야 했다.

헤이든은 린다가 도망가게 퇴로를 터 주었고, 린다는 헤이든이 주의를 끄는 틈에 도주했다.

왕궁 안의 상황이 매우 급하게 돌아간다는 걸 밖으로 알려야 했다. 이미 신분이 드러난 헤이든과 아델라는 들키기 쉬워 린다가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외궁에서 조금 떨어진 하녀들의 숙소로 숨어들어 간단한 짐만 챙기고 도로 나왔다.

외궁과 왕비궁 동시에 불이 나서 그런지 병사들이 하녀들의 숙소까지는 오지도 않았다. 외궁 하녀들은 전부 외궁 별채에 갇혀 있기도 해서 하녀들의 숙소까지 경계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나오자마자 본궁으로 향했다. 기척을 전부 지우고 병사들의 눈을 피해 조심히 움직였다. 린다는 주변이 잠잠해질 때까지 본궁에 숨어 있으려고 했다. 하지만, 본궁 주변 경계가 강화되어 당장 본궁에 숨어들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야, 저긴 또.’

현재 왕궁에서 가장 많은 병사가 있는 곳이 본궁이었다. 특히 이저드의 기척이 느껴지는 중앙 홀.

그녀는 하는 수 없이 현재 인기척이 아예 없는 본궁 옆에 식자재를 준비하는 건물로 몸을 피했다.

린다가 본궁 안을 주시하며 몸을 숨기고 있자 곧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데반트와 모튼이 본궁 밖으로 나왔다. 모튼은 정신없이 어딘가로 향했고, 데반트는 그를 따르며 기사들도 함께 데리고 갔다. 덕분에 린다한테 기회가 생겼다.

그리고 뒤이어 기사들이 누군가를 끌고 나왔다.

‘이저드 님?’

이저드는 그들의 손에 순순히 어딘가로 끌려갔다. 위치로 보아하니 감옥 같았다.

‘이저드 님까지 잡아가? 무슨 죄명으로? 아니지, 죄명이 뭐가 중요하겠어. 죄는 만들면 되고.’

린다는 인상을 구겼다.

‘생각보다 더 빠르게 일이 진행되는 것 같은데.’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저드가 눈앞에서 잡혀가는 데도 그녀는 도울 수가 없었다. 자칫 하다가는 모든 일이 어그러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린다는 이저드가 잡혀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며 악착같이 버텼다.

“놔라! 네놈들이 지금 누굴 잡은 줄 아느냐! 내 너희 얼굴 전부 똑똑히 기억하겠다! 세자가 왕이 될 수 있을 것 아느냐! 네놈들 전부 사형이다!”

본궁에 어느 정도 병사들이 빠지는 중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린다가 숨어 있던 건물에서는 상황이 보이지 않았지만, 저 커다란 목소리는 눈감고도 알겠다.

후궁들 괴롭힐 때도 어찌나 호통을 치던지.

“짐이 살아 있는 한, 아니, 죽어서도 이 자리는 짐의 것이다! 내 핏줄도 아닌 놈들한테 넘길 줄 아느냐!”

그의 목소리는 내궁 쪽으로 점점 멀어졌지만 워낙 커서 본궁 주변에 사람이 있었으면 다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린다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그제야 대충 감이 잡혔다.

‘모튼이 들었구나? 지가 왕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걸.’

그럼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일을 덮고 선위를 받으려고 할 것이다. 왕을 협박해서라도. 게다가 선위를 받은 후 모튼이 이저드를 가만 둘리 없다는 것도 린다는 알고 있었다. 그에 린다의 마음이 급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기다렸다. 급해져서 일을 그르치면 안 될 일이었다. 린다는 태어나 이토록 오래 어딘가에 숨어 있다 탈출한 적은 처음이었다.

본궁을 지키던 군사들이 내궁과 세자궁, 감옥 쪽으로 흩어지고 나서야 그녀는 본궁으로 숨어들 수 있었다.

그사이 빗줄기는 더욱 거세졌다. 본궁에 숨어들 때까지는 빠르게 뛰면 덜 젖을 정도였는데, 지금은 10초, 아니, 5초도 못 버티고 흠뻑 젖을 정도가 되었다.

린다는 그런데도 거센 빗줄기를 뚫고 달렸다. 굵은 빗줄기를 뚫고 진흙으로 엉망이 된 땅을 박차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아직 새벽이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2년 동안 지겹게 외웠던 수도의 지도와 동물적인 감각만을 의지해 뛰었다. 그래서 속력이 평소보다 적게 나왔지만, 그래도 충분히 빠른 속도였다.

번화가를 비롯한 골목길에도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수도를 순찰하는 경비병들도 드물었다. 덕분에 방해 없이 정예군이 모인 장소로 뛸 수 있었다.

‘이것들이. 왕궁은 미쳐 돌아가는데, 수도 안의 병사들은 군기가 빠졌네.’

일상이라 그런 건지. 린다는 정신없이 뛰는 와중에도 허술한 수도 경계를 파악하고 한껏 비꼬았다.

‘여기서 꺾은 후, 열 번째.’

어느덧 고지가 눈앞에 보였다. 그녀는 속으로 하나, 둘, 셋, 하고 숫자를 셌다.

“열.”

숫자 세는 것을 멈췄을 때, 그녀의 앞에는 2층짜리 허름한 저택이 나타났다. 희미한 불빛도 새어 나오지 않는, 꼭 사람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다른 건물에는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이 건물은 아니었다. 린다는 이곳임을 확신했다. 다행히도 자신의 감이 죽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빠르게 허름한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서도 린다가 온 걸 알아챘는지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린다 경!”

어둠 속에 조용히 숨어 있던 호위병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꼴은 정말 말이 아니었다. 비에 쫄딱 젖은 것은 물론, 진흙으로 옷도 더러워졌다.

“아리스 님은요?”

“여기 있습니다.”

린다가 아리스를 찾아 움직이기도 전에 아리스가 2층에서 걸어 내려왔다. 그도 린다의 흐트러진 상태에 꽤 놀란 표정이었다.

“일단 몸부터…….”

“아뇨, 아뇨. 그럴 시간 없습니다. 일단 이거 받으시고요.”

린다는 보자기에 메고 온 옥새를 아리스한테 넘겨주었다. 그리고는 호위병이 건네 준 수건으로 머리만 탈탈 털었다.

“왜 혼자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왕궁에 무슨 일이 생겼어요?”

“예. 왕궁 안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당장 계획을 실행해야 해요.”

“예? 아직, 각하께서 이끄는 부대가 수도 도착 전이라…….”

아리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린다를 보았고 린다는 잠시 고민했다.

“오늘 안에 오실 수 있나요?”

“내일 새벽이나 늦은 밤 정도에는 가능할 겁니다.”

“그럼 제가 수도를 빠져나가 각하께 이곳 상황을 알리겠습니다. 진군을 재촉해야 합니다.”

린다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그녀가 너무 태연하게 말하니, 오히려 정예 부대인 다른 호위병들이 말릴 정도였다.

“아니, 그렇게 젖은 상태에서 또 비를 맞으면 어떡합니까! 아무리 린다 경이라도 저 빗속에서 몇 시간 달리면 없던 병도 생기겠네!”

“차라리 제가 갈게요, 제가.”

물론, 이미 문고리를 잡은 린다가 보였지만.

“잠시,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나마 아리스의 말은 듣는 건지 린다는 걸음을 멈추고 아리스를 돌아보았다.

“안의 상황을 제대로 알려주세요.”

“이저드 님과 헤이든 경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조만간 둘한테 안 좋은 일이 생기겠죠. 왕은 모튼에 의해 내궁으로 잡혀간 것 같았습니다. 대신들도 아직 감옥에 있고, 지금으로서는 모튼을 막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모튼이 원하면 왕위도 강제로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린다는 자신이 보고 판단한 것을 그대로 말했다.

린다가 단 한 문장도 끊임없이 빠르게 말하자, 모두 잠시 멍하니 있었다. 하지만 린다의 설명만 들어도 지금 왕궁이 얼마나 혼란한지 알 것 같았다.

“이게, 제가 지금 한시가 급하게 행동하는 이유입니다.”

그녀의 말에 아리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린다 경 뜻대로 하세요. 다만, 옷은 제대로 갈아입고 가십시오. 그대로는 얼마 못 가 힘이 빠지실 겁니다.”

아리스의 명에 린다는 너덜너덜해진 하녀복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여태 정신이 없어서 복장은 신경도 못 썼다. 하녀 숙소에서 옷을 갈아입을 수 있었지만, 그때의 그녀는 오직 옥새를 챙겨 나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예. 감사합니다. 수도 안의 아군들은 준비가 다 된 상태 맞죠?”

“예, 각하의 신호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린다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얼른 옷을 갈아입으려 하녀복을 끌어내렸다. 그녀에게는 지금 이렇게 대화 나누는 시간도 너무 아까웠다. 모튼이 권력을 잡으면 무슨 짓을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야, 야야야야! 린다 경!”

“왜요?”

린다는 옷에서 한쪽 팔을 빼려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리스를 포함한 정예병들 전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여기서 옷을 갈아입으면 어째!”

“시간 없는데.”

“그건 알지만, 잠깐 들어가서 빨리 입고 나오면 되잖아!”

선 자리에서 옷을 갈아입으려 했던 그녀는 주변 정예병들에게 잔소리를 들은 후에야 방 안으로 들어갔다.

“쟤는 눈에 뵈는 게 없어질 때가 있어.”

“그냥 자각이 없는 거 아닐까요. 자신이 여성이라는.”

탁.

린다는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같은 몸뚱이인데 유난은. 바쁜데 갈아입을 수도 있죠.”

“난 가끔 보면 네가 백작가 아가씨라는 게 안 믿어져.”

“뭔 상관이야.”

그녀는 뚱하니 대답하고 검까지 받아 허리에 고정했다. 린다를 보면 정말로 저 집안은 어떤 자유분방함을 지닌 걸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예정보다 빨리 진행될 수 있게.”

“조심해서 다녀오십쇼.”

린다가 아리스를 향해 고개 숙였고, 아리스도 같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저택을 나와 곧바로 수도 성 서쪽 끝으로 달렸다.

정문과는 다르게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작은 문이 따로 있는 서쪽 성문에는 아군이 있었다. 그 덕에 린다는 조용히 말을 받아 성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 * *

“아델라!”

아침부터 모튼한테 불려 나가 정신이 없었던 아델라에게 아주 잠시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그때를 못 참은 레널드가 그녀의 방으로 달려왔다.

똑똑, 하는 노크 소리도 없이 다짜고짜 아델라의 방문을 열어젖힌 그는 들고 있던 빈 가방을 아델라에게 급하게 건넸다.

“너 당장 짐 싸.”

‘이 자식은 필요할 때는 어디 갔는지 코빼기도 나타나지 않더니,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아델라는 꽤 큰 크기의 짐 가방을 얼떨결에 받아 들면서 인상을 구겼다.

“빨리!”

그가 준 가방을 들고도 아델라한테 반응이 없자, 레널드가 그녀를 재촉했다. 오늘 단체로 자신의 속을 태워 죽일 작정인가. 아델라는 이상한 짓을 하는 레널드를 빤히 보았다.

“아, 뭐 해! 내가 싸 줘?”

“오라버니야말로 뭐 하는 거야?”

아델라가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러자 레널드는 신경질적으로 짐 가방을 자기가 들고 아델라의 옷장으로 향했다.

아델라의 허락도 없이 옷장 문을 여는 레널드를 아델라는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빤히 지켜보았다. 뭐가 그리 바쁜지 그는 손에 엉망으로 잡힌 옷을 전부 가방에 집어넣었다.

“뭐 하는 거냐고!”

아델라가 그의 팔을 붙잡으며 소리쳤다. 그제야 레널드가 행동을 멈췄다.

“너랑 나 둘 정도는 수도를 나갈 수 있어, 내가 손썼으니까. 중요한 거 없으면 버리고 가. 자.”

아델라만 두고 홀연히 사라지더니 한다던 일이 왕궁에서 도망치는 거였나 보다. 아델라는 황당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일인지 설명을 해야 할 거 아니야. 다짜고짜 짐을 싸라니?”

“너, 정말 몰라서 물어? 이저드 경이 곧 처형될 거잖아!”

“그거랑 오라버니가 이러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아델라의 물음에 레널드는 정말 답답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너랑 이저드 관계를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안 들킬 것 같아? 그리고, 너 이저드 죽는 거 아무렇지 않게 볼 수 있어? 못 하지? 분명 저하께서도 알게 되실 거야. 네 표정만 봐도 보이는데!”

아델라에게 따지듯이 말하는 레널드를 보며 아델라는 미미하게 인상을 썼다.

“그래서 들키기 전에 도망가자?”

“그래! 그러니까 얼른 짐 싸.”

“도망가서 잘도 살겠다.”

도망치는 삶이 얼마나 피 말리는지 아나 몰라.

“이저드를 포기할 거였으면 사형장에 가겠다고 하지도 않았어.”

“네가 거기에 가서 뭐 해! 둘이 연……!”

그는 연인 관계, 라는 말을 내뱉기 전에 얼른 속으로 삼켰다. 레널드는 주변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를 확 낮추고 화를 냈다.

“……연인이라고 해도 잊어! 이저드 경 못 살려. 네가 거기서 할 수 있는 게 뭔데? 둘이 얼마나 애틋한지 모르겠지만, 그 감정도 다 한때야!”

“한때일 수도 있겠지. 권태기가 올 수도 있고 헤어지게 될 수도 있을 거야. 안 겪어봐서 모르겠지만.”

아델라는 부슬비가 내리는 창문 밖을 빤히 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저드가 살아야 나도 살아. 설사 우리가 훗날 헤어지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살아 있어야 내가 살 수 있어.”

레널드는 헛웃음이 나왔다. 애가 이저드한테 단단히 빠져서 미쳤나 보다. 그러나 아델라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녀는 농담하는 분위기도, 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밖에 있는 분들을 믿어.”

아침보다 훨씬 맑아진 하늘을 보며 아델라는 마음을 단단히 다졌다. 이 정도 부슬비라면 군사를 움직이는데 크게 위험하지 않을 터였다. 아니, 설령 천둥번개가 동반된다고 해도, 미하일은 움직일 것이다.

“밖에……? 그, 거사?”

레널드에게는 전에 이저드와의 관계를 밝히며 대충이라도 설명했다. 처음에 싫다고 안 한다고 날뛰던 그는 그럼 다 같이 죽자는 아델라의 말에 얌전히 비밀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사실 모튼과의 신뢰가 많이 깨진 상태라 레널드도 대안이 필요했다. 그게 적통 왕족이면 두말할 것도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권력욕 때문에 여기까지 왔으니까.

“근데 그거, 완벽히 준비된 거 맞대? 군사적 움직임이 어디에도 없어. 보고된 서류들 전부 뒤져도 적군의 ‘적’ 자도 안 나왔다고! 심지어 펜베르크 성 수비는 아직도 견고하다는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하냐고! 너 속고 있는 거 아니야?”

레널드는 완벽한 확신이 필요했다. 눈에 보이는 게 없으니, 이리 불안할 줄은 몰랐다. 그는 오히려 전적으로 믿고 있는 아델라가 더 이상해 보였다.

밖은 너무 고요해서 왕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지도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이렇게 조용한데 군사가 언제 수도에 들어오고, 언제 거사가 진행된다는 말인가.

“하……. 좀, 참을성 같은 것 좀 길러라. 나나 다른 사람들이나 이저드 죽게 놔 두지 않아. 절대.”

아델라의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를 보니 레널드도 아주 조금 진정이 되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다른 의미로 걱정됐다. 만일 제때 군사들이 왕궁을 덮치지 않으면 아델라가 사고를 치지는 않을까, 하는.

“너 있잖아.”

“뭐.”

“절대, 허튼짓 하지 마?”

“허튼짓?”

“이저드 경이 죽게 생겼다고 처형대에서 난리를 피운다든지.”

“안 죽는다고.”

아델라가 그런 소리 하지 말라는 듯이 레널드를 노려보았다.

“아니, 만약에! 혹시라도.”

하지만 아델라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안심이 되지 않아 레널드가 아델레한테 재차 묻고 나서야 아델라는 결국 귀찮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레널드한테 당당하게 죽지 않을 거라 이야기하긴 했지만, 조금이라도 타이밍이 어긋나면 이저드가 죽을 수도 있는 건 사실이었다.

하늘은 벌써 노을이 져 있는 상태였다. 비는 거의 멈췄지만, 구름이 많이 끼어 있어서 평소보다 주변이 어두웠다. 아마 저 희미하게 보이는 노을빛도 곧 사라질 것이다.

저 노을빛이 사라지고 달이 뜰 때까지 아군이 수도에 도착할 수 있을까. 아델라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힐끔힐끔 하늘을 살폈다.

시간을 되돌려서 이 모든 것을 없던 일로 만들 수 있긴 하지만 그보다는 이저드가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아델라는 잊고 있던 과거의 일들이 생각나 머리를 저었다. 그의 목이 잘리는 건 앞으로 절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 운명을 바꾸려고 여기까지 온 건데 여기서 또 그 운명대로 흘러가게 놔둘 수 없었다.

아델라는 모튼을 따라 그의 곁에 서며 굳은 눈으로 사형대를 내려다보았다.

비공식이라는 모튼의 말대로 사형장 안에는 극소수의 사람만이 존재했다. 모튼한테 충성을 맹세한 대신들 몇과 왕실 기사단원들 몇 명 정도였다.

“죄인들을 데려오너라.”

모튼의 명에 이저드와 헤이든, 케스너 후작이 차례로 사형장에 나타났다. 아델라는 드디어 그토록 보고 싶었던 이저드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다행히도 크게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아델라는 해가 저물어 가는 하늘을 보면서 잠시 고민했다. 여기서 모튼의 시선을 분산해야 하나. 그렇다면 어떻게 시간을 끌어야 하나.

나팔 소리가 들리지 않을수록 아델라는 약간 초조해졌다.

그리고 이저드가 왕실 기사단 손에 이끌려 사형대 위에 올라가는 걸 보면서 그녀는 더 불안에 떨었다.

시간을 끌 게 있을까 싶어 주변을 빠르게 훑던 그녀의 눈이 경각을 다투는 순간에 이저드와 마주쳤다. 아주 잠시 그의 눈에 빛이 이는 듯했다. 하지만 곧, 그가 단호하게 고개를 한번 저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네 죄는 스스로 잘 알 것이다.”

자기가 온갖 죄명을 달아 몰아붙인 거면서.

아델라는 이저드의 뜻대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속이 배배 꼬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모를 수도 있지, 그럼. 하지만 네가 한 짓이다.”

모튼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혼자만 웃고 있었다. 그의 웃음은 왜인지 왕의 웃음과 닮아 있었다. 모튼을 지켜보던 대신들은 괜히 미친 왕이 떠올라 등골이 오싹했다.

“모든 증거와 증언이 널 향할 것이고 더 나아가 네 가문을 향할 것이다. 왜인 줄 아느냐? 내가 그렇게 마음먹었으니까.”

왕과 모튼이 친자 관계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자라온 환경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대신들은 모튼을 지지한 게 잘한 일인가, 차라리 몇몇 중앙 귀족들처럼 발을 뺄 걸 그랬나 하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제 와 발을 빼기에는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무려 제스트윈 공작가까지 망하게 할 계획에 동참했으니 말이다.

“그렇군요.”

이저드는 그의 비웃음에 무표정으로 답했다.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도 않았다. 사형대 위까지 올라왔으면 빌어도 모자랄 판에 이저드는 너무 당당했다.

덕분에 모튼의 표정이 싹 굳었다. 이저드 때문에 왕궁이 이 모양 이 꼴이 났는데 이저드는 하나도 미안하거나 반성하는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저 당당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한테 빌 줄 알았던 이저드가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으니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데반트 경.”

“예, 전하.”

모튼은 옆에서 대기하던 데반트를 불렀다.

“경의 검을.”

모튼이 그리 명하자, 데반트는 자신의 검을 뽑아 모튼에게 넘겼다. 검을 든 모튼은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왕이 앉는 자리 밑은 다른 곳과 다르게 한편에 작은 계단이 추가로 촘촘히 자리해 있었다. 왕이 사형대 아래에 내려가기 쉽게.

“생각해 보니, 너 때문에 내가 잃은 게 많아서 이리 쉽게 죽이면 안 될 것 같군.”

자신의 어머니는 불길 속에 고통받다 돌아가셨는데, 이저드는 고작 참수형이라니. 생각해 보니 불공평했다.

“일단, 사지가 멀쩡한 게 마음에 안 들어.”

모튼은 사형대 위에서 이저드를 향해 검을 들었다. 이저드는 검이 내리쳐지는 순간에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아델라는 모튼이 검을 휘두르는 순간이 너무나 선명하게 눈에 보였다. 눈을 감고 싶었지만, 감을 수 없어 괴로웠다. 그에게 향하는 검을 이저드가 전혀 피하지 않아 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진짜로 어디 하나 잘릴까 봐.

그에 그녀는 참고 참았던 목소리가 터져 나오려 했다.

“이―!”

다행히 그녀가 이저드의 이름을 크게 부르는 불상사는 생기지 않았다. 그녀가 입을 떼던 순간, 이저드가 움직였기 때문이다.

이저드가 움직이자 주변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모두의 행동이 멈췄다. 실제로 시간이 멈춘 건 아니었지만, 그들은 자신들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믿지 못해서 동작을 멈췄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이저드가 모튼의 검을 가볍게 피하고 되려 그를 제압하는 현장을.

눈앞에서 그를 결박했던 수갑과 줄이 풀리는 기행을 지켜본 대신들은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왕실 기사단원들도 적잖이 당황했다. 그리고 그 조용한 틈으로 어디선가 나팔 소리가 길게 들려왔다.

“뭐야? 무슨 소리야?”

대신 중 나팔 소리를 들은 이가 의아하게 하늘을 보았고 그제야 몇몇 기사들이 정신을 차리고 이저드한테 달려들었다.

퍽!

이저드한테 달려들던 기사들은 헤이든의 주먹에 하나같이 나가떨어졌다. 이저드와 헤이든의 몸놀림이 어찌나 빠른지 훈련받은 기사들도 그들의 행동을 좇기 힘들었다.

그리고 곧, 두 번째 나팔 소리가 왕궁 안에서 울려 퍼졌다. 전쟁을 알리는 신호였다.

“아델라! 내려오게!”

이저드가 급히 아델라를 부르자 아델라는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저건, 저건 또 뭐야.”

이저드에게 검을 뺏기고 바닥에 내팽개쳐졌던 모튼은 주춤거리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아델라를 발견했다. 아델라가 이저드를 향해 달려가는 게 그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의 표정은 평소 절대 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애타고 간절하고 걱정이 가득 담긴, 그런 표정을 모튼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남의 집 귀한 따님께 ‘저게’ 뭡니까, 저게. 왕이라는 놈이 단어 선택은, 쯧.”

달려드는 기사단원들을 단번에 벤 헤이든이 검에서 피를 털어내며 모튼에게 다가갔다.

“이게 무슨…?”

모튼은 떨리는 눈동자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형장 밖으로 큰 함성이 들리는 와중에, 사형장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켜보던 대신들은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닫고 꽁지가 빠져라 도망쳤고, 사형장을 지키던 병사들은 전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심지어 데반트는 맨 처음 모튼을 제압하던 이저드에게 달려들다 당했다.

사형장 안에서 사지 멀쩡하게 서 있는 건 이저드와 헤이든, 그리고 케스너 후작과 아델라 뿐이었다.

“네, 네놈! 네놈들!”

그는 이저드의 곁에 서 있는 아델라를 보며 그들에게 감쪽같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서로 모른 척 연기한 거고 실제로는 처음부터 아는 사이였던 것이다.

모튼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이저드에게 달려가 이저드의 멱살을 잡아챘다.

“너! 이―!”

자신이 이용하며 휘둘렀다고 생각했던 이들이, 모두 다 한편이었다니? 살면서 이렇게 뒤통수를 맞은 적은 처음이었다.

“설마, 처음부터 날 속인 것이냐? 처음부터 날 이용해서? 네놈, 반역을 계획하고!”

모튼이 이저드의 멱살을 있는 힘껏 잡았지만 이저드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이저드는 모튼의 손을 잡아 내려 가볍게 모튼을 떼어 놨다. 이저드가 그를 뿌리치며 밀자, 모튼은 휘청이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가 평생 오지 않아도 될 이곳에 왜 왔겠습니까.”

될 수 있다면 이저드도 다시 오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이곳에 있으면 어머니와 아버지가 당한 일들이 떠오르곤 했으니까.

“하! 이제야 네 시꺼먼 속내를 드러내는군! 왕의 자리가 그리 탐났나? 네가 반역을 저지르고 이 자리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그리 둘 줄 아느냐!”

모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저드를 한껏 비꼬았다. 그는 이저드를 도발하며 틈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저드는 한순간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 자리를 탐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전 그저, 명에 따를 뿐입니다.”

“명? 무슨 명을 말하는 거지?”

“…….”

그의 물음에 이저드가 말없이 모튼을 빤히 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이저드의 시선이 향한 곳은 사형장의 입구였다. 아무도 없는 입구를 그가 말없이 보고 있자, 모튼은 인상을 구겼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사형장 주변에 여러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 인기척 중 몇몇이 사형장 입구로 향했다.

“저분이 제 주군이십니다.”

이윽고, 사형장 안으로 하얀색 바탕에 황금빛 무늬가 수놓아진 제복을 입은 건장한 사내와 병사들이 나타났다. 그들의 가장 앞에 선 사내는 어둠 속에서도 묻히지 않는 강한 인상의 사내였다.

“돌아가신 데릭 왕세자 저하와 엘레나 왕세자빈 저하 사이에서 태어나신, 아리스 이레이저 님입니다.”

이저드의 소개에 모튼의 눈이 아까보다 훨씬 흔들렸다. 죽은 줄만 알았던 첫째 왕자가, 왕실의 적통이 돌아온 것이다.

* * *

같은 시각, 수도를 지키는 수비병들은 난리가 났다.

그들은 평소와 같이 대충 보초를 서고 대충 순찰을 돌며 여느 때와 같은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나팔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그들은 아주 평화로웠다.

수비병들은 전부 들릴 리 없는 나팔 소리를 환청으로 들은 건가 싶었다. 왜냐하면 저 나팔 소리는 보통, 전쟁이나 위급한 소식을 알리기 위해 나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런 소리가 수도에서 날 리가 없었다. 건국 이래, 제베르 왕국의 수도는 한 번도 점령당한 적이 없었다. 그 때문에 그들이 정신을 놓은 것도 이해가 되긴 했다.

나팔 소리는 그들이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다시 한번, 크고 길게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두 번째 나팔 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수비병들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그들 중 누구도 전쟁이라는 상황을 실제로 겪어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전쟁을 대비하는 훈련도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이들이었다.

“성문이! 중앙 성문이 열리고 있습니다!”

“서쪽 성문도요!”

“뭐?! 어떤 미친놈이! 당장 닫아! 누가 파발을―!”

수비병들에게 그나마 명령을 내리던 선임이 우뚝 멈췄다. 그의 목소리가 돌연 끊기자 모두 어리둥절하게 그가 있던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복면을 쓴 사람이 그에게 검을 꽂고 있었다. 퍽, 하고 검을 빼내자 남자의 몸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침입자! 침입자다! 전하께 알려!”

성벽 위에서 전방을 주시하던 수비병들은 자신의 말을 하나도 실천하지 못 하고 쓰러져갔다.

성벽 위가 시끌시끌한 사이, 멀리서부터 무섭게 말을 몰고 온 미하일 공작과 그를 따르는 귀족들의 군대는 그대로 왕궁이 있는 왕성까지 달렸다.

이들은 전쟁보다는 왕을 압박하고 수도 내 병사들의 사기를 깎아 항복하게 만드는 게 목적이었다.

어수선해진 거리에서 수도 사람들은 전부 도망쳤다.

처음에는 저 나팔 소리가 뭔가 하던 이들도 커다란 중앙 거리를 통과하는 군대를 보고 저마다 집으로 들어가 절대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두려운 눈빛으로 가끔 창문을 바라보았지만, 그조차도 군대가 점점 많아지자 하지 않았다.

서쪽은 물론, 동쪽에서까지 군사들이 몰려들었다.

수도를 거침없이 가르던 군사들은 각자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하러 흩어졌다. 수도 안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수비병들의 숙소를 덮치고 제압하는 일이었다.

“각하! 전 먼저 가서 아리스 님께 상황을 알리겠습니다!”

미하일의 뒤를 착실히 따르던 린다가 먼저 앞서 나와 외쳤고 미하일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하일의 허락에 린다는 기다렸다는 듯이 흩어졌다. 그런 린다를 몇몇 호위병들이 따랐다.

린다는 곧바로 비밀 통로가 있는 곳으로 말을 몰았다. 지하 수로와 통하는 비밀 통로는 아리스와 정예병들이 지나간 듯 훤히 열려 있었다. 통로의 끝에서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말에서 내려서 그대로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역시 안에서는 한창 왕실 기사단과 정예군 몇이 싸움 중이었다.

“아리스 님은요!”

린다는 바로 검을 꺼내 들고 싸움 한복판에 뛰어들며 물었다.

“이저드 님께 가셨습니다!”

“사람들은 전부 피신 시켰습니까?”

“다행히 숙소 밖으로 나온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여기 맡깁니다!”

“예? 저, 린다 경!”

뒤에서 그녀를 애타게 불렀지만, 린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중앙 홀을 빠져나갔다.

간단하게 왕실 기사단원 여럿을 제압하면서 접전 중인 곳을 빠져나가는 린다를 모두 황당하게 쳐다보았다. 밀리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린다가 나서면 여기도 금방 정리될 상황이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이 더 노력하기로 했다.

* * *

본궁에서 사형장까지는 멀었지만,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달리면 빠르게 주파할 수 있었다. 정신없이 달려 도착한 린다는 사형장 입구에서 누군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모습을 보고 말의 고삐를 쥐어 멈췄다.

“놔라! 어디서 그딴 거짓말을! 첫째 왕자는 죽었다! 감히 왕족으로 사칭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줄 알아?!”

저 목소리 톤, 어디선가 들어본 것도 같았다.

‘친자식은 아니라도, 그런 왕을 보고 자랐으니 저리 닮은 건가?’

린다는 왕과 아주 똑 닮은 모튼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모튼은 사형장 바닥에서 구른 건지 여기저기 흙먼지가 묻어 병사들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그는 가만 안 두겠다는 둥, 거짓은 곧 들통날 거라는 둥, 온갖 막말을 남기며 잡혀갔다.

그가 병사들한테 끌려가자, 안쪽에서 사람들이 나왔다. 아리스를 필두로 이저드, 헤이든, 아델라 등등.

“아리스 님!”

린다는 곧바로 말에서 내려 그에게 다가갔다.

“린다 경!”

동시에 린다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린다는 그들의 목소리에 푸핫, 하고 웃음이 터졌다. 아리스를 포함한 아델라와 이저드, 헤이든마저 린다를 부르고 있었다.

사실 린다는 매우 피곤한 상태였다. 그걸 정신력 하나로 버티고 있었는데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있으니 이렇게 쉼 없이 달린 보람은 있는 것 같았다.

“전 아주 괜찮으니 걱정 마세요. 상황을 전하러 왔습니다. 각하께서는 현재 왕성을 통과하셨고 왕궁 정문으로 곧 진입하실 겁니다. 나머지 부대들도 각자 자리를 지키고 있고 성벽 위는 제압된 상태입니다. 지금 교전 중인 곳은 수비병들의 숙소와 왕궁 안뿐입니다.”

린다는 간단하게 현재 상황을 알리고 고개를 숙였다.

“고생 많았습니다. 정말 몸 괜찮은 겁니까?”

“예, 그럼요. 참, 전에 너무 급해서 말씀 못 드렸는데, 말 놓으십시오.”

“아…….”

아리스는 뒤늦게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도 계속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십 몇 년을 그리 살았으니 고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나저나, 왕은 만났습니까?”

아까 중앙 홀에서 느낀 바로는 아직 왕은 내궁에 있었다.

“아직. 내궁 주변에 병사를 배치해 두긴 했네.”

“그럼 내궁으로 가시죠. 다들 이날만 기다렸지 않습니까.”

린다가 아리스를 포함한, 이저드, 아델라까지 번갈아 보며 웃었다. 그녀의 말에 아리스는 굳은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온 이유를 그는 다시금 상기했다.

“린다 경과 헤이든 경을 필두로 병력 반은 제스트윈 공작 쪽을 돕고, 나머지 반은 나를 따른다!”

아리스가 말에 올라타며 명하자 모두 그의 명령에 고개를 숙였다. 그가 막 고삐를 쥐고 방향을 틀려는 순간에 멀리에서 병사 하나가 달려왔다.

“아리스 님! 아리스 님! 지, 지금 당장 내궁으로 가 보셔야겠습니다!”

병사는 말에서 내리며 아리스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인가?”

“왕이, 이 미친놈이! 왕의 침실은 물론, 제 몸에도 불을 붙였답니다!”

“예?!”

병사가 들고 온 소식에 아리스보다 주변 사람들이 더 놀라 소리쳤다. 그들은 아주 잠시 제자리에 굳었지만, 금세 대열을 정리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아델라!”

병사에게 말을 받아 탄 이저드가 아델라에게 손을 뻗었다. 아델라가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꽉 쥐자 그는 힘 있게 아델라를 잡아 올려 말 위에 태웠다.

“가요!”

아리스를 포함한 이저드와 아델라는 왕이 있는 내궁으로 향했고, 린다와 헤이든은 미하일 쪽으로 흩어졌다.

* * *

‘이렇게 죽게 둘 수 없어.’

아델라를 포함한 모두의 마음이었다. 왕을 이리 죽게 둘 수 없었다. 왕은 자기가 뿌린 대로 전부 거두고 죽어야 했다.

아리스와 이저드는 말을 좀 더 세차게 몰았다. 원래라면 더 걸릴 거리였지만, 말이 좋아서인지 체감 상 5분도 안 걸린 것 같았다.

마침내 그들 앞에 내궁이 나타났다. 다행인 것은 불이 붙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심하게 타지는 않았고 밤새 내린 비와 오전에 내린 부슬비로 땅이 축축이 젖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상황이 어찌 되지?”

막 도착한 아리스가 곧바로 말에서 내려 물었다.

“근방에 물을 공수할 곳이라고는 본궁 주방 쪽과 외궁 호수 쪽이라 그쪽으로 사람을 보냈습니다.”

“왕은?”

“불을 붙인지는 얼마 안 된 것 같긴 한데, 아무래도 몸에 불이 붙어 병사들이 맨손으로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왕이 자기 몸에 손대면 같이 죽을 거라고 난리를 피우는 통에…….”

“병사들은?”

“저 안에…….”

“뭐? 불이 났는데 사람을 들여보내면 어쩌나!”

아리스가 버럭 화를 냈다.

왕이 이대로 죽으면 어떤 벌도 못 받고 죽게 된다는 건 매우 화가 나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놈 때문에 아군이 허무한 희생을 당하는 건 더욱 안 됐다.

망설임 없이 내궁 안으로 뛰어 들어가려던 아리스를 이저드와 아델라가 잡아 멈췄다.

“안 돼요! 제가 다녀올게요!”

“저희가!”

아리스가 막을 새도 없이 둘은 병사들이 깨 놓은 창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불이 많이 난 것 같지 않았는데 들어와 보니 안에 이미 연기가 자욱했다. 쉽게 눈치채지 못하게 안부터 태웠나 보다. 미친 사람.

아델라와 이저드는 지체 없이 기척이 느껴지는 복도로 뛰었다. 그곳에는 왕이 타는 제 몸으로 병사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피부가 활활 타고 있어 누가 봐도 고통스러운 상황이었는데, 왕은 마치 피부가 녹는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듯이 그저 낄낄 웃고 있었다.

“크하하, 하하하하!”

그는 미친 듯이 웃으며 다가오면 죽이겠다는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경들 전부 나가게!”

멀리에서 이저드가 뛰어오는 것을 발견한 호위병들은 더 안절부절못했다.

“이저드 님! 여기 계시면 안 됩니다!”

“여기 계시면 안 되는 건 전부입니다! 얼른, 나가세요!”

뒤이어 따라온 아델라가 그들에게 말하자, 호위병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왕과 이저드를 번갈아 보았다.

“아리스 님의 명령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저드가 그렇게 외치자, 호위병들은 그제서야 전부 주춤주춤 물러섰다.

이저드를 두고 가면, 자신들이 모시고 있는 미하일을 볼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곧 왕위에 오를 아리스의 명을 거부하자니 그건 명령 불복종이 되어 버린다.

“하지만! 전하를 지키는 것도 저희의 일이지만, 공작가를 지키는 것도……!”

“걱정하지 마세요. 안 죽습니다. 전부 돌아가십시오. 이건 제 명령이기도 합니다.”

이저드는 그렇게 말하며 병사들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손에는 평소 잘 끼지 않는 가죽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무, 무슨 방법이라도 있습니까?!”

“방법이 아예 없진 않죠. 이저드 님 말씀대로 얼른 움직이세요. 저희도 곧바로 따라 나가겠습니다.”

아델라가 호위병들을 향해 부드럽게 웃어 주고 이저드의 뒤를 따랐다. 그녀의 얼굴에는 약간의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병사들은 둘의 뒷모습을 보다가 머뭇머뭇 좀 더 뒷걸음질 쳤다. 그들은 끝까지 이저드와 아델라를 주시하며 물러섰지만, 바로 창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얼른요!”

아델라가 소리치자,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 깨고 들어왔던 창문으로 향했다. 그들이 나간 것을 확인한 이저드는 아델라에게 바짝 다가와 입을 열었다.

“창문 깰 거니까 고개 숙이게.”

왕과 거리가 딱 두 발자국 남았을 때, 이저드가 아델라를 향해 나직이 말했다. 아델라는 이저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냉큼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그 얇은 장갑으로 뭘 할 수 있다…… 고, 어억?”

확! 퍽!

고개를 숙인 아델라의 위로 뜨거운 무언가가 홱 지나간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곧,

와장창!

하는 소리가 아델라의 귓가를 울렸다.

이저드가 가차 없이 활활 타는 왕의 멱살을 잡아 복도 창문으로 날려 버린 것이다.

쨍그랑도 아니고 와장창 소리가 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튼튼하고 멀쩡한 창문을 온몸으로 깨부순 거였으니까 말이다.

아마 창문을 깬 충격은 왕이 그대로 받았을 터였다.

“이리로.”

이저드는 검집으로 깨진 창문의 뾰족한 부분을 정리한 뒤 아델라를 보았다. 그의 시선에 아델라는 금방 상황을 파악하고 창문을 뛰어넘었다.

이저드의 손에 내팽개쳐진 왕은 볼썽사납게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바닥이 축축해서 불길은 약해졌지만 아무래도 몸에 기름을 두른 탓인지 쉬이 불이 꺼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상하게 왕은 아픔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분명, 창문을 몸으로 깬 것도 큰 충격이었을 텐데 말이다.

“흐흐, 흐흐흐. 네놈, 네놈도 내 자리가 탐나더냐? 아닌 척하더니, 날 협박해서 너도 짐의 자리를 탐하려고! 그래서 짐을 살리려고 하느냐? 내가 죽었다가 깨어나도 네놈들한테는 못 넘겨! 여긴 짐의 자리야!”

왕은 사실 모튼에게 가짜 옥새를 던져 주었다.

모튼이 왕의 권한을 대행하며 옥새를 여러 번 사용했지만, 그 옥새는 따로 만들어진 거였다.

자신 역시 선왕에게 억지로 왕위를 빼앗아 왕이 되었기에 왕은 훗날 자신도 혹, 국새를 뺏길 때를 대비해 미리 방 깊숙한 곳에 숨겨놨었다. 모튼에게 선위를 할 때 온전히 물려주려고.

당시에는 모튼에게 왕위를 빼앗길 줄 모르고 했던 일이었는데, 지금은 그 덕분에 배신자에게 왕위를 넘기지 않게 되었다.

“너희는 짐에게서 무엇도 뺏어갈 수 없다! 왕위는 내 것이야. 내 어찌 지켜낸 자린데 네놈들한테 넘겨!”

형을 죽이고, 아내를 죽이고, 자식을 죽이고, 수많은 방해물을 치우고 어렵게 버틴 자리를 그 누구에게도 줄 수 없었다.

그런 꼴을 볼 바에야 전부 없애 버리는 게 맞았다.

옥새도, 왕위를 이을 왕족도, 그리고 왕위도.

자신이 가질 수 없다면 없앤다. 그는 평생 그렇게 살아왔다. 그리고 지금도, 그럴 생각이었다.

그친 줄 알았던 비가, 다시 그의 볼을 차갑게 식히기 전까지는 그랬다. 모든 게 자기 뜻대로 이루어질 줄 알았다. 평생 그리 살아왔으니까, 이번에도 그렇게 될 줄 알았다.

‘평생 불행하세요.’

이번에도 엘레나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왕의 볼에 무언가 톡, 하고 떨어지더니 이내 걷잡을 수 없는 엄청난 양의 비가 쏟아져 내렸다.

쏴아아―

아니, 비라기보다는 거의 물 폭탄에 가까운 양이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물 폭탄.

엄청난 물세례에 아델라는 몸을 가누기 힘들어 눈을 꼭 감은 채 자리에 주저앉았고, 이저드는 그런 그녀에게 달려가 꽉 안아 주었다. 아델라가 최대한 비에 젖지 못하게 그는 커다란 품에 그녀를 더 끌어당겨 가뒀다.

* * *

비는 생각보다 금방 그쳤다. 퍼부을 때는 미친 듯이 퍼붓더니,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이 환한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왕은 뜬 눈으로 맑게 갠 하늘을 넋 놓고 올려다보았다. 그는 이토록 허무함을 느낀 적이 없었다.

기름이 든 램프를 찾아 내궁을 이 잡듯이 뒤지고, 비상용으로 구비된 작은 성냥에 하나하나 불을 붙여 침실을 태우기 위해 그리 애를 썼는데.

고작 비가 조금 많이 왔다고 모든 게 물거품이 됐다. 고작 비가 왔다고!

램프에 기름이 모자라 다른 램프를 찾고 또 찾고, 내궁 창고까지 뒤지던 자신의 행동은 뭐란 말인가. 이리 허무하게 사라질 거였으면 그런 비루한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악! 악!”

그리고 뒤늦게 모든 고통이 몰아서 그에게 찾아왔다.

불길 속에 피부가 녹는다는 기분을 느낄 때는 하나도 아프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 고통이 너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를 지배했던 희열은 어디 가고, 죽고 싶다는 절망 밖에는 남지 않았다.

아델라는 이저드의 곁에 안겨 있다가 왕의 비명에 놀라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이저드가 그녀의 시야를 차단했다.

“보지 말게. 잠시 이러고 있어.”

왕의 몰골이 징그러워 아델라가 보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았다. 까맣게 탄 피부가 몸 곳곳에 보였고 녹아내린 한쪽 얼굴은 말할 것도 없었다.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왕의 비명이 더 커지자, 이저드는 아델라의 귀를 양손으로 꽉 막아 주었다.

“이저드 님! 아델라 님!”

멀리서 둘을 발견한 린다가 두꺼운 담요를 가지고 뛰어왔다. 그녀는 흠뻑 젖은 이저드와 아델라에게 빠르게 담요를 둘렀다.

“둘 다!”

“악!”

“죽으려고 환장―!”

“으으으으…….”

“아오, 저놈은 뭔데 시끄러워!”

린다의 말끝마다 신음이 터져 나오는 왕에게 그녀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여기! 왕 살았습니다! 잡아가세요!”

무모한 둘에게 한껏 잔소리를 퍼부어 주려다 막힌 린다는 호위병들에게 빨리 오라고 손을 흔들었다.

“근데 왕, 정말 살아 있는 거 맞습니까? 곧 죽을 것 같은데.”

왕을 이송하러 온 호위병들이 인상을 구기며 린다에게 묻자, 린다는 어깨를 으쓱였다.

“죽으면 명이 거기까지인 거죠. 저 몸으로는 차라리 빨리 죽는 게 축복일걸요. 물론 그런 축복 없길 바라지만.”

호위병들은 어찌어찌 들것에 왕을 실은 채 자리를 떴다.

그들이 멀어지는 것을 빤히 쳐다보던 린다는 곧 이저드와 아델라를 향해 잔소리를 퍼붓기 시작했다.

둘은 린다에게 엄청나게 혼났지만, 전보다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린다의 잔소리를 듣고 있으니까 정말로 실감이 났기 때문이다. 모든 게 끝났다는 것이.

‘아, 끝이구나…….’

이제 마냥 기뻐해도 되는구나. 마음을 안 숨겨도 되겠구나.

이제 정말…… 죽지 않겠구나.

회귀하는 걸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이제 드디어, 진짜로 끊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지독했던 운명의 고리를. 아델라도, 이저드도, 드디어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 후, 왕궁에는 폭풍 같은 시간이 찾아왔다.

할 일이 어찌나 많은지 아리스와 미하일, 그리고 이번 거사에 가담한 지방 귀족들과 중앙 귀족들까지 모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그동안 업무가 너무 많이 쌓여 하루도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어찌나 바쁜지 심지어 가장 급한 왕의 처분도 미뤄 둔 상태였다. 왕을 폐위시키긴 했지만, 그에게 벌을 내리기에 앞서, 왕궁부터 재정비해야 했다.

내궁을 비롯해, 왕비궁과 외궁까지 전부 불에 타 재건 작업이 불가피했다. 거기에다가 아무 죄 없이 감옥에 갇힌 이들을 풀어 주고 전쟁이 난 줄 아는 수도민들을 진정시키는 것도 일이었다.

왕이 유희를 즐긴다는 명목으로 만들어 놓은 몇몇 건물들의 처리도 문제였다.

어찌나 일이 많은지, 그동안 좌천되거나 파직되었던 원로 귀족들이 대부분 돌아왔음에도 일의 진행이 더뎠다. 그들이 없던 시간 동안 보고서는 개판이 되어 있었고, 서류로 남겨 놓지 않은 부분도 너무 많았다.

“내 그 자식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반드시 그럴 겁니다. 전하께서 안 하시면 제가 합니다. 가만 안 둘 거예요.”

“일을 이딴 식으로 하고, 왕궁이 돌아간 게 신기하군요.”

아무것도 없던 중앙 홀이 임시 회의실 겸 업무실로 변했다.

거의 20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묵혀 둔 서류들을 전부 모아 놓을 공간이 마땅치 않았다.

결국 다들 책걸상 하나와 서류 더미를 중앙 홀에 모아 놓았다. 심지어 왕좌에까지. 부서별로 섞인 서류도 있어 분류해야 했기 때문에 그들은 전부 중앙 홀에 모일 수밖에 없었다.

“이거, 대관식도 있기 전에 과로로 죽겠어.”

“그전에 좌천된 인사들부터 다시 불러들여야죠. 일 잘하던 놈들 전부 파직됐구먼. ……죽었거나.”

한순간 주변이 숙연해졌다.

과거 원로 귀족과 함께 부서를 운영했던 이들은 전부 거의 죽거나 소식이 끊겼다. 아마 살아남은 이는 나라를 떠났거나 지방 귀족들처럼 속세를 떠나 살았을 확률이 높았다.

그 때문에 당장 부서 일을 맡길 인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아, 찾았습니다! 선왕 전하의 친필 문서!”

“잘했네.”

“잘했군.”

중요한 서류 중 하나를 기껏 저 많은 서류 더미 속에서 찾았더니, 다른 이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다들 자기 일하기도 바빴기 때문이다.

“다행이군. 감사하네. 백작 덕분에 대조해 볼 수 있게 되었어.”

그의 공을 알아주는 이는 아리스뿐이었다. 냉큼 서류를 들고 아리스의 책상으로 달려간 그는 그 위에 가지런히 서류를 놓았다. 아리스가 가지고 있는 국새와 같은 모양의 국새가 찍힌 서류는 선왕, 그러니까 아리스에게는 할아버지가 되는 이가 쓴 것이었다.

그가 선왕의 친필 문서를 찾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고, 자신의 선위서와 비교해 보기 위함이었다.

케스너 후작 부인이 국새와 함께 보관했던 선위서. 그것은 아리스의 어머니가 아리스의 임신 사실을 당시의 선왕에게 알리며 받아낸 것이었다.

억지로 선위를 하게 된 선왕은 아들에게는 가짜 옥새와 그 가짜 옥새가 찍힌 선위서를, 그리고 진짜 선위서는 세자빈이었던 엘레나에게 넘겼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게 아리스라는 이름을 지어 주면서.

언젠가 시간이 흘러 아리스가 큰 후에 그 선위서가 쓰일 날이 있을 거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하며 선왕은 선위서를 엘레나에게 넘겼다.

“왕궁이나 수도에 필체를 감정할 수 있는 이가 남아 있나?”

케스너 후작 부인이 전해준 말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왕위에 오르는 길에 장애물은 없으면 없을수록 좋았다.

“왕궁에서는 필체를 감정할 일이 많지 않기에 궁에는 없지만 수도에는 오랫동안 귀족들의 유서를 감정해 주던 이가 있긴 합니다. 한데……, 아직도 살아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혹시, 케스너 후작님은 아십니까?”

“아, 그분. 돌아가셨습니다.”

수도에서 생활하던 케스너 후작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자 물어본 원로 귀족은 혀를 끌끌 찼다.

“에잉, 그 노인네도 나이가 많긴 했지.”

“아뇨. 왕, 아, 아니죠, 이제. 폐왕에 의해서요.”

“어휴, 썩을.”

“폐왕이 그 사람을 왜 죽여요?”

몇몇 귀족들이 어리둥절하게 케스너 후작을 보자 케스너 후작은 서류를 보며 대답했다.

“20년 전에 말 많았잖습니까. 선왕 전하께서 쓰신 선위서가 사실이냐, 아니냐로. 갑자기 선위하신 거니까요.”

“아…….”

모두 대충 이야기를 이해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폐왕의 횡포에 또 죄 없는 이의 목숨이 스러진 것이다.

또한, 20년 전 폐왕이 선왕에게서 억지로 받은 선위서의 사실 여부를 운운한 귀족들도 전부 목이 달아났다.

“일단 제가 그분의 자식들을 수소문해 보겠습니다. 혹은 제자가 있었는지도요.”

“그래 주면 고맙겠군. 그리고 선왕 전하의 친필 문서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 찾게 되면 이쪽으로 넘기게.”

“예.”

그때의 사건으로 선왕이 친필로 적은 서류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폐왕이 강제로 왕위를 뺏은 후, 전부 처분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전대 왕이 남긴 서류를 전부 없애 버리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건지. 보통은 왕의 유산은 쉬이 건드리지 않는데. 폐왕의 행동은 상상을 초월했다.

당시에 왕가 유형 재산의 유실을 막으려던 사서들도 전부 죽였다니 정말 지독한 이였다.

“그나마 그때 문서를 빼돌린 이들이 있어 다행이죠. 그것도 없었으면 선왕 전하와 돌아가신 세자 저하께서 만들어 놓은 제도도 전부 저희가 수기로 기록해야 했을 수도요.”

한 귀족의 말에 다들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어휴, 상상만 해도…… 당시 두 분의 뜻을 옆에서 보고 정리하신 분들은 거의 돌아가셨는데, 그걸 수기로 다시 하다니요.”

20년도 더 된 일이었다. 그래서 당시 요직에 앉았던 가주들은 대부분 죽었다. 그나마 살아 있는 이는 케스너 후작 부인뿐이었다.

“그렇다고 케스너 후작 부인을 불러들일 수도 없고.”

“그분께는 저희가 가서 받아 와야죠. 기억이라도 해 주시면 다행이게요.”

그에 케스너 후작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당시에 왕궁의 요직에 관심이 없어 자신의 영지만 다스리던 때라 왕궁의 사정은 정확히 몰랐으니까.

어쨌든 이렇듯, 그들은 매우 바쁜 며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제 서류의 반을 정리한 그들은 앞으로 죄인들에 대한 판결도 내려야 했다.

그저 폐왕의 명에만 따르는 걸로 끝난 게 아니라 직접 폭정에 가담하여 왕국민의 고혈을 짜내 제 배를 불린 이들부터 그보다는 약하지만, 폐왕의 악행을 옹호한 자들까지.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 자들은 아주 많았다.

그뿐만 아니었다. 기이하게 틀어진 국왕 산하의 조직들도 바로 세워야 했고, 벼슬아치들이 미쳐 날뛰는 지방 기관들도 전부 다시 감사를 봐야 했다.

그리고 폐왕에게 밉보여 수도에서 쫓겨나거나 아예 작위가 해제된 귀족들 또한 복귀시켜야 했다. 그리고 또, 이번 일을 성공시킨 이들에게 그에 마땅한 상도 내려야 했다.

“간신 짓하던 놈들은 작위 박탈과 유배를 보내는 쪽으로 할까요?”

“유배 보내면 돌 맞아 죽을 놈들 여럿 될 걸요.”

“그렇다고 이미 많은 피를 흘린 상태라 전부 처형하기도 보기에 좀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흘린 건 아니지만 폐왕이 워낙 사람을 죽였어야죠.”

사실 가서 죽으라고 유배 보내는 거기도 했지만.

원로 귀족들은 판결문을 쓰기 전에 사람을 추리며 의견을 나눴다.

“사람은 이렇게 처리한다고 쳐도, 건물들은 다 어찌합니까.”

“아…….”

중앙 홀 안에 탄식이 퍼졌다.

폐왕이 돈을 펑펑 쓴 원형 경기장이나 사냥터, 그 외에도 여러 별궁과 같은 장소들을 생각하면 그들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화려한 건물들은 없애는 데에도 큰 비용과 인력이 들어 당장은 그 모든 것을 해결할 여력이 없었다. 안 그래도 국고가 비어서 당장은 귀족들의 비상금까지 털어야 할 지경이었다.

“처리 비용은 공작가에서 대겠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처리할지를 의논하죠.”

그때 여태까지 조용히 서류를 처리하던 미하일이 역시나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예? 가, 각하께서요?”

“예. 지금 왕궁 국고로는 감당하기 힘드니까요.”

“그럼 펜베르크 지역은…….”

“펜베르크 지역을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그 정도 감당할 여력은 됩니다.”

모두의 시선이 미하일에게 향했지만, 미하일은 그저 자기 일을 처리할 뿐이었다.

물론, 이곳에는 제스트윈 공작가에 도움을 받지 않은 가문들이 없었지만, 그들은 정확히 제스트윈 공작가가 얼마만큼의 재력이 있는지 잘 몰랐다. 그저 주변을 도울 수 있을 정도의 재력은 축적해 두고 있었구나, 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제스트윈 공작가는 여태 단 한 번도 주변에 부를 자랑하거나 뽐낸 적이 없었다. 오히려 가문의 위세에 비해 검소한 생활을 했다. 그래서 귀족들은 전부 공작가가 그리 큰 재산을 가지고 있지는 않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펜베르크 지역은 제베르 왕국을 통틀어 가장 전쟁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지역이었다. 그 때문에 잘 모르고 겉으로만 보면 전쟁으로 피해를 입어 재산을 많이 축적해 놓지 못했을 거라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펜베르크 지역은 전쟁이 잦을 뿐이지, 전쟁의 피해가 크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펜베르크 지역은 다른 나라하고 그리 멀지 않아 무역도 활발히 이루어지는 지역 중 하나였다. 또한, 자급자족할 수 있을 만큼 토양도 비옥했다.

보통 펜베르크는 잦은 전쟁으로 위험한 지역이라는 인상이 강했지만 실제로 펜베르크 지역을 잘 아는 이들은 살기 가장 좋은 곳이라고 꼽았다.

잦은 전쟁이 일어나면서도 이주민들이 살기 좋은 지역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다니 말 다 했다. 물론 1순위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역시 이오스와 전쟁이 자주 일어나서였지만.

“각하께서 나서 주시면 저희는 숨이 트이죠. 세를 더 걷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왕권이 교체되자마자 다른 나라에 빚을 질 수도 없는 일이고요. 이미 빚이 많지만요.”

다행히도 그쪽은 작위를 박탈하고 재산을 몰수할 간신들에게 뽑아내면 됐다.

행정부 서류를 훑던 이를 포함해 그곳에 있던 귀족들 대부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리스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오게 귀족들을 끌어준 것도 미하일이었는데, 지금 또 도움을 받고 있었다. 아리스는 그에게는 정말 큰 빚을 졌다 생각했다. 대를 거듭해도 못 갚을 정도의 빚이었다.

아리스는 그런 미하일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에게 큰 빚을 졌네.”

“그렇게 생각지 마십시오. 나라를 위해 제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그곳에 있던 이들은 다시금 깨달았다. 저런 제스트윈 공작가를 멀리하고 배척한 폐왕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누구보다도 왕권을 든든하게 받쳐 줄 가문을 고작 질투에 눈이 멀어 멀리하다니. 그만큼 어리석은 왕도 역사상 아마 없을 것이다.

미하일 덕분에 회의는 다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 * *

모튼과 왕은 처형되지 않았다.

회의하던 귀족들 사이에서 뜨겁게 논란이 된 부분이었지만, 결국, 그리 쉽게 죽이면 안 된다는 결론으로 의견을 모았다.

모튼과 왕비는 왕실을 기만한 죄로 왕가에서 아예 이름이 지워졌고, 모튼이 왕의 자식이 아니었다는 것도 공표되었다. 모튼이 세자궁에 데려다 놓았던 왕비의 시체는 황량한 들판에 버려졌고, 모튼은 외딴 섬에 갇혀 평생 나오지 못하게 됐다.

마지막으로, 폭정을 일삼던 왕. 아니, 이제는 폐왕이 된 그는 폐위되어 깜깜한 지하 감옥에 갇혔다. 사방이 어둠인 감옥은 어디가 입구고 어디가 출구인지도 보이지 않는 공간이었다. 보통 사형수들을 가둬 놓는 곳인지라 방 상태도 매우 열악했다.

그리고 폐왕이 강제로 선위하게 한 선왕을 죽기 전까지 가둬 놨던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그는 자신이 행했던 일을 하나하나 돌려받는 중이었다.

그런 곳에 실제로 있어 본 적 없던 폐왕은 알 수 없는 악취와 울퉁불퉁한 바닥, 잘 나오지도 않는 식사와 고요한 주변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다.

더구나 그는 불에 탄 곳이 짓무르고 망가져 거동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몸을 아예 못 쓰는 건 아니었지만 고통 때문에 움직이는 것 자체가 지옥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오돌토돌한 바닥에서 몸을 움직일 때마다 비명을 질렀다.

그의 몸은 매일 붕대를 갈아야 하는 상태였다. 하지만 죄인에게 의원을 붙여줄 리 없었다. 그는 자신의 몸이 썩어가고 있음을 느끼면서도 쉬이 죽지 못해 점점 미쳐갔다.

이상했다. 고통스러워 죽겠는데, 이제 죽을 것 같은데, 죽음을 예감하는데, 아슬아슬하게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왜, 왜, 왜!’

오직 떠오르는 단어는 그것뿐이었다.

항상 눈을 감고 뜨면 눈앞에는 어둠뿐이었다. 미칠 것 같은데 미치지 않았고, 정신을 놓고 싶은데, 정신이 놓이지 않았다. 그게 그에게 내려진 벌이었을까.

그는 그 후에도 한참 동안, 아니, 꽤 오래도록 목숨을 부지하며 그곳에서 천천히 말라 비틀어져 갔다.

후에 폐왕은 지하 감옥에서 죽었지만, 시체가 썩어 냄새가 심하게 진동할 동안 아무도 그가 죽었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원래도 썩은 냄새가 심했기도 했고, 감옥을 찾는 이라고는 밥을 넣어 주는 병사밖에 없어서 더욱 그랬다.

그의 시체를 수습하던 병사들에 의하면 폐왕의 시체는 이미 벌레가 들끓어 흉측한 몰골이었다고 했다. 시체를 본 몇몇은 구토를 했고, 몇몇은 꿈에 나올까 두려웠다고도 말했다.

결국 한때 왕이었던 자의 시체는 굶주린 짐승들이 사는 황무지에 버려졌다고 한다.

물론, 이 일은 지금보다 조금 더 미래의 이야기였다. 아직은 벌어지지 않은.

지금의 폐왕은 이제 막 감옥에 갇혔고 그의 폭정을 등에 업은 채 이득을 취한 귀족들 또한 단죄를 받고 있었다.

폐왕의 폭정이 길어져 나라 안팎이 황폐한 상태라 최대한 피를 덜 뿌리는 형태로 가려 했지만, 처형이 아예 없을 수는 없었다.

몇몇 가문의 가주는 사형이 내려졌고, 대부분의 귀족은 작위 박탈과 평생을 유배지에서만 보내게 되었다. 모튼도 포함해서.

그리고 레널드에 대한 판결은.

“아델라! 이게, 이건, 아니, 난!”

그는 아침 댓바람부터 아델라를 찾아왔다. 창문을 냉큼 뛰어넘으려던 아델라는 한숨을 푹 쉬며 멈췄다. 아델라를 마주본 레널드의 표정은 매우 억울해 보였다.

“가주 자리도 뺏긴 채 저택으로 돌아가라고 하면 유배당하는 거랑 뭐가 달라?”

그에게는 그런 판결이 내려졌다. 그가 왜 억울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나마 아델라가 있어 그 정도로 끝난 거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내가 이러려고 널 도운 게 아닌데…….”

“하, 오라버니는 날 도운 게 아니고 그냥 입을 닫아 준 것뿐이잖아.”

“내가 입을 뗐으면 이 계획도 성공 못 했지!”

“허어…… 오라버니가 입을 뗐으면 죽었지. 무슨 오라버니 덕분이야.”

주변에서 그걸 가만 두고 볼 리가. 아니, 그 전에 아델라가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오라버니가 뭔가 많이 착각한 모양인데, 그 덕분에 오라버니 목숨 구한 건 줄 알아. 가문이 사라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지. 고작 파직당하고 저택에 좀 돌아가라 했다고 억울한 표정으로 달려올 건 뭐야?”

아델라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하지만 레널드의 미간은 여전히 풀릴 줄을 몰랐다.

“고작 파직? 야! 너 내가 여기까지 올라오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넌 오라버니가 이렇게 됐는데 너무한 거 아니냐?”

“내가 그런 오라버니 살려 주겠다고 모튼의 손아귀에서 빼내 줬잖아. 이런 적반하장이 다 있나.”

아델라가 레널드를 흘기자, 그제서야 레널드는 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아델라의 말 중에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레널드가 거사에 합류한 건 맞지만, 거사의 맨 마지막에 합류해서 크게 도울 게 없었다. 그는 그저 다된 밥상에 숟가락만 얹었, 아니지, 이 정도면 그냥 다 차려진 밥상을 그저 맛있게 먹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정도면 너그러운 판결이지. 오라버니는 모튼의 개라고 불렸던 사람인데.”

“개, 개? 야, 너 그래도 그렇지, 사람을 개라고…….”

“내가 그런 거 아니고, 주변에 소문 쫙 났거든. 가주 자리 잠시 뺏긴 거 가지고. 그런 거로 투덜댈 거면 빨리 고향이나 내려가.”

더 들을 가치도 없다 생각한 그녀는 훌쩍 창문을 뛰어넘었다. 레널드는 그녀가 넘어가는 걸 멍하니 보기만 했다. 아델라가 뭔 짓을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 해?”

“도망가잖아.”

“어디에서 어디로? 왜?”

“다들 자꾸 쉬라고 말리며 어디 나가지도 못하게 하니까.”

크게 아픈 곳은 없었지만, 그동안 무리했다며 주변에서 하도 말려서 그녀는 며칠 내내 침대에만 누워 있었다. 태어나 이렇게 과보호 받기는 처음이었다. 덕분에 숙소 근처로 나가지도 못했고 이저드는 더욱 만날 수가 없었다.

“아델라! 너 아팠던 거 아니야? 어디 가!”

“음…… 집?”

“집? 집이면 나랑 같이 가지, 왜 굳이……?”

“내가 왜? 내 집은 펜베르크 성인데?”

“뭐? 야! 야, 아델라! 이젠 네가 가주라고!”

레널드가 창문으로 바짝 다가와 소리쳤지만 아델라는 이미 발을 뗀 상태였다. 그녀는 레널드의 외침에 앞으로 나아가려다 말고 그를 휙 돌아보았다.

“아, 그럼 가주의 명으로 오라버니가 저택 좀 지키고 있어! 어차피 내가 혼인하면 오라버니 지위는 다시 돌아갈 거잖아. 그러니 미리 가서 저택 관리 좀 해.”

“어? 어어? 아델라!”

전에도 생각했지만, 저 작은 몸으로 어디서 저런 기운이 솟아나는지?

그가 창문을 뛰어넘었을 때, 아델라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 * *

아델라는 시녀들의 숙소를 빠져나와 말을 타고 달려 기사단 숙소로 향했다.

사실 둘은 본궁의 귀빈실을 쓸 예정이었지만 본궁이 현재 너무 복잡하여 원래 각자 쓰던 방으로 돌아가 있었다. 특히 거의 비어 있는 시녀 숙소와 기사단 숙소는 다른 관료들의 임시 숙소로 쓰이고 있기도 했다.

아델라는 아침부터 본궁으로 서류를 들고 출근하는 몇몇 관료들을 아득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얼른 이저드가 있는 숙소로 향했다.

“거기서 뭐 하나?”

“헉!”

나름대로 기척을 숨기고 이저드의 방을 살피려고 했는데 이저드가 엉뚱한 곳에서 튀어 나왔다. 방 안이 아니라 방 밖에서.

이마에 땀이 맺혀 있는 것을 보니, 훈련하고 온 모양이었다.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면 게을러질 법도 한데 이저드는 꾸준했다.

“이저드!”

며칠만의 재회였다. 아델라를 보는 이저드의 얼굴도, 이저드를 보는 아델라의 얼굴도 환하게 폈다.

“몸은 괜찮나? 요즘 계속 잠만 잔다던데 어디 아픈 건 아닌가?”

“예? 누가요?”

“사람들이. 그대가 그동안 피곤했는지 계속 잠만 잔다며 나보고 그대의 곁에 절대 가지 말라더군. 절대 안정이라며.”

“잠은 아니고, 침대에 계속 누워 있긴 했어요. 강제로.”

둘은 잠시 침묵했다.

둘이 붙어 있으면 쉬기는커녕 사고라도 안 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호위병들의 배려 아닌 배려였다.

“그분들의 마음이 조금 이해되는 것도 같네요.”

“뭐가 말인가?”

“우리가 한시도 가만히 안 있을 거라는 걱정? 저, 집에 가려고 했거든요.”

“집?”

이저드는 아델라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곧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녀가 말하는 ‘집’이 어딘지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님께?”

“네. 아무래도 좀 걱정돼서요.”

아델라가 탈출(?)을 감행하며 나온 이유는 그거였다.

아직 릴리아의 죽음이 남아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까지 합해서.

물론, 전생과는 많은 것이 달려졌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걱정됐다. 괜찮다는 소식을 며칠 전에 전서구로 받았는데도, 그래도, 그래도 그녀가 보고 싶었다. 그녀의 얼굴을 마주해야 그제야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준비해서 바로 가지. 그대 괜찮겠나?”

“네! 저 지금 완전 팔팔해요! 이저드는요?”

“나도 그렇네.”

* * *

귀족들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 왕궁에 숨어서 스파이 일을 했던 이들은 전부 휴가를 받았다. 각자 휴가를 받은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린다도 그중 하나였다. 린다는 바깥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아침 바람을 맞으며 기사들이 사용하는 대기실 소파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리고 진짜로 이제 막, 깊은 잠에 빠지려고 할 참에 익숙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응? 숙소에서 쉬고 계시다고 하지 않았나?’

린다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고 천장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이 기척은 분명 아델라가 확실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당연하게도 이저드가 함께했다.

‘두 분 다 어디 가시나?’

그녀는 잠시 창밖을 빤히 쳐다보다가 하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델라와 이저드였기에 계속 누워 있을 수 없었다. 혹시라도 무슨 일을 벌일까 봐. 이젠 모든 게 끝났다지만, 방심할 수 없게 만드는 둘이었다.

린다가 움직이자 아델라와 이저드의 기척이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린다와 마주쳐도 괜찮은지 둘은 계속 걸음을 옮겼다. 셋은 기사단 건물과 가까운 곳에서 마주쳤다.

“린다 경!”

“저랑 대놓고 만날 정도면 사고치는 건 아닌가 보네요.”

린다는 환한 얼굴의 둘을 보고 괜한 기우였다는 것을 알았다. 밝게 미소 짓는 둘을 보며 린다는 그저 함께 피식 미소 지었다.

분명 펜베르크 성에 있을 때 많이 본 표정임에도 꽤 오래도록 둘의 저 표정을 못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왕궁에 그리 오래 머문 것도 아닌데 항상 긴장하고 있어서 그런지 오래 머문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어디 가십니까? 이른 아침부터.”

“집이요!”

“집이요?”

그녀는 잠시 이저드와 아델라의 표정을 살피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세요.”

“더 안 물으세요?”

“어차피 펜베르크 성에 가려던 거 아니에요?”

린다의 물음에 아델라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저드 님이 붙어 있으니 위험할 건 없을 것 같고 릴리아 님 만나러 가는데 샛길로 빠질 것 같지도 않고요.”

둘을 너무 잘 알고 있어 탈이라고 할까. 린다는 씩 웃으며 둘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조심히 가세요. 전 지금 매우 피곤한 상태라 한숨 자고 따르겠습니다.”

“아니에요! 더 쉬다 오세요! 린다 경 지금 되게 피곤해 보여요.”

“피곤한 건 맞지만, 왕궁이 그리 편하게 쉴만한 장소는 아니라서요.”

아무래도 이런저런 일이 있었으니 왕궁이 심적으로 편한 장소는 아니었다.

“그리 하게. 우리 먼저 펜베르크 성에 가 있겠네.”

“예. 각하께는 제가 말씀 드리겠습니다. 한숨 자고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둘만의 시간을 갖는 데 내가 낄 이유도 없고, 피곤한 건 맞으니까.’

린다는 서로를 보며 웃는 얼굴로 걸음을 옮기는 아델라와 이저드를 힐끔 보더니 기사단 건물로 들어섰다. 텅 빈 기사단 건물에 살랑이는 바람이 린다와 함께 들어와 주변을 채웠다. 린다는 오랜만의 여유를 만끽하며 대기실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녀도 휴가를 받았지만 그동안 왕궁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후궁들과 귀족들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증언을 하느라 제대로 쉬지 못했다. 오늘 겨우 모든 걸 정리하고 제대로 된 휴가를 즐기려던 참이었다.

린다는 하품을 한번 하고 대기실 소파에 길게 누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잠에 빠져든 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린다는 아주 약간 후회했다.

자기 전에 먼저 각하께 알릴 걸 그랬나, 하고.

어쨌든, 그렇게 린다가 잘 자고 있는데 벌컥, 대기실 문이 열렸다. 이제 막 잠들었는데 누가 또 자신의 잠을 방해하나 싶었다.

“야! 린다! 아, 경! 아무리 찾아 봐도! 어? 뭐야? 자냐?”

린다가 소파에 누워 있는 걸 확인한 헤이든이 움찔 걸음을 멈췄다.

“한 시간 잤다, 한 시간. 너 때문에 깼거든? 뭐야.”

린다가 눈을 뜨고 그를 째려보았다. 헤이든은 그녀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너도 피곤을 느끼긴 하는구나.”

“사람이라면 피곤을 다 느끼거든. 그래서 뭐냐고. 뭘 찾아?”

“아니……. 도련님하고 아가씨가 없어서. 전하께서 찾는데, 각하께서도 함께.”

“…….”

두 분 바쁜 거 아니었나? 뭐 이리 빨리 찾아?

린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현재 아리스와 미하일은 일에 치여 주변을 신경 쓸 경황이 없었다. 그래서 한숨 자고 보고하려던 거였다. 괜히 일하는 데 신경 쓰이게 할까 봐.

“아침에 떠나셨어. 펜베르크 성으로.”

“뭐? 두 분만?”

“어.”

“왜 안 말렸어?”

“왜 말려?”

린다가 오히려 되묻자, 헤이든이 약간 당황했다.

생각해 보니, 이저드가 있었기에 둘 다 위험할 일은 없었다. 근데, 둘은 안 피곤한가? 체력이 너무 좋은 거 아냐?

제대로 쉬지도 않고 둘이 바로 펜베르크 성으로 돌아갔을 줄은 몰랐다.

“전하와 각하, 두 분 다 바쁘실 것 같아서 이따 전하려고 했는데. 마침 잘됐네. 좀 전해 줘라.”

“내가 전해 주면 뭐 해 줄 건데.”

헤이든이 다시 눈을 감고 자려는 린다를 빤히 보았다.

“날 깨운 죄는 묻지 않으마. 됐지?”

“야! 네가 해야 할 일을 내가 해 주는 건데, 무슨!”

감았던 눈을 뜬 린다의 표정에는 정말 피곤함이 그대로 묻어나왔다. 제발 안 꺼져? 같은 표정이었다. 헤이든은 약간 억울했다. 자기는 잘못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넌 각하와 전하의 명을 받아 둘을 찾는 거였지.”

“어.”

“그리고 내가 답을 줬어. 그렇지?”

“그, 그렇지?”

“그럼 가서 둘의 안부를 전해야 할 사람은 누굴까?”

헤이든이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자신 같았다. 맞는 말인데 속은 것 같은 이 기분은 뭐지.

“볼일 끝났으면 나가.”

린다는 그를 귀찮아하며 손을 휘휘 저었다.

“잘 거야? 그대로?”

“어. 왜?”

불편해 보이는데 왜 굳이 소파에서?

“침대가 편하지 않아? 어차피 지금 기사단 숙소 텅텅 비었는데 가서 자. 아니면 귀빈실이나.”

“잠깐 눈만 붙이고 나도 펜베르크 성으로 곧 떠날 거야.”

“응? 그럼 아까 두 분하고 같이 갔으면 되잖아.”

이 자식 계속 나불거릴 건가.

린다는 헤이든을 패서 쫓아낼까 잠시 고민했다. 감았던 눈을 뜬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이 헤이든을 보았다.

“넌 정말 눈치를 말아 먹었냐. 거기 왜 껴.”

“어? ……아.”

헤이든은 곧 둘이 연인 사이라는 걸 깨닫고 조용해졌다.

“이제 가라? 한 번만 더 말 걸면…….”

“가, 간다, 가. 누가 보면 내가 너한테 말 걸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 같겠다!”

하도 쫓아내려고 하니까 괜한 오기가 들었지만 그 오기로 인해 맞을 수가 있었기에 헤이든은 대기실 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는 그러다 문득, 또 무언가 생각나 반사적으로 입을 열어 버렸다.

“아 참, 근데 너한테…… 헉!”

짜증이 잔뜩 난 얼굴의 린다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그대로 성큼성큼 헤이든의 앞에 바짝 다가갔다.

코앞까지 다가온 린다의 얼굴이 헤이든은 약간 낯설게 느껴졌다. 어째서인가 그 순간, 그녀의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확 눈에 들어왔다.

“뭐, 왜, 뭐. 용건은 한 번에 다 꺼내라고. 별거 아니면 죽는다?”

바짝 붙은 거리에 헤이든은 급히 숨을 삼켰다. 왠지 숨소리 하나 잘못 냈다가는 이승과 하직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밀조밀하기는 개뿔. 자신이 잠시 미쳤었나 보다. 완전 야수가 따로 없었다.

짜증이 가득한 린다의 얼굴에 피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타오르는 그녀의 눈빛은 정말로 한대 칠 것 같았다.

“아, 아니야. 이따 이야기하지, 뭐. 나갈게, 나가! 나 나간다?”

쾅!

파스스, 하고 뭔가 가루가 된 것도 같은…….

헤이든은 자신의 옆에 날아든 린다의 주먹을 보고 속으로 비명을 삼켰다. 나무로 된 문이 움푹 파였다.

“별거 아니면 맞는다고 했는데.”

사람이 졸리니까 눈에 뵈는 게 없어지는 건가. 린다가 짜증내는 모습은 많이 봤지만, 저렇게 눈이 풀린 적은 처음이었다.

“그, 그게! 제국에서 연통이 와서! 너, 너 찾던데…….”

“하이크 제국?”

“어, 어.”

“첫짼가? 아님 둘째? 누가 소식 접했나?”

린다는 주먹을 가볍게 털며 다시 소파로 돌아갔다.

“내가 나중에 연락한다고 해.”

그렇게만 말한 린다는 다시 기다란 소파에 몸을 뉘었다.

“그, 래……. 쉬어.”

그런 린다를 멍하니 보다가 얼른 정신을 차린 그는 린다가 잠에서 깨기 전에 빠르게 대기실에서 나왔다.

십년감수했다.

그는 앞으로 린다가 극한으로 몰려 피곤할 때는 절대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 * *

덜컹거리는 마차 속에서 아델라는 담요를 두르고 이저드의 어깨에 기대 잠을 청했다.

둘 사이에 평소와는 다른 여유로움이 깔려 있었다.

잠시 창밖을 구경하기도 하고, 도란도란 대화도 나누거나 졸리면 서로에게 기대 잠을 청했다.

릴리아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많은 일이 해결되어 전보다는 한결 나아졌다. 그때와는 다르게 지금은 목숨을 걸 일도, 누군가에게 비밀을 들킬까 봐 전전긍긍할 일도 없어졌다.

“아델라.”

이저드가 눈을 감고 있던 아델라를 깨웠다. 눈을 뜬 아델라는 의아한 표정으로 이저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창밖을 힐끔 보며 환하게 웃었다.

“……펜베르크 성이네요.”

“그래. 거의 도착했으니 그만 일어나게.”

창밖으로는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펜베르크 성이 보였다.

수도에서 본 성에 비해 투박한 모습의 성벽이었지만, 어쩐지 더 웅장해 보였다. 어떤 침입도 불가한 펜베르크 성은 수도의 성보다 훨씬 찬란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기분 탓일지도 몰랐지만, 우뚝 솟은 성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였다.

앞으로 평생 살아갈 공간이라 그런가. 아니면 그동안 많이 그리웠던 건가? 점점 가까워지는 펜베르크 성을 보며 아델라는 술렁거리는 마음을 진정할 수가 없었다.

‘펜베르크 성을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맨 처음, 루의 손을 잡은 채 태어나서 처음 보는 웅장한 성의 모습에 입을 다물지 못할 때만 해도 그녀는 자신의 미래를 예측하지 못했다.

원래 미래라는 것이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긴 했지만, 아델라는 더 그랬다. 루와 함께 펜베르크 성에 입성할 때만 해도 그녀의 앞에 이토록 수많은 일이 펼쳐질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단 한순간도.

욘제타 네에서 일을 하다가 가게를 차리게 되고, 전쟁이 일어나서 성이 함락당하는 것을 지켜보게 될 때도 그녀는 다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대로 죽는 줄만 알았다. 그리고 그 새로운 인생이 그녀를 긴 고통 속으로 끌고 들어가게 될 줄도 몰랐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수 없이 같은 천장을 보고 수 없이 죽임을 당하는 중에, 결국 자신이 펜베르크 성을 지키는 선택을 하게 될 줄도 사실 몰랐다.

어떻게든 살아야 하니까, 그래서 어떤 희망이든 걸어 봐야 했기에 그 길을 택했을 뿐이다. 계속 죽는 이 굴레에서 벗어날 방법이 그것밖에는 없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말이다.

실제로 수비병 일을 하면서 이 전쟁을 끝낼 실마리를 발견하기도 했고.

“이저드.”

“음?”

무엇보다 이저드와 연인 사이가 되고 그를 살리기 위해 죽음도 불사할 줄은 더욱 몰랐다.

‘결국 왕을 바꾸는 일까지 하게 됐지.’

다른 이들에게는 믿기 힘든 이야기일 것이다. 아니, 믿으려고 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허구의 이야기로 사라져도 상관없었다. 그녀를 믿어 주는 단 한 명만 존재한다면, 그녀는 아무래도 괜찮았다. 이 이야기는 아마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가 살아 있고,

그녀도 살아 있었으니까.

그가 알고,

그녀도 알고 있었으니까.

“아델라?”

자신을 불러 놓고 아무 말이 없는 그녀를 이저드가 걱정스럽게 보았다. 잠시 이저드를 올려다보던 아델라는 그의 손을 꼭 잡고 입을 열었다.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해서 하는 말이지만, 살아 있어 줘서 고마워요.”

이저드는 그런 아델라의 작고 따스한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네. 살아 있어 줘서 고맙고, 살려 줘서 고마워.”

그의 품은 따뜻했다.

아델라는 그의 어깨에 고개를 폭 박았다.

이상하게 펜베르크 성이 보이자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진짜 집에 돌아와서 그런가. 왕의 처분에 관한 내용을 듣고 수도가 차차 정리되며 왕궁의 일이 해결되는 것을 들으면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지금은 마음이 놓였다. 아델라가 수없이 겪었던 죽음에서 이제야 벗어나는 기분이었다.

웅장하게 서 있는 펜베르크 성이 아델라를 반겼고, 전쟁에서 죽지 않은 이저드가 아델라를 단단히 안고 있었다. 미하일 공작도 죽지 않았고 케스너 후작 부인도, 그리고 아델라의 어머니, 릴리아도, 아무도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그녀는 그 모든 게 꿈같기도 했고 믿기지 않았지만, 너무 행복했다. 너무 행복해서, 그래서 또 잃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가슴 한편에 남아 있긴 했다.

“이번 생은 지킬 거예요.”

아델라가 자신의 품에 고개를 박고 웅얼거리자 그녀의 얼굴을 보기 위해 이저드는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안 잃을 거예요.”

얼마나 힘들게 여기까지 왔던가. 수많은 회귀를 넘고, 많은 이들을 살리며 여기까지 도달했다.

아델라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흔들림 없었다. 이저드는 그녀의 눈가에 입을 맞추고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래. 그대가 원하는 대로 될 거네. 나 또한, 두 번 다시 그대를 잃지 않아.”

그 말이 듣고 싶었다. 그렇게 될 거라는,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거라는, 그 말이 듣고 싶었다. 아델라는 그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처음이었다.

죽음에 대한 걱정 없이 마음 놓고 울어 본 적은.

* * *

싱그러운 햇살이 작은 거실로 쏟아지던 그날 아침, 릴리아는 거실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졸면서 꿈을 꿨다.

오늘같이 햇살이 맑게 비추는 날에, 그 햇살을 닮은 황금빛 눈을 지닌 아이가 성큼성큼 집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아이의 미소는 평소보다 더 햇살 같았고 아름다웠으며, 행복해 보였다.

“아델라!”

릴리아는 잠에서 깨어 확 고개를 들었다.

“꿈이었구나…….”

텅 빈 집안에는 새가 지저귀는 소리만이 자리했고, 그녀가 그토록 걱정하는 아이는 없었다.

릴리아는 요 며칠 불안해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정확히는 아리스가 정말 미안하다고 몇 번이나 이야기했던 날부터였다. 왜 미안하냐고 물어도 그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래 놓고서 그날 그는 케스너 후작 부인과 릴리아를 뒤로하고 펜베르크 성을 조용히 떠났다.

케스너 후작 부인은 아무 걱정 말라고 릴리아를 다독였지만 이상하게 불안해서 쉬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리스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아니면 아델라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그런 걱정 때문에 오늘 아델라의 꿈을 꾼 모양이었다.

“휴.”

릴리아는 바느질하던 것들을 옆으로 전부 치워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씨가 너무 좋아 빨래라도 해야겠다.

바쁘게 일하지 않으면 계속 안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릴리아는 일부러 일을 만들어서 움직였다. 이따 오후에는 욘제타네 식당 일을 돕기로 했다. 몸이라도 부지런히 움직여야 나쁜 생각이 사라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날씨가 좋네.”

그녀는 빨래를 널러 밖에 나왔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보니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은 환기되는 것도 같았다.

그래도 그녀는 밖을 지나가는 말이나 마차를 신경 써서 보았다. 혹시라도 아델라가 타고 있을까 싶어서. 분명 일주일 전에 아델라한테 잘 지내고 있다는 편지를 받았음에도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했다.

‘아휴, 나도 주책이네. 지나가는 사람들 전부 쳐다보고 있게.’

그녀가 픽 웃었다. 그녀는 자신이 유난스럽다고 생각했다.

수도에 어련히 잘 있을까. 아리스도 무슨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거겠지. 언젠가 말해 주겠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릴리아는 애써 고개를 저으며 빨랫감을 있는 힘껏 펴서 빨랫줄에 널었다. 그렇게 마지막 빨랫감을 널던 순간이었다.

“어머니!”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에 삐끗한 릴리아가 놓친 빨랫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릴리아는 아주 잠깐 환청이 들리는 줄 알았다. 아니면 아직 꿈속이거나. 멀리서 도도도 달려오는 아이를 천천히 돌아보며, 릴리아는 정말로 이 모든 게 꿈인 줄 알았다.

하긴, 수도에 잘 있다던 아델라가 짠 하고 눈앞에 나타났으니 못 믿을 만도 했다.

“아델라?”

“어머니!”

아델라가 릴리아 품에 폭 파고들자, 그녀는 그제야 아이가 진짜라는 것을 알았다.

“아델라, 너 어떻게……. 일은 어쩌고…….”

릴리아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아이를 마주 안았다. 아이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아델라가 그녀의 품에 파고들어 절대 떨어지지 않아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진짜 어머니다…….”

일이 얼추 정리되어 간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펜베르크 성으로 오길 잘했다.

릴리아가 살아 숨 쉬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아델라는 너무 기쁘고 행복했다. 릴리아의 환경은 전생과는 많이 달라졌고 몸도 훨씬 좋아졌지만, 그래도 전생에 죽었던 시기가 되니 불안했다.

케스너 후작 부인도 원래 전생에 죽었을 시기를 지났고 미하일 공작도 죽지 않았지만, 만에 하나라는 전제가 있었다.

아델라는 릴리아를 껴안고 그녀가 살아 있다는 것을 느꼈다.

맞닿은 심장이 뛰고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고, 방금 빨래를 널어서 그런지 시원한 물 향기도 났다. 그 모든 게, 그녀가 떠나기 전 그대로였다.

“아델라? 얼굴 좀 보자. 응?”

릴리아는 안겨 오는 아델라를 떼어 놓으며 이리저리 그녀를 살폈다. 왠지 전보다 살이 약간 빠진 것도 같았다. 그런데 표정이 너무 환해서 괜찮아 보였다.

“잘 지낸 거야?”

“음, 잘은 지냈지만! 왕궁 일이 너무 힘들어서 뛰쳐나왔어요!”

“너무 당당하게 말하는 거 아니니?”

릴리아는 황당한 표정으로 아델라를 보다가 그만 웃음이 나와 미소 지었다. 이러면 안 되는 줄 아는데, 아델라가 돌아왔다고 하니, 마음이 놓였다.

“다녀왔어요! 저…… 들어가도 되죠?”

“여기가 우리 집인데 들어가고 말고 할 게 어디 있어. 어서 와.”

릴리아가 환하게 웃으며 아델라를 맞이했다.

“점심은, 먹어야 하지?”

“네!”

“뭘 해야 할까? 손님도 있어서 고민되네. 들어와서 쉬고 있어. 금방 준비할게.”

릴리아는 조금 멀리 있는 이저드에게 시선을 준 후, 집안으로 들어갔다. 마당에 남은 아델라는 이저드를 돌아보았다.

“저, 티 안 나는 거 맞죠?”

“그래. 티 안 나네.”

아델라와 이저드는 펜베르크 성에 사실 지금보다 더 일찍 도착했다. 하지만 아델라가 울어서 눈가가 벌겋게 변하는 바람에 몇 시간이나 마차에 있다가 왔다. 이저드의 대답에 아델라는 다행이라 생각하며 배시시 웃었다.

“점심, 드시고 가실래요?”

“영광이지.”

이저드가 기쁘다는 듯이 미소 지으며 아델라를 향해 한발 한발 내디뎠다. 그녀의 저 미소가 언제까지고 사라지지 않길. 이 행복이 더는 흔들리지 않길.

그는 바라고 또 바랐다.

이번 생이 회귀의 종지부이길.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