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4장. 그녀는 찾고 싶다
왕궁 사람 대부분이 잠든 늦은 밤, 이저드를 주시하던 자객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주 작은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내지 않고 날렵하게 몸을 움직였다.
환한 달빛에도 모습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그들은 확실히 잘 훈련받은 암살자들인 것 같았다.
그들은 이저드의 약한 기척이 느껴지는 방 바로 앞까지 도착했다. 몇몇은 문 앞에서, 나머지는 창문 앞에서 대기했다. 신호를 보내면 한 번에 들어갈 작정이었다.
달칵.
방문 앞에 대기하던 이가 먼저 문을 열자, 밖에 있던 자객들이 그 작은 소리를 듣고 창문을 동시에 열었다.
“에이, 도련님 암살하려면 노력 많이 해야겠어.”
퍽!
한껏 비꼬는 목소리의 출처를 확인하기도 전에 자객들은 전부 바닥에 쓰러졌다. 손이 얼마나 빠른지 그들은 신음도 내지 못하고 전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암살에 실패하면 입안에 넣어둔 독약을 씹어야 했지만, 그럴 시간조차 없었다.
“한 백 년쯤? 아. 그럼 이미 죽겠구나. 그럼 이번 생엔 틀렸네.”
안타깝게도 헤이든의 신랄한 비꼼은 그들 중 누구도 들을 수 없었다. 이저드 방 창밖에 대기하고 있던 자객들을 전부 처리한 그는 입맛을 다시며 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나뭇가지처럼 픽픽 쓰러지는 자객들을 보며 한껏 실망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요즘 대련도 별로라 심심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자객도 별로라니. 시간 낭비만 한 기분이었다.
“죽였나?”
헤이든과 비슷하게 방 안에 들어선 자객들을 눈 깜짝할 사이에 처리한 이저드가 헤이든을 돌아보며 물었다.
“아니요. 살짝 쳤습니다. 멍은 들겠지만.”
멍을 들 정도가 살짝, 이라는 기준에 들어갈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헤이든의 입장에서는 정말 봐주고 친 거지만.
“표정은 왜 그러나?”
“아, 아닙니다. 그냥 조금, 다들 실력이…….”
그렇게 말하며 헤이든은 미간을 구겼다.
마음 같아서는 펜베르크 성에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호위병들 아무나 잡아서 대련해도 이 정도로 허무하지는 않았는데.
“제 기대가 컸나 봅니다. 수도는 뭔가 다를 줄 알았거든요.”
이저드도 헤이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암살자라고 불리는 자들의 실력이 엉망이었다. 그가 답답해할 만했다. 뚱한 헤이든을 보며 웃던 이저드의 표정은 곧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이 일이 끝나면 펜베르크 성에 돌아가 마음껏 대련하게. 우선은 일부터.”
“예, 해야죠, 일. 이렇게 긴장감 없는 암살은 처음입니다.”
헤이든은 이 상황이 참 어이없었다. 실력도 안 되는 것들을 붙일 바에야 차라리 모튼처럼 기회라도 엿보지. 이렇게 막무가내로 암살자부터 붙일 생각을 하다니, 어리석어도 너무 어리석었다.
어중이떠중이를 자객이라고 붙였다가 그 자객들이 죄다 당했다고 하면 앞으로 더 심한 방법을 쓸까 봐 약간 걱정되기는 했다. 하지만 의연하게 서 있는 이저드를 보고 있으면 도저히 당할 것 같은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경이 그만큼 강한 거라 생각하게.”
“이렇게 허무하게 실패했으니, 앞으로 더 강한 놈을 붙일까요?”
“계속 내 쪽을 주목해 주면 나야 환영이지.”
그럴 목적으로 들어온 거였으니까. 헤이든은 이저드의 대범함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적진 한복판에서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저드가 유일할 것이다.
“이놈들은 어쩔까요?”
“수풀에 버려두게. 정신을 차리면 알아서 도망갈 테니.”
“도망 안 가면 용기가 가상해서라도 다음에 더 강하게 쳐야겠습니다.”
헤이든이 자객을 둘러업으며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둘은 조용히 자객들을 전부 수풀 속에 옮겨 놨다. 후에 깨서 상황 파악을 한 자라면 셋 중 하나를 택할 것이다. 도망가던가, 자결하던가, 의뢰를 완수하기 위해 다시 덤벼들던가.
하지만 이런 수모를 주었는데 다시 마지막 방법을 택하는 자객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하나, 둘, 셋, ……일곱. 많이도 붙였네요. 저흰 이만 가죠. 아가씨께서 기다리겠습니다.”
헤이든이 허리를 펴며 이저드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이저드는 저 멀리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경, 먼저 가 있게.”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모튼이 움직인 것 같아. 잠시 확인만 하고 오겠네. 금방 따라갈 테니, 아델라에게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말해 주게.”
그걸 바로 느낄 수 있다는 게 더 놀라웠다. 헤이든은 그제서야 희미하게 느껴지는 모튼과 레널드의 기척에 어깨를 으쓱였다.
“예, 그러겠습니다. 이따 뵙겠습니다.”
둘은 곧바로 각자 향할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 * *
아델라가 다녀간 후, 모튼은 일을 마치고 늦은 밤이 되어서도 집무실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곰곰이 생각에 잠겨서 아까 아델라가 했던 보고를 가만히 떠올려 보았다.
‘무얼 들었다고?’
‘이저드, 그 사람한테 독을 쓸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친해진 후에 방심할 때요.’
‘누가 그러던가?’
‘휴게실에서 시녀 두 분이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전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저하께서 내린 명령으로는 보이지 않기에…….’
굳게 다문 입술과 굳은 얼굴, 그리고 거짓 없는 눈빛으로 봤을 때 아델라가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 정말로 누군가, 모튼의 허락 없이 시녀들을 이용해서 이저드를 해하려고 했다는 거였다.
그리고 모튼은 그 누군가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왕궁에서 왕세자 몰래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레널드 경.”
“예.”
“따라 오게.”
모튼은 따라오려는 시종들도 마다한 채 레널드만 데리고 어둠이 깔린 세자궁 밖으로 나왔다. 밖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그는 거침없이 걸음을 옮겨 목적지로 향했다.
은은하게 불이 켜져 있는 목적지를 보니, 그녀의 오랜 고질병인 불면증이 도진 모양이었다. 모튼은 왕비궁 앞에서 크게 한번 심호흡을 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모튼?”
모튼이 왕비궁 침실에 들어서자, 푸른 머리에 흑안을 한 중년 여성이 창문 쪽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 있다가 놀란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인의 얼굴에는 피곤한 티가 역력했지만, 그래도 자기 아들을 봐서인지 약간의 혈색이 돌아왔다. 하지만 뒤이어 보이는 레널드를 보자 인상을 굳혔다. 그녀는 레널드를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
“하인트 경은?”
“하인트 경은 믿을 만하지 못합니다. 일단 앉으시죠. 레널드 경은 밖에 나가 있어.”
왕비는 레널드가 안 보일 때까지 문을 뚫어지라 보다가 문이 닫히자 자리에 앉았다.
“하인트 경을 데리고 다니는 게 좋겠구나. 저자는 네 곁에 두기에는 신분이 너무 낮아.”
그녀는 잠이 안 와 마시던 포도주를 마저 목으로 넘기며 조용히 이야기했다. 그녀의 말은 권유가 아니라 통보와도 같았다.
“자기 잇속 챙기기만 바쁜 놈들보다야 훨씬 도움 됩니다. 조금만 은혜를 베풀어도 평생 감사할 줄 알죠. 절 배신할 생각도 안 하고요.”
“신분 낮은 것들과 어울리지 말라 그리 일렀거늘……. 그들과 네가 하늘과 땅 차이라는 걸 알려줘야지. 감히 너를 쳐다도 못 보게, 네 옆에 서지도 못 하게.”
“지금도 충분히 제 위치는 굳건합니다.”
모튼의 말에 왕비는 짧게 혀를 찼다.
“네가 몰라서 하는 말이다. 지금 네 자리가 얼마나 위태로운지.”
뒷말은 거의 혼잣말처럼 중얼거려 발음이 뭉개졌지만, 모튼은 똑똑히 들었다.
“그래서 제 자리가 위태롭다고 생각하여 그놈을 해하려고 했습니까? 저 몰래, 제 시녀들을 이용해서?”
“…….”
딱히 놀라는 기색도 없이 왕비는 태연하게 포도주를 마시며 모튼을 보았다.
“전 안 흔들립니다. 왕세자로 오른 순간부터 단 한 번도 이 자리가 제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제 삶 자체가 증거니까요.”
모튼이 세자로 있었던 세월이 벌써 20년이었다. 어릴 때는 세자 교육을 받느라 정무를 보지 못했지만, 철이 들고서는 폭정을 일삼는 아버지 대신 국정을 운영하고 수습해 왔다.
덕분에 그는 그래도 귀족들 사이에서 꽤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이저드가 불안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한순간 세자의 자리를 위협할 최대의 적으로 보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저드가 왕궁에서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쫓겨나면 중앙 귀족들도 그를 더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이저드는 펜베르크 지역에서 다시는 나오지 못하게 될 터였다.
그는 그때를 생각하며 이저드를 옆에 두고 인내하고 있었다.
“안다. 넌 태어난 순간부터 왕의 재목이었어. 내가 그렇게 만들었고.”
“그런데요? 그런데 절 못 믿으시겠다는 겁니까? 제가 그리 약해 보이십니까?”
“약하고 강한 문제가 아니야.”
오늘따라 그녀는 유난히 막무가내였다.
이저드의 뒤에 제스트윈 공작이 버티고 있다는 걸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저드가 죽은 뒤의 상황은 왜 생각하지 않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럼 뭡니까? 저도 그놈을 좋아하진 않지만, 그놈이 죽은 뒤의 상황은요. 대책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그놈을 죽인 뒤 누명을 씌우면 되고 제스트윈 공작은 이오스한테 맡기면 돼.”
왕비는 암투의 중앙에서 사람들을 휘두르긴 했지만, 이렇게 앞뒤 관계 따지지 않고 사람을 죽이려고 하지는 않았다. 모튼은 작게 한숨을 쉬고 자신의 어머니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잠깐은 공작의 시선을 돌릴 수도 있겠죠. 그 뒤는요?”
“군사를 일으키면 역적으로 잡아넣으면 돼. 백성들 다 보는 앞에서 공작이 군사를 끌고 오면 과연 귀족들이 그를 옹호할까?”
“하……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었으면 제가 이저드를 쫓아낼 방법을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이저드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제스트윈 공작가를 필두로 한 국경선 근처 세력들이 크다는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미하일한테 왜 자객이 없었고, 스파이가 없었겠는가. 전부 들켜서 죽었기 때문이다.
독살? 전장에서 개죽음? 암살?
그런 방법은 이미 왕이 다 써 봤다. 그런데도 살아남아 있는 게 지금의 미하일 공작이었다. 그런 공작 그 밑에서 자란 이저드가 그리 쉬이 죽을 리가 없었다. 왕궁에서 이저드가 죽으면 라이벌 관계에 있는 모튼이 오해받기 쉬워 꺼린 것도 있지만, 이저드가 쉽게 죽을 인물이 아니라는 것도 한몫했다.
“쫓아내? 그 정도론 안 된다. 언제 또 기어 올라올 줄 알고. 아니, 다른 귀족들이 그놈을 운운하며 네 앞길을 막으면 어쩌려고!”
왕비는 평소보다 더 흥분하는 듯이 보였다. 모튼은 자신의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어 미간을 구겼다.
“귀족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제 앞에서 어떻게 이저드를 운운할 수 있습니까. 그놈이 조금 나은 건 혈통뿐인데!”
“그 혈통이 문제다! 왕족과 왕족 사이에서 낳은 아이라서! 그놈은 적통이니까. 그게 너한테 얼마나 위협이 되는 문제인지 넌 모르는 것 같구나!”
모튼은 왠지 대화의 방향이 어긋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튼은 자신이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으므로 이저드가 아무리 혈통이 좋아도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지는 못할 거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왕비의 생각은 달라 보였다. 그녀는 이저드가 충분히 모튼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다는 듯이 굴었다.
“그놈이 왜 적통입니까! 외도해서 낳은 자식인데! 왕자로 인정받지도 못했고, 귀족 중 아무도 그놈을 왕가의 핏줄이라 인정하지 않습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으니, 모튼의 목소리와 왕비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귀족들이 인정하지 않는다고 있는 피가 없어지더냐? 전하께서 그놈을 안 감쌀 것 같아?”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전 온전히 두 분의 피만 이어받은 제대로 된 적통입니다. 왕위를 이을 사람은 저밖에 없어요. 전하께서 그놈을 감싼다고 한들, 이미 제정신이 아닌 분의 의견을 따를 놈들은 없습니다!”
같은 적통이라도 모튼은 왕비의 아이였고, 이저드는 외도해서 낳은 아이였다. 보수적인 귀족 집단에서 그 차이는 매우 컸다. 그런데도 저리 화를 내는 어머니를, 모튼은 이해할 수 없었다.
“네가 뭐라 해도, 난 네 앞길을 막는 것들을 치울 것이다. 그놈은 더욱.”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여태 왕비의 계획에 토를 달지 않았던 것은 그녀가 모튼의 정적을 적당히 잘 치워 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둘의 의견이 완전히 갈렸다. 안 그래도 자신의 아버지 때문에 골치 아파 죽겠는데, 이젠 어머니까지 모튼에게 두통을 가져다 줬다.
“후……. 마음대로 하세요. 저도 제 마음대로 할 테니까. 어마마마께서 그놈을 죽이는 것보다 제가 왕궁에서 내쫓는 게 빠를 겁니다.”
모튼은 어머니와 대화가 통할 것 같지 않아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모튼! 어미 말 듣거라! 다 널 위한 거야!”
방을 나서는 모튼의 뒤로 그녀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지만, 모튼은 이미 단단히 화가 난 듯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 * *
“린다 경.”
“음? 오늘은 웬일로 제가 먼저 왔네요. 둘은요?”
린다는 창문을 훌쩍 뛰어넘어 아델라의 방으로 자연스럽게 들어왔다.
“이저드한테 자객이 붙었어요. 아무래도 숙소 건물이 같아서 헤이든 경도 조심히 움직이는 것 같아요.”
“쯧, 실력도 안 되는 놈들 붙여서 인력 낭비만 하고 뭐한데요?”
“자기들이 들켰는지 모르니까 인력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겠죠.”
아델라는 린다가 넘어온 창밖을 이리저리 살폈다.
누군가가 멀리에서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린다가 태평한 것을 보니, 위협이 되는 인물은 아닌 것 같았다.
“헤이든이네요.”
창 밖을 힐끔 보며 그렇게 말한 린다는 아델라 침대에 털썩 앉았다. 린다의 얼굴에 약간의 피곤함이 묻어 있었다.
“피곤해 보여요. 괜찮으세요?”
“예, 뭐. 컨디션은 문제가 없는데, 정신적으로 좀.”
린다는 현재 후궁들이 있는 외궁에서 일하고 있었다. 허드렛일은 힘들지 않았지만, 다른 일 때문에 피곤했다.
“왜? 뭔데? 너도 몸이 근질근질하냐?”
이번에는 헤이든이 훌쩍 창문을 뛰어넘어 오면서 물었다.
“사람들이 다 너 같은 줄 아냐?”
“내가 뭐 어때서?”
오자마자 입씨름을 하는 걸 보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 참. 이저드 님이 볼일이 있어 조금 늦는답니다. 기다려 달라던데요?”
마침 이저드의 행방을 물으려고 했는데, 헤이든이 먼저 말해 주었다. 그에 아델라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객들은요?”
“깔끔하게 처리했죠. 걔들 내일 눈 뜨면 쪽팔려서 일어서지도 못할 겁니다. 자결도 못 하고 기절했으니 암살자로서 자존심이 상했을 테죠.”
“잘 했네.”
쪽팔려서 다신 얼씬도 안 하면 좋을 텐데. 린다와 아델라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넌 왜 기운이 없냐?”
린다가 싸울 기운도 없다는 걸 헤이든은 금방 알아챘다. 평소보다 기운이 없는 건 어떻게 안 건지. 매번 싸움만 해서 그런가.
“말도 마.”
“왜?”
“혹시 하녀 둘이 익사한 사건과 관련된 거예요?”
아델라가 혹시나 해서 물으니 린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왕이 미쳤으면 얼마나 미쳤을까 했는데, 그놈은 정말…….”
말하다 말고 린다는 인상을 팍 구겼다. 아까 오전에 벌어진 일들이 다시금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외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요?”
“악질입니다. 사람 목숨으로 장난치는 놈이에요.”
이번 익사 사건도 왕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다. 이건 큰 사건이었지만 사실 그가 하녀들과 시녀들, 심지어 후궁들까지 막 대하는 건 예삿일이었다.
“밤일을 못 하는 후궁의 하녀들을 잡아다 호수에 밀어 버리더군요. 수영을 못 하는 하녀들이 살려 달라고 빌어도 물에 빠뜨려 죽을 때까지 내버려 둡니다. 그걸 후궁들 전부 보게 하고요.”
구할 수 있는데 못 구하고 사람이 죽어가는 걸 봐야 한다는 건 정말 지옥에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린다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면서 미친 듯이 뛰었다. 살의가 올라오려는 것을 참느라 정말 힘들었다.
전장에서 죽은 사람들을 많이 보아온 린다였지만,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하녀들을 차마 볼 수 없어 시선을 돌렸다. 가슴을 꽉 짓누르는 고통이 숨 쉬는 것도 힘들게 만들었다.
아무리 전장이라 할지라도 항복을 선언한 사람들은 죽이지 않았고, 민간인은 더욱 죽이지 않았다. 그게 당연한 거였고.
하지만 왕이라는 놈은…… 힘없는 이들이 죽어가는 걸 웃으며 지켜보았다. 시신이 물위에 떠오르고 나서야 그는 만족한 표정으로 내궁을 빠져나갔다.
“어떻게 그런…….”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말 한 번 잘못했다고 무지막지하게 패더군요. 누구든 상관없이.”
린다는 그렇게 말하며 이를 아득 갈았다.
린다가 신분을 숨기고 숨죽여 있는 게 아니었다면, 그의 팔다리를 벌써 부러뜨리고도 남았다. 속으로 수천, 수만 번 참은 걸 아마 그놈은 모르겠지.
“그놈을 보니까, 왜 왕이 바뀌어야 하는지 알겠어요. 그놈은 결코 용서받아서는 안 됩니다. 이 일이 묻혀서도 안 되고요.”
밖에서 듣는 것과 왕을 직접 겪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와 닿는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특히 린다는 그 느낌을 더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었다.
처음 외궁에 배치 받았을 때, 외궁 안 분위기가 너무 어두워서 왜 그런가 싶었는데, 그들이 절망하고 있을 만했다.
“절대 묻히게 하지 않을 거예요. 왕으로 인해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으니까요.”
아델라는 린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굳게 다짐했다.
“통로, 최대한 빨리 찾아요. 요 며칠 본궁에 드나들 수 있게 돼서 제가 몇 군데 추려봤는데, 눈대중으로 가늠한 거라 나중에 두 분이 직접 가서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아델라는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종이 몇 장을 꺼냈다. 본궁 지도 위에 방마다 벽난로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셋은 종이를 빤히 쳐다보며 각자 알고 있는 정보를 교환했다.
“본궁 1층 서쪽 구역은 저랑 헤이든이 확인했어요.”
“네. 그런데 동쪽 구역은 거의 매번 밤을 새더라고요. 확인할 틈이 없어요.”
린다와 헤이든은 몇 번이나 본궁 동쪽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방들을 확인하려고 했지만, 요 며칠 불이 꺼져 있는 날이 없었다.
“동쪽 구역이면 재무를 담당하는 곳인데……. 왕실 재산에 구멍이 너무 많아 매번 이리 끌어오고 저리 끌어오다 모튼한테 걸려서 다시 처음부터 일을 하더라고요. 수습하느라 며칠 밤샘 작업을 한다고 들었어요.”
왕이 툭하면 국고에 손을 대서 이런 일이 자주 벌어진다고 들었다. 때문에 재무부에 들어가면 죽어서 나온다나.
“동쪽은 제가 최대한 낮에 다녀 볼게요. 중앙 홀이 있는 곳은요?”
“중앙 홀 안에 벽난로라고는 앞쪽에 두 개, 중간에 하나씩 붙어 있는데, 통로는 아니었어요. 그 주변 방도 딱히.”
“그럼 진짜 남은 건 동쪽이네요? 어디 숨겨져 있지 않은 한.”
숨길만 한 곳이 있긴 한가?
케스너 후작 부인은 그 벽난로가 숨겨져 있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 아주 평범한 벽난로였을 뿐이라고.
“혹시 모르니, 숨겨졌거나 없어진 벽난로들이 있나 알아볼게요.”
그것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아델라는 린다의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셋은 이저드가 도착하기 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저드가 도착한 후에는 이미 대화를 끝낸 상태였다. 그들은 나눴던 대화를 추려 이저드한테 알려주었다. 보고를 들은 이저드도 자신이 보고 들은 내용을 셋에게 알려주었다.
“아니, 뭐 그렇게까지 죽이려고 기를 쓰는지 모르겠네요. 도련님은 수도에 세력도 없는데.”
“크기 전에 미리 싹을 뽑자, 그거 아닐까?”
린다가 뚱하니 말하자, 헤이든이 그들의 생각을 추측해 보며 물었다.
“그랬다가 역풍을 맞을지도 모르는데, 너무 무모하긴 하네요.”
헤이든의 추측에 아델라가 의아하게 덧붙였다.
“좀 더, 은밀하게 움직일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왕비답지 않았다.
보통 왕비가 사람 하나를 귀족 사회에서 없애 버릴 때는 악질적인 소문을 퍼뜨리곤 했다. 안 좋은 소문을 내서 귀족 사이에서 손가락질 받게 하고 자기는 그들 뒤로 숨어 모른 척 관망했다.
그런 식으로 상황을 조금씩 천천히 몰아가는 그녀가 이번에는 전혀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주변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평소와 다른 선택을 한 건, 궁지에 몰렸다는 증거겠죠?”
“그런 것 같네.”
“왕비는 이저드가 무조건 왕위를 찬탈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요?”
평상시의 그녀라면 이저드의 의중을 먼저 파악하기 위해 탐색전을 벌였을 텐데, 이번엔 그런 것 없이 왕비는 무조건 이저드를 죽이는 쪽을 택했다. 이저드가 모튼한테 위협이 될 거라는 확실한 증거, 혹은 심증이 없으면 불가능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어떤 부분에서 그런 확신을 느낀 걸까? 이저드는 여태 어떤 태도도 취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대로 적통이라? 아니면 이저드의 뒤에 제스트윈 공작가가 버티고 있어서?
그러나 아무리 강한 제스트윈 공작가라도 이저드를 지켜 줄 수는 있지만, 왕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그런 일이 쉬웠으면 진작 왕을 갈아치웠을 것이다.
“왕비의 말을 들어보면 내게는 모튼을 밀어낼 정도의 힘이 있다고 보이는군. 그 힘이 뭔지는 나도 알 수 없지만.”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요? 지금 상황에서는 모튼이 밀려날 일이 전혀 없는데.”
아델라가 의문을 표하자, 린다와 헤이든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여기 모인 넷 빼고는 전부 모튼을 지지할 텐데 말이죠. 오죽하면 저희가 적진 한가운데라고 표현하겠어요.”
적어도 왕궁에서 일하는 귀족들은 모튼을 인정하고 있었다. 모튼이 있어 그나마 국정이 돌아갔으니까.
“이저드가 적통이라 경계한다고 보기에는, 모튼이 더 확실한 장자인데…….”
그걸 귀족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현재 살아남은 가문들은 어느 쪽에 줄을 대야 더 오래 권세를 유지할 수 있는지 가장 잘 아는 이들이었다. 그들에게 현 정실부인의 아들과 밖에서 낳아 온 자식 중에 고르라고 한다면 백이면 백, 현 왕비 소생의 모튼을 고를 게 분명했다.
넷은 왕비가 초조해하는 이유를 쉽사리 짐작할 수 없어 한동안 대화가 끊겼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전 단지, 이저드한테 향할 위협을 하나라도 치우려던 건데 오히려 왕세자와 왕비 사이에 껴 버렸네요.”
왕비가 그렇게 단호하게 이저드를 죽이려 할 줄은 몰랐다. 자신이 잘못 선택해서 일을 키운 것 같아 아델라는 미안한 마음만 들었다.
“제 잘못이에요. 죄송해요.”
“그대가 잘못한 게 아니네. 내가 이곳에 온 건 그대를 지키기 위해서였고, 나한테 이목이 쏠린다면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거야.”
“하지만…… 계속 암살이나 독살 같은 위협이 있을 텐데…….”
“그건 모튼과 왕비 사이에 끼지 않더라도 있었을 거네. 내 전생을 알고 있지 않나.”
어디 독살뿐이겠는가. 암살, 교살, 사살 등 얼마나 많았는지 이야기하기도 입 아팠다.
“난 죽지 않아. 그 정도로 죽을 거라면 그대와 함께 이곳에 들어온 이유가 없지.”
이저드는 손을 뻗어 걱정스럽게 찡그려진 아델라의 미간을 살살 펴 줬다.
“그리고, 모튼 편에 그대가 있어 걱정되지 않네. 날 위해 움직일 거지 않은가.”
그건 당연한 말이었다. 이저드가 아델라를 위해 움직이듯, 아델라도 이저드를 위해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아델라는 이저드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통로를 찾을 때까지 아델라는 최선을 다해 이저드를 지킬 생각이었다. 물론 통로도 찾고!
* * *
아침 일찍부터 모튼이 아델라를 불렀다. 아직 다른 시녀들은 입궁도 하지 않은 시각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왔군.”
인상을 구기며 집무실 책상에 앉아 있던 모튼이 아델라를 돌아보았다. 아델라는 의아한 표정으로 모튼의 앞에 다가가 섰다.
“어제 아델라 양이 보고를 올려서 내가 미리 알게 된 건 다행이지만, 문제가 생겼어.”
“예?”
“부탁할 게 생겼는데, 날 도와줄 수 있겠나?”
무슨 내용인지 말하지도 않고 다짜고짜 도와줄 수 있겠냐니? 이건 답이 정해져 있는 부탁이었다. 왕세자의 명을 거부할 수 있는 자가 이 궁에서 몇이나 되겠는가.
‘에효, 하라면 해야지. 보나마나 간밤에 있었던 일과 관련된 거겠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건 자신이 될지도. 아델라는 앞으로 펼쳐질 일들이 결코 자신한테 좋게 돌아가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관건은 왕비와 왕세자의 시선을 얼마나 잡아 두느냐, 였다. 둘이 이저드를 두고 싸우는 동안 얼마나 빨리 통로를 찾아내느냐가 아마 이 암투를 끝내는 길일 것이다.
“저하께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말씀해 주세요.”
아델라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바로 수긍하고 자신을 따르는 아델라의 모습에 모튼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델라의 눈치가 나날이 늘어나는 것 같았다. 처음 어리숙했던 모습도 많이 고쳐졌다. 가르친 성과가 톡톡히 보였다.
아델라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 이후부터 모튼은 틈틈이 아델라를 가르쳤다. 아델라가 왕궁의 예법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면 그때그때 핀잔을 주면서.
덕분에 아델라의 모습은 많이 나아졌다. 전보다 자연스러운 미소와 생각이 보이지 않게 된 표정, 할 말 이외의 말은 길게 하지 않고 주군을 따르는 모습까지.
모튼은 그녀가 달라지는 모습이 흥미로웠다. 하얀 백지장 위에 자신의 입맛대로 그림을 그려 놓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래서 아주 어릴 때부터 교육을 하는 건가.
“그대한테 해가 되는 내용은 아닐 거야.”
“그런 걱정하지 않습니다. 저하를 믿으니까요.”
해가 안 되기는 개뿔. 딱 봐도 아델라가 둘 사이에 껴서 피해를 볼 게 뻔했다.
하지만 아델라의 입에서는 마음속과 전혀 다른 말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요즘 느끼는 건데, 아부 길을 걸으면 진짜 잘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이 궁에서는 나와 레널드 경 말고는 믿지 않는 게 좋아.”
아델라가 기댈 곳은 레널드 아니면 자신밖에 없다. 모튼은 그 점을 이용해서 부탁을 빌미로 압박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전혀 자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렇게 일평생 살았고 주변에서도 별다른 제재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주변은 더 심했다.
어쨌든 그는 왕비와 왕보다는 나름 괜찮은 사람이었고 아량이 넓은 축에 속했다. 왕세자임에도 ‘부탁’이라는 말도 쓸 줄 알고. 이 얼마나 괜찮은 주군인가.
물론 이건 그와 그의 주변에 있는 귀족들의 착각이었지만.
“앞으로 이저드와 다른 시녀들은 절대 붙여놓지 않을 거네. 그리고 이저드와 다른 시녀들이 단둘이 있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그대가 무슨 수를 써서든 막아.”
“예? 왜요?”
“이저드는 궁에서 죽으면 안 돼. 죽더라도 밖에서, 나와 상관없는 곳에서 죽어야지.”
“밖에서요?”
“그래. 왕위 계승이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는 와중에 제스트윈 공작가까지 얽히면 골치 아파. 그놈은 내가 왕위에 오른 뒤에 처리해도 늦지 않고.”
‘그래서 왕위에 오르자마자 바로 이오스와 손을 잡고 이저드를 죽이려 한 거였구나.’
아델라는 눈을 도르륵 굴리며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마음에 안 드나?”
과거를 회상하느라 잠시 멈칫했던 아델라의 행동을 모튼은 다르게 이해했다.
“아, 아닙니다. 저하의 뜻이 곧 제 뜻입니다. 명 받들겠습니다.”
“걱정 마. 그대의 복수는 확실히 해 주지. 그대도 이저드와 친해지면 복수할 기회가 찾아올 거야.”
아델라는 모튼이 자신의 행동을 확대하여 해석한 것을 알고 그만 웃음이 터질 뻔했다. 명 받들겠다며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놈을 잘 봐. 그놈과 친해질수록 약점이 보일 테니, 그대의 복수에 큰 도움이 될 거야.”
‘역시 그거였구나? 속이 투명하게 보이더라니.’
그래도 정보를 알아오는 정도면 양호한 거다. 다른 시녀들처럼 이저드를 죽이라고 명받지 않은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아델라는 씩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어, 어떻게 됐어요?”
밤새 잠을 자지 못한 듯, 퀭한 얼굴로 스웰라가 물었다. 아델라 다음으로 일찍 세자궁에 도착한 그녀는 바로 아델라가 있는 휴게실로 향했다.
“일이 잘 안 풀린 것 같아요.”
주변에 다른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아델라는 조용히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자 덩달아 스웰라의 목소리도 작아졌다.
“어떤 식으로요?”
“왕비 전하와 세자 저하 사이에 문제가 생겼나 봐요. 아마, 의견이 맞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예요?”
스웰라는 불안한 눈으로 아델라한테 물었다.
“음……. 스웰라 님이 저한테 말했다는 건 보고하지 않았으니, 평소처럼 왕비 전하의 명에 따라 움직이세요.”
“그러다, 정말 이저드 경이 죽으면…….”
“걱정 마세요. 제가 시녀들을 방해하는 역할을 맡았거든요. 저한테 최대한 눈치를 주세요! 막아 드릴게요! 그리고 이저드 경은 그 정도로 안 죽어요. 독살이 쉬웠으면 저하께서 이런 고생 안 하셨겠죠.”
확신에 찬 아델라의 표정에 스웰라는 아주 조금 안심한 듯 아까보다는 표정이 환해졌다.
그래도 아델라와 레널드가 자신을 도운다고 생각하니, 혼자 감당하던 때보다는 마음이 편했다. 무엇보다 레널드한테 오해를 받아 방해되는 존재로 인식되지 않을 거라는 게 가장 안심됐다.
“근데, 그러면 아델라 님이 왕비 전하의 눈에 띌 텐데…….”
“전 괜찮아요. 어차피 세자 저하 곁에 있으면 계속 마주쳐야 할 분인데요, 뭐.”
“아델라 님은 대단하시네요. 왕비 전하를 겁내지 않기는 쉽지 않을 텐데…….”
그에 아델라가 어색하게 웃었다. 겁이 안 나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겁이 나서 벌벌 떨릴 정도도 아니었다. 죽기야 하겠어, 하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다.
아델라는 솔직히 이 모든 궁중 암투가 덧없었다. 그래서인가 그다지 왕비가 무섭지 않았다.
그녀의 목표는 통로를 찾기 위해 시간을 버는 것뿐이었다.
“음, 저도 안 무서운 건 아니지만, 저하께서 저한테 해될 건 없다고 말씀해 주셔서요. 괜찮지 않을까요?”
“저하께서…… 아델라 님을 많이 생각해 주시나 봐요. 저하께서 자기 사람을 그렇게 잘 챙기는 줄은 몰랐어요.”
잘 챙기는 건가. 나름대로 챙기는 것 같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용 가치가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아델라가 조금이라도 모튼의 생각에서 어긋나면 어찌 나올지는 아무도 몰랐다.
“제가 레널드 경의 동생이라 더 그런 거 아닐까요? 저희 오라버니는 저하의 최측근이니까요.”
아델라는 짐짓 순수하게 웃었다.
아마도 모튼이 레널드와 자신한테 잘해 주는 건 다루기 쉬워서겠지. 또한, 궁 안에 이렇다 할 뒷배가 없는 남매가 많은 권력을 쥔 모튼을 배신하지 않을 확률도 높았고.
“아, 참. 근데, 스웰라 님은 어쩌다 왕비님 눈에 드신 거예요? 힐튼 백작가는 누구의 편도 안 들고 있었던 걸로 아는데…….”
“그게…….”
스웰라가 다시 축 처졌다. 그녀는 왜인지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사실, 제가 고집을 피워서요.”
“고집이요? 궁에 들어간다고요?”
아델라의 물음에 스웰라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께서 안 된다고 말렸는데, 제가 너무 들어오고 싶어서…….”
눈치를 보아하니, 들어온 이유가 레널드인 것 같았다.
“레널드 경 때문에요?”
“아, 앗. 네!”
역시나 맞았다. 목숨 걸고 궁에 들어올 만큼 그렇게 좋을까?
아델라는 객관적인 눈을 유지할 수 없어 입을 다물었다. 자칫하다가는 ‘걔를 왜 좋아하세요?’ 라는 실례 되는 물음을 던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저 혼자 들어가는 건 너무 위험하다며 조치를 취하신 게…….”
“왕비님이군요.”
“예.”
하긴, 궁이 어떤지 아는 귀족들은 이 궁에서 누가 실세인지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의 왕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엄청난 권력을 가질 사람은 왕비였다. 물론, 전생의 왕비는 모튼이 왕위에 오른 뒤 얼마 안 있어 죽게 되지만, 아직은 벌어지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 힐튼 백작은 스웰라 님이 아니었으면 왕궁에 줄을 댈 생각이 없었던 건가?’
“힐튼 백작님께서 스웰라 님을 위해 선택한 걸 텐데, 상황이 좋지 않게 됐네요…….”
아델라는 한껏 안타까운 얼굴로 스웰라를 보았다.
“제 탓이에요.”
“아이, 그렇다고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일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나요? 제가 최선을 다해 막아 볼게요. 우리 잘 헤쳐 나가 봐요.”
아델라는 환하게 웃으며 스웰라를 위로했다. 일단 스웰라와 친분을 만들어 둬서 나쁠 건 없으니까.
스웰라는 아델라의 환한 미소를 처음으로 마주한 듯 잠시 넋을 놓았다. 평소에도 아델라의 미소가 자연스럽고 예쁘다고 느끼긴 했다. 하지만 그녀가 진심으로 웃는 환한 얼굴을 보니, 그 전의 미소들은 예의상 지어 주던 표정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델라가 진정으로 웃으면 너무 밝고 맑다는 것을 그녀는 처음으로 알았다.
“아델라 님.”
“네?”
그러고 보니, 자신이 처음 레널드한테 반한 것도 그가 꾸밈없이 웃는 밝은 얼굴을 본 후였다.
“예, 예쁘세요.”
“아…… 예?”
스웰라는 레널드와의 첫 만남을 상기하며 얼굴을 발그스름하게 붉혔다.
“이렇게 많이 웃으세요. 너무 보기 좋아요. 빈말이 아니고, 정말 미소가 예쁘세요.”
스웰라가 진지한 얼굴로 말하자, 아델라는 쑥스럽게 웃음 지었다.
“감사합니다. 스웰라 님도 아주 예쁘고, 아름다우세요.”
“아! 아니. 저야말로 감사드려요. 감사 인사가 먼저여야 했는데. 레널드 경께도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스웰라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아델라는 괜찮다며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린다와 헤이든, 이저드를 제외하고 믿을 사람 없는 이 궁에서 아델라의 편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 * *
모튼의 명도 받았겠다, 스웰라도 눈치껏 돕고 있겠다, 아델라는 본격적인 이저드 사수(?) 작전에 돌입했다.
눈치 안 보고, 대놓고 들이대는 이 기분이란! 왕궁에 와서 처음으로 마음 편히 이저드를 꼬실, 아니지, 이저드와 붙어 있을 수 있는 시간이라 아델라는 신이 났다.
“이저…….”
“이저드 경! 저하께서 본궁에 저랑 다녀오래요!”
시녀들이 입도 다 떼기 전에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게 등장한 아델라가 이저드를 채 갔다.
“에? 아, 그! 저! 아델라 님!”
뒤에서 이브니아가 필사적으로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델라는 귀를 닫고 이저드와 함께 본궁으로 향했다.
아델라는 모튼의 명령대로 아주 착실하게 시녀들과 이저드 사이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시녀들은 이저드 근처도 못 가고 이저드와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아, 좀 뿌듯한 기분이야.’
티는 안 냈지만, 이저드 주변에 여인들이 맴도니까 마음이 쓰였던 건 사실이었다. 임무니까 아무렇지 않은 척 시선도 두지 않았던 거지.
“기분이 좋아 보이네.”
“좋죠. 단둘이 다닐 기회인걸요?”
주변의 기척이 멀어진 후에야 이저드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가 사적인 말을 했다는 건, 주변에 감시하는 눈과 귀가 없다는 뜻이었다.
“모튼한테 받은 명이 그건가?”
“예. 이저드와 시녀들을 멀찍이 떨어뜨리라고 그랬거든요.”
아델라가 모튼의 진지한 표정을 따라하며 말했다. 그런 아델라를 보며 이저드는 얼굴에 약간의 웃음기 어린 미소를 띠웠다.
“어쩐지 거리낌 없이 방해한다 했네.”
둘은 평소보다 조금 느리게 걸으며 대화를 나눴다. 둘만의 시간이 너무 짧게만 느껴졌다.
“앞으로 대놓고 방해할 명분이 생겼어요.”
“하지만 걱정이군.”
“왕비……. 말이죠? 세자궁에 배치된 순간부터 각오는 했어요. 최대한 시간을 끌어 봐야죠.”
이런저런 상황을 전부 고려하고 온 건 맞지만, 그래도 이저드는 아델라가 걱정됐다. 그는 주변을 쓱 훑고는 다시 조용하게 목소리를 깔며 입을 열었다.
“견디기 힘들면 꼭 말해 주게. 조금 오래 걸리겠지만 다른 방도도 있으니까…….”
“여기까지 왔는데 물러서기는 너무 아까워요. 어떻게든 버텨서 이 일을 성공시킬 거예요.”
“그대의 각오가 확실한 건 잘 알지만, 혹시,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으면, 하는 말이네. 그대가 시간을 벌어 주는 만큼 우리도 빨리 통로를 찾아볼 거야.”
“네! 믿어요.”
아델라가 환하게 웃었다.
이저드는 그런 아델라의 표정을 살폈다. 혹여 힘든데 억지로 버티고 있는 건 아닌지, 말을 못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불안해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마음이 쓰였다. 환하게 웃은 아델라의 표정을 보면 안심이 되긴 했지만.
슬슬 주변에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지자 둘은 바로 표정을 바꾸고 본궁으로 향했다.
아델라는 본궁에 들어서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재무부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아델라와 이저드가 재무부에 나타나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책상에 고개를 박고 서류만 훑던 이들도 한 번씩은 모두 곁눈질했다.
“저, 혹시, 저하께서 보내셨습니까?”
재무부는 다 죽어 가는 분위기였다. 그들은 너도나도 다크서클을 달고 피곤함에 절어 있었다. 몇 날 며칠 밤을 새웠으니 당연한 몰골이었다.
그나마 아델라와 이저드가 와서 재무부 분위기가 조금, 아주 조금 나아졌다.
“예. 세자 저하께서 보내서 왔습니다. 일은 다 끝나셨는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아델라와 이저드를 구경하던 재무부 사람들이 그녀의 말에 급하게 다시 서류를 훑기 시작했다.
“잠시만요! 서류 몇 개만 찾으면 끝납니다!”
아델라는 힐끔, 서류가 수북이 쌓인 책상 위를 살폈다.
“저, 근데, 이게 다 보고할 문서예요?”
“아! 예!”
“이걸 저랑 이저드 경이 다 들기에는 힘들 것 같은데…….”
“걱정 마십쇼. 두 분이 가져가실 건 약식으로 작성한 보고서니까요! 나머지는 저하께서 직접 오셔서 확인할 겁니다.”
그녀는 조금 안심한 표정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그렇게 서 계시지 말고 앉으세요. 서류 찾고 작성하는데 시간이 좀 걸려서. 혹시 차, 좋아하십니까? 내 올까요?”
“아니에요. 먹고 와서 괜찮습니다. 저 신경 쓰지 말고 일 보세요.”
아델라가 한편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너무 바빴던 재무부 직원은 아델라에게 예, 라고 빠르게 답한 뒤, 일을 끝내러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녀는 그들이 바쁘게 일을 하는 틈에 주변을 구경하는 척, 벽난로가 있는 곳을 찾았다.
‘정리가 끝나 간다면, 오늘부터 밤새우는 것도 끝이려나?’
그럼 오늘 밤부터는 동쪽 구역도 확인할 수 있다.
‘조금만 버티면 통로를 찾을 수 있겠는데요?’
사람들이 바쁜 사이에 눈빛을 교환한 아델라와 이저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기했다.
재무부 직원의 말대로 약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기다리라던 직원이 꽤 두툼한 분량의 서류를 이저드한테 넘겼다.
“이걸로, 밤샘은 끝이시겠네요?”
서류를 슬쩍 보던 아델라가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아, 예. 그렇죠. 무사히 통과한다면요.”
“통과하실 거예요. 이렇게 열심히 준비하셨잖아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조심해서 돌아가십쇼.”
재무부 직원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아델라와 이저드를 마중했다. 둘도 고개를 숙인 뒤 재무부에서 나왔다.
“눈으로 보기에는 전혀 모르겠어요.”
“가까이 가서 확인해 봐야 알 거네. 서류가 통과되면 오늘 밤에는 동쪽 구역도 확인해볼 수 있겠지.”
둘은 좀 더 빠른 걸음으로 세자궁으로 향했다.
이 서류만 통과되면 오늘 밤부터 당장 동쪽 구역을 조사할 수 있었다. 모두 다 확인하는 데 시간이 그리 길게 걸리지 않을 터이니, 며칠 안에 통로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인생은 원래 생각처럼 잘 안 되는 게 당연한 걸까? 아니면 자신만 이리도 어긋나는 걸까?
어제, 모튼한테 재무부에서 가져온 보고서를 넘긴 것까지도, 모두 다 훑어본 모튼이 서류를 통과시킨 것까지도 좋았다. 재무부 사람들은 며칠 만에 집에 돌아갈 수 있다며 기뻐했고, 아델라도 다른 의미로 기뻤다.
하지만, 그들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렸으니……. 그건 바로, 왕의 복귀 소식이었다.
일주일 내내 외궁과 자기 침실에서만 지내던 왕한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날 오후부터 왕은 정무에 복귀했다. 일전에 린다에게서 왕이 복귀할 거라는 쪽지를 받은 뒤 딱 하루만이었다.
그래, 뭐. 왕이니 당연히 관료 회의에 참석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그는 결코 국정에 관심이 있어서 돌아온 게 아니었다.
그의 관심거리는 단 하나, 이번에 주최하는 파티였다.
돌아오자마자 왕은 파티를 앞당기라며 모튼을 닦달했고, 모튼은 하는 수 없이 왕의 명을 따랐다.
‘그 덕분에 본궁에서 일하는 사람들 전부 밤을 새웠지.’
그 말인즉, 동쪽 구역의 통로를 찾는 게 또 미뤄졌다는 이야기였다.
아델라는 아침부터 뚱하니 옷을 꿰입으며 세자궁으로 갈 준비를 마쳤다. 보통은 시녀들이 지내는 곳에 배치된 하녀들이 해 주는 일이지만, 아델라는 꾸미는 일을 거의 스스로 알아서 했다.
‘동쪽 구역 사람들은 죽어나겠네. 며칠 밤새우고 해방되나 싶었는데, 또 밤을 새워야 한다니.’
하나 수습하면 또 하나의 일을 크게 치는 게 왕의 취미인가 보다.
아델라는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점검하고 숙소를 나왔다. 숙소 건물 앞에는 시녀들을 각 소속 궁으로 데려다 주기 위한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녀는 익숙하게 마차에 몸을 실었다.
‘그놈의 파티가 뭐기에…….’
왕궁에서 주최하는 파티이기에 작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돈도 많이 들 테고.
‘현재 국고가 어떤 줄 알면 저렇게 물 쓰듯 펑펑 쓰면 안 될 텐데…….’
물론, 왕이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국고가 이 정도로 바닥을 치지는 않았겠지.
아델라는 흔들리는 밖의 풍경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사이, 마차가 세자궁에 도착했다. 시녀들의 숙소와 세자궁은 비교적 가까운 편이라 금방 도착했다.
그녀는 마부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어머, 아델라 님!”
세자궁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띈 풍경은 세자궁으로 유유히 걸어오고 있는 리지나와 이저드였다.
둘이 어쩌다 만나 함께 걸어오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봐도 리지나가 이저드를 마중 나가서 우연을 가장해 함께 온 것 같았다. 참 대단한 집념이었다.
‘앞으로 새벽부터 기사단으로 출근해야 하나?’
아델라는 마부한테 감사 인사를 하고 웃으며 리지나를 돌아보았다.
“좋은 아침이에요, 리지나 님. 이저드 경.”
아델라가 자연스럽게 이저드한테 시선을 돌리려고 하자, 둘 사이에 리지나가 얼른 끼어들었다.
“예! 간밤에 편히 주무셨나요?”
“그럼요. 리지나 님은요?”
리지나는 일부러 아델라 앞에 서서 아델라를 세자궁으로 이끌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리지나가 아주 자연스럽게 아델라의 시선을 잡아챈 것 같았지만, 아델라와 이저드는 이미 시선을 교환한 후였다.
아델라는 리지나가 아델라의 시선을 잡아 끄려 애쓰는 모습에 웃음을 참고 친절하게 대화를 나눴다.
어제 아델라의 태도를 보고 리지나와 이브니아는 바로 다른 행동을 취하기 시작했다. 아델라가 철벽 방어를 하며 이저드와 시녀들 사이를 갈라놓으니,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다.
아침 일찍 이저드를 만나러 간 것도, 지금 이저드와 아델라 사이에서 둘이 대화도 못 나누게 쉴 새 없이 떠드는 것도, 전부 그녀들의 작품이었다.
‘대응이 빠르네.’
그 부분은 칭찬해 줄 만했다.
“그러고 보니, 파티가 열린다던데…… 아델라 님은 한 번도 못 보셨죠?”
“아, 맞아요. 저는 파티 자체가 처음이라 살짝 기대되네요.”
“영애께서 생각하는 그런 파티는 아닐 거예요. 오히려…… 처음이신 분들은 충격적일 수도요?”
“예?”
리지나는 ‘얘가 아직 왕궁을 잘 모르는구나?’ 하는 가소로운 표정을 지었다가 금세 웃음으로 감췄다.
“파티에 참석해 보시면 알게 될 거예요. 좋아하는 사람들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들은 매우 싫어하거든요. 아델라 님은 어떠실지 몰라, 뭐라 말씀을 못 드리겠네요.”
“아…… 그렇군요.”
도대체 무슨 파티를 열기에 저렇게 겁을 줄까?
왕궁에서 파티가 많이 열린다고는 들었다. 하지만 그 파티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어떤 내용으로 진행되는지 아델라는 잘 몰랐다.
왕이 주최하는 파티는 왕의 편인 귀족들만 참석할 수 있었다. 확실한 왕의 편이 아니면 파티 초대장은 가지 않았다. 대충 좋은 파티는 아닐 거라고는 짐작하고 있었지만, 충격 받을 만한 파티라고 하니까 절로 인상이 써졌다.
“강제 참여는 아니라, 아델라 님은 저하께 말해 빠지실 수 있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리니자는 은근 아델라가 빠져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하긴 아델라가 빠져야 이저드한테 접근이라도 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궁에 들어와 처음 개최되는 왕궁 파티를 빠질 수야 있나요?”
아델라는 언제 인상을 구겼냐는 듯이 미소 지었다.
‘보고 싶은 기분이 들지는 않았지만.’
하기 싫다고 해서 빠질 수 없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다. 이저드와 왕의 첫 대면인데 자신이 빠질 수야 있나.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어찌 알고.
“아델라 님이 나중에 힘들어 할까 봐 걱정이네요.”
“감사해요. 리지나 님께서 제 걱정을 이렇게 많이 하시는 줄 몰랐어요. 덕분에 오히려 마음이 든든해졌어요.”
리지나는 아델라의 환한 미소에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파티에서만이라도 이저드와 가까워져 볼까 했는데, 아델라가 또 방해하는 걸 두고 봐야 할 것 같았다.
“저로 인해 마음이 편해지셨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리지나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꺼내며 상냥하게 웃었고, 아델라도 맞받아쳐 주듯 감동한 눈빛으로 미소 지었다.
* * *
“그러니까, 실패했다?”
매서운 눈을 한 왕비가 화를 참는 듯이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물었다.
“예, 예.”
이저드와 헤이든한테 된통 당한 자객 중 하나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깊이 숙이며 대답했다.
자객으로서 수치도 이런 수치가 없었다.
“실패했는데, 무슨 낯짝으로 돌아온 것이냐? 돈이 더 필요하더냐? 버러지 같은 것들.”
왕비의 차가운 시선이 도망가지 않고 돌아온 몇몇 이들한테 향했다. 돌아오고 싶어서 돌아온 게 아니었는데, 조금 억울했다. 도망가려던 그들은 왕비의 편인 기사들한테 붙잡혀 온 것이었다.
“그, 그것이 왕비 전하께 알려야 할 것 같기에…….”
자객 중 하나가 기사들 눈치를 보며 말했다.
“무얼? 너희가 실패한 걸?”
“아, 아니요! 이저드라는 놈이 보통 놈이 아니란 것을요! 암살자 뺨치는 실력자입니다! 그 사람한테는 누구를 붙여도 힘들 거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나보고 포기하라는 말이냐?”
그녀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딱 봐도 그녀의 심기가 매우 불편해 보였다.
“아, 아니,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고…….”
“저것들 처리해. 더 뛰어난 암살자들을 고용해 그놈에게 붙여.”
“헉! 한 번만, 한 번만 기회를 주십―!”
서걱, 하는 서늘한 소리 뒤로 한 자객의 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뒤이어 살아 돌아온 다른 이들 모두 그런 식으로 죽임을 당했다.
왕비는 그들을 아무 감정 없는 눈으로 보다가 자리를 옮겼다. 그녀의 뒤로 시녀장과 시녀들이 따랐다.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아. 세자궁 쪽은 어떻게 되고 있지?”
왕비의 물음에 시녀장이 왕비 곁에 조금 더 가까이 붙으며 입을 열었다.
“아침에 들어온 보고로는 방해가 심해 이저드 공자 가까이도 못 간답니다.”
“방해?”
누가 감히 왕비가 보낸 시녀들을 방해할 수 있단 말인가. 자리에 멈춘 왕비가 못마땅한 눈으로 시녀장을 돌아보았다. 그에 시녀장이 깊이 고개 숙였다.
“예. 레널드 경의 누이동생이 세자 저하의 명을 받았는지, 적극적으로 저희 시녀들을 방해하고 있답니다.”
“벨제프 가는 나와 척을 지기로 작정한 게야?”
“그들이 아직 왕궁을 모르고 방자한 것이지요.”
세자의 힘을 믿고 우쭐하는 꼴이라니.
왕비는 안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레널드를 이 기회에 아예 치워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좋은 수가 없을까. 세자가 레널드를 너무 싸고돌아 문제였다.
“감히 날 방해하려 해? 고작 자작가 주제에?”
“어찌 처리할까요?”
“다시는 방해할 생각도 못 하게 해야지. 그 오만불손한 것들이.”
이저드의 존재만으로도 불안해서 잠이 안 오는데, 신경을 긁는 존재가 또 생기는 건 사양이었다.
왕비는 이를 아드득 갈며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 * *
우와아아아아!
꽤 큰 규모의 원형 경기장 안에서 커다란 함성이 하늘 높이 퍼져나갔다.
4층 정도로 이루어진 원형 경기장에는 귀족들과 그들의 자식들이 모여 어떤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이들은 매우 흥분한 표정으로 경기에 푹 빠져 있었고, 그 안에서 경기를 즐기지 못하는 사람은 몇 없었다.
‘이건…… 미친 짓이야.’
물론 아델라는 그 경기를 못 즐기는 사람 중 하나였다. 함께 있던 이저드도. 아델라와 이저드, 그리고 왕족들은 경기장이 잘 내려다보이는 정 가운데 층에서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다.
다들 웃고 떠들고 응원하는 와중에, 둘은 그사이에 섞이지 못했다. 아니, 섞일 수 없었다. 사람이 서로를 죽고 죽이는 경기를 보며 어떻게 즐길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이 어떻게 저걸 보고 아무렇지 않을 수 있어?’
이게 파티라니. 이걸 파티라고 부를 수 있다니.
검 한 자루 달랑 쥐여 주고 서로 죽여야 끝나는 경기를 보는 게 정녕 ‘파티’라는 말로 불릴 수 있다고?
“하, 항복! 사, 살려 주세요! 전 검을 못 씁니다! 살려 주세요!”
경기장 안에서 한 남자가 검을 던지며 외쳤다. 간절한 남자의 외침에 돌아오는 것은 야유뿐이었다. 그 남자는 결국 상대방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남자가 죽기 직전, 아델라는 눈을 감아 버렸다. 차마 눈 뜨고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살려고 도망치는 사람, 항복하는 사람, 이를 악물고 맞서는 사람, 여러 사람이 경기장 안에서 죽어 나갔다.
‘살려 주세요! 제발!’
‘아이만은, 아이만은!’
‘아악! 누가 좀!’
그녀는 순간 속이 울렁거려 입가를 가렸다. 구토가 올라올 것 같았다. 눈을 감으니 전생의 기억이 더 생생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무 죄도 없이, 힘도 없이 스러져 간 사람들이 생각났다. 도망가던 사람들이 적군의 손에 목이 잘리며 울부짖던 그때의 참상이 떠올랐다.
탁.
그리고 그 순간, 이저드가 조용히 그녀의 옆에 섰다. 이저드는 아델라 쪽을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온 신경이 아델라한테 향하고 있다는 걸 아델라는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곁을 지켜 주려는 이저드의 기척이 느껴졌다. 아델라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고개를 숙인 그녀의 시선에는 이저드의 신발만 보였다. 그녀는 그것만으로도 큰 위로를 받았다. 이저드가 옆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니 차차 마음이 진정됐다.
“……오라버니.”
전쟁의 기억을 떨치기 위해 몇 번이나 마음을 가다듬던 아델라가 드디어 입을 떼고 레널드를 불렀다. 시끄러운 환호성에도 레널드는 다행히 아델라의 부름을 듣고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응? 왜? 너 얼굴색이…….”
레널드는 아델라의 얼굴색이 평소보다 더 하얘졌다는 걸 알아챘다.
“나가자.”
그는 뒤늦게 아델라가 이런 경기에 면역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델라가 이런 잔인한 경기를 보는 게 처음이라는 것을 깜박 잊고 있었다.
레널드는 너무 당연하게도 아델라도 괜찮을 줄 알았다. 애가 워낙 독해졌기도 하고, 레널드나 다른 이들한테는 이런 일이 특별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니, 아니야. 나만 나갈게. 오라버니는 저하를 지켜야지.”
“아…….”
레널드가 힐끔 모튼을 돌아보았다. 모튼도 약간 놀란 모양인지 아델라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약하다, 약하다, 생각했지만 이 정도로 약할 줄은 몰랐다. 고작 이 경기 하나 못 보면 앞으로 어찌 왕궁에서 살아남을지 약간 걱정될 정도였다.
“아델라 양을 숙소에 데려다 주고 와. 내 특별히 허락하지.”
“감사합니다, 저하.”
레널드는 냉큼 고개를 숙이고 아델라를 부축해 원형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모튼은 그 둘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빤히 쳐다보다가 이저드를 곁눈질로 보았다.
아까는 일부러 움직인 건지, 아니면 그냥 경기를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앞자리로 다가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표정에 뭐가 드러나야 말이지.
아델라의 뒷모습과 이저드를 번갈아 보던 모튼은 다시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피를 무서워하는 건가? 여인 중에 잔인한 걸 못 보는 이들도 있다고 듣긴 했는데.’
그렇게 모튼의 오해는 더 깊어졌다.
하얗게 질렸던 아델라의 얼굴이 떠올라 모튼은 인상을 구겼다. 궁에서는 그런 식으로 무서워하는 사람이 드물어서 그런가,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그런 모튼을 경기가 시작할 때부터 지켜보던 이가 있었으니, 왕의 곁에 앉아 있던 왕비였다. 왕비는 이저드와 아델라, 레널드를 쭉 훑으며 왕의 귓가에 뭐라 속삭였다.
왕비의 속삭임에 왕의 시선도 그쪽으로 향했다. 왕은 왕비의 말에 무뚝뚝하게 모튼 쪽을 보다가 바로 시선을 돌렸다.
* * *
“아델라. 아델라, 너 괜찮아?”
아무리 애가 변했다고 해도, 아이는 아이였다. 그 부분을 신경 쓰지 못한 게 레널드는 뒤늦게 후회됐다.
“미안하다. 내가 몰랐어. 너무 잔인했지? 다음부터는 이런 일…….”
“잔인? 잔인이 아니라 끔찍한 거지.”
아직도 살려 달라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윙윙 맴도는 것 같았다. 어떻게 그런 경기를 즐길 수가 있지?
“그, 그렇지. 끔찍…… 응,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겠다.”
그의 말에 아델라는 인상을 구겼다.
“오라버니는 아무렇지도 않아? 저건 미친 짓이야.”
“음…….”
레널드는 정신적으로 아직 약한 아델라가 충격 받은 것으로만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도 종종 있었으니까.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어. 나도 처음에는 충격 받아서 몇 날 며칠 악몽을 꿨거든.”
“그런데?”
“그런데, 라니? 처음이니까 당연히 그럴 수 있다는 거지. 이런 일이야 왕궁에서는 비일비재해. 전하의 취미에 일일이 놀라고 충격 받았다가는 이곳에서 못 살아남아.”
“취미? 저게 취미라고?”
호수에 빠뜨려 하녀들을 죽이고, 사람과 사람이 서로 죽이는 경기를 구경하는 것이 어떻게 취미에 속할 수가 있단 말인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수는 없었다.
아델라는 머리가 아파 관자놀이를 짚었다.
“많이 힘들고 견딜 수 없으면 역시 그만…….”
레널드가 뭐라 더 말하기 전에 아델라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단호하게 막았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마.”
레널드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아까부터 아델라의 낯빛이 좋지 않아 이러다 애가 쓰러지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
“나 혼자 갈게. 오라버니는 돌아가.”
“안 돼. 너 가다가 쓰러지면 어쩌려고.”
“오라버니가 생각하는 내 이미지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 그렇게 안 약해. 오라버니 마음대로 판단하지 마.”
“난 그냥 네가 걱정되니까…….”
“걱정도 하지 마. 필요 없으니까.”
아델라는 지친 표정으로 차갑게 선을 긋고 먼저 자리를 떴다. 레널드는 자신이 아델라한테 뭔가 잘못 말한 부분이 있나 싶어 아까 했던 말들을 곱씹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상한 점이 없었다.
눈으로 아델라의 뒤꽁무니를 쫓던 그는 한숨을 쉬며 발걸음을 돌렸다. 도저히 아델라의 감정을 따라가지 못 하겠다.
* * *
레널드를 떼어 낸 아델라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경기장과 왕궁 사이에 거리가 있어서 경기장 밖에는 마차가 줄지어 대기하고 있었다.
아델라가 궁에 데려다 달라고 하자 마부는 순식간에 그녀를 왕궁까지 데려다 주었다. 아델라는 마부한테 인사를 건네고 숙소로 들어가는 척, 급히 경로를 틀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본궁으로 향했다. 본궁에서 일하던 이들도 전부 귀족들이라 파티에 초대되어 오늘은 본궁이 텅텅 비었다. 그녀는 굳게 다짐한 얼굴로 성큼성큼 동쪽 구역으로 향했다.
오늘 그들의 미친 경기를 보고 아델라는 뼈저리게 깨달았다. 왕의 미친 짓을 막아야 한다고. 거사가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희생자는 더욱 늘어날 터였다.
“음? 아가씨?”
아델라가 기척을 최대한 흐리게 하고 재무부에 성큼성큼 들어갔다. 그러자 벽을 살피고 있던 붉은 머리의 여인이 아델라를 의아하게 불렀다.
“왜 이쪽으로 오셨어요? 응? 표정은 또 왜 그래요?”
아델라와 같은 목적으로 본궁에 잠입했던 린다가 천천히 아델라 곁으로 다가왔다.
린다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넷 중에 가장 자유로운 상태였기 때문이다. 헤이든과 이저드는 귀족들 호위를 이유로 파티에 잡혀 갔고, 아델라는 모튼의 측근이라 파티에 초대되었다. 때문에 셋 다 본궁을 살피는 건 무리였다.
그래서 지금 린다만 본궁에 있는 거였다. 본궁이 비는 절호의 찬스를 린다가 놓칠 리 없었다.
“린다 경….”
아델라는 린다를 보자마자 긴장이 풀려서 아까의 기억이 다시 새록새록 생각났다. 그녀는 울상인 표정으로 린다의 품을 파고들었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파티에서 누가 무시하기라도 했어요?”
린다는 얼떨떨하게 아델라를 안고 등을 토닥여줬다.
“아니요. 파티 아니었어요. 그런 건 파티라고 불리면 안 돼요.”
아델라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렸다. 평소 우는 소리를 잘 안 내뱉는 아델라가 그러니 린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왜요? 왕이 또 무슨 미친 짓 했어요?”
린다는 아주 당연하게 왕을 콕 집어 물었다. 아무래도 외궁에서 보고 들은 게 많아 왕 이외의 미친 인물을 생각할 수 없었다.
“네.”
그녀의 예상이 적중했다. 아델라가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끔찍했어요.”
“그놈은 진짜…… 정상적인 놈이 아니에요.”
린다가 검지를 자신의 머리 쪽에 가져다 대고 빙빙 돌렸다. 몸소 표현할 정도로 미쳤다는 말이었다. 그에 아델라는 다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린다는 그런 아델라를 도닥이며 아델라의 마음이 괜찮아질 때까지 안아 주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아델라가 진정이 되자 둘은 차근차근 동쪽 구역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요, 린다 경.”
“예?”
“왕이 너무 말라서 그런가요? 모튼하고 좀…….”
아까의 그 장면을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델라는 인상을 구기면서도 회상에 잠겼다.
그녀는 왕에 관해 말로만 들었지, 직접 대면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왕을 보기 전까지는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막상 마주한 왕의 외모는 모튼이나 이저드와는 너무 달랐다.
왕의 첫인상은 마르고 퀭하고 날카로웠다. 죽음이 예정되어 있어서인지 파리한 피부와 마른 몸, 퀭한 다크서클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푸른 머리는 관리를 해 줘서 윤기가 돌았지만, 그의 푸른 눈은 빛이 바래 탁해 보였다. 왕과 같은 푸른 눈이었지만, 모튼의 눈은 저렇게 탁하지 않았다.
“안 닮았다고요?”
린다는 회상하느라 말이 없어진 아델라 대신 뒷말을 짐작하며 물었다. 그녀의 짐작이 맞았는지, 아델라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카락 색과 눈 색, 흘러나오는 분위기만 보고 안 닮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왕과 왕비의 유전자가 잘 섞여서 태어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봐서는 왕과 모튼은 닮은 구석을 찾기 힘들었다.
모튼은 준수한 편에 속했지만, 왕은 글쎄, 젊었을 때의 모습을 보면 또 다를까? 그나마 닮은 쪽은 중년의 나이임에도 빼어난 미모의 왕비였지만 그조차도 모호했다.
“네. 그렇다고 왕비를 닮았다고 하기에도 좀……. 그나마 닮은 부분이 입 모양과 콧대 정도?”
“뭐, 지금 저렇게 파리하고 마른 모습이더라도 젊었을 때는 괜찮은 외모였다고들 하더군요. 그래 봤자 갈아 버려도 시원찮은 범죄자지만.”
린다는 왕의 젊은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이저드 어머니한테 참변이 일어나기 전에 한 번.
그땐 그나마 잘생긴 축에 속하긴 했지만, 사실 그때도 왕에게서 이저드와 닮았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어린 이저드의 미모에 비할 자는 세상에 단 둘뿐이었다. 미하일 공작과 공작 부인.
왕이 어린 이저드한테 당당하게 자신을 똑 닮았다고 하는데, 린다는 그 자리에서 ‘어디가?’ 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걸 참았다. 그땐 공작 부인이 잘못될까 봐 참았던 건데, 그날이 이렇게 평생 후회로 남을 줄은 몰랐다.
“그러고 보니, 그놈 젊었을 때를 떠올려 보면 딱히 모튼하고도 안 닮았네요. 자식이 무조건 부모를 닮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요.”
“그건 그렇죠. 그래도 왕하고 이저드는 절대, 완전 안 닮았는데, 오해한다는 게 어이없어요.”
아델라가 입을 비죽 내밀었다.
다들 이저드와 미하일을 나란히 두고 같이 봐야 알 텐데. 이저드와 미하일만큼 자식과 부모 사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해 주기도 어려웠다. 오히려 오해하는 게 이상할 정도로 둘은 판박이였다.
“중앙 귀족들은 미하일 님의 얼굴이 가물가물할 걸요? 수도에 잘 올라오던 분도 아니었고, 못 본 지 엄청 오래됐으니까요. 그리고 모튼이 왕과 안 닮아서 그것도 하나의 이유로 작용하지 않았을까요?”
“그럼 그 반대일 수도 있잖아요. 모튼과 이저드 둘 다 안 닮았으니, 둘 다 자식이 아닐 수도.”
이저드의 어머니가 외도했다는 걸 귀족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게 화가 난 아델라는 쀼루퉁하게 말했다.
“……그러게요?”
아델라가 툭 던진 말에 린다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한참 고민하다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 그러게요?!”
“네?”
린다가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하자, 아델라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왜 그러세요?”
“제 아들도 적통이면서 도련님한테 뜬금없이 적통 운운하고, 아무 준비도 없이 이저드 님을 죽이려고 하고…….”
왕위는 이미 정해져 있는데 불안해하는 것도 이상했다.
벽난로를 살피던 린다는 뭔가 깨달은 모양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말이에요?”
아델라가 놀란 눈으로 묻자, 린다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에요. 확실한지 확인해 보고 말씀 드릴게요. 일단 나가죠.”
“어? 왜요?”
“사람들 옵니다.”
“아.”
엄청 멀리에서 느껴지는 기척이었다. 그걸 고민하는 중에도 파악하고 있었다니. 아델라는 새삼 린다가 대단해 보였다.
* * *
늦은 밤, 아델라는 작은 테이블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아까 낮에 린다가 했던 말을 곰곰이 생각 중이었다.
주변은 이미 어둠이 깔려 숙소 안에 불이 전부 꺼져 있었고, 아델라의 방에서만 희미한 램프의 빛이 밖으로 약하게 새어나갔다.
톡, 톡.
아델라가 그렇게 멍하니 린다의 말을 곱씹고 있는 사이, 창문 밖에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톡.
다시 한 번 창문을 약하게 치는 소리가 들렸고, 아델라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저―! 아.”
문을 열자 보이는 사람은 그녀의 아름다운 연인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소리를 내려던 아델라가 고요한 주변을 의식하고 얼른 옆으로 몸을 비켜 줬다. 이저드가 훌쩍 뛰어 단번에 방 안으로 들어오자 아델라는 주변을 살피며 창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커튼까지 쳤다.
“아델라.”
걱정스러운 눈을 한 이저드가 아델라를 안았고 아델라 또한 그의 품에 안겼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저드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이저드! 괜찮아요?”
“음?”
“무슨 일 없었어요?”
“……?”
이저드는 아델라가 걱정되어 모두가 잠들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왔는데, 오히려 아델라가 이저드를 걱정했다. 그녀는 이저드의 얼굴을 구석구석 살폈다.
“왕이 뭐라고 했다거나?”
이번 일로 충격받은 건 아델라일텐데, 그런 와중에도 자신을 걱정하는 아델라를 보며 이저드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아델라의 작은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미소를 띠었다.
“그런 일 없었네. 그대는?”
“저요? 전 왕이랑 전혀 관련이……. 아.”
그제야 아델라는 뒤늦게 이저드가 왜 밤늦게 이곳에 왔는지 이해했다. 이저드 또한 아델라를 내내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델라의 얼굴에 천천히 웃음꽃이 번졌다. 그녀는 이저드의 머리가 평소보다 헝클어져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손을 뻗어 그의 앞머리를 정돈해 줬다.
“저 괜찮아요. 놀랐죠?”
마주한 아델라의 눈에는 다행히 이제 어떤 두려움도, 무서움도 없었다.
그녀를 확인하러 오길 잘했다. 이저드는 아델라의 허리를 끌어안고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낮에 본 아델라의 하얗게 질린 얼굴이 자꾸 눈에 밟혔다. 일도 제쳐 두고 그녀를 따라 가고 싶은 것을 이저드는 정말 힘들게 참았다.
“미안하네. 같이 있어 주지 못해서.”
“아니에요. 아까 이저드 덕분에 괜찮아졌는걸요. 지금 이렇게 곁에 있기도 하고…….”
크게 뛰는 그의 심장 소리가 너무 듣기 좋아 아델라는 그의 목에 팔을 둘러 좀 더 꽉 마주 안았다.
“저야말로 혼자 감당하게 해서 죄송해요. 곁에 있어 드리고 싶었는데.”
“아니야. 그대가 더 안 봐서 다행이네. 그건 정말…….”
이저드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이저드도 수많은 전장을 겪어 봤지만, 그런 식으로 사람을 죽이는 건 보지 못했다. 싸울 의지가 없는 이를 죽이고, 무서워서 벌벌 떠는 이를 죽이고, 심지어 성인도 되지 못한 어린 아이조차 죽였다.
이 무참한 살육의 현장이 귀족들의 유희 거리가 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사람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괜찮으세요?”
이저드가 뒷말을 잇지 못하고 한숨을 쉬자 걱정이 된 아델라가 고개를 들어 물었다. 이저드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왕의 닦달이 끝났으니 본궁 사람들이 밤새는 일이 줄어들 거네. 나는 헤이든 경과 린다 경과 함께 매일 밤 본궁을 살필 거야.”
“그럼 전…… 최선을 다해 왕비와 모튼의 시선을 잡아 볼게요!”
“지금도 이미 충분하네. 왕비가 그대를 보는 시선이 좋지 않아. 무슨 일이 생길까 염려되네.”
“모튼과 레널드를 이용해서 최대한 요리조리 빠져나가 봐야죠.”
그러려고 연기까지 하고 있는 거니까.
이용가치가 있는 아델라를 모튼이 쉬이 버릴 것 같진 않았다. 아직 이저드에 대한 정보도 못 알아냈고 무엇보다 다른 시녀들은 왕비의 편이기 때문에 모튼의 입맛대로 휘두르기 힘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아델라처럼 편한 수단을 쉽게 포기할 리 없었다.
“나는?”
“예?”
“나는 왜 이용할 생각을 안 하나? 그대가 위기에 빠졌을 때, 내가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이용하게. 난 그러려고 그대의 곁에 있는 거네.”
그의 말에 아델라는 눈을 또르륵 굴렸다.
이저드를 살리려고 이곳에 온 건데, 이용할 수 있을 리가. 아델라는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델라가 말이 없자 약간 불안해진 이저드는 그녀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혼자 감당하지 말게. 그러지 않기로 나와 약속했잖은가.”
“그, 그렇죠.”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날 찾게. 이용하고. 아니면…….”
“아니면요?”
“내가 이용당할 방법을 찾아보겠네.”
그가 태연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미소에 잠시 혼을 뺏겼던 아델라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네에? 안 돼요. 이저드는 이미 튀거든요? 그냥 제가, 제가…… 이저드를 이용해 볼게요.”
“좋네. 난 전면에 나서기 위해 이곳에 온 거니까 더 튀어서 나쁠 거 없어.”
그, 그건 맞지만.
‘우리, 괜찮을까?’
참 순탄하지 않은 둘이었다.
아델라는 애써 안 좋은 생각을 지우고 그를 꼭 안으며 그의 품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그렇게 잠시간 말없이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안고만 있었다.
* * *
“이저드 말이야.”
“옛?”
방금까지 이저드 생각 중이었는데, 갑자기 이저드의 이름이 나오자 덜컥 아델라의 심장이 떨어졌다.
“왜 그리 놀라? 딴생각 중이었나?”
이저드 생각한 거 들킨 줄. 타이밍이 정말 절묘했다.
“죄송합니다. 어제 일을 잠깐 생각하느라…… 이저드 경이 왜요?”
아델라는 애써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물었다.
“어제 일? 아, 그러고 보니, 그대. 그렇게 약해서 어쩌나?”
“예?”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 약하다니? 어디가? 아델라는 모튼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눈만 깜박였다.
“자극적인 걸 못 보면 말을 하지 그랬어. 그렇게 그대의 약점을 다 보여 주면 어떡하나.”
“자극적이라 함은…… 어제, 파티요?”
“그래.”
‘자극저어어억?’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살육을 즐기는 게 이들에게는 그저 ‘자극적’이라는 단어 하나로 끝날 일이란 말인가? 아델라는 레널드나 모튼이 다시 보였다. 아니, 둘 뿐만이 아니었다. 그걸 보고 즐기는 이들 전부가 다르게 보였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런 환경에 노출됐는지 파티에 초대된 귀족 중 누구 하나 이 경기에 의문점을 제시하지 않았다. 누구도 이 경기가 미친 짓이라고, 이상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런 귀족들 사이에서 아델라만 괜히 유난스럽고 튀는 사람처럼 보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처음 보는 광경이라 조금 놀랐습니다. 앞으로 행동에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처음, 이라고 하기에도 모호하고, 그렇다고 해서 아니라고 하기에도 모호했지만, 일단 모튼을 속이려 아델라는 거짓말을 내뱉었다.
전쟁에서 겪었던 일들을 회상하면 그들이 즐겼던 살육이라는 그 행위 자체는 그녀에게 아예 처음인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특수한 경우가 아닌 곳에서 그때의 기억을 회상하게 되는 건 처음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처음이란 말도 거짓말은 아니었다.
“내 그댈 위해 해 주는 말인데, 약점을 드러낼 것 같으면 차라리 스웰라 영애처럼 아프다는 핑계로 빠져. 알겠나?”
“예. 명심하겠습니다.”
모튼은 자신이 무슨 대단한 조언이라도 건넨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런 파티 자체를 없앨 생각은 할 수 없는 걸까?
“영애들 중엔 비위가 약한 이들도 많다고 들었으니, 이번 일은 크게 주목받지 않을 거야. 그래도 앞으로 조심 좀 하게. 내 말 명심하고.”
“예. 더 단련해서 저하의 앞길에 누가 되는 일을 범하지 않겠습니다.”
아델라의 대답은 모튼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아델라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을 보며 자신이 너무 지적만 했나 싶었다. 이럴 때는 적당한 당근도 필요한 법이었다. 교육에는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조합해야 했으니까 말이다.
“흠흠. 그 정도로 내 앞길이 막힐 리가 있나. 그런 걱정은 말고, 그대가 왕궁에서 잘 지낼 생각을 해. 이저드랑도.”
‘여기서 감동해야 하는 건가? 그런 타이밍인가? 그나저나 이저드는 깨알같이 언급하네.’
아델라는 눈을 바닥으로 내리깔고 약간 고민했다. 감동하라고 던진 말 같았지만 감동은커녕 어이만 없었다.
이쯤 되니 억지로 감동하는 것도 점점 지치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통로를 찾기 전까지는 비위를 맞춰야지.
“제 편의를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하의 은덕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억지로 웃는 아델라의 입가에 경련이 일어날 것 같았다. 여기에 눈까지 초롱초롱하게 떠야 하니 감동해서 우는 것과는 다른 의미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래. 알고 있어 다행이군.”
저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오는 건지…….
모튼의 득의양양한 표정이 꼴 보기 싫어 아델라는 빨리 화제를 돌렸다.
“저 그런데, 아까 이저드 경에 대해 뭐라 하실 말씀이 있었던 거 아닙니까?”
“아, 그거.”
모튼이 무언가 생각난 듯 아델라를 빤히 보았다.
모튼한테도 아델라는 특이하고 튀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이저드도 그렇게 느끼지 않을까? 2주 동안 붙어서 아델라의 신선한 모습을 봤다면 시선이 갈 법도 했다.
“왜 그러십니까? 제가 무슨 실수라도…….”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모튼의 시선이 불편했던 아델라는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아니, 별건 아니네. 혹시, 이저드가 그대한테 관심이 있는 게 아닌가?”
“예에?”
아델라는 그 어느 때보다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놀랐다.
‘갑자기 가만히 있는 이저드는 왜? 그런 티 안 내셨는데?’
혹여나 서로 좋아하는 게 들켰을까 봐 아델라는 모튼의 앞에서 처음으로 긴장했다.
“왜 어제, 아델라 양이 힘들어하는 걸 보고 이저드가 그대 곁으로 다가갔지 않나.”
“그랬습니까? 제가 그땐 경황이 없어서……. 그냥, 경기를 더 가까이에서 보려고 앞으로 나간 것 같았습니다. 절 신경 쓰지도 않았고요.”
자신을 이용하라던 이저드의 말이 떠올랐지만, 모튼의 물음은 목숨에 위협이 되는 게 아니라 아델라는 모른 척했다.
“그대는 그렇게 생각하나?”
“으음…… 예. 아무래도 이저드 경이 저한테 관심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아서요. 너무 무표정이라 생각을 읽기 쉽지도 않고요.”
모튼도 그 부분이 걸리긴 했다. 표정에 변화가 있어야 어떤 약점이라도 잡을 텐데, 그는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시녀들이나 자신을 무슨 생각으로 대하는지.
애당초 주변 사람들을 무슨 생각으로 대하는지 모튼이 아무리 관찰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럼 확인해 보지.”
“확인요? 어떤……?”
저 ‘확인’이라는 말이 그다지 좋게 들리지 않았다.
모튼은 이저드가 세자궁으로 들어선 기척을 느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확신이 없으면, 생기게 일을 만들면 되지 않는가.
“나가지.”
“예?”
“휴게실로 돌아가라고.”
“아…… 예.”
‘갑자기 또 뭐야? 뭔데?’
아델라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세자의 집무실을 나왔다. 그러자 모튼이 그녀를 따라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평소 아델라를 배웅한 적 없는 모튼이 이상한 행동을 하니 아델라는 속으로 약간 불안해졌다.
“뭐 하나? 가지 않고?”
아델라는 얼떨떨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레널드와 이저드가 돌아오는 기척이 느껴지는데, 확인한다더니 아델라를 돌려보내는 게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아델라의 이상한 예감은 그대로 적중했다.
이저드와 레널드의 기척이 점점 집무실과 가까워졌다. 그리고 둘이 모퉁이에서 고개를 내밀었을 때,
휙!
모튼이 기다렸다는 듯이 아델라의 팔을 거칠게 잡아 당겼다.
“어어어?”
이제 막 몸을 돌려서 휴게실로 돌아가려던 아델라는 모튼이 너무 강하게 잡아당겨 순간 균형을 잃었다.
그녀의 몸이 크게 자신 쪽으로 휘청이자 모튼은 기다렸다는 듯이 팔을 들어 그녀를 품에 안으려고 했다. 이저드와 시선을 맞추면서.
‘이 각도, 이 자세, 딱!’
모튼 품에 안길 것 같은 각도!
모튼이 왜 이런 짓을 하나 생각하기 전에 아델라의 본능이 먼저 앞섰다. 그녀는 정말 너무나도, 죽었다 깨어나도 모튼의 품에 안기고 싶지 않았다.
‘이 자식, 왜 자기 맘대로 날 껴안을 준비를 하는 건데?’
기분이 매우 불쾌했다.
쾅!
순간적으로 아델라는 모튼이 등지고 선 문에 두 팔을 쭉 내밀어 받쳤다.
“…….”
“…….”
아주 간발의 차로 아델라는 모튼의 가슴에 얼굴을 박아 넣는 불상사를 면했다.
‘와, 와하하하, 와……! 큰일 날 뻔!’
모튼이 아델라를 안을 준비를 할 때, 아델라는 그가 잡아챈 방향으로 빠르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동시에 허벅지와 다리, 허리에 힘을 주어 중심을 잡은 뒤 팔을 최대한 쭉 뻗어 벽을 짚고 버텼다.
덕분에 모튼에게 안기지는 않았지만 아델라의 양팔 사이에 모튼이 갇히는 상황이 연출되어 버렸다. 그 모습은 잘못 보면 아델라가 덮치는 꼴로 보일 수도 있었다.
일명…… 벽치기?
“죄, 죄송합니다!”
아델라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모튼한테 인사를 올리고 후다닥 휴게실로 뛰어갔다. 뛰어가기 전, 이저드의 표정을 힐끔 살폈지만 다행히도 그의 표정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하마터면 이저드가 보는 앞에서 모튼의 품에 안길 뻔했다.
모튼의 품에 안긴다는 전제도 소름 돋는데, 그걸 사랑하는 사람이 본다니? 심장이 덜컥 바닥으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이저드한테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확인 어쩌고 하더니, 날 안았을 때 이저드의 표정을 확인해 보려고? 나한테는 말도 없이?’
아델라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인상을 구겼다. 불쾌한 기분을 떨친 그녀는 휴게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아델라가 사라진 자리에는 남자 셋만 덩그러니 남았다.
모튼도 제법 당황한 모양인지 방금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한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여자한테, 그것도 자기보다 작은 아이한테 벽치기를 당했으니 당황할 법도 했다.
하지만 자신 쪽으로 다가오는 이저드와 레널드가 있어 티를 낼 수 없었다.
“괘, 괜찮으십니까, 저하?! 제가 가서 아델라를 크게 혼내겠습니다! 용서하십쇼!”
“아니, 아니야. 아델라 양이 날 편히 생각하여 그런 거니까 마음 쓰지 마.”
모튼은 일부러 이저드에게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어제 봤던 이저드의 행동은 모튼의 착각이었는지, 이저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 * *
안 그래도 오늘 내내 기분이 안 좋았는데, 이젠 혈육도 아델라의 속을 긁고 있었다.
“너 미쳤어? 어떻게 그런 짓을……! 당장 저하께 가서 용서 빌어!”
‘이 망할, 정확히 말하면 내가 피해자거든?’
억지로 잡아당긴 것도 모튼이고, 이저드의 마음을 확인한답시고 아델라를 이용하려 한 것도 모튼이었다. 거기에 자신의 의사는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왜 자신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저하께서 다 받아 준다지만, 어떻게 그런, 그런 걸 할 수가 있어? 누가 봤으면 어쩔 뻔했어!”
‘아악, 미친, 미친! 억울해 죽겠네! 그 자식이 날 당겼다고!’
답답한 마음이 하늘을 찌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화를 천천히 가슴 속에 모아 두는 기분이었다.
“하…… 내가 하고 싶어서 했니? 걔……! 저하께서 날 잡아채는 바람에 내가 벽을 짚을 수밖에 없었거든?”
“저하께서?”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아델라한테 잔소리를 퍼붓던 레널드가 잠시 숨을 고르고 물었다.
“그래! 그리고, 그런 거? 그런 게 뭔데? 누가 보면 내가 저하께 뭐 하려다 걸린 줄 알겠어! 내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저하 몸에 안 닿으려고 노력했는데.”
온몸의 근육을 급하게 써서 휴게실에서 대기하는 내내 아델라는 허리와 다리, 팔 등등에 얼얼함을 느꼈다.
매일매일 스트레칭이라도 해 놔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허리나 다리가 잘못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만큼 아델라는 필사적으로 벽을 짚었다.
“저, 저하께서? 저하께서 널 먼저 잡아당겼다고?”
“어! 오라버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저하 편부터 들고!”
아델라가 눈을 치켜뜨며 그를 흘겼다.
“그냥 뭐, 할 말 있으셔서 잡은 건 아니고?”
“말 다 끝났고, 헤어지는 길이었거든? 갑자기 이저드 경한테 확인해 볼 게 있다고는 하셨지만.”
“아아, 난 또 뭐라고. 놀랐잖아! 이야기된 거였으면 진작 말하지.”
그가 머쓱하게 웃었다. 그 역시 좀 이상하게 생각하긴 했다. 모튼이 틈을 줄 사람이 아닌데 말이다.
‘이야기됐다고 누가 그래? 지 혼자 생각하고 날 이용한 건데! 어휴, 상사나 부하나.’
아델라는 혼자 짐작해서 화내고 혼자 이해하는 레널드를 아니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델라의 시선에 괜히 찔린 레널드가 말을 돌렸다.
“그, 그런데 너 진짜 괜찮아?”
“어.”
“화났어? 난 네가 저하께 밉보여서 왕궁 생활 힘들까 봐…….”
“네 왕궁 생활이 흔들릴까 봐, 겠지! 됐어. 말 걸지 마.”
오늘 일이 일찍 끝난 김에 스웰라와 티타임이라도 가질까 했는데 레널드가 아델라를 따로 부른 덕분에 티타임도 다 물 건너갔다. 겸사겸사 왕비의 동태를 확인해 보려고 했건만.
레널드가 아델라를 부른 사이 벌써 전부 흩어졌을 터였다.
내일 알아봐야 하나.
“아델라 님!”
레널드와 아델라가 세자궁과 가까워지자, 멀리에서 누군가가 둘을 향해 뛰어왔다.
하늘하늘 날리는 풍성한 갈색 곱슬머리를 지닌 스웰라였다. 아델라는 속으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스웰라의 표정은 가히 좋지 못했다.
“와, 왕비님께서, 왕비님께서 부르세요!”
그렇게 말하는 스웰라의 얼굴에는 땀이 맺혀 있었고,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려 있었다. 겁을 잔뜩 먹은 스웰라의 모습에 아델라는 왕비가 자신을 그냥 부른 게 아니란 것을 짐작했다.
아델라와 레널드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눈빛을 교환했다.
“안 돼.”
“가요.”
둘의 대답은 동시에 터져 나왔다. 단호하게 고개를 저은 레널드와 달리 아델라는 어차피 벌어질 일이란 걸 알았기에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서로 다른 대답을 한 둘은 잠시 침묵했다. 먼저 입을 연 건 레널드였다.
“저하께서 회의에 들어가셔서 언제 끝날지 몰라. 지금은 안 돼.”
“이미 그 시간을 노리고 부른 것 같은데? 이번에 거절해도 또 그럴 거야.”
“내 말 들어. 가더라도 저하 계실 때 가.”
“오라버니, 왕비 전하의 명 거부할 힘 있어? 난 없는데. 이번에 거절해서 그분 화만 돋우느니, 가는 게 나아.”
“누가 가지 말래? 시간을 끌었다가 저하께서 오시면…….”
아무래도 불안해진 레널드는 아델라의 팔을 잡았다.
왕비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앞길을 막는 장애물을 치우는 사람이었다.
“아마 내가 여기서 시간을 끄는 것보다 대신들이 저하를 잡아두려는 게 더 길걸? 대신들 중 왕비 전하의 편이 얼마나 많은데.”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레널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델라는 그의 손에서 팔을 빼냈다.
“이럴 시간에 저하께 알리는 게 나한테 더 도움 되겠다.”
그렇게 말한 아델라는 휑하니 고개를 돌리고 먼저 앞장섰다.
“야, 아델라! 아델라! 천천히 가! 알았지? 최대한, 천천히 걸어!”
레널드의 외침에 아델라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발걸음은 최대한 느리게 하는 것을 보니, 레널드의 마지막 말은 들어 줄 생각인 모양이었다.
* * *
왕비궁은 곳곳에 수정으로 장식된 물건들이 넘쳐났다. 세자궁과는 다르게 화려한 색채의 왕비궁은 수정 또한 다양한 색상이 장식되어 있었다.
“왕비 전하를 뵙습니다.”
주변을 구경하던 것도 잠시, 아델라는 드디어 이 왕궁의 실세와 마주했다. 화려한 왕비궁만큼이나 화려하고 빛나는 드레스를 차려입은 왕비가 환하게 웃으며 아델라의 인사를 받았다.
“만나서 반갑구나. 아델라라고 했던가?”
날카로운 눈매의 왕비는 아델라를 향해 최대한 웃어 보였다. 웃는 상임에도 오싹한 독기가 느껴진 것을 보면, 아델라를 적대하는 왕비의 진심은 미소로도 못 가리는 듯했다.
아델라의 안내를 맡았던 스웰라는 움찔 몸을 떨며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걱정되는 마음에 아델라를 힐끔 보던 스웰라는 이브니아와 리지나가 서 있는 곳으로 주춤주춤 발을 돌렸다. 매서운 분위기를 풍기는 왕비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는 아델라를 스웰라는 존경에 가까운 눈으로 보았다.
“예. 벨제프 자작의 누이동생, 아델라 벨제프입니다.”
“세자궁에 배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먼저 만나 봤어야 했는데. 내가 그동안 좀 바빠서. 이해해 주렴.”
“이렇게 불러 주신 것만으로도 영광이옵니다.”
아델라가 예의를 갖추고 깊게 고개 숙이자, 왕비의 표정이 일순간 차갑게 가라앉았다가 돌아왔다. 왕비는 부드럽게 미소를 보이며 아델라를 이끌었다.
“아델라 영애는 수도가 처음이라던데. 어려운 게 많았겠어.”
“저하의 은덕으로 매우 익숙해졌습니다. 너무 잘 알려 주셔서요.”
“그래? 우리 세자께서 아델라 양한테 마음을 많이 써 주는 모양이야. 하긴, 레널드 경도 많이 믿으니까.”
아델라와 왕비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사이, 디저트와 차가 준비됐다. 아델라가 그 모든 것들을 신기한 표정으로 보자, 왕비의 눈썹이 약간 꿈틀거렸다.
이런 애송이한테 다른 시녀들이 여태 휘둘리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복장이 뒤집혔다.
‘무능한 것들.’
고작 화려한 디저트와 찻잔에 놀라는 아이 하나를 처리하지 못해서 자신까지 나서게 했다. 왕비는 이 값을 톡톡히 받을 생각이었다. 각 영애의 가문들에게.
왕비는 아델라가 디저트에 시선이 팔린 틈을 타서 매서운 눈빛으로 이브니아와 리지나, 스웰라를 노려보았다. 그녀들은 왕비의 시선을 느끼고 몸을 움츠렸다.
“저, 이거 다 제가 먹어도 되는 건가요? 귀한 것들이라…….”
“무슨 소리니? 내 여태 신경을 써 주지 못해 준비한 거니, 많이 먹으렴.”
언제 시녀들을 째려봤냐는 듯이 왕비는 웃으며 차와 디저트를 권했다. 왕비가 먼저 솔선해서 찻잔을 드니, 아델라도 의심 없이 찻잔을 들었다.
아델라가 찻잔을 들자, 왕비의 시선과 시녀장의 시선이 아델라의 입술에 은밀하게 집중됐다.
‘독, 탔구나.’
아델라는 찻잔을 들고 향을 맡아보는 순간 알아챘다. 찰나에 그녀는 여러 고민을 했다.
마셔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마시고 안 쓰러지면 이들이 어떻게 나올까? 그렇다고 쓰러지면? 그 뒤는?
아무리 아델라가 연기를 배웠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죽은 척하는 건 역부족이었다.
“앗.”
“왜 그러느냐?”
아델라가 갑자기 소리를 내자, 왕비는 짐짓 걱정하는 척 표정을 숨기고 물었다.
“헉, 죄송합니다! 아직 뜨거워서요. 제가 뜨거운 걸 잘 못 먹습니다.”
“그럼 식혀서 천천히 마시렴. 시간은 많아.”
왕비궁에 있던 모든 이들이 아델라가 찻잔을 들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밖에 대기하는 왕실 기사들까지. 그 압박감이 이 공간에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았다.
전에도 누누이 이야기했지만, 아델라는 누구보다 죽음의 기운을 잘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기운이 너무 잘 느껴져서 탈이었다.
‘이거 먹고 죽지는 않겠지만, 이게 실패하면 또 무슨 짓을 저지를까? 그러니 기사들도 대기하는 거고.’
그렇다고 이렇게 질질 끌 수도 없었다. 아델라는 웃으며 디저트를 집어 입에 넣었다.
‘레널드가 얼마나 빨리 오려나?’
차는 조금만 시간을 더 끌다가 마셔야겠다. 레널드한테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서.
사실 아델라는 이제 어지간한 독에는 면역이 있었다. 하도 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어서 결국 2년간 독초를 공부하고 독과 친해지려 노력했다. 품에 항상 해독제 몇 개를 가지고 다니는 건 기본이었다.
“정말 맛있습니다. 이런 맛은 처음이에요.”
아델라는 순진하게 웃으며 디저트를 이것저것 입에 넣었다.
“맛있다니 다행이구나. 많이 먹거라.”
‘네 마지막 음식이 될지도 모르니까.’
순진한 눈동자를 초롱초롱 빛내는 아델라를 보며 왕비는 모튼이 저 세상 물정 모르는 걸 뭘 믿고 뒤를 봐 주고 있는지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 저 순진함을 이용해서 이 아이가 모튼을 꼬여낸 건가? 확실히 왕궁에서는 보기 드문 유형이긴 했다.
“마시면서 먹으렴. 체할라.”
그래 봤자, 약한 것들은 왕궁에서 사라지기 마련이었다. 아델라도 곧 그리될 터였다.
왕비가 아델라를 보며 입꼬리를 올리고 있을 때, 아델라는 찻잔을 보며 슬슬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디저트는 계속 먹고 싶을 만큼 맛있었지만 이제 그만 차를 마셔줘야 할 것 같았다. 나름대로 디저트를 천천히 꼭꼭 씹어 먹으며 시간을 끌었다지만 이제 슬슬 왕비의 눈에서 광선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아효, 내 팔자야. 또 만나네, 독약아. 이제 우리, 친구 해도 되겠어. 친해질 수 없는 사이지만.’
전생에는 아델라를 향했던 독약은 아니었는데 이번 생에는 어째 독약이 친근하게까지 느껴졌다. 아델라는 린다 대신 독이 든 잔을 마셨던 기억이 나서 씁쓸하게 웃었다.
그때 그 맛만 생각하면 지금도 속이 울렁거렸다. 맛이 더럽게 없었기 때문이다.
‘에라, 모르겠다.’
시간은 끌만큼 끌었으니, 나머지는 못 미더운 레널드한테 맡긴다.
아델라는 천천히 찻잔에 입을 가져다 댔다. 독약과 섞인 오묘한 차 맛이 혀끝에 감돌았다. 아델라는 잠시 속으로 심호흡을 하고 조금씩 차를 목 안으로 넘겼다.
아델라가 한 모금씩 마실 때마다 방 안에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특히 왕비궁 소속 시녀들은 목이 바싹바싹 타는지 계속 마른 침을 삼켰다. 반면 세자궁 소속 시녀들은 조용히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셋의 행동을 보니, 아델라가 마시는 차 안에 독이 든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알면서 모른 척을 하고 있던가.
하지만 아델라한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계속 그녀를 힐끔힐끔 보는 스웰라의 행동으로 봐서는 진짜 모르는 것도 같았다.
그렇게 반 정도 찻잔을 비웠을까? 아델라가 움찔, 몸을 굳히며 찻잔에서 입을 뗐다.
아델라의 작은 움직임도 유심히 살피고 있던 왕비의 표정에 점점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아델라가 몸을 움찔하고 반응한 이유가 몸에 독이 돌기 시작해서라고 생각했다.
‘엥? 응?’
그러나 아델라가 움찔거리며 찻잔에서 입을 뗀 건, 쓰러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익숙한 기척이 느껴져서 놀랐기 때문이었다.
‘이 기척…… 설마?’
아주 가까운 곳에서 갑자기 왕비궁을 뒤덮는 강한 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아델라가 아주 잘 알고 있는 기였다.
‘이저드?! 헙. 어떡해, 화나셨나 봐!’
기척으로만 느끼는데도 그의 기세가 흉흉했다. 거센 기가 느껴지자,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은 놀라 왕비궁 밖으로 뛰쳐나갔다.
‘음? 그쪽 아닌데.’
잘못 짚고 전혀 반대로 튀어 나가는 기사들의 기척을 느낀 아델라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지냈으면 네가 죽을 일은 없었을 터인데.”
찻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이는 아델라가 고통을 참고 있는 거라고 착각한 왕비가 그녀를 비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를 원망 말거라. 그 아둔한 머리를 탓해. 감히 누구 앞을 막아, 막긴.”
왕비는 상냥하게 미소 짓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속내를 드러냈다. 곧 죽을 아델라에게 화풀이라도 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어떻게 이런 허술한 애한테 절절맬 수가 있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괘씸했다.
‘어쩌지. 기절한 척 콱 쓰러져 버릴까? 아, 아니야. 역시 사과부터……. 아니지, 여기서 이저드한테 위험한 곳에 혼자 와서 미안하다고 하면 이저드랑 내 관계가 다 들키잖아? 그럼 기절부터…….’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찬 아델라의 머릿속에는 왕비의 말이 전부, 귓등으로도 안 들렸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로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탁.
그때, 왕비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아델라의 곁으로 다가갔다. 왕비의 손에는 찻잔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아델라의 머리 위로 들고 있던 찻잔의 차를 부어 버렸다.
누가 봐도 인상이 찌푸려지는 장면이었지만 스웰라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동안 내 신경을 거슬리게 한 죄이니라.”
비소 섞인 그녀의 목소리가 아델라의 귓가에 울렸다. 아델라는 드레스 위로 번지는 얼룩들을 멍하니 보았다.
불행 중 다행은 차가 조금 식어서 엄청 뜨거운 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냥 좀 뜨겁다?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일까, 머리에서 느껴지는 뜨뜻함보다는 턱 선을 지나 바닥으로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더 현실로 다가왔다.
‘물 싸대기는 맞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머리에 뜨거운 물을 맞을 줄은 몰랐네…….’
차향이 사방에 퍼지며 두피가 따뜻해지는 이 기분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차향이 너무 강렬해서 향수를 머리에 들이붓는 기분이라고 할까? 뜨뜻미지근한 물도 합쳐서.
아델라는 허, 하고 웃음이 나왔다. 너무 당황스러워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웃어? 네가 미쳤구나.”
왕비는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들고 있던 찻잔을 아델라의 머리 위로 내려쳤다. 왕비가 팔을 휘두르는 찰나, 아델라의 뇌리를 번뜩이며 스쳐 지나가는 말이 있었으니.
바로 린다가 전에 중얼거렸던 말이었다.
갈 때 가더라도(?) 왕비가 왜 이저드를 그렇게 악착같이 죽이려는지 알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델라는 정말 손쉽게 왕비가 휘두른 찻잔을 피했다.
“왜 이러십니까? 왜 이렇게 무서운 일을 하시나요. 저하께서 왕비 전하를 막는 건, 왕비님과 왕궁의 평화를 위해서입니다.”
아델라는 최대한 애처롭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왕비는 아델라의 모습을 보고 흠칫했다.
찻물을 뚝뚝 흘리며 왕비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모습은 지옥에서 돌아온 물귀신을 방불케 했다. 이마에 죄다 붙은 앞머리가 눈동자도 잘 보이지 않게 가려서 더 그렇게 보였다.
“……뭐, 뭐?”
왕비는 아델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미간을 찡그렸다.
“저하께서 이저드 경을 곁에 두고 약점을 찾는 건 이저드 경 뒤로 가문이 버티고 있어서라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저드 경은 저하께서 왕위에 오른 후 제거해도…….”
“네까짓 게 뭘 아느냐?”
모르니까 물어보는 거였다.
아델라는 왕비가 찻잔을 잡고 부들부들 떠는 것을 힐끔 보았다. 화가 많이 난 모양이었지만, 딱히 무섭지 않았다. 그보다는 빨리 정보를 알아내는 게 더 급했다. 왜냐하면, 곧 왕비한테 맞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저하께서는 적통이신데……, 저하만큼 확실한 왕위 계승권자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저하께 결함이 있지 않은 이상…….”
“방금 뭐라 했느냐? 결함?”
아델라의 마지막 중얼거림을 들은 왕비가 눈이 튀어나올 듯 아델라를 노려보았다.
“감히 네가 결함이라고 했느냐? 내 아들한테?”
“아, 아니, 전, 왕비 전하께서 심하게 이저드 경을 경계하시기에…….”
아델라가 시치미를 떼며 잔뜩 몸을 움츠렸다. 당연히 맞을 생각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왕비는 아무 행동도 하지 못했다.
왕비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으로 아델라를 쳐다보았다. 아델라를 때릴 생각도 못한 채 왕비는 잠시 사고를 정지했다. 아델라는 그녀의 그 표정을 놓치지 않고 살폈다.
‘결함? 결함이라고 해서 저러는 거야? 모튼한테 무슨 결함이 있나?’
도대체 왕비의 정신을 송두리째 흔드는 저게 뭘까. 소문과는 다르게 아델라의 말에 일일이 흔들리는 것도 이상했다. 고작 변방의 귀족 아가씨 나부랭이한테.
“이, 이 미친 것이! 어디서 입을 함부로 놀려!”
아주 찰나였다. 한순간, 왕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나 왕비는 곧 정신을 차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왕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어린 것의 말에 휘둘렸다는 게 치욕스러웠다. 그녀는 아델라가 더는 나불거리지 못하게 손을 올려붙였다.
“왕비 전하!”
왕비궁 시녀들은 왕비가 높게 팔을 드는 것을 보고 전부 말리러 왕비 쪽으로 뛰어갔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왕비를 말리면 후에 큰 고초를 겪는다는 걸 알았지만, 보는 눈이 있어 어쩔 수 없었다.
이 일을 알면 안 되는 주인공 중 한 명이 문 앞에 떡 버티고 서 있었기에 더욱.
그가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떤 기척도, 소리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녀들이 그를 발견한 건 1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눈을 크게 키우고 입만 뻐금뻐금 벌리던 왕비궁 시녀들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왕비한테 뛰어들었다.
“진정하십시오!”
시녀장이 크게 외쳤지만, 왕비의 손은 이미 아델라의 머리를 향하고 있었다.
당하는 아델라는 이 모든 게 느린 장면처럼 보였다. 놀라는 스웰라와 뛰어오는 시녀들, 화가 잔뜩 나서 손을 휘두르는 왕비, 그리고, 그리고…….
‘역시, 기절해야겠다.’
문 앞에 무서운 기세로 서 있는 이저드를 발견한 순간, 아델라는 잽싸게 기절하는 척 바닥으로 몸을 날렸다.
“헉.”
시녀들과 왕비,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고 돌아온 기사들까지, 모두 그 자리에서 굳었다.
남자의 단단한 가슴에 폭 안긴 아델라까지도.
조금 전, 그러니까 눈 깜박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저드는 방문 앞에 서 있었다.
‘그, 그런데 언제 제 앞까지 온 거죠?!’
아델라는 기절한 척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감은 눈을 뜨지 않았지만, 너무 놀라 심장이 널뛰듯 뛰고 있었다.
“……아델라.”
이저드는 화를 꾹 눌러 참는 듯 아주 작게,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아델라의 귓가에 말했다.
“나와의 약속, 어겼네.”
정말, 정말 미안했지만, 아델라는 지금 눈을 뜨고 있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저드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웬만한 일로는 절대 화를 내지 않는 이저드였다. 그런 그가 한 번 화가 나면 그 표정은 정말…… 무서웠다. 괜히 전장의 사신이라고 이름을 날렸던 게 아니었다.
“가까운 곳에 씻을 수 있는 곳이 있습니까?”
이저드는 아무 표정 없이 단번에 아델라를 안아 든 채 스웰라를 향해 물었다.
“예, 아, 예! 왕비궁 소속 하, 하녀들 숙소가 가까운 곳에……!”
“감사합니다.”
이저드는 자기 할 말만 하고 빠르게 나가 버렸다. 그래서인지 안에 있던 이들은 전부 넋이 나가 있었다. 심지어 왕비마저.
“이저드 경! 이러시면, 이러시면 안 됩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기사들이 이저드를 따라 나왔다.
아델라는 이저드가 안아 드는데 눈도 안 뜨고 입도 꼭 다문 채 있었다. 일단 기절한 척해야 했으니까.
“아델라!”
왕비궁 안이 완전 아수라장이 되어 가는 중이었다. 뒤늦게 도착한 레널드가 허겁지겁 이저드와 아델라한테 다가왔다.
레널드까지 등장하자, 뒤이어 따라왔던 기사들이 굳어서 서로의 눈치만 보았다. 일이 커질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레널드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세자와 붙어 지냈기 때문에 모튼이 아는 건 시간문제였다.
“이저드 경! 경이 여긴 왜……. 아니, 얘 얼굴하고 옷은 왜 이럽니까?”
레널드가 허둥지둥 아델라의 안색을 살폈다. 아델라의 머리와 얼굴, 드레스까지 젖어 있었다. 게다가 기절한 것처럼 보였다.
“제가, 제가 안겠습니다. 저한테 주십쇼.”
레널드가 팔을 벌리며 이저드 쪽으로 다가오자 이저드는 바로 몸을 틀었다.
“그것보다 해독제를 구해 주십쇼. 그리고 아델라 양의 옷, 기력을 보충할 음식도.”
레널드가 입을 열어 대답도 하기 전에 그는 바로 가까운 하녀들의 숙소로 향했다.
“예? 네? 해독제요? 아델라가 독을 먹었습니까? 어어? 저, 저기, 저기요! 내 동생……!”
레널드는 빠른 속도로 멀어지는 이저드를 허망하게 바라보다가 상황이 안 좋다는 것을 깨닫고 왕비궁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런 레널드 뒤를, 모튼이 조용히 따랐다.
그는 이미 저 멀리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 중 하나였다. 모튼의 입가에 흥미로운 미소가 걸렸다.
* * *
“이거. 일단 먹게.”
“아. 엇? 저, 저기, 이저드. 저 진짜 괜찮은데.”
“독약에 면역이 있더라도 해독제는 먹어 주는 게 좋아.”
아델라는 이저드의 굳은 얼굴을 힐끔 올려다보다 그가 건넨 약재가 뭉쳐진 환을 받아 얼른 꿀꺽 삼켰다.
“그리고 여기 수건. 들어가서 몸은 따뜻하되, 머리랑 얼굴을 비롯해 뜨거운 물이 지나간 자리는 차가운 물로 적시게.”
“예? 어, 진짜 괜찮은…….”
“갈아입을 옷은 레널드 경이 가지고 올 테니 걱정 말고, 내가 그동안 여기서 지키고 있을 테니 씻게.”
“예? 에?”
탁.
그가 준 수건을 두세 개 안은 아델라는 그에게 떠밀려 하녀들이 이용하는 욕실로 들어갔다.
굳게 닫힌 욕실 문을 멀뚱히 보며 아델라는 넋을 놓았다. 그가 화가 난 건 확실한데, 아델라를 대하는 그의 행동은 부드럽고 조심스러워서 살짝 헷갈렸다.
아델라는 문 앞에 서서 잠시 고민하다 문고리를 잡고 머리만 빠끔히 내밀었다. 이저드는 언제 멀어진 건지, 욕실과는 조금 멀찍이 떨어져서 벽에 등을 기댄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저, 화…… 많이 나셨어요?”
아델라가 조그만 목소리로 물었다. 이저드는 그런 아델라를 빤히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 나셨는데.’
아델라는 그런 이저드를 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죄송해요!”
그리고 아까 생각했던 대로 냉큼 사과했다.
“뭐가 말인가?”
“그게……. 이저드와의 약속을 안 지키려던 건 아니고…… 기사단에서 훈련 있으니까 혹, 트집 잡힐까 봐요. 그리고…….”
“알아.”
“네?”
아델라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아델라를 지그시 바라보던 이저드가 성큼성큼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대가 날 생각해서 그런 것도, 독약으로 죽지 않을 거라는 것도, 왕비의 손에 놀아나고만 있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아네. 난 누구보다 그대를 잘 알아. 그런데.”
굳어 있던 이저드의 표정이 곧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다.
자신의 앞에 바짝 다가온 이저드를 바라보던 아델라가 놀라서 그의 뺨에 손을 올렸다. 이저드는 뺨에 올라온 그녀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어 잡았다.
“그런데도, 알고 있는데도……. 그대의 이런 모습을 보고 있기가 힘드네. 그대가 누군가한테 함부로 대해지는 것도, 죽지 않는다고 해서 독약을 마시는 것도 싫어. 그대가 또, 목숨을 내던질까 봐 걱정되네.”
“이저드…….”
아델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처한 상황을 바꿔서 생각해보니, 이저드가 그런 식으로 당한다고 생각하면 아델라 역시 가슴이 답답해지고 숨이 막혔다.
이저드를 위한다는 일이, 이저드를 상처 입힌 것이다. 그리고 전생의 기억까지 떠오르게 해 버렸다.
이저드는 차로 젖은 아델라의 머리를 매만지며 그녀의 머리 위로 고개를 숙였다.
“날 이용하라고 말한 건, 피할 수 있는 상황은 내 핑계를 대고 피하라는 거였네. 이번 같은 일에서, 그대가 날 불러 주길 바랐어.”
그의 목소리가 간절하게 들렸다.
이저드가 찻물을 뒤집어쓴 아델라를 보고 이성이 나가려는 것을 어떻게 다잡았는지, 그녀는 모를 것이다. 그녀의 기척이 왕비궁을 향했을 때의 마음도 모를 것이다.
바닥으로 가라앉다 올라온 심장이 얼마나 빨리 뛰었는지, 얼마나 빨리 훈련 중에 진영을 이탈했는지…….
그녀는 모를 것이다.
아니, 몰라도 됐다. 그녀는 몰라도 괜찮았다. 모르는 게 나았다. 아델라가 살아만 있다면, 그때처럼 다시 회귀하지만 않는다면.
“그대가 날 이용하지 않겠다면, 내가 날 이용하겠네.”
그렇게 말하며 이저드는 천천히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아델라는 매우 가까웠던 얼굴이 멀어지는 것을 멍하니 보았다.
“내가 직접 나서서, 이번 같은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게 할 거네. 그렇게 만들 거야.”
탁.
아델라가 넋 놓고 있는 틈에 그는 욕실로 그녀를 밀어 넣고 다시 문을 닫았다.
“으응? 저, 이저드? 이저드!”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아델라가 문에 붙어 그를 불렀다.
“얼른 씻게. 화상을 입은 건 아니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뿐이었다.
“직접 이용한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이저드.”
쾅쾅!
아델라가 연신 문을 두들겼지만, 아까와는 다르게 문이 열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밖에서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이저드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어요. 저, 절대 목숨 내던지는 일 안 할 거예요! 제가 이용할게요. 이용할 테니까…… 뭐 하실 건지 말해 주시면 안 돼요?”
“그대도 나한테 말 안 하지 않았나.”
“그, 그건! 그렇지만…….”
이번 건 불가항력이었다.
시녀들을 방해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지났는데 왕비가 부른 것도, 왕비가 다짜고짜 차에 독을 타서 바로 아델라를 없애려고 했던 것도 예상보다 빨랐다.
이저드가 오후 훈련에 참석해서 곁에 있지 못하게 된 것도, 모튼이 회의를 들어가서 아델라 혼자 남게 된 것도.
전부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제가 그랬던 이유, 아신다고 했잖아요.”
“알아. 그리고 이번에 확실히 알았네. 그대가 날 절대 이용하지 못한다는 거.”
그의 담담한 목소리에 아델라는 할 말이 쏙 들어갔다. 양심이 찔려서 알려 달라고도 못하겠다.
지난밤에 이용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이저드를 배제해 버렸으니……. 모튼과 레널드한테만 기댄 게 생각나 아델라의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씻게.”
이저드가 조용히 다시 한번 말했고, 그제야 아델라는 문에서 몸을 뗐다. 이저드가 쉬이 알려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이저드의 말대로 먼저 씻기로 했다.
* * *
아델라가 독을 먹고 쓰러진 이후로 며칠이 지났다. 아델라는 그동안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고, 숙소 밖으로 나가려고 하면 하녀들이 호들갑을 떨며 말렸다.
모두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 아델라는 며칠 만에 완쾌했다. 레널드가 좀 더 쉬라고 했지만 그녀는 뿌리치고 오늘부터 다시 세자궁에 나갔다.
그녀는 마음이 조급한 상태였다. 이저드가 그런 말을 남기고 사라진 이후로,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씻고 나왔을 때는 레널드가 있었고, 그 뒤로 숙소에 끌려 들어가 강제 휴식을 당했다. 거기에 하녀들 눈도 있고, 레널드가 계속 아델라를 살피러 왔다. 그래서 그녀는 요 며칠 사이 이저드는 물론, 린다와 헤이든도 만날 수가 없었다.
“세자 저하, 아델라 벨제프 영애 듭니다.”
“들라.”
아델라는 곧바로 모튼한테로 향했다. 이저드를 만나기 전에 일단 모튼이 그때 일을 어떻게 생각하나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내 말이 맞지?”
방문이 닫히자마자 모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웃으며 들어오던 아델라가 의아하게 그를 보았다.
“예?”
“이저드가 그대한테 관심 있는 거 말이야.”
모튼은 아델라가 빼도 박도 못하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의 눈에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대는 의외로 일을 잘하는군.”
“과, 과찬이시옵니다.”
웃어야 하는데 자꾸 입가에 경련이 왔다.
‘이렇게 돼도 괜찮은 건가?’
모튼은 이저드를 이용할 생각으로 즐거워 보였고, 이저드는 모튼한테 기꺼이 이용당할 생각으로 보였다. 그 사이에서 아델라는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지 고민했다.
“아, 그리고. 왕비 전하의 일은 내가 사과하지. 왕비 전하께서도 오해가 있어 그대한테 몹쓸 짓을 할 뻔해서 미안하다고 전해 달라 했네.”
“예? 아, 아닙니다! 사과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그 왕비가 사과를?
아델라는 씩씩거리며 손을 올려붙이려고 했던 왕비가 생각났다. 아마 이 말은 그냥 자신을 달래려고 하는 말이겠지. 이저드가 아델라한테 관심이 있는 것을 알았으니, 아델라를 구슬려 앞으로도 계속 잘 이용하려고.
“그래도 죽을 뻔했지 않나. 그대한테 해가 될 일이 없을 거라고 해 놓고 내가 너무 안일했어. 앞으로는 왕비 전하께서 아델라 양을 해코지할 일은 없을 거야.”
‘둘이 무슨 합의를 본 건가?’
레널드한테 들은 이야기는 모튼이 왕비한테 화를 냈다는 것밖에 없었다. 레널드가 아델라한테 갈 때 둘이 따로 이야기한 걸까?
“저번에도 절 살려 주셨는데 이번에도 목숨을 빚졌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다 갚아야 할지…….”
아델라는 전혀 그렇게 느끼지 않았지만, 애써 감동한 표정으로 모튼을 보았다. 그에 모튼이 씩 웃으며 아델라를 보았다.
“으음. 아니네, 은혜는 무슨. 그대는 평소대로 하면 돼. 지금도 충분해.”
‘이저드의 약점이 되기에 아주 제격이지.’
모튼은 뒷말을 삼키며 상냥하게 웃었다. 아델라가 정말로 이저드를 휘두를 수 있는 약점이 될 줄은 몰랐는데. 그놈도 남자긴 남자인가 보다.
‘영 시녀들이나 하녀들한테 눈길도 안 주기에 관심도 없는 줄 알았더니, 특이 취향이었어.’
하긴 아델라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매력이 있긴 했다. 겁이 엄청 많은 듯싶다가도 겁을 상실한 모습도 간혹 보이고. 게다가 아직 어려서 발전 가능성도 무궁무진하고, 얼굴도 반반한 편에다 특히 또렷한 황금빛 눈동자는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네! 감사합니다. 정말, 너무 감사드립니다.”
아델라는 자신을 빤히 보는 그의 시선을 견뎌내고 애써 웃었다. 밝게 웃는 아델라의 얼굴도 꽤 볼만하군. 모튼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아델라 양. 사람들 앞에서 자주 웃어. 보기 좋군.”
칭찬인 듯 칭찬이 아닌 느낌이었다. 모튼의 칭찬은 스웰라가 했던 칭찬과는 뉘앙스가 완전히 달랐다.
진심에서 우러나와서 자주 웃으라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해서 사람들, 특히 이저드한테 잘 보이라고 강요하는 느낌?
“예. 감사합니다.”
아델라는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숙였다.
* * *
아델라는 자신만 조금 조심하면 모튼의 오해가 풀릴 줄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이저드가 아델라한테 관심 있어 보인다는 게 오해였다는 걸 모튼한테 알려 주려고 했다.
그런데, 웬걸?
“제가 들어 드릴까요?”
평소와 같이 무뚝뚝하게 행동할 줄 알았던 이저드가 협조해 주지 않았다.
아델라가 심부름으로 다과를 들고 오는 걸 발견한 이저드는 곧바로 아델라한테 다가왔다.
“예? 예? 아, 아니요. 저 혼자 할 수 있습니다.”
아델라는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이저드를 보았고, 이저드는 그녀를 보며 아주 살짝 웃었다. 부드럽게 풀린 그의 눈매가 그날따라 더 잘생겨 보였…….
‘헉! 안 돼! 얼굴에 넘어가지 말자.’
아델라는 얼른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 광경을 본 주변 사람들도 이저드의 변화에 놀란 듯 보였다. 특히 레널드가.
“그럼.”
그녀는 얼른 고개를 숙이고 모튼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집무실에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모튼이 속으로 혀를 찼다.
“그대, 당황한 거 너무 티 나. 좀 더 웃으라니까 그러네.”
아델라는 모튼의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대가 날 이용하지 않겠다면, 내가 날 이용하겠네.’
전에 이저드가 했던 말이 계속 그녀의 귀에서 맴돌았다.
이건 설마 대놓고 모튼한테 이용당해 주겠다는 건가? 모튼 생각대로 굴러가게? 그러다 이저드가 다치면?
모튼이 이저드를 어떻게 모함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다. 아델라는 입술을 꾹 다물고, 문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날부터 아델라와 이저드의 전세가 역전됐다. 아델라는 이저드를 피해 다녔고, 이저드는 아델라를 찾아 다녔다. 아델라는 도대체 이저드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밤에 찾아오면 물어보려고 했지만, 정작 밤에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푸핫! 크흐흐흐…….”
“웃지 마세요. 저 진짜 심각해요.”
“아니, 아니…… 이저드 님이 그렇게 막 나가는 건 너무 오랜만이라.”
린다는 웃음을 참으려 노력했지만, 눈은 마음껏 웃고 있었다.
갑자기 성격이 바뀐 이후로 이저드는 자기감정을 잘 숨겼다. 쉽게 흔들리지도,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애늙은이가 되어 버렸다고 할까. 그런데 아델라와 관련된 일에는 그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여태 잘 견딘다 했다.
“그래서 제가 곤란해요. 이저드를 따르기에는 제가 완전 이저드의 약점이 되어 버리고, 그렇다고 해서 계속 피해 다닐 수도 없고.”
아델라가 심각하게 고민하자, 린다는 아직 웃음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델라 님은 이미 그렇게 된 것 같은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이저드 님이랑 힘을 합쳐서 모튼을 속이는 게 낫지 않아요?”
“지금 모튼이 저흴 이용하려고 두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는데요? 저 오늘도 혼났어요. 이저드 싫어하는 티 너무 낸다고.”
아델라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모튼의 속은 뻔히 보였다. 아델라가 이저드와 친해져서 빨리 이저드의 약점을 알아낸 다음, 필요 없어지면 아델라도 적절한 시기에 버릴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입에 발린 말은 하던 모튼은 아델라가 생각대로 이저드와 가까워지지 않자, 은혜를 운운하며 아델라한테 면박을 주었다.
“그러니까 이저드 님과 친해지는 척하세요. 모튼이 원하는 대로 다― 해 줘 보세요. 그래야 마지막에 뒤통수를 때릴 때, 통쾌하죠.”
“하지만……. 저흰 통로를 찾는 시간을 끄는 게 목적인데, 이렇게 빨리 이저드한테 약점이 생기면 곤란한 거 아닌가요?”
“누가요?”
린다가 멀뚱히 아델라를 보며 물었다.
“린다 경하고 헤이든 경이요. 두 분이 찾고 계시잖아요.”
아델라 또한 멀뚱멀뚱 린다를 보았다.
“아아, 그거 걱정해서 피해 다닌 거예요? 이저드 님이 위험할 걸 걱정하는 게 아니라?”
“이저드가 위험할 건 당연한 거고, 통로를 찾아야 이 일도 끝나니까요. 그러면 제가 굳이 이저드가 위험에 처할 걸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고요.”
“그건 그렇죠.”
린다는 아델라의 말이 맞는 말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전 이저드가 제가 누워 있는 동안 뭔가 믿는 구석을 만든 줄 알았어요. 너무 당당하니까.”
“믿는 구석이라…….”
린다가 의미심장하게 뒷말을 길게 끌었다.
아델라를 못 만나고 있던 사이, 이저드가 몇 번이나 본궁을 왔다 갔다 했다는 것을 린다는 알고 있었다. 헤이든과 얼마 전에 만났을 때 들었다. 린다가 요 며칠, 외궁에 일이 많아 탐색에서 잠시 빠졌던 기간이었다.
“저희, 가 볼까요?”
“네? 어디를요?”
“믿는 구석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러요. 며칠 전에 헤이든을 만났을 때는 거의 끝나간다고만 들었거든요? 최근은 잘 모르고요.”
이런 궁금증은 빨리 푸는 게 둘 사이에 도움이 됐다.
“어, 근데 전…… 기척을 그렇게 잘 숨기지 못하는데요?”
“흐리게만 하세요. 저번처럼.”
“어쩌시게요?”
아델라가 의아한 표정으로 린다를 보았고, 린다는 그녀를 향해 자신만만하게 씩 웃어 보였다.
* * *
깊은 밤, 본궁은 낮과는 다르게 모든 불이 전부 꺼져 있었다. 주변에도 빛 하나 비치지 않아 매우 어두웠다.
아델라와 린다는 조심히 동쪽 구역 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린다가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고, 그 뒤를 아델라가 착실히 따랐다.
린다는 곧바로 전에 자신이 찾다 못 찾은 구간에 있는 방부터 들어갔다. 서류가 꽂힌 책장으로 사방이 막혀 있는 공간이었다.
“여긴 벽난로가 없는데요?”
“전에 그러셨잖아요. 없어진 벽난로가 없는지. 이쪽 구역은 몇 개의 방 빼고는 전부 벽난로가 있었어요. 알아봤더니, 과거에는 이쪽 구역을 전부 귀빈실로 썼다더군요.”
“귀빈실이면…… 벽난로를 설치했을 수도 있겠네요.”
“맞아요. 보통 한쪽 벽면에 벽난로가 설치되어 있더라고요. 그런데 여긴…… 사방이 막혀 있죠. 밖에서 봤을 때는 분명 이쪽에 창문이 있는데, 책장에 가려 사라졌어요.”
린다의 말에 아델라는 창문이 있을 법한 정면을 빼고 양옆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책장 때문에…… 어떻게 찾아요?”
책장이 벽을 꽉 채우고 있어서 한눈에 봐도 벽을 확인하긴 힘들어 보였다. 밀 수도 없고, 당길 수도 없었다. 옮길 공간이 없는 건 둘째 치고, 무거워서 꼼짝도 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부숴서요.”
“……예?”
“이거 부서져요.”
린다는 당연하다는 듯이 허리 정도 되는 높이의 책을 책장에서 빼내며 말했다. 어둠 속이라 잘 보이지 않아 아델라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건 천으로 응급처치 한 겁니다. 이쪽 칸 전부를 빼내는 게 아니면 딱히 눈에 띄지 않더라고요.”
언제 불을 비춰 확인 작업까지 했는지…….
린다는 서류를 다 빼낸 후, 벽면에 붙여놓은 천을 뗐다.
그곳에는 정말로……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나무로 된 책장이라 그런지 구멍 주변에는 약간의 균열이 가 있었다.
“이거…… 린다 경이 한 거예요?”
“예.”
“손 안 다쳤어요? 이게 가능해요?”
“긁히긴 했는데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당연히 하죠.”
보통 사람은 당연히 못 했다. 아델라는 새삼 린다의 힘이 얼마나 센지 깨달았다.
“소, 소리는요?”
“그것 때문에 진짜 조심하긴 했죠. 덕분에 시간도 오래 걸렸고. 다행히 숙소가 다들 멀어서 잘 안 들리나 봅니다. 안 오던데요? 그리고 여기 사방이 책장이라 방음이 너무 잘 되는 것 같고요.”
대단하다. 저런 담력, 어디서 나오는 걸까.
“본궁에는 보초도 서고, 순찰도 하는데요……?”
“순찰대가 저 끝으로 도는 틈에 했죠. 혹시 소리라도 들리면 숨으면 됐고요.”
아델라가 멍하니 린다를 내려다보았다. 요즘 조용해서 린다가 엄청난 실력자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아델라가 새삼스럽게 깨달음을 얻을 때, 린다는 책장을 다시 가지런히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반대편 책장으로 향했다.
“봐요. 이거 제가 한 거 아닌데, 있죠?”
아까와 같은 행동을 반복하더니, 이내 그곳에도 있는 천을 걷어내며 린다가 씨익 웃었다.
“그럼, 찾아서 그러는 건가요?”
“정확하진 않지만 이저드 님이 행동한 데에는 이유가 있겠죠.”
린다는 잇차, 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는 일전에 몇 개 봐 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까와 같은 방이 몇 개 더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도, 여기도.”
또 다른 방도 그와 비슷한 구멍이 있었다.
“찾았는데 왜 말을 안 해 주는 거죠?”
“아직 옥새를 사용 안 해봐서? 그것도 아님, 아직 통로가 있는 벽난로는 찾지 못했다거나.”
아델라는 린다의 뒤를 조용히 따르며 생각에 빠졌다. 일단 린다가 확인한 모든 방은 구멍이 뚫려 있었지만, 통로라고 할 만한 곳은 없었다.
“음. 못 찾았나 본데요?”
동쪽 구역을 다 돌아다녔지만, 통로는 없었다. 둘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서쪽 구역은 없나요? 이런 곳.”
“알아본 바로는요. 거긴 오히려 짐이 빠져서 드러난 벽들이 많다고 하던데요?”
“그럼, 중앙 홀은요?”
“중앙 홀이요? 거긴, 탁 트여서…….”
아델라의 말에 린다는 중앙 홀을 다시 떠올려 봤다.
중앙 홀은 3층이 통으로 뚫린 높이에 안도 매우 넓었지만, 벽난로가 있는 앞쪽과 중간 빼고는 전부 테라스였다. 그나마 벽난로가 있었을 법한 곳은 맨 뒤쪽이었다. 왕이 회의 때 앉아 있는 자리보다 더 뒤쪽의.
“가 보죠. 확인은 해 봐야 찝찝함이 사라지죠.”
“네.”
둘은 지체하지 않고 바로 중앙 홀로 향했다.
“근데, 원래 본궁 정문에는 보초가 서 있지 않아요? 왜 아무 기척도 안 느껴지죠?”
뒤늦게 이상함을 느낀 아델라가 린다를 쳐다보자, 린다는 싱긋 웃으며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
“지금쯤 죄다 잠들었을 걸요?”
“어떻게요?”
“각하께서 저희 쪽에 호위병들을 보내셨습니다. 그중 한 명이 약물을 아주 잘 다루죠.”
“약물이요?”
“예. 이를테면, 해독제나 독약이나 수면제 같은 거요. 그때그때 적절히 활용해서 잘 쓰죠. 그런 쪽으로는 뛰어난 사람이거든요.”
린다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밖의 보초를 선 기사들한테 수면제를 먹인 이가 잠입한 아군 중에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여태까지 아델라는 절대 밤에 움직이지 않았다. 아델라가 기척을 지우는 데 아직 능숙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그런 아델라를 본궁에 데려간다 했다.
“그렇군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났나요?”
“저희는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되는 것 같지만, 밖에서는 속이 타겠죠. 그래도 적절한 때에 아군을 얻게 된 것 같아요. 물론, 신분이 들키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벌써 보냈다는 건, 그쪽 준비가 얼추 끝나간다는 건가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각하께서는 지체할 시간이 없으니까.”
그렇다면 이제 중앙 귀족들 사이에서도 등을 돌리는 사람들이 나올 것이다. 모튼은 더 위기에 몰릴 거고.
그는 궁지에 몰렸을 때, 어떻게 나올까? 왕비처럼 무조건 이저드를 죽이려고 할까? 군사를 써서라도?
“아, 맞다. 린다 경.”
“예?”
“제가 이상한 말을 들었는데.”
“뭔데요?”
린다와 아델라는 빠르게 걸음을 옮기면서 계속 대화를 나눴다.
“모튼한테 어떤 결함이 있나 봐요. 이저드한테 왕위를 뺏길 수도 있을 정도로.”
“누가 그래요?”
“누가 그랬다기보단…… 제가 왕비한테 막말했거든요.”
“거참, 죽지 않고 잘도 살아 계시네요. 가끔 보면 아델라 님 목숨은 여러 개 되는 것 같아요.”
아델라가 독약을 먹었다는 소리는 린다 역시 들었다. 하지만 왕비한테 막말을 했다는 말은 못 들었다. 린다는 그 상황에서 정보를 얻어내려 막말까지 한 아델라가 대단하다 못해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와 보였다.
아델라는 속으로 뜨끔해서 눈동자를 떨었다.
“아델라 님? 왜 그러세요?”
“아, 아니에요.”
오래된 버릇을 한순간에 없애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2년도 부족했나? 아니, 2년 동안 수련한 덕분에 강해졌다고 생각해서 좀 더 배짱을 부린 것도 있는 것 같았다.
‘아효……. 이러니 이저드가 안심을 못 하지.’
아델라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꽉 쥐었다. 이런 바보가 다 있나.
“아델라 님?”
“네?”
“뭐 하십니까? 머리 잡고.”
린다가 황당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고, 아델라는 눈으로 도르륵 굴리다가 손을 내리고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뭐라고 했습니까?”
“아! 제가 모튼한테 결함이 있는 게 아니면 왕위를 뺏길 일이 없는데 왜 이러시냐고 그랬어요.”
“그랬더니요?”
“충격 받던데요?”
악독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왕비가? 그녀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그 자리에서 아델라의 목을 댕강 잘랐을 터였다.
“저, 바로 맞을 거 각오하고 그랬는데 좀 멍하니 있더라고요. 뭐, 바로 정신 차리고 제 뺨을 때리려고 했지만.”
아델라의 말이 끝나자 린다가 점점 속도를 줄이고 자리에 섰다. 그에 아델라도 그녀의 보폭을 따라 자리에서 멈췄다.
“역시 이상하죠? 저 그때, 린다 경 이야기 듣고 너무 이상해서 떠봤거든요.”
“확실히…… 왕비의 행동은 이상하네요.”
저번에 아델라와 헤어진 뒤로 린다는 왕비와 모튼에 대해 알아내려고 부단히도 뛰어다녔다. 그런데 알아낼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20년 전의 일을 물어볼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신기하게도 이 왕궁에는 20년 넘은 경력자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20년 전에 왕궁에서 일하던 이들은 대부분 죽임을 당하거나 쫓겨났다.
“저 사실, 그때 알아보고 말씀드리겠다고 한 거요.”
“네.”
“못 알아봤어요. 20년 전에 왕궁에서 일하던 사람이 한 명도 없더라고요. 전 아가씨께서 말씀하신, 그…… 둘 다 자식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에 초점을 두고 조사해 봤거든요.”
아델라는 그때 그저 화가 나서 흘린 말이었지만, 린다는 단 하나의 단서도 흘려듣지 않았다.
“모튼이, 왕의 자식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건 모르죠. 왕비가 그 난리를 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어서, 그럴듯한 이유를 찾아본 거뿐인걸요.”
아델라도 린다와 비슷한 생각이었다. 그녀도 왕비가 무조건 이저드를 없애야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후궁과 왕 사이에 후사가 없는 것도 이상했고요. 그렇게 첩이 많은데.”
외궁에 있어 본 린다가 보기엔 후궁들이 임신이 안 되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왕은 매일 후궁도 바꿔 가며 밤 시중을 들게 했다. 게다가 듣자 하니 피임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설마 다…… 못 태어나게 한 걸까요?”
“이저드 님을 죽이려고 발악하는 걸 보면, 그랬을 수도요.”
그렇게까지 왕의 후사를 없애는 데에 집착하는 이유가 뭘까. 린다는 그게 찝찝하고 이상했다. 왕비의 행동은 너무 비상식적이었다.
“그 결함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잘만 이용하면……, 왕비 스스로 무너지게 할 수도 있겠는데요?”
린다는 무슨 좋은 아이디어가 생각난 건지 눈을 빛내며 아델라를 보았다.
“왕비 스스로요?”
“예. 왕비궁에서 모튼의 결함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몇이죠?”
“꽤 많아요. 세자궁 시녀들하고, 왕비궁 시녀들, 밖에 있던 왕비궁 하녀들까지.”
“아주 좋네요.”
린다가 싱긋 웃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고, 아델라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의 뒤를 쫓았다.
“뭐, 뭐 하시게요?”
“음……. 뿌린 대로 거둔다고 하죠?”
“뿌린 대로요?”
“예. 왕비가 아리스 님의 어머님께 했던 것처럼.”
아델라는 린다의 뒤를 착실히 따라가면서 그녀의 말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왕비가 예전에 했던 일이라면, 소문이요? 소문내는 거요?”
“네, 맞아요. 자기가 한 짓 고대로 당해 보라죠. 모튼한테 결함이 있다는 소문이 나면 잡아 뜯을 놈들은 널렸으니까.”
20년 동안 숨어 산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들 중 한 명이라도 나타나면, 모튼에 관해 물을 수 있었다. 확률은 희박했지만. 설사 20년 전의 일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나타나지 않게 되더라도 별로 상관은 없었다. 이런 화제가 도는 것만으로도 왕궁을 뒤흔들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된다면 아마 이저드한테 집중됐던 이목이 모튼한테로 향할 거고, 왕비는 그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한동안 미친 듯이 사람들을 때려잡겠지. 그리고 둘 다 정신이 없는 틈에 통로를 찾는다!
이만한 시나리오도 없었다. 소문 때문에 왕궁이 흔들리면 침투하기 편해질 테니 말이다.
“위험을 감수하고 막말 잘했네요.”
아델라도 보통 강심장이 아니었다. 너무 자기를 내던져서 약간 문제였지.
“하아, 다행이다. 도움도 안 되는 거였으면 억울할 뻔했어요.”
“그렇긴 했겠네요. 독까지 마셨으니까요. 이 정도 정보면, 그냥 이저드 님이랑 협력해도 될 것 같은데.”
모튼의 결함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이런 정보가 퍼지면 모튼한테 시선이 쏠릴 게 뻔했다.
“저도 이저드랑 내외 안 하면 좋죠. 다만, 이 소문이 퍼져서 모튼이 홱 돌아버리면 어떡하지 싶기도 하고요.”
“두 분 모두 걱정이 너무 많아 탈이라니까요. 그렇게 걱정되면 찾아보죠. 아델라 님에게 마음의 안정을 찾아 줄 우리의 무기.”
린다가 중앙 홀 문을 활짝 열며 아델라를 돌아보았다.
“시간이 많이 안 남았으니까 도움도 조금 받죠.”
동쪽 구역을 일일이 확인하는 사이, 벌써 시간이 많이 흘러 있었다. 통로가 중앙 홀에 없을 시 서쪽 구역도 다시 돌아봐야 하는데, 오늘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도움이요?”
“네. 호위병들이 괜히 저를 따라서 본궁에 온 게 아니거든요.”
린다는 환하게 웃으며 힐끔 복도를 보았다. 그러자, 호위병 몇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린다의 눈짓에 서쪽 구역으로 일제히 사라졌다.
린다가 따로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도 그녀의 의중을 바로 파악한 그들은 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빠, 빠르네요.”
“최정예만 뽑은 거니까요. 저흰 중앙 홀을 돌아봐요.”
아델라는 넋을 놓고 어둠만이 남은 서쪽 구역 복도를 쳐다보다가 얼른 린다를 뒤따랐다.
* * *
다음 날, 아델라는 아침 일찍부터 또 모튼한테 불려갔다.
모튼은 이젠 뭐, 틈만 나면 아델라를 불러 젖혔다. 아직 잠도 못 깼는데, 비몽사몽한 상태에서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니. 아델라는 쭈뼛쭈뼛 모튼 앞에 가서 섰다.
“아델라 양.”
“네.”
그동안 이저드를 피하고 다닌 아델라는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도대체 뭐가 문젠가? 그대는 복수를 원했던 거 아닌가?”
“마, 맞는데요.”
“그런데 왜 이저드를 피해 다녀? 그러다 복수할 타이밍도 놓치겠네.”
“그게, 사실…….”
아델라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모튼을 바라보았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려는 아델라의 작태에 화가 났던 모튼은 순간 자신이 아델라를 몰아붙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델라의 표정이 아까보다 더 안 좋아진 게 눈에 보였다. 그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울먹이지 말고 내가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 해 봐. 들어 주지.”
“그게……. 막상 이저드 경이 저한테 잘해 주니까 무서워서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너무 갑작스럽고,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 같고, 제가 저하의 편이라 절 죽이려고 수작을 부리는 건가 싶고…….”
아델라의 이야기를 찬찬히 듣던 모튼은 미간을 살짝살짝 구겼다. 이제 와서 이렇게 겁을 먹을 줄이야. 원래도 겁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가장 중요한 순간에 이럴 줄은 몰랐다.
“후, 아델라 양.”
“예.”
“그걸 알아봐야지. 무슨 꿍꿍이인지. 이번이 그대가 이저드한테 복수할 절호의 기회야. 내가 레널드 경의 뒤에 있는 이상 이저드가 그의 동생인 아델라 양을 죽일 수는 없네. 왕궁에서는 절대.”
모튼은 인내심을 가지고 아델라를 다시 설득했다.
지금으로서는 아델라만큼 이저드의 허점을 노릴 사람이 없었다. 여기까지 와서 그런 그녀가 발을 빼면 곤란했다.
“정말 저, 괜찮은 거겠죠?”
“그럼.”
“한 번 위기를 겪으니까, 자신이 없어져서……. 정말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아니야. 그럴 수 있지. 그대는 다 처음이지 않나. 난 그대가 잘 극복할 거라 믿어.”
모튼은 아델라가 얼른 정신을 차리게 하기 위해 용기를 북돋아 줬다. 독약 사건으로 많이 방어적이 된 아델라를 빨리 원래대로 돌려놔야 했다.
아니면 이저드가 지쳐 나가떨어질 위기였다. 자길 계속 피하는데 어느 남자가 좋다고 계속 따라다니겠는가.
“감사합니다. 절 믿어 주셔서. 역시 세자 저하이십니다.”
아델라의 분위기가 평소와 비슷하게 밝아진 것을 보고 모튼은 속으로 안도했다.
“그래. 그럼 이만 나가 봐.”
“예. 꼭, 이저드 경의 속을 알아내겠습니다.”
아델라가 다짐한 눈빛으로 밝게 웃으며 집무실을 나갔고, 모튼은 그제야 미소를 풀었다.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분명 아델라를 구워삶으며 휘두르고 있는 건 명백히 자신인데, 아델라의 기분에 따라 자신이 휘둘리는 것 같은 상반되는 느낌도 들었기 때문이다.
그 기분이 너무 묘해서 모튼은 자신이 착각한 건가 싶었다.
* * *
모튼의 집무실을 나온 아델라는 씩 웃었다.
이걸로 여태 이저드를 피해 다닌 이유는 만들어 놨다. 앞으로 의심받을 일이 줄어들었으니, 본격적으로 이저드와 단둘이 붙어 있을 수 있었다. 어딜 가든 의심은 덜 받겠지.
‘이제, 시간만 끌면 돼.’
아델라는 멀리에서 느껴지는 이저드의 기척을 읽고 잽싸게 세자궁 밖으로 나갔다. 이제 그의 옆에는 시녀들이 붙지 않았다. 모튼이 정말 왕비와 합의를 한 모양인지 시녀들은 이제 전부 이저드한테 신경을 끊었다.
그리고 암살자들도 더는 붙이지 않았다. 갑자기 이저드를 죽이는 걸 멈춘 건 의아했지만, 아델라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이저드 경!”
요 며칠 자신을 피해 다니던 아델라가 갑자기 먼저 다가오자 이저드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델라 님.”
주변에 시선이 있었기에 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저기, 아직 일 시작할 시간 안 됐죠? 조금 이른데.”
“……예?”
아델라는 어느 때보다 활짝 웃으며 이저드를 바라보았다. 햇살처럼 밝게 빛나는 그녀의 미소를 정말 오랜만에 보았다. 그는 한동안 아델라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남은 시간 동안…… 저랑 조금만 산책하실래요? 저쪽 정원이 예쁘더라고요.”
이저드는 아델라의 제안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연인이 저리 아름답게 웃으며 하는 제안을 거절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델라는 기다렸다는 듯이 먼저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저드는 그녀와 조금 떨어져서 뒤를 따랐다.
“이저드.”
정원까지 조용히 걷던 아델라가 주변의 기척이 멀어지자 빙글 몸을 돌려 뒤따라오는 이저드를 보았다.
“?”
그에 이저드는 의아한 표정으로 아델라를 마주 보았다.
“이저드, 혹시 제가 누워 있던 며칠 동안 믿는 구석이 생긴 거예요? 통로 찾았어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저드가 시치미를 떼며 존댓말을 하자 아델라는 주변을 얼른 돌아보았다. 가까운 거리에서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정원 안이라 밖에서 잘 보이지도 않았고.
“왜 존댓말 하세요? 주변에 아무도 없는데.”
“그런가? 그럼 나가지.”
“자, 잠시, 이저드으!”
아델라는 뒤돌아가려는 이저드의 허리를 답삭 안고 늘어졌다. 이렇게 절대 그냥 못 보낸다.
“말 안 해줄 거예요? 아직도 화났어요?”
이저드는 자신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절대 안 놔줄 것처럼 꽉 안고 있는 아델라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화 안 났네.”
이저드는 아델라가 두른 팔을 잡아 풀려고 했지만, 아델라가 악착같이 버티고 있어 포기했다. 이저드가 힘을 쓰면 금방 풀리긴 하겠지만, 그는 아델라의 행동을 힘으로 막고 싶지 않았다.
“말했잖은가. 내가 직접 나서겠다고.”
“그러니까, 이저드는 스스로 튀는 행동을 해서 모튼의 시선을 자기한테 돌려놓겠다는 거예요?”
“맞네.”
“그렇게 하면 모튼한테 이용당할 게 뻔한데도요?”
“그래. 내가 그대를 좋아한다는 티를 내는 순간부터 모튼이나 왕비는 그대를 함부로 대하지 못해. 이용 가치가 훨씬 높아지니까. 그리고 나는 그대 곁에 있을 수 있다면 상관없네.”
그게 목적이라면 어느 정도 성공한 것 같았다. 아까 모튼의 태도를 생각해 보면 말이다. 왕비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아델라는 이저드가 며칠 동안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한 걸 생각하면 그저 미안했고, 고마웠다.
“저는, 이저드가 잘못될까 봐 두려워요.”
“난 그렇게 쉽게 당하지 않네.”
“알아요. 이저드 강한 거. 그래도, 이저드가 절 걱정하듯이 저도 이저드가 걱정돼요. 남들이 보기에 이저드는 전혀 당할 것 같지 않지만, 전 그래요. 걱정하지 않은 적이 없어요.”
아델라는 이저드의 허리에 두른 팔을 천천히 풀며 그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사랑하니까.”
사랑하니까 연인이 위험하면 무섭고, 사랑하니까 연인이 무시당하면 화가 난다.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마음이 커서, 가끔 서로를 위한 행동이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결국은 서로를 위해서 한 행동인데도 말이다.
“아무렇지 않게 위험 속에 뛰어든 거, 죄송해요. 이저드를 믿지 못하고 최근 피해 다녔던 것도 미안해요.”
“아니, 잠깐, 아델라. 왜 그대가 사과하나? 내가 말하지 않은 게 더 크네.”
“이저드는 절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잖아요. 제가 그런 일을 당하고 숙소에 있는 동안, 계속 통로를 찾아다녔다고 들었어요.”
그는 며칠 동안 밤샘을 기본으로 하면서 찾지 않았던 곳도 다시 찾아보고 본궁을 샅샅이 뒤졌다.
“정말 미안하고 고마워요. 제가 많이 불안하게 했죠?”
“아니네. 오히려 내가……. 아니, 나한테 화가 났어. 그대가 기댈 만한 사람이 되지 못한 게. 그대를 도와주러 왔는데, 오히려 그대한테 도움만 받았네.”
이저드가 평소보다 기운이 빠져 있었다. 아델라는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가 그와 눈을 맞췄다. 서로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여태 노력한 건 서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으으음, 아니에요. 제가 못하는 걸 이저드가 도맡아 했잖아요. 전 밤에 움직일 수도 없었고.”
“낮에는 그대가 많이 움직였으니까.”
“낮이나 밤에나 저보다 훨씬 많이 움직인 이저드가 있는데요?”
아델라는 따스하게 웃으며 이저드의 품에 안겼다.
그냥, 그를 그렇게 안아주고 싶었다. 미안하고, 고맙고, 뿌듯하고, 위로해 주고 싶고 그런 여러 가지 감정이 들어서.
“너무, 너무 고생하셨어요. 본궁 전부 다시 돌아보느라. 이 말, 꼭 해 드리고 싶었어요. 정말 고맙고, 미안하다고.”
요 며칠 이저드가 아델라한테 붙어 있었던 것은, 그저 스스로 이용당하려고만 한 게 아니었다.
그는 무턱대고 모튼의 먹잇감이 될 사람이 아니었다. 특히 아델라에게 피해가 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을 그리 허술하게 처리할 사람은 더욱 아니었다.
“음?”
“믿는 구석, 찾으셨죠?”
“헤이든 경이 말했나?”
“반쯤?”
“반쯤? 그게 무슨 말인가?”
이저드가 아델라와 시선을 맞추고 물었다.
아델라는 그런 이저드를 초롱초롱한 눈으로 올려다보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아델라와 린다가 지난밤 본궁에 간 것은 이저드가 혹,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어서 태도가 바뀐 게 아닐까 싶어서 그걸 확인하러 간 거였다.
며칠 동안 밤낮없이 본궁을 드나들었다는 점과 일이 얼추 끝나간다는 헤이든의 말과 어젯밤 있었던 흔적, 모든 걸 종합해 보면 이저드는 통로를 찾은 게 거의 확실했다. 그것도 바로 얼마 전에.
“헤이든 경은 일이 거의 끝나간다고만 이야기했지, 통로 찾은 건, 말 안 해 주셨거든요.”
아델라는 린다와 함께 중앙 홀을 살폈던 기억을 떠올렸다.
중앙 홀은 앞쪽에 커다란 문과 양옆에 작은 문, 그리고 그 옆에 벽난로가 있는 공간이 전부였다. 그 뒤로는 쭉 테라스였고, 테라스 중간에 벽난로 하나가 또 있었다. 그러니까 중앙 홀에는 총 4개의 벽난로가 있었다. 앞쪽 두 개, 중간 양옆에 두 개. 물론 그것들은 전부 통로가 아니었다.
린다와 아델라는 그 모든 것을 다시 꼼꼼히 확인하면서, 뒤쪽으로 걸어갔다. 중앙 홀 맨 뒤쪽에 왕이 앉는 자리가 있었는데, 중앙 홀 안에 공간이라고는 그곳뿐이었다.
원래 왕의 자리에는 그 누구도 올라가면 안 됐지만, 아델라와 린다는 그런 걸 일일이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나중에 왕위에 오를 아리스한테만 용서를 빌면 되지, 뭐 어떤가.
둘은 정말 당당하게 그 주변을 샅샅이 수색했다. 그리고 마침내, 둘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왕의 자리 뒤편은 황금색 커튼으로 벽이 가려져 있었는데, 벽인 줄 알았던 그곳은 벽이 아니었다. 벽을 손으로 쾅쾅 쳤더니 안이 텅 빈 듯 소리가 윙윙 울렸다. 아무래도 가벽을 대어 새로 공사를 한 것 같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벽의 바닥 쪽에 뭔가 표시한 흔적이 있어서 지나칠 수 없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린다가 가벽을 부수려고 적당한 자리를 찾다가 알게 되었다.
벽의 바닥 쪽에 이미 누군가가 칼집을 낸 흔적이 있었다. 작은 엑스 자였는데, 커튼을 치면 감쪽같이 사라졌다. 물론, 바닥만 보고 다니지 않는 이상 보이지도 않는 흠집이었다.
“바닥에 엑스 자 표시. 그거 두 분이 내신 거죠? 서쪽, 동쪽 구역 전부 확인하고 최종적으로 거기 밖에 없다고 생각하셔서.”
아델라는 어젯밤 그 표시를 보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다른 구역에는 어디에도 그런 표시가 없었고, 오직 그곳에만 표시가 있었다. 아무래도 후에 린다와 함께 옥새를 가지고 와서 확인해 볼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호위병들이 잠입했다고 듣긴 했는데, 하루 만에 본궁 수색에 투입할 줄은 몰랐군. 둘 다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이저드는 난감하게 웃으며 아델라의 뺨을 쓰다듬었다.
“맞네. 그곳이라고 확신하고 있네. 미리 말하지 않아서 미안해.”
아델라는 그의 입을 통해 제대로 확답을 들으니 이제야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이제 정말로, 가벽 너머에 있는 통로에 옥새만 대 보면 거사의 반 이상이 완성되는 것이었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아델라와 이저드, 린다와 헤이든이 얼마나 마음 졸였던가.
“아니에요. 괜찮아요. 오히려 전 지금 너무 기뻐서…… 진짜로 다행이에요.”
그의 사과에 연신 고개를 저은 아델라는 오히려 감동한 표정으로 기쁘게 웃었다.
<6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