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권-2부 3장. 그녀는 돕고 싶다 (12/17)

그녀는 호상이고 싶다 5

| 목 차 |

표지

판권

2부 3장. 그녀는 돕고 싶다

2부 4장. 그녀는 찾고 싶다

2부 3장. 그녀는 돕고 싶다

벨제프 자작이 죽은 지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죽기 전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던 그는 사형대에 올라가 목이 잘리기 직전에서야 빌었단다. 이 정도면 만족하냐며.

어떻게 사람이 용서를 비는 모습까지 무례할 수가 있는지, 그곳에 왔던 몇몇 사람들은 그를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다.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던 생애와는 다르게 그의 최후는 비교적 조용히 끝났다. 깔끔하게 잘려 나간 그의 목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또한, 그의 죽음은 서류에 단 한 줄로만 기록됐다.

「참수형.」

매우 초라한 죽음이 아닐 수가 없었다.

애초에 그가 죽는다고 무언가 크게 달라질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정말로 이후 그녀의 삶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아델라의 삶에 손톱만큼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벨제프 자작이 죽고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델라는 여전히 살아남는 게 가장 중요했고, 가늘고 길게 사는 게 목표였다. 거기에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라는 전제가 붙은 거 빼고는 딱히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을 거라 예상했던 케스너 후작 부인은 아직 잘 살아 있었다.

건강이 악화한 그녀는 이제 하루의 반 이상을 침대에서 보냈지만 간단한 산책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몸이 불편하지만 정신은 아주 말짱했기에 교육이 끝난 요즘도 그녀는 종종 아델라한테 궁에 대한 정보를 알려 주고는 했다.

본의 아니게 한동안 얼굴을 못 보고 지냈던 아델라와 이저드는 미하일의 화가 조금 풀린 후에야 다시 자주 만날 수 있었다.

둘 다 2년 동안 키도, 몸집도 커졌는데, 특히 아델라는 2년 동안 20cm 이상이 훅 자라 성장통 때문에 바닥을 기어 다닌 적도 있었다.

덕분에 이저드는 매일 아델라의 집에 출석 도장을 찍었다. 이저드가 걱정해 주고 보살펴 주는 게 너무 좋아 다 나아갈 즈음에 아델라가 꾀병을 부리기도 했었다.

나중에 릴리아한테 들켜서 한동안 놀림거리가 되었지만.

‘그러고 보니, 그런 적도 있었네.’

아델라는 새삼 변한 눈높이를 상기하며 슬쩍 자신의 옆에서 묵묵히 걷는 이를 보았다. 로브를 쓰고 있어도 살짝 보이는 얼굴의 윤곽이 그의 잘생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음?”

아델라의 시선을 느끼고 이저드가 그녀한테 시선을 옮겼다.

“이저드.”

“왜?”

이저드가 햇살처럼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언제부터 이런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어느 순간부터 이저드는 아델라를 따라 환하게 웃을 수 있게 됐다.

그런 이저드의 미소를 보며 아델라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자주 보는데도 새삼 놀랍도록 그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이저드.”

“왜, 무슨 일 있나?”

여러 번의 실랑이 끝에 둘은 사적인 자리에서는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기로 합의를 보았다.

“아니요. 그냥, 신기해서요.”

“뭐가?”

“그냥…… 우리가 이렇게 성장해서 진짜로 수도에 갈 수 있을 줄 몰랐거든요.”

아델라는 이저드와 잡은 손을 흔들며 배시시 웃었다. 그에 이저드는 아델라와 맞잡은 손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대가 노력한 덕분이지.”

“그럼, 전…… 이 영광을 스승님들께!”

아델라가 장난스럽게 웃었고, 이저드는 피식 미소 지었다.

“고맙네. 따지고 보면 그대의 스승 중 하나는 나도 포함되지 않나.”

“아, 생각해 보니 저 그때 엄―청 흙바닥을 나뒹굴었는데. 낮에도, 밤에도!”

아델라는 어째선지 회상에 잠긴 채로 억울해했다. 이렇게 차차 훈련받으면 될 것을 단기간에 끌어올린다고 그렇게 굴러 댕겼으니.

하긴, 그때는 그 방법 외에 실력을 올릴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호위병들 실력을 따라갈 수 있었다.

“밤은 아니지 않나?”

“밤에도 했잖아요. 특훈! 반은 침대에 있었긴 하지…….”

말을 하고 보니 좀 이상한데. 그러니까, 어감이.

“아니, 제 말은 그러니까, 저녁때.”

“그래, 저녁때.”

누가 뭐라고 했냐는 듯이 이저드는 웃었다. 아델라는 그런 이저드를 빤히 보았다.

“놀리신 거죠?”

“눈치챘나?”

‘크흡! 분해! 내가 놀리려고 했는데!’

아델라는 속으로 매우 아까워하며 먼저 걸음을 크게크게 옮겼다. 이저드는 천천히 아델라의 뒤를 따랐다.

아델라와 이저드의 보폭 차이가 커서 이저드가 마음만 먹으면 그녀를 금방 따라잡을 수 있었지만, 분해하는 아델라의 뒷모습을 보는 게 귀여워 이저드는 그냥 조용히 그녀를 따랐다.

* * *

“어머니! 아리스 경!”

아델라는 멀리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동갑내기 남녀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처음 벨제프 자작의 죽음을 릴리아의 입으로 전해 들었을 때, 아델라는 그녀를 약간 걱정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녀의 안색은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릴리아는 더욱 괜찮아졌다. 그때의 고통을 완전히 이겨냈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이제 그녀는 두려움에 떨지 않았다. 그가 나타날까 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됐고, 아델라가 다칠까 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됐다. 덕분인지 날이 갈수록 그녀는 활기를 되찾았다.

시간이 점점 흐를 때마다 얼굴과 몸에 살이 붙고 푸석했던 흑발에 윤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짧았던 머리카락은 벌써 허리까지 오고 있었다. 멀리에서 보이는 어머니를 보면서 아델라는 새삼 어머니가 젊고 아름다웠구나, 하고 생각했다.

“왔어? 훈련은 끝났고?”

“오셨습니까.”

아리스는 나란히 선 두 모녀를 보며 세월의 빠름을 실감했다.

아델라는 이제 릴리아와 한 뼘도 채 차이가 나지 않았다. 아직 앳된 얼굴이 남아 있긴 했지만, 결 좋은 진갈색 머리에 누구보다 맑게 빛나는 금안을 지닌 아이는 쑥쑥 자라 17살 숙녀가 되었다. 아델라가 2년 사이에 이렇게 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예, 훈련 끝나고 아리스 경하고 같이 오려고 찾았는데! 먼저 오셨네요?”

아델라는 환하게 웃으며 아리스를 빤히 보았다. 그러자 아리스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 저, 죄송합니다. 전 이저드 님을 뵙고 오는 줄 알고…….”

아리스는 나름대로 이유를 들어 상황을 설명했지만, 아델라는 다 안다는 눈빛을 하며 웃고 있었다.

당혹스러운 기색의 아리스를 구해 준(?) 건 아델라의 뒤를 조금 멀리에서 따르던 이저드였다.

18살. 이제 성인식만 치르면 되는 나이가 된 이저드는 전에도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훌쩍 큰 건 물론이고 몸집도 커졌다. 소년티가 났던 16살의 이저드는 어디 갔는지 이제는 제법 어른스럽게 보였다.

“나랑 만난 거 맞네. 경, 지금 놀림 받은 거야.”

“푸흐흐흐!”

그제야 아델라가 빵 터져서 웃었다. 아델라는 이저드를 못 놀린 기회를 만회하려는 건지, 이번에는 아리스한테 장난을 쳤다. 이저드가 나타나자 릴리아는 얼른 고개를 숙이려고 했지만, 그가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릴리아가 이저드와 아델라의 관계를 알게 된 건 1년 전이었다. 아델라가 이저드와의 관계를 전부 밝혔기 때문이었다. 그때만 생각하면 어찌나 아찔한지.

당시에는 별의별 걱정이 다 들었다. 지금에야 두 사람이 진심으로 아낀다는 걸 알았지만, 그땐 쉬이 믿지 못했었다.

“저 또…… 속은 겁니까?”

아리스는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이 얼이 빠져 물었다. 아델라는 짓궂음이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스 경은 반응이…… 최고세요.”

아델라가 뻔뻔하게 칭찬처럼 엄지를 척 올렸다.

“아델라.”

“헙, 자제할게요.”

릴리아가 진지하게 아델라를 부르자, 아델라가 얼른 시선을 어머니한테로 돌렸다.

“장난을 무조건 치지 말라는 건 아니지만, 적당히. 알지? 그러다 네 말이 다 장난인 줄 알면 어쩌려고.”

아델라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 저희, 좋은 소식 들고 왔습니다.”

저희?

릴리아와 아리스가 둘을 번갈아 보았다.

“왕궁에 가게 될 것 같아요.”

“어머, 설마…….”

아델라의 황금빛 눈동자가 짙게 빛났다. 그에 릴리아가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입을 뗐다.

“전에, 시녀로 지원했다는 거 붙은 거니?”

아델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릴리아는 믿기지 않아 눈을 크게 키웠다. 동그랗게 커진 그녀의 눈이 기쁨으로 물들었다.

왕궁에 들어간다는 건 변방 귀족에겐 엄청난 기회였다. 이제부터 보고 느끼는 세상이 달라진다는 것과 동시에, 아이 주변 환경이 이곳과는 차원이 다르게 좋아진다는 의미였다.

왕궁에서 일하면 복지는 물론, 명예와 부, 노후까지 보장됐다. 그래서 지원자는 항상 많았고 그중에서 뽑힌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었다. 그런 곳에 아델라가 뽑혔으니 릴리아는 자랑스러울 만했다.

“너무 축하해. 이게 웬일이니. 네가 수도에 갈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준비해야 할 게 많겠지?”

“천천히 하면 되죠. 아직 한 달이나 남았는데.”

“한 달이나, 라니? 한 달 밖에, 지.”

아델라는 들떠 보이는 릴리아를 보며 양심이 콕콕 찔렸다. 릴리아를 따라 웃고 있긴 했지만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사실, 왕궁 시녀에게 주어지던 그 복지나 부와 명예 같은 건 최근 10년 사이 거의 사라졌다. 국고가 텅텅 비어 걱정인 판국에 무슨 돈으로 왕궁에서 일하는 이들의 복지까지 챙겨 준단 말인가. 봉급이라도 제때 나오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이 사실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특히나 변방에 사는 귀족들한테는 이런 정보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기껏해야 수도와 수도 주변 몇몇 지역에만 알려졌을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개판인 왕궁이라도 국민들은 아직도 왕궁에서 일하는 것을 동경하고 있었고, 왕궁으로만 들어가면 일확천금을 버는 줄 착각하고 있었다. 수도에 입성하는 것만 해도 성공의 척도였는데,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왕궁은 그보다 더한 환상의 공간이었다.

“차근차근 준비해요. 차근차근.”

“어휴, 내 심장이 다 떨려. 괜찮을까 모르겠네.”

릴리아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아델라를 보았다. 아델라는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였다.

“그럼요. 전 괜찮아요. 이날을 위해 계속 준비했는걸요.”

“그럼 다행이고. 아, 근데 아까 ‘저희’라고 하지 않았니?”

릴리아가 이저드와 아델라를 번갈아 보았다. 그에 아델라가 힐끔 이저드를 보았다.

“예, 저는 왕실 기사단에 입단하게 됐습니다.”

릴리아는 이번에도 놀라서 눈을 깜박였다. 어떻게 두 아이 전부 붙은 건지, 너무 신기했다. 원래부터 실력이 뛰어나다는 건 아델라한테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왕실 기사단에 한 번에 붙을 정도의 실력자라니.

릴리아는 왠지 조금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아델라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 너무 다행이었다.

“왕실 기사단이요? 와…… 너무 대단하셔서 말을 잃을 정도네요. 너무 축하 드려요. 각하께서 많이 자랑스러워하시겠어요.”

“감사합니다. 아직 아버지껜 말하지 않았지만, 곧…… 아시게 될 겁니다.”

이저드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저드는 소식을 들은 미하일이 어떻게 반응할지 알기에 잠시 나와 있던 거였다. 마침 만날 사람도 있었고.

“자랑스러워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분명, 그러실 거예요.”

릴리아의 진심어린 말에 이저드는 그저 미소 지었다.

겉으로 보기에 넷은 훈훈한 분위기였지만, 사실 릴리아를 뺀 나머지 셋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앞으로 생길 일들이 짐작조차 되지 않아서,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몰라서 더욱 긴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애써 웃으며 수도에서 생길 최악의 일들을 머릿속에서 떨쳐내려 노력했다.

* * *

“지금 이 상황은 뭐지?”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을 한 사내가 기사단장을 꿇어앉히고 물었다. 원래도 평탄한 적 없는 왕궁인데, 지금은 거의 폭풍전야 같은 분위기였다.

삐딱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 있는, 자신보다 한참 젊은 남성의 앞에서 기사단장은 더욱 머리를 조아렸다. 자칫하다가는 죄 없는 자기 기사단원들 목이 잘리게 생겼다.

“저, 저하.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이온지…….”

잔뜩 화가 난 이는 다름 아닌 이 나라의 왕세자, 모튼 이레이저였다. 평소 단정하게 내려오는 그의 짧은 흑발이 오늘은 유달리 흐트러져 있었다. 푸른 눈을 살벌하게 빛내며 모튼은 기사단장을 압박했다.

“어떤 정신 나간 놈이 그놈을 합격시켰냐는 말이야!”

그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기사단장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귀를 막고 싶었지만, 상대는 왕세자였다. 왕보다는 폭정이 덜 했지만 그 피가 어디 갈 리 없었다. 기사단장은 지레 겁먹고 더욱 고개를 숙였다.

“호, 혹시, 이저드…….”

이저드라는 이름이 나오자 모튼의 미간이 더욱 좁혀졌다.

“그, 그게! 그건! 소문이 쫙 퍼져서…….”

“퍼져서?”

기사단장은 고개를 숙인 채로 힐끔, 모튼의 분위기를 살폈다.

“전하께서도 알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합격 통보가 내려졌습니다.”

모튼의 한쪽 눈썹이 움찔하며 올라갔다. 이건 또 무슨 말이야.

“경의 말은 지금, 전하께서 그놈이 입단 신청서를 낸 걸 아시고 그놈을 합격시켰다?”

“기사단 입단을 허가한다고 도장을 직접 찍으셨답니다. 저, 전 진짜 합격시키려고 한 거 아닙니다! 저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저희 가문은 저하께 충성을 맹세한 거!”

기사단장이 스리슬쩍 고개를 들었다. 모튼의 화가 아직 안 풀린 것 같긴 했지만, 다행히도 정신은 든 것 같았다.

“아바마마가…… 했다고.”

모튼은 한순간 허탈함을 느꼈다. 자신이 믿는 사람이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는 선택을 했다니. 속이 쓰리고 복장이 뒤집혔다.

이저드가 수도로 올라오면 권력 싸움이 시작될 것이 뻔했다.

왕의 폭정 때문에 백성과 귀족들의 지지도가 많이 떨어진 상태에서 새로운 왕위 계승권자가 나타난다? 백성과 귀족 사이에서 왕세자를 교체하자는 불온한 움직임이 나타날지도 몰랐다.

혈통으로 치면 모튼은 이저드에 비할 바가 못 됐다. 이저드의 어머니가 외도해서 낳은 아이라고 해도 왕족과 왕족 사이의 아이니 당연히 적통이었다. 일단 모튼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이저드가 자신의 이복형제인 줄 알고 있었으니까.

모튼은 그 점이 두려웠다. 귀족들이 후계자로 밀기만 한다면 이저드는 언제든 권력을 쥘 수 있었다. 왕가의 핏줄이 확실한 이저드의 뒤에는 제스트윈 공작가까지 버티고 있다.

여태 제스트윈 공작가가 잠잠히 있다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언제든 모튼의 뒤에 칼을 꽂을 수 있는 가문이었는데.

“하인트 경.”

“예.”

“쫓아내.”

“예?”

하인트는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어 재차 물었다.

“이미 통보가 됐으니 어쩔 수 없지만, 본인이 포기하게 만들면 되지 않나? 못 견디게 만들어. 다시는 왕궁 안에 발도 못 붙이게.”

“저, 어떻게…….”

기사단장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저드가 뛰어난 실력을 지닌 자라는 걸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전장을 휘젓고 다녔던 미하일 공작한테 어지간한 훈련은 전부 받았을 텐데 무슨 수로 못 견디게 만든다는 말인가.

“그걸 내가 일일이 알려줘야 하나? 그 정도도 못 해?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네 맘대로 해. 내가 허락하지.”

“아, 네. 알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하긴 했지만 하인트는 막막했다. 은근하게 괴롭히는 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저드를 대놓고 괴롭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자신과 이저드와의 신분 차이가 엄청났다. 게다가 잘못해서 이저드가 덜컥 왕의 후계자가 되는 날에는…… 상상하기도 싫다.

하인트는 벌써부터 모튼과 이저드 사이에 있을 권력 싸움을 생각하면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저, 그런데…….”

“뭐야?”

“그, 이저드 니임, 아니, 이저드와 함께 입단하는 이는 어쩔까요?”

“누구?”

모튼은 이저드만 신경 쓰느라 다른 이들을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왜, 있잖습니까. 제스트윈 공작가와 우호적으로 지내는 세이즈 백작가요.”

“세이즈 백작가? 거기 후계자도 기사단으로 들어오나?”

“예, 헤이든 세이즈요. 둘이 같이 입단한답니다.”

모튼은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그놈은 죽어도 상관없지 않나?”

“아, 저…… 그, 세이즈 가문이 백작가긴 하지만 아무래도 역사가 오래되어 세이즈 백작가가 뿌리인 가문들이 꽤 많습니다. 그래서 아마 하나뿐인 후계자가 왕궁에서 죽으면 일이 조금…… 복잡해지지 않을까요?”

중앙 귀족들 중 상당수가 세이즈 백작가의 사돈에 팔촌, 혹은 자손이었다. 현재는 후계자가 헤이든 하나뿐이었지만 과거 백작가가 대대로 자식이 많던 집안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자식들이 하나같이 대성해서 자립한 것도 한몫했다. 같은 백작가라고 다 같은 백작가가 아니었다.

세이즈 백작가가 제스트윈 공작가에 대놓고 우호적임에도 다른 왕족들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골치 아픈 놈을 붙였군. 간교한 놈.”

모튼은 속이 뒤집히다 못해 토할 것 같았다. 아무것도 자기 뜻대로 되는 게 없었다.

여기서 더 귀족들을 건드려 봐야 좋을 게 없었다. 왕이 무서워 납작 엎드려 있는 가문 중에도 언제든 모튼을 배신할 놈들이 수두룩했다.

“그럼 그놈도 같이 쫓아내. 망신을 줘서라도.”

이 자리에서 얼마나 악착같이 버텼는데 이제 와서 왕의 후계자 자리를 뺏길 수는 없었다. 모튼은 이를 으득 갈며 그렇게 명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이저드!”

큰소리 한번 내지 않던 사람이 화를 내니까 확실히 많이 무섭긴 했다. 이렇게 화를 냈던 게 얼마 만인지. 2년 전에 이저드가 몰래 아리스를 데리러 다녀왔던 때 빼고는 없었다.

이저드가 하려는 일을 함구해 주고 가담했다는 이유로 헤이든과 린다도 함께 불려 나왔다.

“네가 어찌, 네가 어떻게 죽을 생각을 할 수가 있느냐!”

“죽으러 가는 거 아닙니다. 제가 살러 가는 겁니다.”

이저드는 꿋꿋하게 대답했다.

“적진 한복판에 맨몸으로 돌진하는 건데, 그게 죽으러 가는 게 아니라고? 왕가에서 널 가만두지 않을 거다.”

“그렇다고 절 죽이지는 못할 겁니다. 제가 죽으면 아버지가 수도로 밀고 들어올 걸 그들은 잘 아니까요.”

“내가 여태 널 지키려고 수도에 못 올라간 줄 아느냐?”

“아닙니까?”

“아니……!”

혼나면서도 꼬박꼬박 대답하는 건 누굴 닮은 건지, 미하일은 속이 타들어 갔다.

“네 아버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아느냐? 그래, 설사 나 혼자 뭘 할 수 있다고 치더라도 네 안위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내가 그 일을 할 이유도, 목적도 없다.”

“아니요. 하실 수 있습니다. 하셔야 합니다.”

“네가 수도에 가는데 나보고 수도를 치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하거라.”

“제가 위험하지 않게, 길을 찾아 드리겠습니다.”

미하일의 미간이 미미하게 구겨졌다.

“무슨 말이지?”

“왕궁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가 있습니다. 아군의 피해를 줄이고 왕을 잡을 수 있다면 찾아볼 가치가 있죠.”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처음 듣는 이야기에 미하일이 헤이든과 린다를 돌아보았다. 그들도 이 사실을 들은 지는 얼마 안 됐지만, 그래도 미하일보다 먼저 알고 있던 사실이라 슬슬 고개를 숙였다.

“그걸 왜 지금…….”

미하일은 이마를 짚었다. 열이 나는 것도 같았다.

“제가 성장하기 전에 아버지께서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다른 첩자를 보낼 것 같았습니다.”

“찾아볼 가치가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럼 찾을 사람은 당연히 보내야지.”

“그렇죠. 그 말이 당연한 말이지만 수많은 궁인이 죽고 있는 지금, 희생만 계속 불러올 겁니다.”

“그걸 알면서도 궁에 가겠다고?”

그래서 아까부터 그가 계속 말렸던 거였다. 왕궁이 얼마나 흉흉한지 들었기 때문에.

“전 죽을 일이 없습니다. 최대한 희생을 줄이는 방법이 있다면, 그 방법을 선택하는 것도 당연한 말 아닙니까?”

미하일은 뒷골이 약간 당기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걸 왜, 네가 하느냐? 왜 하필 너란 말이야.”

“전 실패해서 죽을 일은 없으니까요.”

“그게 무슨……!”

너무 당당한 아들의 표정에 화낼 힘도 나지 않았다. 미하일은 최대한 차분하게 심호흡했다. 생각을 해 보자. 왜 이저드가 저러는 건지. 왜 굳이 자기가 하겠다는 건지.

“설마…… 너의 그, 시간을 돌려 왔다는 그걸 말하는 거냐?”

이저드는 대답이 없었다. 아무래도 그게 맞는 것 같았다.

“너한테는 미안하지만, 나는 아직도 네 그 말을 완전히 못 믿겠다. 나는 이렇게 살아 있고 심지어 케스너 후작 부인께서도 살아 계셔.”

“못 믿으실 수 있지만, 제가 한 말은 전부 사실입니다.”

처음 이저드도 믿기 힘들긴 했다. 이저드의 아버지, 아리스의 어머니와 아델라의 어머니 등등 원래 죽었어야 할 이들이 살아 있었다. 케스너 후작 부인은 건강이 많이 악화됐긴 하지만 아직도 짧은 거리의 거동도 가능했다.

“절 무조건 믿으라고 말씀 드릴 수 없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합니다. 제가 살기 위해 가는 겁니다.”

제베르 왕가와의 악연을 성공적으로 끊어내야 이저드의 운명도 바뀐다. 아니, 이저드 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운명이 바뀔 거였다.

그렇기에 그는 제베르 왕가와의 악연을 끊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릴 생각이 없었다. 성공 확률이 높은 방법을 택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에 다른 이들의 희생도 적다면, 기꺼이 적진으로 뛰어들 가치가 있었다.

“하……. 변한 2년간 널 잘 알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알면 알수록 네가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구나.”

“…….”

아델라와 마찬가지로 이저드도 미래에 자신이 죽는다는 걸 아직 말하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말을 해야 하는 건가, 그는 조금 고민했다. 그런데 영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자신이 죽을 거라는 말을 꺼내면, 왠지 자신의 목숨을 가지고 아버지한테 이해하라며 협박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하일이라면 분명 크게 충격받을 것이다. 자식이 죽는다는데, 충격받지 않을 부모는 없었고, 자식을 살리려고 무엇이든 할 터였다. 이저드는 그렇게 억지로 미하일의 동의를 받아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저도…… 이 일에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공작가의 후계자로서, 그리고 이 나라를 걱정하는 한 사람으로서. 미리 말씀 드리지 않은 건 정말 죄송합니다.”

이저드는 미하일한테 깊이 고개 숙였다. 미하일은 이저드가 그저 치기 어린 감정으로 일을 벌인 게 아니란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하긴, 그랬으면 2년을 조용히 숨기지도 못 했겠지.

그는 그 사실이 못내 괘씸했다.

미하일은 이저드가 항상 자신의 곁에 남아 있기를 바랐다. 언젠가 떠날 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자신이 만들어 놓은 둥지를 떠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저 멀리 위험한 곳으로 향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도 못 했다.

그래서 더 이해할 수 없었던 것도 있었다. 미하일이 만들어 놓은 울타리가 훨씬 안전하고 튼튼한데, 아이는 자꾸 다른 곳을 향했다. 울타리를 넘어 미하일이 통제할 수도, 알 수도 없는 곳으로 자꾸 가는 아이가 미하일은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저드의 세상은 이미 너무 커져서 그 울타리로는 더는 감쌀 수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이저드.”

“예.”

“난 널 보내고 싶지 않다. 왕궁은 너무 위험해. 하지만…….”

미하일은 잠시 말을 끊었다. 그는 한참 망설이다가 한숨을 쉬며 계속 입을 열었다.

“넌 이 아비가 하지 말라고 해도, 하겠지.”

몇 년 동안 지켜본 이저드는 한다면 어떻게든 할 아이였다. 거사에 굳이 빼 놨더니 2년 동안 이렇게 몰래 준비한 것도 그렇고, 아리스를 데리고 와서 미하일이 거사에 참여하게 만든 것도 그렇고 이저드의 뜻대로 되지 않은 게 없었다.

그러니 수도에 올라가는 것도 미하일이 아무리 반대해도 결국 이저드는 펜베르크 성을 떠날 것이다. 그리고 미하일은 떠나기로 마음먹은 이저드를 막을 수 없었다. 무슨 수를 써도 막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네 뜻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렴. 난 내가 할 일을 할 거다.”

무슨 수를 써서든 아이를 지킨다. 아주 오래 전 아내가 남긴 유언을 지키는 게, 그가 할 일이었다.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난 수도로 올라갈 거고, 그놈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미하일의 의지는 이저드만큼이나 확고했다. 이저드는 그런 아버지를 보며 조금 미소 지었다.

“아버지가 계시기에 제가 안전한 겁니다. 그들은 절 못 건드립니다. 걱정 마세요.”

공작의 영향력은 미하일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컸다. 게다가 미하일이 굳이 나서지 않아도 귀족들은 애초에 이저드를 건드릴 생각을 하지 못 했다. 이저드 뒤에 제스트윈 공작이 버티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과거, 이저드를 구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 전적도 있어 이저드를 건드리면 미하일이 어찌 나올지는 불 보듯 뻔했다. 현재 왕한테 붙어 있는 귀족들은 존립을 원하는 거지, 분란을 원하지 않았다.

이저드와 헤이든이 나간 후, 미하일은 곧바로 집무실로 향했다. 이저드를 이해하고 그의 결심을 인정하는 것과는 별개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저드를 지키는 것.

이저드가 과거, 아델라를 위험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거사를 앞당긴 것처럼 미하일도 필요하다면 기꺼이 그럴 생각이었다.

미하일도 이저드 못지않게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큰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아무 대책 없이 이저드를 왕성에 보낼 리가 없었다.

“린다 경.”

“예.”

이저드와 헤이든을 보내고 남아 있던 린다는 집무실 문 앞에 있다가 공작한테 다가갔다.

“수도와 왕궁에 우리 쪽 정예병을 투입하지. 마음 같아서는 호위병 전부를 빼고 싶지만, 금방 들킬 테니 일부만 왕궁에 보내겠네. 경이 지휘해.”

“정예 부대를 빼면…… 각하의 호위는요?”

미하일이 수도에 사람을 심는 건 그렇게 놀랍지 않았지만, 호위병 중에서 정예 부대에 속하는 이들을 빼서 보내는 것에 린다는 조금 놀랐다.

호위병은 보통 공작을 지킬 때는 그냥 호위에만 집중하지만, 전쟁에 나갔을 때는 조금 달랐다. 공작을 따라 최전방까지 침투하는 정예 부대와 후방을 책임지는 후방 부대가 따로 있었다.

그중 정예 부대는 호위병 안에서도 뛰어난 능력자들만이 뽑힐 수 있었다. 공작을 따라 여러 가지 임무를 수행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호위병 사이가 벌어질까 봐 염려하여 나눠놓지 않는데, 이번에 굳이 정예 부대라고 콕 짚은 것은 그만큼 그가 이 사안을 전쟁과도 같이 생각한다는 거였다.

“남은 호위병들과 수비병이 있지 않나. 그들이면 충분해.”

그러나 린다는 염려되었다. 정예 부대가 없는 틈에 이오스가 공격해서 미하일 공작이 잘못이라도 됐다가는 여태 세운 계획의 의미가 없어졌다. 물론, 그리 쉬이 질 사람은 아니었지만 만에 하나라는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도……, 전술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까 염려됩니다. 정예병을 잃을 수도 있고요.”

왕궁에 갔다가 불의의 사고로 정예 부대를 잃으면 전력 손실이 꽤 컸다.

비밀리에 이저드를 지키려면 병사들 역시 신분을 숨기고 궁인으로 들어가야 한다. 가뜩이나 성에서는 왕이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이 바뀌어 궁인들의 목이 날아간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만약에 그 변덕스러운 행태에 병사들이 걸리기라도 하면 의미 없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아무리 철저히 훈련받은 병사들이라고 해도 왕 앞에서 실력이 다 무슨 소용이랴. 자칫 실력을 드러냈다가는 자신들이 모시는 주군이 위험해질 수가 있는데.

“경들이 헛되이 움직이지 않을 거라고 믿네. 그리 쉬이 들키지 않을 이들을 뽑을 거고.”

그의 대답에 린다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린다도 그들이 그리 쉽게 들킬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런 위험이 있다는 거였지. 최악의 상황을 생각해 놓는 것도 필요했다.

그리고 정예병이 빠진 후에 혹시 이오스에서 도발해 온다고 해도 린다가 걱정할 상황은 아마 거의 펼쳐지지 않을 것이다. 정예병들이 빠져도 다른 귀족들의 사병이 버티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세이즈 백작가를 필두로 펜베르크 지역 가주들은 전쟁이 터지면 언제든 사병을 보낼 수 있게 항상 병사들을 키우고 있었다. 정예병들만큼의 실력은 아니었지만, 호위병들이 전부 빠지는 것이 아니니 전쟁이 터지더라도 공작이 위험에 처할 확률은 낮았다.

“그런데…… 도련님을 지키는데 정예 부대가 소용이 있을까요?”

“음?”

미하일이 누군가한테 보낼 서신을 쓰다 말고 린다를 보았다.

“투입되는 정예병들은 분명 도련님을 지키려고 주변을 맴돌 텐데 그 기척을 아군, 적군 다 분간해서 움직일 수는 없잖습니까? 안 그래도 적진에서 기척 느끼느라 항상 신경이 곤두서 있을 텐데.”

“그러한데?”

“저 같으면 피곤해서 아군이든 적군이든 상관없이 기척을 피하던가, 지우던가. 아예 둘 다 하던가. 그럴 것 같습니다.”

기사단에서의 생활이야 사람들이 전부 보고 있으니까 어떻게 기척을 못 지우겠지만, 통로를 찾으러 은밀하게 돌아다닐 때는 이야기가 달랐다.

어느 누가 미쳤다고 기척을 드러내고 다니겠는가. 특히나 이저드는 기척을 느끼고 지우는 기술이 대단했다. 마음먹고 숨으면 린다조차 알아내기 힘들었다.

“그럼 결국 정예병은 필요가 없어지죠. 도련님이 코빼기도 안 보이는데 어떻게 위험할 때 도와줍니까?”

차분한 린다와는 다르게 미하일은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기척 잘 지우고, 일에 방해되지 않게 조용히 이저드를 지키라고 보내는 게 정예 부대였다. 괜히 정예병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다. 린다를 포함한 정예병들의 실력은 미하일이 보장할 정도로 모든 방면에서 뛰어났다.

“경의 말은, 이저드가…….”

“그만한 능력이 되신다는 거죠. 마음만 먹으면 저희 따돌리는 것쯤은 일도 아닙니다.”

린다는 미하일이 묻기 전에 미리 대답했다. 미하일의 눈동자가 아주 약간 흔들렸다.

“물론, 거사가 가까워질 때쯤에는 왕궁 안쪽에도 우리 쪽 병사들이 필요하긴 하지만요.”

“그건 계획에 있었던 부분이긴 하지만, 아니, 잠깐, 이저드가?”

미하일은 말하다 말고 다시 한번 물었다. 그는 아직 정확한 이저드의 실력을 모르고 있었다.

“예. 최근 발군의 실력을 보이고 계세요. 특히 몸이 자란 지금은 확실히…… 몸이 따라 주는 느낌?”

“몸이 따라 준다니?”

“그전에는 머리로는 아는데, 몸이 안 따라줘서 참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시간을 되돌아와서 그런지 습득 속도나 성장 속도가 어마어마하고요.”

“아무리 그래도 정예병들을?”

미하일은 이저드가 요즘 호위병들 사이에서 연일 화제가 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기껏해야 또래들보다 강한 정도일 줄 알았다.

“아, 못 들으셨습니까? 호위병들 요즘 내기하는데.”

“내기? 어떤?”

“이저드 님과의 대련에서 누가 이길 수 있는지.”

호위병들의 훈련을 빼놓지 않고 챙기는 미하일조차도 그런 이야기는 들어 보지 못했다. 하긴, 이길 생각은 안 하고 내기를 한다고 엄격하기로 소문난 미하일한테 혼날 것이 뻔할 테니 말하지 않았겠지만.

“경도?”

미하일이 믿기 힘들다는 듯이 린다를 보자, 린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은요.”

“아직은, 이라는 말은, 곧 질 것 같다는 말인가?”

“그렇게 안 되게 노력하고 있지만, 뒤처진다는 게 느껴집니다. 도련님께서 커 갈수록 더 많이. 미래에 무슨 훈련을 그리했는지 궁금할 정도라니까요.”

린다는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미하일의 아들이니 이저드도 그에 못지않게 강해질 거라 예상하긴 했다. 다만, 그 성장 속도가 린다의 예상을 뛰어넘고 있었다.

“그리고, 도련님께서 기척 숨기는 건 너무 잘해서 마음먹고 숨으면 저도 찾기 힘듭니다.”

미하일은 오늘 몇 번째 놀라는 건지 세는 걸 포기했다.

린다는 정예 부대 안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의 실력자였다. 자신의 강함을 잘 알고 있는 그녀는 자신의 힘을 적절히 조절해서 쓸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그만큼 노력가기도 했고. 그래서 웬만한 능력으로는 린다한테 인정받기 쉽지 않았다.

그런 린다가 인정한다는 것은 확실히 이저드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증거였다.

“제 사견입니다만, 이저드 님 주변을 맴돌기보다는 이저드 님께 해가 될 만한 사람을 감시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린다의 제안에 미하일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이저드의 주변을 지키는 것뿐이라, 이저드가 하는 일에 방해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영 걱정되시면, 통로를 빨리 찾아서 수도로 향하는 날짜를 앞당기는 것도 방법이죠.”

물론, 통로를 찾는 데 국새가 필요해서 이 방법은 쓰기 힘들겠지만.

“이저드가 기척을 가늠하는 범위가 어느 정도인 줄 아나?”

가만히 고민하던 미하일이 진지하게 물었다.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집중하면…… 공작저 전체? 그보다 더 될 수도 있고요. 평소에는 생활하시는 공간 주변은 파악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에 미하일은 린다의 걱정이 절대 과장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한참을 말이 없던 그는 오랜 시간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 알겠어. 고맙군. 어차피 바로 정예 부대를 투입할 수는 없고, 왕의 눈에 띄지 않게 시간을 두고 한 명씩 늘려야 하니 방법을 강구해 보지. 그동안은 경과 헤이든 경한테 이저드를 부탁하겠네.”

“예, 알겠습니다. 기별을 넣어 주십쇼.”

린다는 깊게 고개를 숙이고 미하일의 집무실에서 빠져나왔다. 긴장했던 목을 이리저리 풀며 그녀는 창밖을 힐끔 보았다.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지만, 잘한 건지는 모르겠네. 우리야 상관없지만 아델라 님은 우리 쪽 사람들이 많은 게 더 안전하려나.’

이저드와 뜻이 같아 최소한의 희생을 줄이려고 건의한 거지만, 과연 이 선택이 훗날 어떻게 작용할지는 가 봐야 알 것 같았다. 린다는 인상을 미미하게 구기다가 걸음을 옮겼다.

‘어쨌든 내가 할 일은 통로를 빨리 찾아서 이 일을 끝내는 거지.’

린다가 아델라와 이저드를 가장 빨리 왕궁에서 벗어나게 할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누구보다 빨리, 통로를 찾는 것.

* * *

“―해서, 예정보다 훨씬 더 빨리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델라는 린다의 설명을 또랑또랑한 눈으로 듣고 있었다.

“그래도 허락 받아서 다행이에요. 통로를 찾는 건, 최대한 노력해 봐요.”

케스너 후작 부인한테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통로는 분명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듣는 것과 실제로 가서 확인해 보는 건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아예 희망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래. 아버지께서 그리 쉽게 보내줬을 때부터 각오하고 있었네.”

헤이든은 넷 중 유일하게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전 되게 의외로 쉽게 끝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군요?”

“자식이 사지로 뛰어드는데 그냥 보낼 부모가 어디 있냐?”

“……그럼 우리 아버지는?”

헤이든이 뚱하니 묻자, 린다가 아, 하며 짧은 탄성을 냈다.

“미안. 백작님을 욕한 건 아니었어.”

헤이든이 수도로 간다고 밝혔을 때 세이즈 백작은 아주 기뻐했다. 사고뭉치가 드디어 사람 구실을 한다며.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칠 줄도 알고 언제 이렇게 컸냐며 매우 기뻐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목숨이 걸린 일인데, 걱정은커녕 대견해 한 그의 포부가 대단했다.

“어쨌든. 그렇게 됐어요. 지금은 저희가 책임지기로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힘들어질 겁니다.”

린다의 말에 아델라와 이저드는 안다는 듯이 묵묵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시간을 벌어 줘서 고맙네. 우린 최대한 빨리 통로를 찾는 것만 생각하지. 아버지께서 정예 부대를 전부 투입하기 전에.”

“네. 아, 그리고, 국새는 린다 경이 떠나는 날 주신대요.”

문을 열려면 국새가 필요하니 가지고 가는 거지만, 아델라는 솔직히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들키면 어쩌나 벌써부터 걱정됐다.

“그런데, 그거 저희가 가지고 있어도 될지…….”

국새라는 이름 하나가 가지는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부담감에 아델라는 어깨가 짓눌리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아리스 님을 데리고 갈 수는 없으니까요. 걱정 마십쇼. 안 들키고 잘 모셔 두겠습니다.”

린다가 그런 아델라를 위로하며 웃었다.

혹시 국새가 들킬까 봐 신분이 드러난 채로 움직이는 이저드와 헤이든은 운반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린다의 짐 가방에 넣어 두고 린다가 지키기로 했다. 아무래도 그녀는 평민 하녀로 들어가니까 둘보다는 상대적으로 의심이 덜할 것이다.

“그나저나 아쉽네요. 왕실 기사단으로 들어갔으면 재미있었을 텐데.”

린다가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린다가 기사단으로 지원하지 않은 것은 그녀가 여성이라서였다.

현재 왕실 기사단에는 여성이 없었고, 애초에 여성을 잘 뽑지도 않았다. 과거, 여성이 기사단원으로 뽑힌 전적이 있긴 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들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소문으로는 왕을 보필하다 사라졌다는데, 자세한 내막까지는 몰랐다. 그래서 그 소문을 들은 린다는 왕실 기사단에 들어가면 신분을 숨기는 데에 차질이 생길 것을 예상하고, 바로 기사단을 포기했다.

진지한 얼굴로 린다의 말을 듣던 헤이든이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 안 돼. 기사단원들이 불쌍하잖아. 맨날 맞을 텐데.”

쟤는 왜 항상 맞아도 항상 개길까?

‘저 입을 콱 틀어막아 버려야 하는데.’

안 그래도 검을 잠시 내려놔야 해서 열 받는데, 헤이든이 불난 집에 부채질하고 있었다.

“야.”

“응?”

“누가 누굴 걱정해? 네가 지금 맞게 생겼는데?”

린다가 서늘하게 웃자, 헤이든은 반사적으로 아델라 뒤로 숨었다. 헤이든보다 작은 아델라 뒤로 숨는 꼴이 웃겼다.

헤이든은 방어 자세를 취해도 린다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몇 년간 맞으면서 몸으로 터득했다. 그래서 택한 차선책이 바로 아델라였다.

“내가…… 상식이 통하면, 주먹이 나갈 일이 없어.”

“뭐? 그럼 난 상식이 안 통한다는 거야?”

“넌 상식이 안 통하는 게 아니라, 말이 안 통해. 뇌가 없나 봐. 같은 이유로 맞으면 사람이 좀, 배우는 게 있어야 하지 않아?”

“나 지금 맞을 짓 안 했거든? 그만큼 네가 강해서 주목받을 거니까 기사단원이 아닌 게 다행이라고…….”

“이게 어디서 약을 팔아?”

둘은 아델라를 사이에 두고 말싸움을 시작했다. 싸우다 정든다던데, 왜 이 둘은 2년을 내리 싸워도 항상 제자리인지 몰랐다.

아델라는 동요하지 않고 둘 사이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는 사이에도 둘은 여전히 입씨름 중이었다.

“싸우다 정든다던데.”

“아닙니다!”

“아니거든요!”

작게 말했는데 찰떡같이 알아들은 헤이든과 린다가 아델라를 보고 소리쳤다. 그리고 둘이 빽, 하고 소리침과 동시에 이저드가 아델라의 두 귀를 손으로 막아 주었다. 그 또한 너무 자연스러운 행동이라 다들 전부 태연했다.

“누가 이런……!”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아델라는 다시 시작된 둘의 싸움에 어색하게 웃었다.

‘원래 지금쯤이면 둘 사이에 아이가 생겼어야 하는 거 아닌가?’

2년 동안 둘 사이는 좁혀지지도, 그렇다고 멀어지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소나무 같은 커플이 다 있나. 아델라는 다시 문득, 둘이 걱정됐다.

“아델라.”

그 사이, 이저드가 작게 아델라를 불렀다.

“네?”

“나가지.”

이저드가 문 쪽을 슬쩍 곁눈질했고, 아델라는 아직도 싸우는 둘의 눈치를 보다 살금살금 방에서 빠져나갔다.

“휴. 저러고 주먹질하다 또 각하께 혼나겠죠?”

“그럴 확률이 좀 높지. 항상 있는 일 아닌가.”

둘은 식당과 숙소를 함께 운영하는 큰 여관을 빠져나와 번화가를 걸었다.

“뭔가…… 뒤죽박죽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들어요.”

“뭐가 말인가?”

“사람들 운명이? 제가 너무 터무니없는 일을 벌인 건 아닌지…….”

원래 죽었어야 할 사람들이 살아 있고, 지금은 또, 태어나야 할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다. 과연 이 세계가 제대로 흘러가고 있는 게 맞는 걸까? 이게 맞는 흐름일까?

“우리의 소중한 사람들이 살아났고 그들 삶에 죽음이 아닌 다른 선택지가 생겼으니, 뒤죽박죽인 건 당연하네. 그들도 생각을 하고 자신의 앞날을 선택하지 않나.”

이저드는 부드럽게 아델라의 손을 꼭 잡았다.

“그들이 보기에는 우리도 그럴 거야. 무모하고, 위험하고, 예측할 수 없겠지. 왜 일이 이렇게 흘러가나, 싶을 거네.”

아델라는 너무도 많이 바뀐 현재가 좋으면서도 이상하고, 불안했다. 자신이 시간을 돌린 게 맞는 선택이었는지도 헷갈렸다. 미래가 너무 많이 바뀌어 전보다 예측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졌다.

하지만 이저드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주 당연한 현상이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미래라는 게 원래 그렇지 않은가.”

그전에는 아델라가 살기 위해서 오직 하나만을 보고 달렸다면, 지금은 그때와 또 달랐다. 아델라가 살린 이들이 선택한 앞날과 아델라가 선택한 앞날이 합쳐져 당연히 예측할 수 없는 미래가 펼쳐졌다.

아주 당연한 현상이었다.

아델라는 2년 동안 회귀를 안 해본 적도 처음이었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미래를 바꾸려고 노력한 적도 처음이었다.

“그대가 가는 길이 맞네. 여태 그렇게 조금씩 나아갔지 않나.”

실제로 그가 아델라를 물리적으로 도닥이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의 목소리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아델라는 맞잡은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잘 가던 아델라가 우뚝 서서 이저드의 손만 내려다보자, 이저드가 어정쩡하게 멈췄다.

“전 역시, 이저드 아니면 안 되겠어요.”

아델라의 작은 목소리를 이저드는 정확히 알아듣고 그녀와의 거리를 좁혔다. 그는 조심스레 아델라의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그 말은,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생각했다는 말로도 들리는데.”

그의 청명한 하늘빛 눈동자가 지그시 아델라를 내려다보았다. 아델라는 강렬한 그의 눈빛에 사로잡혀 눈을 뗄 수 없었다.

“그건 아니고 아니, 조금 생각한 게…….”

“그대가 딴 사람을 생각할 정도로 내가 그댈 불안하게 했나?”

이저드가 심각하게 물었다.

물론 그건 절대 아니었다. 아직도 이렇게 붙어 있으면 심장이 뛰고, 너무 좋은데, 그럴 리가 없었다.

“딴 사람을 생각한 게 아니고, 이 일이 성공하면……, 제스트윈 공작가는 권력의 중앙에 서잖아요. 지금은 왕의 눈치를 보느라 귀족들이 접근하지 못하는 거지만, 그때가 되면…….”

아마 이제 갓 성년이 된 이저드를 잡으려고 유력 가문들이 줄을 설 것이다. 엄청난 권력을 지닌 공작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인데 오죽할까? 거기에 검술은 물론, 외모까지 빼어나니, 그들로서는 밑질 것이 하나도 없는 신랑감이었다. 아니, 밑지는 게 뭐야, 혼인만 할 수 있다면 부와 권력 모두를 얻게 되는 거였다.

이저드는 아델라의 뒷말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난 그댈 놓을 생각이 없는데.”

그가 황금빛 눈동자와 시선을 맞추고 조곤조곤 말했다.

“그댄 날 놓을 생각이었나?”

“아뇨. 그건 아니고…….”

아델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젓자, 드디어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럼?”

“그냥, 그런 생각을 했다고요. 이것도 제가 미리 걱정한 거죠, 뭐. 아무래도 저희 집안이 좀…… 차이가 나서 이저드한테 아무 도움도 안 되고.”

아델라가 아무리 노력해도 바꾸지 못하는 게 있다면 바로 귀족들의 세계였다. 앞으로 정치계나 사교계에 나갈 것을 생각하면, 조금 암담하긴 했다.

“흠, 미리 걱정하긴 했네.”

“역시 그렇죠? 저희 언제 약혼할지도 모르는데.”

아직 사귀는 것도 미하일 공작께 말 못 했는데, 너무 앞서갔나 싶었다.

“무슨 소린가? 약혼은…….”

갑자기 뚝, 이저드의 말이 끊겼다. 아델라는 궁금증 가득한 표정으로 이저드를 빤히 보았다.

“약혼은? 그 다음은요?”

아델라가 이저드의 로브를 잡고 살짝 흔들자, 이저드가 부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아니네. 그러니까 내 말은, 이 일이 성공하면 그대와 놀고먹고 쉴 거네. 어차피 공작가는 단 한 번도 정계에 진출한 적이 없어. 왕이 바뀐다고 해도 그건 변함없네.”

“예?”

“그 골치 아픈 곳에 뭐 하러 가나? 난 그대와 평생 함께 이곳에서 걱정 없이 살려고 이 일을 하는 거야.”

그가 아델라를 품에 안으며 말했다. 약혼은, 그 이후의 말이 아델라는 궁금했지만 이저드의 품이 따뜻해서 그만 잊어버렸다. 그렇게만 되면 얼마나 좋을까. 펜베르크 지역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평생 같이 지낸다니. 상상만으로도 행복한 기분이었다.

“그러니 그런 상상하지 말게. 그대의 속만 상해.”

아델라가 어떤 상상을 하던, 이저드는 절대로 그녀를 놓을 생각이 없었다.

“죄송해요. 제가 이저드에 비해 부족하다고 생각했어요. 우린 똑같은 사랑을 하고 있는데, 나만 불안한 것처럼.”

그에 이저드가 아주 약하게 웃었다.

“예전에 그대가 그런 말을 했지. 그 이야기 그대로 돌려주지.”

“제가 무슨 말을 했죠?”

아델라가 이저드의 품에서 얼굴만 떨어뜨려서 그를 보았다. 궁금증으로 가득한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이저드가 그녀의 귓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그만큼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몰라서, 그런 거 아닌가?”

아주 예전에 전생에서 아델라가 의부증에 걸릴 것 같다며 걱정하던 때 그녀가 당당히 웃으며 하던 말이었다. 귓가를 간질이는 낮은 목소리에 아델라는 어깨를 움츠리며 귀를 막았다.

“헉. 귀에다가 그런 말 하시는 건 절 너무 유혹하시는 행동인데요!”

“유혹하면 넘어오기는 하나?”

아델라한테서 몸을 떼며 그가 눈웃음을 지었다. 여태 저 얼굴에 안 넘어간 게 용했다. 아델라는 자신이 얼마나 참고 있는지 모르는 못된 이저드를 놀려 주고 싶어 눈을 치켜떴다.

“전 넘어가도 되지만, 이저드는 안 되죠!”

그렇게 말하며 잽싸게 아델라가 다시 이저드를 안으려고 하자, 이저드가 그녀의 행동을 파악하고 한걸음 물러섰다. 아델라의 손이 허공을 휘젓고 멈췄다.

“그대도 안 돼. 위험한 행동이네.”

아델라는 금세 멀어진 이저드와의 간격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다시 이얍, 하고 손을 뻗었지만 이저드의 몸에는 닿지도 못했다.

“그대는 내가 많이 참고 있는 걸 몰라서 탈이네.”

“우하! 그건 제가 할 말이거든요?”

방금까지 귀에다 바람 분 게 누군데? 아델라는 너무 억울했다. 손 잡고, 포옹하고, 어쩌다 볼이나 이마에 뽀뽀? 그 이상으로는 2년 동안 시도도 못해 봤다. 성년이 되려면 아직 멀어서 어찌나 내외했는지!

앞으로 성년이 되려면 아직도 더 남았는데 거기에 찬물을 끼얹지는 못할망정, 불을 지핀 게 누군데…….

“그럼 오늘은 손잡는 거로 만족하지.”

‘아니, 이 사람이? 먼저, 어? 먼저!’

아델라는 이저드의 발끝을 분한 듯이 째려보다가 뭐라고 조그맣게 웅얼거렸다. 웬만큼 가까이 가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소리였다.

그는 아델라가 하는 무슨 말이든 듣길 원했다. 그래서 이저드는 반사적으로 거리를 좁혔다. 함께 있는데 그녀의 말을 흘려듣고 싶지 않았다.

“아델라, 왜…….”

“―잡았다!”

아델라가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환하게 웃었다. 이저드가 미처 얼굴을 빼기 전에, 아델라의 입술이 그의 볼에 닿았다.

“절 유혹하고 도망가신 벌이예요!”

아델라가 이저드의 목에 매달려 장난스럽게 웃자, 이저드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연인이 이토록 귀엽고 사랑스러운데, 어찌 안 웃을 수가 있을까. 무엇보다 잠깐의 입맞춤이 머릿속을 맴돌아 잊히지 않았다.

그는 이내 아델라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아델라 코앞까지 얼굴을 가까이 했다. 아주 미세한 숨소리까지 들릴 수 있는 거리였다.

“난 경고했네.”

느긋하게 말하며 그가 아델라의 입술에 천천히 다가갔다.

“흡!”

그러자 아델라가 홉뜬 눈으로 입을 다물며 입술을 쏙 숨겼다. 그런 아델라를 빤히 쳐다보던 그는 곧 그녀의 옆구리를 간지럽혔다.

“으, 으하핫! 흐, 합!”

아델라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이저드한테서 떨어졌다. 자신의 옆구리를 가리며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얼굴로 그녀는 이저드를 올려다보았다. 이저드는 태연자약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만 띠고 있었다.

“이저드!”

“듣고 있네, 아델라.”

얄밉다. 얄미워! 한 점 흔들림 없어서 더 얄밉다.

“전 뽀뽀만 했는데, 간지럼 태우는 게 어딨어요? 제가 제일 약한 부분을! 차라리 입을 맞추지!”

그런 벌이라면 언제든 받을, 아니지, 차라리 안 한 게 다행이었나. 감각이 남아서 목말라 죽겠다.

“아델라.”

“네.”

아델라가 뚱하니 대답했다.

“왜 내가 입맞춤으로 끝낼 거라 생각하나? 난 시작하면 못 버틸 것 같네만.”

그의 말에 아델라는 말이 없었다. 아델라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둘이 의식적으로 입맞춤을 피한 것도 그런 데에 있었다. 한번 시작하면 멈추지 못할까 봐. 더 많은 것을 원할까 봐.

“얄밉지만, 맞는 말이네요. 제가 빨리 커야겠어요! 그땐, 못 다가오게 놀려야지.”

아델라는 엉뚱한 곳에서 힘을 얻는 듯 보였다. 이저드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그래. 잘해 보게.”

“그 말은 제가 못할 것 같아서 하는 말이죠?”

“약간은?”

이저드가 잔잔하게 미소 지으며 사실대로 말했다. 그 말에 아델라는 맥이 탁 풀린 듯했다.

“아니,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세요?”

“그대도 나만큼이나 애타고 있는 걸 아니까?”

그렇게 말하면 또 할 말이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사실 이저드가 유혹한다면 그녀가 안 넘어갈 리가 없었다.

“혹은, 얼굴?”

“……?”

아델라는 이저드의 다음 말에 얼떨떨하게 그를 보았다. 평소 자기 외모 자랑하던 사람은 아니었는데, 미치셨나.

“그대가 좋다고 하지 않았나. 내 얼굴.”

“제가요? 제가 언제요?”

아니, 물론 싫다는 건 아니었는데 언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던가? 마음의 소리가 들렸나?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아델라는 그한테 얼굴이 좋아요, 라고 한 적이 없었다.

“첫 만남에서 반한 건 얼굴 때문이라고, 했네.”

‘그런 말을 언제…… 어? 으응?’

아델라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비밀인데요. 처음엔, 얼굴…… 첫 만남부터 반해서…….’

과거의 어느 때인가 그 이야기를 한 것 같았다. 그런데 그거, 린다와 대화한 거였는데? 그러고 보니, 나중에 나타난 아리스와 헤이든의 태도가 좀, 미심쩍긴 했다. 둘은 있는데 이저드가 안 왔다는 것도 이상했고…….

“헉! 그때 들으셨어요?”

“언제를 말하는지 모르겠군.”

조금 전에는 안다는 듯이 말하더니 지금은 또 시치미를 뗐다. 아델라는 걸음을 옮기려는 이저드 곁에 바짝 붙어 걸으며 그를 추궁했다.

그는 자신을 따라 걷고 있는 아델라를 보며 절로 미소가 나왔다. 이저드는 아델라의 물음에 순순히 대답하기도 하고, 가끔은 조금 다른 대답도 해 가면서 번화가를 걸었다.

* * *

시간은 하루하루 흘러, 눈 깜짝할 사이에 수도로 향할 날짜가 됐다. 이저드와 헤이든은 왕실 기사단 입단식이 일주일 더 빨리 시작해서 이미 떠났다.

그리고 아델라와 린다는 조금 더 늦게 떠났다. 아델라는 아리스와 욘제타한테 어머니를 부탁하고 안타까운 발걸음을 돌렸다.

그렇게 둘은 드디어 수도에 입성했다.

린다와 아델라는 창문 밖으로 비치는 화려한 왕성을 보며 감탄보다는 한숨이 먼저 나왔다. 겉으로 화려하고 멋있어 보이는 저 안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지 대충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렇게 아름답게 빛나는데, 그 안은 지옥이라니.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살다 살다 궁에 돈을 처바른 놈은 봤어도, 왕성 성벽에 저래 놓은 놈은 또 처음 봅니다.”

린다는 팔짱을 끼고 왕성을 아니꼬운 눈으로 구경했다.

수도를 에워싼 성곽은 펜베르크 성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안에 또 세워진 왕궁을 감싼 왕성은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벽면에 금으로 수를 놓을 수가 있는지. 커다란 황금빛 용 한 마리가 하얀 성벽을 감싸고 있었다. 분명 저 작업을 하던 작업자는 과로로 쓰러졌을 게 확실했다.

“보는 사람은 구경거리지만, 저것도 다…… 국고에서 빠져나간 거겠죠?”

그렇게 생각하면 마냥 화려하고 웅장하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백성들을 쥐어짜서 만든 걸 테니까.

‘내 세금이 저 용의 황금 비늘 한 칸 정도는 되려나.’

왕성의 성문에 다다르자 마차가 멈춰 섰다. 꽤 많은 마차가 줄지어 신분 확인을 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아델라도 신분을 확인했고, 다행히도 금방 통과됐다.

왕성 안에는 왕족들과 중앙 귀족들이 생활하고 있어 건물이 많았다. 그리고 그 수많은 건물 가운데에는 단연 돋보이는 건물은 당연히 왕궁이었다. 뭐가 이렇게 다 큼지막한지, 멀리에서도 왕궁 지붕이 아주 잘 보였다. 특히 햇빛을 받고 반사된 금빛 물결은 눈을 부시다 못해 아프게 했다.

아델라와 린다가 왕궁을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이, 마차는 길을 따라 천천히 왕궁을 향했고, 일정 거리에서 멈췄다.

마차가 멈추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달칵, 하고 린다가 마차 문을 열었다. 평민 하녀로 들어가기로 한 린다는 여기서 내려야 했다.

평민과 귀족은 같은 문을 공유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평민이 들어가는 문과 귀족이 들어가는 문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원래는 그곳까지 마차를 가지고 가도 됐지만, 린다는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적당한 거리에서 내렸다.

“그럼, 건투를 빕니다.”

린다가 묵직한 가방을 들고 마차에서 내리며 아델라한테 인사했다.

“예, 조심하세요. 린다…… 언니.”

“아…… 그 호칭, 동생들한테 빼고 들어본 적이 처음이라 어색하네요. 아니지, ……어색하네. 나중에 봐.”

둘은 빙그레 웃으며 헤어졌고, 린다를 내려준 마차는 다시 움직여 왕궁의 정문에서 멈췄다. 이 이상은 마차로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이었다. 아델라는 가방을 들고 마차에서 내렸다.

이미 꽤 많은 마차가 귀족 영애들을 내려 주기 위해 멈춰 있었다. 아델라는 드레스 자락을 쥐고 마차 사이를 지나 궁에서 일하는 귀족들이 드나드는 문으로 향했다.

“신분패를 보여 주십쇼.”

그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가 딱딱하게 말했고 아델라는 품에서 신분패를 꺼내 보여 주었다.

“이번에 시녀로 뽑혔습니다.”

아델라를 이리저리 훑던 기사는 곧 통과시켜 주었다.

그녀는 커다란 왕궁의 정문 옆에 딸린 황금색 철문을 지나 안쪽으로 향했다. 장미로 장식된 정원이 쫙 펼쳐져 있었는데, 너무 넓어서 자칫 정신을 놨다가는 길을 잃을 것 같았다. 정문부터 난관이라니.

다행히도 왕궁의 길을 대충 들어 알고 있는 아델라는 케스너 후작 부인이 말한 대로 일단 일직선으로 쭉 걸었다. 중간에 갈림길들이 보였지만 전부 무시하고 앞만 보고 걸었다.

‘장미 정원을 쭉 일직선으로 가다 보면, 바로 정면에 건물 하나가 보일 거야. 안에 들어가면 탁 트인 홀이 있을 거고. 그리고 그 안은…….’

“엄청 복잡해…….”

아까 장미 정원을 걸어올 때도 사람이 많았는데 지금은 아주 아수라장이었다. 왕궁에서 일할 평민들이 자신의 부서가 어딘지 확인하기 위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다행인 건, 귀족들은 이 복잡한 곳을 피할 수 있다는 거지.’

아델라는 문득 이곳을 참아낼 린다가 생각났다. 무, 무사하시길. 린다를 눈으로 찾으려고 해 봤지만, 복잡한 이곳에서 붉은 머리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아델라는 시간을 확인하고 얼른 걸음을 재촉했다.

“통과. 옆 건물로 가세요.”

신분패를 보여 주고 잠시 기다리니 정말로 금방 통과됐다. 아델라는 안내받은 대로 바로 옆 건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도 아까와 같이 천장이 둥그렇게 솟아오른 커다란 홀이었다.

‘일단, 눈에 보이는 곳은 전부 돈칠을 한 건 알겠네.’

아까 성벽도 그랬고, 철문도 그랬고, 여태 들른 두 곳 천장도 전부 금칠이 되어 있었다. 화려하긴 엄청나게 화려했다. 눈이 부셔서 천장을 계속 보고 있을 수 없을 정도였다.

아델라가 휘둥그레 한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는 동안, 홀에는 건물만큼 화려한 귀족 영애들이 한 명 한 명 입장하고 있었다. 물론 그중에는 아델라처럼 처음부터 꾸미지 않고 온 사람들도 많았다.

홀 안이 점점 북적거리는 것을 보니, 이번 시녀는 꽤 많은 인원을 뽑은 모양이었다. 윗선이 대거 사표를 냈나? 아델라는 서른 명 정도 세다가 말았다. 수가 점점 늘었기 때문이다.

시녀들을 이렇게 한꺼번에 많이 뽑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시녀라곤 하지만 엄연한 귀족 영애가 하는 일이 잡일일 리 없다. 기껏해야 왕족의 말 상대 따위의 일을 하며 인맥과 품위를 늘려 가는 일이 전부일 것이다. 그런 일에 이런 많은 수의 시녀가 한꺼번에 필요할 일이 있는 걸까?

의심은 아델라만 하는 건지, 아니면 귀족 영애들이 전부 표정을 잘 숨기는 건지, 그들은 아무 의심 없이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서로 안면이 있는 사이가 많은 것 같았다. 반면, 아델라는 귀족 사회와는 영 거리가 멀어서 구석에서 멀찍이 떨어져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저…….”

앞으로 어떤 궁으로 배정 받게 될까, 어떤 궁에 배정되면 나쁘고 어떤 궁에 배정되면 좋은지 같은 것들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차에, 누군가가 아델라한테 말을 걸어왔다.

아델라 또래 정도 됐을까? 풍성한 갈색 곱슬머리를 지닌 녹안의 소녀가 쑥스럽게 웃으며 아델라한테 말을 걸었다.

“이름을 여쭤 봐도 될까요?”

목소리 끝이 살짝 떨리는 것을 보니, 많이 긴장한 모양이었다. 원래 사람한테 말 거는 걸 힘들어하는 사람인가?

“아델라 벨제프입니다. 벨제프 자작가고요. 아가씨는요?”

줄곧 무표정하던 아델라가 싱긋 웃자, 소녀의 초록색 눈동자가 떨렸다. 그녀는 얼굴을 발그스름하게 붉히고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아, 저, 전, 스웰라 힐튼이에요. 힐튼 백작가의 차녀입니다.”

아델라는 머릿속으로 힐튼 백작가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았다. 중앙 귀족에 속했고, 현재 왕한테는 중립을 지켰지만, 모튼이 올라갔을 때는 왕의 편에 서는 가문이었다. 모튼과 거래가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지금 왕은 마음에 안 들고 다음 왕은 괜찮아서 따랐는지는 알 수 없었다.

“벨제프 자작님께 여동생이 있다는 건 들었지만, 이렇게 미인이신 줄은 몰랐어요.”

“저희 오라버니를 아십니까?”

“아, 아니. 그, 아는 건 아니고 몇 번, 뵀습니다. 소문으로도 들었고.”

아델라는 그녀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아까 내가 웃을 때 얼굴을 붉힌 건…… 레널드가 떠올라서구나?’

기분은 별로였지만, 어찌 됐든 레널드와 닮은 건 사실이었다. 아델라는 스웰라와 친해져야 할지 말지 조금 고민했다. 일단 좋게 대해서 나쁠 건 없겠지.

“그렇군요. 저희 오라버니를 아시는 분이 있다니 놀랍네요. 좀 기쁘고. 전 여기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요.”

“어머, 그런 말 마세요. 방금 아델라 님이 벨제프 자작가라고 말하는 순간 몇몇 분들이 알아보았답니다.”

그게 좋은 의미인지 나쁜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델라도 시선을 느끼긴 했다. 하지만 아델라는 전혀 모른 척 눈을 크게 키웠다.

“전 저택에만 있어 몰랐는데, 저희 오라버니가 꽤…… 유명한가 봐요?”

기사단의 부단장씩이나 오르는 사람이 안 유명하면 그게 이상한 거였다. 얼마나 왕세자 눈에 들려고 노력을 했을까.

“그럼요. 나라를 위하는 마음도 너무 멋있으시고, 검술도 뛰어나시고……, 얼굴도…….”

‘으음. 소름 돋았는데, 모른 척해야 한다는 게 괴롭다.’

아델라는 팔뚝을 손으로 쓸며 웃었다.

미적 감각을 다시 주워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라고 혀끝까지 올라오는 것을 참았다.

“어머, 죄송해요. 방금 한 말은 잊어주세요.”

다행히도 스웰라는 적당 선에서 멈췄다. 더 말했으면 아델라가 도망갔을 거였다.

“아, 예. 어쨌든 저희 오라버니를 높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한 건데요. 훌륭한 분이시니까.”

아델라는 레널드의 칭찬이 복병이 될 줄은 몰랐다. 어후, 어후우! 하며 온몸을 털고 싶었다. 닭살이 돋아서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그래서, 아델라 님을 뵀을 때,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어떻게 두 분 다 나라를 위해 왕궁에 들어올 생각을 했는지…….”

아까부터 자꾸 나라를 위해, 라는 말을 덧붙이는 게 영, 기분이 이상했다. 자신의 정체가 벌써 들켰을 리는 없는데. 아델라는 진심이 담긴 스웰라의 얼굴을 보며 그저 살짝 미소 지었다.

“저희 오라버니는 나라를 위해 기사단에 입단한 건지 몰라도 전 아닙니다.”

스웰라의 얼굴에 의아함이 피어 나왔다.

“자작 가문에 빚이 많거든요. 오라버니 봉급으로는 어림도 없어서 제가 시녀로 지원한 겁니다. 복지도 이만한 곳이 없고요.”

아델라가 천연덕스럽게 말하자, 스웰라의 눈동자가 아주 잠시 흔들렸다. 벨제프 가문에 빚이 많은지는 몰랐던 모양이었다.

‘정말 오라버니를 좋아해서 찔러 본 거였나.’

“그, 그렇군요. 그래도 선택한 곳이 왕궁이라면…….”

“왕궁만큼 돈을 챙겨 주는 곳이 없어서요. 다들 떼먹기 바쁘고. 무엇보다 오라버니가 있어 마음은 편하니까요.”

이번에는 약간 감정을 실어 연기할 수 있었다. 일당도 못 받고 일해 본 적도 있어서.

“아, 그, 그런, 힘든 생활을 했던 거군요……. 고생이 많았겠어요.”

스웰라는 아델라의 두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아델라는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랐지만,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오라버니보다야 할까요? 궁에서 홀로 일하느라 고생했을 텐데.”

아델라는 적당히 장단 맞춰 주자 싶었다.

“여기! 여기 주목해 주세요!”

홀이 돔형이라 그런지 웅성웅성 시끄러운 와중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아델라는 속으로 그 목소리에 감사했다. 자칫 잘못했으면 옆에 있던 다른 이들도 끼어들어 레널드에 관해 물을 기세였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입가에 마비가 왔을 수도.

* * *

“레널드 경한테 동생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

‘이건, 형식적으로 하는 거짓말.’

아델라는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드레스 자락을 빤히 보았다.

“언젠가 한번 봤으면 했는데, 레널드 경이 통 안 보여 줘서 말이야. 이유를 좀 알겠어. 이렇게 봐서 반갑군, 아델라 양.”

‘이건……. 거짓 반, 진심 반?’

높낮이 없던 남자의 목소리 중에 뒷부분만 약간 감정이 실린 것처럼 들렸다. 기대하는 것 같은?

‘반가울 건 또 뭐지?’

아델라는 의아함에 고개를 들고 싶은 것을 참았다. 그녀는 미동 없이 고개를 숙인 자세로 우아하게 인사했다.

“미천한 소녀한테까지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또한 세자 저하를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형식적인 말에는 형식적인 말로 대처를……. 아니, 그나저나, 일이 왜 이렇게 된 거지?’

기껏해야 후궁들의 시녀로 들어갈 줄 알았는데?

이 일에 관해 설명하려면 일주일 전으로 돌아가야 했다.

* * *

이저드의 기사단 입단으로 모튼은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모튼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저드를 본 것은 14살 때였다. 아버지가 형제라며 소개해 준 9살짜리 꼬마.

그때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뜬금없이 나타난 어린아이가 동생이란다. 그것도 배다른 형제. 그때의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나마 다행히 미하일 공작이 이저드를 자기 아들이라고 두둔하며 펜베르크 성으로 데려갔다. 모튼은 사실 그때 엄청나게 안도했다.

그리고 9년이 지난 현재.

이저드가 펜베르크 성으로 돌아간 뒤로 다시는, 절대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설마, 전보다 훨씬 안 좋은 상황에서 이저드를 다시 궁 안에서 볼 거라고는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적어도 왕위에 오른 후에 만날 줄 알았는데.’

모튼은 이를 갈았다.

과거, 미하일은 절대 수도로 올라오지 않겠노라고 왕한테 약속하고 갔다. 그래서 모튼은 당연히 이저드도 올라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것이 굉장히 안일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최근에야 깨달았지만.

왕과 약속을 한 건 미하일 뿐이지, 이저드는 전혀 상관없었다. 더군다나 이저드는 합법적으로 기사단에 입단했다. 그 누구도 이저드를 말릴 명분이 없었다. 그랬기에 더 속이 탔다.

똑똑.

“레널드입니다.”

입단식 이후 어떻게 되고 있는지 모튼이 궁금해 하던 참에, 레널드가 왔다.

“들어와.”

달칵, 하고 문이 열리며 하얀 왕실 기사단 제복을 입은 레널드가 들어왔다.

“어떻게 되고 있지?”

레널드는 다짜고짜 그렇게 묻는 왕세자를 보며 당황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모튼이 무엇을 물을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하인트 경이 이런저런 시도를 해 보는 것 같은데, 하나도 안 통합니다. 망신을 주려고 시킨 일들도 전부 묵묵히 해내고, 훈련은 두말할 것도 없어서…….”

“그만.”

모튼은 지극히 객관적인 레널드의 말에 인상을 구겼다. 처리 중인 서류들을 전부 찢고 싶었지만, 깊게 숨을 내쉬며 진정했다.

“그, 헤이든 세이즈는? 들리는 소문으로는 버릇이 나빠 가문에서 버릇을 고치기 위해 이저드 옆에 붙여놓은 거라던데.”

“예. 저도 그렇게 듣긴 했는데……. 아예 작정하고 온 건지, 주변에서 어떤 도발을 해도 전부 무시한답니다. 훈련도 잘 받고, 트러블도 일으키지 않고 있습니다.”

레널드는 사실대로 보고하고 있으면서도 모튼의 눈치를 보았다. 저러다가 언제고 터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왜 하필 이런 골치 아픈 일이 생긴 건지.

“아무래도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본심을 철저히 숨기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그럴 거야. 그놈도 교육을 받았을 텐데 머리가 있으면 벌써 본심을 내보일 리가 없지.”

“예, 그렇습니다.”

그럼 어떻게 본심을 이끌어 내지? 그 추악한 꿍꿍이속을 어떻게 만인에게 까발릴 수 있단 말인가.

적어도 귀족들이 이저드를 헐뜯을 수 있게 만들어야 했다. 자신이 당하기 전에 이저드의 꼬투리를 먼저 잡아야 했다. 여론이 이저드한테 좋게 형성되면 안 됐다.

모튼은 불안했다.

벌써 궁내 분위기가 술렁이고 있었다. 입단한 지 이제 3일째인데 이저드는 눈에 띄는 외모와 정직한 태도, 출중한 능력으로 모두에게 주목받고 있었다. 고작 3일째인데!

“그놈,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배치해.”

모튼은 그렇게 말하곤 어디가 좋을지 골똘히 고민했지만 자꾸만 생각이 막혔다.

이저드는 어디에 둬도 너무 튀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얼굴이 그 모양(?)이라 구석에 떨궈 놔도 그 사이에서 유독 눈이 갈 놈이었다. 입에서 욕이 절로 나오려 했지만 주변에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많아 속에서 멈췄다.

‘망할! 이 교활한 놈!’

“저…… 저하.”

모튼이 한껏 인상을 쓰며 허공을 무섭게 째려보고 있자, 레널드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왜?”

“제 좁은 식견으로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모튼은 어디 들어나 보자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레널드는 자신을 실망시킨 적이 없었으니까.

“이저드를 저하의 곁에 두시는 건 어떻습니까?”

“뭐? 네가 미쳤……!”

미쳤냐고 소리 지르려던 모튼이 역시나 주변 시선을 신경 써서 참았다. 대신 애꿎은 펜 하나가 두 동강이 났다.

이저드라는 이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열이 받아 죽겠는데, 그런 놈을 곁에 두라니? 모튼은 이제 그만 레널드를 내쳐야 할 때인가 생각했다.

“후……. 계속해 봐.”

레널드는 모튼이 진정할 때까지 침착하게 기다렸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예. 이저드를 보는 게 괴로우신 것은 제가 누구보다 잘 압니다. 다만, 지금은 그를 내칠 때가 아니라 품어야 할 때입니다.”

“뭐?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를 저하의 그늘에 넣고 가리시는 쪽이 그를 멀리 두고 소문이 퍼지게 하는 쪽보다 나을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저드를 아무리 멀리 배치해도, 결국 이저드는 어디서든 또 빛을 낼 사람이었다. 이저드와 처음 마주한 후, 레널드는 약간의 위기감을 느꼈다. 모튼이 왜 그렇게 이저드를 경계했는지 이해가 갔다. 그한테서 뿜어져 나오는 위엄은 한두 해 만에 완성된 분위기가 아니었다.

때문에, 이저드한테서 뿜어져 나오는 위엄을 죽일 필요가 있었다. 기사단 안에서는 이저드가 가장 높은 신분이라 고고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왕세자의 앞에서는 아니었다.

이저드가 처음부터 본심을 보일 생각이 없다면, 아마 왕세자의 말에 고분고분 따를 것이다. 그러니 이저드를 옆에 둬서 이저드의 기를 먼저 눌러 놓는 편이 나았다.

“귀족들은 판이 어떻게 달라지느냐에 따라 행동을 취할 겁니다. 지금은 지켜보는 것뿐이겠죠.”

“그렇겠지. 내가 걱정하는 부분을 알면서도 그놈을 옆에 두라는 거야?”

“이저드를 옆에 두라고 한 것은, 첫째로는 저하의 평판을 위해서입니다. 이저드가 나타났다고 하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의연함을 보여야 합니다. 왕의 재목으로서의 관대함까지도요.”

레널드는 차분히 계속 이야기를 올렸다.

“둘째로는 귀족들과 이저드를 감시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저드가 저하의 호위 기사로 있으면 항시 저하와 함께일 텐데, 어느 누가 저하 곁에 있는 이저드한테 다가가 말을 걸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저드 또한 함부로 귀족들의 의견을 모은다거나 작당은 할 수 없을 겁니다.”

듣고 보니 전부 맞는 말이라 모튼은 점점 화를 누그러뜨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이저드한테 제약을 걸기 위해서입니다. 현재 왕궁에서 이저드는 꽤 높은 신분에 속합니다. 그런 이저드를 쥐고 흔들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 저하께서 그의 목줄을 잡고 계셔야 합니다. 그래야 후에, 이저드를 위험에 빠뜨리기도 쉬워지십니다.”

레널드의 말이 다 끝났을 때쯤에 모튼은 아까보다 훨씬 밝은 표정이었다. 꽤 그럴듯한 방법이었다.

어떻게 이저드를 쫓아내냐며 중간에서 갈팡질팡하는 하인트와는 다르게 레널드의 태도는 확실했다.

모튼은 레널드의 그런 점을 높이 샀다. 자기가 모시는 사람한테 충성하고, 그 사람을 위해 마음을 다해 충언하는 그 태도. 덕분에 모튼은 자신이 이성적이지 못하고 감정적으로만 이저드를 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치 싸움은 화를 내서 풀리는 문제가 아닌데도, 자신의 입지가 흔들릴 거라 생각하니 쉬이 진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레널드의 말을 듣고 나니 이저드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판단이 서기 시작했다.

“내가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정확해. 경이 또 나를 도왔군. 이 일 잊지 않지.”

“과찬이십니다.”

레널드는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사실 이 방법에는 위험 요소가 하나 있었다.

모튼의 곁에 뒀음에도 이저드가 빛날 경우였다. 그의 존재감을 죽이기 위해 모튼 옆에 둔 건데 그가 모튼보다 존재감이 뛰어나면 오히려 모튼과 더 비교됐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레널드가 이 방법을 제안한 건, 이 상황이 일시적일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저드는 새로운 인물이고 귀족들이 잘 모르는 인물이라 잠시 반짝이고 있는 것일 뿐, 모튼이 중심을 잡고 흔들리지 않으면 지지하는 귀족들도 흔들릴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왕의 폭정에서 살아남은 귀족들은 겁이 많았다. 그러니 이저드가 확실하게 후계자가 된다는 어떤 확신이 없다면 그들이 움직일 리가 없었다. 게다가 특별한 일 없이는 후계자가 뒤집힐 일은 없으니, 모튼만 중심을 잘 잡고 있으면 됐다.

레널드는 모튼을 왕의 재목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이 점이 그렇게 큰 위험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모튼 또한 어릴 적부터 세자 교육을 받은 자신이 이제 갓 성인이 된 이저드 하나 못 다룰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똑똑.

그렇게 모튼한테 만족스러운 상황을 이끌어내고 기분 좋게 웃고 있을 때, 누군가가 또 집무실 문을 두들겼다.

“저하, 왕비 전하께서 보내서 왔습니다.”

“들라.”

안으로 든 사람은 왕비의 수족과도 같은 시녀장이었다. 그녀는 서류 몇 장을 레널드한테 전했고, 레널드는 그 서류를 모튼한테 내밀었다.

“이게 뭐지?”

“왕비 전하께서 간추린 시녀 목록입니다. 대부분 배치를 끝냈지만 몇 분이 걸려서 따로 빼 뒀답니다.”

모튼은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걸 나한테 왜? 국왕 전하께서 최종 확인해야 할 사항 아닌가?”

“원래는 그러셔야 하는데……. 그게, 아직 외궁에 계시다고…….”

“아직도 외궁에? 벌써 일주일짼데?”

요 며칠, 일이 미친 듯이 밀려와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을 하고 있었던 모튼은 황당함에 말을 잃었다.

전에도 이런 적이 몇 번 있었지만, 일주일까지는 아니었다. 적어도 잠은 내궁 침실에 와서 잤는데. 요즘 아버지의 행보가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예, 그래서 세자 저하께 임시로라도 도장을 받아 오라고 절 보내셨습니다. 당장 다음 주부터 귀족가 자제들이 올라올 텐데, 저희도 준비할 시간이 빠듯해서요.”

시녀장의 말에 모튼은 두통이 도졌는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앞부분은 이번에 들어오는 시녀들의 신상이고 뒷부분은 시녀 배치표, 그리고 맨 뒷장은 왕비 전하께서 마음에 걸리는 이들이라 아직 배치하지 못한 귀족 영애들 명단이랍니다.”

모튼은 아까 홧김에 부러뜨린 펜을 옆으로 치워 두고 빠르게 서류를 읽어 나갔다. 한동안 팔랑거리는 종이 소리만이 집무실 안을 가득 채웠다.

빠르게 한 장 한 장 넘기던 그가 일순 속도를 늦춘 것은 맨 뒷장에서였다.

“벨제프?”

낯익은 가문이 보였기 때문이다.

“예? 부르셨습니까?”

레널드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아니, 경 말고. 경의 여동생.”

“……예? 제 동생이요?”

모튼은 레널드를 손짓으로 부른 뒤 종이를 가리켰다.

“아델라 벨제프.”

모튼이 소리 내서 아델라의 이름을 말하자, 레널드는 놀란 눈으로 서류를 빤히 보았다. 그는 동생의 이름을 또 읽고, 다시 읽고, 한 번 더 읽었다. 아무리 봐도 아델라 벨제프가 맞았다.

“왜 말하지 않았지?”

레널드는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난감했다.

벨제프 자작이 죽고, 작위를 물려받았을 때, 딱 한 번, 레널드는 다시 고향을 찾았다. 그런데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주인 없이 텅 빈 휑한 저택만이 그를 반겼을 뿐이다.

이리저리 수소문해서 저택에서 일하던 하녀들을 찾았지만, 그녀들도 아델라와 벨제프 자작 부인에 대한 걸 모른다고 했다. 그저 저택 고용인들을 전부 집으로 돌려보낸 후, 저택을 비우고 사라졌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그렇게 아무 흔적도 찾지 못하고 흐른 시간이 1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생뚱맞은 곳에서 아델라가 나타났다.

그동안 소식을 찾아보려고 해도 어디로 꼭꼭 숨었는지 나타나지 않던 아이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것도 왕궁에 혼자 겁도 없이. 이곳이 얼마나 살얼음판인지 안다면 그런 선택 못했을 것이다.

“레널드 경.”

모튼은 레널드가 말이 없자 조금 더 힘주어 그를 불렀다.

“아, 저, 그게…… 제가 자작가에 안 간 지 오래되어, 제 동생이 시녀에 지원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자작가 밖으로 나와 본 적이 없는 아이라 이렇게 말도 없이 수도에 왔을 거라고는 전혀……. 저의 불찰입니다.”

레널드는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하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혹, 아델라가 집을 나간 사실이 밝혀졌다가 정숙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괜히 귀족들 입방아에 오르내릴 게 뻔했다.

“하지만 세자 저하께 피해를 줄 아이는 아닙니다. 저하께서 신경이 쓰인다면 제가 잘 말해서 돌려보내겠습니다.”

레널드가 쩔쩔매며 말하자, 모튼은 가만히 서류를 보았다.

“경의 가족을 의심하는 건 아니야. 경이 나한테 충성을 맹세한 걸 아는데. 그저…….”

그저, 라고 뒷말을 끄는 모튼을 레널드는 유심히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모튼한테 아델라가 거슬렸나 싶어서.

“타이밍이 참, 신기하군.”

나타난 게 왜 하필 이때일까. 레널드도 예상하지 못한 시기에, 레널드한테 말도 없이, 궁이 혼란한 시기에.

안 그래도 신경이 곤두서 있어서 그런지 모튼은 아델라의 저의가 조금 궁금해졌다. 이저드와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경의 동생은 자작이 어떻게 죽었는지 아나?”

모튼은 어째서인지 아델라가 이 시기에 맞춰 들어온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택에만 콕 박혀 지냈던, 세상 물정 모르던 아이가 왕궁에 시녀로 들어올 무모한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저드가 기사단에 입단한다는 소식은 널리 퍼져 있었으니 말이다.

“아마…… 알 겁니다.”

저택의 고용인들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으니까.

레널드는 어림짐작해서 말했다.

“펜베르크 성에서 억울하게 사형당한 것도?”

딱히 억울할 리가 없을 텐데.

그렇다고 레널드는 ‘자작은 원래도 죄가 컸다.’ 라고 왕세자 앞에서 말할 수 없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모르겠지만, 사형당한 건 알 겁니다.”

“쯧쯧. 어린 나이에 충격이 컸겠어. 당시 나이가 15살? 한참 부모가 필요한 나이일 텐데.”

‘없느니만 못할 텐데요…….’

레널드가 기억하는 벨제프 자작은 그리 훌륭한 아버지가 아니었다. 그는 자작한테 한 번도 애정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분노를 느꼈던 적은 있어도.

“어, 어린 나이이긴 하죠.”

레널드는 일단 모튼이 무슨 말을 하든 긍정하기로 했다. 이것이 후에, 모튼이 크게 착각하는 계기가 될 줄도 모르고.

“상심도 컸겠어.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경은 그래도 담담히 견뎌낸 것 같지만, 경의 동생은 그런 이성적인 생각을 하기에는 너무 어렸지 않나?”

“그……렇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15살이었으니까요.”

“기댈 사람도 없었고.”

레널드는 일순 결 좋은 흑발을 지녔던 어떤 여자가 떠올랐지만, 얼른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그런 여자한테 아델라가 기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예. 그럴 겁니다.”

그는 자신 있게 말했지만, 모튼의 말에 대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찝찝했다. 기댈 사람이 없었던 건 맞지만, 과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상심이 컸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레널드만 하더라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언젠가 그렇게 될 줄 알았다고 생각했다. 워낙 벌인 일이 많아야지. 레널드는 그에게 일말의 동정심도 느끼지 않았다.

당장 레널드가 이런데, 아델라라고 다를까?

혹시, 정말, 만약에 레널드가 가출한 뒤에 아버지가 달라졌다면 또 모르겠다. 레널드는 자신이 나간 뒤에 아델라가 어떻게 지냈는지는 잘 몰랐으니까.

“내 가족이, 그것도 기댈 사람이라고는 아버지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런 사람이 한순간 사라졌다면, 경은 어떻겠나?”

그 가족한테 애정을 느껴본 적이 없어 레널드는 잠시 고민했다.

“억, 울하게 죽은 거면…… 슬프고, 화나고, 허탈하겠죠?”

레널드는 아까 모튼이 이야기한 말을 예시로 들어 그럴싸하게 생각해서 대답했다. 아마, 그러지 않을까? 레널드는 전혀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었지만.

“당연히 그런 마음이 들겠지.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요? 음…… 왜 그렇게 됐는지 알고 싶지 않을까요?”

레널드의 말에 모튼이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후에는?”

“알게 된 후요? 그야 뭔가, 항의……? 납득이 가지 않아 따질 것 같습니다.”

“혹은, 복수일 수도 있지.”

모튼의 추론을 들으면서 레널드는 그럴 리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델라는 그런 성격이 아닙니다. 소심하다고 할까요, 겁이 많다고 할까요. 여리고 약한 아입니다. 그렇게 무모한 일을 벌일 리는…….”

“무모한 일은 이미 벌어졌지. 왕궁에 들어온 것. 어쨌든, 경은 자작이 죽은 뒤에 아이가 어찌 살았는지는 모르잖아? 너무 이상해서 그렇네. 그런 성격의 아이가 위험이 판치는 왕궁 시녀로 들어 왔다는 것이. 그리고 그 타이밍도 기가 막히지.”

저 변방에 살던, 세상 물정도 모르고 밖으로 나와 본 적도 없는 소심하고 겁이 많은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오고 바뀐 계기가 분명 있을 거였다.

“제 동생은 복수를 생각할 정도로 독하지가 못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큰 충격을 받으면 변할 수 있어. 거기에 가족이 죽었는데 어떻게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나?”

‘성격이 변할 정도로 아버지를 위했다고? 아델라가? 그럴 리가 없는데…….’

그의 기억 속에서의 아델라는 오히려 아버지를 무서워했다. 피하고 도망가고 늘 울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아버지라는 건가? 하긴, 잔정이 많던 아이였긴 한데.’

생판 처음 보는 새어머니한테도 정을 주던 아이였다.

레널드는 긴가민가한 표정을 했다. 아델라와 떨어져 지낸 지 너무 오래되어 아델라가 어떻게 변해 있을지 그도 몰랐다.

“일단 내가 경의 동생을 만나보지. 세자궁으로 배치해서.”

“……예? 예에?!”

잠시 멍하니 넋을 놓던 레널드가 놀라서 물었다.

“세자궁에는 시녀를 안 두지 않습니까?”

“가끔은 필요한 일도 있고. 이유야 만들면 돼. 경이 날 도왔으니 그 공을 높게 사서 특별히 경의 동생을 들이는 걸로.”

“아, 아니, 가문의 영광이오나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미혼의 여성은 안 들이시잖습니까.”

세자궁에 출입이 가능한 여성은 세자빈과 어머니인 왕비, 그리고 시녀장이 다였다. 왕이 문란하다는 소문 때문인지, 왕세자인 모튼은 세자빈 이외의 여성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특히 미혼은 더욱.

“그러니까 특별히. 경의 동생이라. 귀족의 예법도 잘 모를 텐데, 잘못 암투에 휘말려 봉변이라도 당하면 어째? 내가 내 사람의 가족들을 챙기지 않으면 누가 챙기나. 그리고 혹시라도 진짜 복수를 위해 들어왔으면 경의 동생은 위험해.”

사실 속셈은 달리 있었지만.

모튼은 짐짓 레널드를 위하는 척 그렇게 포장했다.

사실 아델라가 정말 복수를 위해 무모하게 궁에 들어온 거라면 언제고 써먹을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옆에 두려는 거였다. 거기에 걱정할 것도 없이 레널드가 자신의 편이니, 그의 여동생인 아델라도 모튼의 명을 거부할 수 없을 터였다.

“특혜를 주시는 건 황송합니다. 다만, 제 동생은 저하를 모시기에는 많이 부족한 아입니다. 정말 왕궁에 대해 잘 모르는…….”

“걱정 마. 고려하고 뽑는 거니까. 내가 아니면 그 실수를 누가 받아 주겠나? 경이 너무 걱정하는 것 같으니, 아델라 양한테만 시선이 가지 않게 몇 명 더 뽑지. 됐나?”

‘그, 그냥 자르시면 안 되나? 그렇게 인재가 없나?’

후궁의 시녀들이 대거 빠져서 급하게 모집한 거라고 듣긴 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레널드는 암담한 심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델라가 왕궁에 들어와 암투를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는 아직 자기 한 몸 지키기도 힘들었다.

‘얘는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해서…….’

아델라를 오랜만에 보는 건 약간 기뻤지만, 그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 * *

그렇게, 지금의 상황에 이른 것이다.

자세한 상황을 모르는 아델라는 이따가 레널드를 붙잡고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 건지.’

아델라는 모튼의 장단에 맞춰 고개를 숙인 채로 미소 지었다.

“언제까지 숙이고 있을 거지? 이제 허리 펴도 돼.”

“아, 예.”

레널드가 자신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한지 몰랐지만, 어리숙한 모습을 보이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아델라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난감하게 웃으며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든 아델라의 앞에는 말로만 들었던 왕세자가 서 있었다. 단정한 흑발에 푸른 눈을 지닌, 이복형제라고 소문난 것 치고는 이저드와는 전혀 다른 외모의 남성이었다.

도대체 이 외모와 그 외모 사이에서 어떻게 형제라는 소문이? 이복이라서? 이해할 수 없었다.

아델라와 함께 온 시녀들 사이에서는 약간의 감탄이 터져 나왔지만, 이저드의 얼굴만 보다 보니까 눈이 상향평준화가 된 건지 아델라의 눈에 왕세자는 그냥 평범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그의 옆에 호위 기사로 서 있는 이는 아델라와는 숙적과도 다름없는 오라버니, 레널드 벨제프였다. 그 또한 어디 가서 빠지는 외모는 아니었지만, 아델라의 눈에는 역시 그냥 오라버니였다.

“이쪽은 내 호위 기사인 레널드 벨제프 경. 그리고 그대들이 자주 볼 사람이 또 한 명 있는데, 곧 올 거네. 그동안, 음……. 그래. 일에 대한 설명을.”

모튼이 고갯짓을 하자, 문 앞에 서 있던 시종이 시녀들을 다시 안내했다.

아델라는 그를 따라 다른 방으로 걸음을 옮기며 힐끔, 레널드를 쳐다보았다. 레널드는 차마 아델라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파격적인 특혜이긴 했다. 한낱 자작가의 아가씨가 왕세자의 시녀라니. 그런데 이거 너무 주목받지 않나.

‘레널드 동생이라고 소문날 걸 예상한 후부터 어느 정도 시선은 각오했는데, 너무 많이 눈에 띄게 된 것 같은데.’

이게 통로를 찾는 데 방해가 될지 안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분명 모튼을 따라다니면 본궁의 출입이 잦긴 할 것이다. 왕이 국정을 돌보지 않아서 왕세자인 모튼이 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본궁 출입이 자유로울 것을 생각하면 지금 상황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 정도로 주목받을 생각은 아니어서 난감했다. 물론, 표정은 주변을 신기해하는 어리숙한 아이처럼 꾸몄지만.

“다른 궁과는 다르게 크게 할 일이 많지 않을 겁니다. 대신, 저하께서는 일이 많으셔서 새벽부터 잠에서 깨니 다른 궁보다는 일찍 나오셔야 합니다. 돌아가시면서 조금 더 일찍 오실 분을 정하셔도 되고 고정으로 하셔도 됩니다. 이곳이 대기하실 때 쓰일 휴식 공간입니다.”

아까 세자의 집무실도 큼지막하고 화려하더니, 시종이 안내해준 공간도 매우 넓고 화려했다. 뭐라고 할까? 공작저와 비교하자면, 규모부터 확실히 달랐다. 공작저도 넓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왕궁에 비하면 정말 검소하게 꾸며진 거였다.

아델라는 시종의 안내와 설명을 들으며 주변을 멍하니 살폈다.

“사파이어 궁으로 불린다는 이유가 말 그대로의 뜻이었나 봐요.”

아델라의 곁에서 아델라와 똑같이 커다란 눈을 키우며 주변을 살피던 스웰라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궁이 그렇게 불려요? 어쩐지 푸른 보석이 많더라고요.”

푸른 사파이어와 함께 궁 전제가 푸른 색감으로 꾸며져 있는 세자궁이 사파이어 궁으로 불린다고 듣긴 했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푸르겠거니 했는데, 정말 모든 장식품에 푸른 보석이 안 박힌 곳이 없었다.

어떻게 벽지에도 보석을 박아 넣을 생각을 했을까. 작은 보석들이 자잘하게 많이 박혀 있어, 빛을 받으면 벽이 반짝반짝 빛날 것 같았다.

‘근데, 이분,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됐는데 친화력이 좋으시네.’

스웰라는 다른 두 아가씨들과는 다르게 아델라한테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고 웃었다. 아델라가 특혜를 받은 게 확실한 상황이라 스웰라를 제외한 나머지 두 사람은 아델라 쪽으로는 시선도 돌리지 않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녀가 세자궁에 배정받기에는 신분이 많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사실은 아델라로 인해 다른 이들도 세자궁으로 배정받을 기회가 주어진 건데 말이다.

“이외에도 왕궁 안에 주요 궁들은 전부 보석의 이름으로 불려요. 저희 사이에서만.”

“그럼 평소에는 사파이어 궁, 이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겠네요?”

“그렇죠. 암암리에 퍼진 사실이라.”

그렇게 대화하며 계속 걸음을 옮기는데 아델라가 아주 잠시 움찔했다. 다행히 그런 아델라의 행동에서 이상함을 느낀 사람은 없었다. 시녀들은 서로 이야기하기 바빴고, 시종은 설명하기 바빴다.

‘어라? 이 느낌…….’

아델라가 무시하려 해도 할 수 없는 익숙한 기척. 방금 느껴진 기척은 아델라가 아주 잘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

‘이상하다? 잠시 들르신 건가?’

잠시 들렸다고 하기에는 머무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아까 모튼이 자주 볼 거라는 사람이…… 설마, 아니겠지?’

아델라가 조용히 고민하는 사이, 다른 이들과 대화를 하던 스웰라가 다시금 아델라한테 말을 걸어 왔다.

“그나저나 아델라 님은 어떻게 그렇게 표정을 잘 유지하실 수 있으세요? 전 부끄럽게도 두 분을 뵙고 얼굴이 조금 붉어지더라고요.”

“그러셨어요? 전 스웰라 님도 너무 잘 유지하시기에 괜찮으신 줄 알았어요. 전, 아무래도 한쪽이 제 오라버니라……. 딱히 아무 생각이 안 들었습니다. 좀 당황스럽긴 했지만.”

애당초 아델라는 그들이 멋지다거나 잘생겼다거나 아름답다거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특히 레널드 쪽은 더욱이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어디 가서 사람 구실이나 제대로 하려나, 싶었지.

게다가 왕세자와 레널드가 후에 벌이는 일을 아는 사람으로서 아델라는 그들이 그리 곱게 보이지 않았다.

“어머, 그렇겠네요. 아델라 님은 레널드 경을 자주 봐서 무던한 거군요. 제가 그렇게 보였다면 다행이네요. 혹, 무례를 저질렀을까 봐 바싹 긴장했답니다?”

스웰라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환하게 웃으니 그녀의 귀여운 외모가 돋보였다.

아델라는 그녀의 웃음에 보답하듯 살며시 마주 웃었다.

‘처음에는 이런 인상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스웰라한테는 다른 이들과는 다른 어떤 여유가 느껴졌다.

분명 그녀를 보고 느낀 첫인상은 부끄러움을 많이 타지만 용기 있는 사람,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시녀들 사이에서 중심이 되어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아델라와도 능숙하게 대화를 이어갔고, 다른 이들과도 무난하게 대화했다.

힐튼 백작가에서 아이를 단단히 준비시킨 것 같았다. 혹은, 이런 상황을 여러 번 겪어 봤다던가. 그것도 아니면, 순전히 표정을 감추고 노력 중이라던가.

“―그리고 이곳이, 저하의 침실입니다. 아침 일찍 저하를 깨울 때 빼고는 들어오실 일 없으니 알아만 두십쇼.”

시녀들끼리 대화를 나누는 사이, 각 방의 안내가 끝났다. 시종은 신입 시녀들을 데리고 다시 집무실로 향했고 그 사이 아델라는 표정을 갈무리했다.

아델라의 예상이 맞는다면, 궁에 들어온 첫날 지금, 이 자리에서 예상치도 못한 이와 마주하게 될 예정이었다.

‘이렇게 빨리 뵙게 될 줄은…….’

세자의 집무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문 너머로 모튼과 레널드, 그리고, 아델라가 사랑해 마지않는 연인이 서 있었다.

하얀 왕실 기사단 제복을 빼입은 그는 너무나도 빛이 났다. 다시 반할 정도로. 뭘 입혀 놔도 안 어울릴 리가 없는 외모기는 했지만, 하얀 제복을 입은 그는 천상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보였다. 그의 뒤로 있을 리 없는 후광이 비치는 것도 같았다.

‘이저드.’

일주일 넘게 못 봤던 이저드는 다행히도 멀쩡해 보였다. 항상 빛나던 그 외모도, 어디 하나 색이 바래지 않았다.

아주 찰나의 순간, 둘의 시선이 부딪혔지만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정말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서 아델라도 꿈인 줄 알았다. 눈 깜박하니 이저드의 시선이 비켜나가 있었다.

“헉.”

아델라가 이저드를 발견하고 잠시 뒤, 다른 아가씨들도 그를 발견했는지 하나같이 전부 숨을 들이켰다. 체통을 지킬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녀들은 저마다 입을 벌렸다.

“들어가시죠.”

맨 뒤에 있던 아델라가 그녀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애써 웃으며 재촉했다. 제일 먼저 정신이 든 것은 스웰라였다. 그녀는 레널드의 눈치를 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레널드는 스웰라 존재 자체를 모르는 건지, 그녀에게 터럭만큼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아델라한테 붙어 있었다.

‘왜 저렇게 쳐다봐? 기분 나쁘게.’

아델라는 집요한 두 시선을 힐끔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레널드와 모튼의 시선이 아델라한테서 떨어지지 않았다.

꼭, 사람을 유심히 관찰하는 것처럼.

“세자 저하를 뵙습니다.”

“그래. 들어 와.”

아델라는 찝찝함을 지우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표정은 아까와 같았다. 적당한 미소와 적당한 어리숙함으로 무장한.

‘이저드와 내 사이를 알아서 저렇게 살피는 건 아닐 텐데? 그럼 뭐지? 왜 저래?’

이저드와 아델라가 시선을 마주한 찰나에, 레널드와 모튼의 눈빛이 더 집요하게 변했다. 아델라가 무슨 반응을 하길 기대하는 것처럼.

“아. 이쪽 소개가 늦었군. 앞으로 내 곁에서 레널드 경과 함께 나를 종일 호위할 이저드 제스트윈 경이야. 다들 알 거라 생각하네.”

‘이저드를 멀리 보낼 줄 알았더니. 누군가 머리를 좀 썼네.’

아델라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이조차도 케스너 후작 부인이 언질 줬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말한 왕세자가 선택할 여러 상황 중에서는 ‘이저드를 곁에 둔다’는 선택지도 있었다.

‘오히려 잘됐네. 이쪽으로 완전히 정신이 쏠려 있다는 증거니까.’

이저드가 모튼의 시선을 붙잡고 있을수록 다른 이들이 통로를 찾기 쉬워진다. 특히 정체가 전혀 드러나지 않은 린다에게 이 상황은 매우 유리했다.

“인사하지. 여기는 레널드 경의 동생, 아델라 벨제프.”

모튼은 부러 나서서 시녀들 각자 한 명 한 명에게 이저드와 인사를 나누게 했다. 그리고 그 잠시간,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또 아델라를 관찰했다.

레널드와 모튼이 그러거나 말거나 아델라는 그저 마냥 신기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고 역시나 이저드는 고개만 살짝 숙일 뿐 무표정했다. 자로 잰 듯한 깔끔함이었다.

그는 인사 이외에는 어떤 행동도, 말도 일절 하지 않았다. 아델라를 포함한 모두한테 그랬다.

‘왠지 진짜로 처음 만난 사이 같네. 아니지, 처음 만났을 때는 무표정하긴 했지만, 차가우신 건 아니었는데. 근데 그래도 멋있어……!’

일주일 만에 본 것도 기쁘고, 이저드의 새로운 얼굴을 본 것도 좋았다. 그래서 계속 쳐다보고 싶었지만 아델라는 꾹 참았다.

‘정신 차리자! 호랑이 소굴에서 방심은 금물!’

아델라는 앞으로 이저드와 가까이 지내며 과연 이 마음을 참을 수 있을지 약간 걱정됐다. 사랑하는 이를 앞에 두고 그 감정을 숨겨야 한다는 건, 고문이 아닐까?

“―그럼, 대충 인사와 안내는 다 끝냈나?”

아델라를 살펴보던 모튼이 조금 늦게 입을 열었다. 그는 그렇게 말하는 와중에도 아델라를 살폈다.

“예.”

시녀들을 안내했던 시종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다행히도 모튼은 시선만큼 집요하게 시녀들을 잡고 있지는 않았다. 그도 바쁜 몸이라.

“오늘 막 도착해서 피곤할 테니, 오늘 오후는 궁에 관한 간단한 안내만 받고 물러가게. 일은 내일부터 시작하지.”

“예.”

그의 말에 시녀들은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아델라는 세자의 집무실을 나오기 전까지 이저드 쪽으로는 시선도 두지 않았지만, 다른 시녀들은 나올 때까지 힐끔힐끔 안을 엿봤다.

* * *

정말 궁에 관한 전반적인 정보만 알려준 시종은 오후가 되어 시녀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덕분에 아델라는 오후를 포함 저녁까지 시간이 남았다.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그녀는 시녀들이 묵는 숙소로 향하려 걸음을 옮겼다.

“아델라!”

레널드가 불러 세우기 전까지 아델라는 숙소에서 푹 쉬고 다음 계획을 고민할 생각이었다.

‘인생에 도움이 안 돼.’

아델라는 아까까지 웃던 표정을 싹 지우고 못마땅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아델…….”

급하게 아델라를 향해 뛰어오던 레널드가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가까이에서 본 아델라의 표정이 매우, 정말 많이 안 좋았기 때문이다.

“용건만 말해.”

아델라는 레널드와 대화를 이어가면 피곤한 일만 생긴다는 것을 전생에 겪어 봐서 알았다. 레널드는 전혀 몰랐겠지만. 레널드는 갑자기 변한 온도 차에 당황스럽게 그녀를 보았다.

“아니, 그…….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레널드는 아델라한테 잘못한 것이 있어 삐질삐질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원래는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그가 상상한 상황과는 많이 달랐다.

그저 남매가 몇 년 만에 만난 회포를 풀고, 아델라가 궁에 들어온 진짜 이유를 확인할 생각으로 그녀를 잡은 건데, 아델라의 표정을 보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당장에 면상에 대고 욕만 안 했다뿐이지, 표정이 가히 좋지 못했다.

“내가 이 말을 또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게 왜 궁금해? 내 안부에 관심도 없던 사람이.”

“아, 아니. 난, 그, 여기서 자리 잡아서 널 데리러 가려고…….”

“변명은 됐고. 뭐 하는 거야?”

아델라가 아니꼬운 표정으로 물었다.

“뭐? 뭐가?”

“왜 그런, 이상하고 괴상한 눈으로 날 봐?”

아델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까 레널드와 모튼이 자신을 보던 것을 흉내 냈다. 레널드는 뜨끔해져서 아델라의 시선을 피했다.

“그냥, 신기해서 그렇지. 네가 너무 잘 자랐고, 많이 변했고, 또……. 말도 잘 하고.”

“…….”

변명도 조금 성의 있게 해 봐라.

“오라버니.”

“으응?”

그녀가 웬일로 예쁘게 웃었다. 너무 오랜만에 보는 동생의 미소에 레널드는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으로 들린 차가운 목소리에, 그는 그녀가 예쁘게 웃은 게 아니고 무섭게 웃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으로 나한테 아는 척하지 마. 오라버니가 궁에서 유명한 줄 알았으면 여기 안 왔어. 그러니까, 나 방해하지 말고 여태 했던 것처럼 네 갈 길 가.”

이를 악물며 말하는 아델라의 목소리에는 중간중간 화가 배어 있었다. 이건 누가 들어도 명백한 분노를 표하고 있었다. 아델라의 선연한 분노에 레널드는 잠시 당황해서 말을 잃었다.

“……어? 어어? 잠시, 아델라! 야!”

그는 뒤늦게 돌아서는 아델라를 다시 붙잡았다. 아델라의 얼굴에 짜증이 피어올랐다. 레널드가 아차, 하며 아직도 작고 여린 아델라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난 그게 아니고, 내 말 좀 들어 봐.”

“싫어. 내가 왜?”

“너 지금 위험해. 너 내 말 안 들으면 이 궁에서 큰일 나. 아무것도 모르는 네가 뭘 어떻게 안다고 여기서 살아남을 생각을 해?”

“네 곁에 있어서 또 버려지는 것보다야 낫겠지.”

아델라는 무덤덤하게 레널드의 양심을 찔렀다. 그녀는 정말 하나도 레널드한테 기대하는 게 없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아델라의 불신어린 눈빛은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

“아델라. 감정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응? 나 진짜 너 도우려고 그래. 여기서 살아남아야지.”

“뭘 도와? 오라버니가 도울 건 없는데. 그냥 조용히 있어 주면 돼. 난 돈을 벌면 되고.”

“돈?”

그가 제대로 들은 건가 싶어 다시 물었다.

“응, 돈. 나 돈 때문에 여기 왔거든.”

“네가 무슨 돈이 필요하다고?”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레널드는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필요하지. 어머니랑 둘이 살 자금. 이제 떨어져 가서.”

“뭐……?”

레널드는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어 인상을 구기고 다시 물었다.

“어머니랑 나. 평생 함께할 돈이 필요하다고. 더불어 노후도 보장되면 최고고.”

아델라가 아무렇지 않게 릴리아를 어머니라고 칭하자, 그는 머리를 강하게 얻어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뭐 때문에 가문과 가족을 버리고 나왔는데……?

“그……. 그 여자를 위해서 네가? 네가 지금 내 앞에서 그 여자를 어머니라고 칭하는 거야?”

“그 여자, 그 여자 하지 마. 내 어머니야.”

“너 지금 뭐라는 거…….”

“남의 어머니한테 그딴 무례한 언사 하지 마.”

아델라가 딱 잘라 말했다. 그러자 레널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야! 아델라! 너 미쳤어?”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에 아델라는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떴다.

“그 여자, 아버지한테 팔려 와서 나한테 못 비비니까 어린 널 잡고 안 놔 줬던 가증스러운 여자야! 내가 널 두고 갈 수밖에 없게 한 여자라고!”

그의 말에 오늘 이저드의 얼굴을 봐서 한껏 충전되었던 아델라의 마음이 저 밑바닥으로 패대기쳐지는 것 같았다.

“어디서 구르다 온 여자인지도 모르면서, 뭐가 어째? 네 가족은 나 하나뿐이야! 자작 가문에서 자작 부인은 우리 어머니뿐이었고!”

레널드가 씩씩거리며 말하는 동안 아델라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말 다 했어?”

그의 말이 끝나고, 아델라의 표정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평온했다.

“뭐?”

레널드는 아무 감정 없는 아델라의 표정을 보고 움찔거리며 되물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델라의 평온한 표정이 오히려 무서워 보였다. 이상하게 주변 온도도 뚝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말 다 했냐고.”

아델라가 높낮이 없는 말투로 물었다.

“그, 그래.”

레널드는 눈을 부릅뜨고 대답했다. 왜 자기보다 한참 작고 어린아이의 기에 눌리는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그래?”

그렇게 되물으며 아델라는 천천히 드레스 앞자락을 양손으로 쥐더니 살짝 들어 올렸다. 레널드는 그 모습을 의아한 표정으로 보고만 있었다.

바로 다음 순간, 둔탁한 타격음이 주변에 퍼졌다.

퍽!

“악!”

그녀가 드레스 앞자락을 쥔 것은 장애물 없이 레널드의 정강이를 잘 차기 위해서였다. 레널드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정강이를 감싸는 것을 보니까 아주 잘 찬 듯싶었다.

“한 대로 끝난 걸 다행으로 알아. 전에 나 대신 칼 맞은 거 때문에 조절한 거니까.”

전생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레널드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뭐……. 뭐?”

레널드는 어린 동생이 자기를 팼다는 게 믿기지 않아 얼이 나간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왜 맞는지도 몰랐다.

“잘 들어.”

얼빠진 레널드의 표정을 보며 아델라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방금 넌 그 입을 놀려서 한 여자를 죽일 뻔했어. 그런 말 잘못 퍼져서 죽어간 사람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줄 알아?”

“그게 무슨…… 내가 뭘 했다고…….”

그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그래서 아델라가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눈만 깜박였다.

“말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건 오라버니도 잘 알 텐데. 그 인간이 어머니한테 한 짓도 똑같잖아. 뚫린 입이라고 나불거렸다가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갔지.”

이건 친어머니의 이야기였다. 벨제프 자작이 자신의 아내가 흑마법사라고 떠들고 다니는 바람에 생긴 참극.

당황스러운 표정을 한 레널드가 인상을 구겼다.

“도대체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여기서 어머니 이야기가 왜 나와?”

그는 여전히 아델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방금, 네가, 그 짓을 할 뻔했다고. 아무 죄 없는 사람 하나를 짓밟는 짓.”

“뭐? 내가 언제? 내가 지금 아버지와 같은 짓을 벌였다고? 난 그저 너한테 사실을 전하려고……!”

그전까지는 멍하니 되묻기만 하던 레널드는 죽은 벨제프 자작 이야기가 나오자 울컥 화를 냈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바로 아버지였다. 그런데 그런 사람과 같다니? 그는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심한 욕을 들은 사람처럼 인상을 구겼다.

레널드가 기분이 나쁘거나 말거나 아델라는 바로 그의 말을 싹 끊어 버렸다. 더 들을 이유가 없었다.

“그만해. 오라버니는 새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고 나한테 사실이라고 말하는 거야? 팔려온 게 확실해? 아버지의 말만 믿은 게 아니고?”

아델라가 쏘아붙이며 묻자, 울컥해서 화를 내던 레널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역시. 누군지도 모르면서 막말한 거 맞네.”

“…….”

그는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델라한테는 어림도 없었다. 어디서 억울함을 자기한테 표한단 말인가. 덜 때린 걸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아델라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름, 릴리아. 크로헬 지방 작은 마을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나서 아주 활발하고 생기 넘쳤던 평범한 아이였어. 아주 예쁘고 착한 소녀였대. 마을 사람들 전부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그러더라.”

아델라가 따로 덧붙이지 않아도, 레널드는 그녀가 말하는 릴리아라는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아델라의 새어머니.

릴리아를 만난 후, 그는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들었다. 아버지가 새어머니라고만 소개해서 몰랐다. 아니, 애당초 관심도 없었다. 릴리아는 레널드한테 그저 불순물 같은 거였으니까.

“그냥 평범하게 부모님을 돕고, 형제들과 동네 친구들과 뛰놀던 아이가 왜 우리 집까지 오게 됐는지. 그런 생각 안 해 봤지?”

아델라가 무표정하게 묻자, 레널드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입을 달싹이기를 반복하던 그는 결국 대답하기를 포기했다.

그런 그의 태도에 아델라는 화가 나지도, 그렇다고 실망감이 들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기대한 게 없었으니까.

“오라버니가 집을 나간 거 이해해. 하루하루가 지옥일 것을 알면서 그 집에 날 두고 간 것도 이해할게.”

“아델라, 그때는!”

“내 말 안 끝났어.”

단호한 아델라의 목소리에 레널드는 입을 다물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아델라한테는 전부 변명으로만 들릴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새어머니를 깎아내리고 변명거리로 삼는 짓은 하지 마. 그렇게 원망할 사람이 필요하면 아버지를 원망해. 아무 죄 없는 사람 잡지 말고.”

이 모든 일의 주범은 죽은 벨제프 자작이었다. 레널드와 아델라 사이의 좁혀지지 않는 이 거리도, 레널드와 아델라가 가족을 뒤로하고 집을 떠나게 된 계기도.

“자작한테 잡혀 와 힘든 와중에도 최선을 다해 날 키워 주신 분이야. 앞으로 오라버니 입에서 그 여자, 그 여자 거리는 거,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함부로 말하지 마.”

“난 그런 게 아니고…….”

“나한테 변명하지 마. 안 해도 되니까 그냥 이대로 선만 지키고 살자. 오라버니는 오라버니 일 하고, 난 내 갈 길 가고.”

전생을 생각해 보면 레널드랑 엮여서 좋을 게 없었다. 언제 또 덜컥 스파이를 하라고 자신을 협박할지 몰랐다.

왠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아까도 무슨 속셈으로 아델라를 유심히 관찰한 건지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레널드와 궁에서 마주치는 건 각오했다. 그래도 일하는 곳이 전혀 달라 엮일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인가. 떼려야 뗄 수 없는 악연. 가족의 연이 뭐가 이리 질긴지.

“아, 아델라! 잠깐, 내 말 좀!”

아델라가 레널드를 흘기고 휙, 몸을 돌리자, 그가 그녀를 잡으려 외쳤다.

“아, 그리고. 혹시라도 날 이용해서 뭐 할 생각이면, 나랑 척질 각오해.”

그와 더 엮이기 전에 아델라는 먼저 선을 그었다. 이러면 나중에 할 말 없겠지. 자신은 분명 경고했다. 레널드가 혹 그 경고를 깬다면, 그 뒤에는 거리낌 없이 레널드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멈칫하는 레널드를 다시 흘겨본 아델라는 빠른 걸음으로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 * *

아델라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보냈던 레널드가 잔뜩 풀이 죽어 돌아왔다. 모튼은 문 앞에 대기하던 이저드를 힐끔 보다가 주변 눈치를 살폈다.

이저드를 곁에 둔 것까지는 좋았지만, 레널드와 이야기를 나눌 때 조심해야 했다. 그게 매우 답답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저드가 눈에 안 보이는 게 더 불안했으니까.

“이저드 경.”

“예.”

이저드가 짧게 대답하고 모튼을 쳐다보았다. 그 사이 모튼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저드를 잠시 떨어뜨릴 방법을 생각해 내기 위해서였다.

“하인트 경을 볼 일이 생겼는데, 경이 가서 불러 오도록.”

“예, 알겠습니다.”

이저드는 별다른 의심 없이 세자의 집무실에서 나갔다. 그래도 혹시 몰라 이저드가 나가고 한참이 지나서야 모튼은 입을 열었다.

“동생을 보고 온 거 아닌가?”

“예. 보고 오는 길입니다.”

웬만하면 어떤 감정도 티를 잘 내지 않는 레널드가 기가 확 죽어 있었다. 그 모습이 모튼은 조금 의외였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러지? 오랜만에 봐서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닌가?”

모튼의 물음에 레널드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기쁜 건 저뿐이었나 봅니다. 아델라는…….”

아까 맞은 정강이가 시큰거리는 것 같았다.

“아델라 양은, 뭐?”

“반가워하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왜?”

모튼 역시 아델라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면 당연히 기쁘지 않나?

“그게…… 제가 집을 나온 게 자길 버리고 간 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미운 것 같습니다.”

레널드는 아델라가 자신을 이렇게 밀어내고 싫어할 이유가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잘못 짚어도 단단히 잘못 짚었다.

아델라한테는 이제 그런 감정 따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델라는 그저 레널드의 생각과 행동, 함부로 내뱉는 말들까지, 그 모든 게 싫었다. 그냥 레널드 자체가 싫었다. 아델라를 이용하려 생각하는 그 머릿속까지.

그나마 이번 생에 레널드를 아주 조금 봐줄 수 있었던 것은 전생에 그가 아델라를 위해 벤슨의 검을 막은 것, 그거 하나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걸 지금의 레널드가 알 리 없었기에, 그저 아델라가 자기를 미워하는구나, 라고만 생각했다. 사실은 아델라에게는 그런 감정 자체도 남아 있지 않았는데 말이다.

“아이는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겠군. 오해할 수 있겠어. 어머니가 죽고 그나마 기댈만한 사람이 경밖에 없었으니.”

모튼의 말에 레널드는 더욱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유일하게 남은 혈연과의 관계가 걷잡을 수 없이 틀어진 것 같았다.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오해는 풀면 되지. 아직 어려서 경을 이해 못 할 수 있어. 차차 풀면 되지 않겠나? 시간은 많아.”

모튼은 아까보다 더 기가 죽은 레널드를 위로했다. 그가 이렇게 흔들리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이러다 그가 이저드 앞에서 실수라도 하면 곤란했다. 레널드가 기운을 차리도록 모튼은 그를 나름대로 배려했다.

“감사합니다. 저도 아델라가 지금은 저를 이해 못 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동생이 너무 강경해서 잠시 감정을 못 추슬렀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괜찮아. 그런데…….”

레널드가 기운을 살짝 차린 걸 보자, 모튼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아델라 양이 궁에 온 이유가 따로 있나? 경을 만나러 온 게 아니면, 뭔가?”

“아, 돈 벌러 왔다고 했습니다.”

“……돈?”

모튼은 아까 레널드가 아델라 앞에서 보였던 표정과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당황한 표정이었다.

“저한테는 그 외에는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제 갈 길 가잡니다. 자길 이용할 생각도 하지 말라고 하고……. 전 말도 못 꺼냈습니다.”

“흐음.”

말만 들어도 아델라의 마음이 단단히 토라진(?) 것이 느껴졌다. 아델라의 진짜 목적은 자신이 따로 알아봐야 하나 모튼은 고민했다.

“이저드한테 복수를 하겠다거나, 하는 말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저드를 어떻게 하려면 저한테 도움을 구해야 할 텐데……. 오히려 신경 쓰지 말라고 했고요.”

“경을 믿지 못해 그럴 수도 있지. 한 번 버림을 받았으니까.”

고민에 빠진 모튼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에 레널드는 양심이 찔렸지만, 모튼 앞에서 티는 못 내고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경이 알아보는 건 아직 역부족이겠어. 그럼 일단, 아델라 양을 지켜보면서 의중을 파악해 보지.”

모튼은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델라가 진짜 이저드한테 안 좋은 감정을 가졌다면 언제고 새어 나올 것이다. 그때를 노려 자신이 도와주겠다며 아델라를 회유하면 되겠지.

“저, 그런데…….”

“왜?”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델라가 이저드를 노린다는 게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왜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경도 공작을 용서 못 한다고 하지 않았나?”

모튼이 인상을 쓰며 묻자, 레널드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행동은 모튼의 말에 동의하는 듯이 굴었지만, 생각은 완전 정반대였다.

‘그건 환심을 사려고 연기한 건데…….’

벨제프 자작이 죽었다는 소식이 알려진 날,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쓴 레널드는 거짓으로 눈물을 보였다. 그리고 그는 공작을 용서할 수 없다며 모튼의 앞에서 다시 충성을 맹세했다.

적군의 적군은 아군이라고 했던가. 모튼은 그때부터 레널드를 더 확실히 믿게 되었다. 벨제프가의 가주를 죽인 제스트윈 공작가는 레널드가 연을 맺을 가문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모튼의 신뢰가 레널드한테는 더없는 기회였기에 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2년이 지난 현재, 왕세자의 비호 아래에 레널드는 다음 부기사단장 자리에 오를 인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게, 제 말은……. 마음이 약한 아이라 그런 독한 생각을 할 리가 없을 거라는 말입니다.”

사실 오늘 만남을 보면 애가 너무 억세져서 ‘마음이 약하다’는 자신의 말이 약간 의심이 가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실 그때 제가 거짓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라고 실토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까지 쌓아놓은 신뢰가 와장창 무너질 것이 뻔했다.

레널드는 이때, 뭔가 일이 이상하게 꼬여 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건 지켜봐야 알 일이지. 큰 사건을 겪으면 변할 수도 있다니까? 내기하겠나?”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저하와 다른 의견으로 내기를 한단 말입니까. 저하의 눈을 믿습니다.”

레널드가 기겁하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모튼은 그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퍽 만족스러운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렇게 바로 다음 날, 아델라는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책상 위에 늘어져 있는 화려한 색의 봉투들을 눈으로 쓱 훑던 아델라는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이저드를 힐끔 보았다. 오늘도 세상 혼자 사는 듯한 외모였다.

마음 같아서는 대놓고 얼굴을 보며 대화하고 싶은데, 감시하는 눈이 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어제는 모튼과 레널드가 자신을 살펴보는 듯이 굴더니, 오늘은 모튼이 작정을 하고 아델라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보면 둘이 일을 잘 하나 안 하나 확인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 시선이 참, 불편했다.

너무 노골적으로 보는 거 아닌가. 왜 저러는 걸까.

‘아무리 나랑 이저드가 이런 일을 처음 해 본다고 해도 그렇지, 저렇게 감시하듯 볼 일이냐고. 다른 의도가 있는 것 같은데…….’

아델라는 옆에서 집요하게 따라붙는 시선과 앞에 앉은 이저드가 신경 쓰여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지만, 그래도 최대한 표정을 유지하며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힐끔 쳐다 본 이저드는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저드의 반응을 확인하려는 거야, 아니면 내 반응을 확인하려는 거야?’

같은 공간에 모튼과 이저드, 아델라, 이 셋이 함께 있어서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었다.

방 안에는 정말 긴, 아주 긴 침묵만이 흘렀다. 아델라와 이저드, 그리고 서류를 확인하는 척 자기 책상에서 이쪽을 주시하는 모튼까지, 셋은 정말 묵묵히 일만 했다.

아델라는 괜히 대화했다가 술렁이는 마음이 들킬까 봐 말을 최대한 아꼈다. 물론, 아예 대화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모튼한테 온 온갖 파티 초대장을 분류하며 이저드와 대화를 나누긴 했다. ‘이건 어떻게 하죠?’ 같은 사무적인 대화뿐이었지만.

둘, 아니, 셋이 이렇게 대치하는 것 같은 이 상황이 만들어진 건 모튼 때문이었다.

오전까지는 자신을 수행하는 일만 시키던 모튼은 점심 이후, 다른 시녀들을 한 명 한 명 심부름 보냈다. 심지어 레널드까지.

드디어 자신한테도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기나, 하고 기대하던 아델라한테 모튼이 시킨 일은 모튼과 같은 공간에서 파티 초대장을 분류하는 일이었다. 쉽고 간단한 업무였지만, 아델라가 처음이라 모를 수도 있으니 이저드에게 함께 도우라고 명했다.

그리고 둘을 집무실 한 편에 마련된 테이블과 소파에 앉혔다. 굳이 세자의 집무실에서 이 일을 하지 않아도 됐는데, 모튼은 모르면 자기한테 물어봐야 하지 않냐며 배려하는 척 막무가내로 굴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부하인 이저드나 시녀인 아델라나, 명령을 받으면 해야 하는 것을.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한 배려였지만, 찝찝해……. 아니, 누가 왕실 기사를 이런 잡무에 투입하냐고. 이저드한테 텃세 부리느라 저러는 건가?’

일 리 있는 생각이었다. 모튼은 이저드의 기를 눌러놔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이저드한테 별별 텃세를 부릴 생각을 하고 있을 거였다.

아델라는 아주 살짝 인상을 썼다가 모튼의 시선이 느껴져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이저드한테는 그럴 이유가 있다지만……. 나는 왜?’

아델라는 모튼이 감시하거나 경계할 정도로 모튼한테 위협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자꾸 이저드가 아니라 자신을 주시한단 말인가.

‘일부러 날 보는 척하면서 이저드를 감시하려는 건가?’

역시 그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아델라는 이마를 짚고 싶은 것을 참고 웃으며 왕세자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그는 언제 아델라를 그렇게 집요하게 봤냐는 듯이 서류에 시선을 박고 있었다. 아델라의 시선을 느낀 모튼은 그때 처음 봤다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왜? 모르는 게 있나?”

“아, 아닙니다. 기지개를 켜다가 우연히……. 죄송합니다.”

‘작정했네. 이저드와의 사이가 들킨 건 아닌 것 같은데.’

아델라는 어떤 의심을 할 수도, 지울 수도 없이 계속 그를 신경 쓰며 초대장을 확인했다.

아델라와 이저드가 일을 하는 동안, 모튼은 즐거운 마음으로 그 상황을 지켜보았다.

처음에는 아델라가 이저드를 어떻게 대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하지만 이저드가 별것도 아닌 일을 처리하는 모습을 보며 모튼은 약간의 희열을 느꼈다.

왕세자가 시킨 일이니, 이저드는 거부할 수 없었다. 모튼은 앞으로 이런 식으로도 사람들 사이의 소문을 잠재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저드에게 저런 잡무만 시켜서 큰일을 못 하게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공작가의 귀한 도련님이 내 수족보다 못한 일만 하고 있다고 하면 얼마나 웃길지. 레널드 경이 머리를 아주 잘 썼어.’

그는 터져 나오려는 미소를 애써 갈무리하며, 아델라를 다시 살폈다.

‘그나저나 아델라 양은 표정을 잘 못 숨기는군. 노력하는 건 가상하다만.’

그는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 저리 딱딱해서 어떻게 이 왕궁에서 살아남겠다고.

아델라가 이저드를 싫어하고 있을 거라 속으로 확신하고 있어서인지, 모튼이 보기엔 아델라의 모든 행동이 어색해 보였다. 심지어 이저드를 쳐다보는 시선까지 불안정했다. 나름대로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지만, 모튼의 눈은 못 속였다.

‘이저드랑 있다고 인상이나 쓰고 말이야. 하긴, 화를 참기 힘들겠지. 저 정도면 나이에 비해 훌륭하게 대처하는 거긴 해. 이거 생각보다 쉽게 아델라 양을 회유할 수 있겠는데.’

그 잠깐 인상을 구긴 게 이런 식으로 오해받을 줄은 아마 아델라도 몰랐을 것이다. 사실, 누구라도 그렇게 대놓고 빤히 쳐다보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튼은 자신의 행동이 무례하다는 자각이 전혀 없었다. 그 때문에 그는 그녀의 표정을 아주 다르게 해석해 버렸다. 모튼은 자기 착각 속에 빠져 웃고 싶은 걸 참으며 계속 서류를 읽어 나갔다.

그렇게 시간이 또 하릴없이 흘렀다. 시녀들이 심부름을 하고 하나둘 돌아올 때쯤 둘은 일을 끝냈다.

“수고했어. 오늘은 더 부를 일 없으니, 들어가 봐.”

오늘 오전부터 나와서 한 일이라고는 모튼을 수행하는 일과 초대장 분류밖에 없었다. 아델라는 아직 환한 밖을 힐끔 보았다.

“저만요?”

“아니, 다른 시녀들도 돌려보낼 거야. 이쪽 일이 제일 늦게 끝나서 기다린 거지.”

이건 일부러 아델라와 이저드가 일을 늦게 끝냈다고 핀잔을 주는 걸까? 아델라는 어차피 어리숙함을 연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관없었지만, 이저드는…….

모튼이 이저드를 지적한 거라 생각하면 속이 끓었지만, 아델라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숙였다.

“예. 다음에는 더 빨리 처리해 보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래.”

부정도 안 하는 걸 보니, 핀잔을 줄 의도가 맞았나 보다.

“아, 이저드 경도 나가 봐.”

“예?”

화를 꾹 참고 물러가려던 아델라가 숙였던 고개를 들고 모튼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모튼은 서류를 처리하며 이쪽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굴었다.

아까랑 또 같은 태도였다. 난 너희한테 별로 관심이 없다, 라는 행동을 보이면서, 둘의 분위기를 읽으려는 듯한.

“뭐 하나? 오늘 업무 끝났어. 물러가.”

“……예.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아델라는 찝찝했지만, 흔들리지 않고 인사한 뒤 걸음을 뗐다. 뒤이어 이저드도 그녀를 따라 집무실을 나왔다.

둘은 서로 다른 곳을 보며 걸었다. 세자궁과 얼추 멀리 떨어지고 주변의 기척이 상당히 멀어졌을 때, 아델라가 먼저 입을 뗐다.

“저희, 들킨 건 아닐 텐데 왜 저럴까요?”

아델라는 이저드를 보지 않고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대를 관찰하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요. 몰래, 대놓고. 완전 반대되는 말인데, 진짜 그렇게 보더라니까요?”

이저드는 아까 모튼의 시선이 붙었던 상황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모로 다 이상해요. 절 관찰해서 얻을 게 뭐가 있다고…….”

둘은 헤어져야 할 갈림길에서 잠시 멈췄다. 그들은 그제야 서로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저드의 눈가가 한순간 휘어지는가 싶더니, 곧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원래 페이스로 돌아왔다.

“표정을 너무 잘 숨기세요.”

“연습했으니까.”

그의 작은 목소리에 아델라는 입가가 허물어질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이번 일은 조금 더 지켜보지. 걸리는 게 있긴 한데, 확실하지는 않네.”

“뭔데요?”

“그대의 목적을 확인하려는 것 같기도 하네. 오늘 하루뿐이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말이야.”

아델라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싶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얼굴을 움직이지 않고 곁눈질만으로 세자궁을 확인하고 곧바로 살짝 미소 지었다.

“그럼 내일 봬요.”

아델라는 드레스 자락을 잡고 이저드에게 인사를 올렸고, 이저드 또한 고개를 숙였다. 둘은 그렇게 형식적인 인사를 나눈 후, 깔끔하게 뒤돌아섰다.

* * *

그리고 그런 둘을 멀리서 지켜보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방금 막 세자궁에 도착한 레널드였다.

둘이 주변의 기척이 멀어졌음에도 서로를 보지 못하고 대화만 나눴던 것은 낮이라 멀리서도 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에 나무가 우거져 있지도 않아, 멀리서도 둘은 잘 보였다.

“왔나? 오면서 둘은 봤나?”

레널드가 아리송한 표정으로 돌아와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던가?”

모튼은 참지 못하고 바로 물었다.

“헤어질 때 빼고는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대화는 헤어질 때 잠깐 나누는 것 같았고요.”

“흐음, 역시 이상하군.”

“어느 부분이 말입니까?”

레널드는 모튼이 도대체 뭘 보고 아델라를 이상하게 생각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늘 내내 관찰한 아델라는 어디에도 이상한 점이 없었다. 조용히 모튼의 명령을 따랐고, 묵묵히 모튼을 수행했다. 궁에 익숙하지 않아 버벅거린 거 빼고는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그것도 가르쳐 주니 금세 익히고 따라 했다.

오히려 아델라가 너무 얌전해서 레널드는 아델라가 어제 그렇게 자신에게 쏘아붙이던 아이가 맞나 싶었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존재감도 옅었다.

“혹시 제가 없을 때 아델라가 뭔가 했습니까?”

“아니, 경의 동생은 아주 평범하게 일했네.”

중간에 미간을 구긴 것 빼고는 아델라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행동이 어색해서 그랬지.

“그런데 왜 이상하다고 여기셨는지…….”

“경, 다른 영애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봤나?”

“어떤 행동을 말씀하시는 건지, 저는 잘…….”

레널드는 모튼과 자신한테 해가 될 사람이 아닌 이상에야 사람을 살피지 않았다. 모튼이 경계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살피지만, 그 외에는 정말 관심 밖이었다. 특히나 해가 되지 않을 만한 귀족 여식들이라면 더욱.

“이저드와 함께 있을 때, 이저드와 대화할 때, 이저드를 쳐다볼 때.”

모튼이 정확한 상황을 알려줬을 때에서야 레널드는 급하게 회상했다. 오늘은 아델라만 보고 있어서 사실 다른 영애들의 행동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이저드한테 향하는 시선이 많았다는 것만 기억했다.

“그러고 보니 모든 시선이 이저드 경한테 쏠리는 것 같은…… 기분을 조금 느꼈습니다.”

“그래, 그거야. 그게 이상하다는 거야.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저드는 잘생겼네. 어디 가서 그런 얼굴 보기 힘들 거야. 그놈을 싫어하는 내가 인정할 정도니까.”

모튼은 그 부분이 내심 배알이 꼬였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래서 다른 이들은 전부 대놓고는 못 봐도 힐끔힐끔 몰래 훔쳐보는데, 아델라 양의 행동은 어떤가?”

“전혀…… 흔들리지 않았죠. 아까 둘이 걸어가는데 이저드 쪽은 한 번도 안 본 것도 그렇고, 오전에 본궁으로 움직일 때도 이저드 쪽으로는 시선도 안 뒀고요.”

“그래, 나도 봤어. 아까 둘이 일을 시켰을 때에는 인상까지 구겼네. 확실히 아델라 양은…… 그놈을 싫어해. 표정을 숨기려고 노력하는 걸 보면 이저드가 누군지 아는 것 같고. 잊을 수가 없겠지, 제스트윈 공작가를.”

결론이 왜 그렇게 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로써 아델라는 이저드를 싫어하고, 경계하는 사람이 됐다. 아델라가 들으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이야기였다.

“그건…….”

‘그냥 낯을 가린 게 아닌가?’

아델라가 이저드한테 반하지 않았다는 게, 그를 싫어한다는 이야기가 되지는 않았다.

레널드는 그저 아델라가 남자한테 관심이 아직 없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아니면 아름다운 외모에 무감각한 걸지도 모른다. 이저드와는 다른 의미로 이 세상 외모가 아닌 것 같은 이를 한 명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니, 그 애랑은 계속 연락하나? 아델라를 집에서 나오게 도와준 건 그 친구일 테지.’

그 외에는 아델라를 도와줄 만한 인물이 없었다.

비단결처럼 부드러운 은발과 세상 어디에도 찾아보기 힘든 보석을 박아놓은 것 같은 적안을 지닌 아이.

레널드를 아주 건방진 눈으로 매번 쳐다보던 아이였다. 그것도 아델라는 모르게.

레널드는 잠깐 어린 루를 회상하다가 곧 정신을 차렸다. 모튼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델라가 낯을 가려서…….”

원래 모튼이 한 말에 이렇게 일일이 토를 달지 않는 레널드였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레널드는 되도록 동생이 모튼의 눈에 안 띄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레널드 덕분에 그녀는 이미 많은 주목을 받고 있었지만, 권력 암투에 장기짝으로 쓰이는 것과 아무것도 모르고 왕궁에서 지내는 것과는 차이가 컸다. 레널드는 아델라까지 장기짝으로 움직이게 둘 수 없었다. 높은 분들한테 휘둘리는 건 자기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경은 동생한테 약한 모양이군. 너무 방어적이야. 가족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볼 수 없다는 건 이해하지만, 상황을 제대로 봐.”

모튼은 기분 상한 듯 정색하고 말했고, 레널드는 얼른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믿기지 않아서 판단이 흐려졌습니다.”

“그래. 주변에 동생이 경의 약점이라고 퍼뜨리고 싶지 않으면 조심해. 나니까 눈감아 주는 거야.”

그에 레널드는 다시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여야 했다.

“제가 아델라와 다시 한번 대화해 보겠습니다. 가까워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어. 경이 안 나섰으면 내가 나설 뻔했어.”

모튼이 웃으며 말했다. 레널드는 모튼을 보며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지만, 입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모튼을 모시면서 그의 미소가 얄밉긴 처음이었다.

* * *

모튼의 아델라 의중 떠보기는 며칠 동안 계속됐다. 레널드가 쉬이 믿지 않는 것 같으니, 증거를 보여준다며 자주 아델라와 이저드를 붙여 놨다. 우연을 가장해서.

덕분에 아델라는 본궁에 가서 벽난로를 확인하기는커녕, 근처에 가 보지도 못했다.

자기들은 나름대로 기척을 숨기고 아닌 척 쳐다본다고 하는 것 같았지만 그런 시선에 단련된 아델라는 다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아델라의 시선이 조금이라도 이저드한테 가면 더 유심하게 지켜봤다. 어찌나 집요한지. 다른 영애들한테는 시선도 안 주면서 유독 아델라한테 그랬다.

그들의 감시는 아델라가 숙소로 돌아가면 풀렸다. 즉, 이저드와 함께하고 있지 않으면 신경도 쓰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거, 완전히 아가씨한테 뭐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제 손가락을 걸게요.”

“소, 손가락은 걸지 마세요.”

“맞아. 네가 무슨 암흑계 사람이냐? 이상한 걸 배웠어.”

오랜만에 만났는데 여전히 말싸움 중인 둘을, 아델라는 번갈아 보았다. 이들 사이에 있으니, 바짝 긴장했던 마음이 스르르 풀리는 기분이었다.

넷은 오랜만에 한곳에 모였다. 모두가 잠이 든 한밤중에 각자의 숙소를 조용히 빠져나와 아델라의 숙소로 모인 것이다.

“그 와중에 더 짜증이 나는 건, 레널드가 자꾸 친한 척한다는 거예요.”

그렇게 경고했건만.

레널드는 목적이 있어서 아델라한테 접근하는 게 분명했다. 아델라가 그렇게 무시하는데도 그는 하루에도 한두 번은 꼭 말을 걸고 그녀와의 관계를 회복하려 했다.

예를 들자면,

‘오늘 날씨가 참 좋다, 그치?’

‘나한테 작업 걸어? 아는 척하지 마.’

라고 하질 않나.

‘오늘 저녁 약속 있어? 없으면 나랑 저녁……!’

‘스웰라 님하고 저녁 먹기로 했어. 말 걸지 마.’

라고 할 때도 있고.

‘좋은 아침.’

‘…….’

이라고 계속 말을 걸었다.

나중에는 무시당하면서도 꾸준히 대화를 걸어왔다. 그 노력이 가상하긴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노력이 결코 아델라를 위한 게 아님을 알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보면 동생과의 신뢰를 회복하려는 노력으로도 비치는데. 만일 이 사이에 모튼이 꼈다면 곱게 보이지는 않겠네요. 아가씨가 세자궁에 배치된 것도 그렇고.”

헤이든이 뚱하니 턱을 괴고 말했다.

“이건 처음부터 작정한 거라고밖에……. 아니면 그동안 쭉 시녀가 없던 세자궁에 아델라 님이 배치될 리가 없죠. 거기에 이저드 님까지 세자 호위로? 작정하고 맞춘 거네요.”

린다도 그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저드가 뽑힌 건 이해가 가지만 제가 뽑힌 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요. 레널드를 아낀다고 해도 이런 파격적인 특혜를 줄 리가 없고요. 모튼한테 이익이 되니까 절 뽑은 것 같은데, 아직까진 모르겠어요.”

아델라는 원래 비밀 통로만 찾을 생각이었지, 누군가의 장기짝이 되어 궁에서 암투를 벌일 생각은 아니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면서 암투에서는 빗겨나갈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궁에 대해 배웠다. 적을 알아야 이런저런 계획도 세울 수 있었으니까.

“그대가 세자의 편이 될 수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고 싶은 걸 거야.”

가만히 셋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저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걸 왜 이저드를 대하는 제 행동을 관찰하면서 확인하죠?”

“음……. 적군의 적군은 아군이니까.”

“제가 이저드와 적이라고요?”

이저드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아델라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저드와 아델라는 겉으로 보면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었다.

아델라는 골똘히 이런저런 추측을 떠올리다가 헉, 하고 눈을 크게 떴다.

“제가 그동안 편했나 봐요. 그 인간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그러고 보니, 아델라는 제스트윈 공작령에서 벨제프 자작이 사형당한 사실을 근 2년 동안 아예 기억에서 지웠다. 다시 떠올릴 가치도 없었기 때문이다.

“잊는 편이 좋아. 다시 기억나게 해서 미안하네.”

“아니에요. 뭐, 이저드가 기억나게 했나요? 그 두 사람이 기억하게 한 거지. 근데…….”

그녀는 그제야 레널드와 모튼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 설마……. 제가 궁에 들어온 게 이저드를 해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걸까요?”

“시기가 이상하게 겹쳤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네. 레널드 경이 집 안 사정에 대해 제대로 말하지 않았다면 그대는 자작가 저택에서 조용히 살다가 어떤 심경의 변화를 겪고 갑자기 수도에 나타난 거니까 말이야.”

“제 6년 전 모습만 기억하는 레널드라면……. 갑자기, 라고 생각할 수도 있긴 하죠. 그땐 말도 못 하고 숨어 지냈으니까요.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 인간이 죽었는데, 공작가 도련님을 죽일 생각을 하겠는가. 뭐, 그런 건가? 내 가족도 죽었으니, 너도 당해 봐라! 이건가? 설마 이런 마음으로 수도로 올라왔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델라는 레널드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지 궁금했다. 벨제프 자작이 죽어서 자유가 됐으면 자유가 됐지, 힘들고 슬퍼하진 않았을 텐데?

‘레널드도 그걸 알 텐데, 의심한다는 건……. 모튼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인가?’

전생에도 모튼의 말에 좌지우지되더니, 이번 생에도 같은 모양이었다.

“복수를 위해 이렇게 대책 없이 궁에 들어오는 사람이 어디 있답니까? 절 너무 세상 물정 모르는 애로 보고 있네요.”

“그러니 그렇게 대놓고 지켜봤겠지. 그대를 너무 얕보고 있어서.”

그들이 보기에는 아델라가 어리고 약하고 쉽게 휘둘릴 것처럼 보인 모양이었다. 아델라가 일부러 어리숙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니까. 왕궁에서 오래 일한 그들 관점에서야 아델라는 엄청난 초짜였다.

“어떻게 보면 그렇게도 보이겠네요. 나이도 어린데다가 이제 막 왕궁에 들어왔고. 게다가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은 사람도 아니니까요. 오히려 귀족 사회와는 한참이나 멀리 떨어져 있었죠.”

옆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린다가 말했다. 그에 아델라는 생각에 빠진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

아델라가 갑자기 말이 없으면 거의 백이면 백, 무언가 행동으로 옮길 생각을 하는 거였다. 그걸 아는 이저드는 약간 불안한 눈빛으로 아델라를 불렀다. 그의 물음에 아델라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이저드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어차피 저흰 통로를 찾는 게 목적이잖아요?”

“그렇지.”

“그럼, 방해 없이 찾는 방법을 택하는 게 어떨까 해서요. 지금은 감시하는 시선 때문에 본궁에 가도 뭘 확인할 수가 없어요.”

레널드와 모튼의 집요한 시선 때문에 벽난로가 복도에 몇 개나 있어도 눈으로 훑지 못했다.

“방해 없이요?”

린다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네. 그렇게 절 이용하고 싶다면 기꺼이 세자의 편에 서죠. 제가 확실히 이저드의 적이라는 걸 알게 되면 그 시선도 없어질 테니까.”

어차피 왕궁에 있는 이상, 모튼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 관심을 역으로 활용하는 방법도 있었다. 모튼이 원하는 것을 쥐여 주고, 아델라는 아델라가 원하는 것을 쥐고.

“그전에.”

아델라는 이저드를 물끄러미 보았다.

“?”

“연기니까…… 상처받지 마세요. 앞으로 제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든 진짜 그런 마음 아닌 거, 아셔야 해요?”

앞으로 단단히 마음을 먹을 작정인지 아델라가 매우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저드는 그런 아델라를 마주 보다가 그녀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알겠네. 그대도 알고 있게. 그대가 무슨 말을 해도, 난 그대 편이라는 거.”

아델라는 이렇게나 사랑하는 이를 미워해야 한다는 게 마음이 아팠다. 그저 무시하던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아델라는 너무 미안해서 이저드한테 폭 안겼다.

“미안해요.”

“그대가 왜? 그런 걱정 말게.”

이저드는 오히려 아델라를 위로하듯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저……. 앞으로의 일로 애틋한 건 알겠는데, 저희도 있거든요?”

헤이든이 황당하게 둘을 보았고 뒤이어 린다도 말을 덧붙였다.

“예. 저희도 눈이 있고, 귀가 있습니다. 잠시 나가 드릴까요?”

그제야 둘은 아쉬워하며 떨어졌다. 이 커플은 어찌 된 게 2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을까? 린다는 정말 신기했다.

“어쨌든. 그러니까, 아델라 님은 거짓으로 세자의 편에 설 거고 이저드 님과는 적대 관계인 척하겠다, 이거죠?”

“네. 세자의 편이 되면, 지금보다 활동 범위를 더 넓힐 수 있어요. 괜히 혼자 돌아다니다가 의심받을 일도 없고요. 물론, 제가 이용당해서 내쳐지기 전에 통로를 찾아야 하지만요.”

“어차피 지가 손 안 쓰고 남 시켜서 이저드 님을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거니까, 이저드 님만 흔들리지 않으면 꽤 오래 버틸 겁니다.”

린다의 말에 아델라는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하루라도 빨리 통로를 찾는 일인데……. 시선이 거의 아델라 님과 이저드 님한테 쏠려 있으니, 제가 어떻게든 찾아보겠습니다.”

“저도요. 이저드 님보다 감시의 눈이 적어서 밤에 움직이기 편하더라고요. 사고를 안 쳐서 그런가? 전 신경도 안 씁니다.”

요 며칠, 아델라와 이저드가 시선을 끌고 있어서 헤이든은 비교적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났다.

배치받은 곳도 인적이 드문 왕궁 도서관이라 보초를 서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었다. 왕족들만 다니는 곳이라서 당연히 출입이 적을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그래, 그렇게 하지. 그런데, 아델라.”

“네?”

“내가 그대의 적이라는 확신을 어떻게 심어 주려고 그러나?”

이저드를 포함한 셋의 시선이 아델라한테 쏠렸다. 말로만 해서는 그들에게 확 와 닿게 해 주지는 못할 텐데 말이다.

“둘은 절 대책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대책 없이 가야죠. 복수심으로 똘똘 뭉쳐서 겁 없이 왕궁에 발을 들인 아이?”

아델라는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 * *

아델라가 요 며칠, 계속 불안해 보였다. 주변에 사람들이 오면 움찔움찔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아주 작은 변화라서 그녀를 유심히 관찰한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었지만 확실히 그녀는 처음 왔을 때보다 훨씬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태도에 의심이 든 사람은 역시 레널드와 모튼이었다. 평소 그 정도로 긴장하고 있지 않았는데 요 며칠, 계속 저랬다. 이저드한테 향하는 눈빛은 평소와 비슷했지만, 전보다 횟수가 좀 늘어난 것 같았다.

“이상하지?”

“이상합니다.”

둘은 아델라와 이저드를 심부름 보내면서 중얼거렸다.

“왜 저러는지 알겠나?”

“그건 저도 잘…….”

“하긴……. 경, 아델라 양과 친해지는 거 실패했지?”

이제 고작 일주일 지났다. 실패를 말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른 것 아닌가? 레널드는 속이 쓰렸다.

“예, 예…….”

“쯧쯧, 아주 마음을 꽉 닫았군. 그럼 왜 저렇게 불안한지 모르겠어. 이저드를 보는 횟수도 전보다 늘고. 근데 그게 또, 좋아해서 보는 눈은 아니란 말이지?”

모튼과 레널드는 점점 변하는 아델라의 행동을 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앞으로 계속 아델라 양을 주시해. 저러다 뭔 일을 벌일 것 같아. 예감이 안 좋아.”

그래도 아예 감이 없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모튼은 그리 명하고 서류를 마저 훑었다.

레널드는 부디 아델라가 이상한 마음먹지 않았길 바라며 아델라와 이저드가 사라진 문 쪽을 보았다.

하지만, 레널드의 바람을 들어 줄 아델라가 아니었다.

* * *

둘이 우려하던 일은 바로 다음 날에 터졌다.

평소에는 둘이 있어도 이저드한테 말 한마디 안 건네던 그녀가, 그날은 갑자기 차 한잔 하겠냐며 이저드한테 권했다.

이저드는 거절할 이유가 없으니 고개를 끄덕였고 아델라는 차를 준비하러 휴게실로 향했다. 다른 시녀들은 전부 심부름을 나가서 휴게실에 없었다. 아델라는 주변을 경계하며 두리번거리더니, 조용히 차를 우릴 준비를 했다.

그때까지도 레널드는 아델라가 뭘 하려는 건지 몰랐다.

‘으음, 이 정도로 몸을 틀면 밖에서 잘 보이겠지?’

레널드가 문 틈새로 아델라를 살피는 동안, 아델라는 그런 생각을 하며 약간 신이 나서 차를 준비했다. 차를 우리고 찻잔을 준비할 동안까지 그녀는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아델라의 돌발 행동은 차를 각각의 잔에 따른 후에 시작됐다.

‘저게 뭐 하는 거지?’

레널드는 인상을 구기며 아델라가 품에서 뭔가를 부스럭거리며 꺼내는 것을 유심히 보았다.

그녀가 품에서 꺼낸 것은 작은 병이었다. 아델라는 병을 일부러 레널드가 잘 보이게 두 손가락으로 들어 유심히 보다가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훑었다. 그리고 그녀는 망설임 없이 그 액체를 찻잔에 따랐다.

그는 아델라의 의도된 행동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주변을 경계하며 불안한 눈을 하는 걸 보니, 저건 백 퍼센트, 그거였다!

“아델라!”

쨍그랑!

레널드가 사태를 깨닫고 급하게 문을 열었다. 그러자 아델라는 실수인 척 찻잔과 유리병을 바닥에 쏟았다.

“너, 너……! 이, 이게 무슨! 너 미쳤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레널드는 너무 놀라서 말까지 더듬었다. 설마 그녀가 독약을 준비해 며칠을 품에 품고 있었을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런 무모한 짓을 할 아이가 아니라고 철석같이 믿었는데.

그는 너무 당황스러워서 눈앞이 까맸다.

“아, 아아! 아악! 어떻게! 이거 어떡하냐고! 내가 이걸 어떻게 구한 건데……! 어떻게 방해를 해도!”

레널드가 당황해서 주춤거리고 있는 사이, 아델라는 절규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방금 어마어마한 짓을 한 뻔했던 아델라가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아쉬워하는 모습을 본 레널드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 상황을 누가 알면 안 됐다.

그는 거의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휴게실 문을 닫은 뒤 아델라가 우려 놓은 차와 찻잔을 전부 정리했다.

“너, 너는 아무것도 안 한 거야. 알겠지? 그냥 뜨거워서 찻잔을 쏟은 거야! 알겠어?”

레널드가 아델라의 어깨를 잡고 흔들자 아델라는 그를 팍 뿌리쳤다. 아델라의 눈에는 평소에 없던 독기가 올라 있었다.

“내가 내 일에 신경 쓰지 말랬잖아! 너 때문에 이게 뭐야! 약만 버렸어! 놔!”

아델라가 한껏 신경질을 내며 휴게실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그곳에는 이 상황을 알지 않기를 원했던 레널드의 주군이 서 있었다. 모튼은 레널드를 보고 거 보라는 듯이 거만하게 웃었다.

아델라는 주춤하고 레널드를 힐끔 보다가 모튼한테 고개를 숙였다. 아직 할 일이 남았다는 핑계로 걸음을 재촉하며 멀어진 그녀를 모튼은 딱히 잡지 않았다.

“그러게 내가 뭐랬나? 복수를 위해 들어왔으면 경의 동생이 위험하다니까. 역시 내 도움이 필요하겠어.”

“저, 그, 잠시만. 잠시만 시간을 주십쇼. 제가 말해 보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해.”

모튼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레널드한테 길을 비켜줬다. 레널드는 이미 눈에서 사라져 버린 아델라를 쫓아 뛰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단정한 갈색 드레스를 입은 아델라가 그의 눈에 띄었다. 그는 더 빨리 속도를 올려 아델라를 따라잡았다.

“아델라, 잠깐, 잠깐! 나랑 얘기 좀 해!”

그가 아델라의 손목을 붙잡으며 그녀를 멈춰 세웠다. 아델라는 그의 말대로 순순히 멈춰 서 줬다. 주변의 기척을 가늠하니, 다행히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너, 너, 정말, 이저드를 독살하려고 했어?”

표독스러웠던 아까의 표정과는 다르게 그녀는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의 일은 전혀 벌어지지 않은 듯한 포커페이스였다.

“그럴 리가?”

“뭐……?”

“진짜 속네. 하도 날 떠보기에, 나도 떠본 건데. 그거 그냥 물이었어.”

그녀가 입가를 비틀어 웃으며 말했다.

“뭐? 뭐라고?”

레널드는 자기의 귀가 잘못된 줄 알았다. 아델라의 목소리가 아까와는 다르게 차가웠다.

“누굴 바보로 알아? 그쪽이 뭔가를 확인하고 싶어 하기에 그게 뭔가, 하고 나도 확인해 봤지. 시험해 본 거야, 나도.”

“그게 무슨 소리야?”

“너랑 세자 저하 시선이 너무 잘 느껴져서 내가 무시하려야 무시할 수가 없었다니까? 왜 모른 척이야?”

그녀는 첫날 레널드를 대하던 찬바람 쌩쌩 부는 그때와 같았다. 그렇다는 건, 요 며칠 동안 그녀는 정말 연기를 하고 있었다는 거였다.

레널드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내가 왕궁에 아무 준비도 안 하고 온 줄 아나 보네.”

“왜……. 왜 다 알면서 그런 거야? 아까 같은 짓을 굳이 해야 했어?”

“응, 내가 그런 짓을 했을 때 오라버니가 어떻게 나오는지 알고 싶었어.”

“이건 또 무슨……?”

아까는 모튼과 레널드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시험한 거라고 하더니, 이번에는 또 이상한 이야기를 했다. 레널드는 쉬이 이해할 수 없어 인상을 와장창 구겼다.

“내가 복수를 위해 왕궁에 들어왔다는 거, 알고 싶었던 거지? 난 오라버니가 날 위해 어디까지 해줄 수 있나 알고 싶었어.”

“아니,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무모한 방법을 택해?”

“그런 급한 상황이 아니면 알 수 없을 테니까. 그래도 날 다시 버릴 건 아닌가 보네?”

“넌, 진짜!”

레널드는 울컥 화를 내려다가 참았다. 그녀한테 화를 낸다고 하여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었다.

“내가 널 구하려고 하면 뭐 해. 저하께서 아셨어. 이게 간단히 끝날 일일 거 같아?”

“간단히 끝날 일이 아니겠지. 저하는 날 통해서 이저드 님한테 해를 가하려고 할 거고, 난 그 사이에 끼어 이용당할 거고.”

“그걸 아는 애가 그런 일을 벌여?”

레널드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그런 모습을 보니 전생에 네가 죽기를 원하지 않았다, 라고 한 게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녀가 레널드를 완전히 믿는 건 아니었다. 아델라는 레널드를 이용할 거고, 그 과정에서 그에게 약간의 기회를 줘 볼 생각이었다.

“응. 알고 벌인 거야. 나, 저하의 편에 서려고.”

“무, 뭐어? 너 내 말을 아예 안 들은 거야? 위험하다니까?”

“위험해? 그럼 오라버니가 날 지키면 되겠네.”

아델라는 뻔뻔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확실히 내 편 해 줘. 또 모르잖아? 내 편 해 줬다가 기회가 찾아올지.”

“기회? 무슨 기회?”

“살 기회?”

안 그래도 아델라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방금 한 말은 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델라를 살려야 레널드도 산다는 말일까?

레널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오라버니가 이렇게 하지 말라고 말리는데 하겠다고?”

“오라버니는 내가 가지 말라고 말릴 때 안 갔어?”

“…….”

이런 식으로 공격받을지는 몰랐는데. 레널드는 할 말을 잃고 잠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하아, 왜 갑자기 뜬금없이 저하의 편에 서겠다는 건데?”

“세자 저하의 시녀를 하니까 여기저기서 뇌물을 많이 넣어 주더라고. 그 돈만 받아도 금방 자금이 모일 것 같아서.”

이유가 이런 것일 줄이야. 아니, 조금 전에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나?

“아니, 아까는 복수를 위해 왕궁에 들어왔다고…….”

“내 말을 코로 들었니? 너랑 세자 저하께서 확인하고 싶었던 게 그거 아니냐고 물었잖아.”

“아…….”

레널드는 할 말을 잃고 잠시 침묵했다. 그는 주변을 휙휙 둘러보다가 아델라한테 조금 더 다가갔다.

“그럼, 그거 아니야?”

“아닐 수도 있고, 맞을 수도 있고.”

“아니라는 거야, 맞다는 거야?”

레널드가 답답한지 힘주어 물었다.

“좋은 감정은 아니지? 내가 아버지를 원망하긴 했어도, 누군가한테 죽임을 당한 거랑은 좀 다르잖아? 아버지를 원망하지만, 공작가에 좋은 감정을 가질 수는 없지.”

그래, 복수를 위해 목숨을 내걸 정도로 아델라가 아버지한테 애정이 깊지 않다는 걸 레널드도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그가 약간 놀란 것은 아델라는 그래도 아버지에 대한 티끌만 한 감정이 남아 있다는 거였다.

레널드는 사실 공작가에 어떤 유감도 없었다. 단지, 모튼의 적이라 적으로 취급하는 거였지.

“오라버니는 아니야?”

그런 레널드의 생각을 읽은 듯, 아델라는 일부러 웃으며 물었다.

“어……. 그, 그렇지. 이러나저러나 아무래도 아버지고, 가주였으니까.”

아델라도 뻔뻔함의 극치를 선보이고 있었지만, 레널드도 마찬가지였다.

두 남매의 성장 과정을 들어 보면 절대 아버지를 그렇게 생각할 리가 없었다. 특히나 레널드는 몇 번 크게 대들었다가 손찌검을 당한 적이 많았다. 아델라는 대들 생각도 못 하고 숨어 다녔고.

“어쨌든, 그것도 포함해서 저하의 편에 서려는 거야. 내가 직접 공작가에 해는 못 끼쳐도 세자 저하의 편에 있으면 그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거든. 물론, 뒷배가 생기는 게 가장 큰 이유지만.”

“남의 명성에 기대 돈은 돈대로 벌고 복수는 남이 해 주길 바라고?”

레널드는 아이가 변해도 너무 변했다고 생각했다. 어쩜 이렇게 영악하게 변했을까. 레널드는 너무 많이 달라진 아이가 진짜 자신의 동생이 맞는지 당황스러웠다.

“응. 나한텐 힘이 없으니까. 난 내 나름대로 살아갈 방법을 찾은 것뿐이야. 오라버니가 그랬듯.”

그는 아델라의 말에 머리를 짚었다.

“네가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세자 저하의 옆은 절대 안전하지 않아. 네가 왕궁을 나가는 게 가장 안전하지!”

“안전이 보장된 세상이 어디 있어? 가족도 버리는 판국에. 나한테는 여기나 밖이나 똑같아.”

아델라가 하는 말마다 찔리는 건 왜일까. 레널드는 인상을 팍 쓰다가 애를 설득시킬 방법이 뭐가 없을까 궁리했다.

“내 마음을 돌릴 생각은 접어. 이번엔 내 마음대로 할 거니까.”

미처 뭐라 그녀를 말리기 전에, 아델라가 먼저 선수를 쳤다.

“너! 내가 안 도와주면 지금 계획, 실행도 되기 전에 망하거든?”

“그래서, 망하게 하려고? 이젠 버리다 못해 내 앞길을 막고 아예 날 죽이게?”

그렇게 말하는 아델라의 눈에는 어떤 희망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곳에는 레널드를 향한 원망만이 남아 있었다.

“넌 무슨! 뭐가 그렇게 극단적이야? 내가 언제 그런다고 했어?”

아델라가 일부러 레널드의 죄책감을 꾹 누르는 말을 하자, 레널드는 버럭 화를 내다가 점점 목소리를 죽였다.

“하……. 내가 잘못했다. 내가 미안해. 내가 널…….”

“사과는 됐고. 도울 거야, 말 거야?”

애가 억척스러워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널드는 당장 아델라 하나조차 책임질 수 없어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하기 싫으면 말아. 나 방해만 하지 말라고.”

아델라가 처음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한동안 대답이 없던 레널드는 이것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는 듯이 인상을 잔뜩 구겼다.

“너, 내가 시녀로서 자격이 없다고 저하께 말해 쫓아낸다?”

레널드는 마치 최후의 방법을 꺼낸 것처럼 아델라의 눈치를 보면서 그녀를 겁줬다. 물론 그녀의 입장에서는 웃기지도 않은 협박이었다.

“그럼 쫓아내기 전에 이번엔 진짜 사고 치지, 뭐.”

“야! 너 진짜 머리에 뭐가 들어서……! 이저드 잘못 건드렸다가 우리 다 죽어!”

“누가 이저드 경 건드린대? 오라버니가 날 세자 저하께 고발하면 그때 생각해 보겠다는 거지. 오라버니만 입 다물면 다 해결될 일이야.”

세상에 이런 뻔뻔한 자가 있나. 포기하는 게 아니고, 레널드에게 입을 다물라니. 이건 명백한 협박이었다.

하지만 레널드는 그녀한테 더는 뭐라고 말할 수 없었다. 아델라한테 마음의 빚을 지고 있기도 했고, 그녀가 진짜로 무슨 짓을 저지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차피 모튼한테 이미 이 사건이 들켜서 아델라를 쫓아내긴 쉽지 않을 터였다. 뒤로 후퇴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전진할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하아……. 그래서 도대체 네가 원하는 게 뭐야? 아까 그 상황은 저하께 뭐라고 설명하라고.”

애가 왜 이렇게 달라진 건지 모르겠다. 자신이 없던 6년을 도대체 어찌 보냈기에 이렇게 막무가내가 된 걸까?

레널드가 다 포기한 듯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차라리 아델라의 계획을 듣고 대처할 방안을 찾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 * *

“저하, 레널드 경 드십니다. 그리고…….”

“들어오라고 해.”

시종이 아델라까지 소개하기도 전에, 모튼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둘을 집무실에 들였다.

레널드는 그나마 표정을 갈무리하고 있었지만, 아델라는 표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 당장에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

“왔나? 생각보다 금방…….”

“저하! 어리석은 소녀를 용서하시옵소서!”

“……음?”

문이 닫히자마자 아델라가 냅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녀의 행동에 모튼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레널드를 보았다. 하지만 레널드도 몰랐다는 듯이 당황한 표정이었다.

“뭘…….”

“제가 잠시 미쳤었나 봅니다. 그럴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저하께 큰 피해를 줄 뻔했습니다!”

고개를 바닥에 박은 아델라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가뜩이나 작은 몸으로 그렇게 떠니, 가엾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상황을 알고 있는 레널드는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러려고 아까 나한테 조용히 있으라고 한 거구나…….’

레널드는 자신의 옆에 모튼이 있다는 것도 잊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뻔했다. 아델라의 작태가 너무 기가 막혔다. 안 본 사이, 극단에 들어가서 연기를 배웠나? 동생의 뻔뻔함을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저게 연기라니.

“아, 아아. 그 이야기였군.”

머리를 조아린 아델라를 보며 모튼은 미소가 나오는 입가를 자신의 턱을 쓸어내는 척하며 가렸다.

이 상황이 너무 재밌었다. 자신의 예측대로 상황이 굴러갔기 때문이다. 아델라가 자신의 범행(?)을 자백한 탓에, 그녀를 휘두르기 더 쉬워졌다.

“그래. 그 독을 이저드가 마셨으면 내가 의심받았겠어.”

“다시는,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 죽은 듯이 숨어 지내겠습니다! 아니, 벌을 내려 주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모튼의 한마디에 아델라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손까지 떨며 아델라는 모튼한테 용서를 구했다.

모튼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눈에 조금 밟혔다.

키가 작은 아델라가 어깨까지 움츠리자 더 가녀리게 보였다. 괜히 작고 여린 생명체를 괴롭히는 파렴치한이 된 것 같았다. 모튼은 아델라가 떠는 모습이 각인된 듯 인상을 살짝 찡그리다가 곧 그런 생각을 떨쳤다.

“누가 보면 내가 잡아먹는 줄 알겠어. 그러지 말고 일어서.”

표정을 가다듬은 모튼은 한껏 여유로워진 표정과 말투로 입을 열었다.

“휴게실에 깨진 컵과 흔적은 시종한테 이야기해 전부 청소했으니 겁먹을 거 없어. 그래도 일이 벌어지기 전에 레널드 경이 발견해서 얼마나 다행인가.”

모튼은 막 몰아쳐서 아이를 추궁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최대한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특히 아델라가 이미 자신의 잘못이라 실토했기에 더욱 그럴 필요가 없었다.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당근도 필요한 법이었다.

모튼의 말에 바닥에 엎드려 있던 아델라는 주변 눈치를 보며 몸을 일으켰다. 눈가가 울음을 참은 것처럼 발갰다. 여태 감정 없는 미소만 보였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눈물이 가득 찬 아델라의 눈을 보니 맑고 순수한 소녀처럼 보였다. 전에는 그저 감정을 숨기려 전전긍긍하는 어리숙한 아이로만 보였는데. 그녀를 보며 모튼은 머릿속으로 아델라의 이미지를 정정했다.

“절……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한편, 아델라는 눈가를 촉촉하게 하려고 최선을 다해 슬픈 생각만 하고 있었다. 차마 모튼을 똑바로 마주하지는 못한 아델라가 죄인처럼 고개를 내렸다.

모튼은 아주 잠시, 아델라의 촉촉한 황금빛 눈망울에 시선을 뺏겼다가 정신을 차렸다. 참 알 수 없는 현상이었다.

“내가 용서하고 말고 할 게 어디 있지? 일이 벌어진 것도 아닌데. 나도 이저드한테 그대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충분히 이해해.”

‘같은 마음이면 곤란한데요?’

그 와중에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아델라는 딱히 이 상황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모튼 나름대로 아델라를 회유하려고 저렇게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것 같은데, 아델라로서는 그 모습이 딱히 좋아 보이지 않았다. 전생이나 이번 생이나 그는 아델라를 이용하려는 사람 중 하나였다. 아무리 미소를 지어도 좋게 보일 리 없었다.

또한, 하늘을 뚫을 것처럼 오만한 모튼의 착각 덕분에 조금만 아부를 하면 이 상황을 넘길 수 있을 것 같아 크게 긴장 되지도 않았다.

‘단순하다고 해야 하나? 이오스한테 뒤통수를 왜 맞았나 했더니…… 오만한 착각 때문이구나.’

아델라는 순간 모튼을 속여 먹는 벤슨을 상상했지만, 애써 기억에서 지웠다. 죽은 사람 생각해서 뭐 하랴.

그녀에게 중요한 건 지금, 현재였다.

아델라는 딴생각을 하다 바로 표정을 바꿨다. 그리고 모튼의 말에 감동한 척, 입가를 가리며 울먹였다.

“저하께서 내린 이 은혜를 어찌…….”

모튼은 아델라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모튼의 예측에서 그녀는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은혜라……. 정말 그리 생각하나?”

“예. 그러하옵니다. 저하께서 제 목숨을 구하셨습니다.”

“그렇긴 하지. 요 며칠 아델라 양의 행동이 이상해서 내가 직접 레널드 경한테 지켜보라고 시킨 거니까.”

요 며칠만은 아닐 텐데, 말은 잘한다.

“그럼, 내가 생명의 은인 같은 거군?”

“예, 그럼요!”

“그래?”

모튼은 아까보다는 밝아진 얼굴의 아델라를 뚫어져라 보았다. 허리까지 오는 진갈색 머리를 하나로 곱게 땋은 그녀의 외모는 딱히 특별할 건 없었다. 다만, 그녀의 반짝이는 황금빛 눈동자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특히 생기가 가득 차서 더욱.

처음에는 왜 그녀의 눈동자가 다른 이들과 별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을까. 모튼은 기억을 되짚어 봤다. 생각해보니, 그땐 이렇게 빛나는 눈빛을 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아델라의 원래 모습인 것 같은 그녀의 생기 넘치는 눈빛을 보자, 모튼은 그녀가 생각보다 아름다운 축에 속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직 17살에 저 정도 외모면, 성인이 된 후로는 사교계의 꽃이 바뀔지도 모르겠군.’

그는 아델라의 미래를 짐작하며 그녀를 빤히 보다가 곧 레널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레널드는 당장에라도 한숨을 내쉴 것 같은 표정이었다. 모튼은 여태 자신의 손발이 되어 준 레널드의 공을 생각해서 한 번 정도는 기회를 줘 볼까 생각했다.

“레널드 경은? 경도 그렇게 생각하나?”

생각지도 못하게 자신이 지목 당하자, 레널드는 놀란 눈으로 모튼을 보았다. 그는 모튼의 시선을 받은 후, 아델라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냥 적당히 장단 맞춰. 난 뭐든 저하 곁에만 머물면 돼.’

빤히 쳐다보는 아델라의 시선에 그런 뜻이 담긴 것처럼 보였다. 레널드는 작게 한숨을 쉬며 다시 모튼을 보았다.

모튼의 눈은 이미 흥미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기서 레널드가 잘못 말했다가는 아델라에게 미움받는 것은 물론, 모튼과의 사이도 틀어질 수 있다.

모튼의 질문은 레널드한테 선택의 기회를 주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사실 저 말은 빈말과도 같았다.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면 레널드라 해도 모튼은 언제든지 내칠 사람이었다.

“저 또한 저하께 은혜를 입었나이다. 제 동생을 구해 주신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레널드는 한쪽 무릎을 꿇고 침착하게 말했다. 레널드와 모튼의 눈치를 살피던 아델라도 다시 얌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에, 모튼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레널드가 예상했던 표정이었다.

“이거 참. 둘 다 은혜를 갚겠다니. 난 그런 뜻으로 아델라 양을 도와준 게 아니야. 난 그저, 아델라 양이 이곳에서의 생활을 잘했으면 싶었던 거지. 내 사람의 가족이 곧 내 가족이니까.”

그런 생각은 전혀 없으면서 거짓말을 참 잘했다. 아델라는 입을 비죽 내밀고 싶은 것을 참고 고개를 숙여 바닥에 애써 눈물 한 방울을 떨궜다.

“저하의 깊은 마음도 못 알아보고…… 흡…….”

‘이 상황에서 울 수도 있어? 허어…….’

레널드는 아델라가 마음만 먹으면 많은 이들을 속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여태 어리숙하게 보였던 그녀의 모습 역시 연기였다는 것을,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럴 수 있지.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어.”

모튼은 한껏 너그러운 척 미소 지었다. 아델라를 처음부터 옥죌 생각은 없었다. 이미 아델라의 약점을 손에 쥐었으니 언제든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럼, 앞으로도 세자궁에 계속 있을 수 있겠나?”

“예? 예! 예, 그럼요!”

자신이 잘릴까 잔뜩 겁이 난 표정을 지으며 아델라가 대답했다.

“내가 이저드와 잘 지내길 바라는데도?”

“그건…….”

“역시, 힘들겠지? 그럼 다른 궁으로…….”

“아니, 아닙니다! 자, 잘 지낼 수 있습니다! 저하도 저와 같은 마음이라 하셨는데 저하께서 그러라는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남매라서 그런가, 눈치 빠른 게 똑 닮았다. 다른 건 아직 가르칠 것이 많았지만 생존에 대한 간절함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레널드 경도 그래서 내가 뽑았지.’

지금보다 훨씬 전, 살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가득했던 레널드를 회상한 모튼이 씩 웃었다.

“잘 알고 있어 다행이군.”

“그럼 저는……. 그냥 그 사람과 잘 지내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아델라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난 이저드를 좋아하지 않지만, 궁에서 마찰을 만들고 싶지 않아. 요 며칠 이저드를 보니, 권력에 관심도 없는 것 같고.”

“하지만…… 그건 모르는 거지 않습니까? 사람 마음이란 게…….”

의문을 표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아델라에게 모튼은 아무 말 않고 그저 미소만 지었다. 꼭 아델라가 추측하길 기다리는 듯이.

“설마……. 저보고 친하게 지내라는 게…….”

역시, 그녀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모튼은 만족스럽게 웃다가 손을 내저었다.

“아아, 오해는 마. 굳이 그런 의도로 말한 건 아니야. 그저 왕궁에서 그대가 잘 지내길 바라서 한 말이네. 인맥을 쌓아야 궁 생활이 편하지.”

정말 말 하나는.

아니꼽게 올라가려는 한쪽 눈썹을 감추기 위해 아델라는 얼른 절하듯 바닥에 고개를 숙였다.

“제가 또 저하의 깊은 뜻을 못 알아봤습니다! 그 말, 꼭 명심해서 저하를 보필하겠습니다!”

“보필까지야? 표정 관리만 잘해. 아델라 양은 모르겠지만, 이저드한테 짓는 표정이 너무 어색해. 싫은 티가 너무 나지 않는가?”

이저드의 얼굴을 보면 표정이 풀릴 걸 걱정하던 표정이었는데, 그걸 어떻게 싫어하는 티로 생각할 수가 있지?

“조, 조심하겠습니다! 믿어 주세요. 표정 관리하는 연습을 하겠습니다!”

아델라와 이저드의 접점이 죽은 벨제프 자작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뭐, 그것 덕분에 아델라가 이저드와 함께 궁에 올 수 있었던 거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흐뭇하게 웃을 수는 없잖아.’

이 남자가 내 남자다! 말도 못 하고 있는데. 자신이 얼마나 참는 건지 알고서 하는 말인지. 아델라는 바닥에 엎드린 채 입을 비죽 내밀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사람은 바로 옆에 있던 레널드였다. 그는 모튼의 얼굴을 살피며 몸을 살짝 틀어 아델라를 가려 주었다.

‘미치겠네. 얘, 언제고 사고 칠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동생과 관련된 일에는 항상 후회만 남는 것 같았다. 그는 이번에 아델라의 협박을 받아준 게 조금씩 후회됐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내 한 번 믿어 보지. 표정 관리가 힘들면 미소라도 띄워. 그대는 너무 굳어 있어.”

“예!”

‘오호라, 그럼 앞으로 이저드 앞에서 웃어도 의심받지 않겠네?’

모튼에게 들은 말 중에 가장 반가운 말이었다.

아델라는 이 상황이 너무 희극적이라 웃음이 비죽 튀어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절대 대놓고 웃을 수 없었기에, 아델라는 어색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모튼이 혀를 쯧, 하고 찼다.

“아니, 아니. 그렇게 말고. 너무 어색하잖아.”

모튼이 지적하자, 아델라는 아까보다는 조금 더 환하게 미소 지었다.

“이, 이렇게요?”

“눈이 안 웃고 있는데.”

“그럼……. 이렇게요?”

왠지 이를 악문 것 같은 발음이 아델라의 입에서 새어 나왔지만, 모튼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미소 짓느라 발음이 잘 안 나올 수 있었으니까.

그보다 그는 아델라가 자연스럽게 미소 짓는 걸 보고 싶었다.

“좀 더 부드럽게 하면 딱 좋겠군. 더 연습해 와.”

“예. 명심하겠습니다.”

왜 웃는 얼굴로 지적을 받아야 하는지 도통 모르겠으나, 아델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너 사실, 연극배우야?”

“극단에서 배운 건 맞지만, 배우는 아닌데. 필요해서 배운 거지.”

아무 준비 없이 온 게 아니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하더니, 진짜였던 모양이다. 레널드는 솔직히 아델라가 조금 무서웠다. 어떻게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거짓을 연기할 수가 있을까.

“도대체 네 진짜 모습이 뭐야? 어리숙하게 굴었던 것도 가짜, 독약도 가짜, 아까 운 것도 가짜.”

“내 진짜 모습을 알아서 뭐 하게? 적어도 너랑 왕궁에서 처음 만나서 한 이야기는 진짜야. 됐지?”

“그 여……. 아니, 그 사람?”

그 여자라고 하지 말라고 했더니 그 사람은 또 뭔지. 아델라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어머니 이야기.”

“그럼 지금까지는?”

잘 걷던 레널드가 우뚝 자리에서 멈췄다. 아델라와 레널드 사이에 묘한 침묵이 흘렀다.

“왜? 이제야 위기감이 들어? 내가 다른 마음을 가졌을까 봐 확인하고 싶은 거야?”

“저하의 뜻과 반하는 행동이면 난 널 막아야 해.”

“푸흡.”

레널드가 너무 진지하게 이야기해서 아델라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오라버니도 거짓말하고 있으면서 날 의심하네? 나도 오라버니와 비슷해. 살기 위해 뭘 못하겠어. 연기가 대수야? 내가 사는 게 먼저지.”

“…….”

레널드는 어쩐지 지금 저 비웃는 미소가 아델라의 진짜 모습 같았다. 그리고 이걸로 레널드는 확신할 수 있었다. 만일 레널드가 모튼의 최측근이 아니었다면, 아델라는 그와 말도 섞지 않았을 것이다.

“너, 내가 많이 미워? 혹시 나한테 복수하는 거야?”

“그런 시간 낭비를 내가 왜 해? 가치도 없는데.”

차라리 묻지를 말걸. 입이 문제였다, 입이. 매번 상처받을 걸 알면서도 궁금증을 못 이기고 입을 열었다.

“대답이 됐어? 갈게.”

아까 선 자리에서 꼼짝도 안 하는 레널드를 한번 본 아델라는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아, 맞다. 세자궁에 배치받은 시녀들에 대해 못 물어봤네. 다 세자의 사람들이라 배치받은 건지 묻고 싶었는데.’

하지만 걸음을 돌리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레널드는 여전히 아델라를 따라오지 않았고, 아델라는 이미 아까 서류를 정리하던 방 앞에 다다른 뒤였다.

‘이따 묻지, 뭐. 이걸로 자유다!’

아델라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을 살피는 시선이 하나도 없다는 것에 희열감을 느꼈다. 당장에라도 이저드한테 오늘의 일을 조잘조잘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이 참 안타까웠다.

일단은 지금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아델라는 방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방 안에는 이저드와 함께 누군가가 한 명 더 있었다.

‘응?’

“어? 아델라 영애?”

아델라와 함께 세자궁에 배치 받은 시녀 중 한 명이었다.

리지나 웰슨.

웰슨 백작가 장녀인 그녀는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럴 만도 했다. 세력은 작았지만, 꽤 오랜 전통을 지닌 가문이었으니까 말이다.

웰슨 백작가는 대대로 왕가에 충성하는 가문이었지만, 적통 왕세자인 아리스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접한 후에는 제스트윈 공작가에 협력하는 가문 중 하나였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중간에 일이 생겨 늦었어요.”

평소에는 아델라의 인사도 안 받았던 리지나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저하께서 다른 심부름을 시키셨다고 들었어요. 전 저하의 명으로 아델라 님의 일을 대신하는 중이었고요. 거의 끝났으니, 아델라 님은 가서 쉬세요.”

이저드한테 잘 보일 이유가 있는 건지, 리지나는 아델라에게 상냥한 미소를 띠웠다. 아델라는 리지나가 자신을 향해 저렇게 예쁘게 웃는 건 처음이라 약간 당황했다.

“아, 그렇군요. 그럼 전 휴게실에 돌아가 보겠습니다. 저……. 그리고, 이저드 경.”

아델라가 들어올 때 잠깐 시선을 돌렸던 이저드는 그 후 계속 펜을 움직이고 있었다. 모튼이 무슨 초대장을 돌려야 한다며 아델라와 이저드한테 필사를 맡겼기 때문이다.

저걸 왜 손으로 직접 적으라는 건지. 덕분에 이저드의 유려한 글씨체를 마음껏 감상할 수는 있었지만.

‘정말 쓸데없는 걸로 사람 괴롭히네. 쪼잔해.’

“……부르셨습니까?”

아델라의 입가가 아주 약간 씰룩이는 걸 본 이저드가 가만히 그녀를 불렀다.

“아, 아니. 차요. 아까 차, 제가 우려 온다고 해 놓고 약속 못 지켜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이보다 깔끔할 수가 없는 철벽.

걸음을 돌리기 너무 아쉬웠지만, 안 그런 척 어색하게 웃으며 아델라는 방에서 빠져나왔다. 방에는 리지나의 목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왔다. 이따금 단답형으로 대답해 주는 이저드의 목소리까지도.

방 앞에 서서 잠깐 귀를 기울이던 아델라는 여기서 뭐 하는 건가 싶어, 휴게실로 몸을 돌렸다.

* * *

“―겠어요.”

“어떡해요. 오해하면…….”

“뚝. 영애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나, 그만 우세요.”

“흑……. 전 이러려고 했던 게…….”

기껏 휴게실까지 걸어 왔더니, 이번에는 휴게실 안에서 들리는 울음소리 때문에 아델라는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으음. 어쩐지, 지금 여기도 들어갈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

스웰라 영애로 추정되는 이는 계속 흐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달래 주는 다른 영애는 아마도, 이브니아 영애일 것이다.

셀핀 후작가의 차녀.

건국 때부터 나라를 지키는 일을 도와 각자의 영지에서 귀족도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세 가문 중 한 가문이 바로 셀핀 후작가였다. 과거에는 명성이 높았지만, 지금은 왕의 편에 붙어 간신 짓을 하는 가문일 뿐이었다.

‘여기서 서 있다가 오해받는 것보다는 그냥 들어가는 게 낫겠지.’

스웰라의 울음소리가 조금 잦아들 때쯤, 아델라는 조심히 손을 들어 노크했다. 그리고는 얼굴만 빼꼼 안으로 들이밀었다. 그러자 긴장하고 있던 둘은 금세 표정을 풀었다.

스웰라는 볼일이 있다며 화장실로 사라졌다. 방에 남은 이브니아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스웰라 님 눈이 빨갛던데…….”

“모른 척하세요. 집에 안 좋은 일이 생겼대요.”

“그렇군요…….”

그 말을 끝으로 둘 사이에 대화가 끊겼다.

스웰라를 제외하고, 리지나와 이브니아는 아델라를 거의 공기 취급했다. 어쩌다 대화를 해야 할 때는 예의를 갖췄지만, 굳이 나서서 말을 걸고 분위기를 바꿀 시도는 절대 하지 않았다. 물론 여태까지는 아델라도 관심을 받는 게 싫었기에 그냥 조용히 있었다.

그런데 아까 대화가 신경 쓰여 자꾸 입이 달싹였다.

“아델라 님.”

“예, 에?”

웬일이래?

무슨 말을 걸까 생각하던 아델라한테 이브니아가 먼저 말을 걸었다. 아델라는 놀라서 크게 뜬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브니아의 눈매가 곱게 휘었다.

“오늘도 고생이 많으셨겠어요.”

‘음? 갑자기 내 걱정?’

얌전히 소파 끝에 앉아 있던 아델라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이저드 경과 함께 있으면 대화가 안 이어지잖아요. 저 그렇게 말 없는 분은 처음이었어요. 얼굴은 잘생기셨는데…….”

‘지금 내 앞에서 내 남자 흉보는 거야?’

잘생긴 건 맞지만.

아델라는 그녀의 말을 조금 더 들어보려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말이 없으시긴 하죠.”

“일주일이나 함께 일했는데도 대화가 없어요?”

“예. 제가 뭐 물을 때 빼고는 전과 똑같습니다.”

“아……. 뭐 물을 때요?”

왜 이런 걸 묻는 거지? 이쪽도 이저드한테 관심이 있는 건가?

“네, 제가 일이 서툴러서 조금 귀찮게 물어봤거든요.”

“친해진 건 아니고요?”

“마음을 쉽게 여시는 분이 아니라 친해지긴커녕, 지금도 데면데면합니다.”

진짜로 왜 이런 걸 물어보는 거지? 평소에는 신경도 안 썼으면서. 아델라는 아리송한 표정을 최대한 절제하며 우아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데 그건 왜요?”

“아……. 그저, 오늘도 고생 많으셨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요. 그 정도일 줄 몰랐어요. 제가 너무 무심했어요. 죄송해요.”

“아니에요. 이브니아 님도 밖으로 심부름 다니시느라 고생하셨잖아요.”

아델라와 이브니아는 서로를 보며 싱긋 웃었다. 이브니아의 진한 적안이 아주 잠시 빛났다. 루와는 전혀 다른 빛을 내는 적안이었다.

“제가 그동안 아델라 님을 오해했나 봐요. 말도 없고, 저희를 상대도 안 하시기에 저희랑 어울리고 싶지 않으신 줄 알았어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다.

처음부터 아델라의 인사를 무시한 건 이브니아와 리지나였다. 물론, 아델라가 이브니아와는 어울릴 생각이 전혀 없었던 건 사실이지만.

“제가 낯을 많이 가려서……. 그렇게 보였을 줄은 몰랐어요. 죄송해요.”

“어머, 아니에요. 제가 더 미안하죠. 이렇게 마음 씀씀이가 아름다운 분이신 줄 몰랐어요. 기분이 나쁘셨다면 부디 마음을 푸셨으면 좋겠어요.”

이브니아가 우아하게 미소를 지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아름답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햇살이 그녀의 금발에 비치니 사방이 반짝여 보였다. 이것이 햇빛 효과?

전생에서는 사교계에서 고혹적인 외모로 이름을 날렸다더니. 그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아름답긴 정말 아름다웠다.

‘그런데, 갑자기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지? 하던 대로 하지.’

하루아침에 바뀐 이브니아의 태도에 의문을 품으면서도 아델라는 착실히 얼굴에 미소를 띠웠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런 표정을 내비쳤다가는 이브니아의 페이스에 말려들 것 같았다.

“기분이 나쁘다니요. 저로 비롯해 벌어진 일인데요. 이브니아 님은 괘념치 마세요.”

“제 마음까지 헤아려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이브니아의 행동과 말, 모든 게 예의를 갖춰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더 이상했다.

그 뒤에 그녀는 이저드에 관해 더 묻는 대신 그저 일상적인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델라는 그녀가 분명 속내를 숨기고 웃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딱히 꼬투리를 잡을 게 없었다. 저한테 왜 잘해 주시죠? 갑자기? 라며 따질 수는 없지 않은가.

어쨌든 이브니아가 먼저 말을 걸어오는 턱에, 아델라는 어쩔 수 없이 이 대화가 참 재밌다는 듯 하하 호호 웃어야 했다. 그건 아마도 이브니아도 마찬가지였겠지.

스웰라가 휴게실로 돌아올 때까지 둘은 최대한 웃으며 대화를 나눴다.

* * *

모튼의 편이 된 이후로는 아델라의 행동반경은 훨씬 넓어졌다. 왕족들만 드나드는 곳을 빼고는 전부 출입이 허가된 것이다. 덕분에 종종 본궁도 당당히 다녀올 수 있어서 벽난로들을 조사하기 편해졌다. 주변 눈치를 봐야 하는 게 흠이었지만.

‘문제는 케스너 후작 부인께서 말한, 문이 어디며, 벽난로가 어디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거지. 벽난로가 어디 한두 개여야 짐작이라도 하는데.’

복도뿐만 아니라 각 방에도 벽난로가 설치된 것을 보면 거의 모든 공간을 확인해야 했다. 게다가 각 부서가 쓰는 방이라 물건들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벽난로도 있었다.

요 며칠 동안 복도에 있는 벽난로는 린다가 전부 살펴봤지만, 통로는 찾지 못했다. 그럼 방에 있던 벽난로 중 하나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1층의 방들은 궁의 주요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 사람들로 북적여서 낮에는 확인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눈으로만 훑은 뒤 아델라는 본궁의 서쪽 문을 통해 나왔다. 나오자마자 보이는 건물은 본궁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식사를 책임지는 주방이었다.

맛있는 냄새가 폴폴 풍기는 그곳을 애틋하게 보던 아델라가 곧 정신을 차리고 발길을 돌리려 했다. 그곳을 나오는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기 전까지는.

‘린다 경이다!’

아델라의 표정이 아주 약간 환해졌다.

단발의 붉은 머리와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여인은 린다가 맞았다. 원래는 허리까지 왔던 머리를, 린다는 궁에 들어가기 전 싹둑 잘라 버렸다.

아델라가 린다를 단번에 발견했듯 린다도 금방 아델라를 발견했다. 린다의 회색빛 눈동자와 아델라의 황금빛 눈동자가 찰나에 마주쳤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둘은 아무렇지 않게 서로를 지나쳐 갔다. 그리고 그 순간, 아델라의 손에 아주 얇은 재질의 무언가가 잡혔다.

아델라는 곧바로 주위를 경계하며 사람들의 기척에서 멀리 벗어났다. 인적이 드문 정원에 들어선 아델라는 꽉 쥔 손을 펴 보았다.

작은 쪽지였다.

[외궁 하녀 둘 익사. 왕 정무 복귀 예정. 주의.]

자세한 이야기는 들어봐야 알겠지만, 왕이 복귀하면 어찌 될지…….

그동안 왕은 외궁에서 후궁들과 노느라 본궁에는 드나들지도 않았다. 이저드한테 들으니, 그가 입단했을 때도 잠시 정무에 복귀했다가 다시 침실에 틀어박혔단다.

덕분에 아델라도, 이저드도 아직 왕을 만나지 못했다.

‘이저드가 걱정이네…….’

가장 증오하는 상대를 앞에 두고 감정을 절제하는 것만큼 가혹한 일은 없을 것이다.

아델라는 쪽지를 다시 꼭 쥐고 세자궁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저드한테 쪽지를 전해 주기 위해서였다.

* * *

빠르게 걸음을 재촉하던 아델라가 일순, 움찔 몸을 굳혔다.

멀리에서 한 쌍의 남녀를 발견한 그녀는 더 다가가야 하나 피해가야 하나 가만히 고민했다. 마음 같아서는 둘 사이를 훼방 놓고 싶었지만, 너무 티가 날 것 같아 잠시 망설였다.

‘에이, 티 안 날 정도만 하면 되지! 몰랐다는 듯이!’

그렇게 마음먹은 아델라는 아까보다 더 빠르게 둘한테 다가가 손을 흔들었다. 아주 환하게 웃으며.

“스웰라 님!”

“헉. 아, 아델라 님!”

털썩!

아델라가 나타나자 너무 놀란 스웰라는 이저드한테 건네주려던 작은 상자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래도 다행히 잡고 있던 그대로 떨어져 상자에 충격이 커보이진 않았다.

“엇? 스웰라 님. 상자 떨어지셨어요.”

아델라는 덩달아 놀라서 눈을 크게 키웠다. 스웰라가 이 정도로 놀랄 줄은 몰랐다. 너무 놀란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약간 미안해질 정도였다.

“아, 아, 아니. 이게…… 이건…….”

그녀는 뭐가 그리 당황스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상자를 얼른 들어 등 뒤로 숨겼다.

“스웰라 님?”

둘과 많이 가까워진 아델라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한테 다가갔다. 아델라가 스웰라한테 다가가면 갈수록 스웰라의 눈은 길을 잃고 흔들렸다.

“무슨 일 있으세요? 땀이…….”

“이, 이거!”

마침내 아델라가 스웰라 앞에 서자, 그녀는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냅다 아델라한테 상자를 내밀었다.

“저, 저요?”

그 덕분에 당황한 건 아델라였다. 분명 아까까지는 이저드한테 주려는 것처럼 보였는데?

“예, 예! 아, 아델라 님한테 전해 달라고 방금 말하려던 참이었는데…….”

“아……? 이저드 경한테요?”

변명이 너무 이상했다. 이저드와는 친하지도 않았는데, 그런 이저드한테 전달을 부탁하다니?

“제, 제가 직접 만든 쿠키예요! 맛있게 드셨으면 좋겠어요!”

“어? 저기!”

하지만 아델라가 미처 뭐라 묻기도 전에 스웰라는 쿠키 상자만 덩그러니 주고 사라져 버렸다. 얼핏 봤을 때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뭐죠?”

아델라가 황당하게 이저드를 보자 이저드는 단조로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저한테 묻는 겁니까?”

“아.”

쿠키를 받은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나머지 아델라는 잠시 이저드를 감시하는 약한 기척을 느끼지 못했었다. 몸을 숨긴 솜씨를 봐서는 예사로운 실력이 아니었다. 기척도 아주 훌륭하게 숨긴 편이었다.

‘뭐지? 누구지? 새로운 자객이 붙었나? 어젠 못 느꼈는데?’

그녀는 잠시 이저드를 힐끔 보다가 상자를 빤히 보았다. 기척에 대해 이저드한테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숨어 있는 자들의 귀가 어디까지 밝은지 알 수가 없었다.

‘아, 쿠키. 쿠키가 있었지. 스웰라 님과 쿠키에 대해 묻는 척, 슬쩍 물어봐야겠다.’

“언제부터 이걸 준비한 걸까요?”

“제가 본 건 오늘 아침부터입니다.”

오늘 아침부터? 왜, 갑자기? 모튼한테서 들은 말은 없었다.

“전 몰랐는데…….”

“스웰라 님께서 몰래 준비한 건가 봅니다. 상자를 보니, 이쪽은 아니고…….”

상자? 이쪽? 몰래?

유심히 상자를 보는 이저드에게 아델라는 슬쩍 상자를 내밀어 보았다. 아델라의 얼굴은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남쪽에서 구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남쪽?’

상자를 자객으로 바꿔 생각하면, 이저드는 현재 자신한테 붙은 자객이 남쪽 지역 사람인 것 같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그 잠깐 사이에 이미 자객의 특징을 파악했다는 말이었다. 남쪽 사람들, 특히 바다와 가까이 맞닿은 지역 사람의 특징은 대체로 진한 구릿빛 피부와 억센 억양이었다.

이저드의 대답을 들은 아델라는 급하게 머리를 굴렸다. 왕궁의 세력 중에서도 남쪽 바다에 세력을 둔 귀족이 누가 있더라.

‘아, 아! 왕비를 후원하는 세력!’

왜 여태 잠잠하나 싶긴 했다.

사실 폭정을 했던 왕에게 가려 있어서 그렇지, 아리스의 어머니를 모함하고 그녀인 척 아무렇지 않게 남의 자리에 올라간 왕비도 왕만큼이나 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그 사실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밖에서 보기에 현 왕비는 외도해서 아이를 낳은 죄로 자신의 세력과 왕의 사랑을 모두 잃은 비운의 왕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녀 또한 왕만큼이나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혔고 죽였다. 정말 대단한 천생연분 났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로.

특히 과거, 어린 아리스에 대한 소문의 출처가 현 왕비를 후원하는 가문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녀가 뒤에서 무슨 공작을 피우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 근데, 몰래? 모튼한테 말하지 않고 붙인 거라고? 미리 말이 된 게 아니고? 으음……. 이건 내가 알아봐야 하나?’

아델라는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쿠키 상자를 보았다.

“근데 이거, 이저드 경께 주려던 거 아닙니까? 전 그렇게 봤는데.”

“그건 모르겠지만 아마 아닐 겁니다.”

“제가 멀리서 봤을 때는…….”

“제 생각에는 돌려 말씀하신 게 아닐까 합니다.”

그의 담담한 목소리에 아델라는 약간 놀란 듯 보였다.

“돌려 말해요?”

“가족끼리 맛있게 드시라고 말입니다. 혼자 먹기에는 너무 많고, 다니까요.”

‘으응? 알고 계셨네?’

하긴, 그렇게 눈으로 레널드를 쫓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하긴 했다. 당사자가 몰라서 문제였지. 그렇다면 레널드를 좋아하고 있는 스웰라가 굳이 이저드한테 쿠키를 주려고 한 것은 무슨 의미였을까?

주면서도 그녀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그것도 단순한 긴장이 아니었다. 두려움? 후회? 그런 안 좋은 쪽에 가까웠다.

생각해 보니 최근 스웰라를 포함한 리지나, 이브니아의 태도도 좀 이상했다.

전날에는 이저드와 함께 있으면 말이 안 이어져서 답답하다던 이브니아가 자진해서 이저드와 일을 함께하질 않나. 리지나는 모튼이 말도 끝내기 전에 자신이 이저드와 함께 일을 하고 싶다고 손을 들지를 않나.

서로 눈치만 보던 이들이 먼저 이저드한테 말을 붙이곤 했다. 그 덕분에 아델라는 이틀째 이저드와 말 한마디 못했다. 뭔가 하나가 해결됐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문제가 생기는 것 같았다.

“그래요? 그래도…… 뭔가 제가 줬다 뺏은 것 같은데. 하나만 맛보시겠어요?”

그녀가 굳이 독에 내성이 있는 이저드한테 건넨 것은 정말 만에 하나의 상황이었지만, 혹시 뭔가 들었을까 봐서였다. 물론, 뭔가 들었다면 아델라한테 건네지는 않았을 것이다. 좋아하는 이의 동생을 독살하는 건 좀 이상했으니까.

“잠시.”

이저드도 아델라의 의도를 파악하고 상자를 받아든 뒤 뚜껑을 열어 확인했다. 하지만 이저드의 코끝에는 달콤한 향만 확 퍼졌을 뿐,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담담하게 쿠키 하나를 꺼내 맛본 이저드는 상자를 아델라한테 돌려 줬다.

“맛있습니다. 그럼, 전 이만 돌아가 봐도 되겠습니까? 시간을 지체해서 말입니다.”

쿠키에는 아무 이상이 없는 모양인지, 이저드가 담담하게 말했다.

“예! 제가 너무 잡아 뒀네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럼.”

이젠 이저드의 이런 무뚝뚝함도 익숙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델라는 아까 세자궁으로 빨리 달려온 이유를 망각하지 않고 쪽지를 쥔 손을 살짝 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저드는 그런 아델라의 옆을 지나쳐 왕실 기사단 건물이 있는 쪽으로 사라졌다.

‘확실히 이저드만 따라가네.’

이저드가 멀리 사라지자, 그들의 기척도 함께 사라졌다.

‘모튼은 이저드가 왕궁에서 죽으면 곤란한 상황이어서 자객을 심어놓지 않은 걸텐데, 왕비는 왜 이런 선택을 한 거지? 아들이 답답해서? 아니면 그냥 감시자로 심어둔 건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아델라는 상자에서 쿠키를 꺼냈다. 동그란 머랭 쿠키였다. 아델라가 평소 보던 머랭의 크기보다는 2배 정도 큰 크기였다.

머랭 쿠키의 반을 깨무는 순간 입안에 퍼지는 맛을 아델라는 뭐라 형용할 수 없었다. 아작, 하고 깨물면 초콜릿 향이 입안 가득히 퍼졌다. 겉은 바삭한데 안은 쫀득하고 보드라워서 금방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렸다.

‘아니? 그냥 머랭 쿠키보다 약간 더 클 뿐인데?’

스웰라의 쿠킹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가게를 차려도 될 정도의 솜씨였다.

‘이걸 이저드한테 주려고 했다고? 왜? 좋아하는 건 오라버니가 아니었나? 맞는데? 굳이 날 안 통한 이유가 있는 건가? 뭐지?’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스웰라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아델라는 고민하면서 야금야금 상자에서 쿠키를 꺼내먹었다.

그리고 아델라가 세자의 집무실 근처에 도착했을 때는 상자의 쿠키가 거의 사라져 있었다.

“엇, 오라버니 준다는 걸 깜박했다. 사라졌어. 15개는 넘게 있었는데…….”

이제 달랑 2개 남았다. 아쉬운 표정으로 상자를 내려 보다가 군침을 삼킨 아델라는 세자의 집무실로 향했다. 세자의 집무실 앞에는 레널드가 지키고 서 있었다.

“자.”

“어? 응?”

아델라가 다짜고짜 작은 상자를 내밀자, 레널드는 얼떨떨하게 받아들었다.

“뭐야, 이게?”

“쿠키.”

레널드는 약간 감동 반, 불신 반이 섞인 눈빛으로 아델라를 보았다.

“네가 만든 건 아니겠지?”

“당연하지.”

그녀의 즉답에 금세 레널드의 입에서 한숨이 튀어나왔다.

“내가 받은 거야.”

“뭐? 누가 쿠키를 너한테 선물해?”

실망한 티를 내던 레널드가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레널드를 놀려 줄까 했지만 스웰라가 생각나 아델라는 그에게 사실대로 말해 줬다. 쿠키를 거의 다 먹어 버린 게 찔리기도 했고.

“스웰라 영애께서.”

“어떤 자……. 아, 스웰라 영애.”

그는 뒤에 어떤 자식이야, 라고 묻지 않은 걸 다행으로 생각했다. 하마터면 동생 앞에서 망신당할 뻔했다.

“오라버니랑 같이 먹으라고 줬는데, 내가 너무 많이 먹어 버렸어. 이해해.”

원래는 레널드를 위해 만든 걸 텐데.

양심이 콕콕 찔렸다. 정확히는 레널드한테 미안한 게 아니라, 스웰라한테 미안했다. 정성을 다해 만들었을 텐데, 맛있다며 아델라가 홀랑 다 먹어 버렸으니…….

“얼마나 먹었는데…….”

언제나 당당하던 아델라가 괜히 시선을 돌리는 게 이상했던 레널드가 슬쩍 상자 뚜껑을 열었다.

“……여기 얼마나 있었는데?”

상자 안의 쿠키를 확인한 레널드가 침착하게 물었다.

“음……. 15개는 넘었어. 내가 15개를 먹었거든.”

“근데 오라버니한테는 딸랑 2개 남겨준 거야?”

“남겨준 게 어디야? 너무 맛있어서 내가 다 먹고 증거인멸까지 할까 생각했어.”

스웰라가 생각나 중간에 자제한 거다.

진심처럼 보이는 아델라의 표정에 레널드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그리곤 레널드는 뚜껑을 덮은 상자를 아델라한테 도로 돌려 줬다.

“됐다, 됐어. 나 단 거 싫어해. 너나 많이 먹어.”

“뭐? 내가 저― 앞에서 여기까지 남겨 왔잖아.”

“남겨 온 건 고마운데, 나 단 거 싫어한다니까?”

“안 돼. 하나라도 먹어. 이게 얼마나 맛있는데, 이걸 거부해? 너 평생 후회한다?”

“너어? 너, 오라버니한테―!”

한편, 레널드와 아델라가 옥신각신하는 소리를 다 들은 이가 있었다. 애써 밖에서 들리는 소리를 무시하려 했지만, 점점 소리가 커져서 듣고 싶지 않아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남매의 대화를 듣던 모튼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원래 저런 성격인데, 낯을 가려서 숨기고 있던 건가?’

확실히 모튼과 대화할 때보다 아델라의 목소리가 밝았다. 거기에다가 저리도 당당하다니, 의외로 웃긴 구석도 있었다.

아델라의 성격을 파악하기 힘들어서인지 모튼은 흥미가 동했다. 어쩔 땐 어른스러웠고, 어쩔 땐 아이 같은 그녀가 흥미로웠다.

조곤조곤 실랑이를 벌이는 두 남매의 싸움이 계속되자, 서류를 확인하던 모튼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쿠키가 얼마나 맛있기에 그런가? 나도 하나 먹어 보지. 경도 먹고.”

결국 둘의 싸움을 중재한 건 모튼이었다.

모튼의 명에 레널드는 어쩔 수 없이 쿠키를 먹어야 했다. 모튼은 그때 레널드를 초롱초롱한 눈으로 보는 아델라를 처음 보았다.

레널드를 눈빛으로 압박해서 맛있다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아델라는 휴게실로 돌아갔고, 집무실 앞에는 두 사내만 남았다.

“원래 둘이 그렇게 대화를 나누나?”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그게 아니라 의외라. 남매 대화가 원래 그런가?”

레널드는 뭐가 원래 그런 건지는 몰랐지만,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델라가 절 많이 편하게 생각해서요! 절대 다른 사람한테 저렇게 굴지 않습니다.”

모튼이 아까 아델라의 말버릇을 지적하는 건줄 알고 레널드는 얼른 변명했다.

“편하게? 언제 그리 친해졌지?”

“아, 저하께서 제 동생을 용서해 주신 후로……. 아델라가 생각을 달리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럼 내 덕이군?”

모튼의 목소리가 자신만만하게 들렸다. 레널드는 모튼의 기분이 약간 우쭐해진 것을 눈치채고 얼른 허리를 푹 숙였다.

“예, 맞습니다. 다 저하의 은덕입니다. 아델라와 관계가 회복된 건 전부 저하의 덕입니다. 황송하옵니다.”

“그래. 내가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

이상한 착각의 늪에 빠져 있는 모튼을 보며 레널드는 진심으로 약간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아델라가 보인 행동 중, 뭐가 진심이고 뭐가 거짓인지는 레널드도 전부는 모른다. 하지만 모튼 앞에서 보이는 모습은 거의 99퍼센트 거짓이었다. 이걸 차마 말할 수 없으니 레널드의 속은 답답하기만 했다.

반면, 모튼은 아델라가 처음 궁에 들어와 도와준 이가 자신이라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아델라가 자신의 손에서 빠져나갈 이유가 점점 없어진다는 게 그로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아직 어리지만 예쁘장한 외모에, 앞으로 크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몸. 무엇보다도 시선을 사로잡는 저 눈…….’

처음 아델라를 회유할 때 모튼은 그녀에게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이저드와 친해져 이저드의 속을 캐내기 위한 수단 정도로만 생각했다. 아무래도 작고 여린 여자아이를 매몰차게 대하기란 쉽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조금씩 가깝게 해서 결국 그녀를 시켜 이저드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볼 작정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그 이상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모튼은 아델라를 이용해 이저드를 휘두를 날이 언젠가 생길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 생각이 후에 자신한테 그대로 돌아올 줄도 모르고.

* * *

한껏 가벼운 마음으로 걸음을 옮기던 아델라는 휴게실 근처에 의아한 표정으로 멈춰 섰다. 그 앞에는 아까 쿠키를 주고 간 스웰라가 흙빛이 된 얼굴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지도, 그렇다고 뒷걸음질 치지도 못한 채 굳어 있었다. 아무래도 안에서 쉬고 있을 이브니아와 리지나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이걸 어쩐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말을 들었기에 저러지?’

아델라는 퍽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조금 멀리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그렇게 서 있던 스웰라는 곧 점점 뒷걸음질을 치며 휴게실에서 멀어졌다. 아델라는 그녀의 움직임에 맞춰 복도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다행히 스웰라는 그런 아델라를 보지 못하고 어딘가로 뛰어갔다. 잠시 스쳐 지나간 스웰라의 눈에는 확실히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려 있었다.

그녀가 멀어지고 난 다음에야 아델라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휴게실 앞에 섰다. 귀를 기울이자 이브니아와 리지나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어쩔 수 없죠. 우리 중 누군가는 희생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잘못되지는 않겠죠? 만일 실패하면…….”

“그 또한 우린 모르는 일이예요. 명심해요, 리지나 영애. 우린 여기서 끝나면 안 되는 사람들이에요. 알겠죠?”

그들이 말하는 ‘희생’은 왠지 스웰라를 향하는 것 같다고 아델라는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저 대화를 듣고 스웰라가 울먹이며 도망갈 이유가 없어 보였다. 아델라가 듣기 전에 비슷한 말을 했기 때문에 스웰라가 뛰쳐나간 게 분명했다.

아델라는 잠시 눈을 도르륵 굴리다가 아까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스웰라와 얘기를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스웰라 님.”

“흡!”

아까도 그랬지만, 아델라는 여러모로 스웰라의 심장을 들었다 놨다. 스웰라가 크게 소리를 낼 걸 예상한 아델라는 급히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입술에 대며 쉿, 하는 행동을 취했다.

스웰라의 동그랗게 뜬 녹빛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맺혀 있었다.

‘으음, 울고 있던 거 맞네.’

스웰라는 생각보다 멀리 나가지 않았다. 눈물만 훔치고 돌아올 생각이었는지, 세자궁 근처 수풀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아델라는 스웰라의 곁에 주저앉기 전에 주변을 미리 훑었다. 이 정도 거리면 레널드가 둘의 기척을 느꼈을 것이다.

‘스웰라 님한테 유감은 없지만, 이저드한테 위해를 가하는 일이라면 미리 끊어 놓을 필요가 있어.’

아직 레널드의 움직임이 포착되지는 않았지만, 둘이 계속 수풀 속에 숨어 있으면 그가 확인 차 이곳으로 올 것이다. 아델라는 그동안 시간을 끌 생각이었다.

“제가 안 물어보려고 했는데 전에 운 거,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생겨서는 아니죠?”

“…….”

아델라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지만, 스웰라는 대답하는 대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땅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말 못할 이유가 있군요. 좋아요. 그럼 다른 걸 물을게요. 이저드 경 좋아하세요?”

“아, 아뇨!”

이쪽은 바로 답이 나올 줄 알았다.

“알아요. 저희 오라버니 좋아하시죠?”

“그걸 어떻게…….”

그녀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크게 떨렸다. 놀라서 숨을 삼킨 스웰라는 아델라를 쳐다보았다.

“티 나거든요. 오라버니는 모르는 것 같지만.”

레널드가 모르는 것 같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이저드 경이 아니라고 생각한 건 따로 있어요. 이저드 경한테 향하는 눈빛부터가 달랐거든요. 좋아하는 사람을 보는 눈은 아니죠.”

“마, 맞아요……. 전 그냥…… 정말로 전해 달라고 부탁하려 했을 뿐이었어요.”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런 말을 하면 믿음이 많이 안 가는데. 그걸 알까 모르겠다.

“그래요. 셋 다 이저드 경이 좋아서 가까이하려는 것처럼은 안 보였죠. 이브니아 님, 리지나 님, 스웰라 님한테는 공통점이 있어요. 갑자기 행동을 바꾼 것. 그리고 이저드 경을 볼 때, 불안하고 두려운 눈빛을 하는 것. 스웰라 님은 눈빛하고 행동으로, 나머지 두 분은 주변을 살피며 불안해하는 모습으로 티가 나더라고요.”

“두렵다니요. 그건 그냥, 이저드 경이 머, 멋있으시니까……. 그래서 좋아하진 않아도 떨리니까…….”

자신이 지금 어떤 아무 말을 내뱉고 있는지 알까? 그녀는 뭘 그렇게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 걸까. 무엇이 두려운 걸까.

아까 이저드와 나눴던 대화를 상기시키며 아델라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왕궁에 이제 갓 들어온 저도 알아챘어요. 이저드 경이 못 알아챘을 것 같나요?”

아델라는 뻔뻔한 표정으로 심각하게 말했다. 갓 들어온 건 맞지, 뭐.

그러자 스웰라가 말없이 바닥만 보았다.

“그래도 여태 이 궁에서 스웰라 님이 절 챙겨 주고 걱정도 해 주셔서 하는 말이에요. 만일 이대로 무언가 하실 작정이시라면 그만두세요. 이저드 경이 알아채는 건 시간문제예요.”

거기까지 말했는데도 스웰라는 불안함에 자신의 두 손만 꽉 포개고 있을 뿐, 말이 없었다.

“방금 이브니아 님과 리지나 님의 대화를 우연히 들었는데, 희생할 사람이 필요하다더군요. 그거, 스웰라 님 아닌가요? 일이 틀어지면 스웰라 님이 잘못되시는 거 아니에요?”

“아, 아니에요. 아닐 거예요.”

스웰라는 애써 부정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설마 저?”

스웰라가 도통 입을 열지 않자 아델라는 하는 수 없이 그녀를 떠보았다.

“그럴 리가요!”

생각보다 더 격한 반응이 돌아왔다. 스웰라는 놀란 표정으로 아까보다 더욱 세차게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스웰라는 이저드나 다른 영애 둘, 그리고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는 전혀 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아델라와 레널드가 관련된 이야기는 반사적으로 답했다. 스웰라는 레널드한테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다. 더불어 아델라한테도.

“하지만…… 넷 중에 희생될 사람은 가장 신분이 가장 낮은 저 말고는 없는데요?”

“오해예요! 그렇지 않……!”

바스락.

주저앉아 있는 아델라와 스웰라 위로 어느새 한 사람의 그림자가 겹쳐졌다. 다시 한번 크게 부정하려던 스웰라는 둘을 쳐다보는 시선에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는 숨을 멈추고 굳은 표정으로 그림자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방금, 무슨 소립니까?”

그들 사이에 스산한 바람이 스쳤다. 스웰라의 눈에는 절망과 두려움이 가득 찼다.

그리고 그런 스웰라를 내려다보는, 아델라를 닮은 황금빛 눈동자에는 어느 때보다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레, 레널드 경.”

스웰라의 목소리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렸다. 벌벌 떠는 스웰라가 안쓰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델라를 제외한 세 명의 시녀들의 태도가 바뀐 이유를 알아내려면 이 방법이 가장 확실했다. 스웰라는 레널드한테만큼은 확실히 약했으니까.

“스웰라 영애.”

“예, 예.”

“방금 그 이야기, 제가 자세히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말씀해 주시죠.”

“그, 그것이…… 그…….”

우물쭈물하던 스웰라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그녀가 흐느꼈다.

“흐흑, 흑!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여태 의연하게 주변 사람들과 잘 지냈던 스웰라가 눈물을 터뜨리자, 아델라는 그녀에게 조용히 손수건을 건넸다. 18살이 감당하기에는 힘든 상황이긴 했다. 말하면 말한 대로, 말 안 하면 안 한 대로, 양쪽에서 압박을 주는 상황이었다.

“그렇게만 말씀하시면 저는 이 이야기를 아까 들은 대로만 저하께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레널드는 그녀가 울거나 말거나 흔들림 없이 스웰라를 추궁했다.

그는 이런 일을 한두 번 겪어 본 게 아니었다. 왕궁에서 권력을 잡기 위해 자식들을 앞세우는 가문은 많았다. 그리고 그만큼 그들 밑에서 성장한 아이들은 영악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그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떨고 있는 스웰라를 보고도 흔들리지 않았다.

“아, 안 됩니다. 제발, 그것만은…….”

저렇게 몰아붙이지 않아도 스웰라라면 레널드한테 결국 실토하게 될 텐데…….

“오라버니, 잠시만.”

“넌 돌아가.”

레널드가 계속 이렇게 몰아치기만 하면 스웰라에게 확실한 이야기를 듣기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아델라가 하는 수 없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으나, 곧바로 레널드한테 저지당했다.

그의 단호한 눈빛이 아델라를 향했다. 아델라는 스웰라를 힐끔 보다가 작게 한숨 쉬었다.

“스웰라 님.”

“예, 예?”

“아델라, 돌아가라니까?”

레널드의 압박에도 아델라는 아무렇지 않은지, 스웰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기백에 스웰라는 금방 기가 눌려 몸을 움츠렸지만 아델라는 그런 기색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저만 보세요, 스웰라 님.”

처음에는 아델라를 제대로 보지 못하던 스웰라는 아델라가 계속 시선을 맞춰오자, 천천히 아델라와 눈을 맞췄다.

“전 아가씨를 도울 수 있어요. 저하께는 제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라고 말하면 돼요. 그러니까 저희한테 숨기지 말고 말씀해주세요. 그래야 제가 당신을 제대로 도와요. 물론, 저희 오라버니도요.”

아델라는 웃으며 레널드를 보았고, 레널드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인상을 구겼다. 스웰라는 그런 레널드를 보며 심장이 철렁였다. 아직 마음도 전하지 못했는데, 그전에 이미 레널드는 자신한테 실망만 가득 한 것 같았다.

그의 눈에 자신이 얼마나 못나 보일까. 이러려고 궁에 들어온 것이 아닌데, 그와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것 같았다.

“스웰라 님, 이건 저하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스웰라 님을 위해서이기도 해요. 오명을 쓰고 궁에서 쫓겨날 수는 없잖아요.”

‘이건 과장한 거지만.’

이미 두려움으로 질린 스웰라의 귀에는 아델라가 첨가한 약간의 과장을 구분할 정신이 없었다. 스웰라는 거기까지 예상하지 못한 듯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저 표정을 보니, 이대로 타이르기만 하면 상황을 전부 이야기 할 것도 같았다.

“스웰라 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있잖아요.”

아델라는 다시 한번 ‘저희’라는 말로 레널드를 포함시켜 스웰라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러자 한참 만에 스웰라가 입을 뗐다.

“두 분 다……. 저하의 사람이죠?”

“당연한 말씀을 하시네요.”

아델라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하께 도움이 될 만한 선택을 하시겠네요. 그렇죠?”

“그럼요.”

이저드가 안전하다는 전제하에 움직이겠지만.

지금도 굳이 스웰라를 타일러서 자세한 상황을 들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전부 이저드를 위해서였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 이저드한테 해를 가하려는지 알고 싶었다. 미리 알아 두면 나쁠 게 하나도 없었다.

“사실은…….”

그리고 잠시 후, 아델라의 예상대로 스웰라는 울음을 삼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 * *

“정말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레널드는 충격이 가시지 않는 표정으로 아델라를 보았다.

자신의 여동생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침착하게 대처하는 모습도 그렇고, 스웰라를 달래서 전부 실토하게 하는 모습도 정말 믿기지 않는 모습이었다. 왕궁 사람들이 모두 영악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새 발의 피였다.

적어도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감추지 않았다. 아니, 감추지 못했다.

“아까 스웰라 영애를 부드럽게 대한 거, 다 이유가 있었던 거였어? 전부 실토하게 하려고? 너 진짜 대단하다.”

아델라는 특유의 부드러운 분위기와 순한 인상으로 사람의 약한 부분을 파고들었다. 자신의 장점을 적절하게 쓰고, 갈무리하는 방법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더 신기한 것은 그럼에도 아델라한테 권력에 대한 욕망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속이야 어찌 됐든, 겉으로 보이는 아델라는 너무나도 세상 물정 모르고 순진한 아가씨 그 자체였다.

“꼭 그 이유만은 아닌데. 스웰라 님을 돕고 싶기도 했고. 안타깝잖아.”

“안타깝긴. 왕궁에 들어왔을 때 각오를 했어야지.”

한 사람만 보고 들어왔다가 이렇게 이용당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원래 사람은 자기가 직접 겪어봐야 알게 되는 법이다.

“시녀라고 해도 이제 막 성인이 됐거나 아예 미성년자인 애들이거든? 암투를 벌이다 사람을 죽이는 일이 쉬운 줄 알아?”

“그런 거에 일일이 흔들리면 왕궁 일 못 해.”

레널드의 담담한 목소리에 아델라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아니, 그런 일로 사람이 죽어 나가는 이 왕궁이 이상한 거거든!’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걸음을 더 빨리했다.

“너, 스웰라 영애 돕는 것도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 거지?”

“요즘 내 성격 파악하려고 노력 많이 하네?”

그래봤자 레널드 앞에서 아델라가 진심을 보일 수 있는 날은 없을 테지만. 아델라는 레널드가 의심하는 그대로 있어 줄 생각으로 계속 말을 이었다.

“뭐, 그렇지. 아무것도 없는 나한테는 인맥이 중요하니까.”

레널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

“하지만 힐튼 백작가는 그렇게 큰 세력이 아닌데. 중앙 귀족이긴 하지만.”

굳이 아델라가 나서서 도울 가문은 못 됐다. 그는 아델라한테 사람을 잘못 고른 것 같다는 의미로 은근하게 이야기했다.

“오라버니는 스웰라 님의 다른 모습은 못 봤지?”

“응?”

레널드가 본 스웰라는 매우 조용하고, 말이 없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은 아델라가 아는 스웰라와는 전혀 달랐다.

“스웰라 님은 성격이 좋아서 주변에 아는 귀족 자제들이 많아. 주변 사람들도 잘 챙기고 주도해서 대화를 이끌어서 스웰라 님 곁에 있으면 다들 즐거워해.”

첫날부터 보아온 스웰라는 레널드 앞에 있을 때 빼고는 거의 항상 웃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덕분에 주변 사람들은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물론, 가문에서 단단히 교육한 걸 테지만, 그걸 빼고도 스웰라는 기본적으로 미소가 많은 사람이었다. 자기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기도 했고.

“그래? 내가 아는 모습하고 다른 걸 보면, 그것도 본성을 숨긴 거겠지.”

이 사람, 앞으로 연애는 못 하겠다. 눈치가 너무 없었다. 다른 때는 모르겠지만, 레널드 앞에 있을 때의 스웰라는 정말 확연히 달랐는데 말이다.

‘도대체 이 모습 어디를 좋게 볼 수 있지? 이해할 수 없지만, 세상은 넓으니까.’

아델라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게 스웰라 님의 본성이든 아니든, 빚을 만들어 놓으면 언젠가 쓸 일이 있겠지. 나중에 사교계에 나갈 때 도움도 될 거고.”

“그래 봤자, 중앙 귀족들은 자기들끼리만 뭉쳐. 그쪽은 포기해. 변방의 귀족들은 취급도 안 하니까.”

“오라버니는 저하의 최측근인데도?”

“저하의 곁에 머물 때 제일 반대한 놈들이 그놈들이야. 엮여서 좋을 거 없어.”

레널드가 정색하며 인상을 구겼다. 아무래도 중앙 귀족들한테 꽤 시달렸나 보다. 어쩐지 처음 보는 스웰라를 거부감과 적의로 대한다 싶었다. 무시는 덤이었고.

“그래도 사람의 일은 모르는 거니까, 내 편을 만들어 둬서 나쁠 건 없잖아? 나중에 언제 어떻게 쓰일지 모르는 거고.”

틀린 말은 아니라 그런지 레널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힐끔 올려보던 아델라는 고개를 돌려 앞을 보았다.

아델라는 스웰라를 이용하기 위해 스웰라 대신 모튼한테 보고하겠다고 한 게 아니었다. 이대로 가면 스웰라가 희생될 게 뻔했기 때문에 도와주는 것뿐이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꼴이니까 말이다.

그녀는 이곳에 무고한 희생을 줄이려고 왔지, 희생을 더하려고 온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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