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2장. 그녀는 보고 싶다
펜베르크 성에 돌아온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그 사이 아주 약간? 아니, 좀 크게? 후폭풍이 불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당연히 아리스의 존재 때문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이저드가 공작에게 사실을 숨기고 위험한 곳에 다녀왔기 때문이었다.
아리스와 케스너 후작 부인과 함께 펜베르크 성으로 돌아온 이저드는 두 분을 며칠 쉬게 하고 본격적으로 미하일 공작을 설득했다. 하지만 첫날에는 미하일 공작이 잔뜩 화가 나서 이저드와 아리스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공작이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만났을 때는,
“예에? 빠져요?”
“예.”
이저드가 계획에서 제외되었다.
아델라는 아리스와 이저드가 미하일 공작을 설득하는 동안, 꾸준히 먹고, 간간히 일을 했고 규칙적으로 운동했다. 가끔 린다나 헤이든, 이저드와 함께 하는 날도 있었고 아닌 날도 있었는데 오늘은 린다가 함께했다.
아델라는 린다로부터 공작가 소식을 전해 들으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저드 님이 계획에서 제외되면, 아리스 님은요?”
“아리스 님은 당연히 포함이죠. 가주들끼리 진행하겠답니다. 아무래도 각하께서는 전적이 있으니, 다시 아들을 잃는 게 두려우셨겠죠. 군사를 일으키는 게 장난도 아니고.”
린다의 말에 아델라는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그렇게 치면 전적이 있는 이저드도 아버지를 잃는 게 두려울 터였다.
“미래에서 시간을 돌려서 돌아왔다는 말은 믿으세요?”
“저희랑 비슷한 것 같습니다. 안 믿기에는 애가 너무 많이 바뀌었고 믿기에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고.”
린다는 아델라의 곁에 붙어 같이 뛰며 대답했다.
“우리의 편이 아닐 사람들을 걸러 내기 위해서는 이저드 님의 기억이 필요할 텐데요?”
“그렇긴 한데 절대 안 된답니다. 죽을 수도 있는 일이라 이저드 님은 절대.”
미하일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과거 군사를 이끌고 출정했다가 아내와 아들을 잃었던 기억이 있으니까 말이다.
“이저드 님은요? 괜찮으시대요?”
“말로는요. 각하의 마음을 이해한대요.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만 털어 놓고 물러섰습니다.”
그 역시 이해할 것이다. 가족을 잃은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저드였으니까.
“그러니, 두 분은 이제 이 일에서 손 떼십쇼. 아이는 아이답게 지금 이 시간을 즐기세요.”
린다의 말에 아델라는 말똥말똥 눈을 깜박이다 씨익 미소 지었다.
“사고 칠 생각 마시고요.”
그 미소를 본 린다는 왠지 기분이 싸해져서 덧붙였다.
“사고라뇨. 제가 언제 그렇게 사고를 쳤다고. 아이는 아이답게, 무럭무럭 커야죠.”
아델라가 환하게 웃자, 린다는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순진무구하게 웃는 게 더 불안했다.
“아니, 정정할게요.”
린다는 앞서가는 아델라를 따라잡고 다시 입을 열었다.
“예?”
“사고를 치더라도 저한테는 꼭 말해 주고 치십쇼. 나중에 수습이라도 하게.”
“음…….”
‘진짜로 사고 칠 생각이었냐고요.’
방심할 수 없는 커플이었다.
아델라가 이런 반응을 보이자, 린다는 어쩌면 이저드도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 쉽게 물러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하일을 설득하기 위해 그 먼 곳에서 아리스까지 데리고 왔다. 그 정성을 생각하면 이저드가 이번 계획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미하일이 반대하자 바로 물러나다니? 어쩐지 이상했다.
“약속입니다? 저한테 꼭! 말해 주세요. 각하께 안 알릴 테니까.”
린다가 힘주어 말했다. 그에 아델라는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린다 경이 판단했을 때 위험한 일이면 알릴 거잖아요.”
그거야 당연했다.
물론, 아델라와 이저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걸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당연하다고 말할 수 없었지만.
“그 말은, 위험한 일을 계획 중이시라는 겁니까?”
“아니요? 아직은 계획 없습니다.”
아델라는 순순히 대답했다.
“아직은…?”
“네!”
역시나 당당했다. 그러니까 아직은 계획이 없는데, 앞으로 계획이 생긴다면 위험할 수도 있다는 말인가?
“지금은 쑥쑥 커야죠! 아이답게.”
기분 좋게 웃는 아델라도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린다한테 호의적이어서 쉽게 넘어올 줄 알았더니. 린다는 아무래도 이저드와 아델라한테 꼭 붙어 있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다른 말로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아가씨 아버지 일은 어떡합니까? 각하께서 화가 많이 나서 아직 그 이야기 꺼내지도 못했답니다.”
애당초 아델라는 아버지의 일이 바로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공작가에서 아무 연고 없는 벨제프 자작을 치는 것도 이상했고, 고발한다고 해도 쉬이 잡힐 사람은 아니었다.
‘2년 동안 기다려야 하나? 이 일이 성공한 다음에 잡아야 확실하긴 한데…….’
아리스가 제자리로 돌아간다면 좀 더 확실한 힘을 휘두를 수 있을 테지만, 그동안 해를 입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당장에라도 잡아넣어야 할 사람이었다.
아델라는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전생에 루는 왜 아델라의 아버지를 펜베르크 성까지 데리고 왔던 걸까? 지금 생각해 보면 루는 함부로 아델라가 있는 곳을 노출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말로는 막힐 걸 예상하고 왔다지만, 루는 그렇게 막연한 생각에 따라 움직이는 성격이 아니었다.
아델라가 위험할 만한 곳은 전부 피해서 움직였던 루가 가장 위협이 될 인물을 괜히 그녀의 가까운 곳까지 안내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땐 왜……?’
아델라는 전생을 되돌아보다가 짚이는 부분이 있어 린다를 쳐다보았다.
“펜베르크 성은 치안이 좋죠?”
“매우 좋은 편이죠. 대륙에서 손꼽을 정도로요. 그런데 갑자기 치안은 왜요?”
“그리고, 범죄자한테 처벌도 강하고요.”
아델라가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린다는 의아해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초범한테는 좀 약하지만, 상습범은 뭐. 얄짤 없죠.”
“그 범죄자가 귀족이라고 해도요?”
“음?”
아델라의 물음을 이제야 이해한 린다가 믿기 힘든 표정으로 애매하게 웃었다.
“설마…… 자작을 펜베르크 성으로 부를 생각은 아니죠?”
“옛말에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는 이야기가 있죠.”
‘너무 상큼하게 말하는 거 아닌지…….’
아델라가 당당하게 대답하자, 린다는 황당함에 뭐부터 물어야 할지 속으로 말을 골랐다.
“어떻게요? 아델라 님이 나서면 위험할 텐데.”
“위험하더라도 나서야 한다면 나서야죠. 일단…… 소문을 흘려서 그 인간이 이곳에 오게 해야겠어요.”
“그 뒤는요?”
“그 뒤에는 잡혀갈 만한 일을 만들어야죠. 초범이 아닌 증거와 증인은 저희한테 있으니까.”
아델라는 그 인간을 다시 볼 생각에 벌써부터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이 정도는 견딜 수 있었다. 그를 잡지 않아 그가 벌일 일들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델라는 앞으로 그로 인해 고통 받을 사람들이 적어지는 것에만 신경 쓰기로 했다.
* * *
현재 왕이 즉위한 이후 폭정만이 계속되자 귀족들은 아부를 떠는 이들만 살아남았고, 지방 관리인들은 부패한 이들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어차피 열심히 일해 봤자 알아주는 이들은 없었고, 상사를 고발하면 가차 없이 잘렸다.
그런 와중에 범죄자를 제대로 처벌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일도 제대로 하지 않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더욱이 대상이 귀족이라면, 벌하는 이가 있을 리 없었다.
아무리 한미한 귀족가라도 건드리면 어떻게 될지 뻔히 아는 이들은 다들 귀족들이 뭘 하든 쉬쉬했다. 귀족들이 아무리 수많은 사람을 착취하고 죽이고 겁탈해도 그들에게 제대로 처벌을 내리는 곳은 거의 없었다.
‘그게…… 그 인간이 무슨 짓을 해도 잡히지 않았던 이유지. 나라가 썩어서. 평민들은 전부 잡아가면서도 귀족들은 떵떵거리고 잘 살았지.’
그 대표적인 피해자가 지금 아델라의 새어머니였다.
평범한 농부의 딸이었던 새어머니는 태어나 처음으로 딱 하루, 도시로 나갔다가 자작에게 겁탈당해 잡혀 왔다. 21살이라는 아주 어리고 앞길 창창한 나이에.
“어머니.”
“응? 아델라 왔니?”
부엌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새어머니의 마른 몸을 보며 아델라는 다시 한번 마음을 굳혔다.
‘그 인간, 감옥에 가는 거 꼭 볼 거야.’
아델라가 벨제프 자작을 펜베르크 성으로 불러들이려는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귀족들한테 한없이 너그러운 다른 지역과는 다르게 펜베르크 지역은 범죄자로 밝혀진 이에게 가차 없었다. 영주가 영지를 버리지 않은 지역 중에서도 펜베르크 성은 단연 최고였다.
특히나 펜베르크 지역은 가중 처벌이 강해 범죄자가 함부로 발을 들여놓지 않는 곳이었다.
물론, 숨기고 살려고 마음만 먹으면 숨길 수 있어 범죄자가 아예 없다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잡히면 과거에 지었던 죄까지도 전부 처벌받기 때문에 펜베르크는 범죄자들한테는 기피 지역 1순위였다.
‘그놈이 잡히면 마음고생 그만하셔도 되니까. 그리고 어머니가 행복하게 사는 모습도, 꼭 봐야지. 돌아가실 때까지 행복하게 사시게.’
잃어버린 시간을 돌려 드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듣고, 좋은 일만 생기게 해 드릴 것이다.
아델라는 어머니를 보고 있으면 어떤 일이 벌어져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머니가 견딘 세월을 생각하면 아델라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머니.”
“응?”
아델라가 다시 한번 그녀를 불렀다.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새어머니가 손을 앞치마에 닦고 아델라한테 다가왔다.
“왜? 밖에서 운동하다 무슨 일 있었니?”
“으음. 아뇨. 그게 아니고, 어머니 이름이 생각나서.”
“내 이름? 내 이름을 기억하니? 우리가 만난 날 이후로 내가 말한 적이 있었던가?”
새어머니조차도 오랫동안 잊고 있던 자신의 이름이었다. 아델라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아뇨, 없었죠. 제게 ‘난 릴리아야, 넌 이름이 뭐니?’ 라고 한 이후로 없었죠. 전 그 뒤로 계속 아줌마라고 그랬고.”
그때 왜 어머니 이름을 불러 주지 못했을까. 바뀐 환경, 바뀐 생활, 바뀐 사람들. 그 모든 게 낯설었을 그녀한테 가장 익숙한 이름조차 잊게 했다.
“그걸 기억해?”
새어머니, 아니, 릴리아는 진심으로 놀란 표정으로 아델라를 보았다.
“그럼요. 어떻게 잊겠어요. 왜 그때는 이름 말고 아줌마를 고집했는지 모르겠어요.”
어쩌면 자신도 은연중에 죽은 친어머니를 보내지 못한 걸지도 몰랐다. 자신에게 어머니는 한 분뿐이고, 다른 사람은 어머니라고 인정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릴리아를 끝까지 아줌마라고 불렀는지도 모르겠다.
“아줌마 맞지.”
“적어도 이름을 부를 순 있었는데. 죄송해요.”
“괜찮아. 이름이 대수니? 난 네가 이렇게 씩씩하게 커 줘서 고마워.”
릴리아는 작은 아델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이름이 대수라뇨.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데요. 부모님이 지어 주신 엄청 예쁜 이름인데!”
아델라가 그녀의 손길에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전 이제 아줌마 아니고 어머니라고 부르겠지만 어머니는 릴리아로 사세요. 이웃 분들한테도 자기소개 하실 때 릴리아라고 하시고. 어차피 어머니가 제 보호자인 건 제가 가장 잘 아니까요.”
“뭐?”
“아델라의 보호자가 아니라, 애기 엄마 그런 거 아니라, 릴리아로요. 릴리아 댁, 좋네요.”
아델라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릴리아는 아델라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델라 혹시…… 내가 네 보호자라고 말하는 게…….”
“싫지 않아요.”
아델라는 어머니의 뒷말을 짐작하고 고개를 단호히 저었다.
“어머니가 제 어머니라는 게 좋아요. 자랑스럽고. 제 말은…… ‘릴리아’라는 어머니의 이름을 잊지 말라는 뜻이었어요.”
농부의 딸로 집안일을 도우며 도시가 어떤 곳일지 항상 궁금해 했던 소녀를, 어머니가 잊지 말았으면 했다. 그때의 감정도, 그때의 기대도, 그때의 기억도…….
아델라는 어머니가 그렇게 조금씩 나아졌으면 싶었다. 상처받고 참아 왔던 마음이.
“혹시, 내가 죽는 것 때문에 그러니?”
“없다고 말 못하죠. 하지만, 그건 걱정 안 해요. 그런 일 없게 만들 거거든요. 고생도 안 시킬 거고요.”
훗날, 혹시라도 릴리아에게 죽음이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아델라는 후회를 남기지 않게 어머니를 사랑할 생각이었다.
아델라의 어머니는 그렇게 부쩍 자란 아델라의 모습이 쓸쓸하면서도 기뻤다. 새어머니, 아니, 릴리아는 아델라가 꼭 쥔 손을 내려다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아델라, 내 생각해 줘서 고마워. 하지만 이건 내가 원해서…….”
“그리고…… 어머니의 가족분들도, 찾아볼게요.”
릴리아가 말을 멈추고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떴다.
자작가에서 사는 동안 릴리아는 가족의 일을 잊으려 노력했다. 그립고 보고 싶었지만, 돌아갈 방법이 없어 가슴 깊이 묻었다.
자작의 폭력 속에 릴리아는 도망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자작은 릴리아가 눈물을 그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밤낮없이 괴롭혔다.
참지 못하고 언젠가 한 번, 가족에 대해 수소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날 그녀는 죽을 뻔했다. 자작이 그녀가 가족을 찾고 있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아델라, 그건, 그건 너무 위험…….”
위험하다고 말하려던 릴리아가 말을 줄였다.
이렇게 멀리 도망쳤는데, 자작이 찾을 수 있을까? 이제는 벗어난 게 아닐까? 그럼, 진짜로…… 가족을 찾을 수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릴리아는 알 수 없는 공포감 때문에 무서웠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부모님을 뵐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들었다. 뒤죽박죽 섞인 감정을 갈무리하지 못한 릴리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머니 위험하게 안 해요. 불안하게도 안 할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은 우리를 도와줄 사람도 많고요. 그러니까, 마음껏 웃고, 마음껏 우세요. 참지 말고.”
아델라가 눈부신 햇살처럼 활짝 웃자, 릴리아는 아델라만큼 어렸을 때의 자신이 생각났다.
또래들과 풀숲에서 뛰어놀고, 나무를 타고, 농사일을 돕고, 크게 차려진 것은 없지만 따뜻한 식사를 하고, 가끔은 작은 마을이 저한테는 너무 좁다며 투정도 부리던 그때를 말이다.
릴리아는 제 뺨에 눈물이 흐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넋을 놓고 아델라를 보았다. 아델라는 그녀한테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 주며 그녀를 안았다.
작은 손으로 토닥이는 아델라의 손길에 릴리아는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몰라 아델라를 그저 꼭 마주 안았다.
* * *
“……거기서 뭐 하십니까?”
“아리스 님! 아, 경!”
아델라가 아리스의 집 앞에서 기웃거리자 방금 막 도착한 아리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불렀다.
“저 심부름 하러 왔어요!”
아델라가 웃으며 두 손으로 그릇을 들어 보였다.
릴리아를 위로하던 아델라가 아리스의 집을 찾아온 이유는 릴리아가 마음껏 울길 바라며 자리를 피했기 때문이었다. 안고 있던 릴리아를 놓았을 때, 그녀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아델라 앞이라 울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델라는 눈치를 보다 릴리아가 식탁 한쪽에 식혀 둔 음식을 집어 들고 얼른 밖으로 나왔다. 심부름을 한다는 이유로 릴리아한테 마음을 다스릴 시간을 준 것이다.
“매번 감사합니다. 이렇게 신경 안 써 주셔도 됩니다. 괜히 고생만 하십니다.”
“어머니가 부인의 이야기를 전해 듣더니, 음식 만들 때 많이 만드세요. 저흰 둘뿐이라 항상 남아요.”
아리스는 아델라한테 다가가 그릇을 받아 들고 나무 울타리 문을 열어 주었다.
아리스네가 아델라네 주변으로 이사 온 뒤, 후작 부인의 몸이 안 좋다는 걸 들은 릴리아는 그 뒤로 서너 번 정도 음식을 해서 아리스네로 보내 주었다.
“들어오십쇼.”
아델라는 아리스를 따라 작은 집에 들어섰다. 아델라의 집과는 몇 걸음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바로 옆옆옆집이었으니 말이다.
케스너 후작 부인은 정체가 드러나는 것이 꺼려진다며 공작가에 들어가기를 거부했다. 그 때문에 원래는 공작가에 모시려고 했던 계획이 무산되면서 의심을 피할 만한 곳으로 추천된 게 바로 3구역이었다.
아델라는 자신의 집과 가까운 곳으로 추천했고, 아리스도 이에 동의했다. 그나마 주변에 아는 사람이 있으면 후작 부인의 마음이 편할 거라 여겨서였다.
“어서 와. 오늘은 도련님께서 안 오셨나 보네?”
후작 부인은 작은 거실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이저드 님 대신 제가 왔어요. 안녕하세요!”
“요즘 자주 보는 것 같아.”
“앞으로도 자주 볼 텐데요?”
아델라가 넉살 좋게 웃자, 후작 부인도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후작 부인은 아델라를 향해 소파에 앉으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래서 어떻게 됐니?”
아델라가 냉큼 자리에 앉자, 후작 부인은 아리스를 향해 물었다.
“여전히 각하께서 이저드 님은 안 된답니다. 각하께서 화도 안 풀리신 것 같아서 한동안은 이저드 님은 밖으로도 못 나올 것 같다고 전해 달라네요.”
아리스는 식탁 위에 음식 그릇을 두고 어머니의 곁에 와 앉았다. 그는 소파에 앉아 아델라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저한테 하시는 말씀이세요?”
“예. 걱정되시나 봅니다.”
“그럼 저도, 걱정 마시라고 전해 주세요. 린다 경도 계시고, 아리스 님도 가까이에 사시고!”
아델라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대답했다.
“난 이저드 님이 가만히 계시는 게 조금 이상한데…….”
후작 부인도 린다와 비슷한 생각인지 아델라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저드와 아델라가 아리스와 자신을 데리러 오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벌인 일이었다. 이렇게 쉽게 물러설 리가 없었다.
“우리한테는 얘기해 줄 수 있는 거 아니니?”
“으음……. 지금은, 얼른 크는 게 목푠데요?”
아델라는 내적 갈등을 겪고 있는 듯했다. 어쨌든 나중에는 후작 부인과 아리스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얼른 큰 다음에는?”
아리스와 케스너 후작 부인이 아델라를 주목했다. 둘은 말없이 아델라를 빤히 보았다. 잠시간 작은 집에 정적이 흘렀다.
“왕궁에서…….”
결국 긴 침묵을 견디다 못한 아델라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확인할 게 있대요. 우리 군의 희생을 줄일 방법이죠.”
“그게 뭡니까?”
“비밀 통로요.”
아델라는 정확히 후작 부인을 보고 말했다. 그에 후작 부인은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에서는 찾지 못했고?”
“네. 사실 추측에 가깝지만요. 그러지 않고서야 두 분이 궁에서 안 들키고 나올 방법이 몇 없어서요. 아리스 님은 5살 때라 기억이 없으시고, 부인은 통로에 대한 기록을 안 남기셨으니, 추측만 할 수밖에요.”
만일 정말로 비밀 통로가 존재한다면 이만한 방법이 없었다. 이번 일이 성공하는 데에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였다. 아군의 피해와 수도의 피해를 최소화시키고 왕궁을 점령할 방법으로는 가장 좋았다.
“그럼 내 도움이 필요하겠네.”
“네. 정말 비밀 통로가 있다면 아예 판을 뒤집기가 쉬워지니까요.”
“비밀 통로…….”
분명, 아리스의 어머니의 명에 따라 정신없이 도망 나오는 와중에 통로를 이용한 기억은 있었다. 아리스의 어머니가 이쪽으로 가면 된다고 일러줬었다.
“근데…… 나도 기억이 정확하지 않아. 밤중에 도망간 거고, 난 왕비님께서 가라는 대로 갔으니까.”
“주변에 어떤 풍경이었는지는 기억나세요?”
“주변? 음― 우선 왕비 궁에서 나와서 커다란 정원을 지났고 계속 달렸어. 본궁이 나올 때까지.”
당시 아리스의 어머니는 부인에게 본궁으로 향하라고 일렀다. 어떤 벽난로를 찾으라고 했는데, 벽난로에 도착했던 것만 생각났다. 하지만 정확히 어떤 벽난로인지는 가물가물했다.
“본궁 뒤편이었지, 아마? 왕이 지나다니는 길목 수풀에 숨어 있었는데, 왕 이외에 사람이 지나다니면 안 되는 길목이라 다행히 들키지 않았어. 그렇게 주변이 조용해진 후에 왕비님께서 알려주신 곳으로 가서…… 벽난로를 찾았지.”
“벽난로요?”
“전대 왕들의 취향인지, 다른 궁에도 복도뿐만 아니라 방 곳곳에 크고 작은 벽난로가 있었어. 내가 기억하는 벽난로는 문과 가까웠던 것 같아.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그 컴컴한 와중에 벽난로까지 찾기 힘들었을 테니까.”
“더 자세히는 기억 안 나세요?”
“음……. 그때 너무 정신이 없어서. 지금 말하는 것도 왕비님의 말씀만 겨우 기억해낸 거야.”
당시 케스너 후작 부인은 왕비가 내린 명을 지키려 무조건 뛰었다. 아리스를 살려야 했기에, 사람들의 비명이 들리는 와중에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정신없이 뛰고, 숨고, 뛰고, 숨고를 반복했다. 사람들의 소리라도 들리면 소스라치게 놀라 숨어 있었고, 다시 나와서 뛰며 벽난로를 찾았다. 그 과정이 간단하게 보였지만, 넓은 궁 안에서 벌어지는 추격전은 숨이 막힐 정도였다.
그 때문에 케스너 후작 부인은 벽난로가 있는 곳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쫓긴 기억이 더 강렬했기 때문이다.
“그럼, 그 벽난로가 통로였어요?”
“그래, 지하로 통하는. 국새로 열리는 방식이었어.”
그 안에 들어가 일직선으로 쭉 뛰라고만 알려 줘서 후작 부인은 깊이 잠든 아이를 안고 무작정 뛰었다. 통로가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할 틈도 없었다.
“진짜로 있긴 하군요…….”
“그런데 이런 일은 각하께 말씀드려도 되지 않니?”
“말씀드려야죠. 하지만, 나중에요. 각하께서 준비하는 계획이 얼추 완성되어 가면요.”
아델라의 대답에 후작 부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굳이?”
“비밀 통로를 찾으려고 스파이를 보냈다가 그 스파이가 죽을 위험이 크니까요. 그럼 또 보내서 또 찾아야 하고 또 죽겠죠. 지금 왕궁에 첩자를 못 보내는 이유가 이미 많은 궁인이 죽어 나가서잖아요.”
스파이로 들켜서 죽는 것보다 그냥 한낱 궁인으로 왕의 손길 한 번에 죽어 나가는 게 더 빠를 것이다.
그 정도로 현재 왕궁은 살얼음판이었다. 아군이고 적군이고 할 것 없이 궁인들은 항상 몸을 사려야 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찍혀서 죽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렇긴 하지만, 늦게 하나 빠르게 하나 희생은 따를 텐데.”
“그 희생을 최대한 줄이려고요.”
후작 부인은 아델라의 생각을 대충 이해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나 곧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이저드 님이 조용하신 이유가 그 통로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어? 확인할 게 있다고. 그거랑 이저드님이 조용한 거랑 무슨 상관이지? 희생을 최대한 어떻게 줄일 건데?”
아델라는 눈을 허공으로 굴렸다.
‘분명, 내가 왕궁에 간다고 하면 후작 부인께서도 막겠지?’
아마 모든 이들이 백이면 백, 막을 게 분명했다. 왕궁의 소문을 들은 이들이라면 막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델라도 그런 왕궁에 굳이 가고 싶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희생을 줄일 방법이 있다면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있었다. 아델라와 아델라가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들의 미래를 위해서.
아델라는 이번 생에 자신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할 생각이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또다시 미래를 바꿀 기회가 생겼는데, 놓칠 수 없었다.
“혹시……. 그때 사고 치려고 지금 조용히 있는 거니?”
이렇게 눈치가 빠르시면 곤란한데 말입니다. 아델라는 난감하게 웃었다.
“사고…… 는 아닌데요. 하하.”
“그럼?”
후작 부인이 차갑게 물었다. 아델라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사실대로 실토했다.
“이번 일에 제가 가장 적합하니까요.”
“뭐?”
아델라는 거짓 한 점 없는 눈동자로 눈을 말똥말똥 떴다.
“지금 궁은 목숨이 몇 개라도 살아남기 힘든 곳이잖아요.”
“그런 곳인 걸 아는데, 네가 적합하다고? 혹독하게 훈련받은 암살자도 아닌데?”
“훈련은 받을 거고요. 암살을 목적으로 가는 건 아니죠. 그리고 무엇보다 전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데 다른 분들은 아니잖아요.”
어떻게 저렇게 당당할 수가.
후작 부인은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잃었다. 맞는 말이기도 하면서 황당한 말이라 말이 안 나왔다.
“그건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군요.”
묵묵히 듣던 아리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버티기 힘들 겁니다.”
“버티기 힘든 건 훈련받은 스파이도 마찬가지일 텐데요, 뭐. 저한테는 시간을 돌릴 수 있는 이점이 있고, 실패하면 다시 되돌아올 수 있습니다. 매우 큰 장점이죠.”
물론 그 방법이 ‘죽음’이라는 건 무덤까지 가져갈 생각이었다. 이저드를 제외하고는 아직 아델라가 죽어서 회귀한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다른 사람들은 둘이 그저 미래에서 시간만 되돌려 온 줄 알고 있었다.
“……아가씨 혼자 가는데 이저드 님이 조용할 리는 없을 테고.”
후작 부인은 이저드와 아델라가 이미 이 상황에 대해 논의를 끝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모한 계획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아델라를 보던 후작 부인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 각하께 말하지 않은 이유를 알겠네.”
그에 아델라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렇게 웃지 마. 그냥 안 넘어가. 난 반대야. 이저드 님이 암투에 휘말릴 수 있어.”
후작 부인이 팔짱을 끼고 단호한 시선으로 아델라를 보았다.
“저도 반대에요. 이저드 님은 왕궁에서 너무 튀니까요.”
아델라도 그녀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동의하라고 한 말 아니었는데. 후작 부인의 한숨이 더 커졌다.
“너는 괜찮은 줄 아니?”
“이저드 님보다는 제가 몰래 움직이는 편이 낫죠. 허드렛일을 하는 하녀로 들어가면 신분도 숨길 수 있고요.”
아니, 그 말도 아니었는데.
확실히 아델라의 말대로 그녀는 스파이로서 큰 장점이 있긴 했다. 임무에 실패해도 죽지 않고 그 기억을 계속 가지고 갈 수 있었다. 게다가 세간에 알려지지 않아 신분을 숨기기 수월했다.
“그래. 네가 미래에서 돌라온 게 사실이라면, 제일 마땅한 사람이라는 건 알겠어. 그래도 사람들이 반대할 거야.”
“그렇겠죠. 전 어리고, 세상을 모르고, 믿을 만한 사람인지도 모르니까요.”
“널 모르는 이들은 그렇게도 생각하겠지만…… 걱정되니까.”
후작 부인은 이 아이를 꼭 거사에 참여시켜야 하나 고민했다. 미하일 공작과 마찬가지로 후작 부인도 아이는 아이답게 좋은 것만 보고 크길 원했다.
“알아요. 그래서 이저드 님도 절 말리셨어요. 위험하니까.”
하지만 이저드는 아델라를 말리다가 다른 쪽으로 생각을 틀었다. 그녀를 막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저드는 아델라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노력한지 알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많은 이들이 살아난 지금도 전부 그녀의 공이었다. 큰 공을 세웠음에도 아무도 몰라서 문제였지.
그런데 그걸 전부 알고 있는 자신이 아델라를 말릴 자격은 없었다. 자신은 그저, 아델라의 가는 길이 조금은 평탄하기를 바라며 장애물을 치울 뿐이었다.
“나중에는 생각을 바꾸셨어요. 저도 이 계획에 참여할 이유가 있으니까요. 이 계획이 간절히 성공하길 바라는 사람으로서 저도 돕고 싶어요. 제 미래를 위해서.”
아델라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아리스와 후작 부인을 번갈아 보았다. 셋 사이에 또 침묵이 깔렸다.
후작 부인은 아델라를 말리고 싶었으나 말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 한번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어떻게든 해낼 아이였다.
‘이래서, 이저드 님이 다른 방법을 선택한 거구나.’
아델라와 함께 궁에 가기로.
이저드가 왕궁으로 들어간다면 사람들의 눈은 이저드한테 향할 것이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아델라한테 향할 눈이 적어진다. 그리고 아델라한테 향하는 눈이 조금이라도 적어지면 아델라는 조금 더 자유로울 수 있었고 위험에서도 한발 멀어질 수 있었다.
“……의견은 잘 알았어. 각하께는 비밀로 해 줄게. 대신, 훈련 끝나고 매일 나한테 와.”
후작 부인의 말에 아델라는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갈 거면 제대로 알고 가야지. 적어도 실수해서 죽을 일 없게.”
아델라는 그녀가 한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깜박였다. 이저드야 아델라의 상황을 잘 알고 있으므로 이해해 준 거지만, 아델라가 저리 필사적인 이유를 모르는 후작 부인은 계속 반대할 줄 알았다.
“그렇게 해 주시면 저야 너무 감사한데…… 괜찮으시겠어요?”
“뭘?”
“몸에, 무리가 갈까 봐요.”
후작 부인은 별걸 다 걱정한다는 표정으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내 몸 상태는 내가 조절한단다.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네 갈 길이나 잘 봐.”
그녀의 말투는 쌀쌀맞았지만, 행동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굳이 그녀가 직접 나서서 왕궁에 관해 설명해 주겠다는 것도 그녀한테 있어서는 최고의 친절을 베푼 거였다.
아델라는 얼떨떨하게 후작 부인을 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얼른 일어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안 해도 돼. 각오해야 할 테니까.”
여전히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아델라는 후작 부인의 말투에 눈을 데르륵 굴렸다.
‘혹시 후작 부인……, 린다 경 같은 타입인가?’
아델라는 왠지 자신에게 가시밭길을 찾아서 가는 재능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분뿐이면 좋으련만.
* * *
후작 부인과 그런 약속을 하고 또 며칠이 지났다. 아델라는 약속대로 오후에 개인 훈련을 마치면 부인의 집에 들러 수업 아닌 수업을 매일 받았다.
다행히도 그녀는 처음부터 몰아서 알려주지는 않았다. 아델라와 이저드가 차근차근 준비하듯이, 그녀도 차근차근 알려 줄 생각인 모양이었다.
“부인께 뭐 배운다면서요?”
“어? 들었어요?”
“아리스 경께요.”
“아하.”
아델라는 별일 아닌 듯 반응하고는 린다가 사 준 디저트를 입 속에 밀어 넣었다. 그런 반응에 린다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거기까지만 묻고 말았다.
후에 뭘 배웠는지 알았을 때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되지만.
“이저드 님은 아직도 못 나오신대요?”
“이저드 님도 빡빡하게 교육받고 계십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요. 원래 안 그러셨는데, 이번 일로 후계자 교육에만 몰두하게 할 생각인가 봐요.”
뭐가 그렇게 불안하신지 모르겠다. 린다는 오랜만에 보는 미하일의 초조한 행동을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안타까웠다.
“이저드 님은 후계자 교육을 두 번 받게 되는 거네요. 빨리 두 분이 마음을 푸셨으면 좋겠는데.”
“두 번? 아아, 그렇네요. 그래서 표정이 여유로우셨군요.”
린다는 그제야 이저드가 별다른 무리 없이 수업을 전부 받고, 대련을 전부 견딘 게 이해됐다.
“그나저나, 벨제프 자작은…… 연락이 닿았습니까?”
아델라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이저드가 계속 걱정했던 것을 린다가 대신 물었다.
“사람을 시켜서 보냈긴 한데, 그 뒤로 연락은 없네요. 아마 찾느라 오래 걸려서 그럴지도 몰라요.”
지금쯤 아델라와 릴리아를 찾아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닐 것이 뻔했다. 그러니 심부름꾼도 벨제프 자작을 찾기 쉽지는 않을 것이다.
“펜베르크 성으로 향하고 있다는 연락이 오면 저한테 말씀해 주세요. 언제든 나올 테니까.”
“네! 근데 멀었을 걸요? 아직도 자작가 주변 지역에서 못 벗어났을 확률이…….”
“혹시 모르니까요.”
린다도 벨제프 자작이 멀리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만에 하나라는 말이 있었다. 아델라는 그런 린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은 넓고, 일어나지 못할 일은 없었다. 혹시 모를 일은 언제 벌어질지 아무도 몰랐기 때문에, 그녀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했다.
물론, 그렇다고 진짜 벌어질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벨제프 자작이 이 주변까지 올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린다의 그 말이 실제로 벌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말이 씨가 된다더니!
* * *
아델라는 그날도 운동 겸 가볍게 3구역에서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녀의 아버지를 발견한 건 가벼운 달리기를 시작하고 20분 정도 지난 시점이었다.
멀리서 사람들이 실랑이를 벌이며 뭉쳐 있는 게 보였는데, 그 안에 벨제프 자작이 섞여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누군지 알아? 감히 평민 따위가 귀족 앞길을 막아? 저리 안 비켜?”
라고 큰소리로 쩌렁쩌렁하게 문지기한테 따지고 있는 남자는 누가 봐도 벨제프 자작이었다. 아델라는 그를 멀리서 확인하고 급선회했다. 이 몸이 이렇게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아챈 순간이었다.
‘허어억! 일단 확인부터, 확인!’
아델라는 오늘 시장에 볼일을 보러 간다던 릴리아가 생각나 급하게 뛰었다. 가볍게 뛰면 20분인 거리를 미친 듯이 달리니 10분 만에 도착했다.
‘제발 계셔라!’
그렇게 빌며 벌컥 연 집 안에는 다행히도 릴리아가 있었다. 땀을 줄줄 흘리는 아델라를 그녀는 커다래진 갈색 눈동자로 보았다.
“아, 아델라?”
“허억, 헉! 저, 저!”
“괜찮니?”
릴리아는 하던 바느질을 멈추고 놀라서 아델라한테 다가갔다.
“잠시, 허억! 잠시만요.”
아델라는 현관문을 잡고 크게 숨을 골랐다.
“어머니, 오늘, 시장, 제가 다녀올게요.”
숨을 고른 후 나온 아델라의 뜬금없는 말에, 릴리아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거 말하려고 뛰어왔니?”
릴리아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묻자 아델라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아이가 귀여워서 웃음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은 릴리아는 아델라의 땀을 소매로 훔쳤다.
“그, 그래. 그렇게 하렴.”
“그럼, 시장 말고 오늘 나가실 일 없죠?”
“그거 말고는, 이따 저녁때 욘제타 아주머니 댁 돕기로 했는데. 왜 그러니?”
릴리아는 아델라가 왜 그런 걸 묻는지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듯했다. 아델라는 냉큼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요. 저 다시 운동하고 올게요!”
“정말 괜찮니? 땀이…….”
“괜찮아요. 땀을 내야 운동이죠!”
아델라는 아까보다 훨씬 기분이 좋아진 낯빛으로 릴리아한테 인사하고 걸음을 돌렸다.
그 뒤에 남은 릴리아는 바람과도 같은 아델라를 넋 놓고 눈으로 쫓다가 정신을 차리고 작게 웃었다. 뜬금없이 저러는 걸 보면 분명 뭔가 있었다. 그녀는 아델라가 생각하는 것보다 아델라를 잘 알고 있었다. 아델라의 표정, 행동, 말투가 조금만 달라져도 릴리아는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아무 일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릴리아는 아델라가 사라진 거리를 꽤 오랜 시간 쳐다보다가 현관문을 조용히 닫았다.
* * *
오늘은 다른 날보다 유독, 날씨가 좋았다. 하늘은 푸르고, 햇볕은 따뜻하고, 바람도 선선해서 운동하기 참 좋은 날씨였다.
린다는 그런 싱그러운 분위기를 만끽하며 천천히 말을 몰았다. 점심에 짬을 내어 나온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었으면 이런 날씨의 흐름도 모르고 살지 않았을까.
그렇게 3구역 성문으로 향하던 린다가 일순, 말의 고삐를 쥐고 말을 멈췄다. 아까는 분명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지금은 똥 씹은 표정만이 남았다. 그녀는 우연히 마주친 금발의 미남자를 보았다.
“와……. 나도 널 만난 게 그렇게 유쾌하지는 않거든. 너무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거 아니냐?”
금발의 미남자, 헤이든은 덩달아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둘은 우연히라도 밖에서 마주친 게 기껍지 않은 눈치였다.
“내가 뭐? 도련님은 어디에 두고 혼자 나와 있냐?”
린다는 금세 표정을 바꾸고 뚱하니 물었다. 오늘은 헤이든이 이저드의 호위를 맡는 날이었다.
“그러는 넌?”
“내가 먼저 물었거든?”
린다와 헤이든이 기 싸움을 하는 듯이 서로를 뚫어지라 쳐다보다 결국 헤이든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각하 명에 따라 아리스 경 데리러.”
“아리스 경? 밖에 계셨어? 오늘 순찰이신가?”
린다의 말에 헤이든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린다를 빤히 쳐다보았다.
“뭘 봐.”
린다가 헤이든의 뜨거운(?) 시선을 느끼고 아니꼽게 말했다. 그러자 헤이든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 야! 아니, 린다 경! 내가 말했으니까 너도 말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아아, 시간이 남아서 아가씨 보러.”
“아가씨? 아델라 님?”
“응.”
요즘 린다가 자주 밖으로 나간다 했더니, 아델라와 꽤 친해진 모양이었다.
“엄청 마음에 들었나 봐?”
“뭐가?”
“아델라 님.”
마음에 든다, 안 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기보다 린다는 아델라가 그냥 걱정됐다.
한눈팔면 어디서 사고 치고 있을까 봐. 약한 몸으로 뽈뽈거리고 돌아다니다가 어디 다치기라도 할까 봐. 아델라가 눈에 안 보이면 조금 불안했다. 이상하게도.
“그냥, 마음에 걸려.”
“아델라 님이?”
“응. 눈을 떼면 어딘가 가서 일을 치고 있을 것 같은, 그런 걱정?”
“아아, 너 같아서?”
헤이든이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린다는 그런 헤이든을 무표정하게 보았다.
“크흠흠! 아, 아무튼 그게 마음에 드는 거 아닌가?”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매를 벌 것을 알기에 헤이든은 얼른 시선을 돌렸다.
“마음에 안 든다고 하진 않았어. 무모한 일을 아무렇지 않게 벌여서 걱정인 거지.”
무엇보다 걱정인 건, 아델라나 이저드나 자기들 안위를 은근히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거였다.
보통 사람들은 그런 일을 계획할 때 자신의 목숨을 아끼는 쪽으로 일을 진행하는데, 둘은 영…….
아무리 시간을 돌릴 수 있다고 해도 어떻게 그렇게 위험한 일을 아무렇지 않게 계획에 넣는지 몰랐다. 둘을 보고 있는 주변 사람들만 노심초사했다.
그래서 아델라를 보고 있으면 린다는 심장이 남아나질 않았다. 앞날을 예측할 수 없게 일을 벌이니, 린다로서는 최대한 둘이 무모한 일을 하지 않게 예의주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사람이 하는 감시인지라 어디서 뭘 하는지 자세히 알 수 없었다. 린다는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무슨 마음인지 알겠다.”
헤이든도 최근 이저드와 함께 지내며 종종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이분을 다치지 않게 잘 보필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었다. 2년 동안 이저드를 호위하며 그런 걱정한 적 없는데, 바뀐 이저드는 생각을 읽기 쉽지 않아서 여러 생각을 하게 했다.
헤이든은 성격상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엔 이저드가 어디로 튈지 몰라 생각하고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요즘은 너무 잠잠해서 더 걱정이었다.
“요즘 너무 조용하셔. 순순히 각하 의견도 따르고.”
“아델라 님도.”
둘은 말도 못 하게 싸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지만, 기우이겠거니 생각했다. 아니, 제발 기우이길 바랐다.
웬일로 같은 생각을 한 둘은 떨떠름한 마음으로 말의 고삐를 잡고 천천히 3구역으로 향했다.
린다와 헤이든이 3구역으로 나가는 성문에 다다를 때쯤,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2구역을 담당하는 수비병들까지 모여 있어 그곳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았다.
둘은 말에서 내려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저 인간 누군데 인력을 낭비하게 만들어?”
헤이든이 고갯짓으로 버럭버럭 화를 내고 있는 흑발을 지닌 녹안의 중년 남성을 가리켰다. 그러자 둘 가까이에 있던 수비병들이 경례했다.
“린다 경, 헤이든 경 오셨습니까.”
“어, 무슨 일이지?”
린다도 궁금해서 물었다.
“귀족이라는데……, 신분패를 보여 달라고 하니까 없다네요. 지금 30분째 저러고 있습니다.”
“뭘 30분이나 들어 줘? 공무 집행 방해로 잡아가. 수비대 가서 신분 확인 절차 밟으라고 해.”
“저희도 그러고 싶은데, 귀족을 함부로 대했다가 괜히 각하께 피해를…….”
“아, 뭐야. 귀족이라서 못 데려가는 거야? 그럼 헤이든 경이 처리하면 되겠네.”
린다가 시큰둥하게 대답하고 수비병들 사이를 유유히 걸어갔다. 그들은 린다를 발견하고 저마다 길을 터줬다.
“어어! 야, 아니, 린다 경! 나! 각하 명령……!”
“내가 하면 되지. 아리스 경만 찾으면 되는 간단한 걸.”
헤이든은 귀족 중 진상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었다. 그들을 상대하는 게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도. 그는 얼른 린다의 뒤를 따르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왜 귀찮은 건 죄다 나야? 네가 하면 되지!”
“나보고 처리하라고?”
“어! 아…… 아니!”
린다가 한쪽 눈썹을 올리고 묻자, 헤이든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뭔가 생각난 듯 주춤했다. 그가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진상 귀족들을 상대하는 일은 전에도 몇 번 있었다. 그럴 때마다 린다는 항상 귀족들한테 무시를 당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진심이지? 내가 어떻게 처리해도 상관 마?”
사실 린다는 자신이 처리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쉽게 갈 길을 돌아가는 일들이 많아져서 헤이든한테 맡기고 가려던 거였다.
“아니……!”
헤이든이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며 린다를 잡으려 했지만, 이미 그녀는 떠난 뒤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성문을 막고 있는 수비병들 앞에 도착한 린다는 곧바로 자기 앞을 막고 있는 수비병 한 명을 손으로 툭툭 쳤다.
“아오, 뭐야! 헉! 린다 경!”
벨제프와 실랑이를 벌이던 수비병 중 한 명이 짜증을 내며 돌아본 곳에는 회색빛 눈동자를 치켜뜬 린다가 서 있었다. 그녀를 발견한 수비병들이 전부 경례를 하고 린다도 경례를 해 줬다.
“비켜, 나가게.”
“아! 예!”
린다를 막고 있는 수비병이 얼른 몸을 틀어 비켜 줬다. 그러던 중 수비병들이 방심한 때를 틈타 수비병과 린다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벨제프 자작이었다.
여태 계속 실랑이를 벌였던 그는 자기보다 훨씬 작은 린다를 밀치려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린다는 전혀 밀리지 않았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은 이 새낀 뭐지? 하는 띠꺼운 표정이었다.
“뭐, 뭐야!”
자작이 린다를 밀려고 온 힘을 다했지만, 전혀 밀리는 기색이 없었다. 린다의 어깨를 으스러뜨릴 것처럼 꽉 잡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아픈 기색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온 힘을 다해 그녀를 밀려고 하는 벨제프 자작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이익! 이 계집이!”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잠깐 자리를 비켜줬던 수비병이 벨제프 자작을 떨어뜨리며 화를 냈다. 벨제프 자작은 얼굴이 빨개진 채로 씩씩거렸다. 분한 듯 보였다.
“계집 아니고, 제스트윈 공작가 소속 호위병입니다. 무슨 일 때문에 이러십니까?”
“호위병? 으하하하! 호위벼엉?”
벨제프 자작은 자신과 키 차이가 꽤 나는 린다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고는 가소롭다는 듯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크, 큰일 났다…….’
뒤늦게 린다를 따라잡은 헤이든이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떡하니 벌렸다. 이제 이 상황을 말릴 수도, 자신한테 맡기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린다의 명예는 물론, 공작가의 명예까지 걸린 일이었으니까.
“하긴, 그분도 오래 혼자셨긴 하지. 왜 재가를 안 하시나 했더니, 할 필요가 없으신 거였어. 가까운 곳에 꽃들이 있는데.”
수비병들은 벨제프 자작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신분 차이고 나발이고 진심으로 입을 꿰매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이런 수비병들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벨제프 자작은 계속 입을 나불거렸다.
“난 또, 이놈들이 전부 경례를 하기에 대단한 분이 납셨다고.”
‘예, 소문이 대단하신 분이죠.’
“펜베르크 성도 예전 같지는 않은 모양이군. 쯧쯧.”
‘예전 같지 않죠. 그럼요, 세월이 흐르는데 예전 같으면 쓰나요.’
진짜 귀족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저 사람은 입으로 망할 자였다. 수비병 중 몇은 잘 가라며 손을 들 뻔했다. 하지만 여기서 실수했다가는 나중에 얄짤없이 혼날 것을 알기에 다들 참았다.
대신 그들은 벨제프 자작의 말을 듣고 있는 린다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무감각한 눈으로 자작을 보고 있었다.
“어디서 눈을 똑바로 뜨고! 당장 안 비켜? 너희 전부 귀족한테 이러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벨제프가 으름장을 놓으며 협박했다.
“어디…… 가문이시라고요?”
한참 만에 화를 꾹 참으며 린다가 미소 지었다.
“벨제프 자작가! 내가 공식적으로 공작 각하께 문제를 제기하는 수가 있어! 비켜!”
‘벨제프 자작?’
이놈을 어떻게 잡아갈까 하던 린다는 익숙한 가문의 이름을 듣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아델라 님이 말했던 아버지가 이놈이야?’
린다는 벨제프 자작을 빤히 쳐다보았다. 생긴 건 멀쩡한데, 아델라와 닮은 점이 없었다. 외모도, 분위기도 모든 게. 그나마 조금 닮았다고 한다면…… 콧대 정돈가.
아델라가 어머니 쪽을 훨씬 많이 닮았다는 것을 모르는 린다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럼 저희 쪽에서도 문제를 제기해도 됩니까?”
어차피 린다는 아델라가 아버지를 잡아넣을 생각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어서 마음 편히 그를 잡아갈 생각이었다. 잡아넣기만 하면 그 뒤로는 죄들이 줄줄 나올 것이다.
“뭐?”
“방금, 공작 각하를 모욕하지 않았습니까.”
“모욕이라니! 내 말 중에 각하를 흠잡을 만한 말이 어디 있지? 사실 밖에 없고만.”
그는 당당하게 고개 쳐들었다.
“그럼 지금 진심으로, 여자 호위병들이 각하 주변에 있는 건 각하의 성욕을 풀어 주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게 모욕이 아니라고요?”
‘크헉,’
린다가 적나라한 단어로 무표정하게 묻자, 주변에서 속으로 헛기침을 했다. 그들은 저마다 차마 벨제프 자작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린다를 잘 알았다. 그래서 그녀가 저러다 폭발할 것도 아주 잘 알았다.
“그게 왜 모욕이야! 공작 각하 정도 되는 사람이 그게 흠 될 게 뭐가 있다고! 그리고 그게 아니면 계집이 호위병으로 가당키나 해? 호위는커녕, 자기 몸 지키는 것도 어림도 없겠구먼!”
벨제프 자작은 자신보다 한참 어린 린다를 훑으며 깔보듯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빳빳이 든 그는 얼른 비키라는 듯이 린다를 보았다.
린다의 표정 변화를 빠르게 살핀 수비병들은 벨제프 자작한테 한껏 눈치를 줬다. 그러나 태초부터 눈치가 없는 놈인지 본 척도 하지 않았다.
“그 말, 장담하십니까? 시험해 볼까요?”
린다의 한쪽 입꼬리가 길게 올라갔다.
“뭐? 뭐라는 거야?”
린다는 벨제프 자작 뒤쪽에 버티고 있는 그가 산 용병들을 쭉 훑었다.
“제가 저들을 다 때려눕히면, 당신의 말은 사실이 아니게 되니까, 그땐…… 각하께 사과하셔야 합니다?”
갑자기 날벼락을 맞은 걸 아는지 모르는지, 용병들의 표정은 벨제프와 비슷했다. 오히려 가소롭다는 듯이 린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반면, 수비병들은 용병들이 어떻게 당할지 눈에 선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시할 사람을 무시하지……. 그러나 용병들은 다 어중이떠중이들만 있는 건지, 린다가 내뿜는 살기를 느끼는 이는 한 명도 없는 것 같았다. 이렇게 멍청할 수가.
“사과? 내가 왜? 어린 게 건방지게.”
“그쪽이 틀렸으니까요. 각하께서 안목 없이 특혜를 베풀어서, 몸을 목적으로 여성 호위병들을 고용한 거라고, 방금 당신 입으로 말했잖습니까. 그게 바로 각하를 모욕했다는 겁니다.”
“이 건방진 것이! 누구 보고 틀렸다고 토를 달아!”
뒤의 이야기는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인지 그는 앞의 말만 듣고 열이 받아 위협적으로 한쪽 손을 들었다.
“말문이 막히면 손부터 올리는 버릇이 있나 봅니다? 전 말이 안 통하면 손이 올라가는 버릇이 좀 있는데.”
린다가 씩 웃으며 고갯짓하자 수비병들이 전부 다가와 용병들과 자작을 감쌌다. 꼭 링을 만들려는 것처럼.
‘아효, 저 인간은 글렀네. 글렀어.’
수비병 중 대부분이 한심한 표정으로 자작을 바라보았다. 하필 건드려도 린다 경을.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이것들이! 다 안 비켜?!”
자작이 당황하며 린다의 곁에 있던 수비병을 밀었지만, 역시나 그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말했잖습니까. 그쪽이 각하를 모욕했다는 증거, 보여드리겠다고. 머리 조아릴 준비 하시죠.”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퍼억, 하는 육중한 소리가 용병들 사이에서 들렸다. 순식간에 도약한 린다가 휘두른 주먹에 누군가가 정확하게 맞은 것이다.
“악!”
“날 너무 원망하진 마. 의뢰비 두둑이 받았잖아. 이 기회에 사람도 잘 보고 의뢰를 받아야 한다는 교훈 새기고 가.”
바닥에 힘없이 엎어진 용병을 밟은 린다가 빙그레 웃었다. 그 미소는 흡사, 야차를 연상시켰다.
일방적인 싸움의 막이 오르는 미소였다.
* * *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죠?’
아델라는 중간에 아리스한테 도움을 청하느라 조금 늦었다. 그런데, 벨제프 자작이 소란을 피우던 곳으로 돌아와 보니 용병들이 전부 나가떨어져 있었다. 그것도 아주 처참하게.
죽은 건 아니었지만, 죄다 신음도 못 내고 기절한 상태였다. 그리고 용병들이 쓰러진 곳 한가운데에는 린다가 아주 말끔한 상태로 서 있었다.
“제가…… 나설 필요가 없는 모양인데요?”
아델라가 넋을 놓고 린다의 늠름한 자태를 보며 말했다. 아델라의 도움 요청을 받고 함께 온 아리스도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습니다.”
둘이 멍하니 린다를 보는 사이, 린다는 경악에 찬 표정으로 입도 못 다무는 벨제프한테 다가갔다.
“이제 증명됐죠? 머리 조아리러 가시죠.”
“이, 이이이, 이거, 이거 괴물 아니야!”
“칭찬 감사합니다. 각하께 자작님이 한 말 그대로 잘 전해 드리겠습니다.”
싱긋 웃으며 말하는 린다한테서는 거대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벨제프 자작은 자신보다 작고 어린 여성의 몸에서 풍기는 강렬한 기운에 압도당했다.
“데리고 가. 죄명은 공무 집행 방해, 공작 각하 모욕, 그 외 등등. 전과만 해도 엄청날걸.”
린다가 수비병들한테 눈짓하자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작의 양팔을 잡았다.
“뭣! 이거 놔! 내가 누군 줄 알고, 네깟 놈들이!”
발버둥치려 하면 할수록 더 단단히 붙잡는 수비병들 때문에 자작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는 그제야 위기감을 느끼고 주변을 살폈다. 자신을 살릴 구명줄이 어디 없나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는 발견했다. 자신을 구할 황금빛 구명줄을.
그는 급하게 자신이 아는 그 이름을 불렀다.
“아, 아델라! 놔! 난 내 딸아이! 납치당한 내 딸아이를 찾으려고 여기까지 온 거란 말이다!”
‘에엥?’
지목당한 아델라는 매우 황당한 눈으로 자작을 보았다. 자작은 모두의 시선이 아델라한테 향할 때를 노려 수비병들을 뿌리쳤다. 그는 마치 오래도록 잃어버린 딸이라도 찾은 듯이 아델라한테 뛰어가 부둥켜안았다.
“아이고, 어디 있었느냐! 내가 널 얼마나 찾은 줄 아느냐!”
벨제프 자작의 쇼에 아델라는 눈만 깜박였다. 이 인간이 무슨 쇼를 벌이는지 판단하기 위해서 우선 그녀는 잠자코 안겨 있었다.
“내 널 고발하지 않을 터이니 조용히 있거라. 이 아비 말 들어.”
‘그럼 그렇지, 이 인간이.’
아델라만 들리게 작게 속삭인 벨제프는 다시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내 널 잃어버리는 줄 알았다! 어떻게 된 것이냐! 널 납치해 간 그 년은 어떻게 됐어!”
‘납치 같은 소리 한다.’
아델라는 속이 뒤집혔지만 꾹, 아주 꾸욱, 눌러 참았다. 복수할 기회가 왔는데, 이 좋은 기회를 표정 하나 갈무리하지 못해서 놓칠 수는 없었다.
연기에는, 연기지!
그녀는 곧 자신을 꽉 안은 자작을 밀어 내고선 애처롭게 몸을 움츠리며 울먹였다.
“왜, 왜 이러세요.”
“……응?”
댕그란 황금빛 눈에는 금방이라도 울 듯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왜 이러세요, 누구세요!”
“……뭐……?”
벨제프 자작은 아델라가 자신을 전혀 모른다는 듯이 반응하자 말문이 막혀 아이를 멍하니 보았다. 그사이, 린다가 뚜벅뚜벅 자작과 아델라 쪽으로 걸어왔다.
“딸아이, 라고요? 납치당한?”
린다는 아무것도 모른 척 물었다.
“그, 얘, 얘가 왜 이래! 아델라! 내가 네 아버지다. 여기 네 아비가……!”
자작이 아델라의 어깨를 강하게 잡아 누르고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부라렸다. 그러자 아델라가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울음에 놀란 자작의 손에 힘이 빠졌다.
그 틈을 타 아델라는 자작에게서 떨어져 옆에 있던 이를 두 팔로 꼭 안았다.
“흐어엉! 파파아아아! 저 이상한 아저씨가아!”
“파, 파파?”
‘파파?’
벨제프 자작을 포함해 거기 있던 모두가 놀란 표정을 했다. 심지어 린다도 놀라서 아델라가 냉큼 안긴 사내를 보았다.
긴 푸른빛 머리와 흑안을 지닌 그는 아이를 한 손으로 안아도 될 만큼 근육질에 다부진 몸매의 남성이었다. 바로, 아델라의 요청으로 이곳에 오게 된 아리스였다.
사실 그 역시 다른 이들만큼 당황스러웠지만, 금방 표정을 갈무리하고 아델라를 자기 뒤로 숨겼다. 아델라한테 생각이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크흡, 끄흑. 웃으면 안 되겠지? 죽겠네, 진짜.’
그 모든 상황을 아까부터 지켜보던 헤이든은 웃음을 참기 위해 몸을 돌렸고, 린다도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이 악물고 버텼다. 아리스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표정으로 잠깐 나타나 웃음이 나온 것도 있지만, 그보다 아델라의 태연한 연기가 더 웃겼다.
“우리 애한테 무슨 짓입니까?”
“우, 우리 애?”
아델라는 벨제프 자작이 무섭다는 듯이 아리스의 뒤에서 얼굴을 숨겼다. 아리스의 너른 등은 아델라가 숨기에 아주 적합했다.
“누구신데 우리 애한테 아델라라고 부르면서 딸아이라고 거짓말을 하십니까? 아까 뒤에서 제 딸 협박하는 것도 다 들었습니다.”
아리스는 아주 훌륭하게 아델라의 장단에 맞춰 주었다. 아리스가 화가 난 표정으로 벨제프 자작을 쏘아붙이니 자작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네, 네놈이야말로 누군데 남의 애를……!”
“우리 셀리가 왜 당신 애죠?”
‘음, 나도 모르게 개명한 이름이 참 예쁘구나.’
아델라는 아리스의 뒤에 숨어 그를 응원하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원래 이런 방법을 쓰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아리스의 순발력에 박수를.
아델라는 자작이 잡혀갈 일을 스스로 벌이자 그와 엮이지 않는 게 좋다는 판단이 들어 바로 계획을 바꿨다. 언젠가 망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스스로 무덤을 팔 줄이야.
“세, 셀리? 아니 그게 무슨…….”
자작은 너무 당황해서 입만 뻐끔거렸다. 이런 상황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딸과 똑 닮았는데, 자신을 모른다고 울고 이름도 달랐다. 심지어 아버지까지 있어서 벨제프 자작은 저 아이가 진짜 자신의 딸이 아닌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분위기가 다른 것 같기도…….’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나.
“저기, 벨제프 자작님? 아무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지만, 어떻게 남의 애를…….”
정신을 못 차리고 멍하니 있던 자작이 린다의 목소리에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애가 자신의 애가 맞든 아니든 지금은 어떻게든 우겨야 했다.
“납치당한 거 맞다니까? 쟤가 내 애야! 저 가여운 것이 납치범한테 협박당해서 저러는 거라고! 이놈, 이놈이 납치범이야!”
벨제프 자작은 아리스한테 삿대질을 하며 화를 냈다.
“네가 내 아내랑 같이 내 딸을 납치한 거지! 감히 귀족의 것에 손을 대! 네놈이 그러고도 무사할 줄 알았어?!”
“파파아……. 그냥 가자아. 저 아저씨 이상해. 셀리는 무서워.”
벨제프 자작의 맥을 끊듯 아델라가 아리스의 망토를 더 꼭 쥐고 둘을 올려다보았다.
“크흠! 큼!”
결국, 참고 있던 린다마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아델라의 치명적(?)인 눈빛 공격에 숨을 참고 끅끅 웃었다. 저 상황에서 용케 웃지 않고 진지한 표정으로 아델라를 바라보는 아리스가 대단해 보였다. 아리스는 아이를 벨제프 자작한테서 보호하듯 다시 자신의 뒤로 꼭꼭 숨겼다.
“그 말, 책임지실 수 있습니까?”
아리스가 인상을 구기며 험악하게 묻자, 벨제프가 주춤하며 한 발짝 물러섰다. 잘 보니 외모만 같을 뿐, 자신이 아는 딸과는 너무 달랐다.
저 표정, 저 말투, 저 분위기. 정말 하나도 닮은 구석이 없었다. 벨제프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아델라는 방 안에 꼭꼭 숨어 안 나오는 음침한 아이였을 뿐이다.
“아까 보니 각하께 사죄도 드려야 한다던데, 이 일도 명명백백히 밝히러 저와 함께 가시죠.”
“네…… 네놈이 뭔데! 뭘 밝히러 가, 어? 사람이 살다 보면 착각할 수도 있지! 이 평민 놈이 뭘 안다고 지껄여! 딸 잃은 아픔을 네가 알아?”
아델라는 아리스의 뒤에 숨어 오웩, 하는 시늉을 했다. 어디서 딸 잃은 아픔 운운하나 싶었다.
“내 딸이 여기 있다고! 납치당한 딸이! 착각할 수도 있지! 안 그래?”
“그것도, 각하께 말씀드리세요.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일단 그쪽 죄부터.”
“뭐? 아니…!”
린다보다 먼저 웃음을 갈무리한 헤이든이 벨제프 자작의 어깨를 잡았다. 그에 수비병들도 얼른 헤이든을 따라 벨제프 자작을 잡았다.
“이거 놔! 아델라! 내 딸이 지금 이 성 어딘가에서 나만 기다리고 있다고! 내 딸이 잘못되면 너희 다 가만 안 둘 줄 알아!”
‘변명도 궁색하네. 언제부터 그렇게 딸을 아꼈다고.’
아델라는 입을 비죽 내밀고 끌려가는 벨제프를 힐끔 보다가 아리스의 망토를 놔 줬다. 아리스는 그제야 한숨 놓고 아델라가 괜찮은지 살펴보려 몸을 돌렸다.
그때, 몸을 아델라 쪽으로 완전히 돌린 아리스가 갑자기 굳은 듯 자리에 멈췄다.
“응? 왜 그러세요?”
아리스가 한 곳에 시선을 떼지 않고 서 있자 의아했던 아델라도 아리스의 시선을 따라 몸을 돌렸다. 그리고 곧, 아델라도 눈을 크게 뜨고 몸을 굳혔다.
둘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언제 왔는지 모를 릴리아가 있었다. 아델라는 끌려가는 벨제프 자작을 곁눈질로 보면서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에게 이쪽으로 오지 말라고 가슴 앞에 엑스자 표시도 했다.
하지만 릴리아는 벨제프 자작을 발견한 순간부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했다. 아델라의 만류에도 그녀의 눈에는 오직 어린 아델라만 보였는지 이쪽을 향해 뛰어왔다.
“이 평민 놈! 너 때문에……!”
아리스한테 울분을 쏟으려 자작이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곳에는 언제 사라진 건지 아리스가 보이지 않았다. 아델라만 눈을 댕그랗게 뜨고 그 자리에 있을 뿐이었다.
“조용히 가시죠. 억울하시면 각하께 전부 말하면 됩니다.”
타이밍 좋게 린다가 벨제프의 시선을 가렸다. 린다는 힐끔 아리스가 순식간에 움직인 곳을 곁눈질하고는 다시 벨제프한테 시선을 고정했다.
“저거! 저놈 내빼는 게 이상해! 유괴범 아니야?!”
벨제프가 소리를 치거나 말거나 아리스는 자작한테 릴리아가 보이지 않게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곧바로 자신의 망토를 벗어 덜덜 떨고 있는 릴리아한테 입혔다. 길게 늘어진 망토는 릴리아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리기에 충분했다.
릴리아는 두려움에 가득 찬 표정으로 자신에게 망토를 입혀 주는 아리스를 올려다보았다. 애처롭게 떠는 릴리아가 아리스 역시 안쓰러웠지만, 안심시키는 것보다 빠르게 머리를 굴려야 했다.
이 상황에서 릴리아를 도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 그는 매우 당황한 상태였다. 아내라고 했다가는 벨제프한테 십중팔구 꼬투리가 잡힐 게 뻔했다.
“―하, 할머니!”
아리스가 고민하는 사이, 뒤에서 냅다 릴리아를 향해 뛰어오는 이가 있었으니. 당연히 이 일을 주도한 아델라였다. 아리스는 아델라의 순간 대처 능력에 손뼉을 치고 싶었다. 그는 무언가 크게 깨달은 표정으로 릴리아의 어깨를 감쌌다.
“어…… 어머니, 여기까지 왜 나오셨어요. 몸도 안 좋으신데.”
그는 평소 자신의 어머니를 대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애썼다. 릴리아는 넋이 나간 상태 그대로 아리스와 아델라를 번갈아 보았다. 둘이 왜 이러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죄송합니다. 당황스러우시겠지만, 조금만 저희 장단에 맞춰 주십쇼.”
아리스가 작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속삭였다. 그러나 릴리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아델라가 벨제프 자작을 만난 걸 알게 된 순간부터 그녀의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나마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손을 따뜻하게 마주 잡는 아델라 덕분이었다. 아델라가 무사히 자신의 앞에 있다는 생각에 릴리아는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사이, 아리스와 아델라는 눈빛을 교환했다. 릴리아의 정신이 돌아오기 전에 얼른 벨제프 자작과 그녀를 멀리 떨어뜨릴 생각이었다.
“린다 경. 죄송하지만, 아픈 어머니께서 셀리를 찾으러 나오시는 바람에……. 모셔다 드리고 와도 되겠습니까?”
린다는 둘을 믿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 잠깐만! 누구 맘대로! 난 내 딸 찾으러……!”
“들어주지 말고 데려가.”
다행히 자작은 릴리아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린다의 명령에 수비병들은 얼른 그를 데리고 사라졌다.
벨제프 자작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사라진 후, 아델라는 릴리아의 손을 잡은 채 몸에 힘을 풀며 한숨을 쉬었다.
“하아아아,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아델라 님과 함께하면 제 심장도 남아나질 않겠습니다.”
아리스도 옆에서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맞아요. 한눈을 팔 수가 없다니까요?”
멀리 벨제프가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던 린다도 아델라 곁으로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
“휴……. 죄송해요. 저도 갑자기 계획을 바꾼 거라.”
“판단력 하나는 알아 줘야겠네요. 원래는 뭐 하려고 했는데요?”
“사실 전 한 대 맞으려고 했죠. 저 인간, 조금만 대들고 마음대로 안 되면 손부터 올라가니까요. 그래서 아동학대로 잡아가시라고 아리스 경 데리고 온 건데…….”
본의 아니게 아리스한테 연기를 시켜 버렸다. 아델라는 죄송한 표정으로 아리스와 린다를 올려보려고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가늘게 떨리는 릴리아의 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아직 경직되어 한마디도 못 하는 릴리아를 보았다.
“어머니, 어머니? 숨 쉬세요, 숨! 내뱉고, 내쉬고!”
아델라가 놀란 눈으로 릴리아를 흔드니, 릴리아는 그제야 참아 왔던 숨을 내뱉었다.
“하― 하아아아……. 아델라, 어우, 아델라……!”
그녀는 아델라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드디어 긴장이 풀린 듯 아델라를 안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델라의 귀에 들리는 릴리아의 심장 소리가 평소보다 매우 빨랐다.
“왜 이런 무모한 짓을 했어. 왜 그랬어…….”
릴리아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떨렸다.
“죄송해요. 어머니께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무서워하는 거 아니까, 모르게 하려고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말도 안 하고! 잘못됐으면 어쩌려고 그래!”
릴리아는 아까의 공포만 생각하면 심장이 철렁했다.
과거, 벨제프 자작의 악랄함이 생각난 그녀의 눈동자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아델라는 그런 그녀를 꼭 안고 달래듯이 등을 토닥였다.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화내지 마세요. 도와줄 분들이 계셔서, 제가 좀, 마음을 놨어요.”
처음에는 아리스가 있었고, 그다음에는 린다가, 그리고 헤이든도 있었기에 아델라는 마음 놓고 계획을 바꿀 수 있었다. 자신이 약간의 실수를 해도, 받아줄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릴리아는 아니었다. 릴리아의 곁에는 아델라 하나뿐이었다. 릴리아는 아직 린다와 아리스를 완전히 믿지 못했으니까.
“예, 너무 노여워 마세요. 아델라 님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패를 다 쓴 거니까요. 이번에 자작한테 벗어나지 못하면, 다음에는 더 힘들어집니다. 피해자도 더 늘고요.”
린다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아델라와 릴리아의 눈높이를 맞추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녀는 릴리아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이 웃었다.
릴리아는 그런 린다를 불안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보다가 곧 자신만 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델라를 놓아 주었다. 아델라의 안전을 확인한 뒤에야 릴리아도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죄송합니다. 아, 아니. 감사합니다. 아델라를 도와주셔서.”
릴리아는 아델라를 도와준 린다와 아리스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별말씀을요.”
“저도 많은 도움을 받은 터라,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쇼.”
린다와 아리스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저 근데…… 앞으로 자작님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저희는 어떻게 되고요?”
릴리아의 물음에 린다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벨제프 자작은 여태 행한 악행이 많아 죽을 때까지 감옥에 있거나 그에 준하는 벌이 있을 겁니다. 두 분의 신변에는 아무 문제가 없을 테니 걱정 마세요.”
“그게 가능한가요? 어떻게요? 귀족은 무슨 짓을 해도 처벌이 힘들지 않나요?”
보통은 그랬다.
“다른 곳에서는 그렇죠. 귀족이라는 이유로 감형해 주는 예도 많고. 그나마 강하다고 하는 게 자택 구금이면 말 다 했죠.”
린다는 비꼬듯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어떻게……?”
릴리아가 떨리는 눈동자로 린다를 보았다. 린다는 릴리아의 떨리는 갈색 눈동자를 차분히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여긴 다른 곳이 아니라 펜베르크 지역이니까요. 죄를 지었으면 그에 마땅한 벌을 받아야죠. 원래라면 그게 정상적인 겁니다.”
정상적으로 굴러가는 국가라면 말이다.
릴리아는 린다의 말에 조금 놀란 듯 보였고, 린다는 그런 그녀를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어쩌다가 범죄자한테 형벌을 가하는 게 놀랄 일이 된 건지.
불과 2, 30년 전에는 귀족이라 할지라도 죄질에 따라 형벌을 가했던 시기가 있었다. 물론, 당시에도 감형 사례는 있었지만, 지금처럼 무턱대고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 감형해 주는 경우는 적었다.
그러나 지금의 왕이 즉위하면서 이러한 사례들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서 이제는 돈을 받고 풀어 주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래서 아델라 님이 벨제프 자작을 일부러 펜베르크 성에 불러들인 거고요.”
릴리아는 린다가 덧붙인 말에 더 놀라워했다. 그녀는 아델라가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고 벨제프 자작을 불러들였다는 것에 놀랐다.
자작을 만나게 되면 영락없이 아델라가 당하고 잡혀갈 거라고만 생각했지, 역으로 아델라가 함정을 만들어 일을 꾸밀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델라, 네가 부른 거라고?”
아델라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벨제프 자작을 고발해 봤자 다른 곳에 있으면 제대로 처벌이 가해지지 않을 테니까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릴리아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분명 아델라가 자신이 지켜주겠다, 릴리아가 위험한 일 없게 하겠다, 라고 말은 했다. 하지만 실제로 진짜로 그렇게 할 줄은 몰랐다.
릴리아는 한평생, 벨제프 자작의 손아귀에서 못 빠져나가는 줄만 알았다. 그녀가 이곳에 아델라와 남기로 한 이유도 혹시 벨제프 자작이 아델라와 자신을 찾는다면 아델라의 방패가 되어 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오히려 반대가 됐다. 아델라는 자신의 말을 지켰고, 릴리아한테 어떤 피해도 가지 않게 했다.
릴리아는 이 작은 아이의 머리에서 이런 계획이 나왔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또한, 그 계획을 행동으로 옮겼다는 것도 놀라웠다.
“온전히 제 생각만은 아니에요. 미래에서 힌트를 준 사람은 따로 있거든요.”
“미래에서? 누구?”
릴리아의 물음에 아델라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루요. 루가 미래에 그 인간을 펜베르크 성에 데려왔어요.”
루는 펜베르크 지역의 특수성을 잘 알고 있었다.
보통 수도가 아닌 지방에서는 왕이 보낸 이들이 재판을 관리한다. 하지만 펜베르크 성에는 재판장은 있으나 왕이 보낸 이들이 재판을 맡지 않았다.
처음 그들이 부임했을 때는 열정적으로 공작의 편인 사람들을 몰아내고 재판 기록을 바꿔 공작을 방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죄다 일이 많고 힘들다며 사표를 내고 도망갔다.
그렇게 되어 지금은 재판관이 빈 상태였고, 왕이 다시 사람을 보낼 때까지 미하일 공작이 검토부터 선고까지 전부 도맡아 하고 있었다. 원래 공작은 선고에 관한 판단만 내렸는데 말이다.
실제로 펜베르크 성에는 아주 작은 시비가 붙어도 재판장으로 달려와서 할 일이 매우 많았다. 재판까지 가는 일은 다른 지역보다 많지 않았지만, 조정해 주는 일은 그 어디보다 많았다. 일하다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처음 부임한 이들은 다른 곳에서 하던 대로 대충 보고 전부 돌려보냈다. 그렇지만 공작이라는 사람이 그 사안을 전부 다시 훑고 사건에 대해 꼬치꼬치 따지는데 계속 설렁설렁 일을 처리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뒷배라 믿었던 왕은 그들을 보내 놓은 채 그대로 잊어버렸고.’
그 상황에서 펜베르크 지역의 특수성까지 가동되니, 그들은 참지 못하고 전부 도망쳤다.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는 거지! 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 지역이 바로 이곳이었다. 설령, 귀족이라 할지라도.
펜베르크 지역은 부임한 귀족이라 할지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처벌을 받았다. 아무리 지역을 다스리는 영주라도 보통은 같은 귀족을 함부로 잡을 수 없었지만, 그 역시 펜베르크 성은 달랐다.
아주 오래 전, 건국을 돕고 다른 나라들의 수탈을 막아 내던 시절부터 제스트윈 공작가에게는 공작 이하 귀족들을 벌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오랜 전쟁으로 왕권이 약해지고, 변방 귀족들이 전쟁에서 백성을 지켜준다는 명목으로 엄청난 수탈을 하던 시절.
그때, 제스트윈 공작가는 왕가와 손을 잡고 변방 귀족들을 전부 잠재웠다. 그리고 그때의 공으로 제스트윈 공작가에는 왕권에 위협이 되지 않는 선에서 권한이 부여됐다.
그 권한이 바로 공작의 영지 안에서 벌어진 일 중에 마땅한 벌을 받아야 할 귀족이 있다면 왕의 허락 없이도 벌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었다. 이렇기에 알 만한 귀족들은 펜베르크 지역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중앙 귀족이 펜베르크 지역에 부임하는 건 유배와 같았다.
“그땐 왜 자작을 펜베르크 성에 데리고 왔나 했더니, 일부러 그런 거더라고요. 유일하게 귀족을 벌할 수 있는 분이 공작 각하밖에 없거든요.”
권한을 가진 가문은 셋이었지만 그 권한을 제대로 쓰고 있는 가문은 제스트윈 공작가 뿐이었다.
한때 공작가와 함께 나라를 지켜 냈던 다른 두 가문 중 하나는 후계자가 줄줄이 죽어 가문의 명맥을 잇지 못하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왕의 옆에 붙어 간신 짓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두 가문은 영지를 다스릴 형편이 아니었다.
“물론, 제가 그 무모한 계획을 실행할 수 있었던 건, 절 도와주는 많은 사람들 덕분이지만요.”
아델라는 자신이 아주 운이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벨제프 자작한테 벌을 줄 수 있게 된 이 상황도,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도, 전부 그녀한테는 행운이었다.
아델라가 대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를 뒤에서 도와주는 사람들과 그녀가 돌아갈 곳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이런 일을 벌여도 자작을 확실하게 처벌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많은 회귀를 지나 아델라는 비로소 혼자 모든 걸 해결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중이었다. 그녀에게는 언제나 자신의 편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계시니까요. 저 절대 이 기회 못 놓쳐요. 어머니가 저랑 함께 살면서 불안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도 불안해지고 싶지 않고요.”
릴리아는 새삼 놀랐다. 릴리아가 확신이 없어 불안해하던 미래를 아델라는 전부 지워 주었다.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릴리아를 잡고 나아갈 길로 앞장서서 이끌어 주었다.
이 작은 손으로, 이 작은 몸으로 아델라는 자신을 그 지옥에서 꺼내 주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하고 있었다.
아델라의 작은 손을 잡은 릴리아는 만감이 교차했다.
자신은 아델라를 그저 어린아이로만 대했던 게 아닐까? 그저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아델라를 온전히 믿어 주지 못했던 건 아니었을까?
“아델라…….”
아이한테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릴리아는 몰랐다. 아델라는 입만 달싹이는 릴리아를 보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걱정 마세요. 잘 해결될 거예요.”
아델라의 말은 마법의 주문처럼 릴리아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줬다. 자신을 걱정해 주는 ‘가족’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녀는 너무 안심됐다. 그동안 이 안도감과 신뢰를 잊고 지냈다. 릴리아는 기댈 가족이 있었던 스무 살 때처럼 너무 마음이 놓여 그만 눈물을 보일 뻔했다.
하지만 그녀는 눈물을 참으며 애써 웃었다. 아델라 앞에서 더는 울고 싶지 않았다. 아이의 말처럼 불안에 떨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불안에 사로잡혀 놓쳤을 아이의 생각, 아이의 표정, 아이의 행동, 그 모든 걸 제대로 마주 하고 싶었다.
“응, 분명 그렇게 될 거야.”
그 말은 아델라한테 신뢰를 보내는 말이기도 했지만, 릴리아 스스로 다짐하는 말이기도 했다.
* * *
“너희가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내가 전하께 이 사실을 모두 고할 거야! 이 나라의 지존도 안 하는 일을 변방의 귀족 따위가!”
아까부터 감옥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남자의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퍼졌다. 목소리가 쉴 정도로 그는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질린 눈으로 벨제프를 보던 교도관들은 어느 순간 하나 둘 없어졌다.
한참을 소리 지르던 벨제프가 이쪽저쪽 둘러보았을 때는 사람 인영이라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다 어디 갔어! 이것들이 감히 날 무시해?”
뚜벅, 뚜벅.
자작이 하도 소리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있다 보니 자작 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조차 묻혔다. 작고 가벼운 발소리가 자작 앞에서 멈췄고, 자작은 소리를 지르다 말고 자신의 앞에 멈춰선 아이를 빤히 보았다.
“지존이 하지 않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요? 각하께서는 현명한 판단을 내리셨는데.”
어깨를 닿을락 말락한 진갈색 단발을 지닌 아이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아이는 생기 띤 황금빛 눈동자로 벨제프 자작을 보았다.
“아까 그…… 애?”
벨제프 자작은 철창을 잡고 멍청히 아델라를 보았다.
“예, 셀리. 이름이 예뻐서 개명할까 봐요.”
“……뭐?”
“셀리로 사는 것도 괜찮겠어요. 무엇보다 아버지가 자상하시고 듬직하셔서. 누구처럼 열 받는다고 물건을 때려 부수고 손부터 드는 사람은 아니더라고요.”
아델라는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 벨제프 자작은 그때까지도 아델라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저 기억 못 하시나 봐요? 하긴, 그쪽이 절 제대로 본 기억이 없죠?”
아델라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에 틀어박힌 모습만 봤으니, 그가 아델라를 제대로 알 리가 없었다.
아까만 해도 아델라가 자기 딸인지 확신도 못 했으니까.
“설마 아델라? 아까 그놈 뒤에 숨어서 내가 네 아비가 아니라고 하던 게…… 너였어?”
“네, 제가 지나가던 분께 도와달라고 했죠. 범죄자가 절 쫓는다고.”
덜컹!
벨제프 자작은 뒤통수를 거하게 맞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매우 화가 난 표정으로 철창 밖으로 손을 뻗었다. 아델라를 잡기 위함이었다.
“내, 내 이것을! 딸년이라고는 하나밖에 없는 것이, 감히 나를 속여? 그년이랑 짜고 날 이렇게 엿 먹여? 그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그는 앞으로 자신의 앞날을 걱정하기보다는 당장 딸한테 속았다는 게 더 열받는 모양이었다. 그가 맹렬한 기세로 아델라한테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철창에 가로막혀 아델라의 털끝도 건드리지 못했다.
“하나 오해하신 게 있네요. 저 혼자 한 일인데. 새어머니는 가족의 품으로 보내 드렸죠.”
“하! 그년이 가족이 어디 있어? 죄다 죽었는데! 이게 누굴 속이려 들어!”
자작의 말에 아델라는 그에게 경멸에 찬 눈빛을 보냈다.
“죽었다고요? 설마, 새어머니 가족까지 죽였어요?”
“이것이 아비를 뭐로 보고! 지들이 거지처럼 떠돌다가 객사한 걸 왜 내 탓을 하느냐!”
이 사람은 전생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었다. 우기는 것도 전과 똑같았다.
“왜 떠돌았는데요? 농부라고 들었는데.”
무언가 짐작한 아델라가 인상을 살짝 구기며 물었다.
“내가 그걸 어찌 알아! 내가 그놈들 사정까지 알아야 하느냐!”
“딸 찾으러 떠돌다가 그렇게 된 게 아니고요?”
“나도 모른다!”
아델라가 정곡을 찌르자, 벨제프는 더 버럭 화를 내며 시치미를 뗐다.
‘맞네. 이 인간이 어머니를 납치하는 바람에 갑자기 사라진 딸 찾느라 그렇게 된 거.’
하루아침에 사라진 딸을 찾으러 온 동네방네 돌아다녔을 릴리아의 부모님을 생각하면 아델라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동시에, 눈앞의 이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게 정말 끔찍했다.
울화가 치밀고, 돌덩이가 가슴 한편을 묵직하게 짓누르는 기분이다. 새어머니한테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해 줄 수 있을까.
“지금 그게 뭐가 중요해! 당장 아까 거짓말이었다고 공작한테 말해라! 안 그러면 그년하고 널 고발할 것이다!”
“어머니 여기 없는 거 맞아요. 당신이 어머니 부모님을 그렇게 한 줄도 모르고 고향에 보냈는데……. 어머니는 여기 없고 전 당신이 제 아버지가 아니라고 잡아떼면 되는데, 뭐로요? 뭐로 고발하실 건데요?”
“여기 이 감옥에서 우리 대화를 듣고 있는 사람이 몇인데! 어디서 거짓말을 하느냐!”
그의 우렁찬 목소리가 또다시 메아리처럼 감옥을 가득 채웠다. 감옥이 텅 빈 탓에 그의 큰 목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아델라는 의아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이상하네요? 감옥에는 아무도 없는데. 아까, 교도관들이 죄수들을 데리고 나가지 않았던가요?”
“뭐…… 뭐, 뭐?”
벨제프 자작이 빽빽 소리를 내지르고 있을 때, 교도관들은 약속이나 한 듯 죄수들 몇몇을 통제해서 데리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뒤뜰로 나가는 것 같긴 했는데, 벨제프는 그들이 뭘 하든 관심이 없었기에 몰랐다. 죄수들이 전부 사라질 동안 그는 계속 고래고래 소리만 질러 대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제가 아무 대비도 안 하고 이곳에 왔을까 봐서요?”
아델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꾸했다.
“네, 네가 그럴 힘이 어디 있느냐? 널 도와준 놈이 있구나!”
‘도와주는 분은 많죠.’
이번 일도 린다와 헤이든이 손을 써 준 거였으니까. 아델라는 싱긋 웃었다.
“맞구나! 맞아! 날 함정에 빠뜨려 이득을 얻을 놈이 있어!”
함정, 이라고 말하면 안 부끄러울까.
무덤을 파고 들어간 것은 다름 아닌 벨제프 자작 스스로였다. 아델라는 이 와중에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그를 보며 한숨이 나왔다. 실제로 한숨을 내뱉은 건 아니었지만, 전투력이 급하락하는 기분이었다.
“네가 감히 날 배신해? 내 공작한테 말해 이 성을 샅샅이 조사할 거다! 아까 그놈하고 싹 잡아서 죄를 물을 것이야!”
“어떻게요?”
아델라는 또박또박 토를 달며 벨제프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벨제프는 눈이 시뻘게질 정도로 화를 내고 있었지만, 아델라는 그런 그가 무섭지 않았다. 어릴 때는 저 표정과 말투가 그토록 무서웠는데, 지금은 자신한테 아무 영향도 주지 못했다.
“이 어린 것이, 어딜 똑바로 눈뜨고 대들어?! 지금이라도 빌면 내 널 용서해 주마!”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그쪽은 절 어떻게 못 합니다. 무릎 꿇고 빌어야 하는 건 그쪽이죠.”
온갖 죄로 잡혀 있는 이 상황이, 그에게는 전혀 심각하지 않은 듯싶었다. 아직도 자신이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머리를 조아리면 참작 가능성이 조금은 있을 수도요. 물론 피해자가 너무 많아 힘들겠지만요.”
“뭐……?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제가 이미 고발했거든요. 증거, 증인, 모두 수집해서. 당신이 다시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힘 좀 냈죠.”
“무, 무슨!”
자신이 행한 일이 한두 개가 아니라 벨제프 자작은 주춤거렸다.
“우리 다시는 다음 생에서도 만나지 말아요. 피가 이어졌다는 것도 끔찍해.”
“다시, 다시 말해 보거라! 뭘 고발했다는 것이냐!”
아델라가 벨제프한테서 한 발짝 물러섰다.
“어딜 가려는 것이야! 뭐라고 했느냔 말이다!”
“저보다 더 잘 알고 있지 않아요? 너무 많아서 뭔지 예상이 안 가는 건가? 그쪽이 생각한 거 전부, 그 이상이요.”
그렇게 말한 아델라는 조금씩 그한테서 물러섰고, 그가 계속 소리치는 것을 무시하며 몸을 돌렸다.
‘마땅한 벌을 받길. 영원히, 다시 만나지 말길.’
그녀가 다시 회귀하지 말아야 할 이유 하나가 더 생기는 날이었다.
* * *
벨제프 자작을 잡아 가두긴 했지만, 사실 헤이든은 그가 뭘 했든 딱히 상관이 없었다. 자신이 모시는 분을 모욕한 것에만 화가 났지, 그 외의 일들에 대해선 아무 생각이 없었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으니까.
물론, 방금까지 그렇게 생각한 자신의 텅텅 빈 머리를 여러 번 내리치게 됐지만.
헤이든은 아리스가 가져온 두꺼운 서류 더미를 보며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서 싹 지웠다. 그는 공작과 함께 무언가가 빽빽하게 적힌 서류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자신의 무지를 깨달았다.
“이게 전부, 딸아이가 고발한 내용이라는 건가?”
“예.”
“이렇게 정리하고 모으기 위해서는 혼자서는 힘들 터인데.”
이제 고작 15살인 어린아이가 이런 방대한 자료를 모았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건, 제가 도왔습니다.”
외출했다가 돌아온 린다가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대답했다.
“린다 경이?”
공작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자리에 앉는 린다를 보았다. 린다는 헤이든 곁에 앉아 그가 읽던 문서를 가져가 휙휙 눈으로 훑었다.
“예. 최근 그 아이와 친해지면서 도움을 청하기에 도왔습니다.”
이저드의 명으로 찾은 일이었지만 그 말은 쏙 뺐다. 안 그래도 사고 쳐서 혼나고 있는데 이것까지 이저드가 가담했다고 하면 더 혼날 게 분명했다.
“벨제프 자작 영애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가?”
“자작 영애인지는 몰랐고, 순찰 중에 여러 번 마주쳐서 자연히 친해졌습니다. 자작을 피해 이곳까지 도망 왔대서 조금 알아보다가, 이렇게 줄줄이.”
린다가 서류를 들고 웃으며 말했다. 린다의 태연한 거짓말에 헤이든은 감탄을 하며 그녀가 읽던 서류를 다시 뺏었다. 원래는 자신이 읽던 거였다.
“조금만 팠는데 이렇게 많이 나올 줄은 저도 몰랐죠.”
린다는 서류를 뺏어 가는 헤이든을 잠깐 흘겼다가 다시 미하일 공작을 보았다.
“흠…….”
미하일은 린다의 말을 어느 정도 납득했다. 이 정도로 죄가 크면 엉덩이만 뗐다 하면 일을 저질렀다는 말인데 여태까지 안 잡힌 게 이상했다. 뒷돈을 주고 계속 풀려난 걸까.
하긴 귀족은 그런 경우가 많았다. 아니, 귀족만이 아니라 돈 많은 상인도 그런 식으로 풀려났다. 왕의 사자라며 부임한 자들이 뒷돈을 받아 증거나 증언을 바꿔 준 것이다. 심지어 없던 일이라며 증거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경우도 많았다.
말도 안 되는 말이었지만, 수도에서 감사가 나올 일도 없으니 재판관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권력을 휘둘렀다.
물론, 펜베르크 성에서는 불가능한 말이었지만.
“이거 완전 사형감인데. 참수형.”
벌인 짓이 장난 아니었다. 평생 죄만 짓고 살았나. 어떻게 사람이 이럴까? 헤이든은 혀를 차며 나머지 서류들을 읽었다. 그는 서류를 읽는 와중에 무언가 계산하듯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고 있었다.
“뭐 하냐?”
손가락을 하나둘 접으며 서류를 읽는 헤이든을 린다가 이상하게 보았다.
“무슨 벌을 받을 수 있는지 세고 있잖아. 보면 모르냐?”
“왜 그걸 세고 있어? 강간, 상해, 폭행, 겁박, 납치, 살해 등등. 그중 가장 낮은 형벌이 술 처마시고 돈 안 내고 튄 사건이려나?”
서류들만 본다면 도둑질은 범죄 축에도 끼지 못했다.
“심각하군…….”
미하일 공작은 펜베르크 지역 밖으로 나간 적이 없어서 밖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자세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놈이 활개를 치고 다녔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영지 밖 상황이 얼마나 엉망인지 알 수 있었다.
“이 일을 고발한 아이는? 아버지의 처벌을 원한다고 하나?”
“아주 강력히요. 앞으로 더 나올 피해자를 생각하면 응당 그래야 한다는군요.”
그건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그럼 자작 가문에서는…….”
미하일 공작은 다음 서류를 읽으며 할 말을 잃었다. ‘아동 학대’, ‘가정 폭력’이라는 말이 주된 아이의 증언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보시다시피, 가문에서 그를 도와줄 사람은 없습니다. 자작은 세력 없이 떠돌아다녀서 그를 옹호할 이들도 없죠. 가주의 작위는 후계자인 레널드 벨제프한테 넘어갈 겁니다.”
재판으로 넘기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조금만 정보를 모아도 너무 투명하게 자작의 죄가 드러나서 재판까지 갈 필요가 없었다. 심지어 피해자 중 증언하겠다는 이들도 많아 빼도 박도 못 했다. 미하일 공작은 빠르게 서류를 훑고는 서류를 가지런히 정리했다.
“재판대에는 앉히지. 혹, 올 수 있다고 하는 피해자가 있다면 부르게.”
“재판은 하지 않고요?”
“재판할 게 없지 않은가. 비공개로 날짜 잡고 선고만 내리지. 형은 검토해서 그날 발표하겠네.”
미하일 공작의 말에 헤이든과 린다, 아리스가 알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린다 경.”
“네.”
“그 아이, 내가 좀 보지.”
“예?”
“아델라 벨제프 자작 영애.”
갑작스러운 미하일의 말에 린다는 살짝 머뭇거렸다.
미하일 공작은 아직 아델라의 존재를 몰랐다. 아델라가 이저드와 함께 계획을 세웠다는 것도, 둘이 진지한 만남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미래에서 시간을 돌려서 왔다는 것도 전부 몰랐다.
“왜 그러지?”
“아, 아니요. 데리고 오겠습니다.”
일단 아델라가 이런 상황을 알고 있으니, 그녀가 잘 행동하겠지. 린다는 그렇게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꽥꽥거리는 벨제프 자작을 뒤로하고 나온 감옥 앞뜰에는 린다가 아닌, 다른 이가 아델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단정하게 짧은 검푸른 머리와 쾌청한 하늘을 담아 놓은 것 같은 하늘빛 눈동자가 특히나 빛나는 이저드였다. 이게 얼마 만에 보는 건지 모르겠다.
“이저드 님!”
잔잔했던 아델라의 표정이 그를 보자 금방 변했다. 아델라는 환하게 웃으며 이저드의 품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떻게 오셨어요?”
“린다 경이 알려 줘서 잠깐 나왔네.”
서로를 보는 표정에서 보고 싶은 것을 얼마나 참았는지 나타나 있었다. 둘은 보고만 있어도 좋은지 한참 서로를 보며 미소 지었다. 이저드는 뛰어오느라 흐트러진 아델라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괜찮겠나?”
그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아델라는 웃음으로 답했다.
“이미 고발할 마음을 굳힌 순간부터 예상했던 일이에요. 재판이 시작돼서 사형이 내려진다고 해도 충격받을 것 같지 않고요.”
이저드가 모아온 벨제프 자작의 악행을 전부 확인한 아델라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죽음을 생각했다. 그가 벌을 받아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건 당연한 결과였다. 그가 저지른 짓이 너무 많았다.
“벌을 받을 사람은 받아야죠. 그래야 사람들이 믿을 수 있죠, 이 세상을. 우린, 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거잖아요.”
그저 나 하나만 산다고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아델라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위험을 감수하고 자작을 고발한 거였다.
앞으로 일어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그래, 그렇지.”
이저드는 아델라가 혹, 저번처럼 아버지한테 막말을 들어 마음이 상했을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의 기우였다. 그녀의 마음은 전보다 훨씬 단단했고 강했다.
“그나저나, 이저드 님은 괜찮으세요?”
“음?”
그는 아델라가 뭘 묻는지 몰라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후계자 교육도 쉬지 않고 한다고 들었고, 훈련도 엄청 하신다고 들었는데…….”
그러고 보니 살이 조금 빠지신 것도 같고.
아델라가 이저드의 안색을 요리조리 살피자 이저드가 피식 웃었다.
“한 번 했던 거라 그런지 훨씬 수월했네. 다만.”
다만, 하고 이저드가 뜸을 들이자 아델라가 눈을 깜박이며 이저드를 올려보았다.
“참기는 힘들었지.”
“참기요? 뭘요?”
이저드는 다른 이들에게는 잘 짓지 않는 환한 미소를 보였다. 그가 웃으니 그 주변까지 환해 보이는 것은 착각이었을까?
“그대를 보지 못하는 거. 그댄 내가 보고 싶지 않았나?”
“……예? 에?”
아델라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멍청히 되물었던 것은 이저드의 햇살 같은 미소에 순간 홀렸기 때문이었다.
이 기분 오랜만이었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면 훅 치고 들어오는 저 미모란.
“아! 아니, 저도! 저도…… 보고 싶었어요.”
아델라가 볼을 붉히며 미소 짓자, 이저드도 마주 웃었다.
“린다 경과 훈련을 한다고 들었네. 부인께도 교육받고 있다고.”
“네. 정식으로 배우는 건 아니고, 체력 키우는 거 정도? 그리고 부인께 배우는 건 궁에 대한 이것저것이요. 아무것도 모르고 궁에 들어가는 것보단 실정을 알고 들어가면 더 좋으니까요.”
“무리하고 있는 건 아닌가? 몸은 괜찮나?”
이번에는 이저드가 아델라의 안색을 살폈다. 그에 아델라는 웃음으로 답했다.
“괜찮아요. 천천히 배우고 있어요.”
“그럼 다행이네만. 별일은 없었나?”
“음…….”
아델라는 요 며칠 무슨 일이 없었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이저드한테 하고 싶은 말이 이것저것 많았는데 막상 이저드를 마주하니 바로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가만히 고민하다가 아까 있었던 이야기부터 꺼냈다.
“린다 경이 맨손으로 용병들을 때려눕히는 걸 봤어요.”
“아, 나도 들었네.”
“저 여태 린다 경이 수비병들 가르치면서 많이 봐주고 있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엄청 힘 조절하고 있던 거더라고요!”
“아마 이번 사건도 힘은 조절했을 거네.”
이저드의 말에 아델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못 들은 건가? 아까 그것도 봐준 거라니?
“예? 진짜요?”
“죽이지 않으려면 조절해야 하지 않나.”
“어? 그것도 그렇네요?”
그때의 기억을 되짚어 보니 그 난장판에서 어디 부러진 사람은 있어도 불구가 된 사람은 없었다. 생명의 지장이 있는 이들도 없었다.
아델라는 크게 깨달은 표정으로 이저드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다. 아무래도 린다를 더욱 존경하게 된 모양이었다.
“어머님도 벨제프 자작을 봤다던데 괜찮으신가?”
“아주 괜찮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나으신 것 같아요. 시간을 주고 기다리니까 점점 진정하셨고, 나중에는 민망해하시더라고요.”
“아무래도 상처가 깊으시니.”
“그렇죠. 천천히 나아지시게 제가 노력해야죠.”
아델라가 씩씩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러다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표정으로 시무룩해졌다.
“왜 그러나?”
“어머니의 가족분들을 찾아보기로 했는데 저 인간이 말하길, 딸을 찾다 객사했다고 하더라고요.”
진짜일까?
아델라는 믿고 싶지 않았지만, 아마 벨제프 자작이 릴리아의 가족들 뒷조사를 한 건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몇 달을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한 건 아닐 것이다. 그분들이 돌아가실 때까지 사람을 붙일만한 자금도 없었거니와 벨제프 자작이 그렇게 치밀한 사람은 아니었다.
“확실히 죽는 걸 봤다던가?”
이저드도 비슷하게 생각했는지 아델라한테 물었다.
“그냥 죽었다고만 했어요. 떠돌다가 객사했다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는 모르는 것 같아요. 저 사람 말, 다 믿지 못하지만, 아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아요.”
둘은 고민에 빠졌다. 과연 벨제프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어머님 고향에서부터 수소문을 해 보는 게 어떤가? 아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르네.”
“우선은 그게 좋겠죠? 성과가 있든 없든, 손 놓고 그 인간 말을 믿는 것보다는 알아보는 게 좋겠네요.”
어차피 고민만 하고 있어 봤자 나오는 건 없었다. 직접 움직여서 뭐라도 찾아야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릴리아 가족들이 죽었든 아니면 어딘가에 살아 있든, 알아 봐야 실마리도 얻을 수 있겠지.
같은 생각을 한 둘은 서로를 보고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다른 일은 없었나?”
이저드는 자신이 없었던 시간 동안 아델라가 무엇을 했는지 궁금했다. 시간만 된다면 온종일 묻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아, 그리고! 저 살 조금 붙었어요! 여기 봐요, 볼에.”
아델라가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볼을 이쪽저쪽 이저드한테 보였다. 자랑스럽게 내미는 아델라의 볼을 물끄러미 보던 이저드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사실 자세히 봐도 쪘는지 안 쪘는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미묘한 변화였지만, 아델라가 저리 좋아하니 이저드도 좋았다.
“미묘하긴 하지만, 살이 조금 붙은 것 같네. 잘 먹고 있다니 다행이야.”
삼시 세끼에 간식까지 전부 꼭꼭 챙겨 먹는다는 건 린다한테 들어 알고 있었다. 그 효과가 금방 나타나지는 않을 테지만, 차차 나아지겠지.
“그죠? 앞으로 더 찔 거고 클 거예요. 얼른 예전 키 따라잡으려고요. 아, 예전보단 더 근육이 붙어야 할까요?”
“나쁠 건 없네. 다만, 몸에 무리 가지 않게 성장하는 게 중요하지.”
“린다 경도 그런 말 하더라고요. 그래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엄청 굴리지는 않아요!”
신나서 말하는 아델라를 보며 이저드는 소리 죽여 웃었다. 열심히 말하는 아델라가 너무 귀여웠기 때문이다. 참, 난감했다. 분명 아델라가 엄청나게 어린 모습인데도, 미래의 모습과 겹쳐 보이는 건 무슨 일인지.
이저드는 예전과 똑같이 행동하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하마터면 아델라의 두 볼에 손을 뻗어 입술을 맞출 뻔했다.
“……이저드 님은요?”
“나? 흠.”
그 타이밍에 화제가 자신한테로 돌아오자, 조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저드는 며칠 동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생각해 보았다.
“요즘, 신학 공부를 시작했네.”
“신학이요? 그것도 귀족들 필수 과목인가요?”
“아니, 그건 아니네. 개인적으로 배우고 싶어져서 말이야.”
이저드가 전에는 배우지 않던 신학을 자진해서 배우기로 한 건 루 덕분이었다. 루한테서 고대의 이야기를 듣고 혹, 마법에 관한 내용을 알 수 있을까 해서 듣게 됐다.
“고대에, 마법에 대한 내용이 있을까 해서 듣게 됐네.”
“아아, 그럴 수 있겠네요. 흑마법도 신의 언어로 쓰여 있고, 신이 내린 힘이라고 앞장에 나와 있다니까.”
아델라는 동의한다는 듯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서 마법에 관한 것도 알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네.”
“뭔가…… 알아내셨어요?”
그녀가 조심스레 묻자, 이저드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더 찾아보고 알게 된다면 알려주겠네.”
아델라는 그를 보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저드가 잊지 않고 자기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에 마음이 벅차올랐다.
이저드도 아델라를 생각하며 공부했고, 아델라도 이저드 옆에 빨리 가기 위해 훈련했다. 둘 다 같은 마음이었다는 것이 그녀는 너무 기뻤다.
아델라는 이저드를 꽉 안으며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저드 또한, 아델라를 마주 안으며 잠시 간의 안정을 취했다. 둘의 심장이 비슷하게 뛰어서인지 이상하게 그 소리가 듣기 좋고 편했다. 서로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증명하는 것 같았다.
만일 중간에 공작의 명을 받은 린다가 뛰어오지 않았다면 둘은 몇 시간이고 서로를 안고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한참을 안고 있었음에도 그 시간이 너무 짧게만 느껴졌다.
* * *
아델라와 이저드는 린다를 따라 공작저로 향했다.
이렇게 빨리 공작가에 발을 디디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저택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뭔가 좀 바뀐 것 같았다.
“본관이…… 좀 다르네요?”
아델라가 기억하는 본관의 전경은 똑같았지만, 그 뒤로 길고 넓게 이어져 있던 건물이 없었다.
“여긴 본관이 아니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아델라의 뒤를 따르던 이저드가 대답했다.
“본관은 저쪽입니다.”
이저드의 말에 뒤이어 린다가 대답했다. 린다가 가리킨 곳은 아델라도 아는 곳이었다. 전생에 딱 두 번 들어가 본 곳이었다. 한 번은 마티나를 골려 주려던 편지로 수치사 당했던 때, 그리고 다른 한 번은 린다가 이저드의 부모님 초상화를 확인시켜 주려고 들여보내 줬던 때.
“저기가 본관…….”
아델라가 이저드를 보자, 이저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기가 본관이고, 이쪽은 내가 현재 생활하는 건물이네.”
아델라가 기억하는 본관은 이저드가 지금 생활하는 이 건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란다. 그렇다면 과거의 이저드가 미하일이 죽은 후 본관을 바꿨다는 이야기였다.
“아, 그럼……. 두 분을 잊지 않기 위해서 본관을 바꾸게 된 건가요?”
미하일이 죽은 후에 원래 본관이었던 곳은 폐쇄되고, 지금 이저드가 생활하는 곳을 증축하면서 본관이 된다. 그렇게 이저드가 본관을 옮긴 이유는 유일하게 남은 부모님의 흔적을 간직하고, 자신을 채찍질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것도 있지만, 내가 저곳을 쓸 자격이 없는 것 같아 그랬네. 저곳은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흔적도 있어서 두 분께 떳떳하게 고개를 들 수 없었지.”
아버지가 죽은 것이 다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이저드는 부모님이 인자하게 웃는 그 액자 아래에서 일할 수 없었다. 죄책감이 심장을 짓눌러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때는 충격이 커서 이저드는 1년간은 아버지가 일했던 집무실에 가까이 가지도 못했다. 좀 더 시간이 흐른 후에, 아픔을 감당할 수 있게 된 후에야 그는 부모님을 마주 볼 수 있었다.
“지금은 그런 생각 안 하네.”
어느새 걱정스러운 두 시선이 자신을 향한다는 것을 안 이저드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려했던 일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으니.”
그가 부드럽게 웃자, 아델라도 마주 웃었다. 함께 듣고 있던 린다도 약간 안도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곧 린다는 자신이 이 훈훈한 분위기를 깨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도한 것과는 별개로 아델라를 미하일 공작한테 데리고 가야 했기에 린다는 하는 수 없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자, 그럼. 이제 도련님께서는 교육하러 들어가시죠? 아델라 님은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아…… 그래야겠네요.”
누구보다 떨어지기 아쉬워하는 둘을 떨어뜨리는 일은 린다도 딱히 내키지 않았다. 저렇게 애잔한 두 사람이 조금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그녀는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그만 가시죠. 저택에는 항상 보는 눈이 많습니다.”
아델라는 아쉬움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건 이저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먼저 가게.”
이저드는 아쉬워서 그녀가 본관으로 가는 모습을 끝까지 보려고 둘을 먼저 보냈다. 아델라는 린다를 힐끔 보다가 이저드를 향해 작게 손을 흔들고 걸음을 옮겼다.
누가 보면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곳으로 한쪽이 멀리 떠나는 줄 알겠다. 린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아델라의 뒤를 따랐다.
* * *
적막만이 흐르는 방 안에서 아델라는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린다를 따라 다다른 곳은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 같아 보였다. 커다란 소파와 벽에 걸린 그림들, 그리고 벽난로가 있는 방은 비교적 집기가 적은 편이었다.
전생에 보았던, 두 분의 액자가 걸려 있던 곳과는 많이 떨어진 공간이었다. 문을 두 개 정도 열고 들어온 곳이니까……. 방이 계속 이어진 이곳에서는 아주 앞쪽이었다.
“근데요. 이렇게 길게 이어져 있으면 안 불편할까요? 끝에서 끝으로 가는 시간이 엄청 긴데.”
아델라는 자신과 함께 얌전히 공작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린다한테 물었다.
“아, 중간쯤에 복도로 빠지는 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급할 때는 창문으로 나가면 되고.”
린다는 전면이 유리창으로 된 한쪽 벽을 가리켰다. 예전에 아델라가 이곳을 지날 때는 전부 두꺼운 커튼이 쳐져 있던 곳이었다. 그래서 처음 이곳에 들어서서 감탄했다.
아델라가 기억하는 방 안은 너무 어두워서 불을 밝혀야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살고 관리하는 이곳은 기억과는 전혀 달랐다. 처음에는 커다란 창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방 안을 가득 채우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멍하니 구경했을 정도니까 말이다.
“저길 어떻게요? 깨서요?”
아델라가 멀뚱히 묻자, 린다가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아니요. 중간중간 밖으로 통하는 창문이 있어요. 밀면 열리는. 이 방은 아니지만.”
린다는 예상외의 대답을 듣고 큭큭 웃었다. 아무리 급해도 창문을 깨고 나갈 생각을 할 리가.
그녀가 좀 더 크게 웃지 못한 것은, 이쪽으로 오고 있는 공작의 기척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니었으면 린다는 저길 깨고 나갈 공작을 상상하며 한참 웃었을 것이다. 린다는 웃음을 삼키고 자리에서 일어나 미하일한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군. 기다리게 했어.”
“아닙니다. 저도 방금 왔습니다.”
아델라는 린다를 따라 고개 숙인 후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녀는 이저드와 너무 닮은 미하일을 보며 신기함에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어떻게 잔주름 하나까지 멋지실 수가? 이저드와 미하일이 새삼 부자지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앉지.”
말투도 약간 비슷……. 아.
‘전에 린다 경이 이저드 님 말투도 바뀌었다고 했는데. 아버지와 비슷하게 하려고 노력하신 거였나? 이른 나이에 공작이라는 자리에 앉게 됐으니…….’
이저드가 괜찮아지려고 노력한 시간을 아델라는 전부 알지 못했지만, 아버지를 보기 힘들어하면서도 그가 어느새 아버지를 닮아 갔을 거라고 짐작했다.
아무래도 미하일 공작이 이저드의 롤모델인 것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하나만을 보고 자랐으니까.
“내가 영애를 부른 이유는 몇 가지 묻기 위해서야. 혹, 대답하기 곤란하면 대답하지 않아도 돼.”
미하일의 말에 아델라는 눈을 빛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미하일은 그런 아델라를 보며 조금 놀랐다. 십몇 년간 가정의 불화와 아버지의 폭력을 겪은 아이의 눈빛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만나 본 그런 환경의 아이들은 어딘가 주눅 들어 있었고 어른의 작은 몸짓에도 깜짝 놀랐으며, 상당히 불안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델라의 눈빛에서는 어른에 대한 불신도, 경계도, 불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각하?”
미하일이 아델라를 살펴볼 동안 방안에 정적이 깔렸다. 침묵을 참던 아델라는 그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저…… 궁금하신 게 있으시다고.”
미하일은 자신이 아이를 너무 빤히 봤다는 것을 깨닫고 사과했다.
“아, 미안하군. 영애의 표정이 보기 좋아서.”
그렇다고 미하일은 아델라의 표정만으로 사건을 판단할 생각은 없었다. 말 그대로 환한 표정이 의외라서 놀랐을 뿐이다. 그는 오히려 아델라의 표정이 좋아 보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가 아델라를 부른 건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고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심리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건 없는지, 머물 곳이 필요하진 않는지,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인식하고 있는지, 등을 묻고 조치를 취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제 표정이요? 앗. 제가 무례했습니다.”
아델라는 저도 모르게 뿌듯하게 웃은 줄 알았다. 둘이 닮았다는 생각을 하다가 방금 헤어진 이저드가 떠올라서 그만 표정이 풀려서 헤헤 웃고 있었던 걸까?
아델라가 그런 생각을 하는 줄 몰랐던 미하일은 조금 당황해서 고개를 작게 저었다. 아이를 지적하기 위해 한 말이 아니었는데, 아이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아니, 아니야. 편히 있어도 돼.”
“전…… 편합니다. 말씀하십쇼.”
아까와는 다르게 각 잡고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은 전혀 편해 보이지 않았다. 아델라가 아까와는 다르게 굳어 있자, 미하일이 난감하게 미소 지었다.
신분이 훨씬 높은 사람의 ‘편하게 있으라.’ 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사람은 없었다. 미하일은 차라리 말을 꺼내지 말 것을 하고 속으로 씁쓸해 했다. 그는 아델라가 불편해 할 이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바로 본론을 꺼냈다.
“내가 부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신고한 사람으로 남아도 되겠냐고 묻고 싶어서라네.”
아델라는 의외의 질문에 눈을 몇 번 깜박였다.
“음, 영애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귀족가에서 딸이 아버지를 고발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네. 그 이유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기 때문이죠.”
미하일은 다른 말을 하려다가 말문이 막혔다. 원래 미하일이 하려던 말은 다른 말이었지만, 아델라가 한 말도 틀린 말이 아니어서 어떤 말도 해 줄 수가 없었다.
“아무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으니까요. 아버지가 귀족이라 괜히 끼어들었다가 골치 아픈 일만 벌어지니까.”
아델라는 덤덤하게 말을 이어 갔다.
“친어머니가 두세 번, 오라버니가 한 번 치안대를 찾아갔습니다.”
“치안대에?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인가?”
미하일은 놀란 표정을 지었고, 아델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러 치안대를 찾아갔지만 전부 돌려보냈어요. 저희가 입은 피해보다는 귀족 가문의 명예가 더 중요했던 모양이에요. 어떻게 다 하나같이 이유가 똑같았는지…….”
그들이 귀찮아하며 한 말들 때문에 두 어머니와 레널드는 신고를 아예 포기했다. 어떻게 해도 벨제프 자작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끔찍한 생각에 그들은 하루하루 말라 갔다.
“혹시 그 이유가 영애와 영식의 미래인가?”
“예, 귀족 사회에서 도태될 테니까요. 저와 저희 오라버니가 성인이 됐을 때 앞날이 막힌다는 거죠.”
아까 미하일이 하려던 말도 이와 비슷했다.
아델라가 살아갈 날은 아직 창창하다. 그런 그녀가 가문에 먹칠한 신고자로 낙인찍히면 혼삿길은 물론이고, 나이가 찬 후 사교계에 데뷔하기도 힘들게 될 것이다. 귀족들이 철저히 배척할 테니까 말이다.
미하일은 그에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지만, 아델라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녀는 이미 상황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귀족들은 자신들의 명예를 매우 중시하고 명예에 흠집이 나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죠. 앞에서는 체면을 차리고, 뒤에서는 온갖 일을 벌여도 처벌로 가지 못하게 막고요. 가문 사람들을 얼마나 잘 관리하느냐, 그것도 귀족의 덕목이죠.”
원래 그 덕목은 내부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으라고 생긴 것이 아니었다. 가문의 평안을 위해 생긴 거였다. 가문 사람들을 챙기고, 교육하고, 포용하고, 혹 누가 작은 실수를 해도 감싸 주고, 흉보지 말고 잘 대해 줘서 가문이 잘 유지되길 바라며 만들어진 덕목이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졌다. 가문의 명예를 위해 내부의 잘못이 퍼지지 않게 사람들을 억압하는 족쇄로.
“답답하게도, 그건 사실이야.”
미하일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위와 같은 이유로 여태 귀족 가문 내부에서 고발하는 이가 나온 적이 없었다. 내부에서 신고가 들어간다는 것은 사람들을 관리 못한 가주의 무능함을 밖으로 보여 주는 거였고,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이었다.
그러니 귀족들은 벨제프 자작가를 따돌릴 것이다. 이런 일이 하나둘 생기면 자신들의 가문 내부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질 위험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벨제프 자작가를 아예 귀족 사회에서 배척해서 혹여 자신의 가문에도 생길 내부 고발자들한테 본보기를 보일 것이다.
‘함부로 나대지 말라고. 내부에서 고발했다가 벨제프 자작가 꼴이 날 거라고 가문 사람들을 압박하겠지.’
아델라에게는 벨제프 자작가 평판이 바닥을 치더라도 딱히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가주로 오를 레널드야 타격을 받겠지만. 그녀는 오히려 이참에 선례를 만들어 놓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가문도 가문이지만 내가 걱정하는 쪽은 영애네. 온갖 안 좋은 소문이 돌 거야. 심하게는 귀족으로 대하지 않을지도 몰라.”
혹은 투명인간 취급하거나.
그렇게 되면 아델라는 귀족이면서 귀족이 아닌 신분이 될지도 모른다. 귀족으로 살아온 아이가 다른 귀족들한테 멸시를 받는 건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각오한 일이고요.”
아이가 견딜 미래를 걱정하는 미하일과 달리, 아델라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혹시 아델라가 앞으로 자신에게 벌어질 일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귀족으로 대해지지 않는다는 건 현재의 모든 걸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는 말이야. 영애의 미래까지.”
미하일은 진심으로 아델라를 걱정하고 있었다. 귀족가에서 자란 아이가 혼자 힘으로 이 세상을 견디기에는 세상이 그렇게 녹록지 않았다. 거기에 귀족 사회에서의 압박까지 더해지면 아이의 미래는 더욱 장담할 수 없었다.
“상관없습니다. 저는 귀족이었을 때가 더 불행했습니다. 제 미래는 가문에 있을 때 전부 포기 당했고요. 제 의사와는 다르게 혼처가 정해지고, 제 의사와는 상관없이 휘둘려야 했죠.”
감정을 죽이고, 생각을 죽이고, 제 의견도 입에 담지 못했다.
벨제프 자작의 횡포로 그녀는 방 안에 숨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루에 의해 밖으로 나올 때까지 그녀는 몰랐다. 자신이 오랫동안 통제당하고 억압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제가 고발한 대표자가 되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더 심한 피해를 당할 텐데요? 여태 피해자들이 숨죽여 있던 이유는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평민이 귀족을 고발하다뇨. 괘씸하다며 다른 귀족들한테 죽임을 당하겠죠.”
“그렇다면 영애는? 그들이 같은 귀족인 영애를 직접 죽일 수야 없겠지만, 사람 하나 바보 만드는 건 쉬운 일이야.”
미하일의 말에 아델라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죠? 각하께서도 그걸 걱정하시고 꺼낸 말씀이고요. 그런데…….”
아델라는 뒷말을 끌다가 이어 대답했다.
“일단, 전 성인이 되어 사교계에 데뷔할 생각이 없어서 딱히 귀족들을 만날 일이 없습니다.”
“음?”
“보통 혼처를 찾고, 정치적으로 이해득실을 따지기 위해 자식들을 내보내는 것 아닙니까? 전 딱히 혼처를 찾을 이유가 없고, 평민으로서 살아가면 그들과 관계를 맺을 일이 없습니다.”
“평민으로?”
미하일은 이해하기 조금 힘든 표정을 지었다. 귀족이 되길 원하는 이는 많이 봤어도, 귀족이길 포기하는 이는 처음 봤다.
“예. 평민으로 살면 귀족들은 제가 밑바닥으로 떨어졌다고 생각해서 더 관심을 두지 않을 테죠. 오히려 좋아할 거고요.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전 잊힐 겁니다.”
그것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자신들이 손쓰지 않아도 내부 고발자가 평민들과 함께 살고 있으니, 귀족으로서는 죽음보다 더한 수치였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귀족은 명예를 훨씬 더 중시했으니까 말이다. 가문을 배신한 이의 최후라며 좋아할 테지.
“평민……으로 숨죽여 사는 게 쉽지 않을 터인데.”
특히나 평민으로 살아 본 적 없는 아이가 평민으로 살아간다니. 그는 아델라가 그런 각오를 했다는 것이 안쓰러웠다. 아버지를 고발하기 위해 얼마나 큰마음을 먹었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그동안 가문에 의해 얼마나 괴로웠는지도.
“괜찮습니다. 한 6녀언…… 아, 아니구나.”
“6년?”
아델라가 말을 하다 끊었다. 하마터면 6년을 평민으로 지내서 익숙합니다, 라고 할 뻔했다. 갑자기 말을 끊은 아델라 때문에 미하일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요. 주변에 도와주시는 분들이 많아, 지금 아주 좋습니다. 자작가에 있었을 때보다 더 행복하고요.”
그건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까 아델라의 밝은 표정을 보고 미하일은 아이가 지금 괴롭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군. 난 앞으로 영애의 앞날이 힘들 거라 영애 이름을 빼고 재판하는 건 어떨까 싶어 물어본 거야. 죄가 너무 많아 첫 고발자가 굳이 친딸이 아니라도 형은 내려질 테니까. 영애의 뜻이 이렇게 확고할 줄은 몰랐어.”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가 벌인 일이니까 제가 책임져야죠.”
미하일을 보는 아이의 눈빛은 올곧았다. 학대의 기억 때문에 무서울 텐데 어디서 저런 용기가 나올 수 있을까. 그는 아이가 대견해 보였다. 다른 이들한테 피해가 갈까 싶어 저 작은 몸으로 이렇게 앞장섰다는 사실도 너무 대단했다.
미하일은 잠시 시선을 내렸다가 아델라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영애의 생각은 잘 알겠어. 그런데, 만약에 말이야.”
“네.”
“처음으로 신고한 사람을 나로 하면, 평민이 아니게 되니까 상관없지 않나?”
처음에는 이럴 생각으로 운을 띄웠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가 이렇게나 고군분투하는데, 어른이 돼서 모른 척 외면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펜베르크 지역을 다스리는 영주가 영주민을 보호하지 못하면 직함이 다 무슨 소용인가.
“예에?”
아델라는 놀란 표정으로 미하일을 보았다. 전혀 예상도 못한 제안이었다.
“펜베르크 성에서 소란을 피우는 사람을 잡아서 조사하다가 죄를 많이 지었다는 걸 알게 됐고, 그래서 내가 직접 처분을 명했다, 정도로 말이야. 영애의 가정을 들춰 본 것도 나고.”
“어…… 왜, 왜요?”
아이가 눈을 댕그랗게 뜨며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미하일이 아델라를 도울 이유가 없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이저드라면 또 모를까.
게다가 아직 어린 이저드에겐 미하일만큼의 영향력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방법을 시도한다고 해도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갈지도 장담할 수 없었다. 오히려 자칫하면 이때라고 물어뜯는 귀족들이 생길지도 몰랐다.
“어른이 아이를 보호하는 건 이유가 필요 없지 않나. 당연한 일이고. 영애가 여기까지 애썼으니 그 다음은 우리 몫이지.”
“어, 음, 틀리신 말은 아니지만, 전 전혀 상관없는 사람인데, 굳이 각하께서 나설 필요가…….”
“상관없는 사람이라니. 영애는 앞으로 펜베르크 성에 살 게 아닌가?”
“살 거죠? 되도록 오래요.”
아델라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공작의 물음에 답했다.
“그럼 영애는 펜베르크 지역의 영주민이 되는 건데, 영주가 영주민을 못 지키면 왜 존재하겠나?”
그렇지 못한 영지가 더 많은데……. 아델라는 그렇게 말할 수 없어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제스트윈 공작가에 폐가…….”
“폐가 될 일이 뭐가 있나? 내 영지에서 소란을 피운 귀족한테 벌을 내리는 일인데.”
펜베르크 지역 소문이야 익히 퍼져 있어 그저 벨제프 자작이 운이 좋지 않았다고 평해지겠지. 무엇보다 가문 내 고발 같은 아주 예외적인 일이 아닌 이상, 벨제프 자작은 거의 듣도 보도 못한 귀족 가문이라 화제도 되지 못하고 묻힐 것이다.
모욕당한 공작이 직접 나서 벌을 내렸으니, 절차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그렇기에 공작가를 흠잡을 귀족도 없었다.
“쉽게 갈 일을, 어렵게 갈 필요는 없지.”
미하일 공작은 자신이 있는 자리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자신이 나서면 일이 커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저, 맞는 말이기는 한데.”
아델라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미하일이 나서서 아델라를 보호하겠다는 지금 이 상황이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으음…….”
아델라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 고민했다. 이렇게 도움을 받을 줄은 전혀 예상도 못 했기에 약간 당황했다.
“어떻게…… 감사 인사를 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도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역시 진심으로 마음을 전하는 편이 좋겠지.
“영애가 잘 견뎌 준 거로 됐네. 그곳에서 살아가기 힘들었을 텐데 버텨 줘서 고맙군. 앞으로 펜베르크 성에서 영애의 생이 좀 더 나아지길 바라. 그게 나한테 은혜를 갚는 일이네.”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아델라를 기특하다는 눈빛으로 보았다. 아델라는 남자 어른 중에 저런 인자한 눈빛으로 자신을 봐준 사람이 없어 매우 어리둥절했다.
‘그러고 보니 이저드 님도…… 자기 사람들한테 되게 친절하셨지. 약하신 분이 아닌데도 자기 사람들을 잃을까 두려워했고, 지키려고 엄청나게 노력하셨어.’
소중한 사람들을 잃어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을까.
아델라는 이런 호의가 익숙하지 않아 약간 부담스러웠지만, 미하일과 이저드가 비슷하게 영주민을 위한다고 생각하니 차츰 괜찮아졌다. 미하일 공작이 영주민을 지키는 방법의 하나라고 생각되자 그를 이해하기 훨씬 수월했다.
과거의 뼈아픈 기억 때문에 그들은 누구보다 자기 사람들을 지키려고 하는 마음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네, 감사합니다. 제 미래까지 걱정해 주셔서.”
미하일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예?”
“더 물을 게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이번에는 무슨 말을 하실까 싶어 아델라는 약간 긴장했다.
“혹시.”
‘혹시?’
아델라는 미하일의 말이 떨어지길 기다리며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자작 부인이 펜베르크 성에 있나?”
말을 잠깐 끌어서 더 긴장했는데, 다행히 아델라가 대답하기에 문제없는 물음이었다.
“아, 네. 어떻게 아셨어요?”
“자작 부인도 영애가 떠나고 바로 집을 나왔대서 혹시나 하고 물었네. 자작이 자신의 부인을 들먹일 거니 자작 부인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내 쪽에서도 대비하기 편하지.”
“저, 그런데…… 저희 어머니에 대한 건 비밀로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아델라는 벨제프 자작한테 트라우마가 깊은 릴리아를 이번 재판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웬만하면 재판장에도 데려가지 않고 나중에 선고 내용만 알려 줄 생각이었다.
“영애의 증언은 있는데 자작 부인이 없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유가 있었군.”
아델라는 약간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니는 저보다 훨씬 상처가 크세요. 너무 무서워하셔서 일부러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는 뺐습니다.”
또한, 당사자한테 그때의 괴로운 기억을 꺼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델라는 아예 부부 사이에 일어난 일은 증언에서 빼 버렸다. 릴리아가 더는 그때의 기억으로 괴로워하지 않길 바라서였다. 게다가 공작도 말했다시피 그 일이 없어도 벨제프 자작은 처벌을 면하기 어려웠다.
“그렇군. 아이한테까지 손을 들었으니……. 알겠네, 명심하지.”
미하일은 아델라의 말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군. 불편했을 텐데.”
“아닙니다. 제 의견을 들어 주셔서 정말 감사했는걸요.”
이렇게 너그럽게 받아 주실 줄은 몰랐다. 이저드의 부드러움이 어디에서 왔나 했더니 역시 아버지를 닮아서! 부전자전이라는 말이 딱 어울렸다.
“그럼 다행이야. 이만 가 보게. 나도 일이 있어 일어나야겠어.”
“아, 네!”
미하일이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 주긴 했지만, 알게 모르게 긴장하고 있던 아델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미하일의 눈치를 힐끔 보다가 린다의 안내에 따라 방에서 나왔다.
* * *
그렇게 일주일 뒤, 미하일은 아델라의 부탁을 들어 주었다. 임시 재판관은 선고문을 읽는 동안, 단 한 번도 자작 부인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벨제프 자작은 재판관이 선고문을 읽기도 전에, 자신의 아내와 아이가 펜베르크 성에 있다며 자신이 속았다며 난리를 쳤다. 하지만 재판관은 자신은 그저 각하의 말을 전할 뿐이라며 막힘없이 선고문을 읽고 망설임 없이 자리를 떴다.
벨제프 자작은 판관이 사라지는 마지막까지 선처를 베풀어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억울하다고만 외쳤고, 재판관은 아무리 귀족이라도 저런 놈은 처음 본다며 혀를 내둘렀다.
그한테 내려진 벌은 당연하게도 참수형이었다. 다만, 죽기 전 비공개 재판장에 온 피해자들한테 사죄할 기간을 주겠노라며 형은 일주일 뒤에 집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선고받는 중에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씩씩거리기만 했다. 아무 죄책감 없이 악행을 저지르던 사람다웠다.
그는 수비병들에 의해 재판장에서 끌려나가면서도 피해자들을 향해 ‘이러고도 너희들이 무사할 줄 아느냐’부터 시작해서 ‘진짜 내가 죽을 것 같으냐.’, ‘풀려나면 너희 다 가만 안 둔다.’ 라고 삿대질을 했다.
‘하긴, 돈으로 선고도 사는 판국에 뭐가 무섭겠어.’
벨제프 자작은 사형 집행일이 다가오는 와중에도 자신이 죽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돈 때문이었다.
그는 교도관 중 어리바리한 놈 하나를 잡아 보석을 주며 살살 구슬렸고 그 교도관을 이용했다. 자작은 숨겨 둔 패물을 꺼내 임시 재판관한테 계속 뒷돈을 줬다.
아니, 벨제프 자작은 재판관한테 뒷돈을 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패물들은 미하일 공작의 손에 들어갔고, 공작은 패물을 고스란히 아델라에게 전해 줬다.
갑자기 린다가 패물들을 가지고 왔을 때 아델라는 정말 놀랐다. 언제 집안 패물들을 이렇게 챙겼던 걸까? 가문의 패물들이 점점 사라진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게다가 자작이 지니고 있던 패물 중에는 가문의 것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몇 개는 조금만 힘을 줘도 바스러지는 모조품이었고, 몇 개는 아델라와 릴리아도 모르는 패물이었다. 아무래도 훔친 물건인 듯했다.
아델라는 훔친 것을 제외한 가문의 패물은 받아 두었다. 그러나 영 찝찝해서 일단 서랍 맨 아래 칸에 처박아 뒀다. 언젠간 쓸 일이 있긴 하겠지만 매일 자작이 가지고 다닌 물건이라고 생각하면 별로 가지고 있고 싶지 않았다.
정 찝찝하면 나중에 레널드한테나 줘 버리자. 그렇게 생각하며 깊숙이 봉인해 두었다.
“내일이죠? 그날이.”
그리고 드디어 내일, 벨제프 자작의 사형 집행일이었다. 정확히는 오늘에서 내일로 넘어가는 자정에 형이 집행된다. 그러나 그는 아침까지도 피해자들한테 사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자작은 심지어 사과를 받으러 큰 용기 내서 찾아온 이들한테 평민 주제에 더럽다느니, 어딜 똑바로 보냐느니 하는 막말을 퍼부었다고 했다. 아무래도 뒷돈을 준 게 통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사실 피해자들 사이에서도 풀려나면 어쩌냐는 말들이 흘러나왔다. 벨제프가 너무 당당하기도 했고, 귀족들은 신고해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인식이 강하게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예, 자정에.”
린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있는 게, 그 인간답네요.”
“그러게요. 사형대에서도 그럴 수 있나 봐야죠. 제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오겠습니다.”
린다가 이런 말을 한 이유는 간단했다. 사형 집행장에 어린 아델라는 들어갈 수 없었다. 때문에 아델라는 내일 처형 결과만 들을 수 있었다.
“그 인간의 최후가 궁금하긴 하지만 저보단 피해자 분들께 상세하게 전해 주세요. 이미 돌아가신 분들도 많다던데.”
“아아, 그러고 보니 벨제프 자작이 풀려나면 어쩌나, 하고 두려워서 가 버린 사람들이 꽤 많죠. 예, 그러겠습니다.”
린다의 대답에 아델라가 고맙다며 웃었다.
“아 참, 릴리아 님은 어쩌신 답니까?”
“그게…… 저도 잘 모르겠어요. 별말이 없으시네요? 그냥, 평소랑 같아요.”
“아무래도 그놈을 보긴 힘드시겠죠? 더군다나 사형인데 충격받을 것도 같고.”
“아마, 조금, 힘들지 않을까요?”
아델라와 린다는 우려를 표한 것과 달리 릴리아가 평소와 같았던 것은 이미 마음을 정했기 때문이었다.
릴리아는 평소처럼 욘제타네 가게에 가서 가게 일을 도왔고 돌아와서는 이제는 버릇이 된 삯바느질을 했다. 아직 해가 떠 있어서 눈부신 창밖을 보며 그녀는 부단히도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아델라와 식사를 하고 소소하게 대화를 나누고 함께 장을 보는 모든 시간 동안 릴리아는 더 굳게 마음먹었다.
* * *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해가 저물고 어둠이 깔린 한밤중에 릴리아는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채, 한 여인한테 거듭 고개를 숙였다. 릴리아한테 인사를 받은 여인은 고개를 저으며 그만 가 보라는 고갯짓을 했다. 달빛도 비추지 않아 어두운 와중에 여인에게 다시 고개를 숙인 릴리아는 여인을 뒤로 하고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했다.
릴리아와 아델라의 집 앞에는 이미 말을 탄 누군가가 대기하고 있었다. 릴리아는 망설임 없이 말을 탄 이의 손을 잡았다. 둘은 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듯, 말을 타고 더 짙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델라의 집 문 앞에서 둘이 사라지는 걸 한참을 보고 있던 여인은 조용히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깜깜한 밖과는 다르게 집안에는 여인이 혹여 발을 헛디딜까 봐 릴리아가 희미하게 램프에 불을 켜 놓은 상태였다. 여인은 은은하게 집을 밝히는 램프를 들고 아델라의 방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안에는 아델라가 쌔근쌔근 잠을 자고 있었다.
작은 아델라한테 많이 커 보이는 침대를 보며 미소 짓던 여인의 얼굴이 다시 원래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안 자는 거 알아.”
여인이 그렇게 말하자, 고른 숨을 쉬며 자는 척하던 아델라가 배시시 웃으며 눈을 떴다.
“티 났어요?”
“너희 어머니는 못 본 것 같지만 난 아까 이쪽 창문에서 검은 그림자를 봤지.”
릴리아가 갑자기 집을 나가기에 뭘 하나 싶어 창문에 붙어 있던 아델라가 여인한테 보였나 보다.
“언제…… 이야기가 된 거예요? 부인도 그렇고, 아리스 님도 그렇고.”
아델라는 몸을 일으켜 릴리아를 도와준 여인, 케스너 후작 부인이 침대에 앉을 수 있게 자리를 비켜주며 물었다.
아까 릴리아와 함께 떠난 이는 다름 아닌 아리스였다. 케스너 후작 부인이 밤늦게 위험할 수 있다며 아리스한테 릴리아를 부탁했다. 아리스도 어차피 집행장에 향할 예정이었기에 기꺼이 그녀를 도왔다.
“아까 낮에? 네 어머니가 널 몇 시간만 부탁하더라.”
후작 부인의 말에 아델라는 살짝 놀랐지만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아델라를 물끄러미 보던 부인은 그녀의 곁에 앉았다.
“말 안 해 줘서 속상하진 않고?”
“네.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아서 말 못 하신 거 알아요. 어머닌, 자기 자신보다 절 더 많이 걱정하시거든요. 아마, 자고 일어나서 말해 줄 생각이었겠죠?”
아델라는 릴리아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이 웃었다. 이렇게 담담히 어른스럽게 말하는 것을 보면 시간을 돌려 왔다는 말이 믿어지기도 했다.
“전 오히려 어머니 걱정을 되게 많이 했는데, 제가 어머니를 너무 여리게만 봤나 봐요. 힘든 와중에도 절 이렇게 잘 키워 주신 분인데.”
케스너 후작 부인은 씩씩했던 아델라와의 첫 만남이 떠올라 살짝 미소 지었다. 둘은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는 마음과 올곧은 눈빛만은 많이 닮아 있었다.
“어머니니까. 아이한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수는 없잖니? 내 애가 이렇게 힘을 내고 있는데.”
케스너 후작 부인은 미소를 지우고 무심하게 말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니까 아이는 이제 자렴. 키 크려면 일찍 자야지.”
램프를 다시 들고 나가려는 후작 부인을 멍하니 보던 아델라가 그녀를 잡았다.
“저…….”
“왜?”
그녀는 무표정했지만 어딘가 부드러운 기운을 띈 얼굴로 아델라를 돌아보았다.
“감사합니다. 제 곁에 있어 주셔서. 그리고 아리스 님께도 정말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어머니의 곁을 지켜 주셔서.”
“네 어머니의 부탁을 들어준 건데, 너한테 인사 받을 건 없지.”
케스너 후작 부인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대꾸하며 아델라의 방문을 열었다. 그녀는 방을 나서기 전에 다시 힐끔 아델라를 보았다. 아델라는 눈을 빛내며 후작 부인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예?”
“어머니한테 정말 말 안 할 생각이야?”
그녀의 물음에 아델라는 그저 미소 지었다.
“다 끝나면, 이 일이 끝나면요.”
“이 일이 언제 끝날 줄 알고? 미래에도 못 한 일을.”
“그땐, 시작이 많이 늦었죠. 각하께서 돌아가시고 흩어진 세력들을 모으는데도 오래 걸렸고요. 그런데 지금은 아니잖아요. 많은 분들이 살아 계시죠.”
아델라도 릴리아한테 숨기는 게 없었으면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앞으로의 일들을 전부 털어놓을 수 없었다. 아델라가 없는 동안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갈 릴리아를 생각하면 쉬이 입을 열 수 없었다.
“특히, 공작 각하와 후작 부인께서 살아 계신 건 기적이고요.”
“내가 얼마나 살아 있을 줄 알고 그러니?”
“음― 오래오래요? 아리스 님이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건 보셔야죠.”
“꿈같은 말을 하는구나.”
차갑게 말하고 있긴 했지만 후작 부인도 자신의 목숨이 다하기 전에 그 모습을 보고 싶긴 했다. 애초에 그녀가 이 일에 가담한 목적도 그것이었으니까 말이다.
“꿈이 아니라 진짜일 수도 있잖아요.”
“곧 죽을 사람한테 그런 희망 주는 거 아니야.”
“그…….”
아델라는 눈을 데르륵 굴렸다. 원래라면 케스너 후작 부인의 죽음은 곧, 이었다.
“죄송해요.”
“죄송할 것까지야……. 죽어서라도 볼 거야. 이 일이 성공하는지.”
아델라는 케스너 후작 부인의 눈치를 살피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자 후작 부인이 먼저 말을 꺼냈다.
“허무맹랑한 소리는 하지 말고.”
“제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그러십니까? 전 그냥, 아프지 마시라고 빌겠다고……. 그 말만 하려고 했어요.”
마법진을 이용해서 빌어 보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후작 부인의 말대로 괜한 희망을 심어줬다 안 통하면 실망만 더 커질 테니까.
아델라가 슬슬 시선을 피하자, 후작 부인은 웃음을 삼켰다.
“그래, 고마워. 그런데 오늘은 그만 자고 내일 빌지 그러니?”
“그, 그러려고 했습니다.”
아델라는 꾸물꾸물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아델라.”
“네?”
이불에서 얼굴만 빠끔히 꺼낸 아델라가 후작 부인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케스너 후작 부인은 입을 열기를 잠시 망설였다.
“왜요? 할 말 있으세요?”
아델라가 멀뚱히 묻자, 후작 부인은 조금 주춤했다. 그녀는 아델라의 방 문고리를 잡고 아이를 힐끔 보았다.
“아까 한 말과는 좀 모순되는데……. 그래도, 고맙다.”
후작 부인의 말에 아델라는 눈을 크게 뜨고 깜박였다. 부인이 뭘 고맙다고 한 건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저한테요?”
“너랑 도련님께.”
“뭐…… 가요?”
아델라는 의아함에 고개를 살짝 기울여서 그녀를 보았다.
“그런 꿈도 못 꾸고 죽을 뻔했잖니.”
처음에 그녀는 언젠가, 조금만 더 고생하면 왕궁에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아리스를 비호하던 세력들이 전부 숙청을 당하고부터는 단 한 번도, 아리스가 수도에 입성하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한이 남지는 않을 것 같아. 고마워.”
아델라는 후작 부인의 표정을 보고 싶었지만 그녀는 그렇게만 말하고 방문을 닫고 나갔다. 아델라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그저, 꿈이 현실이 되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꼭 그렇게 될 수 있게…… 아니, 되길 바랄게요. 그런 미래를 위해서 이렇게 모두 노력하는 거니까요.’
예정대로 케스너 후작 부인의 죽음이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바라는 바는 꼭 실현시킬 것이다. 혹시 이번 계획이 실패하더라도, 아델라는 몇 번이고 다시 시도할 것이다.
아델라한테 실패는 포기하는 순간 찾아오는 것이었다. 그녀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이전의 생처럼 기회가 있을 테니까.
<5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