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장. 그녀는 찾고 싶다
잔잔하고 포근한 바람이 책상에 앉아 인상을 쓰는 누군가의 앞머리를 쓸고 지나갔다. 마치, 인상을 펴라는 듯이. 혹은 봄기운이 완연한 밖을 보라는 듯이.
바람이 그의 앞머리를 살살 흐트러뜨리자 그가 드디어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환한 햇살이 비추는 창문을 보았다.
햇살을 받은 남자의 금발은 비단결처럼 곱고 보석처럼 반짝여서 화려한 인상을 주었다. 반면, 그의 갈색 눈동자는 깊이 있게 가라앉아 차분한 분위기를 뿜어냈다.
‘점심때인가…….’
남자, 아니, 펜베르크 성의 성주인 공작은 창으로 비추는 따스한 햇빛을 보며 속으로 시간을 가늠했다.
“카일.”
항시 문밖에서 대기하는 공작가 총관리인인 그가 공작의 목소리를 듣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각하.”
“식사를 준비하지, 이저드는?”
최근 바쁘다는 이유로 이저드와 같이 식사를 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던 미하일은 아들과 식사를 하려고 이저드의 안부를 물었다. 그에 카일이 조금 난감하게 웃으면서 답했다.
“출타하셨습니다.”
카일의 대답에 미하일은 의아한 표정을 했다.
“또 3구역으로?”
“예.”
성격이 갑자기 바뀐 시점부터 아들은 3구역에 나가는 일이 많아졌다. 정말 어디가 잘못된 건 아닌지 미하일은 조금 걱정됐다. 3주 정도는 가끔 3구역을 들락날락하더니, 얼마 전 누굴 풀어 달라며 아침 댓바람부터 저를 찾아온 후로는 이젠 아주 매일 3구역에 출석 도장을 찍고 있었다.
“린다 경과 헤이든 경은?”
“두 분도 호위로 함께 가셨습니다.”
미하일은 슬슬 아들이 3구역에서 뭘 하고 있나 궁금해졌다. 이저드한테 미안해서 그저 그가 하는 대로 뒀지만, 며칠째 밖으로만 나도는 아들이 걱정이 됐다.
안 그래도 어머니의 이야기를 알게 된 후 폭발해서 화낼 줄 알았던 아이가 갑자기 사과를 하고, 과묵해지고, 분위기가 진중해져서 큰 걱정이었다. 철이 들어도 너무 철이 든 아들을 미하일은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매우 걱정하며 속으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린다 경과 헤이든 경이 돌아오면 내 집무실에 들르라고 전해 주게.”
“예, 그런데 요즘 린다 경은 숙소에서 잠을 청하지 않아서……. 헤이든 경한테라도 전하겠습니다.”
미하일은 놀란 표정으로 카일을 보았다.
“린다 경이 숙소에 안 들어온다고?”
“예, 할 일이 있는지, 요 며칠 숙소는커녕 공작저에서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러니까 더 걱정됐다. 린다가 피치 못하게 훈련에 참여하지 못한 때는 다른 임무를 맡았을 때뿐이었다. 그 외에 훈련이라면 절대 빼먹지 않던 린다가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니.
미하일은 더 의아함을 느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미하일은 당장에라도 헤이든과 린다를 불러 이저드가 요즘 뭘 하고 다니는지 묻고 싶었다. 사실은 이저드한테 직접 묻고 싶었지만, 혹시 아버지 앞이라고 상처가 안 난 척, 괜찮은 척할까 봐 물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미하일은 꾹 참았다.
“요즘 이저드가 어때 보이던가?”
미하일은 심각한 표정으로 카일한테 물었다. 카일은 요즘 이저드가 어떤지에 대해 자신이 느낀 대로 대답했다.
“좋아 보이십니다.”
“……좋아 보인다?”
“예, 마음도 편해 보이시고요.”
거짓이 아니라 이저드의 상태는 그 어떤 때보다 좋아 보였다. 활기도 있어 보였고. 원래부터 활기가 없었던 분은 아니었지만, 그와는 조금 느낌이 달랐다. 차분하게 생기가 넘친다고 해야 하나.
“애가 갑자기 철이 든 것 같지 않나?”
“확실히 그렇긴 하지만……. 참고 감내하는 느낌은 아닙니다. 오히려 안정되어 보인다고 할까요?”
카일은 미하일의 걱정을 눈치채고 부드럽게 웃었다.
“도련님이 갑자기 철든 건 이상하다고 여기실 만하지만, 도련님도 많은 고민을 하셨겠지요.”
카일이 당장 이저드를 보고 싶어 하는 미하일을 부드럽게 달랬다.
하지만 미하일은 아들이 무슨 생각으로, 어떤 표정으로 3구역을 돌아다니는지 궁금했다. 혹시 기댈 곳이 없어 밖으로 나도는 건 아닌지, 아버지를 이제 더는 믿지 못하는 건 아닌지, 걱정되고 초조했다.
“도련님도 이제 마냥 어린아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믿어 보십쇼.”
카일이 부드럽게 말하자, 미하일은 굳어 있던 표정을 아주 조금 풀었다.
“그렇게 해야겠지.”
카일의 말대로 이저드는 마냥 아이가 아니라 점점 성장하고 있었다. 몸도, 마음도, 생각도. 미하일에게는 이저드가 영원한 어린아이였지만, 그 아이 역시 언젠가 성인이 되어 자신처럼 이 가문을 책임질 이였다. 지금은 그 준비를 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미하일은 자신이 이저드가 성장하는 시간을 견뎌 주지 못한 것은 아닌가 고민했다.
“아까 내 말 취소하지.”
“예?”
“헤이든 경과 린다 경한테 집무실에 들르라고 하겠다는 거 말이네.”
“그럼 도련님 안부는…….”
미하일은 평소와 같이 차분한 분위기로 고개를 저었다.
“이저드가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아무 말 말게.”
그는 이저드를 기다려 주는 쪽을 택했다. 그에 카일이 인자하게 웃으며 장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 * *
미하일이 이저드를 걱정하고 궁금해 하던 시각, 이저드는 아주 마음 편하게 아델라와 함께 거리를 걷고 있었다. 비록 얼굴을 드러낼 수 없어 로브를 쓰고 있었지만, 그의 주변 분위기는 환하다 못해 꽃이 날리는 것도 같았다.
‘아주 봄이네, 봄이야.’
둘을 멀리서 지켜보며 따르던 린다와 헤이든은 웬일로 생각이 일치했다. 틈만 나면 싸우던 린다와 헤이든도 저 둘의 밝은 기운을 받고 있자니 이상하게 싸우면 안 될 것 같았다.
도대체 이 조합은 어디서 어떻게 이루어진 걸까? 아델라나 이저드나 모호하게 말해서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아델라가 이저드를 도와서 알게 됐다는데…….
어떻게? 언제? 게다가 대부분의 시간을 훈련과 후계자 교육으로 보낸 이저드가 언제 시간을 내서 저 아이를 만날 수 있었다는 걸까?
“도오저히, 알 수가 없네.”
“나도 도오저히, 이저드 님이 왜 저러는지 알 수가 없어.”
아델라와 이저드가 언제 저렇게 연인처럼 발전한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린다가 팔짱을 끼고 중얼거리자, 헤이든이 맞장구쳤다. 그러면서 그는 둘의 대화라도 엿들으려는 듯이 목을 길게 빼고 귀를 기울였다.
“그러면 뭐가 좀 들려?”
미간까지 찡그리며 집중하는 헤이든을 린다가 어이없다는 듯이 보았다.
“안 들려…….”
그가 인상을 쓰며 시무룩해졌다.
린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걸음을 조금 빨리 했다. 헤이든의 행동이 쪽팔린 것도 있었지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헤이든한테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어? 린……! 헙, 같이 가!”
린다, 라고 부르려다가 급하게 숨을 삼킨 그는 린다의 눈치를 보며 그녀를 쫓았다.
“헤이든 경.”
“어? 응? 어, 왜?”
앞서가던 린다가 휙 그를 돌아보자, 헤이든이 움찔거리며 자리에 섰다. 방금 린다, 라고 할 뻔한 걸 들었나 싶었다.
“로브는 폼이야? 후드 좀 쓰지? 우리끼리 나온 것도 아니라서 주목되어 봤자 좋을 거 없는데.”
그녀의 말이 정답이었다. 괜히 이목이 집중돼서 이저드한테 피해라도 가면 큰일이었다.
“이거 답답…….”
단호하고 매서운 눈초리가 헤이든을 향했다. 저 눈은 이 생각 없는 자식을 어떻게 조져야 잘 조졌다고 소문이 날까, 하고 타이밍을 재는 눈빛이었다.
“쓰, 쓸게. 쓰면 되잖아.”
없던 눈치도 저절로 있게 만드는 린다의 눈빛에 헤이든은 얼른 후드를 뒤집어썼다. 린다 사전에 경고는 딱 한 번뿐이었다.
“자, 봐. 썼지?”
헤이든의 얼굴이 완벽하게 가려지자 그를 몰래 지켜보던 여인들의 한탄 소리가 들렸다. 린다는 그러거나 말거나 만족하며 아델라와 이저드를 뒤따랐다. 헤이든도 주변을 신경 쓰는 편은 아닌지 그저 뚱하니 린다의 뒤를 따랐다.
저 멀리 걷고 있는 둘은 아직도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할 말이 저렇게도 많은지, 아델라가 군것질을 먹고 있을 때 빼고는 둘은 계속 이야기 중이었다.
둘의 모습은 멀리서 봤을 때는 평범하게 사랑을 속삭이는 풋풋한 연인처럼 보였다. 하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그들의 대화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증거나 증인을 찾을 수 있다면, 아버지를 끌어내려야죠.”
“그대가 직접 벨제프 자작을 고발하겠다는 말인가?”
“그렇게 해야 한다면 해야죠. 저랑 어머니 둘 다 집을 나와서 그 인간이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돈 나올 구석이 없거든요. 언젠가 잡힐 거라는 불안감에 사로잡히고 싶지도 않고요.”
아델라에게는 무엇보다 새어머니가 문제였다. 아델라가 아는 새어머니는 여리고 약하고 겁이 많은 분이었다. 자작가를 나와 신분을 숨기고 살자고 한다면 아마 불안감에 오래 못 버티실 분이었다.
처음 벨제프 자작가에 던져졌을 때도 그녀는 매일 울기만 했다. 항상 벨제프 자작이 올까 겁에 질려 있었고, 벨제프 자작의 말이면 벌벌 떨면서 따랐다. 자작이 온다고 하면 그녀는 어딘가 항상 불안해 보였다.
그녀는 그가 없어야 안정을 찾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거역하고 저택을 나갈 생각은 하지 못했다. 물론 아델라가 있어서였기도 했지만, 후에 아델라를 떠나보낸 뒤에도 새어머니는 그 저택을 나오지 못했다.
“무엇보다 어머니를 그 집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어서 데리고 나왔는데, 오히려 족쇄가 되면 안 되죠. 그 인간은 아주 깔끔하게 어머니 인생에서 사라져야 해요.”
집을 나온 후 한참이나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벨제프 자작은 새어머니를 강압적으로 대했으며 그로 인해 그녀는 억압되어 있었다고 했다. 마지막까지 저택에 남아 일하던 유모가 남긴 편지에 쓰여 있던 내용이었다.
유모는 그 강압적인 일을 정확히 서술해 주지는 않았다. 그저 아델라가 막연하게 친어머니한테도 행했던 손찌검을 새어머니한테도 한 게 아니었을까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
‘아니, 어쩌면 더 지독한 일을 당했을지도.’
벨제프 자작이 손만 들어도 사시나무 떨듯 떨던 새어머니가 생각났다. 아델라는 새어머니가 어떤 공포를 견디고 있었는지 잘 몰랐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 공포는 자신이 벨제프 자작한테 느끼는 것과는 달랐다.
아델라는 적어도 벨제프 자작한테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적은 없었다. 가족이라고 하는 사람에 대한 배신감과 자신보다 힘이 센 자가 행하는 위협적인 몸짓에 놀라고 무섭고 두려웠던 거였다. 그러나 새어머니는, 그 정도의 반응이 아니었다.
“그래야 제가 마음이 놓여요.”
새어머니를 데리고 자작가에서 나오는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 뒤로 그들이 걱정 없이 살기 위해서는 벨제프 자작의 손발을 묶어야 했다. 다시는 새어머니와 아델라의 앞에 나타나지 못하게.
“증거나 증인은 마음만 먹으면 쉽게 모을 수 있네. 아마 그대가 생각한 거보다 훨씬 많을 거야. 다만, 우리의 입으로 나오는 말을 믿어 줄지는 알 수가 없네.”
저번 회귀 때 이저드가 알아낸 벨제프 자작의 악행만 해도 여러 개였고, 피해자 역시 찾으면 바로 나올 수 있을 만큼 많았다. 그러나 이 일을 둘이 실행으로 옮기기에는 넘어야 할 난관이 있었다. 그들이 너무 어리다는 거였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나라의 치안을 담당하는 이들은 이미 제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였고, 인원도 많지 않아 웬만한 일엔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건 돈과 권력뿐이었다.
“듣고 보니 그렇겠네요. 제 말은 듣기도 전에 애들은 가라며 쫓아낼 거고……. 각하, 아니, 이저드 님은 살살 달래서 보내겠죠.”
아무리 객관성에 근거해 말을 하더라도 고작 아이들이 하는 말이었다. 귓등으로도 안 들을 게 뻔했다.
“6년 전으로 돌아온 건 아쉽지 않은데, 행동의 제약이 많네요.”
아델라의 아버지뿐만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들, 앞으로 방비해야 할 모든 일을 어떻게 알려야 할까?
이저드와 아델라는 요 며칠 대화를 나누며 계획을 세웠지만, 어른들이 협력해야만 가능한 내용이 많았다.
“나도 아버지가 살아 계신다는 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행이네만……. 역시, 제약이 많은 건 아쉽네.”
그가 맞잡은 아델라의 손을 물끄러미 보았다. 아델라도 그의 시선을 따라 손을 빤히 보다가 배시시 웃었다.
“이 나이 땐, 이 나이 때의 추억이 또 있는 거니까요! 천천히 나아가라는 신의 계시가 아닐까요?”
물론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델라는 양심이 찔렸지만.
“저도 이저드 님과 같은 마음이죠, 하지만…….”
왜 답답하지 않겠는가. 저도 안고 싶고, 입 맞추고 싶고, 종일 곁에 붙어 있고 싶은 것을.
전생에는 밤새 침대에 누워 두런두런 이야기도 나누고, 꼭 끌어안고 자기도 했는데, 이제는 상황이 바뀌어 그럴 수 없게 됐다. 무엇보다 그렇게 했다가는 주변 어른들이 난리가 날 거였다. 둘은 그만큼 어렸다.
“천천히 해요. 저희, 여유도 못 즐기고, 제대로 연애도 못 하고 바빴잖아요. 지금도 그렇게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지만……. 시간이 생겼으니까요.”
어쩌면 주변 어른들은 그들을 보며 사랑을 모를 거라 할 테고, 혹은 어린 날에 잠시 지나가는 풋사랑이나 소꿉장난처럼 여길지도 몰랐다. 그랬기에 아델라는 천천히 보여 주고 싶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과 이저드와의 관계가 어떠한지, 어떻게 될 건지, 이 마음이 그저 지나가는 마음이 아니라는 걸 하나하나 알려 주고 싶었다. 그러다 보면 이저드와 아델라가 어리더라도 얼마나 서로를 생각하는지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이렇게 걷는 것도 결코 나쁘다는 뜻은 아니네. 너무 빨리 지나가서 문제였지. 그냥 문득, 이렇게 손잡고 자던 때가 떠올라 그랬네.”
“엇, 같은 생각!”
아델라가 씨익 웃었다. 그녀는 기분이 무척 좋은지 이저드의 손을 잡고 앞뒤로 흔들며 걸었다.
“그때도 당연히 좋았지만, 전 지금도 나쁘지 않아요. 처음인걸요. 사랑하는 사람과 매일 몰래 데이트하는 거요.”
누군가 들을세라 그녀가 목소리를 줄이고 속삭였다.
돌이켜 보면 아델라는 회귀 동안 펜베르크 성에서 일만 하느라 이렇게 느긋하게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따뜻한 봄 햇살을 받으며 사랑하는 이와 함께 나란히 거리를 걷는다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인 줄 지금 생에서 처음 알았다.
“그건, 나도 그렇네. 매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밖으로 나온 적은 처음이야.”
이저드도 아델라를 따라 작게 이야기하며 웃었다. 햇살 아래에서 해사하게 웃는 어린 아델라를 보고 있으니, 그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성인인 이저드의 미소도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는데, 어린 이저드의 미소도 심장을 쿵쿵 뛰게 했다. 그의 얼굴을 빤히 보던 아델라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어쩜, 웃는 것도 맑고 청명하시지! 소년 이저드 님도 너무 잘생겨서 심장에 무리가……!’
아델라가 넋을 놓은 채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느낀 이저드는 눈가를 휘며 그녀를 품에 당겼다. 마음 같아서는 이렇게 저택 안과 밖을 왔다 갔다 하지 않고, 아델라의 곁에만 있고 싶었다.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상황이라면 좋으련만.
사실 이저드는 처음엔 아델라가 공작가로 들어오길 바랐다. 하지만 아델라가 거절했다. 앞으로 어머니와 함께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아델라는 어린 날을 그녀와 보내고 싶다고 했다. 게다가 아델라의 험난한 앞날이 끝난 것이 아니므로 어머니와 함께할 시간은 더 줄어들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이저드와 아델라는 현재 가까운 듯, 먼 곳에서 생활 중이었다. 아델라는 루와 어머니가 오길 기다리며 근처에 숙소를 잡았고 그곳에서 린다가 며칠째 함께하고 있었다.
“방법을 찾아보지. 그대의 아버지에 관한 일도, 앞으로의 일도.”
이저드의 말에 아델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커다란 그의 품에 이대로 계속 안겨만 있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델라가 이저드의 품에서 잠시 편안함을 느끼며 기대고 있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들었다.
“근데 우리, 아리스 님 먼저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6년 전의 펜베르크 성에는 아리스가 없었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1년 뒤에 펜베르크 성에 나타난다. 그것도 자기 신분을 철저히 숨긴 채로.
이저드와 아델라는 그보다 더 빨리 아리스를 찾을 생각이었다. 폭군이라고 불리는 현재의 왕을 끌어내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고, 전생보다 훨씬 더 빨리 준비를 마치기 위함이었다.
“흠……. 아버지를 설득하려면 아리스 님이 있어야 하긴 하지. 아리스 님을 키워 주신 그분도.”
문제는 그를 찾으러 어떻게 가냐는 거였다. 하이크 제국 빈민촌에서 자라났다고 해서 위치는 대략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미하일을 납득시키는 게 문제였다.
그 일대를 다 뒤져야 해서 며칠, 혹은 한 달 이상 펜베르크 성을 비워야 했다. 가뜩이나 이저드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경계하는 미하일이 허락해 줄지가 미지수였다. 그렇다고 몰래 나가자니 미하일한테 걱정만 안겨주는 것 같아 고민됐다.
전생의 기억이 있다 보니 죄책감 때문에 미하일 몰래 무언가를 하기가 조금 꺼림칙했다. 전생과 같은 일이 또 벌어질까 봐.
“하이크 제국이라고 했죠? 하이크 제국에 아무 의심 안 받고 잠시 다녀올 방법이 없을까요?”
아델라는 아리스를 만나면 아버지 일은 물론, 앞으로의 일까지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려면 아리스 님을 찾아야 하는데. 한시라도 빨리 계획을 세우려면 그리 많은 시간이 남은 것도 아니구나.’
적어도 2년 안에는 모든 계획이 끝나 있어야 했다. 왜냐하면 지금으로부터 2년 뒤, 지금의 왕은 지병으로 죽게 되고 이저드를 그렇게 괴롭혔던, 이저드를 자신의 이복동생인 줄 아는 지금의 왕세자가 즉위하기 때문이다. 그전에 상황을 정리해야 이저드와 아델라는 물론 모두의 삶이 좀 나아졌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우리한테 협조해 줄지는 모르겠네.”
아델라가 어떻게 하면 이저드와 함께 아리스를 찾으러 갈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이, 이저드는 아델라를 품에서 놔 주며 난처하게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
덩달아 아델라의 시선도 그를 따라 돌아갔다.
둘의 시선 끝에 걸린 이는 바로 린다와 헤이든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린다한테 시선이 꽂혔다.
* * *
“영 불가능한 건 아닌데, 두 분 만요?”
“그럴 리가. 경들이 호위로 따라와야지.”
호위도 안 붙이고 갔다가는 미하일이 그걸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저희 집에 간다는 건 명분이고, 다른 이유는 뭡니까?”
아델라는 힐끔 이저드를 보았다. 린다는 그런 둘이 너무 수상해서 구태여 집요하게 물었다. 그러나 이저드의 표정을 읽기 쉽지 않았다.
“사랑의 도피, 같은 거요?”
“내가 아델라와 사랑의 도피를 떠날 이유가 뭐가 있나. 여행을 함께하는 거면 몰라도.”
‘평민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하는 거 아니신가?’
린다는 짧게 잘린 아델라의 머리와 마른 몸에 걸치고 있는 옷가지들을 보며 생각했다.
“그럼 여행? 두 분만요?”
“여행은 나중에 둘이서만 떠나고 싶네. 지금은 그저 바람을 쐬고 싶을 뿐이야. 다만, 시기가 좋지 않은 만큼 아버지가 오해할까 봐 그러네.”
이저드의 말만 들어보면 그럴듯해 보이긴 했다. 린다도 이저드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잠잠한 게 불안하던 참이었다.
그저 바람만 쐬러 간다는데 좋아하는 사람을 데리고 가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호위도 몇 명 데리고 가니까 할 말은 더욱 없었다. 사고를 치는 것보다야 이쪽이 훨씬 바람직했다.
바람직하게 스트레스를 푼다는 데 린다가 뭐라고 할까?
‘근데 왜 영 찝찝하지…….’
이상하게 린다의 감이 꺼림칙했다. 뭔가, 이상하게 사고가 터질 것 같은 기분? 린다는 아델라와 이저드를 유심히 살폈다.
하지만 이 어린애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얼굴에 티가 안 났다. 어른 뺨치게 감정을 잘 숨기는 건지 아니면 진짜로 순수하게 밖에 나가보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믿어 보죠.”
린다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들이 린다와 헤이든을 데리고 간다는 거였다. 그 말은 이저드가 적어도 큰일을 저지를 건 아니라는 말이었다. 이를테면 왕한테 분노를 폭발하러 가거나, 따지러 가거나, 혹은…….
“그런데 왜 저희 둘만 갑니까?”
이 이야기를 전부 듣고 있던 헤이든이 의아하게 물었다. 호위는 많을수록 위험이 적어졌다.
“둘이 편해서 좋네. 한 명만 데리고 가면 나중에 실망할 테고, 또 너무 많으면 이동하기 불편하네.”
중요한 일에서 자신을 빼서 항상 부루퉁해 하던 헤이든이 생각난 이저드가 살짝 미소 지었다.
“그래도 많으면 좋지 않나요?”
“많으면 눈에 띄어. 누군가의 눈에 띄어서 왕의 귀에 들어가는 건 더 안 좋네.”
이저드가 진지하게 말하자, 헤이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저드가 왕한테 들어갈 소문까지 신경 쓰고 있는지는 미처 몰랐다. 린다는 적어도 이저드가 자신의 위치를 잘 파악하고 있음을 알았다. 조금 마음을 놔도 될 것 같았다.
“알아 두셔야 할 건 저도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해서 연통이 제대로 닿을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닿을 거네. 경의 부모님은 쉬이 거처를 옮기실 분들이 아니야. 기다리면 답이 올 거네.”
자식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어서 혹 나중에라도 생각날 때 찾아오라고 몇십 년 동안 거처를 옮기지 않았던 분들이었으니까 말이다.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기다릴 수 있었다.
“그럴 것 같긴 하지만요. 그런데 한 달이나 각하께서 시간을 주실지는 장담 못 하겠는데요?”
“한 달은 최대로 생각한 거고, 아버지와 타협을 해 봐야겠지.”
“그건 이저드 님이 알아서 하시겠고. 아델라 양은요?”
멀뚱멀뚱하게 듣고 있던 아델라가 의아한 표정으로 린다를 보았다. 아델라는 생각도 못해 본 사실을 지적당해서 멍한 표정이었다.
“……아!”
아델라는 곧 린다가 보호자한테 허락을 받았는지 묻고 있는 거란 걸 알아채고 짧게 탄성을 냈다.
“아? 뭐죠, 그 표정은? 이야기된 게 아닙니까?”
“아니, 그전까지는 어머니가 없어서…….”
전생의 아델라는 성인의 몸이어서 잠깐 가게를 비우는 것 정도는 괜찮았다. 게다가 아델라를 막을 사람이 없는 완전 자유의 몸(?)이라 생각지도 못했다.
새어머니를 어떻게 설득시키느냐에 대해서는.
‘이 어린 몸으로 그 먼 길을 간다고 하면 십중팔구 걱정할 분이신데! 거기에다가 웬 생판 모르는 남하고 간다고 하면……. 엄청 경계하고 허락하지 않을지도 몰라.’
그렇다고 갑자기 제 애인이에요! 하고 이저드를 소개하기도 뭐했다. 집 밖으로 나가봐야 마을까지 밖에 나간 적이 없는 아델라가 뜬금없이 펜베르크 성 성주의 아들과 만난다니?
여러모로 설명하기 막막했다. 아델라는 이저드가 미하일을 설득하는 것보다 자신이 새어머니를 설득하는 게 훨씬 어려운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미하일한테는 둘의 만남을 지어낼 수 있었지만, 새어머니한테 지어내면 백이면 백 들킬 거였다. 왜냐하면 새어머니와 아델라는 자작가에 있을 때 떨어져 지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아델라가 가끔 마을에 루를 만나러 내려올 때 빼고는.
“저희 어머니는 더 불안해하실 텐데.”
아델라가 이저드를 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이저드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자신이 생각해 봐도 어린 아델라 혼자 생판 모르는 곳에 보내는 건 불안할 만했다. 누군가와 동행하더라도 동행하는 사람들이 알던 사람들도 아니고, 믿을 만한 사람들인지도 모르니까 더 불안할 것이다.
“그럼 그대는 어머니와 이곳에 있는 게 어떻겠나?”
“으음…….”
이저드나 아델라나 어떤 일이든 함께하고 싶었지만, 분명 앞으로 그렇지 못하는 날도 많을 것이다. 게다가 이번 일은 아주 간단한 일이었기에 잠시 떨어져 있는 거라고 생각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아델라는 역시 직접 눈으로 이저드의 안전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아델라는 어머니를 설득시킬 방법을 생각해 보기로 했다.
“왜 그러나?”
이저드는 대답이 없는 아델라가 걱정되어 물었다.
“방법이 없을까 해서요. 어머니를 안심시킬 방법이요. 절 혼자 어디 보낸 적이 없어서…….”
마을에 심부름을 가거나 루를 만나러 간 적은 있어도 새어머니가 자신을 멀리 보낸 적은 없었다.
딱 한 번 빼고는.
“아! 한 번 있었다! 혼자는 아니지만, 저를 집에서 도망가게 할 때요. 엄청 급하게 저를 보냈죠.”
이번 생에서는 발생하지 않은 일이지만, 전생을 생각해 보면 방책이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유일하게 새어머니가 급박할 때 찾은 사람이 있었다.
그나마 이 작은 마을에서 밖이라는 세상을 가장 잘 알고 자주 밖으로 돌아다녔으며 아델라를 안전한 길로 인도할 수 있고, 아델라와 새어머니가 믿을 수 있었던 사람.
그 때문에 전생에는 새어머니가 아델라를 저택에서 데리고 도망가 달라고 그한테 부탁도 했었다.
“그대의 친구와 함께 나온 때를 말하는 건가?”
아델라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루랑 함께 다녀올 곳이 있다고 하면 훨씬 안심하실 거예요.”
물론, 루가 아델라의 부탁을 들어 줘야 가능한 일이지만 말이다.
‘루한테는 또 뭐라고 한담…….’
아델라는 루한테 솔직하게 아리스를 만나러 간다고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뭔가 한고비 넘으면 또 한고비가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두 분 정말…….”
이저드와 아델라가 자신들만 아는 대화를 하는 걸 묵묵히 듣던 린다가 미간을 구기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막 나가실 겁니까? 둘이 몰래 연애하는 것까지는 그렇다고 쳐요. 근데 이 중요한 사안을 각자 보호자 분들께 말도 안 하고 이러실 겁니까?”
린다한테 혼이 난 아델라와 이저드가 난감하게 그녀를 보았다. 생각해 보니 여태까지 이저드와 아델라는 꽤 오래 혼자 결정하고 판단해야 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때처럼 행동해 버렸다.
“그…… 죄송해요.”
“미안하네.”
둘이 정말 미안한 듯 사과를 하자, 린다는 더 혼내려다 입을 닫았다. 원래는 큰일은 미리 상의하라고 잔소리를 할 생각이었지만, 저렇게 정직하게 사과하니까 할 말이 없었다.
“그럴 수도 있지. 우리한테라도 미리 말한 게 어디야? 린다, 아니, 린다 경은 15살 때 쪽지만 달랑 써 놓고 집을 나왔다며. 그거에 비하면 완전 양호하구만.”
“그걸 말이라고…….”
옆에서 아이들을 감싸는 헤이든이 린다는 매우 얄미워 보였다. 린다가 헤이든을 흘기자 헤이든은 자기가 틀린 말을 했냐며 당당한 표정을 지었다.
“저…….”
아델라가 싸한 둘 사이에서 눈치를 보다가 작게 목소리를 냈다. 덕분에 린다와 헤이든의 시선이 아델라한테 향하면서 분위기는 금방 풀렸다.
“린다 경은 왜…… 쪽지만 써 놓고 가문을 나오신 거예요?”
전생에서 린다는 검술 훈련 교관이자 뛰어난 기량을 지닌 강한 기사였으며 세이즈 가의 예비 백작 부인이었다. 아델라가 아는 건 그 정도였다.
여러 직위로 불렸던 린다였지만 정작 그녀가 나고 자란 집안 이야기는 들을 수가 없었다. 어렴풋이 그녀가 귀족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 외의 정보는 들어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궁금했다.
지금의 린다는 또 어떤 사람일지. 아델라가 모르는 린다는 어떻게 자라왔을지. 어떻게 펜베르크 성까지 오게 됐는지.
“아, 그거.”
굳이 그때 남긴 쪽지를 다시 상기하고 싶진 않았는데, 아델라가 물어 보니 린다는 당시 남겼던 쪽지의 내용이 생각났다.
“어린 날의 치기라고나 할까요.”
“푸, 크흡! 푸하하!”
린다가 아련한 표정으로 말하자, 옆에 있던 헤이든이 웃음을 터뜨렸다. 린다는 그런 헤이든을 매우 아니꼽게 보았다. 간신히 둘의 분위기가 완화되나 했는데, 어째 분위기가 더 안 좋아진 기분이었다.
“그만 웃지? 웃기냐? 웃겨?”
“이야아, 치기 맞지! 15살 꼬마가 ‘자기는 자기보다 더 강한 사람을 만나러 수련을 떠난다’ 고……! 푸억!”
헤이든이 옆구리를 잡으며 의자 밑으로 가련하게 떨어졌다. 린다는 자신이 어릴 적 쓴 가출 쪽지의 내용을 헤이든이 정확히 읊자, 열이 받아 그의 옆구리를 쳤다. 다행히도 힘은 적당히 조절했다.
재차 말하지만, 린다 사전에 경고는 한 번뿐이었다.
“15살…….”
아델라는 어렸던 린다의 행동이 신기해서 중얼거렸다. 어떻게 그렇게 어렸을 때 혈혈단신 집을 나올 생각을 했을까.
린다가 홱 아델라를 돌아보았다. 아델라는 그저 신기해서 중얼거렸을 뿐인데, 그녀의 강렬한 눈빛을 받으니 뭐라도 잘못한 것처럼 움찔 몸을 굳혔다.
“그땐 진짜…… 힘이 넘쳤고, 주체하지 못했습니다.”
한참 아델라를 보던 린다가 변명처럼 대답했다. 그에 아델라는 입술이 씰룩이는 걸 막기 위해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얼른 막았다. 린다의 대답이 너무 귀여웠다.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저도 모르게 엄마 미소를 지을 뻔했다.
‘그럼 나도…… 헤이든 경과 같은 꼴이……?’
얼마나 아픈 건지 가련하게 옆구리를 감싼 채 고개를 바닥에 처박은 헤이든에게 아델라는 애도를 표했다.
‘진짜로 두 분 연애 전선 어떻게 생겨요?’
아델라는 고민할 거리가 하나 더 생긴 것 같았다.
“그래, 나도 기억하네. 어떤 소녀가 펜베르크 지역 일대에 주먹 좀 쓴다 하는 건달들을 전부 패고 다닌다고.”
희생양이 된 건달들한테 애도를. 그 정도면 너무 강렬한 인상이라 잊기도 힘들겠다.
“그때 전…… 제 힘을 알고 싶었고 떠돌아다니다가 이 지역까지 오게 돼서.”
“강한 사람을 찾아다닌 건데 펜베르크 성에 머물게 된 이유가 뭐예요?”
“펜베르크 성 일대 치안 때문에 절 만나러 온 미하일 공작 각하께 져서요. 그 뒤로 몇 번을 해도 각하께 못 이겼거든요.”
정말 간단한 이유였다.
미하일을 이기려고 펜베르크 성에 머물러서 그한테 훈련을 받았는데, 계속 못 이겨서 눌러앉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 뒤로 여러 일련의 사건들을 겪고 어떤 죄책감과 책임감 때문에 더 이곳을 못 떠난 것도 있었다.
“부모님이 찾지는 않으셨어요?”
아델라가 정말로 궁금한 표정으로 이것저것 묻자, 린다는 아까보다 기분이 풀어진 듯했다. 헤이든처럼 놀리거나 웃음이 터지거나 둘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델라는 의외로 매우 침착했다. 이저드의 연인이라 성향도 비슷한 걸까.
“아뇨, 딱히. 첫째도 그런 식으로 떠났고 둘째도, 셋째도……. 제 형제들 대부분이 그런 식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그러려니 해요. 어디 있다고 편지하면 다행이고.”
어떤 의미로는 대단한 부모님과 대단한 자식들이었다.
“그럼 형제들끼리도…….”
“야! 쿨럭, 쿨럭! 너 무슨 내가 훈련용 나무 기둥이냐! 지금 이 감각은 옆구리가 파인 게 분명해! 어쩔 거야!”
아델라가 형제끼리도 그러냐고 물으려고 했는데, 어느 정도 고통이 가신 헤이든이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는 급하게 벌떡 일어나서 그런지 사레가 들려 잠시 기침을 하고 린다한테 따졌다.
“어쩌긴. 그 볼품없는 몸 다시 만들 기회네. 내가 훈련 정도는 도와줄 수 있어.”
린다가 헤이든을 위아래로 훑으며 비웃었다.
“뭐어? 네, 네가 봤어! 내 몸이 어때서! 너 평생 가도 이런 몸 볼 기회가 없어어어억!”
아델라는 이 상황에서 자기 눈을 가리고 있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시선을 피해 줘야 하는 건지 고민했다. 왜냐하면 헤이든의 상의를 린다가 찢을 듯이 잡고 흔들었기 때문이다.
“미친! 미친 여자야! 뭐 하는 거야!”
“뭐! 이런 몸 볼 기회가 평생 가도 없다며? 그 몸 얼마나 좋나 봐야지, 내가 평생 가도 볼지 말지 알지!”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은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말인가 보다. 둘이 헤이든의 옷자락을 잡고 실랑이를 벌이자, 이저드가 익숙한 듯 작게 한숨을 쉬었다.
“둘 다 그만하게.”
이저드의 말에 린다가 심드렁하게 헤이든을 놔 줬다. 린다는 깔끔하게 헤이든한테서 손을 뗐지만 헤이든은 여전히 씩씩거렸다.
“무슨 여자애가 힘이……! 헉! 진짜 찢어졌어!”
헤이든은 안쪽 셔츠 소매가 찢어진 것을 발견하고 경악했다.
“이거 어쩔 거야!”
“아, 물어낼게. 됐지?”
“이거, 이거! 우리 어머니가 생일 선물로 주신 거라 어디서 못 구하거든!”
“그럼 꿰매 줄게, 애냐?”
정말 매번 이렇게 싸움이 나는 것도 신기했다. 2년이나 봤으면 서로 성격이 파악됐을 텐데,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움질이었다.
“저 진짜 걱정되는데요.”
둘을 멍하니 보고 있던 아델라가 목소리를 낮추고 이저드한테 몸을 가까이했다.
“음?”
이저드도 아델라의 목소리를 더 잘 듣기 위해서 몸을 숙였다.
“둘이 이번 생에 안 되면 어떡해요? 완전 인연을 바꿔 버린 게 되는데……. 원래 태어날 아이도…….”
아직도 싸우고 있는 둘을 보고 있자니 아델라는 정말 진심으로, 진지하게 걱정됐다.
“걱정 말게. 인연이라면 어떻게든 이루어질 거네.”
이저드가 부드럽게 웃으며 아델라를 도닥였다.
수많은 회귀를 거듭하고 만난 인연도 있는데, 계속 인연이었던 이들이 겨우 한 번의 어긋남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 * *
그 뒤로 며칠이 또 지났다.
아델라는 여전히 루와 새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고, 이저드는 여전히 아델라를 만나러 매일 3구역으로 나왔다. 그날도 그녀는 절차처럼 번화가를 거닐다가 욘제타네 식당에 들르러 가는 길이었다.
식당이 있는 거리에 들어서자 곳곳에 음식 냄새가 솔솔 풍겼다. 거리에 들어섰을 뿐인데 군침이 흘러 욘제타네 가게에 들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먹음직스러운 음식 냄새였다.
“어? 마차에요!”
아델라도 음식 냄새에 이끌려 자연스럽게 욘제타네 식당이 있는 거리에 들어섰고, 멀리에서 욘제타네 가게가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 웬 마차가 세워져 있었다.
아델라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걸음을 재촉해 마차로 다가갔다. 그녀는 기웃기웃 마차를 돌아보다가 안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안에 들어가 보게.”
아델라를 뒤따라오던 이저드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식당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저드의 말에 아델라는 기대에 부푼 마음을 가지고 식당 쪽으로 걸음을 돌렸고, 그와 동시에 식당 문이 덜컥하면서 열렸다.
“응? 아델라?”
안에서 나온 사람은 아델라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루였다.
“루!”
아델라는 그가 무사히 도착했다는 사실에 환하게 웃었다.
“안 그래도 너 찾아보겠다고 하고 나왔는데……. 잘 있었어?”
“응! 어머니랑 너는 괜찮아?”
“보시다시피.”
루가 아델라의 앞에서 확인해 보란 듯이 한 바퀴 돌았다.
자리에서 도는 순간 이저드와 루의 시선이 부딪혔지만, 둘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시선을 갈무리했다. 지은 죄도 없는데 공범이 된 것 같은 기분은 실로 찝찝했다.
“다행이다…….”
“천천히 쉬엄쉬엄 왔어. 너희 어머니 구경도 시켜 드리고.”
“잘했어, 진짜 고마워. 바깥 구경은 오랜만이실 텐데, 좋으셨겠다.”
아델라가 웃으며 말하자, 루도 빙그레 웃었다.
“아, 맞다. 어머니가 뭐라고 안 하셔?”
아델라의 새어머니는 쉬이 집을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델라는 루한테 거짓말을 해서 데려와 달라고 부탁했다. 일단 당장 그녀를 데리고 나오는 게 중요했기 때문이다.
“믿는 눈빛 반, 안 믿는 눈빛 반. 그래도 네가 펜베르크 성에 먼저 갔다니까 걱정돼서 오시더라.”
“어휴……. 다행이다. 거짓말해 달라고 부탁해서 미안해.”
“거짓말은 무슨, 그 사람은 언젠가 철창신세 면치 못할걸?”
루가 뚱하니 대답했다. 아델라는 오랜만에 듣는 루의 비꼼이 듣기 좋아 해사하게 웃었다.
“너희 어머니는 혹시나 하고 모아 놓은 비상금도 털어 오셨어.”
“헉, 진짜? 석방금에 쓰려고?”
아델라가 새어머니를 자작가에서 꺼내 올 방책으로 쓴 것은 바로 벨제프 자작이었다. 정말 지긋지긋한 악연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 인간한테서 벗어나기 위해 그 인간을 이용해야 한다니. 정말 아이러니한 상황이었지만, 새어머니를 저택에서 나오게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아델라는 벨제프 자작이 죄를 지어 펜베르크 성에 구금되어 죽을 위기라는 거짓말을 해 달라고 루에게 부탁했다. 아델라가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먼저 출발했으니, 뒤이어 새어머니를 데리고 와 달라고 했다. 다행히도 새어머니는 아델라의 거짓말에 속아 주었다.
“그 인간 이용한 건 안 미안한데, 어머니한테는 거짓말을 해서 죄송하네……. 엄청 놀라셨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저택에서 못 나오셨을 분이니 어쩔 수 없지. 너무 마음 쓰지 마. 지금부터가 더 중요하니까.”
거짓말을 해서 새어머니를 펜베르크 성에 데리고 온 것까지는 좋았지만,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그녀는 돌아가려고 할 것이다.
아델라와 새어머니 둘 다 사라져서 자작이 얼마나 길길이 날뛸 지 새어머니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한테 벗어나면 안 된다는, 어떤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가 챙겨 온 비상금은?”
“마차 안에.”
아델라는 루의 말을 듣고 쪼르르 마차 위로 올라가 구석에 놓여 있는 돈 가방을 들고 나왔다. 갑작스러운 아델라의 행동에 모두의 얼굴에 궁금함이 서렸다.
“이 돈하고 나한테 남은 패물, 그리고 루가 준 돈으로 작은 집을 살 거야.”
“응? 왜?”
“집은…… 욘제타 아주머니 댁이랑 가까운 곳이면 좋겠어.”
“무슨 말이야?”
루가 궁금한 표정으로 묻자, 아델라가 눈을 빛내며 당당하게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어머니가 자작가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거지! 돈을 다 써 버려서!”
가문의 돈을 탈탈 다 털어 버려서 자작가로 돌아갈 면목도 없게!
“방금 되게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일리 있는 말이네.”
루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델라를 보았고, 아델라는 결심을 굳힌 표정으로 돈주머니를 두 팔로 꼭 껴안았다.
“가자.”
아델라의 행동력은 가히 빛의 속도 급이었다.
“뭐? 지금?”
“응, 당장. 집을 사고, 어머니한테 고백할 거야.”
“무슨 고백?”
“진솔한 마음의 대화!”
그걸 위해 꼭 당장, 그것도 집까지 사야 하는 건가? 예측할 수 없는 아이라는 건 알았지만…….
루는 황당했지만 그래도 순순히 아델라를 따랐다.
“가요!”
돈주머니를 들고 쪼르르 이저드한테 다가온 아델라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저드는 그녀의 미소에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이들은 린다와 헤이든 뿐이었다. 그들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하나도 몰랐지만, 이저드가 따르니 그들도 따랐다.
* * *
“여기가…… 어디라고?”
“우리 집이요.”
“으응?”
얕은 나무 울타리가 쳐져 있고, 작은 뜰이 딸린 아담한 주택에 들어선 아델라의 새어머니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크다고 말할 수는 없는 크기의 집이었지만 방 2개와 주방, 작은 거실에 다락방까지 있어 둘이 살기 나쁘지 않은 공간이었다. 물론 귀족 저택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았지만.
“자작가보단 작아도 있을 건 다 있어요!”
“아니, 아니. 잠깐, 아델라. 자작님은? 자작님께서 잡혀 있다고 그러지 않았니? 갑자기 여기가 우리 집이라니?”
그녀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앞서 걷는 아델라를 잡았다. 그에 아델라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이내 새어머니를 식탁으로 이끌었다. 식탁 역시 두 명이 앉기 딱 알맞은 크기였다. 아델라는 의자에 어머니를 앉히며 말했다.
“사실, 저 어머니한테 거짓말했어요.”
“거짓말? 거짓말이라면……. 설마…… 펜베르크 성에 아버지가 안 계시니?”
그녀의 물음에 아델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새어머니의 눈이 커졌다. 전부터 아델라가 이상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루까지 동원해서 이런 일을 벌일 줄은 몰랐다.
“지, 진짜니? 왜 그런 거짓말을……. 왜 그런…….”
“어머니를 저택에서 데리고 나와야 해서요.”
아델라는 새어머니를 속인 게 죄송해서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자 새어머니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 그럼 지금…… 우리 나온 거, 아버지는 모르는 거니?”
“아니요. 아마 지금쯤은 알게 됐을…….”
우당탕!
아델라가 채 말을 마치기 전에 새어머니는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럽게 일어나서 의자까지 뒤로 넘어간 상태였다.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에 아델라도 놀란 나머지 그녀를 따라 일어났고, 미세하게 몸을 떠는 그녀한테 다가갔다.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야 해.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돌아가야……!”
허둥지둥 문 쪽으로 향하는 새어머니의 팔을 아델라가 덥석 안았다.
“어머니! 잠시, 잠시만요!”
아델라는 필사적으로 그녀를 잡았다. 이대로 새어머니가 가 버리면 정말로 영영 그녀를 못 볼지도 몰랐다. 벨제프 자작은 도망간 이들을 가만히 두고 볼 만큼 너그러운 놈이 아니었다.
전생에서도 아델라가 공작의 약혼녀가 아니었다면 아마 머리채라도 잡았을 것이 분명했다.
“아델라, 아델라……. 놓으렴. 제발. 나만이라도 돌아가야 해. 안 그러면 우리 다……!”
새어머니는 작고 여린 아이가 자신을 꽉 잡고 놓지 않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섰다.
“제 말 좀 들어 주세요. 제발요! 저 어머니 못 보내요!”
아델라는 새어머니의 팔을 더욱 꽉 끌어안으며 외쳤다. 맞닿은 피부를 통해서 새어머니가 매우 떨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래도 그녀를 놔 줄 수 없었다.
“아델라, 왜 그러니? 응? 이러다가 우리 다 잡혀 가. 제발 놔 주렴. 제발.”
그녀가 어린 아델라를 어르고 달래려 했지만 아델라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만들지 않아요.”
“아델라.”
“저 두고 가지 마세요. 저랑 여기서 살아요. 남은 생은 저랑 보내요.”
“아델라…….”
요 몇 년간 떼라는 걸 써 본 적이 없는 아델라가 그녀의 팔을 안고 애원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새어머니는 아델라가 안쓰러워졌다.
아델라의 눈빛은 그녀가 좀 더 어렸을 때와 비슷했다. 친어머니를 잃고, 기댈 곳 없이 울던 아델라의 어린 시절과 비슷했다. 그때 아델라는 누구에게라도 기대고 싶어서, 처음 본 새어머니를 필사적으로 잡고, 그녀의 품에 파고들었다.
새어머니는 그때의 아델라가 생각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허리를 숙여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이 아델라의 머리 위에 닿았다.
“혹시 안 좋은 꿈을 꿨니? 그래서 그래?”
그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묻자, 아델라는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르게 표정을 구겼다.
“제가 겪은 모든 게, 진짜 꿈이면 좋겠어요.”
아델라의 눈빛에는 사무치는 그리움과 짙은 죄책감, 슬픔이 서려 있었다. 아이가 이토록 복잡한 감정이 서린 눈빛을 보낸 적이 있었던가. 새어머니는 아델라한테 보이는 간절함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꿈이면 좋겠다니?
“꿈이면 좋겠는데, 꿈이 아니에요.”
“아델라, 무슨 일이 있는 거니? 무슨 일인지 나한테 말해줄 수 없겠니? 이 아줌마는 도저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이런 일을 벌인 이유도, 날 막는 이유도, 모르겠어.”
아이가 이렇게 필사적인 데에는 다 이유가 있으리라, 그녀는 생각했다. 평소에 아델라가 이런 대담한 행동을 보이는 아이도 아니었고, 아무 일도 아닌데 무작정 새어머니를 잡아두는 아이도 아니었다.
“영영 못 볼 것 같아서요.”
“나를?”
“네, 제가 왜 어머니를 데리고 도망 나왔냐면요……. 어머니가 절 저택에서 도망치게 하거든요. 그리고 그 후에 한 번도 못 만나요. 어머니는 몇 년 후에 죽고요.”
“뭐? 어?”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눈만 깜박였다. 반면 아델라는 아주 진지했고, 담담해 보였다.
“그 일을 되풀이할 수 없어요. 이번 생에 어머니를 못 살리게 된다고 하더라도, 하다못해 저택에서 혼자 돌아가시게 하지 않아요. 옆에 있을게요, 제가.”
“자, 잠시, 잠깐. 아델라. 아줌마가 많이…… 그, 혼란스럽구나.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새어머니는 아델라의 말이 쉬이 믿기지 않았다. 별나라 세상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다. 그녀는 진짜 아델라가 아픈 건 아닌지, 아이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못 믿겠는 거 알아요. 제가 어머니를 잡아 두려고 거짓말하는 것처럼 들리시죠?”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아델라의 표정과 눈빛에 한 톨의 거짓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새어머니는 아델라가 진솔하고 정직한 아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다. 그럴 아이가 아닌데…….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셔도 좋아요. 떠나지만 말아 주세요. 제 곁에 어머니가 계셔야 해요. 억지를 부린다고 생각하셔도 좋아요. 억지를 부려서 어머니를 잡을 수 있으면 그렇게 할래요. 전 어머니 못 놔 줘요.”
“아델라, 난…….”
이쯤 되니 새어머니는 아델라가 자신이 죽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델라한테는 어떤 확고한 확신이 있었다.
“절 믿지 못하시겠지만, 이번 생엔 절대로, 그 인간이 우릴 찾지 못하게 할 거예요. 어머니를 휘두르는 것도 가만 안 둬요.”
“네 마음은 알겠지만, 네 아버지는…….”
“저한테 가족은 어머니뿐이에요.”
아델라는 단단히 못 박았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있어야 해요. 저 아직 보호자가 필요한 나이인 거 아시죠? 저 이대로 두고 가면 펜베르크 성에서 떠돌며 굶고 돌아다닐지도 몰라요.”
울망울망한 눈빛을 보내는 아델라를 보며, 새어머니는 입을 다물었다. 둘 다 함께 있으면 들킬 위험이 컸다. 그래서 적어도 자신은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처음 자작가에 던져졌을 때, 그녀는 말을 잃은 어린 아델라를 보며 정신을 차렸다. 벨제프 자작의 억압과 폭력 속에서도 그녀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아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없으면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이, 세상이 끝날 것 같이 우는 어린아이를 돌보며 그녀는 아이를 위해 살아가기를 다짐했다.
그런 다짐을 하게 해 준 아이가 자신이 필요하단다. 자신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온몸으로 자신을 막으면서. 그런 아이를 두고 자신이 어떻게 떠날 수 있겠는가.
“아델라……. 그런 표정 짓지 말렴. 아줌마가 잘못했어. 안 갈게. 너 두고 어디 안 가. 그리고 믿어. 네가 그런 거짓말을 할 리 없다고.”
새어머니는 아델라를 품에 안고 토닥였다. 그녀는 아델라의 간절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대신, 그녀는 마음속으로 다른 다짐을 했다.
‘후에 그 사람이 찾아와 우릴 괴롭혀도, 내가 지켜 줄게. 그 사람이 널 데려가려고 한다면 무슨 짓을 해서든…… 내가 갈 거야.’
라고.
벨제프 자작이 아무리 무섭고 두렵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아델라는 잘 몰랐지만, 아델라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새어머니였다.
“진짜죠? 저랑 약속한 거예요.”
“그럴게. 대신, 너도 왜 이런 일을 벌인 건지 숨김없이 전부 말해 줘야 한다?”
그녀는 아델라가 듣는다면 슬퍼할 다짐을 속으로 삼키며 부드럽게 웃었다.
* * *
아델라는 회귀에 대한 사실을 일부분 털어 놓았다. 그녀는 새어머니가 놀랄까 봐 한두 번 정도라고만 말했고, 그마저도 그녀가 충격 받을까 봐 전쟁에서 죽었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새어머니는 당연하게도 믿기지 않아 했다. 밤이 늦어 잠자리에 들기 위해 나란히 누운 뒤에도 그녀는 몇 번이고 진짜냐며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사실로 받아들인 후에 새어머니는 아델라를 꼬옥 안아 주었다. 고생했다고, 얼마나 힘들었냐고, 고통을 이겨 내 줘서 고맙다고 속삭이며 잠들 때까지 토닥여 줬다.
창가에서 달빛이 쏟아져 모녀를 따사로이 비추던 밤, 둘은 그렇게 서로를 안고 긴 밤을 보내는 듯싶었다.
슥.
완전히 잠에 빠진 여인을 두고 아이가 침대에서 스르르 빠져나와 방을 나왔다. 그녀는 곧바로 집 문을 조용히 열고 밖으로 나갔다.
“어떻게 됐어?”
아델라가 밖으로 나와 향한 곳은 집 앞 울타리였다. 그곳에는 달빛을 받아 평소보다 더 영롱하게 빛나는 은발을 지닌 루가 있었다.
“음, 모르겠어. 일단은 1차 성공?”
아델라는 루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옆에 서서 별빛으로 반짝이는 밤하늘을 보았다.
“왜? 아줌마가 널 두고 떠날 것 같아서?”
“그건 아닌데…… 어머니를 강제로 체념시킨 것 같아서. 억지로 잡아둔 거잖아. 그게 오래갈 수 있을까, 싶어서.”
“가끔은 억지로 그 상황에서 빼내 줘야 하는 사람도 있어.”
루도 아델라와 함께 밤하늘을 보며 말했다.
“그리고 세상을 겪다 보면 생각이 바뀔지도 몰라. 자신이 너무 좁은 세계에만 있었구나, 하고 생각할 지도.”
“그렇게 되게 해야지. 많은 걸 겪고, 많은 걸 보여 드리고, 많은 걸 하실 수 있게.”
그렇게 해서 생각이 바뀌고, 새어머니가 자작을 잊은 채 홀가분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된다면 아델라는 바랄 게 없었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그 인간을 어떻게 해야 하는데…… 아, 참!”
“응?”
아델라는 벨제프 자작을 끌어내릴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전에 이저드와 린다, 헤이든과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루, 너 혹시 바로 가?”
“아마? 일이 있어서……. 왜?”
루가 팔짱을 끼며 의아한 표정으로 아델라를 보았다. 아델라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정말, 진짜 미안한데…… 가기 전에 거짓말 하나만 더 해주면 안 돼?”
“거짓말? 이번엔 무슨 거짓말?”
루는 아델라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상냥하게 웃었다.
“이게 이야기를 하자면 되게 긴데…… 내가 펜베르크 성에 나가야 할 일이 곧 생길 거거든.”
“응.”
루가 팔짱을 끼고 아델라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근데, 어머니가 불안해하실 것 같아서.”
“응.”
“그래서, 나랑 한, 한 달 뒤에 물건을 떼러 잠시 다른 지역에 다녀온다고 어머니한테 말해 주면 안 돼? 내가 장사도 배우고 시장 조사를 하러 가는 것처럼.”
“음? 난 내일 바로 갈 텐데?”
“네가 미리 먼저 가서 자리를 잡아 놓는 거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아델라는 루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루는 그런 아델라를 물끄러미 보다가 고민하는 척했다.
“혼자 나가는 건 아니겠고.”
“응! 아까 낮에 봤던 사람들이랑!”
“네 연인하고, 호위 둘?”
아델라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줌마는 네가 누구랑 사귀는지 아직 모르셔?”
“만난 적이 있다고는 했는데, 애인이라고는 아직……. 어머니께서 충격 받을 말이 너무 많아서 차차 하려고. 이저드 님의 아버님도 모르시고…….”
“얼씨구, 두 꼬맹이가 몰래 작당을 하고 밖으로 나간다는 말이야?”
아델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 움직인다고 해도 몰래 나가는 건 맞았으니까 말이다.
“부모님들을 굳이 속여야 해?”
“그, 빈민촌에 간다고 하면, 절대 허락 안 하실 게 뻔하고, 허락하셔도 호위를 엄청 붙이실 건데, 그건 너무 눈에 띄고…….”
“빈민촌? 어디?”
“하이크 제국하고 제베르 왕국 국경 근처.”
“알페스 지역? 거긴 좀……. 허락 안 할 만하네.”
아델라가 그곳에 가야 하는 이유를 루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아델라는 루의 정체를 모르니 말리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치안이 엄청 안 좋은 건 알고 있지?”
루가 미간을 살짝 구기며 묻자, 아델라는 그의 눈치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아델라가 있는 제베르 왕국과 하이크 제국, 그리고 카텔 왕국. 알페스 지역은 세 나라의 국경이 붙어 있는 곳에 있었다.
알페스 지역의 특징 중 하나는 하이크 제국이 불가침 지역이다 보니 제베르 왕국이나 카텔 왕국에서 사고를 치고 국경 근처 지역 중 하나인 이곳에 숨는 이들이 많다는 거였다.
덕분에 암거래나 암시장이 커져 그만큼 사건 사고도 많은 동네였다.
“흐음, 호위는 강해?”
“린다 경하고 헤이든 경? 내가 아는 한…… 손에 꼽을 정도로?”
“무법지대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널 지킬 수 있을 만큼?”
“날 들고 싸우셔도 전투력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실 분들이야. 상황 판단은 두말할 것도 없고!”
솔직히 린다와 헤이든, 이저드, 이렇게 셋이 다니면 거의 천하무적이 아닐까? 셋의 실력을 알고 있는 아델라이기에 큰 걱정은 없었다. 다만 린다와 헤이든 사이에서 크게 싸움이 나면 어떻게 말려야 하나, 하는 걱정은 있었지만.
“하긴.”
루는 이해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만한 실력이 아니면 공작가 도련님 호위를 맡을 리 없었다.
“음……. 네가 무슨 일을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무사히 돌아와야 해? 그것만 약속하면 공범, 해 줄게.”
루의 허락에 아델라는 활짝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당연하지! 절대 무슨 일 없을 거야. 어머니한테도 루, 너한테도 걱정 안 끼칠게. 약속!”
그녀가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런 그녀를 빤히 보다 루도 웃으며 그녀의 손가락에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알겠어. 대신, 다음에 만났을 때 안 멀쩡하면 다시는 이런 일에 동참 안 해 줘. 부탁도 안 들어 줄 거야.”
“그럼! 당연하지! 내가 너한테 받은 도움이 얼만데! 완전 멀쩡하게 올게. 내가 몸은 이래도, 도망은 칠 수 있을 걸?”
“큭큭큭. 그래, 도망치다 엎어지지나 말고.”
팔랑팔랑 흩날리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걱정 마! 체력 단련할 거야! 이 몸으로 어디까지 가능한지도 알아야 하고.”
한 달은 너무 짧았지만, 앞으로 열심히 먹고, 최대한 근육을 단련해 가며 훈련할 거였다.
“그래, 그래. 잘해 봐. 무리하다 어디 부러지진 말고.”
“응!”
아델라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 그리고. 나 이번에는 좀 늦게 올 거야. 오래 걸릴 것 같아.”
아델라는 루가 웬일로 자신의 일정을 다 말하나 싶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얼마나?”
“적으면 1, 2년? 많게는 좀 더 오래.”
“그렇게 오래? 무슨 일 있어?”
평소 늦으면 6개월 정도가 최고였는데 1, 2년이나 걸린다고 하자 아델라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루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이라기보단 새로운 공부를 해 볼까 해서.”
“새로운 공부?”
“이를테면 고고학이라던가. 고대 유물이 어디에 묻혀 있다는데, 돈이 될 것 같아서.”
루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거짓을 말했다.
이런 이유가 아니면 자신이 오래도록 아델라를 만나러 오지 못하는 이유가 설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델라의 불안도 덜어 주고 자신은 걱정 없이 밀린 일을 처리할 시간을 벌고, 일석이조였다. 그한테는 이만한 변명거리가 없었다.
“고대 유물이라는 건 처음 듣는 소식인데, 신기하다…….”
고대 유물 그 자체로도 신기하긴 했지만, 아델라는 그보다 새로운 일이 벌어져서 더 신기했다. 수많은 회귀 동안 루가 이토록 오랫동안 안 온다고 한 적도 없었고, 고고학을 배운다고 한 적은 더욱 없었다.
그렇기에 아델라는 이것도 미래가 바뀌고 있는 증거 중 하나인 것 같아 조금 설렜다.
“응, 그래서 좀 알아보려고.”
루는 아델라의 금안을 물끄러미 보다가 부드럽게 웃었다. 아델라의 눈 안에는 밤하늘의 별이 담겨 평소보다 더욱 반짝였다.
“그러니까 내가 오랫동안 안 온다고 울지 말고 있어.”
“내가 앤가……. 좀 걱정하긴 하겠지만!”
장난스러운 루의 말투에 아델라 또한 장난스레 웃으며 맞받아쳤다. 둘은 별이 쏟아질 것처럼 빛나는 밤하늘 아래에서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시간을 보냈다.
* * *
“뭐 빼먹은 건 없니? 돈은 진짜로 필요 없어?”
요 한 달 내내 어딘가로 뽈뽈거리며 돌아다니는 아델라가 걱정스러웠던 새어머니는 뭔가 빠진 건 없나 아델라의 짐가방을 꼼꼼히 살폈다. 난생처음으로 아델라를 조금 오래 떠나보내야 한다는 게 어색했던 그녀는 아델라가 몇 번이나 괜찮다고 하는데도 걱정됐다.
“네, 네! 이거면 돼요!”
“짐이 너무 적지 않니?”
“괜찮아요! 어차피 루한테 가는 건데요, 뭐! 먹을 것도, 옷도 챙겼고요.”
아델라가 씩씩하게 답하자, 새어머니는 조금 안심한 듯 살짝 미소를 띠웠다.
“저 멀리 가는 거 아니니까, 여기 꼭 계셔야 해요? 금방 올게요. 무슨 일 있으면 욘제타 아주머니 댁으로 피해 계세요!”
“그래, 그래. 알겠어. 내 걱정 말고, 도착하면 전서구 꼭 보내렴.”
새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델라도 그녀의 안부가 걱정되어 몇 번이나 욘제타네로 가라고 당부했다.
아델라는 이번 생에도 욘제타와 가까운 사이로 지냈다. 여기저기 일을 하러 다니면서 가끔 욘제타네 식당 일도 도와주면서 그쪽과도 인연을 만들었다.
“네! 그럼 가 볼게요!”
아델라는 환하게 웃으며 마차에 몸을 실었다.
‘죄송해요, 어머니! 절 용서하세요!’
마음 같아서는 계획을 전부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델라 한 사람만 엮인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말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앞으로 몇 년은 더 속여야 한다.
그렇기에 아예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한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앞으로의 계획을 전부 말해야 하니까. 결국 아델라는 어머니를 속이는 쪽을 택했다. 그녀가 알면 기겁을 할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가끔은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었다.
‘부디 이번 생에는 성공하기를.’
아델라는 그렇게 간절히 바라며 이저드와 만날 장소로 달렸다.
* * *
펜베르크 성을 나와서 국경을 넘기 전까지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이저드와 아델라는 여행을 나온 것처럼 평소보다 들떠 보였고, 간간이 오가는 대화는 여행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린다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시점은 마차를 바꿔 타면서부터였다. 펜베르크 성에서 국경선까지 오느라 지친 말들을 쉬게 할 목적으로 중간에 마차를 갈아탔는데, 그때부터 린다는 싸한 기분을 느꼈다.
“잠깐, 잠시 멈춰 보시죠?”
린다는 마차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며 인상을 썼다.
“마차는 안 멈출 거네.”
린다의 말에 이저드가 묵묵히 대답했다. 린다는 놀란 표정으로 이저드를 쳐다보았다.
“지금…… 어디로 향하는지 알고 가시는 겁니까?”
“그래.”
이저드는 린다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 흔들림 없었다.
“미쳤습니까?”
“야, 도련님께 미쳤다는 건……!”
“넌 조용히 해 봐.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건 줄 알아? 알페스로 향하고 있다고!”
린다가 버럭 소리치자, 헤이든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어디서 들어본 지명이었다.
“알페스? 알페스요?! 그, 그 뭐냐, 그 뭐지? 무법 지역?”
“그래!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요. 왜 바람 쐬러 가는데 굳이 하이크 제국까지 오나 했어! 지금 저흴 이용하신 겁니까?”
린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세상에 눈빛으로 사람을 때릴 수 있다면, 아마 딱 지금 린다의 눈빛이 그러했다.
“……미안하네.”
“아니, 어떻게 이런 위험한 곳에 갈 생각을 하셨습니까! 각하께 말도 안 하시고! 당장 마차 돌리시죠? 아니면 제가 돌립니다!”
린다는 마차를 무슨 수를 써서든 당장에라도 세울 기세였다.
“조용히 움직여야 할 이유가 있었네. 아버지가 알면 많은 호위병이 이쪽으로 빠질 테지. 그럼 안 돼.”
“그럼 저희한테는요? 저희한테라도 말할 수 있었잖습니까!”
“이럴 거지 않은가.”
“그……!”
린다는 화를 내려다 맥이 탁 풀렸다. 확실히 알페스 지역에 온다고 했으면 그녀는 극구 말렸을 터였다. 아마 협력도 안 해줬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저드는 린다와 주변 사람들을 아주 잘 알고 맞게 대응한 거였다.
“그으래도! 호위를 많이 붙이더라도 말했어야죠.”
“아니, 이 인원이면 충분하네.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돌아가야 해.”
“도대체 왜요? 뭐가 무서워서요. 전에 말했던 왕이요? 왕이 뭐요. 알페스 지역에 가는 것과 왕의 눈을 피해야 하는 이유가 뭔데요?”
이저드가 제대로 대답을 해 주지 않아, 답답했던 린다가 하나하나 따졌다. 무서운 기세로 따져 드는데도 이저드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 이저드에게 새삼 린다는 감탄했다.
“왕한테 정체를 드러내면 안 되는 이를 모시러 가야 하네. 누구한테도 그분의 행적을 들키면 안 돼.”
“그분이요? 각하께 말씀 못 드릴 정도의 신분입니까?”
이저드가 이렇게 정체를 꼭꼭 숨길 정도의 사람이 누군지 린다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러네. 만일 그분이 신분을 밝히기 꺼린다면, 아무리 아버지라도 말해 드릴 수 없네.”
“아니, 뭐 얼마나 대단하신 분이라고 이렇게까지…….”
미하일한테 말도 못 하고 몰래 만나야 할 사람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적어도 누구를 만난다, 라고는 말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린다는 미하일보다 높은 신분의 누군가를 쉬이 짐작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린다가 아는 미하일보다 높은 신분의 인물들은 제베르 왕국 수도에서 꼼짝도 안 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그분을 만날 때까지 정체를 알려줄 수 없다, 그거죠?”
린다가 화를 참으며 묻자, 이저드는 역시나 이번에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분의 정체는 두 분만 아는 사실이고요.”
린다의 시선이 이번에는 아델라한테 향했다. 아델라는 흠칫 놀라면서도 겁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 보시면 알 거예요. 저희가 왜 함부로 입을 못 여는 건지. 왜 위험을 감수하고 여기까지 온 건지.”
아델라가 쭈뼛쭈뼛 말했다.
“좋아요. 어차피 저희 둘이 말려도 둘만이라도 가겠네요. 아예 작정을 하신 거니까. 저흰 둘을 지켜야 하니까 따라가겠지만, 별 이유 없이 이런 일을 벌이셨으면 저도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경의 뜻대로 하게.”
“네!”
이 아이들 왜 이렇게 단호해?
린다는 화를 내려다가도 너무 확실한 둘의 태도를 보며 기운이 다 빠졌다.
* * *
“그런데…… 이 넓은 곳에서 어떻게 찾죠?”
빈민가가 늘어선 거리는 생각보다 넓었다. 여기저기에서 모인 사람들로 북적인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규모가 클 줄은 몰랐다. 이곳에서 아리스를 찾는 일은 사막에서 바늘 찾기와 같아 보였다.
“일단 암시장 쪽으로 가지.”
“예? 거긴 여기보다 더 험한 곳이거든요?”
“맞아요, 이번만은 저도 린다 편입니다.”
린다가 이저드를 극구 말렸다. 이번엔 헤이든도 그에 동참했다.
“알고 있네. 너무 험해서 장사하려는 이들은 호위가 필수라지.”
“아, 호위!”
이저드가 그런 말을 꺼낸 이유를 단번에 알아챈 아델라가 짧은 탄성을 질렀다.
“호위 믿고 갔다가 둘 다 싸움에 휘말리실 일 있습니까?”
린다는 둘의 이야기를 다르게 받아들이고 미간을 살짝 구겼다. 아무래도 그녀는 린다와 헤이든이라는 든든한 호위가 있으니 암시장에 가도 괜찮지 않냐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요.”
린다가 잘못 받아들였다는 것을 안 아델라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뭐가 아니라는 겁니까?”
“돈을 받고 고용된 용병 중에 저희가 찾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서요. 그분은 실력이 뛰어나시거든요.”
거기에다가 멀리서 봐도 눈에 띄는 덩치까지. 아리스를 찾기에는 최적의 공간이었다.
“굳이, 꼭, 그쪽으로 찾으러 가야 하겠습니까?”
“최대한 빨리 찾아서 돌아가야 하지 않나.”
“그건 맞는 말씀이지만…….”
린다는 순수하게 눈을 깜박이는 이저드와 아델라를 번갈아 보다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물가에 내놓은 아이들을 보는 기분이라는 걸 둘은 알까?
“하…… 그래요. 갑시다.”
린다는 이제 둘이 어디까지 사고를 치나 궁금할 지경이었다.
* * *
암시장은 입구부터가 험악한 분위기였다. 아델라는 이런 곳을 루가 자주 다녔다고 생각하면 경악스럽다 못해 천운이 따른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런 곳을 어떻게 혼자 돌아다녔을까? 아델라는 여태까지 루의 실력을 과소평가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낮이라 좀 덜 어두운 겁니다.”
린다가 둘의 뒤를 따르며 덧붙였다.
“지나가다 눈만 마주쳐도 싸움 나는 곳이 여기예요. 이를테면, 저 녀석들처럼요.”
린다가 턱짓으로 가리킨 곳에는 벌써 시비가 붙은 행인이 서로를 향해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대충 들어 보니, 그냥 눈빛이 마음에 안 들었단다. 이게 무슨?
“쌈닭으로 치면 우리도 만만치 않은 상대가 있는데.”
싸움이 일어난 곳을 보던 헤이든이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뭐냐, 내 이야기냐?”
“아니. 나, 나.”
린다의 아니꼬운 눈빛에 헤이든이 묘하게 웃으며 부정했다. 그의 미소에 기분이 나빠진 린다가 그를 퍽 밀었다.
“아, 나 좀 맷집이 생긴 것 같아.”
“살살 쳤는데 그 정도도 못 견디면 그게 몸이냐? 종이지.”
거참, 앞서 걷는 진짜 종이한테 너무한다. 아델라는 왠지 뜨끔하고 속이 찔렸다.
“아까 그 거리보다 사람이 많지 않네요. 밤에 다시 와야 할까요?”
“일단 물어보지.”
“예? 어디에서요?”
지나가던 행인을 잡아 물어보기에는 다들 험악하게 인상을 쓰고 다녀서 괜히 싸움만 날 것 같았다.
“저기.”
이저드의 시선이 닿은 곳은 이제 막 영업을 하려고 문을 여는 몇몇 가게들이었다. 적어도 손님으로 와서 물건을 사고 물어보는데 협박을 하는 이가 있을 리는 없었다.
아델라와 린다, 헤이든은 이저드를 따라 가장 첫 번째 가게로 들어섰다. 좁은 가게 안에는 각종 무기가 걸려 있었다. 거기에 험악한 용병들까지 대기하고 있으니 가게를 잘못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살 거야?”
덩치가 좀 있는 가게 주인은 매서운 눈으로 다짜고짜 반말부터 했다. 그는 로브를 뒤집어쓴 넷을 위아래로 쳐다보더니 곧 살 거 없으면 꺼지라는 표정을 지었다.
“예, 저거.”
이저드는 가게 안을 빠르게 훑고는 망설임 없이 어떤 검을 가리켰다. 그에 가게 주인은 힐끔 그가 선택한 검을 보다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보는 눈은 있는 양반이군. 저건 진품이라 비싸. 그만한 돈은 있나?”
가게 주인의 물음에 이저드는 헤이든을 보았고, 헤이든이 돈주머니를 풀어 가게 주인한테 보여 줬다. 아까까지만 해도 로브를 쓴 넷을 한껏 경계하고 살피던 가게 주인은 돈다발을 보더니 아까보단 조금 표정이 풀어졌다.
“이해해 줘. 여긴 워낙 뒤통수를 치는 놈들이 많아서.”
가게 주인은 변명하듯 말을 덧붙였고, 넷 중 아무도 그의 말에 토를 다는 이는 없었다. 어차피 큰 기대도 없었다. 헤이든은 돈주머니에서 금화 몇 개를 꺼냈고, 가게 주인은 그 금화를 냉큼 받았다.
“여기, 가져가.”
주인은 먼지가 켜켜이 쌓인 검을 헤이든한테 건넸다.
“더 필요한 건?”
가게 주인이 금화를 이빨로 물며 이저드를 쳐다보았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목적이 따로 있었구먼. 그럼 정보 값으로 금화 하나 더 내놔.”
진짜 금화라는 것을 확인한 가게 주인이 헤이든이 가지고 있는 주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에 이저드는 헤이든한테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뭔데.”
금화를 받은 가게 주인이 시큰둥하게 물었다.
“아리스라는 사람을 압니까?”
“아리스? 아리스으? 난 들어본 적 없는데.”
“다른 분들은요?”
이저드는 혹시나 용병들 사이에서는 유명할까 싶어 주변의 용병들에게도 한번 더 물었다. 그러나 호위를 하는 이들은 묵묵부답이었다.
“니들은? 알아?”
이저드가 물을 때는 꿈쩍도 안 하던 두 용병은 고용주인 가게 주인이 묻자 그제야 입을 뗐다.
“알죠. 우리들 사이에서는 아리스 유명해요. 근데 그놈은 이쪽에 없는데.”
“그럼 어디에 있습니까?”
“그놈 돈 꽤 많이 받고 경매장에서 일합니다. 거기는 워낙 진상들이 많거든요. 덩치 좋고 힘 있는 놈들은 전부 그쪽에서 일하죠.”
그들의 말에 이저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가게에서 나왔다.
‘아리스? 아리스는 또 누구야. 그 사람이, 그분?’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이저드를 따르던 린다는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곳에 미하일의 신분을 뛰어넘는 사람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저, 도련님.”
린다가 아리스라는 사람이 누군지에 대해 깊이 고민에 빠져 있을 때, 헤이든이 이저드를 조용히 불렀다.
“왜 그러나?”
조금 빠르게 걸음을 재촉하던 이저드가 헤이든을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누가 쫓아오는 것 같습니다.”
“알고 있네. 아마 돈 때문이겠지.”
정보를 알려줘서 조용히 따돌리려고 했지만, 추적자는 꽤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이저드는 어찌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아델라를 물끄러미 보았다.
“?”
누군가가 따라붙었다는 것을 아직 모르는 아델라가 의아하게 이저드를 보았다. 이저드는 아델라와 잠시 눈을 맞추고 살짝 웃었다. 그에 그녀는 별일 아닌 줄 알고 마주 웃더니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해결하게.”
이저드는 바로 옆에 따라붙은 헤이든한테 조용히 말하자 헤이든이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 아쉽네요. 제가 가려고 했는데.”
“네?”
린다가 아쉬움을 담아 크게 이야기하자 아델라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라, 헤이든 경은요?”
“가게에 두고 온 게 있다며 잠시 다녀온답니다. 먼저 가 있으면 알아서 따라오겠죠.”
린다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설마 돈주머니요?”
“예.”
“헉, 그럼 다녀오셔야죠.”
린다는 자신의 말을 의심 하나 하지 않고 믿는 아델라를 보며 약간 걱정이 됐다. 사람 이렇게 잘 믿는 애는 또 처음이었다.
“아가씨는 좀…….”
“?”
린다는 아델라한테 사람 함부로 믿으면 안 된다, 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다지 친하지도 않은 아이한테 괜한 오지랖을 부리는 것 같았다.
“아닙니다.”
아델라는 궁금한 표정으로 계속 린다를 쳐다봤지만, 린다는 어서 가자며 화제를 돌렸다.
* * *
“지금 당장 가서 밝히면, 안 들으시겠죠?”
“그럴 거라 생각되네.”
“저라도 안 믿길 것 같고……. 역시 그 방법이 낫겠죠?”
“키워 주신 분을 먼저 뵙는 게 좋긴 하지만……. 괜찮겠나?”
이저드와 아델라, 둘은 심각한 표정으로 서로만 알아들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 두 분?”
린다는 이 상황이 퍽 난감했다. 기껏 아리스라는 사람을 찾으러 경매장까지 왔으면서 왜 멀찍이 떨어져서 동태만 살피고 대화만 나누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저 멀대같이 크고 덩치 있는 사람 맞죠?”
린다의 말에 아델라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런데 왜 안 만나고 멀리서 훔쳐보세요?”
둘 다 너무 진지하게 아리스를 살피기만 해서 린다는 황당했다. 이건 마치, 처음 만난 사람의 동태를 살피는 그런 움직임이지 않은가.
린다는 당연하게도 둘이 아리스라는 사람과 안면이 있는 사이인 줄 알았다. 그분, 그분 해서 당연히 아는 사이인 줄 알았지.
“저 화내도 되죠? 아니면 저 사람 만나러 가도 되죠?”
린다가 웃으면서 화를 내고 있었다. 그녀가 골목에서 나가려는 시늉을 하자, 아델라가 그녀의 팔을 잽싸게 안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대체 이러시는 이유가 뭡니까? 이유라도 압시다, 좀.”
“조금만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아델라가 린다를 잡고 매달려서 린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섰다. 덕분에 아델라한테 시간이 생겼다. 아델라는 얼른 이저드와 시선을 교환하며 린다를 놔 줬다.
“그럼, 다녀올게요.”
“예? 이건 또 무슨?”
둘이 뭔 계획을 짰는지, 아델라는 비장한 표정으로 후드를 벗었다. 후드를 벗어 던지자 드러난 그녀의 복장은 어디서 저런 걸 구해 왔는지도 모를 만큼 후줄근했다. 아델라는 거기서 끝내지 않고 자기 머리를 한껏 헝클어뜨렸다. 그리고 바닥에서 흙을 집어 신발과 얼굴에 덕지덕지 묻혔다.
“뭐 하는 겁니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린다가 황당한 표정을 아델라를 보았다.
“변장이요.”
꾀죄죄한 모습이 된 아델라는 눈빛만은 비장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허리에 둘러놨던 보자기를 풀어 돌돌 말아 품에 안았다.
“그게 뭡니까?”
“약재요.”
역시나 비장한 표정이었다. 아니, 보자기를 안고 그렇게까지 비장할 일인가.
“헤이든 경이 오면 기척을 숨기고 따라와 주세요.”
아델라는 그렇게 말하고 골목을 돌아 걸음을 재촉해서 경매장으로 향했다.
“저렇게 보내도 됩니까?”
경매장 입구를 지키는 아리스한테 향하는 작은 아이를 보며 불안했던 린다가 이저드를 보았다.
“우리 중 아리스 님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신분이 노출되지 않을 만한 사람이 아델라뿐이네. 아리스 님은 아델라한테 해를 가할 분이 아니니 괜찮아.”
이건 아델라가 낸 의견이었다. 아리스의 과거를 전부 들은 아델라가 이번 생에 어떻게 하면 그의 고통을 조금 줄일 수 있을까 고민하고 내 놓은 방법이었다. 이저드는 아델라가 걱정되기는 했지만, 언제든 검을 뽑을 거리에서 그녀를 지켜볼 수 있었기에 그녀의 뜻에 따랐다.
“헤이든 경이 오는군. 우리도 움직이지.”
가만히 아델라의 뒷모습을 주시하던 이저드가 입을 열었다. 린다는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저드를 따라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이쯤 되니, 아델라와 이저드를 모시기 위해서는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건가 싶었다.
* * *
큰 키에 다부진 체격, 길게 늘어뜨린 푸른빛 머리와 흑안을 지닌 아리스는 전생과 그다지 달라진 점이 없었다.
아델라는 전보다 더 높아진 눈높이에 목이 아팠다. 그래도 그녀는 꿋꿋하게 아리스를 쳐다보았다. 아리스는 일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어린 아델라를 힐끔 보고 시선을 돌렸다.
“저기…….”
“뭐야? 애들은 가라, 가.”
아리스와 함께 경매장 문을 지키던, 아리스보다 더 큰 키를 지닌 거구의 남성이 파리를 쫓듯 손을 휘휘 흔들었다. 남성이 대충 흔드는 손짓만으로도 아델라한테는 위협이 되긴 했지만, 그녀는 꿋꿋하게 물러서지 않았다.
“저, 아리스 님을 뵈러 왔는데…….”
아델라가 소심하게 입을 열자, 아델라를 내쫓던 이가 아리스를 돌아보았다.
“?”
드디어 아리스의 시선이 아델라한테 닿았다. 그는 전혀 누군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저, 약재상에서 심부름을 보냈는데…….”
“약재상에서? 왜 여기로?”
아리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가 이 일이 처음이라……. 주소대로 찾아갔는데, 아무도 안 계셔서요.”
“어머니가 안 계시다고?”
몸도 성치 않은 분이 어딜 간 건가 싶어 미동도 없이 서 있던 아리스가 움직였다. 그는 아델라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그럴 리가 없는데……. 적힌 주소 좀 보여 줄래?”
아리스는 아이가 자신의 덩치 때문에 무서워할까 봐 나름 최선을 다해 친절하게 물었다. 아델라는 그의 눈치를 보다가 주섬주섬 종이쪽지를 하나 꺼냈다.
“음?”
쪽지를 읽던 아리스가 인상을 미미하게 구겼다. 그건 아리스 옆에서 같이 쪽지를 보던 아리스의 동료도 마찬가지였다.
“에이, 여기 아닌데. 완전 반대잖아. 신입이라 그랬나?”
아리스 옆에서 쪽지를 같이 읽은 그의 동료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물었다. 아델라는 그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댕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쯧쯧, 약재상도 애한테 너무하네. 여기가 그런 곳이라고 해도 굳이 애를 뺑이 돌려야 했나?”
“네?”
사실 아델라는 밑져야 본전으로 주소를 아무 곳이나 적었다. 만일 의심한다면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하면 될 일이었다. 어차피 표면상의 아델라는 그저 심부름꾼이었을 뿐이다.
“너 처음이라고 똥개 훈련한 거야. 이러고 약재상 다시 찾아가면 그제야 제대로 된 주소 준다니까? 애한테까지 그런 텃세 부리고 싶나.”
아리스의 동료는 세상 말세라며 혀를 끌끌 찼다. 아델라는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좋은 방향으로 진행되는 이야기에 속으로 만세를 외쳤지만, 겉으로는 아닌 척, 몰랐던 척 눈을 더 크게 떴다.
“음…….”
아리스도 동료의 말에 동의하는지 인상을 구겼다. 그는 곤란해 보이는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지금 내가 자리를 비울 수가 없으니 주소를…….”
“야야, 다녀와. 저 쪼끄만 애가 멀리 다녀오느라 얼마나 고생했겠냐? 여기서 가까우니까 잠깐 데려다줘도 되겠다. 주인이 찾으면 화장실 갔다고 해 줄게.”
‘아니! 당신은 제 천사님이신가요?’
아델라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아리스의 동료를 보았다. 어린아이의 존경스러운(?) 눈빛을 받은 그는 한껏 목에 힘을 줬다.
“아, 그럼 나만 다녀올게. 넌 아이를 보고 있…….”
“아, 안 돼요!”
아리스는 또 돌아다녀야 할 아델라가 안쓰러워서 자신만 잠깐 다녀오려고 했지만, 아델라는 보자기를 품에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
‘헛! 무조건 같이 가야 한다는 생각에 그만.’
어차피 아델라가 이곳에서 기다려도 이저드와 린다, 헤이든이 있었기 때문에 아리스의 집은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습관적으로 스스로 알아내야만 한다고 생각해 버렸다.
아델라는 의심받을까 싶어 두 남자의 눈치를 보았다. 그런데 두 남자는 아델라의 외침을 다른 쪽으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아…… 혹시 심부름을 제대로 못 해서 보수를 못 받을까 봐 그래? 그거라면 아리스가 잘 말할 거야.”
“아, 제가 처음으로 받은 일이라 제대로 끝내야 한다는 생각에 그만. 아리스 님을 의심해서 그런 건 아니에요, 절대. 여기…….”
아델라는 정체를 의심받지 않기 위해서는 이쯤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조심스레 보자기를 아리스한테 내밀었다.
“저…….”
그런데 왜인지 아리스가 보자기를 받지 않았다.
‘서, 설마 이상한 낌새를 느낀 건가? 의심이 엄청 많다고 했는데!’
아델라는 차마 아리스의 눈을 바라보지 못하고 애꿎은 보자기 끝만 쳐다보았다.
‘어쩌지, 신호를 보내야 하나?’
“이…….”
아델라는 손끝을 떨지 않으려 최대한 노력하며 아리스보다 먼저 입을 연 아리스의 동료를 올려다보았다.
“이, 이 드문 생명체는 뭐지? 야, 이씨……. 나 여태 내 딸 빼고는 내 뒤통수 후려갈기는 애들밖에 못 봤는데!”
“그 애는 네가 아버지니까 그렇지.”
어찌된 일인지 아리스의 표정은 부드러워 보였고, 아리스의 동료는 아예 감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리스의 동료는 당장에라도 자기 딸한테 아델라를 소개해 주고 싶은 표정이었다.
“꼬마야, 너 이름이 뭐니?”
아리스의 동료는 거대한 몸집을 꾸깃꾸깃 구겨서 쪼그려 앉아 아델라와 눈높이를 맞췄다.
“아델라요.”
“어이구, 이름도 예쁘네. 네 엄마가 널 이렇게 꼿꼿이 키우느라 고생 많으셨겠다.”
그는 마치 자신의 딸을 칭찬하듯이 아빠 미소를 지었다.
“그 큰 몸으로 들이대면 애가 놀라, 다녀올게.”
아리스는 자주 겪던 일인지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는 아델라한테 손을 내밀었다. 아델라는 그의 손을 물끄러미 보았다.
‘뭐지? 같이 가자는 건가? 속으신 건가?’
“뭐 해, 꼬마야. 쟤 저러다 마음 바뀌어. 얼른 가.”
아리스 동료의 말에 아델라는 냉큼 아리스의 커다란 손을 잡았다. 그녀는 자신을 도와 준 아리스의 동료를 보고 환하게 웃어 주었다.
‘은인님, 고마워요! 이 은혜 잊지 않을게요!’
아델라는 아리스의 동료한테 작게 손을 흔들어 줬다. 정말로 나중에 사례라도 해야 하나 싶을 정도의 조력자였다. 이름 모를 동료님, 이 모든 영광을 당신께.
* * *
아리스 동료의 말대로 아리스의 집은 경매장에서 꽤 가까웠다. 낡고 작은 집들이 빽빽하게 늘어선 큰 거리를 지나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자, 거기에는 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작은 집들이 있었다. 이런 곳은 주소를 알고 있다고 해도 찾아오기 힘들 것 같았다. 아리스가 안내해 줘서 천만다행이었다.
좁은 골목을 몇 번을 꺾어 들어가다 보니 어느새 그의 집 앞에 다다랐다. 아리스는 아델라의 손을 놔 주고, 집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안에서 작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집중하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약한 목소리였다.
“네.”
“어머니, 저예요.”
그렇게 말하고 조금 더 시간이 흘렀을까? 굳게 닫혀 있던 나무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집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머리가 하얗게 센 중년의 여성이었다. 병상에 오래 누워 있어서인지 근육 하나 없이 마른 몸이었다.
“아리스? 네가 왜 이 시간에?”
여성은 아리스를 올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그의 옆에 웬 못 보던 소녀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은 아델라를 의아한 눈으로 보았다.
“잠시 들렀어요. 약재상에서 약재를 보냈는데 이 아이가 심부름은 처음이라 길을 헷갈렸대요.”
“그래? 이쪽이 처음인 사람한테는 복잡하긴 하지. 들어와.”
여성이 부드럽게 웃으며 천천히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아리스가 그녀를 잡았다.
“아, 아니요. 죄송해요. 전 바로 다시 돌아가야 해서…….”
아리스가 난처하게 웃자, 여성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아리스한테서 시선을 떼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아델라를 보았다.
“그럼 아가씨라도 들어와서 조금 쉬었다 가요.”
여성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아델라는 홀릴 뻔했다. 아델라가 집 안으로 한 발짝 떼려다 말고 아리스를 보았다. 아리스는 아델라의 시선을 느끼자 들어가 보라며 웃어 주었다.
“그,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아델라는 보자기를 안고 냉큼 집 안에 발을 들였다. 아델라는 아리스가 문을 닫고 가는 것을 곁눈질로 보았다.
“거기서 뭐 하세요? 누추하지만 여기 앉아요.”
아델라가 멀뚱히 문 앞에 서 있자 여성이 그녀를 불렀다.
“아! 네.”
아델라는 그녀의 부름에 얼른 식탁에 가서 앉았다.
집 안은 밖에서 본 것보다는 깊었지만, 둘이 살기에는 조금 좁은 크기였다. 문을 열자마자 거실 겸 주방으로 보이는 공간이 있었고, 주방 바로 옆에 작은 침대가 놓여 있었다. 이불이 젖혀져 있는 것을 보니, 방금까지도 여성이 누워 있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침대 뒤로 작은 방 하나가 딸려 있었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였는데, 아무래도 창문이 없어서 그래 보였다. 이곳에서 창문이라고는 집 문 옆에 딸린 작은 창이 전부였다.
“차, 마셔요? 아니면 따뜻한 우유가 나으려나?”
“전 뭐든지요! 그냥 우유도 좋아합니다.”
사실 물만 줘도 감지덕지했다. 아델라는 혹 그녀가 따뜻한 차나 따뜻한 우유를 만들다가 어디 다치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아가씨가 손님인데 미지근한 걸…….”
“아, 아니, 괜찮습니다. 저 방금까지 길 잃고 헤매느라 목이 말라서요. 그리고 말 놓으셔도 됩니다.”
아델라가 보자기를 식탁 위에 두고 공손히 말했다.
“그래도 될까?”
“넵.”
여성이 인자하게 웃으며 물었고, 아델라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잠시만 기다리렴.”
그녀는 시종일관 부드러운 분위기에다 예의를 갖춰서 아델라를 대했다. 그에 아델라는 눈을 도르륵 굴렸다. 생각해 보니, 생판 처음 본 남을 그녀가 집에 들일 이유가 없었다.
‘뭐지? 내가 그렇게 힘들어 보이셨나? 아니면, 아이들을 원래 좋아하시나?’
탁.
아델라가 일이 너무 술술 풀려 불안한 마음에 이런저런 의심을 할 때, 여성이 아델라 앞에 머그잔과 작은 접시를 내밀었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게 별로 없네. 사탕이 조금 있어서 가져왔어.”
“이걸로도 좋아요. 감사합니다.”
일단 아델라는 그녀가 준 머그잔을 집어 들었다.
‘이거…… 마셔도 되는 거겠지?’
아델라는 잠시 고민하다가 설마 죽기야 하겠냐며 환하게 웃으며 우유에 입을 댔다. 아델라가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홀짝홀짝 우유를 마시자, 건너편에 앉은 여성이 짙게 웃었다.
“제대로 교육받은 아이는 아닌가 보네.”
여성의 목소리가 아까와는 달리 딱딱하게 굳었다. 더불어 그녀의 분위기도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여성의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 아델라는 우유가 든 컵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좀만 참을 걸……. 뱃속에 거지가 들었니. 이걸 준다고 냉큼 먹게.’
물론 그녀는 아리스를 키워 준 사람이었고, 아델라는 그와 아군이었기에 평소보다 경계를 낮췄던 것도 허무하게 당한 이유 중 하나였다. 또한, 20년 전의 일이라 그녀가 단번에 아델라의 정체를 파악하고 경계할 줄도 몰랐다.
“몇 주 전에 약을 끊었어. 약재상한테 단단히 일러 뒀지. 아리스는 모르지만.”
‘아효, 그래서였구나. 근데 왜 약을 끊으셨지?’
아델라는 체념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여성과 시선을 마주했다. 여성은 어딘지 아델라를 꿰뚫어 보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 눈빛에 살짝 오한이 들었지만 아델라는 여성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속여서.”
“죄송할 건 없고, 누가 보냈는지만 말해. 그럼 해독약은 주마.”
‘……음? 으응? 잠깐, 나 또 독 먹은 거니?!’
전생에도 그러더니, 이번 생에도……? 어쩌다 독약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휴…… 어쩔 수 없네요.”
아델라는 한숨을 푸욱 내쉰 뒤, 품에서 쪽지 한 장을 식탁 위에 펼쳤다.
“이렇게 하고 시작하죠. 제가 말하다가 죽으면 큰일이니까요.”
‘종이? 뭘 하겠다는 거지?’
여성은 의아한 눈빛으로 아델라가 펴 놓은 종이를 보았다.
종이에는 알 수 없는 이상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여성은 짐작조차 하기 힘든 문양이었다. 하지만 곧장 여성의 궁금증이 풀렸다. 아델라가 바로 설명을 덧붙였기 때문이다.
“마법진이에요, 흑마법사들이 쓴다고 알려진.”
“흑마법사?”
흑마법사라면 여성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어떤 흑마법사가 제베르 왕을 저주하고 죽었다는 이유로 죄 없는 흑마법사들까지 전부 죽어 나간 사건이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자세한 이야기는 사라지고 마녀사냥으로만 불렸지만, 그 이면에는 암투가 존재했다.
사실, 이 사건에서 흑마법사는 단지 명분에 불과했다. 이때 왕의 반대파였던 귀족들의 아내나 딸들이 흑마법사로 지목당해 대거 죽어 나갔다. 한마디로 숙청이었다. 그것도 죄 없고 약한, 이 일과는 전혀 무관한 이들을 붙잡아서.
직접 가문의 수장을 치면 반발이 심할 게 뻔했다. 그래서 왕실은 귀족들의 어린 딸과 아내를 죽여 본보기를 보였다. 왕권에 해가 되는 세력을 압박하고 위협하는 데에 가족을 쥐고 흔든 것이다. 악랄하게도.
그때의 충격으로 정치계에서 사라져 은둔 생활을 하게 된 귀족들이 많아졌다. 왕의 계획이 성공한 것이다. 왕을 막을 이들이 전부 사라졌기 때문에 그 뒤로 왕의 폭정은 날로 심해졌다.
“제베르 왕국에서 흑마법사들은 씨가 말랐을 정도로 대부분 죽은 거로 아는데 나한테 이렇게 밝혀도 되나? 아니면 날 협박하는 건가?”
“아니요. 이 상황을 설명하려면 밝혀야 해서요.”
“무슨 상황? 네가 내 정체를 아는 것?”
여성의 물음에 아델라는 결의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두 분의 정체를 아는 건 누군가가 보내서가 아닙니다. 아리스 님께서 미래에 말씀해 주셨습니다.”
“……뭐라고?”
여성은 자기가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다시 물었다. 거기에 아델라는 강단 있는 눈빛으로 쐐기를 박았다.
“전 이 마법진을 이용해서 미래에서 왔습니다. 왕자님과 케스너 후작 부인을 보호하기 위해서.”
말을 내뱉고 보니, 제정신이 아닌 아이로 보이지 않을까 걱정됐다. 이건 누가 들어도 믿지 못할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
‘안 믿으면…… 마법진을 또 써야 하나.’
자신의 힘이 흑마법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 덕분에 아델라는 힘을 쓰는 데에 전보다는 거부감이 덜했다. 하지만 자신이 힘을 쓰면 이저드를 끌어들이게 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예전처럼 쉬이 ‘회귀하면 되지, 뭐.’ 하는 마음을 가질 수가 없었다.
이저드는 자신은 상관없다고 했지만, 아델라는 괜히 이저드까지 고생길에 끌고 들어가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게다가 회귀한다고 이번처럼 6년 전으로 돌아오리라는 확신도 없었다.
‘역시 회귀는 최후에 최후로 미뤄 두자.’
“믿기 힘드시겠지만, 어떻게 된 건지 다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아델라는 어색하게 웃으며 여성을 보았다.
“해독약 먼저 먹고 시작하면 안 될까요?”
아델라는 최대한 소리를 낮췄다. 밖에 안 들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이저드한테 신호 비슷하게 소리를 내기로 미리 맞춰 뒀지만, 지금은 큰소리도 내면 안 될 것 같았다.
독약을 먹어 쓰러진 모습을 또 보여 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해독약부터 받은 다음 부를 생각이었다. 조금만 늦으면 피를 토할 것 같은 예감이…….
‘응? 근데 원래 독약의 효과가 이렇게 늦게 나타났나? 독약마다 다른 건가?’
거의 바로 효과가 나타났던 예전과 달랐다. 그땐 속도 울렁이고, 피까지 토했는데, 지금은 아무렇지 않았다.
의아해하던 아델라의 시선이 여성의 시선과 부딪혔다. 아델라는 얼른 애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신이 매우 무해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최선을 다해 눈빛을 보냈다.
“증거는?”
‘역시 안 통하나…….’
그녀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라는 건 아델라도 알고 있었다. 과거, 아리스 어머니의 보좌를 도맡아 아리스 어머니의 일을 함께 처리할 정도로 뛰어난 인재였으니 쉬이 넘어오지 않을 것은 예상했다.
“그럼 지금 부인께서만 아는 이야기를 해 보죠.”
아델라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그녀를 보았다.
“아리스 님 모르게 기록해 놓은 일기가 있죠?”
“떠보는 건가?”
여성이 아무 표정 없이 물었고, 아델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제가 미래에서 아리스 님께 들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방법의 하나라서요. 현재는 후작 부인께서만 알고 계신 거니까요. 그리고 또 하나는…… 국새? 아리스 님께서 태어나기도 전에 선왕 전하께 받은 그 국새요.”
아델라는 자신감 있는 말투로 거기까지 이야기하자, 드디어 여성의 표정이 조금 바뀌었다. 그녀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걸 아리스 님께서 너한테 말하게 된다고?”
“정확히는…… 제스트윈 공작 각하께요.”
“공작 각하? 그럼 넌 제스트윈 공작 각하의 명을 받고 온 건가?”
“음…… 현재는 아닙니다. 미래에 공작 각하셨던 분이죠.”
여성의 물음에 아델라는 성실하게 답했다. 여성은 고민에 빠진 듯 입을 다물었다.
“이 정도면, 해독제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아델라는 조금 기대에 찬 눈으로 여성을 보았고, 여성은 아델라를 묘한 눈으로 보았다. 아델라는 오랜 여성의 침묵에 의아함을 느꼈다. 여성은 아델라를 보며 천천히 눈웃음 지었다.
“이미 눈치챘을 줄 알았는데.”
여성의 시선에 아델라가 눈을 도로록 굴렸다.
“예?”
“여기서 독약 구하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인 줄 아니? 있다고 해도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게 전부인 우리 같은 사람들한테는 사치야. 암거래로 독약을 찾는 이들은 대부분 부호지.”
여성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델라는 그녀의 말에 안도하며 어깨에 힘을 뺐다.
“휴……. 다행이에요. 하마터면 또 반복할 뻔했네요.”
“여러 번 반복했다는 듯이 말하네. 아직 널 믿는 거 아니야. 그저 네가 훈련받은 암살자가 아니라는 걸 확신했기 때문에 말해 준 거지.”
그녀의 말대로 아델라는 암살자라기에는 허술함의 극치였다. 표정 하나도 숨기지 않았고, 꾸민 것 같은 행동도 딱히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에게 모든 걸 다 말해줄 수 있다는 표정과 행동을 보였다. 그랬기에 여성은 경계를 조금 푼 것이었다. 무엇보다 국새에 관한 내용은 조금 믿어 볼 만했다.
“그리고 케스너 후작가가 사라진 지가 언젠데, 후작 부인이라니. 그렇게 부르지 마. 난 그렇게 불릴 이유가 없어.”
“하지만…….”
단호한 그녀의 대답에 아델라는 힐끔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케스너 후작이 살아 계시는데, 없어졌다고 하기에는…….”
아델라가 난감하게 웃자, 여성은 이번에는 정말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누가 살아 있어?”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여성의 말끝이 조금 떨렸다.
“케스너 후작님이요. 후작 부인의 남편 되시는 분…….”
“그이가 어떻게? 어디에? 분명 20년 전에, 그날 죽었어. 난 그렇게…… 들었는데…….”
여성은 아델라를 만난 이후 처음으로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네. 그날, 죽은 걸로 되어 있죠. 후작 부인께서 아리스 님을 데리고 도망가던 날. 그런데 살아 계십니다. 후작 부인만큼 매우 조용히, 꼭꼭 숨어 계십니다. 제베르 수도에.”
“수도? 어떻게…….”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죠. 후작가 사람들의 도움으로 신분을 속이고 수도에 머물고 있습니다. 미래에는 그분 덕분에 잠적한 중앙 귀족들의 뜻을 모을 수 있게 되고요.”
아델라는 술술 잘도 말했다. 사실 말하고 있는 그녀 자신도 아직도 이 모든 게 믿기지 않았다. 아리스와 이저드가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 보구나 하고 이해할 뿐이었다. 처음 아리스의 정체를 듣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른다.
“그게 진짜야? 장담할 수 있어?”
“제 미래를 걸고 장담할게요. 전 분명히 그렇게 들었습니다. 근데 정확히는 저도 잘 몰라서…….”
그렇게 말하며 아델라는 힐끔 문 쪽을 쳐다보았다. 시간이 지체된 만큼 밖에서도 초조해 할 것 같았다.
“더 확실히 아는 분을 모실까요?”
아델라가 어색하게 웃자 후작 부인은 밖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누가 또 있구나.”
“네, 함께 왔거든요. 미래에 아리스 님과 모든 계획을 같이 짜신 분이요.”
아델라는 솔직하게 말했고, 케스너 후작 부인은 다시 말이 없었다. 그녀는 아델라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아델라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바라보자, 후작 부인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래에는 제스트윈 공작 각하셨고, 현재는 아니라면…….”
문 앞에 다다른 케스너 후작 부인은 잠근 장치를 풀었다.
“제스트윈 공작가의 도련님이겠군요. 성함이…… 이저드 제스트윈, 이었던가요?”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이저드는 케스너 후작 부인을 만날 수 있었다. 후작 부인은 아직 어리지만, 자신의 키와 맞먹는 16살의 이저드를 보았다. 이저드는 경계하는 눈으로 저를 보는 그녀한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상의할 일이 생겨,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 왔습니다. 기별도 없이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공작가의 도련님께서 이런 누추한 곳까지 오신 이유가 궁금하긴 하네요. 들어오세요.”
후작 부인은 흔쾌히 길을 터줬다. 이저드는 안쪽으로 들어오며 아델라를 살폈다. 그녀는 이저드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이저드가 고개를 저어 막았다.
탁.
이저드는 린다와 헤이든을 데리고 아델라 옆으로 섰고, 셋 다 들어온 것을 확인한 케스너 후작 부인은 문을 굳게 닫았다.
“그럼, 들어 볼까요? 미래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기에 절 찾아왔는지.”
케스너 후작 부인이 천천히 다가와 다시 식탁에 앉자, 이저드가 로브의 후드를 걷으며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믿기진 않지만 두 분은 시간을 되돌려서 여기까지 오셨고, 덕분에 각하는 돌아가시지 않게 됐다. 그리고 앞으로의 벌어질 일들을 막으려고 어릴 때 죽은 걸로 알려진 첫째 왕자님을 찾으러 오신 거라고요?”
어쩔 수 없이 하루 묵게 된 숙소에 들어선 린다가 여태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하며 물었다.
“맞네.”
“근데, 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건 또 무슨 말이에요? 왕비님의 아들인 건 맞고요?”
린다가 의아하게 묻자, 이저드가 아닌 헤이든이 입을 열었다.
“돌아가신 왕세자 저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헤이든은 자신이 아는 이야기가 나와서 무심코 끼어들었다. 린다가 그한테 시선을 옮겼다.
“응? 그건 무슨 소리야?”
“아, 그……. 지금 왕이 왕자였던 시절에 당시의 왕세자 저하를 죽이고 그 자리에 올랐잖아.”
“그건 알아.”
린다는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이 헤이든을 쳐다보았다.
“딴 건 밖으로 안 알려졌나?”
헤이든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뭐가 안 알려져?”
“아니, 제베르 귀족들 사이에서는 이미 암암리에 도는 소문이라.”
“그러니까, 뭐가.”
린다가 싱긋 웃으며 물었다. 헤이든은 이 사건을 말해도 되는지 망설이며 힐끔, 이저드를 살폈다.
“경이 아는 한에서 말해 주게. 괜찮아, 여기서 듣는 이는 우리뿐이지 않나.”
이저드의 허락이 떨어지자 헤이든은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왕세자 자리를 차지한 다음에, 형의 부인을…… 뺏어 억지로 왕비 자리에 앉혔다는 이야기.”
“난 그런 이야기 들어본 적 없는데.”
이웃 나라에는 왕비가 어느 가문 출신인지도 알려지지 않았고, 그저 왕의 즉위와 함께 왕비로 책봉된 여인이 있다고만 알려져 있었다.
“왕실에서 막았겠지. 왕세자를 죽여 그 자리에 오른 것도 원성이 자자했는데, 세자빈을 강제로 취한 것까지 밝혀지면 즉위식은 거행되지도 못 했을걸. 지금은 망했지만, 옛날에는 그래도 왕권을 견제하는 세력들이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왕이 옛날에 왕세자 저하를 죽이고, 당시의 세자빈 저하를 강제로 자기 부인으로 만들었다는 거잖아?”
헤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 왕비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아리스 님은…… 설마 죽은 왕세자 저하의 자식?”
“아마도? 난 그렇게 생각했어.”
헤이든은 어깨를 으쓱였다. 궁금증을 못 견뎠던 린다와 헤이든의 시선이 이저드한테 닿았다. 둘의 눈빛을 받은 이저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네. 현재 왕비는 아리스 님의 어머니가 아니야.”
이저드의 대답은 헤이든도 모르던 일이라 눈을 크게 떴다.
“예? 아니라니요?”
“아무도 모르게 중간에 왕비님이 바뀌었네. 아직도 대부분은 바뀐 왕비가 첫 왕비님이라 알고 있지.”
“예에?”
헤이든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이건 그 역시 전혀 모르고 있는 이야기였다.
“어쩌다가요? 왜 아무도 모르죠? 또 왕실 놈들이 덮은 사건이 있습니까?”
헤이든과 같은 마음이었던 린다도 궁금증 가득한 표정으로 이저드를 보았다. 이저드는 잠시 어디서부터 말해 줘야 하나 생각했다. 그리고 이내 입을 열었다.
“세자빈께서는 이미 아리스 님이 죽은 왕세자 저하의 자식임을 알고 계셨네. 왕세자 저하께서 돌아가시기 바로 몇 시간 전에, 세자빈께서는 자신이 회임한 사실을 알게 되시거든.”
“그런데요?”
“그래서 숨기는 방법을 택했지. 왕손을 살려야 했으니까. 죽은 왕세자의 자식을 회임한 사실이 알려지면 아이는 물론, 세자빈 저하의 목숨도 장담할 수 없었네.”
그녀를 진맥했던 의원은 왕세자의 편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고, 그녀의 곁에서 회임 소식을 함께 들은 케스너 후작 부인은 완벽하게 그녀의 편이었다. 그랬기에 숨길 수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5년을 숨겼다. 자신이 사랑했던 이를 죽인 사람과 한 이불을 덮고, 아이만을 위해 버텼던 시간이 자그마치 5년이었다.
언젠가 아이가 자라 이 나라를 이어받았을 때, 출생의 비밀을 전부 밝히고 왕한테 복수해 주리라. 자신이 겪은 고통보다 더한 고통을 선사해 주리라. 그 생각만으로 그녀는 숨죽여 살았다.
그동안 역겨운 그의 얼굴을 보면서 웃어 주었고, 치가 떨리는 모욕감을 느끼면서도 아닌 척 태연하게 살아왔다. 권력에 눈이 멀었다는 소문에도 괜찮았다. 아이만 무사하다면 그녀는 아무것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이 물거품이 된 건, 아리스에 관한 소문이 돌면서부터였다.
“아리스 님이 다른 사람의 아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가장 먼저 그 소문을 들은 왕은 왕비님을 죽였네. 그리고 왕은 자신한테 치욕적인 일이라며 그 사건 자체를 지웠어. 왕비의 자리에 다른 여성을 앉혀 놓고 첫 번째 왕비라 우기며.”
“그래서 밖으로 알려진 게 없는 거군요. 첫째 왕자가 5살도 되기 전에 병에 걸려 죽었다는 것도 거짓말이고요.”
린다의 말에 이저드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헤이든은 충격 받은 표정으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허…….”
그는 자신이 알고 있던 왕궁의 일이 빙산의 일각이라는 걸 깨달았다. 왕실 놈들이 얼마나 악의적으로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지우고, 없애고, 조작해 왔는지 이제 알았다.
“그럼 왕은…… 자기 형과 형수님한테 한 것도 모자라서, 우리, 우리…….”
린다는 이를 악물었다. 아직도 그분의 이름을 입에 담으려고 하면 이렇게나 슬프고, 아팠다.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가슴 한편이 무거워지는 그 이름을, 린다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었다. 그저 후회하며 이를 갈 수밖에.
“경이 못 지켜 낸 게 아니네. 죄책감에 사로잡히지 말게.”
이저드는 린다가 과거의 일을 되뇌고 있다는 것을 알고,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이저드와 공작 부인이 잡혀갈 때, 그 누구도 왕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왕의 앞을 막는 것은 죽겠다고 목을 내놓는 것과 같았으니까.
당시, 그 상황에서 왕을 막을 수 없는 건 당연했다. 그럼에도 다들 자신들이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빠져 있었다. 누가 봐도 죄인은 따로 있었는데, 애먼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었다.
“어머니를 지키려 한 사람 중에 그 누구도 잘못한 사람은 없네. 그러니 스스로를 자책하지 말게.”
그의 위로에 린다는 이저드가 시간을 돌렸다는 사실이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투는 물론, 생각하는 것도 많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원래 이저드가 차분한 편이긴 했지만, 어머니의 일에 있어서 이렇게 침착하게 대응할 수 없었다. 아니,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공작 부인이 병이나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신 것도 아니고, 한 사람에 의해 철저히 유린당해서 돌아가신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이성을 붙잡을 수 있는 이는 몇 없었다. 아무리 공작가 후계자라고 하여도 고작 16살이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고, 누군가를 생각할 여유를 가지기는 힘들었다.
아마도 이저드가 시간을 되돌리기 전에 모두 겪은 일이라서 이렇게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린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미래에서 시간을 돌려 돌아오셨다고 했죠.”
“그래.”
“각하께 말도 안 하고 이곳에 온 이유도 있고요.”
이저드는 자신의 옆에 앉은 아델라와 잠시 시선을 맞췄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유, 이제 말씀해 주십쇼. 무슨 이유든지 따르겠습니다.”
린다는 이저드의 말을 모두 믿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저드는 분명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었다. 아까 케스너 후작 부인과의 대화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이저드가 직접 말해 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저도 그 계획이 뭔지 모르겠지만, 동참하겠습니다.”
헤이든도 손을 들어 말했다.
“전 예전부터 그놈이 잘 살고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요.”
헤이든은 공작가에 위해를 가하려는 왕을 매우 싫어했다. 왕인데도 불구하고 호칭 상관 안 하고 이놈, 저놈 하는 것만 봐도 헤이든이 왕을 어찌 생각하는지 알만했다. 자신이 모시는 분이 조용히 있으니 가만히 있었던 거지, 사실 머릿속에는 벌써 수백 번 암살 시도를 하고도 남았다.
“대충 눈치챘겠지만, 아리스 님이 합류하게 되면 아버지를 설득할 거네.”
그전에 ‘아리스가 합류한다면’이 전제되어 있어야 하지만.
“그리고 많은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거네.”
“제자리라면 어떤……?”
헤이든이 의아하게 물었다.
“가장 처음 해야 할 일은 국새와 그 국새를 물려받은 후계자를 본래의 자리로 돌려놓는 일이네.”
선왕은 죽기 전까지 끝끝내 왕세자를 죽인 왕자를 자신의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노쇠하고 힘이 없어 왕자의 협박에 어쩔 수 없이 선위하게 되었지만, 왕세자라면 당연히 알아야 할 왕실 비밀에 관해서 선왕은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았다.
그는 선위하면 당연히 차기 왕에게 물려 줘야 할 국새조차도 빼돌렸다. 그럴듯한 다른 도장을 만들어 왕자한테 물려주고, 진짜 국새는 무덤까지 가져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국새가 현재 케스너 후작 부인의 손에 있는 이유는, 선왕이 죽기 직전 아리스의 어머니가 그를 찾아가 아리스의 비밀을 털어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선왕이 죽기 직전에 아무도 모르게 아리스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왕손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그건 아리스 님의 뜻에 달렸네.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 거야.”
이저드는 아리스가 얼마나 격분할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겠죠. 20년 넘게 정체도 모르고 살아왔는데, 갑자기 왕자라고 하면 누가 믿어요. 믿는다고 하더라도 제정신은 아니겠죠.”
“그래서 케스너 후작 부인을 먼저 만난 거네. 그분만이 유일하게 아리스 님을 잡아 주고 막아 줄 수 있어.”
전생의 아리스는 후작 부인이 죽은 후에, 그녀가 남긴 일기를 읽고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다.
후작 부인이 죽은 후에는 아리스를 막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전생의 그가 분노에 몸을 맡기고 살아갈 때, 그를 잡아 줄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긴 하겠네요. 자기를 키워 준 사람의 손길을 뿌리치기는 힘들죠. 그런데, 저희한테는 과연…….”
린다가 미간을 미미하게 구겼다.
아픈 후작 부인이 아리스를 잡는다면 아리스는 잡히겠지만, 과연 이저드한테까지 그럴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이저드한테 화를 풀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화를 낸다면 화를 내도록 두게. 다만, 수도로 향하려고 한다면 막아야지.”
전생에 수도로 향한 그는 뭇매를 맞고 쫓겨난다. 그리고 그 이후 일어나는 일들을 생각하면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케스너 후작 부인한테 잘 말해 두긴 했지만 혹시 모를 일이니 대비할 생각이었다.
이저드와 아델라, 린다, 헤이든은 케스너 후작 부인과 무사히 잘 이야기가 끝나길 바라며 아리스를 기다렸다.
* * *
아리스가 찾아온 건 모두가 잠든 새벽이었다. 막 동이 틀 무렵, 이저드와 헤이든이 잠든 방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잠귀가 밝은 이저드는 이미 깨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가 문을 열어 주자 아리스는 다짜고짜 이저드의 멱살을 잡아챘다.
“어어어? 저기, 저기요!”
헤이든이 놀라 아리스한테 다가서려고 했다. 그러자 이저드가 손을 들어 헤이든을 막았다.
“어머니한테 무슨 말을 지껄인 겁니까.”
아리스가 이를 갈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눈빛은 분노를 갈무리하지 못하고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몸은 성치 않으셔도 정신은 온전하셨던 분입니다.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아리스는 케스너 후작 부인이 털어놓은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왕세자, 세자빈, 왕, 왕손, 왕자, 모함, 국새 등등.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
아리스는 혼란스럽고 울컥거리는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왜 이런 사실을 자신에게 20년 동안 숨긴 건지 따지지도 못했다. 숨겨서 미안하다며 하염없이 울던 후작 부인 때문에.
“후작 부인께서는 여전히 온전하십니다. 아리스 님도 아시다시피 부인은 강하신 분이죠. 그런 분이 제 한마디로 좌지우지될 리 없습니다. 후작 부인 스스로 모든 사실을 고백할 때라고 판단하신 겁니다.”
“그쪽이 내 어머니에 대해 뭘 안다고…….”
이저드의 멱살을 잡은 아리스의 손이 떨렸다.
사실 그도 알고 있었다. 그저 인정할 수 없었을 뿐이다. 어머니라 믿어온 사람이 어머니가 아니었고, 신분도 전혀 달랐다. 자신이 속해 왔던 세상이 완전히 뒤집히는 순간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어머니라 믿었던 존재가 자신을 아리스 님, 이라고 부르자 가슴이 너무 답답했다. 20년을 가족이라 믿고 살았는데, 어머니는 아닌 듯싶어서. 이렇게 한순간, 관계에 선이 그어지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당신 때문에……. 그쪽이 갑자기 나타나서…….”
아리스는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이저드가 나타나지만 않았다면 평화롭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 버렸다. 물론 이저드의 탓이 아님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아리스는 현재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절 원망하시고 싶으시면 그렇게 하십쇼. 얼마든지 원망하셔도 좋습니다.”
그로 인해 아리스가 당시와는 다른 선택을 한다면 이저드 일행이 이곳에 온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한 거였다.
전생에 아리스는 후작 부인이 죽은 후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어 왕을 죽이러 수도로 향한다. 물론 당연하게도 왕의 머리카락도 구경하지 못하고 문지기들한테 뭇매를 맞아 쫓겨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오직 복수만을 위해 분노에 몸을 맡긴 그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펜베르크 성에 신분을 속이고 들어온 것도, 비슷한 상처가 있는 이저드를 부추기면 함께 왕의 목을 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일이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복수의 대상이 허무하게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그에 아리스는 삶의 목표를 잃게 된다. 왕을 죽이는 게 그가 사는 이유였는데, 그 목표가 사라져 버리니 삶을 살 의지도 함께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가 무너지는 순간을 함께 했던 이가 바로 이저드였다. 아리스가 무너지려는 순간에 그를 잡은 것도 이저드였다. 그래서 이저드는 들을 수 있었다. 아리스가 살아온 세월에 관해서.
“이것으로 아리스 님의 마음이 조금 나아진다면, 저한테 충분히 화 푸십쇼.”
아리스가 살아온 길을 잘 아는 이저드는 이 정도로 끝나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리스는 자신보다 한참은 어린데도 의연한 이저드를 보며 천천히 손에서 힘을 뺐다. 자신보다 훨씬 어린 이저드를 잡고 무슨 짓을 한 건지 슬슬 상황이 파악됐다. 상대방이 차분하니, 혼란스러웠던 아리스의 마음도 점차 안정을 찾았다.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혼란스러우실 만합니다.”
이저드는 아리스의 어떤 행동에도 흔들림 없었다. 아리스는 그런 이저드를 보며, 자신의 어머니가 왜 차분히 이저드와 대화를 나눴는지 알 수 있었다.
“저…… 두 분, 멀쩡한 테이블을 두고 왜 서서 이러십니까?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시죠.”
둘이 방 안으로 들어오는 문 앞에서 그러고 있자, 헤이든이 자리를 옮기는 것을 권했다.
아리스는 이저드를 힐끔 내려다보고 어찌할 바를 몰라 그냥 서 있었다. 아무래도 평민으로 살아온 세월이 오래돼서 갑자기 태도를 바꾸는 게 쉽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어느 귀한 집 도련님의 멱살을 잡았다는 것에 약간의 눈치가 보였다.
“앉으시죠.”
이저드는 자연스럽게 먼저 테이블로 다가가 아리스를 기다렸고, 아리스는 살짝 민망해하며 자리에 앉았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예?”
아리스가 자리에 앉자 이저드는 기다렸다는 듯이 문 쪽으로 다가갔다. 달칵, 하고 문이 열리고 아까부터 밖에서 대기하던 린다와 아델라가 보였다.
린다는 잠을 자지 않았기 때문에 옆방에서 들린 소리를 바로 들을 수 있었고, 아델라는 린다가 나가는 문소리에 잠에서 깼다.
“들어오겠나? 아니면 조금 더 자도 되네. 다시 성으로 돌아가려면 피곤할 거네.”
오늘도 무리한 아델라가 걱정됐던 이저드가 부드럽게 말했다. 아델라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저드 쪽으로 한 발짝 뗐다. 방으로 들어오겠다는 의미였다. 이저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고 그녀와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
“어?”
이저드와 함께 들어온 아델라를 본 아리스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아델라는 아리스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었다.
“아까는 죄송합니다. 속여서.”
“아니, 아닙……. 아니, 잠깐만요. 너무 어린아이를 데리고 오신 거 아닙니까? 어떻게 애를 이용해서까지!”
아리스가 황당한 눈으로 아델라를 보자, 아델라의 미소는 더욱 어색해졌다.
“제가, 아리스 님보다 10살이나 어리긴 하지만, 너무 어린 건 아닌데……. 하하.”
“10살이나요? 그럼 15살…….”
이번에는 더 놀란 표정이었다. 린다와 헤이든은 아리스의 마음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처음 아델라를 만났을 때, 이저드가 미친 줄 알았다. 아니, 무슨 쪼끄만 어린 애를 만난다고! 단순한 소꿉장난이라고 하기에는 둘이 너무 진지하게 만나고 있었다.
이저드도 어린 나이라 생각했지만 아델라를 본 순간 두 사람은 이건 감옥에 들어갈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었다. 이저드는 또래보다 컸고, 아델라는 또래보다 한참 작고 어려 보였다. 그만큼 둘이 한 살 차이 밖에 안 난다고 하기에는 외적으로 보이는 차이가 좀 컸다.
“네. 제 나이 들으면 다들 놀라던데, 제가 많이 먹고 빨리 크긴 해야겠어요. 이저드 님하고 워낙 차이가 나니 오해도 생기고.”
아델라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이저드의 소문이 이상하게 나서 좋을 게 없었다.
“많이 먹고 건강하기만 하면 되네. 키는 언젠가 자랄 거지 않은가.”
“그렇긴 하지만…….”
마음 같아서는 빨리 커서 예전과 같은 눈높이가 되었으면 싶었다. 물론 그때도 이저드가 크긴 했지만, 그래도 까치발을 들면 뽀뽀라도 할 수 있는 키 차이였다. 그렇다고 키가 크고 싶은 이유가 이저드와의 뽀뽀만은 아니었다.
‘아닌가, 그런 이유도 있나.’
…… 아예 없다고 하면 거짓말인가.
어쨌든 가장 큰 이유는, 작고 어린 몸이라 힘도 없었고 활동하기 너무 불편했기 때문이다.
“전 좀 빨리 크고 싶어요. 예전하고 너무 달라서 불편해요.”
“그건 이해하네. 나도 처음 느껴 보니 불편한 게 많더군.”
아델라와 이저드는 서로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하지만 둘의 이야기를 전혀 알아듣지 못한 아리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물어 봐도 됩니까?”
아델라와 이저드, 심지어 린다와 헤이든까지 아리스한테 시선을 돌렸다. 아리스는 넷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못 들으셨어요?”
헤이든이 물었다.
아리스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뭘 말입니까?”
“두 분이…… 미래에서 시간을 되돌려서 왔다는 이야기요.”
“…….”
아리스는 진심으로 이상한 이야기를 들은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이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인가? 하는 표정 말이다. 아리스의 시선을 받은 헤이든이 난감하게 웃었다.
“말씀 못 하실 만했겠네요.”
헤이든은 이 사실을 어떻게 이해가게 설명해야 하나 막막해서 이저드와 아델라를 보았다.
“저희가 설명할게요. 충분히 못 믿으실 수 있는 상황이니까요. 못 믿어도 어쩔 수 없지만요.”
“예. 믿지 못하신다면, 믿지 않는 대로 넘어가셔도 좋습니다. 저희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미래를 바꾸는 일이니까 말입니다. 예측도, 예상도 할 수 없죠.”
아델라와 이저드는 아리스가 앉아 있는 탁자로 다가가 앉았다.
* * *
아리스가 돌아오지 않았다.
한 번도 말없이 집을 비운 적 없던 아이가 해가 뜨기도 전에 나가서 해가 지고 껌껌한 어둠이 찾아온 지금까지도 나타나지 않았다.
‘원망하려나…….’
이저드 일행을 만나는 거면 다행이었지만, 혹, 어딘가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후작 부인은 걱정되었다.
케스너 후작 부인은 거동이 불편해 침대에 앉아 있으면서 계속해서 문을 확인하였다. 여인은 램프에 불도 붙이지 않고 아리스가 나간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후작 부인이 결국 잠에 빠져들 때가 되어서야 아리스가 집으로 돌아왔다.
아주 조용히 집에 들어선 아리스는 앉은 채로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 여인을 발견했다. 그는 작게 심호흡하고 어머니 곁으로 다가가 졸고 있는 그녀를 바르게 눕혔다.
“……아리스?”
“예.”
몸이 들썩이자 후작 부인은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그녀는 아직 졸음이 가시지 않았지만, 아리스가 돌아왔다는 생각에 허리를 일으키려고 했다.
“누워 계세요. 여쭤볼 말이 있습니다.”
그녀는 아리스의 신변의 변화를 가장 빨리 알아채고,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의 귀에 들리는 아리스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놀란 그녀는 아리스가 무사한지 눈으로 그의 상태를 훑었다. 다행히 상한 곳은 없어 보였다.
“아침에 이저드 님을 뵙고 이야기 들었습니다.”
아리스는 그들의 이야기를 완전히 믿는 건 아니었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이야기가 있었다.
“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무엇을요?”
“약을 끊은 거요.”
아리스가 미간을 구겼다.
후작 부인은 아리스가 울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으며 인상을 쓰자, 그의 손을 잡고 힘없이 웃었다.
“제 몸은 제가 잘 압니다. 이제 약이 소용없다는 것을. 더 강한 약으로도 버틸 수 없다는 것도.”
그녀의 말대로 그녀가 매번 약재상에서 받아먹던 약을 끊은 이유는 이제 약이 듣지 않기 때문이었다. 약재상에서 받은 약은 단지 몸이 망가지는 시간을 늦춰줄 뿐, 완벽히 고쳐 주는 약은 아니었다.
“다른 약이 있을지도 모르잖습니까.”
“있을지도 모르겠지요. 하지만 늦었습니다. 몸이 버텨 줄지도 모르겠고, 이제 쓴 약은 싫습니다.”
케스너 후작 부인은 부드럽게 웃으며 아리스의 손을 도닥였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이저드가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을 때, 많이 놀라지 않았다. 그저 그 뒤에 벌어지는 일들에 놀랐을 뿐이다.
“치료를 받으면……, 여기보다 훨씬 좋은 곳에 가서 치료를 받으면…….”
아리스는 목구멍이 따끔거려 뒷말을 이을 수 없었다. 어머니가 전부터 죽음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는 몰랐다. 그녀가 아픈 티를 낸 적이 없으니까.
그래서 그는 약만 잘 먹으면 언젠가 어머니가 괜찮아질 줄 알았다. 이저드와 아델라한테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이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한 이야기 중에 가장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게다가 후작 부인은 이미 자기 죽음을 예감하고 있는 듯 보였다.
“왜 말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왜 아프다고 말을 안 하세요? 이저드 님이 찾아오시지 않았으면 끝까지 숨기실 생각이셨습니까?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전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그 사실을 몰랐을 겁니다. 왜 저한테…….”
아리스는 자신을 다독이는, 뼈밖에 안 남은 어머니의 손을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아리스 님…….”
아리스가 고개를 들지 않자 걱정이 된 그녀가 아리스의 손을 꽉 잡았다. 하지만 아리스의 고개는 올라올 줄 몰랐다. 아리스는 그녀를 볼 면목이 없었다.
어머니가 그렇게 아플 동안 자신은 돈을 벌어온다는 이유로 조그만 시간도 내주지 못했고, 병이 악화할 동안 어머니가 기댈 만한 사람도 되지 못했다. 아리스가 어머니를 향해 따지듯 건넨 물음은 결국, 그대로 자신에게 비수가 되어 돌아왔다.
“저한테……. 제가…….”
얼룩덜룩한 낡은 이불 위로 작은 물방울이 하나둘 떨어졌다.
“아리스?”
후작 부인은 예를 갖춰야 한다는 것도 잊고 아리스를 불렀다. 그녀는 자기 아들이 우는 것을 처음 보았다.
어릴 때 누군가한테 맞고 들어와도 울지 않던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처음으로 눈물을 보이니 그녀는 당황스러워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리스, 아리스……. 미안하다. 내가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울지 말렴. 내가 널 위한다고, 거짓말을 했어.”
그녀는 아이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용서를 빌었다. 아무리 강한 그녀라도, 아이의 눈물에는 속수무책으로 마음이 무너졌다.
아이를 지키기 위해 하지 않은 말이 아이한테 이렇게 커다란 상처를 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아이한테 짐을 지우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그런 배려가 아이에게 오히려 더 큰 짐을 준 모양이었다.
“그러지 마세요. 사과하지 마세요. 왜 어머니가 사과하세요.”
아리스는 그런 어머니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약하게 떠는 어머니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내렸다.
“제가 죄송합니다. 정말, 정말로 죄송해요. 방금 따지듯이 물은 거, 제가 너무 바보 같아서 그랬습니다. 어머니가 기댈 사람이 되지 못한 게 죄송하고, 아무것도 몰라서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야. 네가 사과를 왜 해, 내가 숨긴 건데. 날 원망해도 돼. 그럴 수 있어. 난 널 20년 동안 속였고…….”
“아니요. 제가 원망해야 할 사람은 어머니가 아니에요.”
아직 눈물기가 가시지 않은 아리스의 눈동자에 잠시 분노가 일렁였다. 자신과 어머니를 이런 상황으로 몬 제베르의 왕만 생각하면 가슴 깊이 울분이 몰려왔지만, 어머니 앞이라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러니 저한테 용서를 빌지 마세요. 제발 그러지 마십쇼. 어머니는 저한테 최선을 다하셨어요.”
아리스는 이저드의 이야기를 듣고 빈민촌을 정처 없이 걸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과거를 되짚어 보면 케스너 후작 부인은 아리스를 키우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녀는 자신에게 왕궁의 예법과 왕자로서 배워야 할 체계적인 교육을 아주 호되게 가르쳤다. 게다가 각 나라의 언어는 물론, 고대어까지 쓰인 책도 차곡차곡 모아 읽게 하였다. 그렇게 아리스는 케스너 후작 부인한테 왕족에게 걸맞는 수준의 교육을 20년 동안 받았다.
그녀는 항상 아리스를 잘 키우는 데에만 집중했다. 자신의 인생을 아이를 위해 헌신한 것이다. 단 한 순간도 흔들림 없이.
“감사합니다. 이렇게 살아갈 수 있게 해주셔서.”
눈물짓던 아리스가 애써 미소를 지었다.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미소가 아이의 입가에 퍼지자, 후작 부인의 눈동자가 떨렸다.
“난 한 게 없단다. 난 그저 명에 따라…….”
“사명감에 절 키우신 거라도 괜찮습니다. 어머니가 없었다면, 전 이렇게 크기는커녕 저 역시 없었겠죠. 어머니가 절 이제 자식으로 대하지 않더라도 괜찮습니다. 제가, 당신을 제 어머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거면 돼요.”
케스너 후작 부인은 아리스의 절실한 마음이 느껴져 흔들렸다. 사실은 그게 아니라고, 자신도 널 아들로 생각한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하루하루 기쁘게 키웠다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그녀는 참아야 했다.
케스너 후작 부인도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바꾸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그녀는 곧 죽을 자신을 잊게 하려고 태도를 바꾼 거였다. 거리를 두고 아리스를 떠나보내려고 했다. 아리스가 미련 없이 이곳에서 떠나길 바랐다.
아리스는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았고, 앞으로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그런 자식이 가는 길에 후작 부인은 걸림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아리스 님, 전.”
“그러니까, 전 아들로서 할 일을 할 겁니다.”
케스너 후작 부인은 애써 그의 시선을 외면하며 입을 열려고 했지만, 아리스가 끼어들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치료받을 거예요. 더 좋은 곳으로 가서 더 좋은 환경에서, 더 뛰어난 의술이 있는 곳에서요.”
“치료라니?”
놀란 케스너 후작 부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저드 님께서 제안하셨습니다. 어머니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가능한 방법은 전부 해 주시겠답니다.”
“뭐? 날? 날, 데려가신다고? 이저드 님이 제안했다고?”
“예.”
“왜? 왜 그런…… 쓸데없는 데에 힘을…….”
당연히 그녀는 이곳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었다. 장거리 여행은 상당한 체력이 필요했는데 몸이 약한 그녀에게는 무리인 것처럼 느껴졌다. 조금 무리해서 떠난다 하더라도 자신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힘들 것이 분명했다. 자신의 몸은 그들에게 그저 짐에 불과했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쓸데없지 않습니다. 설사 어머니의 병을 고칠 수 없더라도, 전 어머니와 함께가 아니면 이곳을 떠날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리스는 이미 마음을 정한 것 같았다.
“아리스……. 내가 살아봤자 얼마나 살겠어. 길어야 1년이야. 날 데리고 가서 치료하는 건 시간 낭비야.”
“그 말은 어머니랑 있을 수 있는 시간이 1년 밖에 남지 않았다는 뜻이군요. 전 그 시간을 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아리스!”
어려서는 떼도 쓰지 않던 아이가 다 커서 떼를 쓰니 후작 부인은 짐짓 화난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 아리스를 중심으로 펼쳐질 이 계획에 차질이 생기면 안 됐다. 그녀는 아리스의 앞길을 막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제스트윈 공작 각하를 설득해서 이 일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어머니의 도움도 필요하답니다. 왕족들과 귀족들에 대해 가장 잘 아시는 분이라서요.”
어떻게 해야 아리스가 자신을 두고 떠날지 고민하던 케스너 후작 부인은 그의 말을 듣고 움찔하며 생각을 멈췄다.
“내가…… 필요하다고?”
“예. 전 어머니의 치료가 필요하고, 이저드 님은 어머니의 정보가 필요합니다.”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이 몸으로 내가 뭘…….”
부인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에 아리스는 어머니의 손을 잡아 쐐기를 박았다.
“딱히 뭘 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어머니가 살아계신 것 자체가 증거고, 어머니의 정보 자체가 저희의 힘이 될 겁니다.”
아리스는 강직한 눈빛으로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케스너 후작 부인은 떨리는 눈동자로 아들과 시선을 맞췄다.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자식을 거절할 수 있는 부모가 몇이나 될까. 설령 이 모든 게 어머니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자식의 거짓말이라고 하더라도 그녀는 넘어가 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 가자. 함께, 가.”
케스너 후작 부인이 희미하게 웃자, 아리스는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안 그런 척 마주 웃어 주었다. 아리스는 그녀가 자신을 위해 체념했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의 억지에 어머니가 따라 준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아리스는 어머니를 놓아줄 수가 없었다. 아직, 아직 이렇게 돌아가시게 둘 수 없었다. 그는 반드시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게 하리라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