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호상이고 싶다 4
| 목 차 |
1부 5장-2. 그녀는 지키고 싶다
2부 1장. 그녀는 찾고 싶다
2부 2장. 그녀는 보고 싶다
1부 5장-2. 그녀는 지키고 싶다
죄인을 모아놓는 감옥이 1구역 어딘가에 있다고만 들었지, 실제로 와본 적은 처음이라 아델라는 두 손이 묶여 끌려가면서도 신기하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높은 천장의 감옥은 2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건물에 들어서자 보이는 건 뻥 뚫린 천장이었다. 그 가운데 복도를 기준으로 양옆으로 2층까지 철창이 쫙 펼쳐져 있었다.
뭔가 상당히 긴장되면서도 흥미진진한 이 기분은 뭘까.
아델라는 감옥이 너무 신기해서 힐끔힐끔 주변을 살피다가 죄수복을 입은 눈빛이 매서운 사람과 눈을 마주쳤다. 아델라는 이곳에 갇힌 이들의 눈빛이 조금 신기한지 그들을 빤히 보았다.
죄수들한테 이런 말 하기 그렇지만, 생기가 느껴진다고 할까. 그게, 참…… 아이러니하면서, 과거 아델라가 포로로 끌려갔던 그때가 생각났다. 그때 그들은 절망만이 존재했는데 범죄자들이 모여 있다는 이곳과 분위기가 너무 달라 솔직히 조금 놀랐다.
‘철창 안’이라는 공간이 이렇게 다를 수도 있구나.
“혹시 죄수들 도발이 목적이야?”
“예? 아! 아니요. 그냥…….”
아델라는 얼버무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사람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없다더니…… 대담한 건 인정해 줘야겠어.’
감옥 분위기랑 범죄자들이 모여 있다고 생각하면 태연할 수가 없을 텐데 아델라는 상관없는 듯했다. 저 조그만 몸에서 어디서 그런 대담함이 나오는 건지 그녀는 죄수들과 눈이 마주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분명 처음에 아델라는 수상하긴 했지만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린다는 자신의 감이 틀린 건가 싶어 속으로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들어가.”
린다가 벤슨이 있는 감옥 앞에 멈춰 서서 아델라한테 고갯짓을 했다. 그에 아델라가 주춤하며 그녀를 보았다.
“저기…….”
“왜, 감옥에 오니 이제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실감이 나? 그래서 무서워?”
“그게 아니고…….”
‘그게 아니라고?’
린다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아델라를 보았다.
“각……, 아니, 이저드 님은…… 감옥에 오실 일 없겠죠?”
또 해명 어쩌고 운운할 모양인가 싶어 린다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와. 그분은 이런 자잘한 일까지 신경 쓸 시간 없어.”
“역시 그렇죠?”
린다는 아델라의 반응에 살짝 인상을 썼다. 아까는 그렇게 해명하겠다고 빌더니 지금은 오히려 이저드가 안 온다니까 편한 표정이었다. 종잡을 수가 없는 아이였다.
아델라는 린다의 대답을 듣고 결의에 찬 표정으로 열린 감옥 안으로 들어갔다. 쾅, 하고 아델라의 뒤로 철창문이 닫혔다. 린다는 아델라와 벤슨이 가까이 있지 못하게 아델라를 철창 가까이 묶어 두고 문을 닫았다.
“공범끼리 잘해 봐. 여기서 어떻게 하면 빠져나갈 수 있는지 같은…… 탈출 모의라던가. 절대 빠져나갈 수 없을 테지만.”
린다가 아니꼬운 시선으로 미동도 없는 벤슨을 바라보곤 둘한테서 멀어져 갔다.
“……공범?”
린다가 멀어지고 나서야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온몸이 꽁꽁 묶인 채 벽에 고정되어 있었다. 자유로운 곳이라고는 목과 얼굴 정도였다. 그런 그가 천천히 아델라와 시선을 맞췄다.
그는 한참 말없이 어린 아델라를 보았다. 한없이 어리고 약해서, 조금만 힘을 줘도 저 가는 목을 부러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벤슨의 눈빛에 일순 살기가 들어찼다.
아델라는 목 뒤가 싸늘해짐을 느꼈지만,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안 들어봐도 뻔했다.
“하……! 공범?”
벤슨은 아델라가 여기까지 오기 위해 뭘 했는지 대충 알아채고 픽 웃었다.
“어리석네, 제 발로 죽으러 기어들어 오다니. 뭐, 난 환영이지만. 네가 일찍 죽어 주면 난 좋지. 다음 생이 더 빨리 찾아오는 거니까.”
아델라는 벤슨의 비웃음에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그를 주의 깊게 관찰했다.
‘응? 이상하네. 지난 회귀 때와 같은 방법은 못 쓰는 건가? 왜 내가 죽기를 기다리는 거지?’
지난 회귀 때는 분명 벤슨만 죽었는데 회귀가 진행됐다. 그가 흑마법을 부린 탓이었다. 그가 어떤 대가로, 어떤 마법진으로, 어떤 흑마법을 부린지 모른다.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아델라는 이번 생을 포기할 각오를 하고 감옥까지 들어왔건만, 이번에는 아델라가 죽어야 한단다. 어차피 그건 평소에도 아델라가 자주 겪던 일이라 특별할 게 없었다.
“넌 이제 내가 죽든 말든 상관없지 않아? 네가 내 저주를 가져갔잖아.”
아델라는 이번 회귀 때 그가 부렸던 흑마법이 뭔지 알아내기 위해 그를 떠보았다. 대충이라도 그가 어떻게 회귀하게 된 건지 알아야 대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네 저주를? 어떤 저주인지도 모르는데, 미쳤다고?”
벤슨은 아델라를 멍청한 사람 보듯 보았다.
이미 걸려 있는 남의 저주를 가져가는 건 자신이 저주에 걸린 사람을 대신해서 희생할 때 빼고는 극히 드문 일이었다. 게다가 이미 걸린 저주를 뺏어오는 건 그 자체가 까다로운 일이기도 했고.
그 사실을 잘 몰랐던 아델라는 벤슨의 반응으로 알았다. 그가 아델라한테 걸린 흑마법을 뺏어가지 않았다는 것을.
‘그럼…… 지난 회귀 때 내 앞에 나타난 건 내 저주를 이용만 하려고? 그런데 지금은 나한테 가까이 오지도 못하니까 내 저주를 이용해 회귀하지도 못하는 거고.’
아델라는 벤슨을 살폈다. 그는 온몸이 쇠사슬로 칭칭 묶여 있었다. 그가 저것을 풀고 아델라한테 무슨 수를 쓰기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지난 회귀 때처럼 아델라한테 손을 대지 못하니, 다른 수를 생각한 모양이었다.
“넌…… 내 흑마법을 이용해야만 회귀할 수 있는 거네? 너 스스로는 회귀하지 못 하는 거고.”
그러므로 아델라가 빨리 죽는 게 지금 상황에서는 그한테 가장 좋은 시나리오였다.
자신한테 이미 흑마법이 걸려 있다면 아델라가 죽어 다시 생을 시작하는 것이 그가 이곳에서 빠져나갈 유일한 방법이었다. 저번 회귀처럼 아델라의 흑마법을 이용할 수 없다면 아델라가 죽는 쪽이 계획을 다시 처음부터 짜기에 좋았다.
“그걸 이제 눈치챘어? 느리네.”
벤슨이 아델라를 깔보듯 웃었다. 그에 아델라는 열이 받았지만, 정확히 확인하기 위해 억지로 웃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저번 방법을 못 쓰니까, 내가 죽어 줘야겠다? 너한텐 그 방법밖에 없는 모양이야. 내가 죽었다가 살아나면 너도 다시 살 테니까.”
“네가 제 발로 걸어왔는데 내가 널 이용 안 할 이유가 없지. 공범이라고 네 입으로 이야기했잖아. 그럼 공범으로 같이 죽고, 다시 눈을 뜨는 것도 괜찮지.”
아델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계획을 그녀 역시 대충은 알게 됐기 때문이었다.
둘 다 기억을 가지고 회귀했을 때, 유리한 건 벤슨 쪽이었다. 저번 생 빼고 전전생까지는 아델라의 존재 자체가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아 대처라는 것을 할 수 없었지만 앞으로는 달랐다.
전처럼 함락당하기 6개월 전으로 회귀하면 벤슨은 이미 다른 이들과 신뢰를 쌓아 놓은 상태라서 아델라를 죽이기 유리했고, 이번처럼 6년 전으로 회귀하면 미래를 아는 벤슨이 아델라를 죽이거나 아델라의 흑마법을 밝혀낼 시간이 생겨 유리했다.
또한, 지금 변한 현재가 예전에 벤슨이 아는 현재로 바뀔 수도 있었다.
원래라면 벤슨이 회귀한 현재는 이저드가 정신적으로 가장 힘들고 약할 시기였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미하일 공작은 죽지 않았고 이저드 또한 멀쩡했다.
벤슨은 어린 이저드를 3구역에서 만날 때까지만 해도 자신의 계획이 착착 진행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미래의 기억을 전부 가지고 회귀한 벤슨과 이제 고작 16살인 이저드. 둘의 실력 차이는 물론, 완력 차이도 완연했다.
분명, 그래야 했다.
그래야 했는데…….
“6개월이든, 6년이든, 다시 시작해서 뭐 하게? 네 계획은 다 실패했는데.”
벤슨이 이곳에 잡혀 온 과거를 회상하며 인상을 쓰고 아델라를 보았다. 아델라는 흉흉한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널 죽일 방법을 찾아서 죽일 거야. 너만 없으면 돼. 몇 번이고 죽이고 또 죽일 거야. 네가 죽을 때까지 방법을 찾아낼 거야.”
벤슨이 현재가 바뀐 이 모든 게 아델라 탓 같았다. 아델라가 회귀하기 직전 무슨 수를 썼음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현재에서 벌어질 가장 중요한 사건인 미하일의 죽음이 이렇게 없어질 리가 없었다.
벤슨은 살기를 뿜으며 아델라의 온몸을 옥죄였다. 그런데도 아델라는 꿋꿋했다. 수없이 견뎌온 죽음의 그림자에 무너질 아델라가 아니었다.
“네가 죽인 사람들한테 속죄하고 참회하면서 조용히 살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
“뭐?”
그가 어이없다는 듯이 그녀를 보았다.
“여기까지 회귀했잖아. 그럼 너한테도 다른 삶을 선택할 기회가 왔다는 거 아니야?”
“기회? 무슨 기회? 네가 전부 바꿔놓은 이 현재가?”
“바꾼 기억은 없지만, 바꿨다니까 그렇다고 할게. 네가 각하를 죽이려고 할 때마다 난 바꿀 거야. 지키기로 다짐했으니까.”
아델라의 곧은 눈동자가 그한테 향했다.
“네가 날 계속 죽인다고 해도 상관없어. 무슨 짓을 해도 난 막을 거고. 네가 원하는 미래는 오지 않아. 그러니까 포기해.”
사실 자신은 없었지만, 그가 절망하길 바랐다. 벤슨만 포기하면 일단 흑마법으로 인해 벌어지는 참극은 막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포기하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리길, 간절히 바라며 아델라는 그의 반응을 살폈다.
“크흐, 크흐흐흐…….”
벤슨은 그녀의 정직한 협박에 그녀가 웃긴다는 듯이 웃었다.
“이상한 소리를 하네. 그게 뭐? 어차피 너도 그 힘을 얻기 위해 사람들을 희생시킨 거잖아. 그런데 나보고 참회를 하라고? 내가 왜?”
그가 뻔뻔스럽게 웃었다.
아델라는 그의 대답에 잠시 화를 참는 듯 시선을 내렸다. 마음 같아서는 그걸 지금 말이라고 지껄이냐고 그의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묶여 있는 상태이기도 했고 혹시 가까이 다가갔다가 저번 회귀 때와 같은 일이 벌어질까 봐 거리를 뒀다.
“너…… 우리를 다 죽여 버렸던 게 마력 때문이었어? 그럼…… 각하를 그렇게 오랫동안 죽이려고 한 것도 방해돼서?”
전에 루가 해 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만약의 상황 중에 하나라는 거지. 설마 그런 이유로 살인을 밥 먹듯이 하는 미친놈이 있겠어?’
아델라는 수많은 회귀를 겪으며 항상 생각했다.
왜 우리는 몇 번이고 그렇게 죽어야 했을까. 살려 달라고 비는데, 죽이지 말아 달라고 그렇게 비는데, 왜 죄다 죽였을까. 그녀가 항상 가지고 있던 의문이었다.
그런데 그게…… 고작, 자기의 힘 때문에, 힘에 미쳐서였단다. 아델라는 말문이 막혀 벤슨을 미친놈 보듯 보았다.
‘그런 짓을 벌여 놓고, 손목까지 내려온 흑마법 표식을 영광스러운 상처라고 표현해?’
미쳐도 단단히 미친 표현이 아닌가. 이 세상에 자신의 아버지보다 치를 떨 사람은 없을 줄 알았는데…….
“뭐야, 그 반응은? 넌 아닌 것처럼.”
벤슨이 상당히 불쾌하다는 듯이 인상을 구겼다.
벤슨과 맞먹는, 혹은 그걸 뛰어넘는 힘을 얻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한 사람들의 희생이 따라야 했다. 자신이 아델라의 흑마법에 의해 회귀하며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이는 동안, 아델라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을 거란 말이었다.
그런데 저 반응은 뭐란 말인가, 자긴 전혀 그런 적이 없다는 저 반응은. 어디서 자기 앞에서 깨끗한 척, 순진한 척인지.
그는 그녀가 무척 가증스러웠다.
“아, 시간을 돌려서 아무도 안 죽었으니까 아니라는 건가? 그래? 와, 나보다 뻔뻔하네.”
벤슨의 말에 아델라는 살짝 미간을 구겼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나도 너처럼 사람들을 죽여 가며 이 힘을 손에 넣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델라는 이 기분을 뭐라 설명할 수가 없었다. 치욕적? 모욕적?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분이 나빴다.
포로로 죽어 가던 사람들 속에서 그저 살고 싶다고 온 힘을 다해 간절히 빌었다가 이렇게 무한으로 회귀하게 된 걸 억울해 했던 자신을 가해자라는 놈이 동류 취급을 하니 혼이 나가다 못해 실소가 터져 나왔다.
“왜 아닌 척이지? 너도 결국 그 전쟁 통에서 사람들의 공포심을 모았던 거 아니야? 남자 하나에 미쳐서. 아, 아닌가? 남자는 그냥 명분인가?”
벤슨은 아델라가 자신만큼이나 마력에 매혹당해 사람들을 죽여 놓고 아닌 척 발뺌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델라는 그의 비웃음에 차분하게 화를 참으며 미소 지었다.
“누굴 너처럼 미친놈으로 아나…….”
아델라는 전쟁을 일으킨 이가 전쟁광에, 미치광이라는 것을 오랜 회귀로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여태 그래도 이유가 있겠지, 무슨 이유라도 있을 거야, 했던 것이 결국…… 어떤 이유도 없이, 한 사람의 욕망을 위해서라는 걸 알게 된 순간 허무해서 미칠 것 같았다.
그 많은 전쟁의 희생양들이 한 사람의 마력을 위해 죽었다고 생각하니 화가 나다 못해 허탈할 지경이었다.
“내가 회귀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바뀐 적 없는 너한테 다른 선택을 하는 게 어떻겠냐고 한 내가 멍청이고, 내가 미쳤네.”
어쩌면 이 회귀는 그가 말한 대로 새로 살 기회일지도 몰랐다. 다른 선택을 할 기회, 죽음에서 도망갈 기회.
이번 회귀에서도 똑같은 선택을 한 건 그였고, 그 선택은 앞으로 절대 되돌릴 수 없었다. 그 사실을 벤슨은 앞으로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분명히 말하는데, 너랑 같은 취급하지 마. 난 아니니까.”
“뭐? 아니라고?”
벤슨이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그게 아니면 아델라가 절대 풀리지 않는 이 강력한 흑마법을 쓸 수 있는 이유가 설명되지 않았다.
“그래, 나랑은 좀 다르겠지. 넌 이저드를 위해 마력을 모았고, 난 날 위해 모았으니까.”
전생을 생각하면 아델라는 이저드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가족도, 왕도 속여 가면서 필사의 노력을 다했다. 이저드가 아니라면 아델라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벤슨은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전 전생에서는 벤슨의 눈에 띄지 않았지만, 아마 똑같이 이저드를 살리려고 하다가 실패한 걸로 짐작하고 있었다.
“네 머릿속엔 각하를 해하는 것밖에는 없어? 그러니 내가 각하를 위해 너처럼 끔찍한 일을 벌여서 회귀했다고 생각하는 거고?”
확실히 바로 전생과 이번 생에 그녀는 무리할 정도로 고생을 하고 있으니, 충분히 오해할 만했다. 벤슨은 아델라의 반응에 인상을 썼다.
“그게 아니면? 네가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뭐야.”
“살고 싶었으니까.”
“뭐?”
“살고 싶어서. 내가 건 흑마법은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야. 내가 살고 싶어서, 살려고 걸었지.”
벤슨은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그녀의 오랜 회귀 때 이야기였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흘려보낸 시간 동안 아델라가 성을 지키기 위해 나서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이었다.
그동안 그녀는 자신이 사는 것만 생각하며 도망만 다녔다. 이저드한테 접근했던 이유도 처음에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였으니까 말이다.
“누군가의 고통을 토대로 마력을 키운 건 더욱 아니야. 그러니까 같은 취급하지 마. 기분 더러워.”
아직도 눈을 감으면 생생하게 들리는 그날의 처절한 아우성을 어떻게 마력으로 바꿀 생각을 할 수가 있을까? 그 속에서 어떻게 이들의 불행을 이용할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아델라는 평생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살기 위해? 마력을 모으지 않았다고? 지금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지껄이는 거야? 흑마법엔 대가가 필요해. 사람들의 목숨이 아니면 뭔데?”
벤슨은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눈길로 아델라를 노려보았다. 이제야 슬슬 아델라가 계속 회귀하는 방법의 실마리를 얻게 되나 싶었는데 영 엉뚱한 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
아델라는 궁금증이 가득한 표정의 벤슨을 살피다가 아무 표정 없이 입을 열었다.
“내 흑마법에 대해 궁금한 모양인데, 나도 몰라. 이 마법의 대가가 뭔지, 왜 내가 회귀를 하는 건지. 왜 나한테는 흑마법사의 표식이 생기지 않은 건지.”
아델라는 흑마법에 대한 사실을 말해도 어차피 벤슨은 이 방법을 못 쓸 것을 직감했다. 사람을 죽이는 데에만 익숙한 그가 뭔가를 위해 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벤슨이 조금이라도 정상적인 사고를 했다면 지금보다 좀 더 나은 선택을 했을 터였다.
“표식이…… 없다고?”
벤슨은 미간을 좁히며 아델라를 뚫어져라 보았다. 아델라가 진실을 말하는 건지 확인하기 위해서 그녀의 작은 표정 하나하나까지 놓치지 않았다.
표식이 없다? 겉보기에만 안 보이는 줄 알았더니, 아예 없다니?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했기에? 저주가 아니기에 가능한 건가? 흑마법에 저주가 아닌 것도 있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가 알기로 아델라는 그다지 표정을 잘 숨기는 편이 아니었다. 그런 그녀의 표정에서는 지금은 어떤 동요도 없었다. 그렇다는 건 아델라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걸까.
‘혼란을 주려고 일부러 여기 들어온 건가?’
아델라가 제 발로 이곳에 걸어 들어왔다는 걸 알았을 때, 벤슨은 그녀를 이용해 이 위기를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그녀가 죽으면 저절로 자신은 이 감옥에서 해방되고 생이 다시 시작될 테니까.
그리고…… 현재가 왜, 무슨 이유로 바뀐 건지도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회귀한 근본적인 원인을 알아보기 위해 떠 봤더니, 그녀는 벤슨이 알고 있는 흑마법 상식선에서는 아주 멀리 벗어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벤슨은 아델라를 휘두르려다가 되레 자신이 휘둘리는 기분이었다. 저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벤슨은 머리 아프게 고민했다.
“그게 지금 말이라고…….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네 흑마법을 내가 지금 겪고 있는데?”
벤슨은 아델라를 떠보기 위해 일부러 기가 막힌다는 듯이 웃었다.
“믿든가 말든가 난 상관없어. 난 여기 온 목적을 어느 정도 달성했거든.”
벤슨이 자신을 이용해서만 회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들은 이상, 아델라는 두려운 게 없었다. 더는 자신을 이용하지 못하게 하면서 벤슨을 죽일 궁리만 하면 될 일이었다. 벤슨만 죽이면 이저드한테 이상 현상이 생길 일이 없었다.
그럼, 많은 것들을 바꾸는 게 가능해진다. 자신의 삶도, 이저드의 삶도.
“목적?”
“응, 네가 무슨 수로 회귀한 건지 알아내는 거. 그래서 다음번에는 반드시 막으려고.”
아델라는 유심히 관찰하는 그의 눈빛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내며 대답했다.
“네가 날 막을 수 있겠어? 그전에 내가 널 죽일 건데.”
이 말은 떠보는 말이 아니었다. 그의 진심이었다. 아델라는 그 말에 담긴 살의를 느끼며 태연하게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응, 이번 회귀로 알게 됐잖아. 내가 네 계획을 모두 망칠 수 있다는 거. 그 말은, 네가 아무리 수많은 사람을 죽여도 내가 막을 수 있다는 거지.”
사실 아델라는 자신이 어느 정도의 힘을 가졌는지 잘 몰랐다. 벤슨은 아델라가 현재를 바꿨다고 말했지만 정작 그녀는 자신이 뭘 어떻게, 무슨 수로 바꿨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마법진은 루가 말해 준 이후로 품고 다녀서 그렇다고 쳐도, 마법식도 외운 적 없었고 뭘 간절하게 바란 적도…….
‘어? 간절하게 바란 적이…….’
있었는데.
‘저랑 약속했죠. 기다리시기로. 기다리세요, 제가 갈게요. 제가 각하께 갈 테니까, 기다려요! 저 잊지 마세요. 제 말 꼭, 기억하세요! 저……!’
점점 검게 물들어가는 시야 속에, 아델라는 간절하게 그렇게 바랐다.
이저드가 기다려 주기를,
이저드가 무사하기를,
이저드가 자신을…… 잊지 않기를.
‘허어…… 간절하게 바라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에이, 차라리 벤슨이 마법식 실수를 했다는 게 더 말이 되겠다.’
아델라는 실없는 상상을 했다며 픽 웃었다.
아델라의 표정 변화를 다 보고 있던 벤슨은 아델라가 웃자 기분이 나빴는지 그녀를 당장에라도 죽일 듯 노려보았다.
“웃기네, 어쩌다 흑마법이 통한 걸 가지고…… 뭐가 어째?”
그의 말에 뜨끔했지만, 아델라는 능청스럽게 흑마법에 자신 있는 척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
“어쩌다 통한 건지 아닌지는 앞으로 봐야 알지. 아니, 다음 생에 바로 알게 될지도 모르겠네.”
다음 생에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았지만 공범이라고 하면서 이곳에 들어온 이상, 살아서 빠져나가긴 힘들어 보였다.
이번 생의 아델라의 앞에는 아마 죽음……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니 여기서 죽더라도 다음 생에는 저놈을 기필코 자신이 죽이리라.
‘아……. 난 왜 냅다 질러 버린 걸까? 그거 아니면 이놈 만나기 힘들기는 했지만…….’
적군의 손에 죽는 일이야 워낙 많았으니 이젠 죽겠구나, 할 정도로 담담해졌다. 하지만 아군의 손에 죽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과연 자신이 이번 일을 감당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아델라가 여기서 바랄 수 있는 건 제발 고통 없이 깔끔하게 죽는 거, 그거 하나뿐이었다.
“다음 생이 오는 걸 후회하게 될 걸? 네가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널 계속 방해할 거거든. 네 뜻대로 되게 할 순 없지. 내가 여기까지 온 게 너무 억울하니까.”
세상은 아델라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건 이미 오래전에 깨달았다. 그 사실은 죽고 또 죽고, 계속 죽는 동안 이미 충분히 겪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벤슨의 협박에 별다른 동요를 하지 않았다. 무섭지도 않았고, 두렵지도 않았다. 어차피 여태 회귀하면서 그녀한테 쉬운 상황은 없었다.
“네가 억울할 자격이 있나 몰라.”
아델라는 싸늘한 시선을 벤슨한테 잠시 보낸 후 바로 시선을 거뒀다. 얼마 안 가 죽을 거, 말이 통하지 않는 그와 더 말을 섞을 이유가 없었다.
아델라도 한때는 이 회귀에 억울함을 느꼈지만, 가해자가 그런 말을 하니 기가 막혔다. 그에게 그럴 자격이라도 있으면 말을 안 하겠다.
아델라는 더는 그한테 알아낼 게 없기에 대꾸해 줄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당당하게 미치든가 말든가, 이제 전혀 상관없었다. 아델라한테 그는 다음 생에 반드시 죽여야 할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녀가 그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시선을 돌리자, 벤슨은 이를 갈았다.
“나한테 그딴 태도를 보이는 것도 이번 생이 마지막일 거야.”
벤슨은 자신을 무시하는 아델라의 태도에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꽁꽁 묶여 있지만 않았다면 당장에라도 그녀의 목을 비틀었으리라.
자신이 협박하거나 말거나 관심이 뚝 끊긴 아델라의 거만해 보이는 저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친구는 닮는다더니, 루나 아델라나 자신을 얕잡아 보는 태도가 하나같이 똑같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벌써 숨이 막혔을 살기를 그가 뿜어내는데도 아델라는 꿈쩍도 하지 않고 철창에 머리를 기대고 밖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벤슨의 시선을 느끼고 눈을 감아 버렸다. 그한테서 오는 어떤 감정도 아델라는 받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이번 생에 그한테 죽음이 빨리 찾아오기를 바라며 눈을 감고 뜨지 않았다.
* * *
“야, 이봐. 어이, 정신 차려 봐.”
경계를 풀고 있었던 건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잠이 몰려와서 아델라는 깜박 졸았다.
“으음…… 예?”
아델라는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린다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감옥이 편하면 계속 자.”
린다는 잠든 아델라를 깨우며 황당해서 웃음이 나오는 걸 참았다. 제집인 양 곯아떨어진 아델라를 보며 간이 큰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헷갈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겁이 많을 것처럼 보이는 그녀는 실제로 보니 겁을 상실했고, 여릴 것 같았지만 대담했다. 정말 짐작을 할 수 없는 아이였다.
“이, 일어났어요! 저 이제 죽…… 응?”
아델라는 갑자기 일어나 어지러운 와중에 자신의 건너편을 힐끔 보았다.
벤슨이 없었다.
“그놈은요?”
“그놈? 누구?”
린다가 의아한 표정으로 아델라를 보았다.
“그…… 저쪽에 있던, 남자요.”
린다는 아델라를 속박하던 줄과 수갑을 풀어 주며 힐끔, 아델라가 가리킨 벽면을 보았다. 그녀는 아델라의 진지한 표정에 벽 주변을 전부 훑었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저쪽에 뭐가 있어? 너 유령 같은 거 봐?”
“예? 아, 아니……. 그러니까, 저기에! 주황빛 머리에, 그 남자요! 이저드 님을 공격했다는……!”
“이저드 님을?”
린다는 의아한 표정으로 아델라를 보았다. 그 후, 린다 입에서 나온 말은 아델라 넋을 빼놓을 만했다.
“이저드 님은 공격받은 적 없는데. 여기 너 혼자 있었고.”
‘뭐…… 예? 그럼 아까 나랑 대화 나눈 놈은 뭐란 말이야?’
아델라는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몰라 눈만 깜박였다.
“왜 그래? 표정이…… 정말 헛것이라도 본 표정이네.”
린다의 얼굴을 이리저리 뜯어봐도 그녀의 얼굴에는 어떤 거짓도 없었다. 아델라는 드디어 자신이 미친 건가 한참 생각했다.
‘그놈이 뭔 짓을 했나? 흑마법으로 누군가의 기억도 지울 수 있어? 정신을 어찌하려면 엄청 오래 걸린다고 했는데……?’
설령 그가 정말 엄청난 우연으로, 혹은 엄청난 힘으로 주변 사람들의 기억을 지웠다고 치자. 하지만 그는 탈출했으면 분명 아델라를 죽이고 갔을 놈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멀쩡했다. 정말로 헛것을 본 걸까?
‘나 지금…… 꿈속이었나? 아니면, 진짜 미쳤나?’
아델라는 이 믿기지 않는 현실이 꿈일까 싶어 자신의 볼을 있는 힘껏 꼬집었다. 이번 회귀에 벌써 두 번이나 믿기지 않는 일을 맞닥뜨리다니.
이전보다 훨씬 뒤의 과거로 회귀한 그녀는 앞으로의 일을 더 많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벤슨이라는 뜻밖의 복병 때문에 아델라는 자신이 알고 있는 미래가 전혀 소용이 없어 보였다.
“아!”
있는 힘껏 꼬집은 볼은 얼얼하게 아팠다.
“얼씨구?”
린다는 자꾸 변하는 아델라의 표정을 황당하게 보았다. 경악에 찬 표정을 하다가 갑자기 의아한 표정으로 변하더니 이젠 자기 볼을 꼬집고 앉아 있었다. 가만히 그녀를 보고 있으면 심심하진 않았다.
“뭐어, 종종 감옥에서 유령을 봤다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
린다는 아델라의 반응이 재밌어 놀릴 심산으로 말을 꺼냈다.
“제가 진짜 유령을 본 걸까요? 실제가 아니었다고요? 엄청 생생한데…….”
아델라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 듯 멍하니 벤슨이 있었던 자리를 쳐다보았다. 린다가 확인한 대로 벽면에는 어떤 것도 없었다.
“뭐 해? 유령이랑 여기서 계속 살 거 아니면 나와.”
아델라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자, 먼저 감옥 밖으로 나간 린다가 철창을 사이에 두고 그녀를 불렀다.
“앗, 네!”
린다의 부름에 아델라가 냉큼 감옥에서 나왔다. 그녀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또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저…….”
아델라는 문득 자신이 무슨 문제로 잡혀 온 걸로 되어 있는지 궁금해졌다.
벤슨의 존재 자체가 사라졌고, 이저드가 위협을 받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신은 이저드 습격 사건의 공범으로 이곳에 잡혀 온 게 아니게 되는 거였다.
“응?”
“저 왜 풀어 주시는 거예요?”
아델라는 자신을 옥죄었던 줄과 수갑이 사라진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아까는 벤슨이 사라졌다는 말에 정신이 팔려 린다가 풀어 주는지도 몰랐다.
“네가 훔쳤다는 가방의 주인이 처벌을 바라지 않는대. 그래서 바로 사면.”
“제가 훔친 가방이요?”
아델라가 의아한 표정으로 린다를 보았다.
“몰라? 그새 꿈이라도 꾼 거야? 네가 가방을 훔쳤다며 감옥에 가야 한다고 사정사정했잖아.”
린다가 아델라를 황당하게 보았다. 그때만 생각하면 당황스러운 건 린다였다.
“괜찮다고 해도 안 된다고 들어가야 한다며 우겨서 들어갔잖아. 감옥에 직접 가면 생각이 달라질까 했더니, 감옥에 잠자러 들어갔을 줄은 몰랐네.”
그런 말을 하며 린다는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아델라가 따랐다.
‘근데…… 그게 꼭 감옥에 넣을 일이었나? 수갑도 채우고? 심지어 저 작은 애를?’
아델라의 물음을 곰곰이 생각하던 린다가 이상함을 느끼고 아델라를 돌아보았다. 린다가 갑자기 앞에서 멈춰서자, 아델라는 어리둥절하게 그녀를 올려보았다.
“왜요? 뭐가 막…… 떠오르세요?”
린다는 말없이 아델라를 뚫어져라 보다가 어깨를 으쓱이고 다시 앞장서서 걸었다.
‘얘…… 흉악범인데 내가 까먹은 거 아냐? 풀어 줘도 되는 건가?’
일단 위에서 명이 떨어졌으니 아델라를 풀어 주긴 해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애초에 이 작은 아이를 그렇게 가둬둘 이유가 없었다.
린다는 뭔가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기억 속에 아델라가 있는지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역시 생각나는 게 없었다. 가물가물한 것도 아니고, 그냥 아예 깔끔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도대체 자기가 왜, 어떤 이유로 저 아이를 감옥에 넣은 건지…… 린다는 정말로 알 수가 없었다.
린다가 그렇게 고민하는 동안, 둘은 감옥이 있는 곳을 빠져나와 정문으로 향했다. 결국 린다는 정문에 다다를 때까지 자신이 아델라를 그곳에 넣어둔 이유를 찾지 못했다.
“저…….”
“응?”
“이렇게 그냥 풀어 주시는 거예요? 뭐…… 확인 안 해요?”
아델라는 이리저리 주변을 살폈다. 아주 작은 희망을 걸었건만…….
“확인할 게 뭐 있어? 네 신분이 확실하지 않으면 이 시간 이후로 네가 1구역에 들어올 일은 다시 없을 텐데. 지금은 내가 3구역까지 데려다줄 거고 그 뒤로는 알아서 돌아다녀.”
“아…….”
역시 이저드를 만나는 건 힘든 일이었다.
린다가 정문 앞에 맡겨둔 말을 받아 그 위에 올라타며 아델라한테 손을 내밀었다. 아델라는 공작의 저택이 있는 방향을 힐끔 쳐다봤다가 린다의 손을 잡고 그녀의 앞에 올라탔다.
“의외로 능숙하네?”
“아…… 친구가, 알려 줘서…….”
사실 그녀에게 기마술을 가르쳐준 건 아리스였으나 루한테 처음 말 타는 걸 배웠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친구? 친구가 기술이 좋나 보네.”
린다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말의 고삐를 천천히 돌렸다.
* * *
“여기?”
“네.”
“욘제타네 가게?”
린다는 아델라를 말에서 내려 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네, 왜요? 이 가게를 아세요?”
아델라는 살짝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그녀한테 물었다. 린다는 뭘 생각하는지 인상을 살짝 썼다.
‘우연인가?’
린다는 며칠 전 이곳에 왔던 기억을 되짚으며 아델라를 빤히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는 가게는 아니고.”
린다의 반응에 아델라는 금세 풀이 죽었다.
“그렇군요…….”
“넌?”
그냥 가려던 린다는 뭔가가 마음에 걸려 아델라에게 물었다.
“전 만나기로 한 친구가 있어서요.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아델라가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린다를 힐끔 쳐다보곤 걸음을 옮겼다. 린다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니겠지, 라고 생각하며 곧 말을 타고 사라졌다. 아델라는 린다가 사라진 곳을 아쉽게 바라보다가 가게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아직 루랑 어머니는 도착 안 했겠지? 욘제타 아주머니네는 숙박은 안 하시는데…….’
아델라는 루와 그녀의 어머니가 도착할 때까지 어디에 있어야 하나 고민하다가 일단 욘제타네로 들어섰다. 밥이라도 먹고 생각해 볼 참이었다.
그녀는 감옥에서 한 끼도 먹지 못해 주린 배를 잡고 적막이 쌓인 욘제타의 가게 문을 열었다.
덜컹, 끼이익―
오래된 나무문 소리가 가게 안을 울렸다.
평소에는 사람이 많아 사람 소리에 묻혔던 끼긱 거리는 문소리가 매우 선명하게 가게 안에 울려 퍼졌다. 사람들 소리가 아니면 적어도 요리하는 소리라도 들렸어야 했는데 그 소리조차 없었다. 아델라는 고요한 가게 안이 당황스러워서 문 앞에서 멈칫했다.
‘가게를 안 하나?’
분명 욘제타네 가게라고 확인하고 들어왔고, 문 앞에 쉰다는 팻말도 없었다. 아델라는 너무나 조용한 가게 안을 확인하기 위해 문을 조금씩 열어 빠끔히 얼굴을 내밀었다.
‘어? 사람이 있는데? 왜 아주머니랑 아저씨가 안 보이지?’
한 명뿐이었지만, 끝쪽 테이블에 손님이 있었다. 하지만 정작 주인인 두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현재가 바뀌었다더니…… 가게가 망했나?!’
그녀는 이대로 안에 들어가야 할지 나가야 할지 고민했다.
“저기…….”
아델라는 욘제타와 데이브의 안부가 궁금해서 조심히 입을 열었다. 적막한 공간에 아델라의 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식당 안쪽 끝에 앉아 있는 손님은 아무 미동도 없었다. 모습만 봐서는…… 성인인 것 같지는 않았다. 뒤집어쓴 푸른빛 로브는 덩치에 비해 조금 커 보였다.
‘6년 전 아몬의 덩치보다는 큰데…….’
아델라의 기억을 이리저리 뒤져 봐도 딱 들어맞는 체격의 사람이 없었다.
“저기요?”
대답이 없자, 아델라는 조금 더 크게 그를 불렀다. 하지만 그 사람은 아까와 같이 미동도 없었다.
‘벤슨…… 이라고 하기에는 성인 남성의 몸집은 아니고.’
아델라는 문득 아까 린다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유령을 보냐고 아델라에게 물었던 감옥에서의 그 상황!
‘설마 유령! 나 이젠 헛것까지 보이는 거야? 회귀했더니 이번엔 유령이야?’
아니겠지?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사람이겠지.
아델라는 두근두근 미칠 듯이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필사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하하하……. 가, 가게를 잘못 찾았나 봐요. 죄송합니다!”
쾅!
그녀는 급하게 가게 문을 닫고 뒷걸음질 쳤다. 아델라는 눈동자를 떨며 간판을 다시 확인하였다. 혹 자신이 가게를 잘못 찾은 걸까 봐.
하지만 아델라가 눈을 열심히 비벼 봐도, 양 볼을 꼬집어 봐도, 간판에는 ‘욘제타네 가게’라고 정확하게 쓰여 있었다. 꿈이 아니었다.
‘그럼, 사람인가……?’
아델라는 욘제타의 안부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게에 다시 들어가 로브를 확인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일생이 바빠 잊고 살았는데 아까 벤슨이 감쪽같이 사라진 걸 두 눈으로 확인하니 슬슬 과거에 레널드가 읽어 준 동화책이 생각났다. 그녀가 아주 어린 어느 시절의 일이었다.
레널드가 웬일로 동화책을 읽어 준다고 하더니 읽어 준 책은 잔혹 동화책이었다. 여름에는 그딴 책을 읽어야 한다나 뭐라나하는 핑계였다. 내용이 아마 로브를 뒤집어쓰고 아이들을 잡아가던 얼굴 없는 유령이었던가 그랬다.
그때 어린 아델라는 엉엉 울면서 어머니한테 뛰어갔고, 레널드는 그 일로 친어머니한테 엄청 혼났다.
다행히 아델라가 커 가면서 유령 이야기가 거짓이라는 것을 깨닫고 눈에 보이지 않는 유령을 무서워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막상 유령이 보이면 어쩌지 라고 생각하니 심장이 심하게 뛰었다.
‘때려야 하나? 때려? 패? 어떡하지? 유령은 어떻게 없애? 성수? 그런 걸 뿌리나?’
끼익, 아델라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욘제타네 가게 문을 살짝 열어 보았다. 목을 길게 빼고 열린 문틈 사이로 안을 보았다.
‘응? 없잖아?’
그녀는 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놀라서 문을 벌컥 열었다.
‘없어!’
아까 로브가 있던 곳에는 어떤 흔적도 없었다. 테이블로 뛰어가 이리저리 살펴봐도, 천 조각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없잖아!”
아델라는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 생각만 하던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나 진짜 유령 보나 봐!”
오소소 소름이 돋는 자신의 손을 확인하고 아델라는 다다다다 뛰어서 식당 문 쪽으로 향했다.
‘여기서 벗어나야 해!’
본능적인 몸놀림이었다. 아델라는 이 식당이 유령의 소굴처럼 느껴졌다. 당장에라도 나가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 같았다.
끼이익―.
하지만 아델라가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었을 때, 그녀의 눈앞에서 문이 저절로 닫혔다. 아니, 저절로 닫히는 것처럼 보였다.
천천히, 천천히……,
문이 아주 조심스럽게 닫혔고 아델라는 문 앞에서 딱딱하게 굳었다. 자신의 머리 바로 위쪽에 문을 닫는 로브 입은 누군가의 손이 보였기 때문이다.
“왜…….”
그 누군가는 아델라 뒤편에서 조용히 입을 뗐다. 남자의 목소리였다. 아델라는 놀라서 로브 밖으로 살짝 나온 손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유령? 사람? 유령? 사람? 뭐, 뭐라고 말하려는 거지? 설마! 왜 이제 왔어? 하면서 웃으려고! 막, 잡아갈 것처럼!’
아델라는 뒤에 있는 로브남이 더 말하기를 기다리면서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녀는 어떻게 하면 이 가게를 빠져나갈 수 있을까 궁리했다.
“……날 안 찾나.”
“살려……! 예?”
아델라는 유령한테 싹싹 빌려다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이 로브남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내가 유령을 왜 찾아야 하지……? 그나저나 이 목소리, 이 말투……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데.’
아델라는 로브남의 손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슬금슬금 그의 손을 시작으로 손목, 팔, 어깨를 타고 올라갔다.
그녀가 천천히 몸을 돌리자 그는 아델라한테서 한 발짝 물러섰다. 그녀가 편하게 몸을 돌릴 공간을 만들어주기 위함이었다.
“그대가 그랬지 않나.”
아델라의 황금빛 눈동자와 로브 아래로 보이는 하늘빛 눈동자가 정확하게 부딪히는 순간, 그의 눈가가 아름답게 휘었다.
“나한테 오겠다기에 난 그대의 말대로 얌전히 기다렸는데……. 왜 날 안 찾나, 왜 날 다짜고짜 안지 않는가? 분명 그대가 확인한다고 그랬지 않나?”
“어떻게…….”
아델라는 자신 앞에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 몇 번이고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고개를 이리저리 기울여 봐도, 눈을 느리게 깜박여 봐도 그는 사라지지 않았다.
환상 같은 건가 싶어 확인하려 아델라가 그한테 손을 내밀자, 그는 아델라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자신의 품으로 당겼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있는 힘껏 안지 못하고 소중하게 아델라를 품에 안는 그는 그녀가 기억하는 이저드가 맞았다.
그는 아델라가 아는 모습보다 훨씬 앳되어 보였지만 청초한 외모는 어디 가지 않았다. 아델라는 꿈인가 싶어 그의 품에서 살짝 벗어나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요리조리 뜯어보았다.
“진짜…… 각하세요?”
이저드는 아델라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며 안타까우면서도 기쁜, 여러 감정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이저드, 이저드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나긋하게 말했다.
“아.”
아델라는 이저드가 말한 의미를 깨닫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불안한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 아니……. 어떻게, 어떻게 된 거예요? 절 어떻게 기억하세요? 혹시 저주 때문이에요? 제 저주 때문에……?”
아델라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저주를 걸어 이저드가 자신을 기억하고는 있는 걸까 봐 두려웠다. 아무 죄 없는 이저드까지 자신의 저주에 말려들었을까 봐.
“그대는 내가 그대를 기억하는 게 저주라고 생각하나?”
“그건 아니지만……. 이저드 님이 기억까지 가지고 회귀했다는 건 흑마법이잖아요. 저랑 똑같이……. 제 저주가 이저드 님한테까지…….”
이저드는 천천히 고개를 숙인 아델라의 얼굴을 손으로 부드럽게 감쌌다.
“아델라.”
“네.”
아델라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두려워 보였다. 일평생 흑마법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만 듣고 자랐으니 충분히 그럴 만했다.
“잘 생각해 보게.”
“예?”
그녀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대가 누굴 저주하며 힘을 썼나?”
그럴 리가 없었다.
아델라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은 그대를 위해, 이번은 날 위해서였네. 그리고…… 덕분에 많은 이들이 살았지. 난 그대가 썼다는 힘이 저주라고 생각하지 않아.”
이저드는 확신이 담긴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반면 아델라는 아직도 두려움이 가시지 않는 눈빛이었다.
“그대의 첫 회귀를 생각해 보게. 그대가 회귀함으로 인해 전쟁에서 죽었을 이들이 전부 살아났네.”
“그건…… 제가 안 죽으려고…….”
아델라는 그저 자신을 위해 힘을 썼다. 하지만 그녀가 조금이라도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저주를 퍼부었다면 다른 식으로 발동됐을 힘이었다. 어쩌면 회귀 자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나도 그대의 덕분에 몇 번이고 목숨을 구했네. 내가 알 수 없던 수많은 회귀 동안 나는 몇 번이고 그대 덕분에 살았어. 그대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였다지만, 많은 사람을 살렸네.”
이저드는 너무도 마른 그녀의 볼을 어루만지며 계속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대가 기억을 가지고 회귀한 덕분에 내 아버지가 살아 계시고, 날 지켜 주는 이들이 살아 있네. 그대가 우리 가문에 벌어질 참극을 막은 거야.”
과거 그는 아버지를 눈앞에서 잃었다. 그 극심한 죄책감은 그에게 마음의 병을 주고 악몽에 시달리게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사건 자체를 없애 그를 구해 주었다. 그녀의 말대로 그녀가 지켰고, 그녀가 구했다.
아델라는 이저드가 회귀에 휘말린 것이 자신의 흑마법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이저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저주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지.
“그대가 바꾼 지금 이 세상이…… 저주라고 느껴지나? 그래서 아직도 두렵나?”
그러고 보니 벤슨도 아델라가 바꿨다는 말을 했었다. 하지만 아델라는 아무것도 한 게 없었다. 적어도 아델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냥, 살기 위해 행한 흑마법이 운 좋게…….
“전…… 그런 힘이 없는데…….”
아델라의 눈빛은 차차 안정을 되찾았다. 아까의 두려움은 점점 가시고 의문이 떠올랐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나? 그대한테 사실 그만한 힘이 있었는지 아무도 모르는 거 아닌가.”
듣고 보면 맞는 말이었다. 흑마법을 안 쓰려고 노력한 아델라는 자신의 마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 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한테 써 봤어야 아, 이 정도구나 라고 감이라도 잡았을 테지만 아델라는 그런 게 없었다.
“하지만…… 저는 힘을 모은 적은 없어요. 그렇게 느껴본 적도 없는데……. 한 번도 누군가의 불행을 대가로 해서…….”
“왜 힘의 원천이 불행이라고 생각하나?”
이저드가 부드럽게 웃으며 묻자 아델라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흑마법은 누군가의 불행을 먹고 커지니까요.”
“하지만 그대가 쓴 힘은 사람들의 불행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지.”
이저드의 말에 아델라는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저주 없이 쓴 힘, 몸 어디에도 흑마법사의 표식이 나타나지 않는 힘. 그리고 수많은 사람을 죽여 엄청난 흑마법을 얻은 벤슨을 방해할 수 있는 힘, 그게 도대체 뭘까. 같은 흑마법사가 아니면…….
“저주가 아니면…… 뭘까요? 분명, 처음 죽기 전에는 마법진과 마법식을 썼어요.”
“그 마법진과 마법식은 흑마법이 확실한가?”
아델라는 이저드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몰라 의아하게 그를 보았다. 흑마법이 확실하냐니? 흑마법이 아니면 자신이 어떻게 회귀를 했다는 말일까?
“흑마법서에 쓰여 있는 걸 썼으니까…… 흑마법이겠죠?”
아델라가 여전히 오리무중인 상태로 눈만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이저드는 그런 아델라가 귀여운 듯 그녀를 빤히 보다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혹시, 기억하나?”
“?”
“아리스 경이 해석한 그 책의 제목을 말이야.”
‘제목?’
아델라는 아리스가 흑마법서의 제목을 해석해 준 적이 있나 샅샅이 기억을 뒤져 보았다. 흑마법서는 ‘흑마법서’가 제목이 아니었나? 지나가듯 들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그대한테 말한 적이 있다던데.”
“저한테요?”
들은 기억이…… 어디쯤일까? 어디서? 언제? 아델라는 혼란스러운 눈동자를 하면서도 열심히 지난 회귀의 기억을 뒤졌다.
‘저번 회귀 때 아리스 님한테 흑마법서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게…… 함께 가게에 간 날이었는데. 그때 분명, 고대어를 읽으셨고.’
그러고 보니 아리스가 신의 언어를 알아서 놀라워했던 기억이 있었다. 아델라는 그가 그때 뭐라고 했는지 기억해 내려 애썼다.
‘그게 뭡니까?’
당시 아리스는 아델라가 방에서 가지고 나온 손바닥만 한 크기의 얇은 책을 보며 물었고, 아델라가 대답도 하기 전에 그는 단박에 해석해서 책 제목을 입에 담았다.
‘마법서.’
그렇게 말했었다. 분명히, 그렇게.
“마법서, 라고 했어요. 분명하게.”
아델라는 그때의 기억을 생각해 내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리고 곧 이저드가 책에 관해 물은 이유가 궁금했다. 그가 괜히 마법서에 관해 묻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왜 제목은 마법서인데, 흑마법서라고 알려 줬지? 흑마법도 마법의 일종이니까 그렇게 제목을 붙인 건가? 그런데…… 정작 마법서에는 마법에 관한 내용이 없었는데…….’
고대에 이 책을 흑마법사끼리 공유하기 위해 만든 걸로 아는데, 흑마법서가 아닌 마법서를 붙인 건 무슨 이유 때문일까? 당시에는 흑마법이 아니라 마법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걸까? 근데 왜 지금은 흑마법이라고 하는 걸까?
아델라는 혼란스러운 마음에 이저드를 빤히 보았다.
“그래, 나도 그렇게 들었네. 그리고 거기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어. ……당시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흑마법의 ‘흑’자도 들어볼 일이 없었으니 모르는 건 당연했다. 흑마법의 존재를 아는 소수의 사람들 사이에서도 흑마법사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과거 흑마법사를 사용한 이들이 마녀사냥을 당했다는 것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역시 그저 아델라가 흑마법을 부렸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러나 그녀가 이저드한테 걸린 흑마법을 푸는 과정에서 그는 점점 의아해지기 시작했다. 별다른 준비 과정이나 필요한 것 없이 금세 효과가 나타나는 흑마법이라니.
“내가 그대의 힘에 대해 조금씩 의문을 가지기 시작한 건……, 나한테 걸린 흑마법이 완화되는 것을 느끼면서였네.”
흑마법이 너무 쉽게 풀려서 아델라의 힘이 강한 건지, 루가 알려 준 ‘기본’ 마법진이 완벽한 건지 의아해하던 그 시기였다.
전자가 맞으려면 아델라가 태어나면서부터 강한 마력을 지닌 것은 물론, 마력을 엄청나게 모아 놨어야 했다. 하지만 마력을 모으는 방법은 아델라가 말해 준 대로 끔찍했기 때문에 전자라고 추측하기는 힘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후자가 맞으려면 벤슨이 그렇게 공들여 흑마법을 행할 이유가 없었다.
효과가 바로 나타나는 마법진이 있는데 뭐 하러 그 먼 길을 돌아왔겠는가. 심지어 대가도 치를 필요 없는 마법진이라면 흑마법사들이 안 쓸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전자나 후자나 흑마법을 사용했다면 사용자의 몸에 표식이 떴어야 했다. 벤슨이 수많은 이들을 죽이고 흑마법을 쓴 죄로 온몸에 표식이 퍼진 것처럼.
하지만 그녀에겐 표식이 없었다. 그렇기에 아델라가 쓴 힘을 설명하기엔 흑마법은 무언가 많이 부족했다.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나? 어떻게 전부 죽지 않고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지, 왜 표식이 뜨지 않는지, 왜 대가 없이도 흑마법이 발동했던 건지.”
아델라도 그의 말에 덩달아 의문이 들었다.
아델라는 평생 흑마법을 쓰면 안 된다는 말만 들었다. 그래서 이 힘이 당연하게 흑마법에서 비롯된 줄만 알았다. 다른 힘은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이저드 님의 말씀은, 그러니까 제 힘이…… 흑마법이 아닐 수 있다는 건가요?”
아델라가 얼떨떨하게 묻자, 이저드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러 사람을 살린 그대의 힘이 왜 흑마법인건지……. 그대를 기다리는 동안 많이 생각했네.”
처음 어린 몸으로 눈을 떠서 살아 계신 아버지를 마주한 순간부터, 그가 만져지고 그가 말을 하며 그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마주한 순간부터, 이저드는 평생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느꼈다.
놀랍고, 벅차고, 이상했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꿈인가 싶어 헤이든한테 자신을 때려 보라고 시켰다. 그에 헤이든은 정말로 세게 그를 때렸다. 덕분에 꿈이 아니라는 건 아주 확실하게 알았다.
이저드를 때린 헤이든을 탈탈 털던 린다를 보며 이저드는 정말로 자신이 과거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둘의 관계가 이렇게 안 좋던 때는 이저드의 어릴 적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가 완전히 과거로 돌아온 것을 확신한 순간부터, 그는 전생에서 느꼈던 의문을 다시금 생각했다.
아델라의 힘에 관련된 부분을 말이다.
하지만 아델라가 무슨 일이 있어도 기다리라고 했고 자신은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저드는 아델라를 당장에 찾으러 가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혹여 그녀와 엇갈리게 될까 봐.
대신 그는 현재 벨제프 자작가의 상황을 알아 봐 달라고 아버지한테 부탁했다.
그렇게 한 주, 두 주……, 그는 긴 시간 동안 아델라와 만나기를 손꼽아 기다리며 그녀가 부렸다는 흑마법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낸 결론은 하나였네. 그대의 힘이 흑마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라고.”
“혹시 마법서를 언급하신 게…….”
아델라가 조심히 묻자, 이저드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흑마법이 있다면, 그 반대의 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러고 보니 아델라는 흑마법 밖에 모르고 자라서 그런지 다른 힘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어릴 적부터 박혀 온 생각이 이렇게도 다른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대의 어머니가 그대를 왜 흑마법사라고 생각했는지 그 계기는 모르겠지만, 그대는 계속 흑마법사라고 듣고 자라왔지. 흑마법 이외의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을 거네. 우리 같은 사람들이 흑마법이 실존하는지 모르듯이.”
아델라는 그의 말에 어머니가 소스라치게 놀랐던 그때를 생각해 보았다.
정말 사소한 일 때문이었다.
어렴풋한 과거의 어느 날, 루를 괴롭히던 마을 아이와 다툰 적이 있었다. 몇 번이나 경고했는데 계속 루를 괴롭히는 게 화가 나서 아델라는 아이와 다퉜다.
그 과정에서 아이가 아델라를 밀쳤고, 아델라도 그 아이를 밀쳤다. 아이는 엉덩방아를 찧었고 아델라는 씩씩거리며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모두가 놀랄만한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아이의 코에서 갑자기 코피가 터졌기 때문이었다.
그 전부터 아델라가 그 아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라고 어머니한테 투덜거렸던 적이 있어서인지, 그녀의 어머니는 그 장면을 보고 멀리에서 뛰어와 아델라를 호되게 혼냈다. 너무 어릴 때라 정확하게 기억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도 그때 자신이 왜 혼났는지 억울했던 기분이 남아 있었다.
“제가 기억하는 건……, 제가 싫어하던 아이의 코피를 터뜨렸던 적이 있거든요? 그때 이후로 어머니는 저를 엄격하게 가르치셨어요.”
물론 어린아이들은 영문 없이 코피가 터질 때도 있었다. 혹은 단순히 그 아이의 불운으로 인해 엉덩방아를 찧고 코피를 흘렸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델라의 어머니는 자신이 흑마법사였기 때문에 지레짐작해서 아델라를 어릴 때부터 엄하게 대했다. 아델라가 진짜 흑마법을 쓰는 건지 아닌 건지도 모른 채.
“어쩌면 그대의 어머니가 흑마법사로 살아와서 흑마법 이외를 생각하지 못했던 걸지도 모르네.”
이저드가 부드럽게 이야기하자, 아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식은 크면서 당연하게도 부모한테서 지식을 얻는 부분이 많았다. 게다가 아버지라는 작자는 하나도 그녀에게 가르쳐준 게 없었기 때문에 아델라한테는 어머니가 전부였다. 그러니 그녀가 흑마법 이외의 힘을 생각하는 게 힘든 건 당연했다.
“근데 왜…… 마법서에는 흑마법 밖에 없었을까요?”
만일 마법서에 어떤 설명이라도 되어 있었다면 마법서를 해석할 수 있었던 루나 아리스가 자신한테 설명이라도 해 줬을 텐데 말이다.
이저드는 잠시 아델라의 시선을 피하고 허공을 보다가 다시 아델라와 시선을 맞추고 답했다.
“그대가 흑마법 푸는 방법을 원했으니, 그 내용만 구해 줬을 수도 있고. 후세에 내려올 수 없었던 이유가 있다면…… 알아봐야겠지.”
아직 거기까지는 잘 모른다는 듯이 이저드는 곤란하게 웃었다.
“그럴 수 있겠네요. 저나 벤슨이나 흑마법에 대한 것만 알아봤던 거니까.”
아델라는 위아래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눈을 크게 키웠다.
“헉!”
“왜 그러나?”
“벤슨!”
이저드가 기억이 있다는 충격에 잠깐 잊고 있었다. 그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벤슨이 사라졌어요!”
이저드는 아델라를 따라 조금 놀라더니, 이내 벤슨의 이름이 나오자 차분해졌다.
“벤슨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예? 벤슨을 기억하세요?”
아델라는 아까 린다의 반응을 보고 당연하게도 이저드도 모를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놈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하지만 린다 경은 기억에서 지워진 것처럼 아예 모르던데…….”
아델라가 감옥에 있었던 일을 상기시키며 뒷말을 줄였다.
“그건…….”
이저드는 아까와 비슷하게 곤란한 듯이 미소 지었다.
“그건 말이네.”
“네, 네!”
아델라는 그의 뒷말을 기다리는 듯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그녀의 맑은 눈을 보고 있자니 이저드는 양심이 찔렸다.
자신은 그래도 꽤, 마음을 잘 숨기는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가면도 그녀의 앞에 서자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는 걸, 그녀가 알까 모르겠다.
“알아봐야 할 것 같아…….”
“?”
아델라는 웬일로 말끝을 늘리는 이저드를 멍하니 보았다. 확실히 앳된 티가 보이는 이저드가 곤란한 듯이 웃자, 그렇게 귀여워 보일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아델라는 어린 이저드한테도 콩깍지가 단단히 씌인 모양이었다.
“사실…….”
다행히 아델라는 그저 순수하게 궁금하기만 한 것으로 보였다. 이저드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이 정도는 말해도 되겠지 싶어 입을 열었다.
“벤슨을 내 손으로 끝내려고 감옥에 갔었네.”
“감옥에요?”
아델라는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가 와서 벤슨을 데려갔는데도 자신이 깨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상하고 놀라웠다.
“그럼 벤슨은…….”
아델라는 뒷말을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였다.
“맨 처음 그대의 회귀가 그놈의 계획을 내가 방해한 것에서 비롯되었다면, 내 손으로 끝내는 게 맞는 거라고 생각했네.”
아델라한테 벤슨의 죽음까지 맡길 수는 없었다. 이저드는 그녀의 손에 그의 더러운 피를 묻히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오랫동안 고통 받은 그녀였다.
“그래서 놈을 끝냈고.”
“죽는 걸 보신 거예요?”
아델라의 물음에 그가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다른 이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건 알 수가 없네.”
“혹시 기억을 조작한 거라던가요?”
“기억을 조작하는 흑마법은 최소 몇 년이 걸린다고 알고 있네만.”
그것도 그렇네.
아델라는 혹 목이 떨어져도 살아남을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흑마법이라고 하더라도 이미 떨어진 목을 주워서 붙이는 수는 없었다.
“혹시, 무덤에서 살아나면 어째요?”
“태웠네. 그놈은 땅에 묻힐 자격이 없어.”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이 철저한 사람 보소.
아델라는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렇게 이를 갈며 자신을 죽이겠다고 했던 벤슨이 죽었다고 하니, 믿기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어디선가 기괴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나타날 것 같았다. 오랫동안 벤슨이 만든 끔찍한 세상을 겪었던 아델라는 자신이 약간의 트라우마가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런 아델라의 마음을 알아챈 건지, 이저드가 말없이 그녀를 끌어안으며 그녀의 등을 쓸었다.
“걱정하지 말게. 나한테도, 그대한테도, 다른 이들한테도, 이제 그놈은 영향력을 뻗치지 못하네.”
‘이 세상에서 없어졌으니까, 흔적조차 없이.’
이저드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 벤슨이 사라진 일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 눈빛이었다. 그의 눈은 어떤 확신에 차 있었다.
“그나저나 아델라.”
“네?”
“배고프지 않나?”
이저드는 벤슨이 사라진 이유보다 깡마른 아델라가 더 걱정됐다. 품에 안고 있는 그녀는 정말로 부서질 것 같았다.
아까부터 느꼈지만 그녀는 너무 작고 말랐다. 그 작은 몸을 보며 이저드는 그녀가 자작가에서 얼마나 힘들게 버텨온 건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녀를 더 어렸을 때 만나지 못한 게 이렇게 가슴 아플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예? 아, 억!”
“?”
이저드는 갑자기 자신한테 떨어져 제 얼굴을 가리는 아델라를 이상하게 보았다.
“자, 잠시만 보지 마세요!”
아델라는 이저드를 만났다는 설렘과 놀라움과 충격 때문에 자신의 몰골이 지금 무슨 상황인지 확인도 하지 못했다.
“아델라? 무슨 일인가?”
“그…… 그게요!”
아델라는 손가락 사이로 힐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보았다. 자신이 향할 곳을 대충 확인한 그녀는 냅다 그쪽으로 뛰었다.
“저 씻고 올게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아델……!”
저 작은 몸으로 어찌나 빠른지, 이저드가 그녀를 부르기도 전에 벌써 그녀는 위층으로 호다닥 올라가고 없었다. 이저드는 아델라가 사라진 계단 쪽을 난감하게 보았다.
“갈아입을 옷이…… 없을 터인데.”
그는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린다가 아델라한테서 뺏어 왔다는 가방이 생각났다. 그녀한테 돌려 주려고 이저드가 린다에게서 다시 받아 가지고 왔었다.
이저드는 위층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아델라의 기척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살짝 웃었다. 아델라의 놀란 표정, 당황한 발소리, 목소리까지. 그 모든 게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자, 미소를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와 이 공간에 함께 있고 그녀가 자신과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 이제야 현실처럼 느껴졌다.
그는 아델라가 욕실에 들어간 사이에 그녀의 가방을 문 앞에 두고 내려올 생각으로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 1부 에필로그
눈을 감은 지 얼마 안 되어 아델라가 고른 숨소리를 내며 새근새근 잠들었다. 그 모습을 건너편에서 지켜보던 벤슨은 어이가 없어 말문을 잃었다.
이 상황에서 잠이 오다니, 그것도 저렇게 깊게? 겁을 상실한 건가 아니면 간땡이가 부었나?
“야, 야.”
벤슨이 그녀를 불러 봤지만 소용없었다. 얼마나 깊게 잠든 건지 미동도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벤슨은 기괴한 현상을 겪게 된다. 드문드문 들리던 간수들이나 죄수들의 말소리가 뚝, 하고 끊긴 것이다.
게다가 감옥 중간마다 자리했던 등불이 순식간에 꺼졌다. 주변에는 아델라의 숨소리 이외에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꼭, 아델라와 벤슨이 있는 이 방만 존재하는 것처럼.
“뭐야, 누구야?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벤슨은 누군가의 기척을 느끼려 노력했지만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주변의 기척은 물론, 바로 앞에 있는 아델라의 기척까지 느껴지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냥 모든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벤슨의 목 바로 아래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이 지금 살아 있는지조차도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는 난생처음으로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저번 생에 억지로 죽을 때도 느껴보지 못한 감각이었다. 어떤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 몸이라니.
딱!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엄지와 중지를 튕기자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던 벤슨의 감각이 모두 돌아왔다. 그리고 동시에 등불도 켜졌다. 소리는 여전히 죽어 있었지만.
“누구……?”
큰 키의 남자가 아델라 바로 뒤, 철창 너머에 서 있었다. 불이 꺼져 있던 찰나에 언제 여기까지 온 건지 모르겠다.
허리까지 오는 은발의 생머리를 지닌 다부진 몸매의 미남자였다. 그는 무료한 표정으로 벤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루?”
잘 보니 그는 루였다. 다만, 벤슨이 첫눈에 그를 루라고 알아보지 못한 것은 그가 아는 루와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체격은 물론, 분위기와 눈빛 모든 게 달랐다. 흔하지 않은 은발과 보석을 담은 적안은 루와 같았지만, 그는 이상하리만치 벤슨이 아는 루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너 뭐야?”
벤슨이 루를 경계하며 물었다.
“전생에 날 죽이고 형편은 좀 나아지셨어?”
벤슨의 물음을 무시하고 역으로 묻는 루의 눈빛은 전생에 죽기 직전과 똑같았다. 가소로운, 혹은 하찮은 생물을 보는 것처럼 무감각한 눈빛이었다.
전생의 루는 벤슨한테 심장이 꿰뚫리는데도 아주 따분하고, 무료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감았다. 벤슨은 조용히 죽어 가는 루를 보면서 목덜미가 오싹했던 감각을 한동안 잊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벤슨은 전생과 비슷한 감각에 다시 목 뒤가 싸늘했다.
“아니, 좀 새로운 선택을 하나 기대했더니. 재미없게 여긴 왜 왔어?”
루는 벤슨의 행동을 놀리는 듯이 웃었다.
“재미? 넌 지금 이 상황이 웃겨?”
발끈한 벤슨이 방 안에 살기를 뿌렸다. 꽁꽁 묶여 있는 데도 벤슨의 살기는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루한테는 벤슨의 살기가 미치지도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기는커녕 루는 한껏 벤슨을 비꼬았다.
“응. 방해하는 이들을 모두 죽이고 도달한 끝이 감옥이라는 게, 너한테 참 어울리면서도 어리석어서 웃겨.”
“지금 이게 끝 같아? 내가 이대로 끝낼 것 같아?”
아델라만 죽게 된다면 언제든 자신은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번 생에 저지른 실수를 만회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는 이번 생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것에 들떠, 아주 조금, 실수를 저지른 것뿐이라고 여겼다.
“에이―, 실수는 아니지. 네가 지금의 어린 이저드를 얕본 거니까.”
루는 벤슨의 생각을 다 안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벤슨은 이저드가 급격한 성장을 이루기 전에 그를 미리 제거하려고 했다. 벤슨한테는 지금이 가장 큰 기회였다. 미하일이 죽고 심적으로 약해진 이저드에게 틈이 생겨 아델라도 도울 수 없게 된 지금.
시간을 두고 지켜보기에는 조금 빠듯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이저드가 훌쩍 성장해 있을 거였기 때문이다.
미하일이 죽은 후 약 1년 뒤, 이저드는 이미 전장에 나가 이오스 군대를 막아 낼 정도의 실력을 쌓는다. 주변에 기댈 곳이 없었던 이저드와 이저드의 측근들은 보통 사람이라면 엄두도 못 낼 훈련과 실전을 겪고 엄청난 성장을 이룬다.
처음 벤슨이 이오스 왕의 특명을 받아 호위병으로 잠입했던 시기는 그보다 1년 뒤, 이미 이저드와 호위병들이 전장을 누비며 무패 행진을 하고 있을 때였다.
벤슨이 굳이 6년 전으로 회귀한 이유가 바로 위의 일들이 벌어지기 전에 이저드를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이저드의 힘과 아델라의 기억이 합쳐지면 벤슨이 아는 미래와는 완전히 달라진다. 그 후에 막으려면 이미 손쓸 수 없게 될 확률이 높았다.
저번 생이 그랬던 것처럼.
벤슨은 이제, 아델라가 부린 흑마법처럼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 찾아오는 게 극도로 싫었다.
“원래라면 지금의 이저드가 너보다는 약해야 하는 게 맞아.”
벤슨이 호위병으로 지낸 세월은 무려 4년이었다.
벤슨은 암살 기술은 물론, 모든 무술에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 지금의 이저드와 비교하면 확실히 벤슨이 더 강해야 했다. 기억이 있는 벤슨에 비해 이저드는 기억이 없는, 이제 막 성장 중인 아이였으니까.
“원래라면? 무슨 말이야?”
안 그래도 벤슨은 의문이 많았다. 이저드가 어떻게 자신을 제압한 건지, 왜 미하일은 죽지 않았는지 등등 떠오르는 의문은 수도 없이 많았다.
“무슨 말이냐고! 설마 네 짓이야?”
벤슨이 버럭 소리를 쳤다.
“왜 나한테 화를 내. 미하일 공작이 살아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진작 포기하지 그랬어. 그럼 나랑 감옥에서 보진 않았을 거 아냐. 적어도…… 길 위에서?”
루가 뚱하니 대답했다. 그에 벤슨은 이번 회귀 후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돌이켜 보았다.
* * *
벤슨이 처음 펜베르크 성에 입성해 이저드의 정보를 수집할 때, 미하일이 죽지 않았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듣긴 했었다.
하지만 벤슨은 회귀 때문에 시간에 약간의 간극이 생긴 줄만 알았다. 벤슨이 억지로 아델라를 이용해 회귀한 것이니, 그 정도 변화는 약간의 부작용 정도라고만 생각했다.
이저드가 요즘 종종 3구역에 나타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기회라고 생각하여 그를 추적했다.
“욘제타네 식당?”
돈을 주고 얻은 정보를 따라간 벤슨의 발이 멈춘 곳은 바로 욘제타네 가게였다.
‘뭐야? 기억은 없지만 무의식중에 그 여자를 찾고 있는 건가? 아니면 그 여자가 또 뭘 했나?’
이때, 좀 더 자세히 정보를 얻기 위해 이저드한테 접근한 것 자체가 잘못됐을 줄은 벤슨은 상상도 못 했다.
시끌시끌한 식당 안에는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발 디딜 틈 없이 북적댔다. 데이브와 몇몇 종업원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는 걸 가만히 지켜보던 벤슨은 이저드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기척이 너무 많아서 그런지 그는 쉬이 이저드를 찾지 못했다.
“손님? 몇 분이세요?”
“한 명.”
벤슨이 짧게 이야기하자, 종업원은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자리가……. 죄송하지만, 합석 괜찮으세요?”
벤슨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저드만 찾으면 되니까. 그는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테이블 앞에 섰다. 먼저 앉아 있는 사람은 짙은 푸른색의 로브를 뒤집어쓴 이였다.
“혼자 오신 손님이 두 분뿐이라……. 혹시 합석 가능하세요?”
성인 남성보다는 작아 보이는 몸집의 사람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아무 의심 없이 건너편 자리에 앉은 벤슨은, 아까부터 찾던 이저드와 마주했다.
로브 아래로 보이는 이저드의 하늘빛 눈동자가 힐끔 벤슨을 쳐다본 후 관심 없는 표정을 하고서 시선을 돌렸다.
‘이 어린 게…… 진짜 이저드라고? 이렇게 무방비한 놈이, 이저드가 맞아?’
벤슨은 자신을 모르는 듯한 이저드의 반응에 희열을 느꼈다. 자신만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는 그 기분은 정말 짜릿했다. 이저드보다 우위에 선 느낌을 느낀 적이 실로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혹시,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아?”
이저드는 벤슨이 말을 걸자 다시 벤슨에게 시선을 돌렸다. 벤슨은 한결 여유로운 표정으로 싱긋 웃었다. 이 정도로 무방비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암살을 시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뇨.”
어린 이저드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 그래? 이상하네. 난 너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로브 재질을 보니 어디 귀한 집 도련님 같은데, 이런 곳에 나와 있다가 큰일 나.”
그래서 벤슨은 이때까지 이저드의 목숨이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여차하면 어린 이저드의 목에 독침을 꽂아 넣을 수 있을 거리였다. 다른 사람들 모르게 이저드를 처리할 실력도 벤슨에게는 있었다.
“당신같이 친한 척 말 거는 사람만 조심하면 해될 건 없습니다. 호위도 곧 올 거고요.”
정직하게 답하는 모습은 확실히 이저드다웠다. 무엇 하나 의심할 여지없는 이저드였다.
하지만 벤슨은 이저드의 어린 날을 본 적이 없어 몰랐다.
사실 어린 이저드는 이렇게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는 아이가 아니었다는 것을. 16살의 이저드는 22살의 이저드보다 감정이 훨씬 다양했고 숨김이 없었다.
“호위? 린다 경? 지금의 린다 경은 널 구할 수 있으려나.”
자신이 모시는 이를 지키지 못해 일그러지는 린다의 얼굴도 조금은 궁금했다. 그 강한 사람이 무력하게 눈앞에서 주군을 잃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 얼굴도 무척 볼만할 구경거리라고 생각하며 벤슨은 이곳에 들어올 때부터 준비한 독침을 어루만졌다.
‘지금이 기횐가? 너무 순순히 잘 돌아가는데?’
벤슨은 혹시나 해서 주변의 기척을 빠르게 읽었다. 가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린다의 기척이 느껴졌지만 그 이외에 위협이 될 만한 인물은 없었다.
곧 린다가 가게에 도착할 테지만, 벤슨이 이저드를 없애고 이곳에서 사라질 정도의 시간은 충분했다.
이저드가 이곳에서 살해를 당한다면 제베르 왕과 미하일 사이에 싸움이 날 것이 뻔했다. 제베르 왕은 제베르 왕대로 이저드를 죽인 범인을 미하일 측으로 단정 지을 테고, 미하일 공작은 이저드의 죽음에 분노해 제베르 왕과 전쟁을 불사할지도 모른다.
이대로만 되면 아주 완벽한 시나리오였다. 설령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이저드가 사라지는 건 벤슨한테 큰 이익이었다.
“린다 경은 뛰어난 인재입니다. 무시하는 발언은 삼가시죠.”
이저드는 벤슨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듯 묵묵히 대답했다.
“뛰어난 인재인 건 나도 알아. 미래에는 더 대단한 실력자가 되는 것도. 하지만 아무리 뛰어나도 그녀가 지금 저 벽을 뚫고 널 지킬 수 있을 것 같진 않은데.”
거기까지 말을 마친 벤슨은 눈앞에 다가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저드의 목에 독침이 향했다. 어떤 소음도 없이 고요한 움직임이었다. 벤슨의 손놀림은 놀랍도록 빨라서 웬만한 암살자들 이상의 실력이었다.
탁.
만약 벤슨‘만’ 회귀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면 이 독살은 성공했을지도 몰랐다.
“……네 본성은 항상 추악하군.”
높낮이 없는 어조였다. 아무 감정 없이 가라앉은 하늘빛 눈동자가 벤슨을 똑바로 바라본다고 생각할 때, 벤슨의 몸이 붕 떴다.
우당탕!
벤슨은 자신이 지금 무슨 일을 당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그는 얼굴부터 땅에 처박혀 이저드의 손에 제압당했다.
“음? 뭐야? 어어? 이저드 님!”
이저드에게 즉결 처분될 뻔한 벤슨은 그와 동시에 들어온 린다에 의해 겨우 목숨을 붙일 수 있었다. 이저드는 그냥 죽이려고 했지만, 린다가 암살자임이 명확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정보를 캐내고 미하일 공작한테 알려야 한다는 이유로 막았다.
* * *
벤슨은 며칠 전을 회상하며 이를 으득, 하고 갈았다.
분명, 누군가가 과거를 바꾼 게 분명했다. 처음에는 아델라가 바꾼 줄 알았다. 그러나 루를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너…… 이 모든 게 네 짓이지?”
“이 모든 게 뭔데?”
루가 여유롭게 웃으며 물었다.
“사실 저 여자한테 힘이 있는 게 아니고, 네가 뒤에서…….”
그러면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뭣 모르고 힘을 썼다는 아델라보다는 처음 벤슨이 의심한 것처럼 루가 뒤에서 조종했다는 추측이 더 신빙성이 있었다.
“저 여자가 한 것인 척 꾸몄지. 그렇게 내 시선을 저 여자한테 돌리게 해서 날 방해한 거야?”
루는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재밌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내가 왜? 난 널 막을 이유가 없었는데?”
“날 막을 이유가 없다니. 넌 전쟁이 터져도 상관없었다는 거야? 아니면 죽어도 상관없다는 말인가?”
벤슨이 루의 표정을 살피기 위해 그를 뚫어져라 봤지만, 루는 어깨만 으쓱였다.
“응, 난 상관없는데. 어차피 이 세계를 버릴 생각이었고 그 기간을 빨리 당긴 게 너였는데, 내가 널 왜 방해해?”
루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웃었다.
“여태 그 모습을 숨기면서 나랑 저 여자한테 접근해 놓고, 그 말을 믿으라고?”
“딱히 숨긴 건 아닌데? 이 모습도 나고, 그 모습도 나야. 소년 모습이었던 건 그저…… 경계심을 낮춰서 사람들 본성을 보고 싶었을 뿐이지.”
사람들은 어려 보이는 루를 배척하거나, 속이려 했다. 그중에선 깔보거나 얕잡아 보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그 모든 인간의 안 좋은 본성을 보려던 것뿐이었다. 물론, 안 그런 사람들도 있었지만.
“모습을 자유자재로 바꾸고, 모든 소리를 차단하고, 저 여자를 깊은 잠에 재우고……. 지금 내가 나열한 힘만 해도 끝을 알 수 없는데. 그런 강력한 힘이 있으면서 넌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아델라 저 여자가 전부 한 일이라고?”
“어, 왜 못 믿지? 아델라의 힘이 강하다는 건 몇 번의 회귀로 알았잖아?”
“네가 무한한 마력을 공급해 줘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게 아니고?”
벤슨은 루의 말에 하나하나 토를 달며 비뚜름하게 웃었다.
그는 루의 말을 믿지 못하는 듯했다. 아마 루가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방금 두 눈으로 똑똑히 기이한 현상을 보았으니 말이다. 아까와 같은 현상은 흑마법서 어디를 뒤져도 나오지 않았고, 그런 흑마법은 듣도 보도 못했다.
“내가…… 너처럼 사람을 죽일 수 있었으면, 이렇게 멀리 돌아가는 짓 안 해.”
벤슨이 오해를 하거나 말거나 루는 피곤한 표정으로 자신이 할 말만 했다.
“나한테 죽음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으면 진작에 이 세상은 망했어.”
루가 높낮이 없는 어조로 이야기하자, 벤슨은 긴가민가한 표정이 되었다.
“세상이 망하길 바란 거면, 날 왜 방해하는 거야.”
“몇 번을 말해, 내가 한 거 아니라고. 난 지켜볼 뿐이야.”
바로 앞에 있는데도 아델라가 그리워지는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말이 안 통할 수가, 제자리걸음만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그럼 계속 지켜볼 것이지 왜 나타난 거야. 전생의 복수라도 하려고? 아니면 저 여자를 빼 가려고?”
벤슨이 루를 잔뜩 경계하며 물었다.
“오랜만에 일하러. 드디어 널 빼 갈 명분이 생겼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 뭐, 좀…… 다른 녀석들이 꽥꽥거리긴 하겠지만.”
루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 인상을 살짝 구겼다가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저 여자가 아니라 날? 거기가 날 위한 곳은 아니겠군.”
벤슨은 루의 말뜻을 이해하고 허탈하게 웃었다.
“아닌데? 널 위한 곳이야, 내가 준비한.”
루가 환하게 웃었다.
“물론―, 네 손에 수없이 죽었던 당사자가 허락한다면.”
전제를 단 루의 시선이 향한 곳은 기척도 없이 다가오고 있는 한 남자아이였다. 소년의 분위기는 차갑게 가라앉아 겉보기에는 차분해 보였지만, 속은 냉정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의 마음을 대변하듯이 검푸른 머리카락이 붉은 등불에 비춰 불길처럼 타올랐고, 덩달아 그의 맑은 하늘빛 눈동자도 타는 듯이 일렁였다.
“아델라는 괜찮습니까?”
루의 모습이 아리스나 아델라가 표현한 것과는 상당히 달랐지만 이저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직 아델라의 소식만 듣고 바로 이곳에 온 그의 눈에는 그녀 밖에 보이지 않았다.
“보시다시피.”
이저드는 곤히 잠든 아델라의 곁에서 무릎을 꿇고 철창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그녀의 이마에 조심히 손을 대 봤다. 오랜 시간 마차를 타고 온 것도 모자라 감옥까지 들어왔으니 혹, 감기에 들었거나 아픈 곳이 있을까 걱정되기 때문이었다.
“걱정 마, 아델라는 한동안 아플 예정 없어. 마차에서나 여기서나 손은 써 뒀고.”
밤낮없이 달리는 마차 안에서 아델라가 아프면 크게 앓을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루는 그녀가 펜베르크 성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미리 손을 써 뒀다.
“……감사합니다.”
이저드는 아델라의 몸 상태를 확인하며 그녀한테 시선을 떼지 않고 답했다.
“그래서, 어쩔 거야?”
루가 고갯짓으로 벤슨을 가리키고 나서야 이저드의 시선이 드디어 아델라한테서 떨어졌다.
“죽이려고 온 거지?”
루가 덧붙여 물었다. 이저드는 무표정하게 말없이 벤슨을 쳐다보았다.
“하……! 너도 기억이 있어? 과거가 바뀐 게 아니고, 네가 바꾼 거구만?”
둘의 이야기를 듣던 벤슨은 이저드의 확고한 눈빛을 마주하고 나서야 이저드도 기억을 전부 가지고 회귀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날 죽인다고 이 상황이 끝날 것 같아?”
벤슨은 자신이 농락당한 느낌이 들자 분개했다. 철컹, 철컹, 그를 감싼 쇠사슬 소리가 격하게 감옥 안에 퍼졌다.
“저 여자를 사람들이 가만히 둘 것 같아?! 저 여자의 힘을 알면 전부 피할걸? 자신과 다르다고 배척하고, 무서워하고, 피하겠지! 종국에는……!”
만일 쇠사슬로 매여 있지 않았으면 생난리를 쳤을 벤슨의 행동이 일순 멈췄다. 핏대를 세우고 뭐라 말하려는 그대로 그가 멈췄다.
정말로 말 그대로 그냥 멈췄다. 벤슨만 시간이 멈춘 채 그대로.
벤슨의 위협적인 행동에 철창 너머의 아델라한테 손을 뻗어 그녀를 껴안고 그를 경계하던 이저드가 의아한 표정으로 루를 보았다.
“시끄러워서.”
이저드의 시선을 느낀 루는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 사실 이저드는 종국에는, 의 뒷말을 듣고 싶었지만 루가 그렇다고 하니 더 묻지 못하였다.
“그래서, 네 생각은?”
마침 루가 다시 이저드의 생각을 묻기도 했고.
“……죽이려던 게 맞습니다. 제가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저드가 조금 늦게 아까 했던 루의 물음에 답했다. 루는 그런 이저드를 빤히 보다가 곧 자신의 의견도 말했다.
“난 안 죽일 거야.”
루의 말에 이저드가 의아한 듯 그를 올려다보려 했다. 그러자 루가 스스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이저드와 눈높이를 맞췄다. 루의 키가 커서 올려다보기 힘들었던 참인데 그가 먼저 앉아 주니 고마웠다.
“왜입니까?”
루는 턱을 괴고 아델라의 얼굴을 구경했다. 그녀는 이 와중에 평온하게 참 잘도 자고 있었다. 그러다 루는 이저드의 물음을 듣고 그한테 시선을 돌렸다.
“죽으면 끝이잖아. 고통도, 좌절도, 공포도. 모두 끝나게 둘 순 없지.”
이게 어떻게 얻은 기횐데, 루는 뒷말을 삼키며 웃었다.
아델라와 함께 끝없이 회귀하면서 루는 아델라가 이 회귀의 실마리를 찾아낼 때까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회귀의 실마리는 아델라가 직접 찾아야 했고 자신은 그동안 끼어들면 안 됐다. 그래서 많은 회귀 동안 조용히 지냈다.
그러다 아델라가 드디어 이저드를 만나고, 미래가 바뀔 징조가 보이고 나서야 그녀를 도울 수 있게 됐다. 물론 조력자로서만. 그 이상의 일은 하면 안 되었다.
아델라한테 도움이 되는 일.
아델라와 관련된 일.
루는 딱, 거기까지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생사 알 수 없는 거라고, 의외의 행운이 굴러들어 왔다. 수많은 회귀 동안 루를 찾지 않던 벤슨이 제 발로 루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루가 따로 벤슨을 찾아간 것이 아니었으니, 루가 신들의 규율을 어긴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징계를 받을 일도 없었다.
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아델라가 바꾼 미래는 때때로 루를 당황스럽게 만들었지만, 이토록 재밌는 일들이 발생하곤 했다.
원래 루는 방관자 정도의 자리였지만, 벤슨이 루를 죽여 주는 바람에 루 자신이 피해를 본 당사자가 되어 버렸다. 덕분에 루는 벤슨한테 자신이 직접 죄를 물을 수 있게 됐다.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죽어도 죽어도 벗어날 수 없는 공포 정도는 알아야지, 저놈도. 솔직히 더한 것도 있지만, 일단은.”
루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이저드는 루의 말을 들으며 아델라를 지그시 보았다. 이저드도 할 수만 있다면 벤슨한테 더한 고통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벤슨을 자기 손으로 없애 버리는 거였다. 후에 아델라가 불안해하지 않게, 아델라한테 해가 되지 않게.
“이 세상에 저놈이 다시 나타날 일은 없는 겁니까?”
이저드는 마음에 걸리는 부분을 물었다.
“다시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러자 루가 오히려 반문했다.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그래. 그렇게 하지, 뭐.”
어차피 벤슨은 세상을 살피기 위해 내려온 신을 죽인 죄로 큰 벌을 받을 터였다. 거기에 추가로 이저드와 아델라가 원한다면야, 벤슨을 이 세상에서 없애버리는 일은 너무 쉬웠다.
“근데 그러려면…….”
잠시 말을 끊은 루가 아델라와 이저드를 번갈아 보며 갑자기 싱긋 웃었다.
“벤슨의 존재를 지워야 해. 아예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 말은 즉, 너희 기억에서도 지워져야 한다는 거야.”
“저희 기억에서도 지워져야 한다는 건…… 어디까지입니까?”
“전부. 벤슨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까지.”
루의 표정은 그걸 감당할 수 있겠냐는 말을 담고 있는 듯했다.
“그 말씀은, 아델라와 제가 기억하는 전생들 전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덧붙여 너희의 관계까지.”
루가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이저드는 어두운 표정으로 아델라를 내려다보았다. 잊히고 싶지도 않고, 잊고 싶지도 않았다.
아델라가 힘겹게 만들어낸 이 상황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나 가혹했다. 여태까지 그녀가 노력한 모든 게 무로 돌아간다니.
“그럼 전…… 저놈을 당신한테 넘겨 줄 수 없습니다.”
이저드는 아델라가 만들어 준 현재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 무엇도 잃고 싶지 않았다.
“내가 저놈의 존재를 지우지 않으면 아델라가 회귀할 때마다 다시 나타날 놈인데?”
“그렇게 만들지 않습니다. 설사 그런 상황이 오더라도 제 손으로 몇 번이고 놈의 목숨을 거둘 겁니다.”
이저드의 올곧은 눈동자를 한참 빤히 바라보던 루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크흡!”
“?”
“푸하하!”
루는 몹시 유쾌하게 웃었다. 이저드는 의아한 눈빛으로 루가 웃음을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
“아무리 나라도 아델라의 힘을 건드릴 순 없어, 아델라의 기억도.”
“그런데 아깐 왜 그런 말씀을 하신 겁니까?”
“그냥 궁금해서?”
루가 웃으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저놈의 존재를 없앨 건 맞아. 다만 아델라의 힘이 미친 너는 못 건드려. 아델라는 당연히 못 건드리고.”
다른 이들의 기억이야 이미 무로 돌아갔으니 벤슨의 존재에 대한 기억만 손보면 되지만, 아델라와 이저드는 달랐다.
벤슨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게 하려면 회귀한 시간 전부를 돌려야 한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쉬운 일도 아닐뿐더러 아델라가 힘들게 바꿔놓은 세상을 건드리면 아무리 루라도 엄청난 처벌을 받을 게 뻔했다.
과거에 한 번 인간사에 관여했다가 몇 천 년이 훅 날아가는 경험을 한 후, 루는 절대 이 세계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놈의 규율이 다 뭔지.’
사실 지금도 루가 끼어들면 안 되지만, 마지막으로 아델라가 바라는 세상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게 하려 무리하게 진행하는 것이었다. 주변에서 난리치며 말리려고 할 것까지 감안하고.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 인간의 존재를 지운 것으로 주변에서 난리를 치면, 적어도 밀어붙일 명분은 있었다. 루가 벤슨한테 한 번 죽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너랑 아델라의 기억이 지워지면 안 되지. 돌고 돌아 여기까지 왔는데. 게다가 벤슨이 죽는다고 끝이 아니잖아?”
루의 말이 맞았다.
벤슨은 그저 그들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앞으로 아델라와 이저드가 상대해야 할 사람은 벤슨보다 더 음습한 놈이었다.
“선왕…….”
아니, 이제는 현왕인 남자.
이저드의 어머니와 아버지, 더 이전에는 왕세자였던 이저드의 외삼촌, 그리고 아들을 지키려다 돌아가신 이저드의 외숙모까지. 그렇게 많은 이들을 이저드한테서 앗아간 사람.
그가 살아난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 이번엔 예전과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잖아.”
루가 웬일로 이저드한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이저드는 그의 위로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무언가 깊이 생각에 빠진 듯싶었다.
“아, 그리고.”
“?”
루가 다시 이저드 곁에 앉자, 이저드가 생각을 멈추고 그를 마주 보았다.
“이거 비밀이다?”
“예?”
“여기 내가 왔다 간 것, 벤슨을 데리고 간 것, 벤슨의 기억이 다른 이들한테 지워진 이유, 그리고 이 모습까지 전부. 그냥 이곳에서 했던 대화 모두.”
“왜…… 그런……?”
이저드는 왜 굳이 그래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벤슨이 아예 이 세계에서 사라졌다고 하면 아델라가 크게 안심할 터였다.
“아, 그래. 네가 죽였다고 해.”
“왜입니까?”
이저드의 물음에 루는 골치 아픈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의 머리를 헝클였다.
“아델라랑 약속했으니까. 친구로 남아 주기로.”
“그것과…… 지금 상황을 말하지 않는 건 무슨 관계입니까?”
“그야 내 정체를 아델라가 알게 되면 거기서 끝이니까. 인간과의 관계를 만드는 건, 내가 같은 인간으로서 그 사람한테 인식됐을 때뿐인걸.”
막연하게 이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구나,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과 루의 정체를 확실히 알게 되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루를 제대로 인지한 순간, 그와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관계는 끝난다.
“그럼 저한테도 이렇게 나타나시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너랑은 어떤 관계도 아닌데 뭐 어때. 처음부터 이 모습으로 만난 거니까 상관없어. 네가 입만 다물고 있으면.”
루가 싱긋 웃었다. 그 미소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만약 입을 뗄 시에는…….”
“알겠습니다.”
루의 말을 다 듣지 않아도 뒷말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저드는 곧바로 대답했다.
“눈치가 빨라서 참 좋아.”
루가 흡족한 미소를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제 가지?”
아델라를 감싸고 있는 이저드를 내려다보며 루가 말했다. 이저드는 아델라를 안타깝게 보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 이 상황을 없던 일로 치려면 이저드가 감옥에 있으면 안 됐다.
이저드는 아델라와의 만남을 더 미뤄야 한다는 게 아쉬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발걸음을 쉬이 못 떼는 이저드를 내려다보던 루가 혀를 찼다.
“쯧, 나랑 욘제타네 식당에서 보기로 했으니 거기서 봐. 만날 시간 충분히 줄게. 됐지?”
루의 말에 이저드는 머뭇거리다가 걸음을 뗐고, 그의 뒤를 루가 따랐다. 조금 걷자 멀리에 문이 보였다.
“뭐 하나 여쭈어 봐도 됩니까?”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이저드는 최대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저 문을 열고 나가면 다시는 루한테 질문을 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아델라의 힘 말입니다. 정말 흑마법이 맞습니까?”
기억을 가지고 회귀한 후, 이저드는 계속해서 고민했다. 이것이 저주로 인한 것인지. 이저드의 인생을 크게 바꿔준 이것이 정말 흑마법이 맞는 것인지.
이저드의 아버지가 살아 계시고, 이저드를 지키던 이들이 살아 있고 헤이든도 다치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살아난 이것이, 정말 저주가 맞는 걸까?
“왜 그런 걸 물어?”
잘 걷던 루가 우뚝 멈추며 되물었다.
뒤에서 자신을 따라오는 기척이 없자 이저드도 덩달아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아델라는 저주라고, 흑마법이라 말했지만 전 그렇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몇 번이나 사람들을 살린 아델라의 힘이 저주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거기에 아델라한테 표식이 없다는 것, 너무나 간단한 마법진에다 마법식도 필요 없는 흑마법, 마력을 따로 모은 것도 아닌데 몇 번이나 회귀할 수 있는 힘과 그 모든 게 대가 없이 이루어졌다는 것까지. 이상한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루는 생각에 빠진 이저드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한숨과도 같은 웃음을 내보였다.
“하여간 눈치는.”
딱히 숨긴다고 숨겨질 사실도 아니었기 때문에 루는 쉽게 입을 열었다.
“맞아, 저주 아니야. 흑마법도 아니고. 아델라는 철석같이 믿고 있지만, 그거야 그 애는 흑마법 이외는 생각할 수 없게 자랐으니까.”
“한데, 왜 여태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난 직접적인 말은 못 해. 그래도 간접적으로는 돌려서 말했어. 책도 구해 줬잖아.”
“책이요?”
흑마법서를 말하는 건가. 그게 왜 간접적인 말이 된다는 걸까?
“어. 그 책 제목을 아리스가 알려 줬잖아. 물론, 아델라는 한 톨도 의심하지 않았지만.”
“책 제목이라 하시면…… 『마법서』?”
아리스가 해석을 하며 이야기해줬던 흑마법서의 책 제목을 기억해낸 이저드가 의아하게 물었다.
“응.”
“제목이 마법서일 뿐, 흑마법에 관한 책이 아닙니까?”
“현세에 흑마법을 아는 사람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하는데. 아니야, 그 반대지.”
반대라 하면, 마법서 안에 흑마법서가 포함된 거란 말인가? 이저드는 자기가 이해한 게 맞나 긴가민가했다.
“마법서에는 흑마법에 관한 사용법만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마법의 구체적인 사용법에 관한 내용은 없었습니다.”
이저드는 아리스가 해석했던 마법서의 내용 중 단 한 군데도 마법에 대한 설명이 되어 있지 않았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나마 있는 건 마법식과 마법진 정도였다. 그도 거의 흑마법으로 활용되는 내용뿐이었다.
“그렇겠지, 마법을 쓰던 애들은 다 죽어서 기록을 남길 수가 없었거든.”
루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다 죽었다뇨?”
이저드는 쉬이 이해가 가지 않아 물었다.
“좋게 쓰라고 힘을 나눠 줬더니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배척하고 뒤통수를 치더라고. 그 힘을 알려 준 내 제자들을 다 죽이고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까지 죽였어. 흑마력에 빠진 놈들이.”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먼 옛날의 일이었다.
널리 이롭게 쓰라고 알려 준 힘을 안 좋은 쪽으로 쓰는 걸로도 모자라 아직 아무 힘도 없는 아이들까지 죽여 버리자, 루는 폭주했다.
그의 폭주를 막을 이들은 없었고, 이때 많은 흑마법사가 죽어 나갔다. 이때의 여파 때문에 흑마법사의 숫자는 확 줄어들어 지금까지 적게 유지되고 있었다.
그리고 루를 피해 도망간 이들이 흑마법사 자체가 사라질 거라는 위기를 느끼고 후세를 위해 남겨 놓은 것이 지금의 마법서였다.
“내 제자들은 이미 다 죽었고 그 뒤로 몇 번이나 흑마법과 반대되는 힘을 쓰던 애들이 태어났지만, 전부 죽었지. 기록을 남길 사람이 아예 존재할 수 없었던 거야.”
인간사에 심각하게 관여한 죄로 처벌을 받은 루가 몇천 년이 훌쩍 지난 이후에 돌아와 본 이 세계는 아주 개판이었다. 아델라가 아니었다면 루는 정말 이 세계가 멸망하는 모든 걸 보기 위해서만 돌아다녔을 거였다.
“그래서…… 세상이 망해도 상관없다고 하신 거군요. 아델라 이외의 존재한테 무심한 것도 이유가 있었고요.”
루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지금 나눈 이 대화도, 제가 잊어야 합니까?”
루는 무슨 그런 당연한 말을 하냐는 듯이 이저드를 쳐다보았다.
“아델라가 흑마법사가 아니라는 사실은요?”
이저드는 이 사실을 아델라한테 제일 먼저 알려 주고 싶었다. 평생 자신이 흑마법을 쓰면 어쩌나 전전긍긍하고 두려워한 아델라를 위해,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었다. 그것만으로도 아델라가 마음을 놓는 데 도움이 될 것이 확실했다.
“음…….”
루는 이번 물음에는 고민했다. 그도 아델라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가 추측한 건 온전히 네 의견이니까 알아서 해. 내 과거는 빼고.”
이거 어쩐지, 루와 대화를 하면 할수록 아델라한테 숨겨야 할 비밀만 많아지는 기분이었다. 이저드는 아델라한테 이 모든 걸 숨겨야 한다는 게 양심에 찔렸다.
“아델라가 알아내면, 그건 괜찮습니까?”
“아델라의 행동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땐 어쩔 수 없지.”
루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근데 한동안은 괜찮아. 내가 한동안 이곳에 없을 예정이기도 하고 아델라가 고대 기록을 뒤질 시간이 없거든.”
루가 앞날을 예상한 듯 단호하게 이야기하자, 이저드는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아직 안 끝났잖아. 아델라의 소원.”
루는 씩 웃으며 이저드를 지나쳐 먼저 감옥 문 앞에 도달했다. 그는 감옥 문을 천천히 열며 이저드를 돌아보았다.
“이번엔, 네가 아델라를 지킬 차례지?”
문밖은 짙은 어둠이 깔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했지만, 왜인지 희미하게 길이 있는 것 같았다. 구름에 가려 달빛도 비추지 않는 날이었는데, 이저드가 내디딜 만한 길이 희미하게나마 보였다.
“조심히 가. 난 이쪽 뒤처리가 남아서.”
감옥 밖으로 나온 이저드는 감옥 문 너머로 사라지는 은발의 남자를 한참 보다가 느리게 걸음을 뗐다.
한 걸음 뗄 때마다 확실하게 길이 보였다. 이저드는 그 길을 따라, 느리지만 천천히 나아갔다.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