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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5장-1. 그녀는 지키고 싶다 (8/17)

1부 5장-1. 그녀는 지키고 싶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또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벤슨의 태도에는 어떤 변화도 발생하지 않았다. 아델라는 그를 몰래 살피면서도 열심히 이저드와 나머지 사람들의 흑마법을 풀고 있었다.

처음에는 풀리고 있는 게 맞나 불안했지만, 아주 조금씩, 천천히 그녀의 흑마법이 효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알았다.

알 수 없는 악몽을 꾸던 몇몇 이들이 다시 평소처럼 숙면을 하는 횟수가 늘어나는가 하면, 잠을 청하지 않고 버티다 잠든 이저드가 아무 이상 없이 깨어났다. 꿈을 아예 안 꾼 건 아니지만, 주변의 기척을 못 느끼는 일은 확 줄어들었다.

그녀가 흑마법을 쓰겠다고 한 지 며칠이 지난 후에는 거의 평소와 같은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저드는 자신의 옆에서 색색 소리를 내며 잠든 아델라의 숨소리도, 멀리에서 둘을 깨우러 다가오는 카일의 발소리도 느낄 수 있었다. 오랜만에 평소와 같은 아침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효과가 이렇게 빨리 나타날 수 있는 거였나?’

이저드는 그전부터 루를 아델라가 믿는 만큼 믿었으나, 지금은 사실…… 아리스 만큼이나 의문이 들었다.

아델라는 자신의 흑마법이 형편없다고 말했으나, 사실 엄청 강하다는 것을 스스로 모르는 건가? 아니면 루라는 인물이 그 정도로 강력한 방법을 알려 준 건가? 어떻게 그런 방법을 아는 거지?

전자라면 루는 아델라가 그 정도로 강하기 때문에 지금의 방법을 알려 줬다는 뜻인데…… 그 힘을 어떻게 가늠하고?

후자라면 아델라의 힘을 최대한 끌어낼 방법을 알려 줬다는 건데, 책에도 없는 방법이 어떻게 어느 방향으로 흐를 줄 알고?

이저드는 잠자는 아델라를 지그시 내려다보다가 이내 조심히 꼭 껴안았다.

‘그대는 알고 있나? 그대의 친구가…… 다른 이들과 조금, 많이 다르다는 걸.’

이저드는 루의 정체가 궁금했으나 알아내려고 하지 않았다. 알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어쩐지 루가 아델라의 편임을 다행이라고 여겼다. 이저드의 촉이, 그를 적으로 돌리면 안 될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으음…… 응?”

이저드가 금세 달라진 자신의 상태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아델라가 이저드의 품에서 꾸물거리며 깼다. 눈을 몇 번 깜박이던 그녀는 지금 이 포즈가 꿈인지 현실인지 확인하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헙!”

아주 그냥 찰거머리처럼 그의 품에 딱 달라붙어서 잤다고 생각하니 부끄러워진 아델라가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왜?”

막 이저드의 품에서 벗어나려는 참에 그가 그녀를 붙잡았다. 아델라는 몸을 일으킨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예 누운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이저드를 내려다보았다.

‘어머…… 어머! 어머!’

아델라는 아침에도 변함없이 빛나는 그의 눈부신 외모에 어떤 말도 못 하고 감탄사만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직…… 시간 있네.”

‘그, 그 말은…… 옆에 더 누워 있으라는 말이신가! 시, 싫은 건 아닌데…….’

아, 아닌데…….

아델라는 자면서 침은 안 흘렸는지 엄청나게 걱정했다. 저 탄탄한 가슴에 안겨 침을 흘리고 잤다고 생각하면 당장에라도 수치스러워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델라는 힐끔 그의 옷을 살피다가 못 이기는 척 슬금슬금 다시 자리에 누웠다. 아까보다는 조금 떨어져서. 그러곤 커다랗게 뛰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그한테 들릴까 싶어 간격을 조금 더 벌렸다.

“아델라.”

“네, 넵?”

그녀가 화들짝 놀라 물었다.

“안아도 되나?”

“예에?”

아까 자신의 품을 빠져나가는 아델라를 보며 그는 아쉽다고 느꼈다. 밤새도록 안고 잘 수는 없어도 아침에 이런 시간을 조금은 가져도 되지 않을까, 하고 조심스레 생각했다.

“안 되나?”

아델라는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다 돼요, 다 되죠! 라고 목 끝까지 올라오는 말을 삼켰다. 말로 직접 내뱉었다가는 안 그래도 크게 뛰는 심장이 남아나지 않아 음 이탈을 하든가, 엄청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나올 것이 뻔했다.

아델라는 자신을 지긋이 바라보는 하늘빛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칠 용기가 없어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아침부터 안겠다고 하니까 뭔가 기분이 이상하고 야릇했다.

“그대에게 할 말이 있네.”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아델라는 못 이기는 척 슬금슬금 그의 품으로 쏙 들어갔다.

‘끄으아, 되게 부끄러워!’

아델라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겨 불규칙적으로 뛰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처음에는 그 심장 소리가 자신의 것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 진정하고 보니, 그의 심장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아델라는 자신을 안고 가만히 있는 이저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할 말이 있다고 말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델라가 아닌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응? 설마― 각하도 부끄러워서 이러시나?’

사실 이저드는 안으면 안 되겠냐고 묻는 순간부터 아델라와 비슷하게 주체할 수 없는 심장의 울림을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를 안고 싶었고, 잠시간이라도 그녀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아델라는 이저드도 자신과 똑같이 심장이 뛰고, 부끄럽고, 쑥스러운 걸 알고 아까보다 마음이 편해졌다.

‘맞지, 참. 우리 연인인데.’

자기만 좋아하고 사랑하는 게 아닌데. 같이, 함께인데, 심장이 하나만 떨린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아델라는 기분 좋은 두근거림에 금방 기분이 몽글몽글 좋아져 가만히 그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저, 각하.”

아델라가 조용히 그를 부르자, 그가 드디어 아델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음?”

“아까, 할 말 있다고 하셨죠?”

그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떠오른 이저드가 조금 민망한지 살짝 웃었다.

그는 아델라한테 그녀의 흑마법이 효과를 내는 거 같다고 말해 주려고 했다. 그녀가 느끼고 있던 불안함을 조금은 없애 주고 싶어서.

이저드는 이 사실을 알게 되어 기뻐할 아델라의 환한 미소를 생각하며 차분하게 아까 있었던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 * *

아델라는 이저드가 흑마법의 영향에서 점점 벗어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고 뛸 듯이 기뻤다. 풀 수 있겠구나, 바꿀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이 생겼다.

훈련장으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이 더욱 가벼워졌다. 왠지 모를 자신감이 무럭무럭 자라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앞으로 최선을 다해 흑마법을 풀 생각이었고, 더 열심히 훈련에 임할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생각만 했다. 생각만.

그리고 그녀의 가벼운 발걸음은 채 1시간을 못 갔다. 훈련이 시작된 순간부터 다시 급속도로 자신감이 하락했다.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 쉬어.”

‘난 역시 재능이 없나? 나만 힘든 건가? 나만 아픈 거야?’

아델라는 체면이고 나발이고 잔디밭에 좀비처럼 걸어가 누웠다. 아무리 훈련을 해도 훈련 후에 몰아치는 고통은 말도 못 하게 힘들었다.

아델라는 이 근육통을 따로 명명할 단어가 없어 ‘훈련통’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속으로 혼자. 이 고통은 최선을 다해서 풀어 보려고 해도 안 풀리는 고통이었다.

“아효……. 죽겠…….”

“오늘은 좀 살 만한가 봐요?”

“그렇게 보이신다면 린다 경의 눈이 잘못…… 갹.”

아델라의 곁에 털썩 앉은 린다한테 꿍얼거리니 린다가 그녀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말대꾸하는 걸 보니 살 만하네.”

확실히 첫날 말도 못 하고 물만 찾던 때와는 다르긴 했다. 아픈 건 똑같았지만 말이다.

“힝…….”

“푸흡.”

아델라는 또 말대꾸하다가 린다한테 공격당할까 봐 입만 비죽비죽 내밀었다.

“그렇게 억울하면 절 가르칠 만큼 강해져 보세요.”

“그거 평생 데굴데굴 구르라는 말씀이시죠?”

“아니요? 동기 부여?”

동기 부여가 될 리가…….

린다와 아델라의 실력은 하늘과 땅 차이였고, 아델라의 생활형 근육은 범접도 하지 못할 돌덩이 같은 근육을 지닌 게 린다였다. 어릴 때부터 꾸준히 검술과 무술을 배운 사람하고, 중간에 배운 사람하고 같을 리가 없었다.

수비병이 되기 전에 아델라가 할 수 있었던 건 루한테 배운 호신술 몇 가지가 다였다. 물론 그 호신술이 사실 격투기 중 몇 가지였다는 걸 나중에 수비병이 되고 알았다.

당시 아리스가 아델라의 시범을 보더니, ‘호신술……로도 쓸 수는 있죠…….’ 라고 말하며 짓던 표정이 생각났다. 그는 아델라를 만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난감하게 웃었다.

“차라리 동기 부여를 먹을 거로 해 주세요…….”

“그러다가 또 오델리아 백작 부인이 ‘어머머머머! 영애!’ 그럽니다?”

린다가 웃으며 오델리아 백작 부인의 말투를 따라 했다. 그러자 아델라가 지친 와중에도 린다를 따라 웃었다.

“귀에서 자동으로 들리네요.”

아델라가 푸흐흐 바람 빠진 웃음을 내보였다. 린다는 그런 아델라를 물끄러미 보다가 뿔뿔이 흩어지는 호위병들을 살폈다.

“요 며칠 특별한 일은 없었고?”

“아직까지는요. 이상하네요. 뭔가 대비를 해 놓을 줄 알았는데. 린다 경은요?”

“음…….”

린다는 말을 고르며 훈련장에서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그사이 아델라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린다를 바라보았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 무슨 일 없어요. 무슨 일이 없어서 불안한 적은 또 처음이네.”

흑마법사가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너무 얌전하니까 엄청 수상했다. 지금쯤 초조함을 넘어섰을 텐데. 무슨 꿍꿍이지?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할 만한 일을 꾸미고 있나?

되레 린다가 초조한 기분이었다.

루한테 편지를 전해 주러 떠난 사람한테도 그리고 수도에 있는 세작한테도, 그 누구한테도 아직 소식이 당도하지 않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신경도 안 쓰고 느긋하게 기다렸을 텐데 일이 급하게 돌아가니까 왠지 마음도 급해졌다.

“저도요. 흑마법이 풀리고 있는 건지 초조한데 흑마법사는 나타나지도 않으니 더 초조해요. 제가 제대로 풀고 있는 게 맞을까요?”

“자신감을 가지시죠. 내가 풀지 못하는 건 없다, 라고 생각해요.”

린다는 부드럽게 웃으며 아델라를 위로했다.

“내가 걱정되는 건 아델라 님을 어떻게든 없애려고 할 흑마법사가 아직 너무 조용하다는 거지.”

꼭…… 태풍이 오기 전의 그 고요함처럼.

“그렇죠……. 모두 평화롭고, 다들 웃고, 떠들고, 장난치고. 평소랑 모두 같아서 전쟁은 안 일어날 것 같아요.”

전쟁이 터지기까지 얼마 안 남았다. 아델라는 그 시기를 상기시켰다. 아마…… 다음 주나 다다음 주쯤이었던 것 같았다.

“전쟁? 음― 그러네요. 이오스가 주기적으로 도발하긴 했죠. 마지막 전쟁이 작년 이맘때쯤인가?”

린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전쟁? 으음― 전쟁? 아리스 경이 흑마법사가 이오스 쪽 사람이 아닐까, 라고 했지?’

그럼 이오스 왕과 제베르 왕이 손을 잡았다는 이야기였다. 이저드를 죽이기 위해 둘이 손을 잡고 오랫동안 준비해 왔다는 것이다.

여태 제베르 왕국 내에서는 누구를 보내든 스파이로 금방 탄로 났으니까, 이오스 쪽에서 협력을 해 줬을 확률이 높았다. 이오스가 깨작깨작 군사를 움직인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기다렸던 거겠지. 각하의 상태가 안 좋아지기를. 그게 아니면 지들한테 승산이 없으니까.’

근데 그 기획이 지금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게 생겼다. 그런 상황에서 이렇게 조용한 게 아무래도 이상했다. 분명 무슨 수를 쓰고 있을 텐데.

이오스 왕과 제베르 왕이 무슨 수를 쓰고 있을까?

각하한테 위협이 될 만한 뭔가. 또는 각하를 쥐고 흔들 만한…… 무언가.

‘이거…… 어디서 겪어 본 것 같은데.’

린다는 턱을 괴고 수많은 별이 수놓인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 있는데도 느낌이 영 좋지 않았다.

‘그나저나 각하는 왜 이렇게 조용하신 거지?’

이오스랑 제베르에서 뭔가를 준비하는 것처럼, 이저드도 뭔가를 준비하고 있나?

‘그러고 보니…… 아리스 경이 요즘 바쁘던데.’

린다는 여러 추측 중에 가장 확실시되는 추측을 떠올리고 아델라를 홱 돌아보았다.

“……?”

아델라는 생각에 빠져 있던 린다가 갑자기 자신을 돌아보자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왜, 왜요?”

린다가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델라 님.”

“예?”

“만약…… 레널드 경이랑 아예 관계를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틀어지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면 끊어 낼 수…… 있겠어요?”

린다는 신중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네, 뭐.”

린다가 긴장했던 것 치고 아델라는 의외로 쉽게 긍정의 뜻을 전했다. 사실 당장에라도 끊고 싶은 게 그 혈연관계였다.

“그…… 아델라 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심각하게 흘러가도?”

린다가 다시 조심스레 물었다.

“음― 네, 아마도요. 혹시 유배 같은 거요? 아니면 감옥?”

“아마…… 비슷하겠죠?”

아델라는 아무렇지 않게 린다의 이야기를 듣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잘못 들은 건가.

“저희 오라버니가…… 곧 왕한테 내쳐지나요?”

“내쳐지는 건 모르겠고, 왕의 편이라 언제고 부딪칠 거라.”

언제고, 라고 했지만 린다의 예상으로는 이른 시일 내에 부딪치게 될 것 같았다. 아리스와 이저드가 준비하고 있는 일이 린다가 추측한 방법이 맞는다면 아델라한테 이목이 쏠리는 지금 실행할 확률이 높았다.

특히 이저드는 소중한 사람을 잃었던 기억 때문에 소중한 사람을 잃는 것에 큰 불안과 두려움을 느꼈다.

여태까지는 조용히 있는 것이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는 방법이었기에 그렇게 했지만, 만일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고,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한다면…… 아예 이 판을 바꿀 생각을 할지도 몰랐다. 자신과 자신의 사람들한테 유리하게.

어릴 적부터 이저드의 곁을 지킨 린다는 그가 가끔 조용히 큰일을 저지른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저드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신중히 일을 처리하고, 돌다리도 여러 번 두드려 보고 건넜지만, 모든 확인 작업이 끝난 뒤에 이저드가 어떻게 나올지는 린다도 짐작할 수 없었다.

“괜찮아요. 오라버니와 다른 길을 선택한 순간부터 각오하고 있던 일인 걸요.”

왕이 나라를 버리고 도망간 그 순간부터, 오라버니가 왕의 최측근으로 들어간 순간부터…… 둘의 운명은 정해져 있던 걸지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둘의 거리는 10년 전 레널드가 집을 나간 순간부터 정해져 있던 걸지도.

“그럼…… 만약 각하께서 위험한 일을 한다면? 죽을 수도 있는.”

린다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짐작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중에 알게 되면 아델라한테는 꽤 충격적인 이야기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미리 운을 띄운 것이다.

아델라는 린다의 말에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각하가 죽지 않겠다고 한 말을 믿어요. 만일…… 정말 잘못돼서 그렇게 되더라도,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예요. 제가 죽는 한이 있어도, 살려요. 제 소중한 사람들을요.”

그것이 다시 회귀하는 결말이라고 하더라도 그를 살리고, 자신을 살리고, 소중한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아델라의 굳은 다짐을 들은 린다는 속에 있던 근심 걱정을 조금 내려놓았다. 그녀가 생각하는 것보다 아델라는 단단한 사람이었다.

“아델라 님이 죽으면 안 되죠. 그럼 호위인 제가 면목이 없죠. 지킬 겁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리스와 이저드가 일을 진행하는 동안, 아델라의 곁은 자신이 지키겠노라고 그녀도 다짐했다.

이저드와 아델라의 앞이 결코 평탄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깨달은 린다는 그들이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해지기를 바랐다. 부디 그들의 가까운 미래가 평탄하기를.

린다가 진심으로 미소를 보이자, 그녀를 빤히 보던 아델라가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저 방금 린다 경이 엄청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되게 반할 것 같아요. 헤이든 경의 마음이 좀 이해돼요!”

환하게 웃으며 말하는 아델라를 보다가 과거가 떠오른 린다가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왜요?”

아델라는 린다가 호쾌하게 웃는 건 처음이라 궁금해서 물었다.

“헤이든보다 제가 먼저 반했어요. 헤이든하고는 눈만 마주쳐도 싸워서 걘 내가 좋아하는지도 몰랐는걸.”

“아, 들었어요! 두 분 엄청 싸우셨다고. 근데 언제 반하신 거예요?”

아델라가 흥미진진한 눈으로 린다를 바라보았다.

“각하를 구할 때?”

“구할 때라면……. 아, 혹시 그때…….”

“예, 그때. 어린 이저드 님을 안고 지가 독화살을 다 맞는 바람에 헤이든이 죽을 뻔했거든요. 그땐 주변이 난리도 아니라 정신이 없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계속 생각나더라고. 천둥벌거숭인 줄만 알았더니, 다른 면도 있었고.”

린다는 그때를 회상하는 듯 인상을 살짝 구겼다.

사실 그때 반했다기보다는 그때가 계기였던 것 같았다. 아, 이 자식은 사고를 어마어마하게 치니까 잘 지켜봐야겠다, 하다가 계속 그를 지켜보게 된 것이다.

“아아, 그게 계기가 돼서…….”

아델라는 고개를 위아래로 열심히 끄덕였다.

“그러는 아델라 님은?”

헛. 질문해 올 줄 몰랐는데.

아델라는 살짝 난감한 표정을 하다가 주변을 살피고 린다 곁으로 가까이 붙었다.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은밀하게 하려는 것처럼.

“비밀인데요.”

“응.”

“처음엔…….”

“응, 응.”

아델라가 언제부터 이저드를 좋아했는지 린다도 궁금해서 그녀의 뜻대로 같이 조그맣게 맞장구쳐 줬다.

“어…….”

“어?”

“얼굴…….”

그렇게 말하는 아델라의 얼굴이 새빨개지는 게 보였다.

“첫 만남부터…… 반해서…….”

아델라의 뒷말이 점점 작아졌다. 린다는 그녀를 보며 놀란 눈을 하다가 웃었다.

“푸하하! 그런 낌새도 못 느꼈는데요! 아델라 님, 안 친할 땐 표정이 극과 극이구나! 아, 극이군요.”

“저도 몰랐습니다. 첫 만남이라면 각하께서 호위병 제의를 했을 때 아닙니까?”

“……?”

‘음? 웬 남정네 목소리가?’

아델라는 의아한 표정으로 소리가 나는 곳을 돌아보았다.

“헉! 아, 아리스 겨엉?”

아까보다 더 놀란 표정의 아델라가 민망함에 목소리가 약간 높아졌다.

“아, 저도 있습니다. 영애.”

아리스에 이어 헤이든까지……. 헤이든은 아리스와는 반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아델라는 자신이 이저드의 얼굴만 봤다(?)는 걸 이저드와 친한 사람들이 알게 되자 민망함에 귀까지 새빨개졌다.

계, 계기를 말한 거였는데. 계긴데! 계기일 뿐인데!

그렇게 속으로 열심히 외쳤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델라는 이미 얼굴만 보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물론, 각하께서도.”

“예에?!”

아델라는 몸이 뻐근한 줄도 모르고 벌떡 일어섰다. 안 그래도 큰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자 아리스가 조금 민망해져 허허 웃었다.

“죄송합니다. 농담이었어요.”

“후어어어어…….”

그의 말에 다리에 힘이 빠진 듯 아델라가 다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저 심장 떨어지는 줄…….”

“뭘 그렇게 놀라고 그럽니까. 계기야 상관없지 않나?”

지금 마음껏 사랑하고 알아주면 되는 것을.

“맞아요. 각하께서도 영애께 이성으로서 느낀 계기가 첫날밤인데, 상관없지 않나요?”

헤이든이 린다의 곁에 앉으며 말했다. 그의 말에 린다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음? 그래? 난 그때부터 달라졌다고 느끼지 않았는데. 왜, 그― 아델라 님 수비병 때부터 꼬박꼬박 챙길 때.”

“그땐 호기심 아니었습니까?”

이번에는 아리스가 다가오면서 물었다.

“자기 사람인지 아닌지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그렇게 대할 리가요. 각하가 친절한 건 맞지만, 선을 긋고 대하죠. 그리고 원래 계기는 사소한 거거든요? 호기심이 호감이 되고, 호감이 사랑이 되고, 뭐 그런 거지. 원래 궁금해서 사람을 지켜보고 눈으로 좇다 보면 안 보이던 점도 보이고, 관심이 생긴다니까?”

“아, 나한테처럼?”

헤이든이 씩 웃자, 린다가 고새를 못 참고 끼어드느냐며 웃었다.

“그러고 보니…… 첫날밤 이후로 태도가 점점 바뀌긴 했는데……. 전 제가 그때 실수해서 그런 줄 알았어요.”

“무슨 실수?”

린다를 포함한 셋이 궁금증 가득한 표정으로 아델라를 보았다.

“잠옷이…… 막 비쳐서 엄청, 야했거든요. 그게, 제가 입고 싶어서 입은 건 아니고…… 하녀분들이 입혀 주셔서…….”

아델라가 쑥스러움에 고개를 숙이자, 셋은 서로 눈빛 교환을 하며 씨익 웃었다.

“에이, 그런 걸로 넘어갈 분은 아니시죠. 여태 보신 여자분들만 몇인데.”

헉, 역시 이저드가 너무 잘생겨서 침대로 뛰어든 여자들도 많았던 건가? 그래서 자신을 그렇게 돌같이 볼 수 있었던 건가!

“그렇죠, 그렇죠. 각하는 그런 거에 꿈쩍도 안 하시죠.”

“맞아요. 그럼 첫날밤은 상관이 없겠네요.”

셋은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사실 아델라를 놀리기 위해 짜고 그런 대화를 나눈 건 아니었다. 저쪽 수풀 어딘가에서 귀 끝이 빨개졌을 이저드를 놀리고 있는 거였다.

“그렇겠죠? 사실 저…… 몸매엔 자신 없거든요.”

셋이 놀리고 있다는 걸 모르는 아델라가 한참 잘못 짚어서는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였다.

셋은 저쪽 수풀 어딘가에서 사실이 아니라고 외치기도, 그렇다고 외치지 않기도 뭐했다. 게다가 난감해하고 있을 누군가가 생각나 웃음을 참으려 각자 고개를 돌렸다.

‘각하…… 아직 갈 길이 머네요.’

린다가 입을 가리고 웃으며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몸매든, 얼굴이든, 목소리든, 혹은 성격이든, 그 어느 부분이든 안 예쁘고 아름답지 않은 부분이 어디 있을까. 서로에게 빠진 순간, 이미 단점은 단점이 아니게 된다는 것을 둘은 아직 잘 모르는 듯했다.

수풀 속에서 차마 나오지 못하는 이저드도, 자신의 매력이 어딘지 고민하는 아델라도, 그들 눈에는 그저 귀여운 커플의 일상처럼 보였다.

지금 이렇게 이저드를 놀리고 있었지만, 그들은 진심으로 이 둘이 오래가기를 바랐다.

* * *

레널드가 수도로 돌아왔다. 그는 복귀하자마자 왕한테 보고를 올리기 위해 제복을 갖춰 입고 바로 왕을 알현하러 궁으로 향했다.

레널드는 넓은 궁의 복도를 걷는 내내 궁 안이 평소와는 다르다는 걸 감지했다. 원래라면 곳곳에 있어야 할 왕실 기사단원들이 없었다. 띄엄띄엄 왕궁에 배치된 인원은 일반 병사들이 전부였다.

그는 알현실에 다가갈수록 점점 더 이상함을 느꼈다. 다른 곳과 비슷하게 그곳에도 왕실 기사단원 딱 두 명만이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전하께서 날 기다리셨나? 무슨 일이지?”

“들어가 보시죠.”

그들은 레널드의 물음에 답하기는커녕, 묵묵히 알현실 문을 열어 주었다.

‘이상한데…….’

커다란 방 안에는 왕실 기사단장과 단원들 몇, 그리고 왕이 있었다. 짧은 흑발의 푸른빛 눈동자를 지닌 왕이 고갯짓으로 레널드에게 건너편에 앉으라고 신호를 보냈다.

레널드는 의아함을 느꼈지만,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의 건너편에 가서 앉았다.

“혹시 절 찾으셨습니까?”

“그래.”

“무슨 하명하실 일이라도…….”

툭.

레널드가 미처 말을 끝마치기 전에 기사단장의 품에서 나온 무언가가 레널드의 앞에 던져졌다. 비교적 얇은 책 한 권이었는데, 레널드는 제목을 읽을 수 없어 의아한 표정으로 그것을 보고 있었다.

“뭔지 모르겠나?”

왕이 물었다.

“예…….”

레널드는 영문을 몰라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서.”

“마법서요?”

왕이 짧게 알려 주자 레널드가 놀라면서도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책을 보았다. 세상에 그런 소설(?) 같은 이름의 책도 있구나, 싶었다.

‘그런데 이걸 왜……?’

레널드는 순수하게 감탄하다가 의아한 표정으로 왕을 바라보았다.

“경의 여동생이 가지고 있던 거라는데.”

“예? 제 동생이 이런…… 음……. 사기, 아니, 동화 같은…… 책을요?”

레널드는 사기 치는 것 같은 책의 제목을 듣고 이걸 왜 자신한테 보여 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왕한테 ‘그게 뭐요?’ 라고 하기에는 그럴 배짱도 없었다.

“정말 이게 뭔지 몰라?”

“아…… 예, 예. 방금 마법서라고 하신 건 들었습니다만…… 제가 뭘 알아야 하는 건지는 잘…….”

“그래, 마법서! 흑마법사들이 꼭꼭 숨겨 두고 삿된 술수를 기록해 둔 책이네!”

레널드의 반응이 답답했던지, 결국 왕이 이 책이 뭔지 전부 알려 줬다.

“……예?”

레널드는 자기가 잘못 들은 줄 알고 놀라서 조금 늦게 반응을 보였다.

“이렇게 몰라서야…… 쯧쯧.”

왕은 레널드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에 아주 조금 안심했다. 적어도 자신을 배신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으니까.

“정말 전혀 모르고 있었나? 하긴, 경의 동생은 분명 과거에 오해를 벗었는데 이런 걸 가지고 있는 게 이해가 안 되긴 할 거야.”

‘누구지? 누가 이딴 걸 보낸……!’

―벤슨! 벤슨 크롤!

레널드가 인상을 구겼다. 바로 사태를 파악한 그는 푹신한 알현실 소파에서 일어나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오해십니다, 전하! 그 흑마법사의 말을 믿지 마시옵소서!”

“흠, 무슨 오핸지 들어나 보지.”

“그놈이 지금 저희를 농락하고 있습니다. 흑마법이 제대로 발동되지 않은 것을 제 동생의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자신의 실수라고 하면 죽을 게 뻔하니까요!”

“그런 말을 했긴 해. 경의 동생이 자신의 흑마법을 방해하고 있다더군.”

역시! 레널드는 벤슨과 했던 대화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그건 오해입니다! 제 동생은 흑마법을 쓰지도 못 할뿐더러, 흑마법 이야기만 들어도 어머니 일 때문에 벌벌 떠는 아입니다!”

“그럼, 이 흑마법서는 왜 경의 동생이 가지고 있지?”

왕의 물음에 레널드는 힐끔 책을 한 번 보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그 흑마법사의 간계일 확률이 높습니다.”

레널드는 아델라가 자신한테 정체를 숨길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아니면?”

“그, 그건……. 아델라가 흑마법서를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일단 읽지도 못하고, 흑마법서는 흑마법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닙니까? 아델라는 흑마법사가 아니니 정보를 얻을 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경의 동생이 흑마법사가 아니라는 증거가 있나? 우리의 계획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증거는?”

“있습니다!”

왕의 물음에 레널드가 이번만큼은 우렁차게 큰 소리로 대답했다.

“호오? 있다?”

“예!”

“그게 뭐지?”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서 아델라가 이 일을 하는 목적을 정확하게 알아 왔습니다. 들어보니 그 확실한 목적 때문에라도 아델라는 이 계획이 성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델라한테는 흑마법사 표식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놈을 방해하는 흑마법을 쓰지도 않았습니다.”

왕은 레널드의 말에 눈을 내리깔고 턱을 매만졌다. 오랫동안 왕실에 충성하면서 레널드가 그한테 거짓을 고한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흑마법사의 말을 아예 무시하기에는 자칫 이 계획이 실패로 돌아갈지도 몰랐다.

“근데 왜 벨제프 자작은 자기 딸이 흑마법사라고 그러지?”

“……예? 그게 무슨…….”

왕이 자신의 아버지를 만날 여유는 없었을 텐데?

레널드는 의아하게 생각하고, 혹시나 하고 아버지를 저택에 구금하라고 보냈던 왕실 기사단 몇 명을 슬쩍 보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레널드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 남자의 헛소리를 보고하다니…….’

사방이 적이라 한시도 방심할 수가 없었다.

“공작이 위험하다느니, 공작도 자기 꼴이 될 거라느니…… 그랬다지?”

“전에도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자작의 정신이 온전치 못합니다. 저한테 돈을 받아먹지 못하니, 아델라한테 갔던 건데……. 매정하게 내쳐지니 앙심을 품은 겁니다. 괘념치 마시옵소서.”

레널드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왕은 레널드의 뒤통수를 한참 빤히 보다가 흐음― 하고 아직 전부 믿지 못하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제, 제! 제 목숨을 걸고 맹세합니다. 아델라는 흑마법사가 아닙니다. 이 일을 방해할 생각도 없고요! 믿어 주십쇼!”

그는 레널드를 조금 더 몰아세우려 입을 뗐다.

“장담할 수 있나?”

“예.”

레널드는 아델라를 매우 믿는 듯 보였다. 왕은 사실 그러든 말든 상관없었다. 레널드와 아델라를 의심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그럼, 경의 눈으로 직접 확인했나? 동생 몸 어디에도 표식이 없는 걸.”

왕의 물음에 레널드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팔목과 목은 확인했습니다. 흑마법 표식이 없다는 건, 제 동생 본인 입으로 들은 말입니다.”

“경이 직접 확인은 못 했고?”

“아무래도…… 아무리 남매라고 하더라도…… 다 큰 동생을…….”

“결국 직접 확인은 못 했다는 거로군.”

레널드는 왕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의 동생이 공작한테 안 빠진 건 확인했나?”

“옙!”

이번에도 레널드는 자신 있게 외쳤다.

“그럼, 공작은?”

“확실하게 사로잡은 것 같습니다! 제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아델라는 지금 전하의 신하로서 소임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아주 훌륭하게 스파이로서 역할을 잘 해내고 있다는 말일 터였다. 왕의 뜻대로, 이저드의 약점으로써.

왕은 그를 지그시 내려다보다가 흡족하게 웃었다.

“좋아. 그럼 흑마법사인지만 따져 보면 되겠어. 경이 확인하지 못하겠다면 데반트 경한테 맡기지.”

데반트는 왕실 기사단장이었다. 아리스 만큼 크고 듬직한 체구에, 오랜 수련으로 온몸이 근육으로 이루어진 사내였다.

“예? 옛? 그건…….”

레널드가 난처한 표정으로 짧고 붉은 머리에 적안을 지닌 데반트를 힐끔 보았다.

“왜? 역시 장담 못 하겠나?”

“아, 아닙니다! 그건 아니고……, 역시 외간 남자가 동생의 몸을 확인하는 건 좀……. 제가 확인하겠습니다. 제가 직접.”

그 전에 아델라가 남들이 표식을 확인하는 걸 가만히 두고 볼지……. 레널드는 조금, 아니 매우 걱정됐다.

이번에 아델라에게 호되게 당한 레널드는 그녀가 어떻게 나올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저 우락부락한 기사단장한테도 꼬박꼬박 대드는 건 아닐지 걱정됐다.

“과인을 대신해서 확인하는 건데 상관없지. 어차피 확인 절차일 뿐인데. 그래도 영― 경이 불편하다면, 경과 데반트 경이 가슴 쪽만 확인하지. 됐나?”

전혀 안 된 기분이었다.

레널드는 왕이 한발 물러선 이 제안을 안 받아들이면 이 자리에서 바로 내쳐질 것 같았다. 아니면 데반트의 손에 죽든가.

‘벤스으은! 이 개자식! 우리 남매한테 이런 굴욕을 안겨 주다니!’

레널드는 벤슨이 아델라를 의심할 때 그놈을 한 대 쳐 줄 것을 그랬다며 후회했다. 한 대가 뭐야, 지금 기분으로는 계속 팰 수 있을 것 같았다.

“불만인가?”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그, 그 정도는 아델라도 이해해 줄 겁니다.”

이해해 주긴 무슨. 아델라가 자신의 몸을 확인하는 걸 이해해 줄 리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따르기야 하겠지만.

아델라와의 사이가 원래도 돌이킬 수 없었지만, 이대로 흑마법 표식을 확인하러 가면……. 아예 안 보려고 하겠구나, 싶었다. 이러다가 자신을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건 아닐까?

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이후, 이렇게 그의 명을 거부하고 싶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레널드는 밖으로 티를 내지 않으려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래, 그래야지. 아델라 영애 몸에 어떤 표식도 없다면, 그땐 그 흑마법사를 즉결 처분하지. 벌써 몇 년을 기다렸는지. 성과가 없다면 쓸모가 없지. 하지만 흑마법사의 말이 맞을 시에 경이 어떻게 될지는…… 잘 알겠지?”

왕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에 레널드는 알아들었다는 뜻으로 고개를 깊이 숙였다.

“아델라한테 전서구를 보내겠습니다. 수도로 오라고…….”

“아니, 경과 데반트 경이 가. 왕실 기사단을 데리고.”

레널드는 왕의 말을 듣고 눈을 몇 번 껌벅였다. 왕의 의중을 한 번에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 그러니까……. 데리고 오라는 겁니까?”

“흑마법사가 아니면 데리고 와야지.”

음? 그럼 흑마법사면?

레널드는 그게 정말 묻고 싶었지만, 돌아올 대답이 뻔했기 때문에 다른 걸 물었다.

“확인을 하고 데리고 오라는 말씀이십니까? 소인이 우둔하여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확인만 하면 되는 거 아니었습니까?”

아델라가 흑마법사라는 누명만 벗기면 굳이 여기까지 데려올 필요가 있을까? 레널드는 여전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아, 경은 아직 못 들었군.”

왕이 물끄러미 기사단장을 올려다보았다. 왕의 눈빛에 기사단장인 데반트가 입을 열었다.

“그 흑마법사가 보낸 편지에는 아델라 영애가 의심스럽다는 내용과 함께, 이오스와 계획한 일을 빨리 진행하자는 내용도 같이 전달됐습니다. 이오스 왕국에서는 이미 전쟁을 준비 중이더군요. 그래서 답을 줬습니다. 우리도 계획이 틀어지는 걸 원치 않으니, 합류하겠다고요.”

‘계획을…… 바꾼다고?’

레널드는 왜 이렇게 갑자기?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역시 그놈이 초조한 거야. 아직 공작의 상태도 모르는데, 갑자기? 실패했으니까 주변에 온갖 방패가 필요하겠지.’

레널드는 속으로 이를 으득으득 갈았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달려가서 치고 싶었다.

“그럼…… 저희가 펜베르크 성에 가서 아델라를 데려오는 게…… 공작의 허를 찌르려는 겁니까?”

“경이 잘 알아들어서 기쁘군. 이오스가 공작을 쳤는데 계획이 실패해서 일이 틀어졌을 시에 대책은 있어야 하니까. 혹 성에서 나오지 못하게 된다면 아델라 영애만 확보해.”

레널드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헌데, 전하. 펜베르크 성에서 아예 성문을 열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과인의 병사들한테 적의를 보였다간 반역죄로 즉결 처형하면 돼. 이미 우리 쪽 귀족들한테는 펜베르크 성과 수도로 각각 모이라고 기별을 넣어 놨어. 명분은…… 군사 지원이니 거부하지 못할 터.”

왕이 짙은 미소를 띠며 웃었다.

레널드는 전쟁이 거의 확실시되는 이 상황에서 아델라가 걱정됐다. 지금 이 상황을 아무것도 모르고 갑자기 들이닥치면 놀랄 텐데. 그는 왕의 뜻대로 명을 받들면서도 속으로 엄청난 근심에 사로잡혔다.

* * *

오늘도 다른 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상한 긴장감은 계속됐지만, 그들의 일상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아델라는 점심을 먹고 나오는 길에 구름 한 점 없는 푸르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봄이 왔는지도 모르게 지나가더니, 곧 여름이 찾아올 모양인지 공기가 훈훈하게 변했다.

그녀는 그동안 계절의 변화도 못 느끼고 있었다.

‘이번 여름을 무사히 지낼 수 있을까?’

아델라는 맑은 하늘을 감상하며 아주 잠깐 회상에 젖었다. 이 시기에 여름 하늘을 제대로 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과거 도망을 치던 어느 날, 하늘은 저렇게 맑은데, 라고 생각한 적은 있었지만.

“뭐 하세요?”

“……헤이든 경?”

린다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던 헤이든이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는 아델라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아, 린다 경 뵈러 온 거죠?”

“그렇죠. 아델라 님은 잠깐 쉬러 가십니까?”

“네. 아직 시간이 남아서 조금 쉬다 오려고요. 린다 경은…….”

“여기.”

아델라가 린다는 아직 식당에 있다고 말해 주려다가 말았다. 이미 린다가 식사를 마치고 헤이든과 아델라의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네, 여기 계시네요.”

아델라가 웃으며 린다를 돌아보았다.

“그럼, 전 이만!”

하고 빠져 주려고 했으나…… 린다가 덥석 아델라를 잡았다.

“어디 가세요?”

“예? 저 조금만 쉬러…….”

“호위 없이 움직이는 건 안 돼요.”

린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델라가 슬쩍 헤이든을 보자 그도 단호하게 안 된다는 표정을 보였다.

‘그렇다고 둘 다 바빠서 잠깐 짬 내는 시간을 뺏을 수는……. 사람이 눈치가 있지.’

“그럼…….”

아델라는 둘의 오붓한 시간을 지켜 줄 방법이 뭐가 있나 싶어 머리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다가 그녀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멀리서도 그 존재감이 확실한 푸른 머리를 하나로 묶은 거구의 남자였다.

“아리스 경! 아리스 경한테 부탁하면 되겠어요!”

“응? 아리스 경?”

“아리스 경이 이 시간에 왜……?”

아델라가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정말 아리스가 이쪽으로 빠르게 걸어오고 있었다. 린다와 헤이든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곳을 바라보았다.

아리스의 분위기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무서운 기세로 셋 앞에 도착한 아리스는 곧바로 본론을 말했다.

“모두 여기 계셨군요. 마침 잘 됐습니다. 저랑 같이 가시죠.”

“예, 예?”

아리스는 뭐가 그리 급한지 그렇게 말하며 셋을 재촉했다.

셋은 여태 이런 적이 없었던 아리스의 재촉에 당황하면서도 빠르게 그를 따랐다. 아리스는 평소에도 표정이 풍부했던 사람은 아니지만, 이렇게 잔뜩 굳은 표정을 짓는 사람도 아니었다. 셋은 아리스의 표정에 덩달아 긴장했다.

똑똑.

아리스의 보폭을 따라잡으려 빠르게 걸음을 옮겼더니 금방 이저드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들어오게.”

아리스는 이저드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급히 문을 열었다. 그러곤 바로 무슨 말을 할 것처럼 굴더니, 사람들이 방 안으로 전부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

이저드는 아리스의 평소와 다른 태도에 의아함을 느끼면서 책상에서 일어섰다.

“일단 다들 소파에 앉지.”

그렇게 말하며 이저드가 먼저 소파에 앉자, 다들 그의 말에 따라 모두 소파에 앉았다. 아리스를 제외한 이들의 얼굴에는 전부 의아함이 서렸다. 모두가 자리에 앉은 것을 확인한 아리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출전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장소는 사칠 인근 지역입니다.”

탁.

아리스가 품에서 왕의 인장이 찍힌 편지 한 통을 꺼내 테이블 위에 두었다. 왕의 칙서였다.

그들은 출전 명령에도 크게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워낙 자주 있던 일이라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이곳에서 놀란 표정을 짓는 건 아델라뿐이었다.

‘시기가 좀…… 빠른가?’

아델라도 많이 놀란 건 아니었지만, 이저드의 상태가 확인되지도 않았는데 전쟁이 터진 게 조금 이상했다.

“어? 사칠 쪽에서는 보고가 오지 않았는데요?”

헤이든이 의아하게 물었다.

“기습이었고, 아무래도 사칠 쪽에 헤이든 경이 보낸 감시자는…… 전쟁에 휘말린 듯합니다.”

헤이든이 사칠에 보내 놓은 이한테 보고를 받은 건 불과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움직임은 없다고 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기습할 수가.

“그리고 이건…….”

아리스는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아 바로 다시 말을 이었다. 그는 또 다른 편지들을 품에서 꺼냈다.

“북쪽 지역 귀족들, 남쪽, 서쪽 지역 귀족들의 동태가 이상하다는 보고서입니다. 저희 측 사람들이 보내온 편지입니다.”

린다와 헤이든이 아리스가 꺼낸 편지들을 각자 가져가서 유심히 읽었다. 편지의 내용이 궁금했던 아델라는 린다의 옆에서 기웃거렸다. 자신이 봐도 되는지 몰라서였다.

린다는 그런 아델라를 보며 픽 웃고는 자신이 읽는 편지를 같이 볼 수 있게 편지를 기울였다.

편지의 내용은 대략, 왕의 측근들에게 군사적 움직임이 보인다는 거였다. 아델라는 이게 무슨 뜻일까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그사이, 아리스는 아직 보고가 끝나지 않았는지 품에서 뭔가를 더 꺼냈다.

“그리고, 이건…… 방금 린다 경한테 올 소식을 제가 먼저 받았습니다. 수도에 있는 세작한테 전서구를 보내셨다고…….”

“네, 맞아요. 걸리는 게 있어 제가 보냈습니다. 생각보다 빨리 답이 왔네요.”

이번에는 이저드가 그 편지를 받아서 펴 봤다. 쭉 글을 읽던 그의 미간이 미미하게 구겨졌다.

“왜 그러세요? 뭐라고 적혀 있는데요?”

린다가 궁금해서 물었다.

“왕실 기사단 상당수와 군사들이 수도를 빠져나갔다는군.”

“어디…….”

린다가 어디냐고 물으려다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보나 마나 뻔했다.

“행군 방향으로 보면 펜베르크 지역이라는군.”

역시 예상대로였다. 수도에 숨어 있던 왕이 군사를 일으켜서 향할 곳은 몇 군데 없었다.

“왕은요?”

“왕은 궁에서 나오지 않았다네.”

자기는 궁에 있고, 수족들만 부린다라……. 린다는 겁이 많은 놈한테 박수를 쳐 줘야 하나 주먹을 날려 줘야 하나 고민했다. 둘 다 할까?

‘사칠에서는 전쟁이 터져서 각하는 출정해야 하고, 왕의 부대는 펜베르크 성을 향하고 있고…….’

모든 이야기를 듣고 머릿속을 정리한 린다는 인상을 확 구겼다. 이 상황이 왜인지 낯설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군. 시기가 좀 빠른가?”

린다가 어디에서 본 상황인지 생각하는 사이, 이저드가 아델라를 보며 물었다.

“살짝 빠른 감이 있지만, 아마 이때쯤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좀 이상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각하의 상태를 확인도 안 하고, 자세히 알지도 못하는데 시작됐다는 거죠.”

“내 상태와 상관없이 지금 당장 터뜨려야 할 이유가 있었나 보군.”

아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저드나 아델라가 떠오른 인물은 한 명뿐이었다.

흑마법사.

그가 여태 왜 잠잠하나 했다.

“린다 경.”

“예.”

“혹, 내가 왕실에 잡혀갔던 날을 기억하나?”

예감이 안 좋아서 인상을 팍 쓰고 있던 린다를 향해 이저드가 묻자, 린다는 그제야 이게 어디서 많이 본 상황인지 생각해 냈다.

“허……. 이 자식들이 그 더러운 수를 또 쓴다고요? 그 아버지나 그 아들이나.”

린다의 입에서는 서슴없이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이저드가 린다의 반응을 살피며 부드럽게 다시 물었다.

“기억할 수 있겠나?”

“예, 기억납니다. 제가 모시던 분을 잃은 사건인데, 어떻게 잊겠습니까.”

린다의 눈빛은 당장에라도 누군가를 죽일 기세로 활활 타올랐다. 그녀는 그때만 생각하면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이저드가 그때의 상황을 린다한테 물은 이유는, 그 자신은 너무 어릴 때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고, 헤이든과 아리스는 당시 펜베르크 성에 있지도 않았던 때였기 때문이다. 갓 호위병으로 들어왔던 린다만이 정확한 상황을 알고 있었다.

“이오스가 호시탐탐 이쪽 지역을 노려 온 건 아시죠? 그날도 다른 날과 비슷했습니다. 당시에는 이오스와 크고 작은 전쟁이 하도 빈번해서, 전대 공작님께서 출정이 잦으셨죠.”

그날도 이저드의 아버지, 그러니까 당시 펜베르크 성의 성주였던 제스트윈 공작은 의심 없이 출정을 나갔다. 왕의 부대가 펜베르크 성으로 향하는 줄 모르고.

뒤늦게 수도에 있던 귀족이 소식을 알려 왔지만, 이미 왕이 펜베르크 성 인근에 도착한 후였다.

“그들이 펜베르크 성으로 밀고 들어온 명분은 하나였습니다. 군사 지원. 펜베르크 성 주요 부대가 빠졌고, 전쟁의 규모가 크니 왕이 직접 지원에 나섰다는 겁니다.”

그냥 들으면 왕이 나라의 위기에 대처하려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니 그가 공작한테 우호적이지 않더라도 당시 수비대에서는 성문을 열어 줄 수밖에 없었다. 열어 주지 않았다간 왕의 명을 거역한 죄로 처형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펜베르크 성을 지키는 많은 이들은 왕의 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처신을 잘못하면 그들이 모시는 주인인 공작의 명성에 금이 갈 게 뻔했다. 어쩌면 이걸 빌미로 공작을 몰아세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후의 상황은 아시다시피.”

린다는 일부러 짧게 말을 끝냈다.

공작 부인은 겁간당하고, 어린 이저드는 군사들의 손에 이끌려 왕궁으로 잡혀 갔다. 전장에서 급하게 돌아온 제스트윈 공작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내의 싸늘한 주검을 마주해야 했으며,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잡혀간 어린 이저드를 찾으러 수도로 향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내가 왕에 의해 죽었음에도 그는 이저드를 무사히 데리고 오기 위해 그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이 모든 걸 직접 말하기에는 이저드가 당시에 받은 충격을 알기 때문에 린다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선왕은 지독히도 미친 사람이었다. 린다는 솔직히 더한 욕도 할 수 있었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단어가 ‘쓰레기’밖에 없어 통탄했다.

그놈이 이딴 일을 행한 이유는 별것 없었다. 거슬리니까.

원래 제스트윈 공작가와 왕가는 틀어질 일이 거의 없었다.

왕족들은 제스트윈 공작가를 이용해 이오스를 성공적으로 견제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스트윈 공작가는 수도로는 절대 올라오지 않는다는 전제로 지금의 풍요로운 펜베르크 지역을 받았다. 국경 지역이라 전쟁이 좀 빈번하긴 해도, 펜베르크 지역이 비옥한 땅임은 확실했다. 이오스가 그렇게 아등바등 노리는 이유도 여기 있었다.

어쨌든, 공작은 선조들의 뜻에 따라 그저 자국민을 지키기 위해 이오스 왕국의 공격을 막아 냈지만, 결과적으로는 왕보다 명성이 높아져 왕으로부터 시기를 샀다. 또한 선왕은 공작 부부를 질투했다. 망가졌어야 할 그녀가 너무나 밝게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작 부부의 단란한 가정사가 주변에 알려지면서, 공작 부인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은 점점 사라졌고, 몇몇 가문들에서는 공작 부인을 뵙고 싶다며 초대장도 보내 왔다. 덕분에 그녀는 차츰 주변과 교류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공작가에 안정이 찾아오는 듯싶었다.

왕이 그 소식을 듣고 공작을 시샘하고 질투하지 않았다면, 아마 모두가 평화롭게 사는 미래가 찾아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들이 겉보기에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이 왜 거슬렸는지 잘 모르겠으나, 선왕은 그랬다.

린다는 딱히 선왕의 정신 상태를 파악하고 싶지 않았다. 알아서 뭐 하겠는가. 더럽고 토 나오고 열불이 날 것을.

“아버지가 자리를 비웠기에 왕을 막을 이가 없었지. 그래, 기억나네.”

이저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저드가 린다한테 과거의 이야기를 물었던 이유를 알게 된 아델라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녀도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이 됐다.

모두의 시선이 입을 연 아델라한테로 향했다.

“……이번 계획에 위협을 느꼈다면, 절 잡아가려고 하겠네요. 각하를 죽일 방법이 없으니, 절 이용할 테고요.”

“무슨 명분으로 잡아갈지는 모르겠지만, 그렇죠.”

아델라와 린다의 대화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하지만…… 너무 걱정 마세요. 각하께서 저한테 그 일을 물어본 데에는 이유가 있는 거죠?”

린다가 씩 웃으며 아리스와 이저드를 번갈아 보았다. 린다의 시선을 따라 둘을 보던 아델라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셋의 알 수 없는 시선 교환을 읽은 헤이든이 이 상황이 뭘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갑자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헤이든은 별안간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각하! 전에 저한테 말 못 한 거! 그거죠! 저한테 미안하다고 한 그거!”

이 사람들이 또 자기만 모르는 일을 만들어서! 이곳에서 헤이든의 행동을 어리둥절하게 보는 이는 아델라뿐이었다.

“이게 무슨 상황일까요……?”

아델라가 궁금함에 돌아본 곳에는 린다가 있었는데, 그녀는 뭐가 그리 웃긴지 입술을 씰룩였다.

“또 저만 몰랐죠!”

헤이든이 억울해서 외치자 아델라가 살며시 손을 들었다.

“저도요.”

“와―! 저랑 아델라 님만 모르고 셋이 짠 거예요? 아니, 아델라 님은 이제 막 합류했으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어떻게 저한테! 저한테 이래요?”

헤이든이 엄청난 배신감을 느낀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이저드가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일단 앉게.”

“아니, 린다도 알고, 아리스 경도 아는 걸…… 어떻게 저만…….”

헤이든이 풀이 죽어 스르륵 자리에 다시 앉았다. 억울하고 배신감을 느끼는 와중에도 말은 매우 잘 듣고 있었다.

“미안하네. 상황이 이렇게 급해질 줄 몰랐네. 다 설명하겠네. 린다 경이 알게 된 것도.”

“아, 난 눈치만 챈 거야. 엿들어서.”

린다가 당당하게 말했다.

“예? 언제……?”

이번에는 아리스가 조금 놀라서 물었다. 아리스는 이저드가 린다한테 따로 이야기를 해 놓은 줄 안 것이다.

“저 사실 그때 복도에 있었습니다. 선왕이 죽었을 때 제가 보고하러 갔잖습니까, 각하께. 거기에 아리스 경이 계셨죠.”

린다가 말하자 그제야 생각난 듯 아, 하는 짧은 탄성이 아리스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기척을…… 못 느꼈는데요.”

“제가 잘 숨겼죠. 제가, 좀 뛰어납니까?”

린다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답하자, 아리스는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뛰어난 실력자임은 명백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무슨 말인지 모르시는 것 같은데요…….”

아델라가 이젠 아주 그냥 울 것 같은 표정의 헤이든을 살피며 난감해져서 말했다. 자기가 모르는 사실이 지금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헤이든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배신감이 큰 헤이든과 다르게 아델라는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있다는 것에 눈을 빛내며 귀를 열고 가만히 집중했다.

“아, 그게…….”

린다가 난감하게 웃으며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헤이든 경. 노여움을 푸세요.”

그렇게 말하면서 시작된 아리스의 이야기는 헤이든과 아델라가 경악하기에 충분했다.

* * *

앞으로의 계획과 아리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은 전부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했다. 이저드가 출정하기 전까지 그들은 그저 전쟁을 준비하기 바빠 보였다.

‘정말 폭풍 전야네…….’

아델라는 시종들의 도움을 받아 이저드의 갑옷을 직접 챙겨 입히며 그렇게 생각했다.

둘 사이에는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그러자 시종들이 눈치를 보는 실정이었다. 이저드는 가만히 자신의 갑옷을 챙기는 아델라를 보며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몰랐다.

기다려 달라는 말을 해야 할까?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해야 할까?

아니면, 모두 다 잘 될 거라는 말을 해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살아 있어 달라고, 살아 있겠다고, 해야 할까?

“다 됐습니다, 각하.”

시종장 카일이 입을 뗐고, 시종들이 물러섰다.

“잠시 나가 있겠는가.”

카일이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시종들을 데리고 방에서 나갔다. 카일은 이저드의 시선이 줄곧 아델라한테만 붙잡혀 있는 걸 보고 옅게 웃었다.

반면, 아델라는 이저드의 갑옷만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델라.”

그의 부름에 아델라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불안함도 초조함도 없었다. 그저, 조금 멍한 듯싶었다.

“괜찮나?”

“아…… 예. 그냥…… 기분이 조금 이상해서.”

아델라가 평소보다 조금 느리게 말했다.

“저…… 각하.”

이저드가 의아한 눈빛으로 말없이 아델라를 보았다.

아델라는 이저드의 갑옷을 입히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앞으로 펼쳐질 상황, 자신이 해야 할 행동, 앞으로 올 수도 있는 미래 등등을.

“음― 만약에, 진짜 만약에요. 우리가 멀리 떨어지게 된다면요.”

멀리 떨어진다는 말에 이저드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그렇게 된다면, 저…… 기다려 주세요.”

이저드는 아델라가 한 말의 뜻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가겠네. 그대와 떨어지는 일은 없을 거야.”

“하지만…… 각하의 기억에 제가 없을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갈래요. 제가 여기 올게요.”

그 언젠가 아델라가 그런 말을 했었다.

‘제가…… 제가 반드시 이번 생에 각하를 지키겠습니다. 만일 다음 생이 기다리고 있다면 꼭, 다시 찾아가겠습니다. 몇 번이고.’

이저드는 아델라가 이번 일로 자신들의 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걸 알았다. 그녀의 눈빛은 자신을 지키겠다고 했던 그 순간과 달라진 게 없었다. 이미 결심한 것이다. 혹, 이저드가 잘못된다면…….

“그대는 이미 날 지켰고, 날 살렸네. 흑마법이 풀린 지금, 그대가 아는 미래는 오지 않을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겠네. 조금만 기다리게. 금방 돌아올 것이니.”

이저드는 결심을 굳힌 아델라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네. 그 말, 믿어요. 다 믿어요. 전부 믿어요. 그러니까 제 말은…… 진짜 만약이에요.”

이제부터 벌어지는 일들은 미래에는 없었던 이야기였다. 그랬기에…… 아델라는 각오가 필요했다.

흔들리지 않고 이 일을 뚫고 나갈 각오. 불안해하지 않고, 초조해하지도 않고, 이 일을 무사히 마칠 각오.

“대답해 주세요. 저 기다릴 거죠?”

이저드는 기다리겠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면 진짜로 그렇게 되어 버릴까 봐, 그게 겁이 났다. 하지만 그는 아델라의 간절한 눈빛에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한테는 그 말이 너무 간절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 그대의 말대로 정말…… 만약의 일이네. 기다리겠네. 여기, 펜베르크 성에서.”

이저드는 너무도 환하게 웃는 그녀를 두고 가고 싶지 않았다.

“네! 저도…… 기다릴게요. 각하께서 돌아오시길.”

* * *

“음? 으응? 아델라 님은요?”

병사들이 줄지어 기다리는 곳에 나타난 이저드를 본 헤이든이 그의 뒤를 갸웃갸웃 살피며 물었다.

“인사했네.”

이저드는 짧게 대답하고, 자신의 말을 향해 다가갔다.

“싸운 거 아닌가?”

헤이든이 린다의 옆으로 다가가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각하께서는 혼나도 할 말이 없지. 아델라 님이 혼낼 위인은 아니지만.”

“그럼, 왜 혼자 나오셨지?”

린다는 이제 막, 말에 올라타는 이저드를 지그시 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저 모습이 마지막이 되는 건 싫잖아. 이번 같은 상황은 더욱.”

헤이든도 린다의 시선을 따라 말에 올라타는 이저드를 바라보았다.

“실패하거나 성공하거나, 둘 중 하나구나.”

실패하면 백 퍼센트 죽음, 성공하면 모두 살 수 있었다. 앞으로도 편안하게.

이저드는 떠나기 전 말을 몰고 헤이든과 린다의 주변으로 다가왔다. 둘은 고개를 숙였다.

“무사히 다녀오십쇼, 각하.”

“펜베르크 성과 아델라를 부탁하네.”

“예! 걱정 마십쇼.”

그의 부탁에 헤이든과 린다가 크게 소리 내어 대답했다. 둘의 대답을 들은 이저드는 말의 고삐를 쥐고 호위병들과 군병들 사이로 돌아갔다.

이저드를 선봉으로, 그 뒤를 따르는 수많은 무리가 멀리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보던 헤이든이 한숨을 쉬며 린다를 보았다.

“처음으로 같은 구역에서 싸우나 했더니, 우리 또 헤어지게 생겼네.”

헤이든의 투정 아닌 투정에 린다가 피식 웃었다.

“뭐 어때. 다른 공간에 있어도 죽지만 않으면 또 만나는데.”

쪽.

그녀가 헤이든의 목을 잡아당겨 짧게 입을 맞췄다.

“펜베르크 성을 부탁할게. 다치지 말고 무모한 짓 하지 말고 살아서 봐.”

“응. 당신도, 조심해.”

이들 부부에게는 헤어짐이 자주 있는 일이었지만, 이번만큼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경우는 처음이라 조금 긴장했다.

둘은 한동안 꼭 안고 있다가 떨어지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헤어지는 그 순간, 사랑하던 연인을 보던 부드러운 눈빛은 곧 날카롭게 변했다. 서늘하게 빛나는 둘의 눈빛은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았다.

* * *

레널드는 정말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찝찝하고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열에서 뛰쳐나갈 수도 없었다. 여기서 빠져나가면 죽음뿐이었다.

그는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펜베르크 성을 보았다. 굳게 닫힌 철문을 보자, 펜베르크 성은 절대 뚫릴 것 같지 않았다.

“다녀오시죠.”

데반트 기사단장이 레널드한테 고갯짓했다. 레널드는 그의 눈치를 보며 하는 수 없이 말의 고삐를 돌렸다. 줄을 쥐고 있는 그의 손이 약하게 떨렸다.

‘아델라와는 끝이구나.’

아델라를 협박하고 스파이로서 앉힌 게 자신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그래도 아델라를 위해서, 라고 생각했었다. 이 일만 끝나면 아델라와 자신의 앞이 평탄해질 게 뻔했으니까.

그는 그동안의 과정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10년 동안 왕의 측근이 되기 위해 온갖 일을 다 했듯이, 이 시기만 지나면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델라를 공작의 약혼녀로 앉힐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아델라를 위한 일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아델라한테 과연 좋은 일이었을까?

그는 이제야 아델라가 ‘오라버니만을 위한 일’이라고 한 말을 진정으로 이해했다.

왕한테는 아델라가 그저 쓰고 버릴 패 중 하나였다는 것을 레널드는 그제서야 알았다. 자신은 그녀를 장기 말 중 하나로 밀어 넣은 것이다. 후에 이 일이 끝나면 아델라를 구해 주겠다 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문을 열지 마, 아델라. 아니지, 열어야 하는데……. 아니, 근데 열면 아델라가…….’

레널드는 복잡한 심정으로 말을 몰아 굳게 닫힌 철옹성의 성문까지 다가갔다. 주변은 고요했다. 그가 큼큼,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는 소리까지 주변에 퍼질 정도였다.

“저, 전하의 명을 전하러……!”

철컹.

절대 열리지 않을 것 같던 거대한 문이, 레널드가 말도 다 끝마치기 전에 열렸다. 그는 커다란 문이 열리는 걸 넋 놓고 보다가 고개를 숙이며 눈을 감았다.

멀리서 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있던 왕의 병사들이 곧바로 말을 달려 너도나도 성문 안으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데반트는 레널드를 뒤로하고 성에 들어섰다. 첫 구역의 사람들은 모두 대피한 듯, 주변에는 개미 한 마리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에 병사들이 당황한 듯 속도를 줄이며 두리번거렸다.

“부사령관께서 안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계속 가십쇼!”

성벽 위에서 한 수비병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자 왕의 군사들이 두 번째 성문으로 향했고, 레널드도 마지못해 따랐다.

아까 그 수비병 말이 사실인지 성문 앞에 도착하자 문이 저절로 열렸고 그들은 마지막 관문까지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들어갈 수 있었다. 문이 아무 의심 없이 열릴수록 레널드의 죄책감은 더욱 커졌다. 아델라는 자신을 위해 이렇게 길까지 터 주는데, 자신은……!

흙먼지를 날리며 말을 몰던 데반트가 선봉에서 말의 속도를 점점 줄였다. 저 멀리서 이미 마중 나와 있는 아델라가 보였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보고한 대로 햇살처럼 환한 황금빛 눈망울, 결 좋은 진갈색 머리와 작은 얼굴에 눈, 코, 입이 요목조목 들어선 한눈에 봐도 아름다운 외모의 여성이었다.

데반트와 기사단원들은 그녀와 가까워졌을 때 말에서 내렸다. 그녀의 곁에는 말로만 들었던 이저드의 측근, 린다와 헤이든이 함께였다.

“어서 오세요. 전하의 명을 전하러 오셨다고요.”

아델라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자신의 오라버니한테 시선을 힐끔 줬다가 다시 데반트를 바라보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델라 영애. 왕실 기사단장, 데반트 볼란이라고 합니다.”

“예, 전…… 제스트윈 공작 각하의 약혼녀이자 벨제프 자작가의 장녀, 아델라 벨제프입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들어가서 이야기할까요?”

아델라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델라가 친절하게 병사들을 대할수록 레널드의 심장은 벌렁벌렁 빠르게 뛰었다.

자신의 누이한테 할 말이 차마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저, 아델라, 우린…….”

레널드가 간신히 입을 떼는데, 기사단장이 손을 들어 그를 저지했다. 레널드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괜찮습니다, 영애. 들어가서 전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 바쁘신가 보네요. 예, 그럼 여기서 말씀하세요.”

데반트는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자신들을 맞이한다고 공작 저택의 사용인들이 꽤 많이 나온 것 같았다. 아델라를 지키는 수비병들도 포함해서.

그는 눈짓으로 기사단원들이 레널드를 막게 했다. 그들은 조금씩 자리를 이동해서 레널드의 주변을 둘러쌌다. 레널드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그들을 슬금슬금 피했지만, 그들이 레널드를 따라 움직였다.

“실례합니다, 영애.”

“……?”

아델라가 의아한 기색을 비쳤다.

“죄인을 압송하라.”

‘뭐!’

누구의 마음속 외침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거기 있던 모두의 마음이리라.

기사단원들은 전부 알고 있던 일인 듯 아델라를 향해 걸어왔다.

스릉.

아델라에게로 걸어오는 기사단원들을 향해 린다가 검을 빼 들었다. 헤이든은 그런 린다를 말리려고 다가갔다.

“린다 세이즈, 그대는 지금 전하의 명을 거역하는 것인가?”

“죄명을 말해 주시죠.”

“적국과 손을 잡고 나라의 기밀을 넘긴 죄. 여태까지 공작 각하를 속이고 정보를 빼내 이번 전쟁을 발발시킨 죄이네.”

‘하! 흑마법사 놈이 행한 악행을 죄다 덮어씌울 생각이군. 이딴 방법으로 나온다 이거지?’

린다의 눈빛이 전장에 있을 때와 비슷하게 강렬히 빛났다.

“이 정도면 매국노군.”

데반트가 아델라를 멸시하는 눈빛으로 보았지만 아델라는 그에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표정 변화 없이 차분했다.

반면, 그곳에 있던 사람 대부분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믿기지 않아서였다.

레널드 또한 숨을 들이켜며 이해할 수 없는 눈으로 데반트를 보았다. 이 일을 레널드는 몰랐다. 그렇다는 건 왕과 데반트가 레널드를 속이고 일을 진행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증거가 있습니까?”

“예?”

린다가 따지듯 물었다.

“지금, 당장, 보여 줄 수 있는 증거가 있냐는 말입니다!”

“리, 린다.”

헤이든은 속으로 린다를 응원했지만, 말리는 척은 해 줬다.

“그건 전하께서 친히 밝힐 일입니다. 그대가 신경 쓸 일이 아니죠.”

“하!”

데반트의 말에 린다가 대놓고 비웃음을 지었다. 성격이 강하다는 건 익히 들어 알지만, 직접 눈앞에서 보니 작은 몸집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대단했다.

“그럼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밝힐 수는 없네요? 아델라 영애한테 죄가 있는지, 없는지.”

린다의 물음에 데반트는 아차 싶었다. 그의 표정에 린다가 씩 웃었다.

“여봐라. 마차를 준비해라!”

“예? 예?”

“내 말 못 들었어? 가장 크고 화려한 제스트윈 공작가 문양이 새겨진 마차를 가져와.”

린다는 데반트가 아델라한테 날렸던 눈빛 그대로 돌려주었다.

“그대가 지금 누굴 감싸는 건 줄 압니까? 공작 각하를 배신한 사람입니다. 분명 후회할 겁니다.”

“후회하는 게 누구일지는…… 수도에 가 봐야 알겠죠? 아, 너무 긴장하진 마세요. 호위는 저만 갈 거니까. 만약 아델라 영애가 죄인이 아닐 시에는…….”

시에는?

군사들의 귀와 눈이 린다한테 몰렸다.

“아델라 영애를 그대로 다시 데리고 올 겁니다. 물론, 보상도 요구할 거고요.”

그들은 무의식중에 긴장했다가 다시 풀렸다. 분명 린다보다 다 덩치가 있고 큰 기사들인데 그들은 이상하게 자신보다 작은 린다의 기세에 눌렸다.

“그리고. 왜 자꾸 그대, 그대 합니까?”

“음?”

데반트는 뭐가 이상한 건지 몰라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경한테 그대라고 불릴 이유는 없는데요. 린다 경입니다. 제대로 불러 주십쇼.”

자기 할 말을 다 마친 린다가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고개를 숙였다. 정중하게 변한 린다의 태도에 기사단원들은 얼얼한 표정이었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방금, 기사단장한테 지적이란 것을 한 건가?

아무래도 왕의 최측근인 그한테 뭐라고 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으니, 린다의 지적이 당황스럽긴 했다.

기사단원들과 같이 멍한 표정으로 상황을 관망하던 레널드가 잠시 후 퍼뜩 정신을 차리고 데반트를 보았다.

데반트는 레널드와 눈이 마주치자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단호하고 짧게 저었다. 조용히 하라는 뜻이었다. 레널드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어 머뭇거리며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아델라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모두가 숨죽여 마차를 기다리고 있을 때, 레널드는 처음으로 용기 내서 아델라를 힐끔 보았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시선을 돌려야 했다. 그녀의 눈을 본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의 눈 속에는 그 어떤 두려움도, 그 어떤 기대도, 희망도, 그 어떤 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과거, 울며불며 안 가겠다던 아이가 이젠 자신한테 어떤 감정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그는 실감했다. 심지어 분노까지도.

* * *

슥―

이저드는 핏물이 떨어지는 검을 닦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전쟁 초반이라 그런지, 대부분이 팔팔했다. 조금 더 전진해도 좋을 컨디션이었다.

그들이 사칠 인근에 도착했을 때의 광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과거 아델라가 했던 말대로 정복 전쟁이 아니고 학살을 위한 전쟁 같았다.

그는 이것도 흑마법사와 관련이 있는 건가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집요하게 사람을 죽일 이유가 없었다.

적군이 노인, 아이 상관없이 전부 죽여 이저드가 가는 길목마다 시체 더미뿐이었다. 여러 전쟁을 겪었다는 베테랑들도 이오스의 잔인함에 혀를 내둘렀다.

“각하!”

멀리서 파발을 전하러 온 이가 급하게 말에서 내리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세이즈 백작님이 곧 당도하십니다!”

“웨일 후작은?”

“웨일 후작님은 현재 아리스 님과 합류했답니다. 곧 중앙 귀족들까지 합류할 예정이랍니다.”

이저드는 검을 집어넣으며 자신의 말에 훌쩍 올라탔다.

“펜베르크 성의 상황을 알려 주게.”

“현재 성주민들은 모두 대피하였고, 헤이든 경이 수비병들을 이끌며 지키고 계십니다. 아델라 님과 린다 경은 수도로 압송되는 중이랍니다. 저희가 가는 길목에 장난을 좀 쳐 놔서, 수도까지 가는 시일을 늦출 수 있을 겁니다.”

이저드의 미간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압송되는 이유는?”

“아델라 님께서 이오스 왕국에 제베르 왕국의 정보를 넘겼답니다. 스파이라는 증거를 왕이 가지고 있다며. 그래서 왕이 친히 자백을 받아 내겠다며 데리고 갔습니다. 아무래도 흑마법사가 한 모든 일을 덮어씌우려는 것 같습니다.”

“간교한 놈이로군.”

왕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아델라를 데려갈 것은 알았지만, 흑마법사의 죄를 뒤집어씌울 줄이야. 이저드는 주먹을 접었다 폈다 반복하다가 말고삐를 잡고 펜베르크 성 방향으로 살짝 움직였다.

“다음 마을로 움직이지. 세이즈 백작이 오기 전까지 정리하면서 가겠네. 다른 이들한테 그리 이르게.”

“예! 부디 몸조심하시길! 수도에서 뵙겠습니다.”

파발꾼도 급하게 말을 타고 역시 급하게 사라졌다. 이저드는 파발꾼이 사라진 방향을 잠시 보다가 곧 말을 이끌고 다음 마을로 이동했다.

* * *

“벤슨 경이 안 보이네요.”

아델라가 마차에 타서 처음 꺼낸 한마디였다. 아델라의 맞은편에 팔짱을 끼고 앉은 린다가 인상을 구기며 창밖을 힐끔 보았다.

“그러게요.”

아니길 바랐는데.

헤이든이 이저드 출정 전에 일부러 빼놓은 호위병 중 하나가 바로 벤슨이었다. 그런데 그가 어느 순간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전쟁 준비와 출정 준비로 정신없는 틈을 타서 미리 성을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아― 그놈을 한 대도 못 때린 게 열 받네. 어떻게 끝까지 아닌 척하고 도망갈 수가 있지?”

“그러게요. 전 적어도…… 직접 절 죽일 시도는 할 줄 알았는데. 어쩐지 계속 조용하다 했어요.”

회귀하는 동안 흑마법사로 인해 죽은 사람의 숫자는 어마어마했다. 거기에 아델라 하나 보탠다고 크게 달라지진 않았을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힘을 모은 살인마라면 말이다. 그런 그가 먼저 도망칠 줄은 몰랐다. 이런 식으로 주변에 떠넘기고 사라질 줄은 예상도 못 했다.

도대체 벤슨이 바라는 게 뭘까?

아델라는 분명 그게 자신의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목숨의 위협은커녕 벤슨은 도망가 버렸다.

“그렇게 집요하게 각하를 위험에 빠뜨리려고 한 놈이 이렇게 허무하게 도망쳐? 아, 이런 허무함을 안겨 주려고 그랬나? 진짜 만나면 죽인다.”

린다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것도 꿍꿍이가 있는 거겠죠?”

“없다고 말할 순 없죠. 오랜 시간 공들인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 가는 걸 보고 있을 리가 없으니까.”

문제는 이렇게 아델라를 잡아가서 뭘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는 거였다. 왕이 하려는 짓은 대충 알겠는데, 흑마법사가 하려는 짓은 전혀 모르겠다. 린다는 인상을 팍 썼다.

중간에 별일 없었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걔는 도대체 뭐 때문에 각하께 그런 거지? 돈인가?”

“그 오랜 시간 동안 정체를 안 들키고 공을 들인 거라면, 돈 받고는 못 할 짓 아닐까요?”

아델라는 아무리 돈이 좋아도 수비병은 할 짓이 못 된다고 투덜거렸던 때가 생각났다.

사실 이번 생은 절대로 회귀 안 한다! 하고 다짐하지 않았으면 호위병은 진작 포기했을 거다. 수비병도 훈련 양이 어마어마한데 호위병은 그 배였다. 전쟁 중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기 때문에 변칙적으로 그날에 따라 훈련 양을 늘릴 때가 많았다.

“그럼 뭐죠? 원한?”

“음……. 제가 알고 있는 건…… 각하께서 방해돼서. 이오스의 계획에.”

이렇게 오래도록 공들여 준비한 데에는 여태껏 세운 제스트윈 공작가의 업적 때문이었다.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일련의 일들 때문에 이오스는 악에 받칠 대로 받친 상황이었다.

인해 전술도 안 돼, 고서를 뒤져 얻은 별별 전술을 다 써 봐도, 스파이를 보내도 이길 수 없었다. 심지어 아주 과거에 제스트윈 공작의 선조와 사랑에 빠진 이오스의 스파이가 있었는데 이 여인은 제스트윈 공작한테 푹 빠져 나라를 버렸다.

제스트윈 공작가만 만났다 하면 뭐 하나 이오스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 때문에 서자였던 벤슨이 이 일을 맡기로 했을 때, 왕세자의 반대에도 왕은 서슴없이 허락해 줬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벤슨이 성공하면 이오스는 어부지리로 정복 전쟁의 승자가 될 것이었고, 벤슨이 실패해도 이오스에는 큰 타격이 오지 않았다.

그들의 계획은 현 제베르 왕이 이저드와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더 쉽게 풀렸다. 너무 쉽게 풀려서 이번에는 성공할 줄 알았다. 실제로 성공했긴 하지만, 아델라가 회귀하면서 모두 물거품이 됐다.

“계획? 이오스에서?”

“네. 제가 아는 건, 이오스가 전 세계를 지배하길 바랐고, 그 일을 하려면 각하께서 없어야 하거든요.”

유심히 그녀의 이야기를 듣던 린다가 고개를 살짝 모로 기울였다.

“이오스가 각하를 죽이려는 이유는 알겠는데, 벤슨은 왜? 걔…… 그 과거는 확실해. 나라에서 어머니를 죽인 거나 마찬가진데, 왜 돕고 있는 거지?”

린다가 혼잣말처럼 궁금증을 토해 냈다. 그렇다고 벤슨이 이저드한테 원한이 있는가 하면 아니었다. 벤슨은 이저드와 만난 일도 없었을 뿐더러, 어떤 접점도 없었다.

린다의 물음에 아델라도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권력이 탐나서 어머니를 잊었던가, 아니면…….”

덜컹, 덜컹! 덜그럭!

“어어어어어―”

목소리 떨림이 아주 장난 아니었다. 덕분에 아델라는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마차가 엄청난 기세로 덜컹거려서 제대로 된 대화가 되지 않았다. 아델라는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으려 몸에 힘을 잔뜩 주었다. 편안한 표정의 린다와는 대비되는 상황이었다.

‘아니, 이 상황에서 어떻게 저렇게 태연하게 계시지? 놀랍다…….’

린다는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균형을 잡으려 애쓰는 아델라를 보다가 팔짱을 풀고 마차 밖으로 손을 쑥 내밀었다.

옆에서 마차를 호위하던 사람들이 전부 깜짝 놀랐다.

린다의 손이 불쑥 튀어나오자, 기사단원들이 마차와 말을 세웠다. 뒤에서 행렬이 서자, 앞쪽에 있던 데반트가 마차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작은 창문으로 고개를 숙여 안을 살폈다.

“무슨 일이십니까?”

“길이 너무 엉망이라서요. 영애께서 멀미를 하실 것 같답니다.”

데반트가 힐끔 아델라를 보니 안색이 새하얬다. 아델라는 한 손을 입으로 가리고 있었다.

“이쪽 길이 가장 빠른 길이라 마차를 돌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 길은 천천히 지나가죠.”

린다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길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조금, 많이 천천히 부탁드립니다.”

파리한 안색의 아델라가 간신히 웃는 게 데반트 눈에 보였다. 마차를 자주 타고 다닌 건 아닌 것 같았다.

“예, 신경 쓰겠습니다.”

그렇게 창문을 닫고 다시 선봉으로 나간 그는 아주 조금 아델라가 아까워졌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꿋꿋하게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지?

자세한 상황을 모르는데도 그녀는 성에서부터 지금까지 태도에 큰 변화가 없었다. 무서워하는 기색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아는 아델라 또래의 영애 중에 전쟁이 났다는 말과 죄인으로 압송된다는 말을 듣고도 평상심을 유지한 사람은 정말 드물었다. 아니, 나이 지긋하게 먹고 세상 풍파 다 겪어 봤다는 노인들도 저렇게 태연하긴 힘들었다.

그는 레널드가 왜 아델라한테 스파이를 맡겼는지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린다의 불같은 기세에 가려 못 느꼈지만, 아델라의 차분한 기세도 만만치 않았다.

“레널드 경.”

“예.”

레널드는 아델라가 있는 마차가 신경 쓰이는지 계속 힐끔힐끔 뒤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나와 전하께 유감입니까?”

“그럴 리가요.”

레널드의 표정은 마치 해탈한 사람과 같았다. 자신이 뭐라고 그들한테 유감을 표할 수 있을까.

“심려치 마시죠. 공작만 잡으면 경의 동생과 경 모두 전하께 인정받을 겁니다. 이렇게 끝내기에는 아까운 인재 아닙니까.”

데반트는 아델라를 쓰고 버릴 패 중 하나로 봤지만 그녀의 의연함이 마음에 들었다.

‘내 동생을 언제 봤다고…….’

레널드는 그의 미소가 미덥지 못했다. 한번 배신감을 느끼니, 그의 말을 쉬이 믿을 수 없었다. 말은 이렇게 해 놓고 자신한테 위기가 닥치면 언제든 아델라와 레널드를 놓을 사람들이었다.

부기사단장이 되어 말도 못 하게 기뻐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그는 처음으로 힘들게 올라온 이 자리에 회의감을 느꼈다.

“예, 제 누이를 높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분 푸시죠. 전하께서 함구하라 하시어 나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레널드는 슬쩍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널드야 까라면 까야지 별수 있겠는가.

* * *

마차의 고난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어떤 길목은 폭풍우가 몰아친 듯 이리저리 나무들이 쓰러져 있지를 않나, 어떤 길목은 도적 떼가 나타나질 않나, 어떤 길목은 비가 몰아친 듯 곳곳에 물웅덩이가 파여 있었다. 마차가 점점 고난의 길로 향해 가듯, 아델라의 고난도 심해졌다.

그녀는 이쯤 되니 진짜로 토할 것 같았다.

마차를 별로 타본 적도 없거니와 오랜만에 타본 마차가 이런 버라이어티한 길을 가는데 구토가 올라오지 않는 것이 비정상이었다.

‘그런데 린다 경은 어떻게 멀쩡한 거죠?!’

“저기, 린다 경!”

아델라는 두 손으로 입을 막고 그녀를 불렀다. 린다가 의아한 표정을 아델라를 보았다.

“저…… 저 진짜 토할 것 같은데요!”

아델라의 말에 린다는 잠시 놀란 눈을 하더니 곧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나왔어요?”

“아, 아니요!”

“그럼, 아직 괜찮아요.”

‘예에?! 안 괜찮은 것 같은데요!’

아델라가 속으로 외쳤다. 웁, 하고 헛구역질이 나오는 걸 아델라가 손으로 입을 막았다.

“……나왔어요?”

아델라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원래는 놀려 줄까 하던 린다가 아델라의 질린 얼굴을 보고 이쯤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창밖으로 손을 뻗을 때, 덜커덩 하고 마차가 기울어졌다.

“으억!”

린다가 잽싸게 손을 뻗었다. 덕분에 아델라가 마차에 머리를 세게 박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이거 마차에만 앉아 있으면 되는 줄 알았더니, 거의 극기 훈련에 가까운데!

“괜찮아요?”

“이거…… 우리 쪽에서 손 써놓은 거 맞죠?”

“예.”

린다가 아델라의 상태를 눈으로 확인할 때, 밖에서 한 기사단원의 소리가 들렸다.

“괜찮으십니까?”

린다가 인상을 쓰며 창을 열었다.

“이게 뭡니까? 영애께서 다칠 뻔하셨습니다.”

“두 분 다 괜찮으신 겁니까?”

“저흰 괜찮습니다.”

린다가 창밖으로 머리를 빼서 주변 상황을 살폈다. 마차 뒷바퀴가 거의 늪처럼 변한 물웅덩이에 푹 박혔는데, 무게가 있었던 탓인지 아주 깊게도 박혔다.

‘제대로 박혔네.’

“밖으로 나오실 수 있겠습니까?”

기사단원의 요청에 린다는 알겠다며 기울어진 마차의 문을 열었다. 기사단원이 린다가 잘 내려올 수 있게 손을 뻗었으나 그녀는 이미 바닥에 착지한 후였다. 그는 민망함에 손을 거뒀다.

아델라는 먼저 내린 린다의 손을 잡고 무사히 바닥에 발을 내디뎠다.

‘워허― 살 것 같아!’

흙바닥이 그리워질 줄이야. 아델라는 찌뿌듯한 느낌에 목과 어깨를 이리저리 풀었다.

“근데 이거…… 뺄 수 있어요?”

아델라가 웅덩이에 깊이 빠진 뒷바퀴를 보며 물었다.

“걱정 마십쇼. 저희가 금방 처리하겠습니다. 물러나 계세요.”

그에 아델라와 린다는 마차에서 멀찍이 멀어졌다.

“잡혀가기 참 좋은 날씨네요.”

낑낑거리며 마차를 빼려는 사람들을 여유로운 표정으로 보던 린다가 중얼거렸다. 아델라는 린다의 시선을 따라 이제 막 노을이 지고 있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주황빛으로 물든 햇살은 변함없이 주변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었다.

“진짜네요……. 전 이상하게 이렇게 날씨가 좋은 날이면, 꼭 무슨 일이 터지더라고요.”

“불길한 소리네요.”

“지금보다 더 불길할 수가 있을까요?”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죠.”

린다와 아델라는 그들이 애써서 마차를 빼내든가 말든가 멀리서 지는 석양을 구경하기 바빴다.

누가 보면 마실 나온 줄 알겠다.

“아, 아델라.”

아델라의 시선이 자신을 부르는 오라버니한테 옮겨졌다. 그는 아까 전부터 멀리에서 쭈뼛쭈뼛 그녀의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왜요, 오라버니?”

아델라가 빙그레 웃었다. 더 다가가려던 레널드가 그녀의 미소에 멈췄다. 그는 아델라가 화를 내는 것보다 아델라의 저 미소가 더 무서웠다. 선을 긋는 듯한 저 미소가.

“그, 미안하다. 네가 못 믿을 거 아는데 그냥…… 사과하고 싶었어.”

아델라는 그를 빤히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라버니 원망 안 해. 기대가 있었어야 실망을 하지.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아델라는 레널드를 딱히 탓할 생각이 없었다. 그한테는 이제 어떤 감정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망, 분노, 짜증, 그런 모든 감정이 전부 부질없게 느껴졌다.

어차피 지금 자신도 레널드를 속이고 있어서 더는 별 감정이 들지 않았다. 이번 일이 끝나면 어떻게든 관계가 정리될 터였다.

“하나 놀라운 건 있네. 사과라는 걸 모르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오라버니한테 사과를 다 받고.”

이번 생이 처음이었다. 그한테 사과를 받는 건. 하긴, 회귀 동안 그를 다시 만난 것도 처음이었으니 사과도 처음인 게 당연했다.

“수도에 가서 만약 너한테 이번 일을 덮어씌우면…… 나도 가만있진 않을 거야.”

그런 건 진작 하지 그랬니. 아델라는 어떤 기대도 없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아니야. 오라버니가 뭐 할 필요 없어. 어차피 인생은 죽는 거 아님 사는 건데, 뭐.”

아델라가 싱긋 웃었지만, 그녀의 눈은 전혀, 절대 웃고 있지 않았다. 레널드는 아델라의 인생 포기(?) 발언에 눈동자가 떨렸다. 아델라한테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겠는데, 무슨 말을 입에 담아야 할지 몰랐다.

그가 뭔가를 말하려고 입을 열려 했다. 그러나 시간은 그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영애! 다 됐습니다! 타시죠!”

마차에 말들을 더 붙여 끌고, 밀고 하던 병사들이 그녀를 불렀다. 아델라는 레널드를 한번 훑어보고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마차로 향했다. 아델라가 쌩 지나가자 린다와 레널드만 남았다.

린다가 무표정하게 입을 열었다.

“경, 아델라를 위해 전하를 등질 수 있겠어?”

“예? 뭐?”

“전하랑 척질 각오 없으면 빠져. 그 알량한 마음으로는 네 가족 못 지켜.”

린다는 레널드가 곱게 보이지 않았다. 왕의 최측근이니까 적이기도 했고, 아델라를 이용해 먹은 후에 뒤늦게 후회하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델라의 오라버니였으니까, 나름대로 충고를 해 준 거였다. 말이 곱게 나오지 않아서 문제였지만.

그녀는 레널드한테 시선도 주지 않고 아델라를 따라 마차로 향했다. 홀로 남겨진 레널드는 멍한 상태로 두 여인이 마차에 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전하랑 척질 각오라니……? 왜 그런 각오를 해야 해……?’

레널드는 기사단원이 되고 한 번도 왕의 말을 거역하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아니지. 보통 그렇지 않나? 왕을 거역하다니? 그런 생각 자체가 불손한 거 아닌가?

‘호, 혹시 지금 저 여자…… 나한테 선택하라고 종용한 건가? 설마, 전하와 맞서서라도 아델라를 보호할 생각인 거야? 혼자? 혈혈단신으로?’

레널드는 너무 놀라서 마차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이지? 어떻게 그런 무모한 생각을 할 수가 있지?

레널드는 린다가 그렇게까지 아델라를 보호하는 이유를 찾지 못했다. 가족도, 친구도 아니며, 심지어 같은 편도 아니었다. 레널드가 보기에는 스파이인 아델라가 린다를 속이고 있었으니까.

레널드의 입장에서 린다는 속고 있는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아델라를 지킬 생각이었다. 반면 자신은? 아델라의 편이라고, 아델라가 위험에 처할 일은 없다며 호언장담해 놓고 그녀를 사지로 몰고 갔다.

레널드는 자신이 정말 아델라가 이렇게 될 걸 예상하지 못했는지 생각해 보았다.

아니다. 레널드는 아델라가 수많은 패 중의 하나란 걸 이미 알았다. 그래도 자신이 더 높은 자리에 앉으면 아델라는 비교적 안전할 거라고 자신을 납득시키며 아델라한테 지키지도 못할 말을 내뱉어 왔다.

그는 린다에 비해 너무도 초라한 자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 손으로, 이 자리로, 동생 하나 지키지 못했다.

1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레널드는 한참 동안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주변에서 그를 크게 부르고 나서야 반사적으로 몸이 반응해 걸음을 뗄 수 있었다. 그는 복잡하게 뒤섞이는 머릿속을 정리하지 못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레널드와 군사들이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자, 행렬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불길한 일이 벌어질 것 같다던 아델라는 그 걱정 때문인지 요 며칠 밤늦게까지 잠을 청하지 못했다. 그녀는 건너편 의자에 앉아 있는 린다를 힐끔 쳐다보았다.

린다는 팔짱을 낀 채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주무세요. 며칠은 더 남아서 잘 수 있을 때 자 둬야 합니다.”

아델라의 시선을 느끼고 린다가 눈을 떴다. 아델라는 그녀의 말에 두툼한 담요를 바짝 끌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괜찮겠죠?”

“예, 그럼요. 여기보다 전장이 더 안전할 걸요? 거긴 동료라도 있지, 여긴 우리 둘뿐이니까.”

그럼에도 이저드가 더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각하께서는 더더욱 안전할 거고요. 그러니까 주무세요. 눈감고, 마음 편히 먹고.”

린다는 아델라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굳건한 확신이 어려 있었다. 린다가 그렇게 말하니, 아델라는 마음이 조금 놓였다.

아델라는 그녀의 말대로 눈을 감았다. 마음을 편히 먹으려고 노력하니, 잠이 조금씩 오는 것 같았다.

몇 번 뒤척이던 아델라가 드디어 잠이 들었는지 마차 안에 규칙적인 숨소리가 퍼졌다.

린다는 마차 안에 있는 좁은 의자에 쪼그리고 누워 잠을 자는 아델라를 안쓰럽게 보다가 조심히 마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밖은 모닥불 빛에 비춰 붉은색으로 일렁였다. 린다는 보초를 서는 이들이 이쪽을 쳐다보든가 말든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차와 일정 거리를 두고 주변을 둘러보던 린다가 다시 마차로 돌아와 문 앞에 보초를 서듯 섰다.

‘이상한데. 너무 조용해.’

밤중에 조용한 게 당연했지만, 찌르르거리는 곤충의 소리도, 야행성이어서 바스락거리며 돌아다녀야 할 야생 동물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수풀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만 잠깐씩 들렸을 뿐이다.

“잠이 오지 않습니까?”

린다가 주변의 소리에 집중하고 있을 때, 그녀의 곁에 데반트가 다가왔다.

“전시 중에는 잘 안 잡니다.”

“아…… 여긴 전쟁의 여파가 미치지 않을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쉬십쇼. 저희가 책임지고 수도까지 모시겠습니다.”

“아까는 죄인 취급하시더니.”

“제가 성급했습니다. 경의 말대로 전하께서 명명백백히 밝혀내기 전까지는 귀족의 신분인 걸요.”

펜베르크 성에서는 냅다 죄인 취급하던 사람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니 린다는 기가 막혀서 웃음이 나왔다. 실제로 웃진 않았지만.

“됐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쇼. 전 평소대로 하는 겁니다.”

“아……. 그렇군요.”

데반트는 곧은 눈빛의 린다를 보다가 주변 병사들을 살폈다. 그는 여전히 린다의 옆에 서서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시간이 꽤 흐른 후에도 둘은 미동도 없었다.

“……그 짧은 사이에 영애와 그렇게 친해진 줄은 몰랐군요.”

먼저 침묵을 깬 건 데반트였다.

데반트에게는 린다 곁에 머무는 이유가 있었으니 먼저 입을 연 건 당연했다. 린다는 그가 있든 말든 상관없었다. 아델라만 편한 숙면을 취하면 됐으니까.

“누구랑 친해지는 기간은 사람마다 다른 법이지요.”

“만약 영애가 스파이여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스파이여도 상관없습니다.”

“왜죠?”

데반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각하께서 영애를 지키라 명하셨으니까요.”

“그럼 경은요?”

“제 의견이 중요합니까? 경은 전하의 명에 자기 생각을 집어넣고 일을 진행합니까?”

물론 린다는 제 생각과 판단에 따라 일을 진행하는 때도 종종 있었다. 그녀는 내키지 않으면 아예 임무를 맡지 않았다. 이저드도 그녀가 싫다는 일을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린다가 전혀 다른 대답을 한 건, 그의 나불거리는 입을 닫기 위함이었다. 시끄럽게 계속 자신의 의중을 떠보는 게 짜증났다.

“각하께서 영애께 푹 빠졌다더니, 사실인가 보군요.”

“예, 사람이 달라지셨죠.”

린다는 대충 대답했다. 린다와 데반트는 서로를 보고 있지 않고 앞만 보았다. 데반트는 높낮이 없는 어조로 일반적인 대화를 하듯 물었다.

“그럼…… 영애께 무슨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으면 회군할지도 모르겠군요. 그렇게 사랑하시는데.”

린다한테서 아주 잠깐 말이 없었다. 데반트는 설마 자신이 예상한 게 맞나 싶어 슬쩍 린다를 곁눈질했다.

하지만 웬걸. 당황할 거라 생각했던 린다가 이 상황이 아주 황당하다는 듯이 허, 하고 허탈한 웃음을 날렸다.

“왜 웃으시죠?”

데반트는 린다의 웃음이 언짢아서 물었다.

“각하만 위험하다고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나른하게 웃는 린다가 드디어 데반트를 올려다보았다. 데반트는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나른하게 보이는 그녀의 분위기에는 데반트를 옥죄는 살기가 실려 있었다.

“저 혼자서도 쓸어버릴 수 있습니다. 못 하는 게 아니고, 안 하는 거지.”

“뭐…….”

데반트는 무의식중에 검에 손이 갔다. 린다가 금세 살기를 갈무리하지 않았다면 위협을 느끼고 검을 뽑았을지도 몰랐다.

“푸훕!”

그때, 보초를 서던 몇몇 기사단원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아니, 아무리 각하의 명성이 자자하다지만 허세가 심하시네요.”

그들은 그렇게 말하며 저희들끼리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자신들보다 훨씬 작고 여린(?) 린다가 그런 말을 하니 우스워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린다는 그들의 반응에 딱히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익숙했다. 오랜 호위병 생활을 하면서 이미 많이 들어 본 말이었다.

‘네가? 무슨 네가.’, ‘야, 네가 강하다고 착각하는 거야? 넌 나한테 안 돼.’ 등등 아주 수많은 모욕적인 언어는 다 들어봤다.

“각하가 전장의 사신이신 거지, 경이 사신은 아니잖아요.”

그들 사이에서 위협을 느끼고 식은땀을 흘린 이는 데반트밖에 없었다. 그 말은 린다가 살기를 조절했다는 뜻이었다. 데반트는 아무 표정 없이 서 있는 린다를 힐끔 보았다.

그녀는 그들의 말을 신경도 안 쓰고, 시선도 던지지 않았다. 단지, 수풀 사이 어딘가 매우 먼 곳을 보고 있었다.

“사실 그것도 부풀려진 게 아닌가 싶고…….”

그들은 그렇게 말하며 또 자기들끼리 맞장구치며 웃었다. 결국 데반트가 손을 들어 그들을 막으려고 했다. 어둠 속을 주시하던 린다가 방금 개소리를 지껄인 이들한테 싸늘한 시선을 던지기 전까지는.

“입버릇도 안 좋고, 폼은 엉망진창이고, 몸은 형편없고.”

“예? 아니, 봐, 봤습니까? 누구 몸이……!”

린다가 조곤조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엇보다, 적의 기척도 못 느끼고.”

기사단원에게 그녀의 싸늘한 미소가 날아들었다. 린다는 주변 사람들 다 들으라는 듯이 입을 열었다.

“수도에서 편했나 봅니다. 전쟁의 여파가 없긴 얼어 죽을.”

그 말을 끝으로 린다가 갑자기 검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린다를 비웃던 기사단원 몇이 놀라서 같이 검을 빼 들었다. 데반트도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뭐, 뭡니까!”

“뭐긴요? 기습인데.”

린다가 진심으로 묻는 거냐는 듯이 한심한 눈으로 데반트를 보았다. 린다의 말을 믿지 못하고 다들 어리둥절할 때, 어둠 속에서 ‘억!’ 하는 억눌린 신음이 들렸다.

순식간에 어둠이 이제 막 잠이 깬 기사단원들과 병사들을 덮쳤다.

* * *

“―라! 아델라!”

“으응?”

아델라는 자신을 열심히 흔들어 깨우는 누군가를 흐린 눈으로 보았다.

“일어나! 아델라!”

그녀의 눈앞에 있는 이는 레널드였다. 그는 매우 급한 표정으로 아델라를 억지로 일으켰다.

“정신이 들어?”

“뭐야? 왜……?”

아델라는 느리게 눈을 깜박거리다가 밖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고함과 비명에 강제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뭐야? 린다 경은? 린다 경은 어딨어?”

“밖에서 싸우고 계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이오스 측에서 기습했어. 이럴 시간 없어, 아델라.”

아델라는 놀란 눈으로 자신을 갑자기 담요로 감싸는 레널드를 멍하니 보았다.

“이오스에서? 이오스에서 왕의 부대를 덮쳤다고?”

이오스와 제베르의 동맹이 이렇게 빨리 깨질 줄은 몰랐는데.

“이 자식들…… 우릴 다 속인 거였어. 그놈들, 펜베르크 지역만 달라고 하더니…….”

아, 이 왕놈이 이저드를 죽이는 대신에 펜베르크 지역을 떼어 준다고 했구나! 어떻게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이저드가 죽으면 최전방이 뚫리는 건데, 고작 이저드가 죽도록 싫고 두렵다는 이유로 최전방을 내놓는 멍청이가 어디 있을까. ……아, 여기 있구나.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원래 왕의 부대는 거의 나중에 수도에서 전쟁을 벌이는데 그게 바뀌었다는 건…… 이오스에서 아예 계획을 바꾼 거잖아! 흑마법사다!’

아델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고 했지만, 레널드가 둘둘 싸 놓은 담요에 막혀 다시 앉아야 했다.

“뭐 하는 거야? 이거 풀어.”

“린다 경이 널 책임지고 데려오랬어. 퇴로를 뚫어 놓겠대. 담요가 검은색이니까 눈에 잘 안 띌 거야. 이번만 내 말 들어주면 안 돼?”

“…….”

린다가 한 말이면, 분명 아델라를 위한 거였다.

“내가 전하께 등을 돌릴 수 있을 거라는 장담은 못 해. 그래도 이건 약속할게. 널 죽게 하진 않을 거야. 그때처럼 버리고도 안 갈게.”

‘다 죽는 마당에 그게 무슨 소용이냐고. 진짜 미리 좀 해라, 이, 이! 이 오라버니야!’

그녀는 욕을 하려다가 참았다. 레널드 나름대로 애쓰는 모습을 봐서 참는 거였다.

“아, 맞다. 잠깐만, 잠깐만.”

“왜? 왜?”

아델라가 검은 담요 안에서 부스럭거렸다. 조금 있다가 그녀가 꺼내 든 것은 단검이었다.

“가자.”

그녀가 비장하게 말했고, 레널드는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마차의 문을 열었다.

온 사방에 검을 맞대는 소리로 정신이 없었다.

그는 틈을 보다가 기사단원들이 적군을 벴을 때, 아델라를 데리고 조심히 린다가 향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어린 남자아이가 한 명 있었다.

그는 아버지를 알지 못했지만, 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의 친절로 비교적 행복하게 자라났다. 그런 그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알게 된 건 16살 때의 일이었다.

갑자기 이오스의 병사들이 들이닥쳐 작은 마을의 모든 사람을 잡아들여 가둬 두고 건물에 불을 붙일 때, 그는 아버지를 태어나 처음으로 만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무 표정 없이 마을 사람들을 죽이라 명하고 있었다.

‘이놈이 내 아들이라고?’

‘예.’

그는 방금 자신을 가리킨 이가 처음에는 아버지인 줄 모르고, 활활 타는 건물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곳에는 어머니를 포함한 수많은 마을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었다. 이성을 잃은 그는 병사들을 밀치고 난동을 피우기 시작했다.

‘들어가게 둬. 어차피 얼마 버티지도 못할 텐데.’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죽어도 상관없다는 투로 명령했다.

당시 그의 기억은 조금 조각나 있었다. 유일한 탈출구였던 정문으로 뛰어 들어간 그는 거기에서 죽어 가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그는 어떻게든 사람들을 밀치고 들어가 어머니를 찾았지만, 간신히 찾은 어머니는 이미 죽어 가고 있었다.

건물 안은 아수라장이었으며, 사람들의 공포에 찬 비명만이 가득했다. 어머니도 정신없이 그를 붙잡고 살려 달라고 외쳤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그는 그 비명이 듣기 좋았다. 알 수 없는 기운이 속에서 일렁이는 기분이었다.

그는 그때 처음 알았다. 자신한테 특별한 힘이 있다는 것을.

흑마법이 뭔지도 모르던 그때, 그는 본능적으로 사람들의 절망과 절규, 공포와 분노가 그 특별한 힘을 키우는 방법임을 알았다. 그의 몸속에 피어오르는 힘은, 분명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

그가 죽은 어머니를 안고 멀쩡하게 그 안에서 나오던 날, 그는 기뻐했다.

복수할 힘이 생겼다는 것이.

아직 미약하지만 언젠가 커질 힘이라는 것을 그는 알았다. 마을 사람들의 절규와 공포로, 그의 힘이 자라남을 느꼈으니까.

그는 이 기쁨이 단지 그 힘을 키우면 언젠가 저 사람들한테 복수할 날이 올 거라는 기대 때문인 줄만 알았다.

‘쯧. 목숨이 질긴 건 제 어미를 닮았군.’

그의 아버지는 죽지 않고 돌아온 그를 보며 혀를 차고는 크롤 자작가로 넘겨 버렸다.

왕가의 피가 흐르니 죽이지는 못하겠고, 천민처럼 살게 하기는 싫었다. 그렇다고 왕궁으로 데리고 가자니 사생아인 그를 쥐고 주변에서 자신을 공격할 게 뻔했다. 특히 외척 세력이 왕세자를 왕위에 더 빨리 올리려고 수를 쓸지도 몰랐다.

그의 아버지는 혹, 후에 왕세자가 커서 위협이 된다면 그를 견제할 목적으로 아이를 일단 살려 두었다.

이 일은 극비로 진행됐고 자식이 없었던 크롤 자작이 양자를 들인 것으로 주변에 알려졌다.

그리고 아이는 그 후로 계속 힘을 모았다. 언젠가 자신의 아버지를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며. 그 손으로 많은 사람을 죽이고, 또 죽여서, 아이는 자신의 흑마법을 키워 나갔다. 강해져야 한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 눈빛, 익숙하군. 네 어미가 그런 눈빛이었지. 왕비 자리를 주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하던 그 눈빛이야.’

그리고 그가 다시 아버지와 재회했을 때에는 복수를 위해 사람을 죽인 건지, 사람을 죽이기 위해 복수를 하겠다는 건지 헷갈릴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복수한다는 이유로 당연하게 사람들을 죽였고, 아버지를 만났을 때 그는 이미 누굴 죽인다는 것에 어떤 감흥도 없었다. 그는 그때쯤에 자신이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 이 행위를 멈출 수 없는지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상한 건 그가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는 점이었다. 더 많은 목숨, 더 강한 힘, 더 강한 무언가. 지금보다 더 강해질 수 있다는 욕망. 그런 것들이 그의 마음속에 넘실거렸다.

‘그래서, 넌 뭘 원하지? 너도 내 목숨인가?’

처음에는 분명 그의 목숨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을 죽이는데 일조한 모든 이의 목숨.

하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죽여서 뭐? 아무 감흥도 없는데 왜? 죽이면 그 순간 끝인데, 뭐를 위해서?

그는 이제 딱히 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의 복수로 마음이 편해질 것 같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는 이 알 수 없는 갈증을 해소할 수는 없었다.

더 많은 것을 원했다. 더 강렬한 것을, 더 매혹적인 것을.

‘아뇨. 전 더 많은 걸 원합니다.’

아버지의 목숨은 그가 원하는 길에서 겸사겸사 거두어 가는 하찮은 목숨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 힘만 키운다면 그의 목을 비트는 건 쉬웠다. 그는 아버지를 속이며 그렇게 생각했다.

강해지기만 한다면 자신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생겼지. 처음에는 공작인 줄 알았더니…… 웬 이상한 여자가.’

벤슨은 고요한 밤하늘을 쳐다보며 비소를 터뜨렸다.

그의 앞을 막을 사람 중에 최대의 적은 이저드 하나뿐이었다. 그의 힘이 막강해서 벤슨이 손써 볼 틈이 없었다. 전대 공작이 죽고 훨씬 강해진 이저드를 막을 방법은 없는 듯 보였다.

그러던 중 제베르에서 먼저 협력해 주겠다고 제안했고, 이오스의 왕은 벤슨이 나서서 해 보겠다고 하자 기꺼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성사된 동맹이었지만, 벤슨은 만약 제베르에서 제안하지 않았다고 해도 펜베르크 성에 숨어들었을 것이다. 이저드만 해결하면 모든 게 그의 뜻대로 흘러갈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벤슨은 온몸이 검은 표식으로 뒤덮였음에도 아직도 계속 힘을 갈구했다. 전 세계로 퍼질 죽음의 공포는 또 어떤 기분일지 그는 벌써 기대되었다. 그 여자, 아델라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 기대감에 심장이 뛰고, 흥분되었다.

그런데 그 여자 하나 때문에 모든 게 망가졌다.

‘아버지라는 놈한테 협력한 것도, 제베르 왕한테 신임을 얻은 것도, 여태까지 모아 놓은 마력도 물거품. 전부 다 그 여자 때문에. 그 여자 하나 때문에.’

여기까지 오기 위해 자신이 치른 희생이 너무 많았다. 적어도 벤슨은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전부 죽여 놓고 그는 그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당연한 절차 중 하나라고만 생각했다.

그걸 다 망친 아델라가 나쁜 거였지.

신이 있다면 자신이 어떤 희생을 치르며 여기까지 온 건지 알아 줘야 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그는 신이 없음을 안다. 신이라는 존재가 정말로 실재한다면, 자신을 이렇게 벼랑 끝으로 내몰 리가 없었다. 신이잖은가. 신은 구원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자신의 삶에서 구원인 줄 알았던 이 힘마저 무용지물로 만들다니.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틀림없었다. 자신의 것을 빼앗아 간 존재들은 좋은 옷과 좋은 음식, 좋은 공간에서 행복하게 사는데 자신한테만 이렇게 가혹할 리가 없었다.

가혹하려면 그놈들도 똑같아야 했다. 자기가 잃은 만큼, 그놈도 잃어야 하는 게 맞았다.

“물론― 신이 존재한다면 말이지. 신이 없으니까 내가 하는 건데 왜 그 여자는 방해일까.”

자신의 복수, 계획, 그 모든 걸 방해한 여자, 아델라.

그는 그녀를 용서할 수 없었다. 자신한테 이런 무력감을 준 만큼, 그녀한테도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니까 너도 느껴 봐야지. 자기가 얼마나 할 수 있는 게 없는지. 얼마나 쓸모없는 존재인지.”

그 누구도 벤슨한테 쓸모를 따진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비뚤어진 생각은 이미 오래 전부터 마음속 깊이 자리하고 있었고, 결국 그 화살이 아무런 죄 없는 아델라한테 향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훗날 또 한 번, 아델라의 인생을 바꾸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벤슨은 자신의 능력을 꽤 깊게 신뢰하고 있었다.

그는 멀리서 들리는 싸움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그 속으로 침투했다. 그의 잠복 기술은 호위병 중에서도 손에 꼽혔기에 손쉽게 그 안에 들어설 수 있었다. 멀리서 외마디 비명이 들리는 걸 보면, 린다가 그쪽에 있음이 틀림없었다. 린다의 실력을 잘 아는 벤슨은 일부러 그녀를 피했다.

처음부터 이곳에 이오스의 군사를 끌어들인 건 린다를 잠깐이라도 잡아 두기 위함이었다. 벤슨은 린다를 일대일로 이길 수 없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수풀에 몸을 숙이며 유심히 병사들 사이를 살폈다. 그리고 곧 그가 원하던 이를 발견했다.

“―찾았다.”

* * *

아델라는 죽음에 대해 감이 좋았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수도 없이 전쟁에서 죽는 바람에 없던 감이 생겼다. 인간은 진화하는 생물이라고, 일종의 생존 본능이 생겼다고 할까.

그리고 지금, 그 감이 발동하고 있었다. 추운 것도 아닌데 목 뒤가 계속 싸늘했다.

‘누가 있나?’

아델라는 레널드를 빠른 걸음으로 따르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 틈바구니에서는 누가 누군지 알아보려고 해도 알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어둠 속이다 보니까, 누가 어디서 어떻게 싸우는지도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살긴데…….’

그것도 아델라한테 정확히 향하는 살기였다. 남한테 향하는 살기는 잘 못 느껴도, 아델라는 자신한테 향하는 살기는 귀신같이 느꼈다.

‘설마 벤슨?’

“오라버니, 오라버니!”

“응?”

아델라가 빠른 걸음을 줄이지 않은 채 레널드를 급하게 불렀다.

“오라버니, 기척 같은 거 잘 느껴?”

“응? 그건 갑자기 왜?”

“잘 느껴, 못 느껴? 그것만 대답해.”

아델라가 단호하게 그를 이끌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녀는 기척을 숨기는 방법이나 기척을 느끼는 건 아직 서툴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기척을 느끼는 방법을 본격적으로 배운 건 회귀한 시간을 다 합쳐도 1년 조금 넘었다.

자신의 기척을 자유자재로 숨기는 이들이 마음먹고 숨긴 기척을 읽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레널드한테 물었다. 그래도 자신보다는 오래 기사로 지낸 그가 더 낫겠지 싶어서.

“조, 조금?”

“지금 누가 우릴 쫓아와?”

레널드의 능력을 잘 모르는 아델라가 혹시나 해서 물었다. 그녀가 아까보다 더 빠른 속도로 그를 이끌자, 레널드는 얼떨떨하게 주변을 살폈다.

“어, 음…….”

레널드는 인상을 쓰며 최선을 다해 기척을 느끼려 애썼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 속에서 특정 사람을 찾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정확히 누굴?”

“응?”

“특정적으로 정해 주면 좀 더 빠를 것 같은데…….”

레널드가 소심하게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살기. 나한테 살기를 뿌리는 사람.”

“너한테 살기를 뿌려?”

사람들 틈에서 벗어나 뛸 수 있을 정도의 거리가 확보되자, 아델라와 레널드는 뛰기 시작했다.

“응. 되게 음습하고, 집요한 기분이야.”

아델라가 구체적으로 그 느낌을 표현했다.

그러자 레널드의 눈동자가 커지며 그녀를 급하게 잡아챘다.

“―윽!”

아델라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아니었다. 아델라는 눈앞에 누군가가 튀어나와 반사적으로 그 상대에게 검을 겨눈 상태였다. 그리고 자신 앞에서 검을 빼든 이도 멀쩡했다.

다만, 아델라의 앞을 막아선 이가 빼든 검의 방향이 이상했을 뿐.

‘오라버니……?’

아델라의 등 뒤로 누군가의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정말로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레널드는 아델라를 잡아 자신의 뒤로 숨기려고 했지만, 상대의 타이밍이 더 빨라 그녀를 자신 쪽으로 가까이 당기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검에 찔린 상태에서도 레널드는 혹여 그 검이 아델라의 목으로 향할까 봐 검날을 두 손으로 꽉 쥐고 있었다.

뚝.

뚜둑, 뚝.

검을 타고 붉은 피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 아깝네. 심장에서 스쳤어.”

아델라는 자신의 얼굴 바로 옆으로 스친 검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바로 뒤에 레널드가 있었으니, 이 검은 보나 마나 레널드를 관통했을 것이다.

“조금만 내리면 심장일 것 같은데.”

“크윽!”

아델라는 휘는 벤슨의 눈동자를 보면서 그의 목에 겨눠진 검을 바로 잡았다.

“멈춰.”

“왜? 죽이게? 사람을 죽여 본 적이 있나 봐? 근데 왜 넌 되고, 난 안 됐을까?”

벤슨이 아델라가 겨눈 검을 그녀의 두 손과 함께 꽉 잡으며 오히려 자신의 목에 가져갔다. 고통을 느끼지 않는지 목에서 피가 흐르는데도 그는 아델라가 겨눈 검을 놓지 않았다.

“뭐 하는―!”

“네 오라버니는 죽을 거야. 이 검에 독이 묻어 있거든.”

“뭐?”

“나만 잃을 수는 없잖아.”

그가 아델라의 검을 꽉 잡으며 웃었다. 그는 정말로 미친 것 같았다.

원래 미치광이 전쟁 학살광인 건 수많은 회귀로 알았지만, 이 정도로 미친놈인 줄은 처음 알았다. 여태 저렇게 소름 돋게 웃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을까.

당시 상황만 생각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네 가족, 친구, 전부를 너도 잃어 봐야지. 친구는 없앴으니까 이번엔 가족이고, 그다음엔…… 누굴까?”

“친구……?”

아델라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 맞다. 그랬지. 너 눈치 못 채더라. 그렇게 서로 아끼기에 난 또 눈치챌 줄 알았지. 네 친구 피.”

어떤 미친 사람이 친구의 피를 구별한단 말인가. 그 전에 친구의 피를 볼 일도 많지 않았다.

아델라의 눈동자가 아주 살짝 떨렸다.

‘피? 피라니, 무슨…….’

아델라는 일련의 사건들이 기억나면서 그가 말한 상황이 생각났다. 그녀는 그의 말에 동요하지 않으려 입술을 꽉 다물었다.

‘아냐. 루가, 루가 죽었을 리 없어. 그럴 리 없어.’

그녀는 눈을 꽉 감았다가 다시 떴다. 흔들리지 않기로 약속했다. 여기서 저 말에 현혹되어 흔들리면 안 된다.

“그래서? 나한테 그 모든 고통을 주고 너도 죽겠다는 거야?”

아델라는 벤슨이 죽을 것처럼 구는 게 이상했다. 그녀는 손에 힘을 주어 그의 목에서 검을 빼려고 했다.

“저승길에 길동무나 데려갈까 하고. 너 때문에 내 계획이 다 망가졌잖아.”

“웃기지 마. 너 때문에 내 인생이 망가졌던 거야.”

아델라는 벤슨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봤다.

“그래? 그럼 뭐, 인생 망한 사람들끼리 사이좋게 죽는 건 어때?”

쓱.

“아악!”

벤슨의 검이 아델라 쪽으로 휘어지자 검을 잡고 있던 레널드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델라의 옆에 아슬아슬하게 검날이 세워진 채였다. 레널드는 아델라에게 검날이 더 다가가지 않게 안간힘을 주며 막고 있었다.

그는 아델라가 죽는 것만큼은 볼 수 없었다. 이대로 아델라를 잃을 수는 없었다. 아직 그녀한테 하지 못한 말이 너무 많았다.

자신이 죽는 순간이 다가와서야 그는 아델라에게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감히 미안하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안했다.

“그래도, 네가 날 오라버니라고 불러서 정말 다행이다. 아직은 오라버니라서 다행이야. 난 괜찮……!”

서걱!

레널드가 마지막 유언처럼 남기려는 말이 중간에 끊겼다. 그가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느낄 때, 갑자기 벤슨의 힘이 확 풀렸기 때문이다.

레널드와 아델라는 눈으로 보고도 지금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벤슨의 팔이 종잇조각처럼 반듯하게 잘려나갔다.

“죽는 건 경뿐이네.”

그의 뒤쪽에서 나타난 이저드에 의해, 그의 팔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크…… 크흐흐……! 누가 죽을지는 봐야 알지.”

“어어어?”

이저드가 그의 목을 치기 바로 직전에 벤슨은 아델라의 검을 붙잡고 자신의 목에 깊이 꽂아 넣었다.

아델라는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벤슨의 엽기적인 행태를 막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레널드를 구하려고 잡힌 두 손 중 한 손을 빼내는 바람에, 단검에 힘을 실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뭐, 뭐야? 이 자식 왜 웃어?’

벤슨의 기괴한 미소는 꿈에서도 나올까 겁이 날 정도였다.

“눈 감고 있게.”

이저드는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깔끔하게 벤슨을 베었다.

털썩.

그 작은 소리 하나로, 아델라는 모든 상황이 종료됐다는 걸 알았다.

“―오라버니!”

아델라는 이저드를 부르기 이전에 자신한테서 점점 떨어져 바닥으로 내려앉는 레널드를 부축했다. 아까의 의연했던 표정은 어디 가고 걱정에 가득 찬 아델라가 그를 잡았다.

“오라버니! 레널드! 야! 정신 차려!”

아델라가 레널드를 불렀지만, 감기는 그의 눈을 막을 길은 없었다. 이저드가 힘겹게 부축하고 있는 아델라를 도와 레널드를 바닥에 눕히고 맥을 짚었다.

“지, 진짜 독이에요?”

아델라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고, 이저드는 곧바로 레널드의 몸을 살폈다.

잠시 후, 이저드가 아델라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진짜요?”

“그래.”

아델라는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

“하지만 좋은 상황은 아니네. 심장 근처라 치료도 까다로울 거야. 마차로 옮겨야겠네.”

그렇게 말하며 이저드는 간단하게 응급조치만 취하고 호위병들을 시켜 레널드를 옮기라고 명했다.

“하…….”

“괜찮나? 어디 다친 곳은 없나?”

아델라는 다리가 풀려 풀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늦어서 미안하네.”

이저드가 그런 그녀의 곁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각하께서는 예정보다 더 빨리 왔잖아요. 저 미친놈이 절 죽이려고 이런 짓을 벌일 줄 누가 알았겠어요.”

아델라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흐트러진 모습이 가득한 이저드를 빤히 보다가 그를 껴안았다.

평소 단정한 검푸른 빛 머리가 여기저기 제자리를 찾지 못해 흩어져 있었고, 늘 깔끔하게 정돈된 그의 제복은 흙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그가 이곳까지 오기 위해 몇 날 며칠을 자지도 않고 쉬지도 않으며 달려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국경 쪽은 어떻게 됐어요?”

“세이즈 백작이 이끄는 부대가 잘 막아 주고 있네.”

“다행이다…….”

아델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그를 좀 더 꽉 끌어안았다. 이 얼마나 바라왔던 순간이던가.

아델라가 모르는 미래.

전쟁에서 매번 죽는 게 아닌, 완전히 바뀐 미래.

이저드가 살아 있고, 자신이 살아 있으며 아델라의 소중한 사람들이 살아 있는, 그런 미래.

아델라가 수많은 회귀 동안 꿈꿔 왔던…… 죽지 않고 오래 사는 것. 이왕이면 아프지 말고, 오래오래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다 편안히 눈감는 것. 호상.

드디어 그 호상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아델라는 실감했다.

‘아! 루! 그놈이 루를 들먹였는데……!’

아델라는 아까 벤슨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이저드 어깨너머로 벤슨의 시체를 바라봤다. 루를 생각하다 무심코 시선이 간 벤슨의 시체에서는 아델라가 어디서 많이 보던 뭔가가 그의 곁에 떨어져 있었다.

“……응?”

“왜 그러나?”

아델라가 의아한 목소리를 내자 이저드가 그녀를 잠시 떨어뜨려 놓으며 물었다.

“저기, 저놈 옆에…….”

아델라는 손을 들어 벤슨의 시체 옆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끝을 따라 이저드의 시선도 그쪽으로 향했다.

‘종이?’

작은 종이 쪼가리가 벤슨의 옆에 떨어져 있었다. 품에 있던 것이 흘러나온 듯했다.

“마법진이에요…….”

아델라는 넋을 잃고 중얼거렸다. 이저드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 종이를 유심히 바라보자, 한순간 눈앞이 핑하고 도는 것 같았다.

‘설마, 아니겠지?’

아델라도 이저드와 같은 현상을 겪고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설마, 설마, 설마!’

아델라는 지금 이 순간, 잠잠했던 예의 그 ‘감’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급하게 이저드를 잡아 자신한테 시선을 두게 했다.

“잘 들으세요, 각하.”

“뭘…….”

이저드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소리가 목구멍에서 턱, 하고 걸렸기 때문이다. 소리를 내고 싶었으나 그의 의지와는 완전히 반대로, 말이 아예 나오지 않았다.

“저랑 약속했죠. 기다리시기로. 기다리세요, 제가 갈게요. 제가 각하께 갈 테니까, 기다려요! 저 잊지 마세요. 제 말 꼭, 기억하세요! 저……!”

아델라는 이저드한테 할 말이 너무너무 많았지만, 점점 눈앞이 침침해졌다.

어느 순간 둘은 서로한테 걱정 말라는 말을 하고 있었지만, 정신이 까무룩해지면서 전부 어둠 속으로 먹혀 들어갔다.

* * *

커다란 창문에 햇빛이 부딪쳐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어느 호화로운 방에,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하― 하하하! 크흐흐흐!”

주황빛 머리에 새까만 눈동자를 지닌 그 청년은 바로 벤슨이었다. 벤슨은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미친 듯이 웃었다. 너무나 유쾌해서, 재밌어서 마음껏 웃었다.

자신도 과거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온전히 모든 기억을 가지고. 이제 그를 막을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으니, 그는 그것부터 고칠 생각이었다.

“고맙다, 아델라 벨제프. 나한테 새로 살 기회를 줘서. 넌 지옥이겠지만.”

‘더 강한 힘으로 상대방을 누른다.’

벤슨은 자신의 힘에 어느 정도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아델라한테 걸린 흑마법을 역으로 이용했다. 아델라가 여태껏 죽어서 계속 회귀했듯, 자신도 죽어 본 것이다.

또한 아델라의 흑마법을 이용하려면 아델라와의 접촉이 필요했다.

흑마법에는 항상 대가가 필요했기 때문에 벤슨은 자신의 목숨을 내걸었다. 아델라가 목숨을 잃고 회귀하게 된 것처럼 똑같은 상황을 만든 것이다.

전쟁, 피, 목숨, 누군가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것.

죽이는 사람을 아델라로 정한 것은 그녀한테 걸린 강력한 흑마법을 자신의 힘으로 짓누르고 주도권을 가져오기 위함이었다.

“이걸로 이제 넌 날 막지 못해. 이저드를 처리하고 그다음이 아델라, 그 여자겠지.”

하지만 그가 하나 모르는 것이 있었다. 사실 아델라의 힘은 그가 짓누른다고 눌러지는 힘이 아니었다.

속성이 아예 달라서 이상하게 발동되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였다. 잘못하면 둘 다 죽을 수도 있을 정도로 둘의 속성은 극과 극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원하는 시간대로 죽지 않고 회귀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의 간섭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를 위해서가 아닌, 다른 이들을 위해서.

* * *

“헉!”

또 낯익은 천장……. 낯익은?

“……?”

아델라는 멍하니 낯익은 듯 낯선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디서 많이 봤는데.’

원래 아델라는 회귀를 하면 자신의 가게에 딸린 작은 방의 침대에서 항상 깼다. 작게 난 창으로 햇빛이 들어오는 아주 작은 공간이었다.

그런데 이번 회귀는 전혀 달랐다.

천장이 높고, 깔끔하게 칠해진 벽지 하며, 방은 아델라의 가게보다 훨씬 컸다. 이불은 뽀송뽀송했고, 침대도 아델라가 알던 그 침대 사이즈가 아니었다. 아델라는 여기가 어디지? 하고 생각하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렇게 멍 때릴 시간이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으윽―.”

갑자기 일어나서인지 머리가 띵하고 울렸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머리에 올렸다.

‘어……? 어라, 잠시.’

아델라는 머리를 짚던 작은 손바닥을 이상하게 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쥐었다 폈다.

‘이게 내 손……?’

어딘지 이상했다.

아델라가 계속 봐 온 손하고는 너무 달랐다. 너무 작고, 마르고……. 이렇게 뼈밖에 없었던가?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발을 내디뎠다. 그녀의 발 또한 아델라가 아는 발과는 크기가 달랐다.

‘눈높이도 낮아.’

평소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아델라는 자신의 몸을 낯설어하며 천천히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마침내 거울 속의 자신을 확인한 순간, 그녀는 홉뜬 눈으로 입을 벌렸다.

“어… 어어? 어어어어?!”

아델라는 말도 못 하고, 어어어! 엉?! 하면서 경악에 찬 표정을 지었다.

벌컥!

아델라가 아침부터 소리를 지르자 누군가가 급하게 아델라의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델라! 무슨 일이니!”

‘어, 허? 응?’

아델라는 입도 못 다물고 막 그녀의 방으로 들어온 야리야리한 단발의 여인을 쳐다보았다.

고된 자작가 생활로 핼쑥한 몰골을 하고 있었지만 부드러운 흑발에 갈색 눈동자의 이목구비가 뚜렷한 이 여인은 아델라가 잘 아는 사람이었다.

어찌 잊을 수가 있을까.

어린 아델라를 어르고 달래며 품에 안고 키워 준 사람을.

“어, 어머니?”

그녀는 현재 자신이 꿈을 꾸는 건가 싶어 볼을 꼬집었다.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아팠다.

“어…… 어머니라니?”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아, 그러고 보니…… 떠날 때까지 어머니라고 한 번도 불러 주지 않았지.’

아델라가 새어머니를 부른 호칭은 ‘아줌마’뿐이었다. 그 어린 날, 왜 그렇게 친어머니와 새어머니를 구분 짓고 싶어 했는지. 한 분은 낳아 주셨고 한 분은 키워 주신, 다 같은 어머니였는데 말이다.

“아델라, 어디 아프니?”

곱고 젊은 새어머니의 모습에 아델라는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렇게 젊었는데, 가문의 빚을 감당하느라 손이 다 부르트고, 뼈밖에 안 남을 정도로 말랐다.

그녀는 멍하니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델라가 걱정되어 아델라의 이마에 손을 올려놓고 얼굴에서 열을 쟀다. 온갖 일을 다 하고 고생을 많이 해서인지 그녀의 손에는 잔주름이 많았다.

“아델라?”

“…….”

그녀가 낮고 부드럽게 아델라를 불렀다. 항상 아델라가 잠을 이루지 못하거나 불안해할 때 많이 듣던 목소리였다.

특히 아델라는 그녀의 잔잔한 목소리와 노랫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한 적이 많았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안정됐기 때문이다. 아델라는 그때를 참 그리워했었다. 가끔 그녀의 잔잔한 노랫소리가 듣고 싶고 생각나고 그랬었다.

아델라는 그냥 이 모든 게 안 믿어졌고, 새어머니가 눈앞에 살아 계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녀가 죽은 후, 그녀를 마음속에 묻어 두기 위해 노력했던 지난날이 스쳐 지나갔다.

잊었다, 잊겠다, 추억으로만 남기겠다, 그렇게 다짐했지만 역시…… 아델라는 그녀한테 못다 한 감정이 너무 많이 남아 있었다.

“아델라? 왜 우니? 안 좋은 꿈을 꿨어?”

“흐……. 흐윽…….”

아델라는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았다. 꿈이 아니길 바랐다.

“어머니한테…… 못 해준 말이 너무 많아요.”

“그래, 그랬어? 그럼 어머니한테 다녀올까?”

그녀는 아델라가 친어머니가 보고 싶어 우는 줄 알았다. 아델라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물론 친어머니한테도 할 말이 많지만…… 어머니요. 제 앞에 있는 어머니.”

“……뭐?”

그녀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죄송해요. 그때 두고 가서. 어머니라고 한 번도 안 불러 드려서. 그리고 감사해요. 절 이 지옥에서 빼내 주셔서, 루한테 부탁해 주셔서.”

그녀한테 고마웠던 일, 죄송했던 일, 모두 나열하자면 끝이 없었다. 너무 할 말이 많아서,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딱 하나 정확히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아, 아델라?”

“그리고 또…… 정말,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인데요.”

새어머니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또박또박 할 말 다 하는 아델라를 보다가 소매 단을 끌어와 그녀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그녀는 아델라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왜 우는지 묻지 않은 채 그저 조용히 아델라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사랑해요. 제 어머니가 되어 주셔서 너무 감사했어요. 감사해요.”

그녀를 떠나보낼 때까지 편지에 몇 번이나 지웠다 썼던 문장이었다. 왠지 낯간지럽고, 쑥스러워서…… 끝내 적지 못한 말이었다.

소식을 전하기 위해 새어머니에게 매번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써 본 적이 없었다. 입에 담아 본 적도 없었다. 불효막심하게도.

아델라는 그녀를 있는 힘껏 안으며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전했다. 그녀 덕분에 솔직해질 수 있었는데, 정작 그녀한테는 솔직하지 못한 지난날을 반성했다.

“살아 있어 주셔서, 감사해요.”

어떤 때는 이 회귀가 희망인 줄 알았고, 또 어떤 때인가는 이 회귀가 저주인 줄 알았고, 어느 순간에는 이 회귀가 기회인 줄 알았다.

그리고 지금은―

이 회귀가 축복처럼 느껴졌다.

그녀를 다시 볼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아델라한테는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그 오랜 시간을 건너, 그 오랜 시간을 견뎌, 그녀와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보낼 기회가 왔다는 것이, 아델라한테는 엄청나게 큰 의미였다.

그녀가 죽기 전까지라도……. 아니, 혹시 몰랐다. 그녀의 어머니까지도 살릴 수 있을지.

아델라는 오랜만에 그녀의 품에 안겨 마음 놓고 울었다. 그리웠던 그녀의 품은 여전히 포근했고, 따뜻했다.

* * *

“지금 제가 열다섯이라고요?”

겨우 진정된 아델라가 이번에는 나이 때문에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새어머니는 아델라의 반응이 정말로 너무 이상해서 그녀의 이마에 열이 있나 다시 재 보았다.

“열은 없는데……. 무슨 꿈을 꿨기에 그렇게 놀라니?”

아델라는 큰 충격을 받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왜 벤슨은 6년 전으로 되돌린 거지?’

6년 전이면 벤슨과 이저드는 만나지도 않은 때였다. 아델라가 아버지에 의해 가웨인 백작의 첩으로 팔릴 뻔한 때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저드는…….

“헉! 혹시!”

이저드한테는 트라우마를 안겨 준 사건이 벌어진 시기였다.

‘그래. 아버지가 나 때문에 돌아가셨어. 그때가 열여섯이었나. 그때 난 모든 게 무서웠네. 공작이 되는 것도, 내 사람들을 지킬 힘이 없다는 것도, 그냥 다 모든 게. 그래서 당시에는 안 좋은 꿈을 많이 꿨지.’

아델라는 전에 이저드가 해 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내가 열다섯. 각하께서 열여섯! 그 시기잖아! 각하께서 죄책감으로 시름시름 앓으실 때!’

그랬다. 벤슨이 그렇게 공을 세워서 계획한 일을 쉽게 포기할 리 없었다.

‘각하께서 가장 무방비하실 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델라는 한시라도 빨리 펜베르크 성으로 향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벤슨보다 먼저, 그가 회귀했다는 승리감에 젖어 있을 때, 그보다 더 빨리!

“어머니!”

“어, 어어?”

그녀는 갑자기 자신을 어머니라고 서슴없이 부르는 아델라가 적응이 되지 않아 목소리를 떨었다.

“저! 루 좀 만나고 올게요!”

“어, 으응. 그, 그래.”

어린 아델라의 박력에 그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얘가 간밤에 무슨 꿈을 꿨기에 어머니라고 부르질 않나, 펑펑 울지를 않나, 루를 만나러 간다고 허락을 받질 않나. 정말 여러모로 놀라웠다. 최근에 많이 활발해진 건 알지만, 이 정도로 박력이 넘치지는 않았다. 뭐가 그녀를 변화시켰을까.

아델라는 걱정하는 어머니를 안심시키고 급하게 마을로 뛰어갔다.

예전과 달리 근육도 없고,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아 팔다리도 너무 가늘어서인지 뛰는 데 좀 불안불안했다. 과거 자신이 이런 몸으로 빨빨거리고 돌아다녔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이 정도면 거의 팔랑거리는 수준이었다. 종이 인형? 종이 인간이라고 불려도 좋을 정도로.

아델라는 새삼 욘제타가 얼마나 아델라의 살을 찌우기 위해 노력했는지 알 수 있었다.

“루! 루우!”

아델라가 손을 흔들며 멀리에서 보이는 은발의 미소년을 향해 달려갔다. 루는 자연스럽게 팔을 벌려 달려오는 아델라를 받아 냈다.

“뭐가 이렇게 급해? 너 그러다가 넘어져. 전에 팔꿈치 다 쓸렸잖아.”

“루! 괜찮은 거지? 너 어떻게 하나도 안 변했지?”

전에 루는 변한 게 하나도 없다고 한 게 진짜인 것 같았다. 15살의 루나 21살의 루나 정말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최강 동안인가?

“나야 항상 괜찮지. 왜, 안 좋은 꿈이라도 꿨어?”

루가 예쁘게 웃으며 아델라를 바라보았다.

차라리 안 좋은 꿈이라면 좋았으련만, 꿈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녀가 회귀해 온 삶이 너무 생생했다.

“아니! 히히…… 다행이다.”

벤슨 자식 때문에 이곳의 루가 잘못됐을까 봐 식겁했다.

“루. 나, 부탁이 있어!”

“언제든.”

루는 마치 기다린 사람처럼 기꺼이 대답했다.

“우리 어머니 부탁 좀 할게. 그리고 펜베르크 성의 욘제타네 가게라고, 음식점이거든. 거기로 데려다 줘.”

“언제?”

“나 떠나면 바로.”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벨제프 자작이 저택에 돌아오면 아델라는 가웨인 백작한테 팔려 갈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 전에 이 저택을 정리해야 했다.

아델라와 새어머니가 안타까워 이 저택을 떠나지 못하는 관리인들과 유모, 그리고 이곳에서 도망갈 생각도 하지 못하는 새어머니. 그 모든 이들을 벨제프 자작이 오기 전에 자작가에서 벗어나게 해야 했다. 시간이 없었다.

자작가도 대충 정리하고, 새어머니를 데리고 도망치려면.

“넌 언제 떠나는데?”

“난…….”

아델라는 결의에 찬 눈으로 루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당장!”

루는 얼핏 대책 없어 보이는 아델라의 행동에 토를 달지 않았다. 평소라면 이런저런 잔소리를 했을 텐데. 아델라는 의아한 표정으로 루를 보았다.

“안 혼내?”

“내가 혼낸다고 들을 거 아니잖아.”

그건 또 맞는 말이었다. 지금 아델라는 한시가 급했다.

“펜베르크 성까지 가는 마차하고 식량을 준비해 줄게. 돈은 패물로 가져갈 거지?”

“어? 어머니가 패물 모아 놓은 거 어떻게 알았어? 몰래 모으신 건데!”

과거 새어머니는 아델라가 언젠가 자작가를 떠날 것을 대비해 패물을 모아 놓았다.

아델라가 그 사실을 아는 이유는 회귀 전 그녀가 아델라를 떠나보낼 때, 루한테 잘 부탁한다며 숨겨 놨던 패물을 챙겨 줬기 때문이다.

“다 아는 방법이 있지.”

루가 씨익 웃었다.

“그러고 보면, 루는 모르는 게 없었지.”

“그걸 이제 알았어?”

루가 장난스럽게 웃자, 아델라는 그런 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까, 루는 아는 게 엄청 많았다.

어릴 때는 그저 자신보다 세상을 많이 보고 경험해서라고 생각했는데, 그렇다고 하기에는 엄청난 양의 정보를 알고 있었다. 나이에 맞지 않게 매우. 흑마법에 대해 모르는 것도 없었고.

루의 정체에 대해 단 한 번도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아델라는 아주 조금, 불안해졌다.

“저기, 루.”

“응?”

루가 웃는 얼굴로 그녀와 눈을 맞췄다.

“우리, 친구지? 계속, 쭉. 앞으로도 친구로. 우리 계속 볼 거지?”

아델라가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물었다. 루는 조금 난감하게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포기한 듯 미소를 보였다.

“너의 소원이라면 기꺼이. 언제나.”

루는 평소와 같이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작게 토닥였다.

“약속이다?”

“그래.”

루는 아델라가 내민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었다. 아델라는 되게 뿌듯하게 웃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럴 시간 있어?”

“아? 아!”

루의 말에 아델라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맞아. 루! 패물 말인데, 떠나기 전에 전부 가지고 나올 테니까 저택 관리인들한테 나눠 줘.”

“응? 왜? 안 가져가?”

“난 조금만 있으면 돼! 돈이야 가서 벌지, 뭐! 우리 떠나면 관리인들은 저택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잖아. 적지만 내 성의? 아니구나. 우리 어머니의 성의!”

아델라가 웃으며 그렇게 말했고, 루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라는 묵묵히 자신의 부탁을 다 받아 주는 루한테 감동해서 그를 꼭 껴안았다가 놓으며 환하게 웃었다.

“널 만나서 다행이야. 항상 날 도와줘서 너무 고마워.”

“그건 내가 할 말인데. 내 생애, 한순간을 함께해 줘서 고마워.”

루가 진심으로 웃으며 말했다. 아델라는 그런 그의 미소를 처음 보았다. 햇살처럼 포근하고 따뜻해 보이는 미소는 또 처음이었다.

“이제 가 봐. 널 기다리는 사람 곁으로.”

루가 담담히 말했다. 아델라는 그의 말에서 이상함을 느꼈지만, 곧 이저드를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펜베르크 성에서 봐!”

씩씩하게 뛰어가는 어린 아델라를 보며 루는 그저 웃었다. 자신의 정체에 의문을 가지면서도 자신을 믿는 그녀가 오늘따라 유독 예뻐 보였다.

“곤란하네……. 여기까지였는데.”

계속 볼 거라고 약속을 해 버렸으니 무를 수도 없었다. 한번 뱉은 약속은 꼭 지켜야 하는 게 그들의 규칙이었으니까.

이래서 어디 가서 약속 함부로 하는 거 아닌데.

루는 골치 아프다는 듯이 비단결 같은 자신의 긴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아델라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함이었다.

* * *

아델라는 저택 일을 자신이 정리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루와 유모한테 맡기고 자작가를 나왔다.

그녀는 정말 밤낮없이 달렸다.

루가 붙여 준 마차와 말과 마부는 지치지도 않는지 쉬지 않고 펜베르크 성으로 달렸다.

원래는 말을 타고 가고 싶었지만, 지금의 아델라 몸으로는 말을 타고 몇 주를 견딜 만한 체력이 없었다.

자칫하다가는 끔찍한 낙마 사고가!

절대 그런 일로 회귀하고 싶지 않았다.

마차도 체력 소모가 안 되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앉거나 눕거나 잠깐 눈을 붙일 수는 있었다.

동쪽 끝에서 서쪽 끝으로 간다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땅덩이가 작은 것도 아니어서 원래 한 달은 걸리는 거리였다. 그녀는 최소한만 쉬었다. 참 고마웠던 것은 루가 붙여 준 마부가 아델라의 상황을 다 이해하고 알아서 경로를 조정해 줬다는 점이다.

그는 아델라가 지쳤을 때 잠시 쉬고 말이 지쳤을 때 가까운 마을에서 말을 바꾸고 다시 달렸다. 아델라가 따로 말하지 않아도 척척 해내는, 정말로 유능한 마부였다.

아델라는 벤슨보다 자신이 먼저 펜베르크 성에 도착하길 바라며 잠도, 쉬는 시간도 줄여 가며 그렇게 달렸다. 그녀는 칠흑같이 어두운 바깥 풍경을 보면서 부디 이저드한테 자신과 같은 기적이 있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부디 그의 눈에서 눈물이 나오지 않기를, 부디 그의 꿈에서 괴로운 기억이 반복되지 않기를.

부디, 부디…….

그의 기억에서 자신이 지워지지 않기를.

이번에는 부디.

그를 지킬 수 있기를.

* * *

“아델라 님! 아델라 님!”

이제 막 어둠이 물러나고 있던 새벽, 마차에서 불편하게 잠든 아델라를 마부가 흔들어 깨웠다.

“으예?”

“저기 보입니다. 펜베르크 성! 곧 도착하니까 일어나 계세요!”

마부의 외침에 아델라가 눈을 비비며 쌀쌀한 바람이 부는 밖으로 나왔다. 마부의 말대로 저 먼 곳에, 산을 하나 가져다 놓은 것 같은 펜베르크 성이 보였다. 펜베르크 성은 철옹성의 위엄을 자랑하며 굳건히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드디어…… 왔어. 드디어, 도착했어!’

피곤함으로 푹 죽어 있던 아델라의 황금빛 눈동자가 펜베르크 성을 눈 안에 담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반짝였다.

약 3주 만에 이루어 낸 쾌거였다.

아델라는 그동안 고생한 걸 생각하면 왈칵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한 달이나 걸리는 거리를 줄이고 줄여서 3주 안에 도착하다니.

“날씨가 춥습니다. 들어가시죠. 아마 오전에는 도착할 것 같아요.”

마부의 말에 아델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마차로 들어갔다. 그녀는 천천히 움직이는 창밖 풍경을 보자 만감이 교차했다.

‘가서 각하를 어떻게 만나지? 또 3구역밖에 못 들어갈 텐데. 지금 몸으로는 수비병은 무리고. 허드렛일을 하는 하녀로…… 무리이려나. 이럼 일 잘한다고 아무리 외쳐도 안 뽑아 주겠지.’

아델라는 창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머리를 잘라 파느라 짧게 잘린 단발머리는 3주 동안 관리되지 않아 엉망이었고, 얼굴은 홀쭉하고 꾀죄죄했으며, 몸은 비쩍 말라 있었다.

욘제타가 열심히 먹여 키운 그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나마 이 몸이 이렇게 버티는 건 다년간의 허드렛일로 근육이라도 붙어 있어서였다.

‘기억이 문제가 아니라…… 날 아예 못 알아보시는 거 아냐?’

덜컹덜컹하는 마차의, 이제는 익숙한 진동을 느끼며 아델라는 예상치도 못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사이, 아침 해가 세상을 비추며 떠올랐고 그에 맞춰 펜베르크 성의 성문도 천천히 열렸다.

아델라는 창문을 통해 보이는 수많은 인파를 보며 맨 처음 루의 도움을 받아 이곳에 왔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철옹성의 위엄을 직접 눈으로 보며 얼마나 설렜고, 얼마나 놀랐던지.

그녀는 그때가 생각나 살짝 웃었다.

이제는 오지 않을 미래였지만, 루와 함께한 여행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신기하고 재밌는 게 세상에 가득하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말이다.

“아델라 님, 다 왔습니다.”

아델라는 대충이나마 머리를 정리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마부는 아델라한테 짐을 건네 줬다.

“그분…… 아니, 루 님께서 이걸 전해 주랍니다.”

마부가 내민 가방을 든 아델라는 어리둥절하게 마부를 바라보았다.

“돈과 간식거리, 그리고 간편하게 입으실 옷이랍니다.”

“아, 그래요? 감사합니다.”

아델라가 마부한테 고개를 숙이자, 마부는 빙그레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제 일인 걸요. 그럼, 아가씨의 앞날에 축복만이 가득하길.”

마부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마차를 끌고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고 시장 거리를 향해 걸어가던 아델라는 이상한 기분에 마부가 사라진 길을 다시 돌아보았다.

‘이상하다? 얼굴이……. 그러니까…… 어떻게 생기셨더라?’

이상하게도 마부의 웃는 입술만 기억에 남을 뿐, 그 무엇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지 않았다. 무려 3주를 함께했는데 말이다. 무엇보다 더 이상한 점은 그 사실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가려고 하는 자신이었다.

‘아! 각하. 각하!’

심지어 아델라는 마부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는 사실조차 금방 잊어버리고 걸음을 재촉했다.

* * *

‘여기까지 오긴 왔는데, 이를 어쩐담.’

전에도 말했지만, 공작을 그렇게 쉽게 만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델라는 이제 1구역은커녕 2구역도 들어갈 수 없었다. 신분을 증명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한정되었다.

“저기요. 말씀 좀 물을게요.”

아델라는 길가에서 이런저런 물건을 파는 상인한테 은화 한 닢을 주면서 물었다.

“예, 예. 뭐가 필요하십니까?”

처음엔 비쩍 마른 아이가 다가오니 도둑인 줄 알고 경계하던 상인은 아델라가 은화를 내밀자 바로 태도를 바꿨다.

“현재 이 펜베르크 성의 성주는 누구십니까?”

“예? 그야…… 제스트윈 공작 각하시죠?”

“아. 아니, 성 말고 이름이요.”

“아! 진작 그렇게 물어보시지! 미하―!”

상인이 막 입을 열려는데,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미하일, 제스트윈, 공작 각하.”

상인과 아델라의 시선이 그 누군가한테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백마 탄 왕자님을 방불케 하는 외모의 미남자가 삐뚜름하게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어…….”

그는 아델라가 알던 얼굴과는 조금 달랐다. 더 어리고 체격이 작은, 금발에 푸른 눈을 지닌 헤이든이었다. 항상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기는 것만 보다가 앞머리를 내리니까 훨씬 어려 보였다.

“세상 사람들 다 아는 우리 각하를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그가 무섭게 웃으며 아델라와 상인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알던 헤이든의 분위기와 달라서 아델라는 주춤하고 한 발짝 물러섰다. 그러자 헤이든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요것 봐라?’

헤이든은 자신을 피하려는 아델라의 행동에 수상한 낌새를 챘다. 그러고는 아델라한테 다가가던 걸음을 멈추고 별안간 어딘가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야! 린다! 야! 여기 좀 와 봐! 여기 수상…… 억!”

헤이든은 허벅지를 정말 퍽 소리 나게 맞았다. 그러자 그가 참을 수 없는 고통에 그만 바닥에 주저앉았다.

“린다 경, 경! 이 새끼야! 몇 번을 말해야 쳐 들을래?”

아델라는 험악한 둘의 분위기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저드한테 둘이 앙숙 관계였다고 듣긴 했는데……. 했는데……!

‘둘이 연인이 될 접점이란 게 어디 있죠?! 싸우다 정든 건가요?!’

“야! 그래도 그렇지……. 아악!”

헤이든은 린다한테 발끈해서 대들다가 또 맞았다.

“린, 다, 경.”

린다가 이를 악물고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알려 줬다. 그러자 헤이든은 정말 아팠던지 구시렁거리기만 하고 더는 린다를 야, 라고 부르지 못했다.

“여자애가 무슨 힘이 장사야. 맨날 때려. 나만 때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다 들려. 닥쳐.”

린다는…… 아델라가 아는 린다보다 훨씬 험악하고 한 마리의 야수…… 아, 아니 강단 있어 보였다.

“여자애가 입이 그리 험해서 나중에 애가 배우면 어쩌려고……. 아!”

“네 애 아니니까 신경 꺼.”

한마디만 더하면 죽인다는 눈빛을 보내자 그제야 헤이든이 입을 다물었다. 둘을 보는 아델라는 식은땀을 흘렸다. 둘을 3구역에서 만난 건 정말 행운이었지만, 어째 영…… 일이 순조롭게 풀릴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왜 불렀는데.”

린다는 헤이든이 아픔에 부들부들 떨든가 말든가 시큰둥하게 물었다.

“저, 저! 쟤! 쟤 수상하다니까?”

“뭐? 어디가?”

린다가 아델라를 위아래로 훑었다. 수상할 게 전혀 없었다. 수상하긴커녕 오히려 안타까울 정도로 말라, 어디 데리고 들어가서 뭐라도 먹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아이였다.

“아니, 왜! 일전에 그놈도 각하 존함 묻고 다녔다며!”

‘일전에……?’

아델라는 헤이든의 말이 신경 쓰였다. 일전에, 그놈? 자신이 짐작하는 이가 맞는 걸까? 설마, 먼저 도착했나?

“그러고 나서 이저드 님도 물었다며! 아니, 각하 존함은 몰라서 물어봤으면서 이저드 님을 아는 건 또 뭐야? 이방인이면 아예 몰라야지.”

헤이든은 나름대로 그럴듯한 추리를 내놨다.

“야, 너!”

아델라가 둘의 대화를 조금 더 잘 듣기 위해 몸을 앞으로 빼자 헤이든이 그녀를 지목했다. 아델라는 그의 지목에 놀라서 눈을 몇 번 끔벅였다.

“예?”

“너, 각하 존함 묻고 이저드 님 안부 물으려고 했지?”

아델라는 영 틀린 말도 아니어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거 봐! 이상하잖아! 모르려면 두 분 다 모르던가.”

헤이든이 의기양양하게 린다를 보며 외쳤다. 그에 린다가 한심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대응했다.

“그래, 그놈과 똑같은 패턴으로 주변에 물었다고 치자. 넌 이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애가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뭐…… 뭘 할 수 있겠지! 하녀…… 같은 거로 지원해서 이저드 님 음식에 독을 탄다든가!”

헤이든은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그의 외침에 린다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아델라를 가리켰다.

“이 몸으로 하녀 통과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린다가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그, 그렇게 말랐나? 장을 지질 정도로 확실하게 안 된다니!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린다가 정확하게 짚어 주니 마음이 아팠다.

“그, 그…….”

헤이든은 린다의 말에 반박할 답을 찾지 못했다. 일단 수상해서 잡긴 했는데, 확실히 그녀에겐 이저드를 해할 만한 힘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저드 주변에 접근할 수 있는 어떤 방법도 저 작은 아이에겐 없었다.

“저기…….”

아델라는 헤이든과 린다가 씩씩거리며 싸우고 있을 때에서야 비로소 둘 사이에 끼어들 수 있었다. 둘의 시선이 순식간에 아델라한테 와서 박혔다.

“그놈이라 함은…….”

아델라는 둘이 싸우느라 묻지 못했던 이야기를 조심스레 물었다.

“아, 미안해. 저놈이 무식하게 수상하다 어쩐다 그랬지? 얼마 전에 우리가 모시는 분한테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살짝 예민했어. 정말 미안해. 놀랐겠다.”

린다는 아까 헤이든을 대할 때와는 정반대로 아델라와 눈높이를 맞추고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저드 님께 안 좋은 일이요?”

“응, 얼마 전에 웬 미친놈한테 습격을 받으셨거든.”

“각하, 아니! 이저드 님이요?”

아델라가 심하게 놀란 기색을 보이자 린다도 의아해서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응, 어떤 남자가…….”

린다가 아델라의 표정 변화를 유심히 살피며 뒷말을 길게 늘였다.

‘역시 벤슨인가? 그놈이? 각하를?’

“가, 각……! 아니지, 이저드 님께서는 괜찮으세요?”

린다가 슬쩍 헤이든을 보았고 헤이든의 표정이 곧 의기양양해졌다. 봐라, 내가 수상하다고 했지, 하는 표정이었다.

“다행히도…… 괜찮지.”

아델라의 표정이 눈에 띄게 안도하는 것이 보였다. 린다는 유심히 아델라를 관찰했다. 이저드를 사모하는 많은 이들 중 하나인가?

“그럼 그 범인은요? 잡혔어요?”

“어, 잡혔어.”

린다의 말에 아델라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결심이 선 또렷한 눈동자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주황 머리에 검은색 눈동자, 손목 쪽에 문양처럼 검은 뭔가가 올라온…… 사람이죠? 아마 목에도 검은 뭔가가 보일 거고요.”

아델라의 말에 린다는 헤이든을 쳐다보았고, 헤이든도 린다를 쳐다보았다. 둘 다 아델라가 범인의 특징을 정확히 말할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곧 린다가 진지한 표정으로 아델라와 시선을 맞췄다.

“그걸 어떻게 알아?”

‘맞나 봐! 벤슨이 먼저 도착했어! 그런데…… 왜 잡힌 거지?’

이저드는 괜찮다니까 일단 마음을 놓았지만, 벤슨이 살아 있는 이상 쉬이 안심할 수 없었다. 아델라는 무슨 말을 해야 그를 만날 수 있을지 짧게 생각했다.

“제가…….”

린다와 헤이든의 의아한 눈빛이 아델라한테 향했다. 아델라는 그 짧은 순간 이런저런 변명을 생각하다가 눈 꼭 감고 거짓말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벤슨만 만나면 될 일이었다. 그가 이렇게 잡힌 게 또 회귀를 위한 것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그를 막아야 했다. 아델라의 힘으로 그의 흑마법을 막을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번처럼 손 놓고 또 회귀할 수는 없었다.

“공범이에요! 자백하겠습니다! 필요하다면 그놈이 왜 그런 짓을 벌였는지도 전부 말해 드리겠습니다!”

아델라는 바닥에 납작 엎드렸고, 린다와 헤이든을 포함해 잡상인도 멍하니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이는 이 일에 끼고 싶지 않았던 잡상인이었다. 그는 린다의 눈치를 보며 주섬주섬 물건을 챙겨 넣기 시작했다.

“이봐요.”

린다가 잡상인을 붙잡자, 잡상인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저, 전 물음에 답한 죄밖에 없습니다! 어쩐지 행색이 거지꼴인데 은화를 덜컥 주나 했네! 아이고오!”

‘흑흑…… 그래도 제일 깔끔한 옷으로 입고 온 건데!’

아델라는 엎드려서 상인을 흘겼다. 이럴 줄 알았으면 루가 챙겨 줬다는 간편한 옷으로라도 갈아입을 것을 그랬다.

“은화?”

린다가 인상을 쓰며 묻자, 상인이 아델라한테 받은 은화를 덥석 내놓고 바닥에 엎드렸다.

“저, 저거! 제 거 아니에요!”

아델라가 은화를 보더니 냉큼 대답했다. 아델라는 루가 준 가방을 주섬주섬 그녀의 앞에 내밀었다.

“이것도 다! 이저드 님을 해하는 비용으로 받은 거예요!”

‘미안해, 루!’

루가 준 돈 보따리가 너무 아까웠지만, 아델라는 벤슨을 만나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돈을 꺼내서 보여 줬다.

“누가? 왜? 무슨 이유로? 너 써먹을 곳이 전혀 없는데.”

린다의 차가운 눈빛이 아델라의 뒤통수로 날아들었다. 아델라는 오싹함에 어깨를 움찔 떨었다. 다른 건 다 괜찮았는데 역시 소중한 사람한테 저런 눈빛을 받으니 마음이 아프긴 했다.

“그, 그건! 저 같은 애가 방심하기 가장 좋잖아요! 방금 린다 경도 방심했고요.”

조그만 아이가 몸을 잘게 떨면서도 할 말 다 하는 걸 보니 배짱 하나는 알아줘야 했다. 린다는 아델라의 말에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확실히 그녀가 눈앞의 이 어린아이한테 마음이 풀렸던 건 사실이었다. 평소 그녀는 남녀노소 상관없이 긴장을 푸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아델라한테는 조금 풀어졌다.

“배짱은 알아줘야겠네. 그래서? 왜?”

“그, 그건…… 말씀 못 드려요! 제가 죽을 수도 있어요! 차라리 절 잡아가세요!”

“임무가 실패해서 죽으나, 감옥에 들어가서 사형 날만 기다리나 똑같을 텐데?”

“전 자백했는데…… 그래도 죽나요? 이유가 있어요, 제발요……. 제발 해명할 기회를 주세요.”

통할까? 속을까?

아델라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린다를 힐끔 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고 살기가 드리워 있었다.

“자백? 해명?”

린다가 코웃음을 쳤다.

“해명은 감옥에서 그놈과 오붓하게 해.”

엑, 오붓하게라니요!

아델라는 생각만 해도 뭐가 올라올 것 같았지만, 꾹 참고 울먹였다.

“제발, 제 이야기 좀……! 이저드 님께 제 해명을 좀……!”

턱!

이거 데자뷔…….

아델라는 린다한테 목덜미가 잡혀 끌려가면서 생각했다. 이거 그때 그 수치사 사건이 생각나는데! 왜, 그 있잖은가. 과거에 마티나의 하녀와 만나는 현장을 들켜 린다한테 질질 끌려가던 그때 말이다. 다시 생각해 봐도 아찔했던 그 사건!

<4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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