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호상이고 싶다 3
| 목 차 |
1부 4장-2. 그녀는 풀고 싶다
1부 5장-1. 그녀는 지키고 싶다
1부 4장-2. 그녀는 풀고 싶다
아델라는 이상하게 마음이 불편해서 자꾸 뒤를 돌아봤다. 방에 놔두고 온 루의 편지가 마음에 걸렸다. 평소와는 다르게 오늘은 이상하게 싸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신경 쓰이면 그냥 사람을 보낼까? ……요?”
뒤를 따르던 린다가 말했다. 그녀의 말에 아델라는 아까처럼 또 고민했다. 괜찮겠지, 하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안 괜찮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제 편지만 좀, 전해 줄 수 있을까요? 대충 지금 어디쯤 있는지는 제가 알거든요.”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믿을 만한 사람을 통해 보내겠습니다, 아델라 님. 걱정 마시지요?”
린다는 안심하라는 듯이 빙그레 웃었다. 그녀의 미소에 조금은 마음이 나아지는 것 같았다. 아델라는 찝찝함을 뒤로하고 빠른 발걸음으로 귀빈실로 향했다.
이저드한테 걸린 흑마법을 알고 있고 그 흑마법사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는 사람, 레널드. 그를 만나기 위해.
아델라는 이 판을 뒤집기 위해 이를 갈고 그를 기다렸다. 그녀는 레널드를 기다리는 동안 화병이 나서 죽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어떻게 자신한테 흑마법이 진행되는 상황을 지켜보라고 시킬 수가 있단 말인가. 흑마법의 흑, 자만 말해도 경기를 일으키던 자신한테! 아델라는 이놈을 어떻게 털어야 잘 털었다고 소문이 날까 고민했다.
“너, 너, 너어!”
혈압이 올라야 할 건 자긴데, 왜 지가 혈압이 오른 것처럼 굴어? 귀빈실에 이제 막 들어선 아델라는 한껏 인상을 구겼다.
“너―!”
“너밖에 할 줄 몰라?”
“너밖에 할 줄 몰라아? 지금 내가 어떤 심정인지 네가 알아?”
아델라는 아무것도 모른 척 손님용 티 테이블에 가서 앉았다. 레널드는 그런 아델라를 졸졸졸 따라왔다.
“너, 나한테 보낸 전서구 장난이지? 거짓말이지?”
그는 아델라가 앉자 바로 건너편에 앉아 다짜고짜 편지 내용의 진위를 따지고 들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펜베르크 성에 오는 내내 똥줄 꽤나 탄 모양이었다. 그 표정을 보니 아주 약간 화가 풀리는 것도 같았다.
“당연하지. 오라버니 바보야? 어떻게 몇 주 만에 임신 사실이 나와. 거짓말로 보낸 걸 잘도 믿고 왔네.”
아델라는 한심한 눈으로 레널드를 보았다. 아델라가 어떤 눈빛을 하고 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레널드는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후아아아아.”
긴 한숨 후 찾아온 것은 쪽팔림과 열 받음이었다. 레널드는 버럭 아델라한테 화를 냈다.
“너! 너 진짜! 나 심장마비로 죽게 할 생각이야?”
“안 죽었잖아.”
아델라가 뚱하게 대답했다.
“안, 안 죽었잖아? 이―! 너, 너! 내가 여기에 오면서 어떤 각오까지 했는지 알아? 좀 정상적인 방법으로 부를 수 없어?”
“내가 스파인데 어떻게 정상적인 방법으로 불러? 간신히 신임을 얻었는데, 다시 의심받으라는 소리야?”
그녀는 그를 향해 톡 쏘듯 말했다. 그녀의 말에 레널드는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자신이 같은 상황이었어도 레널드만 따로 부를 마땅한 방법이 없기는 했다.
“그 말은 아니고……. 좀 다른 방법을 생각해……. 잠깐. 그럼, 공작은 네가 임신한 걸로 알아?”
아델라는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생각해 보니 제가 불러 낼 수 있어요! 이렇게만 말했지, 무슨 내용을 썼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대, 대충 장단 맞춰 주시겠지?’
아니면 이저드와 레널드를 안 만나게 하면 될 일이었다. 거짓부렁이라는 걸 레널드가 알고 있으니 이저드한테 가서 깽판을 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 그 작자가 너보고 지우라고 안 해? 낳으래? 축하한대? 기뻐해?”
아델라가 시선을 회피하는 것을 다르게 이해한 레널드는 다다다다 질문을 퍼부었다.
레널드는 현재 아델라가 이저드한테 임신을 했다고 거짓말해서 자신을 자연스럽게 불러냈으며 이저드가 그 거짓말을 순순히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보통은, 기뻐하잖아. 사랑하는 사람의 아인데.”
아델라는 레널드가 따지듯 묻는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기뻐했다고?”
레널드가 재차 물었다. 아델라는 그의 말에서 이상함을 알아채고는 오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보통은 그렇다고, 보통은. 근데 각하는…… 표정을 알 수가 없잖아? 그래서 그냥 기뻐하나 보다 했지.”
“아, 너 자꾸 오라버니 간 떨어지게 할래?”
‘아니, 도대체 어떤 부분에서 간이 떨어져야 되는데?’
아델라는 자신의 오라버니를 이상한 사람 보듯 빤히 보았다.
아델라의 시선을 느낀 레널드가 민망했던지 헛기침을 했다. 그는 자기가 생각해도 너무 호들갑을 떨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델라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말이다.
“큼큼! 아무튼! 공작한테는 임신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라고 확실히 말해. 알았지? 너 그거 소문나서 전하 귀에 들어갔다가는 우리 다 죽어.”
임신이 죽을 만큼 큰 죄인가? 왜 저래? 아델라는 더욱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왜? 몸은 내줘도 된다며. 그럼 임신의 위험은 항상 있는데?”
“그런 건 피임을……!”
“장난하나……. 피임이 내 맘대로 되는 건줄 알아?”
“그건……! 아니지. 그렇지…….”
아델라와 이저드한테는 매우 앞서나간 이야기였지만, 레널드는 둘의 관계를 모르니 해 볼 수 있는 이야기였다. 아델라는 왕이 이저드의 아이까지 싫어한다는 말이 마음에 걸려서 레널드를 한 번 떠본 거였다.
“그래도 조심해, 제발. 우리 조금만 버티면 돼. 조금만 버티면 남부러울 것 없이 살 수 있어.”
아델라는 살짝 띠꺼워지려는 눈빛을 가까스로 자제했다.
‘조금만 버티면 내가 죽는데 남이 부러울 건 또 뭐야.’
저걸 때릴 수도 없고.
아델라는 최대한 침착하게 영업용 미소를 띠었다.
“알았어. 오라버니 말대로 할게. 근데…… 그건 궁금하네.”
“뭐가?”
“왜 우리가 다 죽어? 오라버니는 전하의 기애…… 아, 측근이잖아.”
‘전하의 개’라고 하려던 아델라는 간신히 발음을 늘어뜨려 아닌 척했다. 그러고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의 오라버니를 바라보았다.
그는 순진무구한(?) 아델라의 눈빛 공격에 살짝 마음이 흔들렸다. 자신도 모르게 구구절절 이야기를 풀 뻔했다.
“넌…… 몰라도 돼.”
사람은 참 이상했다. 왜 곱게 이야기하면 들어 먹질 않을까. 아델라는 목을 이리저리 풀며 살포시 웃었다.
“야.”
“야? 야, 야?”
“내가 온 동네방네 소문내서 전하의 귀에 들어가게 해서 확인할까, 아니면 곱게 말할래?”
“뭐, 뭐, 뭣? 너 미쳤어?”
레널드가 펄쩍 뛰었다. 아델라는 자신의 오라버니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미쳐야 살아남지. 내가 여태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말 안 해줄 거야?”
“그건…….”
레널드는 우물쭈물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알았어. 하지 마. 한배를 타긴 개뿔. 내가 알아서 찾아볼게.”
아델라는 매우 실망하는 눈치였다. 그녀는 고민하는 레널드를 두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델라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레널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를 잡기 위함이었다.
“아, 그리고. 나 스파이 짓 시킨 거, 흑마법 확인하라는 거더라? 네가 그러고도 인간이니?”
“어, 어어? 너 그건 어떻게……?”
‘자, 이제 양심에 찔리지? 엄청 찔리지? 그러니까 불어라? 흑마법 확인하라고 시킨 거 용서해 줄 테니까 얼른 불어.’
아델라가 눈을 가늘게 뜨고 레널드를 흘겼다. 그녀의 눈빛에 레널드가 움찔했다.
“너, 혹시, 진짜, 진짜……!”
왜 갑자기 충격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레널드는 강하게 충격을 받은 듯 그 자리에서 얼었다.
“진짜, 흑마법사야?”
결론이 왜 그 모양인지?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지? 아니잖아. 내가 봤는데 그때, 넌 없었어. 그치? 너 흑마법 표식 없었잖아.”
필사적으로 아델라가 흑마법사가 아님을 주장하는 레널드를 보며 아델라는 문득 지금이 물어볼 타이밍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표식? 문신 같은 거야?”
“그래. 검은 문신! 설마…… 있어? 그, 그거 원래 커 가면서 생기는 건가? 그래? 아니지?”
문신의 유무 여부를 물어보는 레널드의 눈동자가 심하게 떨렸다. 아무래도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아델라는 똑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었기에 레널드의 마음을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 좋은 기회를 연민으로 놓칠 수는 없었다.
“혹시 그게…… 신체 어딘가…….”
아델라가 일부러 뒷말을 끌자, 레널드가 갑자기 아델라한테 손을 뻗었다.
“시, 심장. 심장이 있는 가슴에서부터 뭐 생겼어? 진짜야? 확인해……!”
짝!
막무가내로 자신을 잡으려는 레널드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놀란 아델라는 그의 손등을 있는 힘껏 때렸다.
“악!”
“미쳤어?!”
아델라가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그제야 레널드는 자신이 많이 앞서 나갔다는 것을 깨닫고 얌전해졌다.
“미안…….”
“하……. 집 나가서 잊고 사는 줄 알았더니. 지도 못 벗어났으면서 나한테 이딴 일을 시켜?”
그가 힐끔 아델라의 표정을 살폈다. 아델라가 그의 시선을 느끼고 째려보자 레널드는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둘 사이에 잠시 대화가 끊겼다.
아델라는 아델라 대로, 레널드는 레널드 대로 생각을 정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슴에 생긴다고? 그 표식이?”
“으응.”
둘 다 어느 정도 진정한 뒤, 아델라가 먼저 입을 열어 물었다. 진정한 탓인지 레널드도 아까보다는 한층 나아진 표정이었다.
“그럼 벗겨야 알 수 있어?”
“응……. 온몸에 퍼져 있지 않은 이상, 벗겨야 아는 걸로 난 알고 있어.”
레널드는 인상을 쓰며 띄엄띄엄 대답했다.
“그래서 아까 벗기려고…….”
“아냐! 아니다? 그, 팔목이나 목 정도만 확인하려고 했어!”
허둥지둥 수습하려고 해봤자, 아델라한테는 이미 신임을 잃은 뒤였다. 아델라는 너 같은 거 못 믿는다는 표정으로 레널드를 보았다.
“진짜야…….”
금세 주눅이 든 레널드는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팔목이나 목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어?”
“흑마법은 쓰면 쓸수록 퍼져 나간다고…… 들었는데.”
아델라는 그래? 라며 흥미로운 표정을 했다가 무언가 깨달은 듯 다시 그를 노려보았다.
“뭐야, 그건 더 짜증나잖아. 지금 날 뭐 얼마나 의심한 거야?”
“아, 아니……. 그 남자, 아니, 아버지가 허튼소리를 해서……. 미안하다.”
어딜 갔나 했더니 레널드한테 가서 그럴 줄이야. 징한 인간이다. 어쩐지 레널드가 갑자기 흑마법사냐고 놀라서 묻는다 했다.
아델라는 짐짓 아무것도 모른 척, 화가 난 척 레널드를 노려보았다. 사실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지만 표정 관리에 힘썼다.
“그럼 오라버니도 내가 각하한테 술수를 부렸다. 그렇게 생각한 거야?”
“아니, 아니! 난 그런 생각 안 했어. 너 예쁘잖아. 공작이 넘어갈 만하지, 그럼!”
레널드는 이것저것 찔리는 일이 많아서 아델라한테 아부했다. 그에 아델라의 표정이 조금 풀린 것도 같았다. 순전히 레널드가 보기에는 말이다. 예쁘다고 해서 싫어할 사람이 있을 리가.
“아부인 거 다 알아. 기분 나쁘니까 그만해.”
하지만 목적을 달성한 아델라가 레널드의 아부를 가만히 들어 줄 이유는 없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나서 때리고 싶은 걸 참는 것도 감사해야 할 판에, 아부는 무슨.
아델라는 다시 뚱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래…….”
그는 뻘쭘하게 엉거주춤 섰다. 그리고는 힐끔, 화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아델라의 눈치를 보았다.
“저…… 아델라.”
“뭐. 왜.”
“그러니까…… 너 흑마법사는 아니라는 거지?”
“내가 흑마법사였으면 그 현상을 보자마자 발작을 했겠어?”
아델라의 입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어렸을 때야 그런 적이 몇 번 있었지만, 현재는 주변의 도움으로 극복해서 아주 멀쩡한 상태였다. 만일 어릴 적처럼 쓰러질 정도였으면 아델라는 아마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10년 전의 아델라만을 기억하는 레널드는 껌뻑 넘어갔다. 그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했다.
“바, 발작을 했다고? 너 다 나은 거 아니었어?”
이 자식이 말이야, 방구야. 다 나았으면 이딴 일 시켜도 되냐? 아델라는 연기를 하고 있는 거였지만, 속이 팍 상했다.
“그 상처가 어디 쉽게 나을 상처야? 오라버니도 못 잊었으면서.”
아델라는 이참에 레널드한테 죄책감을 팍팍 심어 놓으려고 얼른 의자에 힘없이 털썩 앉아 얼굴을 가렸다.
‘오늘 이 인간이 아는 정보 전부 탈탈 털어 주겠어!’
“그런데에에! 오라비라는 사람으으은! 내가 흑마법에 흑 자만 들어도 어떻게 되는지 뻔히 알면서어!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냐!”
아델라는 짐짓 우는 척하며 뒤에 흑흑, 하고 의성어를 붙였다.
“야…… 저기, 아델라. 우냐?”
“내가 그 기억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데! 오라버니라는 작자는 흑마법사라고 의심을 하질 않나, 뭘 제대로 알려 주길 하나! 아이고, 이렇게 살아 뭐 해!”
“그건 너무 갔…….”
“흐어엉!”
레널드는 난처한 표정으로 아델라 맞은편에서 안절부절못했다.
“이런다, 이래! 동생은 오라버니의 부와 명예를 지켜 주기 위해 목숨까지 걸고 있는데에!”
“그…….”
조금만 더 청승을 떨면 넘어올 것도 같았다.
여태까지는 왕이 이저드를 싫어하는 이유를 알아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아이까지 다 죽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상, 자신과 이저드의 미래를 위해 알아보긴 해야 할 것 같았다.
아델라는 이제 다시는 자신이 모르는 이유로 위험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저드를 살려 둬서 득이 될 이유가 더 많지, 실이 될 이유가 더 많지는 않았다.
단순히 이저드의 강한 힘이 두려워서라고 하기에는 이유가 부족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국경선을 지키는 이저드를 죽이려고 하는 걸까?
“막! 기절까지 했는데! 흐어어―”
“아아, 알았어. 해 줄게, 해 줄 테니까 그만 울어.”
그의 대답에 아델라는 고개를 쓱 들었다. 그리고 새치름히 흘러내린 눈물을 닦았다. 운 보람이 있네. 이대로 계속 질질 끌면 우는 모습이라도 보여 주려고 했더니.
아델라는 자기가 언제 울었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너, 안 운 것 같……!”
“그래! 말해 줘.”
레널드가 뭐라고 하기 전에 아델라가 냉큼 선수를 쳤다. 그는 아델라의 빠른 태세전환에 잠시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힘들게 입을 열었다.
“그게…… 하……. 너 이거 듣고 바로 머릿속에서 지워. 티도 내지 말고, 아는 척도 하지 마. 알았지?”
“알았어.”
뭔데 저렇게 비장해? 아델라는 그의 말에 좀 더 집중하기 위해 몸을 앞으로 당겨 테이블에 밀착했다.
“너, 전하한테 아직 손이 없는 거 알지?”
“알지. 그게 왜?”
“그래서, 안 돼.”
……때릴까? 앞뒤 다 잘라먹고 뭐라는 거야?
“전하한테 자식이 없는 거랑, 각하한테 자식이 생기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아델라는 레널드를 탈탈 털고 싶은 것을 참고,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응? 너 그 소문 못 들어 봤어?”
레널드는 정말로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그의 표정은 마치 세상과 담쌓고 산 희귀한 자연인을 보는 것 같았다.
“내가 저 구석 자작가에서 들을 수 있었던 정보는 겉핥기밖에 없거든? 그 세월이 15년이고, 평민으로 지낸 세월이 6년이야.”
‘그러니까 모른다고 일일이 하나하나 놀라지 마라, 기분이 나쁘다.’라는 의미를 담아 아델라가 싱긋 웃었다.
“아……. 그, 그렇지. 귀족들의 사정은 네가 모를 만하구나.”
레널드는 아델라의 험악한 분위기에 진땀을 뺐다. 그는 주변을 살핀 후 아델라한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목소리를 낮췄다.
“공작이 선왕의 숨겨진 아들이잖아.”
“……?”
‘으음? 잠시만. 잘못 들었나?’
아델라는 자신의 귀가 잘못된 건가 의심했다.
“뭐라고?”
“지금 공작이, 이저드 제스트윈 공작이, 선왕의 아들이라고.”
아델라는 갑작스러운 폭탄 발언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건 정말 예상에도 없던 대답이었다.
“전하랑 각하가…… 친형제라고?”
“친형제는 아니지. 이복형제.”
“이, 이복형제?”
이쪽은 더 충격적이었다. 아델라는 얼얼한 정신을 다잡고 차근차근 물었다.
“이복……형제면, 그러니까 각하 어머님과…… 선왕…….”
말을 뱉고 나니, 이건 무슨 막장이지? 싶었다.
왕족이나 귀족들 사이에서는 근친혼이 존재한다고 듣긴 했다. 그러나 그걸 따지기 이전에, 이저드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주 어릴 적부터 약혼한 관계였다.
이 말은 즉, 약혼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채로, 혹은 결혼을 한 후에 불륜을 저질렀다는 말인데…….
그러고 보니, 이저드한테서 아버지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어머니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아델라는 그게 단지 이저드가 어머니를 어린 나이에 떠나보냈기에 기억에 많이 없어서인 줄 알았다.
“근데, 왜 각하는 제스트윈 공작인 거야? 왕자면, 어쨌든 왕가의 핏줄이니까 데려가려고 하지 않나?”
“아주 어릴 때 왕궁으로 데리고 오긴 했다더라. 전대 공작이 선왕과 거래를 해서 그 사건은 조용히 마무리됐지.”
“거래? 가문을 위해?”
“응. 공작 부인이 간통했다고 소문이라도 나 봐. 가문의 이미지는 회복하기 힘들게 떨어지고 후계자는 후계자대로 손가락질당할 텐데.”
그럼…… 왕은 여태 각하가 직계 왕족 중 유일했기 때문에 그렇게 죽이려고 한 건가? 후계자가 없기에 이저드가 거론되는 게 두려워서?
레널드의 말을 들으면 퍼즐이 맞춰지는 것도 같았다.
그런데 이상한 점도 있었다.
남의 자식을 키워서 후계자로 삼는 건 무슨 경우일까? 이저드의 아버지가 아이를 갖지 못하는 병이 있었나? 그래서 이저드를 내치지 못한 걸까? 그리고 이저드는 이 모든 걸 알고 있는 걸까? 다 알고 있는데……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나?
전에 아버지가 자신 때문에 죽었다고 말하는 이저드의 얼굴에는 그 어떤 원망도 담겨 있지 않았다. 오히려 죄책감으로 고통을 겪었다.
이저드라서? 그래도 키워 준 아버지니까? 자길 이용했음에도 이저드는 그런 감정을 내보일 수 있다는 말일까?
아델라는 이해할 수 없었다. 두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간 아버지를 지금도 용서할 수 없었으니까 말이다.
아델라는 문득 과거에 린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적반하장?’
‘적반하장이요?’
‘뭐, 그런 게 있다. 네가 알아서 좋을 거 없어. 그냥, 왕이 제정신이 아니야. 미쳤어. 이쪽에서 들고일어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지가 뭔데 각하께 지랄인지.’
린다는 왜 왕이 미쳤다고 한 거고, 왜 적반하장이라고 한 걸까?
이저드가 진짜 지금 왕의 이복형제라면 왕은 이저드를 제거할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걸 린다가 왕이 미쳤다고 표현할 일은 아니었다.
현왕 쪽 외가가 당시 왕세자를 제거하고 왕위를 찬탈했으니, 이저드를 경계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선례를 자기들이 만들었으니까.
그런데 린다는 왜 굳이 그렇게 말했을까? 린다가 이저드 편이라? 단지 그것뿐일까?
“오라버니가 알고 있는 그 사실이…… 확실해? 소문이라며.”
레널드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들 사이에서는 소문이지. 이 사실이 알려지면 왕가가 뭐야, 귀족들도 난리고, 파벌 갈리고 아주 아수라장이 따로 없을 거다. 지금도 전하와 등진 가문이 얼마나 많은데.”
레널드는 상상하기도 싫어서 몸서리를 쳤다.
“처음에는 공작 측에서 절대 아니라고 발뺌했지만 지금은 잠잠해. 자기들도 불리하다는 걸 안 거지. 전하께서 증인인데 발뺌한다고 되겠냐? 이미 당사자들이 다 죽어 버렸으니 이대로 모른 척할 모양인데, 그게 가능하겠냐고.”
아델라는 솔직히 레널드의 말을 믿지 못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가 공작가를 흠집 내기 위해 만들어 낸 이야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황이 교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서 아델라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는 수밖에 없었다.
이저드의 부모님을 만나 본 적은 없지만 그런 분들이 아닐 거라는,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게다가 윗분들의 사정 때문에 휘둘렸을 어린 이저드를 생각하면 과거 자신이 견뎠던 날들이 생각나 가슴이 아팠다.
“그러니까 전하는 각하를 이복형제로 알고 있어서 제거하려는 거고, 각하는 해명했지만 전하는 믿지 않는 거고?”
“해명? 해명할 게 뭐가 있어? 전하께서 증인인데. 선왕께서 떡하니 네 형제다, 라고 말했대. 너 같으면 자기 아버지 말을 믿지. 안 그래?”
“난 아버지 말 안 믿는데.”
예를 잘못 들었다.
아버지를 우상으로 삼고 커 온 자식이라면 왕처럼 자기 아버지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을 테지만 아델라도, 레널드도 아버지를 절대적으로 믿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버지에 대한 불신만 쌓여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현재 왕이 자신의 아버지인 선왕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레널드는 그럼 아델라가 전적으로 믿는 사람 누구로 예를 들어 줘야 할까 고민하다가 곧 조금 기대하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 그럼 오라버니 말은 믿어?”
“…….”
불신의 눈초리가 레널드한테 날아들었다.
“크흠! 아, 아무튼! 가장 믿고 의지하는 나라의 지존이 그런 말을 했는데, 그게 거짓이겠어?”
민망해진 레널드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왕이 철석같이 믿고 있는 걸 보면 영 거짓은 아닌 것 같은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일이 잘못된 걸까. 어디서부터 꼬인 거지.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그런 식으로 권세 유지하는 집안이 어디 한두 군데인 줄 알아? 이 세계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엄―청 말도 못 하게 더러워요. 넌 그냥 듣고 머릿속에서 지우면 돼. 알겠지?”
뭐지. 저, 이런 일이 아주 보통 일이라는 듯한 뉘앙스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놀라야 하는 건지.
일단 기억에서 지우겠다고 약속은 했기에 아델라는 알겠노라 고개는 끄덕여 줬다.
“그리고, 공작한테 아이 가진 거 아니었다고 꼭 말하고! 아까 내 이야기 들었으면 내가 왜 그러는 건지 이해하지?”
이 말도 일단 고개는 끄덕였다.
“내가 가고 나서 갑자기 아니었어요, 하면 의심할 거니까 한 주나 두 주 정도 시간을 두고. 조심해.”
아델라는 지금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아서 레널드가 무슨 말을 하든 그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한테는 지금 머리를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참, 그리고 내가 널 만나자마자 가 버리면 의심이 더 커질 테니까 하루 정도 있다 갈게. 갑자기 가 버리면 이상하잖아?”
“그러든가…….”
‘음? 잠시? 뭐라고? 뭐라고 했지, 이놈이? 하루 묵고 간다고?’
레널드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레널드는 벌써 자리에서 일어나서 귀빈실을 구경 중이었다.
* * *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긴 했지만, 이렇게 시간을 벌어 줄 필요는 없었는데.
아델라는 레널드한테 눈치를 줬다. 그녀의 눈빛은 당장 가! 사라져! 였지만, 아델라의 텔레파시를 잘못 알아들은 레널드는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 안다는 듯이.
‘저 인간이 왜 저럴까…….’
레널드가 간 뒤로 린다한테 궁금한 걸 물어보려던 아델라의 계획이 무산되는 순간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세이즈 부인.”
이 자식은 도움을 주겠다고 남은 거야, 사람 물 먹이려고 남은 거야. 아델라는 힐끔 린다의 표정을 살폈다.
린다는 고개를 숙이는 레널드를 아무 표정 없이 지켜보았다. 레널드의 숙였던 고개가 올라오는 것까지 지켜보던 린다는 그의 고개가 올라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레널드 경, 이 자리가 사석입니까? 레널드 경은 사석일지 몰라도 전 사석으로 경을 보는 게 아닌데요.”
“예?”
린다는 여전히 무표정한 상태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간단한 예의를 차린 것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레널드 경. 아델라 님을 보필하고 있는 린다 세이즈입니다.”
린다가 한 말을 이제야 이해한 레널드가 민망함에 다시 그녀한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왕실 기사단 부기사단장 레널드 벨제프입니다. 오늘은 아델라의 오라버니로서 잠시 시간을 내어 묵고 갈까 합니다.”
“오신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묵고 간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요.”
린다의 지적에 레널드는 힐끔 아델라를 보았다. 아델라는 그가 자신을 보자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아델라의 간절한 표현을 잘못 알아들은 레널드는 가슴을 쭉 펴고 턱을 당겨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오라버니로서 홀로 외지에 나와 있는 동생이 걱정돼서요. 안 됩니까?”
‘일부러 이러는 거야? 내 말을 아주 완벽히 씹어 드시네. 눈치가 없는 거야, 모른 척하는 거야?’
저놈이 왜 저렇게 안하무인으로 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뭐 저리 당당해? 저렇게 철판 깔고 말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
“안 될 건 없죠.”
에엥?
표정은 무표정인데, 린다는 현재 나름 친절한 상태였다.
“아델라 님의 오라버니이시니까요. 그럼 머물 곳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하녀들을 따라가시죠.”
레널드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짓다가 아델라한테 눈을 찡긋하고는 하녀들을 따라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왜 저래 진짜……. 무작정 들이받은 게 통했다고 기뻐하는 거야? 그럼 정말 단순한 건데.’
“저렇게 단순할 수가.”
‘헉. 누가 또 내 머릿속을?’
아델라는 얼떨떨한 눈으로 린다를 보았다. 그녀는 아까보다는 풀어진 얼굴로 아델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뭐가? 요?”
“저희 오라버니가 실례를…… 많이 안하무인이죠?”
아델라는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린다의 입으로 제대로 확인받으니까 자신의 오라버니가 얼마나 싸가지 없게 보였을까 싶었다.
“저거 일부러 그런 거예요. 중앙에 있다는 놈이 예의 하나 못 차릴까. 아까 세이즈 부인이라고 한 건 예의 차린 걸 테지만요.”
왜 저러나 생각하긴 했는데 일부러 꾸며 낸 행동이라고?
“왜요?”
“왤까요?”
아델라의 물음에 린다가 살짝 웃으며 역으로 질문했다.
앞으로 아델라한테 이런 상황은 언제든 펼쳐질 수 있었다. 그렇기에 린다는 바로 답을 내 주지 않았다. 아델라가 스스로 생각하고 답을 낼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내 간절한 눈빛도 다 무시하고 굳이 이곳에서 막무가내로 자겠다고 한 건…….’
“절 시험하려고?”
린다는 그저 웃었다.
“그럴 수도?”
‘아닌데……. 그렇다고 하기에는 공작가 비밀도 알려 주고, 위험에 처할까 봐 조심하라고 하고.’
이중 스파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고 일부러 떠보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아니면…… 린다 경? 왜? 왜 린다 경을? 린다 경을 떠보면 뭐가 나오나?’
아델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린다와 눈을 마주쳤다.
“제가 아니면…… 린다 경?”
“으흠?”
“하고……, 공작가 사람들?”
린다의 미소가 조금 짙어졌다. 그녀의 미소에 자신감을 가진 아델라가 계속 말했다.
“그리고, 각하.”
아델라라면 금방 찾아낼 줄 알았다. 연애에 대한 눈치는 모르겠지만, 사람 사이 관계에 대한 눈치는 꽤 빨랐으니까.
“예, 방금 각하와 공작가가 아델라 님한테 어느 정도로 호의를 보이는지 알아본 겁니다. 여기 있는 내내 확인할 거고. 각하께서 아델라 님한테 얼마나 빠졌고 어느 정도 선까지 허용해 주는지. 확인해서 보고하려는 거겠죠.”
아까 레널드가 말한 ‘자기가 바로 가 버리면 이저드가 의심할 거다.’ 라는 말은 구색 갖추기였다.
그는 아델라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이곳에 머물 명분을 갖춘 것이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작가에 머물며 동태를 확인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만일 이번에 린다가 그를 거절했다면 그는 아델라가 이저드한테 신임을 얻는 데에 실패했다고 생각하여 아델라를 데려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근데 그게 너무 눈에 보이니까 단순하다고 한 거죠.”
“전 오라버니가 그런 눈치 싸움 못 할 줄 알았는데. 하긴 하네요. 괜히 왕의 개는 아니네.”
두 여인은 팔짱을 끼고 레널드가 사라진 공간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나름 그럴듯하게 명분을 만들었지만, 왕가에 당한 게 너무 많은 공작가 사람들에게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다.
“아, 맞다. 린다 경. 저 물어볼 거 있는데.”
“음? 뭔데요?”
아델라는 아무것도 모르고 질문을 기다리는 린다를 보며 망설였다. 입이 쉽게 떼어지지 않았다.
이걸 물어보는 게 맞는 걸까? 물어봐도 되는 걸까?
“저……. 전에, 저한테 하셨던 말씀 있잖아요…….”
“내가 했던 말? 언제요?”
“제가 독 먹고…….”
“아델라!”
적반하장이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멀리서 뛰어오는 자신의 오라버니 때문에 대화가 끊겨 버렸다.
‘저 원수……!’
겪으면 겪을수록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 꼭 좋은 타이밍에 나타나서 상황을 다 망치고 있었다.
‘내가 진짜 회귀만 아니었으면 모른 채로 평생 사는 건데! 동생이 보낸 보고도 못 믿어서 직접 확인하는 놈 뭐가 예쁘다고……!’
속은 그랬지만 아델라는 예쁘게 웃어 줬다. 어차피 속여야 하는 놈, 확실히 속여 줘야지.
“응? 왜?”
“아니, 가 보니까 침실이 좁더라고.”
귀빈을 모시는 방이 작다는 이야기는 또 처음 들어봤다. 트집 잡을 게 없어서 공작가 방이 작다는 걸로 까탈을 부릴 줄이야. 이 말도 안 되는 연극에 동참해 줘야 한다니. 아델라는 벌써 막막했다.
‘진상 손님을 대한다고 생각하자. 그래. 아델라, 넌 할 수 있어! 호상만을 생각해!’
아델라는 자신의 오라버니를 향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침실이 좁아? 아, 그래애? 어, 그럼 안 되지. 나 만나러 여기까지 온 우리 오라버니 몸 배기면 안 되지. 그럼 내가 참 슬플 거야. 그치?”
“그럼. 너도 알지? 내가 좁은 방에서는 못 자는 거.”
아델라는 입가가 씰룩이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고 린다를 쳐다보았다. 레널드는 아델라가 속으로 온갖 욕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그녀를 따라 린다를 보았다.
이렇게 보니 외모가 닮긴 닮았다. 특히 저 반짝이는 황금빛 눈동자가. 서로 다른 의미로 반짝이고 있었지만, 둘의 눈동자에는 황금을 박아 놓은 듯 빛났다. 저렇게 거짓말하면서 티 없이 밝게 빛나기 힘든데.
린다는 유전자의 힘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숙였다.
“일단 각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건물에 마련된 침실 중 가장 큰 방을 드렸는데 작다 하시면…… 아무래도 본관으로 가셔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목적이 그거였냐. 그냥 아주 대놓고 나 수상한 짓 하러 왔소, 하지 그러냐.’
아델라는 레널드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보다가 그의 시선이 느껴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웃었다.
“그럼, 각하께 말씀드리고 오겠습니다.”
“네. 부탁드려요, 린다 경. 저흰 이 주변 산책을 좀 하고 있을게요.”
린다는 알겠다며 곧바로 이저드가 있는 건물로 향했다. 레널드는 본관으로 향하는 린다의 뒤꽁무니를 유심히 쫓았다.
왕의 측근들은 단 한 번도 머물러 보지 못한 저곳에 정말 들어갈 수 있다고?
레널드는 믿기지 않았다. 설마 될까, 하고 우겨 본 거였는데. 이 모든 게 아델라가 이룬 성과라는 게 그는 더욱 믿기지 않았다. 그가 없는 10년 사이에 부쩍 자란 아델라가 낯설었다.
“뭐 봐?”
아델라가 레널드의 시선을 느끼고 의아하게 물었다.
“으응? 아니, 아니야. 산책하러 가자며. 가자.”
레널드는 어린 아델라가 이렇게 성장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동시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자신이, 앞으로 이 어린 동생을 감당할 수 있을까.
레널드는 이상하게 아델라와 눈을 마주칠 수가 없어 먼저 앞장서서 걸었다.
“거기 아니야.”
단호한 아델라의 말에 레널드는 속이 찔려서 웃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쪽.”
“그래. 가자.”
손짓하며 앞장서기 시작한 아델라는 하녀들을 멀찍이 걷게 하고는 자신의 오라버니를 끌고 가까운 정원으로 들어갔다.
왜인지 아델라의 미소가 스산해 보인 건 착각이었을까?
* * *
“―그래서 묵고 가겠답니다. 어떻게 할까요?”
곧장 이저드의 집무실을 찾은 린다가 여태 이야기를 보고했다.
“원하는 대로 두게.”
“괜찮겠습니까? 잠을 못 청하실 텐데요?”
“어차피…….”
밤에 그런 일이 있자, 오늘은 잠을 못 잘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아델라의 불안한 눈빛을 다시 마주할까 봐. 아주 잠깐 눈을 감고 다시 깼을 때, 그녀의 울먹이는 눈동자를 마주할까 봐. 이상 현상으로 인해 그녀가 더 불안해할까 봐.
“예?”
말을 하다 잠잠해진 이저드의 모습은 평소와 달랐다. 린다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될 일이었으니.”
“아아― 전 또, 무슨 문제라도 있는 줄 알았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방은 침실과 먼 곳으로 안내할까요?”
“아니. 우리 침실과 가까운 곳으로 하게.”
린다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라는?”
“오라버니랑 산책한다며 정원으로 갔습니다. 아무래도 한 소리 하려나 봐요.”
“표정은 어땠나? 어두웠나?”
이저드의 물음에 린다는 아까 무언가를 물어보려던 아델라의 표정을 상기했다.
“어둡다기보단…… 뭔가 되게 궁금한 게 많은? 그런 눈빛이었죠. 표정이 미세하게 떨리고요.”
뭘 물으려고 한 거였지?
린다는 아까 끊긴 대화를 떠올려 보았다. 독 먹고, 에서 끊겼다. 아델라가 독 먹은 후에 한 말이 뭐가 있더라?
린다는 그날을 기억해 보려 애썼다. 린다가 뭔가를 생각하려 애쓰는 기색이 보이자 혹 아델라에 대한 이야긴가 해서 이저드는 살짝 초조해졌다.
“왜 그러나?”
“아. 아까 아델라가, 아니, 아델라 님이 저한테 궁금한 게 있다고 했는데 레널드 경이 와서 끊겼거든요. 근데 그게…… 좀 걸려서요.”
린다의 말에 이저드는 긴장해서 그녀를 빤히 보았다.
“음― 뭐 마려운 강아지를 보는 느낌? 혹은 똥 누다 끊긴 느낌?”
표현들이 왜 죄다 그런 느낌인지는 모르겠지만,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긴 했다.
“……그것뿐인가?”
린다는 무슨 문제 있냐는 표정으로 오히려 이저드를 의아하게 보았다.
“네. 왜요? 혹시 아델라 님이 저한테 따로 상담해야 할 일이 생겼습니까?”
“…….”
이저드는 그렇다고 하기에도, 아니라고 하기에도 모호해서 말이 없었다.
“찍은 건데 진짭니까? 웬일이시래요?”
평소와 똑같은 무표정이었지만, 어릴 적부터 이저드를 봐 온 린다는 그가 현재 난감해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연애 전선에 무슨 문제가 생기셔서 이럴까? 아델라가 뭘 물어보려고 했는지 더 궁금해지네?’
이때까지만 해도 린다는 아델라가 왕과 이저드의 관계를 물을 걸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그저 가벼운 연애 상담인 줄 알았다. 풋풋하네, 하고 자신과 헤이든과의 과거를 떠올릴 정도였다. 린다는 진심으로 아델라의 연애 상담을 나름 아주 잘 들어줄 생각이었다.
후에 아델라의 물음과 이저드의 현재 상황을 들은 그녀가 이 둘이 지금 풋풋하게 연애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건 아리스가 돌아오고 나서 알게 되는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지금은 그저 둘이 귀엽다고만 생각했다.
* * *
“아델라? 어디까지 가? 아델라? 아델라!”
하녀들과 멀찍이 떨어져 정원 안쪽으로 레널드를 데려온 아델라가 홱 하고 레널드를 돌아보았다.
“오라버니.”
“응?”
아델라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오라버니, 미쳤어? 아주 그냥 동네방네 나 수상한 짓 하러 왔어요! 하고 소문을 내지 그래? 각하께서 바보니?”
어쨌든 레널드는 아델라가 자신의 편인 줄 알고 있으니, 이 정도 딴죽은 걸어 줘야 했다. 레널드가 대놓고 허술했기에 따져 줘야 했다. 게다가 아델라는 지금 스파이라서 뭐든 불안해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말이다.
“괜찮아, 괜찮아. 내가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야. 오라버니 못 믿어?”
“어.”
의심 가득한 눈빛이 레널드를 향했다.
“넌 어떻게 고민도 안 하냐…….”
“지금 내 상황에서 고민하게 생겼어? 10년 만에 나타나서 나한테 뭘 시켰더라?”
아델라의 신뢰를 받기에는 이미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레널드는 글러 먹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까 그렇게 마음이 무거웠던 걸까?
양심이라는 게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서 그는 그런 감정을 없앤 지 오래였는데. 그런데 왜인지 아델라만 보면 불쑥불쑥 양심이 찔렸다. 가족이라 다른 건가?
그는 아델라한테 자길 믿어 달라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의 반응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그건 우리 둘 다 살자고, 잘 살아 보자고…….”
그래도 변명은 좀 해야겠다.
“됐고. 어쩌려고 이래?”
물론 그런 변명은 어림도 없었다.
“아니, 난 그냥, 네가 걱정되니까……. 공작이 어떤지 내가 잘 아는데, 혹 널 속이고 있는 걸까 봐.”
여태 누구와도 추문이 없었던 이저드였기에 레널드는 많이 의심스러웠다.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아델라가 깜빡 속아 넘어간 걸지도 몰랐다. 이제 막 귀족들의 세계에 입성한 아델라가 모르는 뭔가가 있을지도 몰랐다.
“말은 바로 하지? 이 계획 틀어져서 오라버니 자리 흔들릴까 봐 이러는 거잖아. 오라버니가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가면 내가 뭐가 돼?”
레널드는 찔끔 속이 찔렸다.
“무스은! 다 널 위해서 이 오라버니가 나서는 거지.”
이미 속이 뻔히 들켰는데 뭘 나서겠다는 건지.
만일 아델라가 진짜 스파이였다면 레널드는 진작 아델라한테 쳐 맞고도 남았다. 스파이 짓 잘 하고 있는데 깽판을 치러 온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말이다. 아델라는 때리기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넌 여기서 눈치 볼 필요가 전혀 없어! 네 뒤에 누가 있는데! 오라버니가 있잖아? 오라버니 뒤에는 전하께서 계셔. 당당해져!”
“그 전하께서, 이 위험한 일을 시키셨지. 잘못하면 목이 날아가는.”
아델라가 사실을 읊으며 미소 지었다.
“그래서 내가 네 최소한의 안전을 확인하려는 거잖아. 전하께서도 이 일 시키고, 걱정하셨어!”
‘그래, 걱정했겠지. 저 변방 나부랭이 아가씨가 스파이 짓을 잘 할 수 있을까, 누구처럼 실수하면 어떻게 죽여야 하나, 그런 거.’
아델라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레널드한테 어떤 표정을 지어 줘야 하나 고민했다.
초롱초롱한 눈빛? ‘어머, 전하께서 날 걱정하셔?’ 그런 눈빛을 보내야 하나? 아니면 계속 불신의 눈빛을 보내야 하나? 그녀는 이것저것 저울질을 해보다가 곧 불신의 표정으로 답했다.
“어떻게 내 안전을 확인하게? 깽판 쳐서? 어디까지 깽판 쳐야 괜찮은지 몸소 확인하시게?”
“야, 너 그거 진짜 중요하다? 무시하지 마라. 공작이 너한테 어느 정도로 빠졌는지 알아야 우리 쪽에서도 어떤 대처를 할지 생각하지.”
“무슨 대처?”
대처를 생각해 두긴 한 건지 의심스러웠다.
“뭐…… 빠졌으면 괜찮고.”
“안 빠졌으면?”
“널 여기서 데리고 나갈 방법을 강구해 봐야지.”
태연하게 자신을 데리고 가겠다고 말하는 레널드를 보며 아델라는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왔다. 그저 힘이 빠져 웃음만 나왔다.
“오라버니는 내가, 그저, 예쁜 어떤…… 물건이라고 생각해?”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아델라는 아까와 다를 바 없이 예쁘게 웃고 있었다.
“예를 들면, 인형 같은 거 말이야.”
“인형?”
확실히 인형처럼 예쁘긴 했지만, 아델라가 그런 의도로 인형을 예로 든 건 아닌 것 같았다. 레널드는 아델라가 도대체 무슨 말을 꺼낼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여기다 두면 여기 있어야 하고. 저기다 두면 저기 있어야 하고. 이곳저곳 상관없이 주인이 인형을 움직이면 인형은 무조건 거기 있어야 하잖아.”
아델라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제야 이해한 레널드는 그런 거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사람하고 인형하고 어떻게 비교가 돼? 넌 사람이지! 난 단지 널 보호하려고……!”
“평생 하지도 않던 짓 하지 마. 너, 나 보호 못 해. 한 번도 날 위한 적 없으면서 위하는 척하지 마. 그게 더 열 받아.”
아델라의 표정이 싹 굳자, 레널드는 주춤 그녀한테서 물러섰다.
“내 거취는 내가 정할 거니까, 오라버니는 오라버니 ‘일’이나 하고 가. 내 ‘일’ 방해하진 말고.”
몇 번 레널드의 뜻을 따랐다고 그녀한테 남아 있는 앙금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레널드는 아델라가 어느 정도 자신을 용서해 줬다고 생각했지만 크나큰 오산이었다. 아델라와 레널드는 그저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 다시 만나게 된 것일 뿐, 어릴 적 그 일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나 산책할 기분 아니니까, 혼자 산책하든가 공작가를 들쑤시고 다니든가 알아서 해.”
“뭣? 아델라! 너랑 다녀야 널 어떻게 대하는지 확인하지! 아델라!”
아델라가 열이 받아 먼저 자리를 뜨려고 하자 레널드가 붙잡았다.
“왜? 왜 꼭 나랑 다녀야 해? 내가 없을 때 널 어떻게 대하는지 보면 될 거 아냐.”
팍!
아델라는 자신의 팔을 잡은 레널드를 강하게 뿌리쳤다.
“내 오라버니가 깽판을 쳐도 어디까지 참아 주는지 확인할 수 있겠네! 그게 진짜 아닐까? 그건 나도 궁금하네!”
그녀는 버럭 화를 내고 정원을 빠져나갔다.
덩그러니 남겨진 레널드는 아델라를 따라나섰다가 더 화만 돋울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정원 한복판에 멍하니 서 있었다. 남아 있던 하녀들이 레널드를 안내하려고 다가오지 않았다면 아마 오래 그러고 있었을 것이다.
* * *
‘어휴― 그래. 우리 남매의 끝이 좋을 리가 없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아델라는 크게 보폭을 내어 레널드한테서 빠르게 멀리 떨어졌다. 저 원수를 상대하고 있느니 오델리아 백작 부인한테 살 빼세요! 소리를 듣고 있는 게 훨씬 낫겠다.
‘무슨 말로 떨어뜨려 놓나 걱정했는데, 알아서 화낼 거리를 만들어 주네.’
이런 걸로 싸우게 될 줄은 몰랐지만.
아델라는 걸으면서 몇 번이나 욱하고 올라오는 것을 참았다.
‘오히려 잘 됐지. 이대로 린다 경한테 가면 되겠어.’
그렇게 애써 위로해 봐도, 열 받기도 열 받고 속도 쓰렸다.
‘뭐? 날 위해? 날 위해애애? 차라리 공적인 일 때문이라고 하든가. 어디서 되도 않는 이유로…… 나한테 그딴, 거짓말을…….’
씩씩거리며 정원을 나와 자신의 방으로 향해 가던 아델라가 차츰 보폭을 줄였다. 멀리서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천천히 걸음을 줄이던 그녀는 누군가의 발끝 앞에 섰다. 그도 그녀의 앞에서 섰다. 아델라는 물끄러미 유리알 같은 맑은 하늘빛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도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를 보는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어렸다.
“레널드 경과 무슨 일 있었나?”
이저드가 먼저 아델라의 감정을 헤아리고 묻자, 아델라는 혼자 괜히 감동하여 울컥했다.
“흐잉―”
갑자기 와락 자신을 안아 오는 아델라를 이저드는 아무 말 없이 마주 안아 주었다.
“왜 그러나? 누가 그대한테 뭐라고 했나?”
아델라는 이저드한테 얼굴을 파묻은 채 고개를 저었다.
“그럼?”
그녀는 말없이 이저드를 그저 꽉 안았다. 이저드는 자신을 꽉 안는 아델라가 걱정되어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그한테 말없이 위로를 받고 있으니 아까 화났던 감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런저런 감정들과 오늘 했던 대화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흥분했던 마음이 차차 가라앉으니 아까 들었던 충격적인 이야기가 불쑥 떠올랐다.
아델라는 어쩐지 이저드한테 너무 미안했다. 따지고 보면 남의 아픈 가정사를 함부로 들은 것 아닌가. 이번 일은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생각나게 했다.
“피곤하면 들어가 쉬고 있게. 그대의 오라버니는 내가 보고 있겠네.”
그의 말에 아델라는 또 한 번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다 짜고 치는 거라지만 이저드를 막 대하는 오라버니를 보고 있으면 화병이 나서 죽을지도 몰랐다.
아델라는 슬그머니 얼굴을 들고 배시시 웃었다.
“아니에요. 잠깐 오라버니한테 화가 나는 일이 있어서. 원래 남매끼리는 많이 싸워요.”
고개를 든 아델라는 린다가 말했던 것처럼 표정이 어딘지 떨려 보였다. 뭔가 복잡한 마음이 섞여 있어서 쉽사리 왜 그러냐고 물을 수가 없었다.
“단지 그대의 오라버니한테 화가 난 것뿐인가?”
그것만은 아니었지만, 이저드 부모님에 관한 일을 당사자한테 물을 수는 없었다. 이저드한테는 상처로 남아 있을 만한 일이었다. 그래서 아델라는 절대로 이저드한테 묻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이러다가 또 풀리거든요. 각하는 각하 일 보세요. 제 오라버니라고 다 받아 주지 마시고요.”
어쩐지 찜찜한 대화였다. 린다가 말했듯이 뭐 누다 끊긴 어정쩡한 기분이었다.
아델라의 표정은 복잡했지만, 불안해 보이는 건 아니었다. 그런 걸 보면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는데, 기운은 없어 보였다.
“아델라.”
“네?”
“혹시 나한테 물을 게 있나?”
이저드는 그렇게 물음을 던지고, 그녀가 대답하는 동안 입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아델라의 입이 살짝 떨어졌다 닫히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지금은 없어요. 물어볼 게 생기면 그때 물을게요.”
“그래. 그렇게 하게.”
역시 자신과 관련이 있는 이야기를 린다한테 물으려던 모양이다. 저렇게 망설이며 아니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이저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그녀를 안아 자신의 몸에 기대게 했다. 그는 아델라가 언젠가는 꼭 이야기해 줄 거라고 믿었다. 그렇기에 기다릴 수 있었다. 아델라가 스스로 그 무언가를 이야기해 주기를, 그는 언제고 기다릴 수 있었다.
* * *
“아델라?”
마침 린다를 찾으러 가는 길이었는데, 린다와 복도에서 딱 마주쳤다.
“표정이 왜 그래요? 각하 만나고 온 거 아닌가요?”
“만났어요. 요 앞에서.”
“그런데? 왜 근심 걱정이 가득한 표정이실까?”
무거운 마음은 숨길 수가 없는 건지, 자신의 얼굴에 티가 잘 나는 건지 아니면 린다나 주변 사람들이 잘 파악하는 건지.
린다가 단번에 아델라의 마음을 알아채고 물었다.
“무슨 일 있었구나.”
린다가 없던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두면 아델라가 하루 종일 풀 죽어 있을 것 같았다.
“일단 방으로 뫼실까요?”
아델라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린다는 그녀를 에스코트하면서 어쩌면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 * *
“왜 그래? 무슨 일인데 그래. 아까는 궁금한 게 많은 표정이더니 지금은…… 죽겠는 표정이네.”
“티 나요?”
“좀? 많이?”
“각하께서도…… 눈치챘겠죠?”
아까 헤어질 때 웃으면서 보내 주긴 했지만, 린다도 눈치챘는데 그라고 눈치 못 챌 리가 없었다.
“아마도? 연인의 기분은 내 기분보다 더 빨리 알아채지.”
린다가 아델라 맞은편 의자에 앉아 부드럽게 웃었다.
‘그럼 기다리시는 거구나.’
이런 걸 보면 아델라는 자신이 아직 너무 어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괜히 걱정만 시키고. 안 그래도 오늘 새벽 일 때문에 걱정이 많을 사람한테 더 큰 걱정을 심어 줘 버렸다.
모른 척할 걸. 레널드의 말대로 듣고 바로 기억에서 지울 걸. 이저드가 아팠을 거라는 생각에 그의 앞에서 티를 내 버렸다.
“왜 그렇게 표정이 어두워? 아까 물어보려던 거?”
점점 더 어두워지는 아델라의 표정에 린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델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응?”
아델라는 역시나 많이 망설이고 있었다. 망설이는 그녀의 태도에 린다는 전에 자신이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너가 독 먹은 다음에…… 내가 뭐라고 했어? 왜 그래?”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 아델라의 입술이 달싹였다.
“―이요.”
“응?”
기어 들어가는 아델라의 목소리에 린다가 조금 더 아델라의 가까이에 몸을 기울였다.
“적반하장이요.”
“적반하장?”
린다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때 자신이 적반하장이라는 말을 왜 했더라?
“제가, 각하와 왕의 사이가 왜 그러냐고 물었잖아요.”
“아. 아아―!”
이제야 떠오른 듯 린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적반하장이라고 했지. 근데 그게 왜?”
“그게……. 정말 죄송하게도…… 제가, 두 분의 관계를 들었거든요.”
아델라는 린다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 살며시 시선을 내렸다. 아델라의 예상대로 린다가 움찔 몸이 굳는 게 느껴졌다.
“너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레널드뿐이네. 그래서? 각하가 다시 보여?”
린다는 팔짱을 끼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거 진짜 맞아요?”
“진짜면?”
“아니, 전…… 안 믿겨서…….”
“네가 전대 공작님과 공작 부인을 언제 만나 봤다고 믿고 안 믿고를 판단해?”
아델라는 우물쭈물하다가 린다를 힐끔 쳐다보았다.
하지만 린다는 화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따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아니었으면 해서요.”
“뭐?”
“그냥, 모르는 분들이지만, 아니었으면 좋겠어서.”
아델라가 쭈뼛쭈뼛 대답했고, 린다는 그녀를 빤히 보았다.
“너 그래서 각하께 못 물어봤구나. 어쩐지 너무 망설인다 했다.”
“제가 믿든 안 믿든,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각하께는 상처잖아요.”
린다가 아델라의 말을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사자한테 물어볼 말은 아니지. 근데 적반하장은 뭐야?”
“린다 경께서 적반하장에 미쳤다고 하셔서, 뭔가 오해가 있는 게 아닐까…… 했어요. 이복형제면, 제거할 이유가 있는데, 적반하장이나 미쳤다고 한 건…… 그냥 린다 경이 각하 편이라서 그런 건지, 아님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궁금해서요.”
그걸 용케 기억하고 있는 아델라도 대단했다.
린다는 이 상황이 웃겼지만, 풀 죽은 아델라의 앞에서 웃을 수는 없었기에 입가를 가렸다.
둘 다 귀엽다고 해야 하나. 둘 다 서로 상처 받을까 말도 못 하고 끙끙 앓는 게 참 귀여워 보였다. 오히려 저 나이 때는 좀 막 나가도 되지 않나? 철이 빨리 드는 것도 안 좋은 현상 같았다.
“네가 뭘 걱정했는지도 알겠고, 뭘 망설였는지도 알겠는데, 그렇게 미안해할 필요 없어.”
린다의 말에 아델라는 슬쩍 맞은편을 보았다. 다행히 린다의 표정은 부드러워 보였다.
“어차피 과거의 일이기도 하고 우리한테 미안해야 할 놈은 이제 없어. 그리고…….”
린다는 씁쓸하게 웃으며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네가 들은 모든 건 사실이 아니고.”
아델라는 무거웠던 마음이 놓이는 대신, 새로운 게 눈에 밟혔다. 린다의 씁쓸한 웃음이었다.
“사실이 아닌데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이 퍼진 거예요? 왕은 그렇게 알고 있던데.”
“왕이 그렇게 알긴. 걘 그냥 인정하기 싫은 거야. 자기 아버지가 어떤 끔찍한 일을 벌였는지.”
린다는 서슴없이 말했다.
“음―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 줘야 하지? 이야기를 하자면 긴데.”
린다는 고민하듯이 잠깐 아델라를 멍하니 보다가 뭔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내 이야기를 듣고 네가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우리가 여태 말해 주지 않은 건 우리가 그 일이 아직까지 아프고 힘들어서가 아니라…… 네가 위험해질까 봐서야.”
그 말은 전에 적반하장이라는 말을 하면서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알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그랬었다. 도대체 무슨 말이기에 린다가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아델라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낮인데도 불구하고 커튼이 쳐져 있기에 밤처럼 깜깜한 방 안으로 아델라가 조심히 들어섰다. 문을 닫기 전에 힐끔 본 바깥에는 린다가 들어가 보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그녀는 침을 꼴깍 삼키고 먼지 하나 쌓여 있지 않는 물건들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까치발을 든 채 한 발짝 한 발짝 나아갔다. 손에는 린다가 쥐여 준 랜턴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린다의 말대로 물건들을 피해 방 안쪽으로 향했다. 문 하나를 열면 또 하나의 방이 있었고 그 방문을 열면 또 하나의 방이 펼쳐졌다.
너무나 신기한 것은, 항상 관리하고 있는 건지 랜턴 빛에 비치는 물건들이 상당히 잘 보전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손가락으로 아무 곳이나 쓱 문질러도 먼지 한 톨 안 나올 것 같았다.
‘너 전에 잡혔던 곳 기억나?’
‘제가 어디에 잡혔었……. 아, 제가 수치스러워서 죽을 뻔한 곳이요?’
‘푸흡. 그래. 거기, 그 건물. 그 건물에 들어가면 바로 앞에 문이 있거든? 거기로 쭉― 계속 들어가면 볼 수 있을 거야. 증거.’
‘증거요? 무슨 증거요?’
‘전대 공작. 그리고 전대 공작 부인.’
평소에는 폐쇄되어 있어서 총 관리인인 카일과 이저드만 출입이 가능하다고 했다.
가끔 예전의 아델라와 같이 감옥에 보내긴 애매모호하고, 그렇다고 고문을 하기에도 적당하지 않은 상대를 추궁하기 위해 여는 경우는 있다고 했다. 물론, 지금 아델라가 있는 방이 아니고 이 건물 안에 위치한 몇몇 방들에서 조용히 일을 진행할 때 쓴단다.
아델라가 이 깔끔한 방에 들어올 수 있었던 건 린다가 헤이든을 협박해서 키를 받아 냈기 때문이었다.
헤이든은 린다한테 키를 줄 때 몇 번이고 그 안에 있는 물건은 절대 건들지 말라고 사정에 사정을 했다. 덕분에 현재 아델라는 극도의 긴장 상태로 발을 떼고 있었다.
길게 이어진 방의 끝에 다다랐을 때, 아델라의 눈앞에 나온 건 벽이었다. 아델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랜턴을 들어 벽면을 확인했다.
얼핏, 액자의 모서리 부분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서서히 손을 들어 랜턴을 높이 들자, 아델라의 눈에 커다란 두 개의 액자가 나란히 벽에 걸려 있는 게 보였다.
“허어어어―”
아델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숨을 들이켰다. 그러곤 두 액자를 놀란 눈으로 번갈아 보았다. 린다가 증거라고 한 말을 그제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완전 각하…….’
액자의 주인 중 한 명은 이저드와 닮은 하늘빛 눈동자와 푸른 기가 간간히 보이는 검푸른 머리를 지닌 미모의 여성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금발에 갈색 눈동자를 지녔지만 누구보다 확실하게 이저드가 내 아들이다, 라고 말해 주는 듯한 외모의 남성이었다. 젊은 이저드와 너무나 닮은 그 모습에 이건 누가 봐도 부자지간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두 액자를 보고 나니까 이저드가 왜 그렇게 잘나게 태어났는지 그녀는 납득해 버렸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꼭 닮았는데 그런 소문을…….”
이저드가 어렸을 때는 어머니 쪽을 더 닮아서 곱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고는 했다. 하지만 다 큰 이저드를 보고도 그런 소문이 나돈다는 건 정말 억지였다.
아델라는 액자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방에 들어오기 전 린다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돌아가신 공작 부인께서 건장하게 큰 각하의 모습을 봤으면 좋았을걸. 그분은 항상 각하께서 공작님을 닮지 않았다고 불안해했거든.’
‘불안해했다는 건…….’
아델라는 말끝을 흐렸다.
‘아니에요. 말씀 안 해 주셔도 돼요.’
‘나도 그 일을 다시 입에 담고 싶진 않지만, 숨기다가 일이 잘못될 수도 있거든.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린다가 또 한 번 씁쓸하게 웃었다. 아델라가 공작가에 들어오기로 한 이상 언제까지고 숨길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공작가의 해묵은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 * *
“짐승도 그것보단 낫겠다……. 어떻게 사람이…….”
아델라는 생판 남인 둘을 보고 있는데 남인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언젠가 과거에 살아 숨 쉬었을 그들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사연을 몰랐다고 하지만, 잠시간이라도 오해했던 자신이 참 미웠다.
그녀는 뿌예지는 시야를 손으로 걷으며 두 사람의 얼굴을 머릿속에 넣어 두고 싶어 빤히 쳐다보았다.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아델라는 공작 부인이 받았을 고통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녀가 얼마나 이를 악물고 하루하루를 버틴 건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자신을 겁탈한 작자가 나라의 지존이라 한마디도 할 수 없어 미쳐 갔던 공작 부인도, 그런 그녀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던 공작도. 그리고 부부를 지키며 슬퍼했던 이들도 모두 피해자인데, 왜 고통받았던 건 그들이었을까.
‘선왕이 이 일을 덮었어. 당시 각하께서 선왕한테 대항할 수 없었던 건…….’
‘설마…… 각하가 어릴 적 왕실에서 데려갔다는 게…….’
‘그래. 협박하려고 잡아갔지. 제스트윈 공작 부부의 영향력이 커지고 신망이 두터워지니 두려웠던 거지. 공작님을 주저앉히긴 해야겠고, 마땅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으니 더러운 수를 쓴 거지.’
‘어떻게 그런…….’
아델라는 너무 충격적이라서 욕도 안 나왔다.
한 나라의 왕이, 최고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람이 그 권력으로 한 집안을 풍비박산 내는 게 이렇게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니. 그녀는 할 말을 잃어 허망하게 린다를 바라보기만 했다.
‘각하를 전장에 보내 버리고 펜베르크 성에 기별도 없이 도착한 왕은…… 공작 부인한테서 아이를 뺏고 또다시 유린했어. 그 충격으로 부인께서 오래 견디지 못하신 거야.’
이저드의 어머니는 아이를 되찾을 수도 없고 남편을 다시 볼 수도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주변의 도움으로 버티고 살아가기를 택했던 여인이, 단 한 사람의 손에 무너져 내린 것이다.
이토록 쉽게 누군가를 짓밟고 죽였음에도 선왕은 아무 죄책감 없이 이저드를 붙잡고 제스트윈 공작을 협박하기에 이른다.
‘당시 각하께서는 부인의 죽음을 전서구를 통해 접해야 했고, 더불어 아이가 왕실로 잡혀갔다는 소식도 들어야 했지. 사실 그때 각하는…… 반역을 하려고 했어.’
펜베르크 성에 도착한 공작이 부인의 유서를 보지 못했다면, 그는 이미 그때 죽었을지도 몰랐다.
‘공작 부인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를 지켜 달라는 부탁을 마지막으로 남기지 않았다면 지금 어땠을지…….’
반역죄로 붙잡혀 이저드는 물론, 자신들까지 전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것이다. 아닌가, 성공했을 수도 있나?
당시 제스트윈 공작의 선택이 맞았던 건지 린다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그 선택으로 공작은 아들을 지키려다가 돌아가셨으니 말이다.
‘난 그때 이해할 수 없었어. 아이를 지키겠다는 이유로 불명예도 떠안은 채 왕의 압박도 견디고, 공작 부인을 추모할 수도 없고, 거기에다가…… 아이한테 거짓말을 해야 했으니까.’
린다의 눈빛에 깊은 슬픔이 맺혔다.
‘……그 마음을 나중에야 이해했어. 아이를 낳고 보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이 아이를 지켜야겠구나, 아이에게는 우리 부부밖에 없구나, 느꼈거든.’
그녀가 제스트윈 공작을 이해하게 된 순간은 헤이든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였다. 자신이 죽더라도, 이 어린 생명만큼은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린다는 울었다. 자신의 스승이 어떤 고통을 감내하고 버텼을지 너무 잘 느껴졌기 때문이다.
살다가 불쑥불쑥 아내가 생각났을 것이다. 아내와 행복했던 기억, 결혼을 올렸던 순간, 둘 사이에 아이가 찾아온 순간, 그리고 그녀의 유언까지도…….
모두 잊지 않고 기억이 났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너무나 보고 싶어 몇 번이나 절망감을 느꼈지만, 그럼에도 그는 버텼다. 지켜야 할 사람이, 그가 아니면 버티지 못할 그들 사이의 아이가 있었기에.
어린 이저드가 태어난 순간부터, 아이와 눈을 맞추고 손을 잡고 입을 연…… 그 모든 순간부터, 그는 자신이 죽어서라도 지켜야 할 존재임을 알았다. 그래서 지켜야 했다. 무슨 일을 겪더라도. 설령…… 훗날 아이가 자신을 원망하더라도.
‘우리가 어리석었지. 우리가 몰랐던 거야. 사실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제스트윈 각하께서는 이저드 님과 우리들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셨다는 걸.’
이저드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유와 그 모든 사실을 알고 폭발한 날, 제스트윈 공작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이들은 더는 참지 못하고 수도로 향했다. 거기에는 헤이든도 있었다.
당시의 린다는 헤이든과 무조건 반대의 의견을 펼쳤기 때문에 그들을 따르지 않았다. 또한 그땐 그 일을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그녀는 당시 제스트윈 공작한테 원래 보고하던 대로 무심코 이저드와 병사들이 수도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때 처음으로 두려움에 찬 표정을 짓는 그를 볼 수 있었다.
그는 곧바로 집무실 밖으로 뛰쳐나갔고, 린다는 얼떨떨하게 서 있다가 뒤늦게 그를 따랐다. 제스트윈 공작의 그 뒷모습이 생전의 마지막이 될 줄은 그녀는 꿈에도 몰랐다.
‘이저드 님을 반역자로 간주하고 화살을 쏟아붓던 그놈 앞에서…… 각하는 화살을 맞은 채 빌었고, 우리는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어.’
그들은 그렇게 기둥이었던 사람을 잃고 오랜 회복 기간을 가졌다. 자신이 분노에 사로잡혀 움직이지 않았다면 현재 제스트윈 공작이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들은 회복 중이었다.
그사이 누군가는 그 기억 때문에 이곳을 떠났고, 누군가는 남았지만 항상 걱정이 가득했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어떤 괴로움에도 단단해졌다.
이야기를 듣던 아델라는 그들이 겪었을 고통을 떠올리며 그만 울어 버렸다.
‘울릴 생각은 아니었는데.’
린다가 우는 아델라를 토닥이며 난처하게 웃었다.
아델라는 소중한 사람을 잃는 고통이 얼마나 뼈저리게 아픈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 기억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기억에서 지우고 외면했다. 만약 전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면, 그녀는 어릴 때 이미 미쳤을지도 몰랐다.
‘어떻게 그 기억을 감당하실 수가 있지? 얼마나 힘드셨을까? 얼마나 감내하고 견뎌야 무뎌질 수 있을까? 아니지, 무뎌지신 게 아니야. 감당하기로 단단히 마음먹으신 거야.’
아델라는 커다란 두 액자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자신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잊지 않고 기억하려고 애쓴 적이 없었다. 선명한 두 분을 보고 있으니, 잊으려고만 생각했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고, 죄송했다.
“죄송해요……. 흐흡…… 죄송해요.”
누구한테 죄송한 건지 아델라는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다 죄송했다. 오해한 것도, 이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그냥 다.
아델라는 소매로 연신 눈물을 닦으며 그렇게 울었다.
“―아델라.”
좀처럼 진정되지 않던 마음이 그의 낮은 부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진정된다는 게 이상했다. 이 공간에 그가 들어왔다는 것만으로도 아델라는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그대가 왜 미안한가.”
랜턴을 들고 돌아본 곳에는 이저드가 바짝 다가와 있었다.
어머니의 눈을 빼다 박은 그의 하늘빛 눈동자를 보자 아델라는 주체할 수 없이 심장이 아프게 뛰었다. 지금도 많이 울고 있었지만, 참고 있던 소리가 터져 나올 것 같아서 이저드를 보자마자 와락 마주 안았다.
그녀는 그냥 이저드를 안고 싶었다. 그냥 안아 주고 싶었다.
부모님이 그렇게 가고, 그 시간을 견뎠을 이저드를…… 그냥, 그렇게 안고 싶었다. 위로하고, 위로받고 싶었다.
“흐어엉― 죄송해요!”
“……?”
린다가 무작정 끌고 왔기에 이저드는 정확히 무슨 상황인지 몰랐다. 린다가 왜 이곳을 아델라한테 열어 준 건지도 모르고 왔다. 그러나 방금 울 것 같은 아델라의 표정을 보니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사실을.
“정말 죄송해요! 조금이라도 오해해서…….”
이저드는 아델라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아델라를 진정시키기 위해 가만히 그녀를 끌어안고 토닥이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조금이라도…… 각하한테 좋지 않은 부모님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 해서요.”
아델라가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일에 사과하니, 이저드는 살짝 당황했다. 그는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곧 다시 아델라의 등을 토닥였다.
“사과하지 않아도 되네. 그대의 잘못이 아니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아델라를 잠깐 품에서 떼어 놓았다. 시선을 마주치기 위함이었다. 눈가가 많이 빨개진 것을 보니, 이저드가 없던 사이에 펑펑 운 것 같았다.
평소에 그는 그녀가 우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상하게 묘한 감정이 이저드의 심장을 살랑였다. 우는 아델라가 왜 그렇게 예뻐 보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주 잠깐의 순간 자신이 변태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불손하게도 그는 자신을 위해 그녀가 울었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에 안도감이 들었다. 기뻤고, 가슴이 벅찼으며, 행복하기까지 했다.
아델라가 두 초상화 앞에서 빛을 밝히며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을 때부터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떨림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가 아프게, 슬프게, 안타깝게 우는데 자신은 그와 반대로 기쁘다는 게 이상했다.
감정 회로가 고장난 걸까. 왜 우는 연인이 사랑스러워 보이고, 꽉 안고 싶을까. 어째서 저 앙다물어진 입술에 키스하고 싶은 걸까.
“그대가 화를 낼지 모르겠지만, 난 기쁘네.”
아델라가 의아한 듯 이저드를 쳐다보았다. 이저드는 아델라의 눈가를 손으로 쓸며 살짝 미소를 보였다.
그는 세상에서 두 분을 잃고, 많은 위로와 동정을 받았다. 하지만 그 말은 한때였을 뿐, 그 무엇으로도 마음속 공허함을 채울 수가 없었다.
감정을 지우고 몸을 단련하고 힘을 키우면서 그는 단단해졌지만, 완벽했던 건 아니었다. 완벽하게 보였을 뿐이지.
“그냥, 기뻐. 그대가 날 걱정해 줘서. 남겨진 사람들도, 떠나간 사람들도 생각해 줘서 고맙네.”
기쁘다는 말을 소리로 내어 본 적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이저드는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나오는 자신의 목소리에 놀랐다. 아델라는 알까. 그녀로 인해 자신이 이렇게 솔직히 표현도 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을.
살아야 했기에 일부러 죽였던 감정들이 하나둘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이저드는 표현하지 않고, 감정을 보이지 않는 것이 자신이 단단해지는 길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사실 그것만이 단단해지는 길이 아니라는 걸 그녀로 인해 알게 됐다.
“참고 계신 거 아니죠? 울고 싶을 땐 우셔야 해요. 각하가 저한테 그랬던 것처럼, 저도 제 품을 빌려 드릴게요!”
아델라가 눈물을 닦아 내며 팔을 벌렸다.
정작 아프고 힘들었을 이저드는 괜찮은데 자기만 펑펑 울었다는 게 조금 민망했다. 그녀는 혹시 이저드가 자신 앞에서 마음을 못 털어놓은 걸까 봐 걱정되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이저드는 맑은 황금빛 눈망울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를 피하지 않고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아까보다 훨씬 붉어지는 두 볼을 보니, 아무래도 민망했던 모양이다.
그는 문득 그녀한테 살짝 장난을 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참고 있는 건 있네.”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서린 듯싶었다. 아델라는 말만 하라는 듯이 눈을 초롱초롱하게 떴다.
“그대의 품.”
이저드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진다는 생각을 하던 중에, 훅 하고 그의 향기가 아델라의 코끝을 자극했다. 아델라는 코끝이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 놀라 숨을 홉, 들이켰다.
“……과, 그대의 입술.”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그가 낮게 읊조렸다. 귀를 통해 울리는 그의 낮은 목소리에 아델라는 순간 목덜미가 오싹하고 소름이 돋았다. 명백히 어떤 목적이 실린 목소리였다. 그에 따라 아델라의 심장도 기대감과 설렘으로 두근거렸다.
주인 맘도 모르고 저절로 벌어지려는 입술을 아델라는 급히 닫았다.
“아, 안 돼요!”
“왜?”
‘나 조금 전까지 펑펑 울던 사람 맞니! 운 거 다 까먹겠네, 너무 설레서.’
못 이기는 척 눈을 감고 싶었지만, 현재 둘이 서 있는 이곳이 어딘지 생각해 냈다.
“왠지…… 여기선 좀……. 나가서는 괜찮은데…….”
두 분을 기리는 커다란 액자 앞에서 키스할 만큼 아델라의 낯은 두껍지 않았다. 그리고 왠지 기분이, 두 분이 살아계신 건 아니지만 액자가 지켜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괜히 민망했다.
민망해하는 아델라도 귀여워서 이저드는 아주 짧게 입만 맞추고 떨어졌다.
“농담이었네.”
잠깐의 감촉만 내어 주고 순식간에 떨어지는 이저드를 멍하니 보던 아델라가 황당함에 입을 뗐다.
“노, 농담이요?”
대놓고 꼬셔 놓고선 농담이라니!
‘아니, 그전에 각하께서 농담? 농담이라고 했나? 잘못 들은 거 아닌가?’
아델라는 자기가 잘못 들은 건 아닐까 한참 생각했다.
“방금 농담이라고 하셨죠?”
이저드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라는 그 모습을 신기하다는 듯 보다가 곧 자기가 놀림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럼 저 놀리신 거예요? 전 진담이었는데!”
아델라는 괜히 억울해졌다. 뭔가 되게 좋은 기회를 놓친 것 같은 그런 억울함이었다.
이저드는 자꾸만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그녀의 마음도, 그녀의 생각도, 모두 사랑스럽고 귀여운 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역시 자신의 감정이 조금 이상해진 것은 틀림없었다. 아델라의 직설적인 반응에 더는 참고 있기가 힘들어 농담은 이쯤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저드는 아델라의 한 손을 가볍게 잡았다.
“이곳에서는 농담이었지만…….”
그도 두 액자 앞에서 애정행각을 벌일 정도로 낯이 두껍지는 않았다. 이저드는 아델라를 이끌며 뒤로 조금씩 이동했다.
아델라는 의아한 표정으로 한 손을 이저드한테 맡긴 채 그를 따라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둘을 밝히는 랜턴도 그들의 움직임을 따라 점점 액자에서 멀어졌다.
이윽고 옆방으로 이동했을 때, 이저드는 아델라가 들고 있던 랜턴을 받아서 가까운 서랍장 위에 두었다. 아델라는 멀뚱히 그가 하는 행동을 눈으로 좇았다. 뭐하시는 거지?
“여기는 괜찮나?”
“네?”
탁.
이저드는 아델라한테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랜턴 빛에 비친 이저드의 눈동자는 타는 것처럼 일렁였다.
“아까 내가 하려던 일. 그리고, 그대가 진담이라고 한 일.”
곁으로 가까이 다가온 이저드를 넋 놓고 보던 아델라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라의 허락에 그가 살짝 미소 짓자, 아델라는 이대로 숨 막혀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심장이 쉴 새 없이 뛰어서 키스도 하기 전에 숨이 차는 기분이었다.
천천히, 그녀가 허락해 줄 때까지 기다렸던 이저드는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쌌다. 긴장해서 약하게 떨리는 아델라의 몸이 손바닥을 타고 느껴졌다.
그가 짧게 몇 번 그녀의 입에 입을 맞췄다. 살짝 굳어 있던 아델라가 짧은 입맞춤에 그를 마주 보다가 눈을 감으며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아델라는 괜찮다는 듯이 이저드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을 길게 꾹 맞대었다. 이저드는 그런 아델라의 입술을 머금고 조금씩 그녀의 입술을 열었다.
틈 없이 맞닿은 입술은 곧 진하게, 깊게, 그리고 농염하게 얽혔다.
* * *
“죄송해요.”
이저드가 아델라의 손을 잡고 의아한 표정을 했다.
“린다 경이…… 저한테, 이 사실을 알면 제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억지로 알아내서…….”
아델라가 우물쭈물하며 사과했다. 이저드는 아니라고, 괜찮다고 말하려다가 다음 들린 말에 움찔 걸음을 멈췄다.
“아니, 오라버니가! 저뿐만 아니라 아이까지 죽는다고 그래서……. 너무 이상해서, 제가…… 캤어요.”
아델라는 너무 미안해서 이저드와 시선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땅바닥만 내려다보며 걸었다.
그때, 그녀와 손을 잡고 걷던 이저드가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이저드를 올려다보았다.
‘화나셨나? 화나셨을까?’
“……방금 뭐라고 했나?”
화나셨나!
“화…… 나셨어요?”
“아니. ……아이?”
아델라는 그의 말에 이저드가 멈춘 이유를 깨닫고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 당연히 진짜는 아니고요. 음, 그러니까 오라버니를 빨리 오게 하려고…… 제가 거짓말로 둘러댔거든요.”
“아이를 가졌다고?”
“네. 제가 스파이니까 평범한 이유로 불러내면 의심만 살 것 같아서요.”
이저드도 분명 알고 있었다. 그녀와 자기 사이에 아이가 있을 리 없다는 것을. 관계를 맺은 적도 없으니 당연했다.
그런데 아주 짧은 찰나에 ‘아이가 있다면…….’ 하고 생각해 버렸다. 그러다가 그는 덜컥 겁이 났다. 아이를 지킬 수 없을까 봐. 지금 현재는 그가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각하?”
이저드가 눈도 깜박이지 않고 아델라만을 뚫어져라 보자, 아델라가 그를 불렀다.
“상의 없이 그렇게 보내서 죄송해요. 전 그냥 거짓말이었어, 하고…… 흑마법에 관해서 물어볼 생각밖에 못 했거든요.”
아델라가 면목 없다는 표정을 짓자 이저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네. 그대가 한 행동에 굳었던 게 아냐. 만일 그대와 나 사이에 아이가 생긴다면…….”
이저드가 드물게 망설이듯 뒷말을 흐리자, 아델라는 조심스레 그의 안색을 살폈다.
“걱정돼서요? 혹시 죽을까 봐?”
“그래. 혹여…… 지키지 못할까 봐. 아직…… 조금 부족해서.”
아델라는 그의 말을 끝까지 듣고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물론 그녀는 그가 두려워하는 마음을 이해했다. 아델라도 이저드와 자신의 아이가 나라의 지존한테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막막하긴 했다.
아델라가 의아했던 포인트는 두려운 마음이 아니었다. 그 뒷말이었다. 아직 조금 부족하다는 말.
“뭐가…… 요? 뭐가 부족해요?”
“대항하기에는 아직.”
앞의 주어가 빠지긴 했다. 그렇지만 이건 확실히…… 왕으로 추정되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대항……이요?”
이저드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반역이잖아요.”
아델라는 자신이 말해 놓고 놀라서 눈만 깜박였고, 이저드는 대답이 없었다. 왕한테 대항하겠다는 말은, 왕의 말을 거역하겠다는 뜻이었고, 이는 즉결처분이 가능한 반역죄였다.
한참 후 정신을 차린 아델라는 이저드의 두 손을 꼭 잡고 고개를 빠르게 가로저었다.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그냥, 제가 참을게요! 관계 안 맺어도 괜찮아요! 각하께서 죽는 거 보고 싶지 않아요.”
그의 죽음을 볼 생각만 해도 눈앞이 새하얀데, 그가 제 눈앞에서 죽을 수도 있다니. 그의 죽음을 눈앞에서 본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분명 전생에 그의 죽음을 봤지만, 그때와 지금은 완전히 달랐다. 마음가짐도 그렇고, 그와의 관계도 그랬다.
“아델라.”
“네?”
이저드는 왜 우리 사이에 아이를 갖지 않는 게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 된 건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렇지만 일단 그녀를 진정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난 안 죽네. 그대를 두고 죽지 않아.”
“그치만…… 대항한다면서요.”
“그대를 죽이려는 왕한테 맞설 방도를 생각해 보겠다는 말일세.”
아까는 그 뜻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델라는 유심히 이저드를 살폈다. 그의 표정은 평소와 같았다. 포커페이스라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힘들었다.
“진짜죠?”
이저드는 그녀를 안심시키려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에 아델라도 조금 안심한 듯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라는 이저드를 믿었다. 그가 무엇을 하려는 건지는 잘 몰랐다. 하지만, 이저드가 죽지 않겠노라고 한 말을 믿었다. 그 약속만은 지킬 거라고 아델라는 믿고 있었다.
아주 만약에 정말, 전제하고 싶지 않지만, 설령 그가 안 좋은 일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아델라는 언제든 미래를 바꿀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가 없는 세상은 상상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전쟁이 없는 세상이 되더라도, 아델라는 그가 없으면 이제 안 될 것 같았다.
* * *
아델라를 방까지 데려다주고 돌아온 집무실에는 며칠간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온 아리스가 이저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왔군. 경이 알고 싶은 건 알아냈나?”
이저드가 아리스의 맞은편 소파에 앉아 묻자, 아리스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아리스의 흑안에 혼란스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답을 얻지 않은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얻은 것도 아니었다.
“알아냈긴 합니다.”
“그러한데?”
“수상한 건 여전합니다.”
원래 루의 정체를 파악하려고 갔지만, 아리스의 손에 떨어진 루에 관한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다. 흡사 신기루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루가 흑마법사인지, 일반인인지, 평민인지, 귀족인지, 혹은 왕족인지, 아니면 또 다른 존재인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정말 알면 알수록 더 모르겠는 사람이었다.
“그의 정체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저희한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줬습니다.”
“흑마법 말인가?”
“예, 푸는 방법을 알려 줬습니다. 아델라 영애라면 할 수 있을 거라며. 그리고…….”
아리스는 품에서 책을 꺼내어 이저드한테 내밀었다.
“이건 아델라 영애의 책이 아니랍니다. 아델라 영애의 가게에 침입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그때 누군가 바꿔치기를 한 것 같습니다.”
“침입? 그런 말은 없었는데.”
이저드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침입이라고 하기에는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누가 들어온 게 아닐까 하고 알아챈 것도 물건들의 위치를 모두 기억하는 영애뿐이었고요.”
“그래서 말이 없었던 건가?”
“예, 아무것도 바뀐 게 없어서 영애께서 착각한 것 같다고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전 영애의 친구분에 관한 의심 때문에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면목 없습니다.”
아리스가 고개를 숙였다.
“아니, 괜찮네. 그때 침입을 알았다고 한들, 책이 바뀐 건 몰랐겠지. 계속하게.”
이저드의 말에 아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까 하던 이야기를 계속 이어 갔다.
“이 책은 아델라 영애가 원했던 내용과 반대되는 책이랍니다. 아델라 영애가 바랐던 내용은 흑마법에 안 걸리는 방법이나 안 거는 방법이라고 하더군요.”
“그렇다는 건, 이 책은 흑마법을 거는 방법이 쓰여 있다는 건가?”
이저드가 테이블 위에 있는 책을 집어 들며 물었다.
“네. 아델라 영애와는 반대로, 강력한 마법이 쓰인 책을 원하던 이도 있었답니다.”
이저드는 잠깐 생각에 빠진 듯 물끄러미 책을 내려다보았다.
“책을 바꿔 간 이유는?”
“확실치 않습니다. 그녀가 흑마법을 푸는 방법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그런 건지, 아니면 그 책으로 뭘 하려는 건지…….”
아델라의 가게를 콕 짚어 들어가서 훔쳤다는 것은 아델라가 흑마법사일 수도 있다고 짐작했다는 의미였다. 그녀의 가게에 들어간 건 확신을 얻기 위해서였을 확률이 높았다. 진짜 흑마법사인지 증거가 필요했으니까.
하지만 어떻게?
아델라가 의심스러운 행동을 했다고 한들, 그 행동을 바탕으로 그녀를 흑마법사로 의심하기에는 상당 부분 무리가 있었다.
‘아델라의 어떤 부분에서 흑마법사임을 의심했던 거지?’
흑마법사끼리 힘으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아델라의 몸에 문신이 올라온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저드는 이 부분이 굉장히 찝찝했다.
그가 의문을 품고 생각하는 사이, 아리스는 계속 보고를 이어 갔다.
“책에 대한 해석은 끝냈지만, 쓸모는 없습니다. 푸는 방법에 ‘힘으로 누른다.’ 밖에는 없거든요. 나머지는 강력한 흑마법뿐입니다.”
“그런가? 그럼 이 책은 폐기하게. 우리가 갖고 있다는 게 알려져서 좋을 게 없으니.”
아리스는 이저드한테서 책을 받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서는 영애 친구분이 말한 방법이 유일합니다. 아니면 그 흑마법사를 찾아내든가.”
“짐작 가는 사람이 있나?”
“추측하고 있을 뿐입니다. 처음 루라는 사람을 찾아간 이유와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처음 루라는 사람을 의심한 건 고대어를 자유자재로 쓰고, 고서를 구해 올 수 있으며 출신 성분이 모호해서였다. 나중에 그의 출신이 확실하게 평민이라는 것을 알아내고 의심을 살짝 거뒀지만 말이다.
아델라가 루의 신분을 의심하지 않는 건 확실하게 그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도, 그의 할아버지도 그리고 그 전대 할아버지도 모두 고향이 한때는 자작가의 영지였던 마을이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상인인데도 고향이 모두 같은 곳인 걸 보면 고향 사랑이 남다른 집안이라는 것 빼고는 특별할 게 없었다.
“저는 이오스 쪽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저희와는 본국의 왕 다음으로 적대적인 관계니까요. 왕족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고대어를 쓴다고 하길래 루라는 사람이 이오스의 숨겨진 왕족이 아닐까 했지만 잘못 짚었다더군요.”
아리스가 유독 이오스 쪽을 의심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아리스는 개인적인 이유로 본국의 왕족들, 심지어 사생아들까지 전부 꿰고 있었으며 왕의 심복인 귀족들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들 중에 아리스가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여태 공작의 측근 중에 왕의 심복이 없었던 이유 중 하나도, 스파이를 붙이는 족족 아리스의 레이더망에 포착됐기 때문이다. 사람을 사서 부려도, 혹은 출신 성분을 모르는 평민만 달랑 보내도 전부 뒤가 밟혔다. 제베르 왕국 출신이라면 금방 뒤를 캐낼 정도로 아리스의 정보력은 좋았다.
그렇기에 공작 성에 들어올 수 있으면서, 이저드와는 적대적인 관계이고, 아리스가 눈치채지 못할 만한 사람은 비교적 정보가 적은 이오스뿐이었다. 이오스의 정복 전쟁을 항상 막았던 게 제스트윈 공작가였으니까 말이다.
“잘못 짚었다?”
이저드는 이상한 단어를 들었다는 듯이 물었다.
“분명 그렇게 말했습니다. 범인이 이오스의 왕족임을 못 알아낼 줄 알았다며 그 사람이 웃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기를 짚은 건 잘못 짚었다고 말하더군요.”
“…….”
이저드는 아리스가 루에 대한 의심을 떨치지 못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반응이 끝이었나?”
“예. 아주 당당하게.”
“티끌만 한 거짓도 찾아볼 수 없었고?”
아리스가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에 차서 말할 수 있는 건지. 아리스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잘못 짚었다는 건, 자기 말고 다른 사람이라는 건가?”
“그 또한 확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제가 짐작한 말이니, 저보고 찾으라고…….”
아리스가 여태 정보를 알아오면서 이렇게 불확실한 답을 내놓은 적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루가 숨기는 게 많았다는 말이었다. 아리스가 루를 대하며 얼마나 머리를 썼을지, 안 봐도 그려졌다.
“경이 고생했군. 그래서 경은 그를 믿을 수 있겠나?”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아리스는 딱 잘라 말했다.
“믿음을 주지 않거든요. 단지, 제가 믿어 보겠다고 마음먹은 건, 아델라 영애와의 관계는 진짜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로 아델라를 신뢰하고 있는지는 몰랐는데, 아리스의 머릿속에 아델라는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박혀 있는 모양이었다. 아델라가 들었으면 많이 감동했을 말이었다.
이저드는 아리스의 심정을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직접 대면한 경의 판단을 믿지. 그럼 이제 말해 주겠나?”
미래를 바꿀 수도 있는 가장 중요한 이야기였다.
아리스가 루와 뜬구름 잡는 것 같은 대화를 끈질기게 이어 나간 가장 큰 목적, 바로 흑마법을 풀 수 있는 방법.
“예.”
아리스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린다보다 한참 빨리 온 아델라는 커다란 창밖으로 보이는 푸르른 정원을 아까보다는 조금 편한 마음으로 감상하고 있었다. 가만히 턱을 괴고 밖을 보고 있자니 졸음이 몰려올 정도로 나른했다.
나른한 기분에 아델라는 하품도 해 보고 기지개도 펴 보며 잠을 쫓았다. 오늘 여러 일이 몰아치다 보니 긴장을 많이 했나 보다. 확 편안해져서 한 방에 졸음이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아델라는 턱을 괴고 린다가 올 때까지 조금만 눈을 감고 있을 생각이었다.
똑똑.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타난다고 했던가. 어떻게 딱 눈 감자마자 올 수가 있지?
“들어오세요.”
아델라는 안 존 척 눈을 말짱하게 뜨고 문을 쳐다보았다.
“……어라? 벤슨 경?”
린다인 줄 알았는데, 문밖에 서 있는 건 튀는 주황빛 머리의 벤슨이었다. 아델라는 그를 확인하고 긴장이 풀려 스르르 테이블에 한쪽 볼을 붙였다.
“뭐지, 이 반응은. 나한테 너무 긴장 안 하는 거 아닙니까?”
“졸린 걸 어떡해요. 전 린다 경인 줄 알고 일어났죠. 그나저나, 언제 오셨어요?”
벤슨은 웃는 얼굴로 문을 닫고 뚜벅뚜벅 아델라를 향해 걸어왔다. 아델라는 졸린 눈으로 대수롭지 않게 그를 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그의 손목으로 눈이 향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마침 눈높이가 그쯤 됐다.
‘팔목이나 목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어?’
‘흑마법은 쓰면 쓸수록 퍼져 나간다고…… 들었는데.’
왜 지금 이 시점에 그 생각이 났을까. 전에 그냥 흉터라고 했던 벤슨의 손목이 아델라의 눈에 들어왔다.
“방금.”
‘안 보이네. 그러고 보니, 첫 만남 이후로는 계속 장갑을 끼고 있었어. 보기 흉한 흉터라서 그런가?’
“그럼 오늘은 린다 경이 아델라 님의 호위? 난 혹시나 하고 잠깐 들렀지.”
벤슨이 무슨 말을 해도 아델라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녀는 어딘지 멍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델라 님?”
‘응? 근데 저건 뭐지?’
멍하니 벤슨의 손을 유심히 보던 아델라가 갑자기 퍼뜩 머리를 들었다. 그에 덩달아 벤슨도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피!”
아델라의 외침에 벤슨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보통 놀라거나 모르던 사실이면 손을 내려다본다거나 움찔거린다거나 하는데 그는 그 어떤 동작도 취하지 않았다.
벌컥!
“피? 뭔 피?”
때마침 아델라의 목소리를 들은 린다가 들어와서 아델라는 그의 반응을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피 나요, 벤슨 경!”
“아? 아…… 그러네.”
벤슨은 전혀 몰랐다는 듯이 반응했다.
아델라는 그 반응이 이상하게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그의 갈색 장갑에는 검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많이 묻은 건 아니었지만, 누가 봐도 피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디 다쳤어요?”
“너 휴가 가서 뭐 했냐? 피가 나도 모르게.”
아델라가 걱정스레 물었고, 벤슨한테 걸어온 린다도 한마디 거들었다.
“아, 이거 제 피 아니에요.”
벤슨은 숨김없이 사실을 말했고, 일순 정적이 찾아왔다.
아델라가 놀란 표정으로 벤슨을 바라보았다. 전에도 느꼈는데, 웃고 있는 그의 표정이 낯설었다.
“이젠 연적도 막 죽이고 다녀?”
린다가 어이없어하며 묻자, 벤슨이 웃으며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제가 죽을 뻔하죠, 항상.”
“자랑이다.”
“며칠 전에 죽을 뻔한 사람을 구해 줬는데 그때 묻었나 봐요. 피범벅이었거든요.”
벤슨이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했고, 린다는 어깨를 으쓱이며 아델라 곁으로 다가갔다. 아델라는 아직도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어쩌다 그렇게 됐대?”
“집안 문제가 아닐까 싶어요. 보니까 아이의 아버지가 아이를 엄청 때리고 있더라고요.”
“허……. 그래서 끼어들었냐?”
“네.”
벤슨이 그렇게만 대답하고 웃자, 린다는 알 만하다는 듯이 그를 보았다.
“잡혀가지 않은 게 용하다.”
“제가 도망가는 건 잘하잖아요.”
“그래. 잘했다, 아주.”
맞고 있는 아이를 구했다니까 린다는 뭐라 한마디 하지 못하고 애써 칭찬했다. 얘도 가만 보면 물불 안 가린다니까.
“근데 숙소로 안 가고 여긴 왜 들렀어?”
“저 오늘 바로 복귀하는 줄 알고 물어보려고 들렀죠.”
“그래? 그럼 훈련하러 복귀해. 너 밀린 거 많아서 아델라 님은 내가 맡기로 했거든.”
린다의 말에 벤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확인했으니까 전 가 보죠. 저 갑니다? 아델라 님.”
벤슨이 환하게 웃으며 아델라를 부르자, 멍 때리던 아델라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마주 웃었다.
“앗! 네!”
방금 너무 억지로 웃었나? 어색해 보이지는 않았겠지?
아델라는 벤슨이 문을 닫고 나가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왜 그래요?”
그 모습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린다가 의아하게 물었다.
“린다 경.”
“응?”
아델라의 표정은 아직도 넋이 나가 있는 듯했다.
“벤슨 경 손목 흉터요. 무슨…… 사연인지 아세요?”
“음― 이건 너무 개인적인 이야긴데. 필요하니까 묻는 거겠죠?”
아델라는 잠시 망설이다가 꿋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벤슨 경한테 따로 묻지 못하는 이유가 있는 거고?”
다시 한 번 그녀가 끄덕였다. 린다는 아델라의 떨리는 눈동자를 보면서 입을 뗐다.
“벤슨 경도 마녀사냥의 피해자예요. 벤슨 경의 어머니랑 마을 사람들을 모두 잡아서 건물에 가둬 두고 불을 붙였답니다. 벤슨 경은 그곳에 들어가서 사람들을 구하려다가 온몸에 화상을 입었고.”
자신이 잘못 생각한 걸까? 억측이었나?
“그 후로…… 아까처럼 위험에 처한 사람이 있으면 그냥 못 지나간다고 하더라고요. 그 사람이 이오스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이오스요? 이오스 출신이 왜요?”
“벤슨 경은 이오스가 고향인데 그런 기억 때문에 치를 떨 정도로 싫어해요. 오죽하면 이오스랑 맨날 전쟁을 치르는 여기로 왔겠어요. 걘 이오스의 ‘이’ 자만 들어도 표정이…… 좀, 무섭게 바뀐다고 해야 하나?”
아델라는 레널드가 말한 전신을 타고 퍼진 흑마법사 표식이 혹, 벤슨의 손목에 난 그 흉터가 아닐까 아주 잠시 의심했다.
오늘 왜 이렇게 본의 아니게 미안한 짓을 많이 한다니.
항상 웃는 얼굴이라 그에게 이런 과거가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생각해 보니, 자신도 힘들수록 웃으려고 노력했는데 말이다. 아델라는 저도 모르게 풀이 죽었다. 오늘 여러 사람한테 민폐 끼치는 기분이었다.
“죄송해요. 제가 잘못 짚었어요.”
자신의 잘못을 바로 인정하는 아델라를 보며 린다가 피식 웃었다.
“흑마법사?”
아델라가 힘없이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나나 헤이든도 벤슨 경을 떠올리긴 했지만, 좀…… 마음이 편치 않죠. 뒷조사를 전부 했는데 벤슨 경의 말이 사실이라고 밝혀져서…….”
그들이 원래 더 해야 했을 아델라의 집안을 조사하다가 중간에 멈춘 이유 중 하나로 작용한 게 바로 이것이었다.
헤이든은 벤슨과 아델라의 과거가 닮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마녀사냥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모든 조사를 중단했다. 벤슨이라는 참혹한 선례가 있었기에 짐작만으로도 실례가 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 그래서…… 제 말을 비교적 쉽게 믿어 주신 거군요?”
“그건…… 아니요.”
“……?”
벤슨으로 인해 아델라의 과거가 짐작되어 조사를 멈춘 건 맞다. 하지만 벤슨이라는 선례로 인해 그녀를 믿게 됐다고는 하지 않았다. 아델라를 믿게 된 상황과 벤슨을 믿게 된 상황은 천지 차이였다.
“아델라 님은 뭐랄까…….”
린다는 벤슨과 아델라의 첫인상을 어떻게 다르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확실하게 머리에 떡 하니 각인시킬 비유가 뭐가 있을까.
“허허벌판에서 속옷만 입은 채 전 다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하는, 그런 인상이었죠.”
“……예?”
머리에 이미지까지 그려질 정도로 확실하게 각인되긴 했는데…… 표, 표현이 왜……?
아델라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숨기는 게 없지 않아 있지만, 숨겨 봐야 속옷 정도?”
린다는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이거 잘못 들으면 공연 음란죄로 잡혀갈 이야긴데.
확실히 그 정도로 아델라는 절박했다. 수많은 회귀 중에 이런 기회는 처음이었다. 혹 다시 회귀한다 하더라도 이런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니까 더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저런 표현은…….
“반면 벤슨 경은 옷을 엄청 껴입고 제 옷을 하나씩 벗겨 보세요, 하는 인상이었고.”
확실히 매우 달랐다. 아, 아니. 그 전에 표현 좀!
“덕분에 벤슨 경을 신뢰하는 데는 오래 걸렸지.”
“저는요?”
“말했잖아요. 아델라 님은 너무 필사적이라 믿게 되더라고. 오늘만 살 것처럼 구니까 자꾸 신경 쓰이고 안 그랬으면 좋겠고, 그러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네요.”
린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렇다고 의심을 안 한다는 건 아니죠.”
“저요?”
아델라는 아직 그녀가 의심을 안 거두었나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러자 린다가 큭큭 하고 소리 내서 웃으며 답했다.
“아델라 님 아니고 벤슨 경.”
순간 엄청 안심했다.
“한 4년 정도 봤나, 우리가?”
“오래됐네요?”
“음…… 그렇죠. 꽤 오래됐죠.”
아델라는 왠지 자신으로 인해 신뢰를 깨지게 만든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벤슨 경하고 지낸 시간 동안, 싸한 기분을 느꼈던 게 몇 번 있거든.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는데…… 분위기상.”
린다는 그 이상은 말을 아꼈다. 사실 그녀는 이 이야기를 헤이든한테도 한 적이 없었다. 자신이 예민하게 반응한 건 아닌지, 괜히 힘들게 살아온 애한테 편견을 덧씌워서 보는 건 아닌지, 하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까……처럼요?”
아델라가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린다는 조심히 물어오는 아델라를 빤히 보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감 좋다니까.’
“아깐 피 냄새가 나서 그랬나? 오늘은 좀 더 심했죠.”
이상하게 낯설다 싶었다.
평소와 다르게 반응할 만한 일이 있었나? 아델라는 아까 느꼈던 이상함을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손에 피가 묻었다고 놀란 그녀가 큰 소리로 외쳤는데 그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마치,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이.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건가?’
상황이 좋지 않으니까 별 게 다 의심 가고 그랬다.
“어쨌든, 의심은 다 해 봐야 하니까. 벤슨 경뿐만 아니라.”
“만약에 벤슨 경이면 어떡하시게요?”
“어떡하긴요. 죽여야지.”
아까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한 사람치고는 매우 깔끔한 결론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린다의 사명은 이저드를 지키는 것이었다. 그를 위협하는 존재가 눈앞에 나타난다면 그녀는 망설임 없이 없앨 수 있었다.
“진짜인지 아닌지 의심할 때야 마음이 무겁지만, 맞다고 확신이 선다면 괘씸죄까지 포함해서 죽여야죠.”
오랜 기간 자신들을 속였다고 생각하면 배신감에 손이 떨릴지도 몰랐다. 그런 미래가 안 오기를 바라지만, 만약 온다고 해도 린다의 선택은 하나였다.
아델라는 린다의 다짐에 더는 질문하지 않았다. 그녀도 린다와 같으면 같았지 다르지는 않았다. 특히, 영겁과도 같은 회귀 동안 죽어 나간 사람들을 생각하면 더욱 범인을 막아야 했다.
“이제 아리스 경이 돌아왔으니, 조그만 실마리라도 건질 수 있지 않을까요?”
“아리스 경 왔어요? 그럼 이따가 물어봐야겠어요.”
“아아, 친구?”
아델라는 아리스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화색이 돌았다.
“그것도 있고, 흑마법서 해석한 거요.”
“그러네. 갔다 올까요? 각하의 집무실에 갔다던데.”
아델라는 조금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아 참, 각하랑은 이야기 잘 했어? ……요?”
린다는 나름대로 아델라와 둘만 있더라도 말투를 고치려고 노력했다. 아델라가 수비병이나 호위병 내내 반말을 했더니 자신도 모르게 튀어 나가는 반말을 아닌 척 갈무리했다.
아델라와 친근한 사이는 맞지만, 혹 나중에 그녀가 사교계로 나갔을 때 친하다고 버릇대로 반말을 쓰면 큰일이었다. 아델라는 상관없는 듯싶었지만, 후에 다른 귀부인들한테 책잡힐 만한 일이었다.
예비 백작 부인이 공작 부인한테 반말을 하는 건 주변 귀족들한테도 틈을 보여 주는 것과 다름없었다. 안 그래도 아델라를 물어뜯을 만한 거리가 많았는데, 우군인 자신이 그런 약점을 보이면 안 됐다.
린다는 아까 둘만의 시간을 갖게 하려고 이저드를 방 안에 밀어 넣은 후에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 아델라를 웃으며 보았다.
“네, 네!”
아델라의 얼굴에 홍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잘 해결된 모양이었다.
“아! 근데요.”
“……?”
이저드와의 키스가 생각나 이렇다 할 대답도 못 하고 있던 아델라는 뭔가 생각난 듯 린다를 바라보았다. 아까는 이저드와의 키스로 머릿속이 새하얘져 까맣게 잊고 있던 물음이었다.
“왜 해명을 하다 말았어요? 소문은 미리 잡아 놓지 않으면 더 커지는 법이잖아요.”
잡아도 소용없을까 봐?
아델라는 그래도 아니라고 끝까지 말했을 텐데, 잠잠해졌다는 게 이상해서 물었다. 린다는 의외의 물음을 던지는 아델라를 마주 보았다. 눈치나 감이 좋은 건 알고 있었지만.
“이미 손쓸 수 없이 퍼졌고, 왕이 단단히 오해하고 있으니 이 소문이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다, 가 밖으로 봤을 때 우리 입장이고요.”
“밖으로 봤을 때요? 그럼 안으로는요?”
린다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얼마쯤 시간이 흐른 후에 아델라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지금은―”
린다의 날카로운 시선이 방문으로 향했다.
“말하기 곤란할 것 같은데요.”
지금은?
아델라는 의아한 표정으로 린다의 시선을 따라 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약속이나 한 듯 멀리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그 발소리가 문 앞에 다다랐을 때, 밖에 있는 시녀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가 뒤따랐다.
아델라는 테이블에 앉아 린다와 마찬가지로 문을 빤히 보고만 있었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아니, 오라비가 동생 얼굴 보겠다는데 뭐가 안 됩니까!”
‘아― 저 진상.’
누가 이런 소란을 피우나 했다.
안 그래도 피곤해 죽겠는데, 더 피곤하게 하는 존재가 나타나서 아델라는 이마를 짚었다.
벌컥!
결국 실랑이에서 이겼는지, 레널드가 당당하게 문을 열어젖혔다.
쾅!
방에 들어온 레널드는 있는 힘껏 문을 닫으며 바깥과의 소리를 차단했다.
“아델라! 내가 잘못했다!”
‘하……. 저 자식이 갑자기 저러는 이유, 누가 알려 주실 분?’
오늘 내내 안 볼 생각하고 있었더니, 갑자기 숙이고 들어오는 건 또 무슨 경우람. 린다가 앞에 있으니 욕도 할 수 없었다. 아델라는 오늘이 너무 길고 피곤한 하루가 될 것 같은 기분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 * *
아델라의 방 안에서 나온 벤슨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아델라의 방에서 멀리 벗어나 복도를 걷는 중에 그는 우뚝 멈춰 섰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가 그제야 미소를 없앴다. 그러곤 피가 묻은 장갑을 아무 표정 없이 내려다보았다.
‘초조한 건가?’
이제 아델라만 어떻게 하면 되는데, 그 방법만 쓰면 되는데, 초조함이 멈추지 않았다. 그는 왜 이렇게 초조하고 불안한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아델라가 계속 회귀하는 동안 여러 번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이상하게 초조한 기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꼭 뭔가 일어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자신의 모든 게 망가지고, 망쳐질 것 같은 기분.
그래서 그는 자신한테 누구도 자신의 기억을 건드릴 수 없게 흑마법을 걸었다.
일이 꼬일 대로 꼬였다는 것을 알게 된 건 흑마법을 건 이후로 두 번의 회귀를 거치면서였다. 아무 이유도 모르고 회귀했던 과거와는 다르게, 이제야 회귀하는 이유를 찾았는데 그는 이상하게 불안했다.
자신의 계획에 빈틈은 이제 없는데, 무언가 마음에 걸렸다. 그게 뭔지, 왜인지, 알 수가 없어 더 그랬다.
‘진짜 저 여자가 맞나? 별 볼일 없는 여자 하나가 어떻게 미래를 바꿀 수 있었지? 어떤 흑마법을 쓴 거야?’
벤슨은 이를 으득 갈았다.
그녀가 무슨 마법식을 걸었는지, 무슨 마법진을 썼는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 그녀의 책에 마법식은 꽤 있었지만, 마법진은 기본적인 것 딱 하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녀의 책을 뒤져 봐도 계속 회귀하는, 혹은 인생을 다시 사는 마법식 같은 건 없었다.
‘그놈을 잡아다가 고문을 했어야 했나? 그놈이라면 알 텐데.’
벤슨은 아무 정보도 얻지 못하고 루를 죽인 것을 뒤늦게 후회했다. 책에 없다면 마법식은 분명 루가 알려 줬을 것이다. 그는 모르는 게 없었으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아델라가 그런 어마어마한 흑마법을 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이런 운 좋은 우연 같은 건 없을 거야. 내 계획을 망친 만큼 모두 망쳐줄 테니까.’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그의 표정은 달라져 있었다. 무표정에서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쪽으로 오는 기척을 느꼈기 때문이다.
“…….”
코너를 돌다 만난 사람은 다름 아닌 레널드였다. 그는 움찔하며 잠시 멈췄고, 벤슨은 아무렇지 않게 그를 향해 걸어갔다.
“뭐……하는 거지?”
“뭐 하는 것 같아?”
벤슨이 레널드를 향해 손을 내밀자 레널드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
“보통 처음 만난 사이에 인사는 하지 않나? 모른 척하면 더 의심받잖아.”
일리 있는 말이긴 했는데 어딘지 찝찝했다. 레널드는 벤슨을 완전히 믿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을 생각이었다.
“맞는 말이지만, 방금 그 말은 경솔했다.”
“왜? 여기 아무도 없는데.”
“아무도 없다고 장담할 정도의 실력자가 아직까지 어떤 성과도 없는 게 궁금하군.”
레널드와 벤슨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레널드는 그를 믿지 않고, 벤슨은 그를 이용할 생각뿐이다. 그런 둘이 서로 맞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성과…… 성과라. 그쪽 동생, 우리 편인 거 확실해?”
레널드의 미간이 깊게 구겨졌다.
“무슨 말이지?”
“흑마법은 확실히 발동했는데 성과가 없다는 건, 그쪽 동생이 보고를 안 하는 거 아닌가?”
“뭐?”
레널드는 벤슨이 같은 편이 아니었으면 한 대 칠 기세로 노려보았다.
“지금 네 실수를 내 동생한테 덮어씌우려는 건가?”
“덮어씌운다니. 내 흑마법은 완벽해. 그러니까 그쪽 동생이 배신한 거 아니냐고. 아니면…… 내 흑마법을 방해했다거나.”
레널드는 막 화를 내려던 참에 벤슨의 뒷말을 듣고 입을 꾹 다물었다.
‘방해? 흑마법을 방해하려면 같은 흑마법사만 가능한 거 아닌가?’
아까 분명 아델라는 아니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했는데…….
“네, 네 흑마법이 느려 터진 걸로 애꿎은 내 동생 끌어들이지 마. 걘 여기 온 지 한 달도 안 됐어.”
“그건 모르지. 10년이나 떨어져 있었다며.”
벤슨이 레널드의 심기를 살살 건드리기 시작했다.
“난 걱정돼서 그래. 이 일 망하면 나만 죽어? 그쪽도 끝이야.”
레널드가 살짝 흔들렸는지 눈빛이 떨렸다.
“그러니까…… 여기 있는 동안 잘― 확인해 봐. 그쪽 동생이 뭘 원하고, 누구 편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벤슨은 레널드의 어깨를 툭툭 쳐주고 다시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으로 그를 지나쳐 사라졌다.
레널드는 벤슨의 말에 이렇다 할 반박도 못한 게 속이 쓰렸다. 그러곤 벤슨이 사라진 곳을 힐끔 보고는 굳은 얼굴로 걸음을 뗐다.
‘가족 잃은 아픔이 뭔지 아는 앤데, 그런 애가 오라버니인 나를 배신했을 리 없어. 그럴 리 없어. 두고 보자, 벤슨 크롤!’
만일 아델라가 회귀하지 않고 평범하게 여기까지 왔다면 아주 조금은 그럴 확률이 있었을지도 몰랐다.
아버지는 죽어도 상관없었지만, 레널드는 조금 달랐다. 레널드를 미워하는 것과 죽어도 상관없다는 건 매우 달랐다.
이걸 애증이라고 해야 할까. 그가 측은하기도 했다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밉다가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아델라는 그녀가 받은 충격만큼 레널드도 충격 받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주 조금은, 레널드를 용서했을지도 몰랐다.
물론 지금의 그녀는 그딴 거 다 상관없고, 이저드와의 호상이 목표였다. 더불어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도 살리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레널드는 아델라가 자신을 배신할 리 없다고 믿었다. 아델라가 많이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그 상처까지 지우기는 힘들었으니까. 지금 레널드는 아델라의 여린 마음을 믿었다. 아직 그녀가 어릴 적 레널드밖에 모르고 매달렸던 그 작은 아이 그대로일 거라고 믿었다.
그녀가 성장한 줄도 모르고 말이다.
* * *
“……그게 끝인가?”
이저드도 아리스가 했던 반응과 똑같았다. 아리스가 루에게서 정신 지배를 푸는 방법에 관해 들을 때의 그 대사 그대로였다. 아리스는 이런 걸 보면 그와 자신이 닮은 것도 같다고 생각하며 남몰래 속으로 웃었다.
“믿기지는 않지만, 그렇습니다.”
“생각보다 간단해서 놀랍군.”
덧붙여 너무 간단해서 믿기 힘들 정도였다. 아리스가 끝끝내 루에 대한 의심을 지우지 못한 데에는 이런 이유도 있었다. 분명 책에는 이런저런 화려한 마법식과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런 건 다 무시하라니.
“네, 저도 놀랐습니다. 그 사람의 말로는 흑마법은 그렇게 거창한 게 아니랍니다.”
흑마법에 대한 것을 잘 모르니까 우선은 그의 말을 믿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알겠네. 아델라한테 이야기해 두겠네. 흑마법을 푸는 건 레널드가 떠난 후부터 시행하지.”
이저드의 말에 아리스가 알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전 이만 복귀하겠습니다.”
아리스가 보고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저드가 그를 빤히 보았다. 아리스는 자신한테 뭔가 할 말이 있나 싶어 일어나려고 하다가 다시 앉았다.
“왜 그러십니까?”
이저드의 미간이 아주 살짝, 미미하게 구겨졌다.
“무슨 할 말 있으십니까?”
평소 한 번도 뜸 들인 적 없는 이저드가 쉬이 입을 열지 않으니 걱정이 된 아리스가 재차 물었다.
“아리스.”
“예, ……네?”
아리스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이저드를 쳐다보았다. 경이 붙지 않은, 온전히 이름으로만 불린 아리스는 자신의 이름이 그렇게 낯설 수가 없었다.
이저드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정을, 앞당겨도 되겠습니까?”
존댓말을 시작한 이저드를 보며 아리스는 바로 진지하게 표정을 굳혔다.
“특별히 당겨야 하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아델라 영애 때문에?”
“아니라고는 못 하겠습니다. 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무슨 상황이요?”
아리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제가 빠른 시일 내에 죽습니다. 예정대로라면 한, 두 달 정도 남았군요.”
“……예?”
아니,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 설마 흑마법 때문에 이런 소리를 하는 걸까? 아리스는 굳혔던 표정이 풀어지며 아까보다 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흑마법 때문입니까?”
“아마 그게 가장 큰 원인이었겠죠.”
오늘 꿈에서 헤매며 이저드는 생각했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
전장에서는 찰나의 방심도 허용되지 않는다. 찰나의 순간에 목숨이 날아가기 때문이다.
아델라가 자신이 죽을 거라고 말할 때만 해도 그는 자신의 죽음을 믿지 않았다.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가 전장에서 방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오늘 새벽과 같은 일이 전쟁을 치르는 중에, 혹은 스파이가 침입하는 중에 발생한다면? 아델라의 말대로 그는 죽을지도 몰랐다.
“흑마법은 풀면 됩니다. 풀지 못한다면 그 흑마법사를 죽이면 되고요.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아리스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
미래를 아는 아델라가 옆에 있었다. 그리고 그와 그녀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도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저드는 안심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흑마법을 풀거나 흑마법사를 찾아내서 죽인다고 이 굴레가 끝나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를 위협하는 존재가 없어지지 않는 한, 언제고 이런 일은 또 일어날 수 있었다.
“아니요. 많이 늦었습니다. 몰랐는데, 많이 늦었더군요. 제가 자만했습니다.”
“각하.”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전, 제가…… 절대로 죽을 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혹여 죽더라도, 부모님의 누명은 벗기고 죽을 줄 알았습니다.”
“그게 무슨……? 각하는 죽지 않습니다. 저희가 그렇게 두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아리스는 처음에 이저드가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물론 이저드가 자신의 목숨으로 농담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워낙 믿기지 않아서 농담이길 바랐다. 아리스 역시 이저드가 죽는다는 건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아리스는 이저드가 살아남기 위해 어떤 고통을 견뎠는지 모두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죽는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아니, 상상하기 싫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이저드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 마음가짐이, 자신의 발목을 잡았을 줄은 몰랐다.
아리스는 그의 표정을 보며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지금 그 말을 저보고 믿으라는 겁니까?”
“믿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이 사실이 제가 일정을 당기려는 이유입니다.”
아리스는 황당함에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이저드가 곧 죽게 되니 그 전에 일을 끝내겠다는 건가?
이저드가 아무런 근거 없이 의견을 낼 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 근거가 정말 이상했다. 죽을지 죽지 않을지 모를 미래에, 죽는다고 확신하는 건 무슨 상황인가.
절대 죽지 않겠다고 하던 이가 갑자기 죽을 거라고 하는 모습에 아리스는 머리가 아팠다.
“각하의 말씀은, 오지도 않은 미래에 각하께서 돌아가시니까 죽기 전에 일을 치르자는 겁니까?”
“비슷합니다.”
이저드는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지도 모르고 그는 너무 태연했다.
“비슷하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죽기 전에 일을 실행하자는 건 맞지만, 틀립니다.”
“뭐가요?”
“죽지 않으려 빨리 실행하자는 겁니다.”
그럼 일을 일으켜야 죽지 않는다는 말인가. 아리스는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이저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얼마나 빨리요?”
“한 달 내.”
“갑자기 그렇게 빨리요? 시간이 너무 촉박합니다.”
“저도 압니다. 그래도 손 놓고 당하는 것보단 시일을 당기는 게 나으니까요.”
이저드의 의지는 확고했다.
아리스는 오늘부터 연통을 넣으면 얼마 만에 모든 측근들한테 당도할지 계산해 보았다. 빠듯했다.
“휴…… 도대체 왜 그렇게 빨리요?”
“미래를 바꿀 겁니다.”
이저드가 자신이 죽는다고 했던 것은 여태까지 바뀌지 않은 미래를 이야기한 거였다. 아델라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의 앞에 벌어졌을 미래. 손도 못 써 보고, 눈치도 못 채고, 죽어 버렸을 자신의 미래.
그러나 지금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으며 심지어 바뀌고 있었다. 그녀로 인해. 그녀가 나타남으로써 많은 것이 바뀌었고, 바꿀 수 있었다.
그의 미래, 그의 상황, 그한테 생길 앞으로의 일들.
“미래를…… 바꾼다고요? 각하가 하시려는 일이 미래를 바꿔서 각하가 죽지 않는 겁니까?”
“죽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장담할 수 없으니까, 장담할 상황을 만들어야죠.”
이저드가 죽지 않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면, 그렇게 오랫동안 공들인 계획이 무너지는 걸 왕과 왕의 측근들이 두고 볼 리 없었다. 어쩌면…… 벌써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불확실한 요소를 전부 없애겠다는 말씀이시군요.”
이저드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일단 기별을 넣겠습니다. 근데, 왜…….”
아리스는 이저드가 먼저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이 약간 충격이라 말문이 막혀 심호흡을 했다.
“왜 자꾸 죽는다고 하십니까? 누가 그럽니까? 각하가 단명할 상이래요? 아니면, 미래라도 다녀오셨습니까?”
자신이 믿고 따르는 이가 죽는다고 하면 그 누가 마음이 편할까. 아리스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끝까지 집요하게 물었다. 이저드는 그런 아리스를 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꿈에서 봤다고 하면…… 안 됩니까?”
“꿈? 허…….”
아리스는 예상치 못한 대답에 기운이 빠져 한숨을 내쉬었다. 루한테 들었던 말들만큼이나 당황스러운 대답이었다. 아니, 루한테 들었던 말보다 더 당황스러웠다.
저런 말을 이저드가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사람이 하루아침에 변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던데, 진짠가.
“죄송합니다.”
그렇게 정직하게 사과하면 아리스로서는 따질 길이 없었다.
“제가 각하를 많이 믿는 거 아시죠?”
아리스는 결국 이저드한테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어차피 이길 수 있는 상대도 아니었다.
“믿습니다. 각하를 믿어서 여기까지 온 거니까요. 각하의 말대로 당기죠. 전 상관없습니다.”
이저드가 이렇게까지 무리를 하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조금씩 위험 요소를 제거하면서 조용히 숨죽여 움직였던 이가 급박하게 상황을 조정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 * *
‘이건 또 뭐야. 또 왜 저래?’
아델라는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레널드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사람이 왜 이래? 아까는 무례하게 굴어 봐야 이저드의 진심을 알 거라며 그런 되지도 않는 억지를 부리더니?
“이거 참, 맛있군요. 요리 솜씨가 아주 뛰어나십니다.”
아델라는 자기도 모르게 똥 씹은 표정을 지을 뻔했다.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니 너무 수상했다.
아까 대뜸 아델라한테 와서 사과를 하고 점심을 같이 먹자고 부득불 우기던 레널드는 지금은 주변 사람들한테 꽃미소를 날리기 시작했다. 겉만 본다면 정말 멀끔했기 때문에 그의 미소에 얼굴을 붉히는 하녀들도 몇몇 보였다.
“네가 이런 음식을 매일 먹는다고 생각하면 좀 안심이 된다.”
‘갑자기 왜 안 하던 짓을 하세요?’
아델라는 경련이 일 정도로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칠색 팔색 하고 있었다.
“그렇지? 맛있지? 주방장이 요리 솜씨가 정말 좋으셔. 아. 저, 오라버니랑 오랜만에 둘만의 시간을 갖고 싶은데…….”
“아, 예!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아델라는 친절하게 웃으며 방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을 내보냈다. 그녀는 그제야 표정을 풀 수 있었다.
“왜 이래?”
“뭐가?”
“아까는 막 나가 봐야 알겠다며.”
“네 일 방해하지 말라며. 그래서 생각을 바꾸기로 했어.”
“뭐 어떻게?”
바꿨다는 게 더 불안했다.
“미남계?”
“…….”
아델라는 차갑게 식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호의를 베풀면 호의로 갚아 줘야 된다는 생각이 있어.”
“뭐라는 거야. 설마 그 호의가 네 얼굴이야?”
레널드는 아델라가 질색하는 표정을 보지 못했는지 열심히 스테이크를 입에 넣으며 떠들었다.
“아니지. 얼굴은 호의를 극대화시키는 부수적인 수단이고, 뭔가 도와주면서 알아내야지.”
자기 외모에 취해 허튼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었다니 다행이긴 한데, 회유하는 방법으로 바꾼 이유가 뭘까? 자기가 생각해도 바보 같은 계획이었다는 걸 안 건가?
“근데 그거 꼭 나랑 있을 때 해야 해?”
멋있는 척하는 거 토 나올 것 같거든, 이라는 뒷말은 애써 목구멍 끝으로 집어넣었다.
“당연하지! 너도 옆에서 웃고 있어 줘. 그래야 미인계가 두 배지.”
매우 황당한 이유였기에 아델라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사람들은 각하의 외모로 단련된 사람들인데 그게 통하겠냐. 각하까지 갈 것도 없이 헤이든 경만 봐도 답이 나오는데, 어휴.’
아델라는 이제 거의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것 같았다. 빨리 그를 보내 버리고 아리스한테 가 봐야 한다는 것도 잊고 그녀는 지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혼자 뒀다가는 어디 가서 사고를 칠 것 같기도 했고, 갑자기 숙이고 들어오는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레널드한테 끌려다니며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 것을 크게 후회했다.
* * *
‘여긴 어디? 난 누구?’
“오호호호.”
“아하하핫.”
그래, 저 놈이 어디 가서 빠지는 외모는 아니라는 건 알겠다. 도와 달라더니 혼자 작업 멘트를 날리는 걸 옆에서 지켜보게 만들다니. 언젠가 이 인간을 구워삶아 먹으리.
아델라는 웃고 있었지만 어딘지 퀭해 보였다. 반면, 하녀와 하하 호호 웃으며 정원을 거니는 레널드의 얼굴은 확 폈다.
그는 이곳을 잘 모른다며 주변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며 웃음을 날렸다. 아델라가 그를 따라 걸으니, 처음에는 어색해하던 이들도 곧 적응하고 레널드한테 친절히 대했다.
여기에서 미소를 띠고 있지 않은 이는 린다 하나뿐이었다. 그는 린다가 쉬이 넘어오지 않는다는 것을 금방 파악한 후 다른 인물들을 공략하고 나섰다.
린다는 방관자로서 거리를 두며 천천히 따라오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무표정이었지만 눈은 재미있는 상황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약간의 측은함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건 아무도 보지 못했다.
“그나저나, 각하는 많이 바쁘신가 봅니다?”
“각하께서는 항상 매일 일이 많아 바빠.”
레널드가 주변 사람들한테 물어봤지만 아델라가 냉큼 대답했다. 지금도 피곤한데, 레널드가 이저드를 만나 무슨 말을 할지 신경 쓰여 매 순간 전전긍긍할 걸 생각하면 더 피곤했다.
“아……. 그럼 못 보고 가려나? 너 여기 올 때 변변하게 준비한 것도 없고,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려서 만나 뵙고 싶었는데.”
“우리 가문 형편에 뭘 준비해. 각하께서도 이해하고 계셔. 걱정하지 마.”
“그래? 그럼 인사라도…….”
그는 엄청나게 미련이 남는 얼굴로 아델라를 바라보다가 아델라한테 통하지 않을 것 같으니 린다를 힐끔 보았다. 린다는 그의 시선을 받은 채로 저걸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뭘 하는지 한번 지켜볼까?’
레널드가 원하는 대로 두라는 이저드의 허락도 떨어졌겠다, 레널드가 원하는 어떤 것을 해 줘도 막을 사람은 없었다.
린다는 여전히 아무 감정 없이 레널드를 보았다.
“아마 지금쯤 오전 훈련과 일정을 마치고 잠시 쉬고 계실 겁니다. 안내해 드릴까요?”
으응?
아델라가 아는 한, 지금 짬을 낼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짬은 아까 아델라를 만나는데 이미 냈으니까.
아델라는 린다의 안색을 살폈다.
‘정상인데. 엄청 멀쩡하신데.’
아델라는 린다가 레널드를 왜 이저드한테 안내하려고 하는지 자세히는 몰랐지만, 그녀의 장단에 맞췄다.
“어어― 그렇죠. 그렇긴 한데, 전 각하 쉬는 시간을 방해할까 봐.”
“아…… 그런 거야? 그럼 좀 그렇겠네요. 아주 잠깐 짬이 나신 걸 텐데.”
레널드는 아델라의 말에 한발 물러섰다. 무례하게 일을 망치지 않기로 했으니 말이다.
“괜찮습니다. 각하께서 허락하신 일입니다. 일이 많아 자리는 못 비우지만 언제든지 도움은 드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린다가 이렇게 나오면 아델라도 계속 안 된다고만 할 순 없었다. 당사자가 된다는데 아델라가 지속적으로 부정하면 이상하게 보일 게 뻔했다.
“그래요? 그럼, 뵈러 갈까요?”
아델라는 결국 못 이기는 척 말했다. 속으로는 울상을 짓고 있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한없이 맑게 웃고 있었다.
* * *
“앉게.”
“이제야 정식으로 인사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그땐 제가 너무 경황이 없어 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괜찮네. 상황이 매우 급했지 않나.”
“제 사정을 이해해 주셔서 감사하고, 이렇게 특별히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뭐야? 무슨 꿍꿍이냐?’
둘을 보는 아델라는 얼떨떨한 마음이었다. 레널드는 생각보다 정상적인 대화를 이어 가고 있었다.
그녀는 이 상황이 적응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미소를 지운다거나 포커페이스를 깬다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아델라는 긴장을 풀지 않고 둘의 대화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제가 좀 잠자리가 까다로워서. 무리한 부탁인데도 이쪽 방을 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마워하지 않아도 되네. 경이 불편하면 아델라의 마음도 편치 않을까 염려되어 그런 것이니.”
아델라는 부드럽게 자신을 보는 이저드의 눈빛에 그만 경계를 풀고, 헤벌쭉 웃을 뻔했다.
사람이 어떻게 얼굴만 봐도 마음이 막 풀어질 수가 있지? 이저드를 보니까 아까 짜증나고 피곤했던 마음이 사르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워허……! 정신 차려, 아델라! 레널드가 지켜보고 있다!’
그녀는 스멀스멀 무너지려는 입가를 심기일전하여 꽉 붙들었다. 그리고 수줍게 미소를 보였다.
‘난 지금 각하께 사랑에 빠진 연기를 하는 청초하고 조신한 귀족 아가씨다, 아가씨다……! 아가씨!’
아델라는 흔들리지 않으려 다짐에 다짐했다.
“이렇게 제 동생을 아껴 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걸 직접 보니, 오라버니로서 정말 마음이 놓입니다. 사실 아델라 혼자 이곳에서 어찌 지낼까 걱정이 많았습니다만…… 제 기우였던 것 같습니다.”
레널드는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아델라와 이저드를 번갈아 보았다.
“운명이면 어떻게든 만난다고 하던데, 두 분 정말 잘 어울립니다.”
‘얘가 갑자기 웬 아부?’
아델라는 웃고 있으면서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설마 진짜로 내 말을 듣겠다는 거야? 그런 기특한 생각을 했을 리가 없는데.’
레널드는 아델라가 자신을 이상하게 보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이저드한테 시선을 고정했다. 항상 무표정에 생각을 읽을 수 없다고 소문난 사람답게, 이저드의 차가운 표정은 예전에 봤던 그대로였다.
과거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아델라한테 향하는 찰나의 순간만은 그 분위기가 한껏 누그러진다는 거다. 아델라의 말이 사실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직접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믿을 수가 없었다.
“고맙군.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이저드는 사양하지 않고 그의 아부를 받아 주었다. 레널드는 너무 놀라웠지만, 안 놀란 척 웃었다.
“아델라는 이제 걱정하지 말게. 절대 외롭게 혼자 두지 않을 터이니.”
정말로 이 사람이, 단 한 번의 스캔들도 터트린 적 없는 사람이, 아델라를 사랑한다고?
이저드의 눈빛은 누가 봐도 사랑하는 사람을 보는 부드러운 눈빛이었다. 반면, 아델라는 조금 어색한 듯, 쑥스러운 듯 웃고 있었다.
레널드는 이저드한테 향했던 시선을 아델라로 옮겼다. 그는 순식간에 아델라의 표정과 행동을 검사하듯 훑었다.
아델라의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진심은 아니었다.
이저드와 아델라의 온도 차가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한 부분은 그녀가 이저드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피하고 있음을 눈치챈 후부터였다.
‘아무리 자연스럽다지만, 좀 티 나게 피하는 거 아니야? 이따가 한마디 해야겠네.’
레널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활짝 웃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저한테는 영광이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레널드가 깍듯하게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고, 아델라의 눈치를 보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저…… 시간을 너무 뺏는 것 같아 정말 죄송한데…….”
모두의 의아한 시선이 레널드한테 붙었다.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뭔가?”
“오늘 밤…….”
‘드디어 나오는 건가, 본론이!’
아델라의 눈빛이 아주 약간 빛났다. 앞에 뭔 밑밥을 그렇게 까나 싶었다. 밤에 또 뭐, 왜.
“오랜만에 아델라와 이런저런 대화를 하고 싶습니다. 이번에 보면 또 언제 볼지 모르니까요. 그래서 여쭙는 건데…… 오늘 아델라를 제 방에서 재워도 되겠습니까?”
에엥? 이건 듣도 보도 못한 소린데? 왜 저래?
아델라는 이저드와 자신의 관계를 살핀다고 했던 사람이 갑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눈다고 하니까 황당함을 넘어 어이가 없었다.
“그걸 왜 나한테 허락받나?”
“예? 그, 그야……. 아델라는 이제 각하의 사람이니까요. 먼저 물어보는 게 예의라…….”
아무리 남매지간이라고 하더라도 약혼한 여자이기 때문에 함부로 같은 방을 쓸 수 없었다. 그렇기에 보통은 미리 남편한테 허락을 받는다. 그게 예의라고 알고 있는데……. 이저드의 반응은 아예 생각지도 못했다.
“아델라와 이야기가 된 거 아닌가? 남매끼리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데, 나한테 부탁할 이유는 없지 않나. 오래 떨어져 있었던 만큼 할 말이 많을 터이니.”
“아…… 그, 그렇죠.”
레널드가 당황해서 아델라한테 눈치를 주었다.
‘나랑 말도 없었으면서 지 필요할 때만? 저 자식이?’
“아델라가 그러고 싶다면 그렇게 하면 되네. 나한테는 그저 말만 해 줘도 충분하네.”
레널드의 눈동자가 살짝 떨리는 걸 보고 있자니 조금 통쾌한 기분이 들긴 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아델라한테 닿았다.
‘레널드가 바라는 게 뭘까? 뭐지? 왜 저러지?’
도대체 무슨 수작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델라는 레널드가 거의 백 퍼센트 한밤중에 자신들의 침대에 ‘실수’인 척 찾아올 줄 알았다. 자신이 레널드를 너무 단순하게만 본 모양이었다.
“예, 제가 오라버니한테 하고 싶은 말이 많아 청을 했습니다.”
아델라는 자연스럽게 웃으며 이저드의 시선을 끌어 주었다. 이렇게 하지 않아도 이저드의 시선은 아델라한테 향했겠지만, 레널드를 속이기 위해서는 이 타이밍에서 이런 말 정도는 해 줘야 했다.
레널드의 목적이 뭔지 알기 위해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줄 필요가 있었다.
“그렇군. 그럼 특별히 부탁할 건 없나?”
“저…… 침대가 두 개인 방으로 옮길 수 있을까요? 저도 그렇고 오라버니도 그렇고, 예민해서요.”
아델라는 같은 방에 있는 것까지는 그렇다고 쳐도, 레널드와 같은 침대를 쓰고 싶지는 않았다.
어릴 때야 종종 같은 침대에서 잠든 적이 있었지만, 그건 엄청 오래된 이야기였다. 아델라가 글도 못 떼던 시절에 책을 읽어 준다며 그런 적이 있긴 했다.
“그렇게 하지. 린다 경이 안내해 줄 거네.”
아델라는 고맙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 수줍게 웃었다. 이거 수줍게 웃는 일도 만만찮았다. 레널드가 빨리 수도로 돌아가면 좋으련만.
“그 외에 더 필요한 건?”
“더 없습니다. 저희 둘을 배려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드려요.”
“괜찮네. 그대와 그대 오라버니의 일인 것을. 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하게.”
짜고 치는 일이라지만, 아델라는 이저드의 말에 행복하게 웃고 싶었다. 웃음을 짓는 것보다 웃음을 참는 게 더 힘들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심장이 시키지 않는 대로 하려니 아주 죽을 맛이었다. 아델라는 눈웃음을 지으며 그저 감사하다는 말만 내뱉었다.
마음 같아서는 아주 그냥, 막 그냥! 들이대고 싶었지만, 열심히 참았다.
* * *
‘와…… 오늘이 아직 안 끝난 거야?’
절망적이었다.
아델라는 오늘 벌어진 일들을 되짚어 보며 이마를 짚었다. 그녀는 자신 앞에 놓인 은은한 찻잎의 향기도, 달콤한 쿠키의 향도 전부 맡아지지 않았다. 레널드라는 원수한테 온통 신경이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유롭게 향을 음미하면서 차를 마시는 건 오랜만이네.”
레널드는 달빛이 내리는 창밖을 보며 편안한 표정으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누군 태평해서 좋겠다. 아델라는 이놈이 진심인가 싶어서 마지막 인내심을 짜냈다.
“그래? 오라버니도 어지간히 바빴나 보네.”
“바빴지……. 여기까지 오려고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거든.”
아델라는 피곤함에 따뜻한 차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10년 만에 부기사단장이 되었으니, 그의 고생은 안 들어도 알 만했다.
사실 별로 듣고 싶은 주제는 아니었다. 그가 집을 나가서 어떻게 살았는지, 그녀는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맞장구만 쳐 줬다.
“넌?”
그의 물음에 아델라는 의외라는 듯이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나?”
“그래. 넌? 너도…… 힘들었을 거 아냐. 집 나와서 어떻게 지냈어?”
웬일로 자신의 안부까지 묻는 레널드를 보며 아델라는 점점 더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어떻게 지내긴. 루가 도와줬지. 힘들었어. 1년 정도는 떠돌았고 그 뒤로는 펜베르크 성에 정착해서 돈 버느라. 하지만 최근 몇 달보다는 나아.”
그래도 그땐, 삶의 낙이라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 현실에서 벗어날 방법도, 아니 벗어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기 때문에 그때보다 더 힘들었다. 정신적으로. 그나마 수많은 회귀 동안 이번이 가장 덜 힘든 편이었다. 지금은 그녀 혼자 아파하고 힘들어하며 버티지 않아도 됐으니까.
아델라가 상당히 피곤한 표정으로 말하자, 레널드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너한테는…… 항상 미안해. 그때도, 지금도. 생각해 보니까, 너한테 미안하다는 말부터 해야 했는데 내가 해명할 기회를 날려 버렸네. 미안하다. 그랬으면 우리의 관계가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텐데…….”
레널드가 씁쓸하게 웃었다.
‘갑자기 웬 고해성사? 진짜 수상하네.’
그녀는 여전히 그를 믿지 못했다.
“뭘 새삼스럽게 이제 와서. 난 딱히 오라버니랑 오해 풀 생각 없어. 지금이 좋아. 필요로 맺어진 관계.”
피곤해 보였던 아델라의 표정이 이제는 살짝 지친 듯 보였다.
“그래도…… 이 일이 끝나면 나랑 수도로 갈 텐데……. 계속 얼굴 볼 거잖아.”
아델라는 의자에 몸을 맡기며 멍하니 창밖을 보았다.
“누가 그래? 난 오라버니랑 계속 얼굴 본다고 한 적 없는데.”
레널드는 자신을 보지 않고 말하는 아델라를 얼떨떨하게 바라보았다.
“으응? 그게 무슨 소리야? 이 일이 성공하면 너 여기서 못 살아. 그러니까 내가 널 거둬서…….”
“누가 여기서 산데? 나도 떠날 거야. 하지만 오라버니랑 살 생각은 없어.”
“뭐? 그럼?”
창밖을 멍하니 보던 아델라가 다시 레널드한테 시선을 고정했다. 레널드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루랑 떠돌아다니든가, 평민 신분으로 일을 하든가 그럴 거야.”
전혀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그런 척 연기했다.
“왜…… 왜? 이 일만 성공하면 네 앞길은 뻥 뚫리는 거야! 여태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네가 원하는 건 뭐든…….”
‘이 일 성공하면 너랑은 끝이야.’
설령 아델라가 이중 스파이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아마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레널드와는 연 다 끊어 버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맘 편히 사는 것.
“앞길이 탄탄해지는 건 오라버니뿐이지. 난 각하를 죽이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나쁜 년이 될 거고. 내 이름에는 어딜 가나 뒷담이 따라다닐 거야.”
아델라는 높낮이 없는 어조로 평온하게 말했다.
“무슨 소리야? 그때가 되면 아무도 너한테 그런 말 못 해.”
레널드의 말에 아델라가 피식 웃었다.
“앞에서는 말 못 하지, 당연히. 하지만 귀족들 사이에서의 소문은 아니지. 지독하고 끔찍하며 천박한 여자. 그게 아마 나일 거야.”
이저드를 몸으로 꼬여 죽음에 이르게 한 희대의 악녀가 되어 있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아델라는 그렇게 불려도 할 말 없다는 듯이 덤덤하게 이야기했다.
레널드는 아델라의 반응에 가슴 한편이 묵직하게 무거웠다.
“누가 그딴 소리를……. 그런 소리 신경 쓰지 마. 내가 처리할게.”
“으으음, 그러지 마. 나 그 소리 들으려고 하는 거거든.”
“……뭐?”
레널드는 놀란 눈으로 아델라를 보았다.
“조용히 잘 살던 날 여기 끌어들인 오라버니 죄책감 가지라고.”
레널드는 아델라의 말에 움찔 표정을 굳혔다.
“……뭐?”
“내가 불행해지는 게 한 번으로는 부족한 것 같길래.”
아델라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의 머릿속에 속속 박혔다. 마음이 무겁다 못해, 답답했다.
그 집을 나온 순간부터 아델라한테 미움을 받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자신을 조금은 이해해 줄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같은 일을 겪은 혈육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녀와의 대화는 현실만 직시하게 했다. 혈육의 정이나 가족이기 때문에, 라는 말은 그녀한테 더는 통하지 않았다.
“그럼 아까 한 이야기는 뭐야? 내 부와 명예를……. 가족이라서가 아니야?”
“네 부와 명예를 지켜 줘야 날 안 찾지. 너랑 내 처지가 상반될수록 넌 미안해할 테고, 날 귀찮게 하지 않을 거야. 염치가 있으면 날 더 이용하지 못하겠지?”
이 말은 이 일이 끝나면 자신이 뭘 하고 어딜 가든 신경 쓰지 말고 찾지도 말라는 말이었다. 덧붙여 지금 자신을 이용하고 있으면서 가족인 척, 오라버니인 척하지도 말라는 말이기도 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그냥 이 제안 안 받아들였으면, 아니, 차라리 도망을 갔으면……!”
이 인간은 어쩜 이럴까. 자기가 한 말은 쏙 까먹고 혼자 행복회로를 돌렸던 걸까?
“오라버니, 잊은 모양인데 날 협박한 건 오라버니야. 내가 이 일을 받아들인 건…….”
이것까지 일일이 말해 줘야 하는 건가? 아델라는 레널드가 도대체 자신을 얼마나 쉬이 여겼으면 이럴까, 하고 한숨을 쉬었다. 자기의 생각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첫 번째는 목숨의 위협을 받아서였고, 두 번째는 내 일상을 지키기 위해서였어. 내가 여기서 도망가면 전하의 명을 거역한 죄로 평생 도망 다녀야 하잖아. 그건 싫어. 난 아무도 모르게 편하게 살고 싶어.”
“일상? 설마…… 평민으로 지냈던? 앞으로 더 편하게 살 수 있는데 굳이 왜?”
“말했잖아. 난 안 편할 거라고. 난 오라버니 곁에서 편할 수가 없어. 우린 그렇게 돼 버렸잖아.”
정말 만약에 둘이 우연히 길을 가다가 마주쳤다면, 어쩌면 지금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둘은 이렇게 만나게 됐고 서로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관계가 되어 버렸다.
10년 만에 만난 레널드가 아델라한테 강제로 약혼자를 정해 준 순간부터 둘의 관계는 이보다 더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됐다.
“너…… 나, 많이 원망해? 혹시 네가 하고 싶은 게…… 복수야?”
레널드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레널드가 아델라의 앞에서 과거의 이야기를 꺼낸 건, 그녀의 의중을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벤슨의 말이 계속 마음속에 걸려서, 그 찝찝함을 해소하려 했다.
그런데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솔직히 레널드는 상당히 충격이었다. 자신은 그래도 아델라를 다시 만나 꽤 기뻤는데, 그녀는 완전 반대였으니까 말이다.
확실히 그는 아델라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었다. 아델라가 아무렇지 않게 대한다고 방심했다. 다시 예전 같은 남매 사이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내 말 뭐로 들었어? 이 일이 ‘성공’하면, 다시는 보지 말자고. 내가 어디를 가든, 뭘 하든 신경 쓰지 말라고. 이 일이 끝나면 너랑 내 혈연관계도 끝이야.”
아델라는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줘 가면서 그한테 일깨워 줬다.
“네가 바라는 게 나랑 연을 끊는 거야? 그래서 이 일을 하는 거고?”
아델라는 아까부터 하지도 않던 짓을 하는 레널드를 뚱하니 보았다.
아델라의 상황도, 꿈도, 생각까지, 그 모든 걸 고려해 주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아델라의 생각을 묻는 게 영 이상했다.
“응. 그래서 이 일 완벽하게 성공할 거야. 완벽하게 나쁜 사람 돼서 욕 얻어먹고, 죽은 사람 돼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날 거야.”
아델라는 레널드의 반응을 확인하려고 일부러 더 차갑게 말했다. 그녀가 그 정도로 자신을 싫어하는지 몰랐던 레널드는 얼얼한 표정이었다. 직접 주먹으로 맞는 것보다 더 얼얼했다.
레널드는 아델라가 원하는 것과 목적, 생각까지 알게 됐지만, 속이 쓰렸다.
“너랑 나, 가족은 맞지?”
“듣고 싶어?”
“아, 아니…… 됐다.”
레널드는 새삼스럽게 그녀와 있는 것에 어색함을 느꼈다. 둘 사이에는 싸늘한 분위기만이 감돌았다.
“너, 만약에…….”
한참 만에 레널드가 무언가 엄청 궁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공작이, 나한테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살 수 있게 해 준다고 하면…… 어쩔 거야?”
피곤함과 지루함에 죽어 가던 아델라의 눈빛에 아주 잠시 생기가 돌았다.
‘이거였구나? 여태 내 생각을 물은 이유. 공작한테 내가 넘어가서 지가 뒤통수를 맞을까 봐.’
“너…….”
아델라가 입을 달싹였다.
“날 시험하는 거구나?”
레널드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는 애써 웃음을 보이려 했지만, 점점 미소가 사라지는 아델라의 표정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나한테 사과한 것도, 과거 이야기를 꺼낸 것도, 앞으로 어떻게 할지 은근히 말한 것도…… 다…… 날 떠보기 위한 거였어?”
“아니, 아니야. 나 너 믿어. 그냥, 진짜 남매끼리 이런 대화가 필요할 것 같아서…….”
“날 여기로 끌어들인 것도 모자라서 이젠 검증까지 하시게? 더 들을 것도 없네.”
아델라는 더는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이 지루하고 속 터지는 대화를 들어주고 있을 이유가 사라졌다.
그녀가 궁금했던 것은 이놈이 무슨 꿍꿍이로 이러는가 하는 거였는데 이 대화로 대충 알게 됐다. 레널드는 아델라가 혹시라도 이저드의 외모에 홀랑 넘어가 왕을 배신했을까 봐 시험했던 거였다. 여태 이저드를 떠본다고 생각했더니, 그게 아니라 아델라를 떠본 것이다.
벌떡.
아델라가 자리에서 망설임 없이 일어났다.
“진짜야! 우리 10년 만인데 대화다운 대화도 못 했잖아. 난 그래서. 진짜 그런 의도 아니었어.”
뒤늦게 레널드가 변명을 늘어놨지만, 아델라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뭐라고 계속 말하는 레널드를 뒤로하고 방문을 열어젖혔다.
“어디 가! 아델라!”
“자러 간다! 너 이딴 식으로 할 거면 내일 당장 사라져! 나 화병 나서 죽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쾅!
화가 잔뜩 난 아델라의 목소리가 방 안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레널드는 의자에 털썩 앉으며 참았던 숨을 뱉어 냈다.
“푸하아아―”
그는 피곤한 표정으로 멍하니 아델라가 앉았던 자리를 응시했다.
“그래……. 그럴 리가 없지.”
아델라의 의중도 확인했고, 아델라가 이저드한테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 그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아델라는 그 누구의 편도 아니었다. 그녀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과 연을 끊기 위해서라는 사실이 씁쓸했지만, 레널드는 그녀가 적어도 이 계획을 어그러뜨릴 생각은 없다는 걸 알았다.
“그 자식이 허튼소리를 해서!”
레널드는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그는 조금 억울한 기분이었다. 아델라가 꼭꼭 숨겨 놨던 속 이야기까지 들을 생각은 없었는데, 벤슨 때문에 아주 직설적으로 다 들어 버렸다. 차라리 듣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괜히 아델라의 생각을 확인한답시고, 그 좋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꺼내 놓게 했다.
레널드는 과거에 나가려는 자신의 바짓단을 붙잡고 울던 어린 아델라가 떠올랐다.
‘아아―! 흐어어어!’
친어머니의 죽음과 점점 늘어만 가는 가문의 빚. 흥청망청 돈을 쓰고 들어와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 그리고 말을 잃은 채 방 안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울기만 하는 아델라, 그리고…… 자신과 겨우 4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 새어머니.
당시에는 그 모든 게 레널드를 숨 막히게 했다.
갓 성인이 된 레널드는 이 집안에 팔려온 젊은 여자를 어머니로 인정할 수 없었고 미쳐 돌아가는 이 집안에서 한시도 버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성인이 되고 얼마 안 있어 그 집을 뛰쳐나왔다.
집을 나오기 전, 그나마 유일한 가족이라고 생각한 아델라를 잠깐만 보고 가기 위해 레널드는 그녀의 방에 들렀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보았다. 젊은 여자가 가증스럽게 웃으며 아델라를 재우던 모습을.
홱!
‘뭐, 뭐 하시는 거예요!’
‘놔! 팔려온 주제에 어디서 어머니 행세를! 아델라한테서 떨어져!’
레널드는 이제 막 잠든 아델라의 얇은 팔을 잡고 그녀를 잡아끌었다. 그에 아델라는 너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닭똥 같은 눈물만 뚝뚝 흘렸다.
‘그렇게 잡으면 아이가 약해서 아파해요!’
여자는 아델라와 레널드 사이에 끼어들어 레널드의 억센 손을 막으려고 했지만 레널드는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걱정하는 척하지 마! 아델라, 옷 입어. 오라버니랑 나가.’
아직 어린 아델라는 새어머니라는 사람과 레널드가 목소리를 높이니 놀란 마음에 그저 울기만 했다.
‘울지 말고! 너 여기 남아 있을 거야? 아니잖아! 옷 입어, 얼른!’
레널드가 큰 소리로 닦달하자, 안 그래도 벨제프 자작에 대한 상처가 큰 아델라는 두려운 눈빛으로 울음을 멈췄다. 그러곤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레널드한테 벗어나기 위해 레널드의 손을 때렸다.
‘그러지 마세요! 방금까지 울다 지쳐 잠든 애라고요!’
레널드는 이 모든 상황에 화가 났고,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아델라도 이해되지 않았다.
팍!
레널드는 하는 수 없이 아델라를 놓아 줬다. 그 반동으로 아델라가 땅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나랑 같이 안 갈 거야?’
아델라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난 떠날 거야. 선택해.’
그렇게 말해도 어린 아델라는 고개를 세차게 젓기만 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아델라가 답답했던 그는 결국 짐 가방을 들고 방을 나서려고 했다. 어린 아델라가 레널드의 바짓단을 잡고 아아아! 어어어! 하면서 울지만 않았다면 아마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집을 나왔을 거다.
‘나랑 안 간다며!’
아델라는 또 고개를 저었다. 아이가 할 수 있는 건 울고 고개를 저으며 나오지도 않는 소리를 내는 것뿐이었다.
‘그럼, 어서 옷 입어.’
다시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아델라가 뭘 원하는 건지 레널드는 알지 못해서 답답했다.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과 아델라를 번갈아 보는 젊은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래. 넌 여기 남아.’
레널드는 그 여자를 똑바로 바라보고 그렇게 말했다.
그때의 그는 탓할 누군가가 필요했다. 아델라를 두고 가는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그는 엎드려서 몸을 잘게 떠는 작은 아이를 두고 그렇게 그곳을 벗어났다.
“하…….”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아델라가 친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떠올리길 겁낸다면 레널드는 이때의 기억을 무의식적으로 회피하고 있었다. 아델라의 말대로, 둘은…… 얼굴 맞대고 있지 않는 게 서로한테 더 좋을지도 몰랐다.
10년이나 그래 왔던 것처럼.
* * *
이저드는 아까부터 본관 건물 주변을 순찰하듯 맴돌았다.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져서 잠도 안 오거니와, 혼자 레널드를 상대할 아델라가 아무래도 걱정됐기 때문이다.
그녀한테 별일이 없길 바랐지만 그녀가 큰 소리로 화를 내며 방을 나가는 것을 보며 이저드는 미미하게 인상을 구겼다. 그는 창밖에서 레널드를 뚫어져라 보다가 아델라의 동선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이저드는 레널드한테 없던 유감이 생길 것 같았다.
이저드는 레널드가 왕의 측근이었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다. 레널드는 자신에게 위협이 될 인물도 아니었고, 그저 왕의 옆에서 콩고물 떨어지길 기다리는 많은 이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
하지만 아델라한테 저런 표정을 짓게 하는 이라면 없던 신경도 쓰였다. 아델라한테 체념을 가르치고, 포기를 가르치고, 누군가를 믿는 마음을 기만한 사람.
이저드는 과연 자신의 마음이 유감으로만 끝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라. 아델라.”
이저드는 빠르게 걸음을 옮겨 그녀를 따라잡았다. 아델라는 이저드가 침실이 아니고 복도에서 튀어나왔기에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각하?”
자신을 올려다보는 또렷한 눈빛에는 다행히도 분노나 슬픔 같은 안 좋은 감정들은 없었다. 조금 지쳐 보이긴 했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평소와 같았다.
그는 그제야 아델라가 일부러 화가 난 척했다는 걸 알았다.
“안 주무시고 왜 나와 계세요?”
“……그대가 걱정되어 나왔네. 같이 들어가겠는가?”
이저드는 아델라한테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빤히 보던 아델라가 곧 부드럽게 웃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네!”
* * *
아델라는 많이 피곤한지 꾸벅꾸벅 졸았다. 그녀가 눈을 떴다가 감기를 반복하는 사이, 이저드는 그녀를 품에 안고 도닥였다.
“아델라, 일단 자게. 눈 감고.”
“우음―. 저 할 말…….”
오늘 레널드를 통해 알아낸 걸 말해야 하는데, 눈꺼풀이 너무 무거웠다.
“자고 일어난 후에 말해도 늦지 않아. 어디 가지 않고 여기, 그대 옆에 있겠네.”
이저드의 말이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는 몰랐지만, 그 말에 아델라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오늘 많은 일이 있었으니 피곤한 게 당연했다.
이저드는 곧 쌕쌕 고른 숨을 내뱉으며 잠든 아델라를 좀 더 편한 자세로 만들어 주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 주었다. 오늘 그는 잠들지 못하겠지만 그녀만이라도 편히 잠들기를 바랐다.
그는 아델라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어둠이 깔린 방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아갔다.
* * *
아델라는 이상한 꿈을 꿨다.
자신은 너무 잘 자고 있는데, 이저드는 그런 자신을 보며 잠 못 이루는 꿈이었다.
그녀가 잠깐씩 몸을 뒤척이거나 눈을 떴을 때, 그는 여전히 처음 자세 그대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는 가끔 눈을 감은 것 같다가도, 금방 눈이 떠졌다.
아델라는 이 상황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잠에 취해 있었다. 그녀가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스름한 새벽쯤이었다.
“……각하?”
아델라가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기 위해 그를 불렀다. 이저드는 그녀의 부름을 듣고 살짝 미소 지었다.
아델라는 눈을 몇 번 깜박이다가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저…… 꿈꾸는 건가요?”
“꿈에서도 날 봤나?”
이저드가 낮게 웃었다.
“제가 자기 전이랑 똑같아서…….”
아델라가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안 주무셨어요?”
당연하게도 이저드는 고개를 저었다. 비록 잠을 청하지 못했지만, 그 사실을 알면 아델라도 다음 날부터 잠을 못 이룰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닌데…… 안 주무신 것 같은데…….”
아델라가 웅얼거리며 이저드의 안색을 살피기 위해 그한테 더 가까이 붙었다.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다가오자 이저드는 어쩔까 고민하다가 살짝 주의를 돌리기로 마음먹었다.
“잠은 잘 잤나?”
이저드의 부드러운 음성에 그녀는 이저드의 안색을 살피다 말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피곤했던 생각도 전부 날아가고, 한결 후련해졌다.
“더 안 자도 되겠나? 일어나기에는 아직 좀 이른데.”
아델라가 고개를 저으며 부스스하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해 드릴 말이 있어요.”
아델라의 진지한 눈빛에, 이저드도 그녀를 따라 침대에서 일어났다.
“흑마법 표식이요. 알아냈어요.”
아델라의 대화를 시작으로 흑마법사 표식은 물론, 흑마법을 푸는 법 등의 대화가 오갔고 그들의 대화는 어느새 동이 트기 직전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쉽게요?”
이저드한테 흑마법을 푸는 방법을 들은 아델라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들은 사람마다 백이면 백 의아한 반응을 보이는 데에는 정말로 그 방법이 너무나 간단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간단하냐면, 루의 설명이 단 몇 마디로 끝났을 정도였다.
‘일단 흑마법에 걸린 이들과 아델라를 한 공간에 모아요. 밀폐된 공간도 좋고 약간의 거리를 둬도 괜찮지만, 최대한 가까운 곳에.’
루는 의외로 쉽게 흑마법 푸는 방법을 입에 담았다. 아리스는 의외의 친절에 살짝 놀랐지만 잠자코 그의 말을 들었다.
‘여기서 준비물은 기본 마법진하고 아델라의 마음가짐.’
루는 정말 딱 이 정도만 말했다. 그럼 그렇지. 그렇게 쉽게 알려 줄 리가 없었다. 아리스는 너무 간단한 방법에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캐내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마음가짐이라면 어떤―?’
‘마법진을 가지고 다닌다고 다 되는 건 아닙니다. 그걸 발동시키려면 아델라가 간절하게 원해야 해요. 흑마법을 풀고 싶다고.’
흑마법은 저주를 거는 게 아니었나? 이게 흑마법을 푸는 방법이 맞긴 한 건가? 아리스는 그가 저주로 저주를 푸는 방법을 말해 줄 줄 알았다. 지금 루가 말하는 방법은 책을 뒤져 봐도 나오지 않는 방법이었다.
‘흑마법은…… 저주를 거는 게 아닙니까?’
‘아델라의 힘은 저주로 이루어진 게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면, 아델라가 쓰는 건 흑마법이…….’
갑자기 루가 잠잠해졌다.
아리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고, 루는 아리스를 만나 처음으로 답이 끊겼다.
‘예?’
아리스가 재촉하듯 물었다.
‘음, 아니요. 흑마법은 쓰는 사람에 따라 변할 수 있습니다.’
‘확실한 거 맞습니까? 방금, 다른 말 하려던 게 아닙니까?’
‘제가 헷갈렸어요.’
루가 싱긋 웃었다.
누군가의 머릿속을 읽는 흑마법은 없는 걸까. 아리스는 지금만큼은 정말 절실히 그런 흑마법의 필요성을 느꼈다. 믿으려고 해도 믿음을 주지 않는 이 사람을, 아리스는 어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흑마법에는 대가가 필요하다고 쓰여 있는데, 대가는 말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아, 대가. 그건…… 필요 없는데. 그래도 아델라가 흑마법을 쓰는 거니까, 이미 치렀다고 하죠.’
루가 선심 쓰듯 말했다.
‘치렀다’도 아니고 ‘치렀다고 하죠’는 뭘까. 흑마법에서 대가는 중요하지 않은 건가?
아리스는 더 묻고 싶었으나 보나 마나 제대로 대답해 주지 않을 게 뻔해서 다른 물음으로 넘어갔다.
‘그럼 마법식은요?’
‘아델라는 마법식의 조합을 몰라서 그냥 쓰는 것보다 효율이 훨씬 떨어져요. 원하는 미래가 펼쳐지긴 하겠지만, 그 과정은 장담 못 하죠.’
여기까지 듣던 아델라는 뜨끔했다. 혹시 루가 자신이 흑마법을 썼다는 걸 아는 걸까? 어떻게 이렇게 찰떡같이 맞추지?
“자업자득이었어요…….”
“뭐가 말인가?”
“제가 회귀하는 거요.”
이럴 줄 알았으면 회귀하는 동안 루한테 미리 물어볼 것을 그랬다. 아, 아니지. 미리 물어봤어도 어차피 이 회귀를 막을 수는 없었겠구나. 그냥 궁금증만 풀렸을 뿐.
역시 자신의 엉터리 마법식이 문제였다.
“마법식을 쓴 걸 말하는 건가?”
“네. 그게 더 강력할 줄 알고…….”
빈다고 다 되면, 세상 모든 흑마법사가 그렇게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마법진과 마법식이 합쳐지면 더 큰 힘, 혹은 더 확실한 힘을 발휘하는 줄 알았다.
그건 아델라뿐만 아니라 모든 흑마법사가 흔히 하는 착각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것이 착각인 줄도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네. 나도 그만한 흑마법을 거는데 특별한 뭔가가 있는 줄 알았네.”
“그러니까요. 저도 당연히 그래야지 좀 확실하게 흑마법이 걸릴 줄 알았어요.”
그래서 쓴 건데, 그 결과가 안 쓰느니만 못하게 나온다니.
충격이었다. 마법식의 조합이 가능한지도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루가 흑마법서라고 해서 처음 그 책을 받아 들었을 때, 루한테 흑마법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물어볼 걸 그랬다. 그때의 아델라는 평생 쓸 일이 없을 줄 알았다. 사람의 인생은 이토록 모르는 것인데 말이다.
“그런데 마법진만으로도 풀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해요. 푸는 방법이 이렇게 간단한 거라는 걸, 진작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이라도 알았지 않나. 일이 벌어지기 전에 알아 다행이네.”
그건 맞는 말이었다.
아델라는 시무룩해하다가 금세 기운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몇몇 부분에 의문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으나, 그녀한테는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
이제야 조금씩 출구가 보이는 기분이었다. 여태 어디로 이어졌는지 모를 깜깜한 길을 정처 없이 걷고 있었다면, 지금은 그곳에 한 줄기 빛이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근데, 그건 걸리네요. 더 강한 힘으로 누른다는 거요. 제 힘이…… 그렇게 강하지가 않아서.”
흑마법이야 어떻게든 쓸 수 있었지만, 과연 자신이 이저드와 주변 사람들한테 걸린 흑마법을 풀 수 있을 정도의 힘이 있을까?
아델라는 태어나서 한 번도 흑마법을 갈고닦은 적도, 힘을 키운 적도 없었기 때문에 그 부분은 자신이 없었다.
“그대의 친구를 믿어 보지. 어릴 적부터 그대를 봐 왔다면, 그대를 잘 알고 이 방법을 추천해 준 게 아닐까 싶네. 다만…….”
루는 정말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어떻게 모르는 게 없을까.
과거에 루를 요정님이냐고 부른 적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진짜로 요정이 아니었을까. 세상만사에 대해 모르는 게 없으니 신기했다.
“괜찮겠나?”
아델라가 루에 대한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이저드는 약간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 왜요?”
아델라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흑마법 쓰는 걸 두려워했지 않나.”
‘아…… 그랬지, 참.’
새삼스럽게 감회가 새로웠다. 절대 쓰지 않겠다고 해 놓고, 방법이 있다니까 냉큼 하겠다는 자신이 정말 웃겼다.
“참 이상하죠. 흑마법이 무서워서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절대 함부로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방법이 있다니까 그런 생각이 쏙 들어갔다.
아델라는 앞으로 어떤 일이든 장담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쉬이 바뀔 다짐이라니.
변명을 해 보자면 아델라는 그 많은 회귀 동안 이날만을 기다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쟁이 멈춰지는 날만. 전장에서 아군이 패하지 않는 날만.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이번 생에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고, 드디어 미래가 바뀔 희망이 보였다.
아델라는 물불 가릴 이유가 없었다. 흑마법을 쓰는 건 아직도 두렵지만, 수많은 전생을 생각하면 이겨 낼 수 있었다.
그보다 끔찍한 미래는 없었다.
자신을 위해서, 이저드를 위해서, 둘의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수많은 전쟁의 희생양들을 위해서.
아델라는 기꺼이 쓸 수 있었다.
“이상할 게 뭐가 있나. 사람을 살리겠다는 그대의 마음인데. 다만 내가 걱정되는 건 그로 인해 그대의 상처가 다시 생각날까 봐 그러네.”
그의 말에 아델라는 망설임 없이 환하게 웃었다.
“그때의 기억이 전부 다시 떠오른다고 하더라도…… 그렇다 하더라도 괜찮아요.”
아델라는 종종 화염에 휩싸이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그녀의 어렴풋한 기억 속에 한 여인이 불꽃에 휩싸여 사라졌기 때문이다.
사실은 아델라도 기억하려고 마음을 먹는다면 어느 정도는 기억할 수 있었다. 다만 그동안 그녀가 기억하지 못한 건, 아니, 하지 않았던 것은 그 기억이 너무 괴로워서 애써 외면하고 피했기 때문이다. 기억을 없애고 바꿔 가면서.
당시 아무런 힘도 없었고 아무 이유도 없이 어머니를 잃어야 했던 어린아이는 그렇게 그녀를 가슴에서 묻어야만 했다. 그게 아델라가 살 방법이었다. 그땐, 그게 최선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방법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수많은 회귀를 견디면서, 그리고 이저드가 견딘 세월을 보면서, 깨달았다. 외면하고, 피하고, 돌아보지 않는 것만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예전에는 너무 무서워서 떠올리면 안 되는 기억 같아 두려웠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지금은…… 오히려 기억해 내야 할 것 같아요.”
어머니를 기리는 방법 중 하나가, 끝까지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잊히지 않게 노력하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아델라는 그가 기린 두 분의 액자를 본 후에야 알았다.
아델라는 그제야 그리운 어머니의 얼굴, 표정, 말투, 습관, 그런 모든 것이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운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더라고요. 제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절 잊는다고 생각하면, 너무 슬퍼서……. 그게 너무 죄송해서.”
과거에 아델라는 자신 이외의 사람들을 돌아볼 여유도, 생각할 정신도 없었다. 당장 먹고살기 바빴고, 당장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바빴다.
그런 그녀가 과거를 돌아보게 된 시발점은 수많은 회귀를 거치면서였다. 그리고 그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바뀌었다.
“그대의 어머님도 그대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네. 먼저 떠나서 그대한테 보여 준 마지막 모습이 그대의 기억에 박혀서 지워지지 않을까 봐 슬펐을 거야. 그대가 그 기억으로 두고두고 괴로워하는 걸 원치 않으셨을 거네.”
이저드는 부모의 입장에 서 본 적은 없었지만 그의 아버지가 남긴 말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이저드의 기억에 안 좋은 마지막 모습을 남겨서 미안하고, 잊으라던 그였다.
“그러니까…… 여태 잊고 지냈다고 죄책감 느끼지 말게. 그대는 잘해 왔고, 잘하고 있어. 앞으로도 잘할 거네.”
여태는 레널드한테 보여 주기 위해 수줍게 웃었다면 이번에는 진심으로 쑥스러워서 아델라는 수줍게 웃었다.
자신의 삶을 누군가가 이해해 준 기분이었다. 고생한 것도, 치열했던 것도, 행복했던 것도, 모두 그가 알아 줬다는 게 쑥스러우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사실 자신은 그 말이 듣고 싶었던 걸까.
잘해 왔다고, 잘하고 있다고.
아델라는 쑥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볼이 화끈거리는 걸 애써 아닌 척 웃었지만, 그녀의 볼이 약간 발그스름해져 있었다.
“각하를 만나서 정말 다행이에요. 각하께, 많이 배웠거든요. 각하 덕분에 많이 바뀌었어요.”
“그대 덕분에 내 삶도 그러하네. 그대 덕분에 내 미래가 바뀌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는 그녀를 만나서, 그녀는 그를 만나서 원래는 없었을 미래를 생각할 수 있게 됐다.
“앞으로 더 많이 바뀔 거예요. 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루가 알려 준 방법이라면 확실할 거예요.”
“그래, 그대가 괜찮다면 나도 괜찮네.”
설령 그로 인해 자신의 흑마법이 다른 흑마법사한테 드러나게 된다고 하더라도 아델라는 그 방법을 실행할 것이고 꼭 성공할 것이다.
“기본 마법진은 제가 알고 흑마법에 걸린 이들과 함께하는 건…… 훈련을 같이한다는 명목이면 되고요. 여태 안 했던 건 아니니까요.”
“그대의 오라버니가 돌아간 다음부터 실행하려고 하는데, 어떤가?”
이저드의 제안에 아델라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좋아요! 오라버니를 얼른 퇴치해야겠어요.”
아까보다 훨씬 밝아진 아델라의 표정을 보며 이저드는 덩달아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델라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다 불현듯이, 아까 의문을 가졌던 사건이 생각났다.
“그런데 아델라.”
“네?”
아델라는 밝은 표정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흑마법서 말이네.”
“아, 뒤바뀐 거요?”
“그래. 이상해서 말이야.”
이저드가 이상하다고 하니, 아델라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가게에서 어떤 것도 건들이지 않고 오직 단 하나만을 목표로 했던 그 흔적들. 아주 미세하게 달라진 것들.
그리고 무엇보다…… 먼지가 사라진 책장.
아델라는 그 모든 게 딱 하나, 루가 가져다 준 흑마법서에 향한다는 걸 알아챘다. 범인은 처음부터 그 책을 노렸던 것이다.
“그대한테 흑마법서가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확신하고 그대의 가게에서 그것만 바꿔 간 거지?”
“저도 그게 이상해요. 그 사람…… 당연하게 저희 가게에 흑마법서가 있다는 듯이 움직였어요.”
범인은 흑마법사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왜 하필 아델라를? 왜 아델라를 의심한 걸까?
여러 번 말했다시피, 아델라는 평생 흑마법과 동떨어져 살았음은 물론이고 루를 제외한 그 누구도 그녀가 흑마법사임을 몰랐다. 가족도 모르는 자신의 정체를 생판 모르는 누군가가 안다는 게 정말 이상했다.
“혹시, 저희 집안 과거를 들은 사람일까요?”
“흠……. 그대의 어머니가 흑마법사였다고 해서 그대를 바로 흑마법사로 단정 지을 수는 없지 않나? 그댄 어릴 때 오해가 풀리기도 했고.”
“아니면, 흑마법을 쓰지 않으면 표식이 나타나지 않는 걸 알아서겠죠? 그래서 어릴 때 위험을 피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했을 수도요?”
이저드는 그녀의 말에 일리가 있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것도 아니면…….”
아델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흑마법사의 자식이라고 하더라도 흑마법사로 태어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흑마법 자체가 유전도 아니거니와 흑마법을 가지고 태어나는 건 일정한 규칙 같은 게 없었다. 한마디로 무작위였다.
헌데, 여태 쥐 죽은 듯이 지내며 어떤 문제도 일으킨 적 없는 아델라를 흑마법사라고 단정한 이유가 뭘까? 정말 혹시 모를 유전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했던 걸까? 아니면…….
“제가, 이전하고 뭔가 다른 점이 있었겠죠? 흑마법사로 오해받을 만한, 차이요.”
아델라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흑마법사로서 오해받을 만한 행동을 한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표식이 생긴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확신했을까?
“내 추측일 뿐이네만, 혹시 그 흑마법사도 같이 회귀를 하는 건 아닌가?”
만약의 이야기 중 하나였지만, 아예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대가 회귀하다 나를 이번 생에 처음 만난 거라면 그동안 눈에 안 띄다가 처음 그 흑마법사 눈에 띈 게 아닌가 싶어.”
“그러게요……. 확실히, 이번 생은 많이 달라졌죠. 그 사람도 전생을 알고 있다면 제가 엄청나게 수상했겠네요.”
이저드의 곁에 있다가 상황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니 당연히 아델라를 의심했을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고 하면 망설임 없이 아델라의 가게를 뒤진 것도 얼추 말이 됐다.
“만일 저주를 건 흑마법사가 그대와 함께 회귀하고 있다면, 조만간 계획을 바꿀지도 모르네.”
“아― 그렇겠네요. 제가 흑마법사인 걸 알았다면,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테니까요.”
이저드는 그래서 불안했다.
그녀가 회귀하는 동안 한 번도 그녀한테 향하지 않던 적의가 자기를 제쳐두고 그녀한테로 향할 거라고 생각하니, 참을 수 없이 불안하고 화가 났다.
그녀가 원한 건 딱 하나였다. 살고 싶다.
처음에는 자신이었지만, 그다음에는 이저드, 또 그다음에는 다른 사람들, 그리고 지금은 전쟁으로 희생되는 모든 이들. 다른 이들이 죽길 바라지 않는 그녀를 짓밟으려는 그 누군가한테 화가 나다 못해 살심이 느껴질 정도였다.
“음― 일단은 흑마법부터 풀죠! 흑마법을 풀면서 동시에 찾아요. 아마 초조해서…… 금방 정체를 드러낼 거예요.”
“그러지. 그대는 흑마법 푸는 데에 집중하게. 흑마법사는 린다 경과 헤이든 경한테 맡기겠네.”
이저드의 말에 아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데, 그 나쁜 놈이 다시금 활개를 치게 놔둘 수 없었다.
* * *
레널드는 왕한테 보고할 만한 거리를 이미 다 수집해, 아침 일찍부터 아델라의 방에 들렀다. 이만 돌아가겠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방 안에는 아델라가 없었다. 그녀의 방 앞을 지키는 사람도 없었다. 레널드는 방 안을 빙 둘러보았다. 어제 그렇게 화내서 나가고 안 들어왔나? 어디 갔지? 이른 아침부터 할 일이 있나?
그렇게 고민하던 중, 마침 아델라의 방을 청소하기 위해 몇몇 하녀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헉. 가, 간밤에 편히 주무셨습니까?”
하녀들은 레널드가 왜 이 방에 있는지 의아한 눈빛이었지만 아델라의 오라버니였으니 간단한 인사치레를 했다.
“예, 잠자리가 아주 편했습니다. 저, 혹시 아델라가 어디 있는지 압니까? 인사만 하고 이만 수도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모르는 하녀들을 서로 눈치를 보다가 한 명이 나서서 입을 열었다. 그녀는 어제 레널드와 하하 호호 웃던 그 하녀였다.
“이 시간쯤에는 아직 각하와 함께 계실 겁니다. 아침 식사를 같이하시고 돌아오십니다.”
“예?”
그렇게 불같이 화를 내고 나가서 이저드의 방으로 갔다고? 이런 걸 보고 대단하다고 해야 하는 건가?
“아…… 그럼 여기 침실은 거의 안 씁니까?”
“보통 쉬러 오실 때 쓰시죠.”
‘정말…… 단단히 꼬여 냈구나.’
레널드는 설마 자신과 크게 싸우고 간 어제도 아델라가 이저드한테 향할 줄은 몰랐다.
‘아? 아아? 아, 혹시! 그렇게 불같이 화냈던 게…… 공작한테 보여 주기 위한 거였나?’
그렇게 치면 어제 아델라의 화남이 어느 정도는 이해되었다.
이저드가 기척을 숨기는 기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완벽했다. 그러니 당연히 레널드가 기척을 읽어 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아델라는 그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저드가 남매의 대화를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황을 미리 생각하고 있었을 줄이야.
‘그래서! 그래서 일부러 좀 더 세게 말한 건가?’
물론 그건 레널드의 착각이었다.
레널드는 단단히 오해한 모양인지, 아델라의 스파이 정신을 속으로 박수 쳐 줬다.
그는 뿌듯한 표정으로 아델라한테 자신이 수도로 갔다고 전해 달라 말하며 아델라의 방을 나왔다. 굳이 아델라를 안 보고 가도 괜찮을 것 같다는 어떤 확신이 들었다.
그는 앞으로 그한테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모르고, 수도에 돌아가 보고할 생각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 * *
린다는 모든 이야기를 듣고, 아델라가 왜 벤슨을 잠깐이라도 의심했는지 깨달았다.
그의 손목에 얼핏 보이는 검은 무언가. 더워도, 추워도, 비에 젖어도, 눈을 맞아도, 항상 목까지 가려진 옷.
예전엔 저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화상 자국이 있어 벗기 싫어했던 건 맞지만, 공용 샤워실도 쓰지도 않고 장갑을 절대 벗지 않는 모습은 최근 몇 달 사이 확 심해졌다. 린다가 얼핏 봤을 때, 검게 그을린 것 같은 자국도 더 심해진 것 같았다.
그녀는 처음에 벤슨이 병에 걸렸나 싶었다. 하지만 본인이 너무 멀쩡하고, 그런 병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어서 좀 의아하게 생각하고 지나간 기억이 있었다.
“저…… 린다 경? 부르셨습니까?”
벤슨은 린다가 따로 불러서 의아한 표정으로 린다의 집무실 문 앞에 서 있었다.
“응. 왔으면 앉아. 뭘 뻘쭘하게 거기 서 있어?”
린다는 동요 하나 없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서류를 검토하며 그가 소파에 앉기를 기다렸다.
“예.”
벤슨은 조금 혼란스러웠지만, 아무 의심 없이 소파에 앉았다.
“무슨 일 있습니까?”
“있지. 그래서 널 불렀지, 괜히 불렀겠어? 너한테 부탁할 임무가 있어. 최대한 다른 호위병들은 몰랐으면 해.”
서류에만 향했던 린다의 회색빛 눈동자가 드디어 벤슨을 향했다.
“말씀하십쇼.”
벤슨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의 명을 기다렸다.
“너도 알지? 지금 공작가가 시끄럽고, 평소랑 다르다는 거.”
“예, 느끼고 있습니다.”
“여태까지는 사기 저하 때문에 말을 안 했는데, 이젠 해야 할 것 같아서.”
벤슨은 린다가 무슨 말을 꺼내려고 이러나 싶어 그녀의 입술을 계속 주목했다.
“호위병 중에 스파이가 있는 것 같아. 그것도 꽤 오래된.”
“예? 그럴 리가요. 스파이라면 이미 진즉에 걸렸을 텐데요.”
그놈이 흑마법을 쓸 줄 누가 알았겠냐고. 린다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게 말이다. 안 걸렸어도 위협이 될 존재는 아니었지.”
“그런데요……? 혹시 이번 스파이는 위협이 될 존재라서 저한테 임무를 맡기시는 겁니까?”
린다는 바로 맞혔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건 아니고, 검은색 문신만 찾으면 돼. 호위병 중에 있을 것 같은데 무턱대고 전부 의심할 수는 없잖아.”
그녀의 말에 벤슨이 아주 잠시 묘한 표정을 보이다가 이내 미소를 띠었다.
“어, 그럼…… 저는 괜찮다는 겁니까? 왜 저한테 그런 걸…….”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너무 대놓고 아닙니까?”
“그렇다고 거짓말할 수는 없잖아. 내 성격 알면서.”
둘은 농담처럼 대화를 주고받았지만, 그 안에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깔렸다.
“굳이 너한테 부탁한 건 너한테 정말 미안하지만……, 네 과거 때문이야.”
“제 과거라면……?”
“소중한 사람을 잃어 본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얼마나 간절한지 알 테니까. 그래서 우릴 배신할 놈처럼 보이지는 않았거든. 우리한테 각하는 그런 존재잖아.”
린다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린다의 표정과 눈빛, 행동, 모든 게 진실하게 보였지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벤슨을 낱낱이 살피고 있었다.
‘그런 존재를 네가……. 넌 아니겠지. 몇 년간 우리를 속이고 각하를 존경한다면서 뒤에서 다른 맘을 먹는다던가 하는 짓을 하지 않겠지.’
그녀는 벤슨과 함께한 시간에 아주 작은 희망을 걸었다. 그래서 시험해 보는 거였다. 벤슨이 어디까지 진실한 모습을 보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말은 절…… 믿으신다는 거예요?”
“굳이 따지자면 믿는 편이지. 널 봐온 시간만큼 믿어. 우리가 한두 해 본 건 아니니까.”
“그렇군요…….”
벤슨은 항상 웃던 표정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강요는 아니야. 동고동락한 동료를 의심하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나랑 헤이든이 확인하기에는 호위병들과 생활하는 공간이 다르니까. 그래서…… 친근하게 살펴볼 누군가가 필요해.”
그녀의 말에 벤슨은 꽤 오래 고민했다. 그는 이 말이 진심인지, 아니면 자신을 꼬여 내기 위한 미끼인지 몰랐다.
린다는 초반에 벤슨이 의심된다고 경계를 풀지 않았다. 그녀의 의심이 어느 정도 수그러지고 신뢰를 쌓은 건 그가 이곳에 온 지 반년이 지났을 때였다.
그만큼 까다로운 린다였지만 한번 벤슨을 믿기로 한 이후로 그녀에게서 그런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 이후로 벤슨을 스파이 선상에서 아예 배제했다.
그걸 잘 알고 있는 벤슨이었지만 그래도 헷갈렸다. 아델라라는 큰 변수가 들어온 이상,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물론 아델라와 함께 있던 시간보다 자신과 함께한 시간이 더 오래되었기에 믿음이 있긴 했지만 벤슨은 아델라의 등장으로 항상 초조한 상태였다.
“만약 제가 거절하면…… 다른 호위병이 이 일을 맡는 건가요?”
“그렇게 되겠지? 너만큼 오래 있었던 사람한테 부탁해 봐야지.”
린다의 표정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원래 자기감정에 솔직한 사람이기 때문에 벤슨한테 일을 맡기는 게 거짓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 저변에 깔린 의도는 모르겠지만.
아마 정말로 자신을 믿거나, 아니면…… 시험을 하거나.
벤슨은 고민하는 척하다가 그녀의 제안을 승낙할 생각이었다. 린다의 의도를 알기 위해. 아니, 사실 린다의 의도 따위 상관없었다. 지금은 시간만 벌면 되니까.
“알겠습니다. 할게요. 저도 각하의 은혜로 이곳에 있을 수 있게 된 걸요.”
벤슨의 승낙에 린다가 씩 웃었다.
“너라면 해줄 줄 알았어. 고맙다.”
역시 그녀의 태도는 평소와 같이 시원시원했다.
“아니에요. 몸 어딘가에 검은 문신이 새겨져 있다는 거죠?”
“응. 그런 사람만 일단 찾아서 알려 줘. 호위병들한테는 비밀이고.”
“네. 맡겨 주십쇼.”
벤슨이 평소와 다름없이 미소를 지었고, 린다도 마주 웃었다.
똑똑.
마침 누군가가 문을 두들겼다. 린다는 웃으며 벤슨한테 돌아가 보라고 했다.
“그럼, 저는 이만.”
“그래. 혹시 모르니 몸조심하고. 여태까지 들키지 않은 거 보면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닐 테니까.”
“옙.”
그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금발의 미남자, 헤이든이 서 있었다.
“헤이든 경.”
“아, 벤슨 경. 내가 방해했나?”
“아닙니다. 이제 막 가려던 참입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둘은 서로에게 간단하게 인사만 하고 곧바로 헤어졌다.
헤이든은 저 멀리 사라지는 벤슨을 바라보다 천천히 린다의 집무실로 발을 옮겼다.
“그래서, 받아들였어?”
헤이든은 이미 둘이 만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린다한테 혹시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그녀의 집무실을 찾았던 것이다.
“응.”
“어때 보였어?”
린다는 벤슨이 나간 문을 빤히 바라보다가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부자연스러운 건 없었어. 오히려 자연스럽고…… 평소와 같이 여유롭더라고.”
린다는 팔짱을 끼고 무언가 고민하는 듯이 보였다.
“아니라서 여유로운 건가?”
헤이든도 같이 고민하며 린다의 곁으로 다가섰다.
“반대일 수도? 우리보다 먼저 아델라 님이 흑마법사인지 알았다며. 그럼 대비를 벌써 해서 여유가 있는 걸지도.”
린다는 어제 싸했던 그의 분위기를 떠올렸다. 그 분위기는 평소 린다가 느낀 것보다 더 심했다. 확연히 티가 날 정도였다. 예를 들어 비교하자면…… 평소의 미소와 전장에서 사람을 베고 짓던 미소의 차이라고 해야 할까?
그는 누군가를 베고 죽일 때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누군가가 보면 페이스를 잘 유지한다고 볼 수 있었지만 린다는 가끔 그 미소가 기계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었다.
“어제…… 사람을 구한 게 아니고, 죽였나?”
“으응? 누가? 누굴?”
그땐 그저 피범벅인 사람을 구하느라 피 냄새가 짙게 배어나나 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피가 묻은 줄 몰랐던 게 아니라, 일부러 보여 주려고? 아델라한테?’
린다는 생각에 빠졌다. 그녀가 조용히 생각에 잠기자 옆에서 궁금증이 가득하던 헤이든도 덩달아 조용해졌다.
‘누굴 죽였기에 곧바로 아델라한테 온 거지? 피까지 닦지 않고.’
“벤슨 경이 휴가 내고 다녀온다는 곳이 어디였어?”
“하샤 지방. 웨인 후작가 막내딸한테 간다던데.”
하샤 지방이면 바로 옆 지역이었다. 그리고 아리스가 루를 만났다고 한 곳은 하샤 지방과 맞닿아 있는 카텔 왕국의 국경 지역이었고.
“웨인 후작가에 기별을 넣어도 얻는 건 없겠지? 분명 알리바이를 만들어 놨을 테니까.”
“벤슨 경이 진짜 흑마법사라면 그랬겠지.”
“그럼 그 사람의 답신을 기다려야 하나……?”
“누구?”
헤이든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루. 아델라 님의 친구. 아델라 님이 편지를 전해 달라고 했거든. 어제는 일이 많아서, 오늘 오전에 사람을 보냈으니까…… 일주일 내로 답이 오겠네.”
근데 영 찝찝했다. 마냥 루의 답신만을 기다리고 있기에는 마음에 걸렸다.
혹시…… 아리스한테 정보를 넘긴 걸 알고 루를 죽였나? 그럼 답신은 아예 안 올 터였다. 설마 아니겠지. 아델라의 친구를 죽일 이유가 없는데. 아델라면 몰라도.
벤슨이 아델라한테 일부러 피를 보여 줄 이유가 잘 생각나지 않았다. 물론 이 모든 건 벤슨이 진짜 흑마법사라는 전제하에 이루어지는 내용이었다.
만약 아니라면, 모두 우연이라는 이야기인데…….
“헤이든.”
“응?”
“수도에 있는 우리 세작들한테 연락을 취할 수 있을까?”
이 모든 게 우연일 리 없었다.
린다의 직감이 전대 공작을 잃었을 때처럼 날카롭게 섰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취할 수 있지. 왜? 흑마법사가 방비해 놓은 게…… 왕 같아?”
“정확히 왕인지는 모르겠고, 흑마법사를 이곳에 넣은 건 왕이니까 궁지에 몰렸을 때 유용하게 쓰겠지.”
“벤슨 경이라고 확신하는 거야?”
“아직 그건 아니야. 지금은 흑마법사가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지 생각해 봤어. 내가 스파이라면, 이 위기에서 왕의 도움이 필요했을 것 같아서.”
린다의 말에, 헤이든이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벤슨 경을 지켜봐야지.”
“그렇지. 어떻게 나오는지…….”
아델라가 말한 표식이 벤슨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아까 벤슨한테도 말했듯이, 오랜 시간을 함께한 동료가 자신들의 뒤통수를 쳤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둘은 같은 생각을 하며 착잡한 심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델라 님은?”
잠시간 말이 없던 둘 중 먼저 침묵을 깬 건 린다였다.
“레널드가 갔으니, 오후부터 훈련에 합류한다고 준비 중.”
“그래? 알겠어. 이것만 정리하고 나도 가야겠네. 여보는?”
“훈련 때까지 시간 있으니까 여보 얼굴 보고 가려고 왔지.”
헤이든이 씨익 웃자, 그제야 약간 굳어 있던 린다의 표정도 펴졌다. 아무래도 자기 딴에는 위로를 해 주고 싶어 온 모양이었다. 둘은 잠깐이었지만 서로의 체온에서 휴식을 취한 후 헤어졌다.
* * *
아델라는 오랜만에 머리를 돌돌 말아 높게 묶었다.
신부 수업 아닌 신부 수업을 하느라 며칠 동안 훈련복을 입을 일이 없었는데 이게 이렇게 편할 줄이야.
그녀는 새삼 느꼈다. 귀족 영애들도 드레스 말고 이런 편한 옷을 입으면 안 되나.
아델라는 오후 훈련이 끝나면 다시 드레스로 돌아가야 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진짜…… 펜베르크 성까지 전쟁의 피해를 입는 건 아니겠죠?”
아델라의 시중을 들던 하녀가 떨리는 눈동자로 물었다.
하녀들은 안주인이 될 아델라까지 훈련에 참여한다니까 조금 불안한 듯 보였다. 보통 귀족 영애가 군사 훈련에 참여하는 일은 드물었다.
“걱정 마세요. 전 그저 약혼녀로서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는 것이고, 펜베르크 성이 함락당할 리가 없잖아요?”
거짓말이었지만 아델라는 이 말을 사실로 만들 작정이었다. 그 누구도, 자신의 삶과 터전을 빼앗아 가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아델라는 옷 속에 마법진을 그린 종이를 고이 넣어 두고 그가 오길 기다렸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고, 잠시 후 그녀가 기다리던 그 사람이 천천히 안쪽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는 아델라한테 정중하게 손을 내밀며 미소 지었다.
“준비는 다 됐나?”
“네!”
그녀는 이저드가 내민 커다란 손을 맞잡으며 햇살같이 웃었다.
“참고로 말하지만, 린다 경은 봐주지 않네.”
“이미 각오한 일인 걸요. 가요! 성을 지키기 위해서.”
아델라의 표정은 평소보다 훨씬 해사했다. 그가 그녀의 환함을 보고 다시 반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저드는 아델라의 손을 조심히 감싸 잡고 그녀를 이끌었다.
* * *
‘아…… 역시 이상과 현실은 다른 거였어!’
아델라는 데굴데굴 구르는 와중에 생각했다. 한동안 좀 편히(?) 쉬었다고 아주 빡세게 굴려 주는데 정말…… 린다다웠다.
아델라는 정말 어떤 차별도 없이 호위병들과 맨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다가 거의 지쳐 쓰러질 때쯤에 오후 훈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린다는 일부러 이저드도 오지 못하게 막은 채 훈련을 진행했다.
“아델라 님? ……님? 여보세요? 저기요, 정신이 드십니까?”
아델라는 식사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기계적으로 퍼먹고 있었다. 그때, 벤슨이 식판을 가지고 오더니 그녀의 옆에 앉았다.
“경, 경 건들지 마. 아예 정신이 나가셨어. 평소보다 2~3배는 굴렸는데 쉬다 오신 분이 오죽하겠어?”
벤슨이 아델라를 놀리려는 걸 잘 아는 다른 호위병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렸다.
“정신이 나가셨으니까 잡아드려야지. 이 사람, 매정하네. 저녁 훈련 또 있잖아.”
“니에?”
밥을 먹다 말고 아델라가 벤슨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영애, 밥알 떨어져요.”
벤슨의 말에 아델라가 호로록 밥알을 입에 넣어서 열심히 씹었다.
“저녁 훈련이 또 남았다고요? 워, 원래 없었잖아요.”
“아, 아델라 님은 한동안 훈련 못 했죠? 저녁 훈련도 추가됐어요. 전쟁 대비.”
벤슨의 생글생글한 미소와는 다르게 내용은 공포였다.
크흑. 오랜만에 느끼는 이 근육통을…… 더 느껴야 한다고요? 내일 아침에 정상적으로 일어나긴 글렀다.
‘호, 호상만 생각하자. 모두 다 잘 사는 것만 생각해. 흐앙아.’
아델라는 체념한 듯 얌전히 밥을 꾸역꾸역 입안에 밀어 넣었다. 저녁에도 훈련이 있다고 하니 배를 든든히 채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흐리멍덩했던 정신이 점점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녀는 빤히 벤슨의 식판을 보았다. 벤슨을 살피듯이 보면 안 될 것 같았기에 그랬다.
‘린다 경이 뭘 한다고 했는데, 뭘 했을까? 벤슨 경은 평소랑 같은데. 어제의 그런 분위기도 안 느껴지고. 다른 사람한테 뭘 했나?’
오늘 아침, 레널드가 말만 남기고 돌아갔다는 소식에 아델라는 잽싸게 린다와 헤이든, 아리스한테 간단하게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그때 이저드는 린다와 헤이든한테 흑마법사 찾는 일을 맡기겠다고 했고 린다는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으니 자기가 해 보겠다고 했다. 아델라는 린다가 마음에 걸린 일이 어제 아델라와 했던 대화가 아닐까 짐작했다. 확실한 건 아니었지만.
아델라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호위병으로 있던 시간이 극히 짧았던 그녀는 그들의 미묘한 변화를 잘 모르니, 이렇게 둘러봐도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티 나게 먼저 떠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 벤슨의 식판으로 향했다.
‘여기서 떠보면 엄청 수상하겠지? 린다 경이 손을 써 둬서 들킬지도 몰라.’
“아델라 님?”
“네?”
아델라는 속으로 깜짝 놀랐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의아하게 벤슨을 보았다.
“남의 식판은 왜 계속 봐요?”
“히히…….”
아델라가 눈빛을 빛내며 자신의 빈 식판과 벤슨의 식판을 번갈아 보았다.
“와― 무슨 귀족 영애가 한낱 호위병의 식판을 탐낸답니까?”
“탐낸 건 아니고…… 그냥, 맛있어 보여서요.”
아델라는 딴청을 피웠다.
“저도 저녁 훈련에서 살아남아야 해서 절대 안 됩니다.”
아델라는 누가 뭐라고 했냐는 듯이 입술을 비죽이며 식판을 들고 일어섰다.
“누가 달랍니까? 그냥 맛있어 보였다고요. 전 남의 떡 탐내기 전에 갑니다! 식사 맛있게 하세요.”
“남의 떡도 뭐냐에 따라 다르잖아요. 똑같은 식판입니다.”
아델라는 그의 말을 못 들은 척 식당을 나왔다.
‘평소랑 같아. 저번처럼 이상한 느낌도 안 들고, 오히려 여유로워 보여. 역시 아닌가?’
아델라가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벤슨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훈련에는 원래 잘 임했고, 딱히 평소랑 달라진 건 없는데……. 뭐지? 루한테서 알아낸 게 없나?’
벤슨은 힘들어서 축 처진 채로 식당을 빠져나가는 아델라의 뒤를 눈으로 좇았다. 그러곤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다가 곧 포기하고 마저 식사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곧 죽을 건데, 상관없나.’
그의 표정은 평소보다 훨씬 여유로워 보였다.
* * *
“아고고고…….”
아델라는 커다란 침대에 대자로 뻗어 앓는 소리를 냈다. 하녀들이 따로 근육을 풀어 줬는데도 여전히 죽을 맛이었다. 이저드가 없어서 다행이지, 있었으면 걱정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이저드가 오기 전에 격한 운동으로 놀란 근육을 풀기 위해 꼼지락꼼지락 움직였다.
“끄으윽―.”
스트레칭을 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비명을 질렀다.
아델라는 신음을 참고 끄으응, 끄에에 하면서 몸을 풀었고, 그녀의 목소리를 문밖에서 듣고 있던 이저드는 난감한 표정을 지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델라한테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었다고 하면 민망해할 것이 분명했다. 일부러 소리를 죽이고 몸을 푸는 걸 보면, 이저드가 모르길 원하는 것 같았다.
이저드는 모른 척을 해 줘야 할 것 같아 아주 잠시만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 아델라의 신음이 사라지자 그제야 이저드가 문을 두들겼다.
똑똑.
“들어오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이 밝았지만, 약간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가 많이 피곤한 것 같아 안타까웠다.
“왔네. 피곤하진 않나? 먼저 잠자리에 들어도 되는데…….”
이저드가 아델라 쪽으로 다가오면서 말했다. 아델라는 그를 보자 피곤해서 몰려왔던 잠이 싹 달아나는 것 같았다.
‘언제 봐도 멋있어. 아침에 봐도 멋있고 저녁에 봐도 멋있어. 계속 계속 봐도 멋있어!’
“각하 보고 싶어서요!”
아델라는 침대에 걸터앉아 있다가 그가 자신 쪽으로 걸어오자, 침대에서 일어서서 그한테 다가섰다. 아델라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저드한테 팔을 뻗었다. 아델라가 먼저 이저드를 안자, 그도 자연스럽게 아델라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으음―. 이게 바로 안락함! 너무 좋다아.’
이저드를 안고 있으니 왠지 좋은 기운이 충전되는 기분이었다. 너무 좋아서 그런가. 긴장했던 마음이 스르르 풀리고, 편안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를 보고 하루를 시작하고, 그를 보고 하루를 끝내는 하루하루가 너무 좋았다.
“각하도 피곤하시겠다. 그렇죠? 얼른 옷 갈아입고 오세요!”
이저드는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이 상태 그대로 있을 수 있었지만, 그러면 아델라가 잠을 청하지 못할 테니까 참았다.
그는 아델라를 살짝 놔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갈아입고 오겠네.”
“네.”
아델라는 종종걸음으로 침대로 가서 다시 앉았다. 이저드가 옷 방에 들어가는 걸 확인한 그녀는 다시 침대에 픽 누웠다.
‘아효오― 들키는 줄! 아이고, 허리야.’
아델라는 금세 노곤노곤해져 눈을 깜박깜박 감았다가 떴다.
그녀가 그렇게 깜박 잠든 사이, 옷을 갈아입은 이저드는 침대에 웅크려 자는 아델라를 발견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안타까운지.
그는 아델라를 침대 중앙으로 옮기기 위해 움직였다. 이저드가 아델라를 가볍게 안아 들자 비몽사몽이던 아델라가 조금 뒤에 상황을 파악해서는 눈을 댕그랗게 떴다. 그에 이저드는 그녀를 안아서 침대에 내리려는 중에 동작을 멈췄다.
이 자세 왠지…… 덮치는 것 같은 그런 자센데……. 오해를 사는 건 아닐까, 하고 이저드는 걱정했다. 자는 사람 덮치는 파렴치한 사람이 될까 봐.
아델라는 큰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곧 배시시 웃었다.
“죄송해요. 제가 또 깜박 잠들었죠?”
아델라가 갑자기 눈을 뜬 건 자기도 모르는 새에 잠든 것에 놀랐기 때문이다.
“계속…… 자도 되네.”
이저드는 그녀의 미소를 본 후에야 몸에서 긴장을 풀고 그녀를 눕혔다.
“아! 안 돼요. 저 물어볼 거 있어요.”
“뭘?”
정직하게 똑바로 누운 아델라의 곁에 이저드가 다가와 누우며 물었다.
“오늘 하루, 별일 없으셨어요?”
아델라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그를 보았다.
“내…… 안부를 묻는 건가?”
“네! 저 훈련하는 동안 뭐 하셨는지 궁금해서요.”
항상 자신의 안부를 먼저 물어오던 이저드가 생각나서 이번에는 아델라가 먼저 물었다.
그냥 안부만 물었을 뿐인데, 쑥스러운 이 기분은 뭐람.
이저드는 아델라의 물음에 곰곰이 오늘 했던 일을 생각해 보았다. 이저드의 매일은 거의 똑같았다. 아델라와의 시간을 조금 더 갖게 된 것 말고는 딱히 특별해진 건 없었다.
다만, 오늘 한 일을 되짚어 볼 여유가 생겼다는 게 특별하다면 특별했다.
“별일은 없었네. 항상 똑같아서, 그대가 듣기에는 시시하고 재미없을 수도 있네.”
“괜찮아요! 저도 오늘 훈련한 일밖에 없거든요!”
아델라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침에 그대와 헤어지고 일만 했네. 그대가 걱정돼서 잠시 훈련장에 가려다가 헤이든 경한테 잡혔고…….”
이저드는 자신의 하루에 관해 이야기하는 게 서툴러서 많이 고민했다. 아델라는 조금 서툴지만 진심으로 말하는 그의 이야기를 눈을 빛내며 들었다.
그녀는 이런 시간도 너무 좋았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옆에서 뭐든 이야기하는 게 듣기 좋았고, 행복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헤이든 경이 린다 경을 만나고 와서 할 말이 있다더군.”
“헤이든 경이요? 뭘요?”
“아침에 린다 경이 마음에 걸린다고 했던 일을 알려 주더군. 어떻게 일을 진행하고 있는지까지.”
이저드의 말에 아델라가 아, 맞다, 하며 자신도 이제야 생각난 듯 그를 보았다.
“왜 그러나?”
“아, 아니에요. 계속 말하세요. 저도 궁금했던 참이라.”
원래 린다한테 물어보려고 했던 건데, 훈련 후에는 그 문제를 물어볼 정신이 아니어서 못 물었다. 너무 지쳐서 당장 물부터 찾고 앉아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대의 이야기를 듣고 떠오른 사람이 있다고 했네.”
‘응? 내 이야기?’
헉, 역시 어제 말한 벤슨 경?
아델라는 이불을 꽉 쥐고 주변을 경계하며 이저드한테 살짝 가까이 붙었다.
“혹시…… 벤슨 경이요?”
이 주변에 누가 듣는 것도 아닌데 아델라의 행동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어떻게 알았나? 맞네.”
“그래서요? 린다 경이 뭘 했대요?”
“그한테 우리가 흑마법사를 찾고 있다는 걸 알려 줬고, 협력을 요청했다네.”
아까 벤슨을 관찰하듯 살피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겼다. 하마터면 린다의 계획이 초장부터 망가질 뻔했다.
“벤슨 경이 받아들였대요?”
이저드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아델라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떻게 나오는지 보려고요?”
“그러네.”
“하지만…….”
아델라는 오후에 본 벤슨의 모습을 떠올렸다. 평소와 같이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아닌가? 평소보다 더?
“아델라?”
이저드가 낮게 그녀를 불렀다.
“아, 아니에요. 린다 경 말대로 지켜봐요. 만약 그중 누군가가 흑마법사라면, 궁지에 몰리고 있으니까 절 죽이려고 하거나 뭔가 준비하고 있겠죠. 티가 날 거예요.”
이저드는 움찔, 얼굴을 굳혔다.
이저드가 아델라와 떨어져 있는 시간에는 그녀의 곁에 항상 호위가 붙어 있고 그외의 시간엔 자신이 지키니 아델라가 암살을 당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죽는다는 이야기에 이저드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분명 그런 미래가 오지 않게 하려고 이 판을 뒤집을 작정이지만, 그때까지 흑마법사가 얌전히 있어 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린다 경도 그쪽을 염두에 두고 있다더군. 왕의 동태도 살피기로 했네.”
아델라는 그런 날이 안 오기를 바랐지만, 만약 왕이 나선다면 자신은 어찌해야 할까 고민했다. 왕은 아델라가 회귀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전면에 나선 적이 없었다. 그런 왕이, 만일 이 일에 끼어든다면…… 어떤 형태로일까?
“그대는 일단, 흑마법을 푸는 것에만 집중하게. 걱정하지 말고 린다 경과 나를 믿게.”
아델라가 고민에 빠져 있자, 이저드가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아델라는 자신의 손을 감싸 주는 그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이저드는 그런 아델라를 보며, 예상보다 좀 더 빨리, 좀 더 확실하게 일을 진행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럴 이유가 생겼다. 그는 내일 아침 일찍부터 할 일들을 머릿속에 새겼다.
당장에라도 아리스의 잔소리가 귓가로 날아들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저드는 살짝 미소 지으며 결심을 굳힌 눈으로 천장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