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부 4장-1. 그녀는 풀고 싶다 (6/17)

1부 4장-1. 그녀는 풀고 싶다

“그러니까, 시전자를 죽이면 끝 아니야?”

사실상 아는 방법 중에 남은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힘으로 누르는 방법은 아델라한테 무리인 것처럼 보였다.

흑마력을 늘려서 시도해 보는 방법도 있긴 했지만, 그 방법만큼은 쓸 수 없었다. 왜냐하면 흑마력을 늘리는 방법 자체가 아주 비인간적이기 때문이었다.

흑마법사가 ‘남의 불행을 먹고 자라나는 이들’이라고 불리는 건 말 그대로의 뜻이었다. 그들은 누군가의 불행을 먹고 자신의 힘을 채우는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방법은 바로 죽음에서 오는 극한의 공포, 절망, 좌절 같은 불행한 감정들을 자신의 힘으로 치환시키는 것이었다.

이저드한테 흑마법을 쓴 누군가가 있다면 그는 아마 수없이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살인마일 터였다. 이저드의 주변을 맴돌면서 웃는 낯으로, 아무렇지 않은 듯 어울린 누군가가 살인자일 것이라 생각하니 아델라는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게…… 간단하면서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할까요?”

“응?”

고민하는 아델라를 모두가 빤히 보았다.

“뭐가 고민인데? 아, 요?”

죽이면 끝 아닌가, 라고 했던 린다가 반말을 썼다가 존댓말로 정정하며 의아하게 물었다.

“가장 가까운 이부터 의심해야 하잖아요. 최소 2, 3년 이상 오래 어울린 사람들 중에 있을 거예요.”

표정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알게 모르게 긴장감이 맴도는 사람들을 힐끔 보던 아델라는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탁자 끝에 고정한 채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가까운 사람들을 의심한다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괜히 애먼 사람 잡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병사들 사기 문제도 간과할 수 없어요.”

“흑마법사끼리는 그런 거 없어요? 기를 읽는다거나?”

헤이든이 물었다. 아델라는 안타깝지만 불가능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흑마법사라고 일반인과 특별히 다르진 않아요. 다만, 확인할 방법이 있긴 하죠.”

궁금증 가득한 시선들이 아델라에게 향했다.

일반인과 다를 바가 없다면 어떻게 그 많은 흑마법사가 과거에 죽어 나갈 수 있었는지도 궁금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아델라는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도 신경 쓰였다.

“표식이요. 흑마법을 쓰면, 표식이 생긴다고 들었습니다.”

“너도? ……아니구나. 영애도?”

그동안 반말이 더 입에 붙었기 때문에 린다는 무심코 또 반말을 써 버렸다.

“그냥 편하게 부르세요.”

“앞으로 편하게 못 부를 위치에 설 테니까 지금부터 바꿔야지. 그래서요?”

아델라는 자신한테 존대하기 시작한 그녀의 스승이 매우 어색했다. 물론 아델라가 공작 부인이 되면 호칭을 바꿔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한순간에 바뀐 지위라서 쉬이 적응하기 힘들었다.

“아, 전 없습니다.”

“없다니요? 흑마법사 모두가 생기는 게 아닙니까?”

헤이든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모두가 생겼다면, 전 10년 전 마녀사냥 때 죽었겠죠.”

“그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흑마법을 써야 생깁니다.”

아델라는 사람들한테 설명하면서 과연 이것이 확실한 정보인지 조금 헷갈렸다. 자신은 흑마법을 썼음에도 표식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연 이 경우를 특별한 경우로 두어야 하는 걸까? 단순히 자기 자신한테 건 흑마법이 ‘보통’의 범위에 들지 않아서 안 생긴 건지, 아니면 다른 변수인지 아델라는 판단할 수 없었다.

“아아, 그럼 아델라 님 몸에 표식이 없는 건 흑마법을 안 써서?”

“음……. 그것도…… 확실치가 않습니다.”

아델라는 곤란한 얼굴로 린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을 보아하니 썼는데 안 생긴 것 같았다. 그렇다는 건 변수는 얼마든지 있다는 말이었다.

“썼는데, 안 생겼다?”

린다가 아델라의 뒷말을 파악하고 묻자,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책에는 확실히 흑마법을 쓰면 표식이 뜨고, 쓰면 쓸수록 더 짙어진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전…… 아니었어요.”

“달리 짚이는 점은 없나?”

린다와 아델라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이저드가 입을 뗐다.

“예외라고 한다면, 책에는 나와 있지 않은 방법을 쓴 겁니다.”

“그대한테 건 것 말이군.”

“네.”

아델라가 자신한테 흑마법을 써서 계속 회귀하는 사실을 아는 이저드는 단번에 알아들었다.

“자기한테 흑마법을 걸 수 있어? 요?”

둘의 대화로 대충 맥을 짚은 린다가 신기한 눈으로 아델라를 보았다.

“저도 몰랐는데, 되더라고요.”

아델라도 처음에 살려 달라고 엉터리 흑마법을 부렸을 때는 한 번 흑마법을 건 걸로는 표식이 뜨지 않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뒤로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회귀했는데도 표식이 뜨지 않았다. 아델라가 계속 회귀를 하고 있다면, 그때의 흑마법이 계속 발동 중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언제고 표식이 떴어야 했다.

그런데 아델라의 몸 어느 구석에도 표식은 뜨지 않았다. 아델라는 지금도 왜 표식이 뜨지 않는 건지 몰랐다.

그냥 막 아무렇게나 사용해서 그런가? 아니면 대가를 치르지 않아서? 그것도 아니면 스스로에게 써서? 하고 온갖 추측만 할 뿐이었다.

아델라는 표식이 안 뜬 이유를 찾아보려고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런 아델라를 세 사람은 조금 놀란 듯 보았다.

이저드를 제외하고 그곳에 있던 헤이든, 린다, 아리스 이 세 사람은 항상 씩씩한 아델라가 흑마법을 쓸 정도의 일이 발생했었다는 것에 놀랐다. 그러나 그들은 곧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럼 일단 아델라, 아. 영애의 경우는 예외로 합시다. 우리가 범인을 찾아도, 찾아도 찾지 못하면 그 문제를 다시 생각해 봐요.”

린다의 말에 아리스가 동의하며 말했다.

“그게 좋겠습니다. 전 책에 실마리가 없나 해석해 보겠습니다.”

대화를 듣고 있던 헤이든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보았다.

무엇보다 흑마법사를 찾는 게 우선이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헤이든은 우선 흑마법사를 알아내는 방법을 물었다.

“근데, 표식은 어떤 식으로 나타난답니까? 몸에?”

“몸 어딘가에 나타난다고만 알지, 어떻게 알 수 있는지는 전 잘 모릅니다. 저희 어머니는 제가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아델라는 친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았다. 열한 살짜리 꼬마는 어머니를 잃은 충격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거의 대부분의 기억을 머릿속에서 지운 상태였다.

“책에 나와 있지 않았습니까?”

“문신처럼 나타난다고만 들었습니다.”

아리스는 아델라가 해석을 부탁한 흑마법서라는 책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해석해 보고 정보를 공유하죠.”

관건은 책에 얼마나 많은 정보가 들어가 있냐는 건데…….

“그럼 무턱대고 찾기도 그러네요? 영애의 말처럼 아무나 의심할 수도 없고.”

린다는 김빠진다는 표정으로 소파에 몸을 푹 뉘었다. 잡아서 죽인다. 이렇게 간단한 일이면 세상 얼마나 편할까.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니 서로 의심만 키워서 좋을 건 없지. 헤이든 경과 린다 경은 주변 경계를 더 강화하게. 문신 같은 표식도 눈대중으로 찾아보기만 해.”

이저드의 명에 소파에 푹 몸을 가라앉혔던 린다가 허리를 곧게 펴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 린다를 귀엽다는 듯 보던 헤이든도 얼른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리스 경도 마찬가지로 조심하게. 시간은 얼마나 걸리겠나?”

“어휘 구성을 봐야 하겠지만, 일주일 안에 끝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부탁하네.”

아리스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남은 건…….

모두의 시선이 아델라한테 향하는 중에, 아델라는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었다.

“아델라.”

“예? 네?”

“무슨 생각을 그리하나?”

“아! 아니, 어쩌면……. 표식이 어디에 어떤 식으로 뜨는지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기억…… 말인가?”

이저드의 걱정 어린 눈빛에 아델라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제 과거는 아무리 기억해 내려고 해도 힘들 겁니다. 대신! 저 말고…… 있잖습니까.”

애증의 핏줄이.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죠. 그 인간은.”

“레널드 부기사단장한테요? 그 사람이 알려 줄까요?”

헤이든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만일 흑마법사가 왕이 보낸 스파이라면 그런 고급 정보를 쉽게 알려 줄 리 없었다.

“알아낼 방법이 있습니다. 되든 안 되든 물어는 봐야죠. 표식을 알면 찾기도 더 쉬울 거고, 다른 분들의 피해도 줄일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는 건지, 아델라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리고, 저한테는 알려 줄 겁니다. 인간이라면 말이죠.”

아델라는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레널드한테 달려가 그의 머리털을 다 잡아 뽑고 싶었다.

‘그래, 인간이라면!’

아델라가 이를 악물었다.

‘지금 흑마법의 ‘흑’자만 들어도 자지러져서 울던 나한테…… 흑마법이 잘 발동하는지 확인하라고 스파이 짓을 시켰겠다? 날 냅다 버리고 간 것도 모자라서! 이 오라버니가 미쳤네?’

지금이야 주변의 도움으로 많이 극복했지만, 어릴 때의 아델라는 정말 심각할 정도로 흑마법을 싫어하고 무서워했다.

워낙 어릴 적부터 어머니한테 조심하라는 소리를 들어서 흑마법에 거부감이 강하기도 했고, 어머니가 흑마법사로 마녀사냥을 당해 돌아가셨으니 그 충격으로 더 싫어하고 두려워한 건 당연했다.

그런 아델라의 10년 전 모습을 아는 레널드가 동생한테 흑마법이 잘 진행되는지 확인하는 일을 시켰다. 그저 이상 현상만 확인하면 돼, 라고 해 놓고선.

알고 봤더니 흑마법의 진행 상황을 보고하라는 거였다. 그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된 아델라는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가 있는지.

‘오기만 해 봐. 뼛속까지 탈탈 털어 줄 거야. 네가 정보를 안 뱉어 내고는 못 배기게 해 주지!’

아델라는 레널드를 불러서 뼛속까지 탈탈 털 생각을 했다. 그러자 아주 조금은 화가 풀리는 것도 같았다.

반짝이는 아델라의 눈동자를 본 린다와 이저드는 믿음이 가면서도 불안했다. 왜인지 그녀가 평범한 방법으로 레널드에게서 정보를 캐낼 것 같지 않았다. 둘의 예감은 거의 확신에 가까웠다.

* * *

헤이든과 린다, 아델라가 각자 할 일을 하러 돌아간 이저드의 집무실에는 아리스만 남았다. 이저드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할 말이 있나?”

“예.”

이저드가 말해 보라는 듯이 그를 지긋이 보았다. 아리스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굳은 얼굴을 하였다.

“각하께, 거짓말을 했습니다.”

“알아. 해석에 대한 거 말이지.”

“예, 사실 며칠 안에 끝냅니다.”

“그러한데?”

이상하게 아리스가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무슨 일이기에 저러는지 이저드는 궁금했다.

“저, 며칠만 성을 비우겠습니다.”

휴가를 내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성을 비우겠다는 것은 아무도 모르게 어딘가 먼 곳에 다녀오겠다는 뜻이었다.

이저드는 그의 흔들림 없는 진한 흑안을 빤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경이 좋을 대로.”

이저드는 묻고 따지지 않고 바로 대답을 줬다. 아리스를 믿는 건지, 아니면 뭘 하든 상관없는 건지 그는 담담했다.

“일주일 안에 꼭 돌아오겠습니다. 해석도 그 안에 하겠습니다.”

“누누이 말했지만, 경의 의지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하게. 그럴 수 있네.”

아리스는 아까보다 조금은 밝아진 표정으로 일어서서 고개를 숙였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는 이저드의 집무실을 나와 자신의 숙소로 돌아가 짐을 쌌다. 전서구는 벌써 곳곳에 보냈고, 가까운 도시로 향하면서 정보를 받으면 됐다. 간단하게 짐을 싸는 그에게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꼭 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 같았다.

그가 이렇게 무리해서 일정을 뺀 이유는 다름 아닌 아까 낮에 아델라와 한 대화 때문이었다. 아델라한테는 미안했지만, 그는 확인해야 했다. 확인하고 싶었다.

‘아델라의 친구 루’가 아닌, 그냥 ‘루’라는 인물 자체를.

* * *

레널드는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말이 지금 상황에 딱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방금 막 아델라의 전서구를 받고 앞뒤 볼 것 없이 휴가를 쓰고 짐을 챙겼다. 간단한 짐을 싸는 내내 레널드는 미친 사람처럼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아니야, 하하핫, 하며 중얼거렸다. 급한 마음에 자꾸 손이 미끄러졌다.

‘되는 일이 없네.’

아델라의 전서구를 다시 확인하고 싶었지만, 안의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증거 인멸이랍시고 모두 태워 버렸다.

‘이, 인 것 같아, 라고 했지? 아닌가? 이야, 라고 했나?’

레널드는 편지 내용을 더듬으며 빠르게 숙소에서 나와 왕실 기사단 건물을 지났다.

“―님! ―장님! 부기사단장님!”

막 기사단 건물을 빠져나올 즈음에 왕실 기사복을 입은 누군가가 레널드를 부르며 뛰어왔다.

레널드는 인상을 쓰며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멈췄다. 누가 봐도 나 바쁘니 용건만 말하라는 얼굴이었다.

“손님이 찾아오셨는데요.”

“손님? 누구?”

“그, 레널드 경의 아버지요.”

아버, 까지 듣자마자 레널드의 표정은 아까보다 더 심하게 구겨졌다.

왜 하필 이때? 아니, 왜 온 거야. 돈인가? 돈이겠지. 그래, 돈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빚 안 갚아 줄 걸. 아니지, 안 갚아 줬으면 공작한테 가서 드러누웠겠지.

정말 이래도 골치, 저래도 골치 아픈 사람이었다. 아버지만 아니었으면 깔끔하게 치우는 건데.

“나한테 아버지는 없으니 돌려보내.”

“예? 아니, 저기, 레널드 경!”

레널드는 단칼에 대답하고는 다시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였다.

“저, 저기요! 레널드 경! 그, 저도 돌려보내고 싶은데, 경 아버지 다리가!”

기사단원의 말에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다리가?”

“두, 두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그런 상태로 여기까지 힘들게 오셔서……. 그냥 돌려보내기가 좀 그랬습니다.”

그 인간이 이제는 어디 가서 맞고도 다니나? 하긴, 맞을 만하지. 맞아도 싸.

레널드는 며칠 전 이저드한테 받은 자기 아버지의 만행 기록이 생각나 짧게 혀를 찼다. 안 죽고 살아 있는 게 용했다.

“후……. 안내해.”

정말 죽기보다 보기 싫은 인간이었다. 하지만 집안 문제는 해결해도 집안에서 해야지 괜히 골치 아프게 밖으로까지 새어 나가게 할 순 없었다.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도움이 안 돼.’

레널드의 미간이 절로 좁혀졌다. 그는 자신이 없는 왕궁에서 혹시라도 사고를 칠 벨제프 자작이 떠올라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버지를 얼른 돌려보내야 뒤가 찝찝하지 않았다.

* * *

접견실 안에는 정말로 두 다리를 칭칭 동여맨 벨제프 자작이 떡하니 앉아 있었다. 그 와중에 돈은 어디에서 났는지 자작의 옆에는 그를 지키는 하수인이 둘이나 붙어 있었다. 레널드가 안으로 들어오자 벨제프는 환하게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레널드는 잔뜩 굳은 얼굴로 그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아들이나 딸이나 이렇게 예의가 없어서야. 쯧쯧.”

인사도 없이 앉은 레널드가 못마땅한 벨제프 자작은 혀를 끌끌 찼다.

“왜 오셨습니까. 제가 수도에 올라오시지 말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아비가 아들도 못 보러 오느냐! 이놈이나 저놈이나!”

벨제프 자작이 버럭 소리를 치자 레널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사람은 왜 변한 게 하나도 없지.

“저와 분명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돈을 받는 대신에 자작가 주변을 벗어나지 않겠다고요.”

“지금 나보고 옥살이를 하라는 거냐!”

“모르셨습니까? 그러라고 준 돈인데.”

“뭐, 뭐!”

아델라나 레널드나 자신의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는 똑같았다. 찬바람이 쌩쌩 날리는 레널드의 태도에 벨제프 자작은 뒷목을 잡으려다 심호흡을 깊게 했다.

아델라가 자신한테 그렇게 대들었는데, 레널드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넌, 아비가 이렇게 된 것은 보이지 않느냐?”

“봤습니다. 됐죠?”

“익! 이게 누가 이런 건줄 아느냐!”

누가 그런 거면 어떻겠는가. 레널드는 아무 관심 없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제가 바빠서 넘어가겠지만, 오늘처럼 제 말을 듣지 않으시면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억지로라도 가두는 수밖에.

괜히 시간만 버렸다는 생각에 레널드는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아버지라고 고개는 잠깐 까딱여 줬다.

벨제프는 자신한테 어떠한 관심도 없는 레널드를 기가 막혀서 보다가 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델라가 그랬다!”

여동생의 이름이 나오자 레널드는 아주 잠깐 멈칫했다. 하지만 그게 자신을 잡으려는 수단 중 하나라는 것을 알아채고 정색했다.

“증거, 있습니까?”

“뭐?”

“아델라가 아버지의 다리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증거요. 어디 가서 이상한 사람한테 맞고, 애먼 사람 잡는 거 아닙니까?”

그 말이 정답이었다. 하지만 벨제프 자작은 목소리를 더 크게 냈다. 이 또한 그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증거? 그 아이가 바로 증거지! 내가 이렇게 된 건 모두 그 아이의 저주 때문이다! 갑자기 그 아이의 팔자가 바뀐 것도, 다 걔가 주변 사람들한테 삿된 술수를 쓴 게야! 난 혹 너한테도 걸었나 걱정되어 왔더니! 이런 배은망덕한 것!”

레널드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물론 자작에게 감동했다던가 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자작은 아델라를 빌미로 돈을 더 뜯어내려고 했으면 했지, 아들을 위해 이곳에 올 리가 없었다. 레널드는 그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레널드가 놀란 표정을 지은 이유는 아델라가 ‘저주’를 부렸다는 말 때문이었다.

“역시 너도 모르고 있었던 것 같구나. 나도 얼마 전에 아델라를 만나러 갔다가 알았다.”

아델라를 만나러 간 게 자랑인가. 아델라와 자신의 소식을 알아내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했는데.

레널드는 일단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번 계획은 실패하면 안 되는 일이었다. 잘못하면 자신이 여태까지 쌓아 올린 명예가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그렇기에 골치 아픈 모든 일을 배제하고 오직, 이저드 하나에만 집중해야 했다. 그래야 아델라가 살고, 자기가 살았다.

레널드의 목표는 이 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해서 앞으로 절대 이 자리가 흔들리지 않는 거였다. 진급까지 하면 금상첨화였고, 진급이 되지는 않더라도, 퇴직할 때까지 이 궁에 무사히 붙어 있는 게 가장 큰 목표였다.

그런데 그 목표를, 다른 누구도 아닌 아버지라는 자가 망치려고 하고 있었다.

“망상도 작작하시죠. 아델라는 흑마법사가 아닙니다.”

“흥! 내가 그 아이 입으로 들었다! 흑마법사라고, 자길 잡아가 보라고! 표식이 없으니 날 아무도 안 믿어 줄 거란다! 악독한 것.”

“그랬겠죠. 아버지는 도대체 애한테 어떻게 했기에, 그 여렸던 애를 그렇게까지 변하게 합니까? 이번에도 아델라를 몰아세우셨죠? 항상 그랬던 것처럼. 아델라 입에서 그런 거짓말이 나올 정도로!”

레널드의 계획에서 지금의 아델라는 무조건 흑마법사가 아니어야 했다. 아버지의 망상 혹은 정신병으로 끝나야 했다. 아델라가 진짜 흑마법사인지 아닌지는 아버지와 헤어지고 가서 물어보면 되는 일이었다.

“무, 뭐, 뭘!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느냐! 딸 안부를 궁금해해도 안 되느냐! 공작한테 시집을 간대서, 잘 사나 보려고……!”

“잘 살면? 돈이라도 뜯으시게요?”

“이놈이!”

아들과 딸이 하나같이 입 모아 돈부터 이야기할 때는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벨제프 자작은 되레 화만 냈다.

“더 들을 필요도 없네요. 밖에 누구 있나?”

여길 나가서 아버지가 더 입을 놀렸다간 일에 지장을 줄 수 있었다. 레널드는 아버지가 더 이상 입을 놀리기 전에 빨리 대기하던 기사단원을 불렀다.

“예, 부르셨습니까.”

“지금부터 벨제프 자작을 자작가 저택에 구금한다.”

“예? 예에?”

“바, 방금 뭐라고 했느냐?”

레널드 빼고는 모두 멍하니 레널드만 바라보았다. 벨제프 자작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사실 거기 있던 그 누구도 레널드가 이런 명령을 내릴 줄 몰랐다.

“죄는, 전하의 명을 어긴 죄.”

“뭣!”

“제가 아버지와 한 약조는 전하의 명이었습니다. 아델라를 찾아가고 저를 찾아오고 게다가 저택에서 벗어난 것은 명백한 죄입니다. 반역죄로 옥에 안 집어넣는 것을 감사하시길.”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레널드가 기사단원들한테 고개를 까딱였다. 억지스러운 감이 있었지만, 기사단원들은 얼떨떨해하면서도 벨제프 자작에게 향했다. 왕의 명을 어긴 죄는 대역죄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왕실 기사단이 나서자, 그가 돈으로 산 하수인들은 꼼짝도 못 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 그들은 그저 돈 받고 호위를 해준 것밖에 없었다.

“들어.”

“그러게 전하의 명은 왜 어기셔서. 쯧.”

기사단원 중 한 명이 혀를 차며 하수인들한테 고갯짓을 했다. 하수인들은 순순히 왕실 기사단 말을 들었다. 기사단에 하수인들까지 합세하여 벨제프 자작을 달랑 들었다.

“이놈들, 이놈들이! 아이고! 다리가!”

그는 계속 소리치고 화를 내며 발버둥 쳤다.

“앞으로 제발, 말을 하면 들으십쇼. 죽는 것보단 나을 겁니다. 그리고 입조심하세요. 과거처럼 당하고만 있을 나이는 한참 지났습니다.”

벨제프가 나가기 전, 레널드는 다시 한 번 경고했다. 그의 표정은 처음과 다르지 않았다. 그 얼굴에서는 혈육의 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 * *

아델라는 레널드한테 전서구를 보낸 후, 그가 바로 온다는 답장을 받고 기분이 좋아졌다. 골탕 먹일 생각을 하니까 이렇게 기분이 좋아질 줄이야.

그녀는 진갈색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총총 뛰었다. 그러자 그녀를 따르던 하녀들이 뛰시면 안 된다고 잔소리를 해 왔다.

‘아 참,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가벼워져 버렸네.’

귀족들은 제약이 뭐가 이렇게 많은지. 신분이 귀족이어도 귀족답게 살아 본 적 없고 귀족다운 것이 뭔지도 잘 모르겠는 아델라한테는 이해할 수 없는 예절들이 많았다.

“어머, 영애! 허리가! 허리가 이게 뭐예욧! 여자의 생명은 허리! 이! 잘록한 허리! 그런데, 이게 뭔가요!”

“홉!”

이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허리가 뭐, 왜, 뭐.

태어나 살이 붙어 본 적이 없는 몸이던 아델라는 살 때문에 구박받기는 처음이었다. 초반에는 살은 없는데 근육이 많다며 구박받질 않나, 이번에는 허리에 살이 많단다.

“코르셋을 했는데도 어떻게 이럴 수가! 세상에! 아랫배가 나왔잖아요! 며칠 만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아니…… 코르셋 안 했는데…….’

사실 아까 코르셋이 너무 답답해서 화장실에 잠시 들른다고 하고 몰래 벗었다. 옷이 잘 안 벗겨지기에 화장실에 오래 앉아 있었더니 영애가 변비라고 어찌나 수선을 떨던지. 쪽팔려서 화장실에서 그냥 기절할까 고민했을 정도다.

그래도 아델라는 꿋꿋하게 코르셋을 빼서 몰래 숨겨 두고 나왔다. 변비로 오인당하는 것보다는 코르셋에서 해방되는 게 더 우선순위였다.

“오늘부터 식단을 반으로 줄……!”

“안 돼요. 밥은 절대.”

그녀를 가르치러 온 백작 부인은 단호한 아델라의 거절에 움찔했다. 네, 그럼요, 그렇게 하죠, 스승님 말씀이 다 맞습니다, 하며 항상 수긍하던 사람이 맞나 싶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제가 차라리 코르셋을 할게요. 밥은 안 돼요.”

“……?”

지금 코르셋도 안 끼고 그 허리가 나오는 거였……?

사실 요즘 백작 부인은 아델라의 작은 흠도 모두 꼬투리로 잡았다. 그녀가 후에 공작 부인이 되어 사교계에 진출하려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미래를 생각한다면 이보다 더한 비난도 아델라는 견뎌 내야 했다.

그래서 잡은 꼬투리였는데 알고 보니 코르셋을 안 했단다. 그런데도 지금 아델라의 허리는 가늘었다. 엄청 자세히 보지 않는 이상 코르셋을 했는지 안 했는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은 안 좋은 점을 찾아내야 하니 자세히 살펴본 거였지, 보통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칠 정도였다.

“지금…… 코르셋을 빼셨다고요?”

“어, 음……. 네, 죄송해요. 익숙하지 않아서. 절대 안 그럴게요. 알아채실 줄은 몰랐죠. 역시 백작 부인이세요.”

민망한 듯이 웃어도 아델라는 화사하게 아름다웠다. 가면을 쓰고 대하는 귀족들하고만 마주하다가 표정이 살아 있는 아델라를 만나니 백작 부인의 마음도 스르륵 풀렸다.

아델라의 한 번만 봐주세요, 하는 눈빛 공격에 홀랑 넘어갈 뻔한 백작 부인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이이! 어떻게 다 큰 숙녀가 코르셋을 벗을 수가 있어욧!”

“죄송해요! 절대 안 그럴게요! 그러니까 밥은 안 돼요?”

“밥 못 먹고 죽은 귀신이 붙으셨어욧! 식단 줄일 겁니다!”

“안 돼욧! 식단 줄이시면―!”

아델라는 백작 부인의 말투를 따라 하며 큰맘 먹은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처음 대드는 아델라를 보며 백작 부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주, 줄이시면?”

“줄이시면!”

왜인지 거기 있던 하녀들도 아델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다.

“몰래 먹을 거예요!”

정말로 밥 못 먹다 죽은 귀신이 붙었나……. 이 문제가 저런 결연한 다짐까지 보일 일인가?

하지만 아델라가 먹을 것을 포기할 수 없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배불리 먹어 본 적도 없는데 밥부터 줄이라니? 삼시 세끼 먹을 수 있게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펜베르크 성에서 욘제타를 만난 뒤에야 그녀는 밥이란 것을 제대로 챙겨 먹을 수 있게 됐다. 그러니 근 5년 정도 된 것이다. 그런데 밥을 줄이라니! 못 먹어 본 음식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아델라한테는 너무 가혹한(?) 처사였다.

“영애!”

백작 부인이 황당한 표정으로 아델라한테 소리쳤다. 아델라는 백작 부인의 따가운 시선을 피해 딴청을 부렸다.

“식탐은 다이어트의 적! 모르십니까!”

백작 부인의 불호령에 아델라는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다가 작은 목소리로 반박했다.

“……태어나서 다이어트를 해 본 적이 있어야 말이죠.”

이 말은 한 번도 살쪄 본 적이, 혹은 다이어트의 필요성을 느껴 본 적이 없다는 소리였다.

이 말속에는 아델라의 안타까운 어린 날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지만, 아델라의 과거를 모르는 사람들이 듣기에는 부러울 체질이었다. 살찔 걱정이 없는 몸임을 대놓고 말한 격이었다.

물론 아델라는 자신이 살이 잘 찌는 체질인지 아닌지 몰랐다. 그 정도로 먹어 보고 에너지를 쓰지 않아 봤어야 알지. 그 무엇도 할 수 없었던 아델라가 자신의 체질을 알 리가 없었다. 과거에는 못 먹으니 몰랐고, 최근에는 먹는 만큼 몸을 쓰니까 몰랐다.

이런 아델라의 사정을 알 리 없는 백작 부인은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왔다. 그녀는 아델라의 당당함에 할 말을 잃었다가 프로답게 정신을 차렸다.

백작 부인은 아델라 같은 류(?)가 왜 저렇게 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난 원래 태생적으로 안 찌는 체질이에요, 라고 말하는 영애들은 대부분 허세였다. 그녀들은 뒤에서 살이 찌지 않게 무던히도 애썼다.

“그러세요? 그럼 오늘부터 해 보시면 되겠네욧!”

백작 부인이 싱긋 웃으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러면 자신을 의심하던 보통의 영애들은 백이면 백 정말로 살이 안 찌는 기적을 맛본 뒤 자신을 믿고 따랐다.

그녀는 아델라도 곧 그렇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거…… 꼭, 먹을 걸 줄여야 하나요?”

“당연하죠!”

백작 부인은 그렇게 외치며 아델라를 보았다. 하지만 아까처럼 안 돼요! 할 줄 알았던 아델라는 의외로 침착해 보였다.

“참 안타까운 일이네요.”

아델라의 반응은 이뿐이었다.

백작 부인이 간과한 사실이 있다면 아델라는 진심으로 그녀를 피해서 몰래 먹을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백작 부인이 하녀들한테 신신당부하면 하녀들의 눈을 피해서라도 먹을 위인이었다.

아델라는 무언가를 먹으면서 이걸 먹으면 살이 찔까? 같은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이게 먹을 수 있는 건지 아닌지만을 따졌다. 때문에 아델라는 방금 막 강제로 시작된 다이어트는 안중에도 없었다. 오늘 야식은 욘제타가 준 간식이란 것만 생각했을 뿐이다.

“분명 그 계획 실패하실 겁니다. 영애 머릿속은 이미 몰래 먹을 생각으로 꽉 찼거든요.”

‘헉? 누가 내 머릿속을?’

아델라는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은은하게 웃고 있는 린다가 보였다.

“어라? 린다 경?”

“리, 린다 겨엉?”

백작 부인은 아델라가 부른 린다의 호칭에 의아한 표정으로 린다를 바라보았다. 린다는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와 익숙한 듯 아델라의 뒤에 섰다.

“예, 이곳에선 린다 경입니다. 오델리아 백작 부인.”

린다가 빙그레 웃자, 오델리아 백작 부인은 얼떨떨하게 그녀를 보았다. 반면, 아델라는 다른 의미로 놀라 린다를 쳐다보았다. 단순히 누군가의 말을 전하러 온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오늘 호위는 린다 경이에요?”

“예.”

“벤슨 경은요?”

설마! 며칠 전에 거짓말하고 호위병 다 떨어뜨리고 혼자 나가서 삐친 건……! 아니겠지. 당시에 별말 없었는데? 그리고 별로 그런 것에 연연해하는 사람 같지도 않았다.

“휴가.”

“휴가요? 오늘?”

“예, 며칠 전부터 휴가 신청해 놨던데. 헤이든 경이 바빠서 오늘 처리됐답니다.”

“혹시…… 삐친 걸까요? 삐치면 삐쳤다고 대놓고 말할 줄 알았는데!”

응? 갑자기 삐쳤다는 게 왜 나와?

린다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름 심각하게 고민하는 아델라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무슨 실수라도?”

“실수라기보단……. 그때 있잖아요. 제가 거짓말했을 때요.”

아델라가 거기까지 말하자 뜻을 알아들은 린다가 푸핫, 하고 소탈하게 웃었다.

“그런 걸로 삐칠 놈 아닙니다. 관심도 없을걸. 뭐랬더라. 연애 사업? 지도 이제 결혼을 해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나?”

린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벤슨이 휴가를 낸 이유는 완전히 개인적인 사정이었다. 만난 첫날 깨지고 만나고 깨지고 만나고를 반복하더니, 이제야 정신을 차린 건지.

“연애요? 벤슨 경, 애인이 있었어요?”

“애인은 거의 끊임없이 있었습니다. 한 달도 못 가서 그렇지. 요 몇 달 잠잠하다 싶더니.”

“전 전혀 몰랐어요.”

“몰랐다고? 몰랐다는 게 더 신기하다.”

린다는 황당한 표정으로 아델라를 보았고, 아델라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연인은 닮는다더니.”

“예?”

“각하나 너…… 아니, 영애나.”

“예엥?”

린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아델라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추파를 그렇―게 던져도 몰라요.”

“누가요?”

“진짜 몰라? 벤슨 경이 너만 쳐다본 거. 너 훈련장에서 밤늦게 훈련하던 때부터 쭉.”

이젠 거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되어 버린 이야기라 그런지 린다는 주변도 의식하지 않고 반말을 자연스럽게 했다.

“예에? 수작 부린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 뒤로는 딱히? 그게 꼬시는 거면 너무 근성이 없는데요?”

“항상 그런 식이야. 좀 꼬시다가 안 넘어간다 싶으면 바로 발 빼. 근데 외모도 준수하고 항상 웃는 상이라 여러 명 낚였지.”

확실히 처음 봤을 때, 보기 드문 미남이라고 생각하긴 했다. 아델라는 린다의 말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연애 사업이라는 게…….”

“응. 공들여 꼬실 여자가 생겼나 보지.”

사생활이라 린다는 그에 대해 별말은 없었다. 연애를 하건, 결혼을 하건, 일만 잘하면 됐으니까.

“그렇군요? 좋은 사람 만났으면 좋겠네요.”

“좋은 사람 만나면 뭐 하냐. 울리는데.”

“아……. 좋은 사람이 아까운 거였군요…….”

“누굴 만나든 내 알 바 아니지만, 불륜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과거에 전적이 좀 있어서, 라는 뒷말은 삼켰다.

벤슨이 여태까지는 나이가 있는 여성들을 선호했는데, 왜 이번에는 어린 아델라한테 추파를 던졌을까. 린다는 뒤늦게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아델라가 나이 불문, 국적 불문, 성별 불문, 호감이 갈 만한 사람이긴 했다. 특히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만한 저 외모가.

“설마요!”

“설마가 사람 잡을 때도 있으니까, ……요?”

린다는 뒤늦게 자기가 계속 반말을 쓰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녀에게 다시 존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황스러운 시선으로 자신과 아델라를 번갈아 보는 백작 부인이 신경 쓰여 아델라한테 눈치를 줬다.

린다의 시선을 받은 아델라는 곧바로 눈치채고 린다 쪽으로 돌렸던 몸을 바로 했다.

“죄송합니다. 궁금한 게 생겨서 잠깐. 수업 시작해요!”

“크흠, 큼! 그, 그러죠. 아까 말하다 끊겼는데. 식단 조절은 오늘 바로! 들어가도록 말씀드려 놓겠습니다.”

오델리아 백작 부인은 힘주어 말하며 아델라가 아닌 린다를 보았다. 린다가 이곳에 들어왔을 때, 백작 부인의 계획이 실패할 거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누구의 말이 맞는지 두고 보자는 시선이었다.

린다는 그녀의 따가운 눈총에 싱긋 웃었고, 다이어트 계획의 당사자인 아델라는 못 들은 척 딴청을 부렸다. 둘의 반응에 백작 부인은 기필코 성공하겠다고 다짐했다. 그 다짐은 얼마 안 가 산산이 조각나지만.

* * *

“그래서?”

“먹을 거 이야기했더니 군것질을 하고 싶더라고요.”

정확히 말하면 먹을 것을 이야기한 게 아니고, 다이어트를 이야기했지만.

“그런데?”

“그런데…… 못 먹었어요!”

아델라는 이저드의 품에 안긴 채 꽤 억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솔직히 여기까지 들었을 때 이저드는 마른 편인 자신의 연인한테 살을 빼라고 했다는 것에 화가 났지만 꾸욱 참았다. 할 말이 많아서 입을 계속 움직이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기 위함이었다.

“우씨, 욘제타 아주머니표 간식도 어떻게 찾았는지 싹 가져가더라니까요?”

부인이 욘제타가 만든 간식을 모두 가져갔다는 사실에 아델라는 가장 크게 좌절했다. 두고두고 먹으려고 아껴 뒀는데!

“디저트 있는 티타임도 안 된대요! 식단도 조절해야 하고.”

“그래서…… 여태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나? 오늘 내내?”

호위병 훈련을 맡았기에 이저드는 오늘 내내 아델라와 함께하지 못했다. 이 사실을 알았다면 모두 물렸을 텐데.

아델라는 그의 품에 안긴 채 고개를 쏙 빼서 씨익 웃었다.

“제가 순순히 그럴 리가요. 백작 부인 계획을 깨서 죄송하지만, 전 못 먹는 건 견딜 수가 없어요. 차라리 힘들게 운동을 하라고 하면 했지.”

역시 아델라는 아델라였다.

“아까 군것질을 못 했다는 건 뭔가?”

“말 그대로 간식은 못 먹었어요. 다 어디다 치웠는지 못 찾겠더라고요.”

이저드가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긴 것은 그녀가 제대로 끼니를 챙겨 먹었다는 점이었다. 그렇다고 이 일을 그냥 지나칠 생각은 아니었지만.

“아델라.”

“네?”

도대체 이 몸에 어디가 뺄 살이 있다고 다이어트를 하라는 걸까? 요즘 들어 이저드에 대한 걱정 때문에 밤잠도 설쳐서 걱정인 판국에?

이저드는 아델라가 여기서 더 살이 빠지면 어쩌나 심히 걱정됐다. 아침, 저녁으로 좋은 음식만 먹이려고 카일에게 아델라의 식사에 만전을 기하라고 명령을 해 뒀을 정도였다.

“지금 졸리나?”

“아직요?”

“곧 잘 것 같나?”

“아니요? 바로 자면 안 되죠!”

오늘도 어김없이 나타날 이저드의 이상 행동을 봐야 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떤 현상으로 번지는지 알아야 나중에 흑마법서를 해석하더라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이저드는 안 그런 척하지만 걱정하는 낯빛이 퍼지는 아델라의 얼굴을 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도 함께 몸을 일으켜 주었다.

“그럼 나와 잠시 걷겠나?”

이저드의 물음에 아델라는 환하게 웃었다.

“전 좋아요!”

그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아델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 함께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는지 안 묻나?”

“각하랑은 어디든 좋아요. 저희, 이렇게 밤 산책하는 건 처음이잖아요.”

훈련을 받기 위해 밤에 만난 적은 있어도 밤에 같이 어디를 돌아다녀 본 적은 없었다. 또한 요 며칠 둘 다 바빠서 밤에는 잠을 청하는 게 전부였다.

“그대가 아까부터 원하던 곳으로 가지.”

“제가요? 아까?”

아까라고 하면 군것질 이야기밖에 안 했다. 아델라는 궁금한 표정으로 이저드의 팔짱을 꼈다.

“가지.”

어디로 가자는 건지 아델라는 아직도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그의 부드러운 에스코트를 받자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복도를 둘이 걷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했고 좋았기 때문이다.

* * *

“으음― 맛있는 냄새! 되게 고소한 냄새가 나요!”

두 사람의 침실이 있는 저택을 벗어나 조금 더 걷자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아델라는 이저드를 따르며 고개를 살짝 들어 배고파서 한껏 예민해진 후각으로 음식 냄새를 캐치했다.

“이상하군.”

“뭐가요?”

“이 시간에 음식을 할 일이 없는데.”

내일 특별히 무슨 날도 아니었다.

이저드와 아델라의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둘은 큰 식료품 창고가 있는 건물 앞에서 멈췄다. 창고 옆 주방에는 밝은 불빛과 함께 왁자지껄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거 너무 맛있다, 얘! 너도 먹으면서 해.”

“어휴, 우리 예비 마님은 이거 못 드셔서 어떡해요. 이렇게 맛있는데.”

“그래서 아까 점심에 계속 주방장님 붙잡고 어딨냐고 물어보던데요?”

“나 같아도 이거 맛보면 달라고 하겠다.”

“백작 부인이 너무했네! 우리 예비 마님 뺄 곳이 어딨다고.”

“맞아요. 오히려 쪄야 되는데. 그나저나 이건 도대체 어디서 팔까요?”

“귀족 영애신데, 어디서 비싸게 가져왔나 보지.”

“이걸 다 버리라고 한 백작 부인도 대단하네요…….”

‘아? 잠시만. 이거 내 이야기 같은데.’

요리하며 수다를 떨던 하녀들은 보자기에 고이 싸인 욘제타표 간식을 연신 칭찬하며 아주 맛있게 먹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장면을 아델라는 입을 벌리고 멍하니 보았다.

“귀족들의 세계는 정말 모르겠다니까요. 이 맛있는 걸 못 먹고 살……!”

“귀족들은 더 맛있는 걸 먹겠……!”

“뭐야? 왜 다들 말을 하다 말아? ……헙!”

그들은 주방 문 앞에 서 있는 이저드와 아델라를 이제야 보았다. 아델라는 이저드의 뒤에서 빠끔히 얼굴을 내밀었다.

‘저 보자기는! 역시 내 간식!’

“내 거!”

아델라가 충격 받은 얼굴로 간식 보따리를 보자 한쪽에서 간식을 먹던 하녀들도, 다른 쪽에서 요리를 하던 하녀들도 모두 바닥에 엎드렸다.

“가, 각하! 아델라 님!”

‘으응?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아델라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을 보았다.

“죄, 죄송합니다! 주무시는데 방해가 될 줄은 몰랐어요!”

주방에서 침실까지의 거리는 절대 가깝지 않았다. 이곳에서 무언가를 만든다고 잠을 자는 데 방해가 될 리 없었다. 하지만 하녀들은 생전 주방까지 온 일이 없는 이저드를 봤다는 사실에 너무 놀라서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방해가 돼서 온 게 아니네. 다들 일어서게. 이러지 말라고 일렀는데. 나한테 이 상황만 알려 주면 돼.”

이저드가 차분하게 입을 열자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나둘 얼굴을 드는 이들 중에 유독 눈에 띄는 누군가를 발견한 아델라는 멍했던 정신이 돌아왔다.

“어어? 제니트 씨?”

“헉.”

마티나의 하녀였지만 아델라와 공범이었던 제니트는 마티나가 그렇게 된 후로 보이지 않았다. 저택의 어딘가에서 일하고 있다고만 알았지, 정확히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는 잘 몰랐다. 좋은 상황으로 엮인 인연이 아니어서 굳이 찾아 나서지도 않았다.

제니트도 좋은 일로 엮인 게 아니고, 목숨이 왔다 갔다 했던 판이었기 때문에 아델라를 찾지 않았다. 새로 들어온 약혼녀가 아델라라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우와, 제니트 씨. 오랜만이에요! 여기 계셨어요? 어쩐지 안 보인다 했어요!”

모두의 시선이 제니트한테 쏠렸다. 제니트는 자신한테 쏠린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어깨를 움츠렸다.

마티나한테 휘둘린 이후로 그녀는 주목받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이곳에 오게 된 것도 그녀가 시종장한테 사정사정한 것이었다. 귀족들과 마주치지 않는 곳으로 옮겨 달라고.

그런데 운명의 장난인지, 같이 휘말렸던 아델라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마티나를 다시 만나는 것보다야 낫지만, 이젠 아델라도 귀족 영애 중 한 명에 지나지 않았다.

“오, 오랜만이에요, 아델라 님.”

“저도요!”

아델라는 그래도 공범(?)이었던 제니트를 다시 만나 기뻐 보였다. 안 좋게 엮이긴 했지만, 서로한테 안 좋은 감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와 달리 제니트는 대단히 어려운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어렵게 말을 꺼냈다.

“아……. 죄송……합니다. 저희가 이걸, 먹어서……. 버리는 건 줄 알고…….”

아델라는 예전과 달라진 제니트의 태도가 걱정스러우면서도 씁쓸했다. 자신의 자리가 실감이 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델라는 보자기를 힐끔 보고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사람이 일하다 이것저것 먹을 수도 있지, 뭐. 맛도 제대로 못 봤는데 홀라당 사라진 건 슬펐지만 그렇다고 버리라고 줬다는 걸 일하다 간식으로 먹은 이들을 탓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제니트를 포함한 다른 하녀들이 너무 안절부절못해서 마음이 쓰였다.

“괜찮아요. 누가 먹었든 버리는 것보단 낫잖아요? 그런데 지금 뭐 만드시는 거예요?”

아델라는 자연스럽게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간식은 나중에 아몬 것을 뺏어 먹어야지, 하고 다짐하며.

이저드와 아델라의 눈치를 보던 이들이 아델라의 미소에 한숨 돌린 듯 아주 살짝 긴장을 풀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지금 주방의 총책임자로 보이는 하녀가 아델라의 물음에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 화들짝 놀라 이저드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고개를 숙이고 아까 이저드가 말한 이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일 있을 정기 훈련을 미리 준비하느라 주방을 쓰고 있었습니다. 새벽에는 할 게 너무 많아서요.”

“비상 훈련을 말하는 건가?”

아델라와 제니트의 재회를 가만히 보고 있던 이저드가 하녀한테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예.”

어디서 명이 잘못 전해진 듯했다. 이번 정기 훈련은 취소된 상황이었다. 아리스가 자리를 비웠기도 하고, 곧 있을 전쟁을 위해 능력 테스트로 대신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도 상급 수비병들한테만 해당되는 내용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많은 양의 음식은 필요 없었다.

“전해지지 않은 모양이군. 이번 정기 훈련은 취소됐네.”

“네?”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잠을 줄여서 일부러 만들러 나온 거였는데! 그들은 벼락 맞은 기분으로 자리에 서서 이저드를 쳐다보았다.

아델라는 그들의 기분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왕창 만드느라 이 고생을 했는데, 손님이 별로 없을 때의 그 기분이란.

“정기 훈련은 취소됐지만, 수비병들과 호위병들은 똑같이 훈련하러 나오니 내일 아침으로 하지.”

이 많은 걸 어떻게 처리하나 고민할 새도 없이 이저드가 먼저 해결책을 말했다.

“하지만…… 평소 수비병들 아침은 저희 쪽이 아니라 수비병 쪽에서 따로 만들 텐데요?”

“그쪽은 점심, 저녁을 우리 쪽으로 제공하면 되니까 걱정 말게.”

이저드의 말에 요리를 만들던 이들은 한시름 놓았다. 힘들게 만든 먹을 것을 그대로 다 남길 뻔했다. 아깝게.

“저기…….”

아델라가 작게 이저드와 보고를 하던 하녀를 부르자 둘의 시선이 그녀한테 돌아갔다.

“해결된 거죠?”

“그래.”

“그럼 저…… 요리 맛봐도 돼요?”

아델라의 초롱초롱한 눈빛이 현재 이곳을 책임지고 있는 하녀에게 향했다. 하녀는 아델라의 눈빛 공격을 받고 당혹스럽게 이저드를 쳐다보았다.

“괜찮겠나?”

“예, 옛?”

그녀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했다. 귀족들이 먹을 만한 고급 음식은 아니었다. 혹 먹었다가 탈이라도 나면…….

“주, 주방장을 따로 불러오겠습니다. 두 분이 드실 만한 걸 만들어서…….”

“여기 먹을 게 이렇게 많은데, 굳이 왜 또 만들어요? 아! 혹시 제가 먹으면 양이 부족한가요?”

“아, 아니요. 양은 넉넉히 만들어서 괜찮은데…….”

하녀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아델라의 반응에 더 당황했다.

“그럼, 괜찮겠군. 실례하지.”

이저드가 먼저 하녀를 지나쳐 주방 안쪽으로 들어갔고, 그를 아델라가 뒤따랐다. 둘이 너무 자연스럽게 주방 안쪽으로 들어가서 다른 이들은 한동안 뭐가 잘못된 건지 생각할 수가 없었다.

주인 부부 둘 다 이런 누추한 곳에서 뭔가를 먹겠다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곳에 왔다는 것 역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저, 저, 각하! 저희가……!”

“어! 이거 감자죠? 감자 찌는 거죠? 냄새가 감자예요!”

“네넷?”

당황스러워서 아까부터 계속 말을 더듬게 됐다.

공작가에서 일하기를 십 년.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만, 오늘처럼 당황스러운 적은 처음이었다. 아델라는 잘 모르니 그렇다고 쳐도, 이저드가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저 이거 먹어 봐도 돼요?”

“예…… 엣?”

그녀가 대답도 하기 전에 이저드가 솥에 손을 가져가는 것을 본 하녀 포함 모두가 화들짝 놀라서 그를 말렸다.

“제, 제가 하겠습니다!”

“저희가 할게요!”

그들은 이저드의 손이 데이기라도 했을까 봐 호들갑을 떨며 막무가내 주인 부부를 막아섰다.

“의자! 의자 마련해, 얼른! 아, 아니지. 방에 가 계시면 저희가 가져다드릴게요!”

멀뚱히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아델라와 이저드보다는 우왕좌왕하는 주방 사람들이 더 위험해 보였다.

“잠시, 잠시 멈추게.”

멈추라고 동작 그만! 하라는 소리는 아니었는데.

다들 처음인 상황이라 잔뜩 긴장해서 이저드의 멈추라는 소리에 우왕좌왕하던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렇게 마주쳐서 불편하게 만들 생각은 아니었다.

이저드는 아델라와 눈빛을 맞췄다. 아델라는 그의 시선을 받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우리가 와서 당황한 건 알겠지만, 진정하게. 다치네.”

이저드의 말에 얼어 있던 이들 중 몇몇이 자세를 고쳐 섰다.

“우리도 여기 계속 있을 순 없으니, 먹을 것을 좀 챙겨 가도 되겠나?”

“예? 아, 아! 네! 그, 그럼요! 제가 챙겨 드리겠습니다!”

하녀가 눈짓하자 모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저드와 아델라는 사람들이 움직이는데 방해될까 봐 옆으로 비켜서 주방 문 앞쪽으로 나온 상태였다. 주방 사람들은 둘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어머, 어머. 소문이 진짠가 봐요.”

“그러게. 나 저택에서 일하면서 각하가 누구 손잡는 거 처음 봐.”

“난 몇 년 일하면서 각하가 여기 온 것도 처음 본다.”

그들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며 예쁜 접시에 음식을 빠르게 담았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대로 둘은 손을 맞잡고 하녀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각하, 그거 아세요?”

“뭘?”

표정은 평소와 비슷했지만 누구한테도 보인 적 없는 부드러운 눈빛이 아델라한테 향했다. 일하던 이들이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상냥한 눈빛이었다.

“하이크 제국의 어떤 지방에는 달콤한 감자가 난대요. 감자가 달콤하면 무슨 맛일까요?”

“고구마를 말하는 건가?”

“달콤한 감자가 고구마예요?”

“그렇다고 하더군. 먹고 싶나?”

“무슨 맛일지 궁금하긴 하죠. 근데 수확 시기가 멀었잖아요.”

적어도 두 달은 더 있어야 할 텐데.

꽤 예전에 루가 해 준 이야기를 아델라는 잘 기억하고 있었다. 달콤한 감자는 무슨 맛일까, 하는 궁금증 때문이었다.

“당장 먹자는 말은 아니었네만, 당장 먹고 싶었나 보군.”

‘엇. 이러면 되게 식욕 넘치는 건강한 돼지처럼 보이잖아!’

아, 그거 맞지만.

아델라는 원래도 먹을 것을 좋아했다. 자작가에 있으면서 먹고 싶은 것을 포기하고 살아서 그랬지, 사실은 먹는 것을 가장 큰 행복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델라는 그 모습을 딱히 숨길 생각이 없었다. 이저드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숨길 이유가 없었다.

“당장까지는 아니고, 언젠간요?”

상상만 해도 맛있을 것 같아 아델라가 미소를 지으니, 이저드의 입꼬리도 덩달아 살짝 허물어졌다.

“알겠네, 조금만 참게. 수확 시기에 바로 먹을 수 있게 사람을 보낼 테니.”

“그럼 몇 달은 걸리겠네요?”

“그래. 그대와 나 사이에 시간은 많으니 꼭 같이 먹지.”

그의 말이 이상하게 어떤 다짐처럼 들렸다. 몇 달 뒤에도 자신과 함께하자는. 아델라는 이저드와 맞잡은 두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이내 환하게 웃었다.

“네! 그럼요. 계속 함께할 거니까.”

낯간지러운 소리를 둘 다 잘도 하고 있었다. 둘의 대화를 곁눈질하던 하녀들은 경악스러운 심정으로 빠르게 음식 준비를 마쳤다.

그들이 놀란 것은 이저드가 정말 제대로 아델라와 사귀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누가 봐도 연인 사이의 눈빛이었고, 누가 봐도 연인 사이의 대화였다.

‘이 사실을 알면 각하를 흠모하던 하녀들은 죄다 울며불며 난리가 나겠네.’

그들에게 애도를. 님은 갔습니다.

준비를 마친 하녀 몇이 트레이를 들고 둘 앞에 섰다.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엇! 아니에요! 저희 침실까지 거리가 좀 되잖아요. 제가 들고 갈게요. 일 보세요.”

“네……?”

이건 또 무슨 소리? 그럼 여태 기다린 이유가 스스로 가져가려고? 귀, 귀족 영애가?

하녀가 당황스러워서 이저드를 봤더니 이저드는 더 했다. 그는 아델라가 들려는 트레이를 자기가 잡아당겨 들었다.

“그렇게 하게. 그럼 우린 가 보지.”

그렇게 말하고 쏙 주방에서 빠져나가는 저 날쌘 몸놀림까지!

“예에에?”

“어! 각하! 제가 들고 갈게요!”

폭풍이 지나간 듯 멍청히 자리한 하녀들이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아델라와 이저드를 찾으러 나갔지만, 둘은 이미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웨, 웬일이니.”

아까는 이저드와 아델라가 있어 내비치지 못했던 그들의 표정이 밖으로 드러났다. 하나같이 경악에 차 있었다.

그중 가장 놀랍고 신기하고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짓는 이는 제니트였다. 마티나를 모실 때 봤던 이저드의 표정과는 완전 딴판이었기 때문이다.

“제니트, 아델라 님하고 아는 사이 맞지? 넌 뭐 좀 아니?”

“저…… 저도…… 저도 잘…….”

아델라와 안다고 해봤자 마티나 때문에 만난 사이였다. 좀 특이하고 털털한 사람이라는 것 빼고는 제니트도 그녀를 잘 몰랐다.

“저도 잘 몰라요.”

“그래? 난 반가워하셔서 친한 줄 알았지.”

“아니에요. 그냥 이름하고 얼굴만 알아요.”

제니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다시 일에 집중했다. 둘이 어떻게 만났고, 사랑에 빠졌는지는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 이제 그녀는 ‘귀족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은 관심을 가지지 말자’ 주의가 되어 버렸다. 앞으로도 그녀는 그런 일에 관심 두지 않고 그저 자신한테 주어진 일만 할 생각이었다.

* * *

아델라와 비슷한 나이 또래라고 들었는데, 제대로 마주하고 보니 그보다 더 어려 보였다. 소년티가 더 많이 나는 얼굴에 키도 아델라와 비슷했다. 잘못 보면 영락없는 사춘기 소년인 줄 알겠다. 아리스와 덩치 차이가 상당히 많이 나다 보니 더 작게 보이기도 했다.

루의 보기 드문 은발은 비단결처럼 고왔고, 반짝이는 적안은 세상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보석이 박혀 있는 것 같았다.

그 경이로운 미모에 아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넋을 놓을 뻔했다. 이저드 이후로 이런 상황을 겪을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그는 조금 당황했지만 곧 아무렇지 않게 루의 맞은편에 앉았다.

“남의 뒷조사하는 게 취미신가 봅니다?”

루가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물었다. 상당히 언짢은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요 며칠 이상한 놈이 쫓아다녀 짜증이 났는데, 오늘은 또 이상한 놈이 붙었다 싶었더니 아리스였다.

스토커라고 어디다 신고를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쫓아다니지 말라며 팰 수도 없었다. 어쨌든 아델라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 아니던가.

“당신한테 급하게 물어야 할 게 생겨서 결례를 범했습니다. 사과하죠.”

아리스가 깔끔하게 자신의 잘못이라 시인하자 루는 어이가 없어 그만 헛웃음을 지었다.

“들었을 때 별거 아니면 지금 상황 모두 다 아델라한테 말할 겁니다.”

루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건…….”

아리스는 살짝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루는 아리스가 곤란하거나 말거나 언짢은 기분을 지우지 않고 입을 열었다.

“변명은 됐고. 들어나 봅시다. 뭐 때문에 사람을 몇 날 며칠 추적했는지. 아델라한테 물어봤으면 쉬웠을 일을 굳이 사람을 붙여서. 쯧.”

뒷말은 거의 혼잣말과도 같았다.

“영애의 기분이 상할까 하여……. 영애의 가장 친한 친구를 의심하는데 좋을 리가 있겠습니까?”

대놓고 널 의심하고 있다고 하는 사람은 또 오랜만이었다. 얘도 아델라 과인가. 루는 아리스의 솔직한 반응에 오히려 기분이 살짝 풀린 듯 보였다.

“의심하고 있다고 대놓고 말해도 아델라는 제가 어디쯤 있는지 대답해 줄 사람입니다. 직접 가서 겪어 보는 게 가장 알기 쉬우니까.”

의심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아델라도 이야기했었다. 그녀를 못 믿었던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친구를 의심한다고 하면 알게 모르게 마음이 상할까 싶어 걱정됐다.

“아직 아델라를 잘 모르는구나.”

남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루가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루는 아까부터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리며 핀잔을 줬다. 그런 핀잔을 다 듣고 있으면서도 아리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쪽도 강적이라면 강적이었다.

“당신한테 물을 게 많습니다만, 우선 이것부터 하죠.”

아리스는 품에서 아델라한테 받은 흑마법서라는 것을 꺼냈다. 루가 그것을 힐끔 눈으로 훑었다.

“뭔지 아시죠.”

“알죠.”

“당신이 줬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그런데요? 문제 있습니까?”

문제라면 수도 없이 많았다. 아리스는 차근차근 하나씩 묻기 시작했다.

“고대어를 할 줄 안다고 들었습니다. 어디서 배우셨는지 말해 줄 수 있습니까?”

아리스가 물어온 이유를 단번에 파악한 루는 가소롭다는 듯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왜요? 고대어가 왕족들만의 전유물인 줄 아십니까? 그래서 지금 날 의심하는 거고?”

아리스가 아델라한테 고대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을 때 바로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아델라는 평민 중에 고대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있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고대어 혹은 고서는 각 왕국에서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었다. 많이 소실되어 그나마 남은 고서라도 오래도록 보관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고서는 보통 귀족은 꿈도 못 꾸고, 귀족 중에서도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이들 역시 평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책이었다.

고대어는 말할 것도 없이 왕족들만이 교육받는 언어 중의 하나였다. 만일 귀족 중에 고대어를 구사하는 이가 있다면 왕국의 기밀 누설죄로 처형이었다.

“예, 의심합니다. 당신이 혹 이오스의 숨겨진 왕자나 왕족은 아닌지.”

“크흡.”

‘크흡?’

아리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루를 바라보았다. 루의 행동이 너무나 의심스러웠다. 루는 웃긴다는 듯 웃었다.

“왜 웃죠?”

아리스의 미간이 아주 살짝 일그러졌다.

“픕―. 아, 미안. 계속 못 짚을 줄 알았는데. 아델라 덕분인가?”

“뭐가…… 말입니까?”

아리스는 자기가 짐작한 것이 사실로 점점 굳어지는 기분이었다. 루의 분위기는 마치 그래, 내가 첩자다! 라고 말할 것 같았다.

하지만 루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완전 다른 말이었다.

“그런데…… 사람을 잘못 짚었습니다, 아리스 경.”

아까의 퉁명스러운 태도는 어디 가고 루가 싱긋 웃었다.

아리스는 의문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당신한테 이름을 알려 준 적이 있습니까?”

“없죠. 단 한 번도. 그냥 자주, 여러 번, 들어봤습니다.”

소문으로 들어봤다는 건지, 아님 아델라한테 들어봤다는 건지.

“일단 물음에 대한 대답은, 누구한테 안 배웠습니다. 원래부터 알았지.”

“독학을 했다는 뜻입니까?”

“아뇨.”

무슨 말이지? 태어날 때부터 알았다는 소리인 것 같은데. 자긴 날 때부터 천재라는 말을 돌려서 한 것일까?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하셔도 됩니다.”

장난치지 말라는 의미로 한 말이었다. 그러나 루는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누구보다 진실하게 대답해 주고 있습니다.”

루의 붉은 안광이 순진무구하게 빛났다. 그 눈을 보고 있자면 무슨 말을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리스는 마음을 다잡고 곧은 눈으로 루를 보았다.

“아까, 사람을 잘못 짚었다는 건 무슨 말이시죠?”

“말 그대론데요. 이오스 왕국의 왕족, 난 아닙니다.”

“난 아니라는 건, 다른 사람은 있다는 겁니까?”

“그건 나도 모르죠. 그쪽이 짐작한 거 아닙니까? 그럼 그쪽이 찾아야 하는 거지.”

그렇게 말하는 루의 눈빛은 한 점 흔들림도 없었다. 그의 눈빛, 태도, 행동에는 어떠한 거짓도 담겨 있지 않았다. 아리스가 예리하게 보고 있는데도 이 정도면 거짓말에 엄청나게 능하든가, 진실을 말하고 있든가 둘 중 하나였다.

“제대로 된 대답은 못 들을 것 같군요. 그럼 다른 질문을 하겠습니다.”

루는 기꺼이라는 뜻으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당신은 왜 아델라 영애께 이 책에 있지도 않은 내용을 알려 준 겁니까? 당신이 흑마법사라서 책에 안 나와 있는 사실을 알려 준 겁니까?”

아리스가 책을 루의 앞으로 밀며 물었다. 루는 그가 내민 책을 받아 설렁설렁 훑더니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이거 아델라 책 아닌데.”

“……아까부터 자꾸 빠져나가는 대답만 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진짜로 내가 아델라한테 준 책 아닙니다. 참고로 흑마법사도 아니고.”

저 얼굴에 속으면 안 되는데, 아리스는 몇 번이나 깜박 넘어갈 것 같았다.

“의심하는 건 알겠는데, 맹세코 아델라 책 아닙니다.”

루는 아리스가 못 믿는 것 같았기에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했다.

아리스는 문득 아델라의 가게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미세하지만 물건들이 움직였고, 누군가 이 책으로 향한 것 같다고 말하던 아델라가.

“바꿔 놓은 거군요.”

훔쳐 간 것이 없다고 했지만, 사실은 훔쳐 간 것이 있었다.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책.

“내 말을 믿는다면.”

루를 믿는 건 아니지만, 정황상 루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바뀐 이 책과 원래 아델라 영애의 책이 서로 다른 점이 있습니까?”

“푸는 방법이요.”

“흑마법을 푸는 방법이요?”

“네, 아델라는 흑마법에 안 걸리는 방법이나 흑마법을 안 거는 방법에 관한 책을 구해 달라고 부탁했거든요.”

아리스는 잠시 고민하다가 왜인지 지금의 바뀐 흑마법서도 루가 구해 준 것 같아서 물었다.

“그 말은…… 아델라 영애와는 반대로 다른 걸 구해 달라는 이도 있었다는 거고요?”

루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같은 마법서지만, 강력한 마법이 쓰인 책을 원하는 이도 있었죠.”

“그게 누군지 압니까?”

“오랜 세월 동안 수도 없이 많아서 기억 못 합니다.”

사람은 외모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는 거라고 하지만, 루는 아무리 봐도 오랜 세월이라고 말할 나이가 아니었다. 아델라 또래라고 알고 있는데.

아리스는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려 보이는 루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누군지 말을 못 하겠다는 말을 돌려서 한 겁니까?”

“어떻게 생각해도 상관없어요.”

정말로 의문스러운 사내였다.

진실을 말하고 있긴 했지만, 일정 부분 이상을 알려 주지 않았다. 이런 사람을 믿어도 될지 모르겠다.

“도대체…… 아델라 영애와는 어떻게 친하게 지내시는 겁니까?”

이렇게 의문스러운 사람을 아델라는 어떻게 그렇게 철석같이 믿고 있을까.

“어릴 때부터 친구라서?”

“아델라 영애를 도와주는 것도 단지 그 이유 때문입니까?”

“내가 도와주는 것처럼 보입니까?”

“아닙니까?”

루는 묘한 표정으로 살며시 미소 지었다.

“그 반대입니다.”

“반대라고요?”

“내가 도와주는 게 아니라…… 내가 도움을 받고 있죠. 그래서 아델라의 부탁은 거절할 수 없어요. 내 생각을 바꿔 준 사람이니까.”

이 말은 거짓일까, 진실일까?

아리스는 아델라한테 향하는 루의 마음이 어떤 형태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이렇게 속을 읽기 힘든 사람은 또 처음이었다.

“당신의 그 말이 진실이길 바랍니다. 왜냐면 우린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니까요.”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은 없습니다.”

‘무슨 일이죠’도 아니고 ‘없을 겁니다’도 아니고 ‘없다’라니?

루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하는 말에 아리스는 의아함을 느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겁니다. 왜 그렇게 확신하시죠?”

“그렇게 될 거니까요. 내 도움 없이도 아델라는 저주를 풀 수 있고, 당신들이 찾는…… 그 사람.”

루가 잠깐 뜸 들이는 순간 아리스는 갑자기 섬뜩해졌다. 루의 눈을 마주 본 순간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설사 이번에 못 찾는다고 하더라도 아델라는 지금의 힘으로 저주를 충분히 풀고도 남습니다.”

그는 분명 아까 흑마법사가 아니라고 했는데, 어떻게 아델라의 힘을 가늠할 수 있단 말인가. 분명 아델라가 말하길, 같은 흑마법사라도 서로를 모를뿐더러 흑마력을 짐작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고 했다.

“……정말로 당신은 흑마법사가 아닙니까?”

아리스가 조금 뜸을 들인 건 몸이 긴장해 말이 입 밖으로 쉬이 뱉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니라고 하면 믿기는 할 겁니까?”

“…….”

솔직히 믿기 힘들었다. 그냥 보통 상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안 믿을 거면 입 아프게 왜 물어요? 그쪽이 마음 가는 대로 믿으십쇼.”

아까의 묘한 긴장감이 사라지면서 다시 처음 만났을 때의 루로 돌아왔다. 루는 처음처럼 삐딱하게 아리스를 보고 있었다. 분위기는 바뀌었지만, 아리스는 조금 전 느낀 섬뜩함이 뇌리에서 잊히지 않았다.

“미안합니다. 오래된 버릇이라 쉬이 고쳐지지 않아서요.”

“압니다. 그쪽 버릇인 거. 그러니까 믿고 싶은 대로 믿으라고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아리스는 개인적으로 묻고 싶은 말이 이것저것 많았지만 마음속에 묻어 뒀다. 지금은 루를 믿고 안 믿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루한테 자신이 원하는 정보가 있는지 없는지가 더 중요했다.

* * *

“……그게 끝입니까?”

“아마.”

아리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럼, 뭐 거창한 뭔가가 있을 줄 알았습니까?”

루는 아리스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싱긋 웃었다. 루의 말 하나하나를 의심하는 게 아주 재밌는 듯했다.

‘그래, 그렇게 하나하나 의심해.’

루의 미소가 짙어진 걸 눈치채지 못한 아리스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그럼, 더 강한 힘으로 누른다는 뜻은 뭐였습니까?”

아리스의 물음에 루가 드디어 미간을 구겼다. 그러곤 매우 불쾌한 표정으로 책을 내려다보았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놈들 맘대로 그렇게 써 놓은걸.”

“놈들? 흑마법사들을 말하는 겁니까? 그러는 당신은요?”

내가 뭐? 하는 표정의 루는 정말 뭐가 이상한지 모르는 눈치였다.

“당신이 알려 준 방법도 책에는 적혀 있지 않습니다만.”

“적혀 있잖아요?”

루는 당당하게 마법서의 한 페이지를 펴서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문장을 읽으며 아리스는 미간을 구겼다.

‘강한 힘으로 누른다.’

아까 루가 불쾌해하며 내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되묻던 부분이었다. 아리스는 루가 자신과 장난을 치는 건가 싶어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장난하십니까?”

“그럴 리가. 다른 건 몰라도 아델라의 안위가 걸린 일에는 거짓말 안 합니다.”

이 말을 지금 믿으라고 하는 건가. 애당초 이 사람을 정말 믿어도 되는 건가?

“그 말은, 아델라 영애의 일이 아닌 일에는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는 거고요?”

혹여 아까와 같은 섬뜩한 기분을 또 느낄까 싶어 아리스는 잔뜩 경계했지만 루는 의외로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네. 당연하죠.”

“당신이 흑마법사가 아니라는 말도?”

“거참, 되게 못 믿네. 입장 바꿔 생각해 보죠. 내가 만일 그쪽의 정체를 집요하게 캐내려고 한다면 당신은 대답해 줄 수 있습니까?”

아리스의 한쪽 눈썹이 움찔 떨렸다. 알고 묻는 것일까, 모르고 묻는 것일까. 아리스는 루의 의중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태어나 이렇게 상대하기 거북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전, 아리스입니다.”

“그래요. 그쪽은 아리스죠. 나도 같아요. 나는 루입니다.”

루의 깔끔한 답변에 아리스는 입을 다물었다. 서로의 정체를 털어놓지 않는 이상, 이 대화는 무의미했다. 아마 이후의 대화는 모두 나는 나일 뿐이다, 로 귀결될 것이고, 정체를 알아내기는커녕 반대가 될 확률이 높았다.

루는 아리스의 반응을 예상한 듯 싱긋 웃었다.

“날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지금 그쪽은 그저 베어 나갈 수많은 나무 중 하나를 보고 있는 겁니다. 그쪽이 봐야 하는 건 나무가 아니잖아요?”

루는 팔짱을 낀 채 눈을 내리깔며 마법서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의 행동은 꼭, 아리스가 신경 써야 할 것을 알려 주려는 모양새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라져 가는 나무들은 많고, 당신이 모시는 사람도 그 나무 중 하나가 되어 가는 중이죠.”

“그게 무슨……?”

아리스가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루는 아리스와 잠깐 시선을 마주했다가 금방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환한 빛이 들어오는 창밖으로 시선을 두며 입을 열었다.

“그쪽 상사를 걱정하는 건 아니지만, 아델라가 슬퍼하는 건 보고 싶지 않으니까 빨리 가 보시죠?”

빨리 가 보라는 루의 말에 아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몸이 먼저 반응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저드와 아델라한테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소식에 마음이 먼저 앞선 것이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아리스는 서늘한 표정으로 루를 보았다. 그러자 루는 어깨를 으쓱였다.

“왜 날 봐요? 내가 일으켰나?”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불친절하면서도 친절하고, 친절하면서도 불친절했다.

“방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오늘도 조용히 넘어가긴 힘들 거라 그쪽이 빨리 가서 푸는 방법을 알려야 아델라가 한시름 놓지.”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델라와 관련된 일은 루한테 특별하게 취급된다는 점이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을 믿는 건 아닙니다.”

“그건 나도.”

아리스는 또박또박 말을 받아치는 루가 그렇게 얄미워 보일 수가 없었다.

“……아델라 영애의 친구분으로서 믿어 보는 겁니다. 설마 당신을 그렇게 믿는 영애를 배신하지는 않겠지요.”

“그거 역시, 나도. 아델라가 그쪽을 믿으니까 이야기해 준 거예요.”

그렇게 말한 루는 얼른 가 보라는 듯이 문 쪽으로 힐끔 시선을 던졌다. 아리스는 무언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포기했다. 루한테 뭘 물어 봤자 제대로 된 대답은 들을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방법, 확실한 겁니까?”

아리스의 물음에 루는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루로서는 최선을 다해 대답해 준 것이었으니, 믿는 건 자유였다.

끝까지 확실한 방법인지 확답을 받지 못한 아리스는 찝찝했지만, 루와 아델라의 신뢰 관계가 돈독하다는 사실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루의 말이 사실이라면 큰 정보를 얻어 낸 것이다. 그는 하루빨리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마법서를 가지고 방을 빠져나갔다.

아리스가 사라지면서 혼자가 된 루는 테이블에 앉아 그가 사라진 방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곤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를 톡톡 반복적으로 두들겼다.

“빠르네…….”

루는 조용히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종이와 펜을 꺼내 들고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작은 종이 위에 빽빽하게 적힌 편지의 수신인은 아델라였다.

그는 새의 다리에 편지를 묶어 그녀한테로 보냈다.

햇빛을 담고 날아가는 새를 한참 쳐다보던 그는 갑자기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부지런히 정리하다 보니 금세 숙소가 깔끔해졌다. 그냥 깔끔한 정도가 아닌, 사람이 있었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이 아주 깔끔해졌다.

루는 주변을 빙 둘러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더니, 아까 아리스와 마주 앉았던 테이블로 다가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계속 그곳에 앉아 있었다.

꼭,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 * *

볼을 빵빵하게 채운 아델라는 반나절 만에 먹는 간식거리를 행복하다는 듯이 우물거리고 있었다.

이저드는 그런 그녀가 귀여워서 계속 쳐다보았다. 먹는 걸 저렇게 좋아하는 줄 알았다면 진즉에 이것저것 준비할 것을 그랬다.

한참을 먹은 후에야 그의 시선을 느낀 아델라는 살짝 민망해졌다. 그녀는 두 손에 든 다과와 감자를 얌전히 그릇 위에 내려놓았다.

“왜 그러나? 더 먹지 않고.”

“가, 각하께서도 드세요. 제가 혼자 다 먹겠어요…….”

물론 그러라고 가지고 온 것이었다. 이저드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고 그녀의 말대로 다과 하나를 들었다. 연인이 민망함에 고개를 못 드는 건 싫었다. 그로 인해 빗나가는 시선은 더 아까웠다.

그가 다과를 들자, 아델라는 안심한 표정으로 자신도 조그만 다과를 집었다.

“아, 그런데 각하.”

“……?”

“아리스 경은 루를 만나러 간 거죠?”

아리스가 성을 떠난 후, 몇 번 더 회의를 가졌을 때마다 그가 나타나지 않아 아델라는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그가 성에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저드 또한 아델라가 눈치챌 거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던 듯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거라 생각되네.”

“그렇군요. 루가 되게 싫어했겠어요.”

“그렇겠지. 누구라도 의심을 받으면 기분이 좋지 않을 거야.”

아델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빨리 찾아갈 줄은 몰랐지만 의문이 든 이상 언젠가 벌어질 일이었다. 아델라는 예상한 일이었는지 의외로 평온해 보였다. 그런 그녀를 살피던 이저드는 잠시 시간을 두고 입을 열었다.

“그대는…… 괜찮나?”

이저드는 혹여 이 일로 아델라의 마음도 상했을까 싶어 조심스레 물었다.

“네, 전 괜찮습니다. 루는 안 괜찮을 테지만.”

아델라가 작게 미소 지었다.

“오히려 전, 아리스 경이 루를 직접 만나서 의심이 조금이나마 풀렸으면 좋겠는 걸요.”

“나도 그렇게 됐으면 좋겠네. 가까운 사람을 의심하는 건 마음이 편치 않아.”

아델라는 자신의 말에 동의하는 이저드를 물끄러미 보았다.

“왜 그러나?”

“아니…… 그게요…….”

그녀는 이저드의 안색을 살폈다.

“각하는…… 루가 수상하지 않으십니까?”

이저드가 잠시 고민하는 듯싶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수상하네.”

이저드의 대답에 아델라의 눈가가 체념하는 것처럼 휘어졌다. 루가 다른 이들의 눈에 수상하게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조금은 기대하고 있었나 보다.

이저드가 믿어 줄 거라고.

그런 아델라의 마음을 알고 있던 이저드는 설핏 미소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그녀의 옆에 앉아 그녀의 눈가에 손을 올렸다. 이저드는 살짝 힘을 주어 경직된 아델라의 눈가를 슬슬 풀어 주었다.

“하지만 믿어, 그대를. 그런 그대가 오랜 친구를 믿는 만큼 나도 믿네. 나보다는 그대가 더 그 친구를 잘 알지 않나.”

눈가에 닿은 따스한 온기에 긴장했던 근육이 점점 풀렸다. 아델라는 믿는다는 말에 살짝 놀랐지만, 곧 포근한 미소로 답했다.

“네. 전 믿습니다. 저한테는…… 루가, 친구 이상이거든요.”

“친구 이상?”

앗, 뉘앙스가 이상했으려나. 아델라는 루와의 관계를 설명할 말을 찾으려고 눈을 굴렸다.

“그러니까…… 가족? 가족 같은 존재라고 할까요? 제 진짜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친구요.”

아델라는 잠시 회상에 잠긴 듯싶었다. 루와의 추억을 회상하는 아델라의 표정은 어떤 때보다 포근해 보였다.

“루와의 관계를 설명하자면, 가족에 가장 가까워요. 제가 힘들 때, 외로울 때, 즐거울 때, 행복할 때, 그때마다…… 제 곁에 있어 준 몇 안 되는 사람이거든요. 지금은 유일하게 남은 친구죠.”

과거의 아델라를 알던 이들은 이미 모두 떠나거나 죽고 없었기에 어릴 적부터 함께한 인연은 루가 유일했다.

“그래서 전, 루가 아무리 비밀이 많더라도 믿습니다. 절 절대 위험에 빠뜨릴 친구가 아니라는 걸.”

이저드는 순간 루가 참 부러워졌다. 아델라한테 이렇게나 신뢰를 얻고 있으니 말이다. 둘의 신뢰 관계는 이저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깊어 보였다. 함께 지낸 세월이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한편으로 이저드는 아델라한테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다. 과거의 아델라가 외롭고 쓸쓸하지 않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친구가 부럽군. 이렇게 전적으로 보증하고 나서는 친구가 있다는 게 말이야.”

이저드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잔잔하게 미소 짓는 이저드를 보자 아델라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아델라는 숨을 멈췄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시, 심장 마비로 죽겠다!

‘이, 이렇게 웃으시면 제가 또 반해 버리는데요!’

그녀는 속으로 여러 번 심호흡을 했다. 저번처럼 또 다짜고짜 그를 와락 안아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저, 전! 각하도 엄청 믿습니다.”

“나도 그대를 많이 믿네.”

아, 또 웃으셨다.

“앞으로 그대가 슬프고 외롭지 않게 계속 옆에 있겠네. 내가 그대한테 위로가 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군.”

아…… 역시, 못 견디겠다. 저 미소를 보고, 저 말을 듣고 가만히 있으면 사람이 아니었다.

아델라는 부드러운 미소에 홀린 듯 바라보다가 그를 와락 안고 말았다. 그의 목에 팔을 두른 아델라는 벅차오르는 마음에 눈을 꼭 감았다.

“이미, 넘칠 만큼 충분한 걸요!”

아델라는 생각했다.

왜 이 사람을 이제야 만난 걸까? 아니지, 이제라도 만난 걸 감사해야 하나? 이 울렁이는 마음을 이저드한테 전하고 싶었다. 이 사람이 너무 좋다. 너무 좋아서 울고 싶을 정도였다.

“저 믿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그녀가 이저드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갑작스러운 아델라의 행동에 이저드는 흠칫 몸을 굳혔다.

“그리고…… 많이, 좋아해요.”

이저드는 자신을 안아 오는 그녀의 떨림을 고스란히 느꼈다. 맞닿은 심장이 쿵쾅거리며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이저드는 그녀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어떤 갈증이 일었다.

그래서 그는 최대한 조심히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이렇게 마주 안고 있음에도 더 꽉 안고 싶었다. 무언가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나도네.”

그는 그녀의 체향을 느끼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델라가 자신의 품에 안겨 있어서 다행이었다. 만일 그녀가 자신의 눈빛을 봤다면 무서워서 피했을지도 몰랐다.

연인에게 이렇게 온몸으로 좋아한다는 고백을 듣고 이성 줄을 붙잡을 수 있는 건 이저드의 초인 같은 인내력 덕분이었다. 이저드는 주먹을 꽉 쥐었고, 그녀를 안은 상태로 한동안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 후, 아델라와 떨어지고 나서도 한참 동안 자신의 욕망을 진정시켜야 했고, 덕분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건 말할 것도 없었다.

* * *

아델라를 먼저 재우고 이저드가 잠든 시각은 어스름한 빛이 깔린 새벽이었다. 아침이 되기 직전의 시간이었다.

선잠을 청해서 그런지 이저드는 잘 꾸지도 않던 꿈을 꿨다. 어릴 적 반복해서 꿨던 꿈이었는데, 정신적으로 안정되고부터는 그런 꿈을 꿔 본 적이 없었다.

그는 그날의 감각이 살아나는 것을 신기한 눈으로 보았다. 이렇게 생생하게 꿔 본 적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빼고는 없었다.

이저드는 어린 자신의 손을 쥐었다 폈다. 제삼자로서 회상처럼 그날의 기억을 반복한 적은 있어도 과거의 자신이 되어서 꿈을 꾼 적은 없었기에 모든 게 신기했다. 분명 괜찮다는 진단을 받았는데, 이런 꿈을 다시 꾸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리고 그때의 그 충격과 공포와 슬픔이 모두 고스란히 다시 느껴지는 이유도 알 수 없었다.

이저드는 자신을 품에서 천천히 떼어 놓는 헤이든을 보며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어린 이저드는 울먹이는 표정으로 헤이든을 쳐다보았다.

헤이든은 고작 열여섯밖에 안 된 어린 도련님을 진정시키기 위해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두려움에 휩싸인 이저드는 그가 웃을수록 더 불안함에 떨었다.

왜냐하면 헤이든의 몸은 아무렇지 않은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곳곳에 박힌 화살로 인해 곧 독이 퍼질 거였다.

‘―각하!’

헤이든이 괜찮다고 이저드를 달래기 전에 저 멀리에서 누군가의 비명과도 같은 고함이 터졌다. 고함을 내지른 이는 말에서 뛰어내려 한 남자에게 달려갔다.

이저드는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스승님!’

린다가 쓰러지는 이를 부축하며 절규했고, 이저드한테는 항상 커다란 거목이었던 이가 눈앞에서 스러져 갔다.

‘살려 주십쇼. 모두 저의 불찰입니다.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피를 토하며 왕에게 무릎 꿇는 제스트윈 공작을 보며 어린 이저드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은 이저드가 만들어 낸 참사였다. 그래서 이저드는 울 수 없었다. 아파할 자격조차 없었다.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었으니까.

아이는 아버지를 향해 입을 뻐끔거리다가 까무룩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그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이 될 줄도 모르고…….

아이가 운만큼 이저드도 울었다. 그는 시간이 바뀌고 배경이 바뀌는 것이 꿈인지 생신지 알 수 없었다. 이상하게 정신이 가물가물했다.

그는 몇 번이고 정신을 잃었다가 차리길 반복했다.

“―하! 각하!”

꿈속을 배회하는데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여성의 목소리였는데, 아까 린다의 목소리와는 전혀 달랐다. 누구였더라? 기억이 날 듯 말 듯했다.

이저드는 작고 미세한 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지만 금방 다른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흑…… 흡…….’

‘울지 마세요. 좋은 날이잖습니까.’

이저드의 눈에 들어온 풍경은 누군가의 침실이었다.

그곳에는 작은 아이를 품에 안은 남자가 침대에 누워 연신 눈물만 흘리는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눈물을 전부 닦아 주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저드와는 머리카락 색과 눈 색이 달랐지만, 생긴 것만큼은 이저드를 빼닮은 미남자였다. 이저드는 두 사람이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각하를 안 닮았습니다! 각하를……! 흐윽, 우리 아이가……, 우리 아이가 아니면……!’

여자의 표정에는 아이를 낳은 기쁨이나 환희 혹은 힘듦, 어색함, 신기함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울면서 두려움에 찬 표정이었다. 그런 그녀를 안쓰러운 눈으로 보던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립니까? 머리카락 색과 눈 색은 당신을 닮았고, 얼굴은 나를 닮았는데.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예쁜 아기는 드뭅니다.’

남자는 눈을 감고 자는 아이를 사랑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이저드는 이것이 꿈임을 알지만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여태 꿈을 꾸면서 자기가 태어난 순간까지 꿔 본 적은 처음이었다. 그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부모님께 시선을 두려고 했지만, 둘은 벌써 사라진 뒤였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그의 앞에 펼쳐진 다음 꿈은 끔찍했다.

‘놔! 놔! 이저드! 이저드! 아악! 건들지 마! 우리 아이야! 우리 아이……!’

‘―그래, 우리 아이지.’

그런 말을 한 사람은 누구였지?

이저드는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한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과 울음소리가 귓가에 울리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10살도 채 되지 않은 아이는 엉엉 울며 어머니가 우악스럽게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그리고 그 또한 그보다 훨씬 큰 어른들의 손에 잡혀 어딘가로 끌려갔다.

“―각하! 제발!”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라 고통스러웠던 이저드가 인상을 쓰며 귀를 막으려고 했다. 그때, 아까 자신이 들으려고 했던 목소리가 불쑥 꿈속으로 들어왔다.

“제발 일어나세요!”

이저드는 절박한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한참 생각했다.

“이저드!”

까맣던 그의 시야에 천천히 빛이 들어오자, 뿌연 시야 속에 황금빛 눈동자가 촉촉이 젖은 아름다운 여인이 보였다. 곧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이저드는 아름다운 눈동자에서 눈물이 떨어질까 걱정되어 그녀한테 손을 뻗었다. 그리고 눈물이 고인 아델라의 눈꺼풀 위에 입을 맞췄다.

“……미안하네.”

그는 아델라를 품에 안은 뒤에야 꿈에 휩쓸렸던 감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델라는 그의 품에 안긴 후 울지 않으려 애썼다.

이번에는 정말로, 정말로 그가 잘못되는 줄 알았다. 자고 일어났더니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이저드도 무서웠지만, 그의 눈빛이 더 무서웠다.

이전과는 다르게 눈을 뜨고 침대에 앉아 있던 그의 눈에는 어떤 빛도, 어떤 감정도, 어떤 생각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야말로 죽은 눈빛이었다. 그 눈빛을 마주한 순간 아델라는 이 사람이 진짜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가 죽는 이유를.

이번 일로 아델라는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만일 지금 상태에서 나아지지 않고 더 심해진다면, 이저드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죽임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방금 아델라가 크게 흔들어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아델라는 어렴풋이 그한테 걸린 흑마법이 그를 어떻게 망가뜨릴 건지, 앞으로 어떻게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갈지 상상이 됐다.

전장에서 단 한순간의 틈은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만일 이저드 가까운 곳에 스파이가 숨어 있다면 그한테는 그 순간이 바로 기회였다.

흑마법사가 오랜 시간 이저드의 정신을 흔드는 데에 정성을 들인 이유는 바로, 이 한순간의 틈을 위한 거였다. 평소 전장에서 흐트러질 일이 없는 그를 죽일 기회를 얻기 위해서.

“아니에요. 깨어나셨으면 됐어요. 깨어나서 다행이에요.”

아델라는 애써 두려움을 떨쳐 냈다. 각오했던 일이었다. 이저드한테 무슨 일이 벌어져도 무너지지 않기로.

“미안해. 걱정시켰군.”

아델라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이저드가 사과할 일이 아니었다. 아델라나 이저드나 그저 피해자였을 뿐이다. 둘에게 용서를 빌어야 하는 이는 따로 있었다. 아니, 둘에게만이 아니었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빌어야 했다.

“저 괜찮아요. 미안해하지 마세요. 각하께서는 잘못한 거 없어요.”

아델라의 결연한 다짐에 이저드는 속에서 무언가가 북받쳐 오르는 것 같았다.

이상했다. 잠에서 깨자 꿈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저드는 지금 아델라한테 마음의 위로를 받은 기분이었다.

“고맙네.”

그는 많이 놀랐을 아델라의 등을 쓸며 조용히 고마움을 전했다.

* * *

루의 전서구는 아델라가 흑마법사의 실마리를 잡기 위해 간절하게 레널드를 기다리는 순간에 도착했다.

아델라는 루에게서 온 전서구를 의아한 표정으로 받았다. 회귀 중에 루한테 전서구를 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잘 지내, 아델라. 이렇게 편지를 쓰는 것도 오랜만이네. 지금이 아니면 말하지 못할 것 같아서.

오늘 아리스라는 사람이 왔다 갔어. 내 뒤를 캔 게 괘씸하긴 하지만, 나쁜 놈은 아니더라고. 난 오해가 풀렸는데, 그쪽은 풀렸는지 모르겠네.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네가 해야 할 일이 많더라. 널 혼자 두고 가는 게 마음에 걸리네. 공작이 널 항상 지키긴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순간도 있을 거야.

항상 조심하고. 기운 내. 내가 없더라도 넌 잘해 왔으니까 이번 일도 네가 잘 해낼 거라고 믿어. 음……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이 정도뿐이네. 조심하라는 거.

잘 지내고. 다치지 말고. 힘내.

오랫동안 널 보고 싶을 거야.

- 너의 친구, 루.]

루의 편지는 그렇게 끝을 맺었다.

그런데 중간중간 마음에 걸리는 문장이 꽤 많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걸리는 문장은 맨 마지막 줄이었다.

아델라는 편지를 위에서부터 다시 쭉 훑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랫동안 보고 싶을 거라니? 오랫동안 못 볼 일이 생기나? 편지는 꼭 못 볼 일이 생길 것처럼 끝을 맺었다. 어디 멀리 가나?

“네 친구도 지극정성이다.”

옆에서 같이 내용을 살피던 린다가 편지를 유심히 보며 말했다.

“근데 이거 꼭…….”

편지를 유심히 보던 린다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게 꼭, 왜요?”

린다가 말끝을 흐리며 입을 닫자 궁금해진 아델라가 그녀를 보았다. 그러곤 뭔가 콕 짚어 설명할 수 없는 찝찝함에 린다한테 재촉하듯 물었다. 린다도 이 편지를 보며 이상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꼭…… 떠나는 사람이 남긴 편지 같다? 이것도 그렇고, 이것도 그렇고. 이것도.”

린다는 몇몇 부분을 손으로 짚었다.

“잘 지내? 도 아니고, 잘 지내. 이렇게 시작하는 것도 그렇고. 널 두고 혼자 간 게 이번만은 아닐 텐데 굳이 언급하지 않나. 오랫동안 널 보고 싶을 거라고 하고. 아무리 봐도 좀?”

아까 읽으면서 마음에 걸렸던 부분을 린다가 정확히 꼬집었다. 린다한테 물었던 이유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혹여 자신이 심각하게만 받아들이는 건가 싶어서.

“저도 좀…….”

한두 개가 걸리는 게 아니었다. 여태껏 루와 친구로 지내면서 조심하라는 내용을 편지로 받아 본 적은 없었다. 이렇게 긴 편지를 보낸 적도 없었고.

회귀 전의 기억을 되살려 보면, 그가 보낸 편지는 대부분 ‘뭐 필요한 거 있어? 뭐 구해다 줄까? 언제쯤 펜베르크 성에 들를 예정이야.’ 정도의 짧은 말들뿐이었다. 또한 회귀하는 동안에는 루가 전서구를 보내온 상황 자체가 없었다.

“린다 경, 혹시 쓸 거 있어요?”

“쓸 거? 펜? 당연히 있지.”

아델라는 린다가 건네는 펜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그러곤 루가 보낸 편지의 뒤에 이것저것 궁금한 것을 적었다.

보통 아델라가 루한테 답을 보낼 때 자주 쓰는 방법이었다.

“답장?”

“네.”

“어떻게 보내게?”

“네? 그거야 당연히 전서구…… 엇?”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있던 새가 어디에도 없었다.

창문에 앉아 아델라가 준 간식을 받아먹는 것까지 확인했는데, 지금 보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델라는 창밖으로 몸을 쭉 내밀고 주변을 살폈다. 휘파람 소리도 내 봤지만 깃털 하나도 볼 수 없었다. 답을 주기 전까지 돌아간 적은 없었는데.

“어, 없네요?”

“응. 아까 간식 먹고 날아갔어.”

편지에 신경 쓰느라 새가 날아가는 것을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아델라가 난감한 표정을 짓자 린다가 대안을 내놨다.

“사람을 시켜서 보낼까?”

린다의 물음에 아델라는 잠시 고민하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창문을 닫았다.

“아니에요. 아리스 경이 돌아오면 물어보죠, 뭐. 루가 괜찮았는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델라는 영 마음에 걸렸다. 이것저것 다. 오랫동안 떠날 것 같은 루의 편지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아마 레널드가 곧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더라면 아델라는 그날 내내 루가 보낸 편지 내용을 곱씹었을 것이다.

* * *

아델라한테는 편지가 도착하기 전이자 이저드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날, 루는 밤늦게까지 아무도 없는 방 안에 앉아 있었다. 창밖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하나둘 사라지며 아예 들리지 않게 될 때까지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아리스와 앉아 있던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몇 시간을 테이블에 앉아 있던 루가 움직임을 보인 때는 늦은 새벽이었다. 그는 아무 표정도 없이 허공을 보다가 한순간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표정을 누가 보면 이중인격자인 줄 알 정도로.

“이놈이고 저놈이고……. 왜 남의 뒤를 캐고 다니는 거야?”

그는 허공을 향해 짜증을 냈다. 그러자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너, 내 손님들 건드렸냐?”

루는 당당하게 걸어 나오는 주황빛 머리에 흑안을 지닌 벤슨을 삐딱하게 보았다.

“건드리다니. 이해관계가 맞았던 거지. 난 정보를 받고, 그쪽은 위로를 받고.”

“웃기고 있네. 그냥 이용만 하고 버린 거면서.”

벤슨은 루의 비꼼에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넌 용건이 뭐야?”

“음― 내 용건?”

벤슨이 유유히 걸어와 루의 건너편에 앉았다. 그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어딘지 위화감이 들었다. 그의 눈이 웃고 있지 않았다.

“알잖아. 너.”

벤슨은 루를 뚫어져라 보았다.

“네 정체.”

그는 루가 잘 들을 수 있게, 또박또박 한 글자 한 글자 정성 들여 말했다.

“내 정체? 그걸 네가 알아서 뭐 하게?”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벤슨은 묘한 표정으로 루를 빤히 보았다.

“네 정체가 뭐냐에 따라, 재고할지 말지 생각해 보지.”

“……크핫!”

가만히 벤슨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루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뭐가 그리 웃긴지 벤슨의 분위기가 험악해지는데도 시원하게 웃어젖혔다.

“크― 푸하하! 재고? 나를?”

루의 행동만 보면 벤슨이 견딜 수 없이 웃긴 이야기를 꺼낸 것처럼 보였지만, 벤슨은 루한테 경고를 했던 것이다. 협박을 당한 당사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왜? 내 말이 거짓말 같아?”

“큽……! 거짓말이지, 그럼.”

벤슨의 웃는 낯이 아주 살짝 무너졌다.

“내 정체가 뭐든, 넌 날 살려 줄 생각이 없잖아. 입에 침이나 바르고 그런 말을 해라?”

루는 이미 벤슨이 이곳에 왜 온 건지 아는 눈빛이었다. 루의 눈빛으로 미루어 보건데 의심이나 떠보는 게 아닌 확신이었다.

“그 말은…… 네 정체를 말해 줄 생각이 없다? 그러니까 죽겠다?”

“내 정체를 밝혀서 뭐. 그럼 내가 안 죽나? 아니잖아. 넌 날 무조건 죽일 거고, 바뀌는 건 없겠지.”

“뭐?”

벤슨은 루의 저 여유로움이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지 몰랐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 상황에서 우위에 있어야 할 이는 자신이었다. 자신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루를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루의 저 여유 넘치는 모습은 뭐란 말인가. 죽이지 말아 달라고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에 루는 너무 쉽게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벤슨은 이상하게 초조해졌다. 이런 기분을 느낀 게 처음은 아니었다. 두 번의 회귀를 거치며 느끼던 그 감정이었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초조함.

“바뀌는 게 없다고? 그럴 리가.”

입가에 미소를 잃지 않던 벤슨이 별안간 표정을 바꿨다. 그러곤 루를 죽일 것처럼 노려보았다.

“아주 많이 달라지지. 내 운명이 달라질 테니까. 네가 그 여자의 운명을 바꾼 것처럼.”

“아아― 그래서?”

루는 벤슨이 살기를 내뿜으며 자신을 압박하든가 말든가 그렇게 말하며 그의 가슴 쪽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의 시선에 벤슨은 순간 오싹했다. 허술하게 숨긴 것도 아니었는데 그는 보지도 않고 옷 속에 품은 단검을 알아챘다.

눈치로 찍었다고 하기에는 절대 떠보는 어투나 품새가 아니었다. 그에게선 아주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래. 그럼 죽여.”

아무리 벤슨이 살기를 뿜어 대도 루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주눅 드는 낌새도 없었고 불편해하지도 않았다.

루는 겁내기는커녕 거리낌 없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근데 딱히 얻는 건 없을 거야. 난 흑마법사도 아니고 아델라의 운명을 바꾼 건 더더욱 아니니까.”

그저 다른 장사치들보다 희귀한 물품을 조금 더 가지고 있는 상인 정도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벤슨은 은연중에 루의 페이스에 휘말리는 것 같았다.

“그건 네가 죽어 봐야 알지. 네가 아니라면 그 여자고. 전생과 전전생에 보이지 않았던 너희 둘. 그중 하나가 아니라면 남은 하나겠지.”

루는 벤슨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설사 나라고 한들, 돌아가서 어쩌게? 네가 뭘 바꿀 수 있는데?”

“너도 바꿨는데, 나라고 못 바꾸겠어?”

“하……. 왜 다들 내 말을 못 믿지? 난 바꾼 적이 없다니까?”

“그렇다고 해 줄게. 어차피 네가 죽으면 알게 될 거.”

이것들은 다들 내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나.

루는 이쯤 되니 자기가 얼마나 못 믿을 사람인지 실감했다. 그런 자신을 믿어 주는 아델라한테 고마울 정도로.

‘그래서 아끼는 거지만.’

루는 잠시 고민했다. 골똘히 생각에 잠기나 했는데 곧 환하게 웃었다.

“음― 생각해 보니까, 죽는 건 기분이 나쁘지만 명분은 생기겠네. 고맙다? 죽여 줘서.”

“……?”

저 조그만 머리로 뭔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뭐가 고맙다는 거며, 명분은 또 뭐며, 죽여 줘서 고맙다니? 원래부터 속을 알 수 없는 놈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건 맥락도 잡히지 않는 황당한 이야기였다.

길게 대화를 하다 보면 상대방에 대한 조그만 정보라도 나와야 하는데, 당최 손에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았다.

“뭐 해, 안 죽여?”

저 기다리다 못해 기대하는 눈빛은 뭐야. 어차피 회귀할 거니까 저렇게 당당한 건가? 아무리 그래도 죽음에 저렇게 당당할 수 있나?

“너…… 이거 함정이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당당할 리 없었다.

루는 벤슨의 말에 잠시 허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벤슨한테로 다가가 몸을 살짝 숙여 그와 얼굴을 가까이했다.

“내가 왜? 네가 뭔데. 내가 함정을 파야 할 정도로 나한테 너는 강하지 않은데.”

웃음기가 빠진 루의 눈빛은 가소로운, 혹은 하찮은 생물을 보는 것처럼 무감각했다.

루와 눈빛을 마주한 순간, 벤슨은 검을 빼어 들 수밖에 없었다. 목 뒤로 스치는 섬뜩한 감각이 마치, 실제로 자신의 목이 베이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벤슨은 루를 살려 둘까 생각해 본 적도 있었다. 왜냐하면 루는 전부터 방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벤슨이 모르는 사실까지.

그 정보가 없어진다는 건 조금 아까웠다. 그래서 그는 루를 고문해서 어디까지 정보를 가지고 있나 알아볼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이번 대화로 그는 깨달았다.

루는 아주 위험한 인물이다. 여태 자신보다 한 수 아래로 본 게 의아할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그러니, 반드시 죽여야 한다.

앞으로의 계획에 더 이상의 걸림돌은 사양이었다.

<3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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