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호상이고 싶다 2
| 목 차 |
1부 3장-2. 그녀는 알고 싶다
1부 4장-1. 그녀는 풀고 싶다
1부 3장-2. 그녀는 알고 싶다
이상 현상을 확인하긴 개뿔. 아델라는 금세 잠에 취했다.
처음에는 이저드가 자는지 안 자는지 힐끔힐끔 확인하더니 이제는 아예 그한테 뒤통수만 보여 주고 있었다.
“아델라, 자나?”
이저드는 이 상황이 어처구니없었다. 이상 현상을 확인한다던 사람이 먼저 잠든 이 상황 말이다.
“……닙니다. 안 자…….”
잠꼬대까지 하고 있었다. 이저드는 이렇게나 무방비한 사람이 스파이라거나 배신자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솔직히 조금은 의심했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천장을 바라보다가 슬쩍 아델라를 보았다. 저 좁은 자리에서 뒤척이지도 않고 잘 잤다. 습관이 그렇게 든 건가?
“안 불편한가?”
당연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델라.”
“우움……. 아…… 자요…….”
그가 그녀의 이름을 낮게 부르자, 그때야 또 반응을 보였다. 발음이 뭉개졌지만 안 잔다는 말인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름을 부르면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모양이었다.
이저드는 왜인지 자꾸 그녀를 불러 보고 싶었으나 참았다. 잘 자는 사람 괴롭히는 것 같아서.
이저드는 다시 천장을 보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아델라의 기척이 계속 느껴져서일까. 신경이 쓰였다.
그녀의 작은 숨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녀가 숨을 내쉬고 뱉을 때마다 그의 마음이 갑갑해졌다. 결국 뒤척이던 그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다른 일을 하다 보면 다시 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아델라가 깨지 않게 조심스레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갔다.
* * *
어렴풋한 빛이 들어오는 새벽녘에 아델라는 잠에서 깼다. 밤새도록 이저드를 지켜보기로 해놓고 까무룩 잠자리에 든 아델라는 놀라서 자신의 옆자리를 확인했다.
그러나 침대에는 자신 혼자였다. 그녀는 벌써 이저드가 깼나 싶어 몸을 일으켰다.
‘……응?’
아델라는 졸린 눈을 비비고 어스레한 빛이 비추고 있는 소파를 바라보았다.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으응?
아델라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 쪽으로 다가갔다.
‘헉, 각하잖아. 왜 여기서 주무시는 거람?’
어제까지는 분명 같은 침대에 누웠었는데. 아델라는 어제가 꿈이었나, 지금이 꿈인가 헷갈려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기…… 각하.”
아델라가 우물쭈물 입을 열었지만 이저드는 묵묵부답이었다. 이번에도 자는 척을 하시는 건가? 아니면 진짜 너무 졸려서 저러시나?
아델라는 작은 담요 하나만 덮고 있는 이저드가 너무 추워 보였다. 자기는 엄청 편하게 잘 잤는데, 이저드가 너무 불편해 보여서 양심에 찔렸다.
“가, 각하? 주무시죠? 지금 자는 척하시는 거 아니죠?”
그녀가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이저드한테 다가갔지만 그래도 깨지 않았다.
아델라는 조금 자신감을 갖고 그가 덮은 담요를 두 손가락으로 살짝 들었다.
‘이게 뭐라고 긴장이 되지?’
그녀는 숨도 못 쉬고 자신의 이불과 이저드의 담요를 바꿔치기하는 중이었다. 다행히 이불을 덮어 줄 때까지 그는 깨지 않았다.
‘으응? 이상한데……. 그렇게 피곤하셨나? 분명 잠귀 엄청 밝으시다고…….’
아델라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너무 놀라 이저드의 코 밑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허어어어어…….”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건너편 소파에 앉았다.
‘어떻게 되신 줄 알았잖아!’
아델라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하고 나니 긴장이 확 풀렸다.
정신을 차린 아델라는 자신의 임무를 간과하지 않기 위해 자는 이저드를 빤히 쳐다보았다. 특별히 이상한 느낌은 없었다.
아, 아니다. 너무 푹 주무신다.
‘내가 너무 편하신 건가?’
역시 이저드한테 자신은 여자로서는 아닌가 보다 싶었다. 하긴, 별별 쪽팔린 모습은 다 보여 놓고 이저드가 자신을 조금이라도 이성으로 봐주길 바라는 게 염치없긴 했다.
그가 이렇게 나오니까 마음을 접기가 더 쉽긴 했다. 이제 그저 자신의 임무만 집중하면 됐지만, 씁쓸한 마음은 어쩌지 못했다.
‘접어야겠지? 하…… 시작도 못 했는데.’
아델라는 고개를 저으며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를 좋아할수록 헤어질 때 아프기만 더 아플 것이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목적은 호상! 호상이었다. 지금은 펜베르크 성을 지키는 것도 포함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그녀는 그 두 개만으로도 벅찼다.
* * *
이저드는 자신이 왜 아델라한테 줬던 이불을 덮고 있는지 한동안 고민했다. 익숙한 천장을 멍하니 보던 그는 소파 건너편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돌린 순간 그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따사로운 햇살을 머금어 빛나는 진갈색의 작은 머리통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거기까지는 딱히 문제될 게 없었다. 어제도 봤던 뒤통수였으니까.
문제는 그녀의 목선을 타고 보이는 매끈한 등허리였다. 옷이 야해요! 라고 외쳤던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얇은 천은 햇빛을 받아 안이 더욱 잘 비쳤다. 그는 순간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뒤돌아 있지 않았다면 어땠을지.
이저드는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난생처음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강하게 각인된 그녀의 뒷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았다. 그는 너무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그녀한테 이불을 덮어 줬다. 아델라는 이저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역시 잘 자고 있었다.
그는 언제 그녀가 자신의 담요와 이불을 바꿨는지, 언제 그녀가 소파에 누워 자게 됐는지에 대해 생각해야 했지만, 머릿속이 터질 것만 같아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탁.
“각하.”
잔뜩 굳은 얼굴로 방에서 나온 이저드를 확인한 시종장과 시종들은 깊게 고개를 숙였다.
“집무실로 가지.”
“네. 옷은 그곳으로 준비할까요?”
“그래.”
“아델라 님은……?”
“푹 쉬게 놔두게. 아델라가 나올 때까지.”
그의 명에 모두 고개를 숙였다. 시종들은 저마다 이저드의 첫날밤이 궁금했지만 굳은 표정의 이저드를 보면서 다들 깨끗하게 입을 다물었다. 안 좋았나 보다 하고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카일.”
“네, 말씀하십쇼.”
“오늘부터는 아델라가 평소 입는 옷으로 부탁해. 준비한 잠옷을 불편해 하는군.”
“예. 알겠습니다.”
저 말을 들어보면 오늘도 부르실 생각인 것 같은데……. 표정이 왜 저러실까.
시종들은 서로 눈치를 주며 빠르게 걷는 이저드를 따랐다.
“혹시 뭔가 불편하셨던 거라도 있으십니까?”
시종장이 이저드의 표정을 살피고 먼저 나서서 물었다.
“아니, 없었네.”
그런데 표정은 왜 이렇게 굳어 계신지……?
“아니면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거라도 계셨습니까?”
마음에 들지 않은 건 없었다. 이저드는 그저 울렁이는 마음이 당황스러워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를 뿐이었다.
“없었어.”
그는 그렇게만 말하고 묵묵히 앞서갔다.
* * *
“쟤 왜 저래?”
린다의 물음에 벤슨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어제 별일 없었나 하고 들른 거였는데, 얘가 아주 정신이 나갔다. 꼭 뭐에 홀린 듯 멍을 때렸다. 아델라는 린다가 들어왔는데도 창밖만 보고 있었다.
린다는 아델라한테 다가가기 전에 벤슨한테 나가 보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가 방에서 나가는 것을 확인한 린다는 서둘러 아델라한테 다가갔다.
“이봐요, 아가씨? 아델라? 야, 정신 차려 봐.”
린다는 아델라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아델라는 그녀의 손을 멍하니 보다가 천천히 린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제 무슨 일 있었어? 왜 이래?”
“린다 경.”
“어, 왜?”
아델라는 울상을 하고 린다를 바라보았다.
“저 스파이 실격인가 봐요.”
“뭐?”
“왜 그 생각을 못 했죠?”
“그러니까 뭐?”
아이고, 아이고.
아델라는 자신을 바보라며 테이블에 머리를 콩콩 박았다.
린다는 갑자기 넋 놓고 있다가 뭔가 깨달은 듯 저러는 아델라를 건너편 의자에 앉아 지켜봤다. 혼자 쇼를 하는 건 아주 볼 만한 광경이었다.
“분명 이상하다고 느꼈는데, 다른 생각을 해 버리고 말았어요…….”
진짜 자격 미달이 아닐까. 이저드한테 마음이 뺏겨서 생각지도 못하고 지나갔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었는데 말이다.
“저 진짜 자격 미달이에요…….”
이제는 또 땅을 판다. 린다는 아델라를 계속 구경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마 시간이 많았으면 그냥 계속 지켜봤으리라.
“왜? 뭐? 뭔데.”
아델라가 울상인 표정으로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각하께서…… 아무리, 아무리! 편한 사이라고 해도 잠을 자다가 가까이 다가오면 깨시죠?”
“그런데?”
“어느 정도로 예민하세요?”
린다는 아델라의 물음에 어떻게 대답해 줘야 하나 고민에 잠겼다.
“흠…… 주무실 때는 이 건물 안에 누구도 못 들어오지. 어떤 기척이라도 느껴지시면 잠을 못 이루시니까.”
“그럼, 만약에 헤이든 경이랑 같은 방에서 잠을 자게 된다면요? 뒤척이는 것만으로도 깨세요?”
“왜 예시가 헤이든인지는 모르겠지만, 안 깨시지. 이미 같은 공간에서 자기로 합의한 거니까. 각하께 다가오지 않는 이상은 그냥 주무셔.”
“그럼…… 합의해서 자는 중에, 각하께 손을 뻗으면요?”
아델라의 표정이 꽤 긴장되어 보였기에 그녀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린다는 아델라가 왜 대답이 정해져 있는 물음을 묻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왜 답이 정해져 있는 걸 물어? 각하가 주무시는 중에 손을 뻗는 건 자살 행위 중 하난데.”
린다가 아무렇지 않게 말하자, 아델라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그런 사람한테 자기가 편해서 푹 주무시는 건가? 같은 걸 생각하고 앉았었다. 여자로 안 보이시는 것 같다고 땅도 팠다.
“표정이 왜 그래? 자다가 각하 건드릴 뻔했어?”
뻔이 아니라, 건드렸어요. 건드렸다고요!
아델라는 기척을 잘 숨기는 편이 아니었다. 호위대에 이제 들어간 실력이었으니 다른 호위병들에 비해 턱도 없었다.
그런 자신이 다가갔는데 이저드는 깨지 않았다. 그때 이상함을 느꼈어야 했는데, 혼자 착각이나 하고 자빠졌었다.
“어떻게 해요……. 저 진짜…… 스파이 실격이에요. 완전 실격. 완전 자격 미달.”
이번에는 한숨을 푸욱 쉬었다. 린다는 뭐가 문젠가 싶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아델라의 표정을 보고만 있었다.
“각하를 객관적으로 관찰해야 하는데, 그게 안 돼요. 큰일 났어요.”
“왜? 잘생겨서?”
린다의 말에 아델라는 힘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린다는 대수롭지도 않은 걸로 고민하는 아델라를 보며 웃음이 나왔다. 심각한 문제인 줄.
“그게 왜 문제야? 잘생겼으면 잘생겼구나 하면서 보면 되지. 각하 얼굴은 자주 봐야 익숙해져.”
“계속 보다가 중요한 걸 놓쳤어요…….”
이러다가 땅굴을 파고들어 갈 기세였다.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그 얼굴 보고 정신 붙잡고 있는 것도 대단해.”
“린다 경도 그랬어요?”
“그럴 리가. 나랑 각하랑 만났을 때 각하는 요만했거든? 예쁘장하게 생기긴 했지만, 애였지.”
린다는 직접 손을 들어 이저드의 그 당시 키를 알려 주며 말했다. 그녀와 이저드가 만난 지 12년이 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니까 난 예외. 내가 말한 건 대부분의 여성분이야.”
린다가 그렇게 말했음에도 아델라의 기색은 좋아지지 않았다.
“야야, 오늘 하루였잖아. 하루 놓친 거 가지고 축 처지면 어째. 앞으로는 어쩌게?”
그러게. 앞으로 어떻게 하지.
아델라는 미래를 생각해서 이러면 안 됐다. 자기 마음이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고, 오늘도 이저드를 마주해야 했다.
이따 밤에 이저드가 깨지 않은 것에 대해 말해야 했다. 자신의 개인적인 쪽팔림은 꼭꼭 숨겨 두고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꺼내야 했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
“이런 일이 무슨 일인데?”
“한눈팔아서 생기는 일이요.”
그렇게 비장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린다는 아델라의 굳은 다짐을 듣자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약혼 관계인데 한눈팔 게 어디 있다는 말인가. 자기 약혼자 보는 게 한눈파는 건 아니지 않은가.
“너.”
“예?”
“이렇게 되기 전에 정혼자가 있었어?”
“아니요?”
린다는 우선 안심했다. 어느 날 갑자기 전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요! 하며 도망가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왜 한눈을 판다 어쩐다 그래?”
“아아, 제 임무에서 한눈팔지 않겠다고요.”
갑자기 도망갈 것 같진 않았지만, 이건 이거 나름 문제인 것 같았다. 린다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이저드와 아델라가 잘됐으면 하는데, 둘 다 영…….
이저드한테는 아예 기대도 하지 않았고, 그나마 아델라한테 기대를 걸었는데, 둘 다 도긴개긴 같았다. 보고 있으면 귀여운 맛이 쏠쏠하긴 했으나 답답해 죽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어차피 약혼 관곈데 뭐 어때?”
“그냥 약혼 관계가 아니잖아요…….”
“그럼, 진짜 약혼 관계로 만들면 되지.”
말처럼 모든 상황이 쉬우면 얼마나 좋을까.
아델라는 이미 이저드한테 선언을 했다. 이 일이 끝나고 전쟁이 무사히 끝나면 자신의 원래 생활로 돌아가겠노라고. 아델라한테 이 자리는 어울리지 않았다.
예상치 못하게 일이 너무 커지는 바람에 여기까지 왔지만 아델라는 자신이 공작의 정식 약혼녀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 자리는 한시적으로 잠시 빌린, 언제고 돌려줘야 할 자리였다.
“으응, 아니에요. 전 지금이 좋습니다.”
포기는 쉬웠다. 아델라한테는 참 쉬운 일이었다. 살아오면서 자주, 매 순간 포기해야 했으니까. 아델라가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였다.
린다는 그녀가 지금이 정말 좋아서 웃고 있는 건지 헷갈렸다. 분명 눈과 입은 웃고 있었지만, 어딘지 힘이 없어 보였다.
* * *
이저드는 오늘 내내 미칠 지경이었다. 자신이 이렇게도 시각적으로 약했던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그녀의 뒷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정말 온갖 생각을 했다. 자신이 욕구불만이었나, 왜 유독 아델라만 생각이 날까, 아델라한테 애먼 생각을 품었나.
아예 대놓고 나체로 뛰어든 여성들도 많았지만, 그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이 사람을 쫓아내야겠다, 정도뿐이었다. 그런데 왜, 어째서 그녀의 등허리만은 눈을 감아도 생각나고 떠도 생각나는지, 그는 정말 당혹스러웠다.
이저드는 그녀를 잊기 위해 일에 열중했지만 도저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델라한테 너무나 무례한 일임을 알면서도 지워지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잠이 오지 않는다고 훈련을 하지 말걸. 그녀가 깰까 봐 소파에서 자지 말걸. 자신의 행동이 후회됐다.
“각하, 각하?”
“……왜 그러나?”
이저드는 굳은 얼굴로 헤이든을 올려다보았다. 헤이든은 오늘 내내 저 표정인 이저드가 조금 걱정됐다.
“안 들어가십니까? 밤이 늦었습니다. 전 이제 퇴근한다고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이저드는 어지럽게 펼쳐진 서류들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 보게.”
“각하께서는…….”
“나도 곧 들어가지.”
“예. 그런데 무슨 일 있으십니까?”
“……없네.”
그의 대답이 조금 늦었다. 그러자 헤이든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아침부터 이 상황이니 당연했다.
“진짜로요? 정말로요? 저 들어가도 되는 거죠?”
“그래.”
끝까지 말 안 하려는 모양이다. 헤이든은 오늘은 포기하고 내일 다시 묻기로 했다. 그는 고개를 꾸벅이고 이저드의 집무실을 나갔다.
이저드는 헤이든이 나가자 작은 한숨을 쉬었다. 이 현상을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그는 서류를 최대한 천천히 정리하고 침실로 향했다. 오늘도 그녀가 있을 걸 생각하니 가슴 한편이 답답했다.
이저드는 침실에 들어가기 전에 호흡을 가다듬었다. 침실 안에서 그녀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보이기 위해 애썼다.
탁.
아델라는 어제처럼 소파에 앉아 있었다. 오늘은 어제처럼 움츠리고 있지도 않았고, 이저드가 들어오자 소파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오셨어요.”
정말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복장은 평범했다. 레이스가 조금 달린 것 말고는 옷이 비치지도 않았다. 딱 보통 잠옷이었다.
그런데 왜 또 오늘 아침에 그…….
이저드는 그녀와 시선을 맞추지 못했다. 둘 사이에 아주 잠시 정적이 흘렀다.
“저, 죄송합니다!”
“아니, 내가 미안하네.”
서로 다른 이유로 사과를 한 둘은 의아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각하께서 뭐가 미안하세요?”
“그대가 왜 미안하나?”
둘은 또 동시에 물었다. 잠시 눈치를 보던 아델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게……. 제가 놓친 게 있거든요.”
“놓친 거?”
“각하께 이상한 점이 발견되면 다 말씀드리기로 했잖습니까.”
“그랬지.”
“오늘 새벽에 각하의 상태가 이상했었는데,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말씀 못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이저드는 잠시 오늘 새벽에 무슨 일이 있었나 생각했다. 그러다 이상했던 점에 대해 빠르게 떠올리곤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미쳤군. 제정신이 아니야.’
어떻게 그 사실을 잊었는지. 이저드는 정말 심각하게 자신이 욕구불만이거나 변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각하?”
“……계속 말하게.”
“아, 네. 이상한 점은 제가 각하께 이불을 덮어 줬고, 건너편에 앉아 있었는데도 깨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그래. 왜 그걸 잊고 있었을까. 가장 먼저 의심했어야 하는 부분이었다. 스스로 이상했음을 직감했는데도 온종일 잊고 있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실수를 할 리가 없었다. 이저드는 꼭 뭐에 홀린 기분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제대로 확인할 겁니다. 걱정 마십쇼. 두 눈 부릅뜨고 알아내겠습니다.”
흔들림 없는 아델라를 보며 오늘은 안 될 것 같다고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앞으로도 자신이 없었다. 자신이 했던 말을 무의식중에 뒤집어 버릴까 봐.
“……그, 렇게 하게.”
이저드는 무표정하게 말하고 옷을 갈아입으러 옷 방으로 향했다. 그가 작은 방에 들어가자 아델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 그렇지? 잘 넘어가서 다행이다…….’
반면, 이저드는 옷 방에 들어가서 한동안 굳어 있었다.
어제 왜 곁에서 자자는 말을 수락했을까. 이대로 그녀와 같은 침대에 누워도 되는 걸까.
아니, 되겠지. 돼야 한다. 괜찮을 거라고 내뱉어 놓고 안 괜찮으면 안 되었다. 이저드는 자신을 철석같이 믿고 옆을 지키겠다는 그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 * *
아델라는 눈을 부릅뜨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오늘만은 먼저 잠들지 않으리라.
“각하, 주무세요?”
“안 자네.”
“얼른 주무세요!”
“그럼, 말을 시키지 말게.”
아, 그렇구나. 아델라는 민망해져서 눈만 깜박였다.
이저드도 나름대로 노력 중이었다. 옆에 돌이 있다고 생각하며 자는 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아는가. 이저드는 감기지 않는 눈을 억지로 감았다.
“저, 근데 각하.”
“……왜?”
“아까, 왜 미안하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이저드는 이제 와서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그렇게 가리고 싶었던 맨살을 봤다고 실토할 수도 없었고, 본 것을 넘어 심지어 계속 생각까지 난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어째 점점 죄인이 되어 가는 기분이었다.
“……계속 의심하고 있어서 미안하네.”
이저드는 결국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아! 괜찮습니다. 당연한 걸요.”
“이젠 아니니 그대가 할 일만 생각하게. 그동안 미안했어.”
“아닙니다. 저야말로 죄송했습니다. 믿어 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아델라는 자기 마음을 티 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저드가 점점 자신한테 마음을 열고 있다. 믿음을 주고 있었다. 그녀는 뿌듯한 마음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런 관계가 맞는 거다. 이런 관계가 편했다. 남녀를 떠나 서로한테 믿음을 줄 수 있는 관계. 이저드의 곁에 있으려면 그 관계가 가장 중요했다.
마음을 다잡는 그녀와 다르게 양심이 무척 찔리는 이가 있었으니, 그녀의 옆에 누워 두 눈을 꾹 감은 이저드였다.
의심이 거의 사라진 건 맞았다. 그는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지만 왠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저드는 그녀한테 다른 마음이 든다는 것을 이때까지는 잘 몰랐다.
“이제 진짜, 진짜 주무세요. 말 안 걸게요…….”
또 자려는 사람을 방해한 기분에 아델라는 다시 미동도 없이 천장만 쳐다보았다.
그렇게 한 시간, 두 시간……. 꽤 긴 시간이 흘렀다.
아델라는 그동안 자다 깨다,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중간에 한두 번 정도 깊은 잠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임무를 망각하지 않고 피곤한 눈을 억지로 떴다.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보이는 얼굴은 당연하게도 이저드였다.
아델라는 또 넋을 놓고 그의 옆얼굴을 감상했다.
신이 만들어 놓은 조각상이 아닐까. 아델라의 시선은 오뚝하게 솟은 콧날을 시작으로 굳게 다문 입술과 매끈하게 떨어지는 턱선을 지나 좀 더 아래로 내렸다. 이저드의 목선에서 머물던 그녀는 자신의 눈이 더 내려가기 전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 정신 차려라! 해야 할 일! 해야 할 일!’
사람 마음이 어찌나 갈대 같은지, 막상 눈앞에 그가 있으니 또 흔들렸다.
아델라는 비교적 빨리 정신을 차리고 이저드가 자는지 안 자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를 빤히 보았다.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잠에 빠져든 지 좀 된 것 같았다.
‘잘 자는 사람 깨우는 것 같아서 좀 죄송하네.’
그래도 확인 차원에서 해야 하는 일이었다. 어제 그 일이 자꾸 마음에 걸려서.
근데 잘못 건드렸다가 죽으면 어쩌지. 분명 린다는 자는 이저드를 건드리는 건 자살 행위라고 했다.
‘에이……. 그래도 내가 옆에서 자는 거 아는데, 설마.’
그렇게 생각해서 내민 손이었다. 그저 이저드가 깨는지 안 깨는지만 확인하려고 들이민 손이었다. 그한테 닿을 생각으로 내민 손이 절대 아니었다.
쓱―
하고 손을 내밀자마자 순식간에 그한테 잡혀서 끌려갔다.
“끄약!”
눈 깜짝할 새에 그의 아래에 갇힌 아델라는 너무 놀라 눈만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날카롭게 빛나는 이저드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이저드를 만나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눈빛이었다. 당장이라도 목이 달아날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저, 저예요, 저! 저요, 아델라! 죄송해요!”
일단 자신이 잘못한 것이니 그녀는 빌었다. 비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린다의 말이 맞았다. 방금 자신은 자살행위를 한 것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확인해 봐야 했던 일인 것을!
아델라가 울상을 지으며 말하자 그제야 이저드의 정신이 돌아왔다. 맹수처럼 빛나던 그의 눈빛이 안정을 되찾으며 평소의 상태로 돌아왔다.
차차 정신이 돌아온 그는 다른 의미로 아찔해졌다. 이저드는 자신의 밑에 깔린 아델라한테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하얀 시트 위에 아무렇게나 흐드러진 긴 진갈색 머리카락과 어둠 속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나는 울망울망한 황금빛 눈망울. 죄송하다며 소심하게 벌어진 입술, 그리고 전에 한 번 만져 본 적 있는 그녀의 보송한 두 뺨과 그 밑으로 떨어지는 그녀의 고운 목선까지…….
어디 하나 눈에 담기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녀의 뒤태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그녀의 전부가 이저드의 눈에 담겼다. 그는 그녀를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저…… 각하? 손…….”
그가 잡아채서 내리누른 손을 그녀가 힐끔 보았다. 그의 손에 잡힌 그녀의 손목은 조금만 힘을 줘도 부러질 것처럼 가늘었다. 이저드는 울렁이는 마음을 애써 누르며 그녀를 일으켰다.
“미안하네. 다친 곳은 없나?”
“아, 네. 각하께서 미안하실 거 없습니다. 제가 확인하느라…….”
이저드가 말한 미안함은 그녀와 의미가 달랐다.
그녀를 자신의 품에 둔 순간 그는 그녀가 제 품에서 빠져나가지 않길 바랐다. 그녀를 잡았던 손바닥의 감촉이 너무 생생하게 느껴져서 순간 그대로 품에 안을 뻔했다.
자기한테 티끌만큼의 인내심이 남아 있었다는 것에 이저드는 큰 안도를 느꼈다.
“……아델라.”
“예, 예?”
아델라는 아델라 대로 심장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의 눈에 홀려 이 자세로 계속 있어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해 버렸으니 말이다.
이러다가 못 참고 자기가 덮치게 되는 건 아닐지 걱정됐다.
‘공과 사는 구분하자, 아델라야!’
“오늘은 그대 방으로 돌아가서 자는 게 좋겠어.”
“네, 네! 각하 괜찮은 거 확인했으니까……. 네, 그게 좋겠네요.”
끝까지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 아델라를 보며 이저드는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아델라는 상관이 없는 걸까. 정말 아델라는 자신한테 아무 마음도 안 드는 걸까.
그는 문득 이상한 오기가 올라왔다.
아델라는 심각한 분위기의 이저드를 보다가 슬그머니 침대에서 내려왔다. 마침 잘됐다. 안 그래도 심적으로 힘들었는데, 가서 마음을 달래야겠다. 그녀가 침실 문을 열기 전에 이저드한테 인사하기 위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주무세요.”
“……아델라.”
아델라가 문을 열다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는 언제 침대에서 벗어난 건지 모르게 성큼 아델라한테 다가와 있었다.
응? 어라? 어?
이저드가 너무 거침없이 다가와서 그녀는 문고리를 잡고 문에 딱 붙었다. 문은 언제 열렸냐는 듯이 열리자마자 닫혔다.
이저드는 그녀와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아델라한테 손을 뻗었다. 그러곤 아무렇지 않게 문고리를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방금 한 말은 취소하겠네. 내가 그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내쳤군. 그대는 그냥 내 상태를 확인하려던 것뿐인데. 미안하네.”
“예……? 괜찮…….”
아, 아니, 전, 가고 싶…… 가야 될 것 같…… 제 마음은 저기 문밖으로 이미 나갔……!
아델라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지만 그는 못 본 건지 손을 부드럽게 잡아 그녀를 이끌었다. 다시 침대로. 아델라는 자신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는 이저드의 손을 빤히 보았다.
소, 손 잡았어! 손을 잡았어! 별거 아닌 일인데 그녀한테는 심장에 너무 크게 닿았다.
‘흑흑흑…… 저 신경 쓰지 마세요. 친절하게 대해 주지 마세요.’
착각하고 싶지 않은데 착각할 것 같았다.
“오늘도, 내일도 계속 이럴 테니, 내가 앞으로 조심하지. 쉽게 고쳐지지는 않을 거야.”
‘안 고쳐도 돼요! 왠지 저를 위해서인 것 같잖아요!’
아델라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조심하겠습니다. 각하께서 바꾸실 필요 없어요. 앞으로는…… 손 절대 안 뻗겠습니다. 말로 부를게요.”
이렇게까지 선을 확실하게 그어 주니, 이저드는 점점 더 그 선을 넘고 싶었다.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마음이 아델라한테 향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아델라는 자신을 눈곱만큼도 남자로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원래라면 잘라 내야 할 마음이었지만 아델라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포기할 이유가 없었다. 앞으로 아델라가 자신의 약점이 될 일은 없었고, 약점이 되더라도 그녀를 건드린다면 그도 가만히 있지 않을 생각이었다.
“알겠네. 앞으로도 부탁하지.”
아델라는 애써 웃었지만 사실 울고 싶었다.
‘왜 이렇게 절 경계 안 하시는 거죠?’
각자 서로 다른 부분에서 엇갈리긴 했지만, 둘은 이제 막 한 걸음을 뗐다.
* * *
“경.”
“예?”
자신의 집무실까지 찾아온 이저드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지켜보던 헤이든이 얼른 대답했다.
“내가 매력이 없나?”
“……?”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헤이든은 황당한 표정으로 이저드를 쳐다보았다.
“누가…… 매력이 없답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네.”
헤이든은 평소와 같은 무표정이었지만 기운이 없어 보이는 이저드를 보면서 말을 골랐다.
“매력이 없을 리가요. 일단 각하의 외모 보고 안 반할 사람이 없고, 남자인 저도 부러울 정도의 다부진 몸을 지니셨죠. 부와 권력도 빠질 수 없고, 매너도 있으시지! 각하께서 마음먹으면 안 넘어올 사람이 없죠.”
“내가 마음먹어도 안 넘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그런 사람은…… 강철로 심장을 만들었나.
헤이든은 그에게 무슨 조언을 해 줘야 할지 잘 몰랐다. 그가 마음먹고 누군가를 자신한테 넘어오게 하는 걸 본 적이 있어야 무슨 조언이라도 해 줄 텐데, 이저드는 평생 그런 것과는 담쌓고 산 사람이었다.
“그럼, 일단 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제가 봤을 때는 조금만 정성을 기울이시면 각하께 안 넘어오는 분은 없을 것 같은데.”
“뭘 해 보라는 말인가?”
“지금 물으시는 뉘앙스로는…… 유혹?”
“내가?”
“예.”
헤이든이 해 줄 수 있는 조언은 그것뿐이었다. 원하는 바가 있으면 쟁취해라? 헤이든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의외로 이저드는 매우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각하…… 지금 고민하시는 거, 아델라 님 때문입니까?”
“그래.”
너무 쉽게 인정하는 이저드를 보며 오히려 헤이든이 놀랐다.
“언제부터요?”
“그건 잘 모르겠군.”
한 달 전부터였는지, 두 달 전부터였는지, 아니면 요 며칠 그렇게 됐는지.
“언제부터였는지가 중요한가?”
“굳이…… 그렇진 않죠.”
헤이든도 아델라가 싫은 건 아니었다. 그녀가 안주인이 된다면 나쁠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그녀의 가문이 걸렸을 뿐이다.
“괜찮겠습니까?”
“뭐가?”
“벨제프 자작가 말입니다. 솔직히 전 좀 걱정됩니다.”
벨제프 자작가에 빚이 많다던가, 무늬만 귀족이라던가 하는 이유로 걱정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이저드의 상대로는 한미한 가문 집안이 더 나았다. 주변 귀족들의 경계를 늦출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럼 그녀의 오라버니가 왕의 최측근이라는 것? 그것도 큰 문제가 되는 건 아니었다. 아델라가 확실하게 공작의 편이라면 문제될 건 없었다. 공작은 그저 왕의 말을 따른 것뿐이니까.
가장 문제가 되는 건 다른 것이었다. 그녀의 가문을 조사하면서 헤이든은 어떤 사건을 기점으로 조사를 멈췄다.
아델라가 말도 하지 않았는데, 일부러 남의 집안사와 남의 상처를 캐낸 것 같아 아델라한테 정말 미안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미안한 건 미안한 거고, 공작한테 어떤 영향을 끼칠지에 대한 건 따져 봐야 했다. 그는 공작의 심복이었기에 공작한테 안 좋은 영향을 끼칠 만한 건 다 찾아내야 했다.
“각하께 소중한 사람이 되면, 왕이 어찌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한 번 그런 일이 일어났던 가문이라…… 아델라 영애가 필요 없어지면 다시 그 일을 빌미로 몰아갈까 봐요.”
그렇게 또, 소중한 사람을 잃는 고통을 느끼실까 봐.
뒷말은 삼켰다. 헤이든은 서로 다른 이유였기는 하지만 같은 고통을 가지고 있는 아델라와 이저드를 응원해 주는 게 맞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저드는 헤이든의 말에 잠시 침묵했다. 그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이저드가 왕한테 반기를 들지 않는 이상 또, 그런 일은 언제든 반복될 수 있었다.
“경.”
“예.”
“경은 내가 가만히 있었던 게 그저 그날의 고통 때문이라고만 생각하나?”
“예?”
그 일이 가장 클 것이다. 헤이든은 그 뒤 완전히 바뀐 이저드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 그것도 맞아. 난 아직도 두렵네. 언제나 조심하지. 지금도 그래. 나도 알고 있네. 그런데 그것도 아나?”
“뭘…… 말입니까?”
“쥐가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지.”
쥐에 비유하기에는…… 이저드는 완전히 맹수 과였다.
“물겠다고요? 각하께서요?”
“말했지 않나. 궁지에 몰리면. 난 내 사람들만 건드리지 않으면 그의 뜻대로 살아 줄 의향이 있네.”
그래, 쥐가 아니었다. 이저드는 조용히 날카로운 이빨을 숨기고, 몸집이 작아 보이게 웅크리고 있는 확실한 맹수였다.
“마녀사냥을 막으시려면…… 무는 거로 끝나시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렇겠지.”
아니, 이분이 왜 이러시는 거야? 뒤로 방비해 둔 거라도 있는 거야? 헤이든은 또 자기 모르게 그가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저 몰래 뭐 해 놓으셨죠? 아니면 앞으로 할 거죠?”
“그럴 리가 있나. 경이 모르는 일은 없을 거네.”
거짓말이다, 거짓말이야.
헤이든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저드와 살아온 세월이 있는데. 그가 살짝 입가를 올리며 어색하게 웃을 때는 분명 뭔가 있었다.
“말 안 해 주실 겁니까?”
이저드는 금방 무표정이 돼서 헤이든을 바라보았다. 안 해 줄 게 확실했다.
“알겠습니다. 전 각하를 믿습니다만, 조금은 슬퍼해도 되는 거죠?”
“미안하군.”
이러면 대놓고 토라지지도 못하잖은가.
헤이든은 한숨을 푹 내쉬고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자신은 어차피 그가 하겠다는 일은 무조건 따를 것이다. 맹세했으니까.
* * *
이, 이분이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요 며칠, 아델라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마음을 다잡으려고 얼마나 노력하는 중인데 거기에 이저드가 보란 듯이 찬물을 끼얹고 있었다.
옷 방에서 실수로 웃통을 벗고 나오는가 하면, 샤워하고 왔는지 촉촉하게 젖은 머릿결을 보여 주지를 않나. 아침에 눈을 뜨면 정면에 잘생긴 얼굴이 엄청 가까이에서 딱 보이고 심지어 식사 때마다 자신을 불러 같이 밥을 먹는가 하면…….
이저드는 완전히 작정한 듯 아델라의 도 닦기를 방해했다.
같이 식사하는 것은 밖으로 보여 주기 위한 하나의 계획된 모습이니 그렇다고 쳐도, 나머지들은 도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가슴 앓다 죽으라는 건가.
“벤슨 경.”
“왜?”
“원래 안 그러던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시기가 다가온 거 아닐까요?”
“뭐?”
“각하께서 이상해요…….”
아델라는 심각했는데 벤슨은 아델라를 보며 웃었다.
“요즘 각하가 이상해졌다는 소문이 돌긴 하지. 아델라 님한테 푹 빠진 것 같다고.”
그건 아델라가 원하는 소문이었다. 그러려고 밤마다 이저드의 침실을 드나들었으니. 하지만 아델라는 정말로 진지하게 이분이 왜 이러실까 하는 고민에 빠졌다.
이게 말로만 듣던 이상 현상인가? 이게 그 이상 행동인가? 근데 또 이상 행동이라고 하기에는…… 실수인 것처럼 하시니까…….
그랬다. 바로 이게 문제였다. 실수인 것처럼!
그래서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실수로 웃통을 벗고 나오시고, 샤워한 뒤 머리를 안 말리시고, 자다가 마주 보게 되고!
친절한 건 그대로인데, 묘하게 바뀐 그의 태도를 뭐라 확 꼬집어 말하기가 모호했다. 그래서 더 미칠 노릇이었다.
“각하께서 아델라 님한테 빠진 게 이상한 건가?”
“아, 아뇨. 그건 아니지만…….”
“그럼, 이상할 거 없잖아?”
벤슨이 웃으며 물었다. 아델라는 벤슨한테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을 수가 없어 그저 웃었다.
이 상황에서 아델라가 가장 걱정되는 건 이러다가 아델라도 어머, 실수! 라면서 이저드가 잘 때 부둥켜안아 버릴까 봐……. 그런 틈을 자꾸 이저드가 제공해 줘서 강한 유혹을 느꼈다.
역시 평소의 이저드는 아니었다. 뭔가 이상해져도 단단히 이상해진 듯싶었다.
“하하……. 갑자기 부하에서 약혼녀로 바뀌어서 적응이 안 되나 봐요.”
그렇다고 벤슨한테 이 모든 사실을 털어놓을 수 없으니 대충 둘러댔다.
“그럴 수 있지, 그럼.”
벤슨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각하께서 사랑에 빠지실지 몰랐으니까. 당연한 결과였다고 해야 할지? 아델라 님이 예쁘니까.”
벤슨은 아델라의 속도 모르고 칭찬이라는 듯이 웃어 보였다. 벤슨의 반응으로 보아하니 소문이 빠르게 퍼진 모양이었다.
계획이 성공적으로 되어 가는데 아델라는 이저드의 묘하게 바뀐 행동 때문에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이 고비를 잘 넘길 수 있을지…….
아델라는 오늘 밤은 어떻게 버텨야 하나 고민하며 밖으로 나왔다. 이제 막 교육이 끝나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던 중이었다.
“아델라!”
그녀는 소리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앳된 티가 나는 소년이 있었다. 세상에 다시없을 것 같이 얇고 긴 은발은 바람에 휘날리고 있음에도 하나도 엉키지 않고 하늘하늘 흔들렸으며, 루비를 박아 놓은 것 같은 소년의 적안은 맑고 투명했다.
아델라는 신비로운 분위기의 소년을 보자마자 얼굴에 꽃이 핀 듯 환하게 웃었다.
“루……?”
“루! ……우응?”
아델라는 힘차게 루를 부르려다가 의아한 표정으로 벤슨을 바라보았고, 동시에 루의 이름을 말한 벤슨도 아델라를 의아한 표정으로 보았다.
“어? 뭐야? 벤슨은 왜 여기 있어?”
순식간에 아델라 곁으로 다가온 루는 의아한 표정으로 벤슨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셋은 다 머릿속에 많은 물음표를 띄우고 있었다. 이 상황은 마치 삼각관계 같은 모양새였다. 삼각관계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둘이 아는 사이예요?”
상황을 파악 중이던 아델라가 먼저 물었다.
“그러는 둘은?”
벤슨도 덩달아 물었다. 아델라는 벤슨과 루를 번갈아 보았고, 루에 대해 막 입을 열려던 찰나, 루가 먼저 입을 뗐다.
“아델라는 내 소꿉친구, 벤슨은 내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만난 친구.”
“아, 아아―.”
전 세계를 돌아다녔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이런 우연이 다 있나. 아델라가 약간 놀라워하며 벤슨을 쳐다보자, 벤슨도 싱긋 웃었다.
“우연이 계속되면 운명이라고 하던데.”
“저랑 벤슨 경이요? 에이, 저희는 아니죠. 우연이라고 해 봤자, 친구가 겹친 것뿐인 걸요? 그치?”
아델라는 오랜만에 만난 루를 보면서 다시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렇지. 내가 전국에 사귀어 놓은 친구가 한두 명도 아니고.”
“맞아요. 루는 발이 넓은 걸요.”
벤슨은 비슷한 키에 비슷한 긴 생머리에, 얼굴까지 예쁘장하게 생긴 비슷비슷한 둘을 보며 난감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말을 농담으로만 받아들이는 모양이었다. 그는 어차피 상관없나 싶어 생글생글 웃었다.
“그런데 여긴 어떻게 왔어?”
벤슨은 아무 말도 안 했다는 것처럼 바로 화제를 돌렸다. 그의 물음에 무언가 퍼뜩 떠오른 루가 아델라를 보며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맞다! 이거 어떡하냐!”
“응? 뭐가?”
아델라가 얼떨떨하게 물었다.
“너희 아버지……!”
“아버지? 왜? 만났어? 해코지했어? 어디 다쳤어?”
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델라는 급하게 루의 몸을 살폈다.
“아, 아니, 다친 건 아니고…… 협박을 좀…….”
“뭐? 뭐라고? 나 있는 곳 알려 주지 않으면 죽이겠대?”
얼추 비슷했다. 루는 아델라의 눈치를 보며 크게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데려왔거든? 난 진짜 펜베르크 성문 앞에서 막힐 줄 알았지. 성 관문을 통과할 수 있을 리 없잖아, 사병을 데려왔는데. 난 그사이에 얼른 도망치려고 했고. 근데…… 통과를 시켜 주네?”
루는 점점 경악으로 변하는 아델라의 표정을 보면서 면목이 없어졌다.
아델라가 공작의 약혼녀가 됐을지 누가 알았겠냐고. 대충 기회 봐서 여기 아니지, 멍청이들아, 하고 도망가려 했다. 그는 아델라한테 어떤 변명도 할 수가 없었다. 다 그의 판단 미스에서 비롯된 일이었으니 말이다.
“미, 미안…….”
“……지금, 지금 어디 있어?”
아델라는 멍청하게 이곳에 서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게, 저기로…….”
루가 손가락을 들어 가리킨 방향은 공작가 저택의 중앙 건물이었다. 자신과 공작의 침실은 물론, 공작의 집무실 또한 있는 곳이었다.
“알겠어. 고마워. 넌 다친 곳 없는 거 맞지?”
“응.”
“벤슨 경, 루 좀 제 방으로 안내해 주세요. 전, 각하께 다녀올게요.”
아델라는 그렇게 말하고 거의 뛰다시피 빠른 걸음으로 이저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남은 둘은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곳만 응시하였다.
“협박을 받았다고? 네가?”
“너도 사병에 겹겹이 둘러싸여 봐라. 그런 말이 나오나.”
“난 빠져나올 자신 있어.”
벤슨이 그렇게 말하고 걸음을 옮기자, 루는 그런 벤슨을 따랐다.
“근데, 너 진짜 왜 여기 있냐? 너도 가출했냐?”
“가출 아니야. 연을 끊어 버린 거지.”
그가 생글 웃으며 말했다. 그 미소가 어쩐지 평소와는 약간 다르게 보였다.
“그래, 뭐. 네가 어떻게 살든 나랑은 상관없지. 우리가 만난 것도 벌써 5, 6년 전인데.”
5, 6년 전인 것치고 루는 하나도 바뀐 게 없었다. 키도, 외모도, 성격도. 이걸 초동안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아, 그런데 아델라는 안 돼.”
“뭐?”
잘 걷다가 생뚱맞은 이야기를 하는 루를 벤슨이 돌아보았다. 허리까지 오는 은발을 지닌 미인은 곱게 웃음 짓고 있었다. 둘 사이에 알 수 없는 기류가 흘렀다. 그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묘한 기류가 깨진 것은 잠시 후 벤슨이 웃음을 터뜨리면서였다.
“푸핫! 넌 날 뭐로 보는 거야? 주군의 여자를 탐내고, 그런 거 아니야!”
“그래? 탐내는 게 아니면 뭘까?”
루는 웃고 있는 벤슨을 뒤로하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 * *
루가 아델라한테 벨제프 자작에 관해 이야기하기 훨씬 전, 이저드는 이미 그녀의 아버지를 만나고 있었다.
요 며칠 아델라의 반응을 보며 즐거웠건만, 여태 쌓아 올린 모든 좋은 감정이 한 번에 싹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사라진다 뿐인가. 분노까지 느껴졌다.
아델라의 대략적인 가정사는 헤이든의 보고를 들어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 절망적이었다. 이런 사람 밑에서 어떻게 커왔는지 그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 이야기는 끝난 것으로 안다만. 전하께서 해결해 줬지 않나?”
“예, 예. 그런데 전하께서 해결해 준 부분은…….”
벨제프 자작은 자신의 건너편에 목을 꼿꼿이 세우고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흰머리가 희끗희끗 보이는 그는 바로 6년 전 아델라가 집을 나가게 한 장본인이었다.
가웨인 백작.
이저드는 그와 같은 공간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심히 좋지 못했다.
“아주 예전부터 있던 가문의 빚이고요. 6년간 아델라와 파혼 선언을 하지 않고 기다려 준 가웨인 백작님의 위자료에 대해서는 아직…….”
이는 거짓말이었다. 이미 그는 위자료보다 더 큰 돈을 받은 상태였다.
이저드는 이렇게 뻔뻔하게 나오는 둘을 그 자리에서 내쫓아 버리고 싶었다. 만일 벨제프 자작이 아델라의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만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저드의 차가운 시선이 가웨인 백작에게 날아들었다. 가웨인 백작은 그의 눈빛에 움찔했다가 자신의 옆에 있는 비서한테 고갯짓을 했다.
“흠, 흠. 확인해 보시죠.”
가웨인 백작의 비서가 건넨 종이에는 상당 금액의 위자료가 적혀 있었다. 왕한테 받은 액수보다 더한 금액이었다.
이저드와 함께 금액을 확인한 헤이든이 어이가 탈출한 표정으로 가웨인 백작을 보았다. 이걸 지금 위자료라고 적은 거야? 누굴 호구로 아나.
가웨인 백작은 자신이 찔렸던 건지 아무 반응이 없는 이저드 앞에서 구구절절 위자료에 대한 이유를 털어놓았다.
“제가 6년간 벨제프 영애만 기다린 세월도 있고, 무엇보다 처음에 벨제프 자작가와 계약을 할 때 영애가 처녀인 줄도 모르고 그보다 적은 금액을 적었습니다. 처녀인 줄 알았다면 서너 배는 더 적었을 테죠. 각하께서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이 바닥에서 그 사실은 중요하니까…….”
입으로 똥을 싸는 건지, 방귀를 뀌는 건지, 아니면 둘 다인지는 모르겠으나 입이 더럽다는 것은 아주 잘 알겠다. 헤이든이 듣다듣다 화가 나서 욱하자 이저드가 막았다. 이저드는 의외로 침착해 보였…….
아, 아닌가.
헤이든은 급격하게 떨어진 주변 온도를 느끼며 조용히 검에서 손을 놨다.
“그래서 나온 금액이 이 정돈가?”
“예, 예.”
보아하니 이 돈을 둘이 나눠 먹을 셈인가 보다.
아무리 대부분의 가문에서 딸의 존재가 이 정도라지만, 어떻게 이렇게 대놓고 상대 가문을 벗겨 먹을 생각을 할 수 있는지, 한편으로는 대단했다.
“좋아. 물어주지. 위자료는 한 달 안에 가웨인 백작가로 보내겠네. 이 정도 금액이면 이쪽에서도 준비해야 할 게 많아서.”
벨제프 자작은 화 한번 내지 않고 의외로 쉽게 받아들이는 이저드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일이 잘 풀렸다.
루도 아델라가 자신을 만나 줄 것 같지 않아서 인질로 이용할 겸 잡은 거였는데 성문이 알아서 좌르륵 열리고, 공작이 자신을 만나기 꺼릴 줄 알았더니 처음부터 공작의 집무실로 안내받았다. 게다가 지금은 또 말도 안 되는 금액의 위자료를 물어준단다.
이저드가 아델라한테 빠져 모든 걸 해 준다는 게 거짓 소문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더 할 말이 있나?”
벨제프 자작은 가웨인 백작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저, 그럼 계약서를…….”
“그래, 계약서가 있었군. 그럼 먼저 둘이 한 계약서부터 보여 줘야 하지 않나? 사실인지는 확인해야 하니.”
“아…….”
둘은 다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건 저희 가문에서 보관 중입니다.”
가웨인 백작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그럼 돌아가서 바로 보내 주면 되겠군. 확인 후에 계약서를 보내겠네.”
벨제프 자작과 가웨인 백작은 이쯤에서 물러나야 했다. 계약서 따위 있을 리가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런 건 돌아가서 만들면 되니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흰 공작 각하만 믿고, 이만 일어서겠습니다. 바쁘신 분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
가웨인 백작이 먼저 일어난 사이, 어정쩡하게 일어선 벨제프 자작이 이저드를 보았다.
“저…… 전, 아델라를 만나고 싶은데…….”
“이를 어쩌나. 아델라는 지금 몸이 좋지 않아.”
이저드는 아델라가 원치 않는 이상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를 서로 만나게 해 주고 싶지 않았다.
“잠깐 얼굴이라도…….”
“미안하군. 내 침실에는 아델라의 아버지라도 들이기가 힘드네.”
벨제프 자작은 아무렇지 않게 딸아이의 이름을 입에 담고, 벌써 합방을 했다는 사실까지 숨기지 않는 이저드를 보며 놀란 표정으로 입을 닫았다.
“아, 문은 내가 열어 주지.”
벨제프 자작이 멍하게 서 있는 사이 이저드가 먼저 문을 열었다. 얼른 나가라는 의미였다.
가웨인 백작은 이미 나간 상태였고, 벨제프 자작은 뒤늦게 허둥지둥 이저드한테 다가갔다.
“그럼 조심해서 가게. 아델라는 걱정하지 마. 내가 잘 하겠네. 이제 내 사람이니.”
이제 자신의 보호 아래에 들어왔으니 넌 신경 끄라는 말이었다. 벨제프 자작은 이저드의 눈치를 보며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이저드는 그들이 눈에서 사라질 때까지 주시하다가 슬쩍 문 뒤를 보았다.
“여기서 뭐 하나?”
들킬 줄은 알았지만.
방금 도착해서 이제 막 문을 열려던 아델라는 안에서 먼저 문이 열려서 저도 모르게 문 뒤로 숨어 버렸다. 그리고 지금 그 상황을 들켜 버린 거고.
아델라가 민망함에 어색하게 웃자, 이저드는 한껏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아델라는 조금 어두운 느낌의 이저드를 보며 불안한 마음에 얼른 입을 뗐다.
“방금…… 저희 아버지 맞죠? 뭐라고 했어요? 돈이죠? 안 봐도 뻔해요. 돈이죠?”
아델라가 다급하게 묻는데도 이저드는 아무 말 없이 아델라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옆에 있다는 것에 안도하면서도 가슴이 아팠다.
그녀는 그동안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그녀는 과거에도, 지금도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사는 걸까. 그럼에도 그녀는 삶을 놓지 않고 살아 왔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이저드는 만감이 교차했다.
지치지는 않을까? 힘들지는 않을까? 괴로운데 애써 웃는 것은 아닐까? 그녀는 얼마나 오랜 기간을 버텨 온 걸까.
“……별일 아니네.”
그는 아델라가 상처 받지 않길 원했다. 그녀의 아버지를 만난 순간 이저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둘을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별일 아닌 일로 여기까지 왔을 리가 없어요. 아버지의 성정을 잘 아니까 제가 해결할게요. 죄송해요. 괜히 저희 가족 때문에…….”
“아니, 아니야. 이야기는 잘 끝났네. 그대가 죄송할 거 없어.”
자신의 아버지를 따라가려던 아델라를 그가 막아섰다.
“각하와 이야기가 잘 끝났다면 다행입니다. 하지만 전 아버지랑 끝내야 할 이야기가 있어요.”
아델라의 확고한 눈빛을 받으면서도 이저드는 걱정했다. 둘의 만남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못할 거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한테 어떤 말을 할지. 딱 보기에도 딸의 쓸모에 대해서 논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이저드는 전혀 물러서지 않는 아델라를 보며 난감해졌다.
“후…… 알았네. 헤이든 경.”
“예.”
방 안에서 대기하던 헤이든이 이저드한테 다가왔다.
“벨제프 자작만 귀빈실로 모시게.”
“예, 알겠습니다.”
헤이든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이저드는 아델라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이글이글 불타다 못해 자칫하면 테이블을 뒤엎을 기세였다. 도대체 이런 활력은 어디서 나오는지.
“괜찮겠나?”
“그럼요! 괜찮으려고 만나는 거예요. 각하께는 정말,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감사한 건 받아들이겠다만, 죄송한 건 넣어 두게. 말했지만 그대가 나한테 죄송할 건 없어. 그대가 저지르지도 않은 일을 사과하지 마.”
이 와중에 이저드한테 또 반했다고 하면 미친 걸까. 아델라는 친절한 그가 좋으면서도 두려웠다.
이렇게 잘해 주지 마시지.
자신을 도우면 그한테 좋을 게 없었다. 이번에도 아버지와 자신 때문에 피해를 본 건 이저드였다. 그런데도 이저드는 자신의 기분을 살펴 주고 있었다. 자신이 사과할 일인데도, 이저드는 그럴 필요 없다고 한다. 오히려 자신에게 괜찮냐고 묻는다.
아델라는 아버지가 찾아와서 불안한 것보다 이저드가 자신한테 잘해 줘서 불안한 게 더 컸다. 이저드가 누구한테나 베푸는 친절에 자신이 착각할까 봐. 그래서 이 모든 것이 한여름 밤의 꿈같은 일이 될까 봐.
“벨제프 자작을 만나기 전에 그대가 이 말은 새겨듣고 만났으면 좋겠군.”
“뭐, 뭘요?”
“그대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 이 저택 모든 이들이 그대의 편이야. 나는 두말할 것도 없고. 그러니 그대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그녀는 이저드의 말에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다. 지금 그를 보면 다잡은 마음이 무너질 것 같았다. 그래서 아델라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만 갈까?”
“저, 저 혼자 갈게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저드는 고개를 꾸벅이고 빠르게 자신을 지나쳐 가는 아델라를 안타깝게 지켜보았다.
시선도 안 마주치고 가는 그녀를 보며 이저드는 지금보다 더 다가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그녀한테 너무 부담을 준 것 같았다.
* * *
“아델라……?”
그녀의 오라버니나 그녀의 아버지나 성인이 된 아델라를 보는 눈빛은 똑같았다. 믿을 수 없다는 눈빛.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의 딸이라는 것이 그는 믿겨지지 않았다. 어릴 때 예쁘장하게 생겼다는 것은 알았지만, 관심을 두지 않아서 이렇게 아름다운지 미처 몰랐다.
만날 같은 드레스만 입고 꼬질꼬질하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그땐 이렇게 성숙하지도 않았다.
그는 이저드가 왜 자신의 딸한테 푹 빠졌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깔끔하게 꾸며 놓고 보니 왕국 안에서도 손에 꼽을 만한 미인이었다.
벨제프 자작은 6년 전에 그녀를 헐값에 넘겨 버렸으면 배가 아플 뻔했다. 그는 그녀가 공작가로 시집온 걸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네, 네가 정녕 내 딸인 아델라냐? 그래?”
환희에 찬 아버지의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델라는 아무 표정 없이 그의 건너편에 앉았다.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이지, 오랜만이고말고. 내가 너를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아느냐? 어떻게 연락 한번 안 할 수가 있어. 이런 일이 있었으면 이 아비한테 말을 했어야지.”
“말했으면요? 이러시게요?”
“으응?”
벨제프 자작은 자신과 다르게 아무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아델라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아델라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는 그녀의 기분을 금방 눈치채고 자리에 앉아 위압적인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내가 뭘 했다고 그러느냐. 타지에서 고생할 널 생각해서 왔거늘.”
“아―. 그래서 각하께 돈을 뜯어낸 겁니까?”
“뭐? 뜯어내다니! 아비는 너한테 맞는 값을 받은 거다. 너와 우리 가문을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혼약자가 있는 널 마음대로 데리고 가!”
아델라는 침을 튀기며 소리치는 자신의 아버지를 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소리 지르지 마십쇼. 안 통하니까.”
“무슨…….”
눈을 부릅뜨고 자신의 딸을 보던 벨제프 자작은 어째서인지 그녀와의 기 싸움에서 밀리는 기분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뜯어볼까요? 전 이미 목숨 값을 받았습니다, 전하께. 가문 빚보다 더한 돈을 받으셨다고 들었는데? 전하께서 그 돈을 왜 주신 걸까요?”
“목숨 값이라니?”
“어머, 모르셨나 봐요. 제가 공작가 약혼녀 된 거, 전하와 거래를 해서예요.”
벨제프 자작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왕이 하사하니까 그런가 보다 했고, 자기 딸이 공작의 약혼녀가 됐다고 하니 뭐 하나라도 떨어질 거라고 당연히 생각했다.
그런데 거래라니?
“각하께서는 강제로 절 떠맡은 거죠. 그러니 각하께서는 위자료를 낼 이유도, 의무도 없죠. 무엇보다 혼약자?”
아델라는 그를 향해 비웃듯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제가 모를 것 같으세요? 서류 없는 거. 왜요? 가서 만드시게요?”
“너, 너 아비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아델라의 말이 다 맞으니 그는 다시 버럭 화를 냈다. 물론 아델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차분하게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만들어 보세요. 전 이 사실을 전부 오라버니와 전하께 알릴 거니까.”
“뭐? 왜, 왜 전하께……?”
벨제프 자작은 그녀의 입에서 이저드한테 알리겠다고 나올 줄 알았는데 왕이 나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전 분명 가문과 관련된 빚을 해결해 달라고 전하와 거래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위자료가 더 있다지 않습니까? 그럼 전하께서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것이니, 따져야지요.”
“뭐, 뭣? 네가 미친 게냐?”
아델라가 따지고 나서면 그녀는 물론, 가문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었다. 어떻게 감히, 왕이 해결한 일에 토를 달고 항의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왕한테 너 일 제대로 못했으니까 다시 하라는 말과 같았고, 그 이야기를 왕이 들어줄 리가 없었다. 왕은 이것들이 봐줬더니 기어올라? 싶어서 싹 쓸어버릴지도 모른다. 신경에 거슬리는데 살려 둘 이유는 없었다.
“그럼, 너도 무사할 수 있을 줄 아느냐!”
“무사하지 못하겠죠. 그러니까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거 아닙니까. 같이 죽든가, 아님 각하께 사과하고 물러가시든가. 다시는 절 빌미로 밀고 들어오지 않는 건 덤으로요.”
벨제프 자작은 기가 차서 아델라를 향해 너, 너! 이 말만 반복했다. 아델라는 태연한 표정이었다. 아니, 태연한 척 노력하고 있었다.
“이, 이 애미 애비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받은 은혜가 있어야 배신을 하죠. 아, 하나 있네요. 이 악물고 살게 된 거 하나.”
그는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아델라를 보며 자신의 아내, 아델라의 친어머니와 겹쳐 보였다. 강직한 눈빛과 흔들림 없는 마음가짐이 그녀와 아주 똑 닮아 있었다. 바른말만 하고 굽히지 않던 그녀와.
벨제프 자작은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네 어미랑 똑같구나! 네 어미도 그랬어! 항상 날 가르치려 들더구나!”
“……어머니를 언급할 자격이 되십니까?”
아델라의 눈빛이 고요하게 파동을 일으키며 변해 갔다.
그녀의 눈빛엔 분노, 증오, 슬픔…… 여러 가지 감정이 섞여 있었다.
“내 아내를 내가 언급하겠다는데 자격이 왜 필요해! 내 충고하는데, 앞으로 네가 모실 지아비한테 그딴 모습 보이지 말거라! 네가 옳은 줄 알고 네 의견이 다인 줄 아는! 아, 그래! 네 새어머니 반만 따라가거라!”
쩌렁쩌렁하게 귀빈실에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아델라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녀는 손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양손을 꽉 마주 잡았다.
말이 다 끝났는지 벨제프 자작의 씩씩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아델라는 다 말했냐는 듯이 눈을 치켜떴다.
“두 분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아버지께 들을 충고는 아니네요.”
꽝꽝 얼어붙은 그녀의 얼굴과 말이 벨제프의 심장으로 날아들었다. 그는 덜컥 겁이 났다. 그가 이렇게나 몰아쳤는데도 아델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게 왜 내 탓이냐? 내가 네 친어머니한테 흑마법사 하라고 했냐? 아니면 내가 네 새어머니한테 단명할 운명을 갖고 태어나라고 했어?”
그는 오히려 당당하게 소리쳤다. 그도 좋아서 벌써 둘이나 아내를 잃은 건 아니라며 아델라한테 소리쳤다.
아델라는 두 어머니를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는 그가 치 떨리게 싫었다. 그녀는 아직도 가슴이 아파서 입에 담지 못하는 둘을 그는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날 협박하려면 넌 멀었다. 어디서 아버지를 궁지에 몰 생각을 하느냐! 넌 버릇부터 고쳐야겠구나.”
아델라는 굳어 버린 입꼬리를 애써 올렸다.
“그래요? 그럼 전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후의 일은 알아서 해결하시지요.”
“뭐? 뭐! 어딜 먼저 일어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화가 난 그도 벌떡 일어났다.
“어디서 배워먹은 버릇이야!”
“뭐가 문젭니까? 이 저택에서 제가 먼저 일어선다고 문제될 건 없는데요?”
아델라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이 저택에서 그녀는 공작 다음으로 높은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물론 그도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물러설 순 없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그는 이제 막 돈맛을 본 터였다.
“네가 전하께 말씀드리면! 나도 가만있지 않겠다!”
더 할 말이 남았다니 양심도 없었다.
“누가 가만히 계시랍니까? 사과하고 돌아가시라고요. 자작가에 돌아가서 뭘 하고 살든, 알아서 사시고요. 전 할 만큼 했습니다.”
아델라는 그를 차갑게 지나쳤다. 자신의 경고에도 꿈쩍하지 않는 그녀를 보며 벨제프 자작은 그녀를 잡을 궁리를 했다.
“네, 네 정체를 공작이 아느냐!”
아델라는 자리에서 우뚝 멈췄다. 그러곤 천천히 벨제프 자작을 돌아보았다. 정말, 바닥까지 가자는 말이구나. 그는 과거와 똑같았다.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그는 고압적인 눈빛으로 아델라를 바라보았다. 주도권을 잡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제 정체가 무엇인데요?”
“너같이 독한 애한테 공작이 빠졌을 리가. 삿된 술수를 부린 거 아니냐? 네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하…… 하하…… 하하하하.”
아델라는 이성이 나갈 것 같아서 그저 웃었다. 어떻게 저렇게 가볍게 말할 수가 있을까. 아델라는 항상 그 사실이 무서워서 입에 담지도 못했는데.
“맞구나. 네가 그러고도……!”
“그래서요?”
“뭐?”
다시 싹 표정이 사라진 아델라를 보며 벨제프 자작은 주춤했다.
“또 소문이라도 낼 겁니까? 이번에는 내 딸이 흑마법사다?”
“뭐?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제가 모를 것 같습니까? 어려서 몰랐을 것 같았어요?”
벨제프 자작은 빳빳하게 굳어서 아델라를 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급격히 떨렸다.
“너, 너, 뭘 아느냐.”
어떤 표정도 내비치지 않으니 더욱 불안했다. 그는 아델라를 다그치려 그녀한테 손을 뻗었다.
휙.
그녀한테 뻗으려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의 손이 닿기 전에 이미 그녀가 피한 탓이다.
“건드리지 마십쇼.”
아델라의 인상이 미미하게 구겨졌다.
벨제프 자작의 인상은 그보다 더 사납게 구겨졌다. 그 어떤 것도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녀도, 이 상황도, 모든 것이.
“뭘 아냐고!”
그는 예전에도 걸핏하면 소리를 질렀다. 아델라한테도, 레널드한테도, 아델라의 친어머니한테도, 새어머니한테도, 저택에 남아 있던 하인들한테도.
그가 화를 내면 대부분은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를 숙인 채 겁에 질려 대드는 이들이 없었으니까 그런 짓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제가 뭘 알면요? 각하께 제대로 사과하시겠습니까?”
하지만 이제는 그가 소리친다고 들어 줄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린 날에 눈도 못 마주치던 그때 그 작은 아이는 이곳에 없었다.
벨제프 자작은 씩씩거리면서 자신이 지금 한참이나 밀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 느낌은 거의 본능과도 같았다.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그가 살아온 생존 본능이었다. 그는 그 강자가 자신의 딸이라는 것에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자신이 호랑이 새끼를 키웠다. 키워 준 은혜도 모르고.
“내가 왜. 왜 그래야 하느냐? 난 잘못한 거 없다.”
“예, 그러시겠죠.”
뭘 기대했는지. 바뀔 리가 없는 사람한테 너무 많은 걸 바랐나 보다.
“전 많은 거 안 바랍니다. 돌아가세요. 각하께 뭐 받으실 생각 말고.”
“아니, 그렇겐 안 되지. 내가 널 살리려고 노력한 대가는 받아야겠다. 지금도 내가 입만 열면…….”
“아버지께서 한 노력이 무엇입니까? 당시 절 살리려고 갖은 노력을 다한 건 제 유모님이셨습니다. 결백을 증명한 건 제 몸뚱이고요.”
아델라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입 여세요. 아버지의 뜻대로 되지 않을 겁니다. 저한테는 이 공작가가 있고, 오라버니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무엇보다 제 몸에는 표식이 없습니다. 절 흑마법사라고 몰 증거가 없다는 이야기지요. 사람들 앞에서 저를 벌거벗길 목적이라면 또 모르겠지만요.”
“뭐 이런…….”
그가 기억하는 아델라는 절대로 이런 성격이 아니었다. 벨제프 자작 앞에만 서면 어머니나 레널드 뒤로 숨거나 눈도 안 마주치고 방 안에만 있었다.
새어머니가 오고 상태가 많이 호전된 편이었지만, 벨제프 자작이 술을 마시고 온 날이면 문을 걸어 잠그고 방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오지 않던 아이였다.
그는 한평생 그녀가 누구한테 맞선다거나 누구한테 이렇게 사납고 독살스럽게 대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무난하다? 평범하다? 아델라는 자작가에서 그냥저냥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살았다.
“왜 이렇게 변한 것이냐? 네가 어찌 나한테…….”
굳이 따지자면 아델라는 변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그녀를 변했다고 느끼지만 사실 그녀는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아델라는 부부 사이가 완전히 틀어지기 전까지는 방긋방긋 잘 웃던 아이였다. 장난기도 많았고, 활발했으며, 아프면 아프다, 좋으면 좋다, 있는 그대로 다 표현하던 아이였다. 그녀가 아주 어렸을 때는 오히려 지금의 모습과 가까웠다. 그러니 그녀는 변한 게 아니었다.
“과거의 향수 같은 걸 느끼실 거면 전 가 보겠습니다.”
“잠깐, 잠깐 기다리거라! 그럼, 절반이라도……. 우리 가문이 그 정도는 받을 이유가 있지 않느냐!”
아픈 과거까지 기억나게 해 놓고 한다는 말이 반이라고? 가관도 이런 가관이 없었다. 아델라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왔지만 꾹 눌러 참았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몸에 걸친 패물들을 하나하나 뺐다.
“지금 뭐 하는 게냐?”
그녀는 아버지의 물음에 대꾸도 하지 않은 채 패물들을 뺐고, 목걸이를 마지막으로 아버지 곁으로 다가가 탁자 위에 그것들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아쉬우시면 이거라도 가져가세요. 값 많이 나갈 겁니다!”
“지금 내가 이깟 패물이나 받으려고 여기까지 왔는지 아느냐!”
아델라는 그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지만, 직접 그 말을 들으니 너무나 허탈하고 허무했다.
더 싫어질 일은 없을 줄 알았지. 더 밑바닥은 없는 줄 알았지. 이 사람이 자기 아버지라는 것이 부끄러웠고, 꼴도 보기 싫었다. 돈밖에 모르는 사람한테 뭘 기대해서 만났는지 모르겠다.
“패물이라도 줄 때 받아 가세요. 오늘 이후로 절 못 보게 되실 테니까.”
이제 그녀는 그만하고 싶었다. 이 지긋지긋한 대화도, 질기게도 이어 왔던 가문과의 인연도, 그리고 혈육이라는 이유로 들어야 했던 모진 이야기도.
“각하께는 제가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럼 잘 돌아가세요. 앞으로 볼 일은 없을 겁니다. 다음부터는 이렇게 막무가내로 오시면 침략으로 알고 군사 대응하겠습니다.”
벨제프 자작은 미련 없이 패물을 두고 떠나는 아델라의 뒷모습을 허망하게 보다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네가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게 결국 가문의 그늘에 있었기 때문이 아니냐! 귀족이라서! 자작 영애가 아닌 널 어떻게 아내로 맞겠느냐! 두고 보거라! 돌아가는 즉시 널 가문에서 제명시킬 것이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그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도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에서 나갔다.
벨제프 자작은 그녀가 자신은 상대도 되지 않는 듯이 굴자 흥분한 나머지 그녀가 두고 간 패물을 죄다 던졌다.
“내가 고작 이딴 패물이나 받으려고! 고작! 배은망덕한 년! 권력 때문에 단단히 미쳤구나!”
물론 아델라도, 벨제프 자작도 모르는 사실이었지만 그가 던져 버린 패물들은 정말로 엄청나게 값비싼, 고급 중에서도 최고급으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줘도 못 주워 먹는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인 듯했다.
* * *
아델라는 분에 겨워 무언가를 던지는 소리를 방 밖에서 들었다. 그녀는 문 앞에 서서 가만히 심호흡을 했다. 심장이 평소보다 배로 빠르게 뛰고 있었다. 벨제프 자작 앞에서는 괜찮았는데, 그와 싸움을 하고 나오니 후에 감정들이 몰려왔다.
마음을 어지럽히는 감정의 대부분은 분노와 슬픔이었다.
그녀는 곧 루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최대한 감정을 털어 내려 노력했다.
‘괜찮아, 괜찮아. 잘했어.’
아델라는 익숙했다. 그의 화를 받아 내고 감내하는 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수 있었다. 가문에 있던 15년을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그녀가 가장 열이 받고 슬픈 건, 두 어머니의 죽음이 그한테는 고작이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로 인해 큰 상처를 받은 아이들은 안중에도 없었고, 오히려 협박 수단으로 운운하고 있었다.
한 아이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입을 다문 채 마음의 문을 걸어 잠갔고, 다른 아이는 어머니의 죽음에 두려움을 느끼고 집을 나가게 되는 계기가 됐는데도 말이다. 그가 조금이라도 자식을 위했더라면 그런 이야기를 입에 담으면 안 됐던 거였다.
특히 아델라한테 어머니의 이야기는 트라우마였다. 그녀의 상처를 대놓고 후벼 파겠다는 의도가 아니고서야 그렇게 가볍게 입에 담으면 안 될 일이었다. 친어머니가 불에 타는 모습을 지켜본 아이한테 그러면 안 됐던 거였다.
“―아델라.”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그를 만났다.
이곳과 이곳 사람들 모두가 너의 편이고, 자신 또한 너의 편이라던, 그 사람. 마음대로 해도 다 받아 줄 것 같은 그 사람. 자신을 믿어 주는, 그 사람.
이저드.
불길에 휩싸일 뻔했던 주변 풍경이 그로 인해 물러갔다. 심하게 뛰던 심장이 그의 하늘빛 눈동자를 보자 점점 안정을 되찾았다.
아델라가 아무 말도 없이 쳐다보자 불안해진 이저드는 그녀한테 한 발 다가갔다.
“……괜찮나?”
역시 이 사람, 이상했다. 아닌가. 이상한 건 자신인가?
제 마음을 다 안다는 듯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니 아델라는 안 흔들릴 수가 없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저드가 나타나자 잔뜩 긴장해 있던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언제부터 이저드가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존재였지? 아델라는 의문이 들었다. 좋아하는 건 맞지만,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마음이 열린 적은 없었는데. 언제부터 그런 걸까?
“아델라?”
그가 성큼 그녀한테 다가왔다. 그러곤 조금 놀란 듯 그녀의 하얀 볼에 자신의 손을 조심히 가져갔다. 잡으면 부서질까 확 잡지도 못하고 이저드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왜 우나?”
“제가요?”
“지금 울고 있다만…….”
아, 울고 있구나……. 아델라는 자신의 눈물이 맺힌 그의 손가락을 물끄러미 보았다.
자신이 왜 울까? 긴장이 풀려서? 다시 그 일이 생각나서? 아니면 아버지한테 너무 실망해서? 그것도 아니면 너무 기뻐서? 그녀는 자신이 우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마 복합적인 감정이었을 것이다. 원망, 분노, 실망, 안도 등등.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확실히 느낀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그에 대한 이 마음이, 왠지 그저 스쳐 지나갈 마음이 아닌 것 같았다.
그가 나타나서, 옆에 있어 줘서, 안심할 수 있어서, 그리고, 그 모든 호의에 심장이 뛰고, 긴장됐던 마음이 한 번에 풀려서…… 그녀는 두려웠다.
이저드에게 향하는 자신의 마음이 이미 많이 커져서 그의 친절을 지금처럼 착각하면 어쩌지? 그와 헤어져야 할 때, 그를 놓지 못하면 어쩌지? 계약이라고 분명 자신의 입으로 말해 놓고 못 지키면 어쩌지?
그가 지금 베푸는 것은 친절인데, 분명 그러할 텐데, 멋대로 착각하고, 망상에 빠지고, 그를 괴롭히게 된다면? 자신도 모르게 안 좋은 마음이 흑마법으로 변질된다면? 그래서 그가 자신을 멀리하기라도 하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델라는 주춤거리며 그에게서 물러섰다.
“아, 죄송해요. 울 만큼 슬프거나 상처를 받은 건 아닌데.”
그녀는 의연하게 눈물을 쓱 닦으며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그를 보며 웃었다.
“이제 아버지는 찾아오지 않을 거예요. 만일 찾아오더라도 이젠 절대 만나지 마세요. 그리고 오늘 일에 대해서는 오라버니한테…….”
“아델라.”
이저드가 낮게 그녀를 불렀지만 아델라는 그의 말을 못 들은 척 계속 입을 열었다. 아무 말이라도 뱉어야 이 떨림도, 눈물이 고이는 눈가도 가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라버니한테 말해서 조치를 취하라고 할게요. 가웨인 백작은 아마 왕이 개입하면 골치 아파지니까 눈치 봐서 빠질 거고…….”
“아델라.”
분명 아까 전까지만 해도 그녀한테 더 다가가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으면서 그는 그녀한테 손을 뻗었다. 참을 수가 없어서. 그녀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가만히 기다리고 싶은데 몸이 따라 주지 않았다.
그녀가 무언가를 참으면서 애써 시선을 돌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저드는 그녀를 그대로 둘 수 없었다.
“아델라.”
그가 다시 한 번 낮게 그녀를 불렀다.
“이곳에는 우리 둘뿐이네. 주변에 사람들은 물렸고, 그대가 운다고 하더라도 들리지 않을 거야.”
이저드의 말이 끝나자 아델라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울어도 되네.”
“안, 울 겁니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떨리고 있었다.
“괜찮아.”
“울고…… 싶지 않습니다.”
그녀의 고개는 여전히 바닥을 향해 있었다. 이저드는 조용히 그녀를 기다렸다.
“진짜로…… 진짜, 울고 싶지 않아요.”
아델라는 울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떴다.
“저 사람 때문에……. 저런 사람 때문에 우는 것 같아서, 저…… 절대 저 사람 때문에 우는 거 아니거든요?”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울먹거렸다. 또박또박 발음한다고 했지만 뭉개지는 발음도 있었다. 그녀는 정말로 억울한 듯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이저드를 올려다보았다.
아델라는 자신을 바라보는 부드러운 그의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결국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래, 알고 있네. 저런 사람 때문이 아니야. 그대를 위해서지.”
그가 우는 아델라를 품에 안았다. 그녀를 토닥이며 그는 너무 안타까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면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오랜 세월 견뎌 온 감정을 토해 낼 수 있어서. 그런 그녀 곁에 있을 수 있어서. 그녀가 혼자 아파하지 않게 위로해 줄 수 있어서.
* * *
왜 항상 쪽팔림은 울고 난 다음에 오는가. 눈물 콧물 다 빼고 나니 기분은 후련해졌지만, 하필 그의 앞에서 추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그가 끌어당겨서 그게 또 좋고, 그러면서도 왜 이런 친절을 베푸는 거야, 하는 원망도 들었다. 그렇지만 또 좋아서, 그의 품에 폭 박혀 울었다.
자신의 뇌는 염치가 없는 걸까? 그에게 기대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느새 그에게 또 도움을 받았다.
‘지금 내 꼴, 말이 아니겠지……? 화장도 다 번졌을 테고, 각하 옷도 엉망일 테고…….’
이저드의 앞에서는 왜 이런 모습만 보이는 건지. 있던 호감도 싹 달아나겠다. 이저드한테서 떨어져야 하는데 고개를 들기가 민망해서 아델라는 꼼지락거렸다.
“저기…… 각하.”
“이제 좀 진정이 되나?”
“네, 네. 감사합니다. 저, 그런데……. 정말 죄송한데…….”
“음?”
“아뇨! 전 보지 마시고요!”
이저드는 아델라가 정말 괜찮은지 확인하고 싶어 그녀와 떨어지려고 했다. 그러자 그녀가 이저드의 옷깃을 더 꽉 붙잡고 그를 바짝 당겼다. 아델라는 그가 움직여서 자신을 보려고 하자 고개를 숙이고 필사적으로 저었다.
지금 그녀의 행동이 이저드한테는 매우 곤란한 행동이라는 걸 알고 있을까.
“이, 이대로 저기까지만…… 걸으면 안 될까요?”
이저드는 아델라가 가리킨 방향을 힐끔 보았다. 저택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있었다. 저택의 중간에 위치한 저 문은 저택 가장 뒤쪽에 있는 침실로 이어져 있었다.
“이 자세로?”
저기까지 걸어 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게걸음으로 걷든, 뒷걸음질로 걷든, 어떤 자세로도 걸을 수는 있었으니까. 다만 그녀를 품에 안으니 놔 주기 싫어서 문제였다.
이저드는 그녀가 품을 파고드는 대로 가만히 놔두었고, 안고 있던 그대로 팔도 풀지 않았다.
“네! 제, 제가 뒷걸음질할까요?”
“아니, 내가 하지.”
“저, 그리고…… 죄송해요! 옷…… 갈아입으셔야 할 거예요.”
“괜찮네.”
엄청 엉망일 텐데.
아델라는 얼굴을 들어 그의 옷 상태를 확인할 수 없었지만 안 봐도 뻔했다. 화장에 눈물에 아주 난장판일 터였다. 상상할수록 더 죄송했다.
“천천히 움직이겠네.”
이저드는 그녀를 안은 상태에서 천천히 뒷걸음질했다. 될 수 있으면 아주 천천히. 그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그녀를 오래 안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치장하던 것들은 어쨌나?”
그가 기억하기로 아까까지는 액세서리들이 화려하게 그녀의 몸을 치장하고 있었다.
“아. 그거! 그것도 죄송해요……. 아버지 쫓아내려고 다 줘 버렸어요……. 제가 일해서 갚을게요…….”
이저드는 잠시 움찔 멈췄다. 아델라는 그가 멈춘 이유가 너무 궁금해서 올려다보고 싶었지만 자신의 몰골을 생각해서 참았다. 그녀는 이런저런 생각이 다 들어서 안절부절못했다. 호기롭게 줘 버렸기는 하나, 얼마나 값비싼 물건인 줄 몰랐기 때문이다.
“왜, 왜요? 중요한 거였어요? 그럼 제가 다시 뺏어올게요! 죄송해요……. 아까는 너무 화가 나서 그만…….”
“아니. 중요한 건 아니다만…….”
이저드는 아주 한순간 빚으로 아델라를 잡아 둘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나쁜 생각이 불쑥 들었다. 일해서 갚으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터였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말은, 오랜 시간 동안 아델라를 볼 수 있다는 말과도 같았다. 그러니까 전쟁이 끝난 뒤에도 자신과 계속 교류를 할 거라는 이야기였다.
그한테는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패물 몇 개 없어지고 그녀를 계속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물론 전쟁 후에도 자신의 옆에 있을 수 있게 유혹 중이긴 하지만, 이건 그녀가 자신한테 빠져야 가능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곧 그는 그녀가 빚에 시달린 세월이 떠올라 자신을 자책했다. 옹졸해도 이렇게 옹졸할 수가. 이제 훌훌 털어 버린 아델라를 두고 이렇게 음험할 수가.
이저드는 자신의 품에서 숨 쉬는 아델라를 더욱 꼭 안았다. 그야말로 이렇게 마주 안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혹여 시커먼 속이 들켜 그녀가 실망하면 안 되지 않은가.
“그것들은 그대한테 내가 선물한 거니, 어떻게 하든 그대 마음이네.”
“그래도…….”
아델라는 한 번도 그것들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이저드의 재물이었지. 혹은 나중에 제대로 공작가로 들어올 공식적인 약혼녀의 것이거나.
이저드가 다시 천천히 움직이려고 할 때, 이번에는 아델라가 우뚝 멈췄다.
“역시, 안 되겠어요. 다시 가져올게요!”
“이 상태로 말인가?”
아델라가 몸을 들썩이자 이저드는 손을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
“어…….”
아델라는 지금 자신의 처지가 생각나 다시 잠잠해졌다.
끄악, 그러게 왜 울어서. 얼굴 보여 주기 싫어서 얼굴도 안 들고 있는 상태였다.
“괜찮아. 그렇게 값나가는 것도 아니네. 정 미안해서 못 견디겠으면, 앞으로 날 살릴 목숨 값이라고 하지.”
그건 어차피 자신이 살려면 이저드가 살아야 하니까……. 값을 치르기에는 아델라도 얻는 게 많았다. 아델라가 우물쭈물하는 기색이 보이자 이저드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내 목숨 값이 매우 비싸네. 내 생사에 성주민들의 생사도 달려 있으니 말이야.”
그렇게 말하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라 그녀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이저드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은 전에도 알았는데, 이렇게 듣고 보니 더더더 중요한 사람이었다. 아델라는 자신이 막중한 임무를 책임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전까지는 일단 내가 살려면 그를 살리자가 더 강했다면, 지금은 그를 살려야 다 산다가 더 강해졌다.
“계속…… 갈까요?”
누가 보면 연인들끼리 마주 안고 있는 걸로 보이지 않을까?
‘그게 사실이면 좋겠다…….’
아델라는 잠시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신의 역할을 망각하면 안 됐다. 자칫 길을 잘못 드는 순간,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각하의 호의는 호의로만 받아들이자! 착각하면 안 돼!’
그녀는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그의 옷깃을 더 꼭 쥐었다. 밖에서는 정말로 사랑하는 연인처럼 보여야 했다.
‘사, 살짝 사심을 채우는 건 괜찮지 않을까?’
아까 펑펑 운 사람은 어디 갔는지 그녀는 금세 심장이 뛰었다. 너무 꽉 안고 있어서 심장 소리가 들킬 것 같았다.
사실 이때 이저드의 심장도 크게 뛰고 있었다는 것을, 그녀는 자기 심장 소리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몰랐다.
이저드가 그녀를 천천히 이끌어 문 앞에서 멈췄다.
“가, 감사합니다! 이따 밤에…… 밤에 봬요!”
그녀는 빨개진 얼굴로 후다닥 고개를 숙이고 저택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얼굴을 안 보여 줄 방법은 안고 뒷걸음질하는 방법 말고도 많았을 텐데, 확실히 그녀가 당황하긴 했나 보다.
물론 그한테는 너무나 좋은 기회여서 말없이 그녀를 안고 뒷걸음질을 쳐 줬지만. 계속 그녀를 안고 있을 수 있었으니까. 이런 기회가 흔치 않았다.
이저드는 가시지 않은 온기를 조금 더 느끼고 싶어 그 자리에 멈춰 있다가 잠시 후 자리를 떴다.
* * *
이저드는 겉옷을 갈아입고 곧바로 집무실로 돌아왔다. 그가 처리해야 할 문제가 많이 남았다.
“가웨인 백작의 가족이나 자식 관계는?”
“머인 남작이 가웨인 백작의 동생이라고 합니다. 근데 광산 때문에 크게 싸워서 사이는 좋지 않대요. 자식은…… 처첩들 사이에서 난 자식이 아들만 다섯이라는데, 숨겨진 자식들은 모르죠.”
이저드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던 헤이든이 입을 뗐다.
“후계 싸움은 없나?”
“있죠? 그런데 가웨인 백작이 무조건 첫째한테 준다고 해서 시끌시끌하답니다.”
이저드는 소파에 앉아 고민하는 듯 소파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광산 도시 주변에 우리 쪽 인사가 있나?”
“꽤 있습니다.”
“그들한테 연통을 넣게. 후계 2순위와 3순위를 각각 밀어 주라고. 물밑으로는 4, 5순위를 밀어 줘도 되네.”
“예? 다 밀어 주라고요?”
돈을 두고 싸우는 후계자 싸움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었다. 그들을 이용하면 서로 물고 뜯고 종국에는 파멸의 길로 들어설 것이다.
“가웨인 백작이 자식들한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공포심을 심어 주게. 후계 서열에서 물러난 이들은 주변 지역 유지들의 비호를 받고 날뛰게 해.”
“가웨인 백작을 죽이지는 말고요?”
“그래. 가웨인 백작 하나 죽는다고 그 악행이 끊어지진 않을 걸세. 다음 후계자가 같은 일을 반복하겠지.”
그럼 왜……? 헤이든은 의아한 표정으로 이저드를 바라보았다.
“그럼 왜 후계자들 사이를 뒤흔듭니까?”
“그냥은 광산을 팔지 않을 거니까. 지금 떵떵거리고 잘사는데 팔 이유가 없지 않나.”
“광산을 사신다고요?”
“공식적으로는 내가 사는 게 아니라 우리 쪽 인사가 살 테지. 남들이 보기에는 후계 싸움에 가웨인 백작이 새우 등 터지고, 이득은 주변에서 챙긴 것처럼 보일 거네.”
그러니까 돈 나올 구멍을 아예 막아 버리시겠다? 후계자들은 후계자들끼리 싸우게 두고, 가웨인 백작은 자식들한테 치여 나가떨어지게 하고?
“가웨인 백작이 끝까지 안 팔면요?”
“가웨인 백작이 안 팔면, 후계자 중에 누군가가 팔게 해야지. 여론이 자신이 아닌 다른 후계자한테 심하게 기울면 위기를 느낄 거네. 광산을 팔고 큰돈 챙겨서 도망가려는 이들이 나올 거야. 그 틈을 찾게.”
돈 때문에 벌어지는 후계 싸움의 끝은 대부분 끔찍했다. 존속 살인이 일어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한다면 지분을 나눠 갖거나 꼴도 보기 싫어서 가족의 연을 끊어 버리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게 평화롭게 끝나게 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누누이 말했다시피 이저드는 자신의 사람들을 건드리는 걸 가장 싫어했다.
“벨제프 자작은 어쩝니까?”
“그쪽은…… 까다롭군.”
아델라를 울린 데다가 자기 배를 채울 수단으로 생각한 것은 열이 받지만 그가 아델라의 아버지라고 생각하면 쉽게 어떤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이저드의 마음에는 그녀의 가족사 문제에 자신이 손을 대도 되는 걸까 하는 망설임이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아델라와 그가 평생 만나지 않았으면 했다.
“귀족이라 지나간 전과만 해도 꽤 됩니다. 기물 파손도 그렇고, 폭행도 그렇고, 절도죄도 있고, 부녀자 성폭행도……. 하…… 아델라 영애가 모르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정말 총체적 쓰레기입니다. 범죄를 저지른 것도 다 평민이나 천민들을 상대로 해서 돈으로 막거나 매질을 해서 입도 벙긋 못 하게 했습니다.”
물론 그런 사실들만 죄다 모아도 평생 감옥에 썩혀 둘 수 있었다. 이저드가 그 일을 바로 실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델라가 갑자기 받을 충격이 걱정돼서다.
아무리 싫은 아버지라도 네 아버지가 범죄자래, 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누구나 충격을 받기 마련이었으니까.
“후……. 일단 자료 모아서 레널드 부기사단장한테 보내게. 내가 바라는 건 벨제프 자작이 세상 밖으로 안 나오는 거라고 적어서 말이야.”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델라한테는 벨제프 자작에 관한 이야기를 아직 전하지 말라고 하게.”
헤이든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만일 린다의 아버지가 그런 사람이었다면, 린다한테 먼저 말하기 힘들었을 것 같았다. 물론, 린다는 이런 사실을 들어도 아버지에 대해 쌍욕부터 하고 볼 성정이었지만.
“레널드 부기사단장 선에서 끝나면 다행이겠는데요…….”
“동감이네.”
이저드는 이저드 대로, 헤이든은 헤이든 대로 앞으로가 약간 걱정됐다. 그가 망했으면 싶다가도 아델라를 생각하면 살아는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녀의 의견 없이 일을 진행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레널드한테 이 일을 맡길 거지만 제대로 처리가 안 되면 이저드가 나설 생각이었다. 아델라 모르게.
* * *
아델라는 루를 만나기 전에 하녀들한테 얼굴을 들키는 바람에 붙잡혀서 다시 치장을 당해야 했다. 그냥 세수만 하고 루를 만날 작정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풀 메이크업…….
아델라는 살짝 지친 표정으로 침실로 돌아왔다. 테이블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던 은발의 소년이 환하게 웃으며 아델라를 보았다. 아델라도 그를 보고 마주 웃으며 그의 맞은편에 가서 앉았다.
“울었어?”
화장으로 가릴 것은 다 가렸을 텐데, 루가 아델라의 얼굴을 뜯어보며 물었다.
“조금?”
“헉? 왜? 너희 아버지가 뭐라고 했어?”
“예나 지금이나 똑같지, 뭐.”
“정말 미안하다……. 괜찮아?”
루는 걱정스럽게 아델리의 얼굴을 살폈다. 아델라는 아까 울었던 일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괜찮아! 운 건 아버지 때문이 아니고…….”
아델라는 힘든 일을 혼자 감내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녀는 보통 나쁜 일은 금방 잊어버리고 앞으로 살아갈 방도를 모색했다. 버릇처럼.
그런데 현재 자신의 처지를 아는 이저드를 본 순간 마음을 놓아 버렸다. 자신 혼자 감당해야 했던 회귀와 자신의 처지를 알고 있는 이저드. 자작이 어떤 사람인지도, 자작가에 대해서 알고 있는 이도 이저드였다.
그래서 마음이 놓였다. 집을 나와서 온전히 자신을 아는 이는 루를 제외하고 그뿐이었다.
그녀는 이저드의 걱정스러운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이 사람은 믿어도 되겠구나 하는 확신이 드는 한편, 두렵기도 했다. 그런 존재를 잃을까 봐. 그에게 미움받을까 봐.
아버지한테 느꼈던 분노는 한순간 공포로 바뀌었다. 자신이 흑마법사인 탓에 그를 실망시키고, 그의 약점이 될까 봐. 분명 회귀가 가능하니 다시 시작하면 될 텐데도, 한순간 그와 아무것도 아닌 때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버지 때문이 아니면?”
아델라의 표정이 미미하게 바뀌는 걸 가만히 보던 루가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눈을 몇 번 깜박이다가 곧 정신을 차린 듯 또렷하게 그를 보았다.
“……아!”
“뭐야, 이 반응은? 딴생각 중이었어?”
루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내가…… 왜 울었나 생각하느라?”
“왜 울었는데?”
아델라는 루의 시선을 슬슬 피했다.
“앞으로 그 사람 안 볼 생각하니 기뻐서? 그런 마음이 합쳐져서?”
루는 유심히 아델라를 살펴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거짓말이 포함된 것 같지만, 넘어가자. 네가 안 아픈 게 더 중요하지.”
그러고 보니, 그렇게 상처 받지는 않았다. 어렸을 때였으면 벌써 충격 받아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을 텐데 이젠 그의 말은 안중에도 없었다. 와 닿지도 않았고.
“응. 두 어머니 이야기 꺼낸 것 말고는 딱히 화도 안 났어. 원래 그런 사람이고, 매번 그랬으니까.”
“두 분 이야기를 꺼냈어? 갈 데까지 갔군.”
아델라의 어머니와 아델라의 새어머니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모두 아는 루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왜? 자긴 잘못 없대?”
“응.”
“어휴, 천벌 받을 놈.”
퍽도 잘못이 없겠다. 한 분은 지가 소문을 내고 다녀서 안 당해도 될 마녀 사냥을 당하셨고, 한 분은 약한 몸으로 빚을 갚으려 궂은일을 하다가 골병이 들어 돌아가셨다. 그녀들이 세상을 뜰 때 당연하게도 그는 그곳에 없었다. 다른 곳에서 유흥을 즐기고 있었다.
“이렇게 보내도 되나 모르겠다. 가다가 확―.”
루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아델라의 눈치를 보았다. 아델라는 왜 그러냐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사람이 좀 나쁜 생각도 하고 사는 거지. 거참.
능력이 있는데 쓰질 못하는 아델라를 루는 안쓰럽게 생각했다.
“확, 엎어져서 코나 깨져라.”
루는 결국 확 죽으라는 말은 못 하고 순화했다. 그에 아델라가 조금 웃었다.
“나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욕먹을 만하지. 쌍욕도 괜찮아.”
“쌍욕 정도가 아니라 더 심한 말이니 참을게. 너한테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는 없잖아. 그 능력 아니었으면 욕이 뭐야, 더한 말도 했을 텐데.”
“나도 그랬을 텐데.”
루랑 아델라는 서로를 보고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잊어버려. 잊자. 어차피 다시 만날 사람도 아니잖아. 좋지 않은 마음 담아 놔서 뭐하겠어. 그런데 이건 알아 둬.”
“뭐?”
“그 인간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건 너의 능력 때문이 아니고…… 벨제프 자작이 자초한 거라는 사실.”
최선을 다해 자신을 위로하는 루를 보며 아델라는 편하게 웃었다. 루가 얼마나 자신을 배려해서 한 말인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알아. 내가 한 게 아닌 거. 나 그렇게 뛰어나지 않거든. 지레 겁먹는 거지.”
아델라의 어머니가 살아생전 그녀한테 주입한 말이 있었다.
절대 누군가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왕이면 미워도 하지 말고, 화도 내지 말라고 했다. 불행을 불러올 만한 그 어떤 것도 만들지 말라고. 흑마법사는 그 불행을 먹고사는 이들이라고도 했다.
어머니가 잔인하게 죽어 가는 모습을 봤던 당시에는 어머니의 말을 지키려 아무도 미워하지 않기 위해 말을 잃었던 적도 있지만, 새어머니를 만나고 호전된 아델라는 어머니의 말을 융통성 있게 새겨들었다.
그녀도 사람인 탓에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을 수는 없었고, 화를 내지 않을 수도 없었지만 그것 하나만은 지켰다. 누군가한테 살의를 품지는 말자고. 지금처럼 치 떨리게 아버지가 싫어도 어디 가서 객사했으면! 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오랜 세월 학습된 생각을 한순간 바꿀 수는 없었다.
누군가한테 저주를 내리면 내릴수록 자기도 모르게 흑마법이 발동된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학습 받았기 때문이다.
“서툰 능력은 안 쓰는 것만 못 하다고, 잘못하다가 누군가 휘말리기라도 하면…….”
아직은 누군가를 저주해서 흑마법이 발동된 적은 없었다. 자신한테 저주를 내리는 바람에 이 고생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 말이 맞았다. 서툰 능력이나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능력은 안 쓰는 것만 못 했다. 그녀는 특히 회귀를 반복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흑마법을 더 꽁꽁 감추기 위해 노력했다. 들키면 자신만 위험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내가 의심받은 것처럼, 다른 죄 없는 사람들이 휘말릴까 봐.”
루는 근심 어린 표정의 아델라를 빤히 보았다. 그의 적안이 흥미롭게 빛났다.
“그 휘말린다는 사람이…… 공작? 각하께서 위험할까 봐? 전하랑 사이가 좋지 않으니…… 네가 약점 같은 게 될까 봐?”
그 말도 영 틀린 말은 아니어서 아델라는 살짝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 소중한 사람들이 자꾸 생기니까 그전에는 없던 불안감이 문득문득 들었다.
“전하랑 사이가 안 좋은 건 어떻게 알았어?”
“내가 듣는 귀가 몇 개고, 보는 눈이 몇 갠데 그걸 모르겠어?”
아마 대륙 사정은 거의 꿰고 있을 터였다.
“걱정을 사서 하네. 그 사람, 자기가 지켜야 할 사람은 확실히 지킬걸. 못 지키면 내가 널 데려갈 거야. 그러지 않고서야 네 곁에 있을 자격이 없지. 내가 너 잘 살라고 여기 보낸 건데.”
루의 진지한 말에 아델라는 웃음이 나왔다. 지금 상황은 완전 반대였다. 아델라가 이저드를 지켜야 하는 판국이지.
“왜 웃어? 난 진짜 진심이야. 그 사람 곁에 있으면서 내 친구가 불안하면 안 되지, 암.”
“아니, 비웃은 게 아니라…… 역할이, 반대가 된 것 같아서.”
“누구랑 누가?”
“나랑 각하?”
“네가 각하를 지킨다고?”
아델라는 자기가 생각해도 웃겨서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믿기겠지만, 그래. 그래서 폐를 끼치면 안 될 것 같고…….”
“난 또 뭐라고. 주고받으면 되겠네. 네가 지켜야 할 땐 네가 확실히 지키고, 각하가 지켜야 할 땐 각하의 도움을 받고. 부부 사이가 그렇지 뭐. 뭐가 문제야?”
루의 말에 아델라는 잠시 멍 때렸다. 그러고 보니 루는 아델라가 잠시만 약혼녀를 하기로 한 사실을 몰랐다.
자신이 이저드와 평생 함께할 사이라면 루의 말이 맞는 말이었다. 서로서로 돕고, 감싸 주고, 지켜 주고……. 부부 사이에서 당연한 일이었다.
아델라는 한 번도 이저드와 부부가 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아예 생각하지 못했다.
“그…… 그러네?”
분명 이저드는 몇 번이나 아델라한테 믿음을 줬는데, 아델라 혼자 불안해서 지레짐작했다. 이저드가 말하는 ‘내 사람’ 안에 그녀가 끼어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뭐야. 처음 알았다는 그 표정은? 각하께서 널 약혼녀로 인정 안 해?”
“아, 아니! 인정하시고, 잘해 주시는데…….”
“그럼 네가 인정 못 해?”
“그…….”
그러네……?
어릴 적부터 혼자 모든 일을 이겨 내야 했던 탓에, 모든 일은 죄다 아델라의 어깨 위에만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누군가와 일을 나눠야 한다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고, 나눌 수도 없었다. 모두 그녀 혼자 감당해야 했던 일이다. 마음을 추스르는 것도, 살아남는 것도, 살아가는 것도.
“그러네?”
“아까부터 뭐 해……. 둘이, 제대로 된 약혼은 맞지?”
맞다고 하기에도 그렇고, 아니라고 하기에도 그렇고.
“서로 대화는 많이 해?”
루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아델라의 표정을 살폈다. 아직도 얼떨떨한 모양이었다.
“하긴, 하는데…….”
“한다는 거야, 안 한다는 거야.”
“훈련받을 때? 조금?”
“훈련도 받아?”
“내가 부탁드렸지. 더 강해지고 싶어서.”
이 관계는 뭐지……. 루는 미간을 살짝 구기고 계속 물었다.
“뭐, 호신술 같은 건 나한테도 종종 받았으니까 특별할 건 없고. 침실에서는?”
“거의 잠만 자는데?”
“서로…… 좋아하는 건 맞지?”
아델라는 루의 대답에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루는 그런 아델라의 태도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고민할 일인가?
“나는 좋아해. 확실히, 되게 많이.”
“각하께서는?”
“좋아……하시지 않을까?”
아이고, 이 답답아. 좋아하시지 않을까, 는 뭐야.
루는 맹한 아델라의 대답에 사실은 아델라가 사기 약혼을 당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물론 공작이라는 대귀족이 그럴 일은 없겠지만, 아델라가 이렇게 확신을 못 하니 답답했다.
“좋아하실 걸?”
물론 아델라가 생각하는 좋아한다는 기준은 그저 부하로서였다. 남녀 관계가 아니라.
‘그런데…… 무늬만 약혼녀인 부하도 그렇게 안아서 달래나? 각하의 친절함의 끝은 어디까지지?’
아까는 그저 친절일 뿐이라고 세뇌하기도 했고 창피하기도 해서 그냥 도망쳤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친절’이나 ‘호의’라고 하기에는 선을 넘은 것 같았다. 보통 아무리 친절해도 안아서 달래지는 않지? 아니면 자신이 너무 불쌍해 보였을까?
아델라는 그가 자신을 안은 이유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너, 사기 결혼 아니지?”
“그건 진짜 아니야. 사기로 치면…… 내가 더 숨긴 게 많지.”
사기는 아니라니까 다행이긴 한데, 아델라의 태도를 보니 루는 살짝 불안했다. 어디 가서 뒤통수 맞을 아이는 아니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그래? 그럼 엄청 매우, 감동적이게 잘해 주셔?”
아델라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예 희망이 없는 건 아니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아델라를 보며 루는 계속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지금 행복해?”
아델라의 얼굴에 아주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무슨 걱정이 그리 많은지 마음 놓고 웃지도 못하는 모양이었다.
“미리 걱정하지 마. 해결할 수 있을 거야. 네 곁에 있는 사람들이 도와줄 거고, 나도 최선을 다해 응원할게. 내 도움이 필요하면 기꺼이 도와줄 거고.”
루가 진심으로 웃어 보이자 아델라도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마주 웃었다.
“응. 안 그럴게. 고마워. 머릿속이 많이 정리된 것 같아.”
많은 일이 휘몰아쳐 정신없었는데 루의 말 덕분에 오늘 밤에 해야 할 일과 물어야 할 것들이 생각났다. 아델라는 항상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루를 편안한 표정으로 보았다.
“그나저나 너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평소와 같은 아델라로 돌아오자 루는 안심한 표정으로 그녀와 이야기를 시작했다. 평소와 같은 대화였다. 서로의 근황을 전하며 하는 이런저런 이야기 말이다.
* * *
긴 생머리를 지닌 은발의 소년은 봇짐을 지고 높게 솟은 펜베르크 성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는 한참을 그곳에 서서 펜베르크 성을 무미건조하게 바라보았다.
한참 후에 루가 자리를 옮기려 발을 떼자 저 멀리서 바람을 일으키며 사람들이 그한테 달려왔다. 루를 한 번 협박한 전적이 있는 가웨인 백작과 벨제프 자작의 사병들이었다.
“멈춰라!”
루는 이 상황을 예상했던 건지 흔들림 없이 자신을 에워싸는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할 수 있는 게 협박밖에 없을 테니 이럴 줄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루는 병사들한테 둘러싸여서 아무 감정 없는 얼굴로 벨제프 자작을 그저 바라보았다. 자작은 이전처럼 당황하지 않는 루를 보며 잠시 멈칫했지만 이전에 성공한 기억이 있어 다시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
“네놈이 나를 좀 도와야겠다! 얌전히 따라와!”
하지만 벨제프 자작의 말에도 루는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그는 목 근육을 이리저리 풀더니 갑자기 하늘을 보았다.
“아…… 내가 참. 널 죽일 수 있었다면 진즉에 죽였을 텐데. 명줄은 또 왜 그렇게 긴지.”
루는 아무 표정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붉은 눈동자를 빛내며 벨제프를 쳐다보았다.
“운이 미친 듯이 나쁘면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던데. 그 정도는 괜찮겠지?”
누구한테 묻는 건지 모를 말을 벨제프 자작한테 하는 루의 표정은 이전에 사병들한테 사로잡혔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뭐, 뭐라는 것이야! 당장 따라오지 못해!”
“아!”
“뭐, 뭐!”
루가 감탄사를 내뱉으니 당황한 벨제프가 같이 놀라 소리쳤다. 루는 벨제프가 소리를 치거나 말거나 그의 뒤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만 있었다.
“각하!”
그 단어 하나로 모든 이들의 시선이 벨제프 자작과 가웨인 백작의 뒤쪽으로 향했다. 물론 그곳에는 공작의 머리카락 한 올도 볼 수 없었다.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영문도 모르고 뒤로 자빠진 벨제프 자작뿐이었다.
“어억!”
철퍼덕!
그들은 벨제프 자작이 뒤로 엎어진 채 코를 부여잡고 있거나 말거나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루를 다시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없는데 있는 척한 루가 괘씸해서 뭐라 한마디 해주려 모두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루는 이미 그 자리에서 사라진 뒤였다. 방금까지 본 루는 신기루였던 것처럼 어떤 자취도 찾을 수 없었다.
모두 귀신을 본 듯 넋 놓고만 있을 때 루는 이미 그들과는 한참이나 떨어진 수풀 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산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 놈은 치웠고, 한 놈은 겁쟁이라 제 무덤을 스스로 팔 테고, 남은 놈은…….’
그는 산속을 묵묵히 걸으며 다시 펜베르크 성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뒀다.
‘이번 생에 움직인 보람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루는 앞을 보고 걷지 않는데 용케도 넘어지지 않고 잘 걷고 있었다. 그는 다시 앞을 보고 걸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이번에도 안 되면 다음에 다시 보는 거지. 별수 있나.”
한두 번 겪은 일도 아니고.
루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 * *
“저, 각하! 저희 오늘은 대화해요! 훈련 말고.”
“좋네.”
아델라는 비장한 표정으로 이저드한테 말했고,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빠르게 돌아온 이저드의 대답에 아델라는 살짝 당황했지만 곧 그와 소파에 마주 보고 앉았다.
이제는 마주 보고 앉아 있기만 해도 심장이 주인 마음도 모르고 심하게 뛰었다. 아델라는 그의 시선을 피해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머릿속을 빠르게 정리했다. 그런 후에 그와 다시 시선을 마주했다.
“저에 대해서 할 말이 있습니다. 그때 그러셨죠? 저에 대해 몰라서 벌어지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그랬지.”
“많이 늦었지만…….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그와 마주한 그녀의 눈동자가 아주 잠시 떨렸다. 이저드는 불안해하는 그녀를 보며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작가에 대해서는 아시죠? 저희 어머니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조금만 수소문해도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이저드는 그녀의 물음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라는 속으로 다행이라고 여겼다. 아예 자기 집안 사정을 모르는 상태로 이런 이야기를 꺼내기는 좀 그랬다.
“아시다시피 제 어머니는 흑마법사셨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입이 벌어졌다가 다시 닫혔다. 말하기를 굉장히 망설이는 기색이었지만 금방 정신을 차리고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저도…… 흑마법사입니다.”
아델라가 두 눈을 꼬옥 감고 고개를 숙였다.
죄인처럼 어깨를 움츠리고 있는 아델라를 보던 이저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침묵했다.
황당무계한 회귀에 관한 이야기나 아델라의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 때문에 어느 정도 그럴 확률이 있지 않을까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정말로 흑마법사일 줄은 몰랐다. 흑마법사가 흔한 것도 아니고, 아델라는 분명 어릴 적에 의심에서 벗어났다고 들었으니까.
이저드는 잔뜩 긴장한 아델라를 계속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계속하게.”
궁금한 것은 잠시 뒤로 미뤄 뒀다. 지금 이 순간, 그녀가 먼저 입을 뗐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는 그녀의 이야기를 차분히 다 들어 줄 준비가 예전부터 되어 있었다. 그는 아델라를 다그치지도, 그렇다고 재촉하지도 않고 그녀가 마음을 추스를 때까지 기다렸다.
아델라는 꼭 감았던 눈을 뜨고 약간 놀란 눈으로 이저드를 바라보았다. 이저드는 아무렇지 않은 듯 평소와 같은 표정이었다. 이저드의 반응에 아델라는 조금 안심이 됐는지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각하나 각하의 소중한 분들이 위험해질 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이번 생에 이렇게 많이 바뀐 것도…… 제 저주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저드는 아델라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조금 불안해졌다. 말하는 뉘앙스로 봐서는 그런 위험한 순간이 오면 절 버리세요! 라고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한데?”
“사실 떠나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는데요.”
이저드의 미간이 약간 움찔 떨렸다.
“각하께서 절 믿어 주고 배려해 주신 만큼, 실망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음…… 그래서 말인데요. 제가 흑마법사로 몰렸을 때, 빠져나갈? 혹은…… 여론을 바꿀? 계책 같은 걸 같이 생각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는 그녀의 물음에 속으로 놀랐다. 그녀가 앞으로 살아 나갈 방도를 논의하자고 먼저 제안해 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여태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스스로 역경을 이겨 내는 것만 봐와서 그는 이렇게 물어오는 그녀가 낯설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드디어 그한테 마음을 연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 저주는…… 미리 걱정하지 않으려고요. 절대 다른 분들한테 제 저주가 옮겨가게 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안 쓰는 건 진짜 잘하거든요.”
이십 평생을 안 쓰고 살아오다가 단 한 번 살기 위해 흑마법을 썼으니 그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땐 마법진이라는 정확한 매개체가 있었다. 흑마법을 좀 더 강하게 발현하게 하는 매개체.
언젠가 루가 준 흑마법서에서 봤던 것이었다.
그녀는 그게 이런 식으로 돌아올지 모르고 책에서 본 마법식을 그냥 다 때려 박았다. 흑마법을 처음 써 보기도 했고, 자신의 힘이 너무 약해서 혹, 발동이 되지 않을까 봐 그냥 되는대로 중얼거렸다. 엉터리임을 알지만, 아델라는 간절했다.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아요! 자연사도 아니고, 전쟁에서라니! 제발― 앞으로 더 열심히 살게요! 제발! 죽더라도 자는 듯이, 호상으로, 아픔 없이 죽고 싶어요! 라는 간절한 메시지와 함께 흑마법은 발동됐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마, 제 흑마법이 형편없어서 영향도 못 끼칠 거예요.”
사실, 아델라는 당시 발동이 됐는지도 몰랐다.
자기 자신한테 흑마법을 거는 법은 쓰여 있지도 않거니와, 제대로 된 대가도 치르지 않았다. 무작정 그냥 빌었기에 결과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원래 흑마법은 결과가 직접 눈에 나타날 때까지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의 간절한 바람이 통했다는 것을 안 건, 익숙한 천장을 보며 눈을 떴을 때였고, 자신이 저주에 걸렸다는 걸 깨달은 건, 몇 번이나 익숙한 천장을 마주하고서였다.
흑마법이 저주로 발동되는 건 아델라도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아델라는 하늘에 맹세코 누군가를 저주하며 흑마법을 부리지 않았다.
적군들 다 죽어 버리라고 저주를 건 것도 아니요, 내 옆 사람 대신 내가 살자고 욕심을 부린 것도 아니요, 성을 지키지 못한 이들을 원망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흑마법은 발동됐고, 아델라는 회귀를 거듭하게 됐다.
자기 자신에게 쓰면 저주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발동되는 걸까? 아니면 이것도 흑마법의 저주 중 하나인 걸까?
그렇다고 자기 자신을 원망한 적도 없었다. 당시 포로 처형만이 남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녀한테 남은 희망이 그것밖에 없어서 썼을 뿐이다. 저주가 걸릴 이유가 없는데 그녀가 계속 회귀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엉터리로 부린 흑마법 때문인 것 같았다.
이번에야 운이 좋아 자신만 회귀하는 걸로 끝났다고 하지만, 다음은 장담할 수 없었다. 뭣 모르고 흑마법을 썼다가 그녀의 앞에 완전히 다른 결과가 펼쳐질지도 모른다.
간절한 상황에서 자신에게 걸었던 흑마법은 미래를 바꿀 기회를 줬지만, 흑마법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해치기 위해 존재했다. 그렇기에 그녀가 평생 흑마법을 쓰길 두려워했던 것이다.
절대 함부로 쓰지 말아야지. 절대, 기필코. 여태까지 그래 왔듯이, 그녀는 흑마법 없이도 살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각하께서 원치 않으시면 저는 각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저를 안고 가시는 건 위험 부담이 크시니까요. 떠나라고 한다면 떠나겠습니다.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아델라는 이저드를 만나기 전에 달달 외웠던 대로 말을 마쳤다. 제, 제대로 다 말했지? 그렇지?
“끝났나?”
아델라의 황금빛 눈동자가 불안하게 움직이는 걸 보고 있던 이저드가 물었다. 그녀는 마음의 준비를 다 마친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럼 이제 내가 말하겠네.”
“네.”
“우선…… 고맙군. 쉽지 않은 이야기를 해 줘서. 그대의 어머니에 대한 것을 마음대로 조사한 일은 미안하게 생각해.”
아델라는 멍한 표정으로 이저드를 바라보았다. 왜 여태 숨겼냐고 할 줄 알았는데…….
“그리고 나는 그대가 흑마법사든 흑마법사가 아니든, 그대가 당하게 두지 않을 거네. 이 사실을 공유하지 않아 그대가 불안했다면 그것도 미안하군.”
“……미, 미안하실 것까지야……. 저야말로 정말 죄송…….”
아델라는 이런 사람을 여태 못 믿었다는 게 너무 죄송스러워 바닥에 머리라도 박고 사죄해야 할 것 같았다. 한마디로 지금 그녀는 몸 둘 바를 몰라 당황하고 있었다.
“초반에 그대를 의심한 건 나니까 미안해할 필요 없어.”
“그래도…… 각하께서는 당연한 일을 한 거고, 제가 수상한 행동을 해서…….”
“아니지, 아니네. 우리는 서로의 입장에서 당연한 행동을 한 거야. 그대나 나나 당시에는 그 행동이 최선이었어. 그러니 나한테 미안해하지 말게.”
아델라는 이 상황이 낯설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앞으로 그대 혼자 애쓰는 일은 없도록 노력하겠네. 그대는 나한테 부담이 아니야. 나를 믿어 줬으면 좋겠어. 절대 그대를 잃지 않아.”
이저드의 강직한 눈빛에 아델라는 마음이 울렁였다. 눈가도 화끈거렸다. 자신의 횡설수설한 말을 진지하게 답해 주는 이저드가 또 멋있어 보였다.
그가 얼마나 자신을 위하고 배려하는지 피부로 느껴졌다.
“아, 그리고 또. 그대가 가지고 있는 모든 고민이나 불만 같은 걸 지금처럼 나한테 말해 줬으면 좋겠네. 뭐든 좋아.”
“부, 불만이라뇨. 그런 거 없습니다.”
아니, 각하께 불만이라니? 그런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었다.
“언젠가 살다 보면 불만이 생길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때마다 그대가 편하게 말해 줬으면 좋겠어.”
아델라는 그의 말에 눈을 도르륵 굴렸다. 언젠가, 라니 아무리 봐도 한 해, 두 해를 말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지, 지금 물어볼 타이밍인가?’
아델라는 자신에 대해 털어놓은 것과 별개로 궁금한 것이 하나 더 있었다. 그녀는 이저드의 안색을 살폈다.
“내 뜻에 따르지 말고, 그대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원하는 대로 해봐. 걱정하지 말고.”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다가 실수라도 하면…….”
“말했지 않나. 그대 혼자가 아니라고.”
아델라는 그를 힐끔 보았다. 눈을 마주치기가 너무 쑥스러웠다. 왜인지 모를 기대감으로 심장이 두근두근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물어볼까 말까 망설이다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계속…… 궁금했던 건데요.”
“뭐지?”
“원래도 자기 사람들한테 이렇게 친절하십니까?”
그녀는 이저드한테 어떤 대답이 들려오든 신경 쓰지 않으려 눈에 힘을 줬다. 아무렇지 않은 척 이저드와 마주 보기 위해서였다.
“……대부분은.”
이저드는 살짝 아래로 내리깐 그녀의 눈동자를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보았다. 자신의 대답에 약간 실망을 한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표정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으며 조금씩 입가를 허물어뜨렸다. 요 며칠 은근히 끊임없이 유혹한 게 통한 것 같았다.
“아……. 그렇죠. 그렇겠죠.”
으휴, 괜히 설레발쳤네. 아델라는 콩닥대던 마음을 진정시켰다. 역시 모두를 같은 마음으로 대한 거였어!
아니, 그래도 그렇지, 왜 안아서……!
그녀는 퍼뜩 아까 생각이 나서 고개를 홱 소리 나게 들었다. 하지만 그에게 따지려던 아델라는 고개를 들자마자 그대로 굳었다.
굳을 수밖에 없었다. 이저드 곁에 있으면서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그의 미소를 보게 된 것이다. 굉장히 즐거워 보이는 미소였다. 그냥 살짝 입가만 올렸다 내린 것도 아니고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사람 혼을 쏙 빼놓는 미소였다.
미소……. 미, 미소다. 미소라고. 무려 미소! 이게 홀린다는 기분? 유혹되는…… 기분? 아니, 단단히 유혹을 당한 기분?
잦아들었던 그녀의 심장이 다시 요란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빨개진 얼굴로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아, 안 돼! 넘어가면!’
“그, 그그그그럼! 너무…… 너무…… 너무…….”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잘 안 들리네, 아델라.”
아까 그의 미소 띤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아델라는 그가 잘 웃지 않는 이유를 아주 쉽게 납득했다.
그의 미소는 관심이 없던 이들도 불나방처럼 달려들 게 만드는 마성의 힘이 있었……! 크흡! 어쨌든 아주 아찔한 미소였다. 그의 미소 하나 보기 위해 평생을 바쳐도 괜찮다고 생각할 만큼 말이다.
“너무! 과하셨습니다!”
아델라는 이저드를 다시 바라볼까 봐 어깨를 움츠린 채 아래로 고개를 폭 박고 외쳤다.
“과해? 친절이?”
“네!”
“지금?”
“아뇨. 아까…… 낮에…… 위로하시면서…….”
굳이 위로하고 싶었으면 안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기대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 기대하게 돼서 아델라는 지금 좌절을 맛보고 있었다.
그것도 친한 자기 사람한테 하는 당연한 친절이었다니……. 얼마나 허탈하던지.
“낮의 일은 친절이 아니네. 위로는 맞지만.”
……응?
아까는 대부분 친절한 편이라고 해 놓고는……?
“그대를 안은 건 내 욕심이었어.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하지.”
“……응?”
아델라는 잘못 들은 건가 싶어 고개를 슬그머니 들었다. 그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아직도 미소를 띠고 있었다.
‘헉? 뭐야. 뭐지? 왜, 왜 이러시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겠다. 머릿속이 너무 혼란스러워서 이저드를 쳐다보고 있어도 그녀의 정신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앞으로 그런 실수 안 하겠네. 다시는 손대지 않을 테니…….”
“아니……!”
머리보다 몸이 먼저 나간 아델라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입을 꼭 다물었다. 그새를 못 참고 입이 방정을…….
“아니?”
이걸 말해야 해, 말아야 해?
아델라는 이저드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 기분이 나빴던 건 아닙니다.”
좋았으면 좋았지, 기분이 나빴을 리가 없었다.
“아니면? 괜찮았나?”
“괘, 괜찮았죠?”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고?”
“예에……?”
“무례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나?”
“아뇨……?”
아델라는 이저드의 물음에 성실하게 대답하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이상하다. 좀 이상하다. 왜 이런 걸 묻지?
“편했나?”
진짜 이상하네?
아델라는 의문으로 가득 찬 표정으로 대답했다.
“편했다기보단…….”
“그럼, 좋았나?”
“좋았…… 예?”
방심했……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그의 물음에 아델라는 멍하니 굳었다.
‘들켰나! 그때 내 심장이 너무 빨리 뛰었나? 그래서 들켰나? 어, 어쩌지? 모른 척해야 하나? 시치미 뗄까?’
얼굴이 점점 빨개지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이저드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한번 올라간 입가는 쉬이 내려가지 않았다.
“그럼…… 앞으로도 그대를 안아도 되겠나?”
‘안는 걸 왜 허락 받……. 아니, 잠깐만. 방금 진짜로 잘못 들은 것 같은데.’
아델라는 심장이 너무 뛰어서 정신이 멍해진 상태로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이 이저드가 맞는지 의심했다. 이러던 사람이 아니라 매우 당황스러웠다.
“각하…… 지금 좀, 이상합니다. 왜…… 왜 이러십니까? 지금 저 놀리시는 거죠?”
놀린 거라면 놀린 건가. 그녀의 반응이 보고 싶어 이러는 건 맞았다. 얼굴로 곧잘 나타나는 그녀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처음에는 그 목적이었는데, 그녀의 행동이 귀여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홍조가 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델라를 보며 그는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놀리는 거 아니네.”
“그럼요?”
“말 그대로 허락을 구하는 거네.”
“왜요?”
아델라는 놀라서 계속 되묻기만 했다. 머릿속이 하얘져서 그 말 말고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계속 의문만 떠다녔다.
그가 물은 것에 대한 답이 설마 자신이 좋아서, 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대를 좋아해서.”
‘어……? 응……? 으응? 꾸, 꿈인가?’
그녀는 당장에라도 자기의 볼을 꼬집어보고 싶었다.
“안고 싶고, 닿고 싶어서. 하지만 내 감정대로 하면 안 되지 않은가. 그래서 물은 거네. 그대가 싫다고 한다면 앞으로 절대 그러지 않겠네.”
역시 꿈인 것 같았다. 역시 볼을 꼬집어 봐야겠다. 그녀가 멍한 표정으로 손을 스윽 들었다.
“꿈 아니네. 괜히 그대 볼 아프게 꼬집어 볼 필요 없어.”
“……왜죠?”
이번에는 그녀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어떻게 이 상황이 현실일 수가?
그도 자신을 좋아한다니, 믿기지 않았다. 그냥 약혼녀가 되어 옆을 지키게 된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있었는데! 실수할까 봐 노심초사하면서 동침한 건데! 그럼 요 며칠 이상한 행동을 보인 게 다……!
아델라는 그제야 요 며칠 이저드가 자신한테 했던 행동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대놓고 유혹한 거였잖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현실이 맞으니까. 난 그대와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약혼 관계가 아닌, 제대로 된 사이이고 싶네.”
이저드의 눈빛은 진지했다. 아까처럼 웃고 있지도 않았다. 평소처럼 태연해 보였지만, 실은 긴장해서 평소 포커페이스로 돌아온 것뿐이었다.
“늦었지만, 나랑 연인으로 시작해 보지 않겠나? 주군과 부하 사이 말고 말이야.”
그가 아직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것 같은 아델라를 보며 진지하게 말을 마쳤다.
“전…….”
그녀는 망설였다. 아델라의 마음은 처음부터 그한테로 향해 있었기에 확고했지만, 그와 그녀 사이에는 다른 문제가 있었다.
회귀. 반복되는 회귀였다.
그녀는 자신이 과연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의 기억에서 아예 없는 사람으로 싹 지워지는 그 시기를 몇 번이고 견딜 수 있을까?
“전…….”
“당장 대답하기 힘들면 다음에 해도 되네. 부담 갖지 마.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하게.”
“그게 아니라…….”
아델라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앞으로 언제 또 올지 모를 기회였다. 아델라도 그를 잡고 싶었다. 다음 생에 그가 그녀를 싹 잊게 되고 그녀를 좋아하지 않게 된다고 해도, 이번 생에 이렇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최선을 다하겠지만, 만일 이번 생에 죽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몇 번이고 다시 그를 찾아올 것이고, 살릴 것이고, 좋아하게 될 것이다.
그녀는 그가 살 수만 있다면 그 모든 시간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차피 이보다 더한 시간도 견뎌 왔다.
“제가…… 제가 반드시 이번 생에 각하를 지키겠습니다. 만일 다음 생이 기다리고 있다면 꼭, 다시 찾아가겠습니다. 몇 번이고.”
아델라는 맑은 눈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이번에는 그녀가 잔뜩 긴장해서 그의 표정을 살폈다. 여전히 평소와 같은 표정이라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저드는 그녀가 자신과 시작해 볼 마음이 있다는 것에 큰 안도를 느끼고 있었다. 그는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그녀를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도, 그래도 되겠나?”
“예?”
“그대를 몇 번이고 잡아도 되겠냐는 말이네. 나는 다시 다른 생을 산다고 해도 그대를 좋아할 거야. 이거 하나는 확실해. 그대가 질릴 정도일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겠나?”
그녀를 다른 곳에서 다르게 만났더라도 이저드는 그녀를 좋아했을 것이다. 그의 평생 동안 이렇게 잡고 싶은 마음이 드는 이는 아델라뿐이었다. 그 사실은 그녀가 계속 회귀한다고 해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한 번 이저드 마음에 박힌 이가 그리 쉬이 빠질 리 없었다.
그도 그녀가 회귀해서 자신의 모든 기억이 사라지고 그녀와 아무 접점도 없던 때로 돌아갈 생각을 하면 답답하고 먹먹했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놔 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잡지 않으면 그는 계속 후회할 것 같았다. 과거부터 후회했던 일들이 너무 많았던 그는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저는, 괜찮습니다. 각하께서는요?”
“나도 괜찮네. 오히려 환영이야. 그대가 나한테 매번 와 준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아델라는 당당하게 말해 놓고 막상 이저드와 시선이 마주치니 슬슬 피했다.
‘그럼…… 오늘부터…… 우리, 연인인 건가……?’
수락을 하고 보니, 당장 침대에 누워야 될 상황이었다. 아까 이저드가 다음에 생각해 보라고 할 때 수락할 걸 그랬나? 1일 차부터 이 분위기 어쩌지.
“저…… 각하. 저희, 오늘부터…… 연인인 거죠?”
“나는 연인부터 시작하고 싶네. 그대는?”
“저도…… 저도요.”
사실 둘 다 실감이 나지는 않았다. 서로가 서로한테 받아들여질 거라고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까까지 그렇게 당당하게 서로한테 마음을 전해 놓고, 지금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둘 다 말이 없었다. 둘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그들은 시작하는 사이는 뭐부터 해야 하는 건지, 시작해서 뭐가 달라지는 건지 잘 몰랐다.
꽤 긴 시간 침묵이 흘렀고, 먼저 입을 연 쪽은 아델라였다.
“오늘은…… 이만, 잘까요? 각하께서 죽게 되는 원인을 당장 알 수는 없는 거고, 앞으로 찾아봐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내일을 위해 오늘은 조금 쉬고, 내일부터 찾아요. 이번 생에는 반드시 찾을 거예요. 그래서…… 아무 걱정 없이 편하게 연애하고 싶어요.”
“그대의 말이 맞군. 그럼 각자 옷을 갈아입고 다시 보지.”
“네, 네! 저, 근데 각하!”
이저드는 자리에서 일어서려다가 아델라를 보았다.
“옷! 제대로 입고 나오세요!”
“……?”
아델라는 그렇게 말하고 호다닥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그는 새빨개져서 사라지는 아델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그녀의 말을 이해하고 웃음이 터졌다. 요 며칠 그가 한 짓(?)을 생각하면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말이었다.
* * *
“도대체…… 매번 그렇게 자는 이유가 뭔가?”
이번에도 그녀는 이불을 돌돌 말고 침대 끝에 누워 있었다. 이저드는 이 상황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전 이렇게 자는 게 편해서…….”
연인이 됐다고 특별히 달라질 게 없어 보였다.
“안쪽으로 들어와서 자면 안 되나? 그대가 안 떨어질 건 며칠간 봐 와서 알지만, 불안하네.”
아델라는 고개만 돌려 이저드를 힐끔 보다가 슬그머니 침대 안쪽으로 한 뼘 정도 이동했다. 나름 큰 용기를 낸 거였다. 연애 첫날부터 사고치고 싶지 않았다. 아, 그러니까, 자신이.
이저드는 그녀가 한 뼘만 이동하는 걸 보며, 그 모습이 귀엽고 웃겨서 다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 정도 옮긴 것도 발전이라면 발전인 건가.
“이, 이 정도면 됐죠?”
완고한 그녀의 태도에 이저드는 더 이상 안으로 들어오라 말하지 못하고 침대에 누웠다.
연인이 되면 뭔가 크게 바뀔 줄 알았는데, 둘은 딱히 그래 보이지 않았다. 서로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지만, 행동은 평소와 비슷했다.
“근데, 각하.”
이저드가 그녀를 돌아보았을 때, 그녀는 그를 쳐다보지도 못했다.
“왜 그러나?”
“제가…… 막…… 미친년처럼 해도, 다시 좋아하실 수 있겠습니까?”
“무슨 짓을 해도.”
그는 확실하게 답을 내렸다. 그녀가 말하는 미친년이 어느 정도의 범위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때도 다른 의미로 콩깍지가 씌었을 것이다.
“막, 스토커처럼…… 그래도요?”
“그래도.”
“기억이 없으신데, 미친 사람 하나가 침실에 쳐들어와서 난리 치며 덮치려고 하고, 날 기억하라고 해도요?”
과연, 자신이 싫어할 만한 방법이긴 했다. 이저드는 다음 생의 자신이 그 모든 걸 받아 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잠시 천장을 쳐다보다가 살풋 인상을 구겼다.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니네.”
“예…… 엥?”
“그대가 위험하지 않나.”
“헉, 역시 목숨의 위협을 당할 짓이었나요?”
아델라는 눈을 댕그랗게 뜨고 이저드를 돌아보았다.
“내가 그대를 거칠게 다룰까 봐 그러네. 날 덮치지 않는 게 좋아. 적당한 거리는 유지해 주게.”
아! 혹시 ‘자살 행위’라는 그거?
“아! 그거 때문이죠! 각하를 잘 때 건드리면 자살 행위라서!”
“…….”
이저드는 자신이 맞혔다는 듯이 눈을 반짝이는 아델라를 보며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랐다.
“그럴 리가. 그대가 이 주변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부터 난 깨어 있을 거네.”
“아…… 귀가 밝으시댔죠?”
한 침대에 잔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잠시 그 사실을 잊었다.
“그럼…… 제가 너무 들이대면 살심이 들 것 같아서?”
“아니네.”
“그럼요?”
이저드는 정말로 궁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를 마주 보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내가…… 그대를 내 욕망대로 거칠게 할까 봐 그래.”
아델라는 동그란 눈을 깜박이다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저, 저! 안 건드리신다면서요!”
“그건 지금의 나와 한 약속 아닌가. 그대는 좋아하는 사람이 덮치는데 당할 재간이 있나?”
덮치면 어쩌냐고 자기가 물어 놓고선 자기가 따지고 있었다. 아델라는 민망해져서 그의 눈치를 보았다.
“기억이 없으시면…… 절 파렴치한으로 취급해야죠. 각하, 제가 유혹한다고 넘어오실 분 아니잖습니까.”
유혹이나 해 보고 그런 말을 해야…….
이저드는 아델라가 자신을 너무 성인군자로 보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성욕 따위 없는 듯이 생활한 그의 태도가 한몫했지만.
“말했잖은가. 다시 다른 생을 산다고 해도 나는 그대를 좋아할 거라고. 그대가 다짜고짜 내 앞에 나타나서 기억하라고 해도 그대한테 반할 거고, 다짜고짜 유혹해도 반할 거네.”
아델라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저 진짜 해 봅니다? 다짜고짜 포옹한다든가, 각하가 싫어할 만한 스킨십을 하다든가.”
이야기가 어쩌다가 박박 우기기로 변했는지 모르겠지만, 이저드는 그녀가 불안해서 이런 말을 꺼냈다는 것을 알았다. 회귀 후가 불안한 건 그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이저드는 그녀를 빤히 보다가 몸을 천천히 일으켜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녀가 움찔 몸을 굳혔다.
“그대와 하는 스킨십 중에, 내가 싫어하는 건 없을 거야. 궁금하면 시험해 봐도 좋아.”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얼굴로 향했다. 그는 흘러내려 온 그녀의 진갈색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며 그녀의 작은 얼굴을 살며시 잡았다.
아델라는 가까이 다가오는 이저드를 보며 홉뜬 눈으로 숨을 멈췄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얼굴이 훅 하고 다가오니 그녀는 심장이 멈춰 버릴 것 같았다.
“아, 안 돼요! 안 돼요! 안 돼요오오오!”
아델라는 필사적으로 외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에 이저드가 몸을 굳히고 멈췄다.
방 안에 알 수 없는 침묵이 잠시 흘렀다.
“……아델라,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네.”
“……?”
이저드는 이미 아델라의 얼굴에서 손을 뗀 상태였다.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아델라가 안 된다며 이저드를 와락 안아 버렸으니 말이다.
이저드는 그녀한테 안긴 상태 그대로 멈춰 있었다. 아델라는 단단함이 느껴지는 그의 가슴팍에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감았던 눈을 떴다.
‘어라? 내가 왜 여기 있지?’
그녀는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가만히 생각해 보다가 화들짝 놀라 그를 꽉 안은 두 팔을 놓았다.
“헉! 죄송!”
미쳤다! 정신이 나갔나 봐! 진짜 정신이 나갔던 것도 같고!
아델라는 허겁지겁 그한테서 떨어지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연애 고자라 하더라도 이저드는 굴러들어 온 기회를 차 버릴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아델라의 허리와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대가 먼저 안았으니, 허락의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나?”
그녀의 몸이 흠칫 굳었다.
“무, 무, 무슨 허락이요?”
“그대를 안는 거.”
아, 아아.
그녀의 몸에 아까보다 힘이 빠졌다. 아델라는 얼굴이 빨개져서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이저드한테 애먼 생각이 들킨 것 같아 무척 부끄러웠다.
이저드는 자신의 품에 얌전히 안긴 아델라를 조금 더 강하게 안으며 속으로 웃었다. 그래도 그녀가 상당히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대놓고 웃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아델라, 왜 계속 다음 생을 이야기하나? 그대가 말한 거, 이번 생에 하면 안 되나?”
이번 생에? 뭘요? 그걸요? 덮치고 난리 치는 그걸요?
그녀는 놀란 눈으로 그와 거리를 살짝 벌렸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그를 마주하자 그녀는 다시 숨을 홉, 하고 참았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 보는 건 심장에 상당한 무리를 주었다. 아델라는 다시 슬그머니 그의 어깨에 기댔다.
“제가 어떻게 각하를 먼저 덮쳐요!”
“……나는 스킨십을 말한 거네만.”
이저드와 아델라 사이에 다시 침묵이 흘렀다.
아델라는 콱 혀를 깨물어야 하나 싶었다. 음란마귀가 씐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하는 말마다 이럴 수가!
“큭…….”
참으려고 했지만 점점 내려가는 그녀의 고개를 보던 이저드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그녀를 품 안 깊숙이 안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세게 안으면 그녀가 아플 것이 분명했기에 조절하며 그녀를 더 꼭 안았다.
“그대가 귀여워서 곤란하군.”
“죄송……! 예?”
안 그래도 큰 황금빛 눈동자가 더 크게 떠졌다. 그녀는 그의 품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델라는 그의 웃음기 어린 부드러운 눈빛을 보며 다시 뻣뻣하게 굳었다. 세상에나. 그녀는 입이 저절로 벌어지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주변에 어둠이 깔렸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주변이 환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아델라는 그 순간 홀려서 그를 넋 놓고 보았다. 그의 웃는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그의 얼굴이 매우 가깝게 다가온다 싶더니,
쪽.
하는 믿기 힘든 소리가 들렸다. 아델라의 입장에서는 생각도 해본 적 없는 그의 스킨십이었다. 그녀의 이마에 그의 입술이 닿을 때까지도 그녀는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 멍해졌다.
쪽.
멀어지나 싶다가 다시 그녀의 볼로 그의 입술이 닿았다. 그가 남은 한쪽 볼에 입술을 대려고 할 때 아델라는 화들짝 놀라 두 손으로 자신의 볼을 가렸다.
“저! 허, 허락 안 했는데!”
“그럼 지금 허락받지. 키스해도 되겠나?”
우아어어어? 만일 아델라가 표정으로 말할 수 있다면 이런 괴성이 들렸을 것이다.
‘나…… 방금 제대로 들은 거 맞니? 키…… 키스요? 키스? 그…… 키스요? 이, 이분 너무…… 내 생각을 읽나? 내 생각이 읽히나? 그래?’
아델라는 지금 이저드가 키스를 하겠다는 말보다도 자기 머릿속이 읽힌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먼저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사람이 이렇게 저돌적일 수가? 헉! 설마 이게 이상 현상인가?!
아델라는 대답 없이 스윽 손을 올렸다.
“뭐 하나?”
“열이 있으신가 싶어서요.”
꽤 진지하게 자신의 이마에 손을 대는 아델라를 보며 이저드는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참았다.
“연인이 유혹하는데 그대처럼 반응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
아델라는 슬그머니 시선을 내렸다. 그녀는 진지하게 이저드가 이상해진 건 아닐까 걱정한 것이었다. 진짜로 유혹하는 건 줄은 몰랐지……. 안 그러던 사람이 그러니까…….
풀이 죽은 아델라를 보던 이저드는 그녀를 놔 줬다. 그녀가 원치 않는다면 억지로 할 생각은 없었다.
“이만 잘까? 내일도 일찍 일어나야 하지 않나.”
“저, 각하.”
아델라가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와 잤으면 하는 마음에 자리를 비켜 주며 뒤로 물러서던 그를 그녀가 불렀다. 이저드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다시 보았다. 그녀는 심호흡을 깊게 했다.
‘처, 첫날부터 이래도 되나? 되는 건가? 되, 되겠지? 연인이잖아. 이제 연인이잖아! 해도 되잖아!’
와락!
아까와 마찬가지로 그녀가 이저드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녀의 얼굴이 그와 가까워진다 싶더니 그녀의 작은 입술이 이저드의 입술에 맞닿았다. 눈을 살며시 감고 입술을 꾸욱 눌러 오는 것이 그한테 도장을 찍는 듯했다.
이저드는 달려드는 그녀를 단단하게 받아 냈다. 그러곤 약간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다가 곧 맞닿은 입술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녀가 입술을 꾹 누른 채로 움직이지 않자, 이저드는 살짝 입술을 벌려 그녀의 윗입술을 훑었다. 키스가 처음이라 아델라는 긴장해서 더 입을 꾹 닫았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이저드는 잠시 입술을 떼고 웃었다. 얼굴 전체는 물론 귀까지 빨개져서는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이저드가 입술을 떼자 아델라는 슬며시 눈을 떴다. 어라? 끄, 끝인가? 그녀는 약간 긴장이 풀렸는지 무언가 말을 하려 입술을 오물오물 움직였다.
“저…….”
“방금 건 가벼운 입맞춤이었고, 이게 키스네.”
긴장이 풀려 입을 뗀 그녀를 이저드가 곧바로 덮치고 들었다. 약간 비껴서 그녀의 입술을 덮친 그는 놀라 뒤로 빠지는 그녀의 혀를 지그시 맞댔다.
아델라는 그를 꽉 마주 안으며 천천히 숨을 쉬었다. 그녀가 점점 긴장을 늦추는 걸 느낀 이저드는 조금씩 움직였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고 느리게 그녀의 입술과 입안을 핥았다. 조그만 틈도 없이 그녀를 안은 이저드는 몸을 조금씩 돌려 아델라를 천천히 침대에 눕혔다.
아델라는 등 뒤에 포근한 이불의 감촉을 느끼며 그의 목에 팔을 감고 키스에 집중했다. 아까보다 조금 더 자세가 편해져서 그런지 둘의 입맞춤은 더욱 짙어졌다.
소심하게 물러서 있던 아델라가 이저드의 혀를 따라가면서 둘의 입맞춤은 훨씬 농염해졌다. 각도를 바꾸며 길게 이어진 둘의 키스는 어느 한쪽의 숨이 차오를 때까지 계속됐다.
“하아, 하…….”
아델라가 밭게 숨을 내쉬며 그의 입술을 놓았고, 그도 그녀를 놓았다. 둘은 그렇게 잠시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입술을 떼고 한참 후에야 머릿속이 핑핑 도는 것을 느꼈다. 무작정 숨을 참기만 했더니 뒤늦게 온 후유증 같은 거였다. 숨만 문제는 아니었다. 얼굴에 열이 몰리다 못해 머리로 쏠린 기분이었다.
아델라는 잔뜩 흐트러진 남자의 색정적인 눈빛을 마주 보며 아까 정신없이 했던 키스가 생각나 등 뒤가 오싹해졌다. 이 분위기, 이 눈빛, 이 상황, 이 사람, 모두 그녀한테 참 치명적이었다.
그것은 이저드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의 빛나던 황금빛 눈동자가 약간 탁하게 가라앉아 흐려져 있었다. 방금까지 입맞춤을 해서 그런지 그녀의 입술이 자꾸 눈에 들어와 흥분이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한 번만…… 더 하자고 하면 안 되겠지……? 나 너무 쉬운 거 아냐?’
아델라는 힐끔 그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키스라는 게 이렇게 좋은 줄 알았으면 진즉에 해 보는……! 아, 이런. 방금 좀 변태 같았다. 자신이 너무 변태 같아서 얼굴이 달아오른 아델라는 이저드의 시선을 살짝 피했다.
자신의 시선을 피한 아델라를 보고 더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 이저드는 그녀의 위에서 살며시 일어났다. 그는 애써 욕망을 참으며 그녀한테 이불을 덮어 줬다.
“괜찮나?”
아델라는 그가 덮어 준 이불을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저드는 다행이라며 그녀를 보고 옆에 누웠다.
“주, 주무시게요?”
“그래.”
아델라는 정면으로 누워 힐끔 이저드를 살펴보았다. 아델라가 더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 딱 멈추긴 했지만 그의 눈빛은 아직도 그녀를 원하고 있었다.
그녀는 무언가 망설이는 듯 힐끔힐끔 이저드를 보았다.
“왜 그러나?”
우물쭈물하는 아델라의 행동이 이상해서 이저드가 조금 더 가까이 붙었다.
“―쉬워요.”
“잘 안 들리네.”
“저, 저 안 쉬워요!”
갑자기 뜬금없이 말을 꺼내서 이저드는 어리둥절하게 그녀를 보았다.
“저! 쉬운 여자 아니에요!”
“그, 그래. 내가 그대를 쉽게 대하는 것 같았다면 사과하지. 미안하네. 첫날부터 그래서 화가 났나?”
“아뇨! 저 아무한테나 안 그래요!”
“그래.”
이저드는 필사적으로 말하는 아델라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가, 각하라서 그래요! 각하한테만 그래요! 각하가 너무 좋아서요!”
“……?”
음? 갑작스러운 저돌적인 고백에 이저드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아델라는 그가 방심한 틈에 냉큼 다시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떨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둘의 입술이 다시 맞붙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먼저 이저드의 입을 열려는 듯이 그의 입술을 훑어 왔다.
놀라서 주춤하던 그가 적극적인 아델라의 움직임에 호응하며 입을 열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다른 손으론 그녀의 뒷머리를 감쌌다.
이저드는 정말로 엄청난 인내심으로 그녀를 꽉 자신의 품 안에 넣었다. 그녀가 긴 잠옷을 입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이 상태로 그녀의 살결이라도 느껴졌다간 잡고 있는 정신을 놓을지도 몰랐다.
그는 지금 자신의 인내심이 얼마나 강한지 시험받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델라는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입맞춤에 집중했다.
* * *
아델라는 그날 어떤 걱정도 하지 않고 잠들 수 있었다.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만 생각하며 잠든 적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지금 이 순간만을 기억하고 생각하고 집중하는 것은 그녀로서는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단둘만을 생각하며 잠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녀가 잠들기 전에 항상 걱정하던 것은 돈이나 회귀에 대한 것들이었다. 눈을 뜨면 펼쳐질 불안한 내일이었다.
아델라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자본 아주 어릴 적 빼고는 누군가에게 그래 본 적도 없었다. 그녀는 평생 자신의 어머니 품만 따뜻한 줄 알았다. 그것도 아주 어릴 적의 희미하게 남은 기억의 한 조각이었을 뿐이다.
그녀는 오늘만큼 편하고 따뜻하게 자본 적은 오랜만이었다. 작은 침대에서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자던 그때와 전혀 달랐다. 이번에는 그의 단단한 팔에 묶였지만 전혀 갑갑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 그한테 과거를 모두 털어 놨다는 스스로에 대한 만족과 그의 옆에 있어도 괜찮다는 안도와 입을 맞추고 있는 것만으로도 느낀 행복에 그녀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녀는 다음 날까지도 행복에 겨워 얼굴에 꽃이 폈다. 표정 관리를 한다고 하면서도 자꾸 올라오는 미소는 어쩔 수가 없었다. 연애라니! 하루하루가 불안해서 생각도 해본 적 없었는데, 기댈 수 있는 존재가 생긴다는 건 신기한 일이었다. 괜스레 마음이 놓였고, 괜스레 마음이 들떴다.
물론 그를 살려야 한다는 것은 전과 똑같았지만, 그와 함께 짐을 덜 수 있다는 것은 그녀한테 큰 힘이 됐다. 여태까지 그 누구도 그녀의 짐을 덜어서 가져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허……. 이봐요? 아델라 양? 아델라 씨? 아델라 님? 야!”
“……어라? 린다 경? 언제 왔어요?”
“아까 왔거든?”
“왜요?”
아델라는 눈만 깜박였다.
“점심 같이 먹자고 왔다. 안 내키면 간다!”
“어업! 아뇨! 아뇨! 같이 먹어요!”
어제 일만 생각하면 자꾸 웃음이 나오는 걸 어째.
아델라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린다를 잡았다.
“난 네가 우울해 있을까 봐 걱정됐는데. 내 기우였나 보네.”
린다를 잡은 아델라의 고개가 천천히 모로 기울었다. 정말로 그녀가 왜 이곳에 왔는지 모른다는 듯이 아델라가 린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너 쓰레기 아버……! 아, 남의 아버지 욕하는 건 아니지. 어쨌든, 구제할 길 없는 네 아버지 만났다며. 가웨인 백작도 쳐들어오고. 그 일로 눈치 보고 있을 줄 알았더니.”
아델라는 린다가 굳이 찾아온 이유를 알고 다시 환하게 미소 지었다. 원래라면 걱정해야 할 것들이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쩐지 이번 생에는 그 모든 걸 잘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녀한테는 이저드가 있었고, 이렇게 걱정된다고 찾아오는 린다가 있었으며, 그 정도에는 끄떡도 없는 자신이 있었으니까.
“우울할 뻔도 했는데, 괜찮아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도 알았고, 저한테는 지금 린다 경이 있잖아요!”
“공작님이 아니고?”
아델라는 뜨끔했지만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에이, 두 분 다요!”
아델라의 애교 섞인 대답에 린다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예쁜 사람이 더 예쁘게 웃으니 그녀도 당할 재간이 없었다. 그리고 화낼 이유도 없었다.
린다가 이곳에 온 목적은 순전히 아델라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집안 사정과 그녀의 아버지가 공작가에 와서 어떤 깽판을 쳤는지 다 들은 린다는 휴가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그녀를 찾았다.
안 그래도 어린 나이에 겪은 일들이 안타까웠는데, 이번 일까지 겪어서 얼마나 크게 상처를 받았을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아델라는 웃고 있었다. 그것도 행복하다는 듯이. 린다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안도했다.
“너는 참…….”
“제가 참?”
아델라는 린다의 뒷말이 궁금한지 눈을 빛내고 있었다.
“대단하다고. 나 같으면…… 세상을 부숴 버렸을걸.”
그건 다른 의미로 대단했다. 규모가 남달라……. 아델라는 잠시 허공을 쳐다보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저는…… 인간 불신에 빠졌을 지도요? 그런데 제가 힘들고 무너질 것 같을 때마다 신기하게 저를 살려 준 사람들이 있었어요.”
처음은 그녀의 어머니와 유모였고, 다음은 그녀의 새어머니였다. 그다음은 그녀의 소꿉친구 루였으며 그다음은 욘제타네 식구들이었고, 마지막으로는 공작과 공작의 사람들이었다.
그녀는 그들을 만난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이렇게 꿋꿋하게 버티고 지금까지 살아오게 된 것은 아델라를 믿어 주었던 사람들 덕분이었다.
“너무 힘들어서 주변이 보이지 않는 와중에 누군가의 도움을 알고 고마워하는 것도 능력이다?”
린다의 말에 아델라는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기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보통…… 너무, 너무 힘들 때 도와준 사람이 가장 생각나고 마음 쓰이지 않아요?”
“그렇게 정직한 사람만 세상에 널렸으면 얼마나 좋겠냐. 원래 힘들면 힘들수록 나 이외에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 법이야.”
린다는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그녀는 아델라가 기특했다. 저렇게 예쁘게 낳아 준 그녀의 어머니한테 감사 인사라도 드려야 할 것 같았다. 이미 돌아가셔서 마음으로만 전해야겠지만.
“저…… 린다 경이 생각하는 것만큼 정직하지 않아요. 저도 저만 생각했고,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도 갔고…….”
“언제?”
“집에서 도망 나올 때…… 새어머니를 두고 왔거든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녀는 그날을 가슴에 묻어 뒀긴 하지만 아직도 가끔 후회했다. 새어머니가 자신을 내보낼 때, 그녀도 같이 데리고 나왔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새어머니가 골병이 들어 돌아가시지는 않았을 텐데…….
“보통 집을 나오면 네 오라버니처럼 연을 끊어 버리지. 새어머니와 다른 사람들이 걸린다고 주기적으로 연락하진 않아. 빚도 그렇고.”
그녀가 주기적으로 연락하고 빚을 갚은 것은 새어머니와 자신을 위해 주던 이들을 두고 왔다는 부채감 때문이었다.
아델라를 지금 이 성격까지 끌어 낸 것이 바로 새어머니와 그들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평생 은혜를 갚아도 모자랄 사람들을 그곳에 두고 온 것이다.
새어머니와 다른 이들은 처음부터 가문의 빚이 배가 될 것을 감수하고 그녀를 도망치게 한 것이지만, 아델라는 그것을 알면서도 죄책감이 들었다. 아델라가 떠난 후, 가문을 떠나는 사람들이 속출했고 새어머니는 안 그래도 약한 몸으로 일을 하다 골병이 들어 돌아가셨다.
가문에 남아 있던 사람 중에 아델라의 유모가 가장 늦게 죽음을 맞이했는데, 그때까지 그녀는 루를 통해 몰래 유모한테 돈을 보내 주고 있었다. 유모가 죽은 후에는 안타깝게 죽음을 맞이한 가문 사람들의 묘지 비용을 대 주기도 했다.
“전, 제 죄책감 때문에 그런 거예요. 죄책감 지우려고.”
“가문 일에 죄책감을 가질 사람은 따로 있지. 어디 사는 쓰레기. 넌 네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다 했어. 그게 바로 정직하다는 거지.”
어렸던 그녀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다 했던 일마저도 아델라는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당연하지 않은 일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린다는 그게 바로 그녀가 정직하다고 생각하는 이유였다. 세상에 은혜도 모르는 새끼들이 얼마나 깔렸는데.
“널 위해 준 사람들은 네가 죄책감 가지면 오히려 슬퍼할걸. 네 잘못도 아니고.”
“알아요. 그건 제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분들은 떠난 저만 걱정했다는 거. 그래서 많이 노력했어요. 그분들한테 부끄럽지 않으려고.”
“그래서? 그분들을 다시 만나면 안 부끄러울 것 같아? 흠…… 아직 부족한 것 같은데.”
린다는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아델라를 이렇게 키워 준 그들한테 감사하고 있었다. 그녀의 유년 시절을 들어 보면 절대 이런 성격이 나올 수 없었을 텐데, 그들이 얼마나 부단히도 노력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아이를 자신들의 곁에 보내 준 신한테 감사했다.
운명인지, 우연인지, 둘 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로 인해 요즘 이저드의 표정에 생기가 돌았다. 항상 무표정만 고수하던 이저드한테 변화가 생긴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델라 덕분에.
“더 열심히 할 거예요! 안 부끄럽게.”
아델라 또한 처음과는 조금씩 달라졌다. 순간순간 걱정과 근심만 가득하더니 이제는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 듯싶었다. 집안 이야기를 린다한테도 아무렇지 않게 꺼낼 수 있을 정도로 달라졌다.
린다도 자신의 사정을 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놓여 아무렇지 않게 가문 일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아델라한테는 6년 내내 이런 이야기를 루 이외에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가 없었다.
“이렇게 마음 편할 줄 알았으면 진즉에 욘제타 아주머니께도 털어놓을 걸 그랬어요. 아무도…… 아무도, 제 짐을 덜어 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아델라가 배시시 웃자, 린다는 안타깝고 안쓰러워서 같이 웃었다. 이 애를 어찌할꼬. 나이보다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어린 구석이 있었다. 그래도 이제야 주변 사람에게 기대기 시작한 그녀한테 마음으로 응원을 보냈다.
이저드도 아델라만 같으면 좋으련만. 마음껏 표현하고, 웃고, 화내고, 하고 싶은 걸 하고.
린다는 아델라를 보다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응? 어디 가세요?”
“어디 가긴? 점심 먹으러.”
“예? 저랑 먹는 다면서요!”
“너랑 먹는다고 했지, 너랑만 먹는다고는 하지 않았는데.”
“그, 그럼요?”
“날 믿고 한 번 따라와. 설마 이상한 곳 가겠어?”
장난스럽게 웃는 표정과 반대로 린다는 아델라한테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아델라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린다의 손을 맞잡았다. 린다는 그녀를 에스코트해서 방 밖으로 나갔다.
* * *
“각하!”
아델라의 얼굴이 아까처럼 활짝 피었다. 린다는 아까 그렇게 웃었던 것이 전부 이저드 덕분이었음을 알았다.
이저드 역시 점심 일정에 없던 아델라와의 만남에 평소보다 한층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아침에 같은 침대에서 일어났는데도 점심에 보니 기분이 또 좋아졌다.
심장을 간질이는 기분에 자신한테 바짝 다가온 아델라를 보며 이저드는 살짝 긴장했다. 어제의 입맞춤 여파인지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그녀의 입술이 시선에 자꾸 들어왔다.
“점심은?”
“안 먹었어요! 각하는요?”
“나도 아직이네.”
둘은 서로 보고만 있어도 좋은지 주변과 완전 다른 세상이었다. 그사이, 헤이든은 아델라와 같이 온 린다를 발견하고 얼굴에 미소를 가득 담고 그녀한테 다가갔다.
“저 둘, 제대로 사귀는 거 맞지?”
“응?”
아델라와 이저드가 꽃밭이 되든가 말든가 린다만 바라보던 헤이든이 둘 쪽을 힐끔 봤다가 다시 린다를 빤히 보았다.
“아마? 오늘 각하 분위기를 보아 하니…… 밤에 일이 있긴 했던 것 같은데.”
“있어 보이긴 해서 물었어. 각하께서 제대로 고백하신 거겠지?”
린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둘을 번갈아 보았다.
“얼렁뚱땅 넘어간 건 아니겠지? 우리처럼?”
“각하께서 우리 같을 리가……. 아니, 근데 여보. 얼렁뚱땅이라니. 나 제대로 프러포즈했는데…….”
“프러포즈는 당연히 제대로 해야지. 그거 말고 정식으로 사귀는 거 말이야.”
이저드가 둘을 보고 자랐기에 더 불안했다.
린다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헤이든이 답답해서 린다가 덮친 후 그 뒤로 몇 번 그 일이 반복되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사귀게 된, 자신들과 같은 케이스는 아니길 바랐다.
“아니겠지.”
“그래, 각하가 누군데.”
그래도 둘은 이저드를 굳게 믿는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요. 두 분?”
린다가 아직 꽃밭에 가 있는 둘을 불렀다. 먼저 반응한 것은 아델라였다.
“아! 맞아요. 다 같이 점심 먹어요!”
아델라가 말하자 이저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사적인 움직임이었다. 아델라한테 눈을 떼지 않는 이저드를 유심히 보던 린다는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저희 오늘 다른 약속이 있어요.”
“예? 아까는 저랑 점심 먹으러…….”
“헤이든을 보니 떠올랐습니다. 우리 오늘 약속 있었다는 거!”
그런 약속은 없었기에 헤이든은 린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하게 그녀를 보았다.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있었지, 여보?”
린다가 입꼬리를 올려 웃자 헤이든은 그냥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기분이 좋아서 웃는 것이 아니라는 걸 헤이든은 익히 알고 있었다.
“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약속이 있으면 가 봐야지. 둘은 그만 가게.”
“에? 엥? 어? 진짜 가요?”
이 공간에서 제일 황당한 표정을 짓는 건 아델라 하나뿐이었다.
“갈까?”
아델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오늘 별일은 없었나? 어땠나?”
이저드는 아델라의 오늘 일정을 대충 다 아는데도 일부러 물었다. 그 잠깐 떨어져 있던 시간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아침 이후로 떨어진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그녀가 무엇을 보고 느끼고 말하고 생각했는지, 그녀와 함께하지 못한 그 짧은 시간이 너무 알고 싶었다.
“네. 별일 없었어요! 항상 선생님이 이런 눈으로 이건 이렇게 하는 겁니다! 하고 오늘도 혼났어요. 전 역시 공부는 영……. 몸 쓰는 일은 자신 있는데!”
아델라가 미간을 구기며 현재 그녀의 기초 수업을 가르치는 선생님을 따라 했다. 조잘거리는 그녀의 모습이 마냥 귀여워서 이저드는 그녀한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린다 경하고는?”
그는 그녀의 목소리가 계속 듣고 싶어서 린다를 만난 경위도 물었다.
“아, 린다 경이 찾아왔어요! 제가 되게 우울해 있을 줄 알았나 봐요.”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힐끔 이저드를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쩔 줄 모르겠는 기분이었다. 어제 자기가 먼저 키스하려고 뛰어들었으면서 오늘 다시 보니 자신의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아델라는 그와 맞잡은 손을 빤히 보다가 괜스레 미소를 지었다.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고, 실없이 미소가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다. 그와 따스한 햇볕을 맞으며 걷게 될 거라고는. 덕분에 며칠 전 일은 꿈만 같았다. 안 좋게 강렬히 남았을지도 모를 일이 한순간의 꿈처럼 덧씌워졌다.
“지금 우울한가?”
“아니요! 너무 좋아서 문젠데요.”
“너무 좋은데 왜 문제지?”
“제가 걱정해야 할 게 더 많아져서요.”
“뭐가 말인가?”
“우선 각하께서 너무 잘생겼습니다. 너무! 너어무요! 저 의부증에 걸리면 어쩌죠?”
“…….”
이저드는 진지하게 말하는 아델라를 보며 잠시 말을 잃었다.
그건 자신이 할 말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움도, 귀여움도, 강함도 그리고 그녀 스스로 굉장히 빛나는 사람이라는 것도, 모두 자신만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둔한 자신이 이 정도인데 다른 이들은 아마 더하지 않을까. 그런 걱정이 들었다.
“아델라.”
“네?”
“그건 내가 할 말이네. 그대보다 내가 더할지도 몰라.”
다른 사람들한테 보여 주고 싶지 않고, 자신만 알았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이 내 연인한테 추파 같은 것을 던지지도 못하게 하고 싶으면서도 반대로 이 사람이 내 사람인 걸 자랑하고 싶고, 우리가 서로의 연인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고 싶었다.
이상한 마음이었다. 상반되는 마음이 충돌하여 질투를 넘어 집착이 들기도 했고, 이 사람이 자신의 옆에 있는 게 믿기지 않아 행복에 겨워 마냥 기쁘기도 했다.
이저드는 이렇게 들쑥날쑥한 마음도 처음이라 당혹스러웠다. 그는 곧 좋아서 문제라는 그녀의 말을 이해했다.
진짜로 너무 좋아서 기분이 한껏 들뜨는 와중에도 불안했다.
“각하도 그래요? 저도 각하보다 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데!”
질투의 화신이라는 말이 자신한테는 해당되지 않을 말이라고 항상 생각해 왔는데, 어쩌면 그렇지만도 않을 것 같았다. 연애를 하면 원래 그러나? 온갖 것이 걱정되고, 온갖 것에 잘 보이고 싶고?
“그만큼……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몰라서 그런 거겠죠?”
아델라는 지금 느끼는 이 기분마저도 좋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실이 기뻤다. 그가 아델라 옆에 있기에, 아델라의 연인이기에 마음 놓고 마음을 전할 수 있었다.
“그래, 그렇군.”
이저드는 환하게 웃는 그녀를 마주 보다가 살짝 같이 웃었다.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몰라서. 맞는 말이었다. 그는 그녀가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그녀처럼.
이저드는 이 감정이 전혀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주는 그녀가 더 많이 좋아지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꽉 안고 싶은 것을 참았다. 주변의 시선도 많았고, 식사 테이블에 거의 다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여러 음식들로 가득 채워진 커다란 식탁을 보고 아델라의 기분은 꽤 좋은 듯했다. 이저드는 그런 그녀의 기분이 언제까지고 계속되길 바랐다. 언제까지고 저렇게만 웃길 바랐다.
자신의 곁에서.
* * *
“여보, 어디 가는데? 우리 진짜 약속 있었어?”
“아니.”
린다는 뭘 그런 당연한 걸 묻냐는 듯이 대답했다. 그녀는 보폭을 넓게 해서 빠르게 걸었다.
“그럼? 지금 어디 가는데. 점심은, 먹었어?”
“아니.”
“그럼 나랑 점심 먹으러 가자.”
“먹기 전에 할 일 좀.”
헤이든은 린다와 같은 속도로 걸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할 일?”
“쓰레기 퇴치? 그놈, 각하께 아무것도 못 얻었으면 아직 이 근방이겠지?”
“아마?”
헤이든의 말에 린다가 씨익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것만으로도 헤이든은 린다가 사고를 치려 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여보, 이 일은 각하께서 처리하기로 한 일이고, 레널드 부기사단장한테 전서구를 보내 놨어.”
헤이든이 진지하게 말했지만, 린다는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그냥 아주 사알짝 치겠다는 것뿐인데? 다리 하나 정도?”
“여보……. 보통 사알짝의 기준을 다리 하나 분지르는 거로 치지는 않아.”
다리가 부러지나 팔이 부러지나 무슨 상관인가. 열 받아 죽겠는데 그 정도는 양반 아닌가. 그놈이 여태 저지른 악랄한 짓만 해도 길가다 칼빵 맞아도 될 정도 아닌가.
“그렇다고 멀쩡하게 두 눈 뜨고 다니게 할 수는 없지. 사회에 나오면 안 되는 놈인데.”
“쓰레기이기 전에 아델라 님의 아버지…….”
“내가 그걸 모를까 봐? 아델라 귀에 안 들어가게 처리할 거야.”
그것만큼은 린다나 이저드나 같은 마음이었다. 될 수 있으면 아델라가 아예 그녀 아버지 소식을 듣지 않게 할 생각도 하고 있었다. 아예 신경도 쓰지 않게 말이다.
“나도 말리고 싶은 건 아닌데, 여보까지 휘말리게 하고 싶지도 않은데.”
헤이든이 걱정스레 린다를 보았지만, 린다는 오히려 웃었다.
“어디 가서 복면의 누군가한테 칼 맞아도 이상하지 않을 놈이라, 내가 휘말릴 일 없지?”
린다의 자신만만한 미소에 헤이든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녀가 하겠다는 일은 그도 막을 수가 없었다. 친히 복면까지 하고 치러 가겠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그런 그녀를 어찌 말릴까.
“그런 건 이용하라고 있는 거잖아? 감히, 우리를 협박한 대가는 받아야지?”
아까의 미소는 싹 감추고 무섭게 굳은 린다의 표정은 오뉴월에도 서릿발이 날릴 정도의 분위기였다. 헤이든은 그녀의 사고가 부디 다리 하나로 끝나기를 바랐다.
* * *
어제 열정적으로 키스를 나눈 사이가 맞는지, 또 처음으로 돌아가 둘은 어색하게 침대에 누웠다. 그나마 둘 사이에 좀 나아진 것이라면 처음보다는 훨씬 가까워진 거리와 아델라가 등을 돌리고 자지 않는다는 점이랄까.
둘은 천장을 보고 똑바로 누워 힐끔힐끔 서로를 보다가 다시 천장 보기를 반복했다.
“아델라.”
“네?”
“음…….”
그는 무언가 고민하는 듯 잠시 말이 없었다. 아델라가 그를 빤히 올려다보자 그가 큼,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조용히 그녀한테 손을 내밀었다.
“손…… 잡고 자도 되겠나?”
“아, 앗! 네!”
아델라는 기분 좋게 웃으며 그의 손을 냉큼 잡았다. 그녀도 아까부터 그러고 싶었던 참이었다.
이저드는 말갛게 웃는 아델라를 보며 손만 잡은 걸 다행이라고 여겼다. 어제처럼 또 그런 분위기로 흘러간다면 자신이 어제처럼 잘 참을 수 있을까 심히 걱정됐기 때문이다.
“주무세요!”
“그대도 잘 자게.”
아델라도 어제처럼 그런 요상 야릇한(?) 분위기로 흘러갈까 봐 살짝 걱정하고 있었다. 키스는 너무 좋았지만, 사귄 지 이틀 만에 막, 막 가 버릴까 봐! 자신이!
아델라는 혹여 자신이 너무 들이대서 그가 부담스러워할까 싶어 걱정되었다. 다행히 편하게 눈을 감는 이저드를 보며 그녀 역시 조금 마음을 놓고 같이 눈을 감았다.
연애의 길은 멀고도 험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둘은 손을 꼭 잡고 잠이 들었다.
만일 이때, 어제가 둘의 평화로운 밤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오늘을 이렇게 허무하게 보내진 않았을 것이다. 둘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 * *
“윽…… 으…….”
아델라는 귓가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자면서 한 번도 들리지 않던 그의 앓는 소리가 잠자고 있던 그녀의 위험 신호를 깨운 것이다.
번쩍 눈을 뜬 아델라는 그를 살펴보았다.
이저드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인상도 잔뜩 쓰고 있었다. 잠들면 자신 못지않게 표정이 없던 사람이 이러니 아델라는 놀라서 그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일어났다.
원래라면 아델라가 손만 들어도 일어날 텐데, 또 그가 눈을 뜨지 않았다. 아델라와 첫날을 보낸 그날과 비슷했다. 아니, 더 심했다.
“각하? 각하.”
아델라가 그를 흔들었다.
“각하!”
이거야, 이거 맞아. 이상한 행동.
두 번째 겪은 상황이기에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아델라의 동공이 부산스럽게 흔들렸다. 그가 깨지 않자 그녀는 손을 들어 그의 가슴을 치려고 했다.
팍.
다행히 그녀가 손을 내리기 전에 그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이저드는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을 확인하려 눈을 부릅떴다.
그는 기억은 안 나지만 좋지 않은 꿈을 꾼 기분에 정신을 차리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이저드는 아델라가 불안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녀에게 손을 뻗어 그녀를 품에 안았다.
“왜 그런 표정인가.”
아델라는 순순히 그의 품에 안겼다. 그의 심장 소리가 규칙적으로 그녀의 귓가에 들렸다. 그제야 그녀는 뻣뻣하게 굳었던 몸을 풀었다.
“이상한 행동이요. 이상 현상이에요. 이거 맞는 것 같아요.”
“내가 또 일어나지 않았나?”
아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상하군.”
기억나지는 않지만 기분이 안 좋았던 꿈도 그렇고, 꿈을 꾸는 동안 누군가가 자신을 흔들어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도 그렇고, 짚이는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과거에 종종 악몽을 꾸긴 했지만, 누군가가 다가온다고 안 깨지는 않았다. 어떤 꿈을 꾸더라도 그는 반사적으로 일어났다.
“저번보다 더 심해진 것 같아요. 앞으로 더 심해지면…….”
아델라가 몸을 일으키며 불안한 낯으로 그를 보자 그도 덩달아 몸을 일으켜 아델라와 마주 앉았다.
“만일 이게 이상 현상이 맞다면 더 심해질 거야. 왕이 고작 이 정도로 그대한테 날 살펴보라고 한 건 아닐 테니까.”
정말로 왕의 계략이라면 말이다.
그는 지금 자신이 그녀를 잃을까 두렵고 무서워서 무의식중에 스트레스를 받아 그날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 건지, 아니면 정말 왕이 무슨 짓을 해서 이런 상황이 벌어진 건지 살짝 헷갈렸다.
“하지만 아니라면, 내 문제겠지.”
“각하의 문제요?”
“과거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즈음에 이런 일이 있긴 했네.”
아델라는 심각한 표정의 이저드를 물끄러미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식은땀 흘리고…… 나쁜 꿈을 꾸고…… 못 일어나던 때요?”
이저드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 함께한다면 언젠가 아델라가 알 일이었으니 이저드는 그 이야기를 넌지시 꺼냈다.
“그래. 아버지가 나 때문에 돌아가셨어. 그때가 열여섯이었나. 그때 난 모든 게 무서웠네. 공작이 되는 것도, 내 사람들을 지킬 힘이 없다는 것도, 그냥 다 모든 게. 그래서 당시에는 안 좋은 꿈을 많이 꿨지.”
지금은 시간이 좀 지난 이야기였다. 어릴 적 이야기 정도? 그때에서 벗어난 지도 꽤 됐다. 6년? 그쯤 됐다.
앓았던 시간도 오래되지는 않았다. 슬프고 아프고 두려움에도 그는 일어서야 했다. 그한테는 아직 지켜야 할 사람이 너무나 많았으니까. 그리고 그가 일어서길 바라며 도와주던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괜찮아. 나 또한 과거의 일이네.”
진짜 아무렇지 않은 건지,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건지 몰라 아델라는 그를 유심히 보았다. 하지만 그가 말할 때의 표정은 평온해 보였다. 정말로 괜찮다는 듯이.
“진짜…… 괜찮으세요?”
걱정스레 자신의 안색을 살피는 아델라를 보며 이저드는 살짝 미소 지었다.
“그대는 괜찮았나?”
“뭐가요?”
“그대의 과거가.”
아델라는 음― 소리를 내며 고민하다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내 그가 왜 자신한테 그것을 물어봤는지 깨달았다.
“그래, 나도 그러네. 많은 이들이 날 도왔지.”
“저도, 저도요. 다행이에요. 각하께 그런 분들이 있어서.”
그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이렇게 씩씩하게 큰 것도 그와 마찬가지로 주변에 많은 이들이 있었기 때문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있어 줘서 다행이었다.
다만 그가 안타까운 것은, 어린 그녀를 조금 더 일찍 만났더라면 하는 것이었다. 만일 그랬더라면 그녀는 그 집안에서 오랫동안 고통받았을 리도 없었고, 집을 나와 힘든 일을 겪었을 리도 없었을 텐데.
물론 그도 그 상상이 터무니없는 일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지금 그녀와 같이 있는 이 순간이 소중한 것이었고. 자신한테 일어난 지금의 일보다 그는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 동안 그녀가 불안해할 일들이 더 신경 쓰였다.
“이제 그대도 나한테 그런 사람이야.”
“전…… 각하께 뭔가를 해 준 적이 없는데요?”
아델라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꽤 큰일을 했다. 이저드가 여차하면 왕한테 대응할 생각을 하게 했으니 말이다.
그는 원래 아버지의 죽음을 기점으로 무슨 일이든 조용하게 해결하고 싶어 했지만, 아델라와 관련된 일 만큼은 생각이 달라졌다.
그가 자신의 사람들을 건드리면 왕이라도 가만있지 않겠다고 마음먹는 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는데, 아델라가 노려진다고 생각하니 단숨에 마음을 굳혔다. 신기하게도 어릴 적 가졌던 호승심까지 느꼈다. 그한테는 금기시되는 마음이었는데도 말이다.
“지금 하고 있지 않나. 앞으로도 할 거고.”
당신으로 인해 왕한테 대응할 각오가 섰다고 할 순 없어서 지금 상황을 이야기했다. 누가 들으면 반역으로 들릴지도 모를 말이었다.
“이 일은…… 제가 해야 할 일이고, 각하를 지키고 싶어서…….”
그것만으로도 힘이 된다는 걸 그녀는 알까?
공작이 된 후부터 지킬 게 많았던 탓에 지킨다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다. 내 사람을 지키고, 내 성을 지키고, 내 나라를 지키고.
반면에, 자기 몸은 챙기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누굴 지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지, 누군가에게 실제로 지킴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미치도록 수련하고, 일했다. 강해지기 위해, 자신이 지킬 사람들을 확실히 지키기 위해.
그런데 아델라는 말로만 지키겠다는 게 아니라, 진짜로 자신을 살리려고 애쓰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 맹목적인 행동이 의심스러웠고, 무서웠다. 그한테 아무 대가 없이 그리 해 준 이는 아버지와 친분이 있었던 이들 빼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지켜 준다는 의미가 진실했음을 알고 있었다. 저렇게 온몸으로 표현하는데 모를 리가 없었다. 그녀가 얼마나 그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지.
“그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네. 나는 살기 위해 누구보다 강해져야 했고, 그런 나를 지킬 사람은 나밖에 없었어. 내가 그렇게 만들었네.”
아델라는 그의 담담한 말에 예전에 호위병들이 받는 훈련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가 생각났다.
독은 물론, 날아오는 화살도 피하고 암살자 뺨치게 기척을 숨겨야 하며 한 방에 사람을 죽이는 법을 배우고, 먼 거리의 사람들의 기척까지 파악해야 했다. 그 외의 엄청난 훈련 양을 생각해 보면 어마어마했다.
이 모든 걸 이저드가 시켰다. 바꿔 말하면 이저드는 그 모든 게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벤슨의 말을 들었을 때도 이저드의 삶이 평탄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짐작했지만, 생존을 위해 도대체 무슨 단련을 이렇게나 많이 한 걸까. 보통 귀족들은 이 정도까지 자신을 혹사하며 힘들게 살지는 않았다.
“저…….”
아델라는 그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가 얼마나 힘든 세월을 견뎠는지 궁금했지만, 지금 그와의 대화에서 과거는 필요치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과거를 이겨 냈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 그한테 필요한 게 뭘까 생각하다가 아델라는 곧은 눈동자로 결심에 차서 입을 열었다.
“저, 꼭! 각하를 지켜 낼 거고요. 원인도 밝혀 낼 거고, 모두 다 살릴 겁니다. 그리고…… 저도 절대 안 죽을 겁니다, 절대로. 앞으로 다음 생 이야기도 안 하겠습니다.”
무심코 죽는다고 할 때마다 그가 불안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아델라는 너무 미안해졌다.
그러나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미안해서 시선을 슬슬 내린다는 것을 눈치채고 설핏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알까. 그녀가 시선을 피할수록 더 붙잡고 싶은 것을. 더 자신의 시선에 잡아 두고 싶은 것을.
이저드는 자신한테 어떤 확신을 주려는 그녀가 오늘만큼 사랑스러워 보이긴 처음이었다. 이렇게 매번 자신을 반하게 하면 많이 곤란한데.
어떻게 이 사람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말을 서슴없이 해줄 수 있을까. 어떻게 이런 사람이 세상에 있지. 그것도 자신의 앞에.
이저드는 자신을 힐끔 보는 아델라를 환하게 웃으며 품에 안았다. 만지면 깨질까, 품에 넣으면 부서질까, 이것이 혹 환상인가 싶은 마음에 그녀가 꿈이 아님을 확인하고 싶었다.
“각하?”
아델라는 자신을 조심히 안는 그를 의아하게 불렀다.
“괜찮겠나?”
“네?”
“나와 계속 같은 침실을 쓰면 그대는 계속 내 이런 모습을 봐야 하네. 불안하지 않겠나?”
확실히, 아까는 너무 불안했다. 너무 무섭고,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덮었다. 그의 죽음이 예견되어 있음을 미리 알고 있어서 더 그랬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아델라가 아니었다.
이번 생에서 그 예견된 죽음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한 것이었다. 수많은 회귀가 물거품이 되지 않게, 그리고 그가 두 번 다시 죽지 않게 노력하고 또 노력하고 있었다. 그가 견뎌 온 지난날이 얼마나 고단했는지를 듣고 그녀는 더 굳게 결심했다.
살리고 싶다. 그와 함께 살아서,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느끼고, 좋은 것만 하고 싶었다. 함께 오래도록.
“네, 괜찮습니다. 오히려 희망적이에요. 각하가 없는 미래보단.”
그녀가 이저드를 더 꼭 안았다. 절대로 허무하게 그를 보내지 않으리라.
“나도 그러네.”
그러니 어떻게든 원인을 찾을 것이다. 그는 내일 당장 세이즈 백작을 찾아갈 생각을 하며 그녀와 마찬가지로 그녀를 더욱 꽉 안았다.
이 현상이 자신의 심리적 압박감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 * *
“경.”
“예, 예!”
평소와 같은 이저드의 부름에 헤이든이 화들짝 놀라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았던 이저드의 하늘빛 눈동자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헤이든이 이상할 정도로 과민 반응을 하니까 당연히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저드는 찬찬히 그를 살폈다. 시선을 피하는 것과 이마에 땀이 살짝 맺힌 것을 보니 무슨 일을 저지른 모양이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지?
린다와 헤이든이 동시에 오후 시간을 쫙 뺐다고 보고받았다. 아이가 아파서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닌 듯했다.
“세이즈 백작한테 기별을 넣게.”
“저희 아버지한테요? 왜, 왜요? 뭘요?”
약간 패닉 상태인 것 같기도 했다.
“오늘 오후에 잠시 방문하겠다고.”
“왜, 왜? 무슨 일로……?”
이제는 눈치까지 본다.
어제 집안일 때문에 시간을 뺀 것이 아닌 게 확실했다. 이저드는 아까보다 더 곤란해하는 헤이든을 빤히 보았다. 세이즈 백작한테 들키면 안 될 사고를 쳤나, 아니면 자신한테?
“어제―.”
이저드가 막 입을 떼기 전에 헤이든이 자진 납세하듯이 허리를 90도로 꺾었다.
“죄송합니다! 다 제 책임입니다! 린다를 못 말린 절 탓하십쇼!”
역시 사고 친 거였다.
“……경.”
“예!”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네.”
헤이든은 숙였던 고개를 들어 멀뚱히 이저드를 보았다. 방금 완전 제 발 저려서 자진 납세를……. 어디 가서 거짓말은 절대 못할 사람이었다.
“그, 그렇죠…….”
헤이든이 뻘쭘해진 표정으로 슬그머니 허리를 폈다.
“그래서 뭘 했는데 그러나?”
그가 일어서는 것을 기다린 이저드는 침착하게 물었다.
“그게 사실은, 어제 린다가…… 이렇게 곱게 보낼 수는 없다면서…….”
“누굴?”
“그, 있잖습니까. 짐승만도 못한 쓰레기…….”
아아. 그는 단번에 알아들었다. 일단은 레널드한테 맡긴 벨제프 자작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그 사람, 아직도 이 주변에 있었나.’
이저드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벨제프 자작을 생각하면 고운 눈을 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린다 성격 아시다시피…… 다리를 걸어서 뽀각…….”
다리를 걸어서 부러뜨린 것은 아니었다. 다리를 거는 것처럼 차 버렸다. 있는 힘껏. 굳이 그 상황을 설명해 주지 않아도 이저드는 잘 알 것이다.
“두 다리를 다?”
“예.”
하나만 한다면서 그냥 냅다 차버렸으니……. 두 다리 모두 무사할 리가 없었다.
“아, 아마 저희란 건 모를 겁니다. 일부러 밤에 움직이기도 했고, 복면도 하고 있었거든요. 목소리도 절대 안 냈고, 바로 튀었죠.”
“경들이라고 생각해도 상관없네. 잡아떼면 그만이니.”
린다도 그 이야기를 하긴 했다. 그래서 더 때려야 한다는 걸 뜯어말리느라 헤이든은 진을 뺐다. 두 다리 중 하나는 아델라한테 한 짓이 열 받아서이고, 다른 하나는 각하한테 한 짓이 열 받으니 계속해야 한다나.
그때를 생각하면 헤이든은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목숨 걸고 말리는 기분이었다.
“그 후에 벨제프 자작은?”
“움직일 수가 없으니 별수 있습니까? 있는 돈 없는 돈 긁어모아서 마차를 샀습니다. 수도로 향하는 건지, 자기 집으로 향하는 건지, 떠났다고요.”
“떠났다니 다행이군.”
계속 거슬리게 했다면 강제로 집에 보내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그들이 친 사고가 가벼웠다. 뭘 이런 거로 겁먹나 싶었다.
“저희 독단으로 움직인 건데…… 화 안 내십니까?”
“화낼 일인가? 경들이 친 사고가 아닌데. 복면의 괴한이 경들은 아니지 않나.”
이저드는 천연덕스럽게 모른 척했다.
그의 말에 헤이든은 놀란 눈으로 그를 보다가 차차 안정을 되찾았다. 이저드가 눈감아 주겠다니까 헤이든은 얼른 태세를 전환했다.
“그렇죠. 그럼요. 근데 저희 아버지는 왜 보러 가십니까?”
“물을 게 있어서 그러네. 이제 기별을 넣어 주겠는가?”
“예, 바로 기별 넣겠습니다.”
* * *
“―영애?”
“헛, 대장?”
아리스는 그녀가 부른 호칭에 당황하기 전에 이 상황부터 생각해야 했다.
원래 입고 있어야 할 드레스는 벗어 던진 채 어디서 났는지 모를 시종복을 입고, 긴 머리는 말아서 모자 안에 완전히 감추고 말의 고삐를 붙잡고 있는 아델라의 상황 말이다. 누가 봐도 신분을 감추고 도망가려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리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길 올려다보는 아델라를 보며 뭐라고 물어봐야 할지 몰라 잠시 주춤했다. 그사이 당황해 있던 아델라가 먼저 냉큼 입을 열었다.
“저 도망가려는 거 아닙니다?”
“호위는…….”
“점심이요.”
“그럼 교대한 다른 호위병은요?”
“교대하신 분도 점심 식사하라고…….”
그렇다고 말을 들을 호위병들은 아닌데. 아리스가 빤히 아델라를 쳐다보자, 아델라는 찔리는 게 있는지 우물쭈물 말을 꺼냈다.
“원래는 각하랑 가려고 했는데 없으셔서…….”
처음부터 혼자 나올 생각은 아니었다. 호위를 떼어 놓고 나오려고 했던 것은 맞지만.
“그럼, 호위를 다시 부르지 그러셨습니까.”
“이미 각하랑 점심 먹으니까 괜찮다고 모두 돌려보내기도 했고, 린다 경이나 헤이든 경도 없어서…….”
“꼭 호위를 떼어 놓고 가야만 합니까?”
아리스의 물음에 아델라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린다와 헤이든, 이저드만 찾은 것을 보면 이저드와 관련된 일임을 뜻했다. 그래도 그렇지, 믿을 만한 사람이 없다고 혈혈단신으로 밖에 나올 줄이야. 변장만 놓고 보면 절대 귀족 영애로 보이지 않긴 했지만.
아리스는 그녀 뒤에 아무도 붙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녀를 향해 물었다.
“그럼, 저는요?”
“대장이요? 제 호위요?”
그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델라가 혼자 나왔다는 보고가 이저드한테 들어갔다간 어떤 말을 들을지 몰랐다.
“대장이 함께라면 저야 감사하죠! 근데―.”
아델라는 무언가 망설이는 듯 뒷말을 잠시 끌었다.
“대장, 너무 튀어서…….”
큰 키와 다부진 체격, 붉은색 제복에 수비 대장임을 나타내는 금빛 휘장까지. 이저드와 키 차이가 크게 나는 건 아니었지만, 거대한 몸집 덕분에 훨씬 커 보였다.
아리스의 근육질로 이루어진 거구와 큰 키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아델라와 대화 중인 지금도 힐끔힐끔 쳐다보는 이들이 꽤 많았다.
“같이는…… 못 다닐 것 같은데요.”
“그렇군요.”
아리스가 공작 빼고 누군가의 호위를 안 맡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그중 한 가지가 그의 몸집 때문이었다. 멀리서도 튀는 키와 덩치를 가지고 있어서.
그나마 이저드와 있으면 이저드의 외모에 시선이 뺏긴 사람들이 더 많았기에 정상적인(?) 호위가 가능했다. 그래서 그는 이저드를 제외하고는 보통 호위를 할 상대에게서 멀리 떨어져서 기척을 숨기고 꼭 무슨 암살자처럼 호위하는 편이었다.
“그럼 먼저 가십쇼. 멀리서 따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대장. 그리고 감사합니다. 이해해 주셔서.”
“괜찮습니다. 그런데, 왜 저한테 계속 대장이라고 하십니까?”
아까부터 궁금했던 점을 드디어 물었는데, 그녀의 반응이 이상했다. 아델라는 흡사 대장을 대장이라고 부르는 게 왜요? 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대장이잖습니까? 수비 대장.”
“수비 대장인 건 맞지만…….”
그녀가 자신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수비병들이 자신을 대장으로 부르는 경우는 봤어도, 귀족 영애가 자신을 대장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못 봤다.
“저한테는 영애가 대장이 될 겁니다만.”
“제가요?”
아델라는 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왜죠?
“이 성에 각하께서 안 계실 때, 각하의 역할을 맡는 건 영애입니다.”
“……아, 아!”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런 것을 생각할 틈이 없을 정도로 일이 확확 진행됐기도 했고 언젠가 약혼녀의 자리를 누군가한테 넘겨줘야 한다고만 생각했지, 자신이 그 자리에 앉게 될 거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런데 상황은 바뀌었고, 자신은 이저드의 고백을 받아들였다.
‘각하를 구해야 한다는 것만 생각했지, 전쟁이 터졌을 때 펜베르크 성의 책임자가 된다는 걸 몰랐네. 무작정 각하 따라 전쟁에 나간다고만 할 뻔.’
아델라는 미래에 몇 번이고 펜베르크 성을 지켰던 수비 대장 아리스를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역시 스승님이다.
“감사합니다! 그럼 제가 앞으로 어떻게 부르는 게 좋을까요?”
수많은 회귀 때와 다른 삶이었다. 그러니 다르게 살아가야 한다. 차근차근, 하나하나 바꿔 가다 보면 살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많은 것이 바뀌었어도 그것만은 잊지 않을 것이다. 그가 자신의 대장이었던 것도, 펜베르크 성을 위해 최선을 다한 것도.
“아리스 경이면 됩니다.”
“네, 아리스 경! 잘 부탁드립니다!”
아리스는 웃는 아델라의 얼굴을 보며 어떤 데자뷔를 느꼈다.
꿈에서 본 건지 아니면 어디선가 본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알 수 없이 뿌듯한 기분? 역시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 * *
아델라는 이중으로 된 문을 차례차례 열며 뒤를 힐끔 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모든 기척을 숨기고 쫓아왔던 아리스가 어느새 그녀의 뒤편에 서 있었다. 다시 모습을 나타낸 것까지는 상관없었지만, 가게 문이 그한테는 낮은 듯 보였다.
“안은 괜찮은데 문은 좀 낮아요. 머리 조심하세요.”
아리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아델라를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다행히 가게 안의 천장은 넉넉한 편이었다.
아델라는 오랜만에 들르는 자신의 가게를 쓰윽 훑었다. 문을 열지 않은 게 두 달 정도 되어 가는데 벌써 먼지가 소복이 쌓였다.
그녀는 가지런히 정돈되어 전시된 물건들을 하나하나 눈으로 확인하다가 일순 의아함에 동작을 멈췄다. 그녀가 긴장하자 아리스도 덩달아 허리를 펴려다가 멈췄다.
“왜…….”
아리스가 왜 그러시냐고 물으려는데 아델라가 숨을 죽이고 자리에 천천히 앉기에 뒷말은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녀는 숨을 멈추고 가만히 물건들과 시선을 맞추고 눈만 굴렸다. 두 달간 꽤 쌓여 있는 먼지 사이로 물건들이 움직였는지 그 자리에 덜 쌓인 먼지들이 보였다.
특이한 점은 무거운 물건들은 그대로인데, 가볍고 진동에 움직일 수 있는 물건들은 모두 움직였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한쪽에 전시된 것들만. 꼭, 그쪽만 누군가가 지나간 듯이.
“이상하네요…….”
“무엇이 말입니까?”
아델라는 모든 물건을 항상 파악해 놓는 편이고, 자기가 관리해 와서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는지를 모두 꿰고 있었다.
그런데 가게 문을 걸어 잠근 날과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보통 사람은 그냥 지나쳐 갔겠지만 가게 주인이자 물건의 주인인 아델라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아, 죄송해요. 편하게 계세요.”
물건들을 모두 확인한 후 아델라는 천천히 허리를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아리스도 허리를 펼 수 있었다.
“저 잠시 아주머니 댁에 좀 다녀올게요.”
“어딜 말씀하시는 겁니까?”
“바로 옆집이요. 잠시만 계세요!”
아델라는 그렇게 말하고 부리나케 가게를 나와 욘제타네로 향했다. 점심시간이라 사람들이 아주 많았고, 욘제타나 데이브나 정신없이 서빙 중이었다.
“에구! 아델라?”
아델라는 정신없는 와중에 욘제타가 나르는 음식을 잡아채서 자기가 서빙을 해 주고 나섰다. 욘제타는 얼떨떨한 마음에 멍하니 서 있다가 음식을 하러 몸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아니, 이게 누구야? 아델라!”
“오랜만이에요, 데이브 아저씨! 뭐 좀 물어볼 게 있는데요.”
“그래, 그래. 잠시만.”
“여기요!”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아델라를 찰떡같이 알아본 데이브가 웃으며 묻는데 손님이 그를 불렀다. 물론 아델라도 다른 손님에 의해 주문을 받게 되어 잽싸게 욘제타한테 향했다.
“이렇게 바쁜 시기에 오면 어쩌니. 맞이해 주지도 못하고 일만 시키고.”
“아, 괜찮아요. 저도 바빠서! 이것만 확인하고 다시 가야 해요! 혹시 제 가게에 누가 들어갔어요?”
“여보! 저쪽 테이블에 이거!”
“어어, 제가 할게요!”
어째 물어볼 타이밍이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델라는 능숙하게 음식을 들고 웃으며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후다닥 다시 욘제타한테 돌아왔다.
“누가 들어가는 거 못 봤는데? 아몬이 들어갔었나? 여보! 아몬이 아델라네 들어갔었나?”
소란스러운 식당 안에 욘제타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니이! 가게 키 아무도 안 건드렸는데!”
데이브의 외침에 아델라는 다시 욘제타가 건넨 음식을 들고 서빙을 해 주고는 쪼르르 돌아와서 또 물었다.
“아니면 알짱거린 사람도 없었어요?”
“알짱거린 사람? 너 상급 수비병 됐다는 소식에 알짱거렸던 놈들 다 코빼기도 안 보이더라!”
“그럼, 가게 기웃거린 놈이 한 놈도 없었다는 거죠?”
“응. 그런 건 왜 묻니? 가게에 무슨 일 있어? 너 복장은 왜 그러고?”
“알아볼 게 있어서 나왔는데, 신분 들키면 안 되잖아요.”
아델라가 조용히 그녀에게 말하자 욘제타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 있음 얼른 가 봐. 괜히 여기서 시간 다 버릴라.”
“음…….”
아델라는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두 분이 감당하기에는 많은 숫잔데.
과거에는 아델라와 아몬이 도왔지만, 지금은 따로 돕는 사람을 두지 않아 두 분이 점심 인원을 감당해야 했다. 가게는 큰데 일하는 사람은 둘이니, 버거울 만한데도 둘은 꿋꿋하게 사람을 다 받았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응? 아델라! 얘!”
오늘 아몬이 나와서 괜찮다고 하려 했는데 어딜 저렇게 급하게 가는지. 욘제타가 말도 꺼내기 전에 아델라는 또 도도도 뛰어서 자기 가게로 들어갔다.
아델라가 잠시 옆집에 간 사이, 아리스는 한쪽 벽면을 채운 화려한 자수들과 그도 본 적 없는 이런저런 물건들을 눈으로 구경했다.
잡화점이라고 하더니, 난생처음 보는 물건들이 많았다. 아리스는 아델라에게 물건을 가져다주는 이가 보통 인물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 역시 경매장에서 여러 모조품과 물건들을 접해 봐서 아는데, 아델라네 가게처럼 새롭고 신기한 물건들을 취급하는 곳은 드물었다. 그것도 전부 진품으로.
그는 흥미로운 눈으로 쭉 가게를 훑었다. 기회가 된다면 몇 개 사보고 싶기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 아델라가 금방 다시 돌아왔다.
아리스는 그런 아델라를 보며 정말 부지런히도 뛰어다닌다고 생각했다. 이곳 물건 하나하나도 저렇게 부지런히 움직인 그녀가 공들여 관리하고 만든 것일 확률이 높았다. 아니, 확률이 아니라 확실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미묘하게 달라진 물건들의 위치를 파악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아리스 경! 혹시, 가게 안에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다거나 뭔가 제가 알 수 없는 그런 게 있을까요?”
아델라가 가게 안쪽 방문의 자물쇠를 열면서 아리스한테 물었고, 아리스는 말없이 가게를 훑었다.
“아뇨.”
어떤 흔적도 안 남기고 가게를 왔다 갔다면 웬만한 실력은 아니었다. 가게를 이중으로 잠근 문도 흔적 없이 따고 다시 닫아 놓을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그러니 보통 도둑은 아니었다. 뭘 훔치기 위해 들어왔는지도 몰랐다.
“진짜…… 아무 흔적도 없어요?”
아델라가 안쪽 방문을 따고 아리스를 다시 보았지만, 아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없다는 의미였다.
“아까까지는 몇몇 물건의 위치가 바뀐 것만 신경 쓰였거든요? 훔쳐간 것도 없고. 근데…….”
그 누군가가 왜 자신과 같은 목적일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지. 안쪽 방으로 향하는 길목의 물건들만 움직임이 포착되니 그녀는 더 불안했다. 아침부터 스멀스멀 올라왔던 두려움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기분이었다.
말도 안 되는데, 말도 안 되는 그런 일이 지금 자신한테 너무 많이 일어나 말이 안 될 게 없는 기분이 들었다.
“영애?”
말을 하다 잠잠해진 아델라가 이상해서 아리스는 그녀를 불렀다. 그의 목소리에 그녀가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아니에요. 확인해 보고…… 말씀드릴게요.”
아델라는 가게 안쪽에 마련된 작은방으로 들어섰다.
이곳도 마지막 그날과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밖의 물건들과 비슷하지만 미묘하게 위치가 바뀐 물건들만 빼고.
‘도둑이 이렇게 많은 물건을 피해서 한곳으로만 향할 수가 있나? 귀신인가?’
아델라는 작은 침대 위로 올라가 침대 맡에 있는 책장을 유심히 살폈다.
‘역시…….’
여러 권이 꽂힌 한 칸짜리 책장에도 먼지가 없어진 부분이 보였다. 거기에 미묘하게 달라진 책들의 위치까지.
루가 책을 구해 준 이후 딱 한 번 빼고는 꺼내 본 적이 없어 한편에 항상 그대로였어야 했다. 먼지도, 삐뚤빼뚤하게 꽂혀 있던 책들도.
‘다른 것도 뒤졌나?’
아델라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옷장과 짐 상자들도 뒤졌다. 다른 곳은 감쪽같이 그대로였다. 목적이 딱 하나였던 것처럼.
그녀는 다시 침대 위로 올라가 유심히 책들을 보다가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녀의 손에는 얇은 책 한 권이 딸려 나왔다.
‘목적이 책장이었던 것 같은데, 정작 짐작하던 건 멀쩡하네? 이게 아닌가? 그럼 도대체 뭘 위해서 들어온 거지? 훔쳐 가는 게 목적이 아니었나?’
책이 아님에 긴장했던 맥이 탁 풀려 한시름 놓긴 했지만 찝찝한 마음은 지울 수 없었다. 사람이 들어온 흔적은 미묘하게 남아 있는데, 어떤 목적으로 왜 들어왔는지를 모르니 아델라는 너무 꺼림칙했다.
일단 그녀는 얇은 책을 집어 들고 방을 나왔다.
“진짜 이상하네요. 제 기우인 걸까요?”
“누군가 온 것 같은 거 말입니까?”
“네, 사라진 게 전혀 없어요.”
아델라의 말대로 기우였으면 좋으련만, 이 가게를 잘 알고 있는 그녀가 이상하다는 판단이 섰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음이 분명했다.
“사라진 게 전혀 없다고 안 들어왔다는 판단을 내릴 수는 없죠.”
아리스가 그렇게 대답하자 아델라는 다시 가게 안을 찬찬히 훑어봤다. 정말 아무리 봐도 흔적은 미묘하게 달라진, 주인인 자신만 눈치챌 수 있는 물건들의 위치뿐이었다.
“어떤 흔적도 안 남기고, 어떤 것도 훔쳐 가지 않고, 뭔가는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많을까요?”
“세상에 많지는 않죠.”
“아리스 경은 되세요?”
아리스가 가게의 폭과 너비, 높이, 거리 등 모든 걸 재어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기척은 지울 수 있지만 이런 좁은 곳에서 흔적도 안 남기는 것은 저한테 무리입니다.”
지금도 그는 매우 신경 써서 서 있는 것이었다. 가게가 좁으니 그의 덩치가 가게 폭의 반은 차지했다. 이 상태에서 조금만 잘못 움직이면 전시된 물건들을 죄다 건드릴 수 있었다.
“그럼, 꽤 뛰어난 실력자라는 거네요?”
“예, 실력으로 치면 암습을 전문으로 배운 호위병과 비슷하겠네요.”
그럼, 최소 호위병 정예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실력이라는 것이다. 그 정도 실력자가 왜 자신의 가게를 둘러봤을까. 언제? 어떻게?
아델라의 머릿속에 스치는 인물은 자신의 오라버니밖에 없었다. 어떻게 자신의 가게를 알아냈지? 하지만 그는 굳이 이렇게 몰래 아델라의 가게를 찾아올 이유가 전혀 없었다. 어쨌든 아델라는 그한테 확실히 협력해 준다고 말했으니까.
“그럼요, 혹시…… 그 인간은 아니겠죠?”
“그 인간이요?”
“제 오라버니요.”
“아―. 그럴 일은 없습니다. 그 정도 능력은 안 되는 이입니다.”
단호하게 촌철살인을 해 준다. 자신과는 상관없었지만.
‘도대체 누굴까?’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되는 바가 없었다.
처음에는 흑마법과 관련된 자신의 책을 노리나 해서 또 다른 흑마법산가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그랬으면 이저드의 현재 이상 현상에 대한 어떤 실마리라도 잡을 수 있었을 텐데.
“왕 쪽에는 이만한 능력자가 없습니까?”
“제가 알고 있는 선에서는요.”
그러면 완전히 남인 누군가이거나 아는 선에서는 호위병이거나. 그러고 보니 과거에 이저드가 아델라의 정체를 캔 적이 있었는데…….
“제 사적인 공간까지 뒤졌을 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혹시 호위병 중에 제 정체를 알아내려고 가게를 조사하진 않았겠죠?”
“네, 그럴 일은 없습니다.”
역시나가 역시나인가. 아델라도 이저드가 남의 집에 침범하면서까지 알아낼 리는 없다고 생각하긴 했다.
“그럼, 어떻게 알아내셨어요?”
“저희는 보통 탐문으로 알아냅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여기저기 흩어진 각하의 세력들이 꽤 됩니다. 그들한테 모두 물어보고 정보를 간추립니다.”
“아하―.”
여기저기 정보통이 많다는 이야기였기에 아델라는 이해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렇게 듣고 보니 이저드의 명을 받은 호위병도 아닌 것 같은데. 도대체 누구지?
하지만 아델라의 고민은 그리 깊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 집을 뒤져 본들 자신이 들고 있는 책 말고는 딱히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었다. 이 책도 웬만한 사람은 읽지 못하는 거라 어디 던져 놔도 못 읽는 사람밖에 없었다.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그럼 모르는 사람이겠네요. 목적은…… 이거 같았는데, 이게 아니니까 다행이긴 해요. 다른 건 상관없거든요.”
“그게 뭡니까?”
아델라가 손바닥만 한 크기의 얇은 책을 내려다보자, 아리스의 시선도 그 책에 닿았다.
“『마법서』?”
“아, 이거 흑마법…… 에?”
아리스가 책 제목을 또박또박 읽자 막 설명하려던 아델라가 눈을 크게 뜨고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태연한 표정이었다.
“우, 우와아아아.”
아델라는 정말 꾸밈없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리스 경은 신의 언어도 아세요? 어떻게 아세요? 어디서 배우셨어요? 진짜 대단하다!”
“고대어를 신의 언어라고 합니까? 처음 들어보는군요.”
“고대에 신이 내린 글자라고 알려져 있잖아요. 저희 사이에서는 중의적인 표현으로 사용해요. 고대어를 읽을 수 있는 능력자가 많지 않고, 고대어로 전해 내려오는 사료도 많지 않아서 희귀한 언어를 지칭하는 말로 쓰이기도 하고, 원래의 뜻대로 신이 내려 준 언어라고 쓰기도 하죠.”
아델라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을 반짝였다. 사실 아델라는 이 책을 가지고 간들 아주 작은 희망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읽지 못하지만 이저드나 이저드의 사람 중 누군가는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하여 굳이 가게를 찾았던 것이다.
수많은 회귀 동안 쓸모없던 책이 드디어 쓸모가 있을지도 몰랐다. 물론 이 책에 아델라가 원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면 말이다.
언젠가 루가 말해 주었던 책의 내용 중에 아주 사소한 하나가 걸렸다. 그녀는 확신 없이 우선 도움이 될까 싶어 책부터 찾았던 것이다. 삽질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찾기 힘든 언어가 담긴 책은 어떻게 구하셨습니까?”
“친구요. 제 친구가 꽤 유능합니다. 희귀한 물건만 모으는 재주가 있다고 할까요? 그래서 제가 부탁했습니다. 흑마법을 안 쓰려면 흑마법을 알아야 하니까요.”
고대어로 쓰인 책이 희귀한 물건이라고만 표현할 수 있나? 거기에다가 무려 흑마법서다.
십몇 년 전 자행된 마녀사냥으로 많은 흑마법사가 죽어 흑마법사를 만나는 건 하늘의 별 따기였고, 그들끼리만 암암리에 돌던 흑마법서들은 거의 다 불에 타 사라졌다.
말로만 희귀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매우, 엄청나게 희귀한 것이었다. 웬만한 사람은 평생 구경도 못 할 물건이었다. 그런데 그걸 아무렇지 않게 구해 올 수 있는 사람이라니? 어쩐지 잡화점 물건들도 심상치 않더라니…….
“실례가 안 된다면 한 가지 여쭤 봐도 됩니까?”
“네, 됩니다. 뭐든.”
“영애의 친구분도 흑마법삽니까?”
왜 그런 걸 묻나 싶었지만, 아델라는 착실히 대답했다.
“아니요. 루는, 튀는 외모이긴 하지만 흑마법사는 아닙니다.”
“영애께 숨기고 있는 것도 아니고요?”
아델라는 잠시 과거를 되짚어 보았다. 루가 열 받아서 저주 내린 이들만 해도 몇인데, 그럼 그들 중 절반은 어디가 어떻게든 잘못돼야 했다. 그런데 대부분은 잘 먹고 잘 살았다.
루는 누군가를 입으로 저주를 내리는 타입이라기보다는 자기가 직접 패 주는 타입이었다.
“숨기는 것 같진 않은데요?”
“그렇군요.”
“왜요?”
“그분이 평민은 확실합니까?”
“네. 할아버님도 보따리장수를 하셨다고 들었고, 루의 부모님도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팔았어요. 근데, 제 친구는 왜요?”
흑마법사도 아니고, 높은 신분도 아니면 저 책을 어디서 어떻게 구할 수 있었을까. 아리스는 그녀의 친구라는 루의 정체가 신경 쓰였지만 추측해서 나오는 것이 없었기에 그저 고개를 저었다.
“별거 아닙니다. 고서를 일반인이 가지고 있는 건 처음 봐서, 그분이 궁금했을 뿐입니다.”
“아! 아마 암거래로 구했을 걸요? 암거래 경매장이요. 희귀품에 환장한 사람들이 세상엔 많거든요.”
아리스는 또 그렇군요, 하고 묵묵히 대답했다.
그도 암거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별거 아닌 것을 그럴듯하게 속여 파는 곳. 보통은 돈 많은 귀족들과 큰손들 주머니를 털기 위해 열렸다.
적당히 그럴듯하게 속이면 팔리는 곳이 바로 암거래 경매장이었다. 그런 곳에 제대로 된 물건이 있을 리 만무했다. 있더라도 천 개의 모조품 중에 한 개 정도가 진품이었다.
하지만 저건 진짜였다.
어쩌다 얻어걸린 특급 희귀품이었을까.
아리스는 아델라가 말하는 그 ‘루’라는 사람이 왠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그가 아델라한테 별말 하지 않은 것은 자신의 친구를 철석같이 믿는 그녀의 순수한 눈망울 때문이었다.
“그럼, 영애도 고대어를 할 줄 아십니까?”
“아니요.”
아리스는 간단명료하게 답하며 민망하다는 듯 웃는 아델라를 보았다. 아깐 분명 흑마법서라고 했는데.
“전 고대어로 되어 있는 줄 모르고 구해 달라고 했습니다. 설마 번역본도 없을 줄이야.”
“아까는 흑마법서라고 분명 말씀을…….”
“그것도 루가 몇 개 해석해 줘서 아는 겁니다.”
“…….”
그는 그녀의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아무리 봐도 의심스러운데, 어떻게 이렇게 의심 하나 안 하고 믿을 수가 있지. 그 정도로 신뢰가 엄청난 사람인가. 사기꾼들이 보통 신뢰를 얻…… 아니다.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말자. 믿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대단한…… 친구분이시군요.”
아리스가 애매하게 대답하자 아델라는 그를 유심히 보다가 여태까지 한 대화를 떠올려 보았다.
“음― 의심스러우신 거죠?”
“예? 아닙니다.”
아델라는 그를 빤히 올려다보다가 살짝 웃었다.
“맞는데요. 의심하시는 거. 대장, 아니지, 아리스 경. 지금 되게 곤란한 얼굴이십니다.”
“그럴 리가요.”
그는 아델라가 정확히 짚어서 약간 당황스러웠다.
“물론, 루가 알 수 없는 사람이긴 해요. 진실을 얘기해도, 거짓을 얘기해도, 전혀 알 수가 없거든요. 그래도 전 루를 믿고 있습니다.”
그저 맹목적일 뿐인 믿음은 아니었다. 오랜 시간 신뢰를 쌓았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믿음이었다.
“루야말로 제가 힘들 때 항상 거기에 있어 줬거든요. 제가 내민 손, 한 번도 뿌리친 적 없습니다.”
의문스러운 구석이 있다는 건 아델라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루가 비밀이 엄청 많아서 저도 가끔 의문을 품지만, 비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거?”
아델라는 그렇게 말하고 어깨를 으쓱였다.
아리스한테 루가 착한 사람이다, 루는 믿을 만한 사람이다, 라고 주입을 할 수는 없었다. 그건 강요였다. 자신은 루를 믿는다지만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은 루를 의심할 만도 했다. 워낙 베일에 싸인 사람이어야 말이지.
하지만 지금 중요한 점은 루의 비밀도 아니요, 흑마법 책을 얻은 루트도 아니요, 가게에 침입한 흔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델라는 손에 들고 있는 책을 아리스한테 내밀었다. 아리스는 그녀가 내민 책을 얼떨떨한 표정으로 받아들였다.
“이걸 왜 저한테?”
“루에 대한 의문은 조금만 미뤄 두고, 저부터 도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 * *
“문제없습니다.”
“아버지, 상태라도 제대로 보시고……!”
“제대로 봤다, 이놈아. 괜찮으셔.”
아니, 뭘 제대로 봤다는 건지? 힐끔 보고 계속 독서 삼매경이시면서?
세이즈 백작은 50을 바라보는 나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미남이었다. 그 아들에 그 아버지라는 건 이 둘을 보고 하는 말 같았다. 헤이든의 왕자님 같은 외모가 어디에서 온 건지 뚜렷하게 알 수 있었다. 금발의 푸른 눈은 두 부자가 똑 닮아 있었다. 다른 것은 눈가의 주름 정도?
“아, 아버지! 좀!”
헤이든은 아버지의 냉대에 괜히 마음이 무거워져 이저드의 눈치를 보았다. 이저드는 세이즈 백작의 냉대(?)에 별로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이 자식은 누굴 닮아 생떼야? 괜찮다고!”
“자식이 부모를 닮지 누굴 닮습니까!”
“난 너처럼 눈치 없진 않다.”
부자가 옥신각신하는 사이 이저드는 세이즈 백작의 감을 믿으며 속으로 안도했다.
“그럼, 정신적인 문제는 아니라는 말인가?”
이저드의 물음에 둘의 말싸움이 끝났다. 세이즈 백작은 아무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책을 보았다.
“예, 각하께서 절 먼저 찾아왔다는 것에서부터 각하께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렇군. 알겠네.”
간단하게 대답한 이저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고개를 살짝 숙이는 동안에도 세이즈 백작은 이저드를 보지 않았다.
“이, 이걸로 끝입니까? 저희 여기, 한 시간은 전속력으로 달려서 온 건데……. 각하? 각하!”
정말 볼일은 그게 끝이라는 듯 백작의 집무실에서 나가는 이저드의 뒷모습을 보며 헤이든은 허망해했다.
“아니, 아버지! 진짜 왜 그러십니까!”
“좀 조용히 해라, 이 눈치도 없는 놈아! 철들라고 각하 옆에 붙여 놨더니, 나날이 눈치가 후퇴하는구나.”
세이즈 백작은 이저드가 나간 뒤에야 책에서 눈을 떼며 아들한테 핀잔을 줬다.
“얼른 각하나 따라가.”
“따라갈 때 따라가더라도 진짜 각하께선 괜찮은 거예요?”
“괜찮다고 몇 번을 말하냐. 넌 저 말짱한 얼굴이 다시 트라우마가 도진 얼굴 같으냐! 각하 몸 상태는 너보다 내가 더 잘 안다. 걱정 안 해도 될 만큼 건강해. 됐느냐? 이제 가.”
“근데 왜 그렇게 쌀쌀맞게 대하십니까?”
헤이든이 토를 달자 세이즈 백작은 읽고 있던 책으로 헤이든의 머리를 쳤다.
퍽!
“악!”
헤이든은 매우 억울한 표정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보았고, 세이즈 백작은 아파하는 아들의 머리를 꾸욱 누르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지금 여기 왕의 개새끼들이 몇인 줄 아느냐?”
이저드가 주변 모르게 조용히 온 것을 보면 알아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이눔의 자식, 공작 옆에서 뭘 배우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알겠으면 왔던 것처럼 조용히 각하 따라 돌아가거라.”
그제야 헤이든은 소리를 낮췄다. 세이즈 백작은 차분해진 자기 아들을 보다가 헤이든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하여간…… 각하 이야기만 나오면 앞뒤 안 가리는 건 여전하구나. 내 그리 냉정해지라고 일렀건만.”
“전 또 과거 일 때문에 그러시나 했죠!”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이 아비를 뭐로 보고! 내가 각하 진찰할 때 그런 낌새라도 낸 적 있느냐!”
세이즈 백작이 자기 아들을 쥐어박으려 손을 들자 헤이든이 냉큼 뒤로 물러났다.
“호, 혹시나 했죠! 걱정도 못 합니까?”
“걱정하지 말고 왜 그러는지 원인을 찾아라. 내 누누이 말했지만, 네 역할은 각하를 보필하는 거다. 같이 불안에 떠는 게 아니고!”
“예에, 예. 이번으로 그 말만 한 구백구십구 번은 듣는 것 같네요.”
헤이든은 듣는 둥 마는 둥 인사만 하고 집무실을 나왔다. 뒤로 ‘저눔의 자식이!’라는 목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다.
* * *
순식간에 사라진 이저드를 따라잡기 위해 헤이든은 열심히 뛰었다. 이저드는 벌써 뒷문에 도착해 말을 데리고 헤이든을 기다리고 있었다.
“왕측 놈들이 곳곳에 더 많아진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보통 알지 않나?”
아니요, 보통 모르는데요. 너무 태연해서 당연한 일인 줄.
아무리 헤이든이라 하더라도 집 안 사람들 모두를 파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분위기가 바뀌었네.”
“그……렇습니까?”
주말마다 집에 오는데도 잘 모르겠던데.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휴가를 내고 백작가를 다녀온 린다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왕은 왜 또 갑자기……?”
“여기뿐만 아닐 걸세. 내 편이라고 짐작되는 이들한테 모두 보냈겠지. 요 몇 년 같은 패턴 아닌가.”
요 몇 년 갑작스러운 변덕이라고 하기에는 참 시기가 오묘했다.
“참 이상하죠? 이런 시기가 지나면 꼭 출정 명령이 떨어지던데.”
“한 달 조금 넘게 남았군.”
이저드는 태연하게 아델라가 말해 준 시기를 대충 가늠하며 말에 탔다.
“꼭 한 달 후쯤에는 전쟁이 날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예측일 뿐이네.”
헤이든은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곧 말을 모는 이저드의 뒤를 따랐다.
“이번에도 주변 성주들한테 파병군을 받기는 글렀군요.”
“우리를 돕게 둘 왕이 아니지.”
주변 도움 없이 전쟁을 치른 적이 한두 번 아니었다. 이저드와 헤이든은 그러려니 하며 전속력으로 말을 몰아 펜베르크 성으로 돌아갔다.
* * *
“……도와달라는 게, 일입니까?”
시끌시끌한 사람들 사이로 아리스는 굳은 얼굴을 한 채 식당 문 앞에 서 있었다.
“어어! 아니요! 번역! 번역인데, 잠시만요!”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아델라를 아리스는 멀뚱히 쳐다보았다.
“욘제타 아줌마! 저희 대장이에요!”
“뭐? 너 아직 안 갔어?”
“바쁜 시간만 잠깐 도와드리려고요! 인사하세요! 이쪽은 제 보호자, 욘제타 아주머니세요!”
갑작스러운 소개 자리에 둘은 멍하니 서로를 보았다.
아리스가 먼저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자, 욘제타도 어색하게 인사하며 웃었다. 아델라가 대장이라고 소개했지만, 욘제타는 그가 호위를 위해 이곳에 온 것을 알고 있었다.
“이거 어떡해요. 지금 바빠서 제가 경황이 없네요. 점심은 하셨어요?”
“괜찮습니다. 점심은 했습니다.”
“그럼 간단한 요깃거리라도 만들 테니, 잠시만 앉아…….”
“아닙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아델라는 금세 또 어디론가 향했다. 둘이 어색해하고 있는 사이 서빙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부지런히도 움직이는지?
“아델라! 얘! 여기서 그러지 말고!”
“아주머니, 저쪽 테이블에 고기 수프 둘! 두 분 인사는 하셨어요?”
욘제타의 부름에 다시 냉큼 돌아온 아델라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묻자 그녀를 부른 욘제타도, 어색하게 서 있던 아리스도 할 말을 잃고 고개만 끄덕였다.
“좋아요!”
“안 좋단다, 얘야. 바쁜데 대장님을 세워 두면 쓰니!”
“그치만, 안에서라도 앉아 있게 해야 해서……. 안 그럼 밖에서라도 서 있을 분인 걸요.”
아델라와 욘제타가 이마를 붙이고 이야기하는데 아리스한테 다 들렸다. 그는 둘의 웃긴 행동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전 괜찮습니다. 제가 도울 건 없습니까? 저도 돕겠습니다.”
“예? 제가 멋대로 데리고 온 건데 일까지 하시면 안 되죠!”
그럼 공작의 약혼녀만 일을 시키고, 그 부하가 멀뚱히 앉아 있는 건 맞는 이야기인지…….
아리스는 황당함에 웃음이 나왔다. 그는 고개를 살짝 숙여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영애 혼자 일하게 두는 건 되는 일입니까? 저 힘쓰는 거 좋아합니다.”
“어? 아니죠. 전 여기서 호위병일 뿐이니까, 윗사람을 일 시킨 파렴치한이 되는 거죠.”
“파렴치한까지 될 리가요.”
너무 극단적으로 갔다.
“호위병이면 저한테는 동료와 다름없는데, 동료가 동료 도와주는 건 안 됩니까?”
듣고 보니 맞는 말인 것 같은데, 그것과는 별개로 좀 죄송했다. 그냥 밖에서 구경하고 다니시라고 할 걸 그랬나. 아델라는 괜히 아리스한테 폐를 끼친 것 같아 대답을 못 하고 우물쭈물했다.
“그렇게 하죠. 동료가 동료를 돕는 걸로. 이거 저쪽 테이블에 놓으면 됩니까?”
“아…… 예, 예.”
둘의 대화를 들으며 요리를 하던 욘제타는 아리스의 물음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엇. 그거 제가……!”
“넌 이거나 하렴.”
벌써 음식을 갖고 테이블로 다가가는 아리스가 보였다. 욘제타는 난감한 표정을 짓는 아델라를 붙잡아 주방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저분 말이 맞지 뭘 그러니. 넌 이제 예전의 아델라가 아니란다. 그러니까 이런 일도 오늘만 해.”
도와주러 왔다가 된통 잔소리를 들으니 아델라가 비죽 입술을 내밀었다.
“피―. 이제 저 막 밀어내실 준비하시는 거예요?”
“공작님 약혼녀가 이런 일 한다고 그러면 귀족들 사이에서 얼마나 비웃음거리가 되겠니?”
“이 일이 뭐요, 왜요.”
“애니? 당연한 소리를 한다, 얘.”
“진짜 이 일이 뭐요. 열심히 돈 버는 게 비웃음거리가 될 일이 뭐가 있어요.”
그녀는 할 말 다 하면서도 부지런히 손을 놀려 요리를 만들고 있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어헉, 깜짝이야.”
서빙을 끝내고 돌아온 아리스가 기척도 없이 불쑥 말하는 바람에 아델라는 놀라서 그를 보았다.
“일에 귀천이 어디 있겠습니까.”
“맞아요, 맞아요. 대장님 저랑 좀 통하시네요.”
둘이 합세해 욘제타를 쳐다보니, 욘제타는 헛웃음이 터졌다.
“어이구, 그러다가 전하께 불경죄로 잡혀갑니다. 둘, 다!”
욘제타는 힘주어 둘 다 잘못된 생각이라고 말해 주었다. 하지만 둘은 서로를 멀뚱히 쳐다만 보다가 다시 제 할 일을 했다. 이 미적지근한 반응들은 대체 뭐지?
“그나저나 평소에는 어째요? 사람 좀 쓰세요!”
아델라가 요리를 아리스한테 넘기며 물었다. 방금 꽤 심각한 주제였지만 그녀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사실 아리스나 아델라는 골백번 왕한테 잡혀가도 할 말 없을 정도로 왕, 왕 하며 그를 막 불렀었다. 하지만 둘은 거기에 심각함을 갖지 않았다. 왕새끼라고 안 부르는 게 어디임? 하는 느낌이었다.
“우리도 힘에 부쳐서 얼마 전부터 한둘 정도 썼어. 오늘은 아몬이 나온다고 해서 안 쓴 거지.”
“잉? 아몬은 어디 갔는데요?”
“광장에 심부름 보냈어. 떨어진 재료가 있어서.”
아아, 광장. 그럼 빨리 안 돌아오겠네.
아델라는 속으로 마침 자신이 나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쯤이면 올 텐데…….”
‘에이, 아줌마. 기대하시지 마세요. 지금쯤 부티크 아가씨한테 홀라당 빠져서 수다나 떨고 있을 걸요.’
아델라는 예전처럼 자식새끼 키워 봤자 다 소용없다는 걸 시전할 수가 없었다. 그가 어떤 마음인지 요즘 들어 많이 와 닿았기 때문이다.
그 시각, 광장에 심부름을 간 아몬은 아델라의 예상대로 부티크 아가씨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녀와 함께 있던 그는 그 시간 내내 너무 행복했지만, 돌아오는 길에는 식은땀을 줄줄 흘려야 했다.
그 이유는 그녀와 헤어진 직후에 만난 누군가 때문이었다. 광장에서 그 누군가를 마주한 아몬의 눈동자가 심하게 떨렸다.
그의 앞에는 짙은 푸른색 로브를 뒤집어쓴 누군가가 서 있었다. 로브의 모자를 뒤집어써서 윤곽이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엄청난 미남이었다. 아몬이 아는 선에서 로브를 뒤집어써도 가려지지 않는 미남의 기운(?)을 가진 이는 얼마 없었다.
“가, 각…… 합!”
아몬은 그의 눈치를 보며 입을 급하게 꼭 다물었다.
‘왜 각하께서 여기 계십니까?!’
* * *
이저드가 저택에 도착한 시각은 점심시간이 지나고도 한참 지난 때였다.
특별한 일이 아니면 이저드의 집무실이나 헤이든의 집무실에 들르는 이들이 없었기 때문에 정말로 둘은 나간 적도 없었다는 듯 각자의 집무실로 돌아왔다.
이저드가 가장 먼저 와서 한 일은 아델라의 기척을 찾는 거였다. 그는 의자에 앉아 살짝 의아한 표정을 내비쳤다. 그가 쥔 펜이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하얀 종이 위에 톡톡 점을 찍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카일.”
이저드의 부름에 시종장 카일이 문밖에 서 있다가 조용히 안으로 들어왔다. 큰 목소리로 부른 것도 아니었는데 용케 듣고 들어온 시종장의 청각이 대단했다.
“부르셨습니까.”
카일은 문을 닫고 고개를 숙였다.
“저택 안에 아델라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네. 어디 갔나?”
“아, 아델라 님께선 밖에 잠시 나갔다고 합니다. 점심쯤에 아리스 경의 보고를 받았습니다.”
“아리스 경과 함께 간 건가?”
“예, 그런 것 같습니다.”
혼자 간 것은 아니라 다행이긴 했지만, 어쩌다 아리스가 호위로 붙게 된 건지는 알 길이 없었다.
“알겠네.”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자신의 주인을 가만히 보던 카일은 들어왔던 그대로 다시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가타부타 말이 없을 때는 거의 직접 해결하실 땐데…….’
그의 추측은 정확했다. 이저드는 시종장이 문을 채 다 닫기 전에 자리를 떴다. 홀연히 사라진 이저드의 빈자리가 문틈 사이로 보였다. 카일은 누구도 보지 못하게 문을 꼭 닫으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드디어 자신의 주인에게도 봄바람이 든 모양이었다.
* * *
아델라는 지금 이 자식이 오면 어떻게 골려 줘야 하나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다 지나고, 사람들이 모두 빠졌는데도 아몬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욘제타와 데이브, 아델라는 하는 수 없이 아몬을 빼고 늦은 점심을 먹었다.
식사를 다 끝낼 때까지 역시 아몬은 나타나지 않았다.
“무슨 일 생긴 거는 아니겠지?”
“그런 건 아닐 거예요. 걱정 마세요.”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모를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늦다니. 잔소리를 바가지로 해 줄까 보다.’
아가씨와 함께 있고픈 마음은 십분 이해하지만, 피크 시간 끝나고 다녀와도 되잖아!
아델라는 팔짱을 끼고 굳건히 닫힌 가게 문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델라가 일을 다 마쳤는데도 아직 성으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는 아몬이 오면 놀려 주기라도 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게 벼르고 있길 얼마나 지났을까? 아델라와 같은 테이블에 가만히 앉아 있던 아리스가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행동에 아델라는 물론 욘제타와 데이브도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안 그래도 큰 키에 앉아서 올려다보려니 목이 아팠다.
“왜 그러세요?”
아리스가 식당 문으로 시선을 돌리기에 아델라도 덩달아 시선을 돌렸다. 자세히 집중해 보니 아몬의 기척이 느껴졌다.
“아, 아몬이군요?”
“예? 아니, 그분 때문에 일어난 게 아니라…….”
아델라는 아리스의 대답을 뒤로한 채 씨익 웃으며 식당 문으로 도도도 뛰어갔다.
철컥.
그리고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식당 문을 잠가 버렸다.
“어휴, 쟤네 또 저런다.”
욘제타는 항상 있는 일이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식기를 들고 주방으로 들어갔고, 데이브는 식탁 정리를 하러 일어섰다. 이 안에서 멍하니 얼어붙은 사람은 아리스뿐이었다.
“너 없어서 오늘 내가 일 다 했거든! 인건비 포함해서 보상까지 해 줘야겠다.”
아델라가 문에 딱 붙어 외쳤다. 누가 보면 악당인 줄 알겠다. 어쨌든, 평소라면 문 열라고 할 아몬이었지만, 오늘은 잠잠했다.
‘오호? 아닌 척하겠다 이거지?’
“오늘은 고급 인력 두 사람 몫을 받아야겠다! 금화 한 닢!”
가격까지 말하면 바가지라며 꿍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야 했다. 그런데 아몬은 깜깜무소식이었다.
‘어허, 심각성을 전혀 못 느끼고 있군!’
“내가 너한테 아주 불행한 소식을 전할게. 알면 죄송해서 얼굴도 못 들걸! 지금 여기 누가 있거든? 누가 있냐면―!”
“저, 저기 아델라…… 님.”
드디어 아몬이 입을 뗐다. 갑자기 님은 또 뭐래. 아부라도 할 작정인가. 목소리가 좀 떨리는 것도 같고.
“아부해도 안 통해. 돈!”
세상은 아부로 돌아가지 않는다. 돈이 따라붙어야지!
“저기…… 문 좀 열어 봐야 할 것 같은데……요.”
말투 왜 저래? 아델라는 엄청 곤란해 보이는 아몬의 목소리를 들으며 왜 저러나 했다. 새로운 방법을 쓰는 건가.
“어딜 얼렁뚱땅! 돈이 없으면 집도 없다.”
세상은 이토록 잔인한 법이지. 아델라는 입가를 씰룩이며 문도 안 열어 주고 몸을 홱 돌렸다.
“……오십 닢.”
몸을 돌리자마자 곧바로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 아델라는 어이가 없어 다시 식당 문을 바라보았다. 자기가 부잔 줄 아나? 거짓말도 이 정도면 망상이었다. 아몬이 평소에 다섯 닢도 안 가지고 다니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문 열어 달라고 별수를 다 쓴다.
아델라는 얘가 사기를 배웠다며 혀를 끌끌 찼다. 그녀는 갈 데까지 간(?) 아몬이 불쌍해서 결국 잠갔던 문을 열었다.
“사기도 정도껏 쳐야지. 어디서 거짓부렁을―!”
거짓부렁을,
거짓부렁을,
거짓부렁을, 을, 을……!
이상하게 자신이 뱉은 말이 메아리가 되어 머릿속을 맴도는 것 같았다. 그녀는 문을 연 상태로 굳었다.
아몬은 그러니까 내가 열라고 했잖아, 라며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를 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전부네. 이 정도로 되겠나?”
어디서 부자인 척한다고 속으로 생각했는데, 진짜 부자가…….
그녀는 로브를 뒤집어쓴 이가 누군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모를까. 로브로 가려도 가려지지 않는 저 외모를! 목소리가 낮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설마 이저드일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가, 각하께서 왜 여기에 계신 거야?! 맙소사……! 나 지금 아무 죄 없는 각하를 문전박대한 거야? 돈까지 뜯고?’
이저드는 멍하니 굳은 아델라가 귀여워서 품에 안고 싶은 것을 참았다. 사실 아까도 몇 번이나 웃고 싶은 것을 참았다. 사람이 이렇게 귀여워도 되나 싶었다.
만일 그와 아델라가 신분을 숨기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면 마음껏 껴안았을 텐데. 이저드는 아쉬움에 그저 그녀한테 손만 내밀었다.
“데리러 왔네.”
“하…… 하하하…….”
아델라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녀의 얼굴은 쪽팔림 때문에 빨개져 있었다. 왜 항상 그의 앞에서 이렇게 황당한 모습만 보이는지 모르겠다.
“아델라! 무슨 일이니?”
멀리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데이브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아델라 쪽으로 걸어왔다. 그는 로브를 쓴 사람이 아델라한테 손을 내미는 동작을 취하자마자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데이브의 목소리가 들리자 얼른 정신을 차린 아델라는 빨개진 얼굴로 슬쩍 이저드를 가리며 데이브 앞에 섰다.
“아, 아니요. 제 가게 손님이에요. 하하. 아저씨, 아줌마! 저 이만 가볼게요!”
“그래? 정말 괜찮은 거지?”
데이브의 물음에 아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오늘 바쁠 텐데도 도와줘서 고마워.”
“에이, 아니에요! 서로 돕고 그러는 거죠! 아줌마! 저 가요!”
“뭐? 뭐라고?”
주방에 있던 욘제타가 머리만 빼서 다시 묻자, 아델라는 다시 대답해 주었다.
“어머, 얘! 잠시만! 잠깐 기다려 봐.”
욘제타는 손을 씻으며 무언가를 주섬주섬 챙기더니 그것을 보자기에 싸서 나왔다.
“간식 이것저것 넣었어. 네가 오늘 올 줄 알았으면 더 만들어 놓을 걸 그랬다, 얘.”
아델라는 보자기를 받으며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제가 아줌마표 간식 먹고 싶었던 건 어떻게 아시고!”
“다행이네. 그래도 너무 많이 먹지 마렴. 몸에 좋은 건 아니란다.”
“네에! 아리스 경, 저희 가요!”
보자기를 받아든 아델라의 외침에 아리스는 힐끔 이저드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스가 자신 쪽으로 오는 것을 확인한 아델라는 이저드를 데리고 식당과 거리를 벌렸다. 그녀는 가게와 멀어지면서 아몬한테 주먹을 부들부들 들었다.
* * *
“보통 그렇게 장난치나?”
자신의 손을 잡고 이끄는 아델라의 뒤통수를 보며 이저드가 웃음을 삼키곤 물었다.
“현물 말고 돈을 좋아하고 있는 줄 알았으면, 그때 드레스 말고 다른 걸 준비할 걸 그랬군.”
이저드가 그녀를 놀리자 아델라가 자리에 우뚝 서서 이저드를 휙 돌아보았다.
“각하아, 놀리실 겁니까?”
안 그래도 쪽팔려서 죽겠건만. 아델라의 볼이 발간 것을 빤히 보던 이저드가 그녀의 볼에 손을 뻗었다. 급격히 가까워진 거리에 아델라는 놀란 눈으로 주춤했다.
“서로 신분을 속인 상태 아닌가?”
“그, 그렇죠?”
“그럼, 날 각하라고 부르면 안 되지 않나?”
응? 이건 무슨 의미? 아델라는 코앞에 있는 잘생긴 얼굴을 의아하게 보다가 곧 아까처럼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후하. 시, 심장이 남아나지 않는데! 그, 이, 이름 부르라는 거지?’
“그러니까…… 서로 이름을…….”
이저드의 하늘빛 눈동자가 밝게 빛났고, 눈가엔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환한 대낮에 그와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있었던 적도 처음이고, 이렇게 자세히 그의 표정을 들여다본 적도 처음이라 아델라의 심장은 콩닥콩닥을 넘어 쿵쾅쿵쾅 뛰었다.
예전에 그저 어딘가에 심어져 있을 왕 측 스파이를 속이려고 제안한 이름 부르기를 연인이 되어 입에 담게 될 줄이야. 언젠가 서로의 이름을 부를 날이 오게 될 줄은 알았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아델라.”
귓가에 사르르 녹는 그의 부드러운 재촉에 아델라는 얼굴이 터질 것처럼 피가 몰리는 것 같았다. 이건 다른 의미로 시련이었다.
“이, 이…… 이, 저드?”
“음?”
“이, 이저드.”
그저 이름일 뿐인데 아델라는 엄청나게 부끄러워져 시선을 살짝 내렸다.
“잘했네.”
쪽, 하고 그의 입술이 아델라의 입술에 잠시 닿았다가 떨어졌다. 아델라는 그의 얼굴이 느리게 다가왔다가 천천히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실제로는 짧은 찰나였다.
그녀는 눈을 몇 번 깜박이다가 꼭 감고 그한테 두 팔을 뻗었다.
“……?”
하지만 그녀의 두 팔은 허공에서 멈췄다.
분명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키스를 하려 했는데, 입가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뭔가 볼이 더 꽉 잡힌 느낌이었다.
‘이상하다? 그 타이밍 아닌가?’
아델라는 이상함에 눈을 반짝 떴다. 이저드의 얼굴이 눈앞에 보이긴 했다.
했는데…….
“왜…….”
그녀를 막은 건 다름 아닌 이저드였다. 이건 무슨?
아델라가 그한테 다가가려고 힘을 쓰자, 이저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을 보니 웃고 있음이 분명했다.
“지금 절 약 올리십니까? 각…… 아니, 이저드는 하면서 전 왜 막아요?”
“눈에 띄고 싶어 하지 않는 거 아닌가?”
이저드의 말에 그녀의 머릿속으로 주변 상황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게와 시장이 즐비한 거리라서 당연히 사람들은 많았고, 지나가는 사람들 중 몇은 노골적으로 둘을 지켜보기도 했다. 길 한복판에서 입술부터 박고 볼 뻔했다. 민폐도 이런 민폐가……. 뻘쭘해진 아델라는 자신의 볼을 감싼 이저드의 두 손을 잡아 내렸다.
“그, 그냥 포옹, 포옹하려고 한 겁니다.”
‘아이고오. 몸아! 왜 자꾸 진도를 앞서가니!’
아델라는 민망함에 주변도 볼 수 없었고, 고개도 들 수 없었다.
“그런가? 그럼 내 착각이었던 모양이야.”
착각 아니라 맞을 겁니다. 입이 찢어져도 키스하려고 했다고는 말 못 하겠다.
입을 꼭 다문 아델라를 내려다보던 이저드는 참았던 웃음을 입가에 짓곤 손을 맞잡은 그녀를 품으로 이끌었다. 그녀가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 없었다. 품에 안았음에도 왜 더 안고 싶어지는 건지. 참 곤란했다.
“보고 싶었네.”
그가 이끄는 대로 품에 안긴 아델라는 조금 놀란 듯하다가 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저도요.”
참고로 덧붙이자면 둘은 아침에 눈 뜨고 헤어진 지 이제 반나절 지났을 뿐이었다.
* * *
“볼일은 다 봤나?”
둘은 한가로운 거리로 나와 손을 맞잡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네! 이……는요?”
아델라는 아직 그의 이름이 어색해서 입 밖으로 모든 이름이 다 나오지 못하고 쏙 들어갔다.
“잘 안 들리네.”
“이, 이저드는요!”
어쩐지 그와 맞잡고 있는 손에서 땀이 나는 것도 같았다.
‘헉, 땀나면 어쩌지.’
아델라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어떤 모습도 예쁘고 사랑스럽게 보일 텐데 말이다.
“보고 온 길이네. 헤이든 경의 아버지를 뵙고 왔어.”
“헤이든 경의 아버지면…… 백작님이요?”
백작이라는 말을 꺼낼 때는 목소리를 조금 작게 낮췄다. 이저드는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작게 말하지 않아도 되네. 피해서 걷는 중이니.”
헐, 그런! 그러고 있었다니?
누구나 쓰는 방법은 아니었다. 그라서 이런 식으로 왕 측 사람들을 피해갈 수 있는 것이다. 아델라는 이저드가 새삼 대단한 실력자임을 깨달았다.
“백작이 과거에 내 치료를 맡은 적이 있네. 혹시 이번 일이 정신적인 문제인지 궁금하여 갔더니 아니라더군. 아주 멀쩡하다는 말을 들었네.”
트라우마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는 소식은 기뻤지만, 다른 의미로는 나쁜 소식일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이저드는 지금 아주 건강하고, 정신도 말짱하다는 소리네요?”
“그렇지.”
“그럼, 이런 현상을 겪는 게 자연적인 건 아니라는 거고요?”
“그래.”
확답을 들으면 들을수록 아델라의 머리는 복잡해졌다.
“어쩌면, 인위……적인 걸 수도 있겠네요?”
“그럴 확률이 커. 무슨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려하는 상황은 아니길 바라는데, 상황이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갈 것이 거의 확실해졌다. 왜냐하면, 그래야 멀쩡한 이저드가 죽는 이유가 나올 테니까.
아델라의 낯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는 맞잡은 그녀의 손을 조금 더 꽉 쥐었다.
“그대는?”
“예?”
“볼일 말이네.”
“아아, 그게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어서 혹시나 하고요.”
“어떤 부분이?”
“아니길 바라는데…… 흑마법인가 하고요…….”
아델라는 그게 가장 큰 걱정이었다. 원인을 안다고 하더라도 손쓸 수 없을지도 몰랐다.
“내가 저주에 걸렸다는 건가?”
“음…… 조금 다릅니다.”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아델라를 내려다보았다.
“악몽을 꾸는 걸로만 끝났다면 저주일 확률이 높지만, 이 현상이 이저드의 죽음으로까지 이어지는 거라면 저주하고는 다릅니다.”
“그럼?”
그녀는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도 자세한 건 몰라서 확신할 수 없지만, 전조일지도 몰라요.”
“전조? 어떤 일의?”
정말정말 만약의 이야기였다. 정말정말 아니길 바라는 이야기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아델라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정신을 지배하는, 흑마법이요.”
그녀는 언젠가 루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정신, 뭐?’
‘정신 지배. 혹은 정신 교란.’
‘허억, 그런 흑마법사도 있어? 완전 무섭다. 역시 흑마법은 무서운 거였어.’
‘그건 쓰는 사람 나름이지.’
루가 뚱하니 책을 넘기며 중얼거렸다.
‘책에서 그래?’
‘아니, 내 의견? 이 책에는 흑마법을 알맞게 쓰는 법은 안 나와. 그저 쓰고 뭉개고 힘으로 누르고. 그런 것뿐.’
당시 아델라는 정신 계열 흑마법 쪽은 아예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흘리듯이 들었다. 그녀는 그것보다 이 꼬부랑글자를 어떻게 읽는지가 더 신기했다.
‘그래서? 그 무시무시한 흑마법을 푸는 방법은 있대?’
아델라가 루의 건너편에 앉아 그가 대충 훑는 책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루는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책을 살피고 있는 아델라를 지그시 보다가 자기는 다 봤다며 아델라 쪽으로 책을 넘겨주었다.
‘여기 쓰여 있는 방법들은 저주를 푸는 거나 정신을 지배하는 거나 비슷해. 더 강한 힘으로 누른다. 안 되면 시전자를 죽인다.’
아델라는 질린 표정으로 루를 마주 보았다.
‘난, 둘 다 별로……. 누를 만한 힘도 없고, 사람은 더더욱 죽이면 안 되고. 다른 방법은 없는 거야?’
‘난 모르지. 안 쓰여 있는 걸. 죽이는 방법이 가장 간단하긴 해. 어렵게 머리 굴리는 것보단.’
뭐가 이렇게 극단적이야? 아델라는 황당함에 눈만 깜박였다.
‘물론 이 방법은 내가 흑마법에 걸렸다는 걸 인식해야 가능한 일이지만. 아마 인식 못 할걸?’
‘그럼 그대로 죽거나 지배당하는 거야? 인식도 못 하는 사이에?’
아델라의 말에 루는 고개를 저었다.
‘대부분의 저주는 인식을 못 하긴 하지. 그런데 죽일 저주를 내린다고 다 죽는 건 아냐. 그랬으면 흑마법사가 세상을 지배했게?’
‘그것도 그러네.’
그녀는 쉬이 이해했다.
‘그럼 정신 지배는?’
‘정신 계열 흑마법은 저주랑 조금 달라.’
‘뭐가 다른데?’
‘스스로 인식을 못 할 뿐, 전조 증상은 있대. 주변 사람들이 알 만한.’
‘전조 증상? 그게 뭔데?’
아델라는 눈을 가늘게 떴다가 책을 들었다가 내렸다가 하며 유심히 흑마법서를 보고 있었고, 루는 그런 아델라를 웃으며 보고 있었다. 루는 다시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갔다.
‘그것도 모르지? 설명만 몇 줄 있고, 사료가 전혀 없어.’
‘잉? 왜? 어떻게 보면 가장 강력한 흑마법 아닌가? 많이 썼으면 썼지, 적게 쓰지는 않았을 텐데?’
‘정신 지배를 걸려면 최소 몇 년 단위라서? 그만한 마법을 걸 만큼의 흑마력이 있는 사람도 극히 드물고. 그리고…….’
루는 아직도 책을 보는 아델라를 빤히 보았다. 아델라는 그의 시선을 느끼고 자기가 너무 산만했나 싶어 그와 시선을 맞췄다.
‘정신 지배에 흑마력 붓다가 시전자가 죽을 걸? 어디 다른 곳에서 흑마력을 계속 보충하면 몰라도.’
그녀는 잠시 의아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가 루의 말을 이해하고 인상을 구겼다.
‘으으, 나 방금 소름 돋았어. 어떻게 사람 목숨을…….’
아델라는 자신의 팔을 연신 쓸어내렸다.
‘만약의 상황 중에 하나라는 거지. 설마 그런 이유로 살인을 밥 먹듯이 하는 미친놈이 있겠어?’
그래. 그때 설마설마 했다. 정말로 설마 했다.
흑마법사의 씨가 마를 대로 마른 세상에서 그 적은 흑마법사 중에 정신 지배를 걸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흑마법사가 태어날 확률과, 그 흑마법사가 사람까지 죽여 가며 누군가를 집요하게 망가뜨리려고 계획할 확률이 과연 얼마나 될까?
아마 세상이 망할 확률과 비슷하지 않을까.
아델라는 막연히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일이 매우 커질 것임을 직감했다. 그리고 이 일이 그저 자신의 ‘호상’만을 위한 길이 아님을 그녀는 어렴풋이 느꼈다.
“정신을 지배한다?”
“예, 혹은 정신 교란이라고도 해요.”
“흑마법으로 그런 것도 가능한가?”
“불가능하면서도, 가능합니다.”
아델라를 포함해 많은 흑마법사들은 불가능한 일이 맞았다.
“성공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설명은 있거든요. 제가 불가능하다고 말씀드린 건, 확률적으로…… 희박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희박하기에 그러나?”
“그게요. 어느 정도냐면요. 음― 나라가 망할 확률?”
이것 또한 확신할 수 없는 확률인데. 좀 뜬구름 잡는 소린가? 아델라는 다른 예시가 없나 머리를 굴렸다.
“나라는 망하지 않나? 곧.”
“아……! 그렇죠? 그럼, 하이크 제국이 망할 확률?”
“그 또한 벌어질 일이 아닌가?”
이저드의 말에 아델라는 눈을 도르륵 굴렸다. 남은 건 대륙이 망할 확률과 세상이 망할 확률……인데.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에 대한 예를 생각하다가 아델라는 무언가 깨달은 듯 눈을 크게 키웠다.
‘……그 말도 안 되는 확률이, 미래에 다 벌어지잖아?’
아델라가 생각한 말도 안 되는 모든 일은 이미 그녀의 회귀 전에 전부 이루어졌던 일이다. 그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세상이 망해 가는 것을.
“왜 그러나?”
그녀가 넋을 놓고 꼼짝도 하지 않자 걱정이 된 이저드가 그녀를 불렀다.
“아니……. 제가 방금, 일어날 확률이 희박한 일이라고 했잖아요?”
“그랬지.”
“근데…… 이미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다 일어났어요. 저한테도, 이저드한테도, 사람들한테도.”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빛이 떨렸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믿어야 했다. 아니길 바란 것은 애써 현실을 외면하려던 것일 뿐이다.
“그렇다는 건, 앞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없다는 거죠. 세상이 망할 확률보다 낮은 확률은 없을 테니까요.”
정신을 추스른 아델라가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이저드는 확신이 담긴 그녀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대의 말은, 내가 흑마법에 걸렸을 확률이 충분하다는 말이군.”
“……네, 아마도요.”
세상이 망하는 데 가장 첫 출발점은 이저드의 죽음에서부터였다. 이저드가 출정한 초반에 펜베르크 성은 꽤 평화로웠다. 이저드가 전방에서 적군을 잘 막아 주고 있다는 뜻이었다.
수비병들이 의아함을 느끼기 시작한 때는 전방이 뚫리고 적군이 펜베르크 성을 공격하면서였다.
워낙 방어 시설이 잘 갖춰져 있는 곳이라 방어가 뚫리지는 않았지만, 이때부터 슬슬 수비병들 사이에서 이저드가 잘못된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그래도 그들은 자신의 터전인 성을 최선을 다해 수비했다. 이저드가 죽을 리 없다는 강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버티고 버티던 어느 날, 모든 수비병의 전의를 상실시킬 만한 소식이 전해져 왔다.
바로 그의 죽음이었다.
처음에는 믿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으나 추가 병력이 펜베르크 성으로 집중되면서 수비병들은 주군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게 된다.
효시.
이저드의 잘린 목을 본 것만으로 수비병들은 하나둘 항복하기에 이르고, 격렬하게 버티던 몇몇 이들은 결국 전장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펜베르크 성이 함락당한 이후로는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꼭, 예정된 순서였던 것처럼.
나라가 망하고, 세상이 망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아니, 한순간이었던 것처럼 보였다. 수많은 회귀 동안 아델라는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그녀한테는 그저 어느 날 갑작스럽게 떨어진 날벼락과도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이 모든 일이 사실은 아주 오래 준비된 일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군. 그렇지?”
“네.”
“들어가서 그대의 이야기를 듣기 전에 하나만 말해도 되겠나?”
아델라는 복잡한 마음에 고민하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겪은 미래의 일 중에, 지금 현재 벌어진 일이 뭔가?”
“현재요?”
하나하나 되짚어 보았다. 그러다 아델라의 얼굴이 아까보다 조금 밝아졌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물음에 답했다.
“아직, 하나도.”
“그래. 아직 하나도 벌어진 일은 없네. 오히려 벌어지기 전에 찾아냈지. 앞으로 벌어질 일을 우리가 이제부터 함께 푸는 거네.”
아까부터 아델라의 표정에는 많은 감정이 휘몰아쳤다. 이저드는 계속 그녀를 살피고 있었다.
그는 세상이 망할 일보다, 자기가 안 좋을 일을 당할 것보다, 지금 현재 머리가 터져라 걱정하는 아델라가 더 눈에 밟혔다. 감당하지 않아도 될 걱정까지 전부 다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아델라가 말없이 혼자 끙끙 앓는 타입임을 아는 이저드는 조용히 앞으로 그녀와 헤쳐 나갈 일들에 대한 것만 알려 주었다.
‘함께…….’
아델라는 그 간단한 걸 그새 또 까먹고 불안해하고 있었다. 사람은 참 쉽게 바뀌기 힘든 존잰가 보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자신을 진정시키는 이저드를 올려다보았다. 아델라는 가슴이 콩닥거려서 이저드의 허리에 팔을 감고 그를 꼬옥 안았다.
“각하, 아니, 이저드 없었으면 전 어땠을까요.”
“어떻긴. 내가 모르는 곳에서 그대는 또 온몸으로 싸웠겠지.”
목숨이 남아나지도 않게. 이저드의 말에 아델라는 속으로 뜨끔했다. 여태 수많은 회귀 속에 항상 몸통 박치기부터 해서…… 버릇이…….
“이제 그러지 말게. 내가 그대의 짐을 덜어 갈 테니.”
귓가에서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 아델라는 그의 품에 폭 안겨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해결할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누군가의 뜻대로 일이 진행되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아델라는 오래도록 이저드와 함께하고 싶었다. 시간이 흘러서 늙어 죽게 될 때까지. 언제까지고 이 사람과 함께라면 살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