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3장-1. 그녀는 알고 싶다
이저드는 잠귀가 지나치게 밝았다.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면 잠을 이루지 못했고, 자다가도 금방 눈이 떠졌다. 그건 그의 오랜 습관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그래서 시종장을 포함한 저택 관리인들은 이저드가 잠자리에 들 때는 일정 거리 이상 접근하지 않았다. 물론 야간 순찰조도 마찬가지였다. 특별한 일이 아니면 그의 침실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이저드는 달빛이 비치는 창밖에 시선을 뒀다가 침대 맡으로 손을 올렸다. 그의 손끝에 검집이 만져졌다. 당연하게도 그는 누군가가 자신의 침실로 향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의 발걸음이 딱히 은밀하지가 않아서 이저드는 상황을 지켜보려 계속 누워 있었다.
침실 문이 조용히 열리고 닫혔다. 침실 안으로 들어온 사람의 기척이 낯설었다. 낯선 기척은 문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안절부절못하는 느낌이었다.
‘아, 아, 어쩌지? 주무시는데. 소리를 내서 깨워야 하나. 그럼 너무 무례……. 이미 무례한 짓을 하고 있구나. 아니, 근데 각하는 귀가 밝다고 하셨는데…….’
문안으로 들어온 이는 아델라였다. 그녀는 발을 떼야 하나, 아니면 여기서 불러야 하나 계속 고민했다. 벤슨의 말이 일리가 있어 일단 오긴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아델라의 머릿속은 혼돈 그 자체였다.
“가, 각하.”
아델라는 정말 큰맘 먹고 이저드를 불렀다. 그 순간, 아델라는 몰랐겠지만 이저드의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감이 스르륵 풀렸다.
이저드는 자신의 방에 들어온 이가 아델라라는 게 놀라웠다. 평소의 그라면 그녀의 부름에 바로 대꾸를 해 줬겠지만, 낮에 벌어졌던 일이 생각나 그녀의 부름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떻게 나오나 볼 참이었다.
“저…… 각하?”
뭐야, 귀 밝다며. 린다가 분명 그렇게 말하는 걸 들었다. 린다가 또 자신을 놀린 걸까?
아델라는 문 앞에 멀뚱히 서서 조금 더 목소리를 키웠다.
“각하.”
너무 푹 주무시는 거 아닌가?
아델라는 잠시 고민하다가 혹시 방문을 두들기면 깰까 싶어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나갔다. 이저드는 아델라가 뭘 하나 그저 지켜보았다.
똑똑.
그녀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물론 이저드는 반응하지 않았고, 한참 후에 다시 아델라가 빼꼼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안 깨시지. 소리를 질러야 하나. 아델라는 자리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 보니…… 벤슨 경이 각하 침실이 아닌 곳에 안내해 줬을 수도 있지 않나? 난 이미 배신자로 찍혔는데, 날 뭘 믿고 각하께 안내해? 그래, 좀 이상했어. 각하께서는 귀가 밝다고 하셨단 말이야. 내 기척에 안 깨실 리 없어.’
그렇게 아델라는 혼자 큰 착각에 빠졌다.
그녀가 이렇게 착각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저드의 침실 위치를 그녀는 몰랐기 때문이다. 신입이었던 탓에 그녀는 아직 야간 조로 이저드의 호위를 맡아 보진 않았다.
또한 아델라는 이저드가 깼는데 자는 척을 하는 거라고 절대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아델라가 아는 이저드는 깼으면 깼지 자는 척이라는 걸 할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 또한 그녀의 착각이었다. 이저드는 아델라의 행동이 흥미로워 가만히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그는 그녀가 여기까지 몰래 들어온 이유가 상당히 궁금했다.
‘그럼, 저기에 누워 있는 사람은 누구지? 관리인 중 한 명인가?’
그녀는 미동도 없는 실루엣을 힐끔 쳐다보았다. 사실 사람이 아니라 그냥 베개라거나?
‘아니면, 이거 함정……?’
벤슨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쨌든 자기는 배신자가 아닌가. 아델라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침대 쪽으로 다가가 이불을 걷었다. 함정이면 다음 생을 노려야지 별수 있나!
펄럭!
‘어……?’
이불을 걷어 낸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분명 실루엣을 봤는데, 그곳에는 누구도 없었다. 아델라는 자기가 귀신을 본 건가 싶어 그대로 얼어붙었다.
슥.
아델라가 놀랄 새도 없이 그녀의 목 주변에 차디찬 검날이 닿았다. 뒤였다. 그녀는 자신의 뒤에 있는 사람을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이저드.
뒤에 있는 이가 누군지 깨달은 순간 아델라는 앞뒤 볼 것 없이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죄, 죄송합니다아!”
아델라의 행동에 놀란 쪽은 이저드였다.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라거나 절 믿어 주세요, 라거나 혹은 눈물로 호소한다거나 그런 식으로 설득이라도 해 올 줄 알았다. 그런데 다짜고짜 무릎부터 꿇고 사과라니.
“뭐가 말이지?”
“믿어 주셨는데 신뢰를 저버려서요!”
아델라는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이저드는 아델라가 뒤돌아 있어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는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스파이였을지도 모를 가능성보다 그녀의 표정이 보고 싶었다.
“그 말은, 경이 스파이였단 걸 인정한다는 말인가?”
“그건 아닙니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저 절대 스파이 아닙니다.”
“그럼?”
“그러니까…… 이번 일로 인해 받으셨을 충격에 대해 죄송하다는 말입니다. 제가 미리 다 털어놓지 못해서 이런 일이 발생했습니다. 정말로 면목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아델라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원수 같아도 가족이라고, 아델라는 그냥 사과하는 수밖에 없었다. 변명은 나중 일이었다.
이저드는 별다른 말없이 아델라의 작은 뒤통수를 빤히 보기만 했다.
“그리고…… 또 죄송한 게 있습니다.”
“뭔가?”
또, 라는 말은 또 사고를 쳤다는 뜻이겠지. 이저드는 놀라울 것도 없다는 듯이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제가…… 밀정 노릇을 하라는 제안을 받았는데, 받아들였습니다.”
아까는 스파이가 아니라고 하더니, 지금은 밀정 노릇을 받아들였단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런데? 그게 왜 나한테 죄송할 일이지? 양심에 찔리나?”
“아니요. 각하께 묻지도 않고 제 마음대로 행동하고 결정했습니다.”
“밀정을? 그럼 경한테 다른 선택지도 있었나?”
“네.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다시 시작하는 선택지요.”
아, 그래. 아델라가 이렇게 고군분투한 게 모두 그것 때문이었지.
사실 이저드는 아직도 긴가민가했다.
자신을 속이려는 수작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허무맹랑한 이야기이긴 했다. 그렇다고 왕의 최측근을 오라버니로 둔 아델라를 있는 그대로 믿기에는 위험이 따랐다.
“사실 그러고 싶었는데, 어쩌면……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슨 기회?”
“각하가 죽는 원인을 밝혀 낼 기회요.”
아델라가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이고, 확실하게 이저드의 편이라면 적당히 왕한테 맞춰 주면서 정보를 빼올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중 스파이.
이저드는 지금 아델라가 바로 그 역할을 할 생각이라는 걸 알아챘다. 정말로, 아델라가 온전히 이저드의 편이라면 말이다.
“내 죽음의 원인에 전하께서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니니까요. 전하께서 오랫동안 각하를 싫어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은 곧 긍정이라 했다. 아델라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한테 내려진 임무도 좀 이상해서…….”
“경한테 내려진 임무가 뭔가?”
“보통 그냥 각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라. 반역의 기운이 보이면 보고해라. 기회를 봐서 독약을 타라. 뭐, 그런 걸 이야기할 텐데……. 어떤 이상한 행동을 보이면 꼭, 세세하게 보고하라고 했습니다.”
“이상한 행동?”
“네. 각하와 각하의 측근, 그러니까 호위병들까지 모두 포함해서요. 그런데 정작, 제일 중요한 그 이상한 행동이란 걸 자세히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그냥 한눈에 보면 딱 알 수 있을 거라나?”
이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의심이 갈 만하긴 했다. 왕이 뒤에서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는 몰라도, 분명 수작을 부리려고 함은 확실했다. 아델라는 그걸 알아내려고 밀정 일을 받아들인 거고.
그녀의 뒤통수만으로 그녀의 의중을 파악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저드는 그제야 검을 거뒀다.
“나머지 이야기는 일어나서 듣지. 그만하고 일어나게.”
이저드는 아델라를 떠보기 위해서 검을 겨눈 거였지만, 아델라가 알아서 줄줄 말해 주니 더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아델라는 일어서도 된다는 말에 우울하게 가라앉았던 얼굴을 활짝 폈다. 그녀는 다리에 힘을 주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왜인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델라와 이저드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어, 어쩌지.’
아델라는 이 상황을 많이 겪어 봐서 알 수 있었다. 지금 일어나면 죽을 거라는 걸!
“경?”
아델라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눈치챈 이저드가 그녀한테 다가가려고 하자 아델라가 황급히 손을 뻗어 그를 막았다.
“아닙니다! 전 너무 잘못했어요! 못됐습니다! 이대로 계속 꿇고 말씀드리겠습니다!”
“…….”
급박해 보이는 말투가 평소와 다르게 부자연스러웠다.
‘하필 이런 시기에 쥐가 날 건 또 뭐람! 정녕 신이 존재하신다면, 저한테 이러시면 안 되죠!’
아델라는 엉덩이라도 들썩이고 싶었지만, 뒤에 있을 이저드가 신경 쓰여 몰래 쥐를 풀지도 못했다.
“……경, 쥐 났나?”
다짜고짜 무릎부터 꿇는다 했다.
아델라는 이 상황이 너무 창피해서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쥐가 맞군. 일어서게.”
“헉! 안 돼요!”
이저드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아델라와 시선을 맞췄다. 아델라의 얼굴은 이미 불타는 고구마가 되어 있었다.
“앉아 있는 시간만큼 더 심해질 거네. 일어서게. 풀어 주…….”
“제, 제가, 제가 조금씩 풀게요!”
그 마음이 이해 안 가는 것도 아니다만.
이저드는 얼굴이 빨개져서 고집을 부리는 아델라를 보며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실례하지.”
이저드는 아델라를 들어 올렸다.
“으아아!”
아델라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침대에 눕혀졌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어버버거리는 아델라의 다리를 곧게 들었다.
“악! 아파요! 아파요오!”
“참게.”
그는 최대한 빨리 쥐를 풀어 주기 위해 노력했다.
초반이 좀 고통스러워서 그랬지, 아델라는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자 몰려오는 것은 부끄러움이었다. 아델라는 눈물 맺힌 눈가를 비비는 척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 침대에 쥐 난 사람을 눕혀 보긴 처음이네. 경은 참…….”
이저드는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아까 상황이 너무 웃겼기 때문이다. 뒤늦게 찾아온 웃음이 그의 말문을 막았다. 그는 아델라가 보면 비웃음처럼 내비쳐질까 봐 웃음소리는 내지 않고 한 손으로 입만 가렸다.
“죄,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이번 생은 진짜 망한 것 같았다. 어떻게 이 중요한 상황에! 이 눈치도 없는 몸뚱이!
“……미안한 걸 알면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게.”
이저드는 간신히 웃음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네에…….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어떡해. 더 화나게 했나 봐. 안 그래도 화났다는 사람한테!
허락도 없이 침실에 쳐들어와, 맘대로 이불도 걷어, 쥐 났다고 남의 침대에 드러누워. 뭐 하나 안 무례한 게 없었다. 역시 초기화가 답이다. 역시 다시 죽는 게…….
“그래. 앞으로 내가 경에 대한 걸 몰라서 벌어지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
“네. 네! 제가 아는 대로 다 말하겠……?”
아델라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치우고 안 믿기는 표정으로 이저드를 쳐다보았다.
“저……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나한테 용서를 받을 만한 일을 경이 했나?”
신에게 맹세코 침실에 쳐들어온 일 빼고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막무가내로 침실에 들어온 거요?”
“경이 급했던 것 같으니 그건 용서해 주지. 또 있나?”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이저드를 쳐다보았다. 지금…… 믿어 주려고 그러는 건가? 아델라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럼 됐군. 다리는 좀 괜찮나?”
이저드는 아델라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믿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녀의 태도를 봤을 때, 쥐가 날 것을 예상하고 무릎을 꿇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무작정 꿇은 거겠지.
그녀는 정말로 순수하게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에 대해 사과를 했던 것이다. 오라버니의 일까지 그녀가 사과하는 행태는 조금 열이 받았지만, 그녀한테 잘못이 있는 게 아니었으니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완전히 아델라를 믿는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어느 정도 그녀가 진심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다리에 쥐가 날 정도로 대책 없이 꿇어앉아 있던 정성을 봐서라도 이저드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 줄 생각이었다.
“네, 네. 괜찮습니다!”
아델라는 씩씩하게 대답하고는 슬금슬금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이저드의 눈치를 살피며 침대를 정돈하려고 이불에 손을 뻗었다.
“됐네. 경이 정리할 필요 없어.”
아델라는 허공에서 멈춘 손을 살며시 내렸다. 민망해서 죽겠다. 그녀는 이저드의 얼굴을 마주 보지 못했다. 이게 무슨 망신이야.
“경이 무얼 하려는 건지는 대충 알겠어. 그럼, 이제 경이 마음대로 결정했다는 일에 대한 계획을 들어보지.”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앉아서 할까요?”
아델라가 소파를 가리키며 묻자, 이저드는 그녀의 뜻에 따라 소파로 향했다.
* * *
다음 날 아침, 아델라의 생활은 180도 달라졌다.
편했던 제복을 벗은 그녀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드레스를 입게 됐다. 그녀의 방은 휘황찬란하게 꾸며져 있었다. 살아생전 이런 곳에서 잠을 자게 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값비싼 금은보화로 치장을 하게 될 줄도 몰랐고, 하녀들의 수발을 받을 만한 자리에 있게 될 줄도 몰랐으며, 산해진미와 함께 매일매일 귀한 디저트를 먹게 될 줄도 몰랐다.
가장 몰랐던 건…… 공작의 약혼녀가 된 거지만.
아델라도 아주 어릴 적에는 이런 화려한 삶을 꿈꾸기도 했다. 어린아이 눈에는 지체 높은 귀부인들의 삶이 그렇게 부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어린 마음에 어머니한테 시집을 가겠다고 생떼를 부린 적도 있었다. 그때는 질식사할 것 같은 이 코르셋의 의미를 잘 몰랐던 때였다.
그녀는 방 왼편에 있는 커다란 창가로 다가갔다. 문을 여니 햇볕의 따스한 빛과 싱그러운 풀 내음이 방 안으로 훅하고 들어왔다. 저번에 이저드가 보여 줬던 숲 같은 그 정원이었다.
아델라는 숲이 주는 청량함에 잠시 빠졌다가 자신의 신세를 깨닫고 뻣뻣하게 고개를 돌려 방 정면에 있는 창문을 보았다.
‘저 문을 열면…….’
“사실은 공작이 널…… 이미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던 거 아니야? 여기 있는 동안 둘 사이에 아무 감정도 없었어?”
살짝 두근거릴 뻔했는데 불청객의 목소리에 금방 정신이 돌아왔다. 아델라는 헛소리를 하며 방 안을 살피는 자신의 오라버니를 흘길 뻔하다가 참았다.
“으음……. 잘 모르겠는데? 왜?”
아델라는 순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헤게이든 영애가 공작가에 있는 동안 이 방에 얼마나 들어오고 싶었는지 알아?”
“나야 모르지. 난 훈련만 했는걸. 이 방이 왜? 뭔데?”
“공작의 침실 바로 건너편이잖아! 그 공작이! 자기 침실 주변에 아무도 안 둔다는 사람이! 원래 여기 안주인으로 들어올 사람한테 마련된 방이지만, 저번에는 별별 이유를 다 들어서 저쪽 건물의 귀빈실에 있게 했잖아.”
레널드는 흥분한 표정으로 아델라한테 말했다.
“영애를 들여보낼 수 없을 정도로 진짜로 심각하게 더러웠을 수도 있지. 아님 창고 방으로 썼는데 개조를 하느라 오래 걸렸다든지.”
“넌 그래서 어떻게 공작을 유혹할래……. 이미 너한테 호감이 있는데 네가 이렇게 아둔하게 굴어서 언제 기회를 잡으려고.”
뭐래. 언제는 네 미인계가 통하겠냐는 뉘앙스로 물었으면서.
아델라는 아니꼬운 눈으로 오라버니를 쳐다보았다. 아델라의 따가운 눈총을 받은 레널드는 흥분했던 마음을 진정시켰다.
“잘 들어 봐.”
그는 아델라한테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좋은 상황인지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너, 중급 수비병이었다가 상급 수비병으로 하루아침에 승급했다며.”
“어. 마티나 영애가 손을 써서. 원래 받을 등급으로 린다 경하고 헤이든 경이 고쳐 주셨지.”
아…… 그렇구나. 그럼 이건 패스.
“그, 그럼. 상급 수비병으로 있은 지 한 달 정도 돼서 호위병이 됐지. 너 이거 진짜 말도 안 되는 거야. 어떻게 신입이 호위병으로, 그것도 공작이 직접 지목해서 올라가겠냐고.”
“날 추천한 건 린다 경인데. 그리고 여기 호위대는 무조건 각하께서 직접 뽑아.”
아델라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레널드는 얘가 왜 이렇게 눈치가 없을까 속으로 생각했다.
“야, 아무리 직접 뽑는다고 해도 한 달밖에 안 된 신입을, 초짜를 그렇게 덜컥 뽑겠어? 검 한번 제대로 휘둘러 본 적 없는 너를?”
“지금…… 내 노력을 깎아내리는 거야? 오라버니 말은 각하께서 나한테 호감이 막 생겨서 옆에 두려고 날 호위병으로 뽑았다?”
옆에 둔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이저드는 인재가 있으면 일단 옆에 두고 키우자는 마인드를 지닌 사람이었다.
“내 말은…….”
“내가 집 나온 6년 동안 뭘 했을지 알고? 검도 제대로 안 휘둘러 봤다는 건 오라버니가 기억하는 10년 전의 나 아닌가?”
아델라가 이를 악물고 웃으며 말했다. 이 인간이 내가 이 자리를 거저먹은 줄 아나.
그녀가 여기에 올 수 있었던 건 하루아침에, 혹은 운이 좋아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많은 실패를 맛보고, 수많은 죽음도 거쳤다.
“헛소리 지껄일 거면 가. 도움 되는 소리를 해야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난리야.”
아델라가 짜증을 내며 의자에 앉았다.
레널드는 단지 이 상황이 얼마나 행운인지에 대해 알려 주려는 것뿐이었는데 아델라가 화를 내니 난감했다.
“그, 네 노력을 무시하려는 게 아니라…….”
아델라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상황이 진짜 좋다는 말을 하려는 거였어. 행운의 여신이 우리 편이라고! 난 네가 미인계 이야기했을 때 못 믿었거든.”
레널드는 변명 아닌 변명을 해 댔다. 하지만 그녀는 오라버니의 말에 관심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뭐라는 거야……. 미인계는 그냥 농담이었거든? 각하께 절대 안 통해.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 줄래?”
“진짜 현실적인 이야기야. 네가 공작을 잘 몰라서 그러는데, 그 사람 너처럼 약한…… 아, 아니, 너처럼 평범한! 사람을 곁에 둔 적 없어.”
이 자식은 내가 약하고 평범해 보이나 봐.
그러나 레널드는 정말로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에 더 기가 찬 아델라는 입을 꾹 다물었다.
분명 이야기의 흐름은 그녀가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아델라한테는 상처뿐인 대화 같을까?
“그런 사람이 널, 그것도 너만! 침실 주변에! 누구도 절대 그 주변에 얼씬도 못 하게 한다는데, 넌 허용했어. 자기 영역 안에.”
‘각하가 짐승이냐? 영역 따지게.’
아델라는 불쑥불쑥 올라오는 화를 꾹 눌렀다. 토를 달고 싶은 마음도 참았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이미 각하께서 나한테 마음이 있으시다?”
“아마도? 앞으로 네가 조심히 다가가기만 하면 임무는 쉽게 해결될 거라는 말이지.”
엄청난 추리를 해낸 것처럼 레널드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렇게나 여동생을 의심 안 해 주니 속이는 게 미안할 정돈데.
“밀정이 그렇게 쉬운 일이면 너도나도 했겠다. 내 모든 행동을 감시하려고 옆에 두는 거면 어쩌려고 설레발이야?”
“아니야. 넌 할 수 있어. 우리한테 승산이 있는 것 같아. 공작이 이랬던 적이 없거든? 두고 봐. 내 말이 맞을 거야.”
아델라는 확신에 찬 오라버니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나중에 자기 추리가 맞았다며 기뻐할 레널드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어이구, 이 화상아…… 계속 착각해라, 해.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치렴.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질 테니.’
아델라는 앞으로 이저드가 어찌 나올지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턱을 괴고 창밖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레널드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는 척 입을 열었다.
“그럴까?”
“분명해.”
“내가 밀정 노릇 잘 할 수 있을까?”
“그럼. 예상보다 훨씬 쉬울 것 같은데.”
아델라는 레널드의 대답이 웃겼다. 이 상황이 우스꽝스러운 연극의 한 장면처럼 느껴져서 더 그랬다. 덕분에 레널드는 10년 만에 아델라의 미소를 보았다. 그는 아델라의 환한 미소를 본 순간 아찔한 생각에 빠졌다.
그는 황급히 아델라의 어깨를 잡아채 자신의 쪽으로 돌렸다.
“너……!”
“아, 뭐야.”
강한 완력으로 잡아챘던 건지 아델라는 언제 웃었냐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레널드를 올려다보았다.
“너, 너……! 공작한테 반한 거 아니지? 넌 마음 없는 거 확실하지?”
“그거 물어보려고 잡은 거야? 아파. 놔.”
레널드는 자신이 평소보다 더 힘을 줬다는 것을 깨닫고 손을 거뒀다.
“미, 미안하다……. 자국 난 거 아니야?”
아델라의 눈치를 보며 묻는 레널드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보던 그녀는 홱 고개를 돌렸다.
“자국 나든 말든 내가 알아서 할게. 그리고! 나 눈 높거든?”
그래서 이저드한테 반했지. 아델라는 뒷말은 쏙 빼고 당당하게 말했다.
“으, 응……. 그런데…… 아델라, 오라비가 이런 말 하기는 뭐한데, 넌 눈을 낮춰야겠는데…… 아니면 네 눈이 삐었……. 아니지, 눈높이를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
지극히 정상인 사람한테 너무한다.
아델라는 그의 말을 못 들은 척 계속 창밖만 보았다. 일단 이저드한테 안 반한 척하는 게 더 중요했다.
“그럼 난 이만 가 볼게. 연락 꼭 하고. 문제 생기면 전서구 보내고.”
“알겠으니까 오라버니는 내가 부탁한 일이나 잘해.”
“……노력해 보마.”
레널드는 자신이 나갈 때까지 돌아보지 않는 아델라를 보며 조금 속이 쓰렸다.
* * *
레널드가 나가고 시간이 조금 흐른 후, 누군가가 방문을 두들겼다.
“네.”
방 안으로 들어온 이는 일전에도 몇 번 보았던 시종장이었다.
“방은 마음에 드십니까? 저희가 오늘 명을 받아 급하게 치우느라…… 눈에 차지 않으실지 모릅니다. 혹 부족한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쇼.”
아델라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러곤 살짝 미소를 보이며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너무 훌륭해서 감동했습니다. 그…… 성함이……?”
“카일입니다. 그냥 시종장으로 불러 주셔도 됩니다.”
“아, 네. 카일 님? 카일 씨?”
“아뇨. 뒤에 붙는 건 빼셔도 됩니다.”
“카…… 카일?”
나이 지긋하신 분한테 다짜고짜 이름부터 부르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어릴 적 귀족가의 예법을 배울 때, 평민한테는 말을 낮추라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아델라는 쉽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예. 지시하실 일이라도?”
“아니요. 궁금한 게 있어서요.”
“예. 말씀하십쇼.”
“뒤에…… 저것들은 다 뭐죠……?”
하녀들과 시녀들이 붙는 것까지는 알겠으나 그들이 가져온 옷가지와 액세서리, 장식품 등등의 짐들은 한눈에 봐도 너무 많아서 당황스러웠다.
“각하께서 지시하신 일입니다. 따로 준비하실 시간이 없으셨을 거라면서요.”
그렇긴 한데……. 저건 좀…… 너무 과하게 많은 거 아닌가.
아델라는 휑한 옷장과 화장대, 장식장이 빼곡히 채워지는 동안, 뭐라 말 한마디 못 한 채 넋 놓고 그들의 일사불란한 행동을 그저 지켜보았다.
“경, 이런 거 처음 봐? 아, 이제 경 아니지.”
아델라는 인기척도 없이 옆에 선 남자를 빤히 보았다.
“벤슨 경?”
“오해 다 풀렸나 봐?”
“아…… 그랬죠. 싹싹 빌었어요.”
“린다 경한테 한 것처럼?”
“린다 경한테는 더 싹싹 빌었죠.”
“크흡…… 그것도 소문난 거 알아? 울면서 린다 경 바짓가랑이 붙들고 난리였다고.”
벤슨이 웃으며 말하자 아델라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그냥…… 가볍게 무릎을 갈았죠.”
“너무 가벼웠던 거 아냐?”
“용서만 해 준다면 이 한 몸 어찌 되든, 괜찮아요!”
이저드와의 이야기를 마친 그날, 그녀는 숙소로 돌아가서 잠을 청한 뒤 아침 댓바람부터 린다의 집무실로 찾아갔다. 그러곤 그녀를 보자마자 넙죽 무릎부터 꿇었다.
그러자 린다는 흉흉한 표정으로 꼬치꼬치 캐물었다. 다행히 아델라가 자진해서 줄줄 말한 덕분에 린다도 어느 정도 이해하는 눈치였다.
“용서를 받았다니, 잘됐네.”
“그렇죠. 잘됐죠.”
아델라는 뿌듯해 보였다. 아직 오해를 다 푼 건 아니지만 차근차근 풀 수 있게 됐다.
“벤슨 경 덕분이에요! 감사해요.”
“맨입으로?”
“어머, 맨입 아니죠. 각하께 혼날 뻔한 걸 제가 잘― 말씀드렸잖아요.”
벤슨은 활짝 웃는 아델라를 보며 허무한 표정을 지었다.
“와…… 경, 아니, 영애 뻔뻔한 거 알아?”
“그럼요. 아주 잘 알죠.”
그는 웃는 낯으로 못 이기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데 벤슨 경이 왜 여기 있어요? 각하께서 저 불러요?”
“아니. 오늘부터 아델라 님의 호위를 맡게 된 벤슨이라고 합니다.”
방에 들어온 지 한참 후에야 그는 예의를 차리며 아델라한테 고개를 숙였다.
“아…… 제 호위 겸 감시자가 벤슨 경이군요. 낮 동안 잘 부탁드려요.”
그녀가 낮 동안이라고 한 이유는 아시다시피 이저드가 잠자리에 들면 모두 물러나야 했기 때문이다.
둘은 그렇게 예의를 갖추고 서로한테 인사했다.
“그나저나…… 저거 너무 많은 거 아닐까요? 하루에 하나씩 드레스를 바꿔 입어야 하는 건가요?”
옷장은 꽉 차다 못해 터질 지경이었다. 옷장이 작은 것도 아닌데.
“아, 저거. 성내 유명 부티크랑 옷가게에서 그대로 전부 다 가져온 거야. 영애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다 준비해 봤어, 같은 느낌? 역시 우리 각하.”
뭐야. 왜 자기가 뿌듯해 하고 앉았어. 아델라는 힐끔 벤슨을 쳐다보다가 아직도 들어오는 물건들을 보며 기함했다.
“잠시, 잠시만이요.”
“예?”
가지고 들어온 하녀들과 시종장이 멈춰서 아델라를 보았다. 그녀는 보다 못해 정리에 나섰다.
“저 이거 다 못 입어요. 이미 정리한 건 두시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보내 주세요. 환불 꼭! 받으시고요!”
“하지만…… 너무 적지 않으십니까?”
“아뇨. 충분합니다. 필요하면 제가 다시 요청할 테니까 나머지는 전부 환불 받으세요.”
여기서 얼마나 살게 될지도 모르는데, 저렇게 많은 물건은 필요치 않았다. 지금도 그녀 눈에는 넘치도록 많아 보였다. 한 번 사용하고 버릴 것도 아니고, 모두 재사용이 가능한 것들 아닌가.
아델라는 이따 밤에 이저드를 만나면 너무 과했다고 말씀드려야겠다 생각하며 물건들을 돌려보냈다.
* * *
“예? 이번에도요?”
금발의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긴 헤이든이 이저드를 보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는 제가 나가기로 했는데…….”
얼마 만에 나가는 전장인데…… 이렇게 놓치나요?
“그런가? 안됐군. 린다 경이 좋아하겠어.”
엄청 좋아할 것이다. 안 그래도 그 문제 때문에 린다는 계속 꽁해 있었다. 얼마 전, 헤이든과의 내기에서 진 탓에 이번 전장에는 헤이든이 나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왜 린다로 결정하셨습니까? 원래는 정해져 있지 않으셨잖아요.”
헤이든은 1년 전 전투에서도, 2년 전 전투에서도, 3년 전 전투에서도 전장에 서지 못했다. 성주 역할을 부사령관인 자신이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러다 실전 감각이 낡아 부식되는 건 아닐지…….
“성주가 자리를 비우니, 경이 맡아 줘야 하지 않겠나.”
“이젠 저 말고 맡으실 분도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아델라 경, 아니, 영애요.”
“그래서야.”
이저드의 짧은 대답에 헤이든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변했다. 헤이든은 아델라가 여태 보였던 행동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일련의 상황들을 떠올려 보니 이저드가 그렇게 말한 까닭을 알 것도 같았다.
“영애께서…… 전장에 나간다는 건 아니죠? 하하, 설마요. 그렇죠?”
“설마가 맞을 거네. 안 데리고 나갔다가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몰래 참여할지 모르겠더군. 경도 알다시피, 아델라 영애가 어디로 튈지 몰라서.”
조용하다가도 언제, 어디서 기상천외하게 사고를 칠지 몰랐다. 그건 헤이든도 인정하는 바였다.
“아니, 영애께서 왜 그런 위험한 일을……. 이제 호위병도 아니시고…….”
“말로는, 날 구하기 위해서라더군.”
“……영애가 각하를 구한다고요?”
어떻게?
이저드가 쉽게 죽을 위인은 아니지만, 만일 죽을 위기에 빠진다고 하더라도 스스로가 스스로를 구할 사람이었다. 누구의 도움이 필요하지는 않을 터였다.
아델라는 지금 자신의 목숨을 더 중히 여겨야 할 때였기에 헤이든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 두 달 후에도 내가 무사하면 그땐, 각자의 생활로 돌아가기로 했네.”
“영애와 거래를 하셨습니까?”
“거래라…….”
이저드는 어젯밤에 했던 대화를 회상했다. 거래라고 부를 만한 이야긴지는 모르겠다. 거래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내가 해야 할 건, 경의 장단에만 적당히 맞춰 주면 된다는 건가.’
‘내키시는 만큼이요. 각하께 부담이 될 수 있는 계획이니까 내키시는 만큼만 하십쇼. 저와의 거리도, 각하께서 원하시는 만큼만 하세요.’
아델라는 올곧은 눈동자로 이저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흔들림 없이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이렇게 해서 경이 얻는 건 뭔가. 바라는 것 없이 날 도울 생각을 한 건 아닐 텐데.’
‘음…… 바라는 건, 각하?’
‘장난으로 물은 게 아니네.’
진짠데……. 아델라의 풀 죽은 표정이 꼭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저도 장난으로 말씀드린 거 아닙니다. 각하께서 사셔야…… 저도, 이 나라도 살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경은 내가 사는 것 말고는 바라는 게 없다는 말인가?’
아니, 바라는 거야 많았다. 하지만 이저드가 살아서 자신도 살 수 있다면 모두 얻을 수 있는 거였다.
일단 이 일이 무사히 끝나면 원래 생활로 돌아가서 평화롭게 살 수 있다. 다음으로는 가문 빚도 청산했겠다. 이번에야말로 가문과 인연을 완전히 끊을 수 있다. 그녀는 가문의 연을 끊고 욘제타네 양녀로 들어갈까에 대한 생각도 하고 있었다.
또, 이저드와 린다, 헤이든 등등 많은 이들을 살릴 수 있었다.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못할 어마어마한 인맥도 생긴 셈이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그녀의 회귀였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테니, 전쟁으로 죽을 확률은 없어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목숨이 붙어 있게 되는 것만으로도 이저드한테 바랄 게 없었다.
‘으음…… 지금 저한테는 그게 진짜 중요한 거라…….’
이저드는 거래도 아니고, 그렇다고 부탁도 아닌 아델라의 계획에 의심을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믿어야 하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아!’
‘뭔가.’
‘그럼 저…… 훈련 계속해 주시면 안 됩니까? 하루 일정 끝나고.’
이저드는 약간 김이 빠졌다. 예전에도 밤중에 추가 훈련을 도와준 적이 있으니 그 정도 부탁은 쉬웠다. 그는 그녀가 좀 더 큰 부탁을 해 올 줄 알았다.
‘그게 다인가.’
‘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을 때, 이저드는 만감이 교차했다. 자신이 객관적으로 사람을 볼 수 없게 된 것인지 그녀의 웃음이 참으로 예뻐 보였다.
그녀의 저의가 무엇인지, 그녀의 목적이 무언인지를 생각하기 전에 말갛게 웃는 아델라의 얼굴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내가 내키는 대로 하라고 했나?’
‘네. 각하가 내키셔야 이 계획이 가능하니까요. 그래야 제가 안 들키고 이중 스파이 노릇도 하죠.’
‘알겠네. 그럼 내일부터 내 건너편 방으로 옮기게.’
‘……예? 내일부터요? 당장요?’
‘내가 내키는 대로 하라고 하지 않았나.’
아델라는 황금색 눈을 끔뻑였다. 자기가 제안해 놓고 당황한 눈치였다.
이저드는 어제 있었던 그녀의 반응을 하나하나 다시 기억에서 꺼냈다. 아무리 기억을 뒤져 봐도 그녀가 거짓된 표정을 지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거래는 아니네. 영애가 받은 게 없어.”
“받은 게 없긴요? 각하의 건너편 방도 받았고, 각하는 성내 부티크랑 옷가게를 터셨죠. 게다가 원하시는 대로 전장에도 나가실 거고…….”
“영애가 그렇게 해 달라고 한 건 저중에 하나도 없네. 그건 내가 내키는 대로 한 거야.”
누가요? 내키는 대로 누가요? 헤이든은 경악에 찬 표정으로 이저드를 바라보았다.
“내키는 대로요? 각하께서요?”
“그래.”
생전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고……! 헤이든은 불경한 생각을 하다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공작의 안색을 살폈다.
“뭐하나?”
“제가 아는 각하가 맞나 살펴봤습니다.”
무슨 뚱딴지같은 행동인지 모르겠지만 이저드는 헤이든의 얼굴을 밀었다.
“아델라 경, 아니 영애는 뭐라 하십니까?”
“영애가 먼저 내건 제안이네.”
“영애께서 내키는 대로 하라고 했다고요?”
헤이든은 아델라가 내키는 대로 하라고 했다는 말보다 그녀가 내건 제안을 그대로 실행한 이저드가 더 신기했다.
“진짜 각하 맞으십니까?”
“맞네.”
헤이든은 신기한 눈으로 이저드를 쳐다보았다. 여태 선이라는 걸 지키던 사람이 갑자기 그 선을 훅 넘어서 놀라웠다.
이저드는 완전히 자신의 편이라고 판단되는 사람이 아니면 일정 선을 지켰다. 사람을 대할 때의 매너는 지켰지만, 그 이상 그 이하로 다가가지 않았다. 이저드가 살아온 삶이 있었기에 사람과 거리를 두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아델라한테는 미묘하게 다른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선을 지키는 것 같으면서도 아델라의 뜻대로 끌려가 주고 있었다.
헤이든은 이 상황이 좋은 현상인지 생각해 보았다.
“아델라 영애를 아예 믿기로 마음먹으신 겁니까?”
“그건 좀 더 지켜봐야 알 일이지.”
아직 뭐라고 말할 단계는 아니었다. 이저드는 그저 그녀의 장단에 맞춰 줄 의향이 있을 뿐이었다.
헤이든은 이저드의 행동을 미루어 보았다. 아델라를 객관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건 알고 계신 것 같은데 태도가 변한 이유는 무엇일까.
‘음? 에이, 설마 그건 아니겠지.’
생각의 끝에 다다른 건 믿을 수 없는 이유라서 헤이든은 고개를 저었다.
이저드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헤이든으로선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이저드는 왕한테 약점이 잡힐 만한 그 무엇도 만들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각하를 구한다는 건, 레널드 부기사단장한테 무슨 이야기라도 들었다는 겁니까?”
“밀정을 제안 받았다더군.”
까도 까도 끝이 없네. 헤이든은 그 사실을 왜 이제 말씀하시냐는 듯이 눈을 부릅떴다.
“이따 린다 경하고 아리스 경과 함께 이야기하려고 했네. 경한테만 말 안 한 게 아니야.”
헤이든은 불손했던 눈을 살며시 내렸다. 잠깐 흥분을 좀 했다.
똑똑.
“린다 경입니다.”
“들어오게.”
헤이든은 린다가 들어올 때까지 침착하게 기다리다가 그녀의 말을 듣고 진짜 너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들어오자마자 한 말은 이랬다.
“아델라 경, 이중 스파이 한다면서요? 아! 이제 아가씨구나. 어쨌든.”
그러니 당연히 헤이든은 혼자 소외당한 기분에 울적해졌다. 이래봬도 부사령관인데 저택 돌아가는 상황을 제일 늦게 알려 주시다니.
“헤이든?”
린다가 아무것도 모르고 그에게 다가가자 서러웠던 헤이든은 그녀를 껴안았다.
“뭐야? 얘 왜 이래요?”
“헤이든 경한테만 말 안 했다고 생각한 모양이군. 참고로 난 린다 경한테 말 안 했네.”
“뭘 말해요?”
그렇다. 린다가 알게 된 이유는 아침에 아델라가 찾아가서 싹싹 빌면서 다 실토했기 때문이다.
린다는 헤이든이 이러는 영문도 모르고 토닥였다. 자주 발생하는 일 중 하나였다. 이저드는 매번 저러는 둘을 보다가 회의를 진행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뭐 하나?”
이제 막 창문을 넘어서 나오던 아델라와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이저드의 시선이 부딪쳤다. 그는 그녀가 도대체 왜 저러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델라는 자기가 뭘 했나 싶어 주변을 살피다가 하던 일을 마저 했다. 창문 타 넘는 일.
탁.
“왜요?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문을 놔두고 왜 창문으로 나오냐는 말이었네.”
“저희 몰래 만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몰래 만나는 거와 창문을 타 넘는 건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아델라는 되레 왜 그런 걸 물으시냐는 표정이었다.
“잊고 있는 모양인데, 이 주변에는 이미 사람이 없네. 그대가 창문을 넘어서 올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
“아―.”
그녀는 이제 깨달은 듯했다.
“하핫,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창문을 넘을 생각을 하진 않을 텐데…….
아델라가 살짝 민망해져서 또 하하 웃었다. 이저드는 그녀가 황당하면서도 웃겼다.
“다음에는 문으로 오게.”
아무리 몰래 만나러 나온다고 해도 어느 귀족 영애가 창문을 타 넘을까. 그런 발상을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네!”
그녀는 씩씩하게 대답하고 얼른 이저드를 따랐다.
“아 참, 각하.”
이저드는 자신의 뒤를 졸졸 쫓아오는 아델라를 돌아보다가 이내 보폭을 줄여 그녀의 옆에 서서 걸었다.
“이번에 너무 과했던 거 아닙니까?”
“뭘 말인가?”
“음…… 처음부터 물량 공세가…… 과한 것 같습니다.”
“이번 정도를 과하다고 여기면 곤란하네만.”
“……?”
아델라는 아무 반응도 못 하고 멍청히 이저드를 올려다보았다.
“반응이 왜 그러나? 이런 걸 바란 게 아닌가?”
“어……. 맞긴 한데, 보통 처음부터…… 그러나요? 아니면 각하께서는 누군가를 좋아할 때 막 퍼 주는 스타일입니까?”
“보통 그 사람을 너무 좋아하게 되면 없는 것도 만들어서 주고 싶다더군.”
아델라와 이저드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사실 둘은 연애를 시작할 때의 단계라거나 누군가를 좋아하게 됐을 때 다가가는 방법 같은 것을 잘 몰랐다. 아델라는 평생 일만 하느라 남자 따위 잊고 산 지 오래였고, 이저드는 전장을 누비고 일만 하느라 여자를 잊고 산 지 오래였다.
이 계획, 어째 불안불안하다. 아델라는 급하게 주변에서 본받을 만한 커플을 생각해 보았다.
“헤이든 경은 린다 경과 어떻게 가까워졌습니까?”
“둘? 둘은 사이가 좋지 않았네. 가까워질 틈도, 연애할 틈도 사실 없었지.”
이저드는 당시를 생각하는 듯 살짝 인상을 구겼다.
둘은 원수를 진 듯 틈만 나면 싸웠다. 그 사이에 낀 이저드가 골치 아플 정도로. 지금 둘을 생각하면 상상도 가지 않는 과거였다. 한편으로는 신기한 일이기도 했다. 만나기만 하면 이를 갈던 둘이 결혼까지 하고 지금은 누구보다 다정한 부부가 되었으니.
“그럼 어떻게 사귀고 결혼한 거예요?”
“결혼한 결정적인 이유는 아이가 생겨서네.”
이건 무슨 소리?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아델라는 아까보다 더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연애 시작도 안 했는데, 애는 어떻게 생김……?
“그 말은…… 헤이든 경이, 린다 경을 덮쳤…….”
“반대네.”
“아…… 그렇구나…….”
이쪽 커플을 본보기로 삼으면 안 되겠구나……. 하하, 하하하하…….
“제가 예를 잘못 물어봤네요.”
아델라는 왜인지 모를 어색함에 몸을 배배 꼬고 싶었다. 둘에 대한 건 왜 물어봐서! 아니, 둘이 임신부터 했을지 누가 알았냐고. 심지어 아이가 있는 줄도 몰랐다.
“왜지? 괜찮은 예 아닌가?”
“너무 빠르잖아요!”
그녀는 자기가 말해 놓고 뒤늦게 얼굴이 빨개졌다.
“……우린 어차피 보여 주기만 하면 되지 않나.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거 아닌가?”
그러게 말입니다. 바본가 봅니다.
실제로 아델라와 이저드가 그런 관계가 될 것도 아니고, 그저 주변에 보여 주기만 하면 됐다. 아델라는 가도 너무 멀리 갔다고 깨달으며 자신을 질책했다.
“그…… 그래도, 갑자기 그런 관계가 됐다고 하면 의심받지 않을까요?”
애써 화제를 돌리려고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이저드는 아까 아델라가 놀란 것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 대충 그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갑자기는 아니네. 그대와 내가 만난 시점부터 따지면 두 달 전이니까. 그리고 일주일이나 이주일 후에 그대를 침실로 불러들이든, 당장 불러들이든, 그들 눈에는 똑같이 보일 거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들은 이저드와 아델라의 연애 과정 같은 것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었다. 이저드가 아델라한테 얼마나 빠져 있는지가 더 중요했다.
어떻게 아델라한테 빠졌는지는 상상의 나래로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럴싸한 이유만 있다면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거였다.
“역사적으로 미인에게 빠져 나라를 말아먹은 왕이나 수령들이 있었으니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니고.”
이저드의 입에서 직접 미인 소리를 들으니까 아델라는 엄청 민망해졌다.
“저, 각하께서는 괜찮습니까?”
“뭐가 말이지?”
“저랑 단둘이 있는 거요?”
“지금도 단둘이지 않은가.”
그게 아니고! 아델라는 이저드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같은 공간에, 그것도 침실에 단둘이요.”
이저드는 아델라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몰라 그녀의 맑은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 걱정하지 말게. 충분히 걱정되겠지만, 그런 짓 하지 않아.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네.”
아니, 그거 아닌데……. 아델라는 친절하게 선을 그어 주는 이저드를 당혹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니, 각하가 아니라 제가. 제가 더 위험한 짐승이 될까 봐 그럽니다…….’
그녀는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저 얼굴을 마주하고 침실에서 견딜 수 있을까?
자기가 생각해 낸 방법이긴 했지만 이저드가 흔쾌히 받아 줄지 몰랐다. 의심받을 줄 알았는데. 그는 아델라가 침실에 있어도 상관이 없는지 그녀의 계획에 동참해 줬다.
아, 자기가 덮침을 당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시지 않는구나. 하긴, 그렇구나. 누가 덮칠 수가 있겠어. 암살도 불가능한 사람인데.
아델라는 이저드와 건전한(?) 침실 생활을 위해 도를 닦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경. 아, 미안하군.”
“아닙니다. 천천히 바꾸셔도 돼요. 전 상관없습니다.”
“난 상관있네. 앞으로 다른 이들까지 속이려면 고쳐야 할 것 같군.”
호칭을 고민할 필요가 있긴 했다. 친근하게 부를 만한, 혹은 거리감이 안 느껴질 만한 호칭이 있으면 좋았다.
“그렇다고 이름을 부를 수는 없잖습니까? 영애랑 각하. 그 호칭이 제일 낫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사이가 가깝다는 걸 보이는 편이 좋지 않나?”
그건 맞지만…….
아델라는 눈을 크게 뜨고 이저드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서로 이름을 부르자는 말씀이에요?”
“좋은 의견 같네.”
이 사람이 왜 이렇게 적극적이야. 너무 장단에 맞춰 주니 오히려 불안했다.
“난 그대를 아델라라고 부르고, 그대는 나를 이저드라고 부르는 게 어떤가.”
“전 각하라고 불러야죠.”
“누가 부르지 말라고 했나. 실수인 척 가끔 부르는 것도 좋은 효과를 볼 것 같아서 하는 말이네.”
좋다 뿐인가. 엄청난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나가겠지. 새로운 약혼녀랑 공작의 사이는 진짜다! 라며.
아델라는 궁금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이저드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도와줄 줄은 정말로 몰랐다. 진짜 적당히 장단만 맞춰주고 거리를 둘 거라고 생각했다.
“왜…….”
왜 이러십니까, 라고 물을 뻔했다. 도와주면 얼씨구 좋다구나 하고 받으면 되는데.
아델라는 이저드한테 받으면 왠지 마음의 빚을 지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신세 지는 게 많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아델라의 계획 때문에 그한테 돌아갈 온갖 소문도 마음에 걸렸다.
“네, 네. 그것도 괜찮은 방법 같네요. 서로한테 애정이 있는 것처럼 보여야 하니까요.”
진짜 선을 긋고 있는 사람이 둘 중 누군지.
이저드는 그녀의 반응이 마음에 걸렸다. 어젯밤에도 신경 쓰였는데, 그가 뭔가를 주려고 하면 아델라는 일정 부분 이상은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이런 사람이 처음이라 솔직히 불안했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는 것이 분명한데, 오는 건 있는데 가는 것에는 선을 긋는다. 난 계속 줄 테니, 넌 그냥 받기만 해. 이런 관계는 성립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불안했다.
이저드한테 받기만 원하는 사람은 봤어도 자기가 주기만 원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두 사람뿐이었다.
이저드는 잘 가다가 우뚝 멈춰 먼저 앞서가는 아델라를 멍하니 보았다. 그러다 무의식적으로 그녀한테 손을 뻗어 어깨를 잡았다.
“아!”
아델라가 아픔을 표현할 만큼 세게 잡지는 않았다. 그녀의 한쪽 어깨를 가볍게 손으로 감싼 정도였다. 아델라와 이저드는 많이 놀란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어디 아픈가?”
“아, 아뇨. 방금 놀라서…….”
그녀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다쳤나?”
“아뇨? 저 멀쩡한데에엑!”
이저드가 어깨에 둔 손에 조금 더 힘을 주니 그녀가 인상을 구기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이저드는 곧바로 그녀의 어깨를 놓았다.
“……안 되겠군. 들어가지. 오늘은 훈련 없네.”
“저 진짜 괜찮은데! 이쪽 어깨만 조금…….”
이저드가 아델라를 이끌며 왔던 길을 되돌아 걸었다.
“어쩌다 다쳤나?”
‘오라버니 망할 놈의 자식! 이라고 하면 안 되겠지……. 어휴, 이 원수.’
아침에 그녀를 돌아 세우던 레널드의 악력이 어찌나 강했던지 여린 살에 멍이 들었다. 부기사단장이라는 직함을 허튼짓으로 딴 것 같지는 않았다.
“으음…… 박았습니다.”
“어디에?”
“벽에?”
“나한테 묻는 건가?”
아델라는 조그만 목소리로 벽일 거라고 말했다. 이저드는 그녀가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얼굴이 화끈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까 그녀를 잡아챈 이유가 너무 말도 안 돼서 창피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그 두 사람이 아니었다. 아델라가 아무 이유 없이 무언가를 베풀기만 하니, 아델라와 비슷하게 주기만 하다 떠난 두 사람이 생각났다.
받는 게 당연한 줄 알았던 어린 시절…… 그한테는 그런 그를 보호해 준 이들이 있었다. 이저드가 좋은 것만 보고, 좋은 이야기만 듣고, 좋은 생각만 하게 힘썼던 분들이 있었다.
이저드는 당시, 그들이 태연한 척, 괜찮은 척 웃어서 괜찮은 줄 알았다. 그들의 앞에 어떤 고통도 없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게 허상이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됐다.
그들이 이저드 하나만 보며 이 악물고 버텼던 것임을, 그들이 견딘 그 시간들이 모두 고통이었음을……. 이저드는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됐다.
하지만 그는 미안하다는 말도, 그렇다고 고맙다는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이미 그들은 죽었기 때문이다. 아델라처럼 그렇게 웃어 주다, 그렇게 무언가를 주다가 흔적도 없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저드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은 건, 일순 두려운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도 그의 부모님처럼…… 아무 조건 없이, 자신한테 주기만 하다가 자기 때문에 죽게 될까 봐.
* * *
“아델라!”
원래라면 사람이 적어야 할 시간인데, 욘제타네 가게 안에는 사람으로 복작거렸다. 욘제타가 가게 문 앞에 선 아델라를 발견하고 반가운 표정으로 그녀한테 다가갔다.
“어서 와! 훈련은 괜찮니? 안 힘들어?”
욘제타는 가게 안에 있는 사람들한테 고갯짓하며 보란 듯이 아델라를 데리고 테이블에 앉혔다.
가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아델라가 입고 온 붉은색 호위병 제복을 보고는 하나둘 가게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안 나가고 버티던 몇몇도 욘제타의 눈빛 공격에 어깨를 움츠리며 나갔다.
“어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저 사람들 뭐예요? 계속 죽치고 있던 거예요?”
“그래! 내가 동명이인이라고 박박 우겨도 안 믿고 버티고 있었다니까? 떡이라도 하나 떨어질까 하고. 쯧쯧.”
욘제타는 요 며칠 시달린 듯 눈이 퀭했다.
“죄송해요…….”
“네가 죄송할 건 뭐니? 돈 보고 달려드는 하이에나들을 탓해야지.”
“제가 속였잖아요……. 그동안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네가 속인 거니? 우리가 안 물어본 거지.”
욘제타네 가족이 아델라의 출신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원치 않는 것 같아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들한테 아델라의 출신은 그녀를 보살피는 데에 별로 큰 장애물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아델라가 잘 먹고, 잘 웃고, 잘 자랐으면 싶었다. 아델라의 신분이 밝혀진 지금도 그들이 그녀한테 바라는 것은 하나였다. 집안 빚에 허덕이며 고생하던 때는 잊고 잘 사는 것.
“고맙고, 죄송해요.”
욘제타는 그녀가 자신들을 속였다고 미워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기특했다. 욘제타는 아델라가 과거를 드러내고 맞서서 살아볼 생각을 했다는 것이 기특했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들을 다시 찾아온 것에 기뻤다.
“어머, 됐다, 얘. 다 큰 성인이 자기 길 가겠다는데 미안할 건 또 뭐니. 5년 전, 그날의 은혜를 고마워하는 거라면 몰라도.”
욘제타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에 아델라도 긴장이 풀렸는지 살포시 미소를 띠었다.
“넌 각하께 관심도 없다더니 언제 그런 사이가 됐니? 그분이 잘해 주던?”
“아…… 그땐 제가 각하를 잘 몰랐던 때라…….”
아델라의 볼에 발간 홍조가 올라온 것을 본 욘제타는 흐뭇하게 웃었다.
“네. 잘해 주세요. 여기 올 수 있었던 것도 각하께서 먼저 일정을 빼 뒀기 때문이에요. 앞으로 또 바빠져서 만날 시간이 없을 것 같으니 배려해 주신 것 같아요.”
“각하께 우리 이야기를 했니?”
“당연하죠. 물론, 가게에 피해 안 가게 철저히 비밀로요!”
욘제타는 환한 아델라의 얼굴을 보며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평민이랑 친하게 알고 지냈다고 하면…… 안 좋게 보이지 않을까?”
“예에? 그런 걱정 마세요! 각하께서 그럴 분도 아니고, 제 주변 사람들도 그럴 사람들 아니에요. 오히려 저랑 안다고 하면 아주머니만 피해를 보시죠.”
아델라는 아까 가게에서 죽치고 있던 이들이 떠올라 또 미안해졌다. 괜히 장사에 방해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내가? 왜?”
“아까 그 사람들도 그렇고…… 혹시 제 가문 쪽에서 알고 깽판이라도 치면…….”
“이젠 딱 잡아뗄 거야. 아까 그 사람들은 너 제복 입은 거 확인했으니 동명이인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래도 한동안은 좀 시달리실 거예요.”
“얼씨구. 너 며느리 삼겠다고 요 주변 상인들한테 시달린 것보다는 낫겠다.”
으음? 그런 일이 있었어?
아델라는 몰랐던 사실이라 처음 듣는다는 얼굴을 했다. 욘제타는 그런 아델라가 귀여워서 그저 웃었다.
“어쨌든, 그건 걱정 마. 아주 딱 잡아뗄 거니까. 너희 가문 사람들 뭐가 예쁘다고 상대해 주니?”
욘제타는 삐쩍 말랐던 작은 소녀를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어떻게 그 가문을 용서할까. 첫 만남에서 욕설부터 안 날리면 다행이었다.
5년간 아델라가 허리 휘게 일하게 된 것도 결국 그 가문 탓이 아닌가. 아니지. 펜베르크 성에서만 5년간이지, 전에도 빚을 갚으며 살아왔을지도 몰랐다. 정말 쳐다보고 싶지도 않은 가문이었다. 귀족만 아니었으면 한 대 치는 건데.
“그리고…… 이거요!”
아델라는 품에서 돈주머니 두 개를 꺼내 떨리는 마음으로 욘제타한테 밀었다.
“응? 빚 갚는 데 쓰려고? 아직 루는 오지도 않았는데?”
“아뇨, 빚 아니고……. 예? 루가 아직 안 들렀다고요?”
“응. 이번 달에도 안 왔어.”
어, 어라. 이상하다. 벌써 오고도 남을 시긴데? 아델라는 혹시 루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 갑자기 걱정되기 시작했다.
“설마 별일 있겠니? 이렇게 늦을 때도 종종 있었잖아.”
원래라면 느긋하게 기다렸겠지만, 이전 회귀 중에 그가 이렇게 늦은 적은 없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왔었다.
그녀의 일생 자체가 바뀌어서 일정도 아예 바뀐 건지, 아니면 그녀의 일생이 바뀐 만큼 루의 일생도 바뀐 건지 알 수 없었다.
“저 다시 들어가고 나서 루가 오면 연락이라도 해 주시면 안 될까요?”
“그거야 쉽지.”
아델라는 애써 안 좋은 생각을 떨치기 위해 노력했다. 별일 없겠지. 그럼, 누구 친군데.
“아, 아까 말하다 만 이건…… 하나는 루가 오면 쓰라고 주셨으면 좋겠고, 하나는…… 아주머니…… 요, 용돈으로 쓰세요.”
첫 월급을 부모한테 드리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뿌듯하면서도 부끄러웠다. 아델라는 쑥스럽지 않은 척 욘제타를 보았다.
“내 용돈?”
“네. 수비병 첫 봉급은 못 드렸잖아요. 저 호위병 돼서 봉급 더 많이 올랐어요.”
“그때 선물 사 왔으면 됐지. 뭘 새삼…… 너한테 쓰지 않고. 빚은?”
욘제타는 아델라가 이걸 다 줘 버리면 그만큼 빚을 못 갚아서 힘들어질까 봐 그것이 걱정이었다. 가문 빚이 상당하다고 들었는데.
“빚은 이제 괜찮아요. 제가 쓰고 싶은 곳에 쓰는 거예요. 늦었지만, 차근차근 은혜 갚고 싶어서요.”
“넌 무슨 얘가 갚고만 사니. 속상하게…….”
아델라는 평생 그렇게 살았기에 다른 방법은 잘 몰랐다. 물론 돈으로만 갚겠다는 건 아니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뒤에는 욘제타와 데이브한테 계획한 것을 말해 볼 참이었다. 양녀에 대해서. 지금은 아델라가 해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아델라가 아무렇지 않게 웃자 욘제타는 더 속상해졌다.
“용돈이라니까 고맙게 받을게. 다음에는 돈 말고 네 근심 걱정 없는 표정을 보고 싶네.”
“그럴게요!”
욘제타는 괜히 뭐라고 하면 아델라가 풀 죽어 할까 봐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런데 빚은 이제 괜찮다니? 각하께서 다 청산해 줬어?”
“그걸 왜 각하께서 청산해 줘요. 다― 방법이 있죠!”
“무슨 방법?”
“실은, 오라버니를 찾았어요.”
“뭐? 너 오라버니가 있었니?”
욘제타는 아델라 가족에 관한 이야기는 아예 처음 들었다. 아버지가 도박과 유흥에 빠져 돈을 흥청망청 쓴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다.
“한…… 10년 전에 집을 나가서 깜깜무소식이던 사람도 오라버니라면 오라버니죠.”
“어쩐지 형제 있다고 말 안 하더라니. 그럼 오라버니가 갚기로 한 거니?”
“비슷해요. 10년 동안 뻘…… 은 아니고, 돈 좀 벌어 놨더라고요.”
밀정하는 대가로 협박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걱정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욘제타는 아델라가 지고 있던 큰 짐 하나가 없어져서 안심했다. 그녀는 아델라한테 고생했다며 다독였다. 이제 그녀의 앞날에 고생 끝, 행복 시작이 펼쳐질 거라고 욘제타는 생각했다.
아델라한테는 아직 고생 끝이 아니었지만.
* * *
아델라는 어쩔 줄 몰라 커다란 방 안에서 서성였다. 소파에 앉았다가도 벌떡 일어나 밖을 내다보았다. 조금 진정이 되면 또 앉았다가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잠옷 바람으로 소파 주변을 빙빙 돌았다. 진짜 무슨 꼭 첫날밤을 지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저녁부터 하녀들이 오더니 목욕을 시키고 향유를 뿌리고 손발톱 정리까지 해주고 얇은 슈미즈까지 입혀 주니, 아무 생각이 없었던 아델라도 가슴이 술렁였다.
분명 그런 관계가 없을 것임을 알고 있어도 말끔하게 준비를 해주니 심장이 콩닥였다. 긴장하고 싶지 않았으나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아델라는 그의 방에서 어떻게 있어야 가장 덜 어색할까 계속 고민했다. 무엇보다 옷이…….
최대한 아무렇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살결이 비치는 옷에 무감각해질 수가 없었다. 정신없이 꾸며지다가 정신을 차리니, 이미 이저드의 방이어서 바꾸고 자시고 할 새도 없었다.
‘이거 어느 모로 보나 진짜 유혹하는 차림새인데. 하고 많은 옷 중에 왜 이런 걸…….’
아델라는 벽에 머리를 살짝 댔다. 이러고 벽을 보고 있을까.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으니 별생각이 다 들었다.
‘각하께는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은데 세상이 도와주질 않네. 망했어…….’
콩콩 벽에 머리를 박던 아델라의 귓가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저드가 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재빠르게 주변을 훑다가 얼른 소파 위로 올라갔다. 가릴 수 있을 만큼 최대한 가리자! 어차피 침대에서 잘 건 아니니까.
탁.
그녀가 몸을 한껏 웅크리고 소파에 앉아 있을 때, 이저드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방으로 들어오자 시종들이 다들 물러났다.
“오, 오셨어요!”
“……뭐 하는 건가?”
아델라가 이저드 쪽은 보지도 않고 소파에 웅크리고 있는 걸 본 이저드가 의아하게 물었다.
“저…… 저 여기서 잘 거니까, 저 신경 쓰지 말고 주무십쇼! 각하께서 이상한 행동을 보이면 꼭 깨워 드리겠습니다!”
역시나 이저드 쪽은 보지도 않고 그녀가 말했다. 그는 아델라가 왜 그러나 싶어 그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헉! 여기로 오시면 안 돼요!”
그녀가 더욱 몸을 웅크리며 외쳤다. 왜 저렇게 필사적인 거지? 긴 머리에 가려 그녀가 웅크리고 있다는 것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어제도 말했지만, 그대를 해하지 않아.”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냥 제가…… 부끄러워서 그럽니다!”
이저드는 아델라의 표정을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빨개져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그 얼굴을 보고 싶긴 했지만 이저드는 아델라가 곤란해 하니 그녀한테 더는 다가가지 않았다.
“알겠네. 안 다가갈 테니, 침대에서 자게. 내가…….”
“아, 안 돼요!”
안 될 건 또 뭔지…….
“아, 아니! 각하를 지켜야 하는 제가 침대에서 자다니요! 감히! 주군을 소파에서 재우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내가 소파에서 잔다는 말은 안 했네만.”
“……예?”
이저드의 예상대로 아델라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드디어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일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그의 입가가 살짝 올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표정만 보다가 그가 조금이라도 웃는 모습을 보니 아까 콩닥거리던 심장은 맛보기였다는 듯 펄떡였다.
“이제 돌아보나. 무슨 문제가 있었나?”
그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지만 그녀한테서는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델라?”
“어헉.”
잠시 심장 좀 다스리고 가실게요. 이름 부르는 건 단둘이 있을 때도 되는 거였나. 치명적인데. 안 되겠는데!
아델라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 이저드는 그녀한테 무슨 문제가 생긴 줄 알고 빠르게 다가갔다.
“끄악! 안 돼요! 옷이 야해요!”
이저드가 가까이 다가오자 정신을 차린 아델라는 다시 몸을 웅크리고 앉으며 소리쳤다. 그제서야 이저드는 우뚝 멈췄다. 자신이 들은 게 맞나 싶어서였다.
그는 아델라의 바로 곁까지 다가와 있었다. 아델라가 조금이라도 외치는 게 늦었다면 봤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속으로 크게 안도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안도가 됐다. 봤으면 큰일 났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는 아델라를 의식적으로 쳐다보지 않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다음부터는…… 신경 쓰라고 이르겠네.”
그의 실수였다.
이저드가 이렇게 침실로 누군가를 부른 적은 처음이라 하녀들이 정말 힘줘서 아델라를 치장했다. 이저드가 미처 신경 쓰지 못한 부분이었다.
“저, 저 안 보셨죠!”
“그래.”
아델라는 그제야 안도했다. 그를 힐끔 올려다보니 그가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렇게 있지 말고, 차라리 이불을 덮지 그랬나.”
“그 생각도 했는데……. 각하의 이불이잖아요……. 더 이상하게 보일까 봐…….”
아델라가 쭈뼛쭈뼛하며 이야기했다. 그는 이쪽이나 저쪽이나 이상해 보이긴 매한가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저드는 미동이 없는 아델라의 기척을 느꼈다. 저 상태로 잘 생각은 아니겠지. 그는 굳었던 자세를 풀고 침대 쪽으로 향했다.
펄럭.
이저드는 침대의 이불을 끌어 아델라한테 건넸다.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한 채로.
“이거 주시면…… 각하는요?”
“난 따로 덮을 게 있으니 걱정하지 말게.”
아델라는 그의 손에 들린 이불을 보다가 조심스레 이불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어색한 기류가 둘 사이에 흘렀다.
‘흡……. 이런 분위기 원한 거 아닌데!’
가깝고도 먼 사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가까워지는 것 같으면 이렇게 한 방에 어색해지다니.
“주, 주무세요…….”
“진짜 소파에서 잘 건가?”
“당연하죠?”
아델라는 물러설 것 같지 않았다. 침대로 가서 자라고 해도 듣지 않을 테지. 하지만 이저드는 그녀 혼자 소파에서 재우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럼 그렇게 하게.”
그렇게 말한 이저드는 옷을 갈아입으러 방 한쪽에 마련된 옷 방으로 들어갔다. 아델라는 그가 작은 방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자 이불을 돌돌 말고 소파에 냉큼 누웠다.
아델라는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잘 수 있을까…….
저쪽에서 들리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애먼 상상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어헙! 미친! 미쳤어!’
아델라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몸을 뒤척였다. 그러곤 의자의 등받이에 얼굴을 박고 머릿속으로 양을 셌다.
그녀가 양을 세는 동안 이저드는 옷을 갈아입고 나와 그녀의 맞은편 소파에 누웠다. 아델라는 자신의 뒤쪽에서 털썩하는 소리가 들리자 설마 하는 마음에 고개를 돌렸다.
“왜…… 왜 여기에 누우십니까?”
“원래부터 여기서 자려고 했네. 문제 있나?”
무, 문제야 너무 많아서 셀 수도 없는데……?
“아까 소파에서 안 주무신다면서요…….”
아델라는 그가 건너편에 누워 있다는 것 하나로 온 신경이 그곳으로 쏠렸다. 그러곤 그를 보지 않으려 소파 등받이를 보고 있던 그대로 다시 얼굴을 등받이에 박았다.
“그건 그대의 시선을 돌리려고 했던 말이야.”
‘그럼, 진짜로 소파에서 주무시겠다는 말씀?’
같은 공간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의식하게 되어 잠이 올까 말까 한데, 바로 옆에서 잔단다. 오늘 밤은 밤샘 확정이었다.
아델라는 이 비좁은 소파에서 자겠다는 그가 이해되지 않았다. 아델라한테는 적당한 너비와 길이였으나 이저드한테는 척 보기에도 불편할 것 같았다.
“불편하실 텐데…….”
“생각보다 편해. 신경 쓰지 말게.”
아델라는 힐끔 그를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불편해 보였다. 아델라한테 적당한 크기니, 그한테는 불편한 크기가 맞았다.
“침대가 더 편하세요…….”
“그 편한 침대, 그대가 가지.”
“저, 전 여기가 편해요.”
“그럼 나도 여기가 편하네.”
아델라가 침대로 가지 않는 이상 그도 움직일 것 같지 않았다.
‘아니, 잠깐. 내가 침대로 가도 각하는 소파에서 잘 게 아닌가?’
“제가 침대로 가면, 각하는 어디서 주무시는데요?”
“여기서.”
그러니까 아델라가 침대에서 자나 소파에서 자나 이저드는 소파에서 자겠다는 말이었다.
“그럼 제가 침대로 옮기나 소파에 있으나 불경죄잖아요.”
“잊고 있는 모양인데, 그대는 지금 내 약혼녀야. 약혼녀를 소파에서 재우는 내가 더 무례한 거 아닌가?”
그녀는 자신이 현재 공작의 약혼녀라는 것을 깜박 까먹었다. 그녀한테 그는 약혼자라기보다는 지켜야 할 주군에 더 가까웠다. 좋아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말이다. 그래서 아델라는 이저드도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는 줄 알았다.
아델라는 그가 그녀를 약혼녀로서 신경 써 주고 있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 이렇게나 자신을 생각해 주는 사람 앞에서 애먼 생각이나 하고 미리 설레발이나 치다니.
그녀는 저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이저드는 정말로 순수한 호의로 자신한테 제안하는 걸 텐데, 자신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것 같았다.
아까도 옷이 야하다고 외치니 시선도 피해 주고 이불도 가져다 줬다. 그의 행동에는 어떤 사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델라는 뒤늦게 자신의 행동을 반성했다.
아델라와 이저드의 사이에서 무언가 일어날 일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하녀들이 치장을 너무 공들여 해 줘서 잠시 마음이 붕 떴다.
그녀는 소란스러운 마음을 차차 진정시켰다. 그러고 보니 그가 곁에 있는 게 떨리긴 했지만 무조건 해야 할 일처럼 느껴졌다. 왜냐하면 그의 이상 행동을 확인하려면 옆에서 보는 게 가장 정확했기 때문이다.
“저…… 각하.”
아델라는 눈을 감고 있는 이저드를 조심스레 불렀다.
그녀의 부름에 이저드가 감았던 눈을 뜨며 그녀를 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보이는 그의 하늘빛 눈동자가 다시금 그녀의 심장을 요란스럽게 했지만 이번만큼은 마음을 다잡았다.
“저희 그냥…… 침대로 갈까요?”
그의 눈썹이 움찔 떨렸다. 저도 아니고 저희라는 말이 같이 가자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어차피 각하의 상태를 확인하려면 옆에 있어야 하기도 하고……. 소파에 이렇게 둘이 누워 있나, 침대에 누워 있나, 크게 차이 없을 것 같아서요. 이왕이면 둘 다 편하게 자는 게 내일을 위해 좋을 것 같고…….”
같이 가자고 할 줄은 몰랐다. 이저드는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아델라와 시선을 맞췄다. 그녀의 눈빛은 티 없이 맑았다.
“……진심인가?”
“네. 각하께서 여기서 불편하게 주무시는 것보단 그게 나을 것 같아요.”
정말 큰맘 먹고 내린 결정이었다. 불편해도 자신만 불편해야지, 협력해 주는 이저드가 불편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저드는 그녀가 자신한테 어떤 마음도 없이 내뱉은 말임을 알았지만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왜 아델라의 한마디에 혼란스러워하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대는 날 너무…….”
믿는 거 아니냐고 말하려다가 이저드는 자신의 말이 모순됐음을 깨닫고 입을 닫았다. 분명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을 거다, 해하지 않을 거라고 말한 것은 자신이었는데.
“각하를 너무?”
“아무것도 아니네. 그대가 먼저 가.”
“저 먼저요?”
“그 상태로 걷기 힘들 거 아닌가. 안 볼 테니 편하게 걸어가게.”
아, 그렇지.
아델라는 이저드가 시선을 돌리자 꾸물거리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칭칭 동여맨 이불이 거추장스럽긴 했지만 못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도도도 걸어서 널찍한 침대로 향했다. 그러곤 침대 끝에 몸을 뉘었다.
“가, 각하! 이제 오셔도 돼요!”
이저드는 복잡한 마음을 뒤로하고 자신의 침대로 향했다.
서너 명은 누워도 될 만한 침대의 끝만 차지하고 누운 아델라를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최대한 침대 끝에 붙어 0.5명분 칸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게 귀여워 보여서 자신이 미친 건가 싶었다. 그러면서도 조금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그녀의 태도를 봤을 때 정말로 그녀는 이저드에 대한 마음이 1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면…… 편하나?”
“네! 저 원래 이렇게 잡니다. 각하께서도 얼른 누우세요! 편히 주무십쇼!”
보는 사람은 그녀가 당장이라도 침대 밑으로 떨어질 것 같았지만 당사자가 편하다니까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 잘 자게.”
“먼저 주무세요! 전, 혹시 모를 일을 확인해야 하니까…….”
“알겠네.”
대답은 잘 했지만 잠을 청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건 아델라도 마찬가지였다. 뜬눈으로 밤을 새울 각오로 침대를 선택했던 것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이상한 현상이 뭔지 꼭 확인하고 말리라.
둘은 그렇게 눈을 감았다.
<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