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부 2장. 그녀는 잡고 싶다 (3/17)

1부 2장. 그녀는 잡고 싶다

“괜찮겠습니까?”

린다가 아델라를 데리고 신나게 집무실을 나가고 그녀들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어둠 속에 있던 누군가가 천천히 이저드의 곁으로 걸어 나왔다. 긴 푸른빛 머리를 하나로 묶은 흑안의 남자가 이저드한테 고개를 숙였다.

“아델라 경의 신분을 듣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어둠에서 나온 이는 아리스였다. 그는 수비 대장임과 동시에 하급 수비병 훈련 교관이었고, 아델라의 남모를 스승이었다. 그 ‘남’에는 본인도 포함되었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어쨌든 그는 아델라의 비공식 스승이었다.

“아델라 경의 신분을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네. 아까 봤지 않나. 제 신분은, 이라고. 아마 내가 굳이 수고하지 않더라도 곧 알 수 있을 거야.”

“꾸며 낸 신분이면 어쩌시려고…….”

“호위병 안에서 과연 꾸며 낸 신분이 단 한 명도 없을 것 같나? 경도 처음에는 나한테 제대로 말하지 않았잖은가.”

아리스는 자신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혹시…… 저한테 앙금이 남아 계십니까? 그래서 절 따로 부르신 겁니까?”

“나한테 앙금 남길 만한 일을 했나?”

“……그건 아닙니다.”

아리스는 순간 아, 말렸구나 하고 생각했다. 자기 무덤을 자신이 판 격이었다.

“나는 경한테 과거를 따지려고 부른 게 아니라 경의 감은 어떤지 궁금해서 부른 거네.”

“제 감이요?”

“그래. 아델라 경에 대해.”

아리스는 방금 나간 아델라에게 의심되는 점은 없는지, 위협이 될 존재인지, 믿을 만한지 등등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생각 끝에 그가 다다른 결론은 아델라를 받아들여도 괜찮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참 이상하게도 아리스는 아델라의 첫인상이 호감에 가까웠다. 외모 때문은 아니었다. 이저드나 헤이든을 처음 봤을 때도 아리스는 그들을 믿지 못해서 초반에는 거짓말을 했으니까.

아리스는 겉으로 보이는 인상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지는 않았다. 그건 그의 습관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그는 일단 모든 사람을 심하게 경계하고 봤다.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 왜 그런 느낌이 드는지는 설명해 드리기 어렵습니다.”

이저드는 조금 놀랐다. 겉으로는 티가 하나도 안 났지만 이저드는 아리스의 반응이 확실히 놀랍고 신기했다. 아리스한테서 처음 본 이에 대해 이렇게나 관대한 의견이 나온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의심되는 점이 아예 없지는 않지만 걱정할 정도의 인물은 아닌 듯 보이고, 어디까지나 감입니다만, 각하께 위협이 될 존재는 아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참 신기하군. 경을 포함해서 벌써 셋이나 아델라 경을 괜찮게 평가하고 있어.”

린다와 헤이든, 아리스까지 아델라에 대해 좋은 평가를 하고 있었다. 사실 주변에서 이렇게 좋은 평가를 내리면 이저드는 균형을 잡기 위해서라도 반대의 시선으로 아델라를 봐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 대한 평가를 조금 뒤로 미루기로 했다.

앞으로 그녀를 알아갈 시간은 많았다. 그러니 섣부른 판단을 내리고 싶지 않았다.

“경의 의견 잘 들었네. 고맙군.”

“아닙니다. 근데…… 헤게이든 영애는 어찌하실 겁니까? 이번에는 도를 넘은 것 같습니다. 린다 경이 아무리 아랫사람이라 한들, 세이즈 백작가의 며느린데요…….”

“세이즈 백작 귀에 들어가면 백작이 가만있지 않겠지.”

가만히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주 난리가 날 거다.

“그러한데…….”

아리스는 조심히 물으려다 공작의 의도를 파악하고 질문을 바꿨다.

“설마 영애께서 일을 치길 기다리신 겁니까?”

“내가 예언가도 아니고 영애가 사고 칠지 어떻게 알았겠나? 그저 내 사람들을 건드리는 걸 용서할 수 없을 뿐이네.”

이저드의 대답에 아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아리스도 마찬가지였다.

“약혼녀가 바뀌실지도 모르겠군요.”

“바뀌더라도 왕실에서 붙인 사람일 테지.”

이저드는 공작 부인이 누가 되든 상관없었다.

그가 미래의 부인한테 바라는 것은 아슬아슬하게 이어 가고 있는 이 평화를 깨지 않아 주는 것뿐이었다. 자신의 사람들을, 성주민들을, 자신한테 남아 있는 것들을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약혼녀가 누가 되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저드가 원하는 선을 지켜 준다면 미래의 부인이 왕실의 첩자든 뭐든 눈감아 줄 수 있었다.

마티나가 아랫사람 훈육이랍시고 린다한테 손을 댄 것만 아니었다면 이저드는 약간의 실수는 모른 척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정말 큰 실수를 저질렀다.

마티나 본인은 모르고 있는 듯했지만 그녀가 린다를 적대 관계에 둠으로써 많은 이들이 그녀한테 등을 돌렸다. 펜베르크 성에서 그녀를 감싸 줄 사람은 이제 그녀가 데려온 시녀들과 하녀들뿐이었다.

* * *

“왜……! 왜! 왜애!”

와장창! 쨍그랑!

밖에서는 보는 눈이 많아 터트리지 못한 화를 그녀는 애꿎은 화병에 풀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티 테이블에 있던 모든 식기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왜! 왜 그 여자만! 왜 그 여자만 특별한 거야, 왜!”

린다를 다른 여자들처럼 돌같이 봤다면 마티나가 이 정도로 화가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마티나의 생각이었지만. 린다가 아니라도 그가 챙겨 주는 여자가 있다면 마티나는 똑같이 투기했을 것이다.

“아가씨, 몸 상하세요. 그 여자는 괘념치 마세요. 아가씨가 훨씬!”

“알아! 내가 훨씬 예쁘고 아름다운 거! 근데 왜, 왜 각하께서는!”

처음에는 정략결혼이란 게 다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가문 유지를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마티나도 남편의 애정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녀한테는 공작 부인이라는 그 직함이 더 중요했으니까.

분명 이저드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이저드를 만나고 그녀의 모든 생각은 바뀌었다. 마티나는 그와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꿨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그런 생활을.

거래로 맺어진 계약 결혼임을 알면서도 마티나는 기대했다.

그녀는 혼자 기대하고 혼자 실망하고 혼자 사랑하고 혼자 좌절했다. 지칠 만도 한데, 이저드의 얼굴만 보면 또다시 이런 감정이 반복됐다.

“그 여자…… 치우고 싶어. 그를 쳐다보지도 못하게 하고 싶어!”

그녀는 보답 받지 못하는 마음을 풀어야 했다. 곧 부부가 됨에도 자신한테 선을 긋는 그의 행동에 이유를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 자신이 비참해지지 않았다. 그래야 자신이 당한 이 굴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여자 주변 인물들에 대해 알아낼 수 있는 거 다 알아 와. 다! 하나도 빠짐없이!”

“네, 아가씨.”

안타깝게도 그녀는 방금 자신의 명줄을 줄이는 명령을 내렸다. 아델라가 회귀하는 동안에 한 번도 벌어진 적 없는 일이 하나 더 생기게 된 것이다.

* * *

아델라는 믿기지 않아서 몇 번이나 눈을 깜박이며 린다의 뒤를 따랐다. 그녀는 주변의 모든 것이 신기했다. 이번 생에서 여기까지 오게 될 줄은 몰랐다. 상급 수비병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했던 게 한 달 전이었다.

“저쪽에 담장 보여? 저기서부터는 각하께서 주로 활동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함부로 들어갈 수 없어. 실수로라도 저쪽으로 넘어가지 마. 저쪽만 안 넘으면 다른 곳은 어디든 출입 가능해.”

린다가 가리킨 곳에는 허리 정도까지 오는 돌담이 있었고, 돌담 위로 철제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그곳에는 하얗고 붉은 장미가 울타리를 감싼 상태로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담장 너머에는 장미 말고도 형형색색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아델라는 린다를 쫓아가다 말고 멈춰 서서 잘 가꿔진 담장 너머의 정원을 바라보았다.

‘봄이었구나…….’

과거에는 빚을 갚느라 바빠서 봄을 느낄 여유가 없었고, 최근에는 회귀에 회귀를 거듭하느라 계절을 느낄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을 조금 더 눈에 담고 싶었다. 앞으로 또 언제 이런 기회가 주어질지 몰랐다.

“왜?”

“그냥, 봄이구나 싶어서요.”

봄이 된 지가 언젠데……?

린다는 당연한 말을 하는 아델라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항상 반짝이던 아델라의 황금빛 눈동자가 오늘만큼은 가라앉아 있었다. 회상에 잠긴 것 같지는 않은데, 화려하게 핀 꽃들을 보는 눈은 어딘가 아득해 보였다.

“가요, 교관님.”

“린다 경.”

“맞다. 린다 경!”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온 아델라를 보며 린다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몸을 돌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저쪽으로 보이는 곳이 훈련장.”

린다는 호위병들이 활동하는 이곳저곳을 친절히 알려 줬다.

“그리고…… 여기가 네 방. 들어가 봐.”

호위병들은 수비병들과 다르게 개인실이었다. 아델라는 완전히 달라진 생활환경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수비병 숙소도 깔끔해서 괜찮았는데, 호위병 숙소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방 안은 그야말로 만지기도 황송할 정도의 값비싼 물건들로 채워져 있었다. 벽지와 벽난로, 침대, 책상, 장식품 등등 모든 게 고풍스러웠다.

관리도 어찌나 깔끔하게 잘 되어 있는지 아델라는 방에 들어가는 것조차 겁이 났다. 잘못하다가 흠집이라도 나면 어쩌지? 평생 일해도 못 갚을 것 같은데!

“뭐 해? 안 들어가고?”

린다의 말에 정신을 가다듬고 안으로 한 발짝 한 발짝 내디뎠다.

“책상 위에 보면 네 신분패가 있을 거야. 꼭 소지하고 잃어버리면 헤이든이나 각하께 말해.”

“신분패요? 제 신분패요?”

“그럼 누구 신분패겠어? 저택 내 부지 출입은 무조건 신분패가 있어야 해. 나중에 휴가 나갔다가 신분패 잃어버리면 못 들어오니까 간수 잘 하고.”

아델라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신분패를 집어 들었다.

앞에는 공작가 가문을 나타내는 사자 문양이 그려져 있었고, 뒤에는 ‘호위대 소속 아델라’라고 정자로 또박또박 새겨져 있었다.

‘신분…….’

펜베르크 성에 정착한 지 5년 만에 얻게 된 신분증이었다. 이제 이것만 있으면 귀찮게 욘제타를 조르지 않아도 될 것이다. 누군가의 신원 증명으로 자신의 신원을 밝히는 것이 아닌, 자기 스스로 신분을 증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녀는 감회가 새로워 신분패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저, 그런데…… 린다 경.”

“응?”

신분패를 유심히 보던 아델라가 불안한 눈빛으로 린다를 바라보았다.

“이거 제가 받아도 될까요? 저 각하께 신분 안 밝혔는데…….”

얘가 왜 갑자기 심각해졌나 했더니. 그녀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아델라가 웃겨서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린다는 정직한 그녀가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크흡!”

“저 지금 심각합니다. 이거 잘못 받았다가 사기꾼 되고 그런 거 아니겠죠?”

그럼 다시 리셋 해야 하잖아!

“신분패 가지고 사기 칠 생각이야?”

“그건 아니지만……”

“별걱정을 다 한다.”

신원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사람의 뭘 믿고 이렇게 아무것도 안 묻는 걸까? 아델라는 린다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린다 경은 제가 사기꾼이나 범죄자나 스파이나 그런 거면 어쩌시려고 태평해요?”

“나한테 사기 치면 죽고, 범죄자면 제압하면 되고, 스파이면 죽이면 되고.”

세상 이렇게 간단할 수가!

하지만 여태 린다의 실력에 당해 온 아델라는 그녀의 대답을 일정 부분 납득할 밖에 없었다. 게다가 생각해 보니 공작도 전장의 사신이라고 불리는 사람이었다.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다.

아델라는 뒤늦게 자기가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초반부터 몰아세우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야. 조금씩 호위대에 동화되게 한 후에 솎아 내는 게 더 효과적이지.”

“그 방법을 왜 저한테 다 말씀하십니까?”

“긴장하라고.”

린다는 장난으로 한 말이었지만 아델라는 살짝 오한이 들었다.

“쫄기는, 농담이다. 오늘 일정은 다 끝났으니 쉬어.”

그 말에 아델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끝났다.

린다가 방에서 나가자 아델라는 골똘히 생각했다. 자신의 처지를 말하고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감내해야 할지, 그냥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 전쟁에 참여할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은 쉽게 정리됐다.

지금 그녀한테 중요한 건 전쟁에서 승기를 잡아 죽지 않는 거였다. 그녀는 오로지 그 목적 하나만 생각하기로 했다.

* * *

호위대로 옮긴 첫날부터 운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어떻게 만나기 껄끄러운 사람을 아침 댓바람부터 만나냐.

아델라는 멀리서 봐도 튀는 머리색을 지닌 남자를 보고는 바로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여! 또 보자고 했더니 우리 또 만났네?”

뭐 이렇게 빨라? 결코 느린 걸음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벤슨은 금방 아델라를 따라잡았다.

“어땠어? 각하를 본 소감은?”

아! 그러고 보니 어제 신분 때문에 머리 싸매고 고민하다가 앞으로 이저드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생각도 못 했다. 지금이라도 이미지 트레이닝을 해야 하는 건가.

‘아니지? 아니야. 그때의 감각이 착각일 수도 있잖아? 그 와중에 심장이 뛴다는 게 말이 돼? 처음 만난 사람인데? 엄청 멋있긴 했지만……. 그, 그냥 각하를 만난 게 기뻤던 거야. 그래, 이제 좀 희망이 보여서 기뻤던 거지! 암.’

그렇게 생각하자 아델라의 마음은 다시 차분해졌다.

수많은 회귀를 통해 배운 것이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정신을 다잡을 수 있게 됐다는 점이었다.

“멋졌어요.”

“……그게 다야?”

기대한 반응이 아니어서 벤슨은 약간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요?”

“흐음…….”

벤슨은 아델라의 생각을 읽어 보려는 듯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았지만 아델라의 평상심은 무너질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주춤하던 그는 이윽고 아무렇지 않게 화제를 전환했다.

“근데 아델라 경.”

“왜요?”

아델라는 벤슨을 쳐다보지 않고 대꾸했다.

“우리 훈련장 가는 길은 이쪽이 아닌데?”

“저도 알아요. 이쪽 아닌 거.”

“그럼?”

“숙소에 두고 온 게 생각나서.”

아델라는 조금 더 빠른 걸음으로 벤슨을 지나쳤다.

“각하께서는 훈련 시간 안 지키는 걸 가장 싫어하셔.”

아델라는 그 말에 하는 수 없이 우뚝 멈춰 몸을 빙글 돌렸다. 이건 어디까지나 첫날부터 밉보이지 않기 위한 행동이었다. 아델라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벤슨은 그런 아델라를 보며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얄밉기 짝이 없는 표정이었다.

“오해하지 마시죠? 첫날에 밉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거니까.”

“응, 응. 그렇지. 그럼. 그래, 찍히면 안 되지.”

뭐지. 완전히 놀림당하는 것 같은 이 기분은?

아델라가 걸음을 옮기자 벤슨도 그녀의 보폭에 맞춰 걸었다. 그녀는 자기 옆에 선 벤슨을 힐끔 보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장갑을 꼈네?

“신경 쓰여?”

아델라는 정말 잠깐 시선을 돌린 거였는데, 벤슨은 그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아델라의 시선이 닿은 곳을 포착했다.

“아…… 죄송합니다, 벤슨 경. 손목을 볼 생각은 없었어요. 저번에 봤을 때 잠깐 눈에 들어와서.”

그의 손목에서 보였던 것이 무엇인지 아델라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손목이라고 뭉뚱그려 말했다. 벤슨은 아델라의 대답에 고개를 살짝 모로 기울이면서 픽 웃었다.

“죄송할 것까지야? 그냥 흉터야. 나한테는 꽤 영광스러운.”

아델라는 그의 말에 대꾸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누구나 남모를 사정 하나쯤은 있는 거 아닌가.

아델라는 좀 많아졌지만.

“더 안 물어?”

“더 물어야 합니까?”

“아델라 경은 나한테 관심이 눈곱만큼도 없구나.”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관심을 운운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델라는 태연한 표정으로 계속 걸으면서 답했다.

“있어야 합니까?”

“있게 될 걸?”

“없을 걸요?”

“장담하건대 있게 될 거야.”

이건 신종 수작질인가?

“제가 초면에 이런 말 드리기 좀 그런데…….”

그녀는 뒷말을 줄이며 벤슨한테 가까이 와 보라고 손짓했다. 그에 그가 순순히 아델라의 뜻대로 허리를 숙여 그녀한테 다가갔다. 아델라는 가까이 다가오는 벤슨한테 귓속말로 작게 중얼거렸다.

“개수작 부리지 마세요.”

이런 일 한두 번 당해 보는 줄 아나.

아델라는 굳어 있는 벤슨을 내버려 두고 새치름하게 훈련장으로 향했다. 사라지는 그녀를 눈으로 쫓던 벤슨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큭큭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 * *

“이야! 아델라 경? 와! 밝은 곳에서 보니까 엄청 미인이네.”

“이렇게 만나서 반가워.”

“호위대에 온 걸 환영한다.”

뭐, 뭐야. 뭐야, 뭔데.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들이 아델라에게 쉴 틈 없이 말을 걸며 인사를 해 왔다.

“네가 그……. 결국 호위대까지 왔구나?”

“잘 부탁한다.”

누가 누군지도 모르는 와중에 여기저기서 인사를 해 오니 아델라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중간 중간 자기소개도 하는 것 같았지만 아델라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호위병들 틈에 휩싸여 연신 인사하기 바빴다.

“네. 아델라라고 합니다. 네, 아델라…… 제가 아델라…….”

이런 걸 두고 정신이 사납다고 하나? 여기저기에서 말을 걸어오니 이 사람한테 인사를 하다 말고, 저 사람한테 인사를 하고, 또 다음 사람, 그다음 사람…….

왜 이렇게 아는 척하는 사람이 많은 건지!

호위병이라서 군기가 엄청 잡혀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여서 놀랐다. 상급 수비병을 포함해서 모든 수비병은 훈련에서 누군가와의 잡담을 금했다. 그런데 호위병들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델라가 호위병들과 정신없이 인사를 나누는 중에 탁 트인 훈련장 앞쪽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언제 나타난 건지도 모르게 정말 조용히 나타났는데도 그가 나타나자 아델라한테 말을 걸던 많은 이들이 빠르게 대열을 맞춰 섰다. 일사천리로 흩어지는 모습에 아델라도 눈치껏 남는 자리에 가서 섰다.

그녀는 대열 앞쪽에 나타난 이를 보려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그 역시 원래부터 그녀를 보고 있었다는 듯이 두 시선이 단번에 마주쳤다.

‘착각은 개뿔…….’

고고하게 빛나는 하늘색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아델라는 꼼짝없이 그에게 시선이 사로잡혔다.

어떻게 사람 눈동자가 저런 색을 띨 수 있을까? 꼭 맑고 쾌청한 하늘을 담아 내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그의 눈동자를 홀린 듯 보다가 마른세수를 했다.

‘아냐. 안 돼. 혹하지 말자. 저건 그냥 눈일 뿐이다. 그냥 아름다운 눈일 뿐이야.’

그리고 그는 자신이 구해야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괜히 사랑 같은 것에 빠져서 멍 때리다 일을 그르치면 안 된다. 그럼 또 생을 반복해야 한다. 다시 죽을 생각을 하면 없던 정신도 저절로 차려졌다.

‘저건 목이다, 목이야. 잘생긴 목……. 목을 구해야……. 아, 아니지. 목과 몸뚱이가 잘 붙어 있게 해야 하는 사람! 좀 잘생긴! 조, 조금 많이?’

“―이상. 훈련을 시작하지.”

으응?

아델라가 마른세수를 하며 고개를 박고 있는 동안 훈련에 대한 설명은 끝났다. 그녀는 당황스러운 눈으로 다시 이저드를 보았지만 그의 시선은 이제 아델라한테 향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이 대련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멍하니 보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델라와 떨어진 곳에서 얄밉게 웃는 벤슨이 잠깐 눈에 들어왔지만 미소가 너무 얄미워서 애써 고개를 돌렸다.

“경.”

“……!”

저음의 목소리가 조용히 아델라를 부르자 그녀는 흠칫 몸을 굳혔다.

“경은 이쪽이야.”

인생은 실전이라는 걸까. 아니면 이저드의 외모에 한시라도 빨리 적응하라는 걸까. 훈련 첫날부터 이저드와 대련하게 생겼다.

그녀를 조용히 부른 이저드는 그녀한테 검을 쥐여 주었다.

“경의 모든 능력을 동원해서 날 베게.”

“네……?”

린다한테 자기를 쓰러뜨려 보라는 이야기는 들어 봤어도 베라는 이야기는 처음이었다. 그것도 진검을 쥐여 주고.

아델라는 놀란 눈으로 이저드를 쳐다보았다.

“날 죽일 생각을 하고 덤벼도 좋네.”

“네에?”

그쪽을 살리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사람한테 그런 상상을 하라니……!

아델라는 당혹스러운 마음에 검을 검집에서 꺼내지 못하고 주춤했다. 이저드는 그녀가 검을 뽑을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추가로 경이 오늘 나를 상대로 검을 휘두르지 못 하면 될 때까지 나와 이곳에 있어야 할 거야.”

잠시 동안 그것도 나름 괜찮은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하던 아델라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신의 목적을 이렇게나 쉽게 망각하다니.

아델라는 고개를 좌우로 몇 번 저었다. 그러곤 말똥말똥해진 눈으로 이저드를 마주 보았다.

다른 곳에 한눈을 팔고 있을 시간이 없다. 최대한 짧은 시간 내에 그의 신뢰를 얻어야 했고, 그의 옆에서 그가 죽은 이유, 더 나아가 이 나라가 망한 이유를 알아내야 했다.

스릉.

날카롭게 벼린 검날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녀는 검을 뽑자마자 이저드에게 달려들었다.

* * *

다행히도 이저드와의 대련은 무사히(?) 마쳤다.

린다와는 다르게 이저드는 무조건 검으로 패지는 않았다. 다만 아델라가 지칠 때까지 그녀의 검을 피해 다녔다. 덕분에 아델라는 칼날이 스치지도 않는 상대로 헛방질만 해야 했다.

심지어 그는 검집에서 검을 꺼내지도 않았다. 그에 오기가 생긴 아델라는 점심시간이 다 지나간 줄도 모르고 그에게 맞섰지만 끝내 그의 털끝도 스칠 수 없었다.

결국 쉬지 않고 검을 휘두르던 아델라가 체력을 모두 소모하고 나서야 대련은 끝났다.

“허억! 하아! 후아!”

흙바닥에 엉망으로 뻗은 아델라를 보던 이저드는 대충 시간을 가늠했다. 정말 오래 버틴 편이었다. 다른 호위병들에 비해 거의 2배의 시간을 버텼으니까.

그는 그녀의 저력이 참으로 궁금했다. 한 달 전부터 그랬다. 어째서 자기 몸을 생각하지 않고, 모든 체력이 고갈될 때까지 훈련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저렇게 계속 자기의 뼈와 살을 깎으면 결국 수명이 줄어들 텐데…….

그녀는 꼭 목숨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이 자신을 몰아세웠다. 과거의 린다가 열정을 가지고 훈련에 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린다는 자신의 한계를 알고 꾸준히 체력과 실력, 기술을 늘렸다면, 아델라는 자신의 한계 따위 모르고 상관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한 번에 남은 수명을 쏟아붓는 느낌이었다.

훈련에 열정적이고 성실한 것은 좋지만 이렇게 몸을 쓰다가는 오래 버티지 못할 터였다.

“아델라 경.”

“후우, 하아, 네, 네!”

“경은 내일부터 쉬게.”

뭐, 뭣?

거친 숨을 몰아쉬던 아델라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급하게 몸을 일으켜서 현기증이 일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놀란 눈으로 이저드를 쳐다보았다.

“왜, 왜입니까?”

아델라는 순간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대련을 잘 못 했나? 실력이 너무 형편없었나? 체력이 부족한가? 이대로 호위대 첫날부터 잘리게 되는 건가? 또 전쟁이 터질 때까지 손 놓고 구경만 해야 하나?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앞으로 경은 하루 훈련하고 하루는 무조건 쉴 거야. 내일부터는 내가 나오라고 할 때까지 푹 쉬었으면 좋겠군. 이 기간에는 추가 훈련도 허용하지 않네.”

“그 말은…….”

잘리지는 않았다는 이야기였기에 그녀는 금방 화색을 되찾았다.

“네!”

기분 좋게 답했지만, 뒤늦게 왜 이저드가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 궁금증이 일었다.

“저, 그런데…… 왜요?”

“경은 지금 경의 몸이 어떤 상태인지 잘 모르는군. 왜 그렇게까지 혹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호위대에 들어온 이상, 경의 몸은 경의 것만이 아니네.”

아델라는 여태까지 그녀가 자신의 몸을 한계까지 몰아붙이고 있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지 못했다. 알아내야 할 일은 많았고 시간은 촉박했다. 그래서 그녀는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렸다.

이저드의 대답을 들은 아델라는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만 깜박였다.

“오늘 일정은 여기까지 하고 끝내지. 숙소로 돌아갈 수 있겠나?”

“예…… 예, 예. 그 정도야…….”

어쩌면 그가 베푼 배려는 상사로서 당연한 행동일지도 몰랐다. 아, 아니다. 아마 상사로서 베푼 당연한 행동이다. 틀림없이 그거다.

여기서 착각하게 되는 순간, 아델라는 벤슨이 말한 ‘포부도 좋고, 기세도 좋았던’ 이들 중 하나가 될 것이다. 헛소리라고 치부했던 벤슨의 조언이 이제야 또렷하게 가슴에 박혔다.

“그럼 일어나게.”

이저드가 바닥에 앉아 있는 아델라한테 손을 내밀기 위해 다가가자 아델라는 스스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오늘 훈련 감사했습니다! 저 먼저 들어가 봐도 되겠습니까?”

여기 더 있다가는 자기도 모르게 대놓고 자리에 앉아 이저드를 구경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하게.”

이저드의 허락이 떨어지자 아델라는 누구보다 빠르게 훈련장에서 벗어났다. 저렇게 뛸 기운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그녀를 일으켜 주려던 이저드는 멀어지는 아델라를 보며 허무해진 손만 쥐었다 폈다.

* * *

오늘은 마가 꼈나……. 그렇지 않고는 만나기 껄끄러운 사람을 하루에 둘이나 만날 리가 없었다.

벤슨한테는 약점이 잡히더니, 이번에는 마티나인가……. 아델라는 이제야 확신했다. 자기가 운이 더럽게 없다는 것을.

“그쪽이 아델라 경?”

아델라는 자신의 건너편에 앉아 있는 마티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그럼 그쪽은 헤게이든 영애?”

똑같이 되받아쳐 주는 아델라를 보던 마티나는 애써 웃었다. 누가 린다의 제자 아니랄까 봐.

마티나는 아델라를 위아래로 훑었다. 린다만 문제가 아니라…… 아델라도 떼어 내야 할 사람 중 한 명 같았다.

일단 그녀는 너무 예뻤다. 진갈색 머리를 잔머리 없이 한껏 틀어 올렸음에도 커다란 눈과 또렷한 이목구비가 절대 죽지 않았다. 마티나와 닮은 듯 닮지 않은 황금빛 눈동자는 아델라의 환한 얼굴을 더 빛나게 해 줬다. 아무리 재고 따져 봐도 아델라한테 흠은 별로 없어 보였다.

마티나가 그나마 찾아 낸 아델라 외모의 단점은…… 피부색 정도? 그것도 도자기처럼 아주 하얀 마티나보다 조금 어두운 정도였다.

“절 알고 있다니 얘기가 쉽겠네요.”

마티나는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기 위해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아델라의 미모가 어떻든 간에 그녀는 제게 있어 사용하고 버릴 패였다. 그럼 저절로 공작한테서 멀어질 것이다.

“무슨 이야기요?”

“아델라 경한테 부탁이 있어요.”

“저한테요?”

아델라는 바로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마티나가 자기를 부를 이유는 그것밖에 없는 것 같았다.

“네, 공작가 안주인이 될 사람으로서 부탁이에요.”

이 말은 명령이니까 거절할 생각 하지 말라는 경고구나.

마티나는 자신의 목적을 빙빙 돌리지 않고 직접적으로 아델라한테 전달했다.

“린다 경의 일거수일투족을 나한테 보고해 줘요. 각하한테는 말하지 말고요.”

아델라는 그녀의 부탁을 대충 예상한 듯 표정 변화가 없었다.

“경이 이 일을 해 주면 부와 명…….”

“예, 할게요.”

“……네?”

아델라는 부탁을 빙자한 무리한 명령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너무 흔쾌히 답해서 마티나가 오히려 당황했다. 좀 더 구슬리고 협박해야 넘어올 줄 알았는데 당사자가 너무 쉽게 오케이를 한 것이다.

“어차피 제가 여기서 거절하면 곱게 보내실 생각 아니었잖아요.”

아델라는 힐끔, 마티나의 방을 지키는 두 거구의 사내를 보았다. 그녀는 그들이 뿜어내는 살의만큼은 완벽하게 읽고 있었다. 죽음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 그녀로서는 어쩌면 너무나 당연했다.

“내일부터 린다 경에 대한 보고를 드리죠. 누구한테 드리면 되죠?”

“그…… 저한테…….”

역시나 아델라가 너무 쉽게 허락해서 얼떨떨한 상태였던 한 하녀가 손을 들었다.

“매일 만나는 장소는요?”

“제가 호위대 숙소 근처 정원으로 갈 테니, 울타리 너머로…….”

“시간은요?”

“자, 자정입니다.”

“알겠어요. 그럼 전 이만 가 봐도 될까요?”

방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어벙하게 있을 때 아델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티나한테 고개를 숙였다.

“아, 아델라 경?”

“네.”

“뭘 얻고 싶다거나 필요한 걸 말해요. 내가…….”

“아뇨. 딱히 없습니다. 죽이지만 말아 주세요. 전 여기서 계속 돈을 벌어야 하거든요.”

아델라는 태연하게 웃으며 다시 고개를 숙였고, 마티나는 예쁘게 웃는 아델라를 멍한 표정으로 보았다. 모두가 방심하고 있는 틈에 아델라는 두 거구를 무사히 지나 방 안에서 나왔다.

‘어째 일이 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데? 지난 회귀 때도 마티나가 린다 경한테 이렇게까지 했나?’

아델라는 린다와 마티나를 마주한 것도, 호위대에 들어온 것도, 공작을 만난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처음 접하는 상황과 전개에 그녀는 이게 어떻게 굴러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기한테 정말 정보라고 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생이 어떻게 될지 몰랐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길 원했다.

아델라는 마티나가 있던 방을 한번 돌아보고 아까 시녀를 따라왔던 길을 기억으로 더듬어 밖으로 나왔다. 밖은 보름달이 환하게 떠서 저택과 저택의 정원을 비추고 있었다.

아까 오면서 잠깐 봤는데 저택은 정말 컸다. 건물도 여러 개여서 자칫하면 길을 잃기 쉬웠다.

‘하루가 왜 이렇게 긴 것 같지? 가서 쉬고 싶네…….’

그녀는 정갈하게 정돈된 정원을 눈에 담으며 피곤한 발걸음을 옮겼다.

* * *

같은 시각 마티나는 의문이 가시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 여자랑 친하다는 말이 사실 맞아?”

“한 달 동안 그 여자가 아델라 경을 제자로 키웠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끼고돌았다고…….”

“근데 저 태도는 뭐야? 미련도 없어 보이는데?”

“그건 저도 잘…….”

시녀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마티나의 눈치를 살폈다.

“아, 그러고 보니 그 여자가 아델라 경을 혹독하게 굴렸다고도 듣긴 했는데…….”

“혹시 그 여자가 눈치챈 거 아니겠지? 그래서 먼저 선수를 친 건?”

“그렇다고 한들 증거는 없애면 됩니다. 고작 평민 아이 하나일 뿐이니.”

처음부터 그럴 생각으로 아델라를 부르긴 했지만 그녀가 너무 쉽게 수락해서 마티나는 어째 찝찝했다. 아델라의 당당한 태도도 마음에 걸렸다. 다른 뒷배가 있는 건가?

“아까 왔다 간 여자, 제대로 조사해. 돈이면 다 한다고 하더니…… 목숨만 살려 달라니? 찝찝해.”

“아니면 내숭일지도 모릅니다. 처음부터 돈을 달라고 하면 속보이니까 아가씨한테 잘 보여서 훗날 더 많은 것을 받기 위해 그런 말을 했을지도 몰라요.”

마티나의 방에서 이런저런 추측이 난무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수락할 당시 아무 생각이 없었다. 진짜다. 정말로 아델라는 아무 생각 없이 수락한 거였다.

어차피 전쟁이 터지면 다 말짱 도루묵인 것을…….

아델라에게 마티나는 두 달 뒤면 질투고 계략과 음모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사라질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때까지 아델라는 마티나의 운명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물론, 아델라 자신의 운명도.

* * *

“아델라 경, 각하께서 부르십니다.”

어라? 뭐야? 벌써 들켰나? 마티나랑 만난 지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

“네? 자, 잠시만이요!”

아델라는 이제 막 훈련복으로 갈아입으려다 동작을 멈추고 잽싸게 다시 제복을 껴입었다.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확인하고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시종이 대기하고 있었고, 아델라는 그를 따라 어젯밤에 한 번 가 본 공작가 저택에 들어섰다. 밤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밤에는 미처 보지 못했는데, 건물 외벽도 안과 마찬가지로 고풍스럽고 웅장했다.

“각하, 아델라 경을 데려왔습니다.”

“들라.”

시종이 문을 열어 주자 아델라는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부르셨습니까, 각하.”

“거기 앉게.”

이저드는 아델라를 한번 보고는 계속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명대로 푹신한 소파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오늘 훈련하려고 했나?”

귀신인가. 어떻게 알았담.

“하려고 했군.”

그건 또 어떻게 알아냈담? 나름 표정 관리에 힘썼는데.

“그래서 불렀네. 한시라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몸을 움직이고 싶거든 오늘 내 호위를 맡게.”

“각하의 호위요? 제가요?”

“그래. 어려운 일은 아닐 거야.”

“그래도…… 호위로서 주의 사항이나 기본 교육 같은 건 받지 않습니까?”

“경은 안 받아도 되네.”

그의 목소리에는 이상하게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 그렇지만 제가 해야 할 일 정도는 알아야…….”

“오늘 경은 거기에 계속 앉아 있으면 돼. 그게 경의 일이야.”

이거 지금…… 쉬나 안 쉬나 감시하겠다는 건가?! 아델라는 뒤늦게 그가 자신을 불러 낸 까닭을 알아챘다.

“하나 묻겠습니다만…….”

“묻게.”

“혹시 내일도 부르실 겁니까?”

“경이 내 명을 듣지 않고 또 훈련을 하려 한다면?”

이 사람, 자기가 얼마나 치명적인 제안을 하고 있는 건지 알고는 있을까? 밀폐된 공간에 단둘이서! 정신 건강에 매우 해로운 환경이었다. 아델라는 속으로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내일은 방에 콕 박혀 있어야지. 일명 방, 콕이다!

“반드시 쉬겠습니다. 네.”

원하는 대답을 듣긴 했지만 이저드는 기분이 묘했다.

그녀한테 쉬겠다는 말을 들어서 뿌듯하긴 한데, 자길 싫어하는 사람을 억지로 잡아 둔 것 같았다. 여태 이런 반응을 보인 사람이 없어서 그랬는지 그가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집착하는 기분이었다.

이저드가 묘한 기분에 휩싸인 사이 아델라는 편히 소파에 몸을 기댔다. 반드시 쉬겠다고 당당하게 말했지만 아델라는 어떻게 쉬어야 할지 난감했다.

몸을 소파에 맡기고 있어도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훈련에 대한 시뮬레이션이나 회귀에 대한 고민뿐이었다.

“경.”

“네, 네?”

“책이라도 읽겠나?”

그녀의 얼굴에 가득 담긴 걱정을 읽은 이저드가 물었다.

“어…… 그것도 좋은 방법이네요?”

책을 읽어 본 지가…… 언제더라? 자작가에 있을 때는 그래도 일 년에 서너 권 정도는 읽었던 것 같다. 그마저도 빚이 더 늘어서 나중에는 일 년에 한 권 읽을까 말까 했지만.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 속에 그녀한테 항상 책을 구해다 주던 한 여인을 생각했다. 아델라의 입가에 저절로 살풋 미소가 지어졌다. 따스함이 스며든 미소였다.

이저드는 그녀의 미소를 말없이 보다가 조금 늦게 입을 열었다.

“……서재는 옆방이니 가서 읽고 싶은 걸 찾아오도록 해.”

원래는 아예 서재 방에 있으라고 하려다가 명색에 호위로 부른 거라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녀를 옆에 한시도 떨어뜨려 놓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어? 진짜요?”

“경이 읽을 만한 게 있을지는 모르겠군.”

“아, 괜찮습니다. 뭐든 읽을 것만 있으면! 찾아보고 올게요.”

아델라의 얼굴은 아까 왔을 때보다 환하게 펴졌다. 이저드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경.”

“네?”

그녀가 집무실 문을 잡고 이저드를 돌아보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언급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녀의 신난 표정을 보니 이저드는 심술과도 같은 감정이 들었다.

“글을 읽을 줄 아는군.”

아, 맞다. 아직 신분을 안 밝혔지. 그녀가 눈을 도르륵 굴렸다.

“글을 배웠어요. 어머니한테.”

거짓말은 아니었다. 어머니한테 배운 건 맞는걸.

“그래?”

“네.”

“그렇군.”

이저드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델라는 표정 변화 없는 이저드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레 집무실 문을 열었다.

“그럼 저…… 찾으러 다녀오겠습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델라는 밖에 있던 시종장한테 물어 서재로 향했다. 문틈 사이로 쏙 빠져나간 아델라를 보던 이저드의 입가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있는 티 없는 티 다 내고 사라진 그녀가 정말로 웃겼다.

* * *

책을 한 아름 가져온 아델라는 서류에 집중하고 있는 이저드를 힐끔 보고 조용히 소파 앞 탁자 위에 책들을 내려놓았다.

아까 그 말은 떠보기 위한 거였을까, 아니면 그냥 순전히 놀라워서 나온 말이었을까. 일단 모른 척하긴 했지만…….

아델라는 이저드에게 이번 생에 대해 언젠가 선수를 쳐서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다시 고민하다가 그냥 그만두었다. 닥치지도 않은 일을 벌써부터 걱정해서 해결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델라는 잡생각을 지우고 책을 한 권 집었다. 그러곤 얼마 안 가 책 속에 빠져들었다. 아델라는 이런저런 자세를 바꿔 가며 책 속에 푹 빠져 있었고, 이저드는 곧은 자세로 앉아 계속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다. 규칙적인 펜 소리와 책을 넘기는 종이의 소리는 점심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둘 중 한 소리가 점점 잦아들기 시작한 시각은 해질녘쯤이었다. 어느새 집무실 안은 창밖에서 쏟아지는 노을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저드는 따스한 노을빛으로 물든 창밖을 보다가 아델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고롱고롱 잠에 빠져 있었다. 입까지 벌리고 자는 걸 보면 아주 깊은 숙면을 취하는 것 같았다.

이저드는 아주 편히 잠든 아델라를 보면서 조금 황당한 마음이 들었다. 무방비해도 너무 무방비한 게 아닌지…….

자기 침대에 뛰어드는 사람은 봤어도 자기 앞에서 편히 퍼질러 자는 사람은 또 처음이었다.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쳐서 그녀한테 향하는 빛을 막아 주었다. 그리고 그녀를 조심히 정자세로 눕히고 자신의 겉옷을 덮어 주었다. 혹시 중간에 깨서 어두우면 긴장할 테니 작은 등불도 밝혔다.

그는 편안해 보이는 아델라의 자는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대로 자정까지 쭉 잤으면 좋겠군. 난, 경을 잡아들이고 싶지 않아.”

오늘 그가 그녀를 굳이 호위로 부른 이유였다.

* * *

보초를 서는 이들 빼고는 모두가 잠들어 있을 시간, 하녀의 숙소 뒷문이 조용히 열렸다.

숙소에서 나온 여인은 주변을 최대한 경계하고 빠른 걸음으로 아델라와의 약속 장소로 향했다. 그녀가 일찍 도착했던 것인지 약속 장소에는 아델라가 보이지 않았다.

여인은 울타리 너머의 건물들을 바라보다가 담장에 몸을 숨겼다. 그러곤 담장 아래에 쭈그려 앉아 아델라가 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고, 꽤 오랜 시간동안 아델라는 오지 않았다. 그곳에 숨어 있던 하녀는 점점 안색이 새하얘졌다.

수락한 건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 거짓말이었구나!

하녀는 상황을 파악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얼른 가서 마티나한테 알릴 생각이었다. 그녀는 정원수들을 헤치고 정원에서 벗어났다.

턱!

“저!”

“꺄!”

막 뜀박질을 하려던 여인은 자신의 어깨에 올라온 손을 보고 놀라서 자빠졌다.

“어음…… 죄송합니다. 많이 놀라셨죠?”

아델라는 얼른 여인을 일으켜 세웠다. 약속 시간에 늦어서 급한 마음에 잡다가 그만…….

“왜, 왜, 왜 이제 오세요!”

“일이 좀 많아서요. 방금까지 일하다가 늦었어요.”

사실 퍼질러 자다가 왔지만 아델라는 아닌 척 시치미를 뚝 뗐다.

아델라는 자정이 조금 지났을 때 눈을 떴다. 최근 이렇게 퍼질러 잔 적이 거의 없어서 너무 놀라 벌떡 일어났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집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이저드가 남긴 쪽지가 작은 등불 아래에 놓여 있었다.

[오늘 일은 끝났네.]

그녀는 미쳤다고 자기 머리를 쥐어박으면서 매무새를 정리하고 급하게 그의 집무실에서 나왔다. 밖에 서 있던 시종들이 안내한다는 것을 한사코 거절하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알겠으니 빨리 말해 주세요. 너무 오래 나와 있었어요.”

“잠시.”

아델라는 제복 속에서 핑크빛 종이봉투를 꺼냈다.

“취향이…….”

누가 보면 사랑의 편지를 전하는 줄 알겠다.

“그렇다고 검은색 봉투를 쓸 순 없잖아요?”

아델라의 뻔뻔한 말에 하녀는 왠지 설득되는 것도 같았다.

“그런데…… 글을 쓰실 줄 아셨어요?”

“……호위병의 기본 소양이랍니다?”

거짓말이었다.

하녀는 아델라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손을 내밀었다. 아델라는 그녀의 손을 물끄러미 보다가 품에서 꺼낸 편지를 넘겨주었다.

“수고하셨어요. 내일은 시간 지켜 주셨으면 좋겠어요.”

소중한 것을 대하듯 아델라의 편지를 곱게 접어 품속에 넣은 하녀는 몸을 빙글 돌렸다.

슥.

“아니, 내일은 없어.”

하녀의 목에도, 아델라의 목에도 무섭게 번뜩이는 칼날이 닿았다. 잔뜩 가라앉은 누군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냉기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아델라 목에 검을 겨눈 이는 린다였고, 하녀한테 검을 겨눈 이는 벤슨이었다.

“아까 품에 집어넣은 거 꺼내지?”

벤슨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하녀한테 명령을 내렸다. 자신의 목에 검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에 이미 패닉 상태였던 하녀는 손을 덜덜 떨었다. 벤슨이 눈으로 재촉하고 나서야 하녀가 덜덜 떨면서도 천천히 품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헉! 안 돼요!”

하녀가 떨리는 손으로 품속에서 편지를 꺼내려고 하자 아델라가 놀라 외쳤다.

“안 돼? 아안 돼애?”

“억.”

아델라가 하녀한테 닿기 전, 린다의 손에 목덜미가 붙잡혔다.

“넌 따라 와.”

“자, 잠시만! 린다 경! 잠시! 오해가! 오해라니까요!”

아델라가 질질 끌려가는 와중에 소리쳤지만 린다는 들은 척도 안 하고 그녀를 데리고 저택으로 들어갔다.

“저! 숨 막히거든요! 제가 걸으면 안 될까요!”

현행범 주제에 말이 많았다.

린다는 자리에 멈춰 서곤 아델라를 놔 줬다. 그 바람에 바닥에 머리를 살짝 부딪친 아델라는 생각했다.

‘망했네.’

언젠가 들킬 줄은 당연히 알았지만…… 첫 편지부터 들키다니. 저걸 린다나 벤슨, 혹은 이저드가 읽는다고 생각하면 쪽팔림을 넘어 죽고 싶어질지도 몰랐다.

접시 물에 코 박고 죽을까? 아델라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 탓에 린다의 오해는 더욱 커졌다.

“너 진짜, 그 미친……! 후…… 헤게이든 영애한테 내 정보를 팔아먹으려고 했어?”

“린다 경, 그게 아니라…….”

“너, 그 사람 앞잡이 노릇 받아들인 거 맞냐고!”

“이건 그러니까 오해가…….”

불같이 화를 내는 린다를 보며 아델라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한 달 동안 훈련을 받으면서 그녀가 이렇게 화를 내는 건 본 적이 없었다.

“린다 경, 우선 진정하시고, 심호흡 하시고!”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내 뒤통수를 쳐? 내가 사기 치면 어떻게 한다고 했지?”

죽인다고 했지. 아델라는 첫날 했던 그녀의 말이 떠올라 섬뜩했다.

“당장 목 치고 싶은 걸 참은 거야. 다물고 따라와.”

이런 후폭풍이 올 줄은 몰랐는데. 변명은 좀 들어보고 가시지! 아델라는 멀어지는 린다의 등을 보며 얼른 그녀를 따랐다.

린다가 다다른 곳은 저택 안에서도 제일 안쪽에 있는 방이었다. 그곳에는 아까 잡힌 하녀와 벤슨, 그리고 이저드와 헤이든이 있었다. 하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아델라는 안의 상황을 빠르게 훑었다. 분위기가 착 가라앉아 있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주변을 쓱 훑던 아델라의 시선이 핑크빛 편지에서 멈췄다. 편지는 벤슨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녀는 린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서 냉큼 하녀와 벤슨 사이에 자리 잡고 무릎을 꿇었다. 하늘에 맹세코 잘못을 저지르진 않았지만, 분위기상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경이 그곳에 안 나가길 바랐는데. 내 헛된 소망이었던 것 같군.”

어쩐지 아침부터 불러서 앞에서 대놓고 자는데도 깨우지도 않고 놔뒀다 했다. 이렇게 쉽게 들킬 줄 알았으면 안 나갔지.

아델라는 마티나가 그래도 좀 치밀하게 준비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기껏 나온 계획이 하루 만에 들통나 이제는 마티나가 애잔할 지경이었다.

자기 딴에는 증거는 없애면 그만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증거를 없애기도 전에 이렇게 덥석 증거가 적의 손 안에 들어갔다.

‘암살자를 고용하려면 일류로 고용하지…….’

그래야 증거가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기 전에 죽일 것 아닌가. 아델라의 예측일 뿐이지만 아델라와 하녀를 감시하던 놈들이 있었다면 벌써 잡혔을 것이다.

그녀의 예측을 대변하듯 이번에는 복면을 쓴 두 사람을 끌고 들어오는 아리스가 보였다.

‘미치겠네. 수비 대장님까지? 진짜 망했다.’

아델라는 수치사를 당할 것 같았다. 그녀는 힐끔 벤슨 손에 들린 편지를 보았다.

“변명은 없나?”

이저드가 정확히 아델라를 보며 물었지만, 그녀보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하녀였다.

“저, 전 억울합니다! 전 그저, 그저, 심부름만 했을 뿐입니다! 전 아무것도 몰랐어요! 헤게이든 영애께서 동쪽 정원에 가서 편지만 받아 오면 된다고 했습니다!”

신뢰가 쌓여 있지 않은 관계는 이토록 가벼웠다. 하녀는 죽을 위기에 처하니 망설임 없이 마티나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사실인가?”

아델라는 자신을 간절한 눈으로 보는 하녀를 슬쩍 봤다. 이 사람도 먹고살려고 하는 짓일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 아델라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녀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일말의 희망을 걸었더니 아델라가 받아 준 게 놀라운 모양이었다. 하녀는 약간 얼떨떨한 표정으로 이저드의 눈치를 보고 다시 고개를 바닥에 박았다.

“그럼 이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고 헤게이든 영애의 명령을 받은 것뿐이고, 한패는 아니다? 그럼 넌 한패고?”

린다가 매섭게 눈을 치켜떴다.

“아까부터 말씀드렸는데, 오해라니까요?”

“현장에서 잡혔다고 들었는데.”

이저드가 입을 열었다.

현장에서 본 이가 셋이나 됐다. 린다, 벤슨, 아리스까지. 그런데 아델라의 표정은 정말 억울해 보였다.

“현장에 있었던 건 맞습니다. 맞는데, 배신 같은 걸 하려던 건 아니에요.”

“그런가?”

아델라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이저드는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벤슨한테 시선을 던졌다.

“그 변명은 경이 보낸 편지를 읽은 후에 생각해 보지.”

“헛! 아, 안 돼요!”

이저드한테 편지를 주려던 벤슨의 손을 아델라가 낚아챘고,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이들이 싸늘하게 굳었다.

“아, 아니, 이건, 아…… 미치겠네.”

아델라는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의 눈초리를 받으며 결국 편지에서 손을 놔야 했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자진해서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얼굴이 새빨개져서 말이다.

이저드는 목까지 빨개진 아델라를 이상하게 보다가 봉투를 열어 편지를 보았다.

[오늘의 보고.

예비 백작 부인께서는 해가 뜨자마자 출근하셔서 훈련장 1234바퀴를 도셔따.

이두박근과 삼두박근을 키우는 근력 운동도 2341번 하셔따.

예비 백작 부인과 실수로 부딪치는 짓은 하지 마라야게따. 튼튼하신 게 부럽따.

개인 훈련 후에는 어여쁜 제자들을 가르쳤따. 예비 백작 부인께서 검을 휙 휘두르자 상급 수비병들이 우수수 나가떨어져따. 오늘의 훈련은 너무 쉽게 끝나따.

역시 예비 백작 부인께는 대들지 말아야게따.

오늘 점심은 내가 좋아하는 양고기 스프가 나왔따.

근데 예비 백작 부인께서는 좋아하지 않으시는 모양이다. 똥 씹은 표정으로 드시고 계셨따. 이렇게나 마싯는데…… 흑흑. ……(중략)…….]

편지를 읽으면 읽을수록 이저드의 입가가 조금씩 무너졌다. 읽으면 안 된다고 아델라가 막은 이유를 그는 어느 정도 이해했다.

이건 보고가 아니라 거의 개인 일기장 수준이었다. 일부러 그런 건지 맞춤법도 틀리게 적어 놓았다. 누가 봐도 편지 받는 상대를 놀릴 의지가 다분한 내용이었다. 당연하게도 마티나가 원하는 정보는 이 안에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중간 중간 그녀에게 경고를 보내는 것 같은 내용이 더 많았다. 린다의 호칭을 ‘린다 경’으로 쓰지 않고 ‘예비 백작 부인’이라고 꼬박꼬박 적은 것부터가 그 시작이었다.

아델라는 마티나가 지금 누굴 건드리려고 하는지 계속해서 주입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중간에 린다에 대해 대들지 말아야겠다, 나가떨어졌다 등의 말을 굳이 적은 것도 넌 상대가 안 되니까 애초에 그만두라는 경고였다.

물론 이 편지를 마티나가 받았다고 경고로 받아들이지는 않겠지만. 아마 하라는 보고는 안 하고 수준 낮은 일기를 써 왔다며 노발대발했을 것이다.

“큭.”

결국 이저드의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에 아델라만 빼고 모든 이들이 놀란 표정으로 이저드를 주목했다.

“흐어어, 그래서 제가 안 된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다 오해라고 했잖아요!”

이저드의 비웃음(?) 소리를 들은 아델라는 고개를 바닥에 박은 상태로 억울해서 외쳤다.

“큼, 크음.”

이저드는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풀린 걸 느끼고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하지만 이미 그를 잘 아는 헤이든과 린다, 아리스, 벤슨은 이저드의 잠깐 지은 미소만으로도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도대체 뭔데 그러십니까?”

헤이든은 궁금증을 못 참고 이저드 뒤편으로 다가가 편지를 슬쩍 보았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 적혀 있기에 잘 웃지도 않는 사람을 웃겼나 싶어서였기도 하고, 린다가 아끼던 이가 어떻게 배신을 했나 궁금해서이기도 했다.

다른 이들도 이저드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아델라가 쓴 편지를 눈으로 훑었다.

“……푸흡.”

잘 참고 있던 린다가 결국 터졌다. 그녀의 웃음을 기점으로 편지를 보던 다른 이들도 웃기 시작했다.

아델라는 너무 쪽팔려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평생 놀림감이다. 당장에라도 회귀해서 이 사람들 기억이 싹 지워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따, 뭐야! 따!”

린다가 고개를 숙이고 미친 듯이 웃었다.

“너무 심하게 웃으시는 거 아닙니까! 저, 저도 사정이 있었거든요!”

아델라가 엎드려서 외치자 다른 이들은 그 모습이 웃겨서 또 웃음이 터졌다.

이 안에서 그나마 표정 관리를 하는 사람은 이저드뿐이었다. 그도 입가가 살짝 올라가 있었지만 다른 이들에 비해선 양반이었다.

“아이고, 그랬어요? 우리 아델라 어린이는 몇 살이에요?”

“놀리지 마세요! 저 안 믿으셨으면서……!”

“풉!”

린다가 아델라 곁으로 다가가 푹 숙인 그녀의 상체를 천천히 바로 세웠다. 아델라는 린다가 바로 세우니까 세우는 대로 뒀긴 하지만 얼굴은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아델라 경, 날 봅니다.”

치사하게 명령 투로 하다니.

아델라는 삐죽 입술을 내밀면서 어쩔 수 없이 손을 내렸다. 그러자 린다가 덥석 아델라의 양 볼을 잡고 늘렸다.

“야, 이 제자 놈아. 그건 네가 말도 하지 않고 편지도 숨기고 변명도 안 하니까 그런 거지!”

“아아악! 아흐여!”

“앞으로도 이런 일 생기면 오늘처럼 말하지 마라?”

아델라는 눈물이 찔끔 났다. 진짜 아팠다. 진짜 아파!

그녀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제야 린다가 그녀를 놔 줬고, 아델라는 무지하게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말할 기회도 안 주셨으면서!”

“네가 저 편지를 쓰기 전에 나한테 한마디 귀띔이라도 했으면 안 벌어질 일이었단다?”

“그…….”

할 말이 없었다. 일이 이 지경이 될 줄 누가 알았겠냐고. 아델라는 얌전히 린다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닫았다.

“그런데 경, 왜 헤게이든 영애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가?”

아델라는 이저드의 물음에 쪽팔림을 무릅쓰고 차분히 입을 열었다.

“협박받기도 했고, 제가 안 받아들이면 또 다른 누군가를 찾았을 테니까요. 그냥 제가 하는 게 마음 편했어요. 동태도 살필 수 있고. 뭘 알아야 대처도 하는데, 전 헤게이든 영애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었고요. 근데…….”

아델라는 말을 하다 말고 힐끔 이곳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각하를 포함해서 다른 분들이 헤게이든 영애를 경계하고 있는 줄 알았으면 안 했을 거예요. 전 그냥 영애가 제풀에 지쳐 포기하게 만들 생각이었거든요.”

“편지 내용을 이렇게 쓴 이유가 그건가?”

“네, 자꾸 린다 경을 무시하니까 복수해 주고 싶기도 했고……. 각하의 약혼녀니까 사이 틀어져서 좋을 건 없잖아요? 차라리 제가 바보가 되는 게 낫죠.”

처음부터 노리고 쓴 편지였다. 글을 이제 막 배워서 서툰 것처럼 일부러 맞춤법을 틀리고, 머리에 든 게 없는 것처럼 보고를 가장한 일기를 썼다.

마티나를 놀릴 생각에 꽤 정성 들여 썼는데 결국 당사자한테는 못 보여 주게 생겼다. 아델라는 그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그래도 이건 너무 무모한 거 아니야? 누가 봐도 놀리는 편진데?”

이번에는 벤슨이 물었다.

“아마…… 놀리는지 모를 걸요? 그냥 덜떨어진 평민이라고만 생각했을 거예요. 화가 나긴 하겠지만, 자기가 직접 제안했으니 자존심 때문에라도 제가 보낸 보고를 계속 보긴 했을 거고요.”

린다한테도 막 대하는데, 아델라는 얼마나 우습게 보았을지.

“그 편지로 제가 무해하고 무지하다는 걸 계속 각인시켜서 포기하게 할 생각이었는데…….”

그러다 보면 결국 시간이 흘러 전쟁이 터질 테니까. 그럼 이 일도 저절로 덮일 터였다.

아델라는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사 원하는 대로 안 굴러간다지만, 이런 쪽팔림을 겪게 될 줄이야. 놀리는 것도 적당히 하면서 쓸걸. 뒤늦게 후회해 봤자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아델라 경, 너…….”

린다가 회색빛 눈동자를 반짝였다. 이거 꼭 짐승한테 좋은 먹잇감을 던져 준 기분이었다.

“네?”

린다의 다음 말이 조금 두려웠다.

린다는 아델라를 빤히 보다가 힐끔 아직도 벌벌 떨고 있는 하녀한테 시선을 줬다.

“아, 아니다.”

이렇게 말을 끝내면 다음 말이 궁금하다기보다는 두려웠다.

“왜, 왜요?”

“아니야.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했나 싶어서?”

아델라도 아까 린다의 시선에 따라 하녀를 힐끔 보고는 린다의 장단에 맞췄다.

“하하. 과찬입니다?”

두 여자가 서로를 마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럼, 이 편지는 어떡합니까?”

아델라가 배신을 한 것이 아닌 게 밝혀졌으니, 이제 앞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하냐는 거였다.

“이대로 보내지.”

아델라는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눈만 껌벅였다.

“헤게이든 백작이 도착하려면 일주일 정도 남았나?”

이저드의 물음에 헤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까지 경이 쓰고 싶은 대로 써서 보내게.”

“네에? 저한테 저걸 또 쓰라고요?”

“쓰기로 마음먹었으면 써야지. 며칠 정도는 생각해 놓은 거 아닌가?”

생각만 했다 뿐인가. 어젯밤에 한 일주일 치를 쉬지 않고 썼다. 아델라는 편지를 쓰면서 새로운 재능을 발견했다. 일명 소설 쓰기.

“그렇긴 하지만…….”

“그럼 딱 일주일만 더 쓰게. 그 뒤에는 저절로 해결될 거니.”

“저절로 해결된다고요? 어떻게요?”

아까 헤게이든 백작이 온다고 하는 일과 관련된 건가? 근데 백작이 왜 오지?

아델라는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일주일 뒤에 헤게이든 백작이 와서 영애를 데리고 가야 할 테니까. 그때까지 증거는 많이 만들어 놓는 게 좋겠지.”

아델라는 아직 아리송한 표정이었다. 그에 린다가 덧붙여 설명해 줬다.

“헤게이든 영애는 공작 안주인으로서 자질을 의심받고 있어. 세이즈 백작, 그러니까 아버님께서는 이미 들고일어난 상태고. 예전에도 이와 같은 일을 벌인 적이 있는데, 그땐 세력이 약한 가문이라 덮었거든. 하지만 나는…… 덮을 생각이 없어. 그 영애한테 애지중지 모셔 온 각하를 넘길 생각도 없고.”

가만히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하며 듣던 아델라는 눈을 크게 떴다. 이거 왠지…… 약혼이 파기될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아델라의 지난 모든 회귀에서 공작이랑 공작 약혼녀에 대한 이런저런 소문은 잘 들리지 않았다. 사랑이 없는 관계 정도는 듣긴 했지만, 공작 약혼녀가 사고 쳐서 약혼이 파기됐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공작 약혼녀가 성에 입성했다, 성에서 도망쳤다, 이 두 사건밖에 아델라가 모르는 것은 마티나가 그 와중에 언급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속사정이야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둘의 결혼 생활은 꽤 조용한 편이었다. 중간에 이렇게 큰 사건이 터졌다면 아델라가 모를 리 없었다. 소문으로라도 들었을 테니까.

‘설마…… 진짜 파혼하는 건 아니겠지? 약혼 파기는 이전 회귀 때는 없었던 일인데?’

왜 이번 생에 이런 일이? 이들 사이에 바뀐 게 있나? 그래서 마티나의 행동도, 이저드의 태도도 바뀐 건가?

이들 사이에 바뀐 거라면…… 아델라 하나뿐이었다.

아델라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떨렸다.

‘아니야, 아닐 거야. 너무 비약이잖아.’

“혹시 저 때문…… 아니, 이게 아니지. 헤게이든 영애와 약혼을…….”

“경이 생각하는 그거, 맞을 거야.”

이저드는 아델라가 충격 받은 얼굴을 하는 것에 의문을 느꼈다. 마티나를 잘라 내겠다는데 아델라가 충격을 받을 이유는 없었다.

“무슨 문제 있나?”

“헉, 아니에요!”

아델라는 순간 얼굴에 낭패감이 스쳤다. 이렇게 반응하면 더 의심 사는데…….

역시였는지 다른 이들이 그녀를 이상한 눈으로 보았다.

“하…… 하하……. 그, 근데 제 편지 전해 주려면 이 분이 있어야 하는데…… 너무 많은 걸 들어 버려서…….”

아까부터 듣고 있던 하녀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한테로 향하고 있음을 본 여인은 창백하게 굳었다.

“저, 전 못 들었습니다! 시켜만 주시면 뭐든, 뭐든 할 수 있어요! 저, 전 공작가의 하녀지, 영애의 하녀가 아닙니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공범이 되는 순간이었다.

하녀한테는 선택권이 없긴 했지만 다행히 목숨만은 보전할 수 있게 됐고, 직장에서 잘리지도 않게 됐다.

어떻게 보면 그녀는 공범이 돼서 이득을 얻게 된 사람이었다. 헤게이든 영애가 사라질 때, 자신의 자리만은 지켜지게 된 셈이니까 말이다.

반면, 아델라는 이번 사건으로 이저드와 그의 측근들한테 신뢰를 얻게 됐지만, 큰 고민거리를 안게 됐다.

그녀는 이전 회귀 때와 전혀 다른 길에 들어선 것에 기쁨보다는 불안함을 먼저 느꼈다. 자신으로 인해 바뀐 이 상황이 훗날 어떤 사건으로 이어질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 * *

‘어디서부터 바뀐 걸까? 뭐에서부터? 내가 린다 경을 만난 순간부터? 이렇게 바뀌어도 되는 걸까?’

미래를 바꾸려고 필사적으로 살고 있긴 하지만 갑자기 바뀐 이 길이 맞는 걸까?

정확히 말하면 완전히 바뀌었다, 라고 말하기는 조금 애매했다. 어차피 마티나는 언젠가는 이 성에서 나갈 사람이었다. 자의로 나가느냐, 타의로 나가느냐가 바뀌었을 뿐.

“―경, 아델라 경. 야, 아델라 경?”

“……저 부르셨어요?”

아까부터 불렀는데 아델라가 너무 깊게 생각에 잠긴 탓에 린다의 부름을 이제 들었다. 아델라가 린다를 돌아봤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지만 아델라의 정신은 아직도 다른 곳에 가 있는 듯했다.

“경! 경, 사실 평민 아니지?”

“네……. 네, 넷?”

아델라는 다른 문제를 생각하느라 한발 늦게 린다의 물음을 이해했다.

“아깐 그 하녀 때문에 말 못 했지만, 너 귀족이야. 그치?”

린다는 확신에 찬 눈이었다. 아델라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그녀가 씨익 웃었다.

“맞네. 근데 왜 숨겨?”

“숨긴 게 아니라…… 더 안 물어보셔서 굳이 밝힐 이유가 없었어요. 그리고…….”

“그리고?”

일전에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아델라는 말하기를 주저했다.

“제가…… 도망 나온 거라 신원이 밝혀지면 잡혀갈 수도 있거든요.”

“뭐?”

린다는 주변을 살피면서 의아한 눈빛으로 아델라를 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복잡해 보였다.

“아델라 경, 무슨 범죄 저질렀어? 가문에서 잡아갈 만한 중범죄?”

“중범죄일까요? 결혼하기 싫어서 도망 나온 것뿐인데.”

“뭐어?”

아까 망설이던 거와는 다르게 막상 말을 하니까 담담해졌다. 오히려 린다가 놀란 표정이었다.

“왜? 왜 싫었는데? 상대가 별로라? 아님 귀족간의 계약 결혼이라?”

“둘 다요. 아버지가 진 빚을 갚으려고 절 팔았거든요. 상대 가문이 어디더라…… 가웨인 백작가였나? 거기 백작 첩 자리요.”

가웨인 백작이라면…… 올해 쉰여섯이었던가?

그 백작이라면 하도 유명해서 린다도 들은 기억이 있었다. 새로 들인 본부인 나이가 스물다섯이라고 들었던 것 같았다. 광산주라 돈이 어마어마하게 많아 돈으로 젊은 여성들을 산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워낙 악명이 높아서.

“제가 도망치는 바람에 절 팔아서 받은 돈 다 토해 내고, 배상금까지 물어야 했을 거예요. 그래도 전 그 돈 꾸준히 보내 줬어요. 중간에 아버지가 쓰지만 않으셨다면 반 넘게 갚았을 텐데. 모르죠.”

아델라는 담담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너 여기, 5년 전부터 거주한 걸로 아는데…… 그럼, 네 아버지는 최소 5년 동안 널 찾고 있다는 거야?”

“돈 나올 구석이 저밖에 없나 보죠. 루, 아니 제 친구한테 들은 말로는 아직도 찾고 있대요. 제가 도망친 게 괘씸해서인지, 아님 또다시 돈 받고 팔아 버리려는 건지.”

“귀족이면 사유지가 있을 거 아냐?”

“그건 이미 저 어릴 때 벌써 돈 받고 권리를 넘겨서 없어요. 그냥, 무늬만 귀족이죠.”

린다는 담담해 보이지만 어린 나이에 고생했을 아델라를 빤히 바라보았다.

최소 5년 전이면 아델라가 열여섯 살. 더 전에 이런 일이 발생했다면 그 이하. 성인도 안 된 아이가 이 일을 담담하게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그녀는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았던 걸까.

“근데 이런 이야기…… 나한테 막 털어놔도 돼? 신원 알려지면 잡혀갈 수도 있다며.”

린다가 자리에 멈춰 서서 진지하게 물었다.

“린다 경이니까. 제 스승님이니까 절 내치진 않겠죠?”

금세 밝은 분위기로 돌아온 아델라를 보며 린다는 처음 짓는 표정으로 웃었다. 안쓰러워하는 것도 같았고, 쑥스러워하는 것도 같았다.

“네 믿음에 보답은 할게. 아까 믿지 못했던 거 미안하기도 하고.”

린다의 진지한 대답에 아델라가 눈을 크게 떴다.

“……린다 경 맞아요? 린다 경께 미안하다는 말을 듣는 날이 오다니?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아델라 경? 죽고 싶나 봐?”

린다가 인상을 구기며 묻자 아델라가 환하게 웃었다.

“근데요. 린다 경이야말로 아까 그 말, 제가 거짓말한 거라면 어쩌시려고 믿어요?”

“아까 네가 한 말 그대로 돌려주마. 내 제자니까.”

뭐, 뭐지…….

장난스럽게 웃고 먼저 걸음을 옮기는 린다를 보며 아델라는 심장께를 쓸었다. 바, 방금 되게 멋있었던 것 같은데.

린다의 신뢰를 얻은 것까지는 좋았지만 아델라는 이상하게 그녀와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불안했다. 알 수 없는 부담감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 * *

“경, 얼굴이 왜 그러나?”

아델라의 얼굴은 퀭하다 못해 푹 죽어 있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늘도 이저드의 호위로 불려 나온 아델라는 어제처럼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래, 혼자 땅을 파고 있는 것보단 차라리 누군가 곁에 있는 게 나았다.

아델라는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만약 이대로 거리를 안 지키고 린다를 포함한 다른 이들과 점점 가까워진다면 그 뒤에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들이 전쟁에서 죽는 모습을 또 보고, 또 보고, 또…… 계속 반복해서 봐야 하는 건가? 방법을 찾을 때까지?

아델라는 애초에 자기 자신을 위해 이저드를 만나려고 했다. 훈련을 열심히 했던 것도, 이들의 신뢰를 얻으려고 했던 것도 자신을 위해서였다.

분명 그랬는데…….

아델라는 무서웠다. 소중한 사람이 늘어난다는 것은 지킬 사람이 많아진다는 뜻이었고, 잃을 사람도 많아진다는 의미였다.

“아델라 경.”

“네.”

이저드는 어제의 일이 마음에 걸려 사과하려고 그녀를 불러 낸 거였다. 그런데 아무래도 지금 그녀한테는 사과가 중요한 것 같지 않았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델라의 표정은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델라한테 다가갔다.

“일어나게. 나가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아델라는 무조건 이저드를 따라야 했다. 그녀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아델라를 데리고 향한 곳은 공작가 저택 뒤편에 마련된 정원이었다. 사실 정원이라기보다는 숲과 비슷했다. 큼지막한 나무들이 곳곳에 심어져 정원 전체에 나무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그래도 그곳을 정원이라고 칭한 이유는 정원사의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나뭇가지 하나, 나뭇잎 하나도 정성스레 다듬고 키운 흔적이 보였다. 정원 전체가 아주 잘 정돈되어 있음은 물론이고 깔끔하게 닦인 돌로 된 길도 보였다.

아델라는 커다란 나무로 이루어진 정원이 신기해서 감탄하며 구경했다.

“전 이곳이 영락없이 그냥 뒷산인 줄 알았어요.”

“밖에서 보면 다들 그렇게 생각하네.”

이저드는 아델라가 구경하기 편하게 하려고 원래 보폭보다 한참 느린 걸음으로 걸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정원을 찬찬히 구경하다 보니 아델라는 마음의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푹 가라앉아 있던 그녀의 눈빛이 점점 밝게 빛났다. 평소 아델라의 눈빛이었다.

아델라는 생기 넘치는 표정으로 상쾌한 숲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이래서 바람 쐰다, 바람 쐰다 하나 보다.

“이젠 좀 괜찮나?”

아델라의 표정이 아까보다 한결 나아진 걸 확인한 이저드가 조용히 물었다. 아델라는 자신을 돌아보는 이저드를 보고 자리에 서서 멍청히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얼굴이 화끈해져 시선을 슬쩍 돌렸다.

“네. 훨씬 좋아졌습니다. 감사합니다.”

“그거 다행이군. 무슨 고민을 했는지 물어도 되나?”

아델라는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이저드를 마주 보았다. 기분이 참 싱숭생숭했다. 이저드의 친절과 배려가 기쁜데 마냥 좋아할 수가 없었다.

이저드는 아델라가 자신의 직속 부하이기 때문에 잘해 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성적인 감정으로 잘해 주는 게 절대 아니라는 말이다. 아델라는 또 깜박 혹해 버릴 뻔했다.

“음…… 잃을 것에 대해서요?”

“잃을 것?”

“네. 앞으로 잃을 게 확실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괜찮아요.”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그녀를 일부러 데리고 나와서 보폭을 맞춰 천천히 정원을 걸어 주는 이저드를 보며 아델라는 마음을 정했다.

이 사람 곁에, 사람들 곁에, 이 자리에 계속 있고 싶었다. 이런 호의를 계속 받고 싶고, 받은 호의를 돌려주고 싶었다.

이성 간의 관계가 아니더라도 아델라는 지금 자신의 자리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점점 신뢰를 쌓으면 정말 그의 옆자리가 탐날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이 거리만으로도 좋았다.

살기 위해, 살리기 위해 감당해야 할 두려움이라면 감당하자고 마음을 굳혔다.

“정말 괜찮나?”

“네. 각오가 섰거든요.”

“무슨 각오 말인가?”

“잃을 각오요. 고통스럽더라도 다시 감당할 각오요.”

아델라의 올곧은 황금빛 눈동자는 전부터도 눈에 띄었지만 오늘은 유독 더 밝게 빛나 보였다. 이저드는 그녀의 시선에 사로잡혀 잠시간 말이 없었다.

뒤늦게 그녀를 너무 빤히 쳐다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정 변화가 별로 없는 이저드의 눈동자가 잠시 커졌다가 금방 원래대로 돌아왔다.

“잃을 각오를 먼저 하지 말게. 나중에는 버릇이 돼. 잃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이왕 각오를 다질 거면, 지킬 각오를 하게. 경의 마음을 지킬 각오, 경이 잃을 무언가를 지킬 각오. 지킬 방법을 찾다 보면…… 언젠가 답이 보일 거야.”

답을 얻을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자신은 조금씩 답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운이 더럽게 나쁘긴 했지만, 살아갈 방법을 찾는 걸 포기하지 않으니 결국 여기까지 오긴 했다.

어느 누가 알았겠는가. 아델라 자신도 몰랐다. 이저드와 대면할지, 이저드와 이렇게 대화를 나눌지, 이저드한테 마음이 빼앗길지.

아델라는 여태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일들을 해내고 있었고, 하고 있었다.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거기에 사람 한두 명 더 낀다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아델라는 이미 전부터 펜베르크 성 사람들을 구할 생각을 했으니까 말이다.

따지고 보면 린다와 다른 이들도 펜베르크 성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잃을 걸 걱정하며 남은 시간을 보내는 건 너무 아깝지 않나? 시간은 무한하지 않아.”

간과하고 있었다. 지금의 아델라에게 시간은 무한히 반복되는 것이었으니까.

아델라는 진지하게 조언을 해 주는 그의 말에 놀란 것도 잠시, 곧 해사한 웃음을 보였다. 얼마 만에 마음 놓고 웃는 건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기쁜 미소는 그녀의 미모를 한층 더 아름답게 만들었다.

“맞아요. 제가 그걸 잊고 있었네요. 감사합니다.”

이저드는 어째서인지 그녀를 마주 보고 있을 자신이 없어져서 고개를 끄덕이고 등을 돌렸다.

저번보다 더 묘한 기분이었다.

* * *

부욱! 부욱!

“이딴 것도! 이딴 것도 보고라고!”

아델라의 보고가 사흘째 되던 날, 마티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화가 터졌다. 그녀는 아델라의 편지를 갈기갈기 찢었다.

“이 덜떨어진! 멍청한! 평민한테 기댄 내가 어리석었지!”

편지를 가져온 예의 그 하녀는 마티나의 눈치를 보며 어깨를 움츠렸다.

“너.”

“네, 네?”

“앞으로 이 쓰레기 받으면 처분해.”

마티나는 자기가 열 받은 만큼 아델라를 개고생 시킬 생각으로 하녀한테 그렇게 말했다. 하녀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없애 버릴 거야. 이렇게 쓸모없는 패는 필요 없어!”

마티나가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계속 흥분해 있자 시녀들이 물을 가져오고 그녀의 주변에서 부채질을 해 주었다.

“아가씨, 진정하세요. 어차피 쓰다 버릴 패 아니었습니까. 오히려 잘됐어요. 이렇게 멍청한 게 밝혀졌으니 그냥 마음껏 이용하다 버리죠.”

“이용? 그 덜떨어진 애를 어디다 이용해?”

“있잖아요. 이용할 곳.”

마티나는 시녀의 조그만 목소리에 인상을 구겼다.

“계획에는 그 여자밖에 없었는데, 지금 계획을 바꾸자는 거야?”

“네. 상대를 직접 칠 수 없으면 흔들기라도 해야 하지 않아요? 더불어 아가씨의 이미지도 바꾸고요.”

시녀의 말에 마티나가 차차 진정하기 시작했다.

“확실한 방법인 거지? 죽을 일도 없고?”

마티나가 침을 꿀꺽 삼키고 묻자 시녀는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 모든 걸 보고 들은 하녀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고개를 숙였다.

* * *

“예? 독이요? 독약을 준비하라 했다고요?”

“네, 네, 네.”

어둠 속에 쭈그려 앉은 두 여인은 조그만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둘은 옷이 구겨지고 나뭇잎이 묻는 줄도 모르고 심각한 얼굴로 얘기 중이었다.

“누구한테 먹인다, 그런 말은 없었고요?”

“네. 어, 어쩌죠……? 독살 상대가 경이나 린다 경이면…….”

하녀가 불안한 눈빛으로 아델라를 바라보았다.

“아, 전 걱정 마세요. 이 일은 일단 린다 경께 말씀드릴게요. 제니트 씨는 당분간 조용히 영애를 주목해 주시고요.”

한배를 탄 김에 둘은 이튿날 통성명을 했다. 서로 이름으로 불리니 꽤 가까운 사이가 된 기분이었다.

아델라는 하녀, 제니트를 잘 다독여서 보낸 뒤 곧바로 린다를 찾아갔다.

“독? 독약? 그건 어디서 구했대?”

“모르죠? 전 독약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서…….”

“시중에서 비교적 간단하게 구할 수 있는 독약은 정해져 있는데.”

린다는 무언가 고민하는 듯 허공을 바라보았다.

“아니면…… 성에 오기 전에 백작가에서 가져왔거나. 어느 쪽이든 꼬투리를 잡을 만하긴 한데…….”

“한데요?”

“확실하지는 않으니까 지켜보자. 누구한테 독약을 쓸 건지, 죽일 목적인 건지, 화제를 만들 생각인 건지.”

“독약으로 화제를 만들 생각이면 정말…… 미친 거 아닌가요? 누군가의 목숨으로…….”

“원래 암투는 다들 그렇게 미쳐서 해. 미쳐야 살아남으니까.”

린다는 씁쓸하게 웃었다. 자기가 암투의 당사자가 될 줄은 살면서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그것도 펜베르크 성의 안주인 될 사람하고. 괜히 얽힌 아델라한테 미안할 지경이었다.

“넌 앞으로 뭐 먹을 때 나나 호위대에 최소 1년은 있었던 사람들한테 묻고 먹어라? 독약에 대한 건 내가 알아볼게.”

“어…… 네. 그럴게요. 각하께는요?”

“보고 드려야지. 그것도 내가 할게. 넌 먹는 거나 마시는 거 조심하고, 평소대로 해.”

린다는 아델라가 걱정돼서 꼭 지켜야 할 경고만 했다. 그녀는 아델라를 이 일에서 좀 떨어뜨려 놓을 생각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를 이런 일에 끼게 할 수 없었다.

아델라는 린다가 선을 그으니 더는 뭐라 할 말이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자기는 모르는 그들만의 암투가 있는 모양이라 아델라는 이 일에 쉬이 끼어들 수가 없었다. 린다가 걱정되기는 했지만 자기 몸은 자신이 지킬 줄 아는 사람임을 알기에 그녀의 뜻에 따라 한발 물러섰다.

* * *

“이건요?”

“아니.”

“그럼 이건?”

“이것도 아니…….”

아델라는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다 괜찮다는 말이 떨어진 후 입안에 음식을 넣고 오물오물 씹었다.

“아델라 경 어린이는 이제 식사도 허락받고 먹어요?”

경 어린이는 또 뭐야.

아델라는 한껏 치켜뜬 눈으로 오렌지 빛 머리의 벤슨을 째려보았다. 하지만 입에는 이미 음식이 가득해서 뭐라고 하지는 못하고 우걱우걱 씹었다.

“와…… 그 표정은 너무한 거 아니야? 독 있는지 없는지도 감별해 줬더니?”

아델라는 먹던 것을 마저 삼키고 싱긋 웃었다.

“알겠어요. 제가 실례를 했네요. 다음에는 다른 분께 부탁드릴…….”

아델라가 식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니, 벤슨이 급하게 그녀의 팔을 잡았다.

“농담한 건데 야박하네.”

“절 놀리기로 작정한 사람한테 먹이를 주는 건 좋지 않으니까요.”

아델라가 다시 자리에 앉아 새침하게 식사를 시작하자, 벤슨은 할 말을 잃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었다.

“그 독, 그거 진짜 경을 노리는 거래?”

“저도 잘 모르죠?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그건 맞는 말이네. 경 이러다가 독 내성 키우는 훈련부터 하는 거 아니야?”

“그런 훈련도 있어요?”

“원래는 한 5, 6개월부터 차차 배우는데…… 이런 상황이면 더 빨리 배울 수도?”

그건 또 무슨 훈련이지? 독에 내성을 키워? 내성을 어떻게…….

“설마 그 훈련, 먹고 해독하고 먹고 해독하고?”

“오, 잘 아네.”

으으. 아델라는 질색하는 표정으로 밥 먹는 걸 멈췄다. 밥맛이 똑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두 달만 버티면 되는데, 뭐 이리 스펙터클한 상황의 연속인지.

역시 아무나 호위병이 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호위병을 그만두는 이유가 꼭 이저드한테만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저 호위병 된 지 5일밖에 안 됐는데……?”

아델라가 떨리는 눈으로 묻자 벤슨은 어깨를 으쓱였다.

“5일이 됐든, 1달이 됐든, 1년이 됐든, 호위병은 호위병이니까?”

맞는 말이지만…… 왜 저한테 이런 시련을?

당장 마티나한테 가서 제발 가만히 있어 달라고 할 수도 없고. 두 달만 버티면 되는데!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기절할 정도로 먹이진 않아. 조금씩 늘리니까 초반에는 별로 괴롭지도 않고.”

그럼 중반이나 후반에 가면 괴롭다는 말씀? 벤슨 나름 위로를 건넨 거였는데 아델라의 입맛은 돌아올 줄을 몰랐다.

“그, 그런데 그런 훈련은 왜 하는 거예요? 독살이 흔해요?”

“우리의 임무가 뭐지?”

“호위대의 임무라면, 각하를 지키는 거?”

“바로 그거 때문이야.”

엥? 아델라는 의아한 표정으로 벤슨을 바라보았다.

“아델라 경은 이번이 처음이라 모르겠지만, 각하께서는 공작이 된 순간부터 항상 목숨의 위협을 당하셨어. 독살이 뭐야. 암살, 사살, 별별 방법으로 각하를 못 죽여서 안달이지.”

“네? 아니, 왜, 왜요? 누가요?”

공작이나 되는 사람한테 왜? 누가?

벤슨은 주변을 훑더니 아델라 곁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왕가에서.”

“네? 그럼, 더욱 이해가 안 가는데요?”

이저드도 왕족이 아닌가.

“제가 알기로는 각하 어머니께서 공주셨다고…….”

그랬다. 지금은 죽은 이저드의 어머니는 현왕의 고모이자 선왕의 누이였다. 거기에다가 이저드 아버지는 방계이기는 했지만 그도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왕가의 피가 섞여 있었다.

“자세한 건 나도 몰라. 내가 아는 건 왕께서 각하를 별로 안 좋아한다는 거?”

“단순히 안 좋아한다는 마음으로 사람을 죽여요?”

“왕의 마음을 누가 알겠어?”

그것도 그렇지. 아델라는 포크를 입에 물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왕이 폭군이었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겁쟁이였지. 전쟁이 터지자마자 왕은 이저드를 최전방에 보내고 왕족이란 것들은 죄다 수도를 비우고 도망쳤다.

아, 혹시 겁쟁이라서? 공작이 세력을 키우는 게 겁나서? 공작이 어릴 적부터 전장에서 공을 세워 유명해지는 게 두려우니까?

그렇다고 이렇게 악착같이 죽일 생각을 하나? 이것도 암투 중 하난가. 아델라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래서, 호위대는 그 위협에 맞서 여러 훈련을 받는 거군요?”

“응. 나중에는 날아오는 화살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와우, 그게 가능한 일이라고? 아델라는 살면서 가장 불가능한 임무를 받게 된 기분이었다.

단순히 이저드를 지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언제 어디서 목숨의 위협받을지 모르는 상황이라니. 아델라는 수많은 회귀를 했던 자신보다 이저드가 더 많은 죽음을 넘어온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요. 그 독이…… 각하께 향할 일은 없겠죠?”

“미치지 않고서야.”

“하긴, 저도 미치지 않고서야, 라고 생각하긴 했어요.”

“그리고 새로운 종류의 독을 창조하지 않는 이상 각하 독살은 힘들걸.”

벤슨은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지만 아델라는 그 말이 신경 쓰였다. 이저드한테 독살이 통하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는 거의 모든 독약에 내성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럼 각하께서는 여태 독살도 피하고, 사살도 피하고, 암살도 피하시고, 전장에서 살아 돌아오시고…….”

아델라는 하나하나 읊다가 문득 강한 의문이 들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죽지? 인해전술에 당했나? 역시 전쟁에는 꼭 나가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무리 상상해 봐도 그가 죽는 이유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죽을 고비 많이 넘기셨지.”

벤슨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식사를 시작했고, 아델라도 심각한 얼굴로 마저 식사를 마쳤다.

* * *

이저드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호위대를 찾았다.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호위대 훈련장 안에서 또 누군가의 훈련 소리가 들렸다.

쉬라고 해도 죽어라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린다 이후로 오랜만이었다. 훈련 금지령을 푼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이저드는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난감했다. 그는 훈련장에 도착해 조용히 그녀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끄으읍!”

이번에는 도대체 뭘 하는 건지. 유연성 훈련이라도 하는 건가. 아델라는 몸을 기이하게 꺾으며 몸을 풀고 있었다.

이저드의 생각대로 아델라는 최대한 몸을 유연하게 풀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요상한 자세가 되기도 했다. 허리를 한껏 뒤로 젖히며 손으로 바닥을 짚던 그녀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아델라는 처음에 헛것을 본 줄 알았다. 나무나 수풀을 사람으로 착각한 줄 알았다. 그녀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녀가 눈을 깜빡이자 이저드도 한 번 정도 눈을 깜빡였고, 그제야 아델라는 그림자가 사람임을 알았다.

“후웁! 으갹!”

철퍼덕.

그녀는 허리를 들어올리기 위해 힘을 줬지만 놀란 나머지 힘이 빠져 그냥 그대로 바닥에 대자로 뻗었다.

‘왜 자꾸 이런 쪽팔린 모습만 보이는 거야…….’

아델라는 갑자기 땅바닥과 부딪친 등도 아프고 쪽팔림도 같이 와서 바닥에 누워 있었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만.

아델라는 이저드임을 확인하고 몸을 추스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이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쭈뼛쭈뼛하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더 해도 되네. 내가 도와주지.”

“예? 각하께서 도와주시겠다고요?”

“왜? 난 별론가? 그럼 린다 경을 불러오겠네.”

“아니요! 아뇨! 절대 아뇨!”

이럴 줄 알았으면 훈련 끝나고 쉬라고 할 때 그냥 푹 쉴걸 그랬다. 아델라는 이저드의 말을 따르지 않은 게 조금 찔렸다.

“그래서 뭘 연습하고 있었나?”

“음…… 저번에 보니까 벤슨 경이, 요렇게 저렇게 곡예를 하듯이 잘 피하더라고요. 그게 좀 궁금해서…… 잠시 해 봤는데, 제 유연성으로는 무리인 것 같습니다.”

“벤슨 경의 몸놀림은 따라 하지 않는 게 좋네. 관절이 남아나지 않을 거야.”

그래 보이긴 했다. 이런 기술도 있구나 하고 따라 해 본 것뿐이다. 딱 하루 시도해 본 것뿐인데 첫날부터 이저드한테 걸릴 줄은 몰랐다.

“피하는 훈련은 나한테 유효한 공격을 하면 그때 알려 주겠네.”

안 가르쳐 주겠다는 걸까……? 아델라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이저드를 쳐다보았다. 이저드는 그런 그녀와 반대로 조금 즐거운 마음이 들었다.

“시작하지.”

“아침 훈련의 연속입니까?”

“그렇게 생각해도 좋네.”

아델라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진검을 빼 들었다.

“아 참, 헤게이든 영애 건은 앞으로 어떻게 됩니까? 독약 구해 준 이는 잡았습니까?”

“린다 경이 말 안 했나?”

아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저드는 그녀의 행동으로 린다가 아델라를 이번 사건에서 조금 떨어뜨려 놓으려고 한다는 걸 바로 알았다.

“주변 인물들을 확인 중이네. 조만간 잡히겠지. 경은 별일 없었나?”

“네? 아, 네. 전 별일 없었습니다. 제가 표적이 될 것 같진 않지만, 조심하고 있습니다.”

“그래. 경한테는 미안할 일이 많군.”

이저드의 하늘빛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아델라는 그 모습이 참 청초하게 보여 순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누군가한테 청초하다는 단어를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미인은 역시 뭘 해도 미인…… 아, 이게 아닌데.

“아!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전 각하를 위한 거라면 뭐든 상관없습니다. 전 각하의 사람인 걸요.”

말을 뱉고 나니 묘한 기분이 들어 그녀는 뒤늦게 허둥지둥 말을 덧붙였다.

“뭐든 시켜만 주십쇼!”

이번엔 너무 굽실굽실하는 것 같은데. 아델라는 눈을 데르륵 굴렸다.

“그러니까…… 제 말은……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시라는…….”

민망한지 텀을 두고 계속 튀어나오는 아델라의 말에 이저드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알겠네. 그렇게 하지.”

그제야 아델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훈련에 임할 수 있었다. 이저드는 빠르게 변하는 아델라의 표정이 눈에 읽혀서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참았다.

* * *

아델라는 오늘도 땅바닥 신세였다.

그녀는 서글픈 눈으로 밤하늘에 떠 있는 둥근 달을 쳐다보았다. 오늘은 달이 참 예쁘구나. 별도 예쁘고. 하하하하하…….

이래서 피하는 훈련을 받을 수나 있을까.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나?”

“네, 그럼요.”

“왜 이렇게까지 하지? 몸을 이렇게 혹사하면서까지 훈련할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이유라면……. 아델라는 물끄러미 이저드를 올려다보았다. 이저드 때문이라고 하면 안 되겠지.

“제 미래를 위해서요. 앞으로 지켜야 할 게 너무 많은데, 전 너무 약하니까 강해지고 싶어요.”

확실한 이유가 되지는 못했지만 이저드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도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됩니까?”

아델라가 바닥에서 일어나 흙을 털며 물었다.

“하게.”

“린다 경이 말을 안 하니까 궁금해서 그러는데, 헤게이든 영애가 독약을 어디에 쓸 것 같습니까?”

오늘 벤슨한테 이저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아델라는 불안해졌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물은 것이다. 이저드는 어떻게 생각할지.

“내 개인적인 의견을 묻는 건가?”

“네.”

“경의 생각은?”

“전…….”

이저드가 묻자 아델라는 성심성의껏 고민했다. 린다가 선을 그어서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이러할 것이다, 라고 생각해 보긴 했다.

일단, 이저드는 절대 아니니 제외하고, 자신한테는 써 봤자 어떤 이익도 안 되니까 또 제외였다. 그럼 남은 건 린다라는 말인데…….

‘미치지 않고서야 린다 경한테? 아, 아닌가? 뺨도 때린 여잔데.’

“혹시…… 린다 경일까요? 그런데, 린다 경한테 독을 먹여서 헤게이든 영애가 얻는 게 뭐죠? 잃을 게 더 많지 않습니까?”

아델라는 자신이 말해 놓고도 의문이 들어 이저드한테 물었다. 그의 눈빛이 잠시간 부드럽게 빛났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거야…… 아예 빼도 박도 못하게 각하랑 척을 지게 되니까요. 자칫 잘못하면 약혼녀는커녕, 범죄자가 되는 걸요?”

설마 그 정도 생각을 마티나가 안 했을 리 없었다.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귀족은 귀족이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어릴 때부터 권력 관계와 알력 싸움을 배우면서 컸다. 그런 그녀가 세이즈 백작 가문과 제스트윈 공작 가문의 오랜 유대 관계를 모를 리가 없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훈계한다, 정도까지는 귀족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이루어지는 일이니 덮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세이즈 백작의 며느리인 린다를 죽이려는 것까지 넘어갈 수 있을 리 없었다.

“물론, 이 추측은…… 헤게이든 영애의 이성이 잘 박혀 있어야 말이 되지만요.”

만일 마티나가 사리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이성이 나가 있다면 다 소용없는 추측이긴 했다.

“그래. 일리 있는 말이네.”

이저드는 아델라의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아델라는 자신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 주는 이저드를 얼떨떨한 표정으로 보았다.

“진짜로, 린다 경한테 독을 먹이려는 거라면 어떡합니까? 린다 경이 위험한 거 아닙니까?”

린다한테 위험이 닥친 것치고, 린다도, 이저드도 딱히 이렇다 할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아델라는 둘의 태도 때문에 더 헷갈렸다. 지금 위험이 닥친 게 맞나?

이저드는 걱정 어린 눈빛을 한 아델라의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를 빤히 내려다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아델라 경.”

헉! 방금 심장 멈출 뻔. 이름 한 번 불렸을 뿐인데!

자신의 이름이지만, 자신의 이름같이 느껴지지 않는 그의 부름에 아델라는 잠시 넋을 잃었다. 평소보다 더 낮은 저음으로 부르니까 심장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콩닥콩닥 뛰었다.

“……예. 예?”

목소리가 조금 떨린 것 같지만, 아델라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경의 말대로 린다 경한테 독을 쓰는 건 득보다 실이 많네. 아무리 린다 경이 싫다고 하더라도 쉬이 죽일 수 없는 존재지. 린다 경의 뒤에는 세이즈 백작 가문이 버티고 있으니까.”

그 말은, 역시 독약은 린다한테 쓰지 않는다는 말일까? 그래서 이저드도, 린다도 이렇게 조용한 걸까?

“그럼…… 도대체 독약을 어디에 쓰죠?”

아델라는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이저드는 그런 아델라를 조용히 응시하며 기다렸다.

‘확실하지는 않으니까 지켜보자. 누구한테 독약을 쓸 건지. 죽일 목적인 건지, 화제를 만들 생각인 건지.’

린다는 그런 말을 했었다. 여기서 마티나가 린다를 죽일 목적이 아니라면…… 화제? 무엇을 위한 화젯거리지?

이저드는 독이 통하지 않으니 화젯거리가 될 일이 없고, 린다가 독약을 먹으면 마티나의 입지만 흔들린다. 결코 마티나가 원하는 쪽으로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티나가 원하는 것은 독약으로 인해 자신한테 유리하게 돌아갈 어떤 상황이었다. 독약을 이용해서 뭘 바꿀 작정일까?

무엇보다 마티나는 아델라가 회귀하는 동안 쭉 이저드의 약혼녀였다. 그렇다고 한다면, 괜히 린다한테 독을 먹여 자신이 위험에 처할 상황은 만들지 않을 터였다.

“린다 경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화제를 만들 생각일지도 모른다고요.”

아델라는 그렇게 말하고 힐끔 이저드를 살폈다. 그의 표정은 아까와 다름없었다.

“헤게이든 영애는 린다 경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죠?”

이저드는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실은 일련의 사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마티나는 하고많은 공작가 사람 중에 유독 린다를 싫어했다.

“린다 경을 어떻게 해 보고 싶은데, 그게 생각처럼 잘 안 돼서 독약을 선택한 거고요.”

“그럴 확률이 높지.”

“독약을 쓸 건데, 린다 경을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고, 린다 경을 위험에 빠뜨리는 동시에…… 자기 입지를 확보하는, 그런…… 화제는 뭘까요?”

아델라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가 이내 무언가 깨달은 듯 눈만 깜박였다. 그녀는 이 추측이 맞을까 하는 의심을 하며 조심스레 자신의 의견을 풀어 놨다.

“에이, 설마…… 스스로한테요? 어떤 독이냐에 따라 죽을 수도 있는데요?”

“경한테 쓸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봤나?”

이저드의 눈빛에 아주 살짝 웃음기가 스쳤다.

“저한테 써 봤자 얻을 게 없습니다. 그저, 하찮은 평민 한 명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는 것뿐인 걸요. 화젯거리도 없고, 영애의 상황이 바뀌지도 않죠.”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는 아델라를 보며 이저드의 눈빛이 평소보다 밝게 빛났다.

“내 생각도 그러네.”

으응? 그게 끝? 아델라는 벙 쪄서 이저드를 마주 보았다.

“네?”

“못 알아듣겠나? 경의 생각과 내 생각이 같다고 말하고 있네.”

“제…… 추측이 맞을 거라고요?”

이저드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요?”

“아마. 나도 그렇게 추측될 뿐이네. 앞으로의 상황은 더 지켜봐야 알겠지만.”

아델라는 그냥 이저드가 맞장구 쳐 주는 줄 알았다.

“혹시 제 말에 그냥 맞장구 쳐 주시는 거 아니죠?”

“내 행동이 그렇게 보였나?”

“아, 아뇨.”

아델라는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니까 얼떨떨했다.

이저드는 고개를 모로 살짝 기울이며 자기 자신을 의심하는 그녀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무래도 아델라는 자기 자신에 대해 아직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저드는 가끔 그녀한테 의견을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 *

“아, 아델라 경!”

“네? 어? 제니트 씨?”

아델라가 점심 식사를 마치고 잠시 쉬러 온 숙소 앞에 초조한 기색의 제니트가 서 있었다. 그녀는 아델라가 멀리에서 보이자 곧바로 달려왔다.

제니트는 아델라의 외모를 보고 살짝 주춤했다.

아름다운 외모라는 것은 알았지만 햇빛 아래에서 반짝이는 황금빛 눈동자를 마주치니 정말로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외모였다. 요새 계속 밤에만 본 탓에 태양 아래에서 이 정도 빛을 발하는 사람인 줄 몰랐다.

하녀는 잠시 입을 벌리고 아델라의 외모를 감상했다.

“제니트 씨?”

“아, 어머. 내 정신 좀 봐.”

제니트는 아델라의 목소리에 얼른 정신을 차리고 입을 뗐다.

“여, 영애께서. 헤게이든 영애께서 부르십니다.”

“절요?”

“네, 네. 저, 근데…… 경 말고, 린다 경도 부르셨어요.”

뭘 하려는 거지? 왜 둘 다 같이?

아델라는 어젯밤 이저드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목뒤가 싸한 것이, 좀 불안했다. 이러다 이번 생도 꼬이는 건 아닐까 모르겠다.

“알겠어요. 가죠.”

“괘, 괜찮을까요? 저번에 했던 대화도 걸리고…… 함정 같은 건 아닐까 싶고요…….”

“저도 그게 걸리지만, 린다 경이 있다는데 가야죠.”

제니트는 불안한 표정으로 아델라를 안내했다.

* * *

린다는 이미 마티나 방에 와 있었다. 제니트의 안내를 받아 아델라가 안으로 들어오자 린다의 인상이 미미하게 구겨졌다.

“제가 불렀어요. 이쪽으로 와서 앉으세요, 아델라 경.”

햇빛이 밝게 들어오는 창가에 앉아 있는 둘을 향해 아델라가 다가갔다.

“아델라 경은 왜 부르셨습니까?”

“사실…… 린다 경한테 고백할 게 있어요.”

린다의 회색빛 눈동자에는 어떤 궁금증도,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그저 마티나가 하는 양을 지켜볼 뿐이었다.

“제가 며칠 전부터, 아델라 경한테 무리한 부탁을 요청했어요.”

“네, 알고 있습니다.”

“역시 알고 계셨군요.”

아델라한테 린다에 대해 보고하라고 명령한 걸 말하는 것 같았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린다 경을 못 믿었던 건 절대 아니에요. 전 그저 아델라 경이 신분도 불분명하고 갑자기 들어온 사람이라 확인하고 싶었어요. 아델라 경이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인지, 각하께 피해를 주지 않을 사람인지…… 그 과정에서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릴게요. 죄송해요. 린다 경.”

마티나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아델라 경한테도 미안해요. 각하께 혹여나 위협이 될까 싶어…… 제가 경을 시험했어요.”

“아…… 아뇨, 괜찮습니다. 그, 그러실 수도 있죠.”

마티나가 아델라한테도 고개를 숙이는 사이 린다와 아델라의 시선이 부딪쳤다. 이건 무슨 상황?

아델라는 아주 잠깐 동안 린다의 미간에 주름이 파인 것을 보았다. 린다는 마티나가 어디까지 하나 그냥 아무 말 없이 지켜보았다.

“제 마음을 이해해 줘서 감사해요. 아시다시피 각하를 해하려는 적이 많아서…… 저도 걱정이 많았어요.”

마티나가 자신의 마음을 구구절절 표현하는 사이 세 사람 사이에 차와 디저트가 차려졌다.

“너무 죄송한 마음에, 제가 이것저것 준비해 봤어요. 입에 맞으셨으면 좋겠는데…….”

아델라는 자신의 찻잔을 빤히 보고 있었고, 린다는 창밖 정원을 보고 있었다. 자신의 말에 관심도 없어 보이는 둘을 보고 있자니 마티나는 독백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얼굴에 미소를 지우지 않고 계속 입을 열었다.

“린다 경? 차를 싫어하시면 다른 걸 내오라고 할까요?”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 정원에…… 각하께서…….”

린다가 일부러 뒷말을 끌며 계속 정원을 보자, 마티나를 포함한 시녀들과 하녀들까지 정원으로 시선을 돌렸다. 물론 아델라도.

“가, 각하께서요? 어디요?”

마티나를 포함해서 그곳에 있던 시녀들과 하녀들은 이저드의 그림자라도 찾아보겠다고 급하게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들의 얼굴에는 은근한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아뇨. 각하께서도 오시느냐고 물으려고 했습니다.”

급하게 눈동자를 굴리던 사람들 전부 딱딱하게 굳었다. 뭐 이런 이상한 사람이 다 있나 싶었다.

마티나는 애써 화를 꾸욱 눌러 참으며, 굳어버린 입가를 억지로 끌어 올렸다.

“오, 오시죠.”

처음부터 대답을 들으려고 물은 게 아니었기 때문에 린다는 아무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라는 린다가 방금 한 말이 어떤 신호인 것 같았다. 아니면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의도거나.

아델라는 곁눈질로 마티나의 찻잔과 린다의 찻잔을 훑었다.

‘이상하다……. 내가 잘못 봤나? 손잡이 방향이 둘 다 반대 아니었나?’

린다와 마티나의 찻잔은 큰 차이점이 없었지만, 사람들이 시선을 돌린 잠깐 사이 각도가 틀어져 있었다.

보통 자신이 자주 이용하는 손으로 찻잔 손잡이가 가 있을 텐데, 지금은 반대였다. 마티나는 오른손잡이였는데, 손잡이의 방향은 왼쪽으로 가 있었다. 린다 것도 함께.

이상함을 느낀 건 마티나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찻잔의 손잡이 방향이 오른쪽이었던 것 같은데, 왼쪽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시녀들이 실수를 했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지나간 마티나와 달리 아델라는 영 신경 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어쨌든 차는 맛있게 잘 마시겠습니다. 다음에는 각하께 부탁해서 백작가로 두 분을 초대해도 될까요?”

린다는 아무렇지 않게 찻잔의 손잡이를 오른쪽으로 돌리면서 웃었다.

“저한테는 크나큰 영광이죠.”

마티나와 린다는 서로를 보고 빙그레 웃었고, 둘은 천천히 자신들의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사이 아델라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뭔가 이상했다. 묘하게 싸했다.

아델라는 린다가 왜, 뭘, 어떻게 했는지 고민했다. 둘 사이에 자신이 낀 이유랑 어제 나눈 이저드와의 대화, 그리고 린다와의 대화.

‘만약 여기서 마티나가 독약을 먹고 쓰러진다면? 마티나가 바라는 건…… 린다 경을 궁지로 모는 건데……? 근데 왜 나까지? 날 이용해야 할 이유가 있나? 날 이용해서…… 린다 경의 명예를 실추시킬 수 있나?’

아델라가 물끄러미 린다를 바라보았다.

‘린다 경을 독약을 탄 주범으로 몰기에는…… 신뢰가 너무 두터워서 마티나를 믿어 주지 않을 거고, 린다 경의 뒤에는 세이즈 백작가가 든든히 버티고 있지?’

하지만 아델라는 달랐다.

아직 신입인 아델라는 쓰고 버려도 되는 소모품이었다. 거기에 린다가 걸리면 좋고, 안 걸리면 아델라만 치우면 된다.

그리고 마티나가 독약을 먹고 쓰러지면 분명 소문이 퍼질 거고, 마티나는 주변의 동정심을 살 것이 분명했다. 물론, 용의자 선상에서도 깔끔하게 빠질 것이다. 어느 누가 자신의 상황을 바꾸려고 독을 먹는 비정상적인 일을 하겠는가.

게다가 그렇게 되면 린다한테 향하는 눈빛은 조금 달라질지도 몰랐다. 린다는 아델라를 호위대까지 끌고 올라온 인물이다. 그런데 아델라가 독약을 탄 범인이라고 지목된다면, 그런 아델라를 데려온 린다를 의심할지도 모른다.

린다를 오랫동안 봐 온 인물들은 의심하지 않겠지만, 린다를 잘 모르는 성주민들과 귀족들은 다르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런데…… 마티나가 세운 이 계획을, 린다 경이 모르실까?’

그럴 리가.

그 짧은 순간 아델라의 머릿속에서 나온 결론은 린다도 이런 상황을 예상했다는 것이다. 아델라가 낄 것도 린다는 어느 정도 예상했을 것이다.

그럼 린다가 여기서 취할 행동은 무엇일까.

거기까지 생각한 아델라는 린다가 찻잔을 들어 올리는 순간 급하게 입을 열었다.

“헤이든 경!”

아델라는 정원을 바라보는 척하며 거짓말로 헤이든을 불렀다. 린다의 행동을 잠깐이라도 멈추게 하는 마법의 단어였다. 덕분에 린다에게 아주 잠깐, 틈이 생겼다.

휙!

아델라의 목표는 오직 하나였다. 린다의 찻잔!

그녀는 손을 뻗어 린다가 들고 있던 잔을 뺏었다. 그리고 막 입안으로 털어 넣은 찰나.

퍽!

쨍그랑!

린다의 매서운 손날이 아델라의 목으로 날아들었다.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고통에 놀란 아델라가 찻잔을 놓쳤다. 찻잔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이 조각났다.

그리고 아델라는.

“커헉!”

“꺄악!”

목을 부여잡고 고개를 숙였다.

“야, 이 미친! 미쳤냐! 삼켰어? 삼켰냐고!”

린다는 급한 마음에 아델라의 목젖을 쳐 버렸다. 일단 독약이 아델라의 목을 타넘어 가지 않게 하는 게 우선이었다.

“크흐흡.”

“야 씨, 마셨냐고!”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어떻게 사람 목부터 쳐 버릴 수가 있습니까! 어흐흑…… 아파!’

아델라가 울상을 하며 목을 부여잡고 있었지만 린다는 신경 쓰지 않고 아델라의 양 볼을 잡아들었다.

“목으로 넘어갔냐고!”

목으로 넘어갔는지 안 넘어갔는지 잘 모르겠다. 뭘 느끼기도 전에 목을 쳐 맞았으니.

“모, 모르겠는데요…….”

“그걸 네가 왜 처먹어!”

“그렇다고 린다 경이 먹게 둘 수는 없어서…….”

아델라는 생리적 아픔과 억울함에 훌쩍였다. 왜 구해 주고 욕을 처먹어야 하는지 너무 억울했다. 상황을 알아 버린 걸 어떡하라고!

원래 그냥 찻잔을 치기만 해도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델라가 그대로 독을 마신 건 마티나를 빼도 박도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지금 무슨 짓을 하려고 한 건지 똑똑히 보여 줘야 했으니까.

그런데 이 생각은 린다도 같았던 게 아니었나? 아델라는 엄청나게 화가 나 있는 린다를 보며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한 명은 화가 나 있고, 한 명은 훌쩍이고 있을 때, 이보다 더 당황한 이들은 마티나와 시녀들이었다. 그들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린다가 아델라를 다그치다가 흉흉한 기운으로 주변을 쓱 훑었다. 그녀는 마티나 옆에 있는 시녀한테 시선을 고정했다.

“내놔.”

“예, 예?”

“지금 당장 해독제 안 내놓으면…….”

‘음? 어? 잠시…… 속이?’

린다가 시녀한테 손을 내밀면서 한 발짝 한 발짝 다가가는 사이 아델라는 눈앞이 잠시 깜깜해짐을 느꼈다. 속도 이상했다.

“우! 웁!”

처음에는 손으로 막았지만 다음으로 치고 나오는 것은 막지 못했다. 식도를 역류하고 나온 것은 새빨간 핏물이었다.

아델라가 피를 토해 내자 마티나를 포함한 시녀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된 것이다.

“당장 해독제 내놔.”

“저, 저, 전……!”

“당장!”

린다의 고함에 시녀가 어깨를 움츠리며 품속에서 해독제를 꺼냈다. 린다는 시녀의 손에서 해독제를 채가서 곧바로 아델라한테 먹였다. 아델라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중에도 다행히 린다가 준 해독제를 잘 받아먹었다.

“얼마나 탔어?”

“네, 네? 네?”

린다가 아델라한테 해독제를 먹이는 와중에 인상을 쓰며 시녀한테 물었다.

“최소 용량 받았을 거 아니야! 죽지 않을 만큼만! 그게 어느 정도냐고!”

“그, 그, 그게……. 바, 방금 드린 해독제…… 만큼…….”

터무니없이 많은 양이었다. 어쩐지, 웬만큼 많이 쓰는 거 아니면 잘 나지 않는 독약의 향이 이번에는 잘 맡아진다 했다. 다 먹기 전에 찻잔을 쳐 내서 다행이지, 다 마셨으면 이 정도 양의 해독제로는 어림도 없었다.

어떤 놈이 알려 준 용량인지 잡히기만 해 봐라. 린다가 이를 갈았다.

“리, 린다 경, 오, 오해가…….”

마티나 역시 사람이 피를 토하는 장면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이라 덜덜 떨며 입을 열었다.

“피도 무서워하는 사람이…… 후…… 이제 당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하려고 했는지 알겠어? 내가 그쪽 찻잔이랑 내 찻잔을 안 바꿨으면 당신 지금 죽었어.”

린다는 아델라가 편하게 몸을 기댈 수 있게 받쳐 주면서 잠시 아델라를 안고 있었다. 아델라는 밭은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네가 날 궁지에 몰려고 했던 건 알겠어. 용서는 해 주지. 아델라 경을 이용해서 내 입지를 줄이려던 것도 용서해 주겠어, 특별히. 하지만 아델라 경이 잘못된다면 용서하지 않아. 부작용이나 중독 증상이 온다면 가만두지 않겠어.”

아델라의 호흡이 규칙적으로 변하길 기다린 린다는 바로 그녀를 업고 일어섰다.

“이 일은 당연히 각하께 보고할 거니까 허튼짓하지 말고 기다려. 그리고 앞으로…… 상대를 가려가면서 덤벼.”

린다는 화가 난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방에서 나갔다.

방 안은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듯 조용했다. 하녀들은 마티나의 눈치를 보며 엉망이 된 테이블을 주섬주섬 치웠다. 그들이 깨진 찻잔은 물론 여기저기 튄 핏자국을 닦는 동안 마티나는 넋이 나가 있었다.

“아, 아가씨? 아가씨.”

“이게…… 뭐야? 이게 뭐야? 죽어? 누가? 내가 죽을 뻔했다고?”

“부, 분명 린다 경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죽지 않는다며!”

“전 분명 그렇게 들었는데…….”

“누구한테? 누구한테 저딴 걸 받아 왔어!”

마티나는 뒤늦게 찾아온 분노에 시녀의 머리를 잡아챘다.

“네가 날 죽이려고 해? 네가, 감히?”

“아악! 아닙니다! 아니에요! 전 백작님께서 알려 주신 방법대로……!”

“뭐?”

“백작님께서 아가씨가 곤경에 처하면 쓰라고 알려 주신 방법입니다! 죽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오히려 가문에 도움이 될 거라고!”

마티나는 자기가 잘못 들은 줄 알고 동작을 멈췄다. 그녀는 뒤통수가 얼얼한 느낌이었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아버지가 그러셨을 리 없어. 양을 착각하신 거야.’

헤게이든 백작이 펜베르크 성에 도착하기 이틀 정도 남은 시점이었다.

* * *

린다가 급하게 향한 곳은 바로 옆 건물인 부사령관 집무실이었다. 린다가 복도 끝에서 나타나자 시종들이 인사를 해 왔다.

“인사는 됐어. 깨끗한 물하고 천 좀 준비해 줘. 안에 헤이든 있지?”

“네, 네. 린다 경, 옷에 피가…….”

“내 피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입조심하고.”

시종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얼른 헤이든한테 보고하려고 했지만 린다는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보고 없이 일단 문부터 열었다.

탁.

안에는 헤이든만 있지 않았다. 회의하고 있던 이저드와 헤이든은 넓은 소파에 앉아서 린다를 쳐다보았다.

밝은 표정으로 린다를 맞이하려던 헤이든은 린다의 상태를 빠르게 훑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린다, 피!”

“내 피 아니야. 비켜 봐.”

“어, 어?”

린다는 어정쩡하게 서 있는 헤이든한테 다가가 그를 옆으로 살짝 밀치고 소파 위에 아델라를 눕혔다. 헤이든은 아델라의 상태를 확인하고 눈을 크게 떴다.

때마침 밖에서 시종이 허둥지둥 깨끗한 물과 천을 가져왔다.

“무슨 일인가?”

“어떻게 된 거야?”

헤이든과 이저드가 동시에 물었다. 린다는 아델라한테 묻어 있는 피를 닦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각하께는 아델라 경이 정신 차리시면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후…… 사고 쳤어요.”

“누가?”

“누구겠어?”

린다가 헤이든을 올려다보았고, 헤이든은 이저드를 쳐다보았다. 이저드는 말없이 아델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헤게이든 영애? 그런데 아델라 경은 어쩌다……?”

그렇다고 린다가 당했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전혀 생뚱맞은 사람이 이 상태가 된 게 이해되지 않았다.

“눈치는 더럽게 빨라서. 내가 먹으려던 독을 아델라 경이 뺏어서 먹었어.”

“독을 먹었어?!”

훈련도 안 된 일반인한테는 소량도 치명적이었다.

“그 전에 여보, 독을 먹으려고 했다고?”

“어.”

“잠시만, 잠시. 너무 쉽게 말하는 거 아니야? 처음부터 설명해 줘.”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다. 이저드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왜 이렇게 됐는지 정확히 말해 줘야 할 것 같았다.

“헤게이든 영애가 점심쯤 날 불렀어. 그래서 독약 쓰려는 게 오늘이구나 했지. 그런데 영애가 아델라 경도 부른 거야. 거기서 알았어. 자기가 독을 먹고 날 범인으로 지목하면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거니까, 내가 보증하고 나서는 아델라 경한테 죄를 뒤집어씌울 생각이라는 거.”

“그래서?”

“공작 약혼녀나 시녀들이 봤다는데 아델라 경이 빠져나갈 방법이 있을까? 빠져나가더라도 소문은 아델라 경한테 안 좋게 변하겠지. 헤게이든 영애는 가엽고 불쌍한 사람이 될 거고.”

보편적으로 독약을 먹고 쓰러졌다는 소문이 돌면 일단 당사자는 범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가 여론을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독을 먹을 거라고 생각하겠는가.

마티나는 이 부분을 노렸다.

소문, 사람들 사이의 평판, 이미지, 이 모든 걸 자기한테 유리한 쪽으로 돌리려고 했던 것은 물론, 아델라를 물고 늘어져 린다의 입지를 좁히려고 했다.

아델라가 독을 먹는 바람에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됐지만. 오히려 이걸로 그녀는 확실한 범인이 됐다. 만일 아델라가 이것도 계산에 넣고 행동한 거라면 린다는 할 말이 없었다. 무모하기로는 세계 제일일 것이다.

“그래서 난, 영애가 누굴 상대하고 있는지 똑똑히 알려 주려고 영애의 독을 먹으려고 했어. 겁먹고 조용히 있어 주길 바라서.”

린다는 그 정도 독은 견딜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독을 먹고 아무렇지 않게 나올 생각이었다. 나중에 마티나가 알고 충격 받게 하려고. 그럼 좀, 이런 헛짓은 덜하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데, 아델라 경이 당신이 먹을 걸 눈치채고 대신 마셨다는 거고?”

“응. 아델라 경이 마신 덕분에 일이 커져서 증거, 증인, 모든 게 확실해졌긴 한데…… 얘 왜 이렇게 목숨을 막 쓰지?”

린다는 자기가 죽지 않을 게 확실했기 때문에 독을 마시려고 했던 거지만 아델라는 아니었다. 죽을 각오로 마셔야 했다.

깊은 잠에 빠진 아델라를 빤히 보던 린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건 훈련을 열심히 해서 몸을 혹사하는 문제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뭐가 그녀를 목숨조차 아끼지 않게 하는 건지.

“해독제는?”

상황을 전해들은 이저드가 무겁게 입을 뗐다.

“거의 바로 먹였어요. 생명에 지장은 없을 거지만…… 속은 많이 상했겠죠.”

아델라를 보는 이저드의 눈빛이 복잡하게 빛났다.

“기력을 보충할 수 있는 약을 지어 오라고 이르겠네. 그리고 경은 이따가 아델라 경을 손님방으로 옮기게. 계속 여기에 눕혀 둘 수는 없지 않나.”

“예, 알겠습니다.”

이저드의 명에 헤이든이 고개를 숙였다. 이저드는 그렇게 명을 내리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각하께서는 어디 가십니까?”

“처분을 지체할 이유가 없지 않나. 헤게이든 백작이 오기 전에 해결해도 될 일 같네. 아, 경은 따라오지 않아도 괜찮아.”

그렇게 말하고 나간 이저드를 보며 헤이든은 린다와 시선을 교환했다.

“아델라 경은 내가 옮길 테니까 따라가. 얼른.”

역시 그래야겠지. 린다의 말에 헤이든이 얼른 이저드를 따라 나갔다.

한편, 문을 닫고 나온 이저드는 이상한 현상을 겪어야 했다. 머리와 심장이 따로 노는 기분이었다. 머리는 차갑게 식어 가는데, 심장은……. 그는 심장 부근에 손을 가져다 올렸다. 역시 빠르게 뛰고 있었다. 가슴이 이상하게 답답했다.

“각하, 괜찮으십니까?”

뒤이어 나온 헤이든이 걱정되어 물었다.

“경.”

“예?”

“내가 지금 평소와 다른 점이 있나?”

다른 점이 있으니 걱정돼서 나온 걸 그대로 고할 순 없었기에 헤이든은 잠시 고민하는 척했다.

“……표정이요?”

“내 표정이?”

“예. 화나 보이신다고 할까요?”

사실 표정은 여전했다.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린다와 헤이든이 평소와 다르다고 느낀 건 그의 분위기였다.

평소에도 냉기가 안 날렸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무표정의 얼굴에서는 아릴 듯한 냉기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본인은 모르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조금, 진정하셔야 할 것 같은……?”

“내가?”

“예.”

“……그렇군.”

헤이든이 이저드를 상대로 거짓말하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에 이저드는 순순히 인정했다. 이저드는 자기가 왜 이러는지 곰곰이 고민하면서 조금씩 원래의 페이스를 되찾았다.

“가지.”

어느 정도 마음을 진정시킨 그는 다시 걸음을 뗐다.

* * *

아델라는 잠에 취해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처음에는 린다가 보였다. 무슨 약을 먹였던 것 같았다. 린다는 아델라가 눈을 껌벅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너 정신 차리면 진짜 가만 안 둬.”

그 말만 듣고 아델라는 또 잠이 들었다.

아델라를 비추는 햇빛이 점점 모습을 감추고 어스름하게 어둠이 깔릴 즈음, 다시 정신이 들었다. 가물가물한 시야 속에 무표정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저드가 보였다.

‘화가 나셨나?’

평소와 같은 무표정인데 어쩐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아델라는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었다가 내렸다. 도무지 잠이 깨지 않았다.

“경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저드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경이 앞으로도 이런 위험 행동을 한다면, 난 경을 계속 옆에 둘 수가 없네.”

아델라는 졸려서 죽겠는 가운데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아무래도 이번에 자신이 뭔가 크게 잘못한 것 같았다.

“나는 경이 목숨을 소중히 여기길 바라는데, 경은 자기 목숨을 하찮게 여기니…… 이 일이 아니라도 경과 나는 오래갈 수 없을 거네. 나는 내 사람들이 손쓸 수 없이 죽는 게 두려워.”

이저드는 눈을 뜨지 않는 아델라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꼭 변명하는 것 같았다. 그냥 앞으로 말없이 거리를 벌리면 될 것을, 왜 아델라한테 변명을 하고 있는지 이저드도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앞으로 경을 따로 볼 일은 없을 거네. 따로 부르지도 않을 거야. 물론, 전장에도 경을 데리고 나갈 수 없어.”

이저드는 들릴 리 없는 사람한테 이런 말을 하는 자신이 참으로 한심했다. 앞으로 바뀔 자신의 태도를 아델라가 이해해 주기를 원하기라도 하는 듯했다.

아델라의 눈썹이 움찔했다. 이저드는 그녀가 깨려고 한다는 걸 알아채고 자리를 피하려 몸을 움직였다.

꽈악.

아델라는 있는 힘껏 이저드의 옷깃을 쥐었다. 하지만 손에 힘이 잘 안 들어가는지 금방 그의 옷깃을 놓쳤다. 그래도 이저드를 멈추게 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요.”

“……?”

눈도 못 뜬 아델라가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뻐끔뻐끔했다. 이저드는 망설이다 하는 수 없이 그녀한테 몸을 숙여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뭐라고 하는 건가.”

“……돼요. 안, 돼요.”

평소라면 절대 울지 않았을 아델라가 졸음과 약 기운에 눈물을 보였다.

“그러지 마세요……. 죽어요. 진짜 죽어요……. 또 다…….”

“……누가? 경이?”

“흐흡……. 안 돼요. 죄송해요. 전장에 나가게 해 주세요……. 같이, 제발…….”

하지만 아직 제정신이 아닌 아델라한테 제대로 된 대답이 돌아올 리 없었다. 그녀는 계속 반복해서 안 된다, 죄송하다, 죽는다, 이런 말만 늘어놓았다.

이저드는 눈도 못 뜨고 우는 아델라를 당혹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정말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는 필사적으로 자신을 잡는 아델라를 한참 보다가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알겠네. 알겠으니 그만 울게.”

이렇게까지 우는 이유는 나중에 듣기로 하고, 일단은 그녀를 달랬다. 다행히 아델라는 금방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들었다. 언제 울었냐는 듯이 꿀잠을 자는 아델라를 보며 잠꼬대였나 싶기도 했다.

이저드는 도대체 어떤 부분에서 저렇게 서러웠는지 고민했다. 전장? 전장에 못 데리고 나간다고 했을 때? 죽는다는 말은 뭐지?

분명 ‘또 다,’ 라는 말을 했다. 이저드는 ‘다’라는 말도 마음에 걸렸지만, 그 전에 ‘또’라는 말이 훨씬 신경 쓰였다.

그는 아델라의 얼굴에서 마저 눈물을 닦아 주고 침대 머리맡 쪽에 있는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그녀가 했던 말을 곱씹으려고 앉았는데, 그보다 아델라의 볼을 쓸었던 감촉이 불쑥 먼저 생각났다. 이저드는 너무 당황스러워 한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변탠가. 어떻게 이렇게 무례한 생각을.

‘경, 왜 자꾸 아델라 경의 볼을 그렇게 잡아당기나? 경이 하면 무척 아파.’

‘최대한 자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델라 경의 볼은 말랑말랑하고 보들보들하고! 어쨌든 손에 착 감기는…… 말하고 보니 좀 변태 같군요.’

‘변태 맞네.’

‘너무하시네요. 각하께서는 아무것도 모르세요.’

일전에 린다와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그 기분을 조금 알 것도 같은…….

‘미쳤군.’

미친 게 분명했다. 자는 사람을 보고 이게 무슨.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아델라의 자는 얼굴을 보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평소엔 한숨을 잘 안 쉬는데 이번만큼은 한숨을 쉬고 싶었다.

이저드는 그렇게 동이 터올 때까지 아델라의 곁을 지켰다.

* * *

아델라가 제대로 눈을 뜬 건 동이 틀 무렵이었다. 자고 깨기를 반복했던 어제와는 다르게 말똥말똥하게 눈이 떠졌다.

아델라는 주변 사물이 눈에 들어오기까지 눈을 여러 번 깜박였다. 그러자 곧 그녀의 눈에 희미하게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헉!”

작게 소리를 냈는데도 불구하고 옆에서 잠들었던 이저드가 깼다. 아델라는 어둠 속에서도 훤한 남자의 미모에 심장이 벌렁거려 숨을 참았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깼나?”

“후아아아…… 왜, 왜 그러고 계십니까?”

엄청나게 잘생긴 귀신이 있는 줄 알았다.

이저드는 불편해 보이는 나무 의자에 앉아 잠을 잔 것 같았다. 아델라는 푹신한 침대 위에서 주변을 둘러봤다. 모르는 곳이었다.

“여긴 어디……?”

“손님방이네. 어제 일은 기억나나?”

“아…… 네.”

독 먹고 피 토하고……. 아델라는 슬쩍 이저드의 눈치를 살폈다.

“그 후의 일은?”

그 후? 기절한 다음 일을 말하는 건가?

아델라는 멀뚱히 이저드를 바라보았다. 이저드의 미간이 아주, 아주, 아주 미미하게 구겨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닌가? 구겨졌나?

아델라는 자신이 기억하는 부분 중에 무언가 빠뜨린 것이 있나 과거를 되짚어 보았다.

‘독을 마시고, 피를 토하고, 린다 경이 업어 오고. 중간에 린다 경이 또 업어서, 여기에 옮겨 놓은 것 같은데. 그리고…… 중간 중간 무슨 약을 마시고…… 그리고 또 있나?’

중간에 린다와 헤이든을 보고, 이저드를 봤었다.

‘각하께서 여기 계속 계셨나? 언제부터 계셨지? 내가 각하께 무슨 헛소리라도 했나? 그래서 묻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기억나지 않았다. 아, 울었던 것 같은데. 꿈을 꿔서 그랬나. 아델라는 멍하니 이저드를 보다가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정신없이 뭘 잡았던 것 같은데…….’

그러다 아델라의 머릿속을 번뜩이며 지나가는 어떤 장면이 있었다.

울며불며……. 울며…… 불며…….

아델라는 퍼뜩 이저드를 보았다. 그는 눈으로 기억해 냈냐고 묻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동공이 떨리는 줄도 모르고 이불을 끌어 올려 얼굴까지 덮었다. 갑자기 졸음이 쏟아지는 것도 같았다.

“정신 차린 거 다 아네.”

그의 말에도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이불을 덮고 있었다. 이저드는 그 모습을 보면서 화가 나기는커녕 웃음이 나왔다.

“그럼, 그대로 듣게.”

‘설마 혼나는 건가?’

이불 속에서 눈을 열심히 굴리던 아델라는 하는 수 없이 이불을 치웠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이저드가 손을 들어 그녀의 행동을 저지했다.

“누워서 듣게. 아직 움직이면 안 되는 몸이야.”

괘, 괜찮은 것 같은데…….

아델라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저드의 말에 따라 얌전히 누워 있었다.

“여태껏 경이 말하기를 꺼려서 묻지 않았지만, 오늘은 말해 줘야겠네.”

“뭘…… 말입니까?”

말 안 한 게 너무 많아서 그가 뭘 궁금해 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우선 경이 어제 한 말의 의미부터 들어보지.”

“어제……요?”

“그래.”

아델라는 침울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역시 어제 울면서 부탁한 걸 말하는 거겠지……. 아휴! 왜 그랬어, 아델라야!’

머리를 벽에 쾅쾅 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델라는 우물쭈물했다.

“경이 알고 있는 그대로를 말해 주면 되네. 빠짐없이.”

“그…….”

믿어 주실까? 눈 딱 감고 말해 볼까?

모든 생에서 아델라는 회귀에 대한 사실을 누군가한테 털어놓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경의 말에 따라 내가 경을 전장에 데리고 나갈지, 말지가 결정되네.”

아델라가 계속 망설이자 이저드는 어제 그녀가 반응한 말을 입에 담았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드디어 이저드를 향했다.

“아, 안…….”

“그래. 그 안 되는 이유를 알려 주게. 타당하다면 재고해 보지.”

아이고, 아이고. 입은 왜 이렇게 정직한 거야!

그녀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이저드는 그녀의 표정을 구경하면서 시간을 가지고 기다렸다.

“하…….”

숨긴다고 뭐가 달라질까.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아델라는 곧 정신을 차리고 굳게 마음먹었다. 전장에 못 나가면 이 생고생도 말짱 도루묵이었다. 이번 일이 잘못된다면 어차피 다음 생이 또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원하든 원치 않든 그녀의 운명은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

“여기 저랑 각하 딱 단둘뿐이죠?”

이저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말이 안 믿기실지 몰라요.”

“그럴 수도 있겠지.”

“아니, 완전히 미쳤다고 생각할지도 몰라요.”

“그래.”

아델라의 말에 이저드는 담담히 대답했다. 이 정도로 겁을 줘도 이저드는 흔들림이 없었다. 아델라는 호흡을 길게 내쉬고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 미래를 알아요.”

무슨 말을 하든 믿어 보자고 생각한 순간 너무나 허무맹랑한 소리를 들었다. 이저드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 아델라의 표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표정으로 봐서는 정말 힘들게 꺼낸 이야기 같았다. 그녀는 심각하게 당시의 기억을 되짚고 있었다.

그녀가 천천히 앞으로 벌어질 일과 자신이 겪은 일을 하나하나 털어놓기 시작했고, 이저드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믿기지 않을 뿐이었다.

* * *

“……그래서, 경이 그렇게 무모한 거였군. 이번에 독약을 먹은 것도, 나한테 이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털어놔도 되는 것도 모두 경은 죽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인가?”

“그런 마음이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같은 생을 계속 반복해서 살다 보면, 조금만 틀어져도 그런 유혹에 빠지긴 해요.”

그렇게 치면 그녀가 여태 몸 안 사리고 생활한 이유가 이해되었다.

내일이 없는 듯이 몸을 혹사시킨 것도, 아무렇지 않게 독약을 들이켠 것도, 믿어 줄지 아닐지 확신도 없는 상대한테 허무맹랑할 수 있는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도, 모두.

“내가 이 말을 믿을 거라 생각하나?”

“믿지 않으시면…… 전 또 이 일을 반복하게 되겠죠. 이번 생보다는 다음 생이 좀 더 낫길 바라면서요.”

아델라는 큰 기대를 걸고 모든 사실을 털어놓은 건 아니었다. 이번 생에 털어놔서 잘못되면 다음 생을 노릴 생각이었다. 어차피 지난 생들이 다 그런 식이었으니까. 아쉬운 것이 있다면 이번 생은 궤도를 아예 달리하게 돼서 실마리를 잡을 수 있게 됐는데 이쯤에서 끝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저드는 대수롭지 않게 다음 생을 말하는 아델라를 빤히 보았다. 저리 흔들림 없이 말하니까 안 믿기도 힘들었고, 그렇다고 믿기도 힘들었다. 그는 그녀의 말에 뭐라 대답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경이라면 믿을 수 있겠나? 내가 죽고, 펜베르크 성이 함락을 당한다는데.”

“저도 미래에서 돌아올 때까지는 못 믿었습니다. 이해합니다.”

이저드는 어디서부터 뭘 짚어야 할지 당혹스러웠다.

자신이 전장에서 죽는 것보다는 펜베르크 성이 함락 당한다는 사실이 더 믿기지 않았다. 역사상 단 한 번도 그런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장담할 수 있나?”

“장담은……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번 생이 많이 바뀐 거라……. 지난 생들은 모두, 같은 시점에 전쟁이 터졌습니다.”

이저드는 긴가민가했지만 아델라의 말을 받아들였다. 두 달짜리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앞으로 따져 보면 될 일이었다.

“그럼 전쟁에서 내가 죽지 않고, 왕국이 승리하면 경도 더는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일단은 그렇습니다. 그 뒤의 생은…… 제가 겪어 본 바가 없어서…….”

“만일 전쟁에서 승리했는데도 경이 죽으면?”

“그건…… 아직 생각해 본 적이 없지만…… 그럼, 다시 생을 살아야겠죠?”

“다시 살 수 있다는 걸 어떻게 확신하나? 경은 언제나 전쟁에서 죽어서 돌아온 거 아닌가. 그럼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죽으면?”

아델라는 조용히 허공을 쳐다보았다. 이저드에게 모두 다 말했지만 딱 하나, 말하지 않은 사실이 있었다.

바로 흑마법을 자기 자신한테 걸었다는 것. 아델라는 자기가 흑마법사라는 것만큼은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었다. 어떤 트라우마가 있었기 때문이다.

“확신은 못 하지만…… 죽지 않을 겁니다.”

아델라의 눈빛은 확고했다. 무언가 믿는 부분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저드는 더 묻지 않고 가만히 그녀를 마주 보았다.

“이 이야기, 나와 경만 아는 사실인가?”

“네. 누가 물은 적도 없고, 제가 먼저 말한 적도 없어요.”

“그럼 앞으로 경과 나만 아는 걸로 해 두지.”

이저드는 이 말이 불러올 파장을 걱정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있을…… 왕의 첩자한테 정보가 들어가지 않길 원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진위는 차차 확인하겠네.”

“어? 제 말을…… 믿으세요?”

아델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델라는 이저드가 이 이야기를 믿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이저드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믿기 힘들 이야기였던 것이다.

“믿기 힘들지만, 믿어 보도록 노력하지. 내가 믿지 않으면 경은 또 같은 생을 반복할 거 아닌가. 무엇보다 나도 내 사람들을 두고 죽고 싶진 않아.”

이저드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듣고 싶은 말은 다 들었다. 비현실적인 이야기였지만 아델라가 숨겨 뒀던 속 이야기는 다 들은 것 같았다. 그는 그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어차피 죽음의 위기는 항상 겪어 왔다. 그가 앞으로 신경 써야 할 것은 펜베르크 성이었다. 함락 당하는 이유가 자신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으면 됐고, 다른 이유라면 해결 방안을 찾으면 된다. 분명히 어떤 원인이 있을 터였다.

“진짜 믿으세요?”

아델라는 자신이 묻고 자기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경이 말하고 경이 놀랄 일인가? 난 확실히 믿는다고 말하지는 않았네. 믿어 보겠다는 거지.”

이저드가 설핏 미소를 띤 것도 같았다.

안 그래도 잘생긴 사람이 평소 잘 움직이지도 않는 입꼬리를 살짝 움직인 것만으로도 아델라는 잠시 영혼을 가출시켰다. 이런 기분을 홀렸다고 하는 걸까.

“그럼 쉬게. 참고로 오늘 경은 벌을 받는 거라서 이 방에서 나가면 안 되네. 이왕이면 침대에서 꼼짝 말고 있었으면 좋겠군. 삼시 세끼 꼬박꼬박 챙겨 먹고, 약도 먹고 있게. 필요한 건 밖에 있는 하녀들을 시키게.”

“……예?”

아델라가 어리둥절하게 이저드를 쳐다보자, 이저드는 무슨 문제 있냐는 표정이었다.

‘어라……? 이렇게 쉽게 넘어갈 일인가? 난 왜 그동안 숨겼지?’

지난 생들이 허탈해지는 기분이었다.

“아, 아니에요.”

“알겠네. 몸이 좀 괜찮아지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지.”

이저드는 그렇게 말하고 방을 나갔다. 아델라는 아직도 믿기지 않아 천장만 끔뻑끔뻑 쳐다보았다.

* * *

마티나는 헤게이든 백작이 펜베르크 성에 당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초조해서 방 안을 빙빙 돌아다녔다. 그녀는 자기 아버지가 이번 상황을 정리해 줄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얼마 전 만난 이저드가 생각나 불안했다.

아델라가 독약을 먹고 쓰러진 바로 그날, 마티나는 약혼자 자격을 박탈당했다. 이유는 마티나도 잘 알고 있어서 그날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헤게이든 백작이 손을 쓰든가, 거래를 걸면 자신의 원래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헤게이든 백작은 왕의 측근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공작이라도 아버지를 무시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녀가 불안에 떠는 이유는 차갑게 자신을 내려다보던 이저드의 눈빛 때문이었다. 아무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을 때와는 사뭇 달랐다.

그때 본 이저드의 눈에는 시리도록 차가운 적의가 담겨 있었다. 마티나는 이저드한테 미움을 살 생각은 없었다.

똑똑.

“아가씨, 백작님께서…….”

벌컥.

시녀의 목소리가 다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렸고, 헤게이든 백작이 잔뜩 인상을 쓰며 안으로 들어왔다.

“아, 아버지! 어떻게 됐어요? 어떻게?”

“왜 그런 짓을 벌였느냐?”

“어찌 됐습니까!”

부녀는 서로가 궁금한 말만 물었다.

헤게이든 백작은 필사적인 딸의 표정을 보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짐 챙기거라.”

“예, 예?”

“이게 무슨 망신이냐! 내가 이러라고 널 공작한테 보낸 줄 아느냐?”

“그게 무슨 소립니까?”

“뭣들 하느냐! 들어와서 짐을 챙겨라. 마차로 옮겨 실어.”

마티나는 헤게이든 백작의 말을 이해하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그런 딸아이를 향해 다시 혀를 찼다.

“쯧쯧. 내가 준 걸 제대로 썼으면 네가 이런 수모를 당할 일도, 내가 이런 수모를 당할 일도 없었을 것을. 어찌 사내 하나 제대로 홀리지 못해서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해! 일어서거라! 뭘 잘했다고.”

“전…….”

“네 덕분에 전하의 눈 밖에 났다! 백작가로 돌아가면 왕가 쪽에 줄을 댈 거다. 그렇게 알거라. 공작이 먼저 약혼을 파기한 걸로 합의를 봤으니 혼처 자리는 구할 수 있을 게다.”

마티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전, 그저……. 전…… 그분을…….”

“네가 공작 좋아하는 티를 낼 때부터 내 짐작은 했지만, 꿈도 꾸지 말았어야지. 너와 공작은 적이었느니라.”

“……아니에요! 전 그분의 진정한 아내가 되길 원했습니다! 그저 좋은 부부가 되길……!”

“이렇게 될까 봐 우려했다. 그놈을 홀려서 널 믿게 했어야지, 네가 홀려서야 되겠느냐! 전하를 배신할 뻔했지 않느냐!”

마티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껴 울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전 전하를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분을, 그분을 사랑했을 뿐입니다! 흑흑!”

“정략결혼에 사랑 따윈 없다고 내 그리 일렀거늘.”

헤게이든 백작은 울고 있는 마티나를 두고 그녀의 짐 몇 개를 들었다. 그러곤 방을 나서기 전에 마티나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조용히 있든가, 처리할 거면 아예 증거 인멸을 했어야지. 이렇게 어리석어서야.”

헤게이든 백작은 이곳에 오기 전에 들은 그 이름을 곱씹었다.

마티나의 뒤통수를 거하게 친 사람이자 이번에 새로 호위병으로 임명됐다는 여인. 출신 성분이 불분명한데도 불구하고 린다가 싸고도는 사람.

‘아델라.’

아델라라는 이름이 워낙 흔해서 그의 머릿속에서도 여러 명의 아델라가 지나갔다.

갈색 머리에 황금빛 눈동자, 아름다운 외모, 나이는 스물하나. 가족 관계는 모르고, 글을 읽을 줄 알고, 글을 쓸 줄도 알고, 몸에 밴 습관이 평민 같지 않고.

그가 아는 다른 아델라를 이리저리 지우다 보니 누군가가 떠올랐다. 일단 외모와 나이는 맞았다. 그 외에는 정확히 듣질 않아서 확신할 수가 없었다.

백작은 웅장하고 넓은 저택을 한번 돌아보고 곧바로 마차에 올라탔다. 그는 마티나만 백작가로 보내고 자신은 수도로 향할 생각이었다.

* * *

“경.”

“예?”

헤이든은 이저드의 책상에 서류를 올려놓으려다 움찔하고 멈췄다. 잘못…… 올렸나? 헤이든은 자신이 올린 서류의 내용을 빠르게 훑었다. 별문제 없었다.

“경은 내가 죽는다면 무슨 이유로 죽을 것 같나?”

“예? 누가……? 각하께서요?”

헤이든의 푸른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갑자기 이런 건 왜 묻는 거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헤이든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 갔다.

“새, 생을 포기하려는 건 아니시죠?”

“그럴 생각 없네.”

“그럼 왜 갑자기……?”

“만일 내가 전장에서 죽는다면 무슨 이유 때문일지 궁금해져서 말이야.”

헤이든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침착하게 생각해 보았다. 아무래도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해야 하는 질문 같았다. 이저드가 전장에서 진다는 가정은 해본 적이 없어서.

“전장에서면…… 져서? 그런데 져 본 전적이 없으셔서 상상은 안 갑니다만.”

이저드도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헤이든은 이저드가 전장에서 죽을 걸 걱정하는 건 처음이라 난감한 표정으로 다시 생각에 빠졌다.

“아니면…… 이전에는 없던 독이 발명돼서…… 독침을 맞고?”

도대체 전장에서 어떻게 죽는다는 말이지?

“그것도 아니면, 인해 전술?”

이저드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헤이든은 곁눈질로 이저드의 표정을 살폈다.

“그럼…… 배신?”

“배신?”

“여태 배신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방법으로 허를 찌르는 배신자가 나타날지도요?”

“그 새로운 방법이란 게 뭔가? 날 죽음으로 몰 정도의 방법은 상상이 안 가네만.”

이저드의 말을 듣고 보니 그랬다. 일단 던져 보긴 했는데, 웬만한 방법으로는 이저드의 털끝 하나 못 건드릴 터였다.

“솔직히 그건 저도 상상이 안 갑니다만…….”

이저드와 헤이든은 또 말이 없었다. 한참 만에 입을 연 쪽은 헤이든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어느샌가 근심 걱정이 떠올랐다.

“정말 만에 하나의 일인데요. 죽을병에 걸리셨다거나……?”

“갑자기?”

“갑자기라뇨?”

“……아니네.”

으응? 방금 대화 이상하지 않았나? 헤이든은 이저드를 빤히 보다가 이내 그의 말을 이해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 근시일 내에 전장에서 죽는다면, 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마도.”

“그럼…… 전염병?”

여태 전장에서 전염병을 얻은 적은 없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그것도 염두에 둘 수는 있겠군. 그럼 하나 더 묻겠네만, 경은 전쟁 중에 내가 죽으면 어쩔 건가?”

“음…… 충격을 받긴 하겠지만, 제가 진두지휘를 해야 하니 정신은 차릴 것 같습니다.”

“다른 이들은 어떨 것 같나?”

호위병들은 충격이 엄청날 터였다. 헤이든은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정신이라도 차리겠지만 다른 이들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

전장에서 적장의 목부터 치려는 이유가 다 이것 때문이었다. 사기. 전투 중에 사기는 정말 중요한 요소였다. 특히 이저드처럼 호위병들이 전적으로 믿고 따르는 이가 눈앞에서 죽는다면, 사기가 꺾이다 못해 사라질지도 몰랐다. 헤이든은 이저드가 죽은 후 벌어질 일들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헤이든의 얼굴이 금방 어두워졌다. 공작을 굳게 믿던 이들을 어떻게 정신 차리게 한담.

“아니, 근데, 왜 꼭, 죽을 거라는 가정을 하십니까? 절대 안 돌아가신다면서요. 저희 두고 먼저 안 죽는다고 하셨잖습니까.”

“지금도 죽을 생각은 없지만, 혹시 모를 일이라는 게 발생하지 않나. 대비 정도는 해야지.”

평소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를 입에도 담지 않던 사람이 이러니까 헤이든은 조금 불안했다. 헤이든은 이저드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마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살기 위해 그렇게 발버둥 쳤는데, 갑자기 죽는다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죽지 않을 거니까.”

“당연하죠. 절대 죽게 두지 않을 겁니다.”

“든든하군.”

이저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대비는 해야 하니, 앞으로 훈련은 경이 맡게.”

“예? 제가 호위대를요?”

“그래. 린다 경과 돌아가면서 하게. 상급 수비병 훈련도 둘이 돌아가면서 해.”

“예에? 린다는 왜요?”

“다음 전장에는 누가 나갈지 모르지 않나.”

이저드의 말에 헤이든은 할 말이 없어 얌전히 입을 닫았다.

둘 중 한 명은 성에 남아야 하는데, 둘은 매번 서로가 전장에 나가겠다고 싸웠다. 보통 린다가 밖으로 많이 나갔지만, 이번만큼은 헤이든이 나갈 생각이었다. 물론 린다는 자기가 나갈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그리고 이오스와 붙어 있는 국경 마을 중에 사칠이라는 곳을 아나?”

“전 들어본 적 없습니다.”

“매우 작은 마을이라 못 들어본 사람이 많을 거야. 그곳에 믿을 만한 사람 한 명만 보내 놓게.”

“한 명만요?”

“그래. 수상한 움직임이나 이상한 이야기가 돌면 바로 연락할 수 있게 부탁하네.”

“예. 명 받들겠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십니까?”

“확인할 게 있어서 그러네.”

아델라가 처음 습격이 일어났다고 했던 곳이다. 그곳을 시작으로 그 주변 일대는 모조리 초토화된다. 아델라도 당시 하급 수비병 때 보고로만 들은 사실이라서 정확한지는 모른다고 했지만, 사칠이라는 마을 이름은 제대로 들었다고 했다.

이저드는 사실 이 말을 전부 다 믿을 수가 없었다.

사칠이라는,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작은 마을을 적국에서 칠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작은 마을을 쳐서 그들이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국제적으로 이오스의 이미지만 안 좋아질 터였다.

전쟁이 발발한다 한들, 죄 없는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죽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보통 마을을 피해서 전쟁을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도시나 마을에서 하게 되더라도 최대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아델라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적국에서는 마을이고 도시고, 백성이고 병사고 상관없이 전부 공격했다고 했다. 정복 전쟁이 목적이 아니라 꼭 학살을 위해 일어나는 전쟁 같았다고…….

하지만 이오스와 여러 번의 전투를 겪으면서 이오스가 그런 식으로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럼 둘 중 하나였다.

아델라가 거짓말을 하고 있든지, 이오스 왕국에서 그전까지는 간만 보고 있었든지. 전자면 아델라 하나만 쳐내면 되지만, 후자면…… 이오스 왕국에서 태도를 달리한 어떤 결정적 계기가 있을 것이었다.

“내가 시킨 일은 린다 경한테도 비밀일세.”

“그렇다는 건, 각하와 저만 알고 있어야 한다는 거고요.”

“그래.”

헤이든은 이저드의 의중을 알 수 없었지만, 그가 하는 일에는 무조건 이유가 있었기에 고개를 숙였다.

* * *

“―알겠지!”

아델라는 혼이 쏙 빠진 표정을 하며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린다한테 잡혀 어떻게 그렇게 무모할 수가 있느냐부터 시작해 한 번만 더 그러면 가만 안 둘 줄 알라까지 일장 연설을 들어야 했다. 두들겨 맞는 게 차라리 나을 정도로 긴 시간을 붙잡혀 있었다.

“그, 그치만 린다 경도 그거 마시려고 했잖아요…….”

“내가 너랑 같냐!”

“아픈 건 똑같잖아요…….”

꼬박꼬박 말대꾸하는 것을 보니 많이 괜찮아진 듯했다.

“안 똑같다? 난 그거 먹고 기절하지도 않고, 그거 먹고 피를 토하지도 않거든. 그래서 마시려고 한 거고.”

“그거…… 독이었는데요?”

“그런데?”

호위병들이 독에 대한 내성 훈련을 한다는 건 얼마 전에 들었지만…… 그게 독을 들이켜도 괜찮다는 의미였어? 아델라는 커다란 황금빛 눈을 동그랗게 뜨고 린다를 바라보았다.

“독이잖아요!”

“그게 뭐.”

독에 내성이 생기면 다들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독을 마실 생각을 하나? 물론, 그렇지 않았다. 무슨 독인지 분별하고 망설임 없이 들이켤 수 있는 사람은 호위대 안에서도 드물었다.

“린다 경은 혹시…… 사람이 아닌가요?”

“이놈이? 장난할 기운이 있나 보지?”

린다가 아델라한테 막 손을 뻗기 전에 그녀는 얼른 볼을 가렸다.

“제 볼은 안 돼요!”

자제한다는 게 습관적으로. 린다는 허공에서 멈춘 손을 슬며시 내렸다. 아직 안정을 취해야 하니까 참는다.

“어쨌든. 다음에 한 번만 더 그래 봐.”

“다신 안 그럴게요…….”

풀이 팍 죽은 아델라의 모습에 린다는 잔소리를 멈췄다. 오래 하기도 했고, 잔소리는 어차피 그때만 잠깐 효과가 있었다.

“저…… 그런데요. 앞으로 각하께서는 어찌 되는 거예요?”

“어찌 되긴 뭘 어찌 돼. 왕이 다른 가문을 추천할 때까지 평소대로 지내는 거지.”

“이 일로 밉보이게 된 거면 어쩌죠?”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랬으니까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아주 오래 전부터? 아델라는 얼마 전에 벤슨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왕이 공작을 싫어한다는 이야기.

도대체 왜일까. 뭐가 그렇게 싫을까.

이저드는 단 한 번도 왕국에 복종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뒤로 일을 꾸미지도 않았다. 무리한 출정 명령에도 기꺼이 나라를 위해 전쟁을 치렀다. 그런데 왜?

“따지고 보면 각하와 전하는 친척 아닙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사이가……?”

아델라의 물음에 린다는 인상을 구겼다.

“적반하장?”

“적반하장이요?”

“뭐, 그런 게 있다. 네가 알아서 좋을 거 없어. 그냥, 왕이 제정신이 아니야. 미쳤어. 이쪽에서 들고일어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지가 뭔데 각하께 지랄인지.”

왕한테 이렇게 막말을 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린다는 거침이 없었다. 왕 모독죄로 잡혀가도 할 말 없을 것 같았다. 아델라는 주변에 아무도 없음에도 눈치가 보였다.

“전하께서…… 미쳤다고요?”

“사람이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짓 못 하지. 짐승도 이것보단 낫겠다.”

와……. 왕이 미물보다 못 하게 됐다.

“무슨 말인지…… 잘…….”

“몰라도 된다니까. 알면…… 아니다. 그냥 궁금해하질 마.”

그럼 말을 꺼내지 마시지.

아델라는 호기심이 뭉게뭉게 피어났지만 더 물어보진 않았다. 린다의 분위기를 봤을 때, 물어봤자 알려 줄 것 같지 않았다.

“다른 사람한테도 묻지 말고. ……난 네가 오래오래, 내 제자로 살았으면 좋겠다.”

‘이건…… 다른 사람한테 물어보면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인가?!’

아델라는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크흡.”

당황한 표정의 아델라를 보고 있던 린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너 보면, 표정을 잘 숨기는 것 같다가도 아니더라. 원래 친해지면 이래?”

“제, 제 표정이 왜요…….”

생긴 거와 다르게 허당이라는 이야기는 들어봤는데.

“누가 보면 내가 협박한 줄 알겠어.”

어떻게 읽었지. 아델라는 자기감정이 그렇게 밖으로 잘 나타났었나 싶었다. 확실히 마음을 터놓기 시작한 사람한테는 금방 긴장을 풀기는 했다.

“혀, 협박한 거 아니었어요?”

“겁먹기는 했고?”

“조금……요?”

“그럼 더, 더 겁먹어라. 진짜 죽을 수도 있으니까.”

“절 죽이시게요?”

아델라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이럴 때 보면 바보 같기도 한데.

“누가 내가 죽인다고 했냐?”

“그럼요?”

그녀의 물음에 린다는 아무 대답 없이 빙그레 웃기만 했다.

“설마! 각하는 아니시겠죠.”

“각하가 죽이기 전에 내가 죽였지.”

“그럼 누군데요?”

이번에도 린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델라는 린다가 입을 다무는 인물에 대해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혹시…… 전하……?”

아델라의 목소리가 저절로 작아졌다.

“와 똘마니들.”

린다가 간단하게 정리해 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넌 우리보다 더 위험하니까 그 정도만 알고 있어.”

진짜진짜 궁금했지만 아델라는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린다가 저렇게까지 말하면 일부러 캐내지 않는 게 현명했다.

* * *

며칠 뒤 아델라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원래는 더 일찍 침대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주변에서 움직이지 말라고 워낙 성화라서 침대 안에 콕 박혀 있었다.

어릴 적 빼고 이렇게 편히 쉬어 본 적이 없었다. 침대와 한 몸이 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델라는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었다.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린다를 또 훈련 교관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에? 이게 무슨 일이죠?”

“왔어? 아델라 경?”

멍하니 다가온 아델라를 맞이한 벤슨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녀를 반겼다.

“아, 네, 네. 근데 린다 경이 왜 여기 있어요?”

침대에서 보내는 사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상급 수비병들 훈련을 책임져야 할 린다가 왜 호위대에 있는지 아델라는 궁금했다.

“새로운 훈련을 한다나? 며칠 전부터 바뀌었어. 경이 독 마신 이후로.”

독 마신 이후라면 아델라가 미래에 대한 사실을 털어놓은 후였다. 아델라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열에 맞춰 섰다.

‘진짜로 믿으셔? 진짜? 아니면 밑져야 본전이라?’

하긴 그가 믿어 주지 않는다 한들, 믿어 준다 한들 어찌하리. 전자든, 후자든 이번 생에 죽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인 것을.

아델라는 이 일을 너무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지금 그녀가 해야 하는 일은 훈련에 열중하는 것, 그것 하나뿐이었다.

“아델라 경! 경은 열외.”

“예? 전 왜요?”

“경은 처음부터 다시 할 거야.”

아델라는 어째서인지 처음 상급 수비병이 되었을 때가 떠올랐다. 린다의 처음부터가 어디서부터인지 아델라는 매우 두려웠다.

* * *

“진짜 너무한 거 아닙니까! 저한테 푹 쉬라고 한 건 린다 경이면서!”

“푹 쉬어서 평상시 몸을 만들어야 내가 훈련시키기 좋지.”

두려운 예감은 틀리지 않았는지 아델라는 산발이 되어 씩씩거리며 바닥에 누워 있었다. 여기저기 삐져나온 진갈색 머리는 어느새 흙으로 뒤덮여서 머리가 흙인지, 흙이 머린지 구분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하지만 흙먼지 휘날리는 중에도 아델라의 반짝이는 황금빛 눈동자는 죽은 기색 없이 활활 타올랐다. 그런 그녀의 눈동자가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는 걸 알고 있을까?

“입 집어넣고 얼른 씻고 와. 오늘 나와의 훈련은 끝이다.”

린다는 입이 삐죽 나온 아델라를 웃긴다는 듯이 보았다.

“린다 경이랑 끝이면…… 오후에는 다른 분하고 한다는 뜻이군요?”

“눈치 하나는. 그래.”

“누구요?”

아델라는 옷과 머리를 탈탈 털면서 물었다.

“너 아직 각하께 유효 공격 못 넣었더라.”

아델라는 억울했다.

“각하께 유효 공격 날리는 게 가능하긴 해요?”

“가능하게 만들려고 훈련시켜 주잖아. 너 이거 통과 못 하면 계속 열외야.”

역시 아무리 봐도 호위병을 그만두는 이유가 이저드를 너무 좋아해서만은 아닌 것 같았다. 한 달이 지나도 닿지 못할 것 같은데.

아델라는 걱정 많은 얼굴로 터덜터덜 숙소로 돌아와 씻고 식사를 하러 갔다. 그래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기 스튜를 보고 있자니 피로가 싹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벤슨 경, 벤슨 경은 각하를 어떻게 이겼어요?”

“……?”

아델라의 물음에 벤슨을 포함, 곁에 있던 호위병들이 먹던 그대로 멈췄다. 호위병들은 벤슨을 경이롭게 보고 있었고, 벤슨은 황당한 표정으로 아델라를 보고 있었다.

“내가? 내가 각하를?”

“네. 벤슨 경은 유효 공격 넣은 거 아니에요?”

“유효 공격?”

벤슨은 아델라가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생각하다가 웃음이 터졌다.

“이야, 이거 이러다가 내가 각하를 이겼다고 소문나겠네. 아니야, 난 유효 공격 성공한 적도 없는데.”

응?

아델라는 막 수저를 들려다 말고 벤슨을 보았고, 벤슨을 보던 다른 호위병들은 그럼 그렇지 하는 눈으로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다른 분들은요?”

다른 이들도 말이 없었다. 몇몇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럼, 린다 경은 왜 저한테 유효 공격 넣을 때까지 훈련 안 끼워 준다고 한 거죠?”

“그거 놀린 거 아닌가?”

다른 호위병이 그렇게 말하자, 벤슨도 호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렇지 않을까? 이번 주는 경의 몸 상태 점검 차, 일대일로 계속할 거고, 다음 주나 다다음 주부터는 우리랑 같은 훈련할걸.”

뭣이? 놀린 거란 말이야?

아델라는 속았다고 생각하니 황당해져서 스튜에 빵을 푹푹 찍어 먹었다.

거참, 너무하네. 참! 이저드를 어떻게 이겨야 하나 머리에 과부하 걸릴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더니!

* * *

“그 부분은 내가 부탁했네.”

린다는 거짓말을 한 게 아니었다.

“과장되게 말한 부분은 있지만.”

아닌가. 놀린 거 맞나. 아델라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이저드를 쳐다보았다.

“경한테 남은 시간이 두 달밖에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죠?”

“그때까지 경을 전장에 나갈 수 있게 만들려고 하네.”

“그래서…… 진짜로 유효 공격 넣을 때까지 전 호위병 훈련에서 열욉니까?”

호위병들은 열외라고 하면 좋다고 빠졌지만 아델라는 훈련에서 빠지면 불안했다. 그도 그럴 게 두 달 만에 호위병들과 대등하게 싸워야 된다는 말인데,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몸을 혹사하면서까지 훈련을 한 이유도 다 그것이었다. 호위병으로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하고 싶으니까.

“열외는 아니야. 다음 주부터는 경도 같이 훈련을 받을 거네. 다만, 오전에만. 나한테 유효 공격을 넣기 전까지는 오후 내내 나한테 훈련받아야 할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 아델라는 돌아가면서 단체 훈련에서 개인 훈련까지 이것저것 빡세게 훈련을 받게 될 거라는 말이었다.

아델라는 이제야 조금 안심한 듯했다. 호위병들과의 호흡도 전장에서는 중요했는데, 자신이 아예 빠지게 될 줄 알았다가 아니라니까 아델라는 한숨 놓였다.

“그럼, 린다 경은 저를 반 정도 놀린 거군요.”

반은 맞고 반은 틀렸으니.

아델라가 안도하는 모습을 보던 이저드는 기뻐해야 할지 걱정해야 할지 헷갈렸다. 그녀가 마음이 급한 건 이해하겠지만, 또 자기 몸을 안 챙기고 있었다.

“오후 훈련이 끝나면 저녁은 나와 먹지.”

“네? 왜요?”

아델라는 정말 순수하게 너랑 내가 왜 식사를 같이하냐는 의문이 담긴 눈으로 이저드를 보았다. 그에 이저드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식사를 못 할 건 또 뭔지.

“경이, 자기 몸을 챙기지 않으니 훈련시키는 나라도 챙기려……. 그런데 경과 내가 같이 식사를 못 할 이유라도 있나?”

“어…….”

없나? 아니지. 있지.

아델라는 순간, 이유 따위 덥석 내팽개칠 뻔했다. 이저드의 하늘색 눈동자만 보면 꼭 이렇게 딴생각을 하게 된다.

“있죠. 그럼요. 무슨 소문이 날 줄 알고요. 각하와 스캔들이라도 터져 봐요! 사실 마티나 영애는 피해자였다느니, 각하께서 세컨을 두고 있었다느니, 그런 소문 안 퍼질 것 같으세요?”

거기까지 걱정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이저드는 아델라가 자기의 대외적인 이미지까지 신경 쓰고 있을지는 몰랐다.

“경은 고작 호위병일 뿐인데, 너무 과장하는 거 아닌가.”

“소문을 내는 사람들의 입에서 제가 고작 호위병으로 소문이 날지, 미모가 출중한 묘령의 여인으로 소문이 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죠!”

아델라는 아주 뻔뻔하게 대답했다. 그녀가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자 이저드는 순간 실소가 터질 뻔했다.

그녀의 말대로 미모의 여인은 맞는 말이었다. 자기 입으로 말하면서 부끄러움 하나 없는 아델라의 모습이 어딘가 귀여워 보였다.

“그래서 내 초대를 거절하겠다는 건가?”

이저드가 아델라와 시선을 맞추고 진지하게 묻자, 아델라의 시선이 슬슬 내려갔다. 그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입가가 조금씩 허물어지는 느낌이었다.

시선을 내린 아델라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까는 무슨 용기로 미모가 어쩌고저쩌고 지껄인 건지 모르겠다. 아델라도 자신이 예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은 기분이었다.

“거절……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제 몸 챙겨 주시는 건 정말 감사합니다.”

“그래, 그렇군. 경도 곤란한 상황을 겪으면 안 되니까 이쯤 하겠네.”

아델라는 이저드의 말에 가슴을 쓸어 넘겼다. 상사의 초대를 연속으로 거절하는 건 아델라도 힘들었다.

“대신 숙소로 돌아가기 전에 시녀들이 주는 걸 받아 가게.”

“네!”

받아 가는 것 정도야, 뭐!

아델라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 * *

헤게이든 백작은 그림 하나를 보면서 누군가와 계속 대조하고 있었다. 그는 멀리서 다가오는 하얀 제복을 입은 남성과 그림을 번갈아 보았다.

짙은 갈색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남자는 날렵한 턱선과 오뚝한 코, 뚜렷한 이목구비를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림과 닮은 점은 황금빛 눈동자였다.

“폐하께서는 오늘 일찍 침전에 드셨습니다. 혹 전할 말이 있으시면 저한테…….”

“아니, 아니. 난 경을 만나려고 왔네.”

“저를요?”

남자는 이 작자가 무슨 꿍꿍이인지 살피려는 듯 백작을 뚫어지게 보다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럼, 자리를 옮기는 건…….”

“옮길 필요까지는 없어.”

말을 똑똑 잘라 먹는 헤게이든 백작을 내려다보던 남자는 참을 인 자 세 번을 속으로 새기며 미소를 잃지 않았다.

“말씀하십쇼.”

“경…… 가족 관계가 어떻게 되지? 내가 예전에 들은 바로는 아버지와 여동생이 있다던데.”

갑자기 가족 관계는 뜬금없이 왜 묻나 싶어 남자는 본능적으로 백작을 경계했다. 여태까지 자신의 가문을 좋게 운운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렇습니다만.”

“경의 여동생이 엄청난 미인이라던데?”

남자는 살짝 미간을 구기려다 참았다. 남의 여동생이 미인이든 말든 무슨 상관인지.

“수도에 올라온 뒤로는 소식으로만 들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이름이…….”

들을 생각이 없는 건지 백작은 자기 할 말만 하고 있었다.

“아델라?”

“예. 아델라 맞습니다. 아델라 벨제프.”

“진갈색 머리에, 키는 이 정도 되고, 눈은 경을 닮았고. 나이는 스물하나. 몸매는…….”

“그런데 제 여동생은 왜 묻습니까?”

더 들을 이유가 없어 남자는 백작의 말을 잘랐다. 백작은 남자가 그러거나 말거나 눈을 빛내며 남자한테 조금 더 다가갔다.

“내가, 경의 동생을 본 것 같아.”

“제 동생을요?”

남자는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백작이 뭐라 말하거나 묻는다고 해도 대답해 줄 말이 없었다. 지금의 아델라에 대해서는 그도 잘 몰랐다. 그가 기억하는 건 11살짜리 조그만 아이뿐이었다.

“어디서 보셨습니까?”

일단 들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남자는 예의상 물었다.

“펜베르크 성.”

이 사람이 진짜 장난하자는 건가. 소설도 적당히 써야지!

펜베르크 성과 벨제프 자작가는 거의 극과 극에 있었다. 펜베르크 성이 서쪽 끝이라면 벨제프 자작가는 동쪽 끝이었다.

“그것도 제스트윈 공작의 호위병으로, 꽤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

큰일 날 소리를 하고 있었기에 남자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 말도 안 되는 사실로 저를 겁박하시는 겁니까?”

헤게이든 백작은 남자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이 능글맞게 웃었다.

“무슨 그런 섭한 소리를 해, 경. 난 폐하께 이 사실을 알리기 전에 경이 놀라지 않게 준비할 시간을 줬을 뿐이야.”

“폐하께 이 사실을 알리겠다고요?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말입니까?”

“그렇게 못 믿겠으면 경이 직접 확인하러 가지 그래?”

남자와 백작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둘은 원래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백작은 별 볼일 없는 자작가 출신이면서 왕의 눈에 들었다는 이유로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다니는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남자는 자신을 하도 싫어하고 왕한테 간신배처럼 구는 백작을 싫어했다.

“뭘 확인해?”

말도 없이 서로를 바라보는 둘 사이에 끼어든 사람은 다름 아닌 왕이었다. 헤게이든 백작이 꼴도 보기 싫어서 부하를 보내 거절의 뜻을 전했지만, 보낸 부하가 깜깜무소식이라 나와 본 거였다.

“저, 전하!”

“전하의 용안을 뵙습니다!”

“과인이 묻지 않았나? 뭘 확인한다는 말이지?”

“그, 그것이…….”

남자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지만, 그 틈을 타서 백작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전하! 제가 제스트윈 공작의 다음 상대자로 붙이기 좋은 이를 찾았습니다!”

“다음 상대자? 백작이 추천하겠다고?”

“예! 저희 쪽 사람이면서도 공작이 이미 마음을 연 상대가 있습니다!”

“아닙니다, 전하. 헤게이든 백작이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하는 말입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남자가 백작의 말을 막으려고 끼어들었지만, 왕은 일단 남자를 저지했다.

“그게 누구지?”

“레널드 경이 선견지명이 있었지요! 어찌 감쪽같이 모두를 속이고 동생을 펜베르크 성에 심어 둘 생각을 했는지!”

“레널드 경이?”

레널드는 눈을 꽉 감고 고개를 열심히 저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벨제프 자작가에 있을 동생이 펜베르크 성에 있을 리 없다. 그가 기억하는 동생은 그런 모험을 할 아이가 아니었다.

“덕분에 일이 수월해졌습니다! 공작과 친분도 있는 모양이고, 세이즈 백작가 후계자 부부와도 친해 보였습니다. 이번 독약 사건으로 신뢰도 확실하게 얻은 것 같습니다.”

“레널드 경 동생이 펜베르크 성에 있다? 그것도 공작과 그의 측근들하고 친한 관계를 맺고?”

“예! 이름은 아델라 벨제프. 엄청난 미인이랍니다.”

“그런데, 레널드 경은 몰랐다?”

레널드는 왕의 따가운 시선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라가 그런…… 그런 대범한 일을 할 아이는 아닙니다. 집을 나갔을 리는…….”

“하하하. 레널드 경이 여동생에 대해 모르는 게 많은 모양입니다? 그럴 수 있죠.”

“휴……. 아델라가 펜베르크 성에 있을 리가 없습니다.”

레널드는 확고했다. 그녀는 거기에 없어야 했다.

“그럼 가서 확인하면 되겠군.”

“예?”

“과인의 칙서를 경이 가지고 가. 경의 말이 맞으면 그냥 돌아오면 되고, 백작의 말이 맞으면…….”

왕이 평소 잘 보이지도 않던 미소를 띠었다. 레널드는 고개를 숙이고 죄 없는 바닥만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 * *

전쟁이 터지기 한 달 조금 넘게 남은 시점까진 이상할 정도로 평화로웠다.

아델라는 완전히 평상시로 돌아와 가벼운 마음으로 훈련에 임했다. 다 털어놓고 나니 이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아델라는 하루하루 훈련에 열심히 임하면 됐고, 이저드는 별다른 이상 현상이 없는지 확인만 하면 됐다. 평소와 다를 것 하나 없는 생활이었다.

‘한 2주 평화롭나 했다…….’

아델라는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데려가는 린다를 힐끔 쳐다보았다. 절대 이렇게 입을 꾹 다물고 데려갈 사람이 아닌데…….

“저…… 린다 경.”

입을 꾹 다물고 있긴 했지만 린다는 아델라를 무시하지는 않았다. 린다가 앞서가다가 아델라를 홱 돌아보았다. 린다의 낯빛이 굉장히 복잡해 보였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면 안 돼요?”

“……내가 하나만 말하는데.”

하세요, 많이. 아델라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이럴 때 보면 한 마리 강아지가 쫓아오는 것 같은……. 린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저번에 내가 너에 대해 더 안 물은 거, 지금 좀 후회되거든?”

“왜, 왜요?”

“어쨌든 그건 내 실수긴 한데, 만약 알게 됐다고 해도 난 네가 했던 행동이 거짓이라고 생각 안 해. 믿고 싶다고.”

이건 무슨 맥락의 대화일까를 아델라는 열심히 생각해 보았다.

“제가 의심을 받을 만한 행동을 했어요?”

“안 해서 더 미치는 거지. 네가 한 게 뭐냐? 훈련 열심히 한 거? 그거뿐이라고.”

“그……런데요?”

정말로 무슨 대화를 하는 거지. 린다는 이마를 짚었다. 어차피 이쪽 편이 아니면 쳐내면 그만인데, 무슨 이런 대화를 하고 있는 건지.

“경, 오라버니가 있어?”

린다는 우선 사실 확인만 할 생각이었다.

“네.”

“벨제프 자작가고?”

“네에…….”

가문이 얽힌 일인가? 가문이 얽혀서 좋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아델라는 저절로 어깨를 움츠렸다.

설마 아버지가 찾아왔다거나? 아닌데. 그럼 이런 반응을 보일 리가 없는데…….

“맞네. 확실한 것 같네.”

“뭐가요?”

이 순간에도 연기하는 건가? 린다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

“가 봐. 가 보면 알아.”

증인을 들이밀었음에도 그런 표정을 유지할 수 있을지 보자. 왜 하필 많고 많은 귀족가 중에!

린다는 아델라를 데려오기 전 딱딱하게 굳어 있던 이저드의 얼굴이 떠올라 미간을 구겼다. 반면, 아델라는 제대로 된 정보를 얻은 것도 아니요, 안 얻은 것도 아닌 상태라 고개를 갸웃거리며 린다를 따랐다.

그녀를 따라 다다른 곳은 이저드의 집무실이었다. 린다는 예의를 차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아델라도 덩달아 예의를 차렸고, 고개를 숙였다 든 순간 소파에 앉아 있던 황금빛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엥? 이 인간이……?”

아델라는 너무 놀란 나머지 평소에 자주 쓰던 그의 호칭을 입에 담고 말았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오라버니 되는 사람한테 이 인간이라고 하면 너무 버릇없어 보일 것 같았다.

남자, 레널드는 자기가 잘못 들은 줄 알고 자리에서 어정쩡하게 일어섰다.

“아, 아델라? 너 진짜…….”

그의 기억 속에서보다 훨씬 성숙하고 아름다워진 21살의 여동생을 보며 그는 믿기지 않았다. 그는 아주 찰나에 이 정도 외모면 사람들한테 호감을 살 수 있었겠다고 생각했다.

아델라도 믿기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10년간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니 여긴 어떻게 찾아왔지? 아델라의 눈빛이 경계 태세로 바뀌었다.

“내가, 이 오라비가 널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아느냐?”

레널드가 한 발짝 다가오면 아델라가 한 발짝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레널드는 진땀을 뺐다. 이저드와 다른 이들이 이상하게 볼 것이 분명했기에 레널드는 주변을 살폈다. 그러곤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이저드를 쳐다보았다.

“각하, 정말 죄송한 말씀이지만, 아델라와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그러는데……. 잠시 대화를 나눌 시간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델라가 빠르게 눈을 굴려 이저드한테 안 된다는 사인을 보냈지만 이저드는 아델라를 보고 있지 않았다. 아델라는 자신의 간절한 시선이 그에게 닿지 않아 얼떨떨했지만, 바로 떠오른 어떤 생각 때문에 이저드를 이해했다. 그녀는 큰 오해에 빠져 자신의 오라버니를 있는 힘껏 째려보았다.

‘역시 이 인간! 돈 보고 왔구나! 돈 보고 날 찾아왔어! 각하한테도 말했구나!’

“그렇게 하도록.”

이저드는 단 한마디만 던지고 헤이든과 린다를 데리고 집무실에서 나갔다.

“아델라……!”

이제야 제대로 대화할 시간이 생긴 레널드는 환하게 웃으며 아델라를 보았다. 반면, 아델라는 매우 화가 난 표정이었다.

“야!”

“……뭐, 뭐?”

“아버지를 이어서 이번에는 오라버니야? 뭐 얼만데? 얼마 빚졌는데! 어떻게 내가 일하는 곳까지 찾아와서 빌어먹을 생각을 해? 어떻게 나한테 이래? 10년 만에 나타나서! 가문 떠났으면 거기서 돈이라도 벌고 잘 살든가!”

레널드는 한마디도 제대로 못 하고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아델라의 사자후를 가만히 듣고 있어야 했다.

“아니, 아델라, 내 말 좀…….”

“어떻게 각하께 찾아와? 미쳤어? 빚을 졌으면 일해서 갚아야지! 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서!”

“아델라, 오라버니는…….”

“내가 오라버니한테 빚 갚으라고 언제 독촉한 적 있어? 10년 동안 연락 한번 안 했어. 오라버니 잘 살라고! 그런데 나한테 어떻게 이래?”

“아델라, 진정…….”

얘가 왜 이렇게 억척스러워졌어.

그녀와 그가 헤어져 있던 시간이 10년이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그의 동생이라고 안 변했을 리가 없었다.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아니, 어떻게, 각하께 빚을! 허, 참, 와, 차!”

“그러니까 네가 생각하는 이야기 아니라니까? 여 봐! 나 직장도 있고, 돈도 잘 벌고! 이제 너 하나쯤은 내가 책임질 수 있고! 평생 놀고먹을 수 있어!”

오라버니 불신에 빠진 아델라한테 레널드는 로브를 벗어 하얀 제복을 보여 줬다. 아델라는 붉은 무늬가 수놓인 제복을 찬찬히 훑었다. 어디서 많이 본 문양이었다.

“뭐야. 그게 뭔데.”

여전히 불신 가득한 눈으로 아델라가 그를 바라보았다.

“왕실 기사단 제복.”

“그래서 어쩌라고. 자작가 빚 다 갚았다고?”

“아니, 그건 아니…….”

아델라의 눈빛이 다시 가늘어졌다.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친 사람다웠다.

“그럼 필요 없……어?”

어라, 잠깐. 왕실 기사단? 그럼 왕의 최측근 아니야?

아델라는 그제야 린다의 표정과 눈빛, 이저드의 행동 등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기사단장이나 부기사단장쯤 돼?”

“부기사단장.”

그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아델라한테 말했고, 그의 대답을 들은 아델라는 인상을 구겼다.

“혹시 오라버니…… 10년 동안 한 일이…… 전하의 눈에 드는 일이었어?”

“네가 이제야 오라버니의 노고를 알아봐 주는구나.”

뭐라? 아델라는 뒤통수가 얼얼했다.

‘내 가족이 나라를 버리고 도망간 주범과 한패라니. 그리고 각하를 무지무지 싫어하는 이의 최측근이라니!’

10년 동안 어디서 뭘 했나 했다! 아델라는 골이 띵하니 울려서 머리를 감싸며 주저앉았다. 뭐 이런 뭣 같은 상황이.

“아델라? 아델라! 왜 그래? 아파?”

눈앞에 있는 인간 때문에 속이 터지다 못해 죽겠다.

“혹시 독약 부작용 아니야? 이거 공작가에 따져야 되는 거 아냐? 하나뿐인 남의 동생한테 이 무슨…….”

“그걸 왜 각하께 따져? 헤게이든 백작한테 따져야지.”

아델라는 머릿속을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짜 이 인간 명칭은 앞으로도 안 바뀔 것 같았다.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인간. 어휴.

“휴……. 그래서 여기까지 왜 왔어?”

“안부 같은 것도 안 물어?”

“왜? 안부 묻게?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해? 아주 뭣같이……!”

“아니다. 현재가 중요하지, 그럼. 10년 만에 너랑 나랑 만난 게 더 중요하지.”

이 인간이 약 올리나. 처음부터 본론을 말하면 됐을 걸 빙빙 돌려 말하고 있었다.

“우선…… 앉을까? 머리 아파 보이는데.”

아델라는 레널드를 흘기곤 순순히 소파에 앉았다. 열기 좀 식혀야겠다. 뒤통수를 엄청 세게 맞았더니 저절로 눈앞이 까매지는 듯했다.

“아델라, 너, 말……하게 돼서 정말 다행이다. 아까 깜짝 놀랐어. 너무 잘해서. 다행이야. 그런데 왜 이렇게 말랐어. 밥은 먹고 다니는 거야?”

“뭐라는 거야……. 나한테 언제부터 관심이란 걸 가졌다고? 본론이나 얘기해. 우리가 이렇게 오순도순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고 생각 안 해?”

평소 주변 사람들한테 차가운 모습을 보인 적 없던 아델라는 오라버니 앞에서 정말로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입으로 욕만 안 담았다 뿐이지 그녀는 거의 눈으로 욕하고 있었다.

레널드는 이런 아델라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걱정되었다. 마음을 못 돌린다고 한들 칙서는 이미 내려졌지만 말이다.

“네 혼처. 정해졌어.”

“……?”

이중으로 뒤통수 맞는 기분은 아주 더러웠다.

“누구 맘대로?”

“전하의 뜻이야.”

아델라는 너무 기가 차서 말문이 막혔다. 실소도 터지지 않았다. 고작 10년 만에 나타나서 한다는 말이, 네 혼처가 정해졌다? 6년 전에 집을 뛰쳐나온 이유가 그 혼처 때문이었는데?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다르긴 무슨. 돈을, 혹은 권력을 위해 가족을 이용하는 건 둘이 똑같았다.

“이미 칙서는 내려졌고, 공표는 곧 될 거야. 넌 거부할 수 없어.”

“……거부권이 없는데, 왜 날 찾아왔어?”

아델라는 지금 이 모든 상황이 고까웠다.

“네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건 네가 선택할 수 있지만, 거절할 시에는…….”

레널드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10년 동안 보지도 못했긴 하지만 혈육으로서의 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가문의 빚을 못 견디고 나간 건 맞지만 그녀가 죽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

“죽는다는 거고. 그러니까 나보고 거절하지 말라는 거네? 오라버니는 선택이라는 말의 의미는 알고 있는 거야?”

“그러게 왜, 여기 있어? 왜 공작 곁에 있냐고. 왜 하필 공작이야.”

“똑같이 돌려줄까? 왜 하필 오라버니는! 아― 됐다, 됐어. 이런 말해서 나한테 남는 게 뭐라고.”

레널드는 아넬라의 기백에 조금 놀랐다.

한마디도 지지 않으려는 것도 놀라웠고, 절대 꺾이지 않는 그녀의 눈빛도 놀라웠다. 이제 막 훈련을 한 신입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자작가에 있는 동안 그리고 자작가를 나온 후에 그녀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레널드는 살짝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 * *

“야!”

문 밖에서도 들릴 만큼 큰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이저드는 잠시 멈춰서 뒤를 돌아본 후 다시 걸음을 옮겼다.

화가 난 게 분명한 목소리였다. 오라버니가 나타나는 바람에 계획이 어그러져서 화가 난 건지, 아니면 순전히 갑자기 나타난 오라버니한테 화가 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헤이든 경.”

“예.”

“지금 당장 벨제프 자작가에 대해 알아보게. 특히, 두 남매가 어떻게 이곳에까지 오게 됐는지.”

헤이든은 이저드의 명을 받고 고개를 끄덕였다.

“각하.”

“……?”

혼자 가만히 생각에 빠져 있던 린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 이저드를 불렀다.

“아델라 경이 이곳까지 오게 된 이유, 저는 들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그게 사실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이저드는 자리에서 멈춰 서서 린다를 돌아보았다. 린다는 짙게 가라앉은 이저드의 눈빛을 받아 내며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 이유가 뭔가?”

아델라의 사정이 그녀의 치부를 억지로 떠벌리는 느낌이라 여태 누군가한테 말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말해야 했다.

린다는 저번에 아델라와 나눴던 대화를 이저드한테 해 줬다.

“그땐, 아델라 경이 굳이 말하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아서 따로 보고를 올리지 않았습니다. 이름뿐인 귀족이라니까 당연히 권력 싸움에서도 제외되어 있을 거라 여겼고요.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이저드는 린다의 이야기를 듣고 그녀를 이해했다. 만약 자신이 아델라의 사정을 알게 됐어도 린다와 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다.

“경이 미안해할 거 없네. 아마 아델라 경의 말은 사실일 거야. 조사하면 금방 나올 사실을 숨겼을 리는 없으니까. 그 정도로 허술했으면 한 명이라도 눈치챘겠지.”

이저드는 왜 많은 사람이 아델라를 믿게 됐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해 부딪쳤다.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세상에 저렇게 열심히 사는 사람이 다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귀감이 되는 사람이었다고 할까. 너무 열심히 해서 저러다 일찍 죽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까지 들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저절로 많은 이들이 그녀한테 끌렸다. 호감이든, 동경이든, 동정이든, 호기심이든. 어떤 형태로든 그녀는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다. 왜냐면 그녀의 행동에는 거짓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표정, 말 행동 하나하나 그녀의 모든 것에는 거짓이 없었다. 심지어 나 뭐 숨기고 있어요, 말해 주기 곤란해요, 같은 무언가를 숨기고 있을 때도 티가 났다. 스스로는 잘 모르는 모양이었지만.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지켜보지.”

“진심이십니까?”

헤이든은 린다와 이저드가 아델라한테 마음을 많이 줬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도 아예 안 준 건 아니었지만, 둘만큼은 아니었기에 둘이 걱정되었다. 마음을 주다 상처 받는 건 결국 둘이었다.

물론 둘의 감을 못 믿는 건 아니었다. 둘만큼 사리 분별이 분명한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또 달라지지 않을까?

“그래. 아델라 경이 어떻게 나올지에 따라 우리의 행동도 달라지겠지.”

* * *

“그러니까, 나한테 밀정 노릇을 해라?”

이저드의 약혼녀가 된 것도 기가 막혀서 뒤집힐 노릇인데, 왕의 밀정 노릇까지 하라니. 이중에 삼중, 아니 사중으로 충격 받을 말만 들으니 아델라는 아주 잠시 죽음의 유혹을 느꼈다.

자기 자신 말고, 오라버니를.

“전서구만 잘 보내 주면 별일은 없을 거야. 네 신변은 내가 책임질게.”

“누가 누굴 책임져? 오라버니도 발등에 불 떨어진 거면서.”

아델라는 아리따운 인상을 마구 구겼다.

그녀는 이 상황이 자신의 미래를 위해 좋은 건지 따져 보았다. 왕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녀가 얻을 것은 뭘까. 정보? 왕이 말하는 ‘이상 행동’이란 뭘까.

골치가 아파서 죽고 다시 생각해 보면 안 될까 싶다가도, 만약 이 사건이 자신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면 어쩌지 싶기도 했다.

아주 말이 안 되는 전제도 아니었다. 왕은 이저드를 싫어했고, 계속 이저드를 죽이려고 시도했다. 만일 이저드의 죽음에 왕이 관련되어 있다면 이 일은 어쩌면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정말로 네 신변에는 문제없을 거야.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미리 알려 줄 거고, 넌 그냥 그동안 조용히 지내.”

이 말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지난 생에 마티나는 전쟁이 터지자마자 조용히 펜베르크 성을 빠져나갔다. 누구한테도 걸리지 않고.

“혹시 이 제안, 헤게이든 영애한테도 했어?”

“그래. 너도 조심해. 너한테 빠지게 만드는 건 좋지만 네가 빠지면 안 돼.”

이미 빠졌는데. 아니, 어떻게 저 외모와 성격을 보고 안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티가 안 나서? 참 이상한 사고 회로네.

아델라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팔짱을 꼈다.

“너 정도면…… 공작한테 호감을 살 확률도 있고, 못 사더라도 무슨 수를 써서든 이상한 행동만 포착하면 돼. 공작이나 공작의 측근들 모두.”

“너무 추상적인 거 아니야? 정확히 무슨 행동.”

“정확히는 말 못 해 줘. 그냥, 딱 보면 이상하다 싶은 순간이 있을 거야.”

뭐라는 거야, 진짜……. 그것만으로 어떻게 알라고.

아델라는 정보를 더 얻고 싶었지만 이쯤에서 물러섰다. 대신 다른 요구를 했다.

“내가 그거, 밀정하면 오라버니는 뭘 해 줄 건데.”

“……뭐?”

거래를 하자는 말이 아니었는데…….

레널드는 눈만 깜박였다.

“난 내 목숨도 걸고, 내 미래도 걸고, 내 몸과 마음도 걸게 됐는데. 오라버니나 전하는 나한테 뭘 해줄 거냐고.”

정말로 많이 변했다. 이렇게 뻔뻔하게 거래를 청해 올 줄은 몰랐다. 그것도 가족끼리. 레널드는 잠시 넋을 놓았다가 자신과 같은 듯 다른 황금빛 눈동자를 마주하고 얼른 정신을 차렸다. 그녀에게 휘말리면 안 된다.

“목숨.”

“허…… 이거 왜 이래? 한두 번 거래해 본 것도 아니면서? 나는 날로 먹을 수 있을 줄 알았어?”

“아델라, 우리 가문을 위해서고, 네 목숨을 위해서야. 우리가 숨 쉬고 있을 수 있는 것도 다 전하의 은혜고…….”

아델라는 레널드의 말을 더 이상 듣지 않고 바로 끊었다.

“그럼, 가문을 위해서 해 줘.”

“뭐?”

“가문을 위해서라며. 언제부터 그런 걸 챙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라버니가 10년 동안 안 한 일, 이번 기회에 해.”

“무슨……?”

그녀는 턱을 꼿꼿하게 들고 입을 열었다.

“가문 빚 갚아. 아마 10년 전보다 더 늘어났으면 늘어났지 줄어들지는 않았을걸.”

“그걸 내가 왜……?”

“가문을 위해서라며. 그럼 가문을 위한 일 좀 해 봐. 난 아버지가 공작가로 빚 때문에 쳐들어오는 꼴 못 봐.”

확실히 그건 그거 나름대로 골치였다. 사실 레널드도 이 부분을 걱정하고 있긴 했다. 아버지를 저택 안에 가둬 둘 생각도 했을 정도니까.

“그건…… 내가…….”

하지만 어떻게든 해 보겠다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정말 죽기보다 만나기 싫었던 사람이 아버지였고, 억울해서 하기 싫었던 일이 가문의 빚을 갚는 일이었다.

“왜 오라버니가 그걸 고민하고 있어?”

“응?”

“오라버니가 고민할 일은 전하께 내 말을 얼마나 조리 있게 잘 전달하는가 하는 건데. 누가 오라버니한테 갚으래? 바라지도 않아. 10년 동안 소식 끊고 산 사람한테 내가 뭘 바라.”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그의 양심을 심하게 찔러 왔다.

“그, 건은…… 내가 막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이…….”

“그럼 나 죽어? 죽을까?”

“넌 무슨, 죽는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입에 담아? 네 목숨으로 날 협박하는 거야?”

아까는 지가 먼저 죽을 수도 있다고 협박 비슷하게 하더니.

아델라는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협박처럼 들려? 그럼 그럴 수도 있고. 난 사는 동안 수없이 죽고 또 죽어서, 생에 별로 미련 없어.”

레널드는 정말로 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는 울며불며 자신한테 매달리던 11살짜리 꼬마 아이와 다시 대면한 기분이었다. 꼭 10년 전 그때로 다시 돌아간 것 같았다.

“후……. 말은…… 해 보마.”

정색하던 아델라가 그제야 싱긋 다시 미소 지었다.

이참에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면 좋지, 뭘 그래. 이중 스파이도 하고, 가문 빚도 얼른 다 갚아서 손 털어 버리고.

“근데 오라버니, 내가 배신하면 어쩌려고?”

“제발 한배를 탔으면 그런 이야기 하지 마. 내가 너랑 10년 동안 안 보긴 했어도, 너 내 혈육이다.”

어쩌라는 거야. 아델라가 다시 가늘게 눈을 떴다. 레널드는 아델라의 눈빛 공격에 마지못해 계속 말해 주었다.

“정보를 얼마나 흘렸느냐에 따라 죽든가, 잡히든가, 둘 중 하나일 거야.”

“이왕이면 깔끔하게 죽는 쪽으로 부탁해.”

“너 정말!”

“농담이야.”

아델라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뻔뻔하게 말했다.

어떻게 사람이 변해도 이렇게 변할 수 있는지 레널드는 믿을 수가 없었다. 어릴 때 모습이 남아 있지 않았다면 전혀 다른 사람인 줄 알았을 거다.

“튀는 행동 하지 말고, 반드시 얌전히. 이제부터 넌 귀족 영애야. 군인, 기사 그런 게 아니고.”

“각하 꼬시는 건? 튀는 행동이야?”

“꼬신다고? 공작을? 네가?”

“빠지게 하면 좋다며.”

분명 그렇게 말하긴 했다. 레널드는 심각한 고민에 빠진 표정이었다.

“으음…… 좋은데……. 무슨 수로?”

“미인계?”

“미인계가 통했으면 우리가 이런 고생 안 했지.”

아델라도 잘 알고 있었다. 이저드가 그런 걸로 빠질 리가 없다는 것을.

그녀는 단지 이저드와의 거리가 어디까지 허용되는지 알고 싶을 뿐이었다. 이 사실에 대해 그와 대화를 나누려면 단둘이 있을 때를 노려야 하니까.

“어쨌든 조용히 꼬시는 건 괜찮다는 말이지?”

“진짜 유혹하겠다고?”

“그런 걸 바란 거 아냐? 각하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더 잘 알게 되는 거잖아. 이상한 행동.”

레널드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가까워지면 이보다 좋을 수가 없었다. 단, 아델라가 이저드한테 절대 안 빠진다는 전제를 두고.

“맞는데……. 절대, 절대로 빠지면 안 된다. 몸은 내줘도 마음은 내주면 안 돼.”

레널드는 아델라를 나름 걱정한다고 한 말이지만 그녀는 순간 극혐의 표정을 지었다.

‘뭐지. 이 당연히 몸까지 내준다는 전제는? 그게 여동생한테 할 말이야?’

“왜?”

“아니. 오라버니 뇌가 궁금해서.”

“내 뇌는 왜?”

“그냥. 쪼개 보고 싶어서.”

아델라가 어깨를 으쓱였다. 레널드는 싱거운 이야기를 한다며 웃었다.

* * *

아델라는 어둠 속에서 잠든 오라버니의 옆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를 보는 그녀의 황금빛 안광이 달빛을 받아 강하게 빛났다.

‘이것도 가족이라고. 원수도 너보다는 낫겠다. 어떻게 10년 동안 변한 게 없냐. 이놈의 오라버니를 쥐어 팰 수도 없고. 씁.’

그녀는 이번에도 눈으로 욕이란 욕을 다하고는 잠든 레널드를 뒤로하고 방에서 나왔다. 중간 중간 램프가 켜져 있었지만, 복도는 어두웠다. 그녀는 긴 복도를 묵묵히 걸었다.

과연 이게 잘한 선택일까, 과연 이게 맞는 일일까.

아델라는 긴 복도를 어두운 얼굴로 걸으면서 생각했다.

일단 받아들이기는 했는데, 이저드는 어떻게 설득해야 하고, 린다는 또 어떻게……. 갑자기 변한 그들의 시선을 견딜 수 있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만 친해질 걸 그랬다.

이번 생에 변한 게 너무나 많아서 아델라의 머릿속은 터질 것처럼 복잡했다. 자신이 맞는 길을 가고 있는 건지도 많이 헷갈렸다.

그녀는 귀빈실이 있는 건물을 빠져나와 이저드의 집무실이 있는 건물 앞에서 멈췄다. 오늘은 역시 못 만나겠지. 언제쯤 다시 뵐 수 있으려나.

아델라는 그곳에서 잠시 기웃거리다가 끝내 발걸음을 돌렸다. 어차피 처음부터 그녀가 향할 곳은 숙소였다. 내일 당장 왕의 명령이 떨어질 텐데, 그 전에 짐 정리를 할 생각이었다.

“설마 각하께서 만나 주실 거라 생각하고 서 있던 건 아니지?”

“예?”

그녀는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벤슨 경? 오늘 벤슨 경이 야간 조예요?”

“응.”

어둠 속에서도 튀는 오렌지 빛 머리카락을 보고 벤슨임을 알아챘다.

“역시…… 저, 소문 다 났죠?”

“났지. 쫙 퍼졌지. 경의 오라버니가 왕의 개라고.”

벤슨은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그냥 아델라의 속을 뒤집으려는 건지 그녀가 알지 못하는 사실까지 굳이 이야기해 줬다. 남한테 오라버니의 평가를 듣게 되니 그녀는 더 암담해졌다. 측근인 건 알았지만…… 그런 평가를 듣고 있을 줄이야.

“하…… 하하하…….”

역시 다시 시작하는 게 더 좋은 선택이었으려나. 아델라는 약간 실성한 듯 피식피식 웃었다.

“벤슨 경도 제가 배신자 같아 보여요?”

“지금 이 상황에서 아니라고 보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

“그렇겠죠……. 저 이미 낙인 찍혔겠죠. 각하께서 절 만나 주기는커녕, 얼씬도 못 하게 하겠죠?”

그럼 앞으로 어떻게 만나야 한담. 한 달 조금 넘는 시간밖에 안 남았는데!

“아까 잠깐 봤는데, 각하 분위기 장난 아니야. 안 만나는 게 좋을걸. 적어도 서로한테 상처는 안 받을 거 아냐.”

상처를 받더라도 만날 이유가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대놓고 스파이 짓을 시킬 생각을 하냐? 뭐 이렇게 당당해, 왕은? 내가 진짜 스파이였으면 이 일 못 한다고 때려치웠다! 죽고 다시 시작하는 게 낫지! 어휴, 속 터져서.’

아델라는 자신의 긴 진갈색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음, 경. 미쳐 버릴 것 같겠지만, 미치진 마.”

아델라가 옆에서 갑자기 머리를 쥐어뜯으니 조금 미안해진 벤슨이 그녀를 말렸다.

“저 지금 좀 미쳐 보여요?”

“약간?”

벤슨은 말해 놓고 아델라의 표정을 살폈다. 헝클어진 머리 사이로 보이는 아델라의 눈빛이 퀭하니 가라앉아 있었다.

아델라는 벤슨의 말을 듣고 한숨을 한번 푸욱 내쉬며 세상 달관한 표정으로 머리를 정돈했다.

“하……. 이만 가볼게요. 수고하세요…….”

그녀는 축 늘어진 어깨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벤슨은 처진 아델라의 어깨를 보다가 인상을 구기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아까 그녀의 분위기가 너무 어두워 보여서 잡은 건데, 오히려 자기로 인해 더 어두워진 것 같았다.

“경.”

“네?”

아델라가 그를 돌아보았다.

“각하 뵙는 거, 도와 줘?”

“벤슨 경이 어떻게요?”

그녀는 별 기대 없이 물었다. 그러자 벤슨은 아무 말 없이 고갯짓으로 따라오라는 제스처를 보냈다. 아델라는 그의 행동에 의문을 느끼다가 그를 따라나섰다.

“어디 가세요?”

“나 각하께 혼날 거 각오하고 하는 거니까, 경이 말 좀 잘해 줘라?”

“그러니까 어디 가는 건데요?”

“지금 각하께서 있을 곳.”

아델라는 이 늦은 시각에 이저드가 있을 만한 곳을 떠올리다가 우뚝 멈췄다.

“지금 안내하는 곳이…… 설마 침실?”

“지금 시간대는 대부분의 사람이 잘 시간이지.”

아델라보다 더 뻔뻔한 사람이다. 벤슨은 왜 그런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보였다. 아니, 이 사람이? 다짜고짜 침실부터 쳐들어가면 어쩌라는 거야.

“저보고 각하 침실에 들어가라고요?”

“응.”

이건 뭐……? 아델라는 오라버니 다음으로 벤슨의 머리를 쪼개 보고 싶어졌다.

“도와주겠다는 사람한테 이런 질문 죄송한데, 벤슨 경은 제가 각하께 더 오해를 받길 바라는 거예요?”

“아닌데?”

“그런데 왜 이 시간에 각하 침실에 들어가라는 거예요! 오해하기 딱 좋거든요! 더 오해 사겠어요!”

아델라는 누가 들을세라 목소리를 낮췄다.

“지금 말고는 만날 기회가 없으니까? 내일 당장 약혼녀가 될 텐데 만날 시간이 있을 것 같아? 이런저런 교육받다 보면 더 만나기 힘들어져. 시간이 길어질수록 오해는 계속 쌓일 거고. 결국, 지금 말고는 오해 풀 시간도 없을 걸?”

벤슨은 그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읊어 줬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어서 아델라는 대꾸할 수가 없었다.

“난 도움을 줄 뿐이고, 선택하는 건 경의 마음이야. 돌아갈까?”

이렇게 된 마당에 돌아가긴 무슨. 아델라는 세상 다 산 표정으로 계속 가라고 그에게 손짓했다.

‘기회라고 생각하자……. 크흡! 기회는 잡으라고 있는 거잖아?’

아델라는 눈물을 머금고 나름 자기 위로를 하며 울적한 마음으로 벤슨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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