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갔었어요? 말은 하고 가야 사람이 놀라지 않잖아요. 진짜, 진짜 너무해….”
응석 부리듯 따지자 리온이 곧장 그녀의 어깨를 둘러 안으며 사과했다.
“미안해. 푹 자고 있길래 괜찮을 줄 알았어.”
“일어났는데 혼자였단 말이에요.”
“그래, 내가 잘못했어. 미안.”
실은 오래 기다리지도 않았으면서 억울한 척 매달렸다. 한없이 달래 줘서 그런가, 그에겐 항상 이렇게 어린애처럼 굴게 됐다. 리온이 그녀를 가만히 안고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물기만 닦고 올게. 너 감기 걸려.”
“싫어요.”
누가 이렇게 억지를 부리면 좋다가도 싫어질 것 같은데, 그는 기분 좋게 웃었다.
“이런 식이면 일 하러도 못 나가겠는데.”
“응, 가지 마요. 내 옆에만 있어.”
“그래, 안 갈게.”
대답이 선선했다. 그 어떤 비합리적이고 불가능한 일을 요구해도 묵묵히 수긍할 것만 같았다. 기분이 풀려 천천히 팔을 풀자 고요히 내려다보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추워 보여요. 젖은 옷은 벗어 두고 들어와요.”
“서러운 건 풀렸어?”
“애초에 서러웠던 적 없는데.”
시치미 떼는 그녀를 보고 희미하게 웃은 리온이 젖은 옷을 벗기 시작했다. 바닥에 옷이 묵직하게 떨어지는 소리가 나고 너른 어깨와 잘 짜인 근육이 시야에 들어찼다. 베로니카는 단단한 피부 위로 번들거리는 물기를 홀린 듯 훔쳐보다가 그의 팔을 침대로 잡아끌었다.
“아직 차가워, 나.”
“난 따뜻해서 괜찮아요.”
얼른 몸을 녹여 주고 싶었다. 그런데도 그는 물끄러미 그녀를 훑으며 망설이다 마른 수건으로 몸을 닦고 이불 안으로 들어왔다. 맞닿는 몸이 정말로 차가웠다.
“배고프진 않아? 들어오면서 저녁 식사를 올려 달라고 부탁했는데.”
“별로 입맛이 없어요. 그보다 어딜 다녀온 거예요?”
파고들듯 안기며 물었다. 두근두근 심장 소리가 듣기 좋았다.
“전에 말했던 지인을 만나고 왔어. 예전에 로버딘의 영주를 국경지에서 도와준 적이 있는데 제 아들을 가르쳐 주면 어디든 집 지을 땅 하나쯤은 떼어 주겠다고 하더군.”
“영주라고요?”
베로니카는 의외의 얘기에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영주라니, 평범하게 살았던 그녀에게 어떤 의미론 황제나 교황보다 높게 느껴지는 직분이었다. 발 딛고 선 땅의 주인인 것이다.
그제야 리온이 왜 제 빚을 갚을 사람이 반드시 살아 있으리라 확신했는지 알 것 같았다.
“어디서 살고 싶어?”
그때 그가 상념을 끊으며 물었다.
“이 땅의 어디든 살 수 있다면, 어떤 곳에서 지내고 싶어?”
한동안 멍하니 있던 베로니카의 눈이 말뜻을 이해하고 반짝이기 시작했다. 소원이 뭐냐는 질문을 받은 아이처럼 그녀는 하나씩 손을 꼽으며 따져 나갔다.
“나는… 음… 너무 바닷가 근처나 도심은 싫어요. 날씨가 궂으면 위험할 수도 있고 시끄러운 것도 별로거든요. 도시랑 멀지도 않으면서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면 좋겠어요. 양이나 염소를 기를 만한 뒷마당도 있으면 좋겠고. 오크 나무로 지은 집에는 커다란 창문이랑 아늑한 벽난로가 있어야 돼요.”
“상당히 구체적이네.”
머릿속으로 그녀의 상상을 그려 본 듯 그가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모호한 것보다 낫죠. 아주 예전부터 꿈꿔 왔는걸요.”
“아이는?”
거침없이 대답하던 베로니카가 멈칫했다. 아이는….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블라센 산에서 내려온 후로도 그녀는 달거리를 하지 않았다. 다시 태어났고 건강해졌으니 희망이 있는 것 같았는데. 사실 가슴이 생리할 때처럼 아파서 조금 기대도 했었다.
슬쩍 고개를 들자 대답을 기다리는 리온의 표정이 묘했다. 오늘따라 원하는 말을 읽어 내기 어려웠다. 대꾸하지 못하고 입술만 말아 물자 그가 내려간 이불을 끌어 목까지 덮어 주며 조용히 운을 뗐다.
“실은 네가 잠든 사이에 의사를 불러 상태를 봤었어.”
안 그래도 부를 기세긴 했다. 정말로 데려올지는 몰랐지만.
“미열도 있는 것 같아서 기력 보충에 좋은 약재나 받을 생각이었는데.”
진지한 분위기에 베로니카는 덜컥 겁을 집어먹었다. 제 몸에 뭔가 큰 문제라도 있는 걸까, 혹시 아이를 가질 수 없다거나….
“활맥이 잡힌다더군.”
“활맥? 그게 뭔데요?”
“아이가 있을 때 잡히는 맥박.”
“…….”
베로니카가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목덜미께를 내려다보던 남자가 가만히 시선을 맞췄다. 침묵이 아주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 말은, 지금, 우리가….”
더듬거리는 와중에도 머리는 곧바로 상황을 이해했다. 왜 그가 그녀를 두고 급하게 나갔다 왔는지. 그건 리온이 하루빨리 안정된 환경을 갖추길 원했기 때문이다.
“부모가 되겠지. 이대로 둔다면.”
“…….”
“듣자마자 네가 두려워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 누군가 옆에 있는다 해도 결국 그 시간에 대한 부담은 네 몫이 가장 클 테니까.”
리온은 임신이 무조건적으로 좋은 일이라고 그녀를 속이지 않았다. 그의 소망을 드러내며 부담을 주지도 않았다.
“감당하기 힘들면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해도 상관없어. 난 진심으로 너만 있으면 돼.”
낮은 목소리는 다만 단단하고 분명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뭔가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었다.
아이가 생겼다고. 신이 선물을 내렸다고. 그 선물이 그와 그녀의 피가 섞인 새 생명이라고.
“원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간신히 달싹인 입술이 서럽게 내뱉었다.
“그건 내 소원이었단 말이에요.”
감정을 담기에 인간의 언어는 얼마나 턱없이 모자란지.
이미 잊었다고 생각한 바하무트의 환상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동화될 때 보았던 최초의 기억. 막 태어난 아이를 내려다보던 엄마 아빠의 얼굴. 그 웃음과 울음과 인생의 단면.
베로니카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와락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허리를 마주 안은 남자가 머리를 제 어깨에 파묻고 숨을 내쉬는 게 느껴졌다.
단단하게 지탱한 하나가 되고서야 귓가에 불규칙한 호흡이 쏟아졌다. 당신도 긴장했겠구나. 심장이 저릿했다.
“빌어먹을….”
리온이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행복해서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아.”
맞닿은 가슴으로 거세게 뛰는 심장 박동이 전해져 왔다. 베로니카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무한한 어둠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빛깔로 일렁이고 있었다.
언젠가 그런 고민을 해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사랑받지 못한 아이가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도 받아 본 사람이나 줄 수 있는 것 아닐까. 하지만 그런 걸 걱정하는 우리는 분명 잘할 수 있다고, 사랑은 부여받은 재능이 아니라 노력이라고.
“사랑해.”
그가 말했다. 그리고 그녀가 대답했다.
***
비가 그쳤다. 손을 꼭 잡은 둘은 혼잡한 야시장을 가로질렀다. 불을 뿜는 묘기꾼과 번쩍거리는 장신구, 모자를 놓고 돈을 구걸하는 피난민을 지나치자 밤바다가 가까워졌다. 바닷바람에 앞머리가 훅 나부낀 베로니카는 방금 산 복숭아를 한입 베어 물더니 충격받은 눈으로 리온을 올려다봤다.
“미쳤어요. 얼른 먹어 봐요.”
복숭아를 먹고 싶다는 한마디에 함께 밖으로 나왔다. 혼자 사온다던 리온을 붙잡아 따라 나오길 잘했다. 기다리는 건 질색인 데다 그가 여관으로 돌아왔을 때쯤이면 다른 게 먹고 싶어졌을 것 같았다.
주위를 경계하고 있던 리온은 볼이 불룩해진 그녀를 보며 웃음을 흘렸다.
“왜 웃어요?”
“귀여워서.”
뚱한 질문을 리온이 능숙하게 받아넘기곤 물었다.
“춥진 않아?”
“이렇게 입고도 추우면 어디 문제 있는 거 아녜요? 머나먼 북쪽의 섬에 산다는 통통하고 날지 못하는 새가 된 기분이라고요.”
베로니카는 과일을 우물거리며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 옷을 겹겹이 둘러 준 장본인은 그제야 그녀의 모습이 객관적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어떤 새를 말하는지 깨달은 리온의 입에서 또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 미치겠네.”
“웃지 마요.”
크게 소리 내어 웃는 얼굴이 좋으면서도 왠지 부끄러웠다. 주먹 쥐어 때리자 리온은 과하게 아파하는 시늉을 했다.
과일을 먹은 뒤에는 바다와 가장 가까운 노점 좌판에서 낙화(落火)놀이를 위한 막대를 샀다. 긴 막대 끄트머리에 숯 봉지가 달린 물건은 봉지에 불을 붙이면 불티가 떨어지는 걸 볼 수 있어 바닷가 도시에서 인기가 많았다. 생각해 보니까 건국제 얘기를 했던 날 이 얘기도 했던 것 같다. 좋아하는 사람과 낙화놀이를 하고 싶어요.
“…예쁘다. 비가 온 뒤인데도 불이 잘 붙네요.”
리온이 불붙은 막대를 건네주자 베로니카가 아름다운 불티에 시선을 뺏긴 채 중얼거렸다. 모래사장에 겉옷을 깔고 앉자 검은 파도 소리만 들렸다.
“비텔스바흐를 다음 달쯤 로버딘으로 부를 생각이야.”
“비텔스바흐면, 필립 부단장님이요? 상관은 없지만 왜요?”
“맹세를 하려면 증인이 되어 줄 수 있는 사제가 필요해. 내 진짜 이름을 아는 사람으로.”
그의 말을 이해한 순간 불에 홀려 있던 베로니카의 눈이 문득 커졌다. 맹세, 증인, 진짜 이름.
네 번째 손가락에 언제부턴가 처음 보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휙 돌아보자 태연히 웃는 남자가 보였다.
“대체 언제….”
아니, 물어볼 필요가 있을까. 어두운 밤거리를 지나는 내내 손을 잡고 걸었는데.
“아까 나갔을 때 검의 파편을 녹여서 받아왔어. 안 맞을까 걱정했는데 자주 손을 껴 본 보람이 있네.”
이제 보니 그의 넷째 손가락에도 그녀의 것과 같은 게 끼워져 있었다. 헤네시스와 아포칼립시스의 흔적이 마치 신의 인정처럼 느껴져서 기분이 이상했다. 세상은 모르겠지만 그들은 존재했고, 신은 그들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대답은?”
리온이 물었고 베로니카는 입술을 달싹이다 그저 고개만 주억거렸다. 그가 뺨을 닦아 주고서야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시선이 엉킨 채 모래 위로 손끝이 닿았다.
“좋아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이름 모를 땅에서는 낙화에 소원을 비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신이시여, 당신께 마지막 기도를 드리오니 저희에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을 주시기를.
함께 걷다가 지칠 때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가족이 되게 하시기를.
당신을 찾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게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아멘.
<끝>
[참고 자료]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2007, 대한성서공회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Requiem in d-Moll, KV 626
(레퀴엠 중 제2부 부속가, 제3곡 분노의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