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127)화 (127/128)

로버딘은 한눈에 봐도 피난민으로 가득했다. 바다 옆에 있는 도시라는 것 외에는 아는 게 없었다. 올바른 선택일까. 혹시 이상한 곳이면 어떡하지.

바닷바람은 바하무트의 자취를 빠르게 지워 냈을 뿐만 아니라 활력을 여기저기 퍼뜨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다리가 올라간 건물에서 뚝딱뚝딱 망치질 소리가 나고 짐을 짊어진 사람들로 거리가 북적거렸다. 호기롭게 거리에 들어선 베로니카는 처음 온 외국의 생경함에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뒤따라오던 리온이 그녀의 손을 잡은 건 그때였다.

“이런 데서 잃어버리면 곤란하니까.”

저음의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그의 시선은 별일 아니라는 듯 정면만 향했지만 같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손끝에서 안도가 번졌다.

멍하니 있던 베로니카가 불쑥 물었다.

“가끔 보면 신기해요. 어떻게 알고 내가 원하는 일만 딱딱 해 줘요? 혹시 독심술 같은 거 연마해요?”

“그런 거 안 배우고도 알아.”

“어떻게요?”

“건국제 얘기를 할 때 네가 말했잖아.”

리온이 행인이 어깨를 치고 지나가지 않도록 그녀를 가까이 당기며 입을 뗐다.

“‘혼잡한 거리에선 길을 잃지 않도록 누가 손을 잡아줬으면 좋겠다.’”

“…….”

“하루는 아버지가 갑자기 손을 잡고 뛰어서 좋았는데 떨이로 내놓은 호밀빵을 급히 사려던 것뿐이었다고 했지. 그런데 막상 겨울이라 딱딱히 언 호밀빵은 씹기도 어려웠다고.”

“아… 응, 맞아요. 그래서 아직까지도 호밀빵이 싫어요. 엄마가 어릴 때 물에 개서 해 준 죽은 맛있었는데, 이상하게 다시 해 먹어 보니까 그 맛이 안 나더라고요. 그보다 내가 그런 것까지 얘기했었구나….”

아니, 그런 사소한 얘길 잊지 않고 있다는 게 더 놀라웠다. 그는 그녀가 한 말은 한마디도 빼놓지 않고 기억하는 것 같았다. 리온이 고기를 파는 노상 앞에서 멈춰 선 건 그때였다.

“혹시 사냥감을 사기도 합니까?”

“어떤 고기냐에 따라 다릅지요. 그건 뭡니까?”

상인이 말 등에 있는 짐을 턱짓하자 리온이 설명했다.

“공작입니다. 날개의 눈이 하나도 상하지 않은 상태면 얼마 정도 쳐줄 수 있습니까?”

“금화 서른 개 주겠소.”

흥정이 이어지는 동안 베로니카는 리온의 손을 놓지 않은 채 고개만 돌려 주변을 돌아보았다. 시세는 옥수수 하나가 은화 한 개인 것만 봐도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바하무트 이전 시절의 열 배였다. 물가 자체가 급등한 것이다. 생선과 곡식을 바꾸는 사람도 있는 걸로 보아 시국이 안정되기까지 물물 교환이 성행할 듯싶었다.

여분의 땅만 생기면 직접 채소를 재배해야지. 가축을 길러 우유나 계란도 얻을 수 있으면 좋을 것 같고….

골똘히 야무진 생각에 잠겨 있는데 리온이 공작 고기를 말에서 내리기 위해 잠깐 손을 놓았다. 베로니카는 그 틈에 궁금했던 좌판으로 다가갔다. 연기를 폴폴 피워 올리는 솥 안에는 한 그릇씩 파는 고기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 평소엔 좋아했던 냄새인데 순간 예고 없이 속이 뒤집혔다.

“욱,”

반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뒤로 물러나다가 리온과 부딪혔다. 금화 주머니를 막 받아든 그가 삽시간에 표정이 사라지며 그녀의 턱을 감싸 쥐고 낯빛을 확인했다.

“속이 안 좋아? 아침도 입맛이 없다고 굶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으응, 그냥, 별것도 아니에요. 도착했다는 생각에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오나 봐요.”

“다른 곳은, 불편한 데 없어?”

“딱히 없어요. 와, 엄청 걱정되나 보다. 이 정도는 그냥 쉬면 괜찮아져요.”

실은 가슴과 배도 아침부터 콕콕 찌르듯이 아팠지만 베로니카는 괜찮은 척 웃어 보였다. 솔직히 말했다간 구역질 한 번에 심각해진 남자가 의사를 찾아다닐 게 분명했다.

“바로 묵을 곳을 찾을 테니까 조금만 참아.”

“아는 사람이 있다고 만나러 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널 데려다 놓고 가도 안 늦어.”

리온은 로버딘에 지인이 있다고 말했었다. 바하무트의 습격을 겪고도 결코 죽었을 리 없는 사람이라고. 제게 빚이 있는 사람이니 정착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으니 그게 앞선 계획이었을 텐데.

괜히 일을 망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진짜 괜찮아요. 조금 어지러운 것 빼고는,”

“어지러워? 걸을 수는 있어?”

혹 떼려다 단박에 두 배가 된 우려가 돌아왔다. 그는 말 한마디만 더 하면 거의 그녀를 업고 다닐 기세였다. 과보호적인 태도에 베로니카는 결국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포기했다.

그들은 대로 가장 가까이에 있는 ‘눈의 아들’이라는 커다란 여관을 선택해 들어갔다. 견딜 만하다고 우긴 게 무색하게도 따뜻한 욕조에 들어가 씻자 꾸벅꾸벅 졸음이 밀려왔다. 맨날 찬물에 씻고 딱딱한 바닥에서 노숙만 하다가 깨끗하고 푹신한 깃털 침대에 눕자 천국에 온 기분이 들었다. 리온은 그녀가 잠이 들 때까지 옆에 있어 주었다.

그래서 다시 눈을 떴을 때 당황한 건지도 모르겠다. 창밖에 우수수 빗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베로니카는 넓은 침대에 혼자 누워 있었다.

***

“임신이 확실합니다.”

손목을 짚던 의사가 일어나며 확언했다. 리온은 문간에 기대 선 그대로 굳었다.

“활맥이 잡힙니다. 입덧이나 어지러움도 초기 증상과 일치하고요.”

무어라 답할 듯 열렸던 입이 다물렸다. 그의 눈동자가 그녀에게 한참을 머물렀다.

잠든 뒤에도 이어지는 불규칙한 숨소리를 듣다가 사환을 시켜 의사를 불러온 참이었다. 여독이 쌓인 거라는 대답을 들을 줄 알았다. 약을 받을 생각이었던 그는 의외의 말에 한참을 침묵했다.

“입덧이 심하면 물까지 거부하는 분들도 있는데 탈수가 올 수 있으니 주의해 주십시오. 여행자이신 것 같은데 로버딘은 항구 도시라 바다 요리가 많습니다. 음식은 꼭 익힌 걸로 섭취할 수 있게 도와주시고요.”

의사는 토마토와 고구마, 콩 같은 태아에게 좋은 음식을 나열했다. 뒤이어 먹고 싶은 것은 뭐든 대령해야 한다는 데까지 이르렀을 때, 리온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저렇게 약한데 아이를 가져도 괜찮습니까? 몸에 무리는 없는 겁니까?”

지금껏 설명의 중점이 되던 아이와는 전혀 관계없는 질문이었다.

다소 살벌한 눈빛에 의사가 눈을 끔뻑거리다가 누워 있는 베로니카에게 시선을 돌렸다.

“걱정하시는 만큼… 산모가 약해 보이지는 않는데요.”

“단순 어지러움만으로 저렇게 누워 있는 게 정상이란 겁니까?”

“그거야 여행의 피로가 누적되어 그런 걸 수도 있고… 지금도 그냥 잠이 든 겁니다. 호흡도 정상 범위 내고요.”

리온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베로니카는 쉽게 지치는 데다 체력도 약했다. 가뜩이나 깨지기 쉬운 유리 같은데 아이까지 감당하기 힘들어할지도 모른다.

“특별히 평소보다 무리하지만 않으면 괜찮을 겁니다. 아무튼 여기 계속 묵으실 거라면 제가 임산부만 진료하는 의사를 따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의사는 제가 해결할 수 없는 걱정이라 판단했는지 주의 사항 몇 가지를 더 당부하고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진료비를 치르고 방문객을 내보낼 즈음에는 밖에선 툭 투둑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색색 잠든 베로니카는 그 모든 소음이 끝날 때까지 깨지 않았다. 베개까지 꼭 그러안고 옆으로 누운 채 누구보다 평화로운 잠을 잤다. 리온은 의사가 나가고도 한참 동안 그녀를 보고 있었다. 두 귀로 똑똑히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

그와 그녀의 아이라고.

침대에 걸터앉은 채 작게 웅크린 손을 잡았다. 빗소리와 작은 온기가 처음 같이 보낸 밤을 떠오르게 했다.

그날, 그는 제 모든 것을 그녀에게 바쳤다. 결심에는 물론 이런 미래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책임질 자신이 없었다면 여자를 안지도 않았을 거다. 결핍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만큼 그는 언제나 제대로 된 가정을 꾸리기를 소원해 왔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기뻤다. 동시에 무서웠다.

“…네가 좋아할까?”

낮은 혼잣말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리온은 그녀의 손을 뺨에 비비다가 입을 맞췄다.

베로니카는 그에 비하면 아직 어렸고 그들은 정착도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였다. 아이를 주제로 깊은 대화를 해 본 적도 없으니 불안해하거나 겁을 낼 가능성도 있었다.

사실 그녀가 싫다고 하면 아이 같은 건 필요 없었다. 너만 내 옆에 있어 준다면.

번쩍, 하얀 번개에 검은 소유욕이 실루엣을 드러냈다가 사라졌다.

의처증이라고 했던가. 세상 모든 농담에는 진실이 반쯤 섞여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리온은 그녀의 손을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일행의 단순한 호의에 질투할 때부터 알아본 일이지만.

독점하고 싶었다. 오롯이 가지고 싶었다. 같이 씻는 시간도,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재잘거림도, 쾌활한 웃음과 호의 어린 시선이 닿는 곳까지 전부. 제 안에만 가둬두고 싶었다. 한번 타오르기 시작한 욕망은 무엇을 해도 결코 꺼지지 않았다. 이제 그녀 없이는 홀로 타 죽고 말 운명이었다.

갈 데까지 갔군.

리온은 허리를 숙여 베로니카에게 짧게 입 맞추고 일어났다. 베로니카가 안심할 만한 안정된 생활이 절실했다.

***

“리온?”

깨어난 베로니카는 이불을 두른 채 여러 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은 어디서도 돌아오지 않았다. 하긴, 이 작은 방 어디에 그 큰 남자가 숨어 있으려고.

“말이라도 하고 가지. 나보곤 계속 옆에 있으라고 해 놓고….”

비도 많이 오는데 어딜 갔을까. 뭔가 사정이 있으리란 걸 알면서도 괜스레 서러웠다. 나쁜 기억이 슬금슬금 떠올랐다. 어두운 방에 혼자 갇혔던 때가 잡힐 듯 선연했다. 사람들의 비명과 기도 소리, 하루 종일 멍하니 갇혀서 한사람만을 기다리던 때의 기억.

기다림이 싫다. 기다림은 시간의 속도를 한없이 늦춘다. 일 분이 하루가 된 것처럼 늘어지고… 그 순간, 상념을 깨는 소리가 덜컥 들려왔다. 번쩍 고개를 들자 비에 흠뻑 젖은 남자가 문을 열다가 그녀를 보고 놀란 듯 멈췄다. 그가 젖은 옷을 벗지도 않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왜 울어? 어디가 아파? 아직도 어지러워?”

삽시간에 코앞까지 다가온 남자가 이마에 손을 갖다 대며 물었다. 물기에 살짝 움츠리자 그가 손을 떼어 내려고 했다. 베로니카는 팔을 뻗어 멀어지려는 남자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