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126)화 (126/128)

“놀랐죠! 나 춤추는 거 처음 봤잖아요!”

무대에서 내려온 베로니카는 리온을 발견하자마자 곧장 이쪽으로 뛰어왔다. 서늘한 낯이 그녀를 받아안자마자 부드럽게 바뀌었다.

“한 세 시간은 있다 온 줄 알았어. 그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냥 뭐, 딱 얼굴만 봐도 재능이 보인다고 올라가 달라고 부탁하시길래 한번 춘 거죠 뭐. 그쵸, 엔조 씨.”

“예, 뭐 저는 못 들었지만 혹시 고양이한테 받으신 부탁인가요?”

놀리는 듯한 엔조의 반문에 베로니카는 눈썹을 찌푸리며 좀 맞춰 달라고 툴툴거렸다. 리온은 농담을 주고받는 두 사람을 가만히 보다가 손을 얽어 자연스럽게 그녀의 관심을 돌려 왔다.

“어떻게 진짜 사람이 된 거예요?”

또랑또랑한 물음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일행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질문자는 아까 입을 헤 벌리고 있던 관객 중 유독 똘똘한 눈빛을 가진 여자애였다.

“…어?”

“방금까지 인형이었잖아요.”

처음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소리가 귓가에 울리기까지 했다. 마치 바하무트였다가 어떻게 인간이 되었느냐고 물어보는 것만 같아서.

“아가씨와 기사요.”

그러나 아이가 무대 한편에 남은 인형극의 소품을 가리킨 순간, 베로니카는 검은 단발의 인형을 보고 곧 질문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는 리온과 베로니카가 인형극에서 튀어나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리온은 검조차 들지 않았는데도.

“사랑으로?”

일행의 고개가 다시 한번 동시에 돌아갔다. 대답한 건 리온이었고 그는 어린애를 놀리는 어른 특유의 태도로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말을 뱉었다.

“원래 모든 저주를 푸는 건 사랑이야. 그렇게 정해져 있어.”

와아, 하고 눈을 반짝이는 소녀를 보고 베로니카는 얼굴을 붉혔다. 동경의 대상이 되는 느낌이 이상했다. 엄청나게 어른으로 보이겠지. 세상을 다 아는 것 같고.

“그럼 어떻게 하면 언니처럼 기사를 구할 수 있어요?”

아이가 다시 물었다. 베로니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문득 대륙의 기사들을 외우고 동경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제게도 소녀와 같은 시절이 있었다. 그때 누군가 이렇게 말해 줬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기사는 필요 없어. 너 자신을 사랑하면 돼. 사랑은 그게 어떤 종류든 저주를 풀 수 있거든.”

무릎을 잡고 허리를 숙인 베로니카가 소녀와 눈을 맞춘 채 미소 지었다. 아이는 초롱초롱한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어린 관객과 인사하고 나자 드레스를 빌려주고 류트를 연주한 두 사람이 일행에게 다가왔다. 고양이를 든 여자가 샬롯의 손에 들린 음식을 가리키며 천막 안에서 묵는 조건으로 같이 먹자고 청했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보이는 류트 연주자는 인형극에 쓸 재밌는 이야깃거리를 듣고 싶다고 했다.

“아, 인형극으로 쓰면 좋을 것 같은 소재가 하나 있긴 해요.”

멀어지는 아이를 보고 있던 베로니카가 고개를 돌리며 끼어들었다.

“아까의 <아가씨와 기사>에서 영감을 받아 발전시킨 형태인데….”

“바하무트가 된 여자와 팔라딘이라.”

밤별이에게 사과를 먹이던 리온이 중얼거렸다. 식사에 이어 술까지 마신 그들은 잠깐 바람을 쐬러 함께 천막을 나온 참이었다.

“왜요? 우리 얘기를 털어놔서 마음에 안 들어요? 근데 이렇게라도 세상을 구한 티 안 내면 아무도 모르잖아요. 그건 서운해서 안 돼요, 안 돼.”

술기운이 오른 베로니카가 어림없다는 듯이 집게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뭉개진 발음에 시선을 돌린 리온이 어둠 속에서도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고 픽 웃었다.

“아니, 그 사람들이 붙인 제목이 마음에 안 들어서.”

“아 그거, 나도 그렇긴 했는데 애들도 봐야 하니까 어쩔 수 없죠.”

“다른 사람들이 우리 이야긴 걸 알아챌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아? 그쪽은 생각도 못 했다.”

베로니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눈치챘으면 어떡해요?”

“신경 쓰여?”

그가 그녀의 달아오른 뺨에 차가운 손을 대며 물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

길고 짙은 눈매가 묘하게 형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엔 읽을 수 없던 남자가 같이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차차 읽혔다. 베로니카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니 그렇게 누군가를 신경 쓴다기보다… 혹시 질투해요?”

“응.”

“엄청 솔직하다. 엄청.”

“그래서 싫어?”

“아니요. 왠지 기분 좋아요. 괜히 더 질투를 유발하고 싶다고 하면 내가 나쁜 거죠?”

“그럴 필요도 없을걸. 네가 툭툭 치는 장난은 물론이고 씻으러 갈 때는 심지어 여자한테까지 느끼니까.”

“내가 그렇게 좋아요?”

“좋아하는 건 진작에 넘었지.”

거침없이 나오는 대답에 또다시 심장이 귀에서 쿵쿵 뛰었다. 리온과 있으면 언제나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영향력 있는, 엄청나게 매력적인 사람.

“내 어떤 점이 그렇게 사랑스러운데요?”

술에 취해서일까, 아니면 분위기가 그렇게 이끌었을까. 닳아빠진 질문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제대로 된 답을 기대하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는데 리온은 잠시 생각하다가 진지하게 말했다.

“약해 보이는데 약하지 않은 점. 나와 닮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다른 점. 그리고….”

“…….”

“춤을 잘 춰서?”

천막에서 류트 소리가 흘러나온 순간 리온이 잘생긴 입매를 나른하게 휘었다. 밝아서 좋다거나 하는 흔하디흔한 말을 생각하던 베로니카는 아하하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그 말이 오늘 다시 반했다는 말처럼 들려서, 아니, 아마 그게 맞겠지. 내가 아는 당신이라면.

“있잖아요. 혹시 기억나요? 내가 맨 처음 검을 들었을 때요.”

“네가 날의 앞뒤도 구분 못하던 때?”

“응. 내가 당신이 바일라 스텝을 배우면 나보다 훨씬, 훨씬 서툴 거라고 장담했었잖아요.”

“왠지 안 좋은 느낌이 드는 전갠데.”

“지금 가르쳐 줄게요.”

베로니카가 손을 내밀자 리온은 눈썹을 찌푸리더니 거절의 의사를 뱉으려 했다. 문제는 그를 움직이는 주문을 그녀가 아주 잘 알고 있었다는 거다.

“나도 춤 잘 추는 사람을 좋아하거든요.”

목덜미를 쓸던 그의 행동이 멈칫 굳었다. 리온이 고개를 숙이며 헛웃음을 흘리다가 시선을 가만히 들었다. 베로니카의 손은 여전히 그를 향해 내밀어져 있었다. 마치 함께 떠나자고 말하는 사람처럼, 그가 그 손을 힘주어 잡았다.

하나둘 박자를 세며 걸음을 맞출 때마다 웃음이 터졌다. 눈만 마주쳐도 웃겼다. 몸을 쓰는 사람이라 그런지 놀라울 정도로 습득력이 좋았지만 그 와중에도 가끔 실수가 나왔다. 서투른 발자국이 심장에 하나둘 설렘을 찍었다. 앞으로도 당신과 춤추듯이 길을 걸었으면 좋겠다. 일렁이는 불로 얼룩진.

***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산과 들과 계곡과 마을을 지나서, 국경을 넘은 지도 벌써 한 달째였다.

“바다 냄새가 나요.”

절벽 끝에 가장 먼저 도착한 베로니카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아침부터 어지럽던 머리는 소금기 어린 바람을 들이마시자 비로소 맑아졌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발밑에 펼쳐진 바다 도시를 보면 정신이 번쩍 들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은 마침내 목적지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화이트랜드 동부 해안, 항구 도시 로버딘. 이곳은 부동항1)에 목마른 북부의 왕이 국교를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600년 전에 얻어낸 무역 도시다.

“마음에 들어?”

고삐를 쥔 리온이 옆에 서며 물었다. 신을 섬기겠다는 조건으로 번창한 도시는 재건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듣기론 로버딘에는 베이른과 같은 해류가 흐른다더군. 기후 차이는 있겠지만 물색은 비슷할 거야.”

그 말에 문득 여행 중 그가 무얼 좋아하냐 물었던 기억이 났다. 사람인지 사물인지 정해지지 않은 추상적인 질문에 베로니카는 당당하게 바다의 색을 외쳤었다. 사람들은 바다가 다 같다고 생각하지만 바다도 기후와 수심에 따라 에메랄드빛이 있고 흙 섞인 회갈색이 있고 무서울 정도로 짙푸른 바다가 있다고. 그중에서도 그녀가 제일로 좋아하는 건….

“응, 딱 내가 찾던 바다에요.”

속이 울렁거릴 만큼 새파란 바다. 파도 위로 반짝이는 물비늘이 가슴 깊은 곳에서 뭔가를 벅차게 끌어 올렸다. 리온은 눈을 반짝이는 그녀를 빤히 눈에 담았다. 마치 그것만을 위해 살아온 사람처럼 우두커니.

“고마워요.”

베로니카는 옆에 선 남자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리온은 말없이 어깨를 둘러 안아 주었다. 뒤에서 샬롯의 목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그럼 이쯤에서 작별 인사를 해야겠네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단정히 선 샬롯과 엔조가 보였다. 리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정말 도시에 들르지도 않고 그냥 갈 생각입니까?”

“물가가 어마어마하게 올랐을 텐데 여관비를 충당할 자신도 없고. 알다시피 노숙할 거면 복잡한 대도시보단 오히려 사람 없는 숲길이 나아요.”

처음부터 정해진 이별이었는데도 아쉬움이 솟구쳤다. 베로니카는 한 달간 정이 듬뿍 든 샬롯을 시무룩하게 보다가 재빨리 눈동자를 굴렸다.

“엔조 씨도요?”

“북부 끝까지 돌아보고 나서 다시 방문하겠습니다. 그때 뵙죠.”

엔조는 손등에 입 맞추기 위해 베로니카에게 손을 내밀었다가 대신 그의 손을 잡은 리온과 악수했다. 특유의 태연한 미소를 짓는 리온을 보고 여자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다시 오면 성대하게 대접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그때까지 자리를 잡아야겠지만.”

베로니카가 간신히 웃음을 그치고 말하자 샬롯이 밤별이 위에 매어진 사냥감을 찡긋하며 끼어들었다.

“그런 걱정 할 필요 없어 보이는걸요.”

리온이 도시에서 팔기 위해 잡은 사냥감이었다. 날개에 눈알 같은 장식이 화려하게 붙은 새는 값비싼 축에 속한다고 들었다. 일자리를 구하기까지 며칠을 지낼 비용은 번 셈이었다.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둘에겐 부서진 검에서 나온 금 조각이 있었지만, 베로니카는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리온과 같이 있는 한 굶을까 봐 황금을 건드릴 일은 없을 거다.

“둘 다 조심히 가요. 안전한 길로만 다니고요. 마차도 말도 사람도 주의해야 해요.”

“꼭 예전 우리 막냇동생처럼 걱정이 많네. 우린 괜찮으니까 염려 말아요. 베로니카야말로 새로운 시작이 무탈하길 기도할게요. 아, 그리고, 나중에 다시 돌아와 봤는데 아내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 있기만 해요.”

샬롯이 큰 언니처럼 리온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바다를 넘겨다 보던 리온은 돌아보며 그럴 일 없다고 잘라 말했다.

작별 인사는 아무리 길어도 짧게 느껴지는 법이다. 최종의 최종의 최종 인사를 끝낸 일행은 두 방향으로 갈라졌다. 말을 타고 언덕을 오르는 쪽과 고삐를 쥔 채 비탈진 경사를 내려가는 쪽으로.

베로니카는 공허함 반, 설렘 반의 마음을 안은 채 비탈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각주 모음]

1)부동항 : 겨울에 바다가 완전히 얼지 않아 선박이 오갈 수 있는 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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