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125)화 (125/128)

“보여 줄 거 있어요. 이리 와 봐요.”

“급해? 불 금방 피우는데.”

“안 돼요. 꼭 지금 봐야 돼요. 이따가는 없을지도 모른단 말이에요.”

어느 날 밤에는 씻고 온 베로니카가 재촉하듯 리온의 팔을 잡아당겼다. 뿌리칠 수 있는 작은 손짓이었지만 그는 순순히 이끌렸다. 베로니카는 나무에 매인 말들을 지나 시내로 향했는데 오솔길에는 별에 구애하는 밤벌레의 울음이 가득했다.

“같이 보고 싶었어요. 맛있는 거 먹을 때처럼, 자연스럽게 당신 얼굴이 생각났어요.”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어둠이 눈에 익을 무렵, 마침내 걸음을 멈춘 베로니카가 앞에 드리운 가지를 들쳤다. 갑자기 쏟아지는 빛살에 리온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예쁘죠.”

베로니카의 붉은 눈이 빛으로 일렁였다.

“여름밤에만 볼 수 있는 풍경이에요.”

리온은 넓고 단단한 어깨로 느리게 숨을 내쉬었다.

반딧불이였다. 웅덩이 위 휘어진 고목 주위로 호롱 같은 반딧불이 신비롭게 돌아다녔다. 그 위로는 뻥 뚫린 하늘에 은하수가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은밀한 장관에 리온은 한참이나 침묵하다 나직이 입을 뗐다.

“예뻐. 이날까지 살면서 본 것 중 제일로.”

그의 눈은 별이나 불빛이 아니라 그녀를 향했다. 심장이 욱신거리며 가슴에 파도가 일었다.

달 없는 밤임에도 하늘에는 빛이 충분했고 별의 움직임을 빼면 이 세상의 소리는 그들뿐이었다. 붉은 머리칼이 여름 바람에 거칠게 나부꼈다. 어둠을 배경으로 리온이 고개를 숙였다. 반짝거리는 별은 아침이면 사라지겠지만 입술이 맞닿은 그 순간만큼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

“베로니카, 이거 먹어 본 적 있어?”

타그닥타그닥 느리게 걷던 밤별이가 멈춰 섰다. 뒤를 돌아보자 리온이 늘어진 나무에서 검은 열매를 따는 게 보였다. 포도처럼 생겼는데 송이째 열리지 않아서 낯선 과일이었다. 베로니카는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무슨 맛인데요?”

“지력과 체력이 좋아지는 맛.”

“와, 그럼 맛있겠다…가 아니고. 지금 먹이려고 수 쓰는 거죠?”

“들켰네.”

리온이 입가를 깊게 팬 채 천연덕스레 웃다가 하나를 따서 그녀의 입 앞에 내밀었다. 베로니카는 하, 하고 코웃음 치고는 당당히 받아먹었다. 달큼한 과즙이 입 안에서 터지자 그녀의 눈이 토끼처럼 휘둥그레졌다.

냉큼 허리를 곧추세우고 손을 뻗자 과일을 딸 수 있게 리온이 가지를 당겨 내려 주었다. 여러 개를 따서 그중 하나를 그에게 내밀었다. 그가 고개를 숙여 받아먹자 입술이 닿았던 그녀의 손이 움찔 떨렸다. 리온은 붉어진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일행의 재촉하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빨리 와요! 마을이 코앞이에요! 도착하고 나면 오늘 하루는 푹 쉬다 갈 거예요!”

멀리서 샬롯이 외치고 있었다. 베로니카가 어지럽다고 해서 밤별이는 다른 말들보다 천천히 걷는 중이었다.

“괜찮겠어?”

“응, 잠깐은 참을 수 있어요.”

리온의 물음에 베로니카는 고개를 끄덕이곤 재빨리 앞을 돌아보았다. 아직도 뺨이 홧홧했다. 언제쯤 서로에게 아무렇지 않게 될까.

숨을 크게 들이쉬며 고쳐 앉자 리온이 다시 고삐를 잡았다. 밤별이가 바닥을 세차게 디디며 달리기 시작했다. 언덕을 오름에 따라 옹기종기 모인 집들이 하나둘 보이며 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베로니카가 마을 입구에서 펄럭이는 붉은 천막을 발견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일행이 있는 곳까지 도착해 멈추자마자 그녀는 손가락으로 그걸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다들 저거 보여요? 유랑 극단인가 봐요.”

“안 그래도 우리도 기다리면서 그 얘기를 하던 참이에요. 돌아다니는 무대라니, 맙소사. 요즘도 저런 게 있네요.”

샬롯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에서 내렸다. 짐을 내리던 엔조는 어깨를 으쓱했다.

“왜요? 제겐 낭만처럼 느껴지는데요. 어려운 시국에 즐거움을 되찾아 주고 싶은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그냥 현실 감각이 없는 거 아니고요?”

두 사람이 낭만주의자와 현실주의자의 논쟁을 이어 가는 사이 베로니카는 차오르는 기대로 눈을 반짝였다.

유랑 극단이라니!

“오늘 여기서 하루 지낸댔죠? 그럼 공연을 보고 갈 수도 있겠네요!”

베로니카는 리온의 도움 없이 먼저 말에서 뛰어내렸다. 샬롯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런 호사까진 바라지도 않아요. 일단 오랜만에 노숙이나 피할 수 있도록 묵을 만한 곳을 합의하고 오려고요. 도와주시겠어요?”

마지막 말은 리온을 향한 것이었다. 엔조는 체구가 작은 편이라 뭔가를 협상하기에는 리온을 데려가는 쪽이 좋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말에서 내린 리온은 확인받듯 이쪽을 바라봤다. 베로니카는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실은 머릿속엔 유랑 극단 생각밖에 없었다. 어릴 적에 베이른을 방문한 극단을 보고 꿈을 키웠었는데.

리온과 샬롯이 채집한 과일과 고기를 들고 멀어지는 사이 베로니카는 엔조를 돌아보며 은근히 운을 띄웠다.

“두 사람이 돌아오는데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어요. 할 거 없는 우린 어쩔 수 없이 가서 천막 안을 구경해 볼까요?”

“그럴까요?”

별로 원하진 않지만 어쩔 수 없다는 그녀의 말투가 재밌었는지 엔조가 웃으며 동조했다.

그들은 낭만을 안은 채 붉은 천막에 접근했다. 슬쩍 안을 들여다보자 기대와 달리 내부는 휑뎅그렁했다. 남자 하나가 줄을 움직여 인형극을 하고 있었고 아이들 두어 명이 그 앞에 앉아 멍하니 손가락을 빨고 있었다.

“뭘 찾으세요?”

그때 어떤 키 큰 여자가 뒤에서 불쑥 물어와 비명을 지를 뻔했다. 놀란 베로니카 대신 엔조가 서둘러 대답했다.

“아, 저희는 지나가는 여행객인데 무대가 언제 시작되는지 궁금해서 찾아왔습니다.”

“무대 같은 건 하지 않아요.”

여자가 품에 안은 고양이를 만지며 인형사를 눈짓해 보였다.

“우리 둘뿐이거든요. 광대도, 무희도, 노래하는 미네젱거도 남지 않았어요.”

“바하무트와… 관련된 연유겠군요?”

“네. 베이른에 오래 머무른 타격이 컸죠.”

“베이른이요?”

멍하니 있던 베로니카가 놀라서 끼어들었다. 반응이 거셌는지 엔조와 이름 모를 여자가 동시에 그녀를 쳐다보았다. 베로니카는 소름 반 반가움 반으로 어물거리다가 자신을 가리켰다.

“저도 베이른 출신이에요. 베이른에 오는 극단을 보면서 무희의 꿈을 키웠어요. 붉은 천막을 보면서 예전 생각을 하긴 했는데 정말로 그 천막일 줄은….”

“춤을 추던 단원들이 들었더라면 기뻐했을 얘기네요. 그래서 꿈은 이뤘나요?”

고양이를 안은 여자가 차분하게 물었다. 처음 만난 사람들을 상대하는 데 익숙해 보였다. 반면 베로니카는 머뭇거리다 고개를 저었다.

“어떤 면에선 이뤘지만 충분하진 못했어요. 정식 단원이 되자마자 베이른이 습격을 당했거든요. 아마 사람들이 공연에 돈을 지불할 정도로 시기가 안정되지 않고서야 다시는 무대에 설 일이 없겠죠.”

“그럼 오늘의 무대에 서 볼래요? 관객은 몇 없지만.”

여자는 즉흥적인 요청을 아무렇지 않게 툭 뱉었다. 베로니카는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여기서요? 지금?”

“바쁘지 않다면요. 우리는 광야를 향해 가는 떠돌이에 불과하지만 그 길에서 마주치는 아이들에게는 언제나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어 주려고 노력하거든요. 어린 시절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데 이런 시기에 태어나고 싶었던 아이는 없으니까요.”

방금 처음 만난 낯선 사람인데도 마음에 와닿을 만큼 인상적인 말이었다. 생각해 보면 처음에 춤을 추게 된 계기는 아주 단순했다. 소질이 있다고, 따라 빙그르르 돈 어린 그녀에게 극단장이 그렇게 말해 줬기 때문이다. 어린애가 귀여워서 그냥 던진 말일 수도 있지만, 그 칭찬은 어쩌면 그녀의 인생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베로니카는 홀린 듯 아가씨와 기사의 인형극을 구경하는 아이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천막 밖은 아직 조용했고 두 사람이 돌아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 오늘 여기 묵고 가는 거 맞죠?”

베로니카는 엔조를 돌아보며 확인했다. 그가 흥미 어린 얼굴로 끄덕이자 베로니카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류트가 있나요? 그럼 아주 잠깐만, 일행이 돌아오기 전에 한 곡만 아이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데.”

***

“피난민을 반기지 않을 거라곤 예상했지만, 이 정도로 경계가 가득할 줄은 결단코 몰랐어요. 심지어 손에 선물까지 들었는데 말이야.”

샬롯이 눈치가 보이는지 먼저 자국민을 변호하듯 입을 뗐다. 맨 마지막 집에서까지 투숙 요청에 퇴짜를 맞은 참이었다. 리온은 무뚝뚝하게 말을 받았다.

“사람 사는 마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들짐승을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질 겁니다. 노숙하는 것도 나쁘진 않습니다.”

“짐승이야 어차피 잡아서 다음 식사가 될 텐데 마주치는 편이 좋지 않나요?”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지만 리온은 웃지 않았다. 샬롯은 정확히 베로니카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차가워진 남자를 보며 어이가 없어졌다. 같이 씻으면서 베로니카는 종종 ‘너무 능글맞고 장난기 많은’ 남편에 대한 걱정을 털어놓곤 했던 것이다. 아무리 봐도 그녀는 다른 여자와 투닥거릴 남자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다른 사람 같았다. 누가 보면 평생 신만 섬긴 팔라딘인 줄 알겠다.

“그런데….”

그때 그가 돌연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이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는데 혹시 들은 게 있습니까?”

시선을 따라 주변을 둘러보니 정말 천막 옆에 말들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글쎄요, 아무래도 둘이 잠깐 구경이라도 하고 있는 거겠죠. 류트 소리가 들리는데요.”

그 말에 리온은 바로 노래가 흘러나오는 천막으로 성큼성큼 방향을 틀었다. 베로니카가 검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엔조도 괜찮은 인간이었기에 그는 머리론 걱정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그렇기 때문에 걱정하는 건가?

얼마간 같이 지내본 엔조는 성격이 유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딱 여자들이 좋아할 유형이다.

“와아, 예쁘다….”

천막을 걷자마자 들리는 탄성에 리온은 생각을 멈추고 곧장 무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입을 벌린 아이들 앞에서 베로니카가 붉은 천 자락을 넓게 펼쳐 보이고 있었다. 남부의 붉은 드레스는 하얀 어깨를 훤히 드러낸 채 무릎 위에서 나비 날개처럼 나풀거렸다. 나비, 그는 제 감상이 꽤 정확한 은유라고 생각했다. 정체 모를 남자가 현을 당기자 류트의 단조로운 선율에 맞춰 베로니카가 팔랑팔랑 미끄러졌다. 뒤늦게 들어오던 샬롯도 놀란 듯 멈춰 섰다.

“원래 춤을 췄나 봐요? 저렇게 화려하게 차려입으니까 딴 사람 같네요.”

리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을 듣지도 못했다. 그는 다만 그녀를 보고 있었다. 예닐곱의 관객을 단숨에 사로잡은 그의 사랑이 부드러운 류트의 선율이 끝나자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모습을.

흘긋 옆을 본 샬롯은 사람이 사람에게 반하는 순간을 포착할 수 있다면 이런 모습이리라 생각했다. 뚜렷한 이목구비 사이로 빛과 그늘의 음영이 얼룩졌다. 남자는 강렬한 충동을 억누르는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완전히 잠식된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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