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124)화 (124/128)

“위고 아저씨! 봤죠! 봤죠, 저 올라온 거! 이따가 리, 아니 노아 오면 꼭 증언해 주세요. 저 혼자 말 탔다고요!”

성공의 희열로 베로니카가 환하게 양팔을 휘젓자 위고는 졸음이 덜 깬 눈으로 그녀를 보다가 입맛을 다셨다.

“볼수록 영리하단 말이야. 정말 팔 생각 없나? 두둑하게 쳐줄 수 있는데.”

밤별이는 ‘영리한 말’답게 위고의 말을 퍼뜩 알아듣더니 사납게 투레질을 했다. 위에 타 있던 베로니카는 작게 비명을 지르며 말의 목을 다급하게 부둥켜안아야 했다.

“절대 안 돼요! 얜 물건이 아니라 친구라고 어제 말씀드렸잖아요.”

“뭐, 두 번이나 거절한다면야 어쩔 수 없지만… 그나저나 아침을 굶지 않는 건 오랜만이구먼. 요즈음 얼마 없는 성실한 젊은이야. 어제도 맨손으로 토끼 두 마리를 잡아 내밀며 합류했더랬지.”

가능성이 없자 흥미를 잃었는지 위고가 말머리를 리온에게로 돌렸다. 생활력이 정말 강한 젊은이라느니, 먹고살 걱정은 없다느니 하는 얘기 끝에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숙취에 좋은 고깃국이나 폭 고아 먹으면 좋겠는데.”

“방법을 모르시는 거면 제가 끓여 드릴까요?”

“정말?”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요. 옷과 식기까지 빌렸는데 가만 있는 것도 민망하던 참이에요.”

베로니카는 마침내 얌전해진 밤별이에게서 뛰어내리며 덧붙였다.

“꺼진 불만 다시 피워 주세요.”

어지간히 국을 먹고 싶었는지 위고는 냉큼 냄비에 물을 붓고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동안 베로니카는 아직 자고 있는 샬롯을 조심스레 흔들어 깨우고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모닥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엔조가 아침부터 조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뭘 먹고 싶은지 물어라도 볼까. 생각해 보니 일행 중 그하고만 대화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부엉이예요?”

다가간 베로니카는 옆에 쭈그려 앉으며 편하게 말문을 텄다. 엔조는 그녀를 흘끔 보더니 으쓱했다.

“한 번 더 추측할 기회를 드리죠.”

“맞추면 뭐가 좋은데요?”

“이 녀석의 주인을 시켜 드리겠습니다.”

“정말요?”

조각상을 준다는 말에 베로니카의 눈이 반짝였다.

“앉아 있는 고양이!”

“틀렸습니다. 꼬리가 없잖아요.”

“옆이 아니라 앞에서 보면 꼬리가 안 보일 수도 있죠.”

엔조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베로니카는 포기하지 않았다.

“남부 앵무새?”

“…….”

“토끼?”

“…….”

“이상하게 생긴 매?”

“…….”

“으으음, 아무리 봐도 부엉이인데…. 아, 벌레!”

물론 귀여운 조각에 대고 벌레라고 외친 건 아니었다. 말하던 도중 발치에서 커다란 지네를 보고 비명을 빽 질렀을 뿐.

그 순간 단검이 꿈틀거리는 지네의 몸통을 꿰뚫고 콰직 땅에 박혔다. 두 사람 다 놀란 터라 버둥거리는 벌레가 멈출 때까지 침묵이 이어졌다.

“올빼미.”

정답은 의외의 방향에서 들려왔다. 뒤를 돌아본 베로니카는 언제 왔는지 우뚝 선 리온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큼직한 산새를 손에 쥔 그가 무표정하게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노아? 언제 왔어요?”

“남부 앵무새쯤에.”

농담 같은 대답이었지만 물론 웃음기는 없었다. 리온은 죽은 벌레를 흘긋 바라보고 고개를 까딱였다.

“빌린 검은 잘 썼습니다. 덕분에 좋은 사냥감을 잡았으니 아침은 거르지 말고 꼭 드십시오.”

뒤이어 그가 새를 잡지 않은 손으로 익숙하게 베로니카의 손을 잡았다. 함께 돌아서려던 때였다.

“이거, 안 가져가십니까?”

엔조가 미소 지으며 조각상을 내밀었다.

“어떤 동물인지 맞히셨는데요.”

“필요….”

없다고 답하려던 리온은 베로니카와 눈이 마주친 순간 입을 다물었다. 반짝이는 눈을 한 그녀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조각상을 받아 들었다.

“고마워요. 정말 예뻐요. 어딜 가든 고이고이 간직할게요.”

“처음부터 여행길에 부부를 만나면 주자고 생각했던 물건입니다. 제 고향에서는 올빼미가 밤에 아이를 가져다준다고 믿거든요.”

“고향이 어디인데요?”

“탄비아입니다.”

“아.”

베로니카는 감탄하다가 거듭 감사를 표하고는 돌아섰다.

“진짜 대단한 것 같아요. 깃털 질감까지 다 살린 거 보여요?”

그녀는 그와 함께 걷는 내내 한 가지에 집중하는 사람이 얼마나 멋있는지 이야기했다. 리온은 묵묵히 들어주기만 했다. 피를 보고 난 직후라 그런지 약간 날 선 분위기가 흘렀다.

“근데 이거 아무리 봐도 부엉이 같지 않아요? 올빼미라는데 사실 무슨 차이인지 모르겠어요.”

“날카롭게 생기면 부엉이, 순하고 머리가 둥글면 올빼미.”

앞만 보고 걷던 리온이 짧게 정리했다. 묘하게 가라앉았으면서도 그녀의 의문엔 꼬박꼬박 성실하게 대답해 주는 게 좋았다. 음, 하고 의미심장한 소리를 내자 리온이 내려다봤다. 베로니카는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며 장난스레 되물었다.

“날카롭게 생기면 부엉이?”

“…….”

“순하고 둥글면 올빼미.”

덧붙일 때는 자신을 가리키며 뻔뻔하게 생글거렸다. 홀린 듯 보기를 잠시, 리온이 돌연 헛웃음을 터뜨렸다. 피를 본 한기가 삽시간에 허물어지고 하하 청량한 소리가 흩어졌다. 그가 눈가를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도저히 이길 수가 없네.”

“날 이겨 먹으려고 했어요?”

“아니, 맨날 지는데 뭐 하러?”

마침 물가에 다다른 리온은 잡은 손을 풀고 능숙하게 짐승의 피를 빼기 시작했다. 털을 뽑고 내장과 뼈를 바르는 과정을 베로니카는 가까이에서 감탄하며 지켜보았다.

생각해 보면 지금껏 그와 다니면서 먹을 걱정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든든하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원래 손질도 제가 하려고 했던 일인데.

“요리는 내가 할게요.”

“왜? 생고기 만지는 거 싫어하잖아.”

“응, 그렇긴 한데 오늘은 위고 아저씨랑 약속도 했고 뭔가 하고 싶어요. 언제까지나 아무것도 안 하고 의지만 할 순 없으니까.”

나름대로 단호하게 말하자 리온은 그녀의 표정을 살피다 두 번 말리지 않고 식재료를 넘겨주었다.

장난으로 어린애 취급해도 실제로 그는 그녀의 결정을 늘 존중했다. 호강시켜 준답시고 여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 남자들과는 달랐다. 검을 배우고 싶다면 가르쳐 주고 징그러운 손질을 보고 싶다고 해도 막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꼼짝 못 하게 두는 게 위해 주는 거라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하고 싶다는 걸 막는 건 다른 의미의 폭력이었다. 그런 게 없어서 좋았다. 이 건강한 관계가 정말로 좋았다.

“어때요?”

베로니카는 보글보글 끓는 냄비를 앞에 두고 마른침을 삼켰다. 조리를 끝내자마자 리온에게 간을 보게 한 참이었다. 묵묵히 국물을 떠다 삼킨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안 좋은 예감에 일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왜요? 이상해요?”

뭔가 문제가 있는 건가?

아침 시간을 이렇게나 오래 할애했는데. 설마 재료를 다 버린 건 아니겠지.

“…….”

“분명히 아까까진 괜찮았는데?”

대답 없는 리온을 기다리다 못해 서둘러 한 입 떠먹었다. 고소한 국물이 입 안을 부드럽게 적시며 목구멍을 넘어갔다. 맛있었다. 별문제 없는 것 같은데 대체 왜…?

의아한 시선을 든 순간, 입꼬리가 올라간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눈이 가늘어진 베로니카가 이를 갈았다.

“…죽고 싶어요?”

“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표정으로 문제가 있다고 말했잖아요!”

“관심법도 배워 요새?”

감탄하는 그를 노려보다가 작은 새 뼈 하나를 던지자 리온이 한 번에 받아서 내려놓으며 몸을 일으켰다.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정도라 무서워졌어. 사람들을 불러올게.”

같이 살면 지루할 틈은 없을 것 같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

아침을 든든히 먹은 일행은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드디어 카이젠미어-화이트랜드 국경이 코앞이었다. 시기가 시기다 보니 어딜 봐도 피난민의 행렬이 길었다.

사실상 신분도 확인할 수 없는 지경이라 화이트랜드에서는 자국으로 들어오는 난민의 수만 측정했다.

인파에 떠밀려 쉬지도 못했지만 다음 날은 그래도 사정이 좀 나았다. 길이 여러 갈래로 쪼개지면서 같은 방향으로 가는 피난민의 수가 줄었기 때문인데, 그때쯤 왕도로 간다는 위고와도 이별해야 했다.

“하얀 고성에 오게 되면 언제든 날 찾아오라고. 열쇠장이로 이름을 날릴 테니 기대들 해도 좋을 거야.”

정 많은 사내는 젊은 부부에게 제가 쓰던 검을 넘기고 떠났다. 베로니카는 그때부터 다시 검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해가 떠 있을 땐 말을 타고 해가 지면 검을 긋는 식이었다. 여름을 나는 짙푸른 땅은 땀 흘리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생생히 숨 쉬는 자연은 눈 닿는 곳마다 아름다워 자꾸만 여행자의 발목을 붙들었다.

“사람들은 툭하면 세상이 망한다는 소릴 함부로 지껄이지만, 실은 세계는 늘 그 자리에 있을 뿐이죠. 오만한 생물만 홀로 사라질 뿐.”

샬롯은 고국을 그리운 눈길로 바라보며 그렇게 말하곤 했다. 일행은 자연의 경이에 동의했다. 한번은 밤별이가 히힝거리며 뒷발질을 해대서 뭔가 했더니 멋진 뿔이 달린 순록이 가까이 다가온 적도 있었다. 숨을 죽이고 보던 기억, 신수같이 생겼다는 엔조의 혼잣말과 신수가 맞다고 진지하게 대답해 사람 헷갈리게 했던 리온의 못돼먹은 농담, 귀찮은 얼굴로 뒤늦게 설명에 들어간 샬롯까지.

중간에 집시들과 마주쳤을 때는 난생처음으로 별자리 점도 보았다. 태어난 날과 시를 말하고 탄생성을 비교하는데 노파의 말로는 남자 쪽이 꽉 잡혀 살 팔자라고 했다. 리온은 심드렁히 미신을 믿지 않는다고 대꾸했지만 베로니카가 시무룩해하자 당혹한 얼굴로 그럴듯하다고 고쳐 말했다. 그 쩔쩔매는 모습에 사람들은 배를 잡고 웃었다.

그다음은 누구였더라. 아, 작은 마을째로 피난 가던 사람들. 고향이 완전히 무너졌다는 그들은 새로 열린 광야를 향해 걷고 있다고 했다. 리온과 베로니카는 그들에게 목적지와 생사를 알리는 편지를 부탁했다. 수신자는 필립 폰 비텔스바흐 경. 혹시 그에게 닿지 못한다면 다른 기사단원에게라도 전해 달라고 덧붙였다.

그러고도 여정은 계속되었다. 북쪽으로 갈수록 그들은 서로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들판의 짐승보다 자유롭게 사랑했고 어린애처럼 순수하게 키득거렸다. 리온은 그녀의 허벅지에 머리를 베고 낮잠 자기를 특히 좋아했고 베로니카는 그에게 젖은 머리를 말려 달라고 조르기를 좋아했다. 둘 다 좋아하는 건 예기치 못한 순간에 입을 맞춰 당황하는 상대방의 얼굴을 보는 일이었다. 거의 누가 빈틈을 노리느냐 하는 승부에 가까웠다.

모두 털어놓자면 끝이 없다. 길은 갖가지 색채로 가득 차 눈부셨다. 하루는 진짜로 황어가 가득한 시내를 발견하기도 했는데, 샬롯의 손가락질에 버드나무 아래를 들여다본 그들은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같은 밤을 떠올린 탓이다. 눈이 마주친 순간 리온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고 얼굴을 붉혔다. 둘만의 비밀이 자꾸만 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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