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안이 마르고 피가 고동쳤다. 그가 결혼을 말하고 있단 걸 깨닫는 순간 마음이 아려 왔다. 언제나 여유로워 보이는 남자가 그런 걸 걱정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방금 그가 언급한 대로, 말로 안 하면 모르기 때문에.
“그게 내 어둠이야. 널 제대로 채워 줄 수 있는 인간이 나타날까 봐 끊임없이 발버둥 치는 비참함이.”
리온은 서슴없이 제 가장 어두운 부분을 털어놓았다. 가장 보여 주기 싫을 나약한 부분을, 수치도 모르는 인간처럼 그녀에게 전시했다. 부끄러움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녀 역시 솔직하게 나오길 바라기 때문이다.
베로니카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한참 만에 작게 중얼거렸다.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난 신의 축복이나 남들 앞에서 평생을 약속받는 일 같은 건 꿈꿔 본 적 없으니까. 그냥 함께할 사람만 있으면 돼요.”
리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베로니카는 그가 믿지 않는 것만 같아 더듬더듬 덧붙였다.
“그리고 같이 떠난 일도 후회한 적 없어요. 오늘도 안 아팠어요. 좋았어요. 우울해 보이는 것도… 그냥. 별일은 아니고 샬롯이 가족을 잃었다는 말에 우리 생각이 나서.”
“우리?”
“검이 깨지고도 내가 다시 살아나지 않으면 어떻게 할 작정이었어요?”
결국 묻고 말았다. 꾹꾹 눌러둔 질문이자 물에 씻어 보내려 한 과거를. 리온이 생각에 잠긴 듯 덜 마른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 넘겼다. 그게 하고 싶은 말을 참을 때의 버릇이라는 걸 이제는 알았다.
“말 돌리거나 피하지 말고. 솔직히요.”
“죽었겠지.”
“…….”
“실제로 초주검이 되어 있었지만, 건강한 상태였다고 해도 마찬가지야. 네가 없인 살 이유가 없었어.”
몸이 차게 식는다. 예상한 답이었는데도 놀랐다.
“원하는 답이 아니라 실망했어?”
실망했느냐고? 당신 없인 살 이유가 없노라 말하는 연인 앞에서 과연 실망하는 사람이 있을까?
오히려 기뻤다. 자신이 그의 유일한 불꽃이라는 사실이 겁이 날 정도로 좋았다. 좋아서…
“아니요. 음습하게 기뻐하는 내 자신이 싫어요.”
누군가가 너무 좋아서 스스로가 무서워지는 기분을 알아요?
베로니카는 떨리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 도망가고 싶은 사람처럼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행복하길 바라는데. 한편으론 숨 막혀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나만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나만, 내 생각만 하면서 희생했으면. 그런데 그게 뭐야, 마지막 숨까지 앗아 가고 싶은 게 사랑이에요? 그건 너무 이기적이잖아요.”
마음이 커질수록 불안도 함께 자라난다니, 인간은 정말이지 피곤한 족속이다.
“건강하지 못한 마음이 언젠가 당신을 무너뜨릴까 겁나요.”
“베로니카.”
“나는.”
“나는 그런 거론 안 무너져.”
리온이 단호한 투로 끊고 들어왔다. 베로니카는 멈칫하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흔들림 없는 곧은 눈이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사람을 인도하는 불꽃처럼.
“지붕을 떠받드는 두 기둥이 있다고 쳐도, 기둥의 굵기 따윈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반대편에도 받치고 선 기둥이 있느냐 하는 거지.”
알 듯 말 듯한 비유였다. 그때 그가 다시 말했다.
“관계란 건 원래 함께 서 있기만 해도 무너지지 않아.”
멍하던 베로니카의 눈에 서서히 초점이 잡혔다. 뭔가 알싸한 깨달음 같은 게 등골을 스쳤다.
같이 있기만 해도 되는 거라고. 머리 터지도록 복잡한 관계가 실은 그토록 간단하다고.
“빠져나갔을 때가 문제라면 채우고 있으면 그만이야. 온전히 하나가 된 채 헤어지지 않으면, 외롭거나 공허할 일도 없어.”
커다란 손이 그녀의 뒤통수를 당겨 품으로 끌어왔다. 따뜻한 체온이 몸을 감싸자 번잡한 생각이 천천히 녹아들며 사라졌다.
아, 그래. 어쩌면 그걸로 충분하다. 사랑이 크든 작든 이기적이든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난 안 떠나요.”
“응.”
“후회도 안 해요.”
“그래.”
“결혼이나 맹세 같은 것도 진짜로, 필요 없어요.”
뭉개진 소리로 훌쩍거리자 리온은 말없이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카르트를 떠난 후로도 미진하게 남아 있던 설움이 깊은 물에 떨어진 핏방울처럼 완전히 풀려 나갔다. 진작에 털어놓을걸. 그는 무엇이든 같이 받쳐 줄 사람이었는데.
“더 하고 싶은 얘긴 없어?”
어깨까지 자란 머리칼을 쓸어 주며 리온이 물었다. 베로니카는 그의 품에서 딸꾹질을 하다 퍼뜩 생각난 물음을 토막토막 뱉었다.
“있어요, 항상 생각했는데, 왜 당신은, 나를 애칭으로, 부르거나 하지 않아요?”
“아깝게 왜 줄여? 난 네 이름이 더 길었으면 좋겠는데.”
“왜요?”
“더 오래 입에 담고 싶으니까”
“…그런 발상은, 뭐 어디서 배워 오거나 하는 거예요?”
“아니. 매일같이 머리 싸매고 고민하다 떠오르면 써먹으려고 적어 놔.”
흰소리에 결국 웃음이 터졌다. 그녀가 울다가 웃자 그도 따라 웃었다. 노곤한 분위기 속에서 몸이 흐물흐물 풀어졌다. 바람이 살랑거리는 서늘한 여름밤, 같이 있으니 신기하게도 무서울 게 하나도 없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서로에게 닿아 있기만 하면 된다. 그것만으로, 우리는 언제든 더 큰불이 되어 함께 타오를 테니까.
베로니카는 잠이 드는지도 모른 채 따뜻한 품에 안겨 눈을 감았다.
***
남자는 꿈을 꿨다. 아주 오래간만의 꿈이었다. 꿈속에서 그는 광막한 사막 한가운데를 걷고 있었는데, 모래 폭풍을 건너고 나니 옆에는 베로니카가 함께 서 있었다. 둘은 마주 보다가 이내 정면을 향해 함께 걷기 시작했다. 걷고, 걷고, 또 걸은 끝에 멈춰 선 곳은 아름다운 검의 앞이었다. 베로니카가 그걸 가지고 싶다는 듯 가리켜 보였고 리온은 그녀에게 바치기 위해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힘을 주어 뽑아낸 순간, 눈이 뜨였다.
짹짹, 짹짹.
흰 구름이 떠가는 아침 하늘을 보다가 곧 품에 안긴 여자에게 시선을 내렸다. 미처 나뭇잎이 가리지 못한 햇살이 그녀의 얼굴에 떨어지고 있었다. 베로니카는 입술을 살짝 벌린 채 단잠에 빠져 있었는데 가끔 미간을 찌푸리기도 하고 속눈썹을 미세하게 떨기도 하는 게 무슨 꿈을 꾸는 듯 보였다. 온종일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얼굴이었다. 아니, 평생을 옆에서 눈을 뜬다 해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화이트랜드 국경을 넘으면 한 달 뒤에는 북부 제일의 항구 로버딘에 도착한다. 정착하고 나면 리온은 그녀가 원하던 대로 검을 먼저 구해 줄 계획이었다. 그런 생각에 골몰한 나머지 이어지는 꿈을 꾼 게 틀림없었다.
손끝을 세워 쇄골 언저리를 긋자 붉은 낙인이 궤적을 따라 피어났다 사라졌다. 만지는 것만으로 견디지 못해 그는 결국 그녀의 뒷머리에 손가락을 얽어 꽉 끌어안았다.
“응….”
작게 앓는 소리를 내는 여자의 체취를 폐부 깊이 들이마셨다. 발정기의 짐승이 된 기분이었다. 더, 더 깊이까지 그녀를 원했다. 지분거리는 손길이 잠을 깨웠는지 베로니카가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왜 벌써 아침이에요…? 이건 잠의 신이 벌이는 농간이 분명….”
말하다가 도로 잠이 드는 바람에 말꼬리가 흐려졌다. 귀여워서 피식거리자 또다시 무언가를 웅얼거렸다. 리온은 동그란 이마에 입을 맞춘 뒤 상체를 일으켰다.
“피곤하면 더 누워 있어. 식사 준비가 끝나면 다시 부를 테니까.”
“…싫어. 말했잖아요… 아침에 혼자 남는 게 제일 싫어.”
언제 징징거렸냐는 듯 베로니카는 애써 눈에 힘을 줬다. 그녀는 생각보다도 외로움을 잘 탔다. 그를 따라 억지로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잘 정도였다. 가끔 꾸벅꾸벅 조는 걸 볼 때마다 기분이 묘해졌다. 그런 여자를 그는 캄캄한 방에 혼자 두었던 거다.
“그럼 깨워 줘?”
떠오른 잔상을 쫓기 위해 버릇처럼 옷자락 속으로 손을 밀어 넣자 간지러운지 베로니카가 고르지 못한 웃음소리를 냈다. 고개를 숙여 곧고 가느다란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손을 자연스럽게 위쪽으로 미끄러뜨렸다. 둥글고 말캉한 살결이 손아귀 안에서 뭉크러졌다.
“살이 오른 것 같아.”
“누가 쉬지도 않고 먹여서. 아무래도 살찌워서 잡아먹을 생각인가 봐요.”
“대충 듣기만 해도 좋은 사람이네. 절대 놓치지 마.”
앞뒤 안 맞는 뻔뻔한 대답에 베로니카는 킥킥대며 눈을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는 것만으로 신체는 단단하게 반응했다. 자그마한 얼굴에 오밀조밀한 눈코입. 베로니카는 예뻤다. 그걸 본인만 몰랐다. 점점 말도 안 되게 예뻐지는데도.
“잠기운이 가셨으면 다른 사람들 깨우고 있어.”
그녀를 가만히 눈에 담다가 옷자락에서 천천히 손을 빼냈다.
“…물 받아오려고요? 더 안 해요?”
일어나려던 리온은 그녀의 모호한 질문에 멈칫했다. 시선을 돌리자 모로 돌아누운 베로니카가 작게 덧붙였다.
“아직 잠이 덜 깼는데.”
리온은 천진한 눈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고 이파리가 사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직각으로 떨어지는 어깨가 나무 그늘 아래서도 눈부시게 하얬다.
그녀는 제가 뱉는 말의 자극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가 어느 정도로 돌아 있는지 안다면, 결코 그런 말은 할 수 없으므로.
“나중에. 둘만 있을 때.”
누군가가 깬 듯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리온이 대답했다.
그녀에겐 항상 온기 이상을 주고 싶었다. 베르크라는 성을 달고도 감히 평생을 요구할 수 있도록. 불현듯 과거를 떠올려도 떠나지 않을 만큼 넘쳐나게. 그러기 위해선 앉아서 늘어져 있을 틈이 없었다. 그에겐 이제 책임질 가족이 있었다.
***
“리온은 가벼운 식사 거릴 구해 오겠다고 숲에 들어갔어요. 힘들면 더 주무세요.”
베로니카는 피로로 끙끙대는 위고에게 상황을 전하곤 밤별이에게 다가갔다. 이제 승마 연습은 아침 일상이 되어 있었다. 리온은 그걸 보고 말 좀 그만 괴롭히라고 했지만.
그래도 오늘은 제법 큰 성과가 있는 편이었다. 몇 번이나 뛰어올랐다 미끄러지길 반복하자 푸릉 한숨 같은 걸 쉰 밤별이가 거의 목과 몸을 땅에 숙이다시피 해 베로니카가 올라오는 걸 도와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