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인이 있었네
미련한 인간의 딸로 태어나
교활한 괴물의 종이 되었네
까만 머리에 붉은 눈 횃불이 되어
암암한 미래를 선명히 비추었으니
천년의 성도가 이내 무너지리라
살고 싶은 자 광야로 갈지어다
새를 날리고 백성을 움직였네
무너지는 산 아래서 하얀 검을 들었네
오, 붉은 기사여
괴물 아가씨를 구해 주오
주인을 찾아간 여자는 돌아오지 않았네
오, 붉은 기사여
괴물 아가씨를 안아 주오
아무도 그들을 찾지 못했네
- 광야에서 유래된 서사시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중 전승되는 일부 발췌.
***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 검을 버리고 기도를 했더랬지. 바하무트를 코앞에 두고 눈을 콱 감아 버린 거야. 안사람이 살아 있었으면 아마 저 인간이 미쳤지 했을 거야.”
모닥불이 타닥타닥 타올랐다. 관자놀이에 핏대까지 세운 위고는 잔뜩 흥분해 있었다.
“신이시여, 제가 한낱 찰나의 인생에 집착하였습니다. 지금까지의 죄를 다 사함받고 천국 가길 원합니다.”
그는 마치 치열한 전투 상황으로 돌아가기라도 한 듯 두 손을 맞잡고 중얼거렸다. 흥미로워서가 아니라 사뭇 진지해서 베로니카는 저도 모르게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때 그녀의 그릇에 연한 살코기가 하나 더 놓였다. 옆을 돌아보자 그녀만을 보고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갑자기 세상이 새카아맣게 물들었어!”
가래라도 뱉듯이 강렬하게 발음하는 ‘카아’ 소리에 베로니카는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입 안으로 얼른 밀어 넣은 토끼 고기는 고소하게 살살 녹아내렸다.
“에이, 아저씨. 지금 설마 아저씨가 기도해서 신이 돌아오셨다는 얘긴 아니죠?”
깍지 낀 손을 머리에 받친 짧은 머리 여자가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위고는 곧장 격앙된 투로 발끈했다.
“내 신앙을 무시한 거야?”
“아니, 그게 아니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니까 그렇죠.”
“그럼 바하무트가 죄 사라진 건 어디 말이나 되는 일인가? 그 순간에 자네들은 뭐 하고 있었어? 응? 내놓을 사연 없으면 아예 시비를 말라고. 내 식기로 밥을 해 먹으면서 말이야.”
위고가 여행길에 만난 젊은이들을 죽 둘러보며 이죽거렸다.
지금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앉은 인원은 리온과 베로니카를 제하면 총 셋이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짧은 머리 샬롯과 검푸른 머리의 부드러운 엔조, 식기를 제공한 대가인지 모험담을 끊임없이 늘어놓는 땋은 머리의 위고까지, 셋.
“글쎄요, 나야 뭐 그 역사적인 순간에 숨어서 낮잠 자고 있었으니까 모르겠고, 오히려 사연은 이쪽에 있어 보이지 않아요?”
샬롯이 슬쩍 리온과 베로니카 쪽을 눈짓해 보였다. 그녀는 방금 합류한 젊은 부부를 수상쩍게 여기는 눈치였다. 샬롯이 제대로 된 옷 한 벌을 내주기까지 베로니카는 슈미즈 위에 리온의 망토 하나만 두르고 있었다. 바하무트와 전투했다기엔 검 한 자루 없는 차림이다. 의심이 담긴 눈빛에 베로니카는 고기를 꿀떡 삼키고 눈을 굴렸다.
신이 돌아왔을 때 뭘 하고 있었느냐고…?
그땐… 죽어 있었는데.
“음… 그게… 그러니까.”
“위고 씨처럼 흔한 전투 중이었습니다. 죽을 뻔하다가 일식에 도움을 받았고.”
대신 입을 연 건 리온이었다. 그러자 샬롯이 미간을 찡그렸다.
“전투? 맨손으로 말인가요?”
“검은 부러져서 버렸습니다.”
“아하, 자네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거구먼. 검이 부러진 시점에 딱 일식이 찾아든 거지? 헤어질 뻔했으니 그렇게 시선을 못 뗄 만도 하지. 어쩐지 식사 내내 아주 꿀이 뚝뚝 떨어지더라고.”
다들 그가 그녀만 보고 있던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남들 앞에 연인으로 시인하고 나선 건 처음이라 왠지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렸다. 맨 처음, 광야에서 부부로 가장했던 때가 떠올랐다. 그땐 리온의 아내 운운에 곤란했었는데… 문득 장난기가 치민 베로니카가 끼어들었다.
“아, 그건 노아의 의처증이 심해서요.”
필립, 당신의 말을 인용 좀 할게요.
“이 여정을 떠나고부터는 먹을 때도, 씻을 때도, 잘 때도 도저히 혼자 두질 않아요. 잠시라도 시야에서 벗어나면 걱정돼서 견딜 수가 없나 봐요.”
베로니카는 부러 과장되게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러자 위고가 입을 딱 벌리고는 탓하는 눈길을 리온에게 보냈다.
“뭐? 에이, 정도가 심하면 그건 좀 곤란한데. 이봐, 내가 살아 보니까 사랑이란 건 말이야. 각자의 삶이 있고 꿈이 있어야 오래가더란 말이야.”
리온은 뭐라고 대꾸할 듯 몇 번 입을 열었다가 픽 바람 빠지는 웃음 같은 걸 흘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마침내 그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치려고 노력 중입니다.”
“그래, 그래야지.”
따뜻한 국물을 마시던 베로니카는 리온과 시선이 마주치자 눈을 휘어 보였다. 그가 입꼬리를 비틀다 한 손으로 다람쥐처럼 부푼 그녀의 양 볼을 그러쥐었다. 제법 괜찮은 급습이었으나 국물은 이미 꿀꺽 소리를 내며 목구멍을 넘어간 뒤였다.
“베이른 출신이라 들었는데 그럼 그때부터 죽 도망 다닌 건가요?”
“계속 카이젠미어를 떠돌았습니다. 순전히 베로니카의 전투 실력에 의지하긴 했지만.”
쿨럭, 일순 베로니카가 사레 걸린 기침을 토했다. 일행도 귀를 의심한 듯 잠깐 침묵했다. 리온은 베로니카와 빤히 맞추고 있던 시선을 천천히 일행에게 돌리며 물었다.
“아, 제가 말 안 했습니까? 검이 부러질 때까지 바하무트와 싸운 건 제가 아니라 베로니카입니다.”
“…….”
“의존증에 걸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무서워서 혼자 있기 겁이 납니다.”
그는 건조한 투로 뻔뻔한 소리를 하는 재능이 있었다. 웃음기 하나 없는 말에 샬롯과 위고는 이걸 농담으로 받아야 하나 고민하는 표정이 되었다. 키와 덩치까지 합치면 베로니카의 두 배가 넘는 남자다. 죽 나무토막만 깎고 있던 엔조까지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베로니카는 제게 모인 시선을 죽 둘러보았다. 대답을 기대하고 있었다. 아하하, 웃던 그녀는 이내 빈 그릇을 들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슬슬 잠자리에 들 채비를 하는 게 좋겠네요. 내일 일찍 일어나서 떠나야 한다면서요.”
“뭐야, 영웅담은 없는 건가?”
“샬롯, 같이 씻으러 갈래요?”
“아니, 잠깐만, 갑자기 화제가 돌아가서 내 얘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쳤잖나. 일식이 끝나고 눈을 떴을 때! 바로!”
샬롯은 위고의 외침을 무시하고 일어섰다. 엔조도 뒷정리를 시작했다. 위고는 마지막으로 애절한 눈빛을 리온에게 보냈으나 그는 오직 한 사람에게만 관심이 있었다.
“무슨 일 있으면 소리쳐서 불러. 바로 갈 테니까.”
“아니아니, 의처증 고쳐야죠. 금방 올 테니까 정 무서우면 위고 아저씨 무용담이나 들어주고 있어요.”
일부러 마지막 말을 덧붙이자 순간 위고의 눈이 반짝였다. 리온의 눈썹이 구겨지는 걸 보면서 베로니카는 말괄량이처럼 사악하게 웃고는 휙 돌아서 달려갔다.
앞서가던 샬롯은 옆까지 다가온 그녀를 흘금 돌아보곤 입을 열었다.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
“음… 일단은 이런저런 같이 겪은 일이 많아서요. 샬롯은, 화이트랜드에 가족이 있어요?”
따라 걸으면서 쾌활하게 물었다. 북부가 고향이라고 한 게 생각났다.
“부모님이 겨울의 끝에 계세요. 대륙의 가장 추운 지역이니 천만다행으로 무사하시겠죠.”
“신의 가호가 있었군요. 그럼 카이젠미어에는 일 때문에 내려온 건가요?”
“아니요. 결혼 때문에. 남편과 아이가 있었어요.”
베로니카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샬롯은 멈추지 않고 그대로 강가까지 걸어갔다. 있었다는 건 지금은 없다는 뜻이다. 주저 없이 훌훌 옷을 벗는 샬롯을 물끄러미 보다가 천천히 걸었다. 너무 행복한 나머지 잊고 있었다. 무수한 사람들이 근 2년 사이에 부모와 자식과 형제를 잃었다는 걸.
“죄송해요…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악의 없이 물어본 건데 뭘요, 죄책감 느끼지 말고 마음껏 행복해해도 돼요. 두 사람 보기 좋아요.”
어딘가 건조한 목소리로 샬롯이 덧붙였다.
“산 사람들에겐 그럴 권리가 있죠.”
찰랑거리는 잔잔한 물소리가 들렸다. 베로니카는 반쯤 잠긴 등을 보다가 발끝으로 시선을 내렸다.
혼자 남겨진 무언가를 볼 때마다 속절없이 리온이 떠올랐다. 그는 제가 죽었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샬롯이 그렇듯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쓸쓸하게 마음먹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생의 빛이 영원히 바랬을까. 따라 죽으려 할 정도로….
혹시 그랬기를 바라?
“베로니카, 안 들어와요?”
속에서 들린 물음에 흠칫 놀랐을 때 샬롯이 뒤돌아 외쳤다. 베로니카는 황급히 대답했다.
“아, 지금 가요.”
옷가지가 하나둘씩 바닥에 떨어졌다. 생각을 얼른 물에 씻어 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재빨리 흘려보내고 나면, 아무도 그런 못된 마음을 품었다는 사실은 모를 테니까.
***
“씻으면서까지 의처증의 안 좋은 사례들을 들었어.”
강가에서 돌아온 리온이 피곤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베로니카는 담요를 싸매고 바닥을 구르며 킥킥거렸다.
“재밌어? 날 팔아먹고?”
“으응. 피곤할 것 같아서 안 그래도 오늘은 내가 먼저 잠자리도 깔아 놨어요.”
샬롯이 빌려준 모포에 누워 탕탕 바닥을 치자 리온이 옆에 털썩 앉았다. 젖은 머리칼을 귀찮다는 듯 쓸어 넘기는 모습이 익숙하다. 이제 저 머리는 아침이면 밤새 숲을 뛰어다닌 사람처럼 자기주장을 하게 될 것이다. 베로니카는 자신만 아는 그의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안아달라는 듯 자연스럽게 팔을 벌렸다. 리온은 그녀에게 불가 자리를 양보하며 누웠다.
“나 별로 안 추워요.”
“새벽엔 추워져.”
리온이 짧게 대답하고 그녀를 당겨 안았다. 일행은 모닥불을 중심으로 둥글게 잠자리를 꾸린 상태였는데 베로니카는 꽉 안기자마자 그가 참고 있음을 눈치챘다. 모를 수가 없었다. 잠깐 멍하니 있다가 꿈틀꿈틀 튜닉 안에 손을 밀어 넣자 두꺼운 허리와 복근이 단단히 경직되는 게 느껴졌다.
“뭐 해?”
리온이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