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120)화 (120/128)

베로니카는 곧장 반격에 들어갔다. 한바탕 물을 뿌리고 당하고 난리를 치며 와르르 웃음이 터졌다. 씻으러 들어온 것도 잊고 진짜 어린애들처럼 놀았다.

“아, 그만, 그만. 내가 졌어요. 이건 진짜 싫어.”

간지럼을 태울 즈음이 되어서야 베로니카는 그의 목을 와락 끌어안으며 항복 선언을 했다. 작은 새가 쪼듯이 입술을 가볍게 맞춘 베로니카가 배시시 웃자 리온은 뚫어지게 미소를 보다가 그녀를 높이 안아 올렸다. 어깨에 젖은 이마를 문지르는 작은 행동에서도 애정이 묻어났다. 실오라기 한 올 없이 와닿는 굴곡이 낯설고도 좋았다. 안을 때마다 알고 있던 사실인데도 새삼 단단하고 딱딱한 근육이 강하고 든든하게 느껴졌다.

“이제 어디로 갈 거예요?”

어깨를 크게 오르내리며 숨을 고른 베로니카는 흘러내린 붉은 머리를 넘겨 주며 질문했다. 카르트로 가기로 한 건 알지만 지금은 그 후의 일을 묻는 거였다. 리온이 물 묻은 얼굴을 한번 쓸어내리며 되물었다.

“어디 가고 싶은데?”

“글쎄요. 한번 들어 보고 길이 달라질 것 같으면 여기서 헤어지고요.”

장난이었는데 리온이 멈칫하며 시선을 들었다. 진심을 가늠하듯 면밀히 응시하는 눈길에 조금 놀랐다. 마침내 농담인 걸 확신한 그가 슬쩍 고개를 기울이며 입매를 비틀었다.

“미안하지만 여기선 못 헤어져.”

“왜요?”

“아직 아는 게 별로 없어서.”

아는 게 별로 없어서?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가 대답을 망설이는데 그가 불쑥 물었다.

“좋아하는 음식이 뭐야?”

“네?”

“혼자 있을 땐 주로 뭘 해? 노래도 춤추는 것만큼 좋아해?”

베로니카의 눈이 토끼처럼 커졌다. 질문의 목적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그가 다시 말했다.

“너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

“알려 줘.”

가슴이 울렁거렸다. 알고 싶다는 말이 좋아한다는 말로 들렸다. 목구멍이 간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따끔거리기도 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어도 이 감정이 사랑인 건 알았다.

파도처럼 밀려와 발을 적시고 모래성을 무너뜨리는 움직임. 많은 이들이 막연한 두려움으로 뒷걸음질 치지만. 충분히 바다를 알게 된 후에는 결국 파도를 사랑하게 된다.

“네가 원하면 검은 숲에 데려다줄게. 가는 길을 알아.”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는 베로니카에게 리온이 덧붙였다. 그녀가 편지에 썼던 장소를 기억하는 듯했다. 언젠가 가 보고 싶었던 검은 숲의 잔잔한 호수, 물론 거기도 좋겠지만….

베로니카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검은 숲은 나중에 가요. 생각해 봤는데 지금은… 바다가 더 보고 싶은 것 같아요.”

모든 물의 고향이자 목적지. 바하무트가 1년을 숨어 살았던 곳. 세상 만물을 포용할 수 있을 듯한 그 커다란 물을 다시 보고 싶었다.

“바다? 그럼 베이른인가?”

“베이른도 좋고 다른 항구 도시도 좋아요. 물색이 보는 것만으로 추워질 정도로 파랬으면 좋겠어요.”

그러고 보니 벌써 신의 계절 여름이다. 찬란한 햇살이 반짝거리는 바다는 언제 떠올려도 기분이 좋아지는 광경 중 하나다. 온종일 헤엄치고 노느라 까매진 아이들과 풍경화를 그리는 화가의 모습까지 그려 보다가 베로니카는 활짝 웃었다.

“바다에서, 나에 대해서 더 많이 알려 줄게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닿을 듯 말 듯 가까웠던 입술이 겹쳐졌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따뜻했고 이내 뜨거워졌다는 것밖에는.

물이 다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

호수를 나온 그들은 카르트로 돌아가기 위한 행로를 골랐다. 리온이 자신과 같이 절벽으로 온 게 아니라 지하 통로로 왔다는 걸 안 베로니카는 허탈하다 못해 억울해졌다. 동굴에서 일직선으로 죽 뻗은 길을 걷기만 하면 카르트 대성전이 나온다고 했다.

“말도 안 돼. 그런 길이 있는 줄 알았으면 그 고생은 안 했을 거라고요. 내가 말했죠.”

“절벽에서 떨어져서 죽을 뻔했다고?”

“응, 그랬는데.”

“나뭇가지를 붙들고 놀랄 만한 끈기와 근력으로 올라왔다고.”

벌써 세 번이나 반복된 이야기에 앞서 걷던 리온이 물 흐르듯 말을 받았다. 베로니카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같은 얘기를 한 번 더 반복했다. 그들은 어두운 통로를 걸으며 떨어진 사이 있었던 일을 모조리 나누었다. 최초를 만나서 나눈 대화부터 무너진 대성전과 필립이 전해 달라고 한 사과까지.

돌이켜 보니 모든 게 기적 같았다. 그곳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마지막을 각오했었는데, 이렇게 살아서 다시 돌아갈 줄은….

“아.”

“왜?”

“너무 차별하시는 거 아닌가 하고 신께 잠깐 불만을 가졌었는데. 이건 살아서 편하게 돌아갈 길로 마련된 건지도 모르겠어요.”

인간이 신의 일을 모두 알지는 못하니까.

그러자 리온이 감탄 비슷한 소리를 흘리다가 어깨 너머로 씩 웃었다.

“그렇다 해도 절벽으로 가야 했던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그건… 아, 그렇네.”

갸웃하다 맞장구친 베로니카는 결국 뭔 소리를 한 건가 싶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까부터 별거 아닌 일에도 입가로 미소가 비어져 나왔다. 오랜만에 맛보는 평화에 여유가 넘실거렸다. 그러는 사이 저 앞에는 벌써 희미한 빛이 어른거려, 자연스럽게 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리온의 뒤를 따라 차례로 통로를 빠져나가자 탁 트인 지하 공간이 나왔다. 넓은 대성전의 지하 무덤은 부서진 계단 입구로 빛만 들어올 뿐 사람은 없는 듯 고요했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한자리에서 멈춰 섰다. 있어야 할 기사단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도의 관 위에 피로 쓰인 문자가 눈길을 잡아끌었던 탓이다.

Dimitte populum meum, ut sacrificet mihi in deserto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위하여 축제를 지낼 것이니.)

성전의 말씀이었다. 단지 그 한 구절뿐이었지만 그들은 누가 썼는지 의문을 품지 않았다. 필립이 광야로 떠나면서 남긴 전언이 분명했다. 리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단한데. 그 상황에 우리가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는 게.”

“적어도 한 명 정도는 올 거라고 믿었겠죠. 그런데 좀 이상해요. 성력이 있는 사람들은 광야에서 살 수 없잖아요.”

“또 모르지. 우리가 블라센에 있는 사이 뭔가 바뀌었을지도.”

리온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대답했다. 베로니카는 사람들이 무사하리란 안도감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혹여나 하는 마음에 주위를 살펴봤지만 전투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떠난 지 오래됐나 봐요. 물이 말랐어요.”

지하수를 위해 임시로 파헤친 구덩이를 확인한 베로니카는 이내 빛이 들어오는 부서진 계단을 먼저 뛰어 올라갔다. 밝은 빛이 머리 위로 쏟아지는데 가슴이 이상하게 벅차올랐다. 밖으로 나오는 게 오랜만이라서일까. 아니면 어떤 예감 같은 것일까.

돌무더기 사이로 고개를 내밀어 폐허가 된 카르트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역시 생존자들은 카르트를 재건하기보다는 새 도시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은 것 같았다. 그때 베로니카의 입에서 탄성에 가까운 나직한 숨이 터졌다.

“밤별아!”

포석 사이에 머리를 숙이고 있던 말이 귀를 쫑긋하며 이쪽을 돌아봤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 털과 별처럼 총총한 눈. 틀림없었다. 그들의 말이다.

“리온! 빨리 올라와 봐요!”

흥분한 베로니카는 돌아보고 소리친 뒤 얌전하게 선 말에게 숨이 차도록 달려갔다. 여기저기 다른 말도 몇 마리 보이고 떠돌이 개들도 먹을 것을 찾아 도시를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신이 내린 우연, 아니 운명이었다. 무릎을 잡고 숨을 몰아쉬던 베로니카가 마치 말과 대화라도 통하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밤별아, 한 번만 더 우리랑 같이 가자. 맛있는 것도 많이 사 줄게. 갈기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도록 해 줄게.”

“호강시켜 줄 돈은 있고?”

어느새 밖으로 나온 리온이 그녀의 큰 목소리를 들었는지 멀리서 끼어들었다. 베로니카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너스레를 떨었다.

“저 사람이 다 사 줄 거야. 알겠지? 나만 믿어.”

다가온 리온이 헛웃음을 지었다.

“사기꾼이잖아.”

“이런 게 사업이래요.”

뻔뻔하게 대답하고 팔을 벌리자 그는 익숙하게 그녀를 말 위에 올려 주었다. 다정하게 그녀를 올려다보던 남자는 이내 뒤에 가뿐히 올라타며 덧붙였다.

“불편해도 조금만 참아. 적어도 사람 사는 데까지는 가야 안장도 구할 수 있어.”

“응, 괜찮아요. 정 안 되면 쉬엄쉬엄 가면 되죠. 어느 바다로 갈 거예요?”

그에게 머리를 기대 젖힌 채 물었다. 리온은 기대로 상기된 볼을 쓸어 주며 대답했다.

“북부로 갈 거야. 가장 피해를 덜 입은 지역이니까.”

“그럼 화이트랜드로?”

“응.”

“한 번도 가 본 적 없어요. 거긴 어린애도 겨울 곰만 하다던데.”

중얼거리던 베로니카는 내려다보는 짓궂은 눈에서 순간 장난기를 읽었다. 그녀가 아, 하면서 벌떡 허리를 세우고 뒤돌아봤다.

“지금 어린애 취급하려고 그랬죠.”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안장 구할 때 검도 사요, 우리.”

“별 얘기 아닌데 이런 흐름에서 들으니까 무섭네.”

“그게 아니라 아직 배우다 말았잖아요. 재건 중인 도시에 가면….”

평화로운 대화 사이로 다그닥다그닥 말발굽 소리가 부서지기 시작했다. 까만 흑마는 도시의 잔해와 정체 모를 물웅덩이를 넘어갔다. 도랑에는 부서진 다리와 종탑, 분수대가 거꾸로 비쳤지만 어딜 봐도 도시를 망가뜨린 괴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인간을 닮은 커다란 갈비뼈 사이로 푸릇한 싹이 피어올랐다.

<본편 완결, 외전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