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119)화 (119/128)

베로니카는 죽음이 무서웠다. 사후에 무엇이 있을지 몰라 무서웠고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또 무서웠다. 핑계를 대자면 그랬다. 그래서 잠들기 직전이 되어서야 묻고 싶었던 거다.

당신은? 내가 죽으면 당신은 혼자 남아서 어떻게 해요?

다시 눈을 떠서 그를 보려고 했지만 신체는 말을 들을 만큼 강하지 못했다. 의식의 끈을 놓치자마자 수마에 떠밀렸다. 검은 늪에 발이 걸린 베로니카는 더 걷지 못하고 그대로 깊이 침잠하고 말았다.

어둠은 끝없이 이어지다가 새파란 하늘이 되었다. 평화로운 베이른, 아직 살아 있는 엄마, 친구들, 다정하게 웃던 아버지, 추억이 서린 조잡한 골목들, 눈부시게 푸른 바다와 처음 본 고래의 등.

길고 긴 꿈을 꿨다. 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꿈이었다. 옆에 앉아 바다를 같이 보는 사람이 다름 아닌 리온이었으니까. 어쩌면 생의 마지막 선물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가장 좋았던 기억을 조합해서 보여 주고 이제 곧 막이 내릴 거라고.

그랬는데.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싸한 아침 공기가 코끝에 스쳤다. 고개를 젖히자 자신을 안고 있는 남자의 뚜렷한 이목구비가 보였다. 이런 수려한 얼굴이 세상에 둘이나 있을 리는 없으니 분명 리온이었다. 그녀를 안고 옆으로 누운 그는 드물게도 곤히 잠들어 있었다. 부스스 일어나는 기척에도 깨지 않을 정도로 깊이. 문득 걱정되어 곧장 들춰 본 몸은 회복되어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아무리 성력이 있다지만 그토록 큰 상처를 입었는데 흉터도 안 남는 게 가능한 일일까? 혹시 사후 세계에 와 있는 건가?

그러고 보니 제 손도 마찬가지였다. 흉터는커녕 자국 하나 보이지 않았다. 마치 괴롭고 긴 악몽을 꾸고 일어난 기분이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잘 자고 난 아침처럼 머리도 맑고 개운했다. 아마 동굴에 널린 인간보다 큰 뼈를 보지 않았더라면 베로니카는 어디서부터 꿈이고 어디서부터 현실인지 혼란스러웠을지도 모른다. 백골화된 바하무트를 보고서야 시일이 꽤 지났음을 짐작했다. 그럼… 정말로.

“…살아 있어.”

베로니카는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살았어.”

한층 커진 목소리가 잠을 깨웠는지 누워 있던 리온이 미간을 찌푸렸다. 흐트러진 머리칼 아래로 길쭉한 눈매가 희미하게 열렸다가 그녀를 담은 채 잠깐 머물렀다. 베로니카는 환하게 웃으며 그를 내려다봤다.

“리온! 일어나 봐요. 아무래도 신의 기적이 임했나 봐요. 우리 상처가 하나도 남김없이….”

나았어요.

말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그가 땅을 짚고 벌떡 일어난 것과 동시에 그녀를 으스러져라 안은 탓이었다. 가슴팍에서 웅얼웅얼 말이 흩어지고 베로니카는 토끼처럼 놀란 채 어리둥절했다. 머리 위로 낮게 잠긴 음성이 떨어졌다.

“아픈 데는?”

“…어어요.”

발음이 뭉개져서 우스웠다. 리온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물었다.

“다쳤던 곳은 확인해 봤어? 손은?”

“괘차아요.”

베로니카는 간신히 고개를 빼꼼 내고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아, 손가락 열 개, 발가락 열 개가 맞는지 확인 안 해서 불안하긴 한데.”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그가 그녀를 안던 팔에 힘을 풀었다. 설마 하며 올려다본 리온이 제 손을 확인하고 있는 걸 보자 어이가 없어졌다. 베로니카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에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군데도 빼놓지 않고 그대론 걸요.”

원하는 답을 들어놓고도 리온은 뭐가 그렇게 불안한지 그녀를 거듭 살폈다. 베로니카는 눈을 얌전히 굴리며 죽었던 사람이 살아 돌아오기라도 한 듯 구는 남자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걱정이 관심에서 비롯된 걸 알아서 그런지 싫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이런 건 처음이었다. 얼굴을 매만질 때는 애틋한 손길에 절로 기분이 묘해졌다. 그는 그녀의 붉은 입술에서 웃음기가 가실 즈음 고개를 숙여 부드럽게 입술을 맞붙였다.

오랜만의 자극인 만큼 집요하고, 깊고, 질척했다. 제 존재를 단단히 낙인찍는 농밀한 접촉은 육체적 욕망보다도 연결을 확인받고 싶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단단한 턱선과 목울대가 따라 일렁였다. 숨 가쁘게 쫓아가던 베로니카는 결국 팔을 들어 목을 감고 무릎에 올라타야 했다. 앉은키가 올라감에 따라 젖혀져 있던 고개는 반대로 기울었다. 숨을 찾아 입술을 떼어냈을 때는 퇴폐적인 인상을 주는 탁한 눈이 아래 내려다보였다. 젖은 입술이 색정적으로 번들거렸다.

“커다란 강아지 같아요.”

곧장 목선을 타고 미끄러지는 입맞춤을 느끼며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슈미즈의 어깨끈 한쪽이 툭 내려갔다. 잔뜩 헝클어진 붉은 머리를 끌어안자 그의 커다란 손은 그녀를 어쩌지 못하는 것처럼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애정을 갈구하는 몸짓이 늑대 같았다.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어.”

아까와 반대로 이번엔 그의 중얼거림이 그녀의 품 안에서 흩어졌다. 베로니카는 키득거렸다.

“응, 나도 그랬어요. 꼼짝없이 죽는 줄 알고… 막 창피하게 울었는데. 그거 꿈이었다고 해 주면 안 돼요?”

이렇게 멀쩡할 건데 살고 싶다고 울어 댄 게 부끄러웠다. 민망함에 일부러 웃는데 같이 웃을 줄 알았던 리온은 기묘한 침묵을 지켰다. 뭔가 이상을 감지한 순간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베로니카의 입가에서 호선이 점점 사라졌다.

잠깐만.

“설마…, 꿈이 아닌 정도가 아니라.”

“…….”

“나 죽었었어요?”

“…….”

“아냐,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데.”

당황한 채 생각나는 대로 중얼거렸다. 부정해 주길 바랐는데 리온은 뭐라고 말할 듯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굳은 얼굴이 사람을 혼란스럽게 했다.

“다 끝난 일이야. 더는 무서워할 필요 없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럼 어떻게…? 난….”

“네가 죽은 후에 검을 부쉈어.”

리온은 짧게 설명했다. 베로니카는 무슨 뜻인지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가 한 번 더 말했다.

“천년을 쌓인 생명력이라면 죽은 사람을 살리고도 남았겠지.”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산산이 부서진 황금 조각들이 눈에 들어왔다. 검 손잡이만 있을 뿐 검날은 보이지 않았지만 헤네시스와 아포칼립시스임은 알아보고도 남았다. 천년을 쌓인 생명력, 죽은 사람을 살리고도 남을… 베로니카의 눈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그런 게 가능해요? 아니, 이런 짓을 해도 괜찮은 거예요?”

“동굴에는 우리 외에도 시체가 널려 있었어. 그런데도 살아난 건 우리뿐이야. 난 그게 신의 응답이라고 믿어.”

“하지만 이건 신의 뜻이라고 말하고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잖아요. 나는 결코 신실하다고는 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신검이 교회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알고 있어요.”

헤네시스와 아포칼립시스, 신의 두 검은 말하자면 성스러운 증거다. 신이 실존했다는 증거. 성전에서 말하는 이야기가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라는 증거.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건 믿지 않아요.”

“알고 있어. 다 알고도 네 의미가 더 컸을 뿐이야.”

심상하고도 묵직한 대답에 말문이 턱 막혔다. 그는 신검을 가볍게 여긴 게 아니다. 더 무거운 가치가 있었을 따름이다. 베로니카는 잡고 있던 옷자락을 세게 말아 쥐었다.

“검을 부쉈을 때 제정신이었다고 말할 순 없지만, 멀쩡해진 지금도 판단은 같아. 죽어 있는 검보다는 살아 있는 사람 하나가 더 귀중해.”

그는 진심이었다. 베로니카는 리온이 무엇을 버리고 각오했는지 깨달았다. 그가 오래도록 지고 온 십자가를 이곳에 내려놨다는 것도.

“그리고 믿음에 관해서는, 글쎄. 눈으로 봐야만 믿는 게 진정한 믿음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신의 지팡이에 의지하느라 똑바로 걷지 못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

물끄러미 검의 잔해를 돌아보는 리온의 얼굴은 묘하게 씁쓸했다. 티란을 떠난 이후 그와 함께한 유일한 동료는 검이었을 것이다.

결정을 내렸다면 그 길에 후회가 없기를 바랐다. 베로니카는 저도 모르게 팔을 벌려 그의 얼굴을 가슴 가득 끌어안았다.

“우는 것처럼 보여서요.”

두 사람은 오래도록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이름 없는 친구를 애도하듯이 그렇게.

***

그들은 각각 부서진 검 조각과 십자가 목걸이를 챙겼다. 이제 호수에서 몸을 씻고 카르트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사실 씻을 필요 없이 이미 깨끗하긴 했지만 기분이 좀 그랬다. 아무래도 시신들 한복판에 누워 있던 셈이니까.

“변태.”

옷을 벗은 베로니카는 호수로 첨벙첨벙 들어가며 얼굴을 붉혔다. 그때까지 물속에서 빤한 시선을 보내던 리온은 태연히 입가를 휘었다.

“팔로 가리고 있어서 하나도 못 봤는데.”

“거짓말. 아까부터 보고 있었으면서.”

장난기 가득한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베로니카는 빠르게 상황 판단을 하고 경로를 살짝 틀어 리온과 다른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신기하게도 바하무트가 끌어들였을 때는 아주 깊고 무서운 호수 같았는데 그와 같이 있으니까 작고 별거 아닌 물로 느껴졌다. 중앙으로만 안 들어가면….

“꺅!”

짙푸른 수면을 집중해서 보다가 뒤에서 안는 손길에 지나치게 놀랐다. 짧은 비명이 동굴 구석구석으로 메아리치자 리온이 눈썹을 가볍게 찌푸렸다.

“그쪽으로 가면 깊어져.”

“아.”

“대체 새삼스럽게 왜 부끄러워하는 거야? 원래 옷도 다 비쳤는데.”

“거리를 두고 그렇게 빤히 보는 거랑은 다르다고요.”

“그럼 지금은 괜찮아?”

고개를 끄덕거리자 그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웃었다. 젖은 머리를 이마가 다 드러나도록 넘긴 리온의 미소는 보는 사람마저 시원해질 정도로 청량했다. 홀린 듯 올려다보고 있는데 문득 그의 눈에서 싸한 기운을 감지했다. 첨벙, 그 순간 도망가기엔 늦었다는 듯 얼굴 가득 물이 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