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118)화 (118/128)

“예서 뭘 하는 게냐?”

호통에 가까운 질문에 책이 우수수 떨어졌다. 열네 살 리온은 딱딱히 굳은 채 수도사의 얼굴을 한번 봤다가 바닥에 엉망으로 떨어진 책들로 시선을 옮겼다. 어느 것을 우선시해야 할지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다 수도사가 휘적휘적 서재로 들어오자 허리를 굽혀 <죽은 자의 부활>, <기적>, <제202대 교황 일리아스> 따위의 책들을 줍기 시작했다.

일리아스는 선대 교황 중에서도 죽은 자를 살린 이적으로 이름이 높다. 책 이름만 죽 훑어도 알만한 흥밋거리에 수도사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기적은 믿는 자에게 찾아오는 것이지 책에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거늘. 기도회에 빠지면서까지 찾아볼 책은 아니라고 생각되는구나.”

“죄송합니다.”

리온은 짤막하게 사죄한 뒤 책을 꽂아 넣기 시작했다. 변명 하나 없는 태도에 수도사는 눈썹을 치켜세우고 껑충한 키를 가진 소년을 다시 한번 훑어 내렸다.

붉은 머리에 눈가에 난 기다란 흉터, 기사단장의 아들이다.

“얼마 전에 수도원을 몰래 빠져나갔던 일과 관련이 있는 게냐?”

수도사의 목소리는 잘 간 쇠붙이처럼 예리했다. 마지막으로 <기적>의 책등을 밀어 넣던 리온은 그대로 멈춰서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날 자살한 생모와 관련이 있다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그따위 말을 뱉었다간 단순히 늙은 수도사를 놀래는 데서 끝나지는 않을 터였다.

“죽음은 신의 섭리다. 세상에 단 한 가지 진리가 있다면, 그건 한낱 인간의 힘으로는 생과 사를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사실일 게다.”

“하지만 선대 교황 성하께서는….”

“일리아스 교황 성하께서는.”

단호하게 말을 끊어 낸 수도사는 덧붙였다.

“교회의 성물을 수십이나 파괴하여 그 안에 담긴 신의 힘을 사용하셨다. 그런 걸 기적이라 부를 수는 없을 테지. 옳고 그르고를 평가할 시간은 아니니 이 자리에서는 말을 아끼겠다만, 허튼짓은 아예 할 생각조차 하지 마라. 마음이 죄를 지으면 차라리 마음을 뜯어내거라.”

***

서걱서걱, 신경을 긁는 소리에 눈을 떴다. 오래된 기억이 삽시간에 연기처럼 사라졌다.

흐릿한 시야에는 이제 늙은 수도사의 얼굴 대신 익숙한 망토가 들어차 있을 뿐이었다. 검은 벌레가 같은 색의 천에 몸을 숨긴 채 베로니카를 향해 기어오르는 게 보였다.

리온은 별 놀람도 없이 그것을 털어낸 뒤 망토에 감싸인 여자를 더 깊이 당겨 안았다. 이불 속 연인이라도 대하듯 다정한 몸짓이었다.

그는 그 자신이 죽기 전까지는 그 무엇도 그녀를 건드려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닥쳐오는 손길이 설령 신의 섭리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제가 독점한 죽음이다. 온전히 제게 책임이 있는 죽음이었다. 아무도 끼어들 수 없고 간섭할 수도 없었다.

잡은 건 안 놔. 네가 직접 일어나 따지지 않는 이상.

리온은 제가 완전히 돌아 버린 걸 깨닫고 입가를 깊게 휘었다. 목을 젖히자 희붐한 달빛이 부시게 떨어졌다.

며칠이나 되었는지도 가늠이 잘 가지 않았다. 3주가 다 차려면 아직 멀었던가 아니면 거의 다 왔던가.

뒤틀리는 내장에 의식이 흐려졌다 깨어나면 가끔은 아침이었고 가끔은 밤이었다. 가끔은 꿈속 같기도 했다. 어디든 잔인한 고통에 익숙해지지 않는 건 똑같았다. 피부를 모두 벗겨 낸 것처럼 닿는 곳마다 피가 흘렀고 가장 섬세한 뼈까지 산산조각을 낸 듯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내장이 쥐어짜이는 감각에 사지를 뒤틀고 꺾고 몸부림친 끝은 언제나 진득하고 질척한 암흑이었다. 죽여, 차라리 죽여버려. 몇 번이나 그렇게 짓씹었으나 운명은 그가 원하는 것을 그리 쉽게 내주지 않았다.

3주간 기적 같은 생을 누린 대가였다. 형벌은 예상보다 더 참혹했다.

이대로 죽을 것 같다고 느끼는데도 끝나지 않았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라는 말은 누가 만들어 냈는지는 몰라도 문자 그대로 진실이었다. 그간 행해진 여러 번의 자진 시도는 죽음은커녕 그에게 더한 상처만을 부과했다. 낫처럼 깊이 파고드는 아찔한 열감은 육체가 겪을 수 있는 모든 고통을 체감시켰다. 그는 피를 토하고 살가죽이 말라붙고 뼈가 녹으면서도 살아 있었다. ‘살아 있었다.’

생명이 붙어 있느냐만 놓고 따지면 그렇겠지만.

리온은 다시금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고개를 비튼 바하무트 한 마리가 벌레에 차근차근 갉아 먹히고 있었다. 이쪽으로 슬픈 시선을 보내는 텅 빈 붉은 눈이 실은 너는 진즉 심연의 지옥에 떨어졌다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수천수만 구의 시신과 피 구덩이에 갇힌 채. 영원히 수면 위로 올라갈 수 없도록 족쇄를 찼다고.

그럼 베로니카는?

그녀는 아직도 혼자서 눈밭에 앉아 있는 건가?

찰나 바람 부는 설원과 함께 가냘픈 뒷모습이 눈앞을 스쳤다. 불타 버린 도시. 외롭게 앉아 자기 자신을 껴안는 여자. 한참을 울던 그녀가 고개를 든다. 마침내 다가선 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려고 한다. 그러나 눈이 마주치기 직전, 잠시 멎었던 격통이 엄습하며 환상을 갈가리 찢어 놓는다.

“큭….”

리온은 이를 사리물며 커다란 등을 웅크렸다. 베로니카를 안은 팔이 벌벌 떨렸다.

죽어 가는 뇌가 어떻게 망가진 건지 전투에 나가기 전마다 눈에 담아 두던 표정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거짓말, 하고 중얼거릴 때는 어떻게 눈을 치켜떴는지. 마음먹고 웃어 줄 때 눈을 휘며 웃었는지 아니면 입꼬리만 빙긋 올라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초조했다. 보고 싶었다. 한 번만 다시 보고 싶었다.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그녀를 다시 볼 수 있다면 이 생지옥이 무한히 반복돼도 좋다고 생각했다. 죽을 때마다 빌었던 원을 미련하게 되풀이했다.

물론 지금도 그녀의 몸을 안고 있었지만 그가 보고 싶은 건 그녀의 생김새가 아니라 웃음소리였고, 투정이었고, 속삭임이었다. 살아 있는 사랑이었다.

비틀리던 손이 바닥을 긁으며 힘줄이 불거졌다. 리온은 다리에 힘을 주어 천천히 일어섰다. 한 손에는 망토에 싸인 여자를 안고 다른 손으론 검을 짚은 채 한 발자국 떼어 내자 고인 피가 후드득 쏟아지며 환부가 비명을 질렀다. 그는 반응하지도 신경 쓰지도 않았다. 꿋꿋이 베로니카를 안아 든 채 걸었다. 흰 검광이 솟구치는 곳까지. 헤네시스가 놓인 장소로.

번득이는 검 앞에 도달해서야 리온은 베로니카를 옆에 내려 주었다. 그녀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모른 채 무릎 꿇은 기사 앞에 놓였다.

그도 지금 제가 하려는 짓이 미친 짓이라는 것 정도는 잘 알았다. 판단을 내리는 뇌의 한 부분이 부서졌다고 해도 인지 기능은 살아남아 숨 쉬었다. 신을 배반하여 밑바닥에 도달한 인간들이나 할 법한 글러 먹은 발상이다. 가능 여부도 장담할 수 없다. 기사로서의 자아와 일말의 배덕감이 그렇게 설득했음에도 리온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인 신검을 본 순간 생각했다.

왜 진작에 이 생각을 하지 못한 거지.

천년이 넘게 주인을 삼킨 검만큼 생명력으로 가득 찬 물건도 없을진대.

“교회의 성물을 수십이나 파괴하여 그 안에 담긴 신의 힘을 사용하셨다. 그런 걸 기적이라 부를 수는 없을 테지.”

“…상관없어.”

카강!

높이 솟았던 아포칼립시스가 그대로 일직선으로 내리꽂혔다. 검이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동굴에 듣기 싫은 쇳소리가 메아리쳤다. 리온은 무표정하게 검을 들어 다시금 헤네시스를 세차게 내리찍었다. 무자비한 검의 처형이 지속되는 동안 시체들은 침묵하는 군중이 되어 눈을 부릅뜬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두 신검의 격돌은 벌써 여러 차례 있었으나 그간의 경우와는 전혀 달랐다. 이것은 일방적인 칼질이었다. 우선 현재의 헤네시스는 주인이 없는 쇠붙이였고, 두 번째로 아포칼립시스는 주인이 잡은 걸로도 모자라 검 밑에 크로이츠까지 휘감고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리온이 지금 겨냥한 곳은, 흰 날이 아닌 사자가 새겨진 손잡이였다.

카강!

신의 검을 부순다. 신의 검을 파괴한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그가 가장 잘 알았다. 교회에 남은 유일한 성물이자 인간의 손에 쥐어진 신의 축복을 팔라딘인 그가 제 손으로 망가뜨리고 있었다. 불신자도 뒤가 찝찝해 감히 하지 못할 행동이다. 불꽃이 이는 금속 너머로 서임식에서 했던 맹세가 영혼을 울렸다.

“나, 리온 베르크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의 성소에 대고 맹세하나니.”

카강!

“평생 신의 계명을 지키며 제사장께 충성을 바치려니와.”

캉!

“약자를 보호하고 다른 신을 섬기지 않으며 남은 생은 그분을 위해서만 살리라.”

쩌저적.

“영원히 그분께 내 눈을 두리라.”

부서지는 것은 과거의 가치였다. 리온은 그녀를 위해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겼던 것을 저버렸다. 새로운 신에게 기사의 맹세를 바쳤다.

돌이켜 보건대 베로니카는 가장 추운 날 떨어진 햇살과도 같았다.

살이 아려서 웅크리고 있을 때, 구덩이에 누워서 죽는 줄도 모르고 죽어갈 때 다가온 한 줌의 온기.

갑자기 찾아온 따뜻함이 어색해 몇 번이고 그늘로 물러섰으나 그녀가 없었다면 그 겨울을 나지 못했을 것은 자명하다. 그날 구원받은 건 그녀가 아니라 그였다. 그는 한 번도 그녀를 구원한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는, 단 한 번도.

쩌적, 마침내 단단해 보이기만 하던 사자의 머리에 본격적인 금이 가기 시작했다. 리온은 기다리는 대신 검을 한 번 더 내리쳤다. 커다란 금이 갈기를 넘어 거미줄처럼 자루 전체를 잠식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리온이 잡고 있던 검 자루 역시 연결된 것처럼 잇따라 금이 갔다. 버석, 사자 장식이 완전히 가루가 되어 부서지며 얼음처럼 새하얀 칼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해방된 두 개의 검에서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거대한 생명력이 두 사람을 휘감았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마지막 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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