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로니카는 팔을 부들부들 떨었다.
“왜….”
마찰하는 부분이 끼긱대며 검 밑까지 미끄러졌다. 검을 사이에 두고 가까워진 바하무트의 동공이 울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선명히 비췄다.
“왜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굴어야 하는 거야?”
두 개의 신검이 듣기 싫은 마찰음을 내다가 끝끝내 상대를 떨쳐 냈다. 잠깐의 틈도 잠시, ‘그것’은 이내 무서운 속도로 검을 내리쳤다. 쩡, 쩡 하며 작은 불꽃이 튀고 위로 들어 머리를 막은 검이 팔까지 강력한 진동을 전달했다. 베로니카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튕겨 낼 때마다 압박감에 온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그나마 부상을 입고도 밀리지 않는 건 헤네시스 덕분이었다. 신검은 주인이 아닌 자의 손에서는 평범한 쇠붙이에 불과한 것. 베로니카가 검과 함께 싸우는 데 반해 바하무트는 홀로 덤비고 있었다.
“그만해, 충성스러운 가족이든 뭐든 상관없어. 내가 다 해 줄 테니까 그는 내버려 둬!”
슬픔이 가득 고인 목소리는 호수에 떨어진 돌멩이처럼 거대한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둥글게 뻗어 나간 대기가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바하무트들의 머리를 터뜨리자 ‘그것’이 괴기하게 고개를 비틀더니 휙 뛰어 물러났다. 베로니카는 그 틈에 검을 고쳐 잡으며 어깻숨을 몰아쉬었다.
“처음부터 너와 나 사이의 문제였잖아. 리온을 다치게 할 필요는 없었어.”
그가 최초를 죽일 수 없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손에 피를 묻히도록 정해진 인간은 베로니카였다. 언질을 주거나 최소한 그를 말렸어야 했는데.
알면서도 말하지 못했다. 모든 게 생각보다 늦었다. 정신을 차리는 게 늦었고 바하무트 군단을 헤치고 지나는 게 늦었다. 갑자기 꽂힌 다리의 격통에 다시 일어서는 데 시간이 걸렸다. 뒤늦게 도착했을 때는 시체처럼 매달린 남자가 눈앞에 있었다.
두근.
동굴 기둥에 박힌 남자에게서 투드득 피가 뭉텅이로 쏟아져 내렸다. 베로니카는 얼어붙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겨울 호수 같은 마음이 손쓸 새도 없이 갈라지고 무너졌다. 깊고 차가운 물 속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안 돼, 안 돼. 절대로 리온만은.
이성이 날아간 채 무턱대고 뛰어들었다. 세차게 부딪힌 검이 아포칼립시스라는 사실을 눈치챘을 때는 막을 새도 없이 뜨거운 눈물이 왈칵 터졌다. 기사인 리온이 검을 놓쳤을 리 없기 때문이다. 아마 스스로 넘겨준 것이리라. 베로니카를 지키기 위해서, 그녀 ‘때문에.’
손등에 매인 검은 천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리온을 구해야 한다. 과거와는 다르다. 숨지 않기 위해 검을 배웠다. 더는 그의 뒤에서 어린애처럼 울고 있지만은 않을 거다.
“그럼 말해.”
“…말하라니? 뭘?”
“우리는 너희처럼 될 수 없어?”
잠시간 베로니카는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채 호흡만 가다듬었다. 왜 갑자기 그런 걸 묻는 건가 싶어 눈살을 찌푸리자 ‘그것’이 말을 이었다.
“붉은 기사가 말했어. ‘신을 훔쳐도, 자아를 가져도, 모습을 흉내 내도 너희는 우리처럼 될 수 없다.’”
“…….”
“우리는 너희처럼 될 수 없어?”
같은 질문이 섬찟하게 반복되었다. 베로니카는 대답을 망설였다. 본 적 없는 분노가 어디서 기원했는지 알아서가 아니다. ‘그것’의 낯에 서린 갈망과 질투가 뚜렷했던 탓이다.
알고는 있었지만… 너희는 정말로.
“…그 말에 그렇게나 화가 난 거야? 리온을 저 꼴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릴 만큼?”
바하무트는 대답 대신 섬뜩한 눈동자만 기묘하게 부풀렸다 가라앉혔다. 베로니카는 자신과 같은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하지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야. 나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고 인간은 미래를 볼 수 없어. 하지만….”
말을 잇는 사이로 어느새 다시 들어찬 군단이 눈에 들어왔다. 어딜 봐도 같은 풍경뿐이다. 바하무트, 바하무트, 그리고 바하무트. 바로 옆에 서 있는데도 서로를 안아 줄 수 없는 존재들.
“너희가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우리와 완벽히 같아질 수 없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거야. 네 입으로 하늘 너머에서 왔다고 했잖아.”
그들이 유독 번식에 집착한 건 그만큼 외로웠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빈 마음을 채우려 노력한 흔적인 것이다. 달을 좇아 물 빠진 바다는 시리도록 추우니까.
“그러니까….”
베로니카는 포기하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어지던 말은 다소 부자연스럽게 끊겼다. 문득 위화감을 느낀 베로니카는 휙 고개를 내려 검을 내려다보았다. 손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무슨.”
열 손가락이 꿈틀거리다가 검을 떨어뜨렸다. 챙그렁 소리가 나고서야 최초가 제 몸을 통제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예전에 신을 가진 베로니카가 그랬듯이, 그것은 그녀의 다리를 멋대로 움직여 비척비척 걷게 했다.
“우리는 너희처럼 될 수 없어?”
또다시 같은 질문이 날아왔다. 베로니카는 파리해진 얼굴을 들었다. 절뚝대며 걸어간 발은 ‘그것’의 앞에 다다라서 멈추었다. 마치 꿈을 꿀 때처럼 정신만 몸에서 분리된 기분이 들었다. 뻣뻣하게 팔을 벌린 베로니카는 아포칼립시스를 바닥에 박은 ‘그것’을 안아 주었다.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 치명상을 입힐 줄 알았는데. 고작 시킨다는 게….
“우리는 너희처럼 될 수 없어?”
“…….”
귓가에 와닿는 목소리가 슬펐다. 분명히 같은 문장이 반복되고 있는데도 어딘가 달랐다. 베로니카는 멍하니 ‘그것’을 호수에서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바하무트는 지금과 흡사한 인상을 줬었다.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 같기도 하고 발치에 붙어사는 그림자 같기도 했다. 소름 끼치는 동시에 불쌍했다. 존재조차 몰랐던 가엾은 쌍둥이 동생을 만난 기분이었다.
두근, 두근, 두근. 동화된 날 봤던 붉은 환상이 떠오른다. 그때 인간인 베로니카는 바하무트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죽었다 다시 태어났다.
죽는다. 죽는다. 다시 태어난다….
그 순간 깜깜한 정신 속에서 빛줄기 같은 진리가 번득였다. 베로니카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광원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잠깐만, 설마.
신이시여, 당신은.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며 시야가 또렷해졌다. 뒤편에 늘어선 군단이 새삼스레 눈에 박혔다.
세상 모든 일은 인과의 수레바퀴 아래 있다고들 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바하무트의 증식을 운명의 작용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인간을 벌하기 위한 것치곤 지나치게 많은데도.
“혹시 <빗방울 세상> 이야기 알아요?”
“체사니아의 동화를 말하는 겁니까?”
“네. 하나의 빗방울은 안에 그만한 크기의 세계를 품고 있다는 얘기요.”
베로니카는 어렸을 적 들었던 침대맡 이야기 중 체사니아의 동화를 제일로 사랑했다. 순환 구조 때문이었다. 빗방울 속에서 어떤 삶을 살든 결국 바다에서 하나가 되어 하늘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발상이 마음에 들었다.
순환. 그래, 신의 진리는 순환에 있다.
베로니카는 불쑥 떨리는 음성을 내뱉었다.
“아냐, 어쩌면… 우리는 같아질 수 있을지도 몰라.”
의외의 말이었는지 바하무트가 멈칫 반응했다. 베로니카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난 말야. 실은 계속 너희가 신의 실수라고 생각했어. 설령 인간을 벌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들 지나치게 늘어나고 말았다고. 그 증식 속도만큼은 신의 의도가 아니었다고.”
“…….”
“그런데 이제야 알 것 같아. 신께서는 단 한 번도, 실수하신 적이 없어. 그분께서 너희가 온 땅을 덮도록 기다리신 건….”
베로니카는 시선을 내려 옆에 꽂힌 아포칼립시스를 내려다보았다. 햇빛을 덧입힌 듯 영롱한 검 자루가 유혹하듯 금빛으로 번득였다.
“최대한 많은 생명이 이 땅에서 죽어야만 했기 때문이야.”
바하무트는 이방의 존재다. 그러나 이 땅에서 죽는다면, 그것은 벌레에 의해 분해된 뒤 흙의 양분이 될 것이다. 양분은 씨앗에게 먹히고 열매를 맺은 후에는 동물의 일부로 변하게 된다. 이 세계의 순환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빗방울이 바다로 흘러가 하늘에서 다시 떨어지듯이. 죽고, 죽고, 다시 태어나 이 땅의 생물이 되는 것이다.
“너는 신에게 사랑받으려고 애썼지만, 그분은 이미 너희까지 사랑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사랑이라는 말에 바하무트는 놀라서 조이고 있던 팔을 풀어 냈다. 한계껏 벌어진 눈동자가 정면에 들어찼다. 베로니카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팔을 뻗었고, 아포칼립시스를 뽑았다.
“죽고 다시 태어나. 그리고 그때는, 꼭 네가 원하는 것으로 태어나서 외롭지 않게 살아가.”
눈 깜짝할 새 올라간 검날이 바람을 가르며 쇄도했다. 바하무트는 반사적으로 팔을 들었지만 가녀린 살과 뼈는 내리치는 힘을 견디지 못하고 분쇄되었다. 잘린 팔이 바닥에 질퍽하게 떨어지고 피가 울컥울컥 터졌다. 강렬한 통증에도 베로니카는 멈추지 않았다. 한순간도 쉬어선 안 된다. 지금이 아니면 이길 수 없다. 자해처럼 베고 내리쳤고 쇠붙이는 예리하게 번득였다. 등 뒤에서 리온의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 들렸다. 베로니카는 돌아보지 않았다. 지금 당신의 눈을 봤다간, 나는….
뎅, 뎅, 뎅. 교회의 종탑이 환청처럼 들리며 검술을 배우던 카르트의 여관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베기의 기본기를 마치고 막 찌르기로 넘어갔을 때였는데, 리온은 힘을 싣는 것보다도 검 끝에 집중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때 등 뒤의 온기에 집중하느라 몇 번이나 헛손질했던 것, 당신은 알고 있는지.
베로니카는 검을 뒤로 당겼다. 검 끝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고통과 슬픔을 잊었다. 오직 아포칼립스만을. 신의 덮개가 걷히며 보인 계시만을.
푹, 검이 하얀 이마를 정확히 관통하며 뒤통수로 빠져나갔다.
눈을 커다랗게 뜬 ‘그것’이 호흡을 멈췄다.
두근. 두근… 두근… 온 세상이 멈춘 듯 소리가 사라진다. 맥박이 느려진다. 어느 순간 세상에는 붉은 눈과 그녀의 심장 단둘만이 남았다. 심장이 고막에 달린 것처럼 커다란 진동 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붉다. 빨갛다. 세상은 온통 피범벅이다. 처음부터 망해 가는 세상에 태어났으니 갓 태어난 아이들은 아픈 울음을 터뜨린다. 생명이 태어나면서 맡는 짙은 피의 잔향과 시야를 메운 벌건 세상.
그럼에도 아이는 살아간다. 세상이 망한다 해도 아이는 말하고 걷고 달려 나가 어른이 된다.
새빨간 세상은 아주 천천히, 차츰 고유의 색을 찾기 시작했다. 검으로 연결된 채 굳어 있던 두 그림자는 머리 뒤로 삐져나온 검이 솨아아, 하고 검고 작은 점을 흩뿌리자 서서히 기울었다. 그들을 중심으로 강력한 파동이 인다. 마치 땅에서 파도가 치는 것 같다. 끈 떨어진 인형처럼 군단이 무너져 내린다. 그 형국이 마치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의 일렁임과도 같아, 베로니카는 제가 죽어 가고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바다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모든 생(生)의 기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