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115)화 (115/128)

심박수가 미친 듯이 올라간다. 충격으로 목이 강하게 졸리는 가운데 리온은 아포칼립시스를 들어 자신을 붙든 팔을 통째로 베어 냈다. 털썩 두꺼운 팔과 함께 바닥에 떨어진 그가 피 섞인 기침을 토해 내곤 곧장 다가오는 바하무트의 다리를 잘라 냈다.

울컥 차오른 피가 잠깐 사이를 두고 다시 후드득 쏟아졌다. 그가 기침하며 낮은 실소를 터뜨렸다.

“빌어먹을….”

차라리 같이 죽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녀의 의지가 제 목에 칼을 겨눌 정도라면, 차라리 최초를 죽여 버리고 그녀의 품에서 같이 죽겠다고. 적어도 그녀가 ‘그것’을 처리할 일만큼은 없게 만들겠다고. 그런데….

“하하.”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감히 그녀를 죽이겠다 생각했다니.

리온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베로니카의 얼굴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천진할 정도로 잔혹한 아름다움이다. 감히 그처럼 더러운 인간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만큼, 출신과 무관하게 그녀는 그에게 있어 언제나 가장 고귀하고 찬란한 존재였다.

‘여기서 살아남으면,’ 그 후에 그는 뭐라고 말하려고 했던가?

스스로도 잘 알지 못했다. 리온의 입매가 깊게 휘어졌다.

“왜 웃지?”

그것이 버석한 뼈를 밟고 다가와 말문을 열었다. 베로니카와 똑같은 목소리에도 리온은 놀라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겁에 질렸던 이유만큼은 어렴풋이 이해했다. 같은 얼굴에 표정이 다르고 같은 목소리에 어조가 다르다. 흉내를 내고 있기에 더욱 괴기한 몰골이다. 리온은 검을 땅에 짚고 일어나며 대답했다.

“나보다 더 활짝 웃고 있는 인간에게 받기엔 우스운 질문이군.”

“인간?”

“싫으면 괴물이라고 불러 줘?”

그것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번득이는 안광에는 가히 희열이 넘쳤다. 기분이 좋아졌는지 그것은 선선히 대답을 내주었다.

“나는 기뻐서 웃어. 마침내 널 죽이게 되었으니까. 네가 죽으면 그녀는 온전한 가족이 돼.”

완전히 몸을 일으켜 세우자 ‘그것’은 내려 봐야 할 크기가 되었다. 리온은 물끄러미 시선을 내리깐 채 중얼거렸다.

“가족이라.”

상대의 눈에는 지금 리온이 혼자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죽, 전투 내내 형제들과 함께였다. 리온은 고개를 들어 티란에서 죽어 버린 가족들을 가만히 둘러보았다.

다리가 뜯겨 나가고도 질질 끌며 검을 휘둘렀던 발터가 보였다. 그는 마지막까지 성가를 부르다가 유사에 휩쓸려 죽었다.

옆에 있는 멜루지네는 또 어떠한가. 그는 매일 밤 고향에 있는 아내에게 편지를 끄적이는 애처가였으나, 남부에서 보내진 마지막 서신에는 그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가 적혀 있었다. 전서조만 손꼽아 기다리던 여자는 그의 소식을 듣고 오래도록 괴로워했으리라.

아, 후작가의 명예를 위해 보내진 뚱뚱한 사내 구스타프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전투 전날 침대에 소변을 보는 겁쟁이였는데, 마지막엔 친구 막시밀리안을 위해 가장 용맹하게 싸우다 전사했다. 그들 모두가 그의 동료이자 소중한 가족이었다.

친지 없이 자란 리온은 어른이 되어 세상을 줘도 바꿀 수 없는 형제들을 얻었다. 피가 통해야만, 같은 종족이어야만 가족이 되는 게 아니다. 인간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할 때, 그들은 피보다 진한 인연으로 얽힌다. 그것이야말로 신이 이 땅의 생물에게 내린 절대적인 축복이었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기에, 베로니카의 고통도 이해하지 못하는 바하무트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뭐가 그렇게 우습지?”

불쑥 ‘그것’이 의아하게 질문해 왔다. 의식하지 못한 새 소리 내어 웃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리온은 마지막까지 동료들의 얼굴을 살피다가 느리게 시선을 돌렸다.

“남의 가족을 망쳐 놓고 한다는 말이 생각보다 부실해서.”

비웃는 게 여실한 투에 그것의 입꼬리가 차차 내려갔다. 반면에 리온은 입매를 깊게 휘며 서늘한 눈을 똑바로 맞췄다.

“그렇게 외로워?”

“…….”

“베로니카한테 사랑받고 싶어? 잠깐이나마 엿본 내가 부러워 미칠 것 같아?”

리온은 승리자의 얼굴을 한 채 속삭였다.

“안타깝지만 날 죽여도 베로니카는 널 사랑하지 않아. 영원히.”

턱을 잡아 올리자 바하무트의 붉은 눈이 도륵 위로 움직였다. 감히 베로니카와 같은 색을 가진 그 눈동자를 도려내고 싶다고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예언하나 할까. 너희가 아무리 신을 훔치고 인간을 흉내 낸다 해도 우리처럼은 될 수 없어. 설령 개개의 자아를 가진다 해도 마찬가지겠지. 서로를 죽이다가 비참하게 자멸할 거야. 너희에겐 함께 살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게 없거든.”

인간은 오래전에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것은 리온과 베로니카가 최초를 죽일 수 있느냐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문제였다. 자기만 가득한 세계는 외로워진다. 타인의 고통을 공감도 이해도 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겠는가.

바하무트는 한 세대 이상 살아남지 못한다.

말을 끝마친 리온이 턱을 붙들고 있던 손을 내리자 그들을 휘감은 대기는 아래서부터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바닥부터 끓어오르는 공기에 리온은 자신이 최초의 분노를 샀음을 인지했다.

상관없었다. 그는 여기서 죽는다. 부디 형제들이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 죽음이기만을 바랐다. 그들보다 1년 더 산 대가를 치를 만큼 아주 고통스러운 죽음이기를. 베로니카가 오래 슬퍼하지 않을 만큼 깔끔한 죽음이기를.

리온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검을 똑바로 세우기도 전에 바하무트 한 마리가 이빨을 앞세우고 기습적으로 육박해 왔다.

챙, 지지직, 단단한 상어 이빨을 검으로 막아 내며 발이 한참 간 뒤로 밀려났다. 버티기를 잠시 검을 갉아 내려는 듯 딱딱대던 수십 개의 이빨은 그가 자루를 고쳐 쥐기 무섭게 금이 가 유리처럼 와장창 부서져 내렸다. 리온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목구멍에 검을 깊이 쑤셔 박은 뒤 위로 당겨 머리를 두 동강 냈다.

목동맥을 찔렀을 때처럼 핏줄기가 공중으로 솟구쳤다. 어디서든 피는 붉은 신호탄과도 같다. 기다렸다는 듯 사방에서 바하무트가 쇄도했다.

유감이지만 리온은 이렇게 대량으로 몰려드는 적을 사랑했다. 거침없는 칼날이 반원을 그리며 살점을 갈랐다. 기사 작위는 살인자에게 내려지는 가장 명예로운 훈장이다. 그는 손꼽히는 살인자답게 검을 휘둘렀다. 이대로 생명이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날뛸 심산이었다.

갑자기 칼날의 궤도 한복판에 ‘그것’이 뛰어들지만 않았더라도.

제길!

아슬아슬하게 정지한 아포칼립시스에 검은 머리칼 몇 가닥이 잘려 허공으로 흩날렸다. 리온은 얼굴을 일그러뜨리곤 몸을 확 뒤로 물렸다.

최초를 죽일 빈틈이라면 지금까지 몇 번이나 발견했다. 그저 흘려보냈을 뿐이다. 베로니카에겐 상처 하나 내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다칠까 두려워 움직임마저 제어했다. 그런데.

“뭐 하는 짓이지?”

멈춰 선 리온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뇌까렸다.

날카로운 팔뼈를 주워 든 최초가 보란 듯이 손을 높이 들어 올리고 있었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든 다음 순간 말릴 새도 없이 조각난 팔뼈가 하얀 허벅지에 내리꽂혔다.

소리가 전해질 거리도 아닌데 어디선가 베로니카의 비명이 들린 것 같았다.

리온은 얼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피가 차게 식었다.

“검을 버려.”

‘그것’이 빙그레 웃더니 뼈를 뽑았다. 허벅지에서 피가 줄줄 새어 나왔다. 리온이 잠시 얼어붙은 사이 가냘픈 팔은 한 번 더 높이 치솟았다. 이번 목표는 납작한 배였다.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리온은 욕설을 짓씹으며 검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바람을 가르며 세차게 내려온 흉기는 살갗에 닿기 직전 위태위태하게 정지했다. 우뚝 멈춘 손 너머로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그것’은 새빨간 눈만 굴려 바닥에 박힌 검을 응시했다. 그러다 저벅저벅 걸어가 뽑아 들더니 검끝부터 폼멜까지 검신을 감상하듯이 눈으로 죽 훑어 내렸다.

리온은 돌아선 그것의 다음 행동을 예상하면서도 미동하지 않았다. 눈으로 똑똑히 보면서도 피하기를 거부했다. 그가 피하면 베로니카가 당할 테니까. 그리고 신검은 무력하게 주인의 옆구리에 박혔다.

“큭.”

숨을 거칠게 들이킨 순간 검이 뽑혀 나가며 커다란 상체가 굽어졌다. 불덩이를 쑤셔 박은 듯 홧홧한 작열감과 함께 핏물이 배어나는 게 느껴졌다. 그에겐 상처를 추스를 겨를도 없었다. 고작 시작이었다는 듯 검은 쉴 틈 없이 내리꽂혔다. 무릎 뒤에, 어깨에, 우뚝 섰던 리온이 더 버티지 못하고 휘청거리자 바하무트 한 마리가 다가와 아까처럼 그의 목을 잡아 기둥에 붙들어 올렸다.

아까 자해에 쓰였던 뼛조각이 강하게 복부에 처박혔다. 그는 허공에 꿰인 채 매달린 모습이 되었다. 입으로는 왈칵왈칵 피를 토해 내고 전신은 비틀리며 난폭하게 경련했다. 산소가 부족한 폐부는 쥐어짜듯 몸부림치며 공기 한 모금이라도 더 들이마시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시야가 흐려졌다 또렷해지기를 반복했다.

이윽고 아포칼립시스는 그 이름처럼 주인에게 최후를 선사하려는 듯 뒤로 당겨졌다. 검이 그리는 궤적이 시간을 잡아 늘인 듯 느릿하게 펼쳐졌다.

죽는다. 마침내 죽음이다. 고통으로 치자면 그의 것은 단언컨대 걸작이다.

생의 유일한 아쉬움은 역시 베로니카뿐이다. 그녀에겐 아주 오래전부터 해 주고 싶은 게 많았다. 비 오는 날이 무서웠던 시절을 위해 따뜻한 벽난로를 만들어 주고도 싶었고, 가족과 축제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다는 그녀를 위해 손을 잡고 번잡한 거리를 누비고도 싶었다.

우리가 더 평범하게 만났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더 늦더라도 바하무트가 없는 세계에서 너를 알게 됐더라면.

네게는 티끌만큼의 죄도 없다. 사후의 심판대에 선다면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누군가 지옥에 떨어져야 한다면 그건 네가 아니라….

그 순간 쩡, 하는 마찰음이 둥근 파문을 일으켰다. 이어지던 상념이 쇠붙이의 비명과 함께 산산조각 났다.

꺼져 가던 적안이 날카로운 섬광 앞에서 크게 흔들렸다. 리온은 제 앞에 뛰어들어 마지막 일격을 막아 낸 여자의 작은 등을 보았다. 두 개의 신검이 강렬하게 맞붙은 채 불꽃을 일으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