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114)화 (114/128)

진부한 소원이지만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이기적이고 둔감한 생각인가. 무수한 인간의 뼈를 밟고서도 그와 함께 살고 싶다고 생각하다니.

속이 욱신 조여들었다.

베로니카는 멍하니 앉아 제게 기댄 남자의 온기를 받았다.

너울대는 어둠은 풍경을 야금야금 좀먹고 있었다. 해가 지고 사위는 어느새 깜깜했다.

팔목을 쥐고 있던 남자의 손은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당겨 그녀를 제게 바싹 밀착시켰다. 그는 그녀에게서 떨어지면 죽는 사람처럼 굴었다. 목덜미에 입술을 갖다 붙인 리온이 다른 손으로 젖혀진 턱선을 느리게 훑어 내리자 베로니카는 부드럽게 몸을 떨었다. 녹진한 손길에 쉽게 깨지는 유리가 되어 난잡하게 문질러지는 기분이었다. 묘하게 갈급한 감각 속에서 옅은 숨을 몰아쉬었다.

“리온.”

마침내 소리 내어 부르자 그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동작을 멈췄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헝클어진 머리칼 아래로 드러난 이목구비는 혼탁하리라는 예상과 달리 명료했다. 눈물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달빛에 뚜렷하게 번득이는 눈동자를 본 순간, 베로니카는 기묘한 소름을 느꼈다. 그가 그녀의 등 뒤를 빤히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들려?”

들리냐고? 뭐가…?

“다가오는 소리.”

의문을 품은 찰나 속이 울렁거리며 뒤집혔다. 엄습하는 토기에 베로니카는 뻣뻣하게 굳은 채 인상을 찡그렸다.

알고 있다. 이 기분. 아셀도르프에서 한번 겪은 적 있는 감각이다. 발아래에서 수백 수천 개의 얼굴이 쳐다보는 듯한 느낌.

이번엔 방향이 등 뒤였지만 바하무트에게서 기인했으리란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드디어 그녀의 귀에도 둔중한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인간보다 무겁고 머릿수는 일반 군대보다도 많다. 분명히 그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깨닫자마자 오한이 전신을 휩쓸었다. 베로니카는 파리하게 질린 채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어떻게 알고 다시 오는 거지…?”

‘그것’이 리온을 찾으러 간다고 사라진 이후 총총한 눈들도 따라 없어졌었다. 벌써 카르트를 뒤지고 왔을 리가 없다. 게다가 그녀의 속이 뒤집힌 건 공기에 살의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리온은 말없이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절걱절걱 흰 뼈가 부딪히며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지축이 뒤흔들리자 리온의 짙은 동공이 이내 그녀를 향해 움직였다.

“네 눈이 날 봤으니까.”

“뭐라고요?”

“그것밖엔 이유가 없어. 네 눈을 통해서 날 본 거야.”

처음엔 머리가 말을 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예전에 봤던 환상이 뇌리를 스쳤다. 그때 그녀는 대륙 각지에 퍼진 바하무트의 눈을 통해 카르트 바깥의 전황을 봤었다. 루에가와 탄비아, 체사니아와 화이트랜드, 롬 군도의 전투까지도. 그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바하무트의 습격 시기는 늘 오묘했다. 마녀재판이 시행되기 직전이라거나 시민들이 광야로 떠나게 된 바로 그날이라거나. 마치 무슨 일이 벌어진 지 때맞춰 알아차린 것만 같았다. 어쩌면 이 모두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베로니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가끔씩, 그녀의 눈을 훔쳐 쓰고 있었는지도.

홱 고개 돌린 베로니카는 멀리서 밀려오는 빽빽한 붉은 점을 보고 머리털이 쭈뼛 곤두서는 걸 느꼈다. 어느새 바하무트 군단은 해골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이곳은 그들의 소굴이고 그 인원은 블라센 산맥을 모조리 채울 정도로 무수하다. 모조리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

정신이 팔린 사이 리온은 검을 쥐고 묵묵히 일어섰다. 그가 그녀를 지키듯 앞으로 나아가며 어깨 너머로 경고했다.

“가까이 오지 마. 오늘 같은 날은 누구든 검에 휘말리게 돼 있어.”

“설마 싸우려고요…? 말도 안 돼. 혼자서 저걸 다 상대할 순 없어요. 카르트를 지키던 때와는 달라요. 늦지 않았으니까 도망쳐야 한다고요!”

그는 수명이 많이 남았지 않은가. 도망치면 살아남을 수 있다. 설령 베로니카가 최초를 죽이는 데 실패한다 해도 그는 그 정도 생존력은 가지고 있다.

“여기서 살아남으면.”

리온은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게 여기서 살아남으면 도망치겠다는 뜻인지, 혹은 뭔가를 요청하려다 만 것인지는 불분명했다. 그가 피로하고 나른한 얼굴을 마지막으로 돌린 채 물었다.

“혼자 가라고 해도 안 가겠지, 너?”

새까만 어둠이 좌에서 우까지 빨간 점으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베로니카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리온은 피식 웃었다. 빛과 어둠의 경계까지 뚜벅뚜벅 걸어 나간 남자의 적색 머리칼이 밤의 불꽃처럼 흩날렸다. 온도가 몇 도쯤 떨어진 착각이 일었다.

벌떡 따라 일어나려던 베로니카는 헤네시스가 흔들리는 뼈 더미에 묻혔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혹했다. 황급히 바닥을 파헤치는 손길이 벌벌 떨렸다. 흰 뼈에 긁힐 때마다 손이 따끔거렸다.

맥박이 거칠게 뛰고 속이 울렁거린다. 토할 것 같다. 왜, 왜 현실은 항상 예고도 없이 밀려드는 거지? 리온에게 상처 주는 말만 했는데. 그의 눈물을 제대로 닦아 주지도 못했는데.

왜 하필 지금!

“…찾았어.”

마침내 사자가 새겨진 자루를 무릎 뼈 너머로 발견한 순간, 바하무트가 성난 파도 같은 기세로 밀려들었다. 빛 아래 선 리온이 검을 휘둘렀다.

콰득!

가로로 그어진 검의 잔상 아래 바하무트들이 허공에서 멈췄다가 잠시 후 분수처럼 피를 흩뿌리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동족의 시체를 밟아 넘는 바하무트의 키는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줄어들어 이제 성인 남자보다 겨우 머리 두 개쯤 컸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완전히 인간처럼 변하고 나면 그다음은 불 보듯 뻔하다. 각기 다른 얼굴과 존재성을 얻으려고 하리라. 베로니카는 헤네시스를 들고 휘청거리며 일어났다.

리온이 낙뢰처럼 허공을 가를 때마다 아포칼립시스는 눈이 부시게 번득거렸다. 그녀는 눈도 깜빡하지 못한 채 전투를 눈에 담았다. 리온이 신검을 쥔 모습은 몇 번이고 봤었다. 하지만…하지만.

폭주.

검이 바하무트의 머리통을 바닥에 내리찍자 그곳에서부터 저저적 땅이 갈라져 나갔다. 축적된 뼈들이 틈으로 쏟아져 내리며 기묘한 비명이 정신 나갈 듯이 동굴에 메아리쳤다. 베로니카는 멍하니 읊조렸다.

“뭐가 여기서 살아 남으면이야….”

그는 살 생각이 없다. 여기서 죽을 생각이다.

차오르는지도 몰랐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이 슬픔 때문인지 압도적인 살육이 주는 전율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이 정도로 날뛰는 리온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가 다가오지 말라고 한 이유를 이해했다. 저런 태풍에 휩쓸리면 나약한 인간 앞에는 죽음밖에 안 남는다.

그가 양손 검을 묵직하게 내리칠 때마다 살점과 피가 튀어 올랐다. 예리한 얼굴은 이미 반쯤 검붉게 물들었고 핏물을 뒤집어쓴 몸에서는 뜨거운 김이 피어올랐다. 수직과 대각선으로, 검이 그리는 궤적이 잔인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

리온은 바하무트 군단의 중앙으로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그의 검술은 상대를 몰아붙이는 종류다. 방어도 공격도, 심지어는 정지하는 순간조차 다른 공격으로 이어지기 위한 하나의 자세에 불과하다.

아포칼립시스를 땅에 꽂는 반동으로 훌쩍 뛰어오른 리온은 커다란 바하무트의 정수리에 올라타 한 바퀴 돌린 검을 그것의 머리에 박아 넣은 뒤 높은 곳에서 군단을 휙 둘러보았다.

그는 그들의 오와 열을 산산이 흩어 놓을 작정이었다. 하나의 몸같이 움직이는 바하무트에겐 제 자리를 잃으면 찰나 틈을 보인다는 약점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에겐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학살하는 재능이 있었다.

삽시간에 십수 개의 머리통이 날아갔다. 쏟아지는 핏물의 비린내가 지독했다.

몇 마리나 죽였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지? 죽기 전에 베로니카에게 돌아갈 시간은 있나?

잔혹한 살육 속에서 의문은 흐릿해졌다. 뚜렷하게 차오르는 살의는 살가죽이 찢어지고 심장이 터질 때까지 싸우라고 속삭였다.

싸워라, 죽여라, 영혼이 갈려 나갈 때까지 날뛰어라.

검을 든 팔과 바닥을 딛는 다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가벼워졌다. 그게 성력이 빠져나갈 때의 증상임을 모르지 않았지만 리온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더는 멈출 수 없는 지점에 이르러 있었다.

티란에서 동료들이 죽었을 때, 최초가 베로니카를 삼켰을 때 이후로는 최대의 폭주다. 그가 스스로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데는 군단 중심의 빈 공간에 다다르겠다는 목적이 있었다. 강박적으로 열을 맞추는 바하무트 군단에서 사람 하나만큼의 빈 공간은 수상하기 짝이 없는 구역이었다. 리온은 그 자리야말로 ‘그것’의 위치라고 생각했다.

몰아치는 검격이 최대치를 찍은 순간 리온은 땅을 박차고 가장 깊은 곳에, 가장 안전한 곳에, 군단의 한중간에 검을 찔러 넣었다.

그리고 그 순간, 전투가 시작된 이래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던 아포칼립시스가 우두커니 정지했다.

검은 망토가 펄럭이며 가라앉았다.

죽은 듯한 정적, 멈춰 버린 시간.

피를 바닥에 투드득 떨어뜨리는 긴 검신의 끄트머리에는 여자가 서 있었다. 리온은 우뚝 선 채 나직이 입을 열었다.

“…베로니카?”

나신의 여자는 제 이마에 검이 닿을 듯이 가까이 왔는데도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녀의 목까지 천천히 내려가던 검이 돌연 멈췄다.

“당신은 그걸 절대로 죽일 수 없어요.”

리온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그가 그 의미를 깨달은 순간 ‘그것’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옆에 서 있던 바하무트가 그의 목을 조르듯이 들어 올려 동굴 기둥에 강하게 처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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