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113)화 (113/128)

발 담그면 빨려들어 갈 아뜩한 공포감이다.

리온은 그 선명한 붉은 눈을 사로잡힌 듯 뚫어지게 보다가 이윽고 바들바들 떨리는 몸으로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커다란 손이 그녀를 확 끌어안으며 얼굴을 그의 품에 묻게 했다. 압박감이 기이한 안정감을 선사했다. 헐떡거리는 그녀의 머리 위로 낮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알았으니까 손에 힘 풀어. 상처 벌어져.”

“리온, 나는.”

“알아, 괜찮아. 지금은 아무것도 없어.”

“…….”

주위는 고요했다. 베로니카는 온전히 그녀를 감싼 남자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두근, 두근, 두근. 옷자락을 쥔 손에 힘이 서서히 풀어지며 머리가 하얗게 물들었다.

무서웠다.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다. 다시는 못 볼 거라 생각했다.

리온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그런 건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깨어난 정신은 오롯이 차오르는 공포에 잡아먹히는 중이었다. 인간이 아닌 것에게서 느껴지던 그로테스크함, 스스로도 이유를 해명할 수 없던 기묘한 두려움. ‘그것’은 리온을 알고 있었다. 찾고 있었다. 꺼림칙한 벌레처럼 환청이 스멀거렸다.

“알겠어, 그가 죽으면 너는 충성스러운 가족이 돼….”

“‘최초’를 만났어요.”

대뜸 꺼낸 말에도 리온은 놀라지 않았다. 꽂혀 있던 검 때문에 그도 적의 존재를 인지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뿐이다. 그는 ‘그것’을 모른다. 인간이 된 ‘그것’을 만나보지 못했다. 그 눈을, 그 목소리를, 그 표정을 알지 못한다. 인간 아닌 인간. 인간이 되지 못한 인간. 갈망, 호의, 질투.

“당신은 그걸 절대로 죽일 수 없어요.”

베로니카는 확신한 채 내뱉었다. 그가 그녀의 얼굴을 한 괴물을 벨 수 있을 리 없었다. 리온은 한참 동안 대답이 없다가 침묵을 견디다 못한 베로니카가 고개를 들려고 했을 때에서야 돌연 입을 열었다.

“상관없어.”

“리온.”

“아무 데도 가지 않겠다고 했던 건 기억해?”

순간 어지럽던 머릿속이 뚝 정지했다. 베로니카는 입술을 꾹 말아 물며 시선을 맞췄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 평온했던 밤은 여기까지 온 원동력이기도 한 것을.

“이 모든 게 끝날 때까지 내 옆에 있겠다고 했었지.”

“…….”

“약속 지켜. 다른 생각 하지 말고 옆에 있기만 해.”

“하지만 그건….”

말꼬리가 흐려졌다. 잠시 사이를 두었던 베로니카는 목이 멘 듯 중얼거렸다.

“거짓말이었어요. 거짓말한 거예요.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속을 게워 내는 심정으로 거짓말을 쥐어짰다. 거짓말이라는 말이 거짓말이라니. 무슨 말장난 같은 일인가.

하지만 그녀에겐 우스움을 느낄 정신적 여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두렵기만 했다. 금방이라도 바하무트가 나타나 그의 심장을 잡아 뜯을 것 같았다. 베로니카는 제가 사라지면 ‘그것’이 흔적을 찾아 뒤쫓아올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가 왔다는 걸 들키기 전에 보내야만 한다.

“그걸 믿었어요? 내가, 나를 이용하고 버렸던 사람 옆에 죽는 날까지 있으리라고?”

차가운 말을 애써 중얼거렸다. 깊이 상처받는 눈을 보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한때 좋아했으니 당신에게 오래 의지했지만 내 마지막을 바칠 정도는 아니에요. 나한테는 다른 살아 있는 인간들이 훨씬 중요해요. 당신도 그렇잖아요.”

그런데 어째서, 당신의 낯에는 그토록 슬픔이 가득한가? 왜 뿌리가 잘린 나무처럼 희망 한 자락 없이 문드러져 가는가?

제가 아는 리온은 사랑 하나로 무너지기엔 믿음이 강한 사람이었다. 결국엔 그녀보다 인류 전체를 택할 신의 아들. 그렇기에 베로니카는 가만히 있는 남자를 보며 당혹하고 초조해졌다. 차라리 뭐라고 반박이라도 하길 바랐다. 똑같이 칼을 들어 찔러 주길 원했다.

묵묵히 받아들이는 태도는 그에게 그녀가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를 말보다 뚜렷하게 보여 주었다.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들었다. ‘인류를 위해서’ 따위의 논리론 리온을 보낼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인류의 종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직….

베로니카는 그의 품을 뿌리치듯 빠져나왔다. 다소 갑작스러운 행동에 리온은 당황한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베로니카는 이를 악물고 뼈 더미를 짚었다.

“그러니까 가요. 가도 괜찮아요. 처음부터 바하무트를 죽이기 위해 날 카르트까지 데려왔었죠. 전부 당신이 원하던 대로 됐어요. 내가 희생하면 더는 아무도 죽지 않고 끝나요. 다시 원래대로 평화로워질 수 있어요.”

앉은 채 뒤로 물러나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지껄였다. 흘끗 뒤돌아보곤 널브러진 헤네시스를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실은 그녀라고 그와 함께 떠나고 싶지 않을 리 없었다. 죽음 앞에서 등 돌려 도망치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살고 싶냐 묻는다면 몇 번이고 대답할 수 있었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간절해서 미쳐 버릴 것 같다. 그가 내밀어 준 손을 잡고 함께 도망치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양손이 이 정도로 다치지만 않았어도 몇 번이고.

어쩌면 그래서 칼에 꿰뚫렸는지도 모르지.

시선을 내리깐 남자는 땅을 짚고 부들거리는 그녀를 한참 동안 응시했다. 그러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바란 적 없어. 적어도 널 알게 된 후로는.”

뼈대 굵은 손이 이내 그녀를 다시 안으려는 듯 뻗어 왔다. 베로니카는 눈을 질끈 감으며 몸을 뒤로 물렸다.

“또 억지로 데려가려고요?”

찰나 그의 움직임이 허공에서 멎었다. 리온의 눈빛이 꺼질 듯 탁해졌다. 지난날의 과오인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싫다는 그녀를 강제로 그의 여정에 동행시켰다. 죽어야만 하는 운명의 수레바퀴에 그녀를 끌어들였다. 그때의 만남이 지금 와서는 인생의 가장 큰 축복으로 여겨진다 해도, 그녀는 지금 그것이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사건인 양 굴어야 했다. 그를 보내기 위해서라도 상처를 줘야만 했다. 베로니카는 표정이 사라진 남자의 얼굴을 보며 손을 꽉 구부렸다. 축축한 피가 흥건하게 배어 나왔다. 정성 들인 조각상을 부수기 위해 망치를 들어 올린 인간처럼, 심장이 쿵쿵 크게 뛰었다.

“어디서 들었는데, 나를 구원한 신에게 복수하는 최고의 방법은 자살이래요. 그가 나에게 준 것을 저버리는 것. 완전히 해방되는 것.”

“…….”

“당신은 그날 나를 구해 줬고, 구원의 대가로 내 발에 족쇄를 채웠어요. 나는 지금 합당한 대가를 치르고 있어요. 이로써 우리 사이엔 아무것도, 아무것도 남지 않아요.”

그는 얼음 속에 갇혀 죽은 짐승처럼 조금도 미동하지 않았다. 베로니카는 까끌까끌한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주인의 피를 먹은 헤네시스를 주워들었다. 뼈가 비틀려 벌벌 떨리는 손으로 검을 일으켜 세웠다. 아마 다시는 섬세한 물건을 잡거나 글을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내 실소가 새어 나왔다. 어차피 죽을 건데 손을 쓸 수 있는지 없는지가 무슨 소용이야.

“뭘 하는 거지?”

마침내 지켜보던 남자에게서 날카로운 질문이 흘러나왔다. 베로니카는 대답 대신 흔들리는 칼날을 제 목에 들이댔다. 검이 길었기에 검 끝이 아니라 검날이 자를 듯이 목 옆에 와 닿았다. 차가운 강철의 감촉이 서늘했다.

“보이는 그대로요.”

“내려놔.”

“먼저 일어나서 떠나요.”

뻣뻣한 무표정에 드디어 감정이랄 것이 서렸다. 억눌린 분노,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절박하고 무참한 감정….

그가 팔을 뻗은 것과 헤네시스가 뼈 더미 위로 요란하게 떨어져 구른 건 거의 동시였다. 뿌리칠 새도 없이 그가 그녀의 팔목을 낚아채며 낮게 뇌까렸다.

“아무것도 안 남는다고?”

그런 얼굴은 처음 봤다.

“그럼 도와 달라고 말해. 간단하잖아. 여기서 다시 구원을 받으면 그만이야.”

인간 같지 않은 낯. 버려지고 채인 짐승의 낯. 비틀린 남자가 고개를 기울여 자신을 드러냈다. 베로니카는 코앞까지 다가온 부서진 맨얼굴에 숨을 멈췄다.

“죽기 싫다고 말해, 제발.”

“…….”

“같이 가자고. 다른 인간들 따위 어떻게 되든 잊어버리고 함께 살자고.”

붙잡힌 팔목은 아프기는커녕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녀가 아니라 그가 떠는 거다. 죽으려고 한 그녀를 보고 그가 겁에 질린 거다.

“무릎 꿇고 빌까? 영원히 기어 다니면서 사죄라도 할까? 뭘 원해? 내가 도대체 뭘 해야….”

“…….”

“널 살릴 수 있는 거야?”

아득한 절망에 숨이 막혔다. 그녀를 붙든 남자는 지독하게 무력해 보였다.

이런 남자를 예전에는 잔혹하다 생각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따뜻함에 이끌려온 짐승을 잔혹하게 잡아먹는다고. 옆에 있어 봤자 아프기만 하다고. 도저히 불쌍히 여길 줄을 몰랐다. 그러나 모든 것을 태운 불의 결말은 잿더미가 아니던가.

“왜… 울어요?”

멍하니 있던 베로니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잡히지 않은 손을 들어 수려하고도 비참한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의 오른쪽 눈가에는 피가 새로이 굳은 흔적이 있었다. 그걸 매만지려고 하자 그가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며 고개를 파묻었다. 동시에 끝끝내 놔주지 않은 팔목도 함께 바닥에 추락했다.

“협박으로라도 죽으려고 하지 마. 같이 떠나자고 안 해. 옆에 있으라고도 안 할 테니까 살아만 있어.”

알고 싶지 않았다. 당신을 위해 흘린 눈물이 당신의 불꽃을 꺼트렸다는 사실을.

“내 잘못이야. 처음에 지나쳤어야 했어. 구해 주고 그냥 갔어야 했어. 내가 널, 함부로 마음에 담아서.”

해가 진다. 노을이 하얀 뼈 위에 고여 피바다 위에 덩그러니 앉은 듯하다.

“아파. 산산이 부서졌는데도 도저히 끝이 안 나. 빌어먹을.”

남자의 애끓는 소리가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메마른 웃음 아래로 헐벗은 어깨가 젖어 들었다.

밤이다. 끝나지 않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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