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112)화 (112/128)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냐, 그 사람은 아무 상관도 없어. 안 돼, 가지 마. 내가, 내가 다 할게.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할게.”

베로니카는 거의 빌 듯이 말했다. 그러나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바하무트는 그대로 일어섰다. 벌거벗은 발이 부득부득 뼈를 밟아 시야에서 벗어났다. 아무리 베로니카가 버둥거리고 고함쳐도 들은 체도 안 했다.

잔혹한 상상만 부추겨진 채 해골산에 혼자 남았다. 검 자루는 손바닥 위까지 깊이 박혀 행동을 옴짝달싹 못 하게 통제했다. 약간 움직여 상처가 벌어질 때마다 울면서 신음했다.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았다.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여기까지 와서. 가만히 있었더라면 바하무트가 리온을 죽이러 갈 일도 없었을 텐데. ‘그건’ 왜 그렇게 가족에 집착하는 거야? 충분히 많잖아. 그토록 만들고도 부족한 거야?

온갖 생각이 난무했다. 먹구름이 의식을 까만 불안으로 뒤덮었다. 카르트가 점령당한 지금 바하무트가 마음먹고 도시를 뒤진다면, 머리를 써서 성전을 공략한다면 농성은 오래갈 리가 없었다. 미칠 것 같았다.

게다가… 마주친다 한들 리온은 ‘최초’를 죽이지 않으려 들겠지. 그랬다간 베로니카가 죽을 테니까.

투구 너머로 들었던 고백을 떠올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찬연한 목소리.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눈동자.

불 같은 사람이다, 당신. 침대에서 올려다보던 눈길, 헝클어진 머리와 꽉 다물린 턱. 숨이 막혀서 그를 바다로 데려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베이른의 검은 바위에 앉아 같이 짙고 파란 수평선을 보노라면, 아프게 타오르던 불길도 조금 가라앉을까 싶어서.

그의 눈 안에는 모든 것이 있었더랬다. 헤진 사랑과 서글픈 후회와 말 못할 슬픔과 기쁨과 미련까지. 베로니카가 평생을 소원했고 결코 누릴 수 없을 안정과 행복이 바닷결 물거품처럼 요동쳤다. 그게 아슬아슬 벅차서, 곧장 입을 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게 아니다. 한 방울 대답을 해 버리면 그대로 넘친 감정이 우리를 휩쓸까 겁이 났을 따름이다.

해일 앞에서 뒤돌아 도망쳤는데 어떻게 당신만 가라앉는 꼴을 볼 수 있을까.

그러니 빠져나갈 방법을, 어떻게든.

뻥 뚫린 동굴 천장으로 보이는 하늘은 어느새 새파란 새벽에 다다르고 있었다. 멍하니 구름이 움직이는 모양을 보다가 움찔 다리를 내려다본 베로니카는 하얀 피부를 타고 오르는 벌레를 발견하고 한 차례 난리를 쳤다.

“싫어… 싫어! 저리 가. 흑, 제발 좀!”

손뼈가 비틀려 몹시 아팠다. 비릿한 피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등과 이마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피부에는 우둘투둘한 닭살이 돋아났다.

벌레를 쫓아내고도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베로니카는 수백 개 다리가 만들어 내는 작은 소리가 들릴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비틀어 댔다. 그러다 문득 이 해골산에 자신이 유일한 생명체임을 자각했다. 다소간 간절함을 담아 둘러봐도 총총한 눈이 있던 자리에는 까만 어둠만 드리워져 있을 뿐이었다.

무서웠다. 순수하게 혼자라서 무서웠다. 눈에 안 보이는 벌레가 기어오른 듯 온몸이 간지러웠다. 이런 곳에 계속 있다가는 정신병에 걸리고 말 거다. 베로니카는 한참을 빠져나갈 궁리를 하다가 지쳐서 몸을 늘어뜨렸다. 허약한 심장은 아까 입은 충격에서 돌아오지 못한 채 쿵쿵댔다.

몸이 안 좋았다. 호흡이 힘들고 왼쪽 가슴도 자꾸 찌릿거렸다. 당장이라도 숨 막혀 죽을 것 같은 공포가 정신을 자근자근 좀먹었다. 시간의 흐름도 잊은 채 이어지던 움직거림은 중간중간 정신을 놓으면서 끊어졌다. 한번 눈을 감았다 뜨면 깜깜한 밤이 되고 또 한 번 감았다 뜨면 맑은 늦봄의 하늘이 시야를 메웠다. 굶은 데다 피까지 많이 흘려 어지러웠다. 기절하듯 의식을 잃었다.

***

“갈림길조차 없는 건가.”

리온은 불빛 한점 없는 통로를 걸으며 혼잣말했다. 목소리는 우물에 대고 말하듯 왕왕 울렸고 퀴퀴한 먼지 냄새가 강렬하게 코를 찔렀다.

체감상 하루는 족히 넘었다. 카르트는 이미 벗어나고도 남는다. 지하 통로는 필립의 판단대로 대피로의 목적을 지닌 듯 보였다. 무슨 일이 있을 경우 도시를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 끝에 다만 출구가 있을 뿐이기에 남부의 지하 무덤과는 달리 함정이나 방해물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가끔 들리는 쥐의 짹짹거림을 제외하면 통로는 탄탄대로였다. 리온은 한시도 쉬지 않고 걸으면서 물과 식량의 섭취를 해결했다.

힘들 건 없었다.

발을 무겁게 만드는 유일한 문제는 각혈도 손 떨림도 아니요 의외로 환청이었다. 깜깜한 어둠에 지친 뇌는 실제로 없는 소리를 만들어 냈는데, 갈수록 심해져 그를 피로하게 했다.

예컨대 예민한 귀는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소리를 자꾸만 있다고 주장했다. 발소리와 병장기 소리. 한두 명이 아니라 수백 명의 인간이 그의 바로 뒤를 따라 움직였다. 보통 인간이면 머리털이 쭈뼛 곤두설 일이지만 리온은 그들의 정체를 알고 있었기에 비틀린 자조를 입가에 걸었다.

티란에서 죽은 기사들이다. 빛 아래 서면 그 시체의 군단은 피 칠갑이 선연하리라.

베로니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녀의 부름이 어둠 속에서 들렸다면 그는 우뚝 멈춰 선 채 발이 묶이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단지 평범하게 살아가는 환상만 보여 줬더라면, 작은 집과 베로니카와 찬란한 햇살이 이파리 사이로 쏟아지는 여름만 주었더라면, 가짜라는 걸 알고도 영혼을 팔았을 것이다. 그는 환각에서조차 그녀를 떠날 수 없었다. 두 번 다시는.

저벅, 타성적인 걸음이 멈춘 건 그즈음이었다. 리온은 확 넓어진 공기의 변화를 느끼고 팔을 뻗었다. 벽이 사라져 있었다. 천장도 손에 닿지 않았다. 몸을 숙여 요철이 있는 바닥을 확인한 리온은 그 자리에서 주저 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아포칼립시스는 처음보다 강하게 진동하며 주인을 안으로 인도했다. 안내를 따라 걷던 리온은 또다시 대군단의 움직임을 느끼고 멈춰 섰다. 이번엔 환청이 아니라 진짜였다. 기척을 죽이자 그가 걷고 있는 길 아래쪽에서 벌레처럼 우글우글 몰려가는 붉은 눈동자들이 보였다. 바하무트가 군단 째 이동하고 있었다.

리온은 놀라지도 않은 채 그대로 가만히 기다렸다. 이런 지형에서 들켜서 전투에 임하게 되면 귀찮은 요소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러다 문득 귓바퀴를 간질이는 감촉이 있어 고개를 들자 돌벽에 박힌 하얀 손가락 모양의 버섯이 눈에 들어왔다. 블라센에서만 서식하는 종이었다. 다시 말해 이곳은 무너진 산 어딘가의 동굴이라는 뜻이 된다.

바하무트의 둥지. 언젠가 베로니카가 봤다는 환상 속 장소.

대성전이 블라센과 연결되어 있다는 건 교회의 역사를 아는 자에겐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제사장이 신의 계명을 받은 곳이 바로 블라센 산 정상이었으므로.

피로할 정도로 오랜 시간을 인내한 후, 마침내 바하무트의 이동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졌다. 리온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걷기 시작했다.

평범한 동굴의 형태가 이어지다 시야가 탁 트이듯 널따란 호수가 등장했다. 짙고 새파란 호수의 둘레를 걷던 리온은 물을 보급할 겸 짐을 내리고 얼굴을 씻었다. 뚝, 뚝 수면에 물이 떨어질 때마다 비치는 낯이 흐려졌다 선명해지기를 반복했다.

한계인가.

잠시라도 눈을 붙여야 한다. 안 그랬다간….

“…흑….”

흠칫 굳은 건 그 순간이었다. 상념이 뚝 끊어지며 어떤 사고를 거칠 겨를도 없이 고개가 휙 돌아갔다.

“…….”

그는 호수 너머 시커먼 어둠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천적의 기미를 살피듯 집중한 청각에 신음이 다시금 희미하게 들려왔다. 고통에 겨워 새어 나오는 가냘픈 소리였다, 매우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부지불식간이었다. 신체가 한계에 이르렀다는 점이나 지금껏 환청을 들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걸음이 빨라졌다. 시야가 밝아졌다. 희고 눈부신 언덕 앞에 다다른 순간, 리온의 눈은 인간의 뼈 이외의 다른 것을 좇았다.

뼈로 쌓인 설원의 중앙에 검이 꽂혀 있었다. 여자가 있었다. 그는 비탈을 뛰어내렸다.

“베로니카.”

가까이 다가선 리온은 헐벗다시피 한 그녀의 슈미즈가 피투성이인 걸 보고 성어로 욕설을 뇌까렸다. 의식을 잃고 식은땀을 흘리는 베로니카는 입가와 손이 모두 피로 얼룩져 엉망이었다. 이성이 휘발되는 감각은 오랜만이었다. 성벽을 지키고 돌아와 그녀를 침상에서 봤을 때 이후 처음으로, 그는 초조함에 돌기 직전의 상태가 되었다. 딛고 선 바닥으로 피가 줄줄 새는데 틀어막을 게 없는 기분이었다.

깊이 박힌 헤네시스를 보고 턱이 불거지도록 이를 악물었다. 다른 방법이 없다는 판단하에 결단은 빨랐다. 검을 힘주어 뽑아내자 베로니카는 울음에 가까운 신음을 터뜨리며 고통으로 버둥거렸다. 그는 갑옷을 벗고 안에 받쳐 입은 아밍 더블렛1)의 소매를 잘라내 그녀의 손을 꽉 묶어 지혈했다. 베로니카는 인상을 팍 찡그린 채 눈물을 흘렸다.

“읏….”

“조금만 더 참아. 당장 소독은 못 해도 물로 씻어 내기라도 해야 해.”

리온은 듣지도 못할 여자에게 속삭이며 호수로 가기 위해 곧장 그녀를 끌어안았다. 백지장처럼 파리한 여자는 그간 얼마나 여위었는지 가볍다 못해 사라질 것 같았다. 일어나려는데 그녀가 흐리멍덩한 눈을 치켜떴다. 갈라진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리온…?”

“말하지 마.”

통증이 의식을 깨운 것처럼 그녀의 눈이 점차 또렷해졌다. 벌벌 떠는 손이 그의 옷자락을 구겨 쥐었다.

“…안 돼….”

“뭐?”

그가 되물은 건 그녀의 말을 알아들어서가 아니었다. 다만 맑아지는 눈동자에 차오르는 감정이,

“…도망가요.”

눈에 띄는 공포였기 때문에.

“당신을 죽일 거예요. 난 여기 두고 당장, 도망쳐요.”

[각주 모음]

1) 아밍 더블렛 (arming doublet): 무장용 웃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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