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온은 바람 부는 통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이 검은 길이 그를 그녀에게 인도하리라. 목덜미가 서늘하게 욱신거렸다.
너는 지금 어디 있지? 어떤 심연에서 홀로 울고 있지?
“대성전에 비밀 통로가 있다는 말은 예전부터 들었지만 직접 보는 건 처음이군요.”
옆에 다가선 필립이 턱을 쓸며 미간을 찌푸렸다. 직사각형 통로는 기사인 그들과 같은 체구의 남자가 지나다니기 적절한 높이와 너비를 가지고 있었다.
“잘됐습니다. 이제 침입이 있을 시에도 얼마든지….”
“뒤를 부탁하지.”
말을 끊어 낸 리온은 풀어 둔 무구를 걸치기 시작했다. 멈칫했던 필립은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을 던졌다.
“미쳤습니까? 설마 저 안에 그 여자가 있다고 믿습니까?”
“신검이 길을 지시했어. 같이 본 줄 알았는데 눈이라도 감고 있었나?”
베로니카는 그의 옆에 남기보다 전 인류를 살리기를 선택했다. 마음껏 구원을 내준 뒤 미련 없이 훌훌 털고 일어났다. 구원 후 도망간다는 건 신으로서 얼마나 무책임한 행위인가. 그에겐 그녀를 섬길 권리가 있었다.
“여자를 입에 올렸을 때 맞춰서 움직였으니 여자가 있는 곳으로 인도할 것이다? 편리한 발상이군요. 원래 모든 것은 바라는 대로 보이는 법입니다.”
“기사단을 책임져야 하는 부단장 눈에는 도주로로 보였던 것처럼 말인가?”
필립은 한쪽 눈썹만 들썩여 보였다. 무장을 마친 리온은 다시 입을 열었다.
“진리 앞에 굳이 논리를 들이대 볼까. 저건 단순히 그녀가 있는 방향을 가리키는 게 아냐.”
“그럼 뭡니까.”
“신검이 어딘가로 가고 싶어 한다, 상식적으로 그곳에 뭐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순간 필립의 얼굴이 굳어졌다. 절걱대는 아포칼립시스는 평범한 검이 아니다. 주인을 선택하는 검이다. 그러나 그것 또한 임시적일 뿐, 검의 진실한 주인은 따로 있다. 즉 지금 검이 몸부림치며 돌아가려는 상대는… 필립의 자색 눈에 파문이 일었다. 신의 뜻 앞에서 인간이 감히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가 긴 침묵 끝에 고개를 저었다.
“그 몸으로 블라센까지 가는 건 꽤 지난한 여정이 될 겁니다. 중간에 무엇이 나타날지도 모르고 저 좁은 통로로는 말도 데려갈 수 없습니다.”
만류처럼 들려도 실은 한 발자국 물러난 충고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리온은 물 흐르듯 지나간 말에서 거슬리는 지명을 잡아냈다.
“블라센?”
필립은 부연하지 않았다. 철저한 성미에 의도치 않은 말실수를 했을 리는 없었다. 고의로 흘린 거다. 리온은 잠시 후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다물기로 누군가와 약속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베로니카가 블라센으로 간 건가. 귀띔해 줘서 고맙군.”
“새삼스럽게 감사 인사를 할 거라면 사태가 이 지경까지 왔는데도 당신을 아직껏 상관 대접해 주는 태도에 대고 하십시오.”
“그건 그냥 네 기사다움이 귀족다움을 이긴 결과라고 보는데.”
리온이 무심히 대답하자 벽에 기대선 필립이 픽 웃었다. 사실 대귀족 비텔스바흐가 평민, 심지어 베르크에게 예의를 갖추고 존중한다는 것부터가 기사단 밖에서는 어불성설이었다. 그들은 잠시간 그렇게 정적에 잠긴 채 서 있었다. 마치 비밀 통로 같은 건 발견하지도 못한 사람들처럼. 그러다 필립이 불쑥 물었다.
“그 여자 안에 진실로 신이 계셨다고 생각합니까?”
“아마도.”
“그럼 나는 신을 죽이려고 한 겁니까?”
손을 쥐락펴락하며 상처의 경중을 확인하던 리온이 고개를 들었다. 베로니카가 교황청에 있을 때 필립은 동화자의 사형을 언도한 바 있었다.
“아마도.”
“하.”
침음에 가까운 웃음이 터졌다. 냉소적인 반응도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었다. 신이 들어 있던 여자라니, 그야말로 이도교의 주장처럼 들리는 것이다. 마침내 건조한 웃음을 그친 필립은 전혀 다른 이야기인 것처럼 중얼거렸다.
“2주 전, 카이젠미어 황제 폐하께서 서거하셨습니다.”
“…….”
“그다음은 허울뿐인 황녀와 동화자에 대해 떠들던 호사가 귀족들.”
“…….”
“그리고 마침내 며칠 전엔 교황 성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머리에는 사형 집행관의 도끼가 찍혀 있고 시체는 불에 타서 신원 확인이 어려웠다고 하더군요. 신의 은혜를 입어 카르트의 멸망을 보지 않았다고 하는 기사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신의 제사장에게 주어지기엔 지나치게 비참한 말로입니다.”
언뜻 저명한 인사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두 사람 다 잘 알고 있었다. 언급된 이들은 하나같이 베로니카를 박해한 이들이다.
“표정을 보니 역시 알고 있었나 보군요.”
우연일 리 없다. 인과의 수레바퀴는 그런 식으로 굴러간다. 인간이 모르는 사이에 신의 뜻대로.
“성하의 죽음까지 들었을 때는 저도 얼마간 죽음을 각오했던 것 같습니다.”
“전투에 임하는 자세엔 도움이 됐겠군. 원한다면 만나서 감사를 전해 주지.”
가만히 듣고만 있던 리온이 입을 연 건 그때였다. 다음에 나올 말을 틀어막은 것에 가까웠지만 필립은 불만하지 않았다. 상념에 잠긴 채 서 있다가 벽에서 천천히 등을 떼어 냈을 뿐이다.
“감사는 됐고 약속을 못 지켜서 미안하다고 전해 주십시오. 쫓아가는 걸 막아 보려고 했지만 경이 막무가내였다고.”
리온은 신성 기사단의 마지막 부단장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출전을 허락하는 기사의 눈에는 후회가 없었다.
“다시 만나길 기도하겠습니다. 진심으로.”
몹시 중의적인 표현이었다. 필립은 다시 만나는 주체를 말하지 않았다. 리온과 베로니카인지, 아니면 그 자신과 리온인지.
필립은 일정 거리를 두고 서 있던 요아힘을 턱짓해 불렀다. 몇 마디 지시를 받은 견습 기사는 곧장 일주일 치 물과 식량을 담아 오기 위해 달려갔다. 그러는 사이에도 아포칼립시스는 계속해서 절그럭거렸다. 재촉하듯이. 쌍둥이 검의 비명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
헤네시스가 흔들린다. 하얀 검날로 핏줄기가 타고 흐른다.
“흑… 윽….”
베로니카는 바하무트의 가슴에 박힌 검이 꼭 머리를 박은 흰 뱀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단단히 물고 내장을 찢어발긴다. 전신이 부들부들 떨리며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
베로니카는 이어진 신체에서 작열통을 느끼고 가슴을 움켜쥐었다. 꼭 불덩이를 삼킨 기분이었다.
입으로 핏물이 왈칵 터지고 놔 버린 검이 허공에서 휘청였다. 기이하게 고개를 꺾고 제 가슴을 내려다보던 ‘그것’은 깊은 물처럼 고요하게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왜… 안 죽는… 분명히 심장을….”
불명확한 중얼거림이 피를 타고 흘러나갔다.
이상하다. 이쪽은 당장 숨이 꼴깍꼴깍 넘어갈 판인데 ‘그것’은 도리어 여유로운 태도로 검을 스르르 뽑아냈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베로니카는 살이 저미는 예리한 통각에 몸을 고통스럽게 비틀었다.
“우리가, 왜 뇌 먹는지 알아?”
‘그것’이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시야가 어지러웠다. 그 순간 하얀 집게손가락이 머리를 가리켰다.
“우리에겐 여기가, 생명 집약된 곳이야.”
베로니카의 눈이 커졌다. 치명적인 실수가 커다랗게 와닿은 것이다. 바보처럼, 중요한 순간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실수를 저지르다니.
인간의 모습에 현혹되어 착각했다. 충동적으로 바하무트의 가슴을 찔렀다. 그것의 심장은 머리에 있는데!
“왜 죽이려고 했어?”
‘그것’이 물었다. 베로니카는 끅끅대면서 뒤로 도망치려고 바닥을 짚었다. 아찔한 고통과 착란으로 사지에서 피가 빠져나갔다. 가슴의 통증이 너무 심했다.
“왜 죽이려고 했어?
‘그것’이 다시 물었다. 화난 것 같지 않아서 더 소름이 끼쳤다. 엉덩이를 질질 끌듯이 물리던 베로니카는 결국 손이 미끄러져 등을 세게 부딪히며 뒤로 넘어졌다. 인간의 뼈들이 잘그락 소리를 내며 그녀를 받아들였다. 싫어. 싫어. 이게 현실일 리 없어.
그러나 그녀의 소망을 정면으로 배반하듯 ‘그것’은 아까 호수에서 그랬듯 그녀의 위에 매끄럽게 올라탔다. 신검을 들고 있다는 것이 유일한 차이점이었다. 그것은 심지어 검날을 쥐고 있어서 베이는 아픔이 그녀의 손바닥을 가로질렀다.
아파, 아파!
“흑… 말했잖아…. 나는 인간이라고….”
베로니카는 헐떡거리며 간신히 대꾸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그녀의 대답을 듣지 못한 것처럼 다시 물었다.
“왜 죽이려고 했어?”
토씨 하나 바뀌지 않은 동일한 질문이었다. 같은 말이 세 번 반복된 것뿐인데 공포는 극에 달했다. 베로니카는 제가 인간이라는 사실이 ‘왜’에 대한 대답은 되지 못함을 깨달았다. 진짜 이유는, 행동의 진실한 목적은.
“너를 죽여야만… 다른 사람들이 살 수 있을 테니까….”
“사람들?”
바하무트가 천진하게 물었다.
“붉은 기사?”
머리털이 쭈뼛 곤두섰다. 네가 그를 어떻게, 리온을 어떻게 알아? 얼굴엔 그런 생각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그것’은 다시금 괴기한 미소를 지었다. 가슴의 구멍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여러 번 만났어. 아래서부터 계속. 그는 나를 쫓아와. 너를 먹을 때도 그가 있었어. 그는 파리처럼 귀찮아.”
아래라는 건 남부의 티란을 가리키는 말 같았다.
‘바하무트조차 붉은 기사를 안다’고 했던가. 베로니카는 세간에 떠도는 말이 가끔씩 얼마나 정확히 진실에 닿아 있는가를 생각하고 몸을 떨었다. 어느 것이 먼저인지 알 수 없었다. 말이 현실에 영향을 끼쳤는지, 아니면 현실이 말에 반영된 건지. 리온이 거론되자 바싹 마른 입술은 조금도 달싹이지 못했다. 사고가 느려지다 못해 정지했다. ‘그것’의 뒤바뀐 표정을 알아채지 못한 건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바하무트는 덜덜 떨고 있는 그녀의 두 손을 머리 위로 당겨 모았다. 작은 속삭임이 우레처럼 떨어졌다.
“알겠어. 몹시 귀찮은 것 끝이야. 그가 죽으면 너는 충성스러운 가족이 돼. 여기서 기다려.”
겹쳐진 손 위로 못처럼 검이 내리꽂혔다. 베로니카는 비명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