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110)화 (110/128)

흔들리는 계단에서 돌먼지가 우르르 쏟아졌다. 리온이 안으로 뛰어들었고 파편이 들이닥치기 직전 기사 넷이 힘을 합쳐 문을 밀었다. 쿵!

“베르크 경!”

아슬아슬하게 들어온 리온은 몸을 수그리고 거센 기침을 토했다. 무릎 꿇은 바닥 위로 검붉은 피가 번졌다.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명백했다. 붉은 피는 강제로 연장된 생이 보내는 적신호였다.

필립은 인상을 찌푸린 채 기사들 사이를 성큼성큼 가로질렀다.

“그러게 누가 상의도 없이 행동하라고 했습니까. 일찍 와 있던 우리는 엄연히 대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희생은 불필요했단 말입니다.”

“뭐라는 거야. 몇 번이고 죽으라고 내보냈던 새끼가.”

입가를 닦은 리온이 태연하게 웃자 필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적어도 오늘은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몸을 더 사렸어야 합니다.”

리온 베르크는 모든 기적을 소진했다. 타고난 축복이었던 막대한 성력도, 그를 살렸던 크로이츠 목걸이도 없다. 그걸 잘 아는 인간이 보란 듯이 날뛰었다. 마치 죽고 싶어 환장한 인간처럼. 살 이유를 잃어버린 인간같이 굴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필립이 한숨처럼 물었다.

“무리한 행동은 역시 그 여자 때문입니까?”

리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베로니카가 거론되자 입가의 미소는 사라졌다. 필립은 침묵하다가 질문을 바꾸었다.

“제가 억지로 보낸 거라고 정정하면 기분이 좀 낫겠습니까?”

“아니.”

이번만큼은 확실한 부정이 돌아왔다. 리온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흐트러진 머리를 대충 쓸어 돌가루를 털어내며 내뱉었다.

“네 탓이 아니라 내 탓이야. 그녀와 관련된 건 모두 다. 충동적인 발걸음 하나까지도.”

목소리는 낮았고 소름 끼치도록 고요했다. 이해하지 못하던 필립은 불현듯 높아진 시선을 마주하곤 흠칫했다. 이마로 쏟아지는 머리칼 아래 번득이는 눈동자에는 광증에 가까운 독점욕이 넘실거렸다.

네 탓이 아니라 내 탓. 그게 그런 의미였던가.

리온은 죄와 책임마저 홀로 독차지하고 싶은 게 분명했다. 그 외에는 그 누구도, 감히 그녀에게 영향을 끼쳐선 안 되는 것이다. 질투를 넘어선 집착이었다.

제정신이 아니다. 영혼이 부서진 낯짝을 보며 필립은 미간을 좁혔다. 전투 중에도 멀쩡한 농담을 지껄이길래 괜찮은 줄 알았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미쳐 있다는 증거였는지도 모른다.

“당신이 죽더라도 그녀는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결국 필립은 연민을 담아 충고했다. 리온은 대답 대신 대화를 끝내려는 듯 발길을 돌렸다. 숨결은 여전히 거칠었고 입가로는 피가 샜다.

신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더 행복했을 남자였다. 그런 그가 교회 역사상 가장 큰 성력을 타고났음은 비극이라고 생각했다.

***

리온은 지하 무덤의 안쪽까지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머리를 사도의 관에 기댔다. 눈을 감자 피로가 밀려들었다. 전투가 끝나고 나면 흥분의 흔적으로 동공이 풀리고 머리가 눅진해지는 게 일반이었다. 오늘은 예외로 같은 질문이 뇌리를 맴돌았지만.

왜?

너는 왜 나를 떠났지?

눈이 돌아가서 찾느라, 또 전투에 임하느라 미처 살피지 못한 의문이 뒤늦게 그를 괴롭혔다. 리온은 생각을 거듭하다 이내 스스로를 비웃었다. 발목을 잡는 과거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던 탓이다.

따라오기 싫다는데도 베로니카를 고향에서 억지로 끌고 나왔고, 감정을 이용할 목적으로 다정하게 대했다. 그녀를 교회에 판 것도 모자라 황실의 구경거리로 전락시켰고 이미 상처로 얼룩진 마음을 짓밟았다. 가장 약할 때 상처 주고, 진실을 알려 주지 않고, 이기적이고 비열한 짓을 반복하고도 뻔뻔하게 사과하고.

아, 질려 버릴 만한가.

사실 그녀가 그에게 한 일은 되갚아 줬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다정하게 대해 주고 옆에 있겠다고 거짓말했다. 진실을 말하지 않은 채 떠나 버렸다. 어둠 속에 혼자 남겨둔 채로.

뼈를 갉아 먹는 고독 속에서 심연은 목구멍을 꽉 틀어막았다. 리온은 머리를 감싸고 어깻숨을 몰아쉬었다.

“사람의 마음은 말야. 신의 것과는 달라서 금세 변하고 말아. 그러니 사랑하는 쪽은 버림받지 않기 위해 애쓰는 수밖에 없는 거야.”

아득한 기억 속, 모친의 부드러운 음성이 약해진 마음을 파고들었다.

“불안, 내가 인간의 마음에 대해 가지는 유일한 믿음은 그것뿐이란다.”

그녀가 찬양을 흥얼거리기 시작하면 눈가에는 불이 지지는 듯한 고통이 찾아들었다. 그가 울면 어머니도 울었다. 마음이 찢어진다는 듯이 한가득 끌어안고 눈물로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그러면 그 또한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미친 듯이 되뇌고 또 되뇌었다.

지독한 인간 불신은 모친에게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녀가 그토록 사랑한다던 아들을 버린 날, 리온은 어머니가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다.

인간의 마음은 변한다. 신만이 영원불변하다.

주륵 얼굴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피가 느껴진 순간, 리온은 어느새 제가 단검으로 오른쪽 눈가를 찌르고 있음을 인지했다. 손을 내린 뒤 눈을 떴다. 피의 양에 비해 깊이 들어가진 않았는지 시야는 멀쩡했다.

사라진 버릇인 줄 알았는데.

물끄러미 오른손에 들린 단검을 내려다보다가 텅 빈 왼손바닥을 훑었다. 뭔가가 떠올랐다. 그것을 좇으려는 것처럼 내리찍자 얼굴에 피가 팍 튀며 매끈한 눈가가 비틀렸다. 다시 뽑아 올렸다. 도로 꽂으려는 찰나,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무표정한 얼굴을 돌린 리온은 충격받은 기색이 선연한 요아힘을 마주했다. 전해 주려던 게 분명한 말린 햄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눈이 마주친 소년은 뒷걸음질 치다가 어색하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곤란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기겁한 소년이 필립을 불러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사도의 관 옆에 우뚝 선 필립은 리온을 보자마자 피곤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차라리 검을 그만 잡고 싶다는 시위이길 바랍니다. 부디 단순 자해라고 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자해?”

리온은 찌푸린 채 되물었다. 묘한 시선은 피가 철철 흐르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을 자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단지 베로니카가 손을 꼭 쥘 때 나던 상처가 별안간 뇌리를 스쳤을 따름이었다. 그 버릇은 그녀가 검은 복도에 남겨진 이후에 생겨났다.

베로니카는 그의 신이었다. 그러니 이것 또한 신심을 다지는 수도사가 제 등에 하는 채찍질에 가까우리라.

“배신당한 일 때문에 이러는 겁니까? 다른 기사와 떠난 게 화가 나서? 그 여자 때문이라면 이런 미련한 짓은 당장….”

말을 잇던 필립은 돌연 입을 다물었다. 리온의 침묵이 어색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는 본디 혼자서도 잘 떠드는 인간이다. 다만 목에 와 닿는 서늘한 감촉만은 무시하기 어려웠던지 시선을 내려 리온이 겨눈 검을 응시했다. 그 끝에 새겨진 사자가 아포칼립시스를 증명했다.

“어디로 간다고 했지?”

리온이 나직이 물었다. 가라앉은,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는 음성이었다. 맥락 없는 물음에도 필립은 오연했다.

“글쎄, 모르겠습니다. 카르트를 떠나서 갈 만한 곳은 광야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헛소리 집어치워. 광야로 가는 인간에게 교회의 기사를 딸려 보냈다고?”

성력을 가진 인간은 그 땅에서 오래 버티지 못한다. 즉 베로니카는 다른 곳으로 향했다는 뜻이다. 그도 논리의 허점을 눈치챘는지 혀를 쯧 차고는 팔짱을 풀었다.

“위안이나마 삼으라고 말해 주자면 그 여자도 좋아서 떠난 건 아닐 겁니다. 희생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인간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습니까?”

“뭐?”

“못 알아들은 척하지 마십시오. 그 여자는 ‘그것’을 찾아서 떠났습니다.”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리온은 박제된 인간처럼 굳어 버렸다. 고요한 동공은 크게 벌어진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인간의 마음은 변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신이었다.

“왜 그런 표정입니까? 사랑을 증명받았는데 기쁘지 않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그 여자가 가장 살리고 싶었던 인간은 당신일 겁니다.”

“입 다물어.”

리온은 씹어뱉듯 말했다. 폐부에서 산소가 모조리 빠져나간 듯 호흡이 고통스러웠다. 속이 파도치듯 세차게 울렁거렸다. 베로니카가 ‘그것’을 찾으러 떠났다. 그래, 그런 여자였지.

우습게도 마음 깊숙이에는 그녀가 돌아오리란 희망이 존재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되면 매달리고 빌어서라도 같이 있겠다고. 그녀의 분이 풀리지 않는다면 그 손에 죽여 달라 간청하겠다고.

거품처럼 무의미한 결심은 형태가 잡히기도 전에 터져 버렸다. 베로니카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처음부터 죽기 위해 내디딘 걸음이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혼자 살겠다고 도망친 것이었다면, 고통스러운들 납득은 할 수 있었을 것을.

어떤 마음으로 떠났을지 생각하자 정신이 귀퉁이부터 갉아 먹히는 기분이 들었다. 제 죄까지 짊어지지 말라던 여자는 온 세상의 죄를 끌어안고 침수했다. 겉으로는 웃어도 속으로는 울고 있었을 것이다. 썩어 문드러지는 상처를 앞에 두고도 몰랐다. 눈치채지 못했다. 심장이 짓눌리는 통각에 리온은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이상하게 아직까지 여자를 생각하면 눈물을 흘리는 얼굴부터 눈앞에 그려진다. 바람이 나부끼는 설원에서 흩날리는 검은 머리카락. 희고 가느다란 목. 새빨갛게 올려다보는 선명한 눈동자. 태를 드러내며 달라붙은 얇은 옷까지 보고 나면 어떤 강렬한 욕망이 솟구친다. 그러나 그 욕망의 기원은 알 길이 없어서 이내 그는 뭔가를 느꼈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린다.

예리한 검 끝이 천천히 내려갔다. 리온은 물끄러미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경련하는 검을 보고 필립은 성력이 빠져나가는 증거라 생각했지만 당사자의 생각은 달랐다. 지금 멋대로 움직이고 있는 건 그의 손이 아니라 검이었다.

리온은 절걱대는 검에서 힘을 풀고 바닥에 내려놓았다. 드르륵 움직인 아포칼립시스는 한 방향에서 멈추었다. 검 끝에는 평범한 지하 돌벽이 있었다. 필립이 의아한 시선을 보내는 사이 리온은 일어나 피 묻은 손으로 벽을 훑었다. 회색 돌벽에 그려지던 피는 한 곳에서 우뚝 멈추었다. 그 순간, 벽이 뒤로 물러나며 시커먼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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