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109)화 (109/128)

그날, 바하무트는 신을 얻었다. 인간은 버려졌다. 기억상실이 신이 빠져나간 후유증을 증명하는 셈이었다.

물론 신이 그깟 가짜 일식에 속았을 리는 만무했다. 그에게 바쳐진 의식에 넘어가 준 것에 더 가까우리라.

베로니카는 이를 악물었다.

당신은 이 정체 모를 생명까지도 가엾게 여기시는 건가요? 그럼 대체 저를 보내신 이유는 뭐죠?

깊은 상념은 눈앞의 ‘그것’이 입술을 만개하는 순간 산산이 깨어졌다. 물 너머로 보이는 웃는 얼굴은 제 것인 데다 표정이 어딘가 인간과 달라서 섬뜩했다.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것’은 그녀가 기억을 되찾은 걸 알았는지 목을 조르던 손을 떼어 냈다. 그러곤…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베로니카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 호수의 바닥에 가라앉았다.

왜?

왜? 왜?

머릿속에는 그런 의문만이 가득했다. 묻고 싶어도 물 속이라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공기 없이 꽤 오래 버티고 있다는 자각이 든 것도 그때였다. 마치 바하무트가 된 것처럼. 다른 종류의 공포가 엄습했다.

베로니카는 하얗게 질려서 있는 힘껏 그것의 어깨를 떠밀었다. 몸부림쳐서 아래에서 빠져나온 뒤 급하게 일렁이는 수면을 향해 헤엄쳐 올라갔다. 이번엔 ‘그것’도 다리를 잡아채지 않았다. 불빛이 가까워졌다.

“콜록! 하아…하.”

첨벙거리며 물 위로 얼굴을 내민 베로니카는 서둘러 뭍으로 향했다. 물속에서 그렇게 빨리 움직여 본 건 처음이었다. 몇 번 넘어질 뻔하면서 호숫가에 나오자 떨어진 검이 보였다. 미끄러운 손으로 검을 뽑아서 부들부들 겨냥하고 기다렸다.

죽일 거야. 죽여 버릴 거야.

거센 물소리를 내며 마침내 ‘그것’이 솟구쳤다. 물을 뚝뚝 흘리며 다가오는 여자는 머리칼이 미역처럼 붙어 있었고, 몸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었다. 그리고 얼굴은…, 베로니카는 다짐이 가맣게 스러지는 걸 느꼈다.

제 얼굴을 물 밖에서 다시 보자 검으로 긋기는커녕 팔이 가위에 눌린 듯 꼼짝도 안 했다. 그것은 검이 무섭지 않은 듯 걸어왔다. 찔러 넣으면 이어진 생명도 모두 끊어질 것이다. 공포가 삽시간에 현실로 다가왔다. 죽음을 알고, 또 각오하고 왔는데도 막상 눈앞에 오자 미련하게 무서웠다. 떨렸다. 도망치고 싶었다. 아무것도 못 느끼고 아무 생각도 못 하게 되는 어둠이 실감이 안 났다. 리온이 보고 싶었다.

살고 싶어, 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고개를 쳐든 순간, 베로니카는 이미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이윽고 몸을 돌려 뛰었다.

나약하고 부끄러운 악몽이다. 한심해, 한심해, 한심해!

베로니카는 자살 앞에서 도망쳤다.

새카만 동굴에 발소리가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이름 모를 짐승의 울음 같았다. 앞도 안 보이는데 정신없이 달리다가 바닥이 갑자기 푹 꺼지는 바람에 넘어져서 데굴데굴 굴렀다.

우둘투둘하고 딱딱한 돌 같은 것에 팔다리가 까졌다. 한참 뒤에야 구르기를 멈춘 베로니카는 헉헉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드디어 아까보다 더 큰 달빛 아래 있었다. 주위가 온통 하얬다. 밖에 나왔나 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손바닥 아래서 뭔가 으득, 하며 부서졌다.

고개를 내린 베로니카는 딱딱하게 굳었다.

이빨이었다.

“아, 아아, 아….”

엉덩이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그녀가 앉은 하얀 언덕은 모조리 인간의 뼈로 이루어져 있어서 어디를 가도 똑같았다. 중간중간 해진 옷과 기어 다니는 검은 벌레가 보였다. 소름이 쫙 끼쳤다. 언젠가 환상 속에서 본 적 있는 장소다.

바하무트가 번식하던 은신처. 화장도 매장도 되지 못한 무수한 인간의 무덤.

멀리 어둠 속에서는 붉은 눈이 밤하늘 별처럼 총총히 번득거렸다.

식(食)이라는 건 참 재미있다. 먹을 때는 침을 생성하는 주제에 먹힐 때는 구역질을 유발한다.

베로니카는 든 것도 없는 빈속을 몇 번이고 게워 냈다. 투득 떨어지는 노란 위액 앞으로 하얀 발이 다가왔다.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그것’이 다가와 있었다. 베로니카는 주저앉은 채 자신의 가면을 쓴 괴물을 올려다보았다. 이윽고 ‘그것’이 입을 벌렸다.

“어디, 가?”

베로니카는 숨을 멈췄다.

“너는 나를, 만나러 왔어.”

“…….”

“너는 나를, 안아 주러 왔어.”

“…….”

“가족을.”

“뭐?”

“가족이어서, 나도 살려 줬어. 검도 줬어.”

일순 넋이 나가고 말았다. 베로니카는 떨리는 눈을 내려 제 손에 있는 검을 보았다. 신을 빼낸 직후의 이야기 같았다. 그때 동족이라서 베로니카를 살려 보냈다는 뜻이다. 하지만… 가족이라고? 자신을 안아 주기 위해 온 거 아니냐고?

멍한 머리는 그것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베로니카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그러자 그것이 갑자기 몸을 구부리더니 두 손과 무릎을 땅에 짚고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붉은 눈동자에 베로니카의 얼굴이 비쳤다.

“그럼 뭐야?”

커다랗게 벌어진 눈에 등줄기가 선득해졌다. 그것은 조금도 눈을 깜빡이거나 움직이지 않았다. 굳어 있던 베로니카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는 너는 뭔데?”

돌발적으로 튀어나온 질문이었지만 지난 2년간 온 인류가 궁금해했던 근본적인 의문이기도 했다. 그것은 이해하지 못한 듯 침묵했다.

“어디서 왔냐고 묻는 거야. 네가 ‘뭐’냐고. 바하무트라는 건 인간이 붙여 준 이름일 뿐이잖아.”

“어디서…?”

그것은 멍하니 있다가 뻥 뚫린 천장을 향해 고개를 젖혔다. 인간으론 불가능할 각도까지 젖혀지는 머리를 보며 베로니카는 숨죽인 채 대답을 기다렸다.

“하늘.”

“…하늘?”

“저 위에 우리의 세계가 있었어. 우리는 너희보다 대단했어. 많았어. 발전했어. 그런데….”

“…….”

“다 죽었어.”

베로니카는 내용과 음성 양쪽에 경악했다. 그것의 목소리는 마치 듣고 배우듯 서서히 변해 가고 있었다. 더 가느다랗게. 더 그녀처럼.

“우월한 아이들이 다 죽었어. 같아서 같은 병에 걸렸어. 모두 죽을 수는 없으니 살아남기 위해 보내졌어. 이 땅까지 오는데 너희 시간으로 17년이 걸렸어. 바다에서 물고기를 먹었어. 우리는 먹는 대로 변하는데 물고기는 물 밖에 나가지 못했어. 1년 만에 마침내 바다에 빠진 인간을 먹었어.”

쏟아지는 정보가 베로니카가 아는 사실들과 껴 맞춰지기 시작했다. 바하무트는 20년 전에 이 땅을 발견했고, 3년 전에 운석으로 알려진 채 바다에 추락했으며, 2년 전에 인간을 먹고 땅으로 올라왔다.

원래 살아가던 세계가 동일성 탓에 멸망했다면, 왜 이곳의 생물들을 부러워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지독한 모순이 있었다. 넋이 나가 있던 베로니카는 그것의 말이 멈추자 쉰 목소리로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일단 무슨 소린지는… 대충, 대충 알겠어. 하지만 나를 따라 하면서 그런 말을 해 봤자 설득력이 없어. 달라지고 싶었으면서 왜 내 얼굴과 목소리를 흉내 내는 거야?”

떨리는 목소리에 어쩔 수 없는 두려움이 묻어났다. 그것은 어눌하지만 이제 정말 그녀와 똑같이 말하고 있었다.

꺾인 고개가 천천히 내려온 건 그때였다.

“그날 신 앞에는 아이, 젊은이, 늙은이, 우는 사람, 웃는 사람, 뛰고 소리 지르는 사람 있었어. 그런데 신은 너를 골랐어. 배 안에 있는 잠든 아기, 골랐어.”

20년 전의 광야 이야기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때 그 수많은 인간 중 선택된 베로니카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다시 말해 그녀를 흉내 내 신의 사랑을 받고 싶은 게 분명했다.

베로니카의 눈이 흔들렸다.

“…아냐.”

“아냐?”

“응. 신이 나를 고른 건, 내 얼굴이나 목소리 때문이 아니야. 그곳엔 네 말대로 분명 선한 사람, 부유한 사람, 가난한 사람, 꿈 있는 사람과 지위 높은 사람이 있었겠지. 하지만 그들은 결국 모두 세상의 때가 묻은 인간이었을 거야.”

“세상의 때?”

“그래. ‘죄’ 말이야. 태어난 이상 피할 수 없는.”

베로니카의 눈이 음울하게 빛났다. 신이 제게 깃들었다는 가설을 세웠을 때 이미 한번 고민하고 결론 내린 문제였다.

“그릇이 될 만큼 무구하고 순수한 인간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밖에 없었던 거야.”

그것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완벽히 이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분위기는 여전히 솜털이 바짝 설만큼 기묘했다.

그래, 인간은 더럽혀졌다. 그 죄는 참아 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쩌면 신이 바하무트에게 깃든 것은 그것이 가엾어서가 아니라 부패한 인간을 쓸어버리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후에 카르트는 무너졌다. 셀 수 없이 많은 문명 도시가 붕괴했다. 그렇다면 그 후는? 토끼를 잡는 데 쓰인 개는 사냥이 끝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베로니카는 신이 원한 결말을 알았다. 그래서 슬퍼졌다.

걸어오는 내내 최초와 맞닥뜨리는 상상을 여러 번 했지만 이런 대화는 예상에 없었다.

‘그것’은 호의적이었다. 반기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만큼. 괴기한 표정은 언뜻 외롭게 지내다 친구를 사귄 아이처럼 들떠 보이기도 했다. 제 얼굴이기 때문에 잘 알았다.

“그래서 말인데, 미안해.”

베로니카는 인간이다. 육체는 동화됐어도 정신은 여전히 인간의 편이다. 그렇기에 신은 바하무트를 죽일 인간으로 그녀를 골랐을 것이다. 그녀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주었을 것이다. 그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움직일 테니까.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1)

“실은 우린 가족이 아냐. 나는 바하무트가 아니라, 인간이야.”

베로니카는 그대로 가슴에 검을 내찔렀다. 푹, 살갗이 뚫리는 감각이 손까지 전해지며 검날을 타고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것’의 동공이 심장처럼 크게 부풀었다.

[각주 모음]

1) 마태복음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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