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107)화 (107/128)

볼품없는 시체 앞에서 오래도록 울었다. 눈물이 뺨에 말라붙을 때가 되어서야 베로니카는 간신히 일어나 비척비척 걸었다.

머리가 멍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옆으로 지나가는 거대한 그림자가 머리 위로 드리웠다 사라졌다. 바하무트는 도심으로 모여들고 있어서 베로니카는 흐르는 물살을 거스르는 물고기가 된 기분이었다.

저들의 눈엔 도태된 개체나 돌연변이 정도로 보일까.

가끔 그녀를 돌아보고 냄새 맡는 개체도 있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들은 혼자가 된 그녀를 공격하지 않았다.

베로니카는 무너진 산을 향해 홀로 걸어갔다. 목적지를 묻는 필립 앞에서 ‘최초’가 있을 만한 곳은 블라센 정도라고 대답했었다. 아마 헤매게 되겠지만.

“아.”

넋을 놓고 걷던 것도 잠시, 아니나 다를까 발이 잔해에 걸려 넘어졌다. 트드드, 놓친 검이 바닥에 미끄러지고 무릎이 땅에 부딪혔다. 베로니카는 신음하며 피가 배어 나오는 살갗을 들여다보았다. 신체적 아픔보다 더 괴로운 건 속절없이 들리는 목소리였다.

“이런 빈도로 발이 삐는데 춤은 어떻게 춘 건지 모르겠네.”

리온의 기억이 지나갈 때까지 숨을 참았다. 물속에 들어온 것처럼, 지금 그의 기억을 호흡했다간 아프게 되리란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뒤를 돌아봐선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더 강해져야 한다. 일어나야 한다.

베로니카는 부들거리는 손을 꽉 쥐었다 편 뒤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반쯤 무너졌음에도 웅장한 기세를 풍기는 산이 우뚝 서 있었다.

하늘 높이, 마치 그녀를 응원하듯이.

그곳으로 매 한 마리가 날아갔다.

눈으로 좇고 있는데 드륵 하는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미끄러진 검으로 시선을 내린 베로니카는 처음엔 눈을 의심했다. 방금 검이… 움직인 거야?

“설마….”

검 끄트머리가 햇빛을 반사해 번득였다. 망설이던 베로니카는 검을 잡아 반대 방향으로 놓아 보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후, 한숨을 쉬고 안도와 실망을 동시에 느끼던 것도 잠시, 드르륵, 검이 갑자기 빙글 돌더니 같은 곳을 가리켰다.

등줄기에 소름이 끼쳤다.

도저히 다른 뜻으로는 해석할 수 없었다. 베로니카는 헤네시스를 조심스럽게 주워들었다. 검이 알려 준 방향은 산사태의 진원지로 추측되는 곳이었다. 아찔한 바위 골짜기와 절벽을 지나야만 도달할 수 있는 곳. 성치 못한 다리로 갈 만한 곳은 결코 아니었다. 베로니카도 머리로는 알았다.

머리로는.

간신히 무릎을 일으키자 흰 다리로 피가 한 방울 흘러내렸다. 베로니카는 잠시 후 절뚝절뚝 걷기 시작했다.

아마 한나절은 족히 걸은 것 같다. 해가 동쪽에 떠 있을 때부터 산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목이 몹시 말랐고 예상대로 길은 점점 험난해졌다. 거대한 바위 사이에 다리가 빠져서 큰일 날 뻔한 적도 있었고, 잠깐이라도 딴생각을 하면 금세 발을 잘못 디뎠다. 그때마다 땀을 닦아 내고 다시 일어섰다.

본격적으로 산을 오르자 바하무트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인간보다 큰 바하무트야말로 이런 길은 반드시 기피할 테니까.

“…돌아서 가는 길은 없는 거야?”

베로니카는 깎아 지른 듯한 절벽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헐겁게 쥔 검은 절걱거리며 계속 그쪽을 가리키려고 했다.

세차게 흐르는 물소리가 저 먼 아래서 들려왔고 흉흉한 절벽은 인간보다는 산양이 타기 딱 좋아 보였다. 길이라고 부를 만한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떨어지면 죽음이다. 가기 싫다는 마음이 휴식에 대한 갈망으로 가장해 피어올랐다.

하지만….

휴식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쉬고 나서 다시 일어날 자신이 있는가가 관건이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내려다보던 베로니카는 객관적인 답을 내리고 이를 사리 물었다. 아직 살아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며 젖 먹던 힘까지 끌어모았다.

들고 있던 검을 허리에 단단히 매고 손바닥을 소리 나게 털었다. 절벽에 난 좁은 길을 겨우 찾아 발을 조심스럽게 내디뎠다. 숨이 저절로 멈추고 온 근육이 긴장했다. 게처럼 옆으로 붙어 움직이는 동안 한 발 떼어 놓을 때마다 작은 돌 더미가 부스스 떨어져 내렸다. 바람이 불고 머리칼과 치마가 나부꼈다. 그때마다 잠깐 멈춰서 호흡을 골랐다. 일부러 발아래는 쳐다보지 않았다. 새빨간 노을을 담은 땀방울이 눈으로 흘러들었다.

잠깐 앉아서 쉴 수 있는 벼랑까지 딱 한 발자국, 머리칼이 입술에 거슬리게 달라붙었다. 집중해서 다리를 크게 벌린 순간이었다.

“……!”

쩌적, 불길한 소리가 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베로니카는 저도 모르게 아래를 쳐다보았다. 바보처럼.

방향이 틀렸는데!

머리 위에서 뭔가 무너지는 소리가 나고 우르르 돌 조각이 구르며 쏟아졌다. 머리를 감싸려고 손을 놓았다가 균형이 깨지고 말았다. 몸이 뒤로 쏠리며 쑥 아래로 꺼졌다. 비명이 터졌다.

안 돼!

***

쾅!

“성전 문이 부서집니다!”

“위에선 뭘 하는 거야?”

“바깥에서 기어오른 개체들이 지붕까지 올라간 것 같습니다! 부단장님도 거기 계십니다!”

“제길! 그럼 지하에 있는 병력이라도 불러들여! 미끼로 쓸 말이라도 끌고 오란 말이야!”

새벽부터 이어진 전투는 땅거미가 질 무렵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예배당의 장의자를 마구 쌓아 만든 엄폐물 뒤에서 1층을 지휘하던 기사가 바락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의 말에 대한 대답은 하급 기사가 아니라 거대한 성문에서 돌아왔다. 짐승의 단말마처럼 우지끈, 소리가 나더니 천사가 조각된 성문 중앙에 구멍이 뚫렸다. 초조하게 고함치던 기사마저 숨을 죽이고, 모두의 시선이 뻥 뚫린 날카로운 틈으로 모였다. 그 틈으로 큼지막한 눈동자가 예배당을 들여다본 순간, 펄럭이는 검은 망토가 기사들의 시야를 스쳤다.

엄폐물 뒤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기사들은 놀라서 장의자를 밟고 올라서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전원 지하로 내려가.”

검을 뽑아 든 남자가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잠시지만 모두가 시간이 멈춘 것처럼 굳었다. 리온 베르크가 어깨 너머를 흘긋 돌아보며 말할 때까지.

“제대로 된 농성도 못 해 보고 개죽음당하고 싶어?”

지휘하던 기사의 얼굴에 삽시간에 무수한 감정이 떠올랐다. 기쁨과 안도와 용기와 결단, 그리고 무엇보다 희망.

위쪽에 있을 줄 알았던 리온 베르크가 눈앞에 있었다. 한 구역의 성벽을 홀로 지키고 몇 번이나 기적적인 생존을 이룩한 신의 기사가.

“모두 들었지? 1층은 베르크 경에게 맡기고 전원 납골당으로 내려간다!”

그가 돌아보며 고함쳤다. 판단은 다행히도 구멍으로 들어오는 두꺼운 팔보다 빨랐다. 가죽이 뼈에 들러붙은 마른 팔이 문을 난폭하게 잡아 뜯는 동안 기사들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때 리온이 빠져나가던 금발 기사를 불러세웠다.

“요아힘, 그 이름이 맞나?”

예상치 못한 부름에 요아힘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한 채 멈춰 섰다. 베로니카가 이름을 전해 주겠다 했지만 상급 기사가 직접 호명해 준 건 처음이었기에 무척 놀랐다. 보통은 카이젠미어라는 성만을 기억했다.

“미안한데 부탁 하나만 하지. 위에 올라가서 부단장에게 오기 그만 부리라고 전해. 지상은 포기하라고. 돌과 강철로 둘러싸인 납골당은 잘만 문을 닫아걸어도 제법 오래 생존할 수 있어. 냄새도 소리도 전혀 흘러나가지 않아.”

리온이 말을 마쳤을 때쯤 문이 완전히 뜯겨 나가고 어두운 예배당 안으로 광명이 쏟아졌다. 노을 아래 드러난 리온의 낯은 뭔가를 상실한 인간처럼 비어 있었다. 요아힘은 홀린 듯이 그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리온이 덧붙였다.

“아, 그리고 잊을 뻔했군.”

“…….”

“그때 내 마지막을 신경 써 줘서 고마웠다. 카이젠미어 경.”

지나가듯 건조한 투였다. 그런데도 요아힘은 목덜미가 잡힌 짐승처럼 꼼짝도 못 했다.

1층의 지휘관이 호통치지 않았더라면 요아힘은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을지도 모른다. 울컥 치솟는 감동에 휩싸인 채 요아힘은 뒤돌아 계단을 뛰어올랐다.

한편 리온은 멀어지는 기척을 들으며 감흥 없이 검날을 세웠다. 손안의 검은 오늘따라 이상하게 제멋대로였지만 그깟 작은 변화를 신경 쓸 여력은 이미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감상 자체를 잃어버렸다. 필립을 믿지 않고 대성전을 샅샅이 뒤지는 동안 신경 줄은 모조리 갈려 나갔다.

베로니카가 옆에 없다. 그녀가 사라졌다.

그 사실만으로 목숨은 아깝지 않은 뭔가가 되었다. 죽어도 상관없었다. 무감했다.

느릿느릿 기어든 바하무트가 마침내 뛰어오른 순간, 리온은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흰 광선이 일자로 그어지며 예배당을 절반으로 갈랐다. 질퍽한 소음과 함께 펄떡거리는 살점과 내장이 고깃덩이가 되어 바닥에 나뒹굴었다.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잔혹하고 끔찍한,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주는 그로테스크한 소리에도 리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인간이 되어 가는 바하무트가 목소리를 얻었다 한들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는 그저 베고, 베고, 또 베기를 반복했다.

최면 같은 반복 속에 여자를 생각했다. 그녀가 어디까지 갔을지, 광야에 도달했을지, 자신을 생각하고 있을지.

도망갈 만도 했다. 완전히 미쳐 버린 그는 여기서 죽지 않는다면 동료들을 버리고서라도 그녀를 쫓아갈지도 몰랐다. 버려지고도 미련하게 어미를 찾는 새끼처럼, 아, 그러기엔 이미 늦었던가.

리온은 제가 폭주 상태라는 걸 인지했다. 불꽃은 꺼지기 전에 가장 맹렬히 타오르는 법이다. 그는 여기서 죽는다. 앞으로 다시는 그녀의 웃음을 볼 수 없다. 심장이 갈라져 피가 줄줄 새어 나가는 것 같았다. 밧줄에 목을 맨 듯 호흡이 사라졌다.

너도 그랬겠지. 너도 돌아오지 않는 나를 기다리다 어둠 속에서 아프게 웅크렸겠지.

나는 네 품에서 죽고 싶었다. 감히 그런 생각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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