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앞뒤로 바하무트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황폐한 외곽에 이르렀을 때는 사방에 붉은 눈이 가득해서, 솔직히 밤별이를 데리고 나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이런 사소한 부분까지 인간은 이기적이다. 베로니카는 스스로에게 옅은 혐오감을 느꼈다.
뒤에 바짝 따라붙은 바하무트 하나가 말의 꼬리를 잡아챈 건 그때였다. 가엾은 말은 거의 경기를 일으키며 몸부림쳤고, 두 사람은 바닥에 거칠게 패대기쳐졌다. 뒤에 앉은 오스카가 순간적으로 그녀를 꽉 안고 구르지 않았더라면 크게 다쳤을지도 몰랐다.
빙글빙글 도는 시야 속에서 베로니카는 피와 흙냄새를 맡았다.
“오스카!”
멈추자마자 비명처럼 소리 질렀다. 파문처럼 번져 나간 진동에 슬금슬금 기어들던 바하무트들의 머리와 내장이 터져 나갔다. 힘을 무리하게 쓴 베로니카는 코피를 흘리며 엉금엉금 오스카에게 다가갔다.
가슴을 크게 오르내리던 오스카는 그녀를 보자마자 중얼거렸다.
“버리고 가십시오.”
“뭐라고요?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제가 없으면 이들에게 쫓길 일도 없을 겁니다.”
분명 그럴 거다. 그들은 베로니카를 동족으로 취급하니까.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요. 혼자 살겠다고 친구를 두고 가는 인간이 어딨어요?”
베로니카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그녀를 올려다보던 오스카의 관자놀이가 불룩 튀어나왔다. 비 온 숲 같은 녹안이 슬프게 반짝였다. 베로니카는 사명을 받은 기사처럼 구는 오스카에게 화가 났다.
희생, 그 바보 같은 짓은 자신 하나로 충분했으니까.
“그럼 친구의 아버지를 죽이는 인간은 어디 있습니까.”
오스카가 씹어뱉듯 말한 건 그 순간이었다. 베로니카의 눈에서 영혼이 수그러든 것과 동시에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외면했다.
“우리는 친구가 아닙니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습니다. 당신은 베르크 경이 저지른 실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
“당신은 제가 존경하던 기사를 타락시켰고, 불길한 예언을 내뱉었고, 이제는 나의 아버지까지 죽였습니다.”
한마디 한마디가 심장에 꽂힌 화살처럼 타올랐다. 베로니카는 바닥을 짚은 손가락을 긁어 쥐었다. 젖은 흙이 길게 헤집어지며 손톱에 박혔다.
“…그런 존재를 위해 왜 죽으려고 하는데요?”
“당신이 신의 선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예언을 들은 내 영혼은 알고 있기 때문에.”
거기까지 말한 오스카는 눈을 질끈 감았다.
고통 때문이 아니라 속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게 분명했다. 눈을 마주치는 건 ‘나’를 무방비하게 드러내는 행위다. 사람은 눈만 마주쳐도 책처럼 서로를 읽어 낼 수 있다. 다시 말해 오스카는 지금 진짜 속내를 들키기 싫은 것이었다.
심지 굳은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베로니카는 울컥 치미는 뜨거운 감정에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울분과 슬픔이 절반씩 섞인 감정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지 마요….”
간절하게 부정했다.
“친구가 아니었다고는 말하지 마요. 당신은 내게 진심으로 사과했었잖아요. 그 무렵, 한나 씨나 당신과 함께 보낸 저녁이 나한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었어요. 그때 내게 살아갈 의지를 줬던 건 리온이 아니라 당신들이었다고요.”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바하무트들의 잔해로 주위는 이미 쑥대밭이었다. 그들은 피바다 한가운데를 표류하고 있었다. 무리한 베로니카의 입에서도 한 줄기 피가 새어 나왔다.
“죽지 마요. 제발. 성하께는… 그러려는 의도가 아니었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고개를 떨구고 정신없이 사과했다. 오스카뿐만 아니라 죽은 교황과 벤자민, 광야의 강도에게 사과했다. 그들이 잘못했을지언정 죽어야 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눈을 감은 오스카의 볼에도 한 줄기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입술을 부들부들 떨던 남자가 무어라 입을 열려던 때였다. 무력하게 쓰러진 몸뚱이가 갑자기 아래로 죽 끌려 내려가 사라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베로니카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입을 벌렸다. 넋을 놓은 채 등으로 질질 끌려가는 남자를 눈으로 좇았다. 근처까지 접근했던 바하무트 하나가 발목을 잡고 끌어당겨 그를 무리 한가운데 던졌다. 안돼. 아냐. 아니야.
어떻게든 막아 보려 했지만 대기가 잘 통제되지 않았다. 풍경이 일렁이자 베로니카는 극심한 멀미를 느끼고 땅을 짚은 채 토악질을 했다. 너무 무리했다. 하지만 오스카를, 오스카는.
개미 떼처럼 달려든 바하무트들이 무력하게 붙들린 사냥감을 나눠 뜯기 시작했다. 끔찍하게 파고드는 풍경에 베로니카는 힘이 풀려 무너졌다.
애써 일어나려고 할 때마다 다른 바하무트가 밀치고 지나갔다. 아프게 땅에 부딪힌 베로니카는 부들부들 떨며 절규했다.
“제발… 그만해. 놔줘! 그를 놔 달라고!”
악을 썼지만 신을 잃은 목소리가 그들에게 통할 리 만무했다. 말까지 먹어 치운 그들이지만 붉은 눈의 동족은 방해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건, 한낱 인간의 비명이었던 셈이다. 눈 깜짝할 새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
소리가 멀어진다. 침잠하는 검은 시야 속에서 오스카는 과거를 회상했다. 처음 떠오른 건 수도원 기둥 뒤에 숨은 채 서임식을 훔쳐보던 기억이다. 흰 갑주를 입은 붉은 머리의 남자가 교황 앞에 무릎을 꿇는다.
리온 베르크. 그 시절 그는 오스카의 우상이었다. 아니, 사실대로 정정하자면, 그는 모든 베르크의 자랑이었다.
신의 축복 없이 태어난 아이가 신의 아들로 인정받은 사건은 사람들의 인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수도원에 죽은 듯 박혀 살던 외로운 소년에게도 잠시나마 관심이 쏠렸을 만큼.
“야, 베르크가 성력은 더 많이 타고난다던데, 진짜냐?”
그렇게 물어 오는 귀족 소년들 앞에서 오스카는, ‘신의 창’이라는 분에 넘치는 이름을 부끄러워하며 쭈뼛거렸다. 새하얀 갑옷에 당당하게 신검을 쥔 남자는 오스카가 되고 싶은 꿈 그 자체였다.
“목표? 내가?”
열여덟. 영광스럽게도 그와 맞닥뜨렸다. 당시 오스카가 수행하던 기사는 루이스라는 자작가 태생으로 리온과 제법 가까운 사이였다. 제 어깨를 두른 루이스가 이 자식이 부단장님을 목표로 해요, 하고 말하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술잔을 쥔 리온은 긴장한 오스카를 흥미로운 눈으로 훑었는데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거나하게 취한 하인스 크라우스가 옆에서 낄낄거리던 일만 선명할 뿐이다.
“이봐, 다시 생각해 보라고. 부단장 인생은 별로 권할 바가 못 돼. 무턱대고 따라 걷다가 나중에 막다른 길을 맞닥뜨리고 원망하지 말고.”
돌이켜 보면 그것은 사람의 목소리를 빌린 신의 경고였는지도 모른다. 리온이 걸어간 길을 따라가다 보면 고난을 맞닥뜨리게 되리라는.
“오늘은 제가 대신 당신을 변호하는 기도를 올릴게요.”
열여덟의 오스카가 리온을 만났다면 스물셋의 오스카는 베로니카를 만났다. 인간도 아닌 여자는 그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해 주었다.
“내가 만난 기사 중 가장 신의 아들다웠다는 말 정도면 될까요?”
사랑이 아니다. 이것은 사랑치고는 약하디약한 것. 호감에 가까운 것.
몰아치는 폭우가 사랑이라면 그의 마음은 부슬부슬 안개비만도 못했다.
부족한 마음을 채우는 일마저 어설프게 리온의 발자취를 따른 셈이었다. 그것은 비극이었다. 누군가의 뒤를 쫓는 자는 결코 앞서 걸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신과 교황께 순종적인 오스카는 언제나 어느 정도 베로니카를 경계했다. 그녀는 바하무트였고 오스카는 교황을 배신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늦은 나이에 거두어 준 아버지에게는 언제나 마음의 빚이 존재했다. 전쟁 중에 교황청에만 있으라는 불합리한 명령에도 두말없이 복종했을 정도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교황은 출신이 미천한 그를 특히 아껴 주었다.
감사하고도 괴로운 나날이었다. 팔라딘의 전사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그는 자괴감으로 귀를 막았다. 음침하게 수도원의 그늘에서 자랐던 소년은 커서도 그 그늘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가끔은 옆에 붙들어 두는 아버지가 미웠다. 그러면 아버지를 미워했다는 죄책감 속에서 다시 회개 기도를 올렸다.
회개 기도 후에는 더욱더 충성하고, 자괴감에 빠지고, 악순환이었다. 혼란스러워진 오스카는 마침내 나아갈 길을 신께 갈구하기에 이르렀다. 올바른 길을, 부디 당신의 뜻을 보여 달라고.
기도 후에 올라가는 계단에서 베로니카와 부딪쳤다. 그녀는 그를 보고서도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도망쳤는데, 이윽고 다다른 집무실에서 오스카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머리에 도끼가 찍힌 교황 옆에는 덩치에 맞지 않게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는 사형 집행관들이 있었다.
일의 경위는 들어서 알 수 있었다. 매우 간단한 문제였다. 베로니카가 교황을 살해했다. 하지만 왜?
극도의 충격을 받자 정신은 도리어 침착해졌다. 오스카는 교황의 뜨인 눈이 향한 곳에서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카르트의 역사>
머리를 세게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맨 앞 장을 읽은 오스카는 이것이 의심할 여지 없이 기도의 응답임을 알았다.
집행관들을 죽이고 세 구의 시체에 불을 질렀다. 갈라진 목소리로 축성 기도를 읊었다. 고통스러운 일이었으나 교황청을 벗어나는 오스카의 걸음에는 후회가 없었다. 난생처음으로 리온의 발자취나 교황의 그늘에서 벗어난 자신의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오스카는 온전한 그 자신이 되었고, 신의 창이 되어 그 신념을 지켜 냈다. 그걸로 족하다. 마지막 말을 하지 못하고 바하무트에게 끌려간 일은 어쩌면 신의 자비인지도 모른다.
하마터면 죄가 되는 마음을 발설할 뻔했다. 그녀는 아버지를 죽인 원수인데. 이것은 사랑으로 피어나지 못한 봉오리 같은 감정인데도.
신의 은총 속에서 오스카는 죽어 갔다. 스쳐 가는 주마등의 마지막 풍경은 어느 아늑한 집의 저녁 무렵이었다. 그곳에는 다리를 저는 남자가 있었고, 배가 부른 여자가 있었고, 감싸 주고 싶도록 창백한 여자가 있었다. 그들은 다 함께 웃었다.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