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이상한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딱딱하게 굳었다.
봤나? 들킨 건가? 뭐라고 변명하지?
“비텔스바흐가 술을 보냈어.”
불안에 떨고 있는데 리온이 사이드 테이블에 새로운 술을 내려놓았다. 베로니카는 내적 비명을 질렀다.
약 탈 술을 보내 줄 거였어? 그럼 손발이 맞을 수 있게 미리 귀띔해 주든지!
“잘… 됐네요! 난 새로운 거 마실래요.”
이를 갈며 손을 내뻗자 리온이 눈썹을 찌푸렸다.
“혼자서 한 병을 더 마시겠다고?”
수상해 보일 법도 했다.
그가 그녀의 옆에 선 채 볼에 구부린 손을 갖다 댔다. 얼음을 댄 듯 찬 기운에 베로니카는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손이 차가워요….”
“그게 아니라 한 잔 마시고 네 얼굴이 뜨거워진 거겠지.”
“아니에요!”
“그럼?”
“그…, 좋아하는 사람이 가까이 있을 때도 빨개지니까.”
제가 말해 놓고도 부끄러워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김이 푹 오르는 기분이라 시선을 내리깔자 미치겠네, 라는 낮은 중얼거림이 들렸다. 얼굴 반쪽을 통째로 감싸는 손이 엄청나게 시원했다.
“대체 오늘 왜 이렇게 귀여운 거야?”
“귀여우면 같이 마실래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냅다 약을 탄 술을 들이밀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걸 같이 좋아하고 싶어서 마시는 거란 말이에요.”
횡설수설 이상한 논리였지만 리온은 이번엔 거절하지 않았다. 그가 실소를 흘리다가 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을 떼어 내 술잔을 받아 들었다. 어쩌면 너무 많이 중복된 ‘좋아하는’이라는 말이 그를 꼼짝 못 하게 만든 건지도 몰랐다.
리온은 발갛게 물든 얼굴을 똑바로 내려다보며 단숨에 잔을 비웠다. 베로니카는 입가에서 떨어지는 술잔과 위아래로 움직이는 목울대를 바짝 긴장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마셨다.
성공이다.
탁, 마침내 사이드 테이블에 잔이 놓이는 순간 생각은 끊겼다. 그녀의 등받이를 짚은 남자가 상체를 기울여 그대로 입술을 맞붙였기 때문이다. 아, 부지불식간에 입술이 벌어지고 사이로 뜨거운 침입자가 파고들었다. 축축하게 섞이는 혀에서는 달고 쓴 포도주 맛이 났다. 내밀한 안을 꾹꾹 누르고 노골적으로 들어갔다 빠지는 왕복 행위가 무엇을 암시하는지는 분명했다.
숨이 차서 헐떡거려도 아주 짧은 틈만 주었다가 다시 입술이 뒤엉켰다. 왜 흥분한 남자를 짐승에 비유하는지 알 것 같았다.
서툴게 따라가려 애쓸수록 그가 더욱 흥분하는 게 느껴졌다. 팔걸이를 부서져라 움키고 있던 손은 그가 옷감 위로 그녀를 만지기 시작하자 움찔거리며 힘이 빠져나갔다.
더, 더 세게, 아니, 그만.
리온은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를 안아 들고 침대로 데려갔다. 시트에 등이 닿고서야 입술이 떨어졌다.
숨을 정신없이 고르며 풀린 눈을 떴다. 이제 리온은 그녀의 허리에 매인 매듭을 푸는 중이었다.
“이건 대체 어떻게 되먹은 옷이야?”
그러나 불만에 흘금 내려다본 순간 베로니카는 상황에 맞지 않는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인상을 쓴 남자가 흰 끈을 손에 든 채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드레스의 허리선을 잡아 주는 끈은 말하자면 장식용으로, 풀어 봤자 펑퍼짐한 치마가 될 뿐이었지만 여자 옷을 잘 모르는 리온이 그런 걸 알 리가 없었다.
“벗기려면 등 뒤에 달린 끈을 풀어야 해요.”
“그럼 여기엔 줄이 왜 있는 건데?”
“모든 옷이 실용성만 고려해서 지어지진 않으니까?”
키득거리다가 뒤집어 눕자 리온이 이번엔 작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X자로 등줄기를 따라 죽 이어진 끈을 기억해 낸 베로니카는 이제 거의 숨넘어가게 웃고 있었다. 뭐든 능숙하게 해내는 남자가 고작 얇은 천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게 재밌었다. 사실 찢어 버리면 되는 건데.
“차라리 잘 됐어. 덕분에 집 나간 이성까지 돌아오는군.”
결국 리온이 포기하고 옆에 눕자 베로니카는 킥킥대며 얼굴을 돌렸다.
“안 해요?”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해.”
“끈 풀기가 어려워서?”
“아니. 말했잖아, 더러운 꼴이라고.”
리온이 마른세수를 하곤 천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바하무트의 피로도 모자라 배수도에 내려가서 삽질까지 하다 왔어. 애초에 네 안에 들어갈 생각을 한 내가 비정상이지.”
그가 눌러 참는 것처럼 목울대를 일렁였다. 가만히 천장을 응시하는 눈이 풀려서 색정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물끄러미 보던 베로니카는 장난기가 도진 것처럼 침대를 기어가 아까 그가 그랬듯 그의 위에 올라타 앉았다.
리온은 물끄러미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다듬지도 않은 채 누운 남자는 퇴폐적인 의미에서 아름다웠다. 이렇게 크고 서늘한 남자를 보고 아름다움을 생각하는 건 오늘이 처음 같았다. 그는 불꽃이었다. 가진 것만으로 강한 힘을 얻었다 착각하게 만드는.
베로니카는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그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단정한 눈썹뼈와 오뚝한 콧대, 뺨과 귀와 목덜미까지. 그녀의 손이 닿을 때마다 깔린 몸이 딱딱하게 굳는 게 느껴졌다. 숨결은 거칠어지다가 손길이 하복부에 이르자 오히려 뚝 멎었다. 리온이 시트를 세게 움켜쥐자 핏줄이 단단하게 일어섰다.
“베로니카.”
꽉 잠긴 목소리가 견디기 힘든 듯 그녀를 불렀다. 베로니카가 장난처럼 물었다.
“교황 성하 성함이라도 말해 줄까요?”
“이미 하는 중이야. 네가 내려가지 않는 한 초대 교황 성하가 직접 와도 힘들어.”
“그럼 날 밀어내면 되잖아요.”
리온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더 괴롭혔다간 복수 당할 것 같아서 베로니카는 그의 품에 편하게 안겨 버렸다. 깊은 한숨을 쉬는 게 맞닿은 몸으로 전해져 왔다.
“심장이 엄청 쿵쾅거려요.”
“항상 그래. 네가 주변에 있으면.”
“그럼 나랑 떨어져 있는 편이 더 건강하겠네요. 절제도 더 잘되고.”
갑자기 침묵이 흘렀다.
눈치를 살피다 슬며시 고개를 들자 빙글 시야가 뒤집히더니 순식간에 도로 밑에 깔리고 말았다.
“절제? 네가 없는 사이 내가 어떤 밤을 보냈는지 알면 그런 소린 못 할걸.”
리온이 침대를 짚은 채 그녀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 해소되지 못한 열망이 엿보였다.
“어떻게 보냈는데요?”
“알려 줘?”
무표정한 남자를 보자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순간 망설이는데 그가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원래 인간은 혼자서도 욕구를 해결할 줄 아는 동물이거든.”
베로니카는 숨을 거칠게 들이켰다. 말뜻을 알아듣기란 어렵지 않았다. 그가 혼자서 무엇을 했는지. 맞붙은 하반신이 옷을 사이에 두고 말해 주고 있었으니까.
“하필 이불에 네 체취가 남아 있었어. 하면 안 되는 짓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낮은 음성은 고막을 녹일 듯 다정했다.
“원래 죄란 게 알면서 저질러서 죄인 거잖아?”
아.
베로니카는 결국 참지 못하고 옷자락을 세게 움켜쥐었다. 위에서 쏟아지는 낮은 신음과 거친 숨소리가 몸을 한층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왜 평소에 그가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하는지 이해할 것도 같았다. 고막은 그 자체로 성감대다. 금욕을 버린 남자는 오늘 마귀보다도 더 천박했다. 쾌락의 정점을 문지르는 감각에 베로니카는 허리를 뒤틀었다.
“흑.”
찌릿한 감각이 허리를 타고 목덜미까지 죽 내달렸다. 점점 높은 절벽으로 끌려가다 마침내 꼭대기에 올라선 순간, 낙하하는 강렬한 쾌감이 전신을 덮쳤다.
폭주, 감각의 폭주를 느끼며 버둥거렸다. 귓가에 박히는 욕설마저 감당하기 힘든 자극으로 다가왔다.
뭔가가 아래로 스며 나오는 느낌이 났고 힘이 쫙 빠져나간 무력감 속에서 베로니카는 눈가를 발갛게 물들인 채 헐떡거렸다. 시트를 발꿈치로 구겨댔다. 눈물을 흘렸다. 욕망으로 점철된 신경이 물속에서 실처럼 가느다랗게 풀려 나갔다. 미칠 것 같았다. 아니, 이미 미쳐 버렸는지도 몰라.
인간은 바다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생각했다. 그래서 하나가 될 때만 바다로 돌아가는 모양이라고.
***
“그러고 보니까 투구는 어떻게 찾아온 거예요?”
힘없이 누운 채 질문했다. 물수건의 감촉이 축축하게 아래를 스쳤다. 물이 부족한데도 리온은 생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닦아 주고 싶어 했다. 지금쯤 수면제가 돌아서 피곤할 텐데도,
“네 편지를 가져다줬던 여자한테 부탁했어.”
“아, 요한나의 시녀요?”
리온이 고개를 까딱이고 수건을 내려놓았다. 옆자리에 와서 바로 눕는 걸 보니 확실히 피로한 모양이었다. 실은 베로니카도 노곤한 하루를 보냈지만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잠기운은 싹 달아난 지 오래였다.
“질투해도 돼요?”
“뭐?”
“당신은 거의 숨만 쉬어도 질투하잖아요.”
보란 듯이 한숨을 쉬자 그는 픽 웃고는 그녀를 당겨 안았다.
“해도 상관은 없는데 내일 일어나서 해.”
“내일…? 왜요? 졸려요?”
“응.”
하지만 그들에게 내일 같은 건 없었다. 무엇을 하든 오늘이 마지막이다. 술이든, 질투든, 사랑이든. 목이 꽉 메어 왔지만 베로니카는 순순히 그의 품에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늘은 어제와 같아야 했다. 수상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아야 했다.
“응. 그럴게요.”
베로니카가 입을 다물자 세상은 금세 고요해졌다. 귓가에 울리는 규칙적인 숨소리를 듣다가 가만히 속도를 맞춰서 호흡해 봤다. 사실은 그때 죽었어야 했는데. 당신의 숨을 빌려 오래도록 살아남았다. 이제 돌려줄 때였다.
“리온.”
“…….”
“그날 나를 구해 줘서 고마웠어요.”
“…….”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사실 그날 이후로 꽤 달라졌어요. 처음으로 태어나길 잘했다고도 생각했고, 이제 사람들을 도울 줄도 알아요. 나는, 정말로 그 잿더미에서 다시 태어났는지도 몰라요.”
대답은 예상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외로운 침묵 속에서 베로니카는 마지막 말을 하기 위해 입을 벌렸다. 오로지 한 사람만을 위해 준비된, 다른 사람은 아무도 듣지 못할 그 말을.
입술이 움직이고 눈물이 반짝거리며 흘러내렸다.
사랑을 내주니 마음이 텅 비었다. 사람들은 이 공허함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가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