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103)화 (103/128)

어른들이 그러는데 고양이는 죽을 때를 안대요.

그래서 죽음이 다가오면 스스로 집을 떠나 몸을 숨기는 거라고요.

그런데 정말 고양이가 죽음이 뭔지 알까요? 그건 그냥 인간의 생각 아닐까요?

제가 직접 길러 본 바로 고양이는 아플 때마다 숨던걸요. 나을 방법은 모르는데 무서우니까.

그것은 제가 약해졌을 때 닥쳐올 위험을 두려워해요. 미지의 천적에게서 숨고자 어두운 곳에 머리를 처박아요.

그러니까 인간들이 어떤 고귀한 이유를 갖다 붙여도 소용이 없어요. 단지 다가올 죽음이 견딜 수 없이 아팠던 게 다니까.

***

리온은 그녀를 빈방에 데려다주었다. 그러곤 배수도를 막는 일을 도우러 잠깐 자리를 비웠다. 혼자 남은 베로니카는 투구를 끌어안고 지저분한 방의 카펫 한가운데에 드러누웠다. 폭풍우가 몰아치고 지나간 듯 방은 가구부터 시트 한 장까지 온통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퉁, 퉁.

차가운 강철을 두드릴 때마다 속삭임이 귓가에 되살아났다. 가슴이 벅차면서 커다랗게 부풀었다. 커지고 커지다 마침내 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나올까 걱정될 정도로.

“…아파.”

뚝 소리를 멈춘 손길은 이내 왼쪽 가슴으로 향했다. 너무 아파서 가슴을 꽉 쥐고 몸을 웅크렸다. 투구가 바닥에 데구루루 굴러갔다.

차라리 고백을 듣고 나면 미련이 없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렇게 무거운 마음을 안고 어떻게 떠날지 아득했다.

리온을 생각하는 일은 자해와도 같다. 그를 알게 된 이후로는 늘 그랬다. 주어진 것 이상을 바라게 되니까. 죽어야 하는 걸 알면서도 살고 싶어지니까.

“살고….”

목구멍에서 쥐어 짜낸 것처럼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베로니카는 의식의 흐름을 느끼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살고 싶다.

눈물이 뿌옇게 차올랐다. 억울함을 누르기 위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읏….”

적색 카펫이 동그랗게 물들었다. 툭, 투득, 숨죽여 울던 베로니카는 눈물이 멈출 것 같지 않자 결국 억지로 팔을 들어 슥슥 문질렀다. 주저앉아 우는 걸로는 무엇도 해결할 수 없었다. 약해지지 말자. 어깨가 솟을 정도로 숨을 크게 들이쉰 베로니카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현기증으로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돌아왔다.

비척비척 걸어간 베로니카는 단단히 닫힌 커튼을 슬며시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광장에는 바하무트들이 돌아다니고 도시 여기저기서는 여전히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거리에 개미 한 마리 남지 않게 되면 바하무트는 그때부터 집 하나하나를 공략할 것이다.

아무리 마지막 저항을 할 지하 납골당이 있다 해도 대성전은 오래 버티지 못하겠지.

“그러니까 정신 차려. 살아 있는 사람들이라도 구해야 해.”

일부러 소리 내어 말하며 커튼을 쳤다. 리온이 잠깐 자리를 비운 지금, 해야 할 일은 자명했다.

성전 문을 열고 협조해 줄 사람을 찾아야 한다.

뭐, 처음부터 사람은 정해져 있었으니 물색할 필요도 없었지만.

“그래서 베르크 경도 모르게 날 찾아온 이유가 도주 때문이라는 겁니까?”

책상에 걸터 선 필립이 퀭한 눈을 떴다. 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눈을 감고 있던 남자는 건조한 얼굴이었다.

동요 한 방울 없는 얼굴에 베로니카는 당황했다. 전쟁에서 이길 가능성을 털어놨는데. 이토록 무감한 반응이라니. 잠들었던 건가 하는 합당한 추론까지 간 순간 필립이 품에 손을 넣었다. 다시 나온 엄지와 집게손가락 사이에는 작은 유리병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한 방울을 넣으면 불면증을 치료하고, 두 방울을 넣으면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에 빠지며, 세 방울을 넣으면 잠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약물입니다. 시중에는 꿈의 물방울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들어 봤습니까?”

고개를 가로젓자 그가 유리병을 가볍게 던졌다. 베로니카는 호선을 그리며 날아온 병을 엉겁결에 잡아 채고는 손바닥만 한 투명한 액체를 내려다보았다.

“포도주에 타서 재우십시오.”

“네?”

“오늘 밤 문을 지키는 기사들에게 귀띔해 두겠습니다.”

깔끔했다. 베로니카가 가만히 서 있자 그가 눈두덩을 꾹꾹 누르다가 흘끗 보았다.

“더 할 말 있습니까?”

“…아니요.”

“그럼 이만 돌아가 보십시오. 베르크 경의 의처증 증세를 고려했을 때 지금쯤 다른 방까지 헤집고 있을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예상과 다른 전개였다. 필립은 최초의 바하무트가 실재하는지 따위는 따지지도 않았다. 신검을 뺏길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리지도 않았다.

그녀를 믿어서가 아니었다. 그만큼 궁지에 몰렸기 때문이다. 지금은 가능한 모든 패를 다 동원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게 설령 제가 전쟁을 끝낼 수 있다 주장하는 동화자라 할지라도.

생각에 잠겨 유리병을 보던 베로니카는 결심한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가기 전에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방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필립과 눈이 마주쳤다. 베로니카는 말했다.

“리온이 나중에라도 절 따라오지 못하게 해 주세요. 제가 성공해서, 바하무트가 모두 사라질 때까지. 제가 죽을 때까지요.”

***

벌컥, 손잡이를 잡지도 않았는데 문이 저절로 열렸다. 서둘러 유리병을 소매 안에 감추자 나오던 리온이 우뚝 멈춰 섰다.

“어딜 갔었어?”

“그냥 답답해서 한 바퀴 둘러보고 왔어요.”

고개로 스윽 둘러보는 시늉을 한 베로니카는 그가 뭐라고 더 말하기도 전에 와락 품에 파고들었다.

리온은 놀라는 것 같다가 이내 파묻히는 기분이 들도록 꽉 안아 주었다. 등 뒤로 다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흉갑을 벗은 상태라 두꺼운 몸 선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의 품에 코를 박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서늘한 체취와 섞인 땀 냄새, 쇠 비린내.

“뭐 해?”

“냄새 맡아요.”

웅얼거리자 리온은 드물게도 약간 당황한 것 같았다.

“아직 씻지도 못했어. 식수만으로 물이 모자라서.”

“괜찮아요. 당신 냄새가 좋은 거니까.”

고개를 빼꼼 올리고 눈을 휘자 떼어 내려던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왜 예전엔 몰랐을까. 제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지진처럼 반응하는 남자인데.

그가 그녀의 웃음을 가만히 보다가 머리칼을 쓸어 주며 물었다.

“배는 안 고파?”

다행히 어디에 갔었는지는 더 캐물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베로니카는 생글거리며 속삭였다.

“조금요. 아니다, 목이 더 마르긴 한데.”

실은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았다. 다만 소매 안에 있는 약물을 넣을 곳이 필요했다. 예상대로 리온은 곧바로 그녀를 방 안으로 이끌었다.

“귀리에 물을 말아서 불린 죽이 있어. 맛은 없겠지만 그거라도 먹어 둬. 어제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폭풍이 지나간 듯 난장판이었던 방은 리온이 대충 정리한 것 같았다. 모서리가 부서진 사이드 테이블 앞에 앉자 희멀건 죽이 보였다. 사실 죽이라기엔 제대로 불을 가해 만든 요리도 아니었다.

“군 창고의 식량만 더해져도 상황이 한결 나아질 거야. 오늘만 참아.”

“응, 괜찮아요. 반찬 투정 안 해요. 어린애도 아니고.”

어린애에 방점을 찍자 리온이 픽 웃었다. 옛날 생각이 난 것이리라. 베로니카는 마주 웃다가 숟가락을 들었다. 언제나 그렇듯 리온은 음식을 마시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빨리 먹었고 베로니카는 억지로 죽을 욱여넣었다.

일찍 식사를 마친 남자는 그 모습을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사랑스러운 것을 보듯 관찰했다. 살아 있는 생물이라면 모두가 해야 하는 행위인데 덕분에 뭔가 굉장한 일을 하고 있는 기분마저 들었다.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춤을 추면서 무수한 주목과 관심을 받아도 채워지지 않던 마음이 한 사람의 시선만으로 풍성해졌다. 가엾게 말랐던 달이 보름을 맞이해 가득 차올랐다.

“저건 안 마셔요?”

베로니카는 그의 눈길에 민망해하는 척 사이드 테이블의 포도주를 눈짓했다. 리온은 그녀를 따라 포도주 병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별로 안 내켜.”

예상 못 한 전개에 베로니카는 당황했다.

음식에 넣기엔 이미 늦었고 술은 안 내킨다니. 곤란했다.

“그럼 내가 마셔도 돼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리온이 눈썹을 까딱했다.

“술 안 마시잖아, 너.”

“그래서 오늘 한번 시도해 보려고요. 물을 마셨는데도 아직 목이 말라서요.”

보란 듯이 입술을 축이자 리온이 잠깐 나왔다 사라진 붉은 혀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말이 씨가 된다고 정말로 입 안과 목이 바싹바싹 말라 왔다. 고개를 슬쩍 기울인 남자가 수상함을 눈치챈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한 모금 마셔 보고 아닌 것 같으면 바로 버려.”

마침내 리온이 기대 젖히고 있던 등을 바로 세우며 포도주 병을 집어 들었다.

그가 술잔에 검보라빛 액체를 따르는 동안 베로니카는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이제 뭘 어떻게 하지.

저 술에 약을 타야 한다는 것까진 알겠는데 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바로 앞에서 지켜보는 상황에서 어떻게 수작을 부린단 말인가. 생각에 잠긴 사이 눈앞에는 이미 독극물처럼 생긴 술이 내밀어져 있었다. 망설이다 받아서 홀짝홀짝 마셨다. 첫맛이 쓰고 끝맛이 단 술이었다. 리온은 의자 팔걸이에 턱을 괸 채 그녀를 바라봤다.

“…맛있네요. 한 잔 더 주세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빈 잔을 패기 있게 내밀자 리온의 눈이 커졌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이러다 취하기만 하는 거 아냐?

“무리하지 마.”

그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술을 채워 주며 말했다. 어쩔 수 없이 두 번째 잔을 입가에 댔을 때, 바깥에서 구원 같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리온이 흘긋 시선을 들었다가 일어났고 베로니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소매에서 유리병을 꺼냈다.

한 방울, 두 방울. 뚜껑을 닫고 넣었다. 이제 이 술을 리온에게 먹이기만 하면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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