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102)화 (102/128)

흑마는 그대로 중앙로를 내달렸다.

카르트 대성전으로 이어지는 길목이었다. 시체가 쌓인 처참한 언덕을 오르면서 베로니카는 카르트에 처음 왔던 때를 떠올렸다.

우뚝 솟아 아름답던 종탑과 분수대는 무너진 지 오래였고 작은 다리는 끊겨 있었다. 곳곳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새파랗던 겨울 강에서는 피가 고여 썩는 냄새가 났다.

차마 더는 볼 수 없어 시선을 떨궜다. 무심코 흔들리던 눈길은 리온의 왼손에 머물렀다. 정확히는 그가 들고 있는… 투구에.

베로니카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그래. 그건 고작 투구였다. 리온이 막사에 찾으러 간 물건.

탄비아산 강철이 분명한 투구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제품이었다. 어느 대장장이의 유작이자 그에게 줬던 유일한 선물이기에 그녀가 제일 잘 알았다. 비록 마지막에 본 곳은 요한나의 방이었지만.

어긋났던 톱니가 제자리를 찾듯 안에서 철컥 맞춰지는 소리가 났다.

바보처럼. 이제 와서 그게 뭐라고.

피가 안 통할 때처럼 손발이 저려 왔다. 베로니카는 갈기를 꽉 쥐어 간신히 현실감을 되찾았다. 이를 사리물고 정면을 보자 그즈음엔 핏자국이 번진 광장을 지나고 있었다.

대성전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는데 리온은 가속을 줄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빠르게 달렸다. 베로니카는 흘긋 뒤쪽을 돌아보았다. 수십 마리 바하무트가 따라붙은 상태였다.

뭘 어떻게 하려는 거지. 막사와 달리 대성전의 문은 말발굽 정도로는 부서지지 않을 텐데.

“꽉 잡아. 마지막이야.”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스친 건 그때였다. 다그닥다그닥 더는 고삐를 잡아 해결할 수 없는 수준까지 왔을 때.

말이 수십 개의 계단을 뛰어넘었다.

몸이 붕 뜨며 성전의 문이 기기긱 양옆으로 묵직하게 열렸다. 딱 말 한 마리가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밤별이는 그 짐승의 아가리 같은 틈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뒤에 쫓아오던 바하무트들은 대성전 지붕에서 쏟아진 창에 맞아 바닥에 내리꽂혔다.

열두 사도의 조각상이 지붕에 서 있어 마치 그들이 도와준 것처럼 느껴졌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문은 양옆으로 단단히 닫혔다.

쿵.

나아가던 힘에 의해 붉은 카펫을 한참 더 내달리고서야 밤별이는 제단 바로 앞에서 앞다리를 들어 올리며 간신히 멈춰 섰다.

“전원 심장에 적중해 사살했습니다!”

계단 위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말이 진정하지 못하고 한자리에서 뱅글뱅글 돌자 예배당의 풍경도 같이 회전했다. 장의자가 있었던 자리에는 식량 더미가, 또 한편에는 말들이 모여 서 있었다. 대성전은 기사단의 임시 집결소가 된 것 같았다. 스테인드글라스에는 모두 커튼이 쳐졌다.

그제야 리온이 멈추지 않았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는 닫힌 문만 보고도 기사단의 존재를 확신한 거였다. 말하자면 건물 위에서 망을 보고 있을 동료들을 믿은 셈이었다.

“생각보다 늦었군요. 새벽에는 왔어야 할 사람이 아침까지 오지 않아 의아해하던 참입니다.”

리온이 내리자 계단 위에 선 필립이 입을 뗐다. 베로니카는 동굴처럼 울리는 ‘새벽’이란 단어에 움찔했다. 확실히 그녀를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리온은 이곳에 더 일찍 도착했을지도 모른다.

“22구역 군 창고에 들렀다 오는 길이야. 식량은 가능한 만큼 가져왔지만 삼 개월은 넉넉히 버틸 양이 아직 더 남아 있더군.”

“수고했습니다. 남은 건 사람을 시켜 가져올 겁니다. 그 외에 보고할 사항이 또 있습니까?”

리온은 고개를 저었다. 필립은 사무적인 태도로 돌아섰다.

“그럼 자세한 전황은 크라우스 경에게 들으십시오. 신검이 두 자루 다 무사히 돌아와 다행입니다. 사기 진작에 도움이 될 겁니다.”

필립은 인사차 묵례하고 계단을 올라갔다. 여러모로 바빠 보였다. 리온은 그제야 베로니카를 바닥에 내려 주었다.

토벌 때 한번 본 적 있는 대머리 기사가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 상황을 설명했다. 침입 가능성이 있는 지하 수로를 막고 있다는 얘기, 위층에서 도시의 피해 상황과 전략을 점검 중인 부단장과 참모 기사 등등.

그동안 베로니카는 눈치껏 고삐를 잡고 밤별이를 말들이 서 있는 쪽으로 이끌었다.

“오늘도 무사히 데려다줘서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커다란 말의 머리를 겁도 없이 끌어안았다. 몽글몽글한 마음이 전해졌는지 밤별이는 얌전히 까만 눈만 끔벅였다. 베로니카는 망설이다 미간을 쓸며 덧붙였다.

“어쩌면 조만간 또 네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지만… 그땐 아마 나 혼자일 거야. 그래도 태워 줄래?”

말의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금방 대답이 돌아오기라도 할 것처럼.

귀를 쫑긋거리던 밤별이가 갑자기 머리를 돌린 건 그때였다. 덩달아 시선을 움직인 베로니카는 홱 돌아서 급하게 계단 위로 사라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았다. 중키에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 오스카다.

…설마 피한 건가?

왜?

교황청에서 부딪혔던 일이 생각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때였다.

“뭘 보고 있어?”

갑자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 깜짝 놀랐다. 돌아보니 어느새 대화를 마친 리온이 서 있었다. 그가 계단과 그녀를 천천히 번갈아 살폈다.

“아, 그냥… 누굴 본 것 같아서요.”

차마 오스카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리온은 그 이름에 특히 예민했다. 게다가 빤히 내려다보는 시선은 뭔가를 아는 것처럼 묘하게 서늘했다. 그가 그녀의 안색을 훑다가 팔을 뻗었다.

“일단 위층에 데려다줄 테니까 쉬고 있어. 여긴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길목이니까.”

잡으려는 손 앞에서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멈칫 굳은 리온과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차올랐다. 베로니카는 당황해서 눈을 깜빡거리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괜찮아요. 내가 알아서 움직일게요. 여기서까지 손을 잡거나 안아 줄 필요는 없어요.”

리온은 그대로 시선을 내려 제 빈손을 내려다보았다. 상처를 준 걸까.

그가 만지는 게 싫어서 피한 건 절대로 아니었다. 다만 이쪽을 흘금거리는 기사들이 신경 쓰였다. 리온이 아무리 탕아 취급을 받는대도 전쟁판에서 여자와 붙어 다니는 그림이 좋게 보일 리 없었다.

“다른 기사들이 당신을 나쁘게 생각할까 봐 그러는 것뿐이에요. 끝까지 당신과 함께 지낼 사람들이니까.”

등을 맡길 사람들인데 자신 때문에 손가락질당하는 게 싫었다. 굳이 여기까지 함께 온 건 리온이 동료들 곁에 있는 모습을 보고 가고 싶었던 탓이 컸다. 그 정도는 바라도 될 것 같았다. 전 세계에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이기적이고 철없는 소망이지만. 그래도, 마지막이니까.

“너는?”

손을 내린 리온이 낮게 물은 건 그때였다.

“네?”

“넌 꼭 끝까지 내 옆에 있지 않을 것처럼 들리는데.”

리온이 농담이라도 하듯 픽 웃었다. 그러나 입매와 달리 눈가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베로니카는 주춤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물론 나도 가능한 한 오래 옆에 있겠지만, 나랑은 다르잖아요.”

“뭐가?”

“저 사람들은 신호 하나 없이도 당신에게 문을 열어 줬던 동료들이에요. 당신이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이요.”

“그리고 넌 인생의 끝에서 만난 가족이지.”

거침없는 발언에 말문이 턱 막혔다.

일주일 전에 제가 했던 말이 발목을 잡았다. 리온은 당황한 그녀를 보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또 뭐라고 했더라. ‘아무 데도 안 가고 끝까지 카르트에 남을’ 거라고 했던가.”

분명 그랬다. 붕괴할 것 같은 남자를 지탱하기 위해 그에게 구원의 말을 건넸다. 그때는 그 불안한 온기가 이토록 짧게 지속할 줄을 몰랐다. 적어도 그가 다시 일어설 때까지는 도움이 될 줄 알았다.

“거짓말로 똑같이 갚아 주려는 목적이면 그만해. 지난 일주일간 충분히 고생했거든.”

리온이 고요히 뇌까렸다.

“잠도 오지 않을 만큼 추웠어. 네가 없는 시간 내내.”

한 발자국, 보폭이 다른 그가 그녀가 멀어진 거리보다 훨씬 가까이 다가왔다.

자연스레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어둠에 잡아먹히는 기분이었다. 나직한 말소리가 남에게 새어 나가지 않을 정도로 가까웠다.

“들려오는 이야기론 넌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았어. 다행이다 싶다가도 미친놈처럼 비뚤어진 생각이 치밀곤 했지. 어떻게 넌 잘 지낼 수 있는 건가 하고.”

“지난 일주일은 워낙 주변에서 잘 챙겨 줘서, 오스카도 그렇고 요아힘도.”

“그게 싫어.”

멍하니 고개를 젖혀 올려다보았다. 위험할 정도로 솔직하다. 어딘가 비틀린 남자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다른 놈들 얘기가 듣기 싫어, 베로니카. 네가 나 없이도 잘 지낸다는 사실이 지독하게 거슬려. 창백하게 질려서 달려온 널 보고 저열한 안도까지 느꼈을 정도로.”

“…….”

“그 정도로 제정신이 아냐. 그러니까 사라질 것처럼 굴지 마.”

리온은 돌려 말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 안에서 얼마나 커졌는지를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표현했다. 그녀가 그의 숨이라도 되는 듯이 말했다. 사라지면 죽는 수밖에 없다는 듯이. 똑바로 부딪혀 오는 태도에 심장이 아프게 뛰었다.

말끝에 그가 들고 있던 투구를 그녀에게 씌워 주었다. 한 사람만 담길 정도로 좁아진 시야 속에서 베로니카가 중얼거렸다.

“왜 이걸 나한테….”

“안 죽어. 저번에 말했잖아. 해야 할 말도 있고 전해 줄 것도 있다고.”

죽다 살아난 그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베로니카는 말을 뚝 멈추고 투구를 더듬거렸다.

투구는 그녀가 그에게 전했던 최초의 마음이었다. 그렇다면 리온이 하고 싶은 말은….

허리를 숙인 남자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입술을 움직였다. 베로니카의 눈이 점점 커졌다.

왜 투구를 씌워 줬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지 않았다면, 새빨개진 얼굴만으로 사람들은 당신이 내게 속삭인 밀어를 눈치채고 말았을 테니까.

심장이 따끔거렸다. 아프게 긁힌 상처처럼.

뜯어보면 분명 흉이 남았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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