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판자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그들은 한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다. 서로를 안고, 맹목적이리만치 고요하게.
어떤 완벽한 순간에는 말이 필요치 않다. 물에 잠긴 것처럼 심장이 울렁거렸다.
“내가 무섭진 않아요?”
마침내 숨 쉬는 속도가 같아졌을 때, 베로니카는 그렇게 물었다. 심해 같은 공간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오늘 내 의지와 상관없이 사람을 죽였어요. 내 옷에 묻어 있는 피도, 바하무트의 것이 아니라 교황 성하의 피예요.”
실은 계속해서 마음을 괴롭혔던 부분이다. 피 묻은 흰옷을 검은 망토로 감춘 지금, 리온은 정말로 교황의 죽음에는 연연하지 않고 있을까. 대부분의 기사가 교황을 아버지처럼 여기며 자란다고 했다. 가족 없이 큰 리온에게 그가 어떤 의미였을지 신경 쓰였다.
리온은 한참을 침묵하다 시선을 내려 망토를 바라보았다. 그 너머의 피가 보이기라도 하듯 집요하게. 그는 그녀의 예상대로 죽은 교황을 깎아내리거나 살인을 정당화하지는 않았다. 다만 속삭였다.
“그렇게 따지면 무서워해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너 같은데.”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내가 그동안 사람을 몇이나 죽였을 줄 알고?”
그렇게 묻는 입술이 일그러져 슬펐다. 오만이나 잔인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베로니카는 굳은 채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저 새끼 정체는 똑바로 알고 밤마다 빨아 주나? 응? 그 빌어먹을 바하무트가 올라오기 전까지 저 새끼는 성전(聖戰)이다 뭐다 해서 우리를 죄 죽이고 다니던 살인마 새끼였어.”
처음 만났을 때 봤던 냉정한 남자를 떠올렸다. 희생을 강요하던 잔혹한 눈빛.
하지만 그가 온전히 잔인한 인간이었더라면 죄책감에서 도망칠 필요는 없었으리라. 가면을 뒤집어쓰고 태연을 가장할 이유도, 슬픔을 느끼지 않기 위해 감정을 잘라 낼 일도.
“모르겠어요. 내가 들은 건 달랐거든요.”
고개를 가로젓자 리온은 무슨 소리냐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베로니카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내가 아는 리온 베르크는 홀로 루에가의 적진에 숨어들었다는 영웅이에요. 적장의 목을 베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변방 도시의 피해를 막아 낸 사람이요.”
“…….”
“첩자를 잔인하게 죽이기로 악명 높지만 그건 앞으로의 배신을 막기 위해서라고 들었어요. 귀족들의 휴양지 하센을 지키지 못했다고 비난을 산 적도 있지만 사실 그건 다른 경로에 있는 검은 숲을 지키려고 했던 거겠죠. 카이젠미어에서 가장 큰 숲인 슈바르츠발트에는 세상의 모든 하찮은 생명들이 모여 사니까.”
평민 출신 팔라딘에 대해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바하무트조차 붉은 기사를 안다는 말은 괜히 나온 얘기가 아니다. 그는 평민들의 자랑거리였다. 그녀도 그의 인생을 잘 알았다.
“항상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서 필요악을 골랐다는 걸 알아요. 그게 당신 방식이죠. 그러니까 나와는 경우가 달라요.”
재난을 막기 위한 필요악. 문득 그게 제게도 적용되었단 생각이 들어 말끝에 설핏 실소를 흘렸다. 리온은 영혼을 빼앗긴 듯 그녀의 입술을 응시했다.
“내게 거짓말한 이유도 이제는 이해해요. 솔직히 나라도 그랬을 것 같거든요. 한 명을 속이는 걸로 전 세계를 구할 수 있다면, 누가 바보처럼 한 사람을 고르겠어요?”
알고 있다. 제가 떠나고 나면 그는 버려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울어 줄 인간도 없이 죄책감에 몸부림칠 그를 그리면 하염없이 서글퍼졌다. 발이 떨어질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베로니카는 제 심장에 꽂혔던 칼을 꺼내 보여 주었다. 이제 괜찮다고. 나는 괜찮으니 편해지라고.
“그러니까 그만 미안해해도 돼요. 용서할 테니까.”
“베로니카.”
“자유로워져요.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진심을 가득 담아 웃어 보였다. 그의 눈이 불꽃처럼 흔들렸다. 리온은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가 의미 없이 닫았다.
그러다 베로니카가 떨어지려 하자 낚아채듯 손목을 붙들어 당기며 서늘한 시선을 들어 올렸다. 마치 사라질 환상을 움키듯 형형한 눈동자로 서슴없이 파헤쳤다. 매료될 만큼 강렬한 인상 속에 조급함이 엿보였다.
“싫다면?”
그가 낮게 물었다.
“내가 죄를 끌어안고 바다 끝까지 가라앉고 싶다면?”
가느다란 팔을 당긴 그가 제 목을 감게 했다. 몸이 바싹 밀착하며 자연스럽게 고개가 젖혀졌다. 딱딱한 갑옷에 허리와 가슴이 짓눌리는데도 느끼지 못한 채 숨을 죽이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리온은 뭔가를 예감한 사람처럼 새기듯 속삭였다.
“용서하지도 말고 족쇄를 풀어 주지도 마. 내가 질식해 죽을 때까지 옆에 있어.”
가까이서 섞이는 폭력적인 호흡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일부러 대답하지 않자 리온이 입을 열려는 듯 엄지로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짓눌렀다. 베로니카는 색색 불규칙한 숨을 쉬었다. 이미 알고 있는 쾌락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몸이 뜨거워졌다. 마주치고 있던 눈이 콧대를 타고 흘러내리는 걸 느꼈다. 분홍색 점막이 발갛게 드러나자 남자의 곧은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하고 싶어요?”
베로니카가 쉰 소리로 물었다. 눌린 입술 때문에 발음이 불분명했다.
“그럴 리가.”
새빨간 거짓말.
“이렇게 더러운 꼴로 널 어떻게 안아?”
바람이 비릿한 피 내음을 실어 왔다. 머리칼은 가볍게 흔들리는데 그의 눈동자는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말로 돌리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베로니카는 그가 대답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았다.
“나는….”
끝끝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떠나야만 하니까. 그를 풀어 주지 않고선 떠날 수 없으니까.
결국 입을 다물자 리온의 눈에서 광휘가 사라졌다. 눈보라가 멎어 새까매진 밤처럼.
리온이 손을 천천히 떼어 내자 바람이 뺨을 스쳤다. 베로니카는 숨을 가다듬으며 표정이 사라진 남자의 얼굴을 슬프게 올려다보았다. 흩날리는 머리칼이 거슬리는지 머리를 두어 번 쓸어 넘긴 리온은 목에 핏대가 서 있었다. 뭔가를 눌러 참듯 그의 목울대가 거칠게 움직였다.
“밖에 소리가 줄었어. 슬슬 가자.”
그가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옆에 내려 주고 일어나 손을 내미는 리온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떠나는 게 아니라 도망쳐야 한다. 그는 잡은 손을 먼저 놓는 인간이 아니다.
***
삐걱 열린 문틈 사이로 긴장감이 새어 들었다. 숨죽인 베로니카는 바깥을 살피며 질문했다.
“어디로 갈 거예요?”
“일단은 막사로 갈 거야.”
“군영 더 깊숙이로 들어간다고요? 왜요?”
의외의 대답에 놀라서 되물었다. 아까 엿들은 기사들의 대화가 있으니 당연히 교회라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
“두고 온 것도 있고 군영을 뒤져야 살아 있는 군마를 한 마리라도 건질 수 있어. 원래는 혼자 다녀오려고 했지만,”
리온은 그녀에게 돌려받은 망토를 걸치며 말을 맺었다.
“이상하게 떨어지기 싫어서.”
“날 진짜 좋아하나 봐요.”
“말해야 알아?”
“네. 그래서 아직 모르잖아요.”
멈칫한 리온이 고개를 내렸다. 옆얼굴로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면서도 베로니카는 돌아보지 않았다.
널브러진 시체들을 살피다가 이내 동화자에 집중했다. 바하무트의 명령에 따르는 그들은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움직일 것이다. 인간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에 입 안이 버석하게 말랐다.
“힘들면 굳이 상대할 거 없어.”
뒤에서 검날이 뽑히는 새된 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베로니카는 가만히 생각하다 인상을 찌푸렸다.
“버릇이에요?”
“뭐가?”
“혼자서 죄책감이란 죄책감은 다 뒤집어쓰려고 하는 거. 아셀도르프에서 나올 때도 그랬잖아요. 도망가자고 한 건 당신이니까 나는 아무 책임도 없다고.”
그렇게 말하며 베로니카는 문을 발로 가볍게 밀었다. 삐거덕 경첩이 울자 비척거리며 지나다니던 동화자들이 하나둘씩 이쪽을 돌아보았다.
“내 죄까지 훔쳐 가려고 하지 마요. 이건 내 몫이에요.”
동의하듯 헤네시스가 예리한 마찰음을 냈다. 베로니카는 크게 어깻숨을 쉬었다. 뛰어야 할 다리에 힘을 주었다.
죽이고, 죽이고, 죽인 뒤에 달렸다.
숨이 차고 폐부가 아픔을 호소했다. 불씨가 튀는 곳곳에서 건물이 와르르 무너지고 생각지도 못한 데서 바하무트가 튀어나왔다. 무사한 마구간을 찾았을 땐 절로 기적이란 소리가 나왔을 정도였다.
아직 살아 있는 말들은 그들을 보자 흥분해서 발을 구르고 투레질을 했다. 리온은 마구간을 부숴 모조리 풀어 준 뒤 군마 한 마리의 고삐를 낚아챘다. 따라오던 동화자들의 관심이 사방으로 뛰어나가는 말들에게 쏠린 사이 그들은 재빨리 말 위에 올라탔다.
집채만 한 군마는 난리도 치지 않고 침착하게 땅을 박찼다. 그제야 베로니카는 제가 탄 말을 알아보았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 털과 유독 커다란 덩치. 그렇게 아름다운 말을 몰라볼 수는 없었다.
밤별이었다. 광야에서 직접 이름 붙여 준 순한 말이 그들을 태우고 달렸다.
우연히도, 또는 지독히 필연적으로 그들 셋은 다시 만나서 함께 움직였다. 표징을 이만큼 받고도 모르는 척할 수는 없었다. 똑같이 흘러가고 있다. 광야에 들어간 자들의 시간이 반복된다는 옛말은 이런 의미였을까.
어릴 때 같이 자란 친구를 만난 것처럼 가슴이 저려 왔다. 말은 기억력이 좋은 동물이다. 밤별이 또한 광야를 같이 건넌 동행을 기억하리라.
대호만큼 강건한 말은 앞에서 튀어나오는 동화자들마저 서슴없이 짓밟으며 내달렸다. 베로니카는 점점 가까워지는 막사를 보며 목청 높여 소리쳤다.
“이렇게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데 어떻게 멈추려고요?”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 탓일까, 리온은 그녀의 말을 못 들은 것 같았다. 대답은커녕 더 강하게 박차를 가했다. 베로니카는 코앞까지 다가온 천막에 질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거침없이 막사 안으로 난입한 말은 리온이 뭔가를 낚아챈 뒤 그대로 튀어 나갔다. 리온이 베어 낸 천막을 가르며 말이 높이 뛰었다.
눈을 다시 떴을 땐 탁 트인 대로 앞이었다. 도심으로 이어지는 길목에는 여기저기 시체가 즐비했다. 푸드덕, 달리는 말 앞에서 까마귀가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