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100)화 (100/128)

귀가 쫑긋 섰다.

“그럼 그 ‘최초’만 죽이면 전쟁도 끝이라는 거네?”

“뭐 그런 말도 있다 이거지. 근데 야, 그게 사실이라 해도 네가 최초면 어디 꽁꽁 숨어 있지 싸움판에 나오겠냐? 제 목숨 하나에 전 종족의 존속이 달렸는데?”

최초만 죽이면 이 전쟁도 끝이다. 누군가 그것을 찾아내 죽이기만 하면.

두근, 두근.

베로니카는 자신의 냄새를 맡던 바하무트를 떠올렸다. 쳐다보다 아무 일도 아닌 듯 허리를 바로 세우던 몸짓. 그것은 그녀를 동족으로 인지했다. 다시 말해 베로니카는 이 혼란 속에서 대군을 뚫고 지나갈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란 뜻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어, 어…?”

그때 갑자기 대화하던 기사들이 이상한 소리를 냈다. 불길한 예감이 상념을 뚝 끊어 먹었다. 고개를 쳐든 베로니카는 견습 기사들이 그녀의 어깨 너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걸 보았다. 밤중에도 선명한 눈동자들이 위에서 아래로, 죽 떨어졌다.

콰직.

머리통이 부서지는 소리에 어깨가 움칠 튀었다. 뒤돌아보기도 전 고막을 찢는 나팔 소리와 고함이 먼저 울려 퍼졌다.

“제길, 떨어진다!!!”

“막아!!! 무기를 들어!!!”

흙바닥에서 휴식을 취하던 기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일어서며 검을 뽑았다. 덩달아 일어난 베로니카는 높다란 성벽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득한 꼭대기에서 바닥까지 팔다리를 휘저으며 떨어지는 기사들이 눈에 박혔다.

쾅, 쾅, 콰직. 뒤집혀 죽고도 다리를 파르르 떠는 짐승의 단말마.

이윽고 경계가 뚫린 벽에서 바하무트가 쏟아져 내렸다.

그 붉은 눈이 마치 불비 같았다.

신력 1522년 5월 1일.

교황이 죽고 카르트가 먹혔다.

***

눈을 뜬 바하무트가 온 방위에서 카르트를 덮쳤다.

광야로 빠져나간 시민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잘 모른다. 다만 바하무트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친 난리가 어떤 결과를 불러오긴 한 셈이었다.

서부 성벽의 경계가 뚫리고 북쪽의 임시 방벽은 아예 무너졌다. 댐이 한 곳만 터져도 홍수가 나는 것처럼 카르트는 물 밀듯 들어오는 바하무트를 막아 낼 도리가 없었다. 이미 들어온 이상 바하무트는 그 존재만으로 재앙이었다.

그들은 마주치는 일반 군대며 남아 있던 시민들을 모조리 동화시키며 앞으로 나아갔다. 포석 사이로 움튼 싹은 커다란 발에 잔혹하게 짓밟혔다.

인간이 인간을 학살했다. 비척비척 걷는 붉은 눈의 인간들 사이로 커다란 바하무트가 긴 팔을 앞으로 늘어뜨린 채 걸어 다녔다.

피비린내와 살육의 냄새, 비명.

아비규환이었다.

오늘 밤 카르트는 베이른과 같은 운명을 맞이할 것이다. 죽어 가는 가족, 친구, 이웃과 동료와 죄 없는 사람들을 데리고.

막고 싶었는데.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베로니카는 귀를 틀어막고 군영 창고에 틀어박혔다.

왜지. 왜 움직일 수 없는 거지.

아셀도르프 때와는 달랐다. 이건 훨씬, 훨씬 베이른의 풍경과 흡사했다.

그 기시감이 그녀를 미치게 했다. 계기가 된 것처럼 묻어 뒀던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눈앞에서 뜯어 먹힌 아버지, 시체가 즐비하던 거리.

베로니카는 바들바들 떨며 눈을 질끈 감았다. 스스로가 이토록 무력하고 한심하기는 오랜만이었다. 시간을 돌려 벤자민과 함께 숨어 있던 건물 잔해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이곳을 나가면, 불타는 잔해를 지나고, 어깨를 잡아 돌려세워지고, 벤자민이 죽으리라는 착각.

콰직.

“더 크고 안전한 건물로 들어가야 해. 살아남은 기사단은 교회로 갔을 거야.”

“교회?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다인원을 수용하도록 지어진 건물이잖아.”

문틈으로 바깥을 살피던 기사들이 숨죽여 속삭였다. 베로니카와 함께 앉아 있던 네 명의 어린 견습 기사들은 주위가 바하무트의 물결에 휩쓸리는 사이 냉정하게 몸을 숨기는 쪽을 택했다.

리온은? 그는 어느 쪽을 골랐을까? 아직 성벽 위에 남아 있을까?

“군영 가까이 있는 외곽 교회면… 적어도 반 시간 이상은 걸릴 거야. 안전하게 이동하려면 짧게라도 눈을 붙이는 게 낫겠어. 식량도 챙기고. 해가 뜨고 주변이 좀 보일 때 움직이자.”

기사들은 진지하게 내일의 일을 논의했다.

저들에게 같이 가자고 할까. 베로니카는 고민했다. 살아남은 기사단이 있는 곳에는 리온도 있을 확률이 높았다. 베로니카는 괜찮은 전력이니 기사들도 거절하지는 않을 테다. 이 이상한 공황 상태도 괜찮아질 거다. 분명히.

귀를 막고 있던 손을 부들거리며 내렸다. 용기를 짜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베로니카는 입도 떼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열린 문틈으로 새빨간 눈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입이 벌어져 웃는 것처럼 보이는 얼굴. 문을 등진 기사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논의를 계속했다.

베로니카는 입술을 달싹였다.

“도망….”

콰직.

기다란 손가락이 문 앞에 서 있던 소년의 머리를 꿰뚫고 입으로 튀어 나갔다. 베로니카는 피가 다른 기사들의 얼굴에 팍 튀는 걸 보면서도 가만히 있었다. 머리로는 그들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몸은 보이지 않는 힘에 붙들린 듯 움직일 수 없었다. 벤자민의 마지막과 같은 최후였다. 마치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문득 베로니카는 제 발치에 놓인 나무 상자를 바라봤다. 칼로 문구가 새겨져 있었는데 성전의 언어였다. 베로니카는 저도 모르게 그것을 읽었다.

Deus dereliquit hominem

“신이 인간을 버렸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바하무트가 검을 뽑아 든 기사들을 양손으로 주워들어 머리만 뜯어 먹고 집어던졌다. 그것은 식량 창고를 둘러보다가 아까부터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베로니카를 보고 쿵쿵 다가왔다.

붉은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베로니카는 과거가 반복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런 식의 흐름이라면 분명 다음에 등장하는 건….

“설마….”

서걱하는 날카로운 검의 소리가 귓가를 서늘하게 울렸다. 베로니카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녀를 보던 바하무트의 머리가 반으로 잘려 나가며 무너졌다. 그 뒤에 선 키 큰 인영이 푸른 달빛을 배경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그렇구나. 당신이 왜 신을 믿는지 알겠다.

신은 있다. 운명은 분명히 존재한다.

“…베로니카?”

낮은 목소리가 역광의 그림자 속에서 들려왔다.

“살고 싶어?”

마치 과거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검은 망토 뒤로 보이는 바하무트의 시체들. 날리는 불티와 우뚝 선 채 내려다보는 붉은 머리의 남자까지.

베로니카는 운명을 깨달았다. 오한이 전신을 내달렸다.

인생을 살다 보면 사람은 누구나 비슷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과거에 겪었던 것과 비슷한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그럼 우리는 과거의 경험에 기반해 선택을 내린다. 그것이 실은 신이 보내는 메시지라는 것도 모른 채.

“다친 데라도 있는 거야? 도움이 필요해?”

한쪽 무릎을 꿇고 앞에 앉는 남자를 보며 눈앞이 뿌예졌다.

“지옥 불에서 굴러도 살고 싶냐고.”

“대답해. 죽고 싶다고 하면 고통 없이 죽여 줄 테니까.”

“그럼 도와 달라고 말해.”

“아니요.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인생에 똑같은 갈림길이 다시 등장하는 건 이번엔 다른 길을 선택하라는 뜻이다.

리온은 주저앉은 그녀의 앞으로 검을 내리꽂았다. 시뻘건 불빛이 반사되는 은날 위로 파리한 얼굴이 조각난 채 떠올랐다. 검은 단발. 하얀 얼굴. 붉은 눈.

붉은 눈. 바하무트와 같은 색의 눈동자.

세상은 망해 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진화하고 있다. 베로니카는 인류를 구하기 위해 신이 내린 인간이었다. 떠나야 했다.

***

“밖에 몰린 것들이 사라지면 바로 움직일 거야. 탈진하지 않게 새벽까지 뭐라도 먹어 둬.”

리온이 창고 깊숙이 앉은 그녀에게 가죽 주머니를 눈짓했다. 그는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창고에 들른 것 같았다. 그들은 정말이지 우연히 마주친 셈이었다.

“지금은 입맛이 없어요. 뭐라도 들어가면 분명 토할 거예요.”

리온의 검은 망토를 둘러쓴 채 베로니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곤 눈치를 살피다 조용히 덧붙였다.

“그거 말고 그냥 잠깐만 안아 주면 안 돼요?”

아이 같은 말에 선반을 살피던 리온이 멈칫하곤 그녀를 돌아봤다.

거절이 나올까 싶어 서둘러 말을 이었다.

“갑옷은 안 벗어도 돼요. 그냥 아주 잠깐만, 안전하다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그러면 다시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아서.”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역시 우습게 들리는 소리였을까,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린 순간 리온이 뚜벅뚜벅 걸어와 옆에 털썩 자리를 잡고 앉았다. 검을 언제든 들 수 있게 옆에 내려놓고 자연스럽게 그녀를 망토째로 들어 안았다. 목을 둘러 안은 베로니카는 그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은 채 숨을 들이쉬었다. 깊은 바다를 헤매다 마침내 수면 위로 올라온 기분이었다. 그에게선 서늘한 체향에 섞여 쇠 비린내가 났다.

“있잖아요. 나 머리 잘랐어요.”

전혀 상관없는 소리.

“알아.”

상관 안 하는 대답.

“긴 머리 좋아하는데 아쉽겠네요.”

“내가?”

“네.”

“아닌데.”

거짓말, 속으로만 생각했지만 리온은 눈치챈 듯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

“네가 하는 건 뭐든 좋아해.”

베로니카는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그런 말을 뱉고도 리온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뻔뻔하게 눈을 마주쳤다. 늘 그랬듯 부끄러움을 모르는 남자 앞에서 베로니카는 인상을 썼다.

“…바람둥이 같아요.”

“거짓말쟁이, 바람둥이, 그다음은 뭐야?”

“몰라요. 하지만 내가 대머리여도 예쁠 거라고 생각하진 않잖아요.”

“아….”

리온이 감탄하곤 잠시간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의아하게 마주 보던 베로니카는 퍼뜩 시선의 의미를 깨닫고 이를 갈았다.

“상상하면 죽일 거예요.”

리온이 낮게 웃음을 터뜨리자 공기가 가벼워졌다. 이상하다. 분명 바깥의 혼란은 그대로인데 두려움이 옅어지는 착각이 들었다. 베로니카는 웃는 법을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입술을 따라 말아 올렸다. 기뻐서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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