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99)화 (99/128)

교황을 죽였다.

“아이야, 대포 소리에 놀랄 것 없단다. 겨우 바하무트의 습격일 테지. 언젠가 네가 했던 예언대로.”

교황을 죽였다.

“예언, 그래. 그 예언부터 널 긴밀히 지켜봐 왔다. 아까 책을 보여 준 이유가 죽음 앞에서의 자비냐고 물었더냐? 아니, 아니다. 나는 네가 광야의 비밀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 궁금했단다.”

번들거리는 눈은 사실은 바하무트 따위는 눈곱만큼도 겁내고 있지 않았다. 그동안 그가 보인 두려움은 사라진 신에 기인한 것임을 깨달았다. 늙은 교황은 사지가 씹히더라도 마침내 순교했음에 만족할 자였다. 그는 진실로 신을 추구했다.

“그런데 네 반응은 정확한 기록을 지금에서야 본 사람 같더구나. 아주 놀란 얼굴이었어. 네 예언이 연기가 아니라 진실이라는 소리가 되지. 네게, 진실로 ‘신’이 있다는 뜻이다.”

콰직.

범람하는 기억 속에서 베로니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심장이 쿵쿵 터질 것처럼 세차게 뛰었다. 손발이 덜덜 떨렸다. 살인은 처음이 아니다. 벤자민, 강도, 황실 기사. 하지만 이번은… 이번만은….

“큰 사고를 쳤어요.”

리온마저 돌아설지도 몰라.

“성하를….”

“베로니카.”

성큼 다가온 리온이 말을 끊으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코끝에 서늘한 체향이 스쳤다. 리온이 침착하게 속삭였다.

“숨부터 똑바로 쉬어.”

텅 빈 눈을 든 베로니카는 자신만을 담은 남자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바람이 멈췄다.

폭발 소리가 멀어졌다. 호흡이 천천히 가라앉으며 예민한 신경이 누그러졌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주먹을 꼭 말아쥐었다.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여기까지 왔는데 그가 돌아설 리가 없잖아.

“내가… 교황 성하를 죽였어요. 그분이 내 목을 자르고 싶어 했어요. 내게 신이 있는 게 틀림없다고, 내 목을 자르면 다시 광야에 신이, 돌아오실 거라고.”

리온의 얼굴이 굳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그는 충격적인 얘기를 듣고도 그녀를 감싼 손을 떼어 내지 않았다. 베로니카는 온기에 의지해 핏물로 얼룩진 장면을 더듬더듬 끄집어냈다.

“그래서 집행관들에게 내 머리를… 가르라고…. 막으려던 거지 죽이려던 건 아니었는데… 일이 마음대로 안 됐어요. 검을 들고 도망치다가 계단에서 오스카랑 부딪히고… 나와서 무기를 싣는 마차에 올라탔는데 교황청에 불이 났어요.”

말하면서도 현실감이 없다고 생각했다. 광기가 깃들어 있던 귀신같은 얼굴, 그건 직접 보지 않고는 모르는 종류의 것이었다. 교황은 신을 갈구했다. 그는 그 누구보다 신을 사랑했다. 평생 기다려 온 것에 대한 갈망 앞에서 베로니카는 뒷걸음질을 쳤다. 결코 죽일 생각은 아니었다. 커다란 집행관들이 팔을 잡고 도끼를 들었을 때도. 절대로.

단지 죽기 싫어서 뿌리친 도끼가 날아가 교황의 머리에 박힐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사고였다. 실수였다.

콰직, 눈을 크게 뜬 채 얼어붙은 얼굴.

바로 죽지도 못하고 으, 어 신음하며 그녀를 향해 팔을 뻗었다. 작고 새까만 눈 위로 피와 뇌수가 흘러내렸다. 철 들었을 때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평생 찾아 헤매던 것을 마침내 코앞에 둔 채. 비참하게.

그건 피나 뇌수가 아니라 눈물이었을까.

신은 그에게 모든 것을 주되 가장 원하는 것은 주지 않았다.

“불이 났다고?”

우뚝 서서 듣기만 하던 리온이 되물은 건 그때였다. 그가 그녀에게서 손을 떼고 막사 바깥으로 나갔다. 새하얀 교황청이 하늘 높이 검은 연기를 피워올리는 게 멀리서도 아주 잘 보였다.

제일 위층에서 난 불을 한참 동안 응시하던 리온은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감정을 갈무리한 눈이 어둡고도 냉정했다.

“팔라딘 대부분은 그를 친부나 다름없이 여기면서 자랐어. 그걸 떠들고 다니는 건 자살 행위야.”

입을 다물라는 뜻이다.

“하지만….”

“시체는 이미 불탔어.”

리온은 조용히 내뱉었다. 보지 못한 것을 확신하듯 말했다. 그때 병사 하나가 다가왔으므로 베로니카는 어떻게 아느냐 되묻지 못했다. 리온은 뭔가를 받아 챙기곤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겼다.

“막사 안에서 기다려. 지금은 여유롭게 대화할 시간이 없어.”

성벽에 올라가기 직전이었던 모양이다. 베로니카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급히 입을 열었다.

“전투에 가려는 거죠? 나도 데려가요. 인원이 부족하잖아요.”

“베로니카.”

“전처럼 한계까지 검을 휘두를 생각은 없어요. 이제 정말 안 그래요. 오늘은 상황도 봐 가면서 행동할게요.”

“…….”

“제발, 뭐라도 하게 해 줘요.”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광장에서부터 계속되던 흥분과 불안은 피를 보면서 최대치를 찍었다. 교황이 무슨 짓을 하려고 했든 그녀는 존경받던 성인을 죽였다. 잔인하게 터지던 핏물이 머릿속에 남아 떠나지를 않았다. 리온은 숨을 몰아쉬는 그녀를 말없이 응시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쾅쾅 터지는 대포 소리가 심장을 빠르게 뛰게 했다.

“한번 올라가면 밤이 될 때까지 내려올 수 없어. 쉬는 시간도 고작 한두 시간이 될 거야.”

“상관없어요.”

굳건한 태도에 리온이 날카로운 얼굴을 쓸어내렸다. 짙게 가라앉은 시선 아래서 결국 피로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견습 기사를 보내 줄 테니까 그가 안내하는 성벽을 맡아. 중앙으로는 오지 마. 내가 양보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야.”

불거진 턱선이 기억보다 예리했다. 못 본 사이 조금 마른 것 같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다른 대화를 이어 가기엔 여유가 없었다. 이곳은 전장이었다.

“제발 무리하지 마.”

돌아서기 직전 리온은 그렇게 말했다. 다시 한번 고막을 찢는 폭음이 터졌다.

***

“이쪽입니다.”

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견습 기사는 그녀를 서부 성벽의 끄트머리로 이끌었다.

“다른 방향보단 상대적으로 수가 적습니다만, 역시 도움이 필요합니다.”

도르래를 타자 어린 기사가 창백한 얼굴로 설명했다. 삐걱삐걱 올라가는 발판이 너무나도 느리게 느껴졌다. 땅이 멀어지는 감각이 아득했다. 아까부터 그랬지만, 정말이지 현실감이 없었다. 베로니카는 몇 번이고 검을 바꿔 쥐었다. 안 그러면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땀으로 헤네시스를 놓쳐 버릴 것 같았다.

마침내 쿵, 소리가 나며 도르래가 멈추고 성벽 위로 발을 디디자 탁 트인 세상이 눈에 들어왔다. 새파란 하늘과 그 아래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폭발의 연기. 베로니카는 회색 연기 사이로 보이는 붉은 점의 양에 얼어붙었다. 중앙으로 몰리는 수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공포를 인지한 다음 순간 베로니카는 예감했다. 카르트는 이번 공격을 막아 낼 수 없다.

그간의 습격과는 다르다. 처음에는 단지 그녀를 찾아내기 위해서, 두 번째는 눈을 감은 상태로 이루어졌다면, 지금은,

“모조리 죽이려고 오는 거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잊어버린 줄 알았던 베이른의 악몽이 스쳐 지나갔다.

불타는 도시. 검은 연기. 교회의 벽면에 쓰여 있던 붉은 글씨.

Deus dereliquit hominem(신이 인간을 버렸다.)

그것은 돌이켜 보건대 예언이었다.

도망가고 싶다. 도망가야 한다. 살과 뼈와 근육과 온몸의 솜털까지 일어나 그렇게 주장했다.

그간 나름대로 바하무트에게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그녀이기에 도리어 실감했다. 다가오는 적은 살의를 품고 있었다. 바하무트는 카르트를 부숴 놓을 것이다.

구역질이 쏠렸다.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으십니까?”

옆을 돌아보자 검을 들고 그녀를 쳐다보는 소년 기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 10대 중후반이거나 심지어는 더 어려 보였다. 성인 남자의 반절밖에 안 되는 키로 검을 든 용기 있는 소년까지 보고서야 베로니카는 이를 악다물었다.

정신 차려. 이러려고 고집을 부렸던 거야?

베로니카는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검을 뽑아 들었다. 기어오르는 바하무트를 기다렸다. 두근, 두근, 두근, 턱, 커다란 손이 성벽 위로 올라오는 순간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왜 지금, 당신에게 검을 처음 배웠던 날이 떠오르는 건지.

***

교대는 밤하늘에 별이 돋아날 때에서야 이루어졌다. 기어오르는 손과 지평선의 붉은 눈은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다시 도르래를 탔을 때는 검을 잡았던 손이 부들거리고 온몸이 욱신거렸다.

당연하지만 혼란 속에서 리온을 찾을 길은 요원했다. 베로니카는 억지로 음식을 입에 쑤셔 넣고 모포를 받아 야외에서 두 시간가량 휴식을 취했다.

거기서 시민들의 피난 소식을 접했다. 남문이 열리고 광야로 이주할 사람들이 쏟아져 나가고 있다고 했다. 두 팔을 벌리고 흥분해서 떠벌리는 어린 기사를 보며 베로니카는 안도했다. 그래도 아무 소용 없는 짓은 아니었구나, 하고.

피난을 돕기 위해 이쪽에서 더욱더 요란하게 대포를 터뜨리는 거라고 했다. 바하무트가 남부로 향하지 않도록 동부와, 심지어는 임시 방벽이 쌓인 북부에서도 바하무트의 관심을 끌고 있다고 했다.

교황의 죽음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았다. 황궁 사건을 쉬쉬하던 필립의 태도를 감안할 때 카르트가 함락될 때까지 아무도 모를 가능성이 높았다. 유명인의 죽음은 사기만 꺾을 뿐이다. 교황과 황제의 방해가 없어 시민들의 탈출이 용이한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베로니카는 무릎을 세우고 고개를 묻었다.

오한으로 몸이 떨렸다. 온몸이 피범벅인 느낌이었다.

너무 많은 죄를 지었다. 어떻게 해야 이 죄책감을 씻어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근데 말야. 너희도 아까 찌르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픽픽 쓰러지는 놈들 봤냐?”

귓가에 병사들의 대화가 박혀 든 건 그때였다.

“아, 그거. 나도 알아. 연결된 바하무트가 죽어서 그런 거 아냐? 모체가 죽으면 그 자손은 한꺼번에 죽는다고 하던데.”

“어, 난 진짜 죽을 뻔하다가 살았다니까. 혈기 왕성하던 놈이 벽 뒤로 나자빠지는 걸 보니까 확실히 그런 기대가 생기더라고. 진짜 최초의 바하무트라는 게 있는 거 아닌가. 그놈만 죽이면 모두 끝나는 거 아닌가.”

베로니카는 눈을 떴다.

설원에서 개미 떼에게 술을 붓던 리온이 떠올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