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96)화 (96/128)

“벌써 이러고 있어도 괜찮은 건가?”

하인스가 뚜벅뚜벅 다가오며 물었다. 흰 장벽에 걸터앉은 리온은 지평선 끝에 시선을 둔 채 건조하게 대답했다.

“크로이츠 덕까지 봤는데 가만히 누워 있긴 아깝지.”

“그 여자가 크로이츠를 다룬 게 정말이란 말인가?”

리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나부끼고 지나갔다. 기적적인 회복만으로 답은 충분했는지 하인스는 수염을 매만지며 감탄했다.

“허, 요새 성녀 노릇을 하고 있다곤 들었는데. 그렇다면 나름대로 자격이 있는 셈이군.”

크로이츠는 과거 사제들이 치유에 쓰곤 하던 성물이다.

그 대가 때문에 오래 쓰이지는 못했지만.

“무섭지는 않나?”

흘금거리던 하인스가 불쑥 운을 뗐다.

“빌렸던 성력이 빠져나갈 때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찾아올 걸세.”

잘 아는 얘기였으므로 리온은 무감하게 교회의 기록을 곱씹었다. 크로이츠가 부여한 인위적인 성력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일주일, 한 달, 혹은 길어야 반년.

생명력을 대신하던 성력은 다시 성물로 되돌아간다. 그때 치유를 받았던 인간은 대가를 치르게 되는데, 그것은 피가 다 빠져나가고 살이 녹는 첨예한 고통이다.

심지어 그 느린 죽음 동안에는 마음대로 죽지도 못한다. 크로이츠가 생명을 연장한 만큼 꼼짝없이 비참한 시간을 보내야 해서 사람들은 이를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라 불렀다. 기록에 따르면 그 모습만으로 욕지기가 치밀 만큼 역겹고 끔찍한 최후라고 했다.

뼛가루도 남기지 못하고 스러지는 병자들을 본 제120대 교황 아나스타시오는 교황의 허락 없는 크로이츠의 사용을 금지했다. 단순한 십자가 목걸이가 교황의 권위를 나타내는 물건이 된 이유였다.

신의 성물이니 감히 말은 못 했겠지만 분명 아나스타시오는 크로이츠가 악마의 목걸이라고 생각했으리라.

“글쎄, 내일 날 불을 벌써부터 두려워하기엔 오늘 너무 추워서 말이야. 성력이 빠져나갈 때까지 과연 카르트가 버티기나 할지 의문이야.”

리온은 너른 들판 끝에서 희미하게 번득이는 붉은 점들을 응시했다.

바하무트가 눈을 떴다. 이번 습격은 그동안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을 띨 것이다. 이번에 그들은 찾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눈이 먼 채 무작정 들이닥치는 것도 아니다. 일반 군대는 동화될 수 있으니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벽은 곧 뚫리고 만다.

베로니카도 정황을 알고 있으니 광야로의 이주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거겠지만.

이기적이게도 보고 싶었다. 그녀가 다른 이들의 안위 따위 생각지 않고 마지막까지 제 옆에 머물러 주길 바랐다. 이 정도면 병이었다. 집착이었다. 미쳤다는 건 진작에 인지했다. 신념의 한 축이 무너지자 반대로 그녀에 대한 갈망이 늘었다. 며칠간 안고 있었다고 습관이 된 건지, 리온은 온기 없는 침대에서 내내 불면했다. 이불에 남은 체취에 의지해 자신을 달랬다.

“괜찮은 건가? 그러게 무리하지 말라니까.”

털썩 등을 대고 눕자 머리 위에서 하인스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리온은 눈을 멀게 하는 햇살을 팔로 가렸다.

죽음의 고통보다 절제를 모르는 갈증이 더 무서웠다. 확신을 받고도 지칠 줄 모르는 욕망은 언젠가 그를 태워 버릴지도 모른다.

“아, 월경이 멈췄긴 해요.”

그 말을 들었을 때 내가 뭘 꿈꿨는지 너는 평생 알 수 없겠지.

***

“데우스 노비스쿰 에스트.(신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베로니카는 얼굴이 온통 짓무른 노인의 손을 잡으며 속삭였다. 까마귀발처럼 주름진 노인의 눈가는 금세 이슬처럼 작은 감격의 눈물을 매달았다.

광장에서 열린 기도회는 말하자면 지난 일주일간의 연장선이었다.

시민들 사이를 지나면서 손을 잡아 주거나 머리에 손을 얹다가, 높은 단에 올라가 기도하는 시늉을 하면 된다. 옆에 오스카와 요아힘이 없다는 점이 달랐지만 두 기사의 짧은 부재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둘 이외에도 호위는 넘쳐났다.

“정말? 정말 그렇게 믿나요?”

노인의 옆에 있던 비쩍 마른 여인이 쉰 소리를 낸 건 그때였다. 베로니카는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여인을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그녀가 한 말 때문이 아니라 어딘가 묘하게 익숙한 목소리 탓이었다. 아는 사람 같은데… 대체 어디서, 그 순간 여자가 덥석 팔을 낚아채며 가까이 끌어당겼다.

“이미 신께서는 인간을 버리신 게 아니고?”

붉은 눈과 흘러내린 몇 가닥의 금발.

베로니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요한나였다. 일주일 전의 연회에서 황제를 시해한 황녀.

하지만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어떻게 살아 있느냐고?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뭘 모르는 척 물어? 잘 알면서.”

한껏 낮춘 목소리는 뱀의 쉭쉭거림과 닮아 있었다. 요한나는 귀족이나 황족 중 누군가와 잠자리를 한 게 분명했다. 그러나 문제는 성력을 나누는 것만으로 멀쩡했던 베로니카와 달리 로브 안의 얼굴이 이전과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었다.

요한나는 초조하게 중얼댔다.

“말해. 왜 아무리 성력을 받아도 예전과 같지 않은 거지? 왜 나는 너처럼 동화가 완전하지 않은 거야? 너와 내가 뭐가 달라서?”

조급하게 내뱉는 얼굴은 이전의 고운 인상을 찾아볼 수 없이 해골처럼 수척했고 머리칼은 지푸라기처럼 푸석푸석했다. 징그러운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베로니카는 본능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뿌리쳤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자 요한나는 희번득한 눈으로 노려보다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로브를 벗어젖혔다. 다른 방향으로 베로니카를 압박할 작정 같았다.

“들어라. 나는 황금 바다의 외동딸, 카이젠미어의 유일한 황녀 요한나 폰 카이젠미어다. 이 여자는 교회에서 떠드는 것 같은 희망이 아니다! 감히 나를 동화시키고 황제 폐하를 살해한 마귀의 딸이다. 당장 돌을 들어 쳐 죽이지 않으면 재앙은 끝나지 않는다!”

얼굴을 드러내고 눈부신 금발을 보이면 시민들이 응답하리라 예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너무나도 달라져 있어서 먼 발치에서 황녀를 봤던 이들조차 고개를 저었다. 그들의 사랑스러운 황녀는 꿀처럼 떨어지는 금발에 새파란 눈을 가진 미인이었다. 불운하게도 그녀를 알아볼 요아힘조차 오늘만은 베로니카의 곁에 없었다.

“내 말을 따르는 자에겐 두 손으로 다 거머쥘 수 없는 양의 금은보화를 약속하겠다!”

초조해진 요한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고함쳤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 수군대는 사람들의 반응은 그녀의 믿음과는 거리가 멀었다.

“뭐라는 거야?”

“자기가 요한나 황녀래. 황제 폐하가 살해당하셨다는데?”

“별 미친 여자가….”

“제길, 이봐. 그렇게 말로 될 수 있는 거였으면 난 진작에 구두닦이 생활을 청산했을 거라고.”

낄낄거리는 웃음이 터졌다.

“황금 바다의 외동딸? 무슨 부끄러운 소리를 하는 거야.”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멸시에 요한나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두리번대다가 발을 세차게 구르며 벌컥 성을 냈다.

“멍청하고 어리석은 우민들 같으니. 지금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이 기도회에 참여했던 인간들을 모두 죽여 버릴 것이다. 너희를 모아 놓고 모조리 화형에 처하라고 폐하께….”

흥분해서 내뱉던 요한나는 버릇처럼 황제를 말하다가 흠칫 굳었다. 피골이 상접한 얼굴에 환멸과 절망이 동시에 떠올랐다.

베로니카는 이상한 기분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사람들의 시선에 벌벌 떠는 창백한 얼굴이 과거의 자신을 연상시켰다. 황실 결투장과는 상황도 장소도 완전히 달랐지만, 왜인지.

“뭘 수군거리는 거지? 네깟 것들이. 감히 출생부터 다른 나를, 고귀한 핏줄을 타고난 나를!”

그 순간 그녀가 발악처럼 소리 지르며 낄낄거리던 남자를 쏘아보았다. 대기의 일렁임을 느낀 찰나, 막을 새도 없이 남자의 머리통이 터져 나갔다. 옆에 섰던 여자가 피와 살점을 그대로 뒤집어쓴 채 찢어져라 비명을 지르고 시체는 군중 속에 무력하게 넘어졌다. 베로니카는 핏기가 가시는 기분으로 한 발짝 다가섰다.

“그만 하세요. 여기서 더했다간.”

“마녀다! 바하무트의 수하가 성도에 숨어들어 성녀님을 해치려는 거야!”

그때 누군가 흥분해서 외치며 베로니카의 말을 잘라먹었다. 인파 속에서 튀어나온 돌이 요한나의 머리를 후려친 건 그다음 일이었다. 고개를 푹 숙였던 요한나가 광분한 눈으로 좌중을 휘둘러보자 그들은 겁에 질려서 슬금슬금 물러났다. 베로니카는 반사적으로 바하무트의 힘을 통제했다. 피해를 막을 생각이었다. 문제는 피해자를 잘못 상정했다는 거다.

하나 대 다수가 싸울 때는 다수를 통제했어야 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다음 순간 시민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바닥에 떨어진 돌을 마구잡이로 요한나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어, 얼른 해치워야 해. 안 그러면 우리 머릴 터뜨릴 거야!”

“죽여! 죽여 버려!”

군중이 서로를 떠밀었고 병사들은 필사적으로 베로니카를 호위하느라 시야를 가로막았다.

아무리 그만하라고 외쳐도 소용없었다. 닿지를 않았다. 사람들은 방금 본 살인에 겁에 질려 있었다. 울며 부르짖던 기도로 한껏 고조된 심정이 악의로 물든 것 같았다. 빨리 죽여 없애지 않으면 요한나가 호언한 대로 자기들이 죽으리라 생각했다. 베로니카는 방금까지 눈물방울을 흘리던 상냥한 사람들이 이리도 쉽게 변한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모든 게 얼떨떨할 만큼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 몰려든 사람들의 발아래로 진득하고 새빨간 액체가 둥글게 퍼져 나갔다. 발자국이 찍히는 핏물을 보다가 속이 울렁거려 입을 틀어막았다. 구역질은 멈추지 않았다.

카이젠미어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황녀는 카이젠미어의 백성들에게 최후를 맞이했다.

고귀한 핏줄을 가리켜 소위 푸른 피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지만, 죽음의 색은 모두 같으니 인간은 운명을 벗어날 수 없는 셈이다.

부디 그녀가 이로써 패악의 모든 대가를 치렀기를, 베로니카는 진심으로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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