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95)화 (95/128)

‘도망갈래?’

잠결에 설핏 그런 말을 들었다.

아주 낮은 목소리는 그러자고 대답만 하면 정말로 어디든 데려가 줄 것만 같았다. 새파란 바다 깊숙이나 조각달이 뜬 밤하늘 너머까지도. 그래서 베로니카는 꿈이라고 확신했다.

우리는 도망가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종류의 인간이 아니다. 세계의 벼랑 끝까지 다다르면 더 갈 데 없는 우리는 손을 잡고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말 것이다.

아, 인간의 자유 의지는 신념 앞에서 얼마만큼 힘을 잃는지.

***

고작 이틀이었다. 교회의 부름에서 자유로웠던 기간은.

“오스카?”

천막을 나오던 베로니카는 앞에서 기다리던 발을 따라 올라가다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게 얼마 만이에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다친 데는 없고요? 한나는요?”

이른 아침 막사로 찾아온 오스카를 보고 베로니카는 다다다 질문을 쏟아 냈다. 오스카는 어색하게 미소 짓더니 질문에 하나씩 대답해 주었다.

“전 건강하게 잘 지냈습니다. 다친 데도 없고, 한나 씨는 친분 있는 귀족 가문에 특별히 부탁해 놓았으니 괜찮을 겁니다. 베로니카야말로 안색이 좋아 보여서 다행입니다.”

“저야 안 괜찮을 일이 없는걸요.”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큰 부상을 입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저번에 왔다 얼굴도 못 보고 가는 바람에 걱정을 좀 했습니다.”

“다쳐요? 누가, 제가요?”

어리둥절해진 베로니카는 손가락으로 제 얼굴을 가리켜 보였다. 오스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멍하니 있던 베로니카는 이윽고 필립과의 약속을 기억해 내고 아,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그가 교황을 만나지 않도록 만들어 준 명분이 분명했다. 교황을 피하려면 죽을 만큼 큰 부상을 입는 수밖에 없나 싶어 우습기도 했다.

“아… 음, 네, 많이 나았어요. 교회에서 받은 성물 덕분인가 봐요.”

말을 대충 맞춰 두며 목걸이를 매만졌다. 오늘은 기분이 특히 좋았다. 오랜만에 잠도 푹 잤다.

오스카는 크로이츠를 보고는 눈에 띄게 굳었다. 그 반응이 이상해서 뭐라도 묻었나 목덜미를 쓸던 베로니카는 문득 그곳에 남아 있을 간밤의 흔적을 떠올리고 얼굴을 붉혔다. 리온이 천막에서 나온 건 그때였다. 돌아본 베로니카는 가벼운 방어구를 걸친 그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설마 벌써 나가려고요? 새벽부터 다시 열이 올랐잖아요. 조금만 더 쉬어요.”

“미열 정도는 상관없어. 당장 전투에 나가는 게 아니라 경계하려는 거니까.”

“그래도.”

“바하무트가 눈을 뜨기 시작한 이상 시민군은 도움이 안 돼. 그보다 무슨 일로 온 거지?”

리온이 그녀의 길어진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곤 오스카를 흘끗 일별했다. 간밤에 남은 흔적을 자연스럽게 훑어내리는 손길에 베로니카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위중하시다 들었는데 회복하신 모습을 보니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아, 그래. 그야말로 신이 내린 기적이지. 그래서 용건은?”

“제 용무는 슈바르츠발트 양에게 있습니다.”

문제 될 소지가 없는 깔끔한 대화다. 그런데도 두 남자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는 무시하기 힘들 정도로 묘하게 날카로웠다. 베로니카는 당혹한 채 리온을 올려다보았다. 오스카를 좋아한다고 했던 말을 아직도 신경 쓰고 있는 걸까. 이젠 그도 그 말이 정말 홧김이었다는 걸 알 텐데.

“성하께서 슈바르츠발트 양을 데리고 오라 명하셨습니다.”

“부르시는 목적은 알고 움직이는 건가?”

“죄송하지만 저는 아버지의 의도까지 따질 만큼 마음이 완악하지 않습니다. 아직 버림받지 않은 처지라서 말입니다.”

예상외로 먼저 날카로운 혀를 빼든 건 오스카 쪽이었다. 무표정하던 리온의 입매가 재밌다는 듯 기울었다.

“글쎄, 앞으로도 버려질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재해가 덮친 이래 내내 옆에만 끼고 도신 아들을 버리실 리가 있나.”

리온의 말에 베로니카는 순수하게 놀랐다.

산사태 이후 내내 옆에만 끼고 있었다니? 그럼 지금까지 방벽이나 성벽의 전투에는 임하지 않았다는 뜻인가?

오스카는 안전한 교황의 옆에만 머물렀다는 사실을 수치로 여기는 듯, 그녀의 시선을 받자 창백한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변했다. 베로니카는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실수가 나오리란 걸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급하게 끼어든 건 오스카를 위해서였다.

“리온, 그만 해요. 교황 성하의 부름은 이미 예정되어 있던 문제고, 안 그래도 가려고 했어요.”

망토를 당기며 속삭이자 리온은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 가라앉은 시선 속에 걱정이 묻어나서, 마음이 신기할 정도로 따뜻하게 녹아들었다.

“별일 없을 거예요. 어제 내가 저지른 짓들을 말해 줬잖아요. 멋대로 편지도 보내고 성물의 힘도 빌렸어요. 의무를 지키는 건 당연해요.”

베로니카는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당신이 다 낫지도 않은 몸으로 성벽에 올라가려는 거랑 같은 거죠. 금방 돌아올게요.”

장난스레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이자 리온의 서늘한 눈매가 조금 풀어졌다. 그녀를 바라만 보는 남자의 손을 잡아다 손가락을 얽었다. 어린애 같은 행동에도 리온은 순순히 응해 주었다.

롬 군도에서는 새끼손가락 끝으로 영혼과 닿을 수 있다고 믿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건, 말하자면 영혼이 엮이는 행위.

“다른 건 상관없어. 다치지 않는다고만 약속해.”

리온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여기서 약속하지 않으면 그녀를 훔쳐서라도 도망갈 사람처럼.

바보같이 그런 생각을 하며 베로니카는 쉽게 말했다.

“약속해요.”

***

결론부터 말하자면 리온은 현명했다.

‘금방’ 돌아오겠다는 약속 같은 건 처음부터 지킬 수 없었으니까.

제 발로 교황청에 들어간 순간부터 베로니카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뭔가가 되었다. 신이 카르트에 내린 희망. 말하자면 영웅 비슷한 것. 이게 되려나 싶었는데 됐다. 기가 막혔다.

교황은 제일 먼저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자르라고 지시했다. 십자가 목걸이가 잘 보이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어깨 넘어서까지 길렀던 흑발은 다시 턱 길이로 짧아졌지만 베로니카는 단발이 편했으므로 딱히 불만은 없었다. 리온이 아쉬워하겠다는 생각만 잠깐 했을 뿐이다. 슬프게도 그는 그녀의 바뀐 머리도 보지 못했지만.

그로부터 일주일간 베로니카는 시민들의 구제 활동에 참여하느라 성벽에 있는 리온을 만나지 못했다.

교회가 작정하고 발 벗고 나서자 순식간에 그녀는 카르트에서 가장 유명한 인사가 되었다. 식사를 나눠 주고, 부상자를 치료하고, 죽은 자를 보내 주는 자리에 빠짐없이 나가서 손을 거드는 베로니카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순결한 순백색 드레스, 크로이츠 목걸이, 한 손에는 신의 검 헤네시스를 든 여인.

그녀는 금세 하나의 상징으로 변했다.

사람은 이름을 따라간다고 했던가. 기록 속에 등장하는 ‘성녀 베로니카’가 사실 실존 인물이라는 증거는 없다고 한다. 그녀 자신도 그랬다. 가짜에 지나지 않는, 만들어진 희망. 기적처럼 동화를 이겨 내고 카르트의 재앙을 예언한 신의 딸.

정말이지 터무니없는데, 그토록 터무니없는 소리를 믿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뭔가를 상실한 사람일수록 더했다. 의지할 데가 필요한 사람들이 그녀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무릎 꿇고 울면서 회개했다.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베로니카는 이것이 둘도 없는 기회임을 직감했다.

잠깐 리온과 떨어지면서까지 순순히 교회의 봉사에 임한 건 그런 이유였다. 베로니카는 시민들에게 은근슬쩍 광야에 대한 소문을 흘렸다. 기도하면서 귀띔하고 바하무트가 들을지도 모르니 주의해야 한다고 속삭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에 들키지 않은 채 소문을 퍼뜨리는 중이었다. 시간은 다소 걸리겠지만, 그래도.

“음, 그래도 그런 식으로 카르트 전체를 움직이긴 힘들걸.”

이러한 얘기를 다 털어놓았을 때, 일주일간 상당히 친해진(동갑이라는 이유가 컸다) 요아힘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각보다 군중은 멍청하고 우유부단하거든. 뭔가 충격적인 일이 있어야만 해. 광장에서 네가 바하무트의 머리를 터뜨렸을 때처럼 확신을 주는 이적 같은 거.”

“카이젠미어 경. 무례를 삼가십시오. 세속적인 신분과 관계없이 교황청 내에선 다 같은 신의 종에 불과합니다.”

식사를 들고 오던 오스카가 요아힘의 말투에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두 사람은 베로니카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보면 볼수록 성격이 안 맞았다. 요아힘이 까불고 서글서글하되 눈치가 빠르다면 오스카는 냉정하고 예민한 대신 어리숙할 때가 많았다.

“딱히 무례하다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괜찮아요.”

베로니카는 급하게 편을 들어 요아힘이 깨지는 걸 막았다. 그러곤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뭔가 충격적인 일. 확신을 주는 이적이라….

“오스카. 아무래도 사람은 눈으로 보이는 걸 잘 믿겠죠?”

“예.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떨떠름하게 대답한 오스카가 덧붙였다.

“그러니까 옛날에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때도 열 가지 재앙이나 보여 주신 것 아니겠습니까. 그 정도나 해서야 믿었으니까요.”

열 가지 재앙.

빵을 먹지 않고 잡아 뜯기만 하던 베로니카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오스카가 언급한 일화는 성전에 나오는 유명한 탈출기로, 신의 백성이 타국에서 핍박받을 때 그들을 구해 내기 위해 그 나라에 열 가지 재앙을 내렸다는 내용이다.

“그래, 그건 카르트 시민이라면 어린아이도 알고 있는 이야기죠. 그거예요.”

“예? 그게 무슨, 설마 카르트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겠다는 말입니까?”

“아니요. 하나면 충분해요. 충격적이고 뇌리에 남을 한 가지 사건.”

베로니카는 눈을 반짝이며 일어났다.

“두 사람의 도움이 필요해요.”

며칠째 어긋나던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오늘만은 뜻이 맞았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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