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94)화 (94/128)

설마.

“설마 지금까지 내가 준 물건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하지만 황실의 문양이 찍혀 있잖아요. 상식적으로 내게 저런 사치품을 살 돈이 있을 리도 없고요.”

“그렇다고 요한나가 전하는 물건이라고 말하지도 않았지.”

말문이 막혔다. 그의 말대로였다. 얼굴 보기도 껄끄러웠던 때라 주고 오기 급급했다.

그간의 억울함이 사르르가 아니고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말도 안 돼. 그럼 그 사랑에 빠진 것 같던 눈빛이, 너덜너덜해져도 버리지 않던 손수건의 정체가.

“그게 뭐야. 난 그것도 모르고….”

베로니카는 허탈하게 중얼거리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당신이 요한나 황녀를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

리온의 미간이 단숨에 일그러졌다. 그가 입꼬리를 비튼 채 냉소적으로 대답했다.

“세상 사람이 다 죽어도 그 여자와 사랑에 빠질 일은 없어.”

경멸이 짙어서, 그건 마치 사랑 자체에 대한 멸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너무 나간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왜인지 마음 한구석이 시렸다. 리온은 빈 접시를 가지고 일어나느라 표정을 보지 못했겠지만.

“누가 환자인지 모르겠네요.”

티 내지 않기 위해 리온이 담아 온 스튜와 빵을 받으며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는 픽 웃고는 제 접시를 가져와 그녀의 옆에 앉았다.

“이 기회에 아픈 데는 없는지 잘 돌이켜 봐.”

“아, 월경이 멈췄긴 해요.”

스튜를 뒤적거리며 무심코 내뱉었다. 파장은 미처 생각지 못한 발언이었다. 내려앉은 침묵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을 때에서야 오해를 불러일으킬 발언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베로니카는 드물게 당혹한 리온의 얼굴을 보고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맙소사. 진짜 아니에요. 그런 이유이기엔 시간이 너무 얼마 안 됐잖아요!”

“…그런 이유?”

“그러니까 내 말은, 월경이 멎은 지는 벌써 2년 째예요. 불안하면 굶는 버릇이 있는데 그 영향일 거예요.”

급하게 수습하느라 들키기 싫었던 비밀을 실토하고 말았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은밀한 얘길 해 보긴 처음이었다. 정신적인 병은 늘 실제보다 가여워 보이니까. 불행해 보이긴 싫었다. 왜 이제 와서 그에게 털어놓는지 모를 정도로.

역시나 방금까지와는 다른 빤한 시선이 와 닿자 베로니카는 일부러 먹는 데 집중했다. 지금은 잘 먹는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국물이 많은 스튜는 밍밍한 맛이 났다. 군영에서 식량을 아끼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왜 굶게 됐는데?”

그러나 리온은 아무렇지 않은 척 넘어가 주지 않았다. 그가 제 그릇엔 손도 대지 않은 채 물었다. 베로니카는 가만히 스튜를 뒤적거리다가 별거 아닌 척 대답했다.

“2년 전에는 내가 극단에 들어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거든요. 베이른에는 춤으로 먹고살 길이 하나밖에 없어서, 못 들어가면 도시를 떠나야 할 형편이었어요.”

“아니, 난 계기를 묻는 거야.”

애써 비껴가려는 대답에 리온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질문을 되짚었다. 베로니카는 숟가락을 움찔 떨었다. 계기라는 말이 떠올린 어느 기억이 시리도록 추웠던 탓이다.

바람이 쌩쌩 불던 어느 겨울밤. 엄마가 죽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아버지는 며칠씩 외박하는 일이 잦았고 베로니카는 내내 그 집에 홀로 있었다. 이불 안에 웅크리고 바다의 울부짖음을 들으면서.

“글쎄요. 그냥, 아버지한테 보여 주고 싶어서?”

입술이 들릴 듯 말 듯 작게 움직였다.

미련한 어린 시절이 떠오르자 슬프고도 우스워졌다.

“어릴 때는 나를 망치는 게 부모님께 복수하는 일이라고 착각하잖아요. 밥도 안 먹고, 잠도 한숨도 안 잘 거야, 다시는 한마디도 안 해서 속을 썩이고 가슴을 아프게 만들 거야, 하고.”

멍청한 다짐이었다. 베로니카의 아버지는 그녀가 비쩍 말라 가는 것도 몰랐다.

“잘 몰랐던 거죠. 그것도 날 사랑하는 사람한테나 통하는 거였는데.”

자조적인 말을 마지막으로 베로니카는 빵을 잘라 먹는 데 열중했다. 침묵을 지키던 리온이 다시 입을 연 건 한참 만의 일이었다.

“힘들었겠네.”

욱신, 별거 아닌 말에 심장이 반응했다. 베로니카는 손을 멈춘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날카로운 눈동자와 부딪치자 심장이 관통되는 듯한 흉통이 일었다. 리온은 그제야 천천히 시선을 내려 식사를 시작했다.

속이 울렁거렸다. 동굴 천장의 이슬이 호수에 뚝, 떨어질 때처럼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울컥하는 감동과는 다른 것. 한 방울 이해만으로도 마음은 하나가 된다.

조용한 식사가 이어졌다. 베로니카는 부스러기 하나 남기지 않고 접시를 싹싹 긁어먹었다. 물을 많이 넣은 데다 건더기까지 적은 병영의 음식이었지만 처음으로 맛있다고 느꼈다.

그들은 접시를 바깥에 내보내고 나란히 이를 닦았다. 올리브 비누로 땀이 흐른 몸도 깨끗이 씻어 내고 침대를 의자 삼아 검도 닦았다. 막혔던 말문이 겨우겨우 트인 건 그 후의 일이었다.

“몰랐는데, 그래서 어린애라는 말에 그렇게 예민했나 봐요. 나 스스로가 나를 온전치 못하게 여기고 있어서.”

그런데 그도 그녀를 여자로 봐 주지 않아서.

같은 주제를 이어 가기엔 너무 긴 시간이 지나 있었지만 리온은 딱히 별다른 지적을 하지 않았다. 검을 내려놓은 그가 오해를 정정하듯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

“어린애로 안 봐. 오히려 요즘은 나보다 어른 같다고 생각하는데.”

“와, 그건 좀 양심 없는 소리 아니에요? 나보다 어린 척하기엔 좀….”

한숨을 푹 내쉬며 장난처럼 눈을 치뜨자 리온이 입술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아아, 걸렸네. 10년은 어려질 절호의 기회였는데.”

“십 년? 그럼 스물아홉이에요?”

베로니카는 귀를 쫑긋하는 토끼처럼 눈을 댕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리온이 권태로운 낯으로 끄덕였다.

“응. 말해 준 적 없던가?”

“없어요. 한 대여섯 살쯤 많은 줄 알았는데. 와, 그럼 그 나이대 언니들이 가르쳐 준 방법 쓸걸.”

“무슨 방법?”

흥분해서 의식의 흐름을 뱉던 베로니카는 리온이 되묻자 당황해서 입을 합 다물었다.

“아니, 별거 아닌데. 그냥 친한 무희 언니들이….”

말꼬리를 흐리며 점차 달아오르는 얼굴을 리온은 흥미 서린 시선으로 가만히 바라보았다. 베로니카는 입을 꾹 다물었다가 힘주어 선언했다.

“말 안 할래요. 자꾸 나만 털어놓는 것 같아서 불공평해요. 당신은 비밀 같은 거 없어요?”

“교환하자고?”

고개를 끄덕이자 리온이 생각에 잠긴 듯 잠시간 화로를 쳐다봤다. 그러다 정말이지 불쑥, 이름 하나를 꺼내서 불 속에 던졌다.

“노아 베르크라는 이름을 혹시 기억해?”

“노아 베르크… 광야에서 당신이 썼던 가명이요?”

“응.”

“기억하긴 하는데 왜요? 혹시 특별한 사람 이름에서 따온 거예요?”

“아니, 그건 내 이름이야.”

“네?”

“메클렌부르크가 새 이름을 붙여 주기 전까지는 그랬어. 이 세상에서 단 두 사람만 아는 비밀이었지. 이미 불러 줄 인간은 죽어 버렸지만, 그건 아직까지 내가 가진 가장 큰 비밀이야.”

사람은 이름을 따라간다고들 한다. 그가 쉬지 못하고 신의 사자라 불리게 된 것도 전부 이름 탓일까. 놀람이 잦아들자 조금 슬퍼졌다.

“나라도 노아라고 불러 줄까요?”

“아니. 이대로도 괜찮아.”

왜요, 라고 물으려고 했다. 그때 리온이 담담하게 덧붙였다.

“그렇게 되면 메클렌부르크에겐 아무것도 받은 게 없어지니까.”

베로니카의 눈이 커졌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무거운 침묵이 고였다.

리온의 목소리는 아무렇지 않아서 더 쓸쓸하게 느껴졌다. 우울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그가 고개를 돌리며 특유의 태연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머니에게 뭘 받았는지까지 물을 필요는 없었다. 그의 어머니가 남긴 흉터를 직접 눈으로 보고 있었으니까.

나이를 먹고도 사랑의 흔적을 찾는 우리가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실은 어른이야말로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라서, 모두가 속고 있는 건 아닐까.

어른 같은 건 없어. 아이가 아이를 사랑하는 거야.

“이 정도면 돼? 아니면 아직도 네 비밀을 듣기엔 값이 모자라?”

리온이 그녀 가까이 팔을 짚으며 장난처럼 물었다. 베로니카는 빨개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악수할 때처럼이 아니라 거울에 손을 마주 댈 때처럼.

“손 크기 잴래요?”

“손 크기?”

의아하게 반문하면서도 리온은 순순히 손을 내주었다. 늘 느끼고는 있었지만 직접 대 보니 그의 손은 정말이지 그녀를 한입에 집어삼킬 듯 컸다. 흉터와 굳은살. 도드라진 핏줄과 힘줄. 그을린 구릿빛 손.

이건 그런 사람들에게 특히 하기 좋은 수작질.

“친한 언니들이 맨날 좋아하는 남자 있으면 이거 하라고 알려 줬거든요. 난 손이 작으니까 보호본능을 일으킬 거라고.”

“…….”

“이거 말고도 되게 많았는데. 뭐였지. 아, 눈 마주치고 웃는 거랑….”

잠시 멍하니 있던 리온은 그녀가 눈을 마주치고 생글거리자 사로잡힌 사람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 베로니카는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농담에 더 크게 웃어 주기나 장난인 척 건드리기 같은.

도중에 말을 멈추자 그가 그녀의 손을 꽉 깍지 껴 잡으며 채근했다.

“또? 또 뭘 하라고 했는데?”

그 목소리가 달래듯 달콤해서 베로니카는 망설이다 아, 하며 잡히지 않은 손으로 화로를 가리켜 보였다.

“저기 좀 봐요.”

그리고 리온이 시선을 돌린 순간, 그의 볼에 그녀의 입술이 빠르게 닿았다 떨어졌다. 쪽, 소리가 날 만큼 짧은 찰나의 접촉이었다. 멋대로 저질러 놓고도 베로니카는 선연한 눈동자가 제게로 돌아오자 양 볼을 붉혔다. 그녀를 빤히 보던 리온은 살짝 입술을 벌렸다가 눈가를 문지르며 욕설처럼 나지막이 뇌까렸다.

“진짜 미치겠네.”

입가엔 비틀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 베로니카가 시무룩하게 물었다.

“왜요? 별로예요?”

“그래, 안 통해. 그러니까 나 말고는 아무한테도 하지 마.”

잡힌 손이 뒤로 밀려나면서 시트에 등이 닿았다. 리온이 그녀의 위로 올라타며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엉키는 두 개의 불꽃. 뜨거운 숨이 입술 사이로 흩어질 때마다 등허리가 오싹해졌다.

폭풍전야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폭풍이 닥치기 전의 고요한 밤. 우리가 누렸던 마지막 평화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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