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92)화 (92/128)

아비를 살해하는 딸. 그 배덕한 황실의 그림을 넋 놓고 감상했다.

황제는 노쇠한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꺽꺽거렸지만 요한나는 피 칠갑을 하고도 멈추지 않았다. 계속 단검을 내리찍다가 기사들에 의해 억지로 끌려 나갔다.

피, 비극과 참극과 그리고 또다시 피.

타오르는 붉은 눈은 새파란 드레스와 지독하게 안 어울렸다. 요한나는 제가 그토록 멸시하던 모습으로 몸부림쳤다. 팔다리를 뒤트는 모양새가 예전에 베로니카가 가시를 박은 채 추던 춤을 연상시켰다.

천벌.

“…아.”

가슴 밑바닥에서 요동치는 희미한 희열을 느낀 순간 베로니카는 울렁거려 입을 틀어막았다.

최악이다. 치미는 자기혐오로 속이 메슥거렸다. 남의 불행을 기뻐하다니. 언제부터 이런 사람이 된 거지.

“베로니카!”

그때 요아힘이 모래색 밧줄을 위에서 집어 던졌다. 황실 기사단이 연회장에 들이닥친 것도 그즈음이었다. 벌벌 떨며 주저앉은 나머지 귀족들이 검의 보호 아래 놓였다. 동화되지 않은 대귀족들… 잠깐만, 그러고 보니 황녀는 왜 동화된 거지?

황제나 귀족은 바하무트의 눈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개국 가문의 핏속에 흐르는 성력 탓이다. 성력을 가진 인간이 동화된 사례는 한 번도 보고된 적이 없다. 자살하듯 뛰어내린 귀족들은 개국 가문이 아니라 작위를 돈으로 산 이들이 분명했다.

그렇다는 건….

오싹, 깨달음에 머리털이 쭈뼛 곤두섰다.

“황제의 딸이 아냐….”

베로니카는 기사들이 투기장으로 내려오는 것을 보며 천천히 검을 내려뜨렸다.

타인의 결핍을 보는 일은 언제고 껄끄럽다. 황녀가 살의에 잠식되어 택한 첫 희생자가 왜 황제인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악인은 만들어진다. 최고의 형벌은 그들의 서사를 모른 채 미워하는 것.

***

“논란의 한가운데 거듭 같은 사람이 있다는 건 참 재밌는 일입니다.”

“이런 일이 있을까 봐 갔던 거예요. 문제가 있을 경우를 대비해서 부단장님께 전언도 미리 보냈던 거고요.”

“예상했든 못했든 그런 건 관심 없습니다. 중요한 건 당신이 멋대로 군영을 이탈하고도 참사를 막지 못했다는 겁니다. 누구의 행적과 꼭 닮았군요. 혹 가르침이라도 받은 겁니까?”

베로니카는 입을 꾹 다물었다. 리온까지 모욕하는 데 화가 났지만 서릿발 같은 공기는 반박할 여지 없이 냉랭했다. 필립은 차갑게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시국에 황제 폐하께서 서거하셨습니다. 이 일이 시민들의 귀에 들어가면 어떤 소란이 일어날지 가늠이나 됩니까? 오늘 있었던 사건은 당분간 대외비에 부칠 예정이니 그 누구에게도 언급하지 마십시오. 진정 광야로 가자는 주장을 펼치고 싶었더라면 당신은 적어도 사람들을 한데 모을 중심만은 지켰어야 합니다.”

“그걸 어떻게….”

“데려가.”

필립은 화를 모두 쏟아 내고는 가차 없이 말을 끊었다. 광야에 대해 어떻게 알았는지 묻고 싶었으나 사실상 묻는다고 대답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별수 없이 돌아서자 요아힘이 그녀에게 담요를 둘러 주고 조심스럽게 이끌었다.

밖에는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이제 리온에게 가야 한다고 생각하자 아까의 다툼이 생각나 베로니카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있잖아요, 요아힘. 말다툼하고 그냥 모른 척 넘어가는 건 불가능하겠죠?”

찰박찰박 옆에서 걷던 요아힘이 갸웃하며 되물었다.

“누구랑요?”

“그냥, 누구랑이든.”

“뭐, 넘어갈 수야 있겠지만 임시방편에 불과할 겁니다. 터질 일은 터질 테죠.”

역시 그런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군 채 걸었다. 그러다 문득 아까의 일이 생각나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아까 목걸이 얘긴 뭐였어요?”

“그건… 뭐, 그냥, 아무것도 아닙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요아힘은 한참 고민한 것과 별개로 싱거운 대답을 내놓았다. 베로니카는 그 푸른 눈동자를 흘끗 보고는 리온의 막사 앞에서 멈춰 섰다. 캐묻지 않은 데는 신경이 다른 데 쏠린 탓이 컸다.

리온은 괜찮을까.

아까 열이 펄펄 끓는 채로 두고 나간 게 자꾸 신경 쓰였다. 베로니카는 불빛이 새어 나오는 천막 사이를 물끄러미 보다가 건조하게 인사했다.

“다행이네요. 아무튼 오늘 여러모로 고마웠어요. 내일 봬요.”

따라온 기사들과 목례를 나눈 뒤 다소 조급한 손길로 천막을 걷었다. 빈 침대를 보고 심장이 쿵 내려앉길 잠시, 기척이 들리는 곳으로 재빨리 고개를 튼 베로니카는 그대로 굳었다.

“…….”

뚝, 뚝, 물이 흐르는 젖은 머리칼. 팔에 꿴 검은 튜닉과 헐벗은 상체.

씻고 있던 그와 눈이 마주치자 무형의 힘에 사로잡힌 것처럼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검붉은 눈동자가 뚫어지게 그녀를 보다가 느리게 훑었다. 새삼스럽지만 리온의 빤한 눈길은 사람을 긴장시키는 구석이 있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아까는, 하고 운을 떼려는데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생각이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

베로니카가 어정쩡하게 서 있는 사이 리온은 태연히 옷을 마저 갖춰 입었다. 이제 보니 씻고 있던 게 아니라 다 끝내고 옷을 입던 것 같았다. 평소와 같은 목소리는 아까의 사소한 말다툼 따위는 없었다는 듯 태연했다. 베로니카는 그제야 어색함을 벗어던지고 후다닥 다가가 질문을 쏟아 냈다.

“벌써 이렇게 일어나도 괜찮아요? 열은 내렸어요? 찬물로 씻어도 돼요?”

“응, 아니, 응.”

리온이 장난처럼 대답하곤 픽 웃었다. 베로니카는 제가 한 질문의 순서와 그의 답을 맞혀 보다가 미간을 찡그렸다.

“열도 안 내렸는데 이렇게 찬물을 들이부으면 어떡해요. 수건에 적셔서 필요한 부분만 닦아도 되잖아요.”

“찝찝해서 싫어.”

“그래도.”

“그만해. 조금만 더했다간 걱정이라고 착각하겠어.”

“걱정이에요.”

“날 걱정하는 사람치곤 상당히 늦었는데.”

리온이 뼈 있는 말을 던지고는 그녀의 얼굴을 익숙하게 감싸 쥐었다. 방금 씻어서인지 아니면 제가 열이 올라서인지 길고 곧은 손이 차갑게 느껴졌다. 그에게선 좋은 냄새도 났다. 양 볼을 붉히는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리온이 나직이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

뭐든 대답해 주고 싶어지는 목소리였다. 베로니카는 입을 벙긋거리다 꾹 다물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일부러 옷을 갈아입고 왔는데도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걸 바로 알아채는 그가 신기했다. 아니, 정말 신기한 건 마치 집에 돌아온 것처럼 편안한 느낌을 받는 자신일지도 모른다.

이상하다. 정말… 이상해.

“…부단장님이 말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베로니카는 눈길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리온은 메마른 웃음을 흘렸다.

“그렇겠지. 비텔스바흐는 거의 그 말을 가훈으로 삼아야 해. 시민들이 알면 동요할 겁니다, 당분간 대외비입니다, 잘못된 소문이 돌지 않도록 언행을 똑바로 하십시오.”

목소리는 그가 더 낮고 깊었지만 오늘 필립과 나눈 대화와 어느 정도 일치하는 바람에 베로니카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상황에 안 맞는 것 같아서 참으려고 했는데 그럴수록 입꼬리가 제멋대로 꿈틀거렸다. 리온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웃던 베로니카가 부끄러워질 때까지. 시선이 엉키며 웃음이 잦아들고 마침내 그가 고개를 숙였을 때까지.

“읏.”

자연스럽게 입맞춤이 밀려들었다. 발꿈치가 들리고 그의 옷을 저도 모르게 움켜쥐었다. 혀를 깊이 넣지 않는 부드러운 키스였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기엔 충분했다. 호흡이 먹히는 아찔함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숨을 찾아 고개를 젖히자 리온이 입술을 떼어 내며 속삭였다.

“말해. 애초에 필립의 ‘대외비’란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말이야.”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대답을 주저했다. 그러자 리온은 눈을 내리깐 채 그녀의 입술을 보다가 느릿하게 허리를 바로 세웠다. 그러곤 생각할 시간을 주듯 허리에 찬 검대를 풀어 주었다. 그가 검의 무게를 가져갈수록 마음까지 가벼워지는 착각이 들었다.

“다시는 안 오는 줄 알았어.”

리온이 불쑥 다른 말을 뱉은 건 그때였다. 베로니카는 움찔 놀라 고개를 들었다. 서늘하고 강인한 인상은 여전히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당연히 그럴 리는 없었다. 단지 자연스러운 것뿐.

“이 진영에는 성력을 가진 기사가 넘쳐나는데 나는 네게 이제 아무것도 줄 게 없으니까. 나는 네게 유일하지 않아. 언제든 대체 가능하지. 심지어 다른 이들은 네게 상처 준 일조차 없어.”

아침에 들었던 말이 떠오르자 폐부가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

신경 쓰고 있다. 그녀뿐만 아니라 그도.

그냥 넘어가 봤자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옆에 있고 싶은걸요.”

입술이 충동적으로 움직이자 검을 기대 세우던 리온의 손이 멈칫하며 굳었다. 베로니카는 울렁이는 속을 느끼며 최대한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거 알아요? 인생의 끝에서 만난 사람은 가족이 된대요.”

말에는 재주가 없다. 그래도 전해졌으면 좋겠다. 그가 더는 슬프지 않았으면 좋겠으니까.

“가족은 대체할 수 없어요. 상처를 줘도, 가진 게 없어도.”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형언할 수 없는 얼굴로, 그러니까, 지금까지 본 가장 외롭고 허기진 눈으로.

“유일해요.”

한 사람을 지옥에 빠뜨리는 건 사람, 지옥에서 구원해 내는 것도 사람.

“아무 데도 안 가요. 나는 끝까지 카르트에 남을 거예요.”

베로니카는 언젠가 자신을 구원했던 말을 입에 올렸다.

‘안 가, 아무 데도.’ 그건 공허한 설원에서 그가 속삭였던 말이다.

같은 걸 떠올렸는지 검붉은 눈이 커졌다가 새카맣게 가라앉았다. 기억나지 않는다. 기대 세우려던 검이 먼저 미끄러지며 소음을 냈는지, 혹은 그가 먼저 입을 맞췄는지, 그것도 아니면 그녀가 목을 감싸 안으며 매달렸는지.

다만 머릿속에는 한 가지 사실만이 분명하고도 불길하게 번득였다.

오늘, 바하무트는 그녀를 공격하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 ‘최초’를 죽여야 한다면, 그건 바하무트의 대군을 뚫고 지날 수 있는 그녀여야 마땅했다. 다시 말해 자살이었다. 동화가 그녀를 죽게 할 테니까.

부디, 그날이 오기까지 이 불안한 온기가 오래오래 지속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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