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떠오른 건 오스카의 흥분한 목소리.
“토벌의 공로를 인정해 당신을 황궁 연회에도 초대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얼마나 큰 의미인지 와닿습니까? 평민이 건국제 연회에 발을 들이는 건 카이젠미어 역사상 처음입니다.”
이런 거였구나. 오른발로 반질반질한 대리석을 밟으며 생각했다.
연회장은 엄청나게 컸고, 또 높았고, 또 아름다웠다. 이 세상이 아니라는 착각마저 들 정도로 사방이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웅장한 현악기의 선율과 향긋한 음식의 냄새가 신경을 자극했고 부드러운 웃음소리들이 작은 새소리처럼 귓가에 내려앉았다. 결국 어떻게든 연회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신의 장난처럼 여겨졌다. 마치 운명처럼. 산이 무너져도, 신이 사라져도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마는 것이다.
연미복과 드레스를 차려입은 귀족들의 시선이 스쳐 지나다 하나둘씩 그녀에게 고정되었다. 인간은 복장만으로 이방인이 될 수 있다. 그녀는 새삼 제가 하잘것없는 흰색 튜닉에 평민 남자들이 입는 황갈색 바지를 입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고 얼굴을 붉혔다. 입장이야 요아힘이 있으니 가능했지만 그 이후는 베로니카의 몫이었다.
화려한 연회장을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가장 이목이 집중된 곳. 가장 탐미적인 자리. 그곳에 요한나가 있을 테니까.
그 순간이었다.
“어머, 요아힘?”
오랜만에 듣는 달콤한 목소리에 머리끝까지 소름이 끼쳤다. 돌아서자마자 시야에 쏟아지는 색깔의 잔치에 목까지 숨이 턱 막혀 왔다.
“반가운 손님을 모셔 왔구나.”
샹들리에가 떨어뜨린 불빛이 꿀 같은 금발 위로 찬란하게 부서져 내렸다. 새파란 목걸이와 새파란 드레스. 같은 색의 눈동자에는 적의, 아니, 악의에 가까운 감정이 넘실거렸다. 파랑은 결국 불의 색이었다.
“누님?”
요아힘도 같은 압박감을 느꼈는지 쉰 소리를 냈다. 요한나는 화사하게 웃었다.
“내 친우를 데리고 와 줘서 고마워.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데려와 달라고 부탁한 건 저예요, 전하.”
용기를 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자 요한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가 미소를 유지한 채 부채를 접었다.
“완벽한 복장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그렇게라도 오고 싶었다니 기뻐. 그간 시끄러운 소식은 잘 전해 들었어. 죽었다가 살아 돌아오다니, 성녀라 그런지 신의 역사와도 일치하는구나.”
그녀는 부드럽게 빈정거렸지만 예전처럼 타격을 주지는 못했다. 왜 그땐 요한나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벌벌 떨었을까. 왜 하나하나 부러워서 그토록 시선을 떼지 못했을까. 더 예뻐서? 다 가진 것 같아서?
설령 그렇다 한들 가학적인 행위로만 살아 있음을 느끼는 불행한 사람인데.
그녀가 가엽고 불쌍했다.
이제야 리온의 말을 믿을 수 있었다. 그가 요한나를 사랑했을 리 없다. 사랑은 채우는 행위인데 요한나에게는 그를 채워 줄 여유가 없었다. 오히려 더 커다란 결핍이 엿보였다. 누구보다 크고 깊어서 타인까지 빨아들이는 검은 구멍이.
“내가 본 너는 미련하지만 어리석지는 않았지. 그때는 황실의 서고, 이번에는 뭘 원해서 왔니?”
요한나가 바짝 다가서며 악마처럼 속삭여 물었다. 뱀, 같다고 생각했다. 베로니카는 기죽지 않고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뵈었을 때, 황제 폐하께 광야로의 이주를 말해 보신다고 하셨는데 기억하시나요?”
“광야? 아.”
요한나가 길게 탄사를 늘이더니 입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그래, 말은 해 봤어. 그런데 어디 현실성 있는 소리여야 말이지. 설령 광야가 안전하다고 해도 가기만 하면 끝이 아니잖아. 물은? 음식은? 그 많은 백성이 거기서 하루라도 버틸 수 있을까? 차라리 카르트에 남아 바하무트에게 먹혀 죽느니만 못하지.”
“성전에서 ‘광야의 기적’을 읽어 본 적 있으세요?”
“하늘에서 양식이 떨어져 백성들이 40년간 먹고살았다는 이야기 말이니? 이런, 안타깝지만 그건 그냥 신화란다. 실망인걸. 이제 너도 교회의 거짓말은 구분할 때가 되었을 텐데.”
요한나가 쯧쯧 혀를 찼다. 베로니카는 더 설득하려 들지 않았다. 그녀 자신도 의심하고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실로 광야가 약속된 곳이라면 그곳으로 탈출했을 때의 생존 또한 인간이 걱정할 바는 아닌지도 모른다. 근심이야말로 신의 몫.
“황제 폐하께서도 같은 생각이신가요?”
“알현을 위해 온 거구나?”
“네.”
“대가는?”
황실 서고에 드나들기 위해 황녀의 친우가 되었고, 광야의 언급을 위해 리온에게 손수건을 전달했다. 그러니 오늘은.
“바하무트와의 투기에 제가 들어가겠어요.”
요한나의 눈이 마치 생쥐를 눈앞에 둔 부엉이처럼 벌어졌다. 연회장 저 멀리에서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진 것과 그녀가 장갑 낀 손으로 베로니카를 덥석 움켜쥔 건 순서를 따지기 애매할 정도로 거의 동시였다.
흡사 목덜미를 잡아채는 발톱 같았다. 박힐까 봐 굳이 몸부림치지는 않았다.
***
지하 연회장은 궁전의 면적만큼이나 넓은데, 그 중앙에는 구멍이 뻥 뚫린 채 원형 투기장이 놓여 있다. 원래는 외국의 포로를 데려다 싸움 붙이거나 기사들의 공식 결투를 지켜보는 용도다.
베로니카는 그 한가운데 서 있었다. 눈길과 샹들리에의 불빛이 따갑도록 쏟아졌다.
제아무리 바하무트라 해도 구경꾼들이 있는 난간까지 뛸 수는 없을 것이다. 베로니카는 황실 기사의 살해범이라는 소개를 들으며 일부러 그런 생각에 몰두했다. 그들은 아무도 그녀의 이름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살아남은 동화자, 교회의 성녀라는 소문, 붉은 눈의 사형수, 뭐 그 정도면 차고 넘친다. 애초에 지금 카르트에 베로니카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베로니카는 연회장에서도 가장 높은 상석에 앉아 그녀를 내려다보는 황제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옆머리를 괴고 늘어져 있던 늙은 황제는 긴긴 소개가 끝나고서야 검버섯이 핀 손을 휘저으며 근엄하게 선언했다.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게 전투에 임하라.”
성전의 구절을 인용한 것이지만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문장이었다. 베로니카는 허리를 숙여 예의를 표하고 검을 잡았다.
잘되면 광야를 상류 사회에 알릴 기회이고, 잘 안 되어도 조마조마한 사고를 막은 셈이 된다.
저번과 달리 이길 거란 자신도 있었다.
부우우, 나팔이 울자 사방이 고요해졌다.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나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듯한 정적이었다. 그 속에서 베로니카는 침을 질질 흘리던 사나운 얼굴들을 떠올렸다. 그들도 그녀의 존재를 ‘느꼈’을까…?
그늘 속에서 창살이 열리고 터벅터벅 육중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인간보다 훨씬 큰 기척이 앞뒤 양옆에서 하나, 둘, 잠깐만.
베로니카는 떨어질 듯 난간에 기대선 요한나를 노려보았다. 한 마리라더니, 있는 전부를 풀었다.
열 마리도 넘는 개체가 그늘에서 느리게 걸어 나왔다. 광장에서 겪은 난리를 생각하면 이 정도 수는 일도 아니지만, 타인이 품은 악의야말로 진정 소름 끼치는 것이었다. 죽으라는 말이겠지.
괜찮아. 할 수 있어. 좀 더 시간을 끌고, 황제가 실컷 즐길 시간을 준 후에.
쾅!
바하무트가 돌발행동을 저지른 건 그 순간이었다. 베로니카는 놀라서 난간으로 뛰어오르려다 바닥에 추락한 바하무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쪽에 섰던 귀족들이 비명을 지르며 와르르 물러났다.
“…뭐 …왜?”
왜 나한테 달려들지 않고?
십여 마리 모두 베로니카는 보지 못한 것처럼 난간 위의 인간들을 향해 연거푸 귀뚜라미처럼 뛰어올랐다 나동그라졌다. 시끄러운 소란을 들으며 베로니카는 잔뜩 긴장해서 들고 있던 검을 내렸다.
설마 동족으로 생각하는 건가? 안 보이는 게 아니라?
돌이켜 보면 광장에서도 먼저 공격하기 전까진 그녀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검을 갈무리하고 근처에 있는 바하무트에게 접근했다. 앞에 우뚝 서자 그것이 뛰려다 멈칫하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베로니카는 숨을 참았다. 팔이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구부린 바하무트가 얼굴을 베로니카의 앞까지 그드득 들이댔다. 냄새를 맡으려는 것 같았다. 인간의 두 배는 됨직한 흰 얼굴, 털이 없어 그로테스크한 머리와 벌어진 입… 훅훅 내쉬는 입김이 얼굴에 와 닿았다. 빨아들이는 듯 머리칼 몇 가닥이 흔들렸다. 이전에 바다 비린내가 났다면 지금은 고기 누린내가 났다. 눌러 참던 숨이 점점 모자랐다. 대체, 언제까지….
“…아.”
멍청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눈이, 열렸다.
그것은 그녀를 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언제부터?
심장이 멎는 것 같은 고동 속에서 베로니카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절박한 깨달음이 치달았다. 베로니카는 곧장 검을 뽑아 그것의 목을 위로 베어 내곤 뒤돌아서 절규했다.
“모두 눈을 감아요!”
언제나 그렇듯 소리는 너무 늦었다. 쿵, 쿠광, 난간에서 사람들이 자살하듯 뛰어내렸다. 혼비백산한 비명조차 없었다. 새빨간 눈을 한 귀족들이 기꺼이 자유 낙하하며 서로 부딪히고 나동그라져 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냈다. 바하무트들은 기다렸다는 듯 그들을 손으로 잡아채 씹어 먹었다.
베로니카는 검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피와 살점이 튀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동화자들이었다. 그녀는 그들을 죽일 수 없었다. 연회장 끄트머리에서부터 달려온 기사들도 제 주군을 어쩌지 못하고 하얗게 질린 건 마찬가지였다. 혼란에 어찔어찔한 현기증이 치밀었다. 완전히 거꾸로였다. 이제 구경꾼은 그녀였고 구경거리가 된 것은 그들이었다. 마치 복수나 혁명처럼. 올바른 지배층이 재설정된 것처럼.
이를 악물던 베로니카는 급하게 요아힘을 찾아 눈을 굴렸다. 그러나 이리저리 구르던 눈동자가 멎었을 때, 그녀는 오싹한 전율에 사로잡혔다.
누군가의 비명.
붉은 눈의 황녀가 푸른 눈의 황제를 난도질하고 있었다.
아, 그것은 그야말로 금기의 현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