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90)화 (90/128)

말도 안 되는 소리. 최초의 바하무트를 포기하겠다고? 이제 와서 왜?

바쁜 병사들 사이를 헤치고 거닐며 베로니카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몇 번을 자문해도 이유는 같았다. 자신 때문이다.

뒤에서 믿고 의지하는 시민들을 위해 물러설 수 없었던 것처럼, 리온은 이번엔 앞에 서 있는 베로니카 때문에 도망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네가 살아남아 행복하기를 바라.”

그 나직한 목소리를 상기한 순간 베로니카는 혼잡한 군영 한복판에서 길 잃은 아이처럼 우뚝 멈춰 섰다.

“지옥도 같이 갈 것처럼 굴었으면서.”

빗물이 고인 진창을 밟은 채 중얼거렸다. 발 옆으로 둥근 파문이 번졌다. 어쩌면 그는 영영 사랑 따위는 입에 올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리온 베르크는 그런 사람이다. 파괴보다 포기를 택할 사람. 사랑하는 존재가 망가지는 걸 더는 견딜 수 없는 사람.

“바보 같아.”

짓씹은 여린 살에서 비린 맛이 느껴졌다. 리온의 논리는 엉망이었다. 바하무트를 섬멸할 기회를 저버리겠다니. 그건 그녀 한 명을 살리기 위해 수억 명의 희생을 외면하겠단 소리였다.

수지가 맞지 않았다. 한 사람이 감당하기엔 너무 무거운 무게다. 그 혼자 짊어지기엔 죄책감이 너무 크다.

우는 건 지긋지긋한데, 자꾸만 눈가가 뜨거워져 얼굴을 감싸 쥐었다. 모든 게 엉망이었다. 일어나서 하고 싶었던 진솔한 대화는 결코 이런 게 아니었다. 그저 그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을 뿐인데. 어째서.

“하아, 한참 찾았습니다.”

상념에 침잠하는 순간 누군가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퍼뜩 깨어난 베로니카는 고개를 들어 얼굴이 벌게진 요아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그녀를 찾아 군영 여기저기를 뛰어다닌 듯 어깨숨을 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뒤늦은 현실감을 불러일으켰다.

아, 말도 안 하고 그냥 뛰쳐나와 버렸지.

“미안해요. 겨를이 없다 보니까.”

이어지던 말은 요아힘의 어깨 너머를 본 순간 끊어졌다. 시선을 빼앗긴 베로니카는 제 눈을 의심했다. 잠시나마 리온에 대한 생각조차 잊을 정도로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그녀가 제 등 뒤만 보자 요아힘도 덩달아 몸을 틀었다. 눈처럼 흰 장벽을 배경으로 군마들이 검은색 우리 여러 대를 덜컹거리며 끌고 오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창살 안에는….

“저게 뭐죠…?”

베로니카가 작게 물었다. 진짜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니었다. 가늘게 뜬 눈은 그저 시야에 담긴 것을 부정하고 싶어 했다. 쇠사슬에 친친 묶인 운반물의 정체, 그건 바하무트였다.

살아있는 진짜 바하무트. 한 마리도 아니고 튼튼한 우리는 열대도 넘게 이어졌다.

“생포한 바하무트입니다.”

요아힘이 물끄러미 성벽 쪽을 보며 대답했다.

“황궁으로 옮기는 걸 겁니다.”

“황궁이요? 왜요? 실험이라도 하려는 거에요?”

“그런 생산적인 목적이라면 좋겠지만….”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검은 우리를 보며 그가 말끝을 흐렸다. 어느새 군영의 병사들도 진귀한 행렬을 구경하느라 멈춰 서 있었다. 덜컹거리는 검은 창살이 눈앞까지 다가오자 베로니카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진짜 바하무트였다.

팔다리며 목을 죄다 묶여서 옴짝달싹 못해도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건 선명하게 보였다. 눈도 못 뜬 큼직한 얼굴이 입을 벌리고 침을 뚝뚝 떨어뜨릴 때마다 사람들이 흠칫거렸다. 간간이 귓가에 파고드는 욕설과 기도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저걸 굳이 생포하느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을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분명 특별한 필요가 있어서….

“연회에 구경거리로 쓰기 위해 데려가고 있는 겁니다.”

홱 고개를 돌렸다. 베로니카는 이번엔 귀를 의심해야 했다. 설명을 요구하듯 노려보자 요아힘이 덧붙였다.

“산사태 이후부터 황궁에선 날마다 연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건국제를 위해 준비해 둔 술과 음식을 누리고 악단의 노래와 광대의 재롱을 즐기는 식입니다. 뭐, 카르트의 모든 귀족이 초대에 응하는 건 아니지만. 듣기론 오늘은 생포한 바하무트를 데려다 황실의 기사와 맞붙일 예정이라고 합니다.”

발음이 또렷한데도 물속처럼 아득하게 들렸다. 벙쪄있던 베로니카는 이내 헛웃음을 흘렸다. 말도 안 되게 위험한 발상이었다. 살아있는 폭탄을 데리고 뭘 한다고? 머리까지 돋아났는데 이제 눈을 뜰지도 모른단 생각은 아무도 안 하는 건가?

못된 농담처럼 느껴졌다. 리온은 죽음의 고비를 넘겨 가면서 벽을 지켰는데. 누군가는 그 사실은 알지도 못한 채 웃고 떠들며 전투를 유흥 거리로 삼고 있었다.

믿기지 않는데 동시에 믿을 수밖에 없는 건 그 이야기에 어딘가 익숙한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하무트를 데려다 황실의 기사와 맞붙인다.’ 그 발상은 베로니카도 겪은 적이 있었다. 잊고 있던 황궁에서의 결투가 떠오르자 불쾌감으로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저들만 아는 상류 사회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지금 카르트 밖에선 바하무트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집 없이 떠돌며 굶어 죽어가고 있을 텐데.

너무 화나면 웃음이 난다는 건 또 처음 알았다.

인간은 참 재미있는 존재다. 모르긴 몰라도 신은 인간을 지켜보는 일만으로 영생을 버티고 있을 것이다.

“당장 카르트가 무너질지도 모르는데 연회라니. 제정신이에요?”

“쉬이, 목소리를 낮추십시오. 그리고 뭘 모르나 본데 무너질지도 모르니까 즐기고 노는 겁니다. 지난 연회에서는 황제 폐하께서 ‘환락이야말로 종말의 주인’이라는 프리드리히 2세의 말까지 인용하셨지요.”

요아힘은 누가 들을까 겁난다는 듯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그는 폭군이었잖아요.”

베로니카가 거침없이 받아치자 그는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황족과 귀족들을 변호할 생각은 딱히 없어 보였다.

“아무튼 궁금증을 해결했으면 다시 막사로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성벽 가까이까지 오다니 너무 멀리 나왔습니다.”

“하지만….”

“베르크 경에게 밉보이고 싶진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분이라.”

많은 의미가 함축된 말에 베로니카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십 대 임이 여실히 드러나는 혈색 좋은 얼굴엔 조금은 얄미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초반에 경계하는 것만 보고 필립이나 오스카 쪽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낯을 빨리 트는 성격이었나.

그 넉살 좋아 보이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뭔가가 생각났다. 그건 말하자면 벼락과도 같은 깨달음, 혹은 직감에 가까운 억측이었다.

“그럼 제게 밉보이지 않는 게 먼저겠네요. 리온에게 뭐라고 말을 전할지는 모르는 거잖아요?”

“말을 전하다니요?”

“전할 말이야 많죠. 신께 충실해야 할 견습 기사가 제게 반해서 졸졸 쫓아다닌다거나.”

요아힘의 반질거리던 얼굴이 순식간에 어처구니없다는 빛을 띠었다. 베로니카는 그가 그랬듯 싱긋 웃어 보였다.

그는 푸른 피로 이루어진 신성 기사단 소속이다. 개중에서도 베로니카의 연행에 앞장 섰다는 건 꽤나 좋은 집안 출신이라는 뜻이고. 아무리 귀족들을 초대했대도 오늘의 연회 계획까지 속속들이 알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막사로 돌아가기 전에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서요.”

요한나 황녀와 똑같은 금발에 푸른 눈. 서글서글하고 사랑스러운 이목구비. 그 흔치 않은 특징이 왜 지금에서야 보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

“미친 짓입니다.”

“알아요. 그래서 들어오기 직전에 부단장님께 자백하는 전언도 보냈잖아요. 다 제가 멋대로 협박한 거라고 했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오랜만에 카르트 황궁에 발을 들이니 기분이 이상했다. 아니, 기분이 이상한 이유는 사실 옆에 황녀의 이복동생을 끼고 걷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기나긴 이름을 빼고 베로니카도 알만한 이름과 성만 남기면 견습 기사의 이름은 요아힘 폰 카이젠미어로, 무려 22황자라고 했다. 서열 다툼을 하기도 우스운 입지라 그의 어머니는 일찍이 그를 수도원에 넣었다고 했다. 팔라딘이 되면 적어도 명예는 챙길 수 있을 테니까.

“진영을 빠져나온 게 미쳤다는 게 아니라, 당신이 제 발로 여기 들어온 게 미친 짓이라는 겁니다. 또 끌려가서 결투라도 하려고요?”

“그러려고 온 거 어떻게 알았어요?”

심드렁히 받아치자 요아힘이 갸웃거렸다. 진짜 미친 여자를 보는 얼굴이라 흘긋 봤다가 상황에 맞지 않는 웃음을 흘렸다.

리온이 알면 화를 내겠지. 지금 제가 하려는 건 위험한 모험이니까. 그래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위험을 감수하기엔 예감이 불길했다.

막사를 뛰쳐나와 딴 길로 샌 건 신의 한 수가 된 셈이었다. 지금쯤 베로니카의 감시로 붙었던 다른 병사들은 죄다 군영 여기저기를 헤매고 있을 터였다. 새벽에, 불시에 막사에서 튀어 나가서 가능했던 따돌림이다.

“그런데 왜 지하로 가요? 저번 결투는 궁전 꼭대기에서 했던 것 같은데.”

“바하무트가 날뛰어도 안전해야 하는 데다 알다시피 백성들에게 새어나갔다간 곤란해지는 문제기 때문입니다.”

요아힘이 시종의 안내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며 답했다. 새삼스럽지만 재판장에서 그를 구한 건 정말 잘한 일이었다. 요아힘은 지금 위험을 무릅쓰고 그녀에게 목숨의 빚을 갚는 중이었다. 아무리 황족이래도 외국의 비가 낳은 스물두 번째 아들이 힘이 있을 리 없다. 부디 폐만 끼치지 말자고 생각하는데 요아힘이 갑자기 뒤돌아서며 물었다.

“그런데 계속 궁금했는데, 베르크 경의 상태는 어떻게 그렇게 단숨에 좋아진 겁니까?”

“아, 그건 아마 이 크로이츠 목걸이 덕분일 거예요.”

십자가를 만지작거리자 요아힘의 눈이 댕그랗게 커졌다.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 같은 얼굴은 어디 가고 순식간에 당황한 표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크로이츠는….”

크로이츠는?

대답을 기다렸으나 나머지 말은 문이 열리면서 흘러나온 연주에 먹혀버렸다. 두 사람은 동시에 시선을 정면으로 틀었고 베로니카는 펼쳐진 광경에 질문도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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