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89)화 (89/128)

“아, 미안해요. 걱정하는 마음을 오해한 거라면.”

견습 기사는 어색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덕분에 질문 하나는 사라졌다. 신검의 위험성을 아는 리온이 왜 멈추지 않았는지.

이런 사람들 때문이다. 눈앞의 청년 같은 사람들이 뒤에서 그를 믿고 의지했기 때문이다. 가장 앞에 선 인간은 물러설 수 없는 법이다.

“…뜬금없게 들릴 건 아는데, 생각해 보니까 통성명도 하지 않았네요. 이름이 뭐예요?”

물끄러미 상대를 살피던 베로니카는 불쑥 쾌활한 질문을 던졌다. 또래로 보이는 기사는 분명 카르트의 귀족이겠지만, 지금 그녀의 위치로선 그것도 딱히 상관없었다.

“폰이니 성씨니 하는 거 제외하고 그냥 불리는 이름이요. 난 베로니카예요.”

악수를 청하자 기사는 경계하는 표정으로 천천히 손을 맞잡았다. 귀족에게 감히 이름만 묻는 평민을 처음 보기도 했을 것이다.

“요아힘입니다.”

“요아힘. 리온에게도 이름을 전해 줄게요. 당신이 도와줬다고요.”

요아힘은 놀란 눈치였다. 리온을 편하게 부르는 데 놀란 건지 아니면 제가 재판에 끌고 갔던 여자의 호의에 놀란 건지 모르겠지만.

베로니카는 미소 지었다.

“그럼 부탁드려요. 진통제랑 씻을 물, 그리고 소화하기 쉬운 아침 식사도요.”

옅은 금발 아래로 잘 자란 도련님 같은 얼굴이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왠지 인간적이라 베로니카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가끔은 성격이 좋은 건지 순진한 건지 구분이 안 가.”

막사로 들어오자 리온이 낮게 입을 열었다. 어느새 일어나 앉은 그는 젖힌 고개를 침대 머리에 기댄 채였다.

“다 들었으면 굳이 이름을 전해 줄 필요는 없겠네요. 들은 거 맞죠? 요아힘이래요.”

“내가 없는 사이 견습 기사들이 널 멋대로 재판에 데려갔다던데.”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당신을 위해 저렇게 나서는 것만 봐도요.”

리온이 무표정하게 고개를 내렸다. 흘러내린 적발이 눈가에 음영을 드리워서 베로니카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어제 제가 감겨 준 결 좋은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감겼다. 리온은 가만히 있었다.

“오스카와 한나한테서 배운 거예요. 용서와 호의.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리온의 그늘진 눈동자는 용서를 들을 때 잠깐 번득였다가 짙게 가라앉았다. 베로니카는 머리를 정돈하던 손을 내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운을 뗐다.

“내가 썼던 편지, 소지품 사이에서 봤어요.”

리온의 낯이 살짝 굳었다. 편지의 내용을 떠올린 것처럼.

“어디서 찾은 거예요?”

“…황녀의 시녀가 가져다줬어. 네게 사죄하고 싶다고.”

요한나의 시녀라니, 생각도 못 한 인물이다. 의외라고 생각하면서도 베로니카는 그녀를 금방 기억해 냈다. 서고까지 안내해 준 사람이다. 가시가 든 신발을 놓아주기도 했었고. 단지 황녀의 명령만 따르는 줄 알았지만 역시 세상에 그런 조연 같은 인물은 없다.

“그걸 왜 가지고 다녔는데요?”

“끝까지 기억하고 싶었어.”

첫 질문과 달리 대답은 순순히 흘러나왔다.

“내가 네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깊은 정적이 흘렀다. 베로니카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남자를 보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가면 따위는 없다. 그들은 마침내 서로를 마주 들여다보고 있었다. 엇갈리거나 밀어내지 않은 채, 그 지리한 위악의 시간을 지나 드디어.

“나는 진심으로, 네가 살아남아 행복하기를 바라.”

말을 잇는 리온의 어조는 낮고 어른스러웠다. 베로니카는 그것이 포기임을 알아보았다. 수없이 사랑을 잃었던 소년은 체념을 아는 어른으로 자라났다.

“그렇기에 더는 최초의 바하무트를 죽일 생각은 없어.”

“그게 무슨….”

“신인류의 탄생이 신의 섭리라면 그걸 지켜보는 수밖에 없겠지. 남은 건 마지막까지 카르트를 지키는 일 정도야.”

잠깐만, 최초의 바하무트를 잡는 건 당신의 목표였잖아. 인류의 사활이 달려 있었잖아. 그런데 그걸 다 포기하고 죽을 때까지 카르트에 남아 싸우겠다고?

“네가 광야로의 이주를 생각한다는 건 알지만 현실적으로 시민 전체를 한 번에 이동시키는 건 불가능해. 누군가는 남아서 싸워야만 하지. 나는 타인의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어. 그냥 그렇게 생겨 먹은 인간이야.”

한 번만 더.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리온은 기적적으로 눈을 뜬 순간부터 재생을 기도했다. 3년은커녕 이번이 마지막이겠지만 그걸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꿈에서 그는 선택을 끝마쳤다. 천칭의 저울은 한 여자를 향해 기울었다.

그는 그녀를 죽일 수 없었다. 저울의 반대편에 인류의 운명이 걸려 있다 해도. 아니, 그 무엇이 있어도 결론은 같았다. 그렇다면 죽어 간 동료들에게 신의를 지키는 길은 마지막까지 멸망하는 카르트에 남는 일뿐이었다. 그는 약자를 지키고 교회를 수호하는 팔라딘이었다. 성도에 남아 떠나지 못한 사람들을 지켜야 한다. 그의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피난민 속에 베로니카를 보낼 때까지.

그게 그가 찾아낸 좁은 길이었다.

“그러니 떠날 때까지만 같이 있는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어. 물론 네가 나와 함께 있고 싶어 할지는 미지수지만.”

파리하게 질린 베로니카를 보며 리온은 태연하게 말을 끝마쳤다. 베로니카는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어째서 그렇게 항상….”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제멋대로예요? 왜 멋대로 결정해요?”

화가 났다. 그런데 뭐에 화가 나는지 모르겠다.

“언제는 죽일 거였다가, 제멋대로 살리기로 결정하고. 떠날 때까지라고요? 내가 광야로 갈 거라고 왜 당신이 결정하는데요?”

그녀의 목소리가 흔들리자 리온의 얼굴에서도 천천히 여유가 가셨다. 서늘한 무표정을 응시하며 베로니카는 하고 싶은 말을 참지 않고 토해 냈다.

“왜 내가 당신과 같이 있고 싶어 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요? 아프다고 와 있는 거 보면 몰라요? 눈이 붓도록 울고 옆에 붙어 있는데도 모르겠어요?”

머리가 어떤 결정을 내렸든 미련한 마음은 아직도 그를 좋아한다. 그것만이 진실이었다. 세상에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를 붙들고서 몇 번이고 안아 달라고 하는 여자가 어디 있나. 그런데도 눈치 빠른 사람이 모르는 척하니 답답했다.

“네가 홧김으로라도 오스카를 좋아한다고 말했으니까.”

그 순간 낮은 목소리가 분노를 관통했다. 베로니카는 멈칫 굳었다.

“이 진영에는 성력을 가진 기사가 넘쳐나는데 나는 네게 이제 아무것도 줄 게 없으니까. 나는 네게 유일하지 않아. 언제든 대체 가능하지. 심지어 다른 이들은 네게 상처 준 일조차 없어.”

아연해졌다. 베로니카는 그의 어조에 깃든 불안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필요 같은 건 상관없어요.”

끊어질 것 같은 부정이 흘러나왔다. 베로니카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뱉었다.

“내가 당신처럼 굴까 봐서요? 걱정하지 마요. 나는 필요해야만 옆에 두는 사람이 아니에요. 절대로 그렇게 잔혹하진 못하죠.”

어떤 말은 의지와 관계없이 상대를 상처입힌다. 베로니카는 마지막 문장에 얼어붙은 리온을 보며 제가 말실수했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입술을 달싹여도 이렇다 할 말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혀는 꼭 중요한 순간에 의지를 배반한다.

정적이 흐르길 잠시, 베로니카는 이내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서로 잠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물러나던 발은 들어오던 요아힘과 부딪힌 순간 방향을 틀었다. 어디로 갈지도 모르면서 천막을 젖히고 나가 버렸다. 방금 들은 이야기들로 어지러운 머릿속은 질퍽거리는 흙바닥과 닮아 있었다.

***

진통제를 전한 요아힘은 베로니카를 찾기 위해 다시 밖으로 나갔다.

리온은 나가는 기사의 뒷모습을 보다가 사나운 실소를 흘리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격통 속에서도 타오르는 독점욕이 우스웠다. 타협의 여지가 없는 강렬한 종류의 소유욕이었다. 그녀를 원했다. 그녀를 온전히 가지고 싶었다. 인간이 품을 수 있는 가장 소름 끼치는 욕망이 그녀의 영혼까지 닿고 싶어 안달했다. 수년간 억누르던 충동이 터진 것처럼. 제 의무를 다하는 어린 기사까지 거슬릴 정도로.

새삼스러운 질투였다. 동화되지 않았더라면 어차피 그녀는 제 또래의 남자를 만나 평범하게 사랑하고 살아갔을 텐데.

안온한 일상, 그건 리온이 절대로 가질 수 없는 행복이었다. 심사가 묘하게 뒤틀렸다. 불행에 뿌리를 박고 자란 사랑이 부서진 정신에 대고 속살거렸다. 네가 바하무트의 축복이 아니고서야 감히 그녀를 안아 볼 수나 있었겠느냐고. 신념을 떠나서 그는 베르크였고 그녀보다 아홉 살이나 많았다.

리온은 제가 미쳐 가고 있음을 느꼈다. 의식의 흐름대로 흘러가는 사고는 모래성처럼 느리게 붕괴하고 있었다. 머릿속에선 끊임없이 베로니카의 목소리가 울렸다. 다른 이름을 입에 올리며 좋아한다고 말하던.

그게 홧김이 아니었다면? 제게 안겨 입을 맞추면서도 마음은 다른 데 있었다면? 신경을 저미는 감각이 칼처럼 예리해졌다.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회의적인 질문을 불러왔다.

그 겨울에 그녀는 진실로 그를 좋아했던가? 그건 어쩌면 인생의 밑바닥에서 마주하는 환각과 비슷한 것 아니었던가? 저체온증을 겪는 병사들이 마지막 순간 느끼는 뇌의 착각. 존재하지 않는 온기 같은 것.

그 순간 기침이 치밀어 리온은 몸을 구부리며 검붉은 피를 후드득 토해 냈다. 막사 지붕에서 떨어지는 빗소리에 맞춰 툭, 투득, 진득한 피가 손과 허벅지로 쏟아져 내렸다.

불현듯 티란에 주둔할 때 봤던 거대한 모래시계가 떠올랐다. 티란의 중앙 광장에는 1년짜리 모래시계가 있었는데 ‘한 번 지나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어느 왕의 금언이 새겨져 있었다.

피가 모래시계 속의 모래알처럼 보였다. 돌이킬 수 없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의 수명도, 카르트의 운명도. 리온은 피로 얼룩진 손을 뚫어지게 보다가 다시 벽에 고개를 기대 젖히고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눈앞에 손을 들어 올려 천천히 쥐었다 피기를 반복했다. 무너진 내장이 짜 맞춰지며 재생하는 고통이 적나라했다.

검은 늪이 영혼을 잠식해 온다. 갉아 먹는다. 흐린 동공이 제멋대로 꿈틀거리는 손을 바라보다 침대로 늘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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