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88)화 (88/128)

“…리온?”

이상을 눈치챈 건 그가 키스 도중 멈췄기 때문이다. 베로니카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선명한 적안을 마주했다. 초점이 돌아온 눈동자가 그녀를 뚫어지게 보다가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크로이츠….”

그가 중얼거렸다. 베로니카는 그제야 교회의 성물이 아직까지 목에 걸려 있음을 깨달았다.

“아, 이건 교황청에서 받아 온… 설마 이 목걸이의 도움을 받은 거예요?”

“조금은.”

나지막이 대답한 리온이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통증이 심각한 것 같았다. 하지만 처음 봤을 때를 떠올리면 눈을 뜬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리온은 상황을 파악하듯 막사 안을 둘러보다가 다시금 시선을 그녀에게 내렸다.

“네가 왜 여기 있지?”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에요. 당신이 이렇게 요란하게 다치지만 않았어도 성벽까지 오는 일은….”

방금의 상황이 민망해 불퉁하게 내뱉다가 막사에 들어왔던 순간이 떠올라 입을 다물었다. 정말로 죽는 줄로만 알았다. 돌이켜도 악몽 같았다. 갑자기 설움이 북받쳐 말을 잇지 못하자 리온이 물끄러미 보다 뺨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왜? 죽기라도 할 줄 알았어?”

“뭘 모르나 본데 그럴 줄 안 게 아니라 당신 진짜로 죽을 뻔했다고요.”

“안 죽어. 저번에 말했잖아. 해야 할 말도 있고 전해 줄 것도 있다고.”

이상하다. 왜 눈뜬 모습을 보는데도 불안감이 가시지 않을까. 거울이 깨지고 새가 날아와 부딪힐 때 같다.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아서 심장의 두근거림이 멎지를 않았다.

“할 말이 뭔데요?”

“나중에, 알려 줄게.”

피로한 목소리로 대꾸한 리온은 이내 그녀의 목에 고개를 묻었다. 멀쩡해 보여도 숨소리는 여전히 불규칙했다. 베로니카는 그의 등이 경련하는 걸 보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의무병을 부를 생각으로 숨을 들이마시는데 눈치챈 리온이 선수 치듯 속삭였다.

“아무도 부르지 마. 재생 중에는 어차피 의사도 도움을 주지 못해.”

“그래도….”

“불안하면 그냥 옆에 있어. 네 말대로 크로이츠 덕을 보긴 한 것 같으니까.”

안도와 불안이 동시에 휘몰아쳤다. 마음이란 얼마나 간사한지, 두 마음이 뿌리를 내려도 너그럽게 자리를 내준다. 다른 목적으로 지니고 있던 목걸이가 도움이 된 건 다행이었지만 리온은 결코 나아졌다고 말할 수 없는 상태였다. 오히려 그녀가 있어서 몸부림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베로니카는 초조하게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충동적으로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솨아아, 밖에선 여전히 비가 내렸다.

“생각났어.”

목덜미에서 아픈 사람 특유의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널 혼자 두고 간 때가 언젠지.”

처음에는 갑자기 바뀐 화제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말이 이어지자 리온이 뭘 말하고자 하는지는 보다 명백해졌다.

“교황청에서 나와 여관에서 같이 지낼 때.”

“…….”

“아침에 깨우지 않고 나간 건 더 자라는 뜻이었어. 그냥, 그게 다야. 서운한 일이라곤 생각도 못 했어.”

담담한 말에 베로니카는 멍해졌다. 죽다 살아나서 하는 이야기가 아침의 연장선이라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오늘 나가기 전에 들은 말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아침에 베로니카는 식사를 가지러 나간 리온에게 당연히 가 버린 줄 알았다고 말했다. 늘 혼자 두고 가지 않았느냐고.

“미안.”

리온이 나지막이 사과했다. 또다시, 지칠 줄도 모르고.

미안, 베로니카는 벌써 여러 번 듣는 사과를 속으로 되뇌었다. 그 말이 뭐라고 들을 때마다 마음이 슬퍼졌다. 눈을 감자 비 냄새가 너무 진해서 코끝이 먹먹했다.

“어릴 때 수도원에서 기도할 때 말이야. 다른 녀석들은 지은 죄만 고백하는데 나는 꼭 마지막에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죄까지도 다 용서해 달라고 말하곤 했어. 무서웠거든. 혹시 내가 모른 채 스쳐 지나가는 잘못이 있을까 봐.”

“…….”

“너한테도 그래. 그래서 계속 신경 쓰여.”

그의 손이 그녀의 머리칼 속으로 파고들었다. 부들부들 제멋대로 비틀리는 기다란 손가락이 그녀의 머리칼을 느리게 매만졌다. 베로니카는 늘 그 잘생긴 손을 좋아했었다. 남자답게 도드라진 힘줄과 흉터까지도. 너무나도 좋아해서.

“왜 울어?”

“모르겠어요.”

베로니카는 손등으로 퉁퉁 부은 눈가를 가렸다. 얼굴로 흐르는 눈물까진 가려지지 않더라도. 그래도.

분명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제 편지는 어디서 발견했는지, 무슨 생각으로 지니고 다닌 건지, 신검의 위험성을 알면서 왜 본인은 그렇게 무모하게 군 건지.

그러나 그런 얘길 했다간 이 완벽한 순간이 무너질 것 같았다. 연약하고 아름다운 찰나가 파편이 되어 버릴까 봐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겨우 쏟아진 마음을 덧없이 흘려보내는 건 슬픈 일이니까.

내려앉은 정적 위로 빗소리가 메아리쳤다. 기이할 정도로 평온한 분위기 속에서 수마가 느리게 그들을 잠식했다.

***

저벅저벅, 얕은 잠을 깨운 건 질척한 발소리였다. 병사들이 일어나기 시작한 이른 새벽, 갑옷 여러 대의 철걱거리는 소리는 정확히 천막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혹시 일어나 계시면 나와 주십시오. 오스카 베르크 경이 뵙길 청합니다.”

살짝 벌어진 천막 사이로 바깥을 지키던 병사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흐릿하게 눈을 떴던 베로니카는 익숙한 이름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오스카라고? 성벽을 지키다 보러 온 건가?

벌떡 일어나 앉으려는데 뒤에서 리온이 강한 힘으로 당겨 안았다. 다 일어나지 못하고 침대로 풀썩 무너진 그녀의 귓가로 낮은 목소리가 내리 감겼다.

“진통제 좀 집어 줘.”

느릿하되 서늘한 투였다. 당황한 베로니카는 망설이듯 천막 쪽을 바라봤다. 그러자 허리가 뱀처럼 조여들며 뒤에 있는 남자의 품에 바짝 안겼다. 솔직히 덩치 차이 상 그가 팔을 뻗는 게 빠를 텐데. 생각은 밀착한 몸으로 단단히 일어난 뭔가를 느낀 순간 끊어졌다. 베로니카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필사적으로 중얼거렸다.

“놔줘요, 그럼. 어차피 탁자까지 손이 안 닿아서 일어나야 해요. 나뿐만이 아니라 당신도 일어나서 먹는 편이 낫고요.”

“어제는 어떻게 먹였는데?”

“어제는… 피치 못할 상황이라 입으로 전하긴 했지만.”

흐르던 약과 젖은 시트가 떠오르자 목구멍이 바싹바싹 말랐다. 욕망은 우물과도 같다는 생각을 한다. 깊이 팔수록 샘솟는 물, 그건 한번 빠지면 기어 나오기 쉽지 않으니까.

“아.”

감탄한 리온이 탁자로 팔을 뻗었다. 애초에 왜 부탁했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로 쉽게 진통제를 집어 들고는 입가로 병을 내밀었다. 그러곤 태연하게 물었다.

“오늘은 싫어?”

과연 어떤 여자가 그에게 싫다고 할 수 있을까. 베로니카는 헛웃음을 지었다. 약보다는 행위에 목적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홀린 듯 입을 벌렸다.

“읏.”

입 안에 액체를 머금자마자 리온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잡아 돌렸다. 병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지고 그 너머로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물론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질척하고 적나라한 탐식만이 그 자리를 메울 뿐.

그가 그녀를 받아마실 때마다 턱선과 울대가 위아래로 꿈틀거렸다. 아픈 사람이랑 이래도 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할 때쯤 약탈적인 입맞춤이 끝이 났다. 숨을 허덕이던 베로니카는 새빨개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곧장 이마에 손을 얹었다.

역시.

“열이 이 정도로 펄펄 끓는데도 하고 싶은 생각이 나요?”

“안 그러면 나갔을 거잖아.”

“무슨 뜻이에요?”

리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특유의 날 선 분위기는 분명 오스카를 향하고 있었고 그걸 감출 생각도 없어 보였다. 가슴이 술렁거려서 툭 내뱉었다.

“여자가 필요한 거면 오래 살 사람을 알아보는 편이 좋아요.”

떠보는 말이다. 밀어내는 게 아니라.

“괜히 더 정들면 서로 상처만 받으니까.”

“베로니카.”

더 이어지려던 말은 이름 하나로 끊겼다. 시선이 마주치자 리온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다른 여자한텐 관심 없어.”

마음에 마음이 박힌다. 관통은 아주 찰나의 순간에 이루어진다.

베로니카는 입을 다물고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비틀린 것치곤 지나치게 근사한 미소를 보며 속으로 물었다.

그럼 정말로 날 좋아해요?

그 순간 리온이 미간을 고통스레 구기지만 않았어도 질문은 실제로 입 밖으로 흘러나갔을지도 모른다. 내상의 격통이 다시 치닫는지 그가 낮은 신음을 뱉으며 그녀의 옆으로 고개를 묻었다.

“잠깐만 기다려요. 진통제랑 식사를 다시 받아 올 테니까.”

급하게 일어난 베로니카가 침대에서 내려서며 말했다.

약초가 담긴 병은 방금 그걸로 끝이었다. 나가서 식사며 해열제, 씻을 물까지 새로 받아 와야 했다. 사실은 더 일찍 했어야 했는데 그가 멀쩡해 보여서 아픈 걸 몰랐다. 베로니카는 황급히 천막을 나섰다.

“어디 가십니까?”

몇 걸음 떼기도 전에 익숙해진 목소리가 뒷덜미를 잡아챘다. 돌아보니 교황청에서부터 따라온 견습 기사였다. 그녀를 감시하는 임무 때문에 밤새도록 천막 근처를 지킨 모양이었다.

“아, 베르크 경이 깨어났는데 진통제가 다 떨어져서요.”

“깨어났다니 그게 무슨… 아니, 제가 구해 오겠습니다. 막사를 떠나지 마십시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도망갈 생각은 없어요. 여기서 어딜 갈 수 있겠어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부단장님이 마지막을 지켜 주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누군가 최대한 곁에 있어 드렸으면 하는 것뿐입니다.”

앳된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심지가 결연했다. 순간 베로니카는 그가 진정 돕고 싶은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제 몸을 불살라 도시를 지킨 기사, 한때 카르트가 사랑했던 붉은 기사를 위한 호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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